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필 K2023-05-24 06:45:46
후까시랑 쌈마이는 적지만 일단 익숙한 느낌의 재미는 있다
영화 <도어맨> 리뷰
기타무라 류헤이 감독은 흔히 "쌈마이의 귀재"라 부를만한 감독이다.
예술성 영화랑은 다른 속칭 B급의 매력을 잘 알고 있는 감독이며, 그는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컬트 영화 <미드나잇 미트 트레인> 부터 최신작인 <더 프라이스 위 페이>까지 이러한 매력을 잘 밀고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영화 중 하나, <도어맨> 또한 그러한 매력이 완벽하지는 않지만 괜찮게 들어간 영화이다.
사실 이런 줄거리 흔히 알고 있을 것이다.
주인공이 군인이나 용병 같은 거 하는데 은퇴함 -> 그냥 평범하게 사는 중 -> 근데 괴한이나 범죄 조직이 모종의 이유로 습격 -> 그냥 일반인인 줄 알고 나대다가 역관광 이런 내용 많이 보았을거다.
이 영화도 이런 예상가는 줄거리를 그대로 따라간다.
다만 이런 흔한 스토리를 알면서도 보는 이유는 그 "과정"에 있을 것이다.
속칭 "역관광" 당하는 그 장면들의 매력이 얼마냐에 따라 영화의 평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나이트메어 시네마>에서 감독한 단편 "Mashit" 같은 경우에는 아주 피칠갑을 하고 B급 감성이 그대로 묻어 나왔는데, 이번 영화 등급이 15세인 걸 보면 예상가겠지만 생각보다 수위가 낮아 아쉬운 부분이다.
그렇다고 해서 액션이 심심한건 아니지만, 뭔가 좀 더 보여주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이 수위 조절을 한 거 같다는 느낌이 드는 장면이 몇몇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다만 스피드하고 흥미로운 전개덕에 오락성은 충분했다 생각이 든다.
또한 <레옹>으로 유명한 장 르노 배우를 악역으로 만나볼 수 있어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다만 본 영화에서는 무난한 연기를 보여줘서 장 르노 배우만의 매력은 크게 보이지 않았다.
익숙한 배우를 봐서 좋았다 이 정도의 느낌.
*이 글은 원글 없이 새로 작성된 글이며, 출처란에는 작성자의 인스타그램 주소를 기재하고 있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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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길이네 곱창집> - '내일의 희망을 붙잡고 살아간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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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길이네 곱창집
(焼肉ドラゴン, Yakiniku Dragon)
개봉일 : 2020.03.12 (한국 기준)
감독 : 정의신
출연 : 김상호, 이정은, 마키 요코, 이노우에 마오, 오타니 료헤이, 오오이즈미 요
'내일의 희망을 붙잡고 살아간다는 것'
이 영화는 오늘 당장 손에 잡히는 희망이 없어 어쩌면 내일은 있을지 모르는, 내일의 희망을 잡고 살아가는 가족의 이야기다. 전쟁 직후 만신창이가 된 조국에서 쫓겨나듯 떠나온 용길과 영순은 낯선 땅에서 부부의 연을 맺는다. 용길과 영순과 함께 떠나온 시즈카, 리카, 미카는 한 자매가 되고, 막내 토키오가 세상에 나온다. 이들은 한국인이면서 일본인이고, 지금 밟고 있는 나라 땅에 살아가는 국민이면서 국민이 아닌 사람들이다. 경제는 매우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용길이네 곱창집이 있는 판자촌은 하루가 다르게 무너져내린다.
강한 태풍 한 번이면 날아갈 듯 연약해 보이는 작은 판잣집에서 함께 사계절을 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또 아껴가며 긴 세월을 버텨온 용길의 가족에게서 여러 발효 식품들의 냄새가 풍기는듯하다. 뜨거운 여름 햇살 아래 아주 진하게 묵어버린 된장과 고추장. 그런 것들의 냄새 말이다.
머리 위로 쉼 없이 비행기가 날아다니고 있건만 내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 탈 비행기는 없는 현실이 슬프다. 하지만 슬퍼하고 주저앉는다고 해서 해결될 일은 아무것도 없다. 무조건 부딪히고, 이겨내고, 살아남아야 한다. 용길은 그렇게 말한다. 그는 나를 위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낯선 땅에서 가족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힘을 쥐어짜본다. 나라를 위해 한쪽 팔을 바쳤건만, 돌아온 건 힘겨운 삶뿐이다.
다른 나라와 조금은 다른 시기이긴 하지만, 최근에 개봉한 영화 <미나리>를 보며 <용길이네 곱창집>을 떠올리기도 했다. 아직 씨조차 뿌리지 못한 단단하고 낯선 타국 땅 위에 나와 나의 가족들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가족의 모습이 서로 닮아있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미국이든 일본이든 어디든.. 타국살이라는 것이 참 눈물 나는 일이란 걸 이만큼 자라고 나서야 알았다. 아무튼, 지지 않고 꿋꿋이 뿌리를 뻗어내리고 있는 그들의 내일엔 아주 작은 희망이 움틀 수 있길 바랄 뿐이다.
