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4-09-05 09:01:57
[JIMFF 데일리] 〈라라랜드〉만큼 매혹적인, 어쩌면 더 진득한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치코와 리타〉

치코와 리타/Chico & Rita
Spain, UK | 2011 | 93min | DCP | Color | Animation
'제천 리와인드' 섹션
1948년 쿠바 아바나. 재능과 야심을 가진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치코는 어느 클럽에서 노래하는 리타를 보고 한눈에 반한다. 치코의 적극적 구애로 팀을 이룬 두 사람은 차차 명성을 얻고, 리타가 뉴욕의 연예기획사 사장의 눈에 들어 미국에까지 진출한다. 리타가 점점 스타가 되어가면서 두 사람은 종종 어긋나지만 끝내 노년이 되어 재회한 후 못다 한 사랑을 나눈다.
음악에 대한 열정과 서로를 향한 사랑이 끈적하게 얽혀 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사랑이 엇갈리고야 마는 순간의 안타까움을 탁월하게 포착한다는 점에서, 〈치코와 리타〉는 자신보다 4년 늦게 개봉한 〈라라랜드〉와 닮은 데가 있다. 그러나 개인적 취향을 전제로 하자면, 내게는 〈치코와 리타〉가 더 매력적이었다.
먼저 영화의 시공간이다. 1948년 리타를 처음 만난 후, 우여곡절 끝에 치코가 다시 쿠바로 돌아오는 건 1959년 이후로 보인다. 쿠바 혁명(1959)에 들뜬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즉 치코와 리타의 사랑과 음악은 1950년대 쿠바 아바나와 뉴욕을 오가며 연속되고 단절된다. 혁명을 앞둔 쿠바와 인종차별이 횡행하지만 아메리칸드림 역시 가능하던 시절의 뉴욕, 두 공간이 만들어내는 역동적 긴장은 두 사람의 이야기와 어우러져 긴장감과 몰입감을 증폭시킨다. 재즈를 비롯해 쿠바의 음악인 맘보와 콩가가 대세인 1950년대 뉴욕에서, 검은 피부를 가진 두 남녀가 꿈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한다는 설정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낭만적이다. 눅진한 OST 목록과 두 사람의 진득한 사랑 이야기는 이 낭만적 기대를 채우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무턱대고 낭만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의 사랑과 음악을 한껏 부풀린 영화의 시공간은 동시에 비극의 원인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기서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이 피어오른다. 치코와 리타가 뉴욕으로 떠난 이후부터, 아니 어쩌면 아바나에서부터, 두 사람은 자기 삶의 온전한 주인인 적이 없었다. 사랑과 음악의 중요한 순간마다 늘 외력이 개입해 두 사람을 흩어놓았기 때문이다. 치코를 두고 리타만 뉴욕에 데려가는 기획사 사장, 치코와 리타가 각각 라틴계 남성과 여성으로서 겪은 무시와 착취, 사업적 성공을 위해 두 사람을 어떻게든 떨어뜨려 놓으려는 주변인들, 모든 것을 정리하고 체념한 채 돌아간 혁명 이후의 쿠바에서조차 재즈가 ‘제국주의 음악’이라는 이유로 연주하지 못하는 치코……. 치코와 리타의 음악과 사랑이 꺾이고 흔들리는 이유가 그들 자신의 문제가 아닌 두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의 개입 때문이라는 점은 이들의 엇갈림에 대한 안타까움을 배가한다. “미래 같은 건 의미 없어. 내가 바라는 건 다 과거에 있거든.” 리타의 이 말은 자기 삶의 주인이기를 부정당한 두 사람의 비애를 대변한다. 꿈 말고는 가진 것 없던 과거는 빈곤하지만 풍요로웠고, 이 풍요로움을 원천으로 치코와 리타는 사랑과 음악의 모험을 감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풍요로움이 소진되었을 때, 두 사람은 스러졌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가 되어버린 영화 속 시공간처럼.
치코와 리타가 50여 년 만에 재회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영화의 결말은 다소 판타지처럼 느껴진다. 차라리 두 사람이 간절히 추구했으나 실현되지 못한 낭만을 ‘실패’한 상태로 남겨두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싶다. 그 실패의 아련함이 두 사람의 이야기가 품은 아름다움을 거듭 곱씹을 수 있게 하지 않을까 싶어서다. 그러나 이런 결말은 치코와 리타, 두 사람에게는 조금 가혹할지도 모른다. 더 이상 음악을 하지 않고 길거리에서 구두를 닦으며 생계를 유지하는 치코와 원치 않는 방식으로 은퇴한 후 허름한 모텔에서 청소 일을 하며 살아가는 리타에게 두 사람이 함께했던 과거는 어떤 식으로든 완결될 필요성이 있다. ‘비현실’적이라도, 두 사람에게는 기나긴 슬픔 끝의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다.
〈치코와 리타〉는 24회 유럽영화상을 비롯해 스페인의 아카데미상이라 불리는 고야상(애니메이션상)을 수상했고, 제7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주년을 맞이하는 이번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는 이전 영화제에서 사랑받은 작품을 다시 한번 선보이는 ‘제천 리와인드’ 세션에 선정되었다. 진득한 쿠바 음악과 남미 특유의 생기 넘치는 문화, 1950년대의 아바나와 뉴욕이라는 매력적인 시공간을 배경으로 두 연인이자 음악가의 상승과 하강을 낭만적으로 버무린 이 영화를, 부디 많은 관객이 다시금 큰 스크린에서 만끽하기를 바란다. 낭만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을 아주 깊은 곳부터 적셔줄 영화다.
*〈치코와 리타〉 상영 정보 및 예매 페이지
-9월 7일(토)/9:00~20:33/제천의림지자동차극장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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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재의 강박으로 새롭게 재구성한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이거 재판받는 거 맞지
이 영화의 시점은 두 가지다. 컬러파트인 ‘핵분열’ 흑백파트인 ‘핵융합’이다. 컬러파트의 시점은 1954년이다. 원자력 협회 건물의 어느 방 안. 좁은 공간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있다. 이유는 주인공 오펜하이머의 청문회 때문이다. 오펜하이머가 국가기관에서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접근 승인을 받아야 한다. 그냥 평범하게 살았더라면 승인에 큰 문제가 없었겠지만 오늘의 주인공은 그동안 어려운 선택지만 골라왔다. 세계 2차 대전을 끝내는 데에 두 번의 항복이 있었다. 첫 번째는 나치였고 두 번째는 일본이었다. 나치보다 먼저 원폭을 만들었고 일본의 항복을 유도하는데 큰 기여를 한 오펜하이머. 전쟁영웅이라고 봐도 무방한 오펜하이머가 소련의 첩자라는 의심을 받고 있다. 영화는 컬러 파트를 통해 ‘왜 오펜하이머에게 이런 위기가 들이닥쳤는가’를 보여준다.
