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3-05-01 15:08:26
4월 넷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4월 28일 - 4월 30일
안녕하세요! 영화/OTT 전문 큐레이션 웹 매거진 씨네랩입니다.
다들 즐거운 주말 보내셨나요?
오늘은 4월 넷째 주 주말 동안의 박스오피스 분석 결과를 공유해 드리겠습니다.
시작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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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내 주말 박스오피스
화제작 개봉이 많았던 4월 넷째 주는 지난번(77만 9천 명)과 비교했을 때 주말 관객 수가 약 151만 5천 명으로 94% 증가하였습니다. 이번 주도 기대작이 많은 관계로 5월 첫째 주의 주말 관객 수 역시 기대해 볼 만 합니다. 개봉 전부터 기대를 모았던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와 <드림>이 예상과 같이 1, 2위를 차지하였습니다. 두 영화의 개봉으로 아쉽게도 <리바운드>와 <킬링 로맨스>는 주말 관객 수 TOP 5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존 윅 4>, <스즈메의 문단속>, <옥수역귀신>의 순위가 하락하였습니다.
1.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NEW)
유명 게임 시리즈 '슈퍼 마리오'를 영화화한 영화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가 개봉 첫 주말에 약 61만 관객을 동원하며 주말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였습니다. 개봉 전부터 화제를 모으고, 닌텐도와 일루미네이션이 합작하며 기대를 모았던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는 전 세계에서 10억 달러가 넘는 매출을 기록하며 전 세계적인 흥행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실사 영화 중에서도 호평받는 작품으로 개봉 2주 차 성적 역시 기대가 되는 작품입니다.
2. <드림> (NEW)
배우들의 케미와 유쾌한 대사로 호평을 끌어내고 있는 영화 <드림>이 개봉 첫 주말 38만 관객을 동원하며 주말 박스오피스 2위를 차지하였습니다. 예측불허 매력과 개성을 지닌 캐릭터들로 기분 좋은 웃음을 주고, 도전을 멈추지 않는 이들의 이야기가 따스한 희망과 감동을 선사하며 뜨거운 입소문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3. <존 윅 4>(⬇︎2)
인기 영화 시리즈 <존 윅 4>는 개봉 19일 만에 150만 돌파에 성공하며, 팬데믹 이후 청소년관람불가 등급 개봉작 중 흥행 1위에 올라섰습니다. 또한,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매니아>보다 16일 빠르게 150만을 돌파하며 얼마큼의 흥행이 이어질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영화는 많은 관객의 호평을 받으며, N차 관람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4. <스즈메의 문단속> (⬇︎2)
높은 순위를 유지했던 <스즈메의 문단속>이 약 2개월 간 장기 상영을 하며 개봉 8주 차 주말에는 4위로 하락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즈메의 문단속>은 누적 관객 수 500만 명을 돌파하며 높은 성적을 기록하였습니다. 또한, 국내 개봉 전체 애니메이션 영화 흥행 3위를 기록하며 여전히 뜨거운 인기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5. <옥수역귀신>(⬇︎1)
지난주에 4위를 차지했던 김보라, 김재현, 신소율 주연의 <옥수역귀신>이 넷째 주에는 한 단계 하락하여 5위를 차지하였습니다. 개봉 2주 차에 10만 관객을 돌파한 <옥수역귀신>은 해외 127개국에 판매되며 프랑스, 영국, 베트남 등에서 상영될 예정입니다.
(2) 북미 주말 박스오피스
넷째 주 주말 북미 박스오피스 역시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가 차지하며 4주 연속 1위를 차지하며 흥행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레이첼 맥아담스 주연 영화 <알 유 데어 갓? 이츠 미, 마가렛>의 개봉과 <스타워즈 에피소드 6 - 제다이의 귀환>의 재개봉으로 <더 커버넌트>와 <던전 앤 드래곤: 도적들의 명예>가 순위권 밖으로 하락하였습니다. 3위를 차지한 <알 유 데어 갓? 이츠 미, 마가렛>는 <지랄발광 17세> 연출을 맡은 켈리 프레몬 감독이 6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이며, 아직 국내 개봉에 대한 소식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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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픽의 4월 넷째 주 박스오피스 분석 콘텐츠는 여기까지입니다.
이번 주도 건강한 한 주가 되기를 바라며 씨네픽은 다음 주 월요일 이 시간에
또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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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는 우리가 ‘은혜씨’의 얼굴을 들여다볼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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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생각만으로 그저 웃음이 나는 얼굴이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 〈니얼굴〉을 보고 나면, 거기에 하나의 얼굴이 더 추가될 것이다. 다운증후군을 가진 발달장애인 ‘은혜씨’의 얼굴 말이다.
〈니얼굴〉은 여러 예술가가 모여 물건을 판매하는 문호리 리버마켓에서 캐리커처를 그리는 은혜씨의 이야기를 담았다. 은혜씨에게 자기 얼굴 캐리커처를 맡긴 사람은 4천여 명에 달한다. 집에서 뜨개질만 하던 은혜씨는 화가인 어머니가 운영하는 그림 교실에서 우연히 자신의 재능을 발견한 후 문호리 리버마켓에서 인기 셀러(seller)로 거듭났다. 마주 앉은 사람의 얼굴을 정성 들여 그려주다보니 ‘니얼굴 작가 은혜씨’라는 별명도 생겼다. 인기가 너무 많아서 골치 아프다는 은혜씨의 너스레에서 그녀의 인기를 가늠할 수 있다.
장애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가 내내 밝은 분위기로 전개된다는 점이 특이하다. 아니, ‘밝은 분위기’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니얼굴〉은 엄청나게 웃긴 영화다. 은혜씨는 내내 재치 있는 말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그렇다고 또 마냥 웃기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영화에는 은혜씨가 발달장애인을 위한 직장생활 안내서에 삽화를 그려달라는 의뢰에 답하는 장면이 있다. 제안을 들은 은혜씨는 “중요하다, 이거”라고 말한다. 그녀가 자신의 문제에 깊이 있는 고민을 품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요컨대 발달장애인인 은혜씨는 유쾌하고 성숙한 시민이다. 차이를 차별로 환원하지 않는 공간과 사람들 사이에서 은혜씨의 ‘다름’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장애를 다루는 영화라고 해서 조금은 무거운 마음으로 영화관에 왔다면, (내가 그러했듯) 〈니얼굴〉을 본 관객은 아마도 어떠한 반성의 계기를 마주할지도 모른다. 밝고 유쾌한 은혜씨에게도 불행한 순간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장애인은 마땅히 불행할 것이다’라고 생각한 우리들의 편견 때문이기도 하다. 장애인이라서 불행한 게 아니라, 장애인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는 우리의 가정이 불행의 원인일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은혜씨의 웃는 얼굴은 원인과 결과의 순서가 뒤바뀌었음을 자각시키는 계기이기도 하다. 동료 시민들의 애정과 지지 그리고 그를 바탕으로 한 제도적 뒷받침이 있다면, 장애인의 얼굴은 얼마든지 다양해질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은혜씨의 웃는 얼굴 옆에 있는 돌봄 제공자의 얼굴도 기억해야 한다. 은혜씨의 기쁨, 짜증, 투정, 행복을 가장 가까이에서 듣고 반응하는 은혜씨의 어머니이자 화가인 장차현실, 그리고 화면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은 아버지이자 감독인 서동일의 얼굴 말이다. 아무리 은혜씨의 그림 재능이 탁월하고 그녀의 성격이 활발하다 하더라도, 두 사람의 헌신이 없었다면 은혜씨는 여전히 집에서 다소 우울한 얼굴로 뜨개질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처럼 두 사람은 사회‧공동체가 마땅히 했어야 할 일을 사적인 공간에서 오롯이 떠맡은 채 은혜씨의 삶이 빛나도록 지탱하고 있다. 그들은 많은 순간 행복을 느꼈을 테지만, 그만큼 많은 순간에 괴로워하기도 했을 것이다. 비장애중심주의가 상식인 사회에서 장애인과 그의 가족이 마냥 행복하길 바란다면 그건 기괴하게 뒤틀린 환상에 불과할 테니까.
