KinoDAY2023-04-25 11:36:28
자유와 안식을 찾아 떠나는 마지막 여정
<존 윅 4> 리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윈스턴'(이안 맥쉐인)의 총을 맞고 추락한 '존 윅'(키아누 리브스)'. '바워리 킹'(로렌스 피시번) 덕분에 간신히 살아난 그는 최고 회의에 복수하고, 완전히 자유로워질 방법을 모색한다. 그러나 최고 회의로부터 처분 권한을 위임받은 '빈센트 드 그라몽 후작'(빌 스카스가드) 덕분에 그는 다시 한번 위기에 빠진다. 한 때 동료였던 킬러 '케인'(견자단)과 현상금을 노린 '추적자'(셰미어 앤더슨)가 그라몽 후작의 사주를 받아 존의 목을 노리기 때문. 이들은 존을 쫓아 '코지'(사나다 히로유키)와 '아키라'(리나 사와야마)가 운영하던 오사카 콘티넨탈 호텔까지 습격한다. 존도 앉아서 당하지는 않는다. 그는 완전한 평화와 안식을 가져다줄 마지막 반격을 준비한다.
<존 윅> 시리즈의 명과 암
"그런 거 할 시간에 존 윅은 한 사람이라도 더 죽입니다." <존 윅> 시리즈를 가장 잘 설명하는 문구다. 오로지 복수를 향해 내달리는 단순한 서사와 셀 수 없는 사람이 죽어나가는 액션의 향연은 <존 윅>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1편에서 존 윅은 강아지와 자동차를 잃은 그 순간부터 한 명이라도 더 확실하게 죽이는 데 총력을 다했다.
하지만 이 문구는 <존 윅> 시리즈의 그림자이기도 했다. 시리즈가 점차 커지고 화려해지면서 단순한 매력이 옅어진 까닭이다. <존 윅 3: 파라벨룸>이 대표적이다. 일단 액션이 기대 이하였다. 총격전과 주짓수가 조합된 이른바 '건짓수'의 분량은 줄었다. 대신 나이프나 연필을 사용한 액션이 빈자리를 대신했다. 날렵한 닌자에 맞서는 키아누 리브스의 느린 액션은 허술해 보였다. 내용 면으로도 이질감이 강해졌다. 최고 의회, 장로, 패밀리, 심판관 같은 낯선 고유명사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존 윅의 복수와 도주에 초점을 맞추지 못했다.
따라서 <존 윅> 시리즈의 잠정적인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영화 <존 윅 4> 앞에 놓인 과제는 명확했다. 단순해질 것. 본래 매력인 건짓수의 미학을 보여주고, 존 윅의 이야기를 군더더기 없이 매듭 지을 것. 결론부터 말하면 <존 윅 4>는 두 과제를 훌륭히 완수한다. 총성과 비명소리는 시작부터 끝까지 영화를 도배한다. 자유와 안식을 갈망하는 존 윅도 더 바라기 어려울 정도로 깔끔하게 퇴장한다.
존 윅의 액션을 망라하다
<존 윅 4>의 러닝타임은 2시간 49분. 대부분 액션이다. 전편을 봤다면 익숙한 장면이 가득하다. 문짝이 떨어진 차, 귀를 때리는 클럽 음악 사이로 퍼지는 총소리, 계단에서 구르고 또 구르는 존 윅, 일본도를 든 사무라이까지. 무의미한 반복은 아니다. 4편의 배경인 '파리' 덕분에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된다. 마르스 광장에서 마주 앉아 마지막 '결투' 조건을 정하는 담판. 개선문을 빙 돌며 펼쳐지는 살육. 미술관과 예술 작품 앞에서 이뤄지는 대화... 이전 시리즈에서 비슷한 장면을 봤다 해도 무언가 다른 인상을 받기에 충분하다.
새로운 요소도 있다. 일 대 일로 총을 겨누는 '결투'다. 낯설지는 않다. 서부극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설정이기 때문이다. 존 윅의 작중 첫 등장 덕분에 더욱 그렇다. 사막에서 말을 타는 존 윅. 그는 양복만 입었을 뿐 카우보이나 다름없다. 새로운 인물도 눈길을 잡아 끈다. 케인을 연기한 견자단은 전편에 등장한 닌자 액션과는 다른 현대적인 쿵후 액션을 자랑한다. 특수분장을 한 스콧 애드킨스의 액션도 인상적이다. 외관은 마블 영화의 킹핀 못지않은 거구인 킬라. 그러나 그는 체구에 걸맞지 않게 날렵한 몸놀림을 자랑하면서 존 윅을 위기로 몰아간다. 새로움과 익숙함의 조화는 화려한 피날레로 손색없다.
기술적으로도 뛰어나다. <존 윅 4>는 화면을 흔드는 셰이키 캠을 많이 쓰지 않는다. 대신 격투를 화면 중심에 놓으면서 어떤 상황이 펼쳐지는지 정확히 알 수 있게 한다. 덕분에 모험적인 시도가 빛난다. 건물 안에서 존 윅이 '용의 숨결'이라는 탄환을 사용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존 윅에게 달려드는 킬러들은 총에 맞아 터져 나간다. 영화는 하늘에서 바라보는 '탑 뷰(top-view)' 시점으로 액션 장면을 보여준다. 연이은 폭발의 향연 덕분에 관객은 강력한 타격감을 느낄 수 있다. 분위기는 다소 다르지만 <킹스맨> 1편에서 사람들의 머리가 터지는 장면과 유사한 쾌감이다.
액션이 보여준 존 윅의 지옥
<존 윅 4>의 액션은 훌륭한 조력자 덕분에 더욱 빛난다. 단순하면서도 우직한 복수 서사 덕분이다. 1편에서 존은 아내가 남긴 마지막 선물을 파괴한 이들에게 복수했다. 킬러의 삶을 그만두고 아내와 살겠다는 소박한 꿈. 아내가 죽은 후로는 살인을 하지 않고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겠다는 꿈이 깨졌으니까. 그 꿈을 되찾기 위한 복수 외의 이야기는 없었다.
2편부터는 전편 내용을 계승하되 살짝 변주했다. 존 윅의 복수는 물론 존에게 죽은 이들의 복수가 함께 펼쳐진다. 복수를 끝내고 싶은 존은 자기가 과거에 저지른 살인 때문에 자유를 찾지 못한다. 그는 복수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계속해서 살인을 저지르지만, 바로 그 살인 때문에 다시 굴레에 얽매인다.
4편에서도 마찬가지다. 장로를 만나 초반부 장면이 이를 잘 보여준다. 존은 사막에서 장로를 찾아 그를 죽인다. 하지만 장로는 그가 무슨 짓을 해도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한다. 오사카 컨티넨탈 호텔도 안식처는 될 수 없다. 복수의 칼날이 존을 놓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개선문을 배경으로 한 40여 분의 액션 시퀀스가 감정적으로도 인상적인 이유다. 존 윅의 처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는 지쳤다. 그에게는 병으로 죽은 아내를 온전히 애도할 자유만 있으면 됐다. 하지만 그는 상심을 미처 달래지도 못한 채로 온갖 이들에게 쫓긴다. 몇 안 되는 휴식처는 사라졌고, 최고 회의는 친구와 동료까지 이용해 그의 목을 노린다. 그러니 파리 시내에서 총성과 신음, 비명이 이어질수록 관객은 자유와 안식을 갈망하는 존 윅에게 공감할 수밖에 없다. 존의 지옥을 두 눈으로 목격한 이상.
서부극으로 시작해 서부극으로 끝나는 이유
그렇다면 존 윅에게 완전한 자유와 안식은 무엇일까? 영화는 두 장면을 통해 그 끝을 암시한다. 하나는 양복을 입은 존 윅이 요르단 사막에서 말을 타고 펼치는 추격전이다. 다른 하나는 '결투'다. 둘의 공통점은 하나다. 서부극에서 빠지면 아쉬운 상징적인 장면이라는 것. 실제로 <존 윅 4>는 웨스턴 영화다운 피날레로 나아간다.
많은 서부극은 피카레스크 장르가 섞인 이야기, 복수극의 형식을 띤다. 작품 속 주인공은 악인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숱한 악행을 저지른다. 그리고 그 대가를 결코 피하지 못한다. <로건>이 인용한 영화 <셰인>의 대사만 봐도 알 수 있다. "사람을 죽이면 고통 속에 살게 돼. 되돌릴 방법은 없어. 그게 옳든 그르든 낙인이 되어 지워지지 않지. 이제 어머니한테 가서 괜찮을 거라고 전하렴. 이제 이 계곡에 총성은 없을 거라고..."
존 윅도 마찬가지다. 그의 끝은 울버린, 로건과 다르지 않다. 그에게 죽음은 슬픈 일이 아니다. 킬러로서의 삶, 영원히 손에 피를 묻혀야 하는 삶, 복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삶에서 완전히 벗어난 안식처다. 아내의 무덤에서 시작한 시리즈가 그의 무덤으로 끝나는 이유다.
새로이 등장한 인물들의 관계는 <존 윅 4>의 깔끔한 수미상관에 당위성을 더한다. 케인과 아키라의 악연이 대표적이다. 딸과 함께 살고 싶은 그는 옛 동료인 존을 죽이라는 그라몽 후작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 과정에서 오사카 컨티넨탈의 지배인 코지를 죽인다. 결투를 끝낸 케인은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되어 딸을 만난다.
하지만 그의 앞에는 코지의 딸, 아키라가 나타난다. 그녀의 손에는 칼이 들려 있다. 아버지의 복수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존 윅처럼 악행의 대가를 받아들이지 않는 한 복수의 굴레를 끊을 방법은 없다. <존 윅 4>의 이야기가 지극히 서부극스럽게 끝나야 하는 이유다.
<존 윅 4>는 거의 흠잡을 데 없는 영화다. 액션도 서사도 기대한 것 이상을 보여준다. 시리즈의 결말로서도, 한 편의 독립된 작품으로서도 준수하다. 작별을 고하면서도 존 윅과의 재회를 기대할 여지를 남긴 마무리도 재치 있다.
다만 한 가지 단점이 있다. 너무 길다. 전편(131분)에 비해서도 169분은 과하다. 긴 러닝타임을 액션으로 꽉 채우다 보니 지치는 대목도 있다. 물론 존 윅의 액션도 이야기도 후회 없이 쏟아내겠다는 채드 스타헬스키 감독의 야망은 잘 전해진다. 그러나 조금만 더 압축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지울 수는 없다.
