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3-05-10 20:38:08
컴백이 아냐 떠난 적 없으니까
영화 <아기공룡 둘리 : 얼음별 대모험 리마스터링> 리뷰
둘리가 돌아왔다.
아기공룡 둘리의 유일한 극장판, <아기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이 4K 리마스터링 작업을 거쳐 재개봉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마음에 떠올랐던 문장이다. 그러나 정작 극장에서 둘리를 만난 순간, 마음속 문장을 수정했다. 컴백이 아냐 떠난 적 없으니까! 하는 블랙핑크의 노래 가사로.
다시 보니 명확히 알겠다. 둘리는 언제나 우리의 친구였다는 거. 그리고 둘리는 어른 되어 보면 더 재미있다는 거.
<아기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은 1996년 개봉 작이다. 시골 마을의 미취학 아동이었던 나는 1996년 이후의 그 어느 날, 노란색 비디오로 이 영화를 처음 접했다. 그리고 질리도록 돌려 보았다. 텔레비전에서 해주는 둘리도 보고, 비디오도 보고, 딱히 둘리를 되게 좋아한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일상에는 둘리가 가득했다. 12색 둘리 물감이나 24색 둘리 크레파스, 필통 같은 데에.
학년이 올라가고 머리가 굵어지면서 둘리는 어쩐지 촌스럽게 느껴졌다. 크레파스도 필통도. 사실 내 그림 실력에는 딱 참했던 12색 둘리 물감 대신, 나도 뭔가 좀 더 멋지게 생긴 전문가용 튜브 물감 쓸래. 둘리보다는 당시 유행하던 일본 애니메이션이 좀 더 청소년에게 어울리는 것 같아. 그렇게 한동안 둘리를 잊었다. 귀여운 비눗방울 노래도. 좋아했던 색감의 그림도. 특히 볼 때마다 '작화를 간단히 했는데 색감만으로 저렇게 맛있어 보일 수 있나?' 신기해서 유난히 좋아했던 둘리 특유의 라면 그림까지.
1억 년 전 빙하는 다시 녹고, 둘리는 더 선명한 색채를 덧입고 우리 곁에 돌아왔다. 나도, 나를 둘러싼 세상도 달라졌다. 너무 어린아이 같다고 싫어했던 크레파스는 다시 비슷한 느낌의 오일 파스텔로 유행하고, 지금의 나는 둘리 굿즈 내준다면 냉큼 사러 갈 기세. 그래 우리에겐 노는 게 제일 좋은 뽀로로 이전에 둘리가 있었지. 이거 잘 돼서 둘리도 시즌제로 뽑아줘요. 짱구나 코난처럼 영영 다 해먹자. 그날을 기다리는 동안, 둘리의 매력 포인트를 짚어본다.
첫 번째, 어른의 눈으로 보니 더 매력적인 둘리의 모험
둘리의 모험은 당시 어린 눈에 너무 참신했다. 미래로든 과거로든 어디로든 갈 수 있는 타임코스모스도 신기하지만 그걸 타고 간 우주에서 버스 정류장이나 공중전화를 보는 것이 더 신기한 기분이었다. 익숙한 것들과 낯선 것들이 뒤섞여 더 독특하고 흥미로운 세계를 만들어냈달까. 우주해충이나 가시고기도 임팩트 있는 캐릭터라 머릿속에 오래 남았다. 1996년 작품인데 지금 어른이 되어 보아도 여전히 흥미진진하고, 불편하지 않고, 유쾌하고 다정하다. 오히려 어렸을 때보다 어른의 눈으로 보니 더 재미있었다.
인터넷에서 가끔 단편적인 기억만 가지고 둘리와 친구들을 민폐 취급하는 글이 많았는데, 막상 보니 둘리와 친구들은 그런 말을 듣기엔 매우 현실적인 시각을 가진 어린이들이었다. 둘리가 저런 말도 할 줄 아는 애였구나... 둘리와 친구들은 아이의 순수함과 호기심을 가졌으면서도 묘하게 쌍문동에 거주하는 현대 서울 사람의 시각을 갖고 있었다. 이번 재개봉은 8090 서울을 사랑스러운 감각으로 채색한 배경 위로 몽글몽글 떠오를 추억의 재현에 그치지 않는다.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나는 둘리는 훨씬 더 매력적이다. 그 이유는 아무래도 역시...
두 번째, 별사탕처럼 통통 튀는 캐릭터 케미스트리
고길동 아저씨도 이제 희대의 빌런이라는 오명을 벗은 것 같지만, 둘리 등장인물들은 잊어버릴 만하면 한 번씩 '진상인지 아닌지' 평가받는 것 같다. 그만큼 둘리가 오래 사랑받고 모두가 아는 콘텐츠라는 뜻도 되겠지만, 그만큼 우리가 진상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을 만큼 지친 사회를 살고 있다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막상 둘리를 오랜만에 다시 펼쳐보니, 짧은 대사에서도 각자 성격이 확실하게 묻어나는 캐릭터들이 서로 톡톡 튀면서 펼치는 케미스트리가 그저 유쾌하기만 했다. 한때 얄미워 보였던 캐릭터조차 왜 이리 귀엽기만 한지. 고길동 아저씨는 '불쌍한 사람' 그 이상으로 다시 재평가되어야 한다. 그는 놀랍게도 둘리와 친구들과 수평적 관계를 맺는 어른이며, 툴툴대면서도 자식조카 밥 야무지게 챙기는 남성이었다. 게다가 왕년에 홍콩 영화 좀 본 K-소드마스터였고요.
다른 캐릭터들도 21세기의 시선으로 보니 더욱 독특한 매력이 있다. 20세기 최고의 슈퍼스타를 꿈꿨던 마이콜은... 21세기에 활동했으면 혁오와 잔나비를 이어 인디씬의 독보적 존재감을 담당했을 텐데. 유퀴즈는 못 나와도 라디오스타에서 소소한 입담을 자랑하지 않았을까. 지금이라도 재발굴해 줄 필요가 있다.
묘하게 세파에 지친 어른의 시각을 가지고 있어, 볼 때마다 아동노동 근절을 외치게 만드는 또치의 '어른식' 현명함도. 성깔 있지만 의리도 있는 도우너도. 그들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는 둘리의 MBTI는 아마도... ENFJ... 아닐까? 귀여운 아기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실 이 구역 최강자였던 희동이도. 피지컬 공격력과 상황 판단력, 어떤 상황에도 요동하지 않는 마음을 갖춘 장군감이지 민폐 빌런이 아니다. (종종 회자되는, 희동이가 둘리와 엄마의 재회를 방해하는 장면은 이 극장판 내용이 아니다. 그러니 마음 편히 보시길.)
세 번째, 그 시절 사랑했던 면과 오늘 새로 사랑하게 된 면
그 시절 사랑했던 성우들의 목소리를 다시 듣는 일도 즐거웠다. 박영남 성우는 짱구 이전에 둘리였고, 이선 성우는 뽀로로이기 이전에 또치였지. 성우 정미숙(희동이), 최덕희(도우너), 이인성(고길동), 홍시호(텔레비전 아나운서/간수) 등 익숙한 이름들의 노련한 연기 또한 반가웠다. 캐릭터도, 연기도, 그 둘이 어우러지는 놀라운 케미스트리도 모두- 그때는 좋았고 지금은 더 좋다.
엔딩 크레딧 영상도 아기자기 예쁜 데다가, 옆에 일러스트로 나름의 쿠키라고 할 수 있는 후일담이 펼쳐진다. 그러면서 “요리 보고~ 조리 봐도~”로 시작하는 익숙한 주제가의 2절까지 듣게 되었는데, “고향은 다르지만 모두가 한 마음”이라는 가사에... 어른은 울컥하고 말았다. 생각해 보니까 진짜 고향이 다 다르네... 둘리도 기후 난민이었네... 그런데 이 우정 너무 아름답잖아... 고길동 씨를 포함하여 둘리의 모든 친구들에게서 배울 것이 있다면 바로 이 것, 배척하지 않는 마음일 것이다. 둘리는 어린 시절의 기억만으로 막연히 생각했던 것보다도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어른이 되고 싶어 씩씩거리던 아이들이 우주로 향했듯, 아이였단 우리들도 자라 둘리에서 새로운 것들을 본다. 둘리는 떠난 적이 없었으므로 컴백할 필요도 없다. 컴백은 내 몫이었다. 어른이 되어 둘리 앞자리를 떠났던 나의 몫. 분주한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여전히 어른된 우리를 충분히 이해해 줄 만큼 다정하고 즐거운 둘리와 친구들을 만나러 가 보자.