장차현실과 서동일이 가능케 한 은혜씨의 웃는 얼굴은 우리를 그다음 질문으로 인도한다. 돌봄과 헌신을 제공받지 못해 자기 내면의 빛을 꺼내 보일 수 없다면, 장애인은 웃지 못할 수도 있다(은혜씨의 문제가 비단 장애인의 문제만은 아니다. 은혜씨와 장차현실, 서동일이 촉발한 질문은 계급, 성별, 인종 등의 이유로 같은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위한 질문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이 〈니얼굴〉을 봤으면 좋겠다. 그들이 은혜씨의 밝은 얼굴과 그녀의 유쾌한 농담에 웃음 짓고 감동받았으면 좋겠다. 나아가 그들이 은혜씨가 선물한 웃음을 또 다른 질문으로 전환해 더 많은 은혜씨‘들’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은혜씨는 이미 4천 명의 얼굴을 마주하고 그 얼굴의 구체성을 포착하여 정성 들여 그려줬다. 이제 우리의 차례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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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곳적 복수 신화를 지금 소환하는 이유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서기 895년, 해외 정복을 마치고 자신의 왕국으로 돌아온 '아우반디르(에단 호크)' 왕은 왕비 '구드룬(니콜 키드먼)'과 어린 암레스 왕자와 재회한다. 그러나 막 성인식을 치른 아들에게 본격적인 후계자 수업을 해주기도 전에 그는 동생 '푤니르(클라에스 방)'의 반란으로 목숨을 잃는다. 푤니르는 구드룬 왕비와 왕국을 차지하고, 암레스는 바다 건너로 도망간다. 이후 세월이 흘러 바이킹의 일원이 된 '암레스(알렉산더 스카스가드)'는 왕국을 잃은 푤니르가 망명지인 아이슬란드에서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에 노예로 신분을 위장한 그는 노예선에서 만난 마녀 '올가(안야 테일러 조이)'의 도움을 받아 푤니르의 땅으로 들어가고, 아버지의 복수를 준비한다.
로버트 에거스 감독의 신작 <노스맨>은 바이킹 왕자 암레스의 사랑과 복수를 노래하는 영화로, 중세 시대극이자 근래 할리우드에서 보기 힘들었던 에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피비린내 나는 10세기 북유럽의 모습이 가장 먼저 눈을 사로잡는다. <그린 나이트>처럼 상징적이고 시각적인 방식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며 신화적 영웅의 비현실적 여정을 압도적인 분위기와 미장센으로 녹여낸다. 주술사가 이끄는 암레스의 성인식이나 피 튀기는 바이킹의 전투 장면은 거칠고 잔혹하다. 폭풍이 몰아치는 북대서양의 거친 바다부터 아이슬란드의 화산에 이르는 웅장하면서도 잔인한 자연의 풍광이 더해지면 그 시대의 야만성이 눈앞에서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심심찮게 등장하는 절단 장면은 '이 정도로 잔인할 필요가 있나?'라는 의문을 자아낸다.
하지만 강렬한 영상에서 눈을 돌려 주인공 암레스의 여정에 빠져들다 보면 그 의문은 자연히 답을 찾는다. 특히 중세 스칸디나비아 전설 속 영웅인 암레스 왕자가 셰익스피어 비극의 주인공 햄릿의 원형이라는 점, 하지만 암레스와 햄릿의 이야기가 사뭇 다르다는 점에서 그 답은 더욱 명확해진다. 덴마크의 왕자인 햄릿은 삼촌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그에게 복수하려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분노와 슬픔을 다 풀어내지도 못한 채 예기치 못한 사건사고에 휘말린다. 혼란 속에서 그는 미친 듯 보이는 현실과 미쳐 가는 자아를 화해시키지 못하고, 복수마저도 온전히 끝내지 못한 채 죽는다.
햄릿의 복수는 허망하다. 복수심이 도리어 파국을 가져온다는 것을 복수가 결코 건강한 선택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듯 보인다. 사실 복수의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작품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당장 <일리아스>만 해도 그렇다. 친구를 죽인 헥토르를 향한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시작한 <일리아스>는 헥토르의 아버지를 만난 후 그의 용기와 부성애에 감동한 아킬레우스를 비추며 헥토르의 장례식으로 끝난다. 분노에 가득 찬 야수였던 아킬레우스가 복수심을 버리고 사랑, 희생, 용기를 아는 고결한 인간으로 거듭나는 이야기인 것이다. 비록 그 끝은 조금 달라도 햄릿과 아킬레우스는 모두 복수의 무용함을 이야기한다.
<노스맨>과 암레스는 다르다. 영화는 햄릿, 아킬레우스와는 달리 복수의 완성을 통해 생명력을 되찾고 한 명의 인간으로 거듭나는 암레스를 보여준다. 복수와 삼촌의 죽음을 다짐하며 바다를 건넌 간 암레스는 바이킹의 배를 탄 채로 다시 등장한다. 배에서 내려 한 마을을 공격하는 바이킹들 사이에서 암레스는 다른 바이킹들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 그저 사람을 죽이는 데 몰두한다. 적군을 죽이고 그 몸을 입으로 물어뜯으며 울부짖는 그의 모습에서는 목적 없이 배회하는 한 마리의 외로운 늑대가 보일 뿐이다.
그러나 마녀의 환시를 보고, 자신이 복수를 완수할 운명이라는 예언을 들은 후 그는 새롭게 태어난다. 삼촌의 땅인 아이슬란드로 향하기 위해 인간 대우도 받지 못하는 노예로 위장한 암레스는 가장 낮은 계급이지만 오히려 가장 살아있어 보인다. 집을 나가 떠돌던 외로운 늑대는 이제 무리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 눈이 이글거린다. 복수를 통해 암레스의 인생이 죽음에서 삶으로 전환되는 이야기는 영화의 결말이 가장 단적으로 드러난다. 용암이 치솟는 화산에서 삼촌을 죽임으로써 마침내 꿈꾸던 복수를 하는 데 성공한 암레스. 그는 삼촌과의 결투에서 입은 상처로 인해 죽음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클로즈업되는 그의 표정은 환희와 평화로 가득하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지켰고, 아버지와 자신의 왕통을 이을 아이들도 남겼으면, 응어리 진 분노도 온전히 터뜨린 후 해소하여 온전한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다른 인물들의 서사 역시 복수의 긍정적인 면을 드러내 보인다. 당장 푤니르만 하더라도 그는 단순히 복수의 목표물이 아니다. 왕의 배다른 동생이자 사생아인 그는 자신의 삶을 무시한 이복형에게 복수한 인물로, 비록 영지를 잃어버리기는 하지만 가족들과 따뜻한 삶을 영위한다. 그래서 암레스에게 가족을 한 명씩 잃어가는 그의 모습에서는 간악함보다는 인간적인 연민이 느껴진다. 그의 어머니인 구드룬 왕비가 마찬가지다. 삼촌 푤니르에 인해 강제로 결혼하여 비극적인 삶을 사는 것처럼 보였던 그녀는 알고 보니 푤니르를 추동한 만악의 근원으로 밝혀진다. 그녀는 노예로 팔려와 강제로 결혼하고 후사를 낳아야 했기에 증오 가득 찬 결혼 생활을 끊기 위한 복수를 감행한 것이다. 그래서 구드룬은 분노하는 암레스 앞에서 자신의 선택에 후회가 없었고 지금의 삶이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고 일갈한다.
이에 더해 올가와의 관계도 흥미롭다. 일반적으로 신화 속 여성은 남성의 성장을 위한 도구로 활용되어 왔다. 여성과의 사랑을 통해 남성은 상처를 치유하고 질적으로 다른 인간으로 거듭나는 반면, 여성은 분기점 외의 특별한 역할을 맡지 못한 채 해피 엔딩 속에서 존재감을 잃는 경우가 많다. <노스맨>은 다르다. 암레스는 올가를 만나 사랑을 나눈다. 복수를 함에 있어서 적잖은 도움도 받고, 또 서로의 목숨도 구해준다. 하지만 올가는 암레스의 운명에 종속되지 않는다. 암레스는 사랑을 통해 복수심을 잊고 성숙한 인간이 되는 대신 목숨을 걸고 복수하는 늑대로 남을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들의 사랑은 쌍둥이를 잉태한 채 그 관계가 끊어질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암레스는 온전히 마음의 평화를 얻을 기회를 잡고, 올가는 노예에서 벗어나 위대한 왕통을 이어갈 새로운 미래를 개척해 나간다. 이처럼 <노스맨> 속 복수는 단지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힌 싸움이 아니라 바람직하고 정당하며 옳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피할 수 없는 싸움이다.