이에 더해 너무나 깔끔한 마무리 역시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여러 정황으로 미뤄 봤을 때, 키아누 리브스의 <존 윅> 시리즈 본편을 만나기는 어려울 듯하다. 이런 상황에서 <존 윅 4>의 완벽에 가까운 결말은 다음 타자인 스핀오프 영화 <발레리나>와 드라마 <콘티넨탈>의 어깨를 짓누르는 듯 보인다. 과연 그들이 <존 윅>을 넘어설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될 수밖에 없으므로.
Exceeds Expectations 기대이상
자기 자신을 넘어서서 마침내 자유와 평화를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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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난 여사친조차 없넹......이게 나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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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넷 스태프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제작: 크리스토퍼 놀란, 에마 토머스
각본: 크리스토퍼 놀란
출연: 존 데이비드 워싱턴, 로버트 패틴슨, 엘리자베스 데비키 외
장르: 액션, 스릴러, SF, 첩보[2]
제작사: 신카피
배급사: 워너 브라더스.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촬영 기간: 2019년 5월 19일 ~ 2019년 11월 12일
개봉일: 2020년 8월 26일
음악: 루드비히 고란손
주제곡: 트래비스 스캇 - The Plan
편집: 제니퍼 레임
촬영: 호이트 반 호이테마
개봉 포맷: 2D · 4DX (2.20:1)[A]
Dolby Cinema (2.20:1[A] Dolby Vision|Atmos)
IMAX (1.90:1 / 2.20:1) 용산 IMAX 레이저 로고 (1.43:1 / 2.20:1)
상영 시간: 150분
제작비: 2억 500만 달러-시놉시스
당신에게 줄 건 한 단어 ‘테넷’
이해하지 말고 느껴라!시간의 흐름을 뒤집는 인버전을 통해 현재와 미래를 오가며 세상을 파괴하려는 사토르(케네스 브래너)를 막기 위해 투입된 작전의 주도자(존 데이비드 워싱턴). 인버전에 대한 정보를 가진 닐(로버트 패틴슨)과 미술품 감정사이자 사토르에 대한 복수심이 가득한 그의 아내 캣(엘리자베스 데비키)과 협력해 미래의 공격에 맞서 제3차 세계대전을 막아야 한다!
#테넷리뷰 #테넷해석 #테넷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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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CIA 요원 로빈 맥콜은 고모인 바이올라 마세트 그리고 딸 딜라일라와 함께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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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로빈은 살해 현장을 목격했다가 오히려 살인 누명을 쓴 십대 소녀 쥬얼 마차도를 우연히 만나게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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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NOPSIS
재능 있는 조각가인 리지는 새로운 전시를 준비하며 예술가로서의 삶과 가족, 친구 등 일상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문제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애쓴다. 리지는 사는 집의 주인이자 예술가 라이벌이기도 한 조와 사소한 사건들로 갈등을 겪고,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오빠 숀의 상태도 살펴야 하는 상황이다. 전시 개막일은 점점 다가오는데, 리지는 과연 무사히 전시회를 열 수 있을까? 〈웬디와 루시〉(2008),〈퍼스트 카우〉(2019) 등 미국 사회의 현재적 삶을 내밀한 시선으로 다뤄 온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신작. 2022년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화제작을 아시아 프리미어로 선보인다.
PROGRAM NOTE
〈쇼잉 업〉은 예술가를 주인공으로 삼지만 굴곡진 서사나 드라마틱한 사건과는 거리가 멀다. 전시를 앞둔 리지는 사소한 일들로 골머리를 앓는다. 예술가 동료이자 리지가 사는 집의 주인이기도 한 조는 보일러 고장 문제를 나 몰라라 하고, 흩어져 사는 가족은 저마다 리지에게 근심과 걱정을 불러일으킨다. 전시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작업에 집중할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짜증과 불안이 쌓여가지만, 주변에 그걸 알아채 주는 이는 없다. 켈리 라이카트의 주인공들이 줄곧 그랬듯 리지도 꽤나 고독한 인물이다. 오리건과 몬태나의 풍광 속을 확신 없이 지나던 이들처럼 리지 또한 삶의 어느 시기를 천천히 지나는 중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공통점. 이들에게는 곁을 내주고 돌봐야 할 동물이 있다.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여성감독 중 하나인 라이카트는 〈퍼스트 카우〉로 19세기 미국의 풍경을 바라본 뒤, 오리건의 작은 도시 포틀랜드를 배경으로 지역 예술가들의 활동과 끊임없이 무언가 만드는 삶의 모습을 포착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쇼잉 업〉에서 두드러지는 건 찰흙, 직물, 실 같은 우리 주변의 평범한 재료를 계속해서 만지는 손짓이다. 영화 속 인물들에게 예술이란 그처럼 매일의 반복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대단하고 유명한 대가가 아니라, 매일 끈기 있게 작업대에 앉는 평범한 예술가의 이야기가 전하는 단단한 울림은 25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슬로건 ‘우리는 훨씬 끈질기다’와 공명한다. 〈쇼잉 업〉을 통해 매일 무언가 만지고, 걷고, 돌보고, 일하는 움직임들로 지켜지는 소박하고도 경이로운 일상의 시간을 마주할 수 있길 바란다. [손시내 프로그래머]
*영화 <쇼잉 업>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보는 동안 ‘한동안 내가 피곤했군…’ 깨달으면서, 너무 좋다고 생각하면서도 눈이 살풋 감기는 걸 참지 못하는 영화들이 있다. 성격상 푹 잠들지는 못하고 아주 잠깐 졸다 깨다 반복하면서, 그래도 흐름을 놓치지는 않을 만큼만 눈을 감았다 뜨면서 보게 되는 영화들. 공교롭게도 그런 영화들이 내게는 다 참 좋은 영화들이었다. <애프터썬>의 주인공들이 침대에서 숨을 쉬는 박자에 맞춰 같이 눈을 잠깐 감기도 하고,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전작 <퍼스트 카우>도 주인공들이 부지런히 걷고 움직이는 동안 그 소리를 베고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둘 다 내 마음 속 명예의 전당에 붙어 있는 영화들이다.
<쇼잉 업>도 그렇다. 영화가 시작되면 벽면 가득,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다채로운 색상의 여성 상들이 있다. 그리고 책상 위에서 흙을 주물러 이 여성들의 모습을 현실로 데려오느라 바쁜 예술가, 리지가 있다. 일도 해야 하고, 사료가 떨어졌다고 역정을 내는 고양이 리키(연기를 진짜 잘하는 천재 고양이이다)의 사료 그릇도 채워 주어야 하고, 제각각의 삶을 살고 있는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대단하게는 못해도 기본 할 도리는 또 해 주어야 한다. 그 와중에 집에 온수는 안 나오는데, 집 주인이자 동료인 조는 온수를 고쳐줄 마음이 없으니, 온수로 샤워를 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또 헤매야 한다. 결국 전시회를 코앞에 두고 부랴부랴 연차를 낸다.
(으레 그렇듯) 모처럼 작정한 하루는 마음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고양이 리키의 습격을 받은 새를, 죽더라도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죽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집 밖에 내보낸 새를 친구 조가 구조할 줄이야. 전시를 두 개나 앞두고 있는 조의 부탁에 따라, 엉겁결에 떠맡은 비둘기 한 마리를 돌보는 것이 그 날 가장 주요한 일이 되어 버린다. 심지어 비둘기를 위한 최적의 환경을 만드느라, 작업실을 두고 2층에 올라가서 고양이를 가둬 둔 채로 작업을 한다.
결국 작업의 속도나 방향은 삶에 생겨나는 일들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술가도 인간이니까, 어떤 상황이든 아랑곳 않고 작업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무리 마감이 코앞이어도 고양이와 비둘기에 둘러싸인 하루를 보낼 수도, 그럴 수도 있다.
어찌 보면 비효율적인 태도일 수도 있다. 사무실 동료가 낄낄거리며 말했듯이, 비둘기를 병원에 데려가고 비둘기가 스트레스를 받았다며 조심하는 것이 이상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어쩌면 이 마음이 예술가를 예술가로 만드는 것은 아닐까? 어딘가에 묻혀 있는, 세상에 가시적이지 않았던 느낌과 마음과 감정과 에너지를 가시적인 형상으로 이 세계에 끌어오는 일이다. 다른 데 가서 죽었으면 생각할 수는 있어도, 끝내 외면하지는 못하는 시선 끝에 그 형상이 걸려 있는 건 아닐지.
마음은 마음이고, 손은 손이다. 바삐 작업하는 리지의 손, 그리고 리지가 일하는 학교 곳곳의 학생들이 작업에 몰두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손을 움직여서 무언가를 그리거나 만들고 싶어진다. 그리거나 오리거나 붙이거나 칠하거나 짜거나 뜨는 그 모든 일에 단 한 순간도 재능이 있어본 적 없는 나지만, 그럼에도 자차분히 손을 놀려 보고 싶어진다. 고되지만 행복한 일일 것이다.
책상 위의 작업물과 나, 둘만이 존재하는 시간의 느낌을 안다. 고되고 행복한. 외롭지는 않지만 고독한. 기쁘지만 덜컥 겁이 나는. 동시에 그 모든 것이 마음 같지 않은 답답함도 안다. 그래도 리지는 직업인이 될 만큼 익숙하고 실력이 좋은 예술가니까, 가마에서 잘못 타버린 것을 제외하면 자신이 만들어가는 세계에 있어서는 더없이 초연하지만, 나는 그렇지도 못해서 하나하나 동동거리기만 한다. 그런데, 이거 죄다 행복한 고민이다. 인생은 절대, 작업물과 나 둘만 존재하는 시간으로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직업인이자 예술가로 어엿하게 인정받는 리지에게도 신경 쓸 게 많은 남루한 일상이 있다. 파티에 빠져 온수기를 모른 체하는 친구에게 화가 나는 날들. 가뜩이나 가족이며 전시회의 치즈까지 신경 쓰이는 게 한두 개가 아닌데 비둘기의 건강까지 신경이 쓰이고. 예술가의 삶이라 해서 예술로만 채워지지는 않는다. 답답한 대화가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터져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인간의 삶은 으레 그렇다.
그러나 푸드덕거리는 힘찬 날갯짓으로 그 모든 답답한 대화를 탁 끊는 비둘기처럼, 그런 새처럼 나에게 왔다 가는 것들이 있다. 예술가의 삶이든, 예술가가 아닌 나의 삶이든.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의 반복 위로, 사뿐 날아올라 반짝 빛나는 것. 내겐 영화가 그렇다. 어두운 영화관에 나를 틀어박아 두고 잠시 빛나는 생각들로 나를 채우고 나오면, 복잡했던 마음이 위로를 얻기도 하고 답답하던 감정의 맥락이 끊겨 있기도 하니까.