핵융합 파트의 주인공은 루이스 스토로스다. 1959년. 루이스 스토로스는 상무부 장관 취임을 위한 절차를 밟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단계만 남았다. 청문회를 앞두고 있는 루이스 스트로스. 형식상의 절차라는 보좌관의 말이 들리기는 해도 왠지 삶을 재판받는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뭐 장관 뽑는 게 쉽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긴장되는 마음이 사그라들지는 않는다. 이렇게 떨리는 스토로스에게 변수 하나가 생겼다. 익명의 과학자가 증언을 앞투고 있다는 점이다. 평범한 선택지만 골라온 삶이라면 이렇게까지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을 것이다. 스토로스의 청문회에서 그의 삶에 가려져있던 어떤 음모가 드러난다.
플롯의 마술사
‘플롯의 마술사’ 크리스토퍼 놀란이 감독의 장기를 활용해 작가의 인장이 쾅 박힌 신작을 발표했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플롯을 자유자재로 활용해 자기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사람이다(플롯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법’을 다루는 영화 용어다). 놀란이 ‘플롯의 마술사’라는 별명을 얻었다는 것은 각자의 필모그래피가 갖고 있는 다양한 전달방식이 있다는 것이다. <메멘토>는 흑백/컬러의 색채가 대비되는 장면들을 병치시켜 사건의 진실을 쫓는다. <덩케르크>는 ‘전쟁 반대’라는 테마 아래 액션장면을 거진 다 지워버리는 승부수를 뒀다. 전쟁영화에서 '반전'이라는 키워드를 설득시키기 위해 살아 돌아가는 과정의 어려움을 플롯으로 삼은 것이다. sf 영화인 <인터스텔라>에서 가족영화라는 테마와 블랙홀의 심연은 사실상 동격이다. 이 일종의 멀티버스 세팅은 ‘아버지가 딸을, 반대로 딸이 아버지를’ 생각하는 형태가 우주의 모습과도 같다는 점이 유사점을 갖는다. 최근작 <테넷>은 초기작 <메멘토>를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난해한 구조를 보여준다. 기점 찍고 전후반의 사건관계가 대칭을 이루고 있다. 이는 ‘주인공이 운명의 주연으로 어떻게 똑바로 서 걷는가’에 대한 이야기 전개방식을 시간관계를 뒤틀어서 보여준 것이다.
이 영화 역시 크리스토퍼 놀란이 플롯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고유의 연출법이 그대로 들어가 있다. 우선 영화가 색채대비를 통해 이야기를 전달한다는 점은 전작 <메멘토>가 연상된다. 이 <메멘토>에서 인물이 처절하게 사건의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을 묘사했던 것과는 반대의 방식을 구사하고 있다. 본작이 이런 방식을 쓰는 것은 대단히 합리적인 것으로 보인다. 오펜하이머와 스트로스가 갖고 있는 내면의 모순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미국의 한 행정부 장관이 되는 일은 어마어마하게 큰 사건이다. 또한 원자폭탄을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는 세계사에 기록될 만큼 큰 이벤트다. 하지만 두 사람은 관계에 서툴러서 위기를 스스로 자초한다. 오펜하이머나 스트로스의 서사 하나만을 콕 찝어서 전개하기보다 대칭되는 두 사건을 보여줌으로서 감독이 보여주고 싶었던 것에 집중한 것이다.
위대하면서도 끔찍한
이 영화의 컬러 부분인 ‘핵분열’ 파트는 아이러니를 다루고 있고 이는 영화에 작동하는 핵심 모티브다. 이 파트에서 다루는 가장 큰 줄기는 오펜하이머가 중심이 되어 원자폭탄을 만드는 과정이다. 오펜하이머는 이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도중에 수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실제로 오펜하이머는 만났던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던 건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로브스를 위시한 군사전문가들과 과학자들에게 원자폭탄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장면이나 과학자들 앞에 서서 연설하는 장면은 '거대한 일은 이뤘지만 사소한 건 놓친' 한 인물의 입체성을 보여준다. 오펜하이머에게 아이러니가 작동하는 것이다. 이 아이러니는 우리가 오펜하이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명대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오펜하이머가 TV 앞에서 한 유명한 대사가 있다(자료화면으로도 남아있다). ‘난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라는 문장이다. 이 문장은 한 인물과의 사랑이 가장 정점일 때 처음으로 등장한다. 원자폭탄을 발명해 전쟁을 멈춘 한 사람의 서사가 사랑이 가장 불타오를 때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영화가 이 인물을 묘사하는 방식은 20세기 당시 미국사회가 얼마나 폐쇄적이었는가 대한 암시로 보인다. 영화에서 중요한 시간적 배경은 매카시즘 광풍이 몰아치던 1950년대이다. 시대적 배경을 이루는 ‘매카시즘’을 아주 쉽게 설명하면 ‘반공주의의 극단’이다. 한국전쟁 및 소련과의 냉전으로 인해 미국 내에 공산주의에 대한 비호 여론이 들끓었다. 매카시라는 미국의 상원의원이 자국 내 공산주의자를 색출하기 위해 비열한 방식을 사용한다. 이를 '매카시즘'이라고 하는데,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은 이 광풍을 정통으로 맞은 오펜하이머를 주인공으로 뽑았다. 이 인물을 주인공으로 선정한 것이 소모적이지 않게 감독은 부지런할 정도로 시대적인 배경이 어떻게 한 인간을 괴롭히는가를 후반부에 보여준다. 구체적으로 핵분열 파트의 청문회 부분은 '너 공산주의자지?'를 정해놓고 조사위원들이 오펜하이머에게 질문한다.
아날로그 변태
기존의 필모그래피와 유사한 측면에서 감독은 폭발 효과를 직접 구현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전작 <테넷>에서 중고 비행기를 직접 구매해 실제로 부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또 <인셉션>에선 촬영 도중에 직접 세트장을 뒤집었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크리스토퍼 놀란은 영화의 리얼리티를 위해 작중에서 제시되는 폭발을 직접 구현했다. 이 폭발은 단지 크리스토퍼 놀란이 영화적 기교를 부리기 위해 이런 연출법을 사용한 것이 아니다. 폭발을 눈으로 보여주고 폭발음을 몇 초 있다가 들려준다. 이는 연쇄작용이 서서히 일어나는 오펜하이머 개인 서사의 은유처럼 보인다.이 영화의 음향과 촬영이 인물의 드라마를 보여준 것이다.