* <아기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 리마스터링>은 5월 24일 재개봉합니다. 배경 하나까지 사랑스러운 추억 속 둘리를 극장 스크린으로 다시 만나 보세요!
**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Relative contents
-
- 자고 일어났는데 코 끝이 시큰하다. (안녕, 나의 조제)
자고 일어났는데 코 끝이 시큰하다.
안녕, 나의 조제
울고 싶다.
이 영화는 전반적으로 어두컴컴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가 잘 보지 못하는 (혹은 알고 있지만 그저 스쳐 지나가기만 하는, 혹은 보고 싶지 않아하는) 사회의 이면들을 비추며 시작된다. 걸을 수 없는 빈민층의 조제가 추운 날 자신의 다리나 다름 없는 휠체어에서 넘어졌을 때, 주위에 아무도 도움 줄 사람이 없었을 때, 얼마나 세상은 그녀에게 차가웠을까. 아니 어쩌면, 차가울 거라고 느끼는 건 관객인 나의 몫일지도. 내가 겪어 본 적 없는 불행 아니던가. 그녀의 마음은 이미 혼자인 세상 속을 유영하고 책들에게서 나온 상상의 나래 속에서 충분히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그 견고한 유리 구슬 속 세상을 깬 것은 대학생 영석이다.
조제는 말한다. 누가 뒤에서 덥석 가슴을 만지려고 해서 피하다가 넘어졌다고. 장애인 여성을 범하려는 사람들은 추잡하지만, 사회적 약자를 건드리는 악인들은 어느 사회 뒷골목에나 존재할 터. 원작인 일본판에서의 조제는 영석 역의 츠네오를 연모하던 여대생에게 외친다. '이게 그 사람을 잡는 무기 같다면 너도 차라리 다리를 분질러 버려!' 라고. 한국의 조제는 조금 다르게 자신을 지킨다. 조금 더 삐뚤어진 듯한, 조금 더 어두컴컴한 세상 속에 갇힌 듯한, 조금 더 많이 현실 보다는 허구의 세상 속에 있는 그녀다. 신체가 자유롭지 않은 사람을 대하는 시선이란, 상상할 수도 없다. 정신적으로 아픈 사람들조차 '정신과 다녀'라는 손가락질로 대하는 사람들인데, 원치 않았던 이유로 걷지 못하는 정신이 말짱하고 건강한 사람은. 어느 쪽도 불행하겠지.
(우에노 주리가 연기한 카나에가, 수경을 연기한 배우보다 좋았던 건 순전히, 그 전 부터 그녀를 좋아했기 때문일 것이다. 건강하고 잔망미 넘치지만 사랑 앞에서는 한치의 양보도 없던 그녀의 모습이, 꼭 나의 20대 모습 같아서 좋았다. 곧 죽어도 직진하던 나는 어디에 있나)
이제와 생각해 보건데 내가 조제라는 영화를 참 좋아했던 이유는 지난 찬란한 사랑의 추억 속에서, 내가 온전히 나 자신이었던 순간들을 남기고서, 그 안에서 자유롭게 고요히 살아갈 '바다'를 발견한 조제의 마지막 미소 때문이었다. 영석 역의 츠네오는 다시 만나지 못하고 안지 못할 조제를 떠올리며 울음짓지만, 좀 더 안락하고 편안한 현실로 도피했다. 조제의 세상으로 들어오려고 했던 그의 사랑은 그러나 거짓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츠네오가 조금 더 명민한 사람이었다면, 사랑이라는 감정과 조제에의 호기심어린 마음에 취해 그녀와 오랜 시간 함께 보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니까. 서로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것이, 사랑에 어떻게 금을 그어버리는지, 서서히 어떻게 두 사람 사이에 틈이 생기는지 잔잔하게, 위트있게, 아름답게 그려낸 영화여서, 참 좋았다.
나는 그래서 한국판 '조제'에서도 그런 미소와 상큼한 이별을 기대했다. 러시아산 권총보다 글렌리벳 위스키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조제는, 좀 더 천천히 말하고, 좀 더 저온으로 사랑하는 듯한 절제된 모습을 보여주고, 영화의 전반에 걸쳐 호랑이와 물고기를 만나는 과정들은 천천히 아주 느리게 간다. 밤 늦은 시간 두 사람이 데이트하는 유원지에서, 관람차에 처음 올라타는 조제는 방금 전까지 남아프리카에서 열기구를 탔다는 허영은 온데간데없고, 난생 처음 올라와 보는 상공에서 미세하게 떨며 영석에게 의지한다. 그런 그녀를 업고 관람차에서 내리려는 찰나, 직원의 실수로 문은 열리지 않고 다시 관람차는 허공으로 솟아오르며, 조제를 업어올린 영석을 바라보는 직원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었다가 멀어져간다. 관객들은 영석과 조제를 바라본다.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 직원처럼, 그랬을까. 아렸을까, 아니면 아련했을까.
(관람차를 바라보던 두 사람의 시선은 시작점 부터 좀 다르다. 출처 포토뉴스. 관람차 안에서 조제를 업은 영석의 사진은 찾을 수 없었다.)
물고기 대신 커다란 돌고래를 만나러 간 수족관에서 조제는 이별을 직관한듯 영석의 손을 잡고 '나는 괜찮아' 라는 말을 조용히 읊조린다. 둘의 대화는 많지 않다. 많을 필요가 없는 흐름이기 때문이다. 영석이 말하는 '어떻게 그래...'의 눈물은, 큰 울음보다 더 아프게 다가왔다. 한국 정서에서 더 당연하게 느껴지는, 결말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부터 한국 사회에 이렇게 냉소적이 되었을까? 나부터도 신체 부자유한 사람들에게 관심 조차 없지 않았나? 당연히 그들이 우리와 같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던 불친절한 내가 아니었나 싶다. 일본의 조제는 좀 더 생기발랄했다. 한국의 조제도 선방했다. 배우 한지민이 영석에게 말하는 대사 '독이라도 탔을까봐' 라는 말을 듣자니, 그녀가 영화를 위해 쌓아올린 그녀의 세상이 조금은 느껴졌다.
스코틀랜드에서 촬영한 듯한 상상씬은 진짜 그랬으면, 하고 바랄 정도로, 보기 좋았다. 그리고 한국판 조제의 당찬 마지막 모습도, 전혀 나쁘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 만의 방식대로 세상과 맞닥뜨리며, 영석을 만나기 전과 전혀 다른 조제의 마음으로 살아갈테니. 사랑과 성취의 경험이라는 건 그런 것 같다. 누군가를 많이 사랑했고 또 이해받고 행복했던 기억은, 내 마음 속에 고요히 작고 예쁜 성을 만들어 준다. 가끔 삶이 힘들고 지칠 때, 외로울 때, 슬며시 들여다 보고 추억할 수 있도록, 그렇게 힘을 주는 것 같다.
(한지민 인스타그램에서 나온 비하인드 컷이라고 한다. '때로는 너와 함께 아주 먼 곳까지 가고 싶었어'라던 조제의 대사가 귓가에 맴돈다.)
영화에 관한 글을 쓰는 건 거의 한 달 만인 것 같다. 그 한 달 동안 마음이 힘들었다. 내 마음을 자꾸 두드리는 사람이 있고, 나는 아직 지난 사랑과 이별이 만들어놓은 우울의 동굴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만 같고. 오늘 두 시간 정도 요가를 하면서 여전히 가슴을 펴는 동작에서는 잔기침이 나고, 눈물이 날 것만 같은 욱하는 것들이 올라왔다. 비로소 내 안의 우울감 속에 편하게 오랫동안 있었구나, 이런 생각이 들더라. 나의 견고한 세계를 부수고 다시 사랑하고 싶다. 눈이 부시도록. 마음이 터지도록. 끝을 예상하며 도망치지 않으면서, 사랑하고 싶다.
* 본 콘텐츠는 블로거 아일린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 영화 <뺑반>은 뺑소니라는 신선한 소재를 두고 거대 악을 물리치는 뻔한 이야기를 선택한 이유가 뭘까?
-
공효진과 조정석이 드라마 <질투의 화신> 이후 다시 만났다는 소식에 기대를 하며 봤었던 영화 <뺑반>. 영화 <뺑반>이 나오던 시기 이런 류의 범죄 오락 장르의 작품들이 다시 한번 붐을 일으켰던 시기였다. 하지만 모두 베테랑의 문법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어서 그렇게는 새롭지 않았던 작품이었다.