그리고 나서도 또 걸어가는 리지와 조의 뒷모습을 본다. 작업은 계속되고 인생도 계속된다. 오고 가는 것들과 답답한 것들 사이, 인생은 그렇게 계속된다. 그 모든 것들 안에서, 우리는 계속 끈질길 것이다. 앞으로도 쭉.
2023.08.24 17:30-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KOFA 2관
2023.08.27 20:00-21:48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MX관
2023.08.29. 13:30-15:18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MX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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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과 일본이 같은 재료로 다르게 끓여낸 이 영화
최근 넷플릭스를 통해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라는 영화가 오픈했다. 제목만 보고 감이 왔는데, 이 영화는 일본에서 한 차례 개봉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내용이 같을 텐데, 한국판만 보면 되는 것 아닐까'라고 생각했지만 생각을 고쳐먹고 둘 다 봤다. 결론적으로 두 영화 모두 소재와 플롯 진행만 비슷하고 세부적인 것들은 판이하게 다르게 세팅되어 있는 극본이다. 하지만 두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같은데, 두 영화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알아보자.
1. 등장인물의 배치가 같지만 역할이 다른
이 시나리오에는 공통적으로 핸드폰을 떨어뜨리는 사람이 있고, 그걸 줍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떨어뜨리는 사람 주변에 그를 사랑하는 애틋한 관계의 사람들이 더러 등장한다.
일본판에서는 핸드폰을 떨어뜨리는 것은 남자이고, 그걸 주운 범인은 떨어뜨린 당사자의 폰을 해킹하며 그의 여자친구를 노린다. 성적인 도착증이 있는 남자의 성범죄임을 강조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관계가 핸드폰을 떨어뜨린 마코토와 그의 여자친구 아사미의 굳건한 사랑이다. 아무리 해킹을 통해 범인이 이들을 교란시켜도 결국 이들을 구해내는 것은 이들의 사랑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판으로 오면, 마코토와 아사미 vs 범인의 구도가 달라진다. 애초에 범인이 한 여성이 떨어뜨린 핸드폰을 줍는다. 하지만 피해를 당한 여성인 나미와 범인의 1:1 대결이 눈에 띈다. 일본판에서는 여성 혼자 범인을 상대하는 것은 힘이 드니 그를 지키는 남자가 필요한 것 같았다면 한국판에서는 그저 피해자와 범인의 한판 승부 같은 느낌이 강하다. 그래서였을까 개인적으로는 남녀에 대한 구분 없이 피해자와 가해자의 직접 대결이 돋보이는 만큼 한국판이 한층 더 빠르고 시원한 전개였다고 생각한다.
또한 일본판에서는 엄마의 학대로 인해 성적인 도착이 생긴 범인을 그렸다면, 한국판에서의 범인은 출생 신고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아 그를 사회 안전망으로 이끌어줄 참된 어른이 없었음을 암시하긴 하지만 특별히 성적인 도착증이 보이진 않는다.
2. 범인은 추적해 내는 과정
일본판에서는 범인이 누구일지 추적하는 과정이 메인 플롯이기도 하다. 마지막에 가서야 범인이 누군지 등장하는 전통적인 추리 전개를 보여준다. 마지막에 범인이 밝혀지며 놀라움을 자아내게 되긴 하지만 그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해서 몇 가지 무리수가 보이기도 한다. 범인이 누구인지 추리해 내는 것이 영화를 보게 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에 중간에 범인일 법한 인물들을 낚시하기도 하는데, 그중 하나가 신입 경찰인 마나부이다. 그가 범인과 똑같이 여성의 긴 머리칼에 대한 집착이 있음을 보여주며 '이 사람이 범인일까'하는 의심을 심어주는데, 그 모습이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어 오히려 범인은 아닐 것이라는 확신을 들게 한다. 엄마에게 학대를 당해 사랑받지 못한 유년에 대한 보상 심리로서 여성의 머리카락에 집착하는 모습을 가졌다는 범인과의 공통점으로 범인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경찰이 있다는 설정이 영화의 매력을 반감시키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아사미가 범인을 인식하는 것은 납치되고 나서이기 때문에 아사미와 마코토는 경찰이 출동하기 전까지 그저 범인에게 당하기만 한다.
하지만 한국판에서는 처음부터 범인을 보여주고 시작한다. 그래서 범인이 어떻게 나미를 농락하는지 보여준다. 범인을 초반부터 의도적으로 보여주는데, 그래서인지 오히려 범인의 교활함과 잔인성이 부각된다. 한국판에서는 일본판과 다르게 몰카도 등장하는데, 범인은 철저히 사이버 범죄가 인간의 삶에 해할 수 있는 극단의 상황으로 몰고 간다. 이는 나미의 생활 전선에도 영향을 미치기에 극단에 몰리자, 나미는 범인의 존재를 인식하고 범인을 교란하기에 이른다. 일본판과는 달리 피해자가 주체성을 가지고 자신이 당하고 있는 이 상황을 반전시켜 보려고 발버둥 치는 부분이 매력적인 서사 포인트이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나미를 각성시키는 것은 남자가 아니라 아버지라는 점에서 남녀 간의 사랑이 소재로 한 일본판과는 다르게 한국판에서는 가족 간의 사랑이 두드러진다.
3. 궁극적인 두 영화의 공통점
두 영화 모두 현대 사회에서의 SNS로 다져진 사랑, 신뢰, 우정 등은 알량한 말에 불과하고 끝나는 것은 한순간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유야 어떻든 두 영화 속 범인들은 극단의 외로움에 지쳐 복수 심리로 자신처럼 나미도 철저한 외로움의 세계로 끌고 가려는 의도가 보이고 그 절망의 순간에서 사람을 죽이면서 자신만의 쾌락을 느끼는 사이코패스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결국 SNS의 얄팍한 관계성뿐만 아니라 진정성 있는 1:1 만남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SNS 속 관계도 인정받을 만한 관계라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갈수록 위험해져 가는 사회의 안전망이 되어줄 정도인지 반문하게 되는 영화이다. 두 영화 모두 스마트폰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주며 스마트폰의 분실이 생각한 것보다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누군가 마음만 먹으면 내 정보는 언제든 털릴 수 있는 세상이니까. 그가 마음만 먹지 않았을 뿐인지도 모른다.
4. 총평
둘 중에 하나를 봐야 한다면 한국판만 봐도 되겠다고 생각한다. 한국판이 가진 서스펜스가 더 밀도 있고 일본판 특유의 현대인의 삶을 설명하려는 구구절절한 대사가 없어서 빠르게 몰입할 수 있다. 전개와 결말이 완전히 다른 영화지만 결론적으로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기에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한국판을 추천한다. 아, 그리고 임시완 배우의 연기는 너무 잘해서 짜증이 날 정도였다. 그 맑은 눈이 살인자 연기에까지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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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복탄력성을 잃은 사람들에게
간만에 좀 울림이 있는 드라마를 보았다. 요 근래 한국의 콘텐츠들은 지나치게 자극적인 액션이 필수인가 싶을 정도로 몰아치는 서사에 지쳐있었는데, 잔잔한 듯 하면서 몰아치는 드라마를 만났다. 정신병원이라는 일종의 금기시되어 있는 공간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애환부터 그 병에 허덕이는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따뜻하긴 한데 알게모르게 마음이 아프다. 결국 사람은 사람에게 상처받고 사람으로 치유받는다는 진리를 담은 이야기이기에 오늘도 어디선가 마음이 다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인간에 대한 혐오가 생겼다가도 사람을 갈구하는 인간의 나약함을 보는 것 같아서 말이다.
이전까지의 콘텐츠들은 정신병 환자들을 집중 조명하지 않았던 것 같다. 대체로 주인공의 애물단지 주변인물 정도로는 나왔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들이 왜 아픈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깊게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다양한 정신병도 보여주기도 하지만 환자들이 자신의 병을 어떻게 겪어내고 있는지에 집중한다. 암흑 속 현실을 벗어나 새로운 새계로 자신을 몰아넣는다든지, 갑자기 다운된 자신을 극 하이텐션으로 끌어올린다던지 등등 모두 암흑 속에 갖힌 자신을 지켜내려고 발버둥치는 그들의 각기 다른 모습들을 다양한 연출적인 요소들을 이용해 표현해내었다.
조울증 환자들이 왜 감정 기복이 심한지, 그 기복 속에서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것인지 혹은 망상 환자가 왜 갑자기 게임 세계의 주인공이라고 착각하면서 살아가는지 등등 그들의 시각을 대리경험할 수 있게 한 연출이 탁월했다.
참 별거 아닌 말들인데, 상처가 오래 남는 말들이 있다. 예를 들자면,
"네가 뭐가 부족해서 그러니"
이건 누군가에 희생하면서 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주로 하는 말이다. 이런 말 다음에 아프다는 사람에게 소심하다는 둥, 의지가 박약하다는 둥 안타까움에서 비롯된 또다른 공격이 시작된다. 너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내가(사실은 착각이지만) 혼구녕을 내든, 각성을 시키든 나약한 아이를 다시 강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징징대지마 너 누구 닮아서 이러니"
앞선 멘트 뒤에 항상 따라붙는 말이다. 그런 말을 듣다보면 내 말은 그저 투정으로 밖에 안보인다고 생각해 점점 말이 없어진다. 좋은 말만 하고 나쁜 말은 삼켜버리니 속이 답답하고 나의 약점을 들키지 않으려니 항상 자기를 방어하는 데에 익숙하고 당하지 않으려고 항상 곤두서있다.
나는 이런 말을 들으면 다시 깨닫는다. 나에게 물질적으로 부족한 것은 없다는 것. 그렇다면 나는 왜 이말을 들으면 화가 치밀어 오를까. 항상 이게 궁금했었다. 이런 말들을 들으면 항상 화가 나는데, 나는 왜 화가 나는지 모르겠었다. 그런데 최근 조금 달라진 내 자신을 마주한 것이, 비슷한 상황을 마주했을 때 회복탄력성을 잃은 것 같다고 느낀 지점부터였다. 분명 예전에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다시는 그런 말을 안들으리 하며 이를 바득바득 갈았었는데 지금은 절망만 하고 그냥 그대로 주저앉아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저 누워있고 약속이 잡혀 나가려고 해도 침대에서 벗어날 생각을 못했다.
정신을 차리고 사는 현 시점에서 드라마 속 인물들을 보니 느껴졌던 것이, 이들은 각자의 삶에서의 절망에서 회복 탄력성을 잃어 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점이었다.