물론 혹자는 <노스맨>의 복수극이 그리 특별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햄릿과 암레스가 복수에 성공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차이를 제외하면 이 영화의 각본은 어디서 본 듯한 기시감을 떨쳐내지 못한다. 이는 2시간을 넘는 137분의 러닝타임 동안 느린 템포로 진행되기에 꽤나 지루한 인상이 남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 멋지게 복수하는 쾌락을 선사한다는 특징은 고전 중의 고전인 알렉상드르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특출 난 게 아닐 수 있다.
이에 더해 신화 원전의 분위기를 재현하는데만 집중한 것도 비판의 여지가 있다. 일례로 작년에 개봉한 <오필리아>는 햄릿을 원작으로 하면서도 햄릿의 아내인 오필리아를 전면에 내세워 햄릿의 비극을 여성의 시선에서, 그간 주목받지 못했던 이들의 시선에서 재해석한 바 있다. 그에 반해 죽음과 폭력, 예언과 마법으로 가득한 <노스맨>의 세계는 굳이 이 신화를 지금 이 시점에 만나야 할 이유가 있는지 의문을 남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암레스의 세계를 잘 살펴보면 <노스맨>에 숨겨진 시의성이 그 모습을 찬찬히 드러낸다. 화산을 배경으로 암레스는 복수를 위해 목숨을 바쳐도, 싸우다 죽어도 좋다는 마음가짐으로 마지막 결투에 임한다. 바이킹에게 정당한 복수를 위해 싸우다가 죽는 것은 그들의 천국인 발할라로 갈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죽을힘을 다해 속에 가득한 울분을 온전히 표출하면, 전장에서 죽은 후 발할라에 들어가 라그나로크가 올 때 오딘의 옆에서 함께 싸우는 영광을 누릴 수 있다. 즉, 이 세계는 복수를 긍정하며, 오히려 되갚아주지 못하는 이들이 손해를 본다는 믿음이 지배적인 세상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노스맨>의 현대적 맥락을 볼 수 있다. 지금의 사회는 외관만 다를 뿐 암레스의 세상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SNS 상에서 오가는 설전, 리벤지 포르노의 등장,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적을 제거하려는 정치인들과 지지자들의 모습까지. 일상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이 모든 현상은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과거의 수많은 전쟁과 갈등의 변주일 따름이다. 범죄자들에 대한 형량을 강화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엄벌주의에 대한 갈망 역시 국가나 사법 제도가 복수를 대신한다는 믿음이 약해졌음을 방증한다. 암레스처럼 직접 당한 만큼 돌려주고 정의를 바로잡는 복수의 욕구가 나날이 높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지나치게 충실한 재현 같아 보이는 <노스맨>의 접근법은 결코 과하지 않다. 태곳적 복수 신화를 성공적을 소환하는 심장 박동을 닮은 북소리와 극한의 현실 고증을 통해 신화에 설득력을 더하는 비주얼이 인상적이다. 암레스의 세계와 그의 행적이 가능한 사실적으로, 그리고 실감 나게 느껴질수록 관객 역시 영화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현실에서 커져가지만 실천에 옮기기 어려운 욕망을 분출하는 공간을 경험할 수 있으므로.
암레스가 발할라에 들어가는 결말이 대표적이다. 화산에서 죽어가는 그의 앞에 하늘이 열리고, 발키리가 날개 달린 말을 타고 내려와 그를 발할라로 이끄는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환상이다. 하지만 이는 복수를 통해 평화를 찾은 암레스의 심정을 그 어떤 방식보다도 훌륭하게 반영하는 연출이기도 하다. 성인식부터 전설 속의 검을 얻는 장면에 이르기까지 복수에 미친 그가 다양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모습을 이미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지나치게 재현적이고 현대적 맥락에서는 동 떨어져 있는 듯 보이는 <노스맨>에서는 원형적인 복수 신화를 통해 현대 사회를 반추하게 만드는, 단순한 영화적 재현 이상의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A(Acceptable, 무난함)
태곳적 복수 신화를 재소환하는 현대의 야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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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수 입장' 빼고 나머지 다 한 느낌
과제 같은 느낌. 글을 쓰는 건 임무 같은 느낌이 강하다. 물론 재밌어서 하는 것도 있다. 창작의 재미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이런 걸 꾸준히 하는 거겠지? 재미있으니까. 재미는 인생의 엄청 중요한 동기부여가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잘 나가는 축구선수가 새로운 환경에서 도전도 하는 거고. 누구는 매너리즘에 빠져 우울증도 하고 그런 거겠지. 실패 자체가 나만 기억하고 남들은 신경 안 쓴다는 속성을 일찍 깨달으면 좋은 게 많은 것 같다. 알아도 신경 쓰이긴 하지만 뭐라도 얻으면서 사는 게 최고인 것 같다.
물론 영화도 마찬가지다. 어떤 장르에서 뭐가 실패하면 한국영화는 분명 성장해서 더 나은 결과물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올해 <헤어질 결심>과 <소설가의 영화>가 나온 것이 아닐까? 질척이는 걸 빼고 누벨바그 향 첨가한 한국영화가 좋은 작품의 자양분이 된 건 참 뿌듯한 일이다. 그래서 극장에 자주 가는 것이기도 하고 그렇다. 내가 세상이랑 소통하는 재미도 얻고 함께 성장하는 것만큼 뿌듯한 건 얼마 없다. 그래서 이 뿌듯함을 얻는 연장선상에서, 어떤 글에는 정말 솔직하게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쓴다고 생각한다. 다들 고생하셨겠지만 아닌 건 아니니까. 평생 연예인 얼굴 보고 살 팔자도 아니고 비판받아야 할 건 오로지 감독과 제작자뿐인 걸 아니 목표를 분명하게 정하기로 한다. 이번 주 금요일, 넷플릭스에서 오리지널 영화 하나를 발표했다. 엥? <베이비 드라이버> 아니야? 아니었다. 살짝 비튼 영화 하나가 공개됐다. 여러모로 아쉬운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사랑할 때 누구나 최악이 된다> 보고 싶다고 생각이 여러 번 들었던 <서울 대작전>이다.
혼란기 바로 직후
나라가 바뀌었다. 대통령이 바뀌었다. 신군부의 맨 위에서 군인들을 지휘했던 전두환이 물러났다. 어지러운 대한민국. 1988년이 되고 예정되어 있던 서울 올림픽이 개최될 예정에 있다. 그런데 어지럽던지 안 어지럽던지 우리의 주인공 동욱에겐 알 바 아니다. 해외에서 외국 돈 달달하게 벌고 있는 동욱. 이제 적당히 벌었는지 한국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귀국행 비행기를 탄 동욱. 집에 돌아가려는데 갑자기 정장 입은 남자가 동욱을 불렀다. 어이! 동욱은 화들짝 놀란다. 고개를 두리번 휘젓는 동욱. 친구 복남의 차를 타고 어딘가로 이동한다.
아지트에 도착한 동욱. 그런데 몸을 피했다고 해서 능사는 아니었다. 아지트에서 고기 굽고 있는데 난데없이 양복의 남자가 찾아왔다. 일당을 장악하는 남자. 남자는 자기를 소개한다. 안평욱 검사는 공항부터 동욱 일당을 쫓아오고 있었다. 금세 동욱 일당의 범죄사실을 지적하며 ‘지금 당장이라도 기소할 수 있어’라고 겁박한다. 그러고 미션을 전달하는 안 검사.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사채시장의 대모인 강인숙의 운전기사가 되라고 주문한다. 검사의 진짜 임무는 전 대통령이 어떻게 비자금을 쌓아왔는지를 조사하는 것이었다. 어려운 과제에 당면한 동욱. 동욱과 친구들은 임무를 해결하고 전 대통령을 감옥에 넣을 수 있을까?
