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4-09-05 09:01:57
[JIMFF 데일리] 〈라라랜드〉만큼 매혹적인, 어쩌면 더 진득한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치코와 리타〉

치코와 리타/Chico & Rita
Spain, UK | 2011 | 93min | DCP | Color | Animation
'제천 리와인드' 섹션
1948년 쿠바 아바나. 재능과 야심을 가진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치코는 어느 클럽에서 노래하는 리타를 보고 한눈에 반한다. 치코의 적극적 구애로 팀을 이룬 두 사람은 차차 명성을 얻고, 리타가 뉴욕의 연예기획사 사장의 눈에 들어 미국에까지 진출한다. 리타가 점점 스타가 되어가면서 두 사람은 종종 어긋나지만 끝내 노년이 되어 재회한 후 못다 한 사랑을 나눈다.
음악에 대한 열정과 서로를 향한 사랑이 끈적하게 얽혀 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사랑이 엇갈리고야 마는 순간의 안타까움을 탁월하게 포착한다는 점에서, 〈치코와 리타〉는 자신보다 4년 늦게 개봉한 〈라라랜드〉와 닮은 데가 있다. 그러나 개인적 취향을 전제로 하자면, 내게는 〈치코와 리타〉가 더 매력적이었다.
먼저 영화의 시공간이다. 1948년 리타를 처음 만난 후, 우여곡절 끝에 치코가 다시 쿠바로 돌아오는 건 1959년 이후로 보인다. 쿠바 혁명(1959)에 들뜬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즉 치코와 리타의 사랑과 음악은 1950년대 쿠바 아바나와 뉴욕을 오가며 연속되고 단절된다. 혁명을 앞둔 쿠바와 인종차별이 횡행하지만 아메리칸드림 역시 가능하던 시절의 뉴욕, 두 공간이 만들어내는 역동적 긴장은 두 사람의 이야기와 어우러져 긴장감과 몰입감을 증폭시킨다. 재즈를 비롯해 쿠바의 음악인 맘보와 콩가가 대세인 1950년대 뉴욕에서, 검은 피부를 가진 두 남녀가 꿈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한다는 설정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낭만적이다. 눅진한 OST 목록과 두 사람의 진득한 사랑 이야기는 이 낭만적 기대를 채우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무턱대고 낭만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의 사랑과 음악을 한껏 부풀린 영화의 시공간은 동시에 비극의 원인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기서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이 피어오른다. 치코와 리타가 뉴욕으로 떠난 이후부터, 아니 어쩌면 아바나에서부터, 두 사람은 자기 삶의 온전한 주인인 적이 없었다. 사랑과 음악의 중요한 순간마다 늘 외력이 개입해 두 사람을 흩어놓았기 때문이다. 치코를 두고 리타만 뉴욕에 데려가는 기획사 사장, 치코와 리타가 각각 라틴계 남성과 여성으로서 겪은 무시와 착취, 사업적 성공을 위해 두 사람을 어떻게든 떨어뜨려 놓으려는 주변인들, 모든 것을 정리하고 체념한 채 돌아간 혁명 이후의 쿠바에서조차 재즈가 ‘제국주의 음악’이라는 이유로 연주하지 못하는 치코……. 치코와 리타의 음악과 사랑이 꺾이고 흔들리는 이유가 그들 자신의 문제가 아닌 두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의 개입 때문이라는 점은 이들의 엇갈림에 대한 안타까움을 배가한다. “미래 같은 건 의미 없어. 내가 바라는 건 다 과거에 있거든.” 리타의 이 말은 자기 삶의 주인이기를 부정당한 두 사람의 비애를 대변한다. 꿈 말고는 가진 것 없던 과거는 빈곤하지만 풍요로웠고, 이 풍요로움을 원천으로 치코와 리타는 사랑과 음악의 모험을 감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풍요로움이 소진되었을 때, 두 사람은 스러졌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가 되어버린 영화 속 시공간처럼.
치코와 리타가 50여 년 만에 재회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영화의 결말은 다소 판타지처럼 느껴진다. 차라리 두 사람이 간절히 추구했으나 실현되지 못한 낭만을 ‘실패’한 상태로 남겨두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싶다. 그 실패의 아련함이 두 사람의 이야기가 품은 아름다움을 거듭 곱씹을 수 있게 하지 않을까 싶어서다. 그러나 이런 결말은 치코와 리타, 두 사람에게는 조금 가혹할지도 모른다. 더 이상 음악을 하지 않고 길거리에서 구두를 닦으며 생계를 유지하는 치코와 원치 않는 방식으로 은퇴한 후 허름한 모텔에서 청소 일을 하며 살아가는 리타에게 두 사람이 함께했던 과거는 어떤 식으로든 완결될 필요성이 있다. ‘비현실’적이라도, 두 사람에게는 기나긴 슬픔 끝의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다.