그럼 혹자는 말하겠지. 무슨 말을 해야 네가 낫겠냐라고 묻는다면 그냥 아무말도 하지 말라고 하고 싶다.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게 정신병은 설득으로 해결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몸이 아픈 게 아니니 당신의 말이 만병특효약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 말을 하면 얘가 낫지 않을까 착각하는 것이다. 이유가 그사람의 소심함이었든 뭐였든간에 이미 낙오되어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속도로 오라고 재촉하는 것만큼 비수가 없다.
물론 주변인들은 불편하고 힘들겠지만 느려진 그들의 속도에 맞춰 다시 용수철처럼 튀어오르도록 그저 바라만 봐주는 게 더 큰 힘이 되지 않을까. 정신병은 당신이 고쳐줄 수 있는 게 아니다. 잔인하지만 그저 지켜보시라.
아, 그런데 황여환과 민들레의 러브라인은 좀 필요없지 않았나 싶긴 한데, 물맞는 씬은 읭스럽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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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가 망했다고? 왜?
우리 잡히지 말자! 리들리 스콧 감독은 낭만을 잘 살리는 감독이었다. <델마와 루이스>는 아주 좋은 예시가 될 것이다. 가부장적인 곳에서 잡혀 살던 주인공이 한 사건을 계기로 자아를 찾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나도 그게 와닿을 시기에 그 작품을 봐서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물론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올 더 머니>나 <에일리언> <블레이드 러너> 이런 것들은 가슴이 웅장해지는 작품이겠지. 아니 사실 나는 더 솔직할 필요가 있다. 리들리 스콧의 감독 작품 중에 본 것 <델마와 루이스>밖에 없다. 그래서 그를 감성적으로 기억하고 있나 보다. <마션>이나 <블레이드 러너> 한번쯤 봐야 하는데 공익근무요원 일이 너무나도 힘드니 볼 틈이 없다.
근데 그런 바쁜 와중에도 최신작은 못 참는다. 후에 스파이더맨 유니버스에 굉장히 중요한 포지션을 차지할, <베놈 2 : 렛 데어 비 카니지>와 함께 자웅을 겨뤘던 <라스트 듀얼 : 최후의 결투>를 다루려고 한다. 원래는 <라스트 나잇 인 소호>를 써보고 싶었지만 뭔가 극장에서 시간이 안 날 것 같아서 근래 상영작 중 좋았지만 저평가가 있었던 것을 고르려고 한다. 나는 이 영화가 러닝타임도 길고 중세 서부라는 한국인들이 접근하긴 어려운 소재임에도 훌륭한 메시지와 좋은 연기를 담았다고 생각하기에 여러분들에게 추천하는 바이다. 과연 2021년의 과소평가 작품 1등으로 꼽힐만하며, 이 작품의 조디 코머는 주요 시상식의 여자 주인공 후보로 뽑힐 수도 있다는 소심한 주장을 해본다. 아마 아무도 동의 안 하겠지만..ㅋㅋ
1. 감독 리들리 스콧, 장기를 살렸나요?
물론 이 감독의 영화를 <델마와 루이스> 빼곤 보진 않은 게 맞다. 근데 (자칭) 시네필로 살고 있다는 가오는 어느 누구와도 바꿀 수 없지 않은가? 그의 대표작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리들리 스콧은 상상력이 좋은 사람이다. 그러니까 <에일리언>이나 <블레이드 러너> <마션> 같은 작품은 현실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 주위에 화성 갔다 온 사람 있는가? 비트코인으로 간 거 말고 실제로 화성에 간 사람 말이다. 또 실제 존재하는 에일리언 본 적 있는가? 당연히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는 리들리 스콧의 최고 강점은 '가상의 현실을 직조시켜 최대한으로 서스펜스를 유지시키는 것'인 것이다. 근데 이 작품은 에릭 제거가 쓴 소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또 이 원작이 되는 소설은 실화를 중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전적으로 없던 현실을 만들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13세기로 넘어가는 타임머신이 있는 건 아니라서 상상력이 필요하지 않았던 건 아니겠지? 근데 영화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지 않아도 2021년의 현재를 관통하는 메시지를 만들었다. (내가 아는) 리들리 스콧의 영화와는 살짝 다른 감이 있지만 그 나름대로의 묵직함이 있다.
2. 배우들의 연기는 어떠한가요?
일단 주인공 자크 드 거리를 맡은 아담 드라이버에 대해 써보고자 한다. <결혼 이야기>에서의 부부싸움 연기나 <인사이드 르윈>에서의 그냥 포크 뮤지션 역할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래도 중요한 건 역시 <스타워즈> 시리즈에 나왔던 것 아닐까? 다방면의 역할을 보여주는 할리우드의 이선균 아담 드라이버는 그야말로 전천후 연기자다. 난 이런 그의 연기력이 이 작품에서 극대화됐다고 생각한다. <아네트>에서도 어마어마했고 <패터슨>도 잘했다고 들었다. 근데 두 작품을 안 본 것과 별개로 나는 이 역이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난이도가 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 작품의 핵심 키워드가 되는 사건이 있는데, 사실 극을 보다 보면 이 일이 어떤 식으로 전개됐는지 누구나 다 알 수 있다. 결말을 예상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는 것이다. 근데 충격적이라면 충격적인 것이 이 자크 드 그리의 캐릭터가 보통 미친놈이 아니라는 것인데, 현실적으로도 있어서는 안 될 돌아이라 내가 배우 입장이라면 이 역을 맡는 게 무서웠을 것 같다. 근데 우리의 아담 드라이버는 이를 200% 소화해낸다. 다른 주인공은 맷 데이먼이 맡은 장 드 카루 주인데 이 인물 역시 딱히 우리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인물은 아니다. 자크 드 그리 만큼은 아니더라도 그가 그렇게 좋은 인간 같지는 않아 보인다. 근데 <악마를 보았다>의 장경철이나 <다크 나이트>의 조커같이 비현실적인 미친놈들도 연기의 난이도가 어느 정도는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근데 이 장 드 카루 주같이 어느 정도는 현실성 있는 돌아이도 어렵다면 어렵지 않을까? 맷 데이먼은 그때는 보편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보기엔 돌아이인 그런 인물을 아주 멋지게 소화해낸다. 본 시리즈에 나왔던 샤프한 모습은 없다. 그냥 배 나온 아저씨가 보일 것이다. 근데 맷 데이먼은 나이가 들어도 역시나 연기를 너무 잘해서 포스가 흘러넘친다. 다음은 조디 코머다. 조디 코머가 맡은 마르그리트는 많은 것을 감내하는 중세시대 여자 역할을 한다. '많은 것을 감내한다'에서도 알 수 있듯 그녀는 수도 없는 개소리를 참아야만 하는데, 터닝포인트가 되는 핵심 사건을 비롯 그녀에게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감정적으로 참는 것이 배우로서 힘들었을 것 같다. 인간적으로 영화의 마르그리트는 살아있는 부처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외에도 벤 애플랙을 비롯한 나머지 배우들도 좋은 연기를 보여줬지만 나머지 세 배우가 워낙 탁월했기에 글을 줄이도록 한다.
3. 난이도는 어떤가요?
쉽지는 않다. 무슨 말이냐. 리들리 스콧 감독이 서스펜스를 차곡차곡 쌓은 것도 맞지만 일단 이 영화는 같은 에피소드를 세 번 반복한다. 만약 우리가 같은 말을 세 번 듣는다고 생각해보자. 솔직히 지루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결론이 어떻게 나는데?'가 궁금한 분들은 긴 러닝타임을 견디기 어려워할 수도 있다. 웬만하면 극장에서 보는 게 좋은 작품인 건 맞는데 모바일 환경에서 보는 게 어마 장장한 손해를 품고 있지는 않으니 스릴러, 역사물 좋아하는 분들은 부담 없을 듯. 아, 살짝 지루할 수도 있다는 위험부담이 있기야 하지만 플롯을 성실히 따라가다 보면 이해하기 크게 어려운 작품은 아니다.
4. 왜 과소평가되었다고 생각하나요?
물론 전 세계 영화 팬들의 마음을 꿰뚫을 순 없겠지만 난 사실 되게 간단한 이유로 과소평가가 이뤄지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첫 번째 요인, 같은 이야기를 세 번 반복한다. 인스타그램 쇼츠가 유행하는 세상이다. 나도 본론 결론 딱 임팩트 있게 끝나는 영화가 더 손이 갈 때가 있다. 이런 세태에 같은 과정을 세 번 반복하는 영화가 대중적인 입맛에 딱 맞아떨어지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두 번째. 전염병이 창궐한 세상에 인터넷이 너무나도 발달했다. 14세기 중세시대를 다뤘던 게 소수의 덕후들이 아닌 나머지들에겐 접근 난이도가 있었을지도? 또, 세 번째. 러닝타임이 길다. 솔직히 나도 극장에서 이 작품을 봤을 때 2시간 30분이라는 러닝타임에 놀랐다. <이터널스>가 아마 비슷하지 않았나? <이터널스>는 10명의 히어로들을 밸런스 있게 배치해야 한다는 과제가 있기라도 했지 이 영화는 같은 이야기만 세 번을 쓰니 반복이 지치다면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근데 이것은 이 영화의 단점에 대한 이야기가 될 테고, 나는 14세기의 원작 소설이 현대사회를 관통하는 키워드를 내포한다는 점에서 단점을 충분히 감추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지점이 리들리 스콧이 이 영화를 만든 이유이기도 하겠지. 이 모티브를 부담 없이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극찬받을만하다.