교과서 찢고 나온 듯
이 영화에 등장하는 과학자들은 관객들이 어디서 들어봤던 사람들이다. 일단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한 조연이자 세계사에서도 족적을 남긴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그렇다. 영화 초반부에 나오는데 똑같이 생겼다. 하지만 단지 교과서에 나오는 인물 똑같이 구현하는 것 자랑하려고 이 인물을 이렇게 보여준 것이 아니다. 이는 아인슈타인이 영화에서 스트로스/오펜하이머의 차이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데, 이 분기점을 보여주려고 감독이 어떤 선택을 뒀는지 주의깊게 본다면 흥미롭다. 그 외에도 어니스트 로렌스, 리처드 파인만, 닐스 보어, 아이도어 아이작 라비 등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과학자들이 등장한다. 특히 베니 샤프디가 맡은 에드워드 텔러는 배우 개성과 과학자의 캐릭터 세팅을 높게 흡착시킨 예시가 될 것이다. 트루먼 대통령 역을 맡은 캐릭터는 놀랍다. 글쓴이는 솔직히 못 알아봤다.
영화의 다른 주인공인 '루이스 스트로스' 역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탁월한 연기를 보여줬다. 이야기의 반쪽을 담당하는 입장에서 영화의 긴장감, 서스펜스를 혼자 이끌고 가야 한다. 구체적으로 후반부에 이 모든 이야기의 잔상이 밝혀질 때 목소리 톤에 변주를 둔 장면은 배우의 해석능력이 돋보인다. 내년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조연상 후보가 유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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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노는, 때론 최고의 상처 치료제
표면적이거나 내적인 상처를 입었을 때, 아이들보단 어른들이 상처가 빨리 아물고 회복하는 속도가 더 빠르다고 생각하곤 한다. 아무래도 유년기, 청소년기에 접어든 이들보다 부서지는 상황을 더 많이 겪어왔고 이로 인해 어느 정도 내성이 생겼을 것이라는 경험적 측면 때문이다. 종종 연장자들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도 선경험했기에 답을 알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있지 않은가.
일리 있는 말처럼 보이긴 한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잘못된 추측이다. 어른들도, 하늘이 갑자기 무너지거나 누군가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른다. 그리고 '어른'이라는 카테고리에 속하는 이들 중 상당수 이상은 몸만 컸을 뿐 여전히 유아기적 정체성에 머물러 미성숙하다. 일부 어른들은 자신이 한번 깨지고 부서지면서 큰 상처를 입고 회복하지 못하기도 한다. 이는 트라우마라고 명명하는 마음을 갉아먹는 족쇄로 자라나 끝까지 고통받기도 한다. 그래서 트라우마로부터 괴롭힘을 받지 않으려고 상처로부터 멀찍이 회피하거나 분리하는 등 동떨어진 삶을 택한다.
미셸 공드리 감독과 짐 캐리가 만난 드라마 '키딩'도 상처 입은 어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키딩'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나 다들 어딘가 결핍, 상처를 가지고 있다.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닮아 감정이입이 쉽게 됐다. 그중 하이라이트는 이 남자, 제프 피키릴로(짐 캐리).
제프 피키릴로는 어린이 TV쇼 프로그램 '피클스 아저씨의 인형극장'서 주인공 피클스 아저씨를 30년간 맡고 있다. 그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은 미국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글로벌 인기를 누리고 있다. 마치 종이접기 장인 김영만 아저씨가 오랜 세월 글로벌 스타로 자리매김해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는 매해 크리스마스트리 점등 행사에 참여해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자신을 보고 자란 어른들에게는 동심과 추억을 선물했다.
정갈한 5대 5 가르마를 탄 단발머리, 단정한 초록색 넥타이와 흰색 셔츠, 항상 활짝 웃는 미소로 제프 피클스를 기억하고 있으나 이는 본체 제프 피키릴로를 가리고 있는 가림막이라는 걸 '키딩'이 보여주고 있었다. 본캐 제프 피키릴로는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험천만한 상태. 1년 전 교통사고로 일란성쌍둥이 아들 필을 잃었다. 불의의 사고는 아내 질(주디 그리어)과 이혼 위기로 몰아넣었고, 남은 아들 윌(콜 앨런)과 소통은 점점 어려워졌다. 본캐 제프의 삶은 엉망진창 망가지고 있어 한시라도 상처 치료가 필요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제프는 상처 입은 자신과 감정들을 분리시키고 억눌러야만 했다. 전 세계 어린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부캐 피클스 아저씨로 출근해야만 했기 때문. 또 제프는 오래전부터 아이들을 좋아하고 모두에게 좋은 사람 피클스 아저씨로 영원히 남기를 갈망해왔다. 그 결과 진작에 치료해야 할 자기 상처와 슬픔을 제대로 돌보지 않고 피클스 아저씨로부터 격리시킨 부작용이 발생했다. 인형극장을 통해 아이들에게 슬픔과 죽음을 이야기하겠다고 나서면서 30년간 평화로웠던 피클스 세계관이 균열을 보이기 시작했다.
돌발행동을 하는 제프가 더 이상 정상이 아닌 걸 인지한 아버지 셉(프랭크 란젤라)과 누나 디어드러(캐서린 키너)는 대체물을 찾으러 나섰고, 제프가 부캐에 매달려있는 동안 집에서 그의 자리는 점점 사라져 갔다. 제프 피키릴로와 피클스 아저씨 세계관 둘 다 유지하려고 애쓰는 제프의 노력, 그러나 그의 희망과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마치 웃고 싶지 않은데 웃어야 하는 광대의 모순처럼 제프의 애환만 부각될 뿐이었다.
시즌 1 후반부가 돼서야 제프는 마침내 인간 제프 피키릴로를 마주할 수 있게 됐다. 필이 죽은 날 운전대를 잡았던 질에 대한 원망과 아내를 용서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분노를 한꺼번에 표출했다. 또 세상을 떠난 필에게 자신이 좋은 부모가 아니었다고 인정했다. 오랫동안 신처럼 부각됐던 제프 피클스에 가려진 솔직함이었고, 비로소 자기 자신에게 한걸음 다가갈 수 있었다.
'키딩'에서 재밌는 건, 분노라는 감정을 묘사하는 방식이었다. 보통 분노와 평화를 이분법적으로 표현해 대립시켰고, 참았던 분노를 폭발시키면 분노의 화신으로 탄생하는 것으로 그려냈다. 그러나 '키딩'에선 조금 달랐다. 그가 상처로 인해 오랫동안 눌러왔던 감정을 드러내면서 무작정 삐뚤어진 인간성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인간은 계속 바람을 불어넣으면 크게 부풀어지다 터져버리는 고무풍선처럼 단순하지 않다는 걸 보여줬다.