익숙한 맛
5공화국 직후의 대한민국이 영화의 소재다. 사실 이런 맛은 우리가 아주 잘 알고 있다. 대표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응답하라> 시리즈부터 시작해서 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다뤘던 소재들이다. 또 한때 복고 열풍이 불었던 때도 있었던 만큼 나 같은 90년대 후반생들도 이 시절 한국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들국화부터 이선희, 송골매와 장국영까지 국내외 문화예술계가 꽃피웠던 당시의 대한민국. 이 영화는 다른 작품과 다를 바 없이 그때 고증에 철저하다. 일단 1988년 대한민국을 바탕으로 ‘사우디아라비아’라는 소재가 가장 도입부에 등장하는 것은 박정희 정권이 퇴장하고 난 후에도 외국과 교류했던 한국의 세태를 묘사하는 좋은 수였다. 또 전두환 전 대통령이 권력에서 바로 퇴진하지 않았다는 설정도 흥미롭다. 후에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던 두 분의 대통령이 집권하고 난 후에 두 범죄자의 법적 처벌이 이루어졌던 것이나 노태우 전 대통령의 집권이 곧바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설정의 치밀함 자체는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또 김성균 배우가 연기한 이현균 캐릭터는 군인이다. 군사정권이 퇴진한 이후 군인 출신 정치인이 권력자 곁에 있을 수 있을까? 싶지만 위에서 쓴 부분과 비슷한 맥락으로 현실성을 덧붙인 설정이 됐다. 정치현실에 대해서 허술해 보이지만 리얼리티를 남겨둔 설정을 유지한 셈이다. 또 이 외에도 1988년 당시의 나이키 조던 시리즈나 코디 스타일, 음악, '오우삼'으로 대표되는 홍콩 느와르 등등 시각적, 청각적 고증은 고생을 많이 한 티가 난다. 이 영화에서 보여줬던 감독의 역량보다 더 한 미술팀의 열일이 돋보인다.
그리고 이렇게 현대사의 단면을 잘라 구현한 설정은 러닝타임의 중반부를 돌아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후술 할) 맹숭맹숭한 전반부가 끝나면 영화의 톤이 급변한다. 끔찍하게 묘사된 살인사건을 기점으로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이 영화의 설정이 좀 더 내밀하게 제시된다. 그리고 톤이 바뀌고 난 후인 이 중반부의 한 시간이 아마 감독이 의도했던 영화의 주요 포인트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영화는 시대극과 스릴러의 중간지점에서 나름의 균형감각을 가지며 후반부까지 질주한다. 예고편만 보면 <베이비 드라이버>를 교묘하게 본뜬 것 같았는데 아니었다. 이 <서울 대작전>은 <베이비 드라이버>랑 다른 맛이다. 같은 것이라곤 운전 잘하는 주인공 빼곤 없다는 거? 오히려 <베이비 드라이버>보단 <택시운전사>의 2022년 버전에 좀 더 가깝다. 차량 액션부터 군부세력에 대한 쓴소리까지. 기본적인 틀은 나름 신선하게 설정을 잘 한 듯 보인다. 이에 힘입어 문소리라는 큰 배우의 캐스팅은 굉장히 주요하게 작동한다. 근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구는 헛스윙 스트라이크
첫 번째 시퀀스다. 유아인 배우가 내려서 어떤 제스처를 취한다. 이때 보여준 제스처만 봐도 느낌이 안 좋아진다. 바로 다음, 조력자 롤을 맡은 배우가 동욱에게 문서를 전해준다. 그리고 동욱이 문서를 볼 때 선글라스를 살짝 내린 채로 문서를 본다. 오케이. 이것도 살짝 올드한 느낌이 드는데 그럴 수 있어. 직후 동욱이 ‘오 마이 갓뜨’라고 말한다. 거의 3~4년 만에 ‘오 마이 갓뜨’라는 영화, 드라마 대사를 들어본 것 같다. 그리고 그 3~4년 전에도 2018, 2019년의 최근작 영화를 봐서 들은 게 아니다. <논스톱>같이 00년대 초반에 인기 있던 작품을 보다 그 멘트를 들은 기억이 있다. 뭐 영화 배경이 1988년이니까 예전에 쓰던 말을 넣는 건 별 일 아닐 수도 있다. 과거에 대한 고증이 다른 영화와 차이점이 될 정도로 강점으로 작동하는 영화니까. 근데 관객은 2022년에 이 영화를 본다. 굳이 이 대사가 아니어도 시대상에 대한 고증이 더 꼼꼼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렇게 올드한 연출이 제일 첫 시퀀스부터 들어가니 중반부까지의 모든 러닝타임이 헐거우며 조악하기까지 하다. 일단 유아인 배우 옆에 있는 준기 역이 “형이 여기 나가는 게 꿈이잖아요!”라며 차 엔진 소리 ‘우우웅~’을 입으로 낸다. 김무열 배우 닮은 남자다움에 가벼운 역을 하니 뭔가 안 어울리는 느낌이 강하다. 그리고 영화의 전체적으로 써져 있는 올드한 디렉팅에 대사 쓰는 방식까지 너무 과거를 소재로 한 영화가 아닌 ‘그냥 과거 영화’ 느낌이 강하니 보기가 힘들어진다. 이런 고루한 느낌은 러닝타임 내내 반복된다. 중반부에 무게감이 생기긴 하는데 그 무게감 중간중간마다 끊임없이 제시되니 집중을 깬다.
두 번째도 헛스윙 스트라이크
바로 다음 시퀀스로 넘어간다. 동욱, 준기 형제가 한국으로 귀국했다. 옆에서 복남이 형제를 기다리고 있다. 가장 첫 번째 대사. “이게 누구여. 누구누구 아니여?”다. 그리고 카메라가 복남을 가까이서 찍는다. 음.. 뭐 이상한 대사는 아니다. 그런데 좀 많이 올드하다. 1988년에 나올 법한 인물 소개가 그대로 쓰였다. 다음 장면에서 윤희가 등장한다. 박주현 배우가 사랑스러운 매력을 뽐내며 등장한다. 윤희는 동욱의 동생이다. 그럼 준기의 누나가 되겠지? 윤희가 준기의 볼을 꼬집으며 “우리 준기, 잘 지냈어?”라고 묻는다. “누나 보고 싶었지?” 뭔가 이질감이 든다. 너무 익숙하게 많이 봐서 이질감이 드는 느낌이다. 이 부분까지 극초반부니 일단 참고 나머지 130분을 보기로 한다.
남매가 그렇게 오랜만에 조우한 후에 카메라는 어떤 인물에게로 옮겨간다. 모피 코트를 입은 남자가 마이크에다 준기, 동욱 형제를 환영하고 있다. 노래를 간단하게 부른다. 조명이 휘황찬란하다. 윤희 한 숨 쉰다. “저 또라이.” 남자가 대사를 말한다. “동욱, 준기 형제님. 어서들 오십시오.” 유아인 배우가 남자를 보고 어이없다는 듯이 슬쩍 웃는다. 남자는 자기를 소개한다. 보니까 이 인물 이름이 ‘우삼’이다. 설마 영화감독 오우삼을 오마주 한 건 아니겠지? 우삼의 바로 다음 대사를 보니 아마 맞는 것 같다. “아, 그럼 귀국 선물이 없다 이 말씀?” 어.. "이 말씀"이라고? 굉장히 오랜만에 듣는 것 같다. 음. 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기시감이다. 이 기시감 때문에 인물들이 다 뻔하기도 하지만 오랜만이기도 해서 어색함까지 느껴진다.
정확히 다섯 명의 인물 등장 신을 쭉 썼다. 이 어색한 인물 연출은 러닝타임 내내 쭉 이어진다. 이 다섯 명이 영화에 사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 인물들 모두가 올드해서 첫 시작을 굉장히 이상하게 끊은 셈이다. 그리고 이렇게 제시한 인물의 내면이 중후반부까지 주요하게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이 영화의 메인 주인공은 유아인 배우가 맡은 동욱 역이다. 동욱 역에게 어떤 특성이 있어서 중반부에 이어지는 '인물을 관통하는 질문'에 그렇게 대답할 근거가 생긴다. 그런데 이 동욱이라는 캐릭터에게 이런 설명이 없다. 그냥 단지 좋게는 밝게 나쁘게는 유치하게만 묘사해서 이런 이중적인 모습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건 굉장히 아쉬운 부분이다. 단순히 이 사람들이 구면이고 예전에 인연이 있다는 것만 알기 때문에 사채업의 큰 손의 뒤를 캐는 예리함과 주도면밀함이 느껴지지도 않다. 금세 다른 넷플릭스 오리지널들이 생각난다. <오징어 게임>에서 성기훈 캐릭터가 도망가고, 어머니에게도 궁색 맞은 캐릭터를 설정해 관객에게 ‘이 사람은 이렇게 무책임한 인간’이라는 묘사를 했던 것을 기억하는 관객이 많을 텐데, 이런 방식은 좀 고리타분하다고 느꼈다. 또 <베이비 드라이버>에서 음악과 운전을 결합해서 베이비의 운전 실력을 묘사했던 방식과 멀리 떨어졌다는 점에서 이 작품과 괜히 비교하게 된다.