5. 어떤 것에 대한 영화인가요?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미투 운동이다. 미투 운동. 우리 사회에서 상처를 입은 이들을 위로하는 운동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미투 운동은 역선택을 품고 있다. 무고한 사람을 걸고넘어지면 그 사람의 마음에 구멍이 생길 수도 있다는 점이다. 물론 애 먼 사람의 삶을 망가트리는 짓은 그만큼의 대가가 치러져야 마땅하다. 근데 이런 역선택의 위험성이 미투 운동의 본질을 흐리면 안 되지 않을까? 이 영화의 마르그리트는 한 사건의 주인공으로서 그때의 성차별적인 행동에 대해 적극적으로 답한다. 또 현대사회의 미투 운동을 연상케 하는 여러 말들을 통해 왜 우리 사회가 약자들의 이야기에 집중해야만 하는가? 에 대해 조명한다. 또 그녀 역시 역선택의 위험부담에 놓여 정체성을 잃을 뻔 하지만 어쨌든 당당하게 그녀의 목소리를 낸다. 우리는 이런 그녀의 모습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본다.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행동하고 있는 게 아닐까? 과연 현재의 우리에겐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이 사회에서 꼭 우리와 함께 양립해야 할 가치는 무엇일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본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할까? 뭐 그런 것들 말이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그런 질문들을 통해 뇌 비운 혐오가 팽배하는 우리 현실에서 그 자체를 바라본다는 것이 얼마만큼의 가치를 지니는지를 전해주는 영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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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FF 데일리] ‘올란도’로부터 시작되는 트랜스젠더 계보
올란도, 나의 정치적 자서전/Orlando, My Political Biography
폴 B. 프레시아도/France/2023/98min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올란도》*는 어느 날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별이 바뀐 올란도가 수백 년의 시간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다. 울프가 사랑했던 여성 비타 색빌 웨스트가 모델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즉 《올란도》의 설정과 작품이 쓰인 배경을 결합하면, 이 소설이 트랜스 여성을 향한 동성애적 욕망에 기반한 이야기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소설이 쓰인 게 1928년. 출간 100주년을 앞둔 지금, 폴 B. 프레시아도 감독은 〈올란도, 나의 정치적 자서전〉에서 《올란도》를 다시 읽는다. 그럼으로써 올란도로부터 이어져오는 트랜스 계보를 써내려가고자 한다.
《올란도》는 프레시아도 감독에게 경외와 분노를 동시에 자아낸다. 트랜스 서사의 ‘원형’으로 삼을 만한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경외를, 모든 트랜스젠더의 자서전은 《올란도》를 능가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동시대의 수많은 트랜스가 귀족이자 시인이었던 올란도가 누린 특권에서 이질감을 느낀다는 데서는 분노를 느끼는 것이다. 즉, 〈올란도, 나의 정치적 자서전〉은 《올란도》에 대한 헌사이자 이를 비판적으로 넘어서기 위한 시도다.
영화에는 동시대의 수많은 올란도‘들’이 등장한다. 젠더 이분법이 포섭하지 못하는 모든 존재는 ‘올란도’다. 영화에서는 8세부터 70세까지의 트랜스젠더/논바이너리(non-binary, 자신을 성별 이분법으로 분류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일컬음) 26명이 《올란도》와 자기 서사를 오가며 ‘원형’을 변주한다. 동시대의 올란도들은 현대의 젠더 이분법보다 버지니아 울프가 백여 년 전 그려낸 세계에 더 편안함을 느낀다. 물론 시간이 흐르는 동안 변한 것도 많기에 최초의 올란도와 그 후예는 완전히 같지 않다. 《올란도》의 시적 아름다움이 가능케 하는 자유를 노래하다가도 정신병원, ‘남성’과 ‘여성’뿐인 신분증이 야기하는 불안,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법의 문제 등을 수시로 소환하는 동시대 올란도들의 이야기를 보라. 요컨대, 이들은 ‘최초의 올란도’를 재연하는 동시에 이를 자기 나름대로 재구성한다. 어디까지가 ‘원형’이고 어디부터가 ‘변형(trans)’인지 모를 이야기는 우리를 성별 이분법의 기나긴 역사와 이 폭력적인 체제가 양산한 트랜스젠더의 경험, 감정의 궤적으로 인도한다. 패러디와 유머를 활용해 기어이 폭력적인 규범 속에서 자신들만의 공간을 만들어낸 올란도들의 이야기는 쾌감을 자아내기도 한다.
올란도 이후에도 수많은 트랜스젠더 아이콘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가 올란도와 마찬가지로 그 후예들이 동일시하는 대상이 되었다. 미국에서 최초로 성전환 수술을 받은 것으로 유명한 크리스틴 조겐슨이 대표적이다. 수잔 스트라이커가 쓴 《트랜스젠더의 역사》를 보면, 조겐슨의 유명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다. 사람들이 그녀에게 편지를 하도 많이 보내서 미국 어디에서든 주소 없이 ‘크리스틴 조겐슨’이라고만 써서 편지를 붙여도 그녀의 집에 배송되었다고 한다. 올란도의 후예들이 동일시하는 건 대중에게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가시화한 인물뿐만이 아니다. 모든 특권에 반대하며 혁명을 주창한 급진적 트랜스젠더 활동가들도 동일시의 대상이다. 동시대의 올란도들은 여러 번의 동일시를 통해 젠더 이분법이 누더기로 만든 트랜스젠더 계보를 복원한다.
영화의 마지막, 인상적인 세 장면이 연달아 나온다. 첫 번째는 의사가 《올란도》를 수술대 위에 올려놓고 수술하는 장면이다. 의사는 “폭력뿐이었다(Violence was all)”는 구절을 오려내고, 책에 실린 올란도의 얼굴을 동시대 올란도들의 얼굴로 교체한다. ‘정신병자’로 낙인찍혀 의료 조치의 대상이 되어야 할 존재는 트랜스젠더가 아닌 그들을 주변화한 젠더 이분법이라는 점을 ‘수술’이라는 트랜스젠더에게 각별한 의미를 갖는 의료 행위로 패러디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당당히 스스로가 트랜스젠더라고 말하는 어린이들의 ‘올란도 선언’이다. 아이의 이미지는 대개 이성애 규범적인 핵가족의 미래를 상징하는 보수적 상징으로 활용되지만, 〈올란도, 나의 정치적 자서전〉에서는 그렇지 않다. 트랜스젠더임에도 우울하지 않은 아이들의 얼굴은 올란도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앞으로도 다채롭게 변주되어 이어질 것임을 분명하게 암시한다.
마지막은 《올란도》 출간 100주년인 2028년을 맞아, 《올란도》로부터 권위를 부여받은 판사가 체제의 폭력에 시달려온 존재들에게 논바이너리 국가의 시민권을 부여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최초의 올란도(그리고 버지니아 울프)가 미처 자각하지 못했던 식민주의‧제국주의의 관성을 거부하고 배제된 자들을 위한 국가와 권리를 선포하는 장면, 즉 권력을 전유하는 장면으로 독해할 수 있다.
이 진지하고 감동적이면서도 풍자 정신이 충만한 블랙/코미디가 최종적으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버지니아 울프의 시적 세계에서만 가능했던 트랜스젠더의 자유를 현실로 가져오라는 것. 〈올란도, 나의 정치적 자서전〉은 퀴어가 나오는 작품의 문학성은 예찬하면서도 정작 현실의 문제에는 눈감는 사람, 독특한 상상력으로 우리를 속박하는 규범의 경계를 넘어보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할 만한 독창적‧실험적 영화다.
*국내에는 ‘올랜도’로 번역된 것이 더 많으나 영화의 제목에 맞춰 편의상 ‘올란도’로 표기한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 초청으로 제24회전주국제영화제에 기자로 참석해 작성한 글입니다.
★이 영화는 제 24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4월 30일 13시, 5월 3일 17시 30분, 5월 4일 16시 30분에 상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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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을 꾸는 현재를 놓지 않겠다는 과거와 마주하는 순간
쉽게 쓰이지 않은 글, 쉽게 만들어지지 않은 영화는 흥행하지 못하면 좋은 영화가 아닌 걸까. 좋아하는 마음에서 시작한 일이 어려움으로 다가와 내려놓게 되는 현실을 마주한다. 깨진 문 사이의 바람처럼, 끝끝내 틀린 맞춤법과 같은 딜레마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진 지완. 그는 어느 날, 아르바이트 삼아 두 번째 여성 영화감독인 홍은원 감독의 작품 <여판사>의 음향 복원하는 일을 하게 된다. 중간중간 사라진 필름, 들리지 않는 소리, 바래진 장면으로 가득한 영화 속에서 흔적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홍은원 감독의 마지막 행적을 따라가는 길목마다 그 영화와 관련된 사람들을 만나며 어떤 여성의 그림자를 만난다. 어떤 장소에 빛만 바래진 채, 사라지지 않는 마음이 각자 다르지만 비슷한 형태로 펼쳐지고 있는 영화인들을 발견하며 들게 만든 소중한 작품들이 빛을 받지 못했던 과거의 순간과 현재의 순간이 겹치며 어둠이 그림자를 흡수하듯 앞으로 나아가는 지완의 발걸음이 조금씩 가벼워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자넨 끝까지 살아남아”
하나, 둘씩 떠나가는 주변과 영화 그만하라는 말 가운데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에 이런 말을 듣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변화를 겪어야만 벌어지는 상황을 어떻게 이겨나가냐에 따라 달라지는 수많은 상황 속에 놓였다. 한때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하지 못했고 또 검열되었던 수많은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하면서 불협화음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힘들게 필름을 복원하듯 먼지를 털어낸 자신의 꿈을 다시 바라보는 순간을 맞이 한다.
포기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오랫동안 그 꿈을 포기하지 않았는데,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놓아주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어도 포기는 쉽지 않은 법이다. 좋아하는 것을 평생 할 수 없었지만, 그때의 순간들을 찍어둔 앨범, 커피에 달걀을 넣어 마시던 다방, 고이 넣어둔 영사기처럼 영화에 대한 마음을 놓지 않았던 마음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끝끝내 자리를 지켜 소중한 영화들을 펼쳐낸 누군가의 작품이 그림자처럼 흔적을 남기고 커피에 달걀을 넣어 먹던 그때의 다방이 빛바래지지 않은 채,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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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샹치 텐링즈의 전설]리뷰:서사는 부족했지만 액션은 지렸던 오락영화,마블의 새로운 시도/쿠기는 2개!/NO스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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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양조위입니다. 시무리우...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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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넷 해석' 영화 속 과학 원리 해설 영상ㅣ테넷 엔트로피ㅣ테넷 리뷰ㅣ테넷 해석ㅣ테넷 해설ㅣ테넷 과학ㅣ테넷 설명ㅣ시간의 엔트로피
? '테넷' 영화리뷰 및 과학해설(*스포없음)
영화 보기 전 봐도 좋은 영상"이 영상 그대로 여사친에게 설명해주면
여친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근데...난 여사친조차 없넹......이게 나라냐!!!!!"