영화 <뺑반> 시놉시스경찰 내 최고 엘리트 조직 내사과 소속 경위 은시연. 조직에서 유일하게 믿고 따르는 윤과장과 함께 F1 레이서 출신의 사업가 정재철을 잡기 위해 수사망을 조여가던 시연은 무리한 강압 수사를 벌였다는 오명을 쓰고 뺑소니 전담반으로 좌천된다.
알고 보면 경찰대 수석 출신, 만삭의 리더 우계장과 차에 대한 천부적 감각을 지닌 에이스 순경 서민재. 팀원은 고작 단 두 명, 매뉴얼도 인력도 시간도 없지만 뺑소니 잡는 실력만큼은 최고인 뺑반. 계속해서 재철을 예의주시하던 시연은 뺑반이 수사 중인 미해결 뺑소니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가 재철임을 알게 된다.뺑소니 친 놈은 끝까지 쫓는 뺑반 에이스 민재와 온갖 비리를 일삼는 재철을 잡기 위해 모든 것을 건 시연. 하나의 목표를 향해 힘을 합친 그들의 팀플레이가 시작되는 가운데 방법을 가리지 않고 수사망을 빠져 나가려는 통제불능 스피드광 재철의 반격 역시 점점 과감해진다.
*본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조했습니다.
연기는 정말 잘한다...!공효진과 조정석의 만남을 기대한 이유는 질투의 화신이라는 드라마 이후 재결합이라는 기대감도 있었지만 두 배우가 어떤 캐릭터던 소화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공효진은 엘리트 의식이 있는 경찰의 모습을 너무나도 잘 표현했고, 류준열은 경험을 바탕으로 한 뺑소니를 굉장히 감각적으로 잘 잘아내는 캐릭터를 과거 사건 한 번 저지른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싱크로율이 높았다. 그리고 조정석이 맡은 망나니 재벌 2세의 역할 역시 조정석이 단정하고 깔끔한 역할만 잘 소화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말더듬이 싸이코 캐릭터도 잘 소화한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증명하고 있었다.
그런데 안타까웠던 점은 각각의 배우가 캐릭터와의 싱크로율은 높았을지 모르지만 배우들간의 합이랄까? 시너지는 전혀 나지 않았던 느낌이었다. 영화 속에서 배역으로 보이지 않고 배우로 보이다보니 연기는 참 잘한다~~는 느껴졌지만 영화 스토리 자체에 대한 공감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듯 싶다.
다 봤던 내용이다..영화 속에서 배우들이 배역으로 보이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는 아마 이미 다 다뤘던 내용이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영화 뺑반은 소재만 뺑소니일 뿐 베테랑의 내용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유아인의 망나니 역할을 지우기에는 그 아우라가 너무 강력했고, 조정석이 아무리 연기를 훌륭하게 해냈다고 하더라도 개인적으로는 베테랑의 조태오 캐릭터가 이미 각인되어 있는 터라 딱히 조정석의 재철이라는 캐릭터가 악인의 존재로 한 순간에 입력이 되지는 않았다.
이미 매운맛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그와 비슷한 강도를 전달한들 큰 자극이 없는 것처럼 이미 한 번씩 다 접해봤던 내용이어서 큰 감흥과 충격을 일으키지는 못했던 것 같다.
차라리 뺑소니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다뤘으면 좋지 않았을까?뺑반이라는 영화 제목 답게 뺑소니 사고에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다룰 것이라고 기대를 했었지만, 시놉시스부터 그런 결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뺑반에 대한 평들이 다들 클리셰 덩어리라고 하는 이유는 소재만 뺑소니를 선택해 그 차이를 뒀을 뿐 내용과 전개가 너무나도 기존의 범죄 오락 영화와 똑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라리 거대악을 물리치는 경찰들의 영웅담 이야기보다는 주변에서 너무나도 많이 일어나는 소소한 악들의 모습을 바로잡는 일반사람들의 뺑소니를 다룬 내용이었다면 적어도 클리셰 덩어리라는 비판을 면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뺑반>은 배우들의 연기력은 두말할 필요없이 너무나도 뛰어났지만 영화 자체의 스토리에는 힘이 없었던 작품이었다.
-
- '봄'같았던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
'봄'같았던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
지난 04월 03일을 마지막으로 2월 12일에 시작했던 tvN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가 방영을 끝마쳤다.
많은 사람들이 정말 좋아해주었던 드라마이고 또 응원했던 드라마이기에 마지막화 방영 이후 다양한 의견이 있는 것 같다.
정말 애정했던 드라마가 끝이나니 참 아쉽기도하지만 또 기대하는 새로운 작품들이 나오니 기대가되는 마음도 든다.
지금 이 글은 그냥 약 2달 동안 나를 웃고 울게했던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를 위해 쓴다.
드라마가 참 '봄'같았다고 표현하고 싶다. 봄의 폭신하고 기분 좋은 날씨처럼 따스하고 사랑스운 작품이었다.
때로는 추적추적 내리는 봄비처럼 쌀쌀함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최근에 봤던 작품 중 가장 봄같은 따스함을 전달해줬다.
이 드라마 자체를 참 좋아했다. '백이진'과 '나희도'를 좋아하는 것이 아닌 <스물다섯 스물하나>라는 드라마 작품 자체를 참 좋아했다.
이진과 희도의 성장을 보고 있으면 행복했고, 지웅과 유림의 풋풋함을 보면 설레었다.
승완의 무료함을 보며 공감했고, 희도 어머니의 무거운 짐을 보면 가슴 아팠다.
양찬미 코치님의 철학을 보면 감탄했고 내가 태어나기도 전 그 시대를 다루는 이 드라마의 시각이 참 아름다웠다.
사실 희도와 이진의 결별은 예견되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방영 시작 전 프리뷰를 진행하면서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각자의 유서를 보면서 '백이진'이 죽을 것이라는 예상도 한 만큼 둘의 관계가 연인으로 종지부될 것이라곤 생각치 않았다.
다만 드라마 회차가 진행되면서 너무나 아름다운 두 배우의 모습에 잠시 속아 '개연성이고 작품성이고 극본이고 다 무시하고 그냥 그렇게 둘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결말을 아쉬워 하는 것이 오히려 더 좋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이 드라마에서 이진과 희도의 만남 부터 성장까지를 모두 깊이 공감했다는 의미일테니 말이다...
개인적으로 결말은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을 보내주는 마음이 참 이해가 되었다.
다소 앞서 말했던 따스함과는 그 거리가 있었지만, 나의 응원이 상대에게 닿지 못 할 때 상대는 얼마나 미안하고
나는 얼마나 무력할지를 우리는 감히 상상할 수 없다. 드라마는 이를 이제껏 보여준 따스함이 아닌 현실적으로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둘의 이별을 이해하고 마지막 까지 첫사랑이란 단어로 추억하는 둘의 기억을 존중한다.
이진과 희도를 응원한 것이 아닌, 지웅과 유림을 응원한 것이 아니었고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를 응원했던 나에게 이 결말은 새드엔딩이 아니다.
연인이 되는 행복한 감성보다 더 큰 울림을, 개인의 성장을 보여준 이 드라마는 나에게 있어 해피엔딩이었다.
연출을 맡은 정지현, 김승호 PD님, 극본의 권도은 작가님, 촬영에 빈태환, 김우성 감독님,
미술과 음악을 담당하신 김소연, 임하영 선생님 모두 진심으로 고생하셨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역시 드라마에서 정말 많은 울림을 준 김태리, 남주혁, 김지연, 최현욱, 이주명 배우님 외 모든 배우님들께도 진심으로 고생하셨다는 말씀을 드린다.
좋은 작품과 함께할 수 있던 2022년 봄을 절대 잊지 못 할 것이다.
-
- [SIWFF 데일리] '아'들의 조우, 사랑, 일탈
*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리뷰입니다.
* 스포일러가 있으니 관람하지 않으신 분은 읽으실 때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포스터]
[감독]
니콜레트 크레비츠
[출연]
소피 로이스, 우도 키어, 밀란 헤름스
[시놉시스]
한동안 연기 활동을 하지 않은 배우 아나, 골칫덩이로 여겨지는 고아 아드리안. 서로를 만나게 된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고, 거리를 거닐며 담배를 나눠 피우는 사이로 발전한다. <와일드 Wild>(2016)로 사랑의 범위를 확장하는 시도를 했던 니콜레트 크레비츠 감독의 신작이다. (제24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
우리는 때때로 일탈을 꿈꾼다. 삶이 메마를 때, 더 이상 흐르지 않을 때. 그 옛날 세차게 흐르던 강이던 시절을 그리워하면서. <아에이오우: 사랑의 빠른 철자법>의 주인공 '아나' 역시 그러한 일탈을 꿈꾼다. 남편과 사별한 그에게 삶의 낙이라곤 찾아보기 힘들다. 직장에서는 '나이에 비해서는 매력적이나 그럼에도 한물 간 퇴물'로 취급 받고 사회는 그를 도움이 필요한 노부인으로 바라본다. 그의 젊음은 시들었고 그는 더더욱 위축되어 간다.