용길이네 곱창집 시놉시스
1969년, 고도성장이 한창이던 일본 오사카 공항 근처의 판자촌 동네. 그곳에 전쟁을 겪고 일본으로 건너와 뿌리를 내려 살아가던 사람들이 있었다. 좁디좁은 ‘용길이네 곱창집’ 한 켠에 모여 술 한 잔에 시름을 털어내며 차별과 무시를 꿋꿋하게 버틴다. 가족이 있기에 오늘보다 나은 내일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69년 봄, 노란 잎을 가진 꽃이 만개하고 따스한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올 때. 우리는 용길이네 곱창집을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고도성장이라는 특급열차를 탄 사회 속에서 아직 그대로 머물러있는 판자촌. 구불구불 이어지는 골목의 한켠, 용길이네 곱창집이 있다. 머리 위로는 비행기가 지나고, 시끌시끌한 동네는 풍족하진 않지만 나름의 행복을 찾아가고 있는듯하다.
첫째 시즈카와 둘째 리카, 셋째 미카, 그리고 막내 토키오. 용길과 영순. 여러 복잡한 사연을 가진 이 여섯 명은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함께 살고 있으며, 느리고 뒤처진 걸음이지만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생을 살아간다.
시즈카는 다리를 절고, 리카는 사랑하지 않는 테츠오와 결혼을 하고, 미카는 유부남 하세가와와 사랑에 빠진다. 토키오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하고 그를 지켜보는 영순은 속이 터진다. 영순과 반대로 용길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소란 피우지 말라며 가족들을 토닥인다. “소란 피우지 마”, “난 한국 가련다!” 두 사람의 말다툼은 영순의 한마디와 함께 막을 내린다.
한국과 닮지 않은 듯 어딘가 닮은 나라. 일본. 혼인을 약속한 신랑의 발바닥을 때리고, 술에 거나하게 취해 닐리리아를 부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이들이 한국인이라는 것을, 함께 있는 일본인들도 한국인들과 닮아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비슷한 나라라고 해도 어쨌든 타국은 타국이다.
전쟁의 참혹함을 피해 도망치듯 안착한 타국 땅. 용길은 가진 돈을 털어 땅을 사고 곱창집을 차린다. 그는 이렇게 하루하루 살아나가다 보면 언젠가 희망이 생길 거라 믿으며, 외롭게 남은 한 팔로 열심히 곱창을 굽는다. 그 땅이 국유지라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 시간이 지나 사회는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그리고 이젠 나름 먹고살만해진 사람들을 위한 여유 공간의 건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정부는 판자촌이 원래 국유지였다며 그곳에 공원을 지을 것이니 빠른 시일 내에 퇴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내 돈을 주고 산 내 땅이지만 내 땅이 아닌 땅. 용길은 나도 돈을 주고 산 땅이라며 퇴거 명령에 불응한다.
가슴이 터져나갈 것만 같다. 당장이라도 비행기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고향으로 돌아갈 돈도, 다시 터를 잡을 돈도 없다. 비행기 활주로에서 가장 가까운 동네에 살고 있지만 비행기와 가장 먼 사람들. 용길은 막내 토키오를 손수레에 태우고 활주로 옆길을 달린다.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큰 소리를 지르면서 말이다.
가진 것 없는 무력한 이들이 할 수 있는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털썩 주저앉아 울거나, 소리를 지르는 것뿐이다. 영순은 가족들과 갈등을 겪을 때마다 큰소리로 윽박을 지르고, 시즈카, 리카, 미카 또한 자신을 갈등하게 만드는 인물인 테츠오와 하세가와 부인에 대적해 목소리를 낸다. 하지만 토키오와 용길은 그러지 못했다.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던 토키오는 아이들을 향해 제대로 된 말 한번 해보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한다. 현실을 이겨낼 무기가 없다면 마음껏 소리라도 질러봐야 하는데.. 그것조차 할 수 없었던 토키오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했을지.. 안타까웠다.
용길은 아들의 죽음과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앞에서 처음으로 큰소리를 토해낸다. “이 땅 가져가려면 내 팔 돌려줘.” 항상 담담하게 가족을 지켰던 아빠의 입에서 서러운 말들이 터져 나온다. 나도 모르게 마음이 울컥하는 순간이었다.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을 등지고 매일같이 치열하게 싸우며 살아남았다. 나라를 위해 전쟁에 나갔고 팔을 잃었다. 하지만 이 나라는 다시 잡은 삶의 희망조차 빼앗아가려고 한다. 내 땅, 내 가게, 내 생계. 원래부터 사고팔 수 있는 땅은 아니었다지만.. 그래도 엄연한 내 땅이었거늘. 용길에겐 이제 고향도, 새로운 희망도 보이지 않는듯하다.
“거기서 보는 풍경은 멋지냐?”