- 테넷 과학 리뷰 제작 후기 by 건데
- 테넷 스태프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제작: 크리스토퍼 놀란, 에마 토머스
각본: 크리스토퍼 놀란
출연: 존 데이비드 워싱턴, 로버트 패틴슨, 엘리자베스 데비키 외
장르: 액션, 스릴러, SF, 첩보[2]
제작사: 신카피
배급사: 워너 브라더스.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촬영 기간: 2019년 5월 19일 ~ 2019년 11월 12일
개봉일: 2020년 8월 26일
음악: 루드비히 고란손
주제곡: 트래비스 스캇 - The Plan
편집: 제니퍼 레임
촬영: 호이트 반 호이테마
개봉 포맷: 2D · 4DX (2.20:1)[A]
Dolby Cinema (2.20:1[A] Dolby Vision|Atmos)
IMAX (1.90:1 / 2.20:1) 용산 IMAX 레이저 로고 (1.43:1 / 2.20:1)
상영 시간: 150분
제작비: 2억 500만 달러-시놉시스
당신에게 줄 건 한 단어 ‘테넷’
이해하지 말고 느껴라!시간의 흐름을 뒤집는 인버전을 통해 현재와 미래를 오가며 세상을 파괴하려는 사토르(케네스 브래너)를 막기 위해 투입된 작전의 주도자(존 데이비드 워싱턴). 인버전에 대한 정보를 가진 닐(로버트 패틴슨)과 미술품 감정사이자 사토르에 대한 복수심이 가득한 그의 아내 캣(엘리자베스 데비키)과 협력해 미래의 공격에 맞서 제3차 세계대전을 막아야 한다!
#테넷리뷰 #테넷해석 #테넷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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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더 파더>
기억이 뒤섞여 갈수록 지금 이 현실과 사랑하는 딸,
그리고 나 자신까지 모든 것이 점점 더 의심스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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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웨이브 <이퀄라이저> 공식 예고편
전직 CIA 요원 로빈 맥콜은 고모인 바이올라 마세트 그리고 딸 딜라일라와 함께 지낸다.
CIA는 최고의 요원이었던 로빈이 복귀하도록 회유하기 위해 로빈의 친한 선배이자 전직 CIA 소속이었던 윌리엄 비숍을 보내 보기도 하지만 소용없다.
그러던 중 로빈은 살해 현장을 목격했다가 오히려 살인 누명을 쓴 십대 소녀 쥬얼 마차도를 우연히 만나게 되고
쥬얼을 돕기 위해 옛 동료인 스나이퍼, 멜로디 바야니와 해커인 해리 케시지언을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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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WFF 데일리] 새처럼 왔다 가는
SYNOPSIS
재능 있는 조각가인 리지는 새로운 전시를 준비하며 예술가로서의 삶과 가족, 친구 등 일상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문제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애쓴다. 리지는 사는 집의 주인이자 예술가 라이벌이기도 한 조와 사소한 사건들로 갈등을 겪고,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오빠 숀의 상태도 살펴야 하는 상황이다. 전시 개막일은 점점 다가오는데, 리지는 과연 무사히 전시회를 열 수 있을까? 〈웬디와 루시〉(2008),〈퍼스트 카우〉(2019) 등 미국 사회의 현재적 삶을 내밀한 시선으로 다뤄 온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신작. 2022년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화제작을 아시아 프리미어로 선보인다.
PROGRAM NOTE
〈쇼잉 업〉은 예술가를 주인공으로 삼지만 굴곡진 서사나 드라마틱한 사건과는 거리가 멀다. 전시를 앞둔 리지는 사소한 일들로 골머리를 앓는다. 예술가 동료이자 리지가 사는 집의 주인이기도 한 조는 보일러 고장 문제를 나 몰라라 하고, 흩어져 사는 가족은 저마다 리지에게 근심과 걱정을 불러일으킨다. 전시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작업에 집중할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짜증과 불안이 쌓여가지만, 주변에 그걸 알아채 주는 이는 없다. 켈리 라이카트의 주인공들이 줄곧 그랬듯 리지도 꽤나 고독한 인물이다. 오리건과 몬태나의 풍광 속을 확신 없이 지나던 이들처럼 리지 또한 삶의 어느 시기를 천천히 지나는 중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공통점. 이들에게는 곁을 내주고 돌봐야 할 동물이 있다.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여성감독 중 하나인 라이카트는 〈퍼스트 카우〉로 19세기 미국의 풍경을 바라본 뒤, 오리건의 작은 도시 포틀랜드를 배경으로 지역 예술가들의 활동과 끊임없이 무언가 만드는 삶의 모습을 포착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쇼잉 업〉에서 두드러지는 건 찰흙, 직물, 실 같은 우리 주변의 평범한 재료를 계속해서 만지는 손짓이다. 영화 속 인물들에게 예술이란 그처럼 매일의 반복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대단하고 유명한 대가가 아니라, 매일 끈기 있게 작업대에 앉는 평범한 예술가의 이야기가 전하는 단단한 울림은 25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슬로건 ‘우리는 훨씬 끈질기다’와 공명한다. 〈쇼잉 업〉을 통해 매일 무언가 만지고, 걷고, 돌보고, 일하는 움직임들로 지켜지는 소박하고도 경이로운 일상의 시간을 마주할 수 있길 바란다. [손시내 프로그래머]
*영화 <쇼잉 업>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보는 동안 ‘한동안 내가 피곤했군…’ 깨달으면서, 너무 좋다고 생각하면서도 눈이 살풋 감기는 걸 참지 못하는 영화들이 있다. 성격상 푹 잠들지는 못하고 아주 잠깐 졸다 깨다 반복하면서, 그래도 흐름을 놓치지는 않을 만큼만 눈을 감았다 뜨면서 보게 되는 영화들. 공교롭게도 그런 영화들이 내게는 다 참 좋은 영화들이었다. <애프터썬>의 주인공들이 침대에서 숨을 쉬는 박자에 맞춰 같이 눈을 잠깐 감기도 하고,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전작 <퍼스트 카우>도 주인공들이 부지런히 걷고 움직이는 동안 그 소리를 베고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둘 다 내 마음 속 명예의 전당에 붙어 있는 영화들이다.
<쇼잉 업>도 그렇다. 영화가 시작되면 벽면 가득,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다채로운 색상의 여성 상들이 있다. 그리고 책상 위에서 흙을 주물러 이 여성들의 모습을 현실로 데려오느라 바쁜 예술가, 리지가 있다. 일도 해야 하고, 사료가 떨어졌다고 역정을 내는 고양이 리키(연기를 진짜 잘하는 천재 고양이이다)의 사료 그릇도 채워 주어야 하고, 제각각의 삶을 살고 있는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대단하게는 못해도 기본 할 도리는 또 해 주어야 한다. 그 와중에 집에 온수는 안 나오는데, 집 주인이자 동료인 조는 온수를 고쳐줄 마음이 없으니, 온수로 샤워를 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또 헤매야 한다. 결국 전시회를 코앞에 두고 부랴부랴 연차를 낸다.
(으레 그렇듯) 모처럼 작정한 하루는 마음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고양이 리키의 습격을 받은 새를, 죽더라도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죽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집 밖에 내보낸 새를 친구 조가 구조할 줄이야. 전시를 두 개나 앞두고 있는 조의 부탁에 따라, 엉겁결에 떠맡은 비둘기 한 마리를 돌보는 것이 그 날 가장 주요한 일이 되어 버린다. 심지어 비둘기를 위한 최적의 환경을 만드느라, 작업실을 두고 2층에 올라가서 고양이를 가둬 둔 채로 작업을 한다.
결국 작업의 속도나 방향은 삶에 생겨나는 일들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술가도 인간이니까, 어떤 상황이든 아랑곳 않고 작업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무리 마감이 코앞이어도 고양이와 비둘기에 둘러싸인 하루를 보낼 수도, 그럴 수도 있다.
어찌 보면 비효율적인 태도일 수도 있다. 사무실 동료가 낄낄거리며 말했듯이, 비둘기를 병원에 데려가고 비둘기가 스트레스를 받았다며 조심하는 것이 이상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어쩌면 이 마음이 예술가를 예술가로 만드는 것은 아닐까? 어딘가에 묻혀 있는, 세상에 가시적이지 않았던 느낌과 마음과 감정과 에너지를 가시적인 형상으로 이 세계에 끌어오는 일이다. 다른 데 가서 죽었으면 생각할 수는 있어도, 끝내 외면하지는 못하는 시선 끝에 그 형상이 걸려 있는 건 아닐지.
마음은 마음이고, 손은 손이다. 바삐 작업하는 리지의 손, 그리고 리지가 일하는 학교 곳곳의 학생들이 작업에 몰두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손을 움직여서 무언가를 그리거나 만들고 싶어진다. 그리거나 오리거나 붙이거나 칠하거나 짜거나 뜨는 그 모든 일에 단 한 순간도 재능이 있어본 적 없는 나지만, 그럼에도 자차분히 손을 놀려 보고 싶어진다. 고되지만 행복한 일일 것이다.
책상 위의 작업물과 나, 둘만이 존재하는 시간의 느낌을 안다. 고되고 행복한. 외롭지는 않지만 고독한. 기쁘지만 덜컥 겁이 나는. 동시에 그 모든 것이 마음 같지 않은 답답함도 안다. 그래도 리지는 직업인이 될 만큼 익숙하고 실력이 좋은 예술가니까, 가마에서 잘못 타버린 것을 제외하면 자신이 만들어가는 세계에 있어서는 더없이 초연하지만, 나는 그렇지도 못해서 하나하나 동동거리기만 한다. 그런데, 이거 죄다 행복한 고민이다. 인생은 절대, 작업물과 나 둘만 존재하는 시간으로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직업인이자 예술가로 어엿하게 인정받는 리지에게도 신경 쓸 게 많은 남루한 일상이 있다. 파티에 빠져 온수기를 모른 체하는 친구에게 화가 나는 날들. 가뜩이나 가족이며 전시회의 치즈까지 신경 쓰이는 게 한두 개가 아닌데 비둘기의 건강까지 신경이 쓰이고. 예술가의 삶이라 해서 예술로만 채워지지는 않는다. 답답한 대화가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터져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인간의 삶은 으레 그렇다.
그러나 푸드덕거리는 힘찬 날갯짓으로 그 모든 답답한 대화를 탁 끊는 비둘기처럼, 그런 새처럼 나에게 왔다 가는 것들이 있다. 예술가의 삶이든, 예술가가 아닌 나의 삶이든.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의 반복 위로, 사뿐 날아올라 반짝 빛나는 것. 내겐 영화가 그렇다. 어두운 영화관에 나를 틀어박아 두고 잠시 빛나는 생각들로 나를 채우고 나오면, 복잡했던 마음이 위로를 얻기도 하고 답답하던 감정의 맥락이 끊겨 있기도 하니까.
그리고 나서도 또 걸어가는 리지와 조의 뒷모습을 본다. 작업은 계속되고 인생도 계속된다. 오고 가는 것들과 답답한 것들 사이, 인생은 그렇게 계속된다. 그 모든 것들 안에서, 우리는 계속 끈질길 것이다. 앞으로도 쭉.