시즌 1 마지막에서 제프가 질의 남자친구 피터(저스틴 커크)를 차로 들이받으면서 제프가 분노의 화신이 된 게 아닐까 하는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시즌 2에 접어들면서 제프의 극단적인 돌발행동은 단순한 폭발이 아닌 진심으로 피터를 싫어했고 가족을 아끼고 있었다는 걸 '키딩'이 설명했다. 그러면서 피터에게 악의를 숨기지 않고 자기 잘못을 인정했다. 자신이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닌 것도 받아들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삐뚤어진 인간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면서 '키딩' 시즌 2 내내 제프는 자기 자신과 과오를 시인함과 동시에 자신과 주변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받아들였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사랑하는 아내와의 별거를 인정하고, 이혼 서류에 서명했다. 그리고 새 출발을 선언했다. 그런데도 자신을 억누르고 괴롭혔던 문제들은 말끔히 해소되지 않았다. 과거 질과, 쌍둥이 아들들과 행복했던 순간들이 자꾸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왜일까.
변화를 받아들이고 보내는 것 또한 그는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어 하는 욕망과 이를 위해 '희생'으로 인식해서였을 것이다. 과오를 순순히 인정하고 "잘못했다"고 말하면서 세상을 떠난 필은 아름답고 그리운 존재로 남아버렸고, 질을 놓아주는 건 여전히 그를 사랑하나 자신을 떠나려는 아내를 존중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질의 새 출발을 하나의 권리로 존중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선한 희생으로 남았다. 그렇게 자기 안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타인을 원망하는 것'을 집어삼켰고, '나쁜 사람'들을 제거했다. 교통사고가 전부 아내 탓이라고 원망하기엔 너무나도 그를 사랑했고,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탄생한 인위적인 평화는 결국 제프 피키릴로를 기괴한 제프 피클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제프 또한 절대선이 아닌 평범한 인간일 뿐인데 말이다.
시즌 2 후반부에 윌이 제프와 질, 그리고 필과 행복했던 시간으로 되돌릴 수 있는 마법에 집착하는데, 시즌 2 마지막에 일어났다. 그런데 되돌리는 게 아닌 시간이 멈췄다. 제프도 윌도, 괴로운 현실에서 회피해 행복했던 과거로 되돌아가는 판타지 원하나, 그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판타지는 무엇이든 가능하나 아무것도 이뤄주지 않는다는 한계도 알려줬다. 제프는 아이들에게 집에 있는 시계를 한 시간씩 앞당겨 가족들과 보내라고 하나, 아이들 또한 이 속임수를 깨달았다. 상상은 현실로 향해야 한다고 미셸 공드리가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프는 상처를 마주하면서 행복했던 시간들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다. 떠나간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고, 이를 원망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내면을 스스로 통제하고 마음을 붙잡고 있으면 고요히 넘어갈 줄 알았다. 그러나 마음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통제할 수 없고, 이 때문에 내가 몸담고 있는 세계가 무너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사랑하는 것들이 떠나갔다. 원망하고 싶지 않았는데, 감정을 드러냈고 아파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달리 사랑은 떠나가지 않고 남았다. 그때 느꼈던 감정과 기억들은 여전히 남아있고 언제든 소환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특별한 물건을 깨트려 다시 금으로 붙이는 예술 기법인 긴츠키처럼 치유된 것이다. 비로소 모든 걸 내려놓고, 어른으로 성장해나가며 새 출발선에 섰다.
내면의 상처를 천천히 들여다보고 아파하고 원망한다고 해서 좋았던 감정까지 잃어버리지 않는다. 행복했던 시간들은 어떻게 해도 되돌아오지 않는다. 다만 기억이나 추억 등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새로운 행복으로 계속 이어질 것이다. 당신이 살아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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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린나이트, 이끼 낄 명예 대신 선택해야 하는 것
▲ 영화 <그린나이트> 포스터 영화 <그린나이트> 포스터 ⓒ 팝엔터테인먼트
* 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너무나도 아름답게 성찰적 여정의 문을 열었다. 중세 유럽, 가웨인의 여정을 이끈 어느 크리스마스 게임처럼 말이다
영화 <그린나이트>는 상실의 의미를 다룬 작품 <고스트스토리>를 연출한 데이비드 로워리의 신작이다. 14세기 영국에서 집필된 작자 미상의 두운시 '가웨인경과 녹색의 기사'의 내용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극중 가웨인경(데브 파텔)은 아서왕(숀 해리스)의 조카로, 아직 본인이 기사라고 자신감 있게 말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왕족임에도 위대한 무용담이 없는 본인이 부끄러워 왕의 옆자리에 앉는 걸 불편해한다.
그가 쭈뼛거리며 왕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어느 크리스마스, 궁정에 의문의 존재가 찾아왔다.거대한 고목 같기도, 사람 같기도 한 녹색기사(랄프 이네슨)였다. 녹색기사는 본인과 맞서는 자에게 명예와 근사한 도끼를 주겠다고 제안한다. 다만 그에게 했던 일들을 정확히 1년 뒤의 크리스마스에 되돌려주겠다고 말한다. 이 대결에 나선 자는 가웨인이었다. 그는 신념도, 대비책도 없이 녹색기사의 머리를 검으로 내려쳤다. 녹색기사는 잘린 본인의 머리를 들고 유유히 자리를 뜬다. 그리고 1년 뒤 그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가웨인은 녹색 예배당을 찾아 나선다. 영화 <그린나이트>는 광활하고 신비한 대지를 방황하며 진정한 가치를 알아가는 가웨인의 모습을 그렸다.
게임은 왜 하필 크리스마스에 시작될까
게임은 왜 하필 크리스마스에 시작될까.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예수의 탄생, 두 번째는 빨강과 초록이라는 색채를 쓰기 적합한 시기라는 점이다. 가웨인은 어쩌다 저질러버린 녹색 기사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녹색 예배당을 찾으러 나선다. 그리고 광활하고 신비로운 대지를 방황하는 내내 정령들을 마주한다. 정령들은 소년 강도들의 모습으로 또 언젠가는 머리를 찾고 있는 성녀 위니프레드의 모습으로 그리고 또 다른 언젠가는 안식과 매혹이 공존하는 성과 성주 부부로, 인간의 언어를 할 줄 아는 여우로 등장한다.
그들은 가웨인에게 자연이자 '기사다움'에 대한 은유로 다가온다. 가웨인은 그들과 엮이고 대화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우리는 어느새 기사도 정신이라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해 보게 된다. 기독교 윤리를 바탕으로 한 관용과 공경, 자선, 용맹함 같은 것들 말이다. 예를 들어 소년 강도들은 예수가 겪는 시련처럼 가웨인을 곤경에 빠뜨리는 존재인 동시에-가웨인은 십자가 대신 나무에 묶였지만- 작은 친절, 관용에 대해 알리는 역할이었다.