아나의 꿈은 한 어린 소매치기, '아드리안'과의 조우에서부터 실제가 되었다. 어수룩하게 가방을 훔쳐 달아나던 아드리안을 처음 보았을 때, 아나는 무언가 형용키 어려운 싱그러움을 느낀다. 그는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 될 수도 있었을 테지만, 운명은 지독하게도 그 두 사람을 이어주었고, 두 사람은 어느 복지국 재활 프로그램에서 재회했다.
'아'로 시작하는 이름을 가진 두 사람은 서로에게 어떠한 동질감을 느낀다. 과잉행동장애로 말을 더듬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그는 아나와 마찬가지로 이 사회의 '아웃사이더'다. 부모 자식뻘의 나이 차가 나면서도 두 사람이 서로에게 강렬하게 이끌리게 된 것은 어쩌면 이러한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드리안은 온몸으로 아나를 원하노라 표현한다. 매일 같이 그를 찾아가고, 남의 물건을 훔쳐서라도 그를 위한 선물을 마련한다. 그리고 아나는 소외된 소년인 아드리안에게 어른으로서가 아니라, 동등한 사람으로서, 같은 눈높이에서 조언한다. 그는 말한다. 잘 안되면 어떠냐고, 네가 잘하는 다른 걸 해보라고. 각자의 방식으로 고여만 있던 서로의 삶을 흐르게 한 것이다. 새로운 세계로의 길을 열어준 것이다.
영화에서는 '아'는 막을 수 없는 소리, 항상 뻗어나가는 소리이다.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모르던 것을 깨달을 때, 감탄할 때, 오르가슴을 느낄 때... ... 그 모든 순간, 가장 먼저 내뱉는 소리가 바로 '아'라는 것이다. 아나와 아드리안, '아'로 이름이 시작하는 두 사람은 어쩌면 서로에게 이러한 '처음' 혹은 '깨달음'을 선사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비록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만한 방식일지언정, 서로에게는 각별하다. 그들은 그토록 꿈꾸던 일탈이라는 과업을 완수했으므로.
사회적 관습에 익숙해진 우리의 시선으로 보기에는, 나이든 여자와 도벽이 있는 소년의 결합은 그다지 도덕적이지 않아 보인다. 그들은 숱하게 위법을 저지르고, 그로 말미암아 형사에게 쫒기기까지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 나름대로의 해피엔딩을 맞이하면서.
소위 말하는 '유교걸(유교 사상에 찌든 여자)'인 필자로서는 이들의 일탈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 모든 부도덕함을 기꺼이 무릅쓰고 마침내 서로에게로 가 닿는다. 어째서일까?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기존의 고루하고 메마른 일상에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싶어서는 아니었을까? 혹은 우리가 꿈꾸는 어떤 판타지를 스크린 너머에서 재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이 영화의 해석은 관객이 생각하기에 달려있겠지만.
'아에이오우-사랑의 빠른 철자법', 22.08.26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08/25(목) - 09/01(목)
-
- 한나 아렌트가 자랑스럽게 생각할 '존 오브 인터레스트'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강력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독일인 부부 루돌프 회스(크리스티안 프리에델)와 헤트비히 헤스(산드라 휠러)다. 세계 2차 대전 중이다. 일에 충실하는 루돌프 회스. 아예 집 옆에 일터가 있을 정도로 일에 진심이다. 조용한 일상. 아내와 귀여운 아이들과 함께 사니 두려울 것이 없다. 다만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있을 뿐이다. 사는 집 옆에 있는 것이 아우슈비츠 수용소고, 루돌프는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임무를 받았다는 것이다.
우선 이 영화를 보고 가장 먼저 생각난 건 가까스로 다 읽은 한나 아렌트의 책 두 권이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 보면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개념 ‘악의 평범성’에 대해 손쉽게 접할 수 있다. ‘악의 평범성’은 평범한 사람에게도 누구나 악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기도 하지만 더 본질적인 함의를 품고 있다. 바로 누구나 악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가 중요한데, 생각하거나 관심 갖지 않고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다 보면 악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그녀가 제시한 ‘악의 평범성’이다. 한나 아렌트는 이 성격을 설명하기 위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 한 남자를 조명한다. 바로 아돌프 아이히만이다. 아이히만은 재판 중에서 당당하게 “나는 조직이 시키는 일을 했을 뿐”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 남자의 궤변에 격분한다. 하지만 서서히 관찰하면 관찰할수록 아이히만이 우리 평범한 사람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발상의 전환이 일어난 한나 아렌트. 한나 아렌트는 이 아이히만의 모습을 포착하며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타인의 입장에 대한 무사유(Thougtlessness) 하나만으로도 평범한 직장인이 역사에 남는 전쟁범죄자가 된 것이다.
이 ‘악의 평범성’을 제시한 것은 후대에 엄청난 파급력을 낳는다. 당연하다. 원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잖아? 이긴 자들은 승자의 입장에서 상대방, 그러니까 악의 근원을 “이 집단이 이래서 문제야!”로 퉁칠 수 있다. 아니면 인간이란 원래 그런 존재라고 규정하면 쉽다. 잔다르크가 마녀로 지목당해 화형 당하는 과정을 생각해 보면 종교라는 잣대가 명확하다. 또 서양의 기독교나 동양의 맹자가 인간에겐 원죄/악한 본성이 있다고 해석한 것도 악이라는 개념이 특정한 상황 하에 만들어진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리고 그게 되게 대단한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 인류 역사상 히틀러 같은 존재는 흔하지 않다. 이런 측면을 고려해 보면 악은 특정한 무언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한나 아렌트는 이를 전적으로 거부한다. 특정한 무언가가 있기에 대단하다던가 굉장히 특이한 게 아니다. 그냥 전적으로 평범한 사람일 뿐, 생각 없이 산 것의 총합체라고 정의한 것이다. 물론 한나 아렌트 이전의 역사가들이 악에 대해 이렇게 규명한 것은 나름대로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도 그 악의 형태가 구현되고 있다. 가령 영화에서 온갖 비명소리가 들리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는 회스 부부의 모습은 분명한 악이다. 아니면 유대인의 코트를 빼앗아 입는 헤트비히의 모습 역시 분명한 악이다. 하지만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무사유’의 과정을 두 측면에서 보여준다. 어떻게?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아이히만이 보여주듯, 조직에 흘러가는 남자(루돌프)와 타인에게 무관심한 여자(헤르비히)를 통해서. 또 <인간의 조건>에서 한나 아렌트가 역설하듯 인간과 인간사이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을 강조한 방식을 그대로 계승하면서다.
가장 먼저 탐구해야 할 인물은 루돌프 회스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루돌프 회스가 조직 내에 꽉 박혀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영화 연출을 통해 보여준다. 이 연출은 꼭 필요했다. 왜? 루돌프 회스가 실존인물이기 때문에.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역사적인 상황과 결부시켜 강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래야 이 영화가 비판하고자 하는 악의 속성이 더 설득력을 얻는다. 영화는 이를 위해 건조하게 그의 직장인으로서의 일상을 보여준다. 가령 외부 협력업체가 와서 회스에게 뭔가를 설명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 장면 속 두 남자는 그냥 대표자들끼리의 대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 장면을 기점으로 영화는 그가 직장인으로 얼마나 자기 하는 일에 투신하는지를 묘사한다. 좀 필요 없어 보이는 전화 장면이 여러 번 들어간 이유는 여기에 있다. 여기에 특별한 설정이 영화에서 빛을 발한다. 아우슈비츠 옆에 사무실이 있고 거기서 산다는 특징은 가정적이면서도 열심히 일하는 루돌프 회스의 모습을 보여주기 쉽다. 열심히 일하고 난 다음 아이들에게 동화를 읽어주는 아버지 회스의 모습은 지극히 평범한 악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루돌프라는 인물에게 가장 첫 번째로 수행해야 하는 과제는 직장인으로서의 업무나 가정의 안녕이 아니다. 나치라는 조직이다. 나치의 일원으로서 소속됐다는 한 가지 사실이 이 사람 인생에서 제일 중요하다. 왜? 초반부터 영화가 이 인물의 내면을 이미지로 강조하고 있다. 루돌프 회스가 누군가에게 축하받는다. 그런데 그 축하를 해주는 사람들이 나치 조직원들이다. 얼핏 보면 회색 옷 입은 사람이 떼거지로 몰려들어 누가 누구인지 구분이 안 된다(심지어 배경도 회색 저택이다). 영화가 고의적으로 카메라를 멀리 떨어트려서 누가 루돌프 회스인지 알 수 없게끔 묘사하는 것이다. 축하받는 사람과 하는 대상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은 명백하게 수신자와 발신자가 정해진 행동을 흐려놓겠다는 감독의 의도를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개인보다 조직을 강조한 것이다.