이렇게 주인공 5인방이 다 조악한 방식으로 소개되기 때문에 첫인상이 안 좋다. 캐릭터성을 강조한 액션 영화에서 인물에 몰입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한데 초장부터 어색하니 균열이 어긋나는 것이다. 이런 불안정한 인상은 영화 러닝타임 중반까지 내내 지속된다. 이 어색하고 따로 노는 톤은 유아인, 고경표 같은 베테랑들도 피하지 못했다. <지옥>에서 내면에 분노를 가진 채로 운명론적인 삶을 살아가던 사이비 교주, <헤어질 결심>에서 일에 진심이지만 살짝 유머러스한 경찰을 보기엔 좀 많이 낯설다. 아. 대신 오정세 배우가 연기한 안 검사 역은 초장부터 카리스마가 대단했다. 이 인물은 극의 톤을 바꾸는 굉장히 중요한 반환점이 된다. 이때 처음 등장부터 발성과 억양으로 인물들을 휘어잡기에 극의 강약 조절을 부여하는 역할이 된다. 이 사람이 등장하면 뭔가 모르게 긴장이 되는 것이다. 또 문소리 배우가 맡은 역할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읽힐 수 있다. 이 강 회장 역은 전 대통령 부역자로서 비겁하고 저열한 인간이다. 그런데 이중적인 측면에서 인간적인 면모도 있다. 이 인간적인 면모를 계속 유지할 것인가? 혹은 아닌가? 가 극에서 긴장감을 부여하는 두 번째 방식이 될 것이다. 살짝 뻔한 것 같지만 당연히 어렵다. 문소리라는 큰 배우가 맡을 수 있는 중압감 있는 역할이다. 그런데 이 영화의 인물 연출이 이 베테랑도 비켜나가지는 못했다. 조명을 쓰는 방식이 왠지 모르게 어색하다. 인물에게 집중이 안 되는 느낌이 강하다. 이렇게 인물에게 불협화음이 느껴지는데 배우가 연기를 너무 잘해서 이 부분이 평범하게 쉭 지나간다. 특히 이 인물이 극후반부에 감정연기를 하는 걸 보면 이렇게 소박하게 안 해도 될 대사들이라고 생각했다. 더 터트려도 되는 연기를 해야 카타르시스가 느껴질 텐데 인물이 느낄 감정에 비해 대사들이 죄다 간단하다. 배우가 들끓어 오르는 연기로 소화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정세 배우 역시 다른 역할이 뽐내는 이질감 때문에 이 배우의 호연에 집중이 안 된다. 연기는 분명 잘했는데 뭔가 깔끔하지 못한 것이다.
3구도 역시 헛스윙
이런 식으로 인물 연출이 거의 없다시피 하는 쪽이기 때문에 긴장감이 별로 안 느껴진다. 사실 중후반부도 그렇게까지 서스펜스가 엄청나지는 않았다. 군사정권의 잔혹함이 어느 정도 사려있다 뿐이지 전체적으로 유치한 톤이 끝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렇게 배우의 개인기에 의존한 러닝타임의 강약 조절 실패 때문에 솔직히 많이 지루하다. 박주현 배우의 사랑스러움과 유아인-문소리-오정세 배우의 카리스마로도 덮어지지 못한 것이다. 극후반부에 인물 두 명이 감정을 드러내는 신에서는 두 배우의 테크닉이 느껴지기는 한다. 그런데 대사 중에 '엥' 싶었던 부분이 있다. 구체적으로 쓰면 스포일러가 될 것이니 여기다 쓸 수는 없다. 예를 들자면 <명량>에서 "미래 후손들이 우릴 잊어버리면 후레자식들이지"를 2022년 버전으로 듣는 느낌이었다. 또 초중반부에 안 검사와 주인공 일행이 소주와 맥주를 섞어 마시는 장면이 있다. 이거 좀 모순적이다. '내가 소맥이란 걸 개발했다'라는 말로 퉁 치는데, 그냥 어디서 주워 들었다고 하는 게 차라리 더 나을 뻔했다. 또 하이라이트 신에 '알잖아. 내가 운전은 이찌방인 거'라는 말이 나오는데 감정 몰입이 확 깬다. 배우들의 연륜이 감정선을 끓어 올리다가 대사 때문에 중간에 끊겼다. 이런 식으로 인물과 갈등관계를 어디서 본 것처럼 설정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산만한 톤이 유지되는 건 치명적이다. 영화를 본 후세대를 지나치게 의식한 느낌? 오히려 이 느낌이 <응답하라> 시리즈와의 차별점을 크게는 꼽지 못하는 이유가 됐다. 그러니까 배우들이 분명 연기를 잘하는데 영화는 딱히 연기를 잘하지 못한 것이다. 사실 중반부를 넘어가서 군부의 위협이 들어가는 부분부터는 보는 재미는 있는 케이퍼 무비임에도 좋은 평을 내리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아마 거의 대부분의 관객들은 중반부까지 안 보고 그냥 껐을 것 같다.
계획대로 되지 않은 작전
물론 이 영화에는 진심이 담겨 있을 것이다. 배우들도 마찬가지다. 유아인 배우는 그중에서도 상대 배우와 감정을 집중시키는 뛰어난 연기를 보여줬다. 전체적으로 들쭉날쭉 종잡을 수 없는 영화의 톤 중에서 이 정도의 재미도 찾을 수 있었던 건 이 배우의 경험치 덕이다. 그런데 유아인 배우의 열정으로도 숨길 수 없는 단점이 있다. 바로 준기 역의 모든 것이 이상하다. 다들 들쭉날쭉 다른 영화를 연기하는 와중에서도 유독 튀었다. 지나치게 오버하는 느낌이 강하다. 안 그래도 오그라드는 영화의 톤에 오버하는 연기가 주인공 옆에 있으니 보기 어려운 영화의 난이도를 더 높인 셈이다. 그리고 배우 이미지랑도 안 맞았다. 이 배우의 다른 사진들을 찾아보면 엄청 잘생겼다. 아이돌 출신 중에서도 깊이 있게 잘생긴 미남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메이크업 방식 자체가 박주현 배우의 동생이라는 설정에 어긋나 보인다. 시각적인걸 중요하게 생각해서 고증에 진심이었던 영화가 배우 코디부터 실패하면 몰입이 안 된다는 걸 몰랐던 걸까? 잘생긴 미남 아이돌을 어깨가 좁아 보이게 코디한 건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물론 이런 불균형이 배우 본인의 책임은 아니다. 박주현 배우 같은 경우도 이 영화에서 좀 따로 논다. 몸을 쓰는 게 어색한 느낌? 근데 이런 단점을 상쇄할 만큼 캐릭터가 사랑스러웠나? 그건 아니다. 아예 납작했던 인물의 개성을 박주현 배우의 그나마의 매력으로 이끌었다 뿐이지 캐릭터의 특성이 기억나지는 않는다. 윤희 역이 아니라 그냥 박주현 역 같다. 박주현 배우의 드라마 <인간실격> 잠깐 본 게 전부지만 이 분은 이런 식으로 연기했을 것 같다. 이는 신선한 얼굴이었던 박주현 배우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이 뿐만 아니라 김성균 배우도 좀 연극 톤 느낌이 강하다. 이 배우가 군인 역을 맡으면 할 것 같은 연기를 그대로 보여준다. 물론 연기 잘했다. 근데 이런 연기 보려고 이 영화 보는 거 아니다. 어차피 김성균 배우 좋은 연기자인 거 우리 모두 다 알고 있다. 그럼 뭔가 새로운 게 있어야 하는데 <범죄와의 전쟁>에서 봤던 모습에서 목소리 톤만 높은 방식이라 첫 대사부터 식상하다. 이 캐릭터에서 기억에 남는 건 강 회장과의 독대 신이다. 이 외에는 그냥 '김성균 배우가 군인 역할을 맡은' 연기를 보여준다. 이런 식으로 이 작품이 거의 대부분의 캐릭터를 희생시킨 영화인 것은 굉장히 아쉽다. 케이퍼 무비에 캐릭터 개성이 없으면 무슨 재미로 볼까? 감독의 영화 해석이 중심인 게 아니라 배우의 인기나 매력으로 극을 주파하니 이런 아쉬운 단점이 생기는 것 같다.