그런가 하면 파리한 얼굴의 위니프레드는 대가를 바라지 않는 태도, 이타성을 심어준다. 머리를 찾아주면 뭘해줄 거냐는 가웨인의 말에 왜 그것을 생각하고 하냐는 무심한 대사로 말이다. 온전히 머리와 숨이 붙어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존재가 사실은 헛것임을 알려주기도 한다. 위니프레드는 가웨인이 현상이 아닌 본질을 보도록 만들어준 것이다. 이 일화는 또한 후반부 가웨인의 환상 속 사건에 대한 복선으로 작용한다. 여정 중 몇 번이나 가웨인의 죽음이 암시되었던 바, 환상 속 그의 목은 이미 수년 전에 기능을 다한 것처럼 쉽게 떨어져 나갔다.
▲ 영화 <그린나이트> 스틸컷 영화 <그린나이트> 스틸컷 ⓒ 팝엔터테인먼트
녹색과 빨강을 언급한 이유
안락한 성에서 만난 성주 아내(알리시아 비칸데르)는 앞서 본 정령들보다도 영화 가이드 급으로 친절하다. 녹색은 생명의 색이자 부패의 색이고 빨간색은 욕망의 색이라고 직접 언급하기 때문이다. 다른 색 대신 두 가지 색의 특성만 소개한 건 다분히 의도적이다. 영화의 갈피를 잡지 못하는 관람객에게는 굉장한 힌트인 셈. <그린나이트> 속 무한한 자연의 녹색, 그리고 존중받지 못하는 왕의 머리 위 왕관의 이끼 낀 녹색을, 나중에는 넝마가 되어버리는 녹색 띠를 눈여겨 보라는 것이다. 또 대비하라는 것이다. 시작과 끝을 모두 담당하는 녹색에 비해 너무도 폐쇄적인 붉은 욕망을. 더불어 핏덩이 인간을. 여인의 말이 아니더라도 노란색, 파란색, 빨간색, 초록색을 적절하게 사용한 조명에서 가웨인의 심경 변화를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관객들의 눈을 사로잡기에도 훌륭했다.
이끼 낄 명예 대신
마지막 장면에서 가웨인은 징표로 가지고 있던 녹색 띠를 벗어던지며 이제 준비가 됐다고 말한다. 환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약속을 지키지 않고 인위적으로 목숨을 이어갔을 때 본인이 살게 될 삶에 대한 시나리오를. 이끼 낀 왕관처럼 유한하게 빛나던 생에 대한. 그는 이끼 낄 명예를 택하느니 겸허하고 단호하게 멍에를 끊는 쪽을 택한다. 사랑했던 여성 대신 '고귀해보이는' 인종의 여성을 반려인으로 맞는 생은 과연 명예로운가. 백성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천덕꾸러기 신세의 왕을 고귀하다 할 수 있는가.
▲ 영화 <그린나이트> 스틸컷 영화 <그린나이트> 스틸컷 ⓒ 팝엔터테인먼트
환상 속 왕이 된 가웨인의 뒤편 낯익은 초상화도 눈길을 끈다. 앞서 만난 성주의 아내가 그려준 초상화가 똑바로 놓여 있다. 성주의 아내가 그린 그림은 광활한 우주 배경에 가웨인의 상이 거꾸로 맺혀 있는 듯한 작품이었는데 다시 뒤집어둔 것이다. 자연을 지배하려는 인간의 자기중심적이고 오만한 태도가 드러나는 장면이다. 그런 그는 신비롭고 고통스러운 여정 뒤에 확실히 성장했다. 녹색기사 앞에 무릎을 꿇고 녹색 띠를 벗어던지던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또렷했다.
녹색기사는 가웨인의 목을 베었을까
최후의 순간, 확실하게 나오지는 않았지만 나는 결국 녹색기사가 가웨인의 목을 베었을 거라 추측한다. 자연이 위대하고 잔인하기 때문이 아니다. 무릇 훌륭한 기사란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아야 된다는 교훈을 주고자 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 가웨인이 1년 전 녹색기사에게 그 짓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인류가 자연에게 행한 치욕이 고스란히 인류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데이비드 로워리는 보여주고 싶었을 테다. 실제로 로워리는 한 인터뷰에서 "산 사람이 숲에서 뼈 더미가 되는 시간은 우주적 차원에서 볼 때 단 1초 정도면 된다. 우리는 사라져 먼지가 될 것이고 머잖아 땅엔 이끼가 낀다. 이 영화에서 그런 우주적 스케일을 보여주고 싶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사실 어느 쪽이라도 우주적 스케일이 느껴지기는 한다. 인간의 오만을 되돌려주는 자연은 자연스럽다. 인간을 용서하는 자연은 또 한 번 거대해진다.
▲ 영화 <그린나이트> 스틸컷 영화 <그린나이트> 스틸컷 ⓒ 팝엔터테인먼트
로워리는 지배자들이 피지배자들을 잘 구슬리기 위해 기능하는 기독교 윤리나 기사도 정신을 추앙하지 않았다. 명예욕에 대해서는 이미 영화 초반 가웨인의 연인 에셀(알리시아 비칸데르)의 대사로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왜 위대해져요? 좋은 걸로는 부족해요?"라고. 어머니 역할을 희생과 무한한 사랑의 아이콘으로 뻔하게 그리지도 않는다. 그는 기사도 정신으로 대변되는 너무나도 귀한 가치인 관용, 공경, 자선, 용맹함, 겸양과 같은 것들을 2021년에 다시 꺼내보고자 한 것이다. 녹색기사, 무한한 생명력을 가진 자연의 머리를 메론 한 덩이처럼 쉽게 베어버리는 수많은 가웨인들을 위해서 말이다. 세속적 명예, 가부장 문화, 목숨에 말 그야말로 '목숨 거는' 현대 인간들에게 영화 <그린나이트>는 더없이 시의적절하게 찾아온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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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아씨들> : 이 영화가 왜 다시 만들어져야 하는가?
루이자 메이 올콧의 명작 <작은 아씨들>은 그간 여러 차례 영화화된 작품이다. 그레타 거윅 감독은 2019년의 <작은 아씨들>을 촬영하며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을 영화화할 때의 압박감만이 아니라 이미 영화로 제작된 작품을 다시 창작한다는 고민 역시 가졌으리라고 예상된다. 나 역시 <작은 아씨들>(2019)에 큰 기대를 가지지 않아야겠다고 속단했었으나, 먼저 영화를 본 관객들의 후기에 다시 약간의 기대를 회복하고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결과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고전의 재해석이었다. 어떤 영화를 찍을 때, 특히나 이미 만들어진 영화를 다시 만들 때는 이 영화가 대체 이 시대에 왜 필요한지를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거윅의 <작은 아씨들>은 그 질문에 정면으로 부딪히는 영화이다.