2023.08.24 17:30-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KOFA 2관
2023.08.27 20:00-21:48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MX관
2023.08.29. 13:30-15:18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MX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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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과 일본이 같은 재료로 다르게 끓여낸 이 영화
최근 넷플릭스를 통해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라는 영화가 오픈했다. 제목만 보고 감이 왔는데, 이 영화는 일본에서 한 차례 개봉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내용이 같을 텐데, 한국판만 보면 되는 것 아닐까'라고 생각했지만 생각을 고쳐먹고 둘 다 봤다. 결론적으로 두 영화 모두 소재와 플롯 진행만 비슷하고 세부적인 것들은 판이하게 다르게 세팅되어 있는 극본이다. 하지만 두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같은데, 두 영화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알아보자.
1. 등장인물의 배치가 같지만 역할이 다른
이 시나리오에는 공통적으로 핸드폰을 떨어뜨리는 사람이 있고, 그걸 줍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떨어뜨리는 사람 주변에 그를 사랑하는 애틋한 관계의 사람들이 더러 등장한다.
일본판에서는 핸드폰을 떨어뜨리는 것은 남자이고, 그걸 주운 범인은 떨어뜨린 당사자의 폰을 해킹하며 그의 여자친구를 노린다. 성적인 도착증이 있는 남자의 성범죄임을 강조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관계가 핸드폰을 떨어뜨린 마코토와 그의 여자친구 아사미의 굳건한 사랑이다. 아무리 해킹을 통해 범인이 이들을 교란시켜도 결국 이들을 구해내는 것은 이들의 사랑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판으로 오면, 마코토와 아사미 vs 범인의 구도가 달라진다. 애초에 범인이 한 여성이 떨어뜨린 핸드폰을 줍는다. 하지만 피해를 당한 여성인 나미와 범인의 1:1 대결이 눈에 띈다. 일본판에서는 여성 혼자 범인을 상대하는 것은 힘이 드니 그를 지키는 남자가 필요한 것 같았다면 한국판에서는 그저 피해자와 범인의 한판 승부 같은 느낌이 강하다. 그래서였을까 개인적으로는 남녀에 대한 구분 없이 피해자와 가해자의 직접 대결이 돋보이는 만큼 한국판이 한층 더 빠르고 시원한 전개였다고 생각한다.
또한 일본판에서는 엄마의 학대로 인해 성적인 도착이 생긴 범인을 그렸다면, 한국판에서의 범인은 출생 신고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아 그를 사회 안전망으로 이끌어줄 참된 어른이 없었음을 암시하긴 하지만 특별히 성적인 도착증이 보이진 않는다.
2. 범인은 추적해 내는 과정
일본판에서는 범인이 누구일지 추적하는 과정이 메인 플롯이기도 하다. 마지막에 가서야 범인이 누군지 등장하는 전통적인 추리 전개를 보여준다. 마지막에 범인이 밝혀지며 놀라움을 자아내게 되긴 하지만 그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해서 몇 가지 무리수가 보이기도 한다. 범인이 누구인지 추리해 내는 것이 영화를 보게 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에 중간에 범인일 법한 인물들을 낚시하기도 하는데, 그중 하나가 신입 경찰인 마나부이다. 그가 범인과 똑같이 여성의 긴 머리칼에 대한 집착이 있음을 보여주며 '이 사람이 범인일까'하는 의심을 심어주는데, 그 모습이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어 오히려 범인은 아닐 것이라는 확신을 들게 한다. 엄마에게 학대를 당해 사랑받지 못한 유년에 대한 보상 심리로서 여성의 머리카락에 집착하는 모습을 가졌다는 범인과의 공통점으로 범인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경찰이 있다는 설정이 영화의 매력을 반감시키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아사미가 범인을 인식하는 것은 납치되고 나서이기 때문에 아사미와 마코토는 경찰이 출동하기 전까지 그저 범인에게 당하기만 한다.
하지만 한국판에서는 처음부터 범인을 보여주고 시작한다. 그래서 범인이 어떻게 나미를 농락하는지 보여준다. 범인을 초반부터 의도적으로 보여주는데, 그래서인지 오히려 범인의 교활함과 잔인성이 부각된다. 한국판에서는 일본판과 다르게 몰카도 등장하는데, 범인은 철저히 사이버 범죄가 인간의 삶에 해할 수 있는 극단의 상황으로 몰고 간다. 이는 나미의 생활 전선에도 영향을 미치기에 극단에 몰리자, 나미는 범인의 존재를 인식하고 범인을 교란하기에 이른다. 일본판과는 달리 피해자가 주체성을 가지고 자신이 당하고 있는 이 상황을 반전시켜 보려고 발버둥 치는 부분이 매력적인 서사 포인트이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나미를 각성시키는 것은 남자가 아니라 아버지라는 점에서 남녀 간의 사랑이 소재로 한 일본판과는 다르게 한국판에서는 가족 간의 사랑이 두드러진다.
3. 궁극적인 두 영화의 공통점
두 영화 모두 현대 사회에서의 SNS로 다져진 사랑, 신뢰, 우정 등은 알량한 말에 불과하고 끝나는 것은 한순간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유야 어떻든 두 영화 속 범인들은 극단의 외로움에 지쳐 복수 심리로 자신처럼 나미도 철저한 외로움의 세계로 끌고 가려는 의도가 보이고 그 절망의 순간에서 사람을 죽이면서 자신만의 쾌락을 느끼는 사이코패스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결국 SNS의 얄팍한 관계성뿐만 아니라 진정성 있는 1:1 만남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SNS 속 관계도 인정받을 만한 관계라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갈수록 위험해져 가는 사회의 안전망이 되어줄 정도인지 반문하게 되는 영화이다. 두 영화 모두 스마트폰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주며 스마트폰의 분실이 생각한 것보다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누군가 마음만 먹으면 내 정보는 언제든 털릴 수 있는 세상이니까. 그가 마음만 먹지 않았을 뿐인지도 모른다.
4. 총평
둘 중에 하나를 봐야 한다면 한국판만 봐도 되겠다고 생각한다. 한국판이 가진 서스펜스가 더 밀도 있고 일본판 특유의 현대인의 삶을 설명하려는 구구절절한 대사가 없어서 빠르게 몰입할 수 있다. 전개와 결말이 완전히 다른 영화지만 결론적으로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기에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한국판을 추천한다. 아, 그리고 임시완 배우의 연기는 너무 잘해서 짜증이 날 정도였다. 그 맑은 눈이 살인자 연기에까지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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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복탄력성을 잃은 사람들에게
간만에 좀 울림이 있는 드라마를 보았다. 요 근래 한국의 콘텐츠들은 지나치게 자극적인 액션이 필수인가 싶을 정도로 몰아치는 서사에 지쳐있었는데, 잔잔한 듯 하면서 몰아치는 드라마를 만났다. 정신병원이라는 일종의 금기시되어 있는 공간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애환부터 그 병에 허덕이는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따뜻하긴 한데 알게모르게 마음이 아프다. 결국 사람은 사람에게 상처받고 사람으로 치유받는다는 진리를 담은 이야기이기에 오늘도 어디선가 마음이 다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인간에 대한 혐오가 생겼다가도 사람을 갈구하는 인간의 나약함을 보는 것 같아서 말이다.
이전까지의 콘텐츠들은 정신병 환자들을 집중 조명하지 않았던 것 같다. 대체로 주인공의 애물단지 주변인물 정도로는 나왔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들이 왜 아픈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깊게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다양한 정신병도 보여주기도 하지만 환자들이 자신의 병을 어떻게 겪어내고 있는지에 집중한다. 암흑 속 현실을 벗어나 새로운 새계로 자신을 몰아넣는다든지, 갑자기 다운된 자신을 극 하이텐션으로 끌어올린다던지 등등 모두 암흑 속에 갖힌 자신을 지켜내려고 발버둥치는 그들의 각기 다른 모습들을 다양한 연출적인 요소들을 이용해 표현해내었다.
조울증 환자들이 왜 감정 기복이 심한지, 그 기복 속에서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것인지 혹은 망상 환자가 왜 갑자기 게임 세계의 주인공이라고 착각하면서 살아가는지 등등 그들의 시각을 대리경험할 수 있게 한 연출이 탁월했다.
참 별거 아닌 말들인데, 상처가 오래 남는 말들이 있다. 예를 들자면,
"네가 뭐가 부족해서 그러니"
이건 누군가에 희생하면서 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주로 하는 말이다. 이런 말 다음에 아프다는 사람에게 소심하다는 둥, 의지가 박약하다는 둥 안타까움에서 비롯된 또다른 공격이 시작된다. 너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내가(사실은 착각이지만) 혼구녕을 내든, 각성을 시키든 나약한 아이를 다시 강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징징대지마 너 누구 닮아서 이러니"
앞선 멘트 뒤에 항상 따라붙는 말이다. 그런 말을 듣다보면 내 말은 그저 투정으로 밖에 안보인다고 생각해 점점 말이 없어진다. 좋은 말만 하고 나쁜 말은 삼켜버리니 속이 답답하고 나의 약점을 들키지 않으려니 항상 자기를 방어하는 데에 익숙하고 당하지 않으려고 항상 곤두서있다.
나는 이런 말을 들으면 다시 깨닫는다. 나에게 물질적으로 부족한 것은 없다는 것. 그렇다면 나는 왜 이말을 들으면 화가 치밀어 오를까. 항상 이게 궁금했었다. 이런 말들을 들으면 항상 화가 나는데, 나는 왜 화가 나는지 모르겠었다. 그런데 최근 조금 달라진 내 자신을 마주한 것이, 비슷한 상황을 마주했을 때 회복탄력성을 잃은 것 같다고 느낀 지점부터였다. 분명 예전에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다시는 그런 말을 안들으리 하며 이를 바득바득 갈았었는데 지금은 절망만 하고 그냥 그대로 주저앉아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저 누워있고 약속이 잡혀 나가려고 해도 침대에서 벗어날 생각을 못했다.
정신을 차리고 사는 현 시점에서 드라마 속 인물들을 보니 느껴졌던 것이, 이들은 각자의 삶에서의 절망에서 회복 탄력성을 잃어 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점이었다.
그럼 혹자는 말하겠지. 무슨 말을 해야 네가 낫겠냐라고 묻는다면 그냥 아무말도 하지 말라고 하고 싶다.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게 정신병은 설득으로 해결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몸이 아픈 게 아니니 당신의 말이 만병특효약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 말을 하면 얘가 낫지 않을까 착각하는 것이다. 이유가 그사람의 소심함이었든 뭐였든간에 이미 낙오되어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속도로 오라고 재촉하는 것만큼 비수가 없다.