이런 식으로 따로 놀게 영화가 느껴지는 것 때문에 뻔한 답을 골랐던 각본이 더더욱 아쉽게 느껴진다. 긴장감을 넣는 연출은 했는데 서스펜스는 안 느껴지고. 어쩐지 예상대로 딱딱 이어지고. 심지어 다른 장면에서 이 배우가 이 대사를 치고 어떤 역을 할 거야!라고 생각하면 바로 그대로 이어진다. 연기도 어디서 본 것 같다. 이야기 흐름? 카메라 워킹? 좀 예전에 보던 방식이다. 카체이싱을 껍데기로 군사정권의 위선과 모순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그렇게 단순히 착한 영화를 만드는 게 그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지금은 2022년이다. 마석도 형사가 악당들 두드려 패고 톰 크루즈가 저세상 액션으로 관객을 800만 관객 동원하는 게 요즘 세상이다. 단순히 인기 있는 래퍼 섭외해서 카메오로 넣고. 연기 잘하는 남자 배우 섭외해서 원톱 주연 놓고. 역사의 흑막을 묘사해서 보편적으로 나쁜 놈 만들고. 매력 있는 배우 섭외해서 히로인 포지션에 놓고. 이런 어디서 본 것 같은 기획은 많은 비판을 받기 충분하다. 한국영화의 팬으로서 아쉽다. 넷플릭스가 <오징어 게임>이나 <지옥>, <마이 네임>같이 작가주의적인 성향을 유지하며 개성 있는 영상물을 만드는 것 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그게 과연 전부일까, 하는 생각은 든다. 의도고 뭐고, 관객들은 재미있는 걸 보고 싶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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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CFF 데일리] 붉그스름한 군자
감독: 박재민
러닝타임: 4분
진정한 어른으로 거듭나기 위해 험난한 성인식을 치러야 하는 수많은 아이들. 과연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애니메이션 1' 中 <성인식> 스틸컷옛날 부족국가 시절, 제사는 신을 향한 행위였다. 돼지나 소와 같은 가축도 가능했지만, 살아있는 사람을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인신공양도 있었다. 제물이 희귀할수록 신에게 큰 기쁨을 전달할 것이라 믿었던 부족들의 행위였다. <성인식>은 인신공양까지는 아니고, 하얀 새를 제물로 바친다. 제단 위에서 제사장이 꼬마에게 하얀 새를 공양하라고 한다. 그러나 꼬마는 반대한다. 하얀 새를 제사장에게 던지며 제사장을 제단 밑으로 떨어트린다. <성인식>은 샌드아트와 복합적으로 연출하며 빠른 전개와 인상적인 효과를 보인다. 넘어진 제사장을 목격한 다른 하얀 새를 품고 있던 꼬마들은 각자가 품었던 하얀 새를 풀어준다. 하얀 새들은 자유를 찾는다. 생명의 소중함을 느낀 꼬마의 결단력 있는 행동은 성인(聖人)의 모습을 보인다.
상영일자: 9/19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 9/13~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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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건 역시 짝 찾기와 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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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같은 사랑
마치 첫 만남에 내 사랑을 찾은 것 같았다. 그냥 일개 변호사였던 렌필드. 비서를 구한다는 누군가의 공고에 이끌리듯 성으로 들어갔다. 도착한 곳은 이유가 무엇인지 어두컴컴하다. 여기요? 주인을 부르는 질문에 남자가 등장한다. 말투가 이상하다. 뭔가 중 2병의 느낌을 풍기는 남자. 알고 보니 중 2병 무드만 품기면 다행이었다. 남자의 정체는 드라큘라였다. 영생과 무한한 능력을 하사 받은 렌필드. 벌레를 먹으면 모든 걸 다 씹어먹는 빌런이 되어 사람의 팔다리 다 뜯어버린다. 이렇게 초자연적인 힘을 그냥 무료로 얻을 리는 없다. 드라큘라와 렌필드가 만나게 된 계기는 직장이다. 그러니까 렌필드가 드라큘라의 수발을 들어야 하는 입장이었던 셈이다. 피를 먹어야만 생을 연장할 수 있던 렌필드. 렌필드는 순수한 체하며 인간의 피를 구해오거나 사냥꾼들을 드라큘라와 때려잡는 일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이 일이 떳떳할리는 없다. 도망자 신세인 렌필드. 드라큘라는 별생각 없어 보이지만 렌필드는 이런 삶에 진절머리가 나기 시작했다. "저 그만두고 싶습니다!" 용기 내어 드라큘라에게 고백한다. 드라큘라의 대답은 온화했다. "그래. 뭐 그만둘 수도 있지." 바로 정색하는 렌필드. 드라큘라의 대답은 곧바로 차가워진다. "내 힘으로 이 삶을 누리고 있으면서 감히 퇴사?"라는 말로 맞받아친다. 바로 렌필드를 빈사상태로 만드는 드라큘라. 드라큘라는 렌필드를 구워삶기 시작한다. "오직 나만이 너에게 사랑과 능력을 줄 수 있는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드라큘라. 가스라이팅이 시작됐다. 물리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렌필드의 독립은 좀 멀리 있는 듯하다. 과연 그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찾을 수 있을까?
이런 거 좀 기다렸어
2주 전인가? <곰돌이 푸 : 피와 꿀>이라는 영화를 봤다. 본 시기가 주말이었고 cgv 공식 어플의 3천 원 할인쿠폰을 적용해서 봤으니 12000원이 들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고 극장에서 나올 때 엄청 후회했다. 그냥 <리바운드> 볼 걸. 뭐랄까 극장에서 모욕을 당하는 느낌이었다. 어떤 이유에서 모욕을 당했을까. 한 35가지의 이유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곰돌이 푸'를 활용한 방식이다. 영화의 전체적인 콘셉트는 인간에게 버림받은 곰돌이 푸와 피글렛이 살육극을 벌이는 내용이다. 퍼블릭 도메인을 패러디해서 영화를 만든 것이다. 단점 중 하나는 이 지점에서 온다. 전체적으로 이 영화의 주인공이 푸, 피글렛이 아니어도 된다는 것이다.
영화는 이와 반대로 드라큘라와 렌필드를 활용한 이유를 보여주는 편이다. 일단 드라큘라라는 캐릭터의 가장 큰 특성 중 하나는 피를 빨아먹어야 살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렌필드와 드라큘라의 관계를 은유하는 특성이기도 하지만 영화의 주제적인 측면과도 관련이 있다. 영화 초중반부 렌필드에게 어떤 사건이 벌어진다. 이 사건 덕에 렌필드는 시각이 넓어지는 성장을 겪게 된다. 이 시퀀스에서 하이라이트처럼 반복되는 대사가 있는데 이 문장도 생각해 보면 영화의 어떤 부분을 반박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 영화에서 핵심 소재 중 하나인 '나쁜 관계 모임'을 들여다보면 역시 흥미롭다. 이 모임에 소속한 인물들이 빨아 먹히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영화에서 드라큘라의 속성을 빗대 영화의 갈등구조로 활용한 방식은 그냥 단지 재밌으려고 영화의 핵심을 만들지 않았다는 점은 영화의 강점으로 칭찬받을만하다.
