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외딴 산장 다락에서 떨어져 죽었다. 처음 발견자는 개와 산책을 나갔던 시각 장애인 아들. 집에는 엄마가 혼자 있었다. 이것은 사고일까 자살일까 살인일까.
일반적인 추리물은 사건이 어떻게 벌어졌는지 역학관계를 짜 맞춘다. 그러다 보니 종종 '트릭'이 얼마나 촘촘하게 잘 짜여있는지, 또 그것을 어떻게 기가 막히게 파헤치는지에 집중한다. 거기엔 사건에 대한 깊이 있는 사색이나 고찰은 별로 없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어느 가난한 종이 주인의 학대를 이기지 못해 살인을 했고 감옥에 가는 게 두려워 자기가 하지 않은 것처럼 꾸몄다면, 결국 그 종이 어떻게 살인을 했는지 트릭을 찾아내는 것이 대부분의 추리물이다. 그것이 재미있고 자극적이니까. 다 해결하고 나서야 미국식으로는 잠깐 플래시백 해서 범인의 과거를 보여주며 씁쓸한 마무리가 되거나, 일본식이라면 추리해 낸 괴짜 주인공이 범인에게 일장 교훈연설을 하며 범인의 눈물을 쏟게 만들면 끝난다. 거기엔 그 사회는 왜 종과 주인이라는 계급이 존재하는지, 그들은 원래 그런 성격인 건지 다른 이유로 사이가 점점 틀어진 것인지, 사회적으로 해결할 방법은 없었는지, 살인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그 둘의 문제에 관심은 가졌을지에 대한 전방위적인 생각은 할 겨를이 없다. 그럼 스토리가 지루해지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추리 마니아들은 미스터리 커뮤니티나 방탈출 게임 등으로 아예 서사는 없애고, 트릭을 만들고 추리하는 것을 즐긴다. 그렇게 장르물을 즐기는 것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모든 장르물은 장르성이 강해지면 사람보단 사건이 두드러지게 마련이니까. 그러나 그것이 현실이 되면 달라진다.
쥐스틴 트리에 감독의 <추락의 해부>는 처음엔 평범한 추리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부부 사이 이면에 감춰진 몰락한 관계와 감정에 대한 이야기이며 사건을 논리로만 바라보는 사회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더 나아가서 남녀의 이념갈등에 대한 은유도 들어있다.
해부
독일인인 유명한 소설가이자 번역가 산드라(산드라 휠러)는 자신이 살고 있는 프랑스 외딴 산장에서 그녀를 찾아온 여학생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다락에서 큰 음악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아들인 다니엘(밀로 마차도 그라너)은 안내견 역할을 하는 개 스눕(메시)과 함께 산책을 나간다. 음악소리는 점점 커지고, 그녀는 남편이 일부러 인터뷰를 방해하는 것 같다고 하며 인터뷰를 중단한다. 잠시 뒤, 다니엘이 산책에서 돌아오자 다니엘의 아빠, 프랑스인 사뮈엘(사뮈엘 테이스)이 집 밖 마당에 쓰러져 죽어 있다. 사뮈엘의 직접적인 사인은 길고 단단한 무언가에 머리를 세게 부딪히게 되어 두개골 손상으로 죽게 된 것이지만, 그 손상이 된 원인을 찾기가 힘들었다.
사건의 초기에는 직접증거를 토대로 추론을 해나간다. 예를 들어 어떤 여성이 교통사고 후 두개골이 골절되어 식물인간 상태로 치료받다가 폐렴에 걸려 사망한 일이 있었다고 하자. 그럴 경우 직접 원인은 폐렴이지만, 폐렴의 원인인 두개골 골절, 두개골 골절의 원인인 교통사고, 그 교통사고의 의도성까지 사망진단서에 기재하며 병인 폐렴으로 죽었지만 사인은 '병사'가 아닌 '외인사'가 된다.
<추락의 해부>에서 산드라가 사뮈엘을 죽였다고 생각하는 검사는, 어떤 방식으로 그녀가 죽여야 사망현장처럼 되는지 시뮬레이션을 통해 사건을 재조립한다. 산드라 측에서는 자살 혹은 사고로 떨어졌을 경우에도 그럴 수 있다며 다양한 증거들과 시뮬레이션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런 추리로 사건의 원인을 정말 제대로 알 수 있을까? 산드라는 유력한 용의자지만 또한 그녀가 범인이라는 증거도 불충분하다. 살해에는 살해의 동기가 있어야 하는데 그 동기가 부족했다. 그러던 중 다니엘이 사건 당일 산책 나가기 전 부모가 대화하는 것을 들었다는 증언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고, 다니엘이 증언과 다른 지점이 밝혀지며 사건의 해부는 다른 양상으로 흘러간다.