또 이 인물이 직장인으로서의 활동반경과 쉴 수 있는 집의 바운더리가 그렇게 선명하지 않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옆에 산다는 것도 이상한데 거기서 일을 한다는 건 더 기괴하다. 자연인으로서의 모습이 조직에 잡아먹힌 루돌프의 모습을 보여주는 설정이 되는 것이다. 영화 후반부에 루돌프가 전출을 가니 마니 하는 설정이 들어간 것도 흥미롭다. 사실 이 에피소드 자체가 굳이 영화에서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안 간 거라서 굳이 알 필요도 없고, 갈등이 격정적이지도 않다. 영화의 기-승-전-결이 이 전출 여부를 두고 쌓아 올린, 소위 ‘빌드업’ 한 것도 아니라 맥 빠지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 일이 이 가족에게 끼친 영향이 중요하다. 조직이 루돌프 회스의 가족공동체를 해체시킬 정도로 주인공(회스)에게 절대적이었다는 의미다. 나치와 히틀러의 말이라면 뭐든 다 줄 수 있는 사람이다. 엔딩신에서 헛구역질이 날 정도로 내면의 무언가를 갖고 있지만 결국 어둠 속으로 걸어가는 그의 모습 역시 인물의 이런 부분을 설명하고 있다. 그의 무의식이 영화의 플롯에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이렇게 루돌프의 내면을 보여주는 연출은 후반부에서 다시 반복된다. 초반 루돌프가 축하받는 장면과 후반부 나치 조직원들끼리 회의하는 장면은 수미상관처럼 반복된 것 같다. 왜? 회의를 주체하는 장면을 가장 첫 신에선 보여주지 않는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는 부감 숏으로 화자를 숨긴 것이다. 이다음 장면을 보면 영화 안의 회의 주제에는 회스가 제시한 근거가 중요하게 설정되어 있다. 다음 장면은 회스가 자기 의견을 역설하는 장면을 넣으면서 회의의 끝을 분명하게 보여주지도 않는다. 루돌프 회스가 회의에서 중요하다는 것만 묘사하고 그 안의 내용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루돌프 회스가 이 당시 나치라는 조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기 때문에도 근거를 찾을 수 있으나, 영화 초반부를 생각해 보면 수미상관처럼 조직 안의 루돌프 회스를 강조하기 위함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단지 사운드의 힘만 믿은 게 아닌 비주얼의 힘이 조직에 휩쓸리는 루돌프의 모습을 보여줬다. 악의 평범성을 드러내는 연출인 것이다.
두 번째로 이야기할 수 있는 인물은 루돌프의 아내 헤트비히 회스다. 이 인물이 이 영화에 차지하는 물리적 비중은 굉장히 많다. 하지만 그 비중치고 영화 안에서 유효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인물은 아니다. 오히려 이 인물은 플롯 전면이 아닌 영화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이야기를 담당한 캐릭터처럼 보인다. 근거는 간단하다. “내가 이 집을 가지려고 17년 동안 고민해 왔다!”라는 대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강조하고 싶은 것. 이 인물의 동선이다. 이 인물은 집 밖에 멀리 나가지 않는다. 루돌프가 타 지역으로 나가거나 헤트비히 어머니가 그녀의 집으로 도착한 것과는 대비된다. 전업 가정주부인 것으로 보이는 헤트비히. 남편 루돌프에게 ‘아우슈비츠의 여왕’이라는 말을 듣는다. 후반부 루돌프와의 갈등에서도 이 사람은 집 밖에 나가기 싫다. 남편을 속여서라도, 유대인들 고용해서라도 만든 집이니 만큼 애착이 강한 것이다. 이렇게 집에 박혀있는 헤트비히. ‘아우슈비츠의 여왕’이면 자기 집 안에 일어나는 것들에 대해 능통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이 영화가 이 인물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인물은 집안사정에 그렇게 밝은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관심이 짧은 것처럼 느껴진다. 첫 번째 근거. 이 사람이 집 안에 일어나는 상황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증거는 대놓고 드러난다. 이 영화의 사운드 지분 중 크다고 볼 수 있는 아기의 울음소리도 그 예시 중 하나다. 그냥 ‘왜 이렇게 울까?’ 한 마디면 엄마로서의 역할이 끝나나? 후반부에 남자 형제들끼리 비닐하우스 같은 곳에서 다투다 형이 동생을 장난으로 가두는 상황이 벌어진다. 여기서 동생이 울고불고 소리 지르지만 어머니 헤트비히는 알아채지 못한다. 중후반부 폴란드 소녀가 사과를 수용소 근처에 묻는 장면이 있다. 그때도 이 헤트비히는 인기척을 느끼지만 구체적으로 알려고 하지 않는다. 강가에 재가 떠다니는 것도 헤트비히가 아이들을 씻는 장면은 있지만 원인을 예방한 다 던가 하는 진단이 없다. 어머니로서의 역할에 취해있기만 하지 실질적으로 ‘일 잘한다’라는 말을 듣기엔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영화 후반부에 묘사되는 루돌프 회스의 불륜은 이 인물(헤트비히)의 무능력함을 암시하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어디 다른 곳에서 바람을 피우는 것이 아니다. 루돌프의 집 근처에 있는 사무실에서 불륜이 이어진다. 루돌프의 아이가 “아빠 땀 냄새나!”라고 말할 정도로 이 남자의 불륜은 이 가정과 분리된 것이 아니다. 철저하게 남편이 속였기 때문에 불륜을 저지른 것 아니냐?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루돌프 회스는 실제로도 가정적이지 않은 인간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헤트비히 의 대사 “오래전에 (전출이) 결정 난 것으로 보이는데 왜 말하지 않았냐”라는 말은 과연 그녀가 남편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생각하게 만든다. 이 집안이 화기애애하다는 시각적인 만족감에 도취되어 가정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자각하지 못한다는 건 그녀의 분명한 패착이다. 마치 나치 독일과 히틀러가 집권하고 난 다음의 모습이 1차 대전 전후의 독일을 재건하고 있다고 믿었을 독일인들처럼 말이다. 글쓴이가 헤트비히가 2차 대전 당시의 독일인들을 비유하고 있다는 건 여기에서 온다. 나의 행동이 독일의 재건을 위해서라는 자기기만, 가정에 착실한 어머니라는 자기기만이 나치당의 지지자들과 헤트비히에 중요하게 작동하는 것이다. 이 비유에 의미를 부여하니 영화 안의 두 대사가 더 와닿는다. 유대인 학살이 기본적으로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은 채, “너희들(유대인)은 나 덕에 편하게 사는 거야”라며 남편이 널 재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고 폭언을 하는 것. 그녀가 가진 모순을 이 영화가 폭넓게 묘사하는 것이다. 또 후반부에 루돌프가 헤르비히에게 “우리의 성과”라는 식으로 “우리”를 강조하는 것이 흥미롭다. 당연하다. 자국민들을 속인 나치의 군인들도 당연히 문제가 있지만, 심정적 동조자로서 학살에 ‘무관심’과 ‘자기기만’으로 참여한 당시 독일인들도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냥 단지 일상만 보여주는 줄 알았는데 그 이면에 담긴 의미가 무시무시한 좋은 각본의 힘이다.
두 캐릭터 말고 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 중요한 것은 카메라와 사운드다. 우선 카메라. 이 영화가 카메라로 일상을 담는 방식이 특별하다. 그냥 일상적인 걸 담으면 모르겠는데 어디에서 훔쳐보는 것처럼 화면을 담았다. 실제로 검색해 보면 어렵지 않게 이 영화의 촬영 기법을 찾을 수 있다. 세트장을 만들고 카메라를 많이 설치한다. 대신 카메라가 어디에 있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이건 중요하다. 억지로 드라마를 배격했기 때문이다. 카메라가 대놓고 있다. 그럼 그건 대놓고 영화다. 배우들이 서로 얼굴 보면서 연기한다. 감정의 이입을 유발하고 곡진한 무언가를 탐구한다는 것. 이건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에 대치되는 부분이다. 관심을 떼는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의 응집성을 위해서라도 감정이입을 유발하면 하고 싶은 걸 보여주기 어렵다. ‘얘 나쁘지?’가 되는 순간, 인물의 표정이 보이는 순간 비명의 의미가 옅어진다. 영화가 그은 선을 스스로 넘는 것이다. 촬영 구도만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명확하게 만드는 연출이었다.