또 영화에서 드라큘라 원작의 디테일을 잊어버리지 않았다는 점 역시 좋은 점수를 줄 만하다. 앞에서 언급한 <곰돌이 푸 : 피와 꿀>은 그냥 등장인물만 갖다 놓은 수준(일례로 푸와 피글렛이 사람들에 상처받아서 극단까지 간다는 것 자체가 인물들이 지나치게 평면적이라는 느낌이 드는 정도)인데 이 <렌필드>는 다르다. 우선 원작에서 렌필드가 어떤 걸 먹으면 힘을 얻는다. 이는 원작에서도 알 수 있는 속성이다. 그러나 렌필드라는 인물의 특성을 갖고 온 지점이 원작에만 있지는 않다. 대표적으로 직업인 변호사에 대한 것도 다른 창작자가 만든 부분을 갖고 왔다. 게다가 영화에서 중후반부에 제시되는 드라큘라의 목표와 관련된 부분도 다른 작품에서 갖고 온 듯하다. 이렇게 이것들 말고 다른 드라큘라들의 특성을 갖고 와서 오마주한 것들을 찾아보는 재미도 분명한 영화의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액션 칭찬해
영화의 가장 큰 강점은 코미디적 요소나 자아 찾기라는 테마가 들어있는 대사들이 아니다. 바로 액션이다. 이 영화에서 액션은 필수적이다. 렌필드가 드라큘라에게 자아를 의탁했다는 콘셉트를 살리려면 당연히 렌필드가 얼마나 강력한지를 묘사해야 한다. 영화는 이를 잘 보여준다. 마블의 캡틴 아메리카를 예를 들어 설명하면 쉽다. 캡틴 아메리카는 혈청을 맞고 인간의 운동능력 이상의 것을 가진 인물이다. 그걸 기점으로 빌런을 두들겨 패는 캡틴 아메리카. 뭐 빌런들이 붕 날아가는 것도 그의 파워를 보여주는 방식이겠지만 글쓴이는 살짝 다르게 생각한다.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처럼 악당들의 팔, 다리를 뽑아버리는 묘사도 그 인물의 강력함을 보여주는 연출 방식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영화는 이를 그대로 구현한다. 렌필드 역을 맡은 니콜라스 홀트는 그 큰 피지컬을 활용하며 합을 잘 맞춘 액션을 보여준다.
그중 글쓴이가 ‘액션 좋다’라고 느낀 부분은 초반부다. 렌필드가 모임을 참석하고 만난 인연이 있다. 이 인연을 괴롭히는 나쁜 인간들을 혼내주러 간다. 이 장면에서 시각적인 효과나 사운드를 잡은 방식이 경제적이었기 때문에 렌필드라는 인물을 설명하기가 용이해진다. 사실 이 시퀀스보다 좋았던 건 후반부/극후반부에 들어가는 액션이다. 이 장면들은 사건이 벌어지는 공간적인 특성을 잘 활용했다는 느낌이 든다. 렌필드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질 수도 있고, 지형지물을 뜯을 수도 있고, 벌레를 먹기에도 용이하다는 특성은 필연적으로 이곳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또 이 장소의 특성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인물들을 묘사하는 것에도 강점을 가진다. 니콜라스 홀트가 범주가 넓은 배우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케서방과 아콰피나
이 영화에서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인물은 당연히 드라큘라다. 원작을 드라큘라에서 가져왔기 때문이다. 이 드라큘라라는 역할은 많은 드라마/영화에서 수도 없이 등장했기 때문에 살짝 식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이렇게 독이 든 성배 같은 역할을 니콜라스 케이지라는 베테랑이 맡았다는 것은 어느 관점에서 신선하게 느껴진다. 니콜라스 케이지 이 영화에서 연기 정말 잘했다. 이 영화 사실 굉장히 잔인하다. 팔다리 뜯기는 건 기본이고 피가 철철 흐른다. 이는 영화의 스타일을 가로지르는 연출 방식이 된다. 반대로, 영화가 호러영화로서의 특성을 가지는 것은 이 니콜라스 케이지의 연기 덕분이다. 니콜라스 케이지는 정통파 빌런처럼 연기한다. 글쓴이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잭 니콜슨의 ‘조커’가 생각이 났다. 장난스럽고 익살스럽지만 그만큼 괴기스러운 한 방을 갖고 있는 느낌? 자기 파괴적인 면모를 가졌던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 / 광기에 사로잡힌 <데어 윌 비 블러드>의 선데이 / 기분 나쁜 느낌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는 <더 배트맨>의 조커, 리들러보다 더 클래식에 가까운 빌런을 연기한 것이다. 실제로도 니콜라스 케이지는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쩌면 예상 가능하게 행동한다. 그런데 여기서 영화의 서스펜스를 극대화시키는 좋은 연기를 보여준다. 또 니콜라스 케이지는 이 영화를 받자마자 자기가 할 수 있는 롤을 그대로 이해하고 연기하는 듯하다. 이런 그의 연기는 전작에서도 볼 수 있었다. <피그>에서 보여줬던 1인 캐리를 이 작품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셈이다. 지금 4월이라 속단하긴 이르지만 아마 내년 초 유수의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 후보에 이름을 올릴 것이다.
아콰피나는 매력적인 캐릭터를 맡아 잘 맞는 옷을 입은 듯 활약한다. 사실 이 아콰피나가 맡은 역도 좀 뻔하다. 뭔가 이 사람의 이면에 무언가가 있고, 이를 이겨내기 위해 겉으로 센척하는 그런 인물 타입이다. 어찌 보면 장르의 관습에 기댔다고 볼 수도 있다. 이런 전형적인 캐릭터세팅은 영화의 단점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아콰피나는 이를 본인만의 화법으로 주파한다. 글쓴이는 이 역할에서 개성을 부여한 방식이 눈빛연기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렌필드를 대하는 방식이 점점 변하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데, 이를 투사한 표정연기가 이야기의 핵심이 될 만큼 영화에서 악센트를 주는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강강강
뭐 니콜라스 케이지 연기 잘하고 니콜라스 홀트, 아콰피나가 매력적인 데다 영화가 품고 있는 메시지도 건강한 데다 액션까지 잘 뽑아서 적당히 재밌는 영화 같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기도 하다. 영화는 잔인한데도 불구하고 팝콘을 어렵지 않게 먹을 수 있을 만큼 보기 좋은 작품이다. 그러나 영화의 템포가 내내 빠르게 후다닥 진행된다는 점은 호불호가 나뉠 수 있는 한 지점이다. 보면 좀 생략되어 있는 부분도 많고 불필요하게 고어한 느낌도 없지 않아 있다.
또 캐릭터들을 사용하는 방식이 살짝 전형적이라는 느낌은 좀 아쉽다. 아이디어가 창의적이었던 것은 맞다. <조커>를 통해 악인의 발생을 탐구해 현대사회를 관통하는 문제점을 제시했던 것과 유사하게 <렌필드>를 통해 자아 찾기의 의의를 조명한 것이다. 그러나 <렌필드>는 이 영화가 품고 있는 메시지만을 표현하기 위해 공장에서 찍은 듯한 느낌이 드는 감이 있다. 왜? 인물들이 다 배우의 이미지에 어느 정도는 의존한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글을 쓰는 시점에서 드라큘라에게 인상 깊던 장면은 있어도 렌필드와 레베카에게 인상 깊던 장면이 뭘까하면 생각이 안 난다. 심지어 이 글을 쓰면서도 아콰피나가 맡은 역을 검색했으니 말이다. 이런 공산품적인 특성은 영화의 후반부 때문에 더 강하게 느껴지는 것도 어느 정도 있다. 편의적인 엔딩인 셈이다. 굳이? 싶은 것도 맞지만 영화에서 일어나지 않아도 될 일을 클리셰에 기대느라 불필요하게 사건을 벌였다는 것이 아쉽다. 영화라는 예술의 한 장르에서 엔딩은 당연히 중요하다. 그런데 엔딩을 너무 상투적으로 만드니 ‘안 그래도 뻔한’ 영화가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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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 태어나지 않아도 괜찮은 세상이 오길
* <괴물>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괴물 (2023)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출연: 안도 사쿠라, 나가야마 에이타, 쿠로가와 소야, 히이라기 히나타, 다나카 유코
장르: 드라마, 스릴러
상영 시간: 127분
개봉일: 2023.11.29
"돼지 뇌를 이식한 인간은 인간일까? 돼지일까?"