[이하 스포일러 포함]
실험
처음에 다니엘은 집 밖 창문 밑에서 부모가 일상적인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고 했었다. 하지만 경찰들의 실험 결과, 당시에는 음악이 크게 틀어져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서는 일상적인 목소리 톤으로 이야기를 하면 들을 수가 없었고 그건 집 안에서만 가능했다. 그제야 다니엘은 자기가 위치를 착각했다고 말을 바꾼다. 사실 정황을 보건대, 다니엘은 기둥마다 다른 테이프를 붙여놔 구분을 하는데 시각장애인인 그가 테이프를 혼동하긴 힘들어 보인다. 그렇다면, 다니엘은 엄마가 살인자로 몰리게 되지 않길 바랐기 때문에 둘이 언성을 높여 말하는 혹은 싸우는 소리를 일상적인 대화를 했다고 말을 바꿨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에 검찰과 변호사는 다양한 방식으로 부부관계를 해부하기 시작한다. 직접증거는 나오지 않으니, 정황증거, 즉 살인의 동기와 자살의 동기를 각각 파헤친다. 다니엘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줄 것을 우려했던 재판부는 다니엘이 이후의 재판은 참석하지 않기를 권고했지만, 다니엘은 부모 관계의 진실을 듣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 재판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생각보다 그들의 골이 훨씬 깊었던 것이다.
부부싸움을 하는 집은 꽤나 흔하다. 부부싸움은 서로를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서로의 상처를 제일 깊게 건드린다. 부부는 위태로운 실로 연결되어 있으며, 가정이라는 울타리는 너무 쉽게 부서져버릴 수 있다. 하지만 싸운다고 해서 그것이 살인을 했다는 증거가 될까? 사뮈엘의 녹취에 들어있는 둘의 싸움은 관계가 몰락해 가는 끔찍한 과정을 보여주었지만, 그것이 사람을 죽이는 정도인지는 의문이 든다.
산드라는 다니엘에게 '있는 그대로 말하면 된다'라고 말하지만, 다니엘이 있는 그대로 말한 것들은 다 산드라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결국 아들 다니엘은 마지막 증언을 신청한다. 그리고 그 변론이 있을 때까지 엄마와 떨어져 있는 것을 선택한다.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할 수 있지만, 이것은 다니엘이 영특하게도 엄마를 구하기 위해 한 행동 같다. 수사 초반 자신의 어설픈 둘러댐이 '경찰의 실험'으로 들통나고 엄마는 점점 살인범으로 몰렸다. 있는 증거 없는 증거 다 끌어모아 변론을 하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무언가 실험을 통해 주장을 확증받는 게 필요했다. 엄마가 가고 난 후 다니엘은 아스피린 10알을 스눕에게 먹이고, 스눕이 쓰러지자 토하게 만들어서 그 냄새와 스눕의 상황이 그때와 비슷하다며 울먹인다. 스눕이 그때도 똑같이 지금처럼 쓰러졌었는데, 아빠의 아스피린이 들어간 토사물을 먹었던 것 같다고.
사뮈엘이 토한 토사물에 아스피린이 10알 정도 있었다는 건 앞에서 볼 때 굉장히 흐릿한 기억 속에서 나온 몇 가지 이야기를 짜 맞춘 느낌이었다. 아스피린은 실제로 수십 알을 과다복용하면 인간에게도 치명적이다. 엄마가 가고 난 후 스눕에게 아스피린을 먹이는 실험을 한 것으로 보면, 다니엘은 처음부터 그날의 증언을 하려고 했다. 그럼 왜 엄마를 내보냈을까. 그날 사뮈엘이 정말로 아스피린을 먹고 토한 것인지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그런 심각한 일이 있었다면, 사뮈엘이 죽었을 때 바로 자살시도가 있던 사람이라는 게 생각나야 했다. 지금까지의 '사뮈엘의 자살시도' 증언이 조그만 실제 정황으로 엄마와 변호사가 말을 맞춰서 만들었다고 한다면, 지금은 감시자가 있기 때문에 엄마와 말을 맞출 수가 없다. 그러면 가짜 실험을 위해서 엄마가 주변에 없는 것이 더 낫다.