하지만 이 카메라를 활용한 연출 중에 정말 중요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시각적인 것으로 사방이 막힌 이미지를 강조한 것이다. 모든 샷에서 벽이 강조되는 건 아니다. 그런데 벽이 필요하지 않은 장면에서 굳이 벽을 보여준다는 게 핵심이다. 중후반부에 어떤 남자가 벽 너머의 풀숲에 어떤 것을 뿌리는 장면이 있다. 일반적인 카메라워킹이라면 벽을 등지고 찍는 게 맞다. 그런데 굳이 이 장면에서 벽과 남자, 풀숲이 같이 등장한다. 벽을 보여주고 싶었던 감독의 의도가 읽힌다. 더 나아가 청각적인 요소는 벽과 충돌하며 영화에 균열을 낸다. 남자가 숲에 무언가를 뿌리는 장면에서 들리는 소리. 어떤 남자가 비명인지 절규인지 질문인지 모를 소리를 지른다. 곧바로 총성이 들린다. 카메라는 여기서 총에 맞는 사람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벽만 보여준다. 마치 소리가 벽에 부딪힌 것처럼. 그 대신 관객들은 상상력이라는 게 있어서 벽과 소리만 보여줘도 이 상황이 어떤 일인지 대충 예상할 수 있다. 굳이 이렇게까지 사운드를 강조하는 이유? 아니 그 이전에 사운드를 어떻게 강조했을까? 벽의 이미지를 강하게 보여줘서 이 영화 안에 쳐져있는 벽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실 이 영화를 본 사람에게 벽의 의미는 간단하다. 무관심이라는 벽이다. 계속해서 안에 있는 야채니 꽃이니 라일락이니 수영장이니 하는 것들을 보여주지만 무관심이라는 벽이 인물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벽의 의미는 앞에서 언급한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닿고 있다. 악의 평범성을 이 영화가 사운드와 카메라의 존재로 보여준 것이다. 이 벽의 존재 덕에 카메라는 무엇을 찍을지에 대한 고민도 끝냈다. 분명한 악에 대해서는 카메라로 찍고 희생자들은 사운드를 통해 표현한다. 이 영화의 인물들은 악에 익숙한 악인이 되는 셈이다. 이 맥락에서 열 카메라로 표현한 소녀를 설명할 수 있다. 악이 아닌 무언가의 존재, 그러니까 유대인에게 사과를 주는 따뜻한 마음이 이 영화의 카메라에 담기지 못한 선의가 된다. 사운드만 부각되는 것이 아닌 촬영에 의한 연출이 영화의 주제를 강조했다.
이 영화의 사운드는 영화의 핵심을 담는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단란한 가족들의 일상 속 비명이 틈입한다. 이 비명이 가지는 임팩트는 영화를 본 모든 사람이 다 같은 의견을 말할 것 같다. 비명도 비명 나름이다. 어떻게 기괴한 소리만 다 골라서 삽입했는지 이런 요소들도 다 감독의 감각이 크게 주요한 것으로 보인다. 전작 <언더 더 스킨>에서 외계인(스칼렛 요한슨)이 지구인들과의 교감을 표현하는 방식이 이 영화에서 사운드로 치환된 셈이다. 이 선택은 아주 좋았다. 학살의 진상을 원초적인 방식으로 다가가게 한다. 원초적인 기억으로 남았다? 우리 일상 속에서 비슷한 것만 보면 생각난다는 의미다. 이 의미는 중요하다. <헤어질 결심>에서 감정적인 임팩트로 관객에게 큰 효과를 낸 것과는 다르게 신기한 방식으로 관객에게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청각을 아주 잘 활용했다. 이 영화 예술의 근본에는 무성영화라는 게 있다. 이 말은 즉슨 영화라는 예술 자체가 시각적인 걸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인지심리학에서 인류는 시각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연구도 있다. 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영화라는 예술이 가진 두 특징을 과감하게 무시하며 청각적인 요소를 강조한다.
하지만 영화가 청각적인 것을 활용하는 방식의 화룡점정은 오프닝과 엔딩에 있다. 이 영화의 청각적인 요소에는 뭐가 담겨 있을까? 비명이다. 유대인들의 절규가 담겨있다. 오프닝을 본다. 오프닝은 검은색 화면인 채로 음악을 크게 틀어놓는다. 첫 장면부터 청각적인 것이 중요하다고 힘을 꽉 주는 것이다. 이 기점으로 영화의 청각적인 것에 대해 연이어 생각해 보면 이후에 비명소리가 들린다. 대신 시각적인 부분이 청각적인 장면과 먼저 시작하지 않는다. 그럼 비명소리가 이 이야기의 이전에 깔려있다는 의미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리고 영화의 엔딩으로 날아간다. 루돌프가 헛구역질을 한다. 현대의 박물관 노동자가 건물을 닦는다. 닦는 소리가 부스럭거린다. 그리고 다시 영화의 시점으로 돌아와 루돌프 회스가 어둠으로 걸어간다. 시점이 세계 2차 대전 한가운데로 돌아간 것이다. 그다음이 엔딩이다. 이 영화의 엔딩은 오프닝처럼 청각적인 요소만 부각한다. 영화 후반과 초반이 비명소리로 이루어져 있고 그 중간이 직선으로 흘러가는 일상이다. 이 영화는 일종의 타임라인인 것이다. 영화의 과거와 미래, 오프닝과 엔딩이 청각적인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영화 안에서 비명소리가 청각적인 요소로 강조된다는 것. 그렇다면 영화의 과거와 미래를 이 감독이 어떻게 해석했는지에 대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홀로코스트는 곧 비명과도 같았다는 의미처럼 들렸다. 악인들이 시선을 돌리지 않아 만든 비극이 홀로코스트라고 말한 셈이다.
괴물 같은 영화다. 음향, 촬영, 각본, 연출 모든 부분에서 한 부분의 극점에 다다른 능력을 보여줬다. 심지어 산드라 휠러를 위시로 한 배우들의 연기도 굉장히 뛰어나기까지 하니 무결점의 영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굳이 꼽자면 극의 재미를 부각한 영화가 아니라서 누군가는 지루하다고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위험부담(?)에도 글쓴이가 장점으로 확신하는 것이 있다. 정말 필요한 인간의 조건이 무엇인지 묻는 것이라는 점이다. 사실 이 영화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만큼 징글징글하고 강박적으로 관객에게 질문한다. 사실 이 사람들이 왜 인간 근처도 가지 못하는지는 영화가 쉽게 설명하고 있다. 이 설명하는 부분은 곧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과도 이어진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이라는 책에서 인간의 관계성에 대해 언급했다. 정치적인 행위부터 시작해 불멸하게 남는 여러 기록까지, 또 공/사적인 공간의 필요성까지 이 세상을 이루는 모든 것들이 다 함께 살아가는 것에서 온다고 역설했다. 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이 <인간의 조건>에 대한 깊은 통찰을 아주 속 깊게 우려낸 사골국처럼 느껴진다. 이 영화에서 대화하는 사소한 것들, 공간들, 하녀의 움직임부터 루돌프 회스의 동선과 공간까지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조건>의 목차처럼 느껴진다. 충격적인 영화다. <액트 오브 킬링>과 함께 과거의 비극이 단지 과거에만 국한될 것이 아닌, 날카롭고 깊은 인사이트를 보여주는 영화다.
-
- 우리 담쪽이는 5천 년을 자서 신경이 예민해
-
봉인이 풀리다
그렇게 멀지 않은 미래. 가상의 왕국 칸다크는 인터갱이라는 군사 집단이 지배하고 있었다. 폭압에 시달리는 사람들. 사사건건 검열하는 군부에 주민들은 진절머리가 났다. 이 동네는 혁명이 필요하다. 독립을 원하는 사람들. 어느 나라의 역사에서도 혁명을 꿈꾸는 사람은 있었다. 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아드리아나. 아드리아나는 팀을 이루어 전설로 전해지는 왕관을 손에 얻기 위해 모험 중이었다. 유적으로 접근하는 데 성공한 아드리아나 일행. 노력을 기울인 덕에 왕관을 손에 넣었다. 그런데 왕관을 손에 넣자마자 인터갱이 들이닥쳐 아드리아나 일행을 공격하려고 한다. 위기일발의 상황. 아드리아나는 주문으로 왕관을 통해 칸다크의 수호신 ‘테스 아담’을 소환한다.