물론 주변인들은 불편하고 힘들겠지만 느려진 그들의 속도에 맞춰 다시 용수철처럼 튀어오르도록 그저 바라만 봐주는 게 더 큰 힘이 되지 않을까. 정신병은 당신이 고쳐줄 수 있는 게 아니다. 잔인하지만 그저 지켜보시라.
아, 그런데 황여환과 민들레의 러브라인은 좀 필요없지 않았나 싶긴 한데, 물맞는 씬은 읭스럽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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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가 망했다고? 왜?
우리 잡히지 말자! 리들리 스콧 감독은 낭만을 잘 살리는 감독이었다. <델마와 루이스>는 아주 좋은 예시가 될 것이다. 가부장적인 곳에서 잡혀 살던 주인공이 한 사건을 계기로 자아를 찾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나도 그게 와닿을 시기에 그 작품을 봐서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물론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올 더 머니>나 <에일리언> <블레이드 러너> 이런 것들은 가슴이 웅장해지는 작품이겠지. 아니 사실 나는 더 솔직할 필요가 있다. 리들리 스콧의 감독 작품 중에 본 것 <델마와 루이스>밖에 없다. 그래서 그를 감성적으로 기억하고 있나 보다. <마션>이나 <블레이드 러너> 한번쯤 봐야 하는데 공익근무요원 일이 너무나도 힘드니 볼 틈이 없다.
근데 그런 바쁜 와중에도 최신작은 못 참는다. 후에 스파이더맨 유니버스에 굉장히 중요한 포지션을 차지할, <베놈 2 : 렛 데어 비 카니지>와 함께 자웅을 겨뤘던 <라스트 듀얼 : 최후의 결투>를 다루려고 한다. 원래는 <라스트 나잇 인 소호>를 써보고 싶었지만 뭔가 극장에서 시간이 안 날 것 같아서 근래 상영작 중 좋았지만 저평가가 있었던 것을 고르려고 한다. 나는 이 영화가 러닝타임도 길고 중세 서부라는 한국인들이 접근하긴 어려운 소재임에도 훌륭한 메시지와 좋은 연기를 담았다고 생각하기에 여러분들에게 추천하는 바이다. 과연 2021년의 과소평가 작품 1등으로 꼽힐만하며, 이 작품의 조디 코머는 주요 시상식의 여자 주인공 후보로 뽑힐 수도 있다는 소심한 주장을 해본다. 아마 아무도 동의 안 하겠지만..ㅋㅋ
1. 감독 리들리 스콧, 장기를 살렸나요?
물론 이 감독의 영화를 <델마와 루이스> 빼곤 보진 않은 게 맞다. 근데 (자칭) 시네필로 살고 있다는 가오는 어느 누구와도 바꿀 수 없지 않은가? 그의 대표작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리들리 스콧은 상상력이 좋은 사람이다. 그러니까 <에일리언>이나 <블레이드 러너> <마션> 같은 작품은 현실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 주위에 화성 갔다 온 사람 있는가? 비트코인으로 간 거 말고 실제로 화성에 간 사람 말이다. 또 실제 존재하는 에일리언 본 적 있는가? 당연히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는 리들리 스콧의 최고 강점은 '가상의 현실을 직조시켜 최대한으로 서스펜스를 유지시키는 것'인 것이다. 근데 이 작품은 에릭 제거가 쓴 소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또 이 원작이 되는 소설은 실화를 중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전적으로 없던 현실을 만들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13세기로 넘어가는 타임머신이 있는 건 아니라서 상상력이 필요하지 않았던 건 아니겠지? 근데 영화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지 않아도 2021년의 현재를 관통하는 메시지를 만들었다. (내가 아는) 리들리 스콧의 영화와는 살짝 다른 감이 있지만 그 나름대로의 묵직함이 있다.
2. 배우들의 연기는 어떠한가요?
일단 주인공 자크 드 거리를 맡은 아담 드라이버에 대해 써보고자 한다. <결혼 이야기>에서의 부부싸움 연기나 <인사이드 르윈>에서의 그냥 포크 뮤지션 역할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래도 중요한 건 역시 <스타워즈> 시리즈에 나왔던 것 아닐까? 다방면의 역할을 보여주는 할리우드의 이선균 아담 드라이버는 그야말로 전천후 연기자다. 난 이런 그의 연기력이 이 작품에서 극대화됐다고 생각한다. <아네트>에서도 어마어마했고 <패터슨>도 잘했다고 들었다. 근데 두 작품을 안 본 것과 별개로 나는 이 역이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난이도가 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 작품의 핵심 키워드가 되는 사건이 있는데, 사실 극을 보다 보면 이 일이 어떤 식으로 전개됐는지 누구나 다 알 수 있다. 결말을 예상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는 것이다. 근데 충격적이라면 충격적인 것이 이 자크 드 그리의 캐릭터가 보통 미친놈이 아니라는 것인데, 현실적으로도 있어서는 안 될 돌아이라 내가 배우 입장이라면 이 역을 맡는 게 무서웠을 것 같다. 근데 우리의 아담 드라이버는 이를 200% 소화해낸다. 다른 주인공은 맷 데이먼이 맡은 장 드 카루 주인데 이 인물 역시 딱히 우리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인물은 아니다. 자크 드 그리 만큼은 아니더라도 그가 그렇게 좋은 인간 같지는 않아 보인다. 근데 <악마를 보았다>의 장경철이나 <다크 나이트>의 조커같이 비현실적인 미친놈들도 연기의 난이도가 어느 정도는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근데 이 장 드 카루 주같이 어느 정도는 현실성 있는 돌아이도 어렵다면 어렵지 않을까? 맷 데이먼은 그때는 보편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보기엔 돌아이인 그런 인물을 아주 멋지게 소화해낸다. 본 시리즈에 나왔던 샤프한 모습은 없다. 그냥 배 나온 아저씨가 보일 것이다. 근데 맷 데이먼은 나이가 들어도 역시나 연기를 너무 잘해서 포스가 흘러넘친다. 다음은 조디 코머다. 조디 코머가 맡은 마르그리트는 많은 것을 감내하는 중세시대 여자 역할을 한다. '많은 것을 감내한다'에서도 알 수 있듯 그녀는 수도 없는 개소리를 참아야만 하는데, 터닝포인트가 되는 핵심 사건을 비롯 그녀에게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감정적으로 참는 것이 배우로서 힘들었을 것 같다. 인간적으로 영화의 마르그리트는 살아있는 부처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외에도 벤 애플랙을 비롯한 나머지 배우들도 좋은 연기를 보여줬지만 나머지 세 배우가 워낙 탁월했기에 글을 줄이도록 한다.
3. 난이도는 어떤가요?
쉽지는 않다. 무슨 말이냐. 리들리 스콧 감독이 서스펜스를 차곡차곡 쌓은 것도 맞지만 일단 이 영화는 같은 에피소드를 세 번 반복한다. 만약 우리가 같은 말을 세 번 듣는다고 생각해보자. 솔직히 지루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결론이 어떻게 나는데?'가 궁금한 분들은 긴 러닝타임을 견디기 어려워할 수도 있다. 웬만하면 극장에서 보는 게 좋은 작품인 건 맞는데 모바일 환경에서 보는 게 어마 장장한 손해를 품고 있지는 않으니 스릴러, 역사물 좋아하는 분들은 부담 없을 듯. 아, 살짝 지루할 수도 있다는 위험부담이 있기야 하지만 플롯을 성실히 따라가다 보면 이해하기 크게 어려운 작품은 아니다.
4. 왜 과소평가되었다고 생각하나요?
물론 전 세계 영화 팬들의 마음을 꿰뚫을 순 없겠지만 난 사실 되게 간단한 이유로 과소평가가 이뤄지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첫 번째 요인, 같은 이야기를 세 번 반복한다. 인스타그램 쇼츠가 유행하는 세상이다. 나도 본론 결론 딱 임팩트 있게 끝나는 영화가 더 손이 갈 때가 있다. 이런 세태에 같은 과정을 세 번 반복하는 영화가 대중적인 입맛에 딱 맞아떨어지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두 번째. 전염병이 창궐한 세상에 인터넷이 너무나도 발달했다. 14세기 중세시대를 다뤘던 게 소수의 덕후들이 아닌 나머지들에겐 접근 난이도가 있었을지도? 또, 세 번째. 러닝타임이 길다. 솔직히 나도 극장에서 이 작품을 봤을 때 2시간 30분이라는 러닝타임에 놀랐다. <이터널스>가 아마 비슷하지 않았나? <이터널스>는 10명의 히어로들을 밸런스 있게 배치해야 한다는 과제가 있기라도 했지 이 영화는 같은 이야기만 세 번을 쓰니 반복이 지치다면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근데 이것은 이 영화의 단점에 대한 이야기가 될 테고, 나는 14세기의 원작 소설이 현대사회를 관통하는 키워드를 내포한다는 점에서 단점을 충분히 감추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지점이 리들리 스콧이 이 영화를 만든 이유이기도 하겠지. 이 모티브를 부담 없이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극찬받을만하다.
5. 어떤 것에 대한 영화인가요?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미투 운동이다. 미투 운동. 우리 사회에서 상처를 입은 이들을 위로하는 운동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미투 운동은 역선택을 품고 있다. 무고한 사람을 걸고넘어지면 그 사람의 마음에 구멍이 생길 수도 있다는 점이다. 물론 애 먼 사람의 삶을 망가트리는 짓은 그만큼의 대가가 치러져야 마땅하다. 근데 이런 역선택의 위험성이 미투 운동의 본질을 흐리면 안 되지 않을까? 이 영화의 마르그리트는 한 사건의 주인공으로서 그때의 성차별적인 행동에 대해 적극적으로 답한다. 또 현대사회의 미투 운동을 연상케 하는 여러 말들을 통해 왜 우리 사회가 약자들의 이야기에 집중해야만 하는가? 에 대해 조명한다. 또 그녀 역시 역선택의 위험부담에 놓여 정체성을 잃을 뻔 하지만 어쨌든 당당하게 그녀의 목소리를 낸다. 우리는 이런 그녀의 모습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본다.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행동하고 있는 게 아닐까? 과연 현재의 우리에겐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이 사회에서 꼭 우리와 함께 양립해야 할 가치는 무엇일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본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할까? 뭐 그런 것들 말이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그런 질문들을 통해 뇌 비운 혐오가 팽배하는 우리 현실에서 그 자체를 바라본다는 것이 얼마만큼의 가치를 지니는지를 전해주는 영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