〈치코와 리타〉는 24회 유럽영화상을 비롯해 스페인의 아카데미상이라 불리는 고야상(애니메이션상)을 수상했고, 제7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주년을 맞이하는 이번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는 이전 영화제에서 사랑받은 작품을 다시 한번 선보이는 ‘제천 리와인드’ 세션에 선정되었다. 진득한 쿠바 음악과 남미 특유의 생기 넘치는 문화, 1950년대의 아바나와 뉴욕이라는 매력적인 시공간을 배경으로 두 연인이자 음악가의 상승과 하강을 낭만적으로 버무린 이 영화를, 부디 많은 관객이 다시금 큰 스크린에서 만끽하기를 바란다. 낭만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을 아주 깊은 곳부터 적셔줄 영화다.
*〈치코와 리타〉 상영 정보 및 예매 페이지
-9월 7일(토)/9:00~20:33/제천의림지자동차극장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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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둘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개봉 첫 주 150만명을 기록하며 1위로 올라선 <콘크리트 유토피아>,
누적관객수 430만명을 기록하며 손익분기점을 넘긴 <밀수>! ✍
[1] 국내 주말 박스오피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개봉 첫 주 누적 관객 수 150만명을 동원하며 개봉 첫날부터 압도적인 수치로 박스오피스 정상에 올랐으며 <밀수>가 누적 관객 430만명을 기록하며 손익분기점 돌파에 성공했습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주말 관객수 110만명을 끌어올리며 1위를 지키고 있던 <밀수>를 밀어내고 1위를 차지했습니다. 배우들의 열연과, 완성도 높은 작품성으로 화제를 일으키고 있으며 개봉 2주차에 광복절 휴일을 맞아 예매율을 더욱 높일것으로 예상합니다. 영화는 다음 달 7일 열리는 제 48회 토론토국제영화제 갈라 프레젠테이션 부문에 진출했다고 밝혔습니다.
<밀수>는 개봉 이후 꾸준히 높은 예매율과 좌석 판매율 역시 높은 수치를 기록하며 전 세대 관객이 사랑하는 영화의 좋은 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밀수는 2주차에 총 관객 435만명을 기록했으며 개봉 4주차를 앞두고 다양한 신작 공세 속에도 예매율 상위권을 지키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손익분기점 400만명을 넘기며 <범죄도시3> 이후 가장 크게 성공한 한국영화이기도 합니다.
<엘리멘탈>이 다시 박스오피스 3위로 올라오며 두달이 넘게 흥행을 이어가면서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밀수>와 함께 'k장녀' 서사가 통했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고 흥행과 더불어 OST까지 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참담한 성적을 보이고 있는 <비공식작전>이 4위에 머물렀습니다.
<엘리멘탈>에 다시 3위 자리를 빼앗기며 관객수와 박스오피스 순위 모두 점점 밀려나는 행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미션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PART ONE>은 400만을 앞두고 있으며 이전 시리즈에 비해 아쉬운 성적이지만
한국 텐트폴 영화 성적에 비해 꾸준히 순위권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2] 북미 주말 박스오피스
<바비>는 북미 누적 매출액 5억 2600만 달러를 넘겼고 전 세계 총 수익은 약 1조 5천억 원을 넘긴 상태입니다. <오펜하이머> 또한 전 세계 총 수익 6억 5천만 달러를 기록하며 역대 전기 영화 중 가장 높은 수익률을 기록했습니다. <바비>가 세계적으로 히트를 하고 있는 가운데, 유독 한국에서만 부진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중이며 오는 15일에 한국에서 개봉 예정인 <오펜하이머>는 사전 예매율만 40만 장을 넘기며 흥행 돌풍이 불 것으로 예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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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젠 자유롭고 싶은 우리,둘의 결말
*이 글은 시사회 초대받은 후 작성되었으며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내용을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다들 적당히 참으며 지낸다. 정해진 시간에 맞춰 일어나서,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서, 이유 모를 불편한 상황을 견딘다. 그러다가 문득 하늘을 보며 떠있는 구름과 흘러가는 바람의 자유를 부러워한다. 이제 자유롭고 싶은 우리에게 한 가지 결말을 알려 줄 영화 '우리,둘'을 소개한다.
영화 '우리,둘'
영화 '우리,둘'은 복도를 사이에 둔 집에서 이웃으로 지내는 70대 두 여인 '니나(바바라 수코바)'와 '마도(마틴 슈발리에)'의 사랑을 다룬다. '니나'는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로마에서 자유롭게 살아가길 제안하지만, '마도'는 자녀들의 반응을 신경 쓰느라 연인과의 계획을 솔직히 말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한다. 결국 가족들에게 말하지 못한 채 '마도'가 갑작스러운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자유롭게 만날 수 없는 그들의 마음은 더욱 커져만 가고 '니나'는'마도'를 되찾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영화'우리,들'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미리 만나보세요▼
'마도'를 향한 '니나'의 행동은 나이 든 여성에게 기대하는 온화한 할머니와 다르다. '마도'를 돌보게 된 간병인 몰래 집에 들어와 사랑을 속삭이거나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간병인이 '마도'의 딸에게 오해받도록 자동차를 부순다.