2019년 <작은 아씨들>의 가장 혁신적인 연출은 현재(1868년)를 배경으로 시작해 과거 회상을 삽입한다는 점일 것이다. 조의 뉴욕을 보여주는 현재와 매사추세츠 주의 콩코드를 배경으로 한 과거는 푸른색과 붉은색으로 대조된다. 현재의 조가 베스의 소식을 듣고 콩코드로 돌아간 후에도 이 구분은 유지된다. 이미 다섯 번이나 영화화된 고전을 리메이크하면서 고민되는 지점은 '어떻게 해야 관객의 지루함을 덜면서 신박함을 더할 수 있을지'이다. 과거 삽입이라는 비직선적인 시간의 흐름은 이미 고전을 아는 관객들이 뻔한 전개를 예상하며 영화를 보는 것을 방지하고 몇몇 장면에서는 과거와 현실의 대조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예를 들어 베스의 침대 옆에서 병구완을 하다 잠든 조가 침대가 텅 비어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암스트롱의 <작은 아씨들>은 모두가 아는 <작은 아씨들> 작품의 전개를 그대로 따라가면서도 시간상 한계로 중요한 포인트, 특히 베스와 로렌스 씨의 감정교류 장면을 배제해서 원작을 모르는 관객들은 왜 갑자기 로렌스 씨가 베스에게 피아노를 선물하며 진작 주었어야 했다고 말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반면 거윅의 <작은 아씨들>은 과감한 연출로 원작의 중요한 사건들을 놓치지 않았다.
<작은 아씨들>은 본질적으로 당시 시대상에서 여자가 추구할 수 있는 최선의 사회적 참여를 추구하는 작품이다. 다만 1994년작의 여자주인공 조 마치는 그 한계로 결혼을 해야만 하고 로맨스를 찾아야만 하는 인물로 그려지지만, 2019년작의 조는 너무나도 외롭다고 외치더라도 그 결말이 결혼으로 이어져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동시에 말할 수 있는 인물이다. 편집장의 요구로 결혼하지 않은 여자주인공은 죽거나 결혼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편집장 앞에서 비웃을 수 있는 여유를 가진 꼿꼿한 사람이기도 하다. 94년작 <작은 아씨들>을 보기 시작했을 때 사실 초반부터 마미의 여성주의적 발언에 꽤 놀랐다. 암스트롱의 <작은 아씨들>의 마미는 로라 던이 연기한 마미보다 (최소한 말로는) 딸보다도 급진적인 사상가이며 더 오래된 작품인 94년작에서 19년작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는 인권 문제에 대한 뚜렷한 입장을 볼 수 있다. 마미가 딸들이 로리를 썰매개처럼 부리는 것을 보며 브룩 선생에게 여자 아이들을 근본적으로 남자 아이들과 신체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으며 성인 여자가 연약해지는 것은 사회가 그들을 코르셋을 입혀 집안에 가둬두기 때문이라고 대놓고 말한다거나(19년작이든 94년작이든 브룩 선생은 좀 구식으로 맨박스에 갇혀 있어서 이 캐릭터와 메그를 이어주는 올콧의 의도를 의심하게 된다), 메그가 부자 친구의 집에 놀러가서 고급 드레스, 특히 면화 드레스를 사지 않는 이유로 흑인 아이이든 아니든 대부분의 면화 농장은 아이들을 착취하기 때문이라는 발언을 한다거나, 마치 가 아버지가 흑인 노예를 해방시켜야한다는 뚜렷한 소신을 가지고 참전했다는 배경을 보여준다거나 하는 장면이 그렇다. 반면 19년작 <작은 아씨들>은 이러한 직접적이지만 부수적인 무수한 표현 대신, 결말로써 조를 해방시킨다.
거윅의 <작은 아씨들>은 작가 조를 가장 강조하는 버전이다. 영화 초반부, 책 <작은 아씨들>의 표지가 등장하며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데, 사실 그 앞에도 조는 이미 등장해 살아 숨쉬고 있다. 책 표지 등장 전의 조 마치와, 책이 인쇄된 후의 조 마치의 등장은 조가 책 바깥의 작가라는 점을 강조한다. 또한 이 버전의 <작은 아씨들>은 앞에서도 언급했듯 '현재'로 시작해서 과거가 간헐적으로 플래시백되는 시간의 흐름을 가지는데, 즉 이 영화에서 중요한 시대는 따스하고 아름답고 네 자매가 모두 한 지붕 아래 살았던 행복한 과거가 아니라, 베스가 죽었고 자매는 뿔뿔이 흩어져 차가운 세상에 내던져졌지만 그럼에도 살아가는 현재, 1868년이다. 1868년은 루이자 메이 올콧의 <작은 아씨들>이 출간된 해이기도 하다.