부활한 테스 아담. 엄청난 덩치에 카리스마까지 대단했다. 겁에 질리는 인터갱 군인들. 의문의 남자에게 발포한다. 신에게 총알이 통할 리가 없다. 총알을 맨손으로 잡고 ‘하찮은 마법이다’ 조롱하는 테스 아담. 순식간에 무덤(유적) 안을 이동한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바람소리만 휙휙 날리며 가볍게 인터갱 군인들을 몰살하는 아담. 아담은 손으로 군사들을 지져버리고 있었다. 그렇게 유적 내부의 병사들을 해치우고 밖으로 나온 아담. 무덤 밖에도 인터갱 군사들이 아담을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순식간에 전부 군사들을 태워버리며 손쉽게 1대 다수 싸움을 이긴 아담. 이 테스 아담을 제지할 사람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칸다르를 죄다 부술 것 같은 테스 아담. 이 아담을 제지하기 위해 초능력자 집단 '저스티스 소사이어티'가 등장한다. 아담 일행과 저스티스 소사이어티만 대립하고 끝나면 다행일 텐데, 칸다르를 앞에 두고 거대한 빌런 집단이 이상한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 같다. 과연 테스 아담은 블랙 아담이 되어 칸다르를 지킬 수 있을까?
지지고 볶고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액션이다. 2시간가량의 영화지만 체감상 1시간 10분 정도는 액션에 비중을 둔 것 같다. 또 그 와중에 이야기 전개도 성실하다. 가령 극초반부 블랙 아담이 등장할 때 병사들을 해치우는 신을 봐도 그렇다. 아담이 샤샤샥 하는 카메라 워킹에 인물의 전지전능함이 어떤지를 삽입한다. 뿐만 아니라 이런 액션신을 쭉 하다가 이터니움으로 된 폭탄을 맞고 기절한다. 여기서 이터니움 폭탄 묘사도 극에서 어느 정도 중요하기도 하지만 전적으로 이야기를 보여주기 위해 액션을 삽입한 느낌이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먼저 깔고 액션을 삽입한 부분은 러닝타임 후반부까지 지속된다. 닥터 페이트라는 인물이 있다. 피어스 브로스넌이 맡은 역할이다. 이 인물은 이 <블랙 아담>에서 필수적으로 필요하다. 이 이유가 영화 전체적으로 주요한 터닝포인트마다 배치된다. 캐릭터가 영화 동안에 살아 숨 쉰다고 느껴진 이유가 이 좋은 설계 덕이었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호크맨이라는 캐릭터도 이 영화에서 무조건 필요하다. 영화는 무자비한 안티히어로 '블랙 아담'을 조명한다. 그 뜻은 즉 아담의 악랄함과 선함을 양가적으로 배치해야 한다는 뜻이 될 것이다. 같은 액션을 넣어도 둘 다 성립할 수 있게 배치한 각본가의 큰 그림이 돋보였다.
또 영화에서 중요한 소재는 번개와 초자연적인 현상이다. 블랙 아담이 신이기 때문에 우리가 아는 물리법칙을 무시하는 묘사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번개를 주 무기로 사용하는 블랙 아담. 이에 걸맞게 번개를 활용한 시각화가 잘 들어갔다. 영화에서 드웨인 존슨이 그렇게까지 강렬한 연기를 보여주지 않는다. 뚱한 표정으로 '나는 히어로가 아냐'라고 말하는 것이 영화의 1/2 가량을 차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기억에 블랙 아담이 남는 이때 활용했던 시각화 비주얼이 잘 뽑혔기 때문이다. 이 또 영화에서 이 히어로의 기원을 다루기도 한다. 그럼 과거의 칸다르도 나오고 그 나라를 지켜보고 있는 신(마법사)들도 제시돼야 한다. 전자 과거의 칸다르는 살짝 빛바랜 느낌으로 촬영하고, 후자 마법사들은 색마다 특이점을 부여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설득력을 갖게 만든다. 이 시각화는 후에 나오는 사이클론과 닥터 페이트에게도 강점으로 작용한다. 사실 사이클론과 스매셔는 저스티스 소사이어티에서 존재감 그렇게 안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클론 캐릭터를 활용해 형형색색 아름답게 제시한 액션은 기억에 남을 것이다.
이 인물을 활용한 시각화의 정점은 닥터 페이트다. <닥터 스트레인지 : 대혼돈의 멀티버스>에서 닥터 스트레인지를 활용하는 방식은 좀 아쉬웠다. <어벤저스 : 인피니티 워>에서 타노스와 싸우던 그 닥스는 어디로 갔을까? 이상한 음표 가지고 싸우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주인공이 닥스인데 마법사로서의 능력치는 완다에게 더 갔으니 후속작에서 주인공의 존재감을 묘사하는 것이 약했던 것이다. 이 영화에서 닥터 페이트의 마법 능력은 대단하다. 인물이랑 어울리기도 어울린데 진짜 멋있게 잘 뽑혔다. 주로 투명한 유리를 활용해서 액션 신을 보여준다. 엄청난 박력으로 히어로들을 요리하던 완다와는 다른 느낌의 마법이다. 가령 유리를 통해서 피사체가 여러 각도로 보이는 마법을 보여준다. 이 마법은 운명에 대해 이야기하는 닥터 페이트와의 캐릭터성과 어울리는 좋은 연출이었다고 생각이 든다.
이상한 캐릭터들
그렇게 눈요깃거리는 충분한 영화지만 사실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단 영화의 이야기 구성에 대해 말해 볼 수 있다. 이 영화에 모녀 두 사람이 나온다. 그중 아들이 말하는 대사 퀄리티가 아쉬웠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히어로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명대사들이 있다. <블랙 팬서>에는 '와칸다 포에버!' <캡틴 아메리카>는 'I can do this all day!'같은 것이다. 여기서 영화에서 소년이 대사를 치는 걸 보면 이 명대사 삽입을 지나치게 의식한 티가 난다. 대사가 삽입되는 방식이 좀 뜬금없기도 하고, 아들 캐릭터 자체가 이야기 전개에서 비중이 크지 않음에도 물리적인 시간이 많아 불필요하게 느껴져 이 지점이 두드러진다. 보통 이런 히어로들의 명대사들이 밈이 되어 유행이 되는 건 그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로 작동하기 때문일 것이다. 캡틴 아메리카도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 하루 종일 무엇이든 할 수도 있다! 는 걸 전달하기 위해 뱉은 말이다. 그런데 극 중에서 블랙 아담이 내내 정색하고 있어서 유머러스하지도 않고 그 말이 영화에서 중요하지도 않다. 그냥 말장난일 뿐이다. 이 심심한 표정연기는 인물 전체를 관통한다. 뭔가 입체적인 모습이 있어야 이 사람의 개성이 살아날 텐데 내내 똑같은 표정으로 같은 말만 한다. 내내 부수기만 하고 끝난다. 후반부로 간다. 이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하고, 그 이후 맨몸액션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오! WWE 전설의 경험치를 볼 수 있나? 내레이션만 기억나고 카메라를 계속 흔들어서 잘 안 보여준다. 그래서 블랙 아담이라는 캐릭터가 멋있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냥 내내 부수는 것만 보니 캐릭터의 매력을 못 느끼는 것이다. 영화에서 테스 아담이 감정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장면이 없지 않다. 충분히 나옴에도 불구하고 내내 정색한 표정으로 연기하니까 주인공이 등장하니까 1절 못하고 2,3절까지 계속되는 유머를 보는 느낌이다. 이 히어로의 철학도 맥 빠진다. 자유를 추구하는 건 좋다. 왜? 그냥 주인공이 세니까 칸다르는 자유를 찾아야 해? 단순히 자유가 왜 중요한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닌 그냥 무작정 이상만을 좇는 캐릭터가 나오니 아무것도 기억에 남지 않게 되는 것이다.