어떤 방법도 서슴지 않는 그녀는 사랑 앞에서 누구보다 솔직하며 때론 거칠고 폭력적이다. 영화'우리,둘'로 데뷔한 필리포 메네게티 감독은 '니나'와 '마도'를 나이에 구애받지 않는 한 명의 자유로운 인간으로 설명한다."I wanted to show age for what it is, with wrinkles and everything,
while also showing that you can be 70 with wrinkles and still be alive and kicking."
주름이 있는 나이를 그대로 보여주면서,당신이 주름이 있는 70세도 되어서도 여전히 살아있고 발길질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감독은 그들의 상황을 긴장감 있는 전개로 풀어내며 로맨스 영화의 클리셰를 깬 실험적인 연출을 시도한다. 일단 영화의 시작부터 자유분방하다. 검은색과 흰색의 원피스를 입은 두 소녀가 나무를 사이에 두고 숨바꼭질을 한다. 흰색을 입은 소녀가 나무 뒤에서 갑자기 사라지고 검은 옷의 아이는 누군가를 잃어버린 듯 이름을 부른다. 아이의 목소리는 까마귀 소리에 가려져 관객에게 들리지 않는다. 음침한 화면과 점점 더 커지는 까마귀 소리가 어우러져 기괴한 분위기가 흐른다. 이후에도 영화는 현장음을 최대한 강조하여 사건을 간접적으로 전달하고 팽팽한 리듬감을 유지한다.
또한, 스릴러 영화에서 들을 법한 효과음을 곁들이거나 '니나'의 집에서 스산하게 촬영된 조형물은 영화 장르를 고민하게 한다. 게다가 '마도'가 말할 수 없는 상태로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는 장면의 극단적인 클로즈업은 오싹한 기분마저 든다.
우리는 자유를 위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할까?
영화의 결말에서 그들은 자유를 찾기 위해 대가를 치른다. '니나'의 집은 난장판으로 변하고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잃는다. '마도' 역시 두 자녀와의 관계를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그럼에도 그들은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면 충분히 치를만한 대가였다는 듯 행동한다.
우리의 자유도 '니나'와 '마도'의 자유만큼 어렵고 무겁다. 자유를 얻는 대가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야 한다면, 누군가의 비난을 받는다면, 현실적인 어려움을 겪어야 한다면, 과감하게 자유를 선택할 수 있을까?적당히 견딜 수 없는 아침이 찾아올 때, 우리의 결말이 새롭게 쓰여질 것이다.
참고 자료: Nick levine, 'Two of Us, the Queer Love Story That Addresses Cinema’s Problem With Age', AnOther,
https://www.anothermag.com/design-living/13466/new-film-two-of-us-a-covert-queer-love-story-with-a-tw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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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FF 데일리] 피상적 인간 관계에 대한 독특한 시선
전작 ‘욕창’으로 고령화 사회에서 직면할 수 있는 노인 문제에 대한 가부장적 가족 관계와 돌봄 노동 등을 조명했던 심혜정 감독의 신작 한국 독립 영화 〈너를 줍다〉를 관람했습니다. 신인감독들이 주로 소개되는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부문에 ‘당신으로부터는’, ‘우리는 천국에 갈 순 없지만 사랑은 할 수 있겠지’, ‘미확인’, ‘밤 산책’, ‘우리와 상관없이’, ‘수궁’, ‘어쩌다 활동가’, ‘폭설’, ‘믿을 수 있는 사람’, ‘잔챙이’와 함께 출품된 작품으로, 아무 생각 없이 버려지는 쓰레기로 사람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고 믿는 지수를 통해 현대 사회 속 사람들 간의 관계를 독특하게 바라봅니다. 자칫 범죄처럼 보일 수 있는 부분을 조심스럽게, 그리고 너무 무겁지 않게 풀어가고 있어 색다른 소재의 활용과 더불어 전체적인 분위기도 색달랐는데 다른 분들은 어떠셨을지 궁금하네요.
※ 최대한 자제하였으나 일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그의 쓰레기에는 품위가 있다”
사랑에 배신 당한 지수는 타인의 쓰레기를 뒤지면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을 알 수 있다고 믿는다. 어느 날, 최선을 다해서 깔끔하게 버린 쓰레기가 눈에 띈다. 옆집 남자 우재의 것이다. 지수는 그가 궁금하다. 지수는 쓰레기 정보로 그에게 접근하는 데 성공한다. 우재와의 만남이 거듭되면서 그의 밝고 따뜻함, 그리고 상처들. 지수는 점차 마음이 열리기 시작한다.