다니엘은 결국 실험으로 자신의 마지막 증언에 무게를 더했다. 아스피린을 먹고 아픈 스눕을 동물병원에 데리고 아빠와 갔다 오면서,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도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말을 했기 때문에 자신은 자살이라고 생각한다고. 생각해 보면 조금 이상하다. 사뮈엘이 자살까지 하려고 아스피린 수십 알을 먹고 토할 정도였다면, 그날 스눕보다도 아빠가 병원에 가서 투석 치료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굉장히 멀쩡하게 차를 운전하는 모습으로 회상씬이 나온다. 하지만 지금은 판결을 내리기 직전이고, 다니엘의 증언은 실험을 더해 논리보단 감성으로 참심법관들에게 전해졌다. 결국 산드라는 무죄가 된다.
다니엘은 성경에 나오는 이름인데, 특별한 지혜를 가지고 꿈을 해석하는 인물이다. 그 이름의 뜻은 '하느님은 나의 심판자'라는 뜻이다.
관객
프랑스는 중요 형사사건에서 참심제를 하고 있다. 참심제란, 일반 시민이 단순한 의견을 내는 배심원이 아니라 형량 선고까지 내릴 수 있는 참심법관으로 임명되어 재판하는 제도다. 재판에 참심법관은 9명, 법관은 3명이 참여한다. 법률 전문가에게는 법적인 논리 등이 중요하지만, 참심제에서는 아무래도 일반 시민이 참심법관으로 참여하므로 감정이나 정황에 호소하는 것이 재판에 유리할 때가 많다.
그래서인지, 결정적인 증거가 없는 이 재판은 치밀한 법적 공방보다는 점점 자극적인 내용으로 흘러간다. 검사는 산드라의 과거 소설들이 실제 그녀 주변에 일어났던 사건과 유사하다며, 이와 비슷한 사건이 소설에 있었으니 그걸 그대로 실행하려 한다고 압박한다. 법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지켜보는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흥미로운 데다 일반 시민으로 구성된 참심법관들도 혹할만한 내용이다. 재판을 참관하러 온 사람들은 사뮈엘의 죽음에 슬퍼하거나 산드라의 억울함에 안타까워하는 게 아니라, 마치 재미있는 리얼리티쇼나 미스터리 법정 수사극을 보는 듯 웃으며 관람한다. 이미 산드라의 재판은 프랑스의 구경거리다.
여기서 살인자가 되느냐 아니냐의 갈림길에 놓인 주인공들을 제외한 다른 시민들의 모습은, 범죄 콘텐츠를 대하는 우리들의 모습과 닿아있다. 우리도 어느새, 이 영화를 보면서 산드라가 정말 사뮈엘을 죽였는지, 죽였다면 어떻게 죽였는지에 더 신경을 쓰며 그들의 아픔조차 즐기고 있지 않았던가.
다니엘은 마지막 증언에서 '어떻게'보다 '왜'가 더 중요하다고 한다. 이 사건은 산드라가 살인자면 배드엔딩이고 사뮈엘이 자살이면 해피엔딩이 아니다. 그 반대도 아니다. 둘 다 부모사이의 관계가 몰락하면서 생긴 너무나 슬픈 결말인 것이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옭아매긴 했어도, 만약 자살이라면 사뮈엘의 감정이 무너지게 된 것에 산드라의 책임도 있으니까.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사건 당사자들의 아픔이나 사건이 일어나게 된 큰 원인을 뒤로한 채 사고 자체만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나 그 원인이 사회나 정치적인 문제라면 사건의 '왜'를 더욱 축소하고 은폐하고, '어떻게'만 말하려 하기도 한다. 만약 산드라의 변호인 쪽이 '사뮈엘은 사고사였다'라는 걸 가닥으로 잡고 주장했다면, 판결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참심법관인 일반시민이 볼 때 그런 행동은 자신의 책임을 완전히 회피하려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어떻게가 아니라 왜. 이 말은 이 재판을 지켜보는 침심법관에게, 프랑스 시민들에게, 또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뱉는 따끔한 일갈이다.