<작은 아씨들>을 집필한 올콧-거윅-조는 남자 편집자 대시우드에게 미혼 여성 주인공은 결혼하든가 죽든가 해야한다(이영도라는 남작가가 쓴, 내가 좋아하는 판타지 소설 <폴라리스 랩소디>의 문장을 빌리자면, 어느 쪽이든 처녀는 죽는 것이다)는 강요에 가까운 조언을 받는다. 결국 작가 조(올콧)는 대시우드에게 '너 좋을대로 하라'는 여유를 보이며 작가로서 납득할 수 없는 결말임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성공을 위해 이 정도는 타협할 수 있다는 태도로 조와 베어 교수를 결혼시킨다. 한편 실제 루이자 메이 올콧은 <작은 아씨들>의 대성공으로 가족을 경제적으로 부양하는데 성공해 평생 결혼하지 않고 살았다. 개봉한 직후에 영국에 있었기 때문에(이미 상영이 끝난 후였다) 극장에서 <작은 아씨들>을 보지는 못했지만 당시에 <작은 아씨들> 후기는 꽤 열심히 읽었었는데, 조가 베어와 이어진 것인지 아닌지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는 소식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영화를 감상한 지금 내 의견을 말하자면, 비혼 엔딩이다. 극중 중절모를 쓴 작가 조의 입으로, 작가는 일관적인consistent한 주인공heroine을 쓰고 싶으며, 자신의 인물 조는 어렸을 때부터 로리의 청혼을 받은 순간까지 결혼하지 않으리라고 말했으니 결혼을 하지 않는 엔딩이 지당하고 마땅하다고 말한다. 대시우드, 즉 가부장적 헤테로 로맨틱 엔딩(a.k.a. 결혼)을 원하는 사회와 독자의 대변자는 독자들은 일관적인 여주인공이 아닌 결혼을 하는 여주인공을 원한다고 주장한다. 대시우드가 '왜 로리가 조와 결혼하지 않느냐'고 불만을 표하는 대사에서 거윅의 또다른 올콧 해석이 강조되었다고 생각한다. 올콧은 소녀와 소년의 우정은 필연적으로 소꿉친구 헤테로 로맨스 결말을 봐야한다는 사회와 독자의 '압제에 저항'하기 위해 로리를 지조없이 자기가 좋아한다는 조의 동생인 에이미와 결혼해버리는 놈으로 만들어 소꿉친구 헤테로물을 외치는 독자에게 한방을 먹인 것이다. (내 상상일 뿐이다)
원작과 2019년도 작품을 제외한 모든 작품에서 조는 베어와 결혼 엔딩을 보지만 조라는 캐릭터를 구성하는 요소 중 로맨스적 측면을 고찰할 때 로리라는 캐릭터를 떼어놓고 해석할 수는 없다. 우선 19년작과 94년작의 조와 로리 케미에 대해서 말하자면, 거윅 감독의 전작인 <레이디 버드>에서 시얼샤 로넌과 티모시 샬라메가 잠깐 동안 사귀는 사이였음에도 둘 사이에 낭만적 기류는 읽기 어려웠듯이, 2019년작은 1994년작보다 로맨스적 케미스트리가 훨씬 약하다고 생각한다. 거의 없다고 생각해도 된다. 이 차이는 로리 배역의 캐스팅에서 비롯한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으로 알려진 티모시 샬라메가 청초한 소년 이미지의 배우인 반면, 94년작의 로리 크리스천 베일은 <아메리칸 싸이코>나 <다크 나이트>를 찍기도 전이지만 확연히 테스토스테론이 넘치는 배우이다. 샬라메가 1861년 과거 시점에서도, 1868년 현재 시점에서 방탕하게 사는 로리가 되었음에도 변함없이 가련미가 넘치는 소년이라면, 베일은 등장부터 곧 청년이 될 소년이라는 이미지이다. 헤테로 로맨스를 즐기는 주류 여성 관객들은 여주인공보다 아리땁고 가냘픈 남주인공을 원하지 않는다. (특수 니즈 제외, 보편론을 논하는 중) 헤테로 커플 키 차이는 몇 센티미터가 이상적이라느니 하는 헤테로 로맨스 롤플레잉에 적합한 구체적인 수치까지 존재하는 사회에서, 요약하자면 94년작 관객들은 매력적이고 케미 넘치는 처녀총각이 나이를 먹으면 자연스럽게 눈이 맞아야 한다는 '자연의 이치'를 거부하는 위노나-조에게 배신감을 느끼도록 유도되지만, 19년작의 관객은 커플적 전망을 보기 어려운 사이의 아름다운 청춘의 우정을 고백으로 파괴하는 샬라메-로리에게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로맨스물에서 여주인공이 잠시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홀랑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리는 남주인공은 그 순간 실격이다. 허용되는 범위는 집안 사정으로 인해 강요된 약혼까지뿐, 그때는 네 말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이제 네 말이 무엇인지 알겠다, 네 동생에게 느끼는 사랑과 네게 느끼는 사랑은 다른 것이다,라는 말을 하는데 다르다는게 여주에게 느끼는 감정이 우정이고 여주 동생에게 느낀다는 감정이 사랑인 남자 캐릭터는 이미 로맨스 스토리의 남자 주인공이 아니라 여자 주인공의 과거의 장애물일 뿐이며 넘어야 할 흑역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상대가 막내동생인 에이미만 아니었더라면 할리우드 로맨스 기준으로는 허용일지도 모르겠지만, 조의 동생인 에이미에게 청혼한 순간 로리는 아웃이다. 차라리 마치 가에 편입되어 따스한 가정의 정을 느끼고 싶어서 몸부림치던 로리가 맏이 메그와 결혼했으면 눈살 한번 찌푸리고 말았겠지만, 네 자매 중 막내이며 가장 철이 없는 어린 아이로 나오는 에이미와 로리가 결합하는 전개는 소설이 출간되었을 당시에 많은 독자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었으리라고 짐작한다. (94년도 영화의 에이미는 심지어 아역과 성인 배우가 따로 있는데, 어린 에이미에게 그와 비교하면 거대한 성인처럼 보이는 로리가 나중에 크면 결혼해주겠다고 입맞춰주는 장면까지 나와서 이후의 전개를 생각하면 소름이 돋게 만든다.) 이 모든 점을 고려했을 때, 거윅은 올콧이 낸 결말을 표면 그대로 읽는 대신 올콧이 그렇게 밖에 결말을 쓸 수 없었던 배경까지 하나의 작품으로 표현하려고 시도했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는 결말의 심볼인 디즈니마저도 2010년대 <겨울왕국>과 <말레피센트> 이후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작은 아씨들>의 책과 영화를 본 독자와 관객은 많을 것이나, 당시 루이자 메이 올콧이 어떤 이유로 작품의 결말을 수정했는지 혹은 어떤 이유로 캐릭터들의 결말이 선사되었는지를 각자 상상하는 것과 그 상상을 구체화해 하나의 작품으로 보는 것은 다른 경험일 것이다. 그레타 거윅의 <작은 아씨들>은 조의 운명을, 여자주인공의 결말을 시대의 변화에 걸맞게 재해석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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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능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지난 제26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폭발적인 반응으로 관객상에 해당하는 넷팩상을 수상하며 주목받아 궁금했던 작품이다.
겉으로 보기엔 어느 기업과 다름없지만, 최강의 여직원이란 타이틀을 위해 각 부서별 파벌 싸움이 끊이지 않는 미츠후지 상사를 배경으로,
아주 평범한(?) 회사원 나오코가 싸움에 휘말리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오피스 코믹 액션이다.
만화 같은 오버스러운 액션이 적응이 안 되긴 했지만, 일부러 만화 같은 연출로 재미를 더한 것 같다.
OST가 장르와 잘 어울리는 락으로 스피디한 느낌이 있어서 싸우는 장면들과 잘 어울리면서 액션을 더욱더 실감 나게 마치 만화를 보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유치하기도 하지만 그 너머에 주는 교훈도 있는 그런 영화. 하지만 엔딩 장면은.. 용납 못해..!!
주인공이 싸움에서는 이겼지만, 상대에게 남자친구 있다는 사실로 결국은 진 것과 다름없다는 그런 엔딩은 대체 뭡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액션과 코미디가 적절하게 섞여있는 이 영화를 시간이 된다면 한 번쯤 보는 것을 추천한다.