예고편│Trailer
영제: Flowers of mold│감독: 심혜정│각본: 심혜정, 이수진
원작: 하성란 소설집 ‘옆집 여자’에 수록된 단편 ‘곰팡이꽃’
출연진: 김재경, 현우 외 多│장르: 드라마│상영 시간: 104분
국가: 대한민국│등급: 12세 관람가
평점: 왓챠피디아 2.6
초청·수상 내역: 제24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 경쟁 부문 (왓챠가 주목한 장편상, CGV상)
“버려지는 것들이 그 사람에 대해 더 솔직하게 말해”
사람들이 내놓은 쓰레기봉투를 가져와 내용물을 통해 이웃들의 성향과 취향을 기록하는 특이한 버릇 혹은 습관을 가진 지수라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지금 사회의 인간 관계를 들여다보며 나아가 특별한 사랑까지 파고듭니다. 시점에 따라 쓰레기를 뒤지는 행위가 범죄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버려진 것을 통해 진짜 모습을 접근하는 방식은 굉장히 독창적이게 다가옵니다. 밀키트 마케터이자, CS라는 직업적인 부분도 어느 정도 그녀의 성향을 보여주며 치장된 말과 행동으로는 알 수 없는 진짜 모습을 판단하는 그녀만의 소통법임을 알려주죠. 그리고 깔끔한 일처리로 인정받는 직장과 180도 다르게 소심하고 내성적인 모습은 왜 그런 행위를 하였는지 궁금증을 일으킵니다.
호실별로 쓰레기를 찾아 세세히 사진과 매일 기록을 꼼꼼히 남기며 타인에게 벽을 느끼는 일종의 정신병처럼 비치는데, 과거 연인의 잘못된 행위가 남긴 상처에 대한 자기방어적 트라우마이자, 보호 본능이었습니다. 다시 상처받기 싫은 그녀의 단단한 잠금장치, 영화는 그것을 해제하고 치유할 수 있는 게 새로운 관계라 여겼는지 낯선 우재와의 만남으로 전반부의 긴장감과 새로운 출발의 애틋함 사이에서 묘한 기류로 뒤엉키기 시작합니다. 결국 사람의 문제는 사람으로 해결돼야 하고 진정한 관계는 진실한 소통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시선을 애둘러서 보여주며 우리 사회가 만든 단절된 인간관계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누구에게나 실시간으로 자신을 뽐내지만, 양면이 다른 동전처럼 전혀 알 수 없는 속마음으로 가득 찬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떠올리게 됩니다. 다른 이들을 따라 마치 내 취향인 양 똑같은 모습으로 동질감과 유대감, 관심에 목메는 사회이기 때문에 지수처럼 꾸밀 것 없이 버려진 쓰레기들을 봐야 진짜를 볼 수 있는 가짜로 가득 찬 안타까운 현실일지도 모릅니다. 영화 〈너를 줍다〉는 그렇게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에 대한 묘하면서도 진지한 시선을 던지며 나아질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을 남깁니다. 지수의 화사해진 스웨터처럼 우재와의 새로운 출발을 통해 더 이상 남들의 흔적이 그녀의 쓰레기봉투에 없길 바라면서 말이죠.
한 줄 평: 피상적 인간관계에 집착하는 사회를 쓰레기봉투에 담은 재밌는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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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그들만의 리그(1992)> 리뷰
평생 스포츠와 관계 없는 일상을 살았고, 올림픽 시즌엔 늘 소외감을 느꼈으며, 올해에도 어김없이 도쿄 올림픽 열기에 동참하지 못하는 소시민이지만, 시즌이 시즌인 만큼 스포츠가 주요 골자인 영화를 감상했다. 바로 페니 마셜 감독의 《그들만의 리그(1992) 》다. 미국 의회도서관 선정 영구 보존 영화로도 꼽혔다고 하는 만큼 영화 내에서 문화적, 사회적 텍스트를 구석구석 살피는 것도 영화를 감상할 때의 한 가지 재미일 것이다. 물론 ‘신예로만 꾸려진 스포츠 팀’과 ‘급작스럽게 몰락했으나 어쨌든 유능하긴 한 코치’의 조합에 질렸을 수도 있고, 세월이 흐른 만큼 영화의 세련미를 느끼기 어려울 수도 있겠으나 이런 지점은 이 영화와 사랑에 빠지는 데에 큰 장애물이 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출처: 네이버 영화 포토
《그들만의 리그》가 다큐멘터리인 것은 아니지만,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가볍게라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영화의 스토리적 배경인 AAGPBL의 창립 과정을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단 것이 아니라, 여성 프로 야구 경기가 미국을 휩쓸게 된 까닭엔 세계대전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단 이야기다. 세계 2차 대전. 아마 의무교육기간에 모두가 들었을 서구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본격적으로 일어난 시점이 이 때였다. 특히 “미국 정부는 노동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여성들을 국방 산업과 경제 전역으로 호출(서재철, 2016)”하였다. 그러나 국가가 장려한다 한들 ‘Rosie the Riveter’는 분명 통념에 위배되는 일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여성 스포츠, 흙 위를 달리고 굴러야 하는 야구 경기는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겐 어처구니가 없는 처사다만- 몹시도 여성적이지 못한 일로, 권장한다는 건 얼토당토 않은 일이었다.