이념
영화의 불어 원제인 <Anatomie d'une chute>는 중의적인 제목이다. 프랑스어 Chute는 영어 Fall에 해당하지만, Chute는 여성형 관사 une이 붙은 여성형 명사다. 즉 이 제목을 프랑스어로 들으면 여성인 산드라가 해부당할 것 같은 느낌적 느낌을 준다. 하지만 영어인 <Anatomy of a fall>에선 그 느낌이 없다. 게다가 한국어 제목인 <추락의 해부>까지 오면, Chute나 Fall이 가지는 중의적 뜻인 '몰락', '패배', '타락', '죄'등의 뉘앙스가 없어진다.
이처럼 언어가 주는 뉘앙스에 대해서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심지어 재판에서, 산드라의 변호사는 산드라에게 '진실을 전하고 싶을 때는 꼭 프랑스어로 이야기하라'는 식으로 말한다. 하지만 산드라는 프랑스어를 영어만큼 잘하지 못한다. 결국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 영어로 이야기하고 법관들은 통역 이어폰을 끼고 듣게 된다. 또 프랑스인인 사뮈엘과 독일인인 산드라는 서로의 언어가 아닌 영어로 소통하는데, 이것은 남녀 서로가 자신의 고유한 언어가 아닌 방식으로 서로 맞춰가며 말하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언어에는 철학과 이념이 깃들어있다. 어느 한 언어로 말하는 것은 완벽하지 못하면 그 뉘앙스를 제대로 번역할 수가 없다.
언어와 소통의 어려움, 산드라와 다니엘의 관계나 재판의 과정은 가부장제와 페미니즘 간의 대립을 은유하고 있다. 마치 몰락한 가부장제를 페미니즘이 죽였다고 재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은가?
사뮈엘은 산드라가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고 말한다. 시간, 꿈, 섹스까지도. 그는 산드라가 괴물 같다고까지 말한다. 또 산드라는 산드라 나름대로 억울하다. 산드라는 사뮈엘의 나라인 프랑스에 살기 때문에 내내 모국어인 독일어를 쓴 적도 없다. 다니엘이 시력을 잃어버린 사고는 사뮈엘의 잘못이 있다. 섹스를 거의 하려 하지 않으니 외도를 한 거라고 한다. 둘은 각자 나름대로 배려했지만 상처 입었고, 사회적으로 산드라는 점점 잘 나가고 사뮈엘은 스스로 몰락해 간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역시 사랑이다. 산드라는 아들 다니엘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이든 아빠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돌이켜보면 모든 것은 사뮈엘이 좋아서 자처한 일이었고, 소설을 포기하고 아이디어를 넘겨준 것도, 사뮈엘을 돌보겠다고 한 것도, 프랑스에 와서 산장에서 살게 된 것도 사뮈엘이 결정한 일이다. 사뮈엘은 누구의 탓도 아닌 스스로 그런 상태에 빠지게 된 것이다. 누구보다 사뮈엘 자기 자신이 그것을 가장 잘 알았을 것이다. 산드라에게 분노를 표출하지만, 그것은 산드라를 향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기 자신을 향한 분노이기도 했다.
극단적으로 해석하면 가부장제의 몰락에 대한 페미니즘의 재판처럼 보이지만, 또한 이것은 완벽한 미러링이라고도 볼 수 있다. 산드라와 사뮈엘은 통상적인 남녀역할이 완전히 바뀌어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보면, 사뮈엘의 외침은 바로 여성들이 외치던 말이다. 여성들은 집안일에 치여, 자신이 원래 하고 싶던 꿈은 하지도 못한 채, 바람이나 피우는 남편 뒷바라지나 하고 살았다. 결국 이 영화는 가부장제를 깔아뭉개거나 페미니즘을 올려치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생기는 비극을 이해하자고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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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의 해부>는,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겉으로 드러난 것들이 아니라 해부해야 볼 수 있을 정도로 깊은 곳에 감춰져 있다고 말한다. 그곳에 우리가 미처 몰랐던 사건의 이유들이 숨어있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 몰락하기 전에, 그 이유들을 조금이라도 바라볼 수 있다면 비극을 피할 수 있을까?
어떻게가 아니라 왜. 다니엘의 말이 자꾸만 귀에 맴돈다.
*개의 이름이 스눕이라고 하면, 사실 바로 떠오르는 이름은 미국 힙합의 전설 스눕독이다. 스눕독 역시 1집이 나올 당시 살인사건에 연루되었고, 살인자라는 비난을 받으며 재판을 몇 년이나 한 끝에 무죄판결을 받은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