* 씨네랩의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초청되어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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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인’이라는 은유, 그 미친 사랑의 노래
7★/10★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2017년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으로 전 세계적 호평을 이끌어낸 루카 구아다니노의 차기작은 1977년 개봉한 〈서스페리아〉를 리메이크한 동명의 공포·스릴러 영화였다. 반응은 엇갈렸다. 누군가는 ‘마녀’에 대한 영화의 재해석과 감각적인 연출에 호평을 보냈지만, 다른 누군가는 지나친 난해함과 인위적 기괴함에 거부감을 느꼈다. 그리고 몇 편의 영화를 거친 후, 루카 구아다니노는 두 영화의 특장점인 로맨스와 기괴함을 버무려 〈본즈 앤 올〉로 돌아왔다.
아버지와 함께 사는 매런은 소심한 성격이기는 하지만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싶기도 한 여성 청소년이다. 그러던 어느 날 매런은 자신의 집에서 자고 가라는 친구의 초대를 받는다. 매런은 당장이라도 응하고 싶지만 아버지가 문제다. 아버지는 매런이 잠을 자러 방에 들어가면 문 밖에서 방문을 걸어 잠근다. 창문도 밖으로 나갈 수 없도록 만들어두었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친구와 놀고 싶었던 매런은 몰래 연장을 활용해 창문을 뚫고 친구네 집으로 향한다.
그런데 반전이 있다. 매런의 아버지는 권위적이거나 통제욕이 강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매런이 남에게 피해를 끼쳐 위기에 처하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밤마다 매런을 가둔 것이었다. 매런은 식인 식성을 갖고 태어났다. 세 살 때 유모를 물어뜯어 죽게 했고, 아버지는 그런 매런을 데리고 도망쳤다. 너무도 끔찍한 장면을 목격한 아버지는 매런을 사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혐오할 수도 없었다. 어떻게든 잘 교육하면 끔찍한 식성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 여겼고 매런을 학교에 보냈다.
하지만 오판이었다. 매런은 그날 밤 자신에게 다정히 대해주는 친구의 손가락을 물어뜯어버린다. 결국 아버지는 매런을 바꿀 수 없다는 걸 깨닫고 그녀를 혼자 남겨둔 채 몰래 도망간다. 그래도 자신이 보듬어야 할 딸이라는 괴로움과 선량한 시민이라는 자의식 사이에서 타협한 결과였을 테다.
아버지는 매런을 떠나며 그녀의 어머니에 관한 단서를 남긴다. 매런은 자신의 식성과 어머니 사이에 연결고리가 있으리라 짐작하고 아버지가 남긴 단서를 따라간다. 어머니를 향한 여정에서 매런은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식성을 가진 리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자신이 남들과 다른 존재라는 사실 앞에서 큰 혼란을 느끼던 매런은 리와의 관계에서 스스로를 이해하는 방법을 배운다. 자신 역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고,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 역시 깨닫는다. 그리고 여러 위기를 겪은 후에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려준 리와 ‘하나’가 됨으로써(죽어가는 리를 먹음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완성한다.
매런이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하고 끝내 사랑으로 구원받는다는 영화의 서사는 퀴어 정치와 닮은 데가 있다. 아버지가 떠나 혼자가 된 후, 매런은 설리라는 이름의 나이든 남자를 만난다. 설리는 매런에게 식인 식성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점을 알려주고, 사람을 먹는다는 죄책감을 넘어서야만 진입 가능한 세계가 있음을 일깨워준다(퀴어 역시 이성애와 성별 이분법이 규범인 세상에서 혼란스러워하다가 선배들이 먼저 구축한 세계를 만나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핵심은 죄책감의 극복이다. 이들은 자신의 본성이 도덕적, 윤리적이지 못하다는 죄책감을 떨쳐내야만 계속 살아갈 수 있다.
매런이 리와의 사랑으로 절망을 딛고 미래를 상상한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매런이 그러하듯, 퀴어들은 내가 남들과 다른 괴물, 괴짜라는 수치심과 고립감에 자신을 혐오하는 일이 많다. 그러나 기존 도덕과 규범을 거스르는 존재들 사이에서 피어나는 사랑은 그들 역시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있는 존재임을 일깨워준다.
기존 사회에 충격과 공포, 두려움을 안겨준다는 점에서 퀴어와 식인 습성은 공통점을 지닌다. 〈본즈 앤 올〉의 식인 소재는 용인 가능한 정도에 관한 선을 파격적으로 넘었을 뿐이다. 그리하여 〈본즈 앤 올〉, 이 미친 사랑의 영화가 끝내 도달한 곳은 수용할 수 없는 자들의 존재론이다. 모든 배제된 자들의 가장 극단적인 은유인 식인 습성을 지닌 자들은 사랑으로 스스로를 구원했다. 남은 것은 ‘공존’*이다.
*식인 습성을 가진 부족을 조사한 문화인류학 연구를 보면, 식인 풍습은 사냥하듯 누군가를 먹어치우는 게 아니라 공동체의 존속, 사회적 유대 차원의 의례로 수행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본즈 앤 올〉에서는 식인을 은유의 차원에서만 다루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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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흥신소-라떼극장] 산장 내 노이즈 캔슬링 특화가족 '조용한 가족'
영화 흥신소 - 라떼극장 EP.09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영화 "조용한 가족"에서 소중한 추억을 떠올려보자조용하고 소박하게 운영할 산장을 오픈한 가족
하지만 자꾸 시끄러운 일들이 발생하고 외부로 새나갈 잡음 차단을 위해 노력하는데...산장내 비친된 유머와 상상력을 키워줄 그 시절 잡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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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끝장리뷰 | 개구리들의 연대 | 적색 vs 청색, 숲속 vs 도시 | 부성애의 세계 | 결말해석 | 술래, 숲속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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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2024)에 대한 헐거운 리뷰
Chapter 1 개구리들의 연대
Chapter 2 부성애의 세계, 숲속 vs 도심, 적색 vs 청색
00:00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00:52 아쉬운 지점들
02:16 개구리들
05:16 술래 의미
06:04 부성애의 왕국
06:46 숲속 의미
09:22 적색 vs 청색
10:29 별점 및 한 줄 평
10:49 다음 리뷰 예고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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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타이타닉 : 25주년> 예고편
영원히 가라앉지 않을 감동 [타이타닉: 25주년] 2월 컴백! 개봉 25주년 기념 4K 3D HDR 리마스터링 오직 극장에서 경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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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더 마블스> FIGHT 30초 예고편
더 높이, 더 멀리, 더 빠르게 돌아온 캡틴 마블❕ 이번엔 혼자가 아닌, 팀업으로 POWER UP?? [더 마블스] 11월 8일 IMAX 극장 대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