그렇기에 선수단에게 주어지는 여러 제약은 우리에게 영화적 장치처럼 보일지 몰라도, 실제 선수들의 증언에서 비롯되었다. 예컨대 선수의 몸을 보호하기 어려워 보이는 스커트형 유니폼, 숙녀가 되기 위한 필수 교양 수업, 상당히 강력한 사적인 생활 제재 따위가 이에 해당한다. 유감스럽게도 언론의 태도나 일부 유니폼 규정은 20세기로부터 특별히 달라지지 않은 듯 보일 때도 있으나, 최소한 아들을 데리고 원정을 다녀야만 하는 에블린(비티 슈람)같은 선수나, 외모가 떨어진다는 이유만으로 탁월한 능력을 보았음에도 스카우트되지 않는 일은 감소했으리라 믿는다-혹은 믿고 싶다-. 이중에서도 마라 후치(메간 카바나프)가 스카우트 되던 장면과, 여성 프로 야구를 홍보하기 위해 선수들에게 요구되었던 여러 ‘노력’ 에 관해선 선수 개인의 항의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현실의 벽이 존재한다는 걸 실감케 한다. 확실히, “여성과 스포츠는 결국 여성과 남성의 문제, 혹은 여성과 사회의 문제라는 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전통적, 관습적인 이유가 있다(김은영, 이혜란., 2004)”고밖에 말하기 어려운 장면들이다.
특히 구조적인 요소를 지적할 수밖에 없는 것은, 선수들에게 사실상의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위에서 짧게 이야기한 스커트형 유니폼을 입지 않을 때엔 더 이상 선발된 야구 선수일 수 없으며, 신문사 촬영팀의 인터뷰에 기꺼이 응하지 않는다면, 여성 프로 야구 리그는 존속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가정이 그들을 몰아붙인다. 이밖에도, 더불어 선수들이 심각하게 자각하진 않았으나, 관객에게 울림을 주는 장면 역시 있다. 전미 여성 프로 야구라는 이름이 붙어있고, 자작곡 가사엔 캐나다와 스웨덴을 비롯한 국가 이름이 등장하는데도 미국에 사는 흑인 여성은 모집 대상조차 아니었던 점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장면은 능력이 출중하다면 어떤 인재든 등용한다는 능력주의가 기실 미국 사회의 백인 남성에게만 적용된 것이 아니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게 한다. 브레히트까지 인용할 생각은 없으나, 《그들만의 리그》는 영화 내에서 이들의 여정이 그리 낭만적이지만은 않았다는 점을 넌지시 보여줌으로써 관객에게 어느 정도의 껄끄러움을 남기는 데에 성공했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점에서 이 영화가 지닌 사회문화적 가치를 새삼 깨달을 수 있다.
출처: 네이버 영화 포토
스토리에 진입하기 전 서론이 너무 길었다. 이젠 《그들만의 리그》의 주인공 격인 도티&키트 자매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다. 언뜻 보기에 둘은 야구 경기를 한다는 것 외에 크게 공통점을 찾기 어려워 보인다. 야구를 향한 태도 역시 크게 다르다. 언니인 도티 힌슨(지나 데이비스 & 트레이시 레이너)은 능력이 출중하나 야구에 뜻을 두지 않았으며, 동생인 키트 켈러(로리 페터 & 캐슬린 버틀러)는 도티에 비해 실력이 뛰어나진 않으나, 야구에 대한 열정은 하늘을 찌른다. 그런데 이 외, 자매의 연결고리를 부각시킬만한 외모가 닮았다던가, 공유하는 습관이 있다던가 하는 장면은 특별히 보이지 않는다. 도티와 키트의 관계에 눈길이 가는 이유는 따로 있다. 키트가 언니에 대해 열등감을 품고 있다는 점이 영화 곳곳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영화 도입부에서부터 키트는 강하게 불만을 토로한다. 도티와 함께 있을 때 스포츠 실력에 대한 비교를 당하는 것은 물론, 외모에 대한 비교까지 당하는 경우가 잦다고. 그러던 와중 게임에 임하던 순간, 팀을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한 언니에게 키트는 불만을 품는다. 길게 이끌 수 있었으나, 제법 짧게 묘사된 이 갈등은 결국 키트가 트레이드 되는 것으로 일단락된다.