빌런 캐릭터를 설계하는 방식도 아쉬움이 있다. 전반부. 가장 첫 번째 시퀀스에서 내레이션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칸다르 왕국과 그 나라를 지켰던 수호신에 대해 쭉 전달하는 영화. 살짝 길긴 하지만 친절한 전개 덕에 이해가 어렵지는 않다. 다시 러닝타임 중반으로 지나간다. 블랙 아담이 자기 이야기를 플래시백으로 보여준다. 여기서 내레이션이 한번 더 사용된다. 중후반부쯤으로 넘어간다. 그럼 최종 흑막으로 지목된 인물이 그동안 있던 일을 쭉 설명한다. 비슷한 연출 방식이 세 번이나 쓰였다. 2시간 동안 같은 말을 세 번 하는 사람이 있으면 지루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영화는 이런 식의 연출을 세 번이나 써서 안 그래도 전체적으로 진부한 영화가 더 지루하게 느껴지게 만든다. 또 그 사실이 빌런 개인의 입장에서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중요한 사실인데 후반부 잠깐 쨘 하고 나온 부분은 아쉽다. 이걸 초반부에 제시해서 빌런 캐릭터가 갖는 긴장감을 유지하면 좋았을 걸 중반부가 넘어가고 나서야 부랴부랴 보여준다. 염소 같은 빌런 디자인만 기억이 날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몰개성한 작법으로 캐릭터를 만든 것이다. <공조 : 인터내셔날>의 진선규 캐릭터가 연기했던 빌런 역이 생각난다.
이 아쉬운 캐릭터는 피어스 브로스넌이 맡은 닥터 페이트에도 이어진다. 아마 많은 분들이 이 캐릭터를 좋아할 것으로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계획 없이 내내 부수기만 하는 블랙 아담 / 감정적인 호크맨 / 무계획으로 깔아뭉개는 아드리아나 모자 / 존재감 없는 흑막까지 내내 이성적이고 사려 깊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닥터 페이트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솔직히 닥터 페이트의 행보는 글쓴이의 예상대로 전부 흘러갔다. 더 과장해서 말하면 '닥터 페이트'라는 캐릭터만 듣고도 이 사람의 행보가 예상될 정도다. 이는 닥터 페이트가 들어간 '저스티스 소사이어티'역시 전형적으로 설정됐기 때문에 그에 대한 작용으로 이 인물이 이렇게 단조롭게 느껴졌다는 의미와도 상통한다. 닥터 스트레인지보다 마법은 멋있게 썼어도 그와 차이점을 못 느끼겠다. 이게 원작 코믹스는 닥터 페이트가 원조라고 한다. 그럼 오히려 오리지널리티를 더 살릴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전형적인 이야기 톤, 사려 깊음, 운명론이 남고 이 사람이 왜 멋있는지는 어떤 창의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냥 브로스넌이 멋있는 자세로 앉아서 중저음의 톤으로 노년의 섹시함을 드러냈던 것만 기억에 남는다. 그런데 그건 피어스 브로스넌이 멋있는 거지 닥터 페이트가 멋있는 것이 아니다.
안전한 선택지만 골랐어
이런 아쉬운 점은 영화 전반적인 연출 방식으로도 이뤄진다. 정말 과하다 싶을 정도로 반복되는 연출 방식이 있다. 바로 슬로모션이다. 이 슬로모션이 필요했을 수도 있다. 가령 사이클론의 캐릭터성을 묘사하기 위해서 인물의 동선을 꼼꼼하게 보여주고 싶었을 수도 있다. 또 블랙 아담이 광속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슬로모션 연출이 필요하다. 슬로모션을 넣어야 이 인물의 무력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떤 맥락에서는 슬로모션을 넣는 게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이는 한 1/10쯤 된다. 그렇지 않아도 될 부분에도 슬로모션이 들어가는 것은 아쉽다. 가령 사이클론에 슬로모션이 들어가는 방식을 보면 한 10번 이상은 쓰였다. 빠르게 회전해서 형형색색의 바람을 유발하는 사이클론. 여기서 사이클론이 몇 바퀴 돌고 정자세로 서는 장면이 있다. 여기서 이 정자세로 서는 자세에 슬로모션이 반복해서 쓰인다. 이거 슬로모션으로 넣을 이유가 없다. 이 행동이 서사에서 차지하는 비중 그냥 없다. 단지 멋있게 보이려고 넣은 것이다.
이 뿐일까? 전체적인 장면 구성이 기존 슈퍼히어로 영화에서 따온 듯한 기시감은 어쩔 수 없다. 이는 닥터 페이트 캐릭터의 사용법과도 이어진다. 다른 예로는 블랙 아담의 입장 변화에서 따올 수 있다. 블랙 아담의 첫 등장이 있다. 그리고 굴곡이 생긴다. 또 그 굴곡을 상회할 만큼 문제가 생겨서 다시 부활한다. 이거 <아이언맨> 시리즈에서 다 봤던 내용이다. 첩보물로 장르의 변주를 줬던 <캡틴 아메리카>나 코미디/스릴러로 장르를 병치시켰던 <앤트맨>과는 영 다른 느낌이다. 그래서 패턴이 전부 예상 가능하고 장면 구성도 거의 모든 시퀀스가 어디서 본 느낌이며 액션도 템포 조절 없이 강한 리듬으로 반복되기 때문에 중반부로 방향키를 틀면 지루해진다. 볼거리는 많은데 진부한 영화처럼 느껴지는 것이다(이 글 쓰는 것도 어려웠다. 영화를 보고 나서 '이거 다른 영화에서 봤는데'만 생각나서). 예술가적인 창의성이 안 느껴지는 느낌? 이거 DC 코믹스의 영화다. 그럼 DC 코믹스 다운 전체적인 톤이 있어야 한다. 글쓴이는 그게 멋있는 시각화와 뭔가 어두운 분위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영화에 유머(같이 느껴지는)와 모자 캐릭터 중 소년이 말하는 부분을 보면 딱히 그런 걸 노리고 만들지는 않았던 것 같다. 심지어 닥터 페이트 / 호크맨을 제외한 두 히어로는 그냥 둘이 다른 영화 찍고 있는 느낌이었다. 청춘들의 로맨스를 넣을 거면 두 히어로를 주연으로 한 다른 영화를 만드는 게 좋았을 텐데?
올해 5월 개봉했던 <닥터 스트레인지 : 대혼돈의 멀티버스>가 있다. 이 영화가 만듦새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어도 <블랙 아담>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물론 <닥스 2>도 아쉬운 점이 있다. 그런데 적어도 감독 샘 레이미의 인장과 운명론을 벗어나 미래를 개척하는 히어로의 이야기라는 주제는 기억에 남는다. 또 같은 DC 코믹스 영화인 <더 배트맨>은 이 <블랙 아담>보다 훨-씬 낫다. <더 배트맨>은 다 기억에 남는다. 반 폐인 같은 얼굴로 쓱 나타나서 악당들에게 맞기도 하고, 곤궁에 빠지기도 하지만 희망을 향해서 날아가는 브루스 웨인의 모습은 아직도 기억에 난다. 리들러나 캣우먼 같은 캐릭터도 연출에서 힘을 줬던 지점이 분명해서 이 배역들의 특장점을 글로 쓸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냥 어디서 통했던 것들만 그대로 갖고 왔다. 영화가 기억에 남아야 하는데, 드웨인 존슨과 피어스 브로스넌만 장점으로 기록될 영화가 돼버렸다.
성공적인 시행착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전체적인 이야기가 그래도 있는 편이고 몰입하기도 어렵지 않아서 친구들끼리 극장을 찾아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또 영화에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쿠키 영상이 있다. 이 히어로의 행보가 오리무중에 있었기 때문에 DC 유니버스의 팬이라면 두 사람의 대결을 기다려 왔을 것 같다. 또 DCEU가 들인 돈에 비해 영화판에서 존재감이 없다. 전체적으로 무난한 선택지만 골랐다. 이에 따른 단점이 느껴진다. 그러나 이런 시도도 있어야 더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가 2시간 동안 이 쿠키영상의 예고편이 된 건 아쉽지만 화려한 볼거리로 여러분의 시간을 불태울 건 확실하다.
-
-
-
- 영화 <레드> 메인 예고편
토코는 상류층 집안의 남편 그리고 귀여운 딸과 함께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던 어느 날 10년 만에 옛 애인인 건축가 구라타와 우연히 재회를 하고,
마음속 깊이 간직했던 복잡한 감정이 조금씩 되살아나며
무미건조했던 그녀의 일상에는 큰 변화가 찾아온다.
-
- 영화 <파묘> 1차 예고편
"뭐가 나왔다고 거기서, 겁나 험한 게" 모두가 기다린 오컬트 미스터리 [사바하][검은사제들] 장재현 감독 신작 최민식X김고은X유해진X이도현 [파묘] 1차 예고편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