'미나토(쿠로가와 소야)'는 동네 걸스 바 건물이 화재로 활활 불타는 장면을 엄마 '사오리(안도 사쿠라)'와 함께 뜬금없는 질문을 내뱉는다. 엄마는 아들이 기이한 질문을 하게 된 저의나 아이의 생각보다 이런 말을 어디서 듣고 왔는지가 더 궁금하다. 학교에서 배웠다는 미나토의 대답. 사오리는 요즘 학교는 별 걸 다 가르친다는 정도로만 생각하고 만다.
그 물음은 무언가 나쁜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징후였을까. 어느 날부터 아들 미나토의 행동이 조금씩 이상해지기 시작한다. 상처가 난 채로 집에 돌아오기도 하고, 물통에는 새까만 흙이 담겨 있을 때도 있고, 집에서 가위로 머리카락을 자르기까지 한다. 미나토는 번번이 핑계를 대며 상황을 무마시키지만, 결국 엄마는 아들의 학교에서 벌어진 진실을 직면하게 된다. 돼지 뇌를 이식한 인간이라는 폭언을 듣고, 교사에게 폭행까지 당한 아이가 바로 자신의 하나 뿐인 아들이었다는 것을. 남편과 일찍 사별하고, 홀로 세탁소 일을 하며 미나토를 키우던 싱글맘 사오리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억누르며 곧장 학교로 향한다.
미나토의 세계는 생각보다 훨씬 더 뒤틀려 있었다. 아들에게 손찌검을 한 젊은 남자 교사 '호리(나가야마 에이타)'는 피해 아동의 학부모를 마주하고도 뉘우치는 기색이 전혀 없다. 남편의 실수로 손녀를 잃었다는 교장은 학교에서 벌어진 사건에 관심조차 보이지 않고, 마치 자동응답기처럼 짜여진 각본을 감정 없이 읊을 뿐이다. 왜 아이에게 폭언을 했냐는 사오리의 다그침을 무시하듯 과자나 씹어대는 호리 선생의 태도는 뻔뻔하기 그지 없고,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대화를 거부하는 간부 교사들은 분노 유발자나 다름 없다.
감독이 나타내고자 하는 괴물은 이렇게 무책임하고 비겁한 어른들이었던 것일까? 사오리의 관점에서 진행되는 전반부는 마치 호리 선생과 그를 비호하는 학교의 교사들을 두고 '괴물'이라는 프레임을 씌우려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려고 할 즈음, 극의 시선은 사오리가 아닌 다른 인물으로 자연스럽게 뒤바뀌며 차마 이해할 수 없었던 그들의 행동을 조금씩 이해하게끔 만든다. 호색한에 파렴치한일 줄만 알았던 '호리'는 사실 아이들에게 따뜻하게 대할 줄 아는 신임 교사였고, 퇴근 후에도 학생들의 일을 걱정할 정도로 어른으로서의 책임감이 강했다. 하지만 겹겹이 쌓여버린 여러 오해가 그를 빠져나올 수 없는 구렁텅이로 내몰았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모두가 그를 괴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인생이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데는 '미나토'의 거짓 진술이 결정적이었다. 학생을 상대로 어떠한 폭언과 폭행도 일삼지 않았던 그를 왜 가해자로 낙인찍어야만 했을까. 자신을 비난하는 미나토의 엄마 앞에 앉아 할 말은 많지만, 차마 할 수 없었던 호리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게 되면서 모든 사태의 원흉과도 같은 미나토의 사연이 궁금해졌다. 물론 극의 초반부터 기행을 일삼던 미나토의 이야기는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궁금했지만, 그 호기심이 극에 달했을 때 비로소 미나토의 진짜 속마음이 펼쳐진다.
미나토는 왜 그랬을까. 극이 미나토의 시선으로 진행되기 시작하면서 이야기의 실마리는 전부 풀린다. 미나토에겐 쉽게 수용할 수 없지만, 지켜주고 싶은 소중한 마음 하나가 생겼다. 그의 마음은 동급생인 '요리(히이라기 히나타)'에게로 향했다. 요리는 남자답지 못하다는 이유로 같은 반 남자애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가정에서는 폭력적인 아버지로부터 학대를 받는다. 돼지의 뇌를 이식한 인간, 즉 '괴물'은 요리의 친부가 아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스스로를 괴물이라고 생각하는 천진난만한 아이. 미나토는 그런 '요리'에게 자꾸만 관심이 가고, 그 감정은 열두 살 소년이 감당하기 어려운 혼돈으로 변모한다.
“저도 잘은 모르겠지만 좋아하는 애가 있어요.
그걸 말할 수 없어서 거짓말을 했어요.
내가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게 들통날까봐 말할 수가 없었어요.”
자신의 마음을 깨달은 미나토는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요리와 같은 취급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학교폭력을 모른 체 해야 했다. 그 마음은 자신을 홀로 힘겹게 키우는 엄마에게 들켜서도 안 됐다.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사는 아들의 미래를 기대하는 엄마 앞에서 괴물 같은 자신의 모습을 꺼내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을 테니까. 그렇게 요리와 엮인 사건들을 설명하지 않기 위해서는 적당한 핑곗거리가 필요했다. 그래서 미나토는 거짓말을 하며 호리 선생을 괴물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교장 선생님 앞에서 덤덤하게 속마음을 고백하는 미나토를 보면, 거짓말로 여러 사람을 곤혹에 빠뜨린 그의 행동을 무작정 비난할 수가 없게 된다. 호리 선생 또한 아이들의 이면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고 미나토를 오해하지 않았던가. 그 때문에 학교를 수차례 들락거리게 된 엄마 또한 악의 없이 뱉은 말이 아이의 여린 마음을 짓밟아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나.
누구든 괴물이 될 수 있고, 그 누구도 괴물이라 불려서는 안됐다. 그것은 단지 관점의 차이일 뿐이었다. 그만큼 사회가 만든 편견과 단편적인 외양만을 보고 이면을 판단하려는 사람들의 경솔하고 오만한 태도가 얼마나 위험하고 무서운 지를 일깨운다. 극이 진행되는 내내 관객인 우리도 어떤 인물이 과연 괴물인 지를 찾게 되지 않던가. 극중 한번이라도 괴물로 인식되었던 캐릭터들 모두 그들을 감싸고 있던 껍데기를 한 꺼풀 벗기기만 하면 선한 면도 존재하고, 각자의 삶에서 누군가에게 소중한 존재로 여겨지고 있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어떠한 관점에서 그 캐릭터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괴물이 될 수도 있었을 뿐이다. 인위적인 장치 없이 자연스럽게 여러 인물의 시각에서 극을 진행하는 연출은 이러한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아주 탁월했다. 이러한 전개 때문에 나도 모르게 괴물 찾기에 혈안이 되고 말았지만, 그로 인해 후반부 극의 메시지가 주는 충격은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애초에 누군가의 이면을 멋대로 생각하려 하지 않은 채 인물 한 명 한 명을 대하려고 했다면, 특정 캐릭터를 괴물일 것이라고 속단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선생님, 교장, 엄마, 남자 등 각 인물들을 지칭하는 수식어를 모두 떼어 놓고 본다면 이들은 모두 그저 소중한 하나의 개인이었을 뿐인데. 감독이 이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생각해본다면, 비록 자신의 미숙함이나 잠깐의 실수로 인해 '괴물'로 불릴 상황에 처했다 할지라도 이에 무력화되지 말고 나만의 모습을 잃지 말자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교사다움을 요구 받던 호리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미나토를 찾아가는 것처럼. 미나토가 요리에게 솔직해지는 것처럼. 학교를 지켜야 하는 본분에 충실했던 교장이 미나토에게 진실을 고백하는 것처럼. 학생다움, 남자다움, 부모다움, 교사다움 등 사회로부터 요구받는 나의 모습에 스스로를 빼앗기지 말고 나만의 모습을 아껴주자는 게 아닐까.
극의 결말부, 소용돌이 같던 태풍이 지나가고 맑게 갠 세상 밖으로 나온 미나토와 요리는 이렇게 말한다. 사회에 치이고, 온갖 풍파에 지쳐 나만의 모습을 지켜내는 데 실패한 어른들과 달리 이 아이들(혹은 이 아이들과 같은 후세의 모든 어린 아이들)만큼은 너희들의 행복을 위해 다시 태어날 필요도,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할 필요도 없다는 의미에서 이러한 결말을 택한 게 아닐까 싶다. 있는 그대로의 소중한 나 자신을 절대 잃지 말라는 뜻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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