편의상 도티와 키트를 주인공격의 인물이라 명명하긴 했으나, 영화가 이 둘의 서사에만 오롯이 집중했다고 보긴 어렵다. 우리는 키트가 트레이드 된 후 라신느에서 자신의 실력을 입증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쏟아 부었는지 알 수 없고, 남편인 밥(빌 풀만)이 전쟁에서 돌아오자마자 야구를 접고 고향으로 돌아가려던 도티가 어떤 결심을 하고서 경기장으로 복귀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키트가 도티에게서 승리하는 장면을 더욱 극적으로 만들고자 했다면 그의 노력이 촘촘히 쌓여지는 순간을 삽입하여 마지막 경기에서 승리를 거머쥐는 순간, 관객이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시퀀스를 넣었어야 했는데, 페니 마셜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도티가 감독인 지미 듀간(톰 행크스)의 말을 듣고 야구에 대해 숨겨진 자신의 열정을 깨닫고 돌아오는 모습을 삽입하지도 않았으며, 키트와의 경기에서 패배한 후 크게 좌절하는 모습을 넣지도 않았다. 감독이 잡아주는 숏이란 그저, 도티가 놓친 공과 승리를 만끽하는 도티를 멀어지는 샷으로 넣어준 것이 전부다. 팀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투수에게 높은 공을 치라고 했던 도티가 자신의 실수에 대해 크게 자책하는 모습 역시 없다.
그렇기에 나는 도티가 마지막 순간 공을 놓친 건, 그의 자발적 선택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마치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2002)의 유명한 대사, “결과를 알고 있을 때 우리는 미래를 선택할 수 있다.”는 말처럼, 언니인 자신이 아니라 야구를 위해 온몸을 날리는 키트를 위해 기꺼이 손을 놓은 것은 아니겠는가, 하고. 전미 선수로 뽑혔을 때부터 가지 않겠다고 말했던 도티는 지미가 감독직을 성실히 수행하지 않을 때에도 나서서 게임을 지휘했을만큼 매 순간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그는 지미가 야구를 사랑했던 자신의 삶을 망친 5년에 대해 털어놓는 순간에도 감정적으로 꿈쩍하지 않았다. 그는 남편이 돌아오자마자 미련없이 짐을 싸 고향으로 떠나고자 했으며, 진심으로 키트가 아닌 자신이 트레이드되길 원했다.
생각해보자. 처음부터 도티가 전미 야구에 들어오게 된 이유는 오로지 하나, 동생 키트가 떠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기 위함이었으며, 그가 남편이 돌아왔을 때 자신이 경기 내에서 어떤 위치인지 알면서도 야구를 떠나면서까지 피하려 했던 것은 혹시 모를 패배에 대한 두려움이나, 자신의 기량이 떨어졌다던가, 부상을 입었기에 나오는 내적 갈등 때문이 아니라, 키트와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키트를 밀어내면서까지 피치팀에 남으려 할 의도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일 뿐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그를 다시금 경기장으로 부른 건, 남들이 몇 번이고 말한 ‘숨겨진 야구에 대한 열정’때문이 아니라 ‘하나뿐인 자매 키트에 대한 애정’일 것이다. 야구를 향해 온 몸을 내던지는 동생에게서 야구를 떠나는 것 정도로 화답해선 안된다는 생각에 돌아왔을 테니까. 그러하므로 도티와 키트는 모두 승리한 것이라 봐도 무방할 터다. 도티는 자매를 되찾았고, 키트는 야구를 되찾았으며, 둘 모두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살았으므로. 그러하니 이 자매가 닮은 부분은, '야구를 한다'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삶에 있어선 누구보다 고집이 세다는 점이며, 어려운 시대임에도 꺾이지 않고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선택했다는 점에 있으리라.
출처: 네이버 영화 포토
끝으로, 영화 속 몇 남성 캐릭터를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좀 섭섭한 일일 것이다. 예컨대 마라의 아버지, 마라의 남편이 되는 넬슨, 도티의 남편인 밥, 그리고 감독인 지미 듀간(톰 행크스)까지. 이 당시 여성들은 남성들의 트로피로 존재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 및 문화가 팽배했으나, 그것이 얼마나 피상적이고 무의미한 것인지를 이들이 함께 증명하기 때문이다. 같은 여성마저 마라를 향해 ‘야간 선수로 세우라’고 이야기하지만, 마라의 아버지와 남편인 넬슨은 그에게 크나큰 자부심을 품고 있다. 지미의 말에 따르면 ‘흔치 않은', 몇 안되는 똑똑하고 괜찮은 남자 밥은 스포츠라는 전통적 여성상과 어긋난 일을 하는 아내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으로 포용한다. 단순히 남성들이 없는 자리를 '계집애'들이 들러리로 채웠다 생각하였으나, 선수들이 진정한 스포츠맨십을 발휘하는 것을 발견한 지미는 자신의 리딩 방식도 바꾸려 노력(!)하는 것은 물론 도티에게 찬사를 보내며, 다른 팀의 감독직이 왔음에도 거절하기에 이른다. 그러니 보라, 건강한 관계 속에서 상대를 나와 동등한 인간이라 인정할 때 우리가 얼마나 다정한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달리 말하자면, 접점 없이 먼 자리에서 선수를 조롱하던 남성 관객은 성 차별주의자의 관점에 입각하여 선수를 오로지 구경거리로만 취급하였고, 여성 프로 야구 리그를 창단했다 한들 자본주의적 관점에 입각하여 여성 선수를 경제적 손실을 방어할 대체물정도로만 인식했던 월터 하비의 태도는 인본주의적 사상에서 크게 어긋났다는 점에서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니 이 영화 내의 모든 여성과 남성 캐릭터는 각각의 위치에서 우리에게 성별과 인종을 떠나, 사람을 사람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가장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전달한다. 그리고 나는 이런 90년대식 인간적 온정을 사랑한다.
★★★★
참고문헌
김은영, 이혜란. (2004). 여성스포츠의 성립배경과 페미니즘적 제 이론 고찰. 한국여성체육학회지, 18(2), 35-45.
서재철. 2016. 영화《그들만의 리그(1992)》에 대한 여성스포츠역사 및 사회적 성 역할 관점의 `교육적` 읽기. 한국여성체육학회지 30: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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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캡틴
더 캡틴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어처구니 없지만, 비이성, 광기의 시대에서는 나타날 수밖에 없는 블랙 코미디. 영화는 매우 역설적으로, 전쟁을 일으킨 독일의 입장에서 독일의 전쟁범죄를 고발하고 있다. 마치 '세르비안 필름'처럼 세르비아인 감독이 자기 나라에서 저지른 폭력을 포르노에 빗대어 고발하는 것처럼, 이 영화에서는 주인공 헤롤트가 우연히 발견한 장교복을 입으면서, 제복의 힘에 경도되는 과정과 인간성이 파괴되는 과정을 잘 드러내고 있다.
전쟁이 거의 끝나가던 1945년 4월, 헤롤트 일병은 탈영한다. 영화에서도 잘 드러나듯, 이 시기에 독일군 탈영병이 꽤 많았던 모양이다. 전쟁 끝무렵이니 완전히 수세에 몰린 독일군이 계속 후퇴하고 있었고, 여기서 죽는 건 그야말로 개죽음이라고 생각한 병사들이 하나둘 탈영을 시도했다.
독일 헌병대에서는 이렇게 탈영한 군인을 잡아들이거나 즉결 처형하기도 했는데, 이 와중에 헤롤트 일병의 실화가 발생한다. 헤롤트는 탈영을 하지만 당장 어떻게 움직여야 할까 막막하다. 그러다 우연히 길가에 세워진 군용 짚차에서 트렁크를 발견하고, 그 안에 공군 대위의 제복과 군화를 비롯한 훈장 등 완벽한 세트를 발견한다.
고작 스무 살의 어린 헤롤트였지만, 이미 1년 정도 전방에서 전투에 참전했었고, 초반에는 매우 영웅적인 군인이어서 '철십자훈장'을 받을 정도로 공로를 세우기도 했다. 그런 헤롤트가 어떤 이유에서 탈영을 한 것인지 이유가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어리지만 이미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었고, 철십자 훈장까지 받은 경력을 보면, 나름 배짱도 있고, 머리도 있는 인물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헤롤트는 장교 군복을 차려 입고, 스스로 장교가 된 것으로 자기 최면 및 이미지 변신을 시도한다. 그리고 우연히 만나는 탈영병을 모아 '헤롤트 부대'를 만든다. 그는 후방을 다니며 마주치는 탈영병을 규합하고, 농가에서 밥과 술을 얻어 먹으며 다니는데, 탈영병을 추적하는 헌병대를 만나 위기에 놓이지만, 헤롤트는 자기가 '최고지도자'의 직접 명령을 받고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큰소리 치며 위기를 넘긴다.
헌병대 대위와 함께 탈영병들이 잡혀 있는 임시수용소에 도착해 수용소장 쉬테의 환대를 받는다. 쉬테는 탈영병들을 죽이고 싶지만, 그럴 경우 자신이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에 불만만 터뜨리고 있는데, 헤롤트가 쉬테에게 '총통의 특명'을 받고 있으니 자신이 직접 탈영병들을 처리하겠다고 큰소리 친다.
헤롤트는 단지 자신이 살기 위해 공군 장교 노릇을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장교가 되었다는 확신에 차서 말하고 행동한다. 그가 일병이었을 때라면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판단과 결정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가 탈영병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 권력을 쥐게 되면서, 상황은 극단으로 치닫는다.
여기서 벌어지는 상황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실제 역사에서는 헤롤트와 그의 부대가 탈영병 약 90여 명을 대공포로 살해한다. 탈영병이라 해도 같은 독일인이고, 전선에서 함께 싸운 전우들임에 틀림없으며, 헤롤트 자신도 탈영병이었던 걸 생각하면, 헤롤트는 자신이 탈영병이라는 죄의식을 감추기 위해 오히려 더 극단적으로 행동했을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 헤롤트가 갑자기 장교복을 입고, 장교의 권력을 갖게 되면서, 자신도 제어할 수 없는 폭력을 휘두르게 된 것이다. 이때 헤롤트의 본성이 잔혹하고 폭력적이었는지, 아니면 그동안 전투를 통해 선량한 청년이었던 헤롤트가 점점 괴물로 변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른 하나는, 헤롤트의 행위가 자신이 의식하지 않고 있어도, 독일군이 같은 독일군을 살해한다는 점에서 나치의 폭력성, 전쟁광 히틀러와 독일군의 야만성을 풍자하는 장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결국 헤롤트의 광기는 순박한 청년이 전쟁에서 미쳐가는 과정과 함께, 당시 1차,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광기와 폭력성을 동시에 드러내는 매우 상징적인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 아이러니한 사건은 뒤에서 발생한다. 탈영병들을 살해한 헤롤트와 그의 부대는 신고를 받고 들이닥치 육군헌병대에 체포된다. 헤롤트도 이 과정에서 체포되며 그가 장교가 아닌, 일병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헤롤트는 군사법정에 서게 되는데, 재판장은 장교사칭, 탈영병 학살의 죄를 물어 사형을 집행하려 하지만, 다른 장교가 헤롤트의 행동은 독일군인으로 충분히 할 수 있었던 행동이며, 독일이 전쟁에서 져도 나중에 독일군의 일부는 비밀 저항조직을 만들어 적들과 싸울 것이며, 이때 헤롤트 같은 군인이 필요한 인재라고 옹호한다.
독일의 군부는 연합군에 패배한 다음에도 어떻게든 다시 전쟁을 일으키려는 야욕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헤롤트 같은 인물을 독일군의 훌륭한 인재라고 생각할 정도라면, 독일군부는 히틀러처럼 이미 정상적인 사고방식이 작동하지 않는, 괴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영화는 헤롤트가 군사법정에서 재판을 받았지만 무사히 탈출해 숲으로 사라지는 것으로 끝나지만, 실제 헤롤트는 그로부터 얼마 살지 못하고 참수형을 당한다. 전쟁에서는 살아남았지만, 독일이 패하고, 헤롤트는 항구도시이자 해군주둔지인 빌헬름스 하펜으로 가서 굴뚝청소부로 일하며 살았다. 그가 욕심부리지 않고 성실하게 살았다면 아마 늙어죽을 때까지 살았겠지만, 1945년 5월에 빵을 훔치다 영국 해군에게 체포된다. 당시 영국 해군은 이 지역을 점령하고 군정을 실시하고 있었다.
단지 빵을 훔쳤다는 가벼운 죄였지만 어찌 된 일인지 헤롤트는 자기가 군인이었을 때 저질렀던 장교사칭과 탈영병 학살까지 모두 밝혀졌고, 영국 해군은 헤롤트를 끌고 수용소가 있던 아셴도르퍼모어의 수용소 부지로 이송되어 학살당한 장소에서 195구의 유해를 발굴한다. 영국 해군은 헤롤트와 그의 부대원들을 검거했고, 모두 여섯 명이 체포되어 다시 재판을 받았다. 이 가운데 다섯 명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헤롤트도 포함되었다. 이들은 1946년 11월 29일, 볼펜뷔텔 교도소에서 단두대에 목이 잘리는 참수형을 선고받고, 모두 참수되었다.
이때 헤롤트의 나이는 불과 스물 한 살. 전쟁이 헤롤트를 괴물로 만든 것일까, 아니면 헤롤트의 내면에 있던 괴물이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튀어나온 것일까. 권력을 가진 자가 광기에 휩싸이기 쉽고, 이성을 잃으면 얼마나 위험해지는가를 헤롤트의 행동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직 어리기만한 헤롤트는 그래서 더욱 쉽게 권력의 노예, 권력의 광기에 영혼을 빼앗겼을 수 있다. 당시 독일 전체가 이미 미쳐버렸고, 나치의 광기에 휩싸인 뒤여서 청년들의 생각도 그렇게 세뇌되었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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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신비한 동물들과 덤블도어의 비밀> 티저 예고편
다시 시작된 마법 세계의 혼돈!
운명을 건 덤블도어와 그린델왈드의 본격적인 대결,
과연, 뉴트의 운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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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슈퍼노바> 티저 예고편
여기, 우리의 별이 머물렀다.
오랜 시간 서로의 구세주이자 사랑하는 연인,
그리고 최고의 친구로 지내온 ‘샘’(콜린 퍼스)과 ‘터스커’(스탠리 투치).
기억을 잃어가는 ‘터스커’와 그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샘’은
마지막 여행을 떠나게 된다.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여행이 끝나갈수록,
그들의 감정은 점차 고조되는데…
차마 사라지지 못하고 우주를 떠돌 마음의 파편,
그곳에 가장 빛나는 사랑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