삶이 답답하고 팍팍하다. 토키오는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소리를 피해 지붕에 올라간다. 용길은 그런 아들을 보며 “거기서 보는 풍경은 멋지냐?”라고 묻는다. 붉게 물드는 하늘은 굳이 말할 것 없이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하늘 아래서 용길이 말한다. “기분 좋다. 이런 날은 내일을 믿을 수가 있지.” 희망이 보이지 않았던 오늘이 지나고 내일이 오면, 정말 희망이 찾아올까? 내일이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내일은 행복해질 수 있을까. 용길의 가족은 희망을 찾아 각자의 길로 떠난다.
용길이네 곱창집이 있던 판자촌은 철거 후 아름다운 공원으로 태어날 것이다.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아픔은 남김없이 쓸려나갈 것이고, 그 위엔 아주 깔끔하게 포장된 새것들의 냄새가 가득 차겠지. 흩어진 가족들은 각자의 터전을 구축하고 내일을 맞이하기 위해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 가끔은 가족을 잊고, 또 가끔은 사무치게 그리워하면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사연 많은 한 가족의 추억이, 찢어지게 아팠던 순간들이 벚꽃잎 한 장 한 장에 담겨 휘날린다. 오늘을 살아가고 나면 내일은 희망이 있겠지. 당장은 보이지 않지만 언젠가 다가올 희망을 그리며 오늘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내일은 희망이 가득 쏟아져내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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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을 기억하고 삶을 사랑하고 시간을 간직하라
“여자의 일생을 단 하루를 통해서 보여준다.”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영화 <디 아워스>(2002)는 마이클 커닝햄의 동명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소설이든 영화든 모든 이야기의 시작은 한 작가에게서 출발한다. 바로 18세기의 현대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1882~1941)다.
<디 아워스>는 버지니아 울프가 1925년에 발표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의 세계관을 확장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댈러웨이 부인>이 클라리사 댈러웨이가 파티를 준비하는 하루를 그렸다면 <디 아워스>는 다른 시대의 세 여성이 보내는 각기 다른 하루를 보여준다. 다른 공간, 다른 시대를 살고 있지만 세 여성의 삶은 만나고 겹쳐지며 하나의 이야기로 흘러간다. 각자의 하루를 다루고 있지만 사실 한 세기를 보여주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각 여성의 시간은 한 세대로 확장되어 보편성의 범위를 넓힌다.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읽지 않았다면 먼저 소설을 읽은 뒤 영화 <디 아워스>를 보는 것을 추천한다. 영화는 소설을 읽은 이들을 전제로 만들어져서 소설 속 요소들이 영화에 어떻게 녹아있나를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소설이 클라리사 댈러웨이의 '삶'에 조금 더 집중되어 있다면 영화는 버지니아 울프 혹은 리처드의 '죽음'에 더 많은 무게가 실려있기 때문에 다소 무겁게 느껴질 수도 있다.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으신 분들에게 추천한다. 다만 '자살'이라는 키워드에 민감하거나 현재 심정적으로 좋지 않은 분에게는 권하지 않는다.
디 아워스
1923년 영국 리치먼드에서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는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하고 있다. 그는 런던의 거친 생활을 그리워 하지만, 정신병 때문에 한적한 시골에서 요양을 해야 하는 처지다. 언니와 조카들을 맞이할 준비는 고용인에게 맡겨 둔 채 버지니아는 글을 쓰느라 여념이 없다. 1951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로라 브라운(줄리안 무어)은 <댈러웨이 부인>을 읽고 있다. 로라와 어린 아들은 남편 댄의 생일을 맞아 함께 케이크를 만든다. 케이크 만들기를 실패한 로라는 못생긴 케이크를 쓰레기통에 버린다. 이웃에 사는 친구인 키티가 자궁에 문제가 생겨 입원한다는 소식을 듣고 로라는 가슴이 답답해진다. 2001년 뉴욕에 사는 편집자인 클라리사 본(메릴 스트립)은 친구 리처드를 위해 소설 속 댈러웨이 부인처럼 아침부터 축하 파티 준비를 한다. 작가인 리처드는 에이즈로 인해 몸이 매우 쇠약해졌고, 삶을 지속하고자 하는 의지를 잃었다. 그렇지만 클라리사는 그가 살아주었으면 한다.
본문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닮은 듯 다른, 각자의 감옥
로라 브라운은 둘째 아이의 출산을 앞두고 있다. 아빠가 아들의 아침식사도 챙겨주는 모습이 화목한 가정처럼 보인다. 하지만 로라의 미소는 깨질 듯 불안하고, 댄이 보지 않을 때면 무기력하고 우울한 모습을 보인다. 어린 아들은 그런 로라의 눈치를 조심스럽게 살핀다.
누구나 케이크를 굽는 일이 어렵지 않다고 말하지만 로라에게는 쉽지 않다. 댄을 사랑하고 결혼 생활을 함께 하는 것이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로라는 아마 댄을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다. 케이크를 만들고 사랑스러운 아내를 연기하며 살고 있을 뿐이다. 누군가에게는 쉽고 당연한 일이 어떤 이에게는 죽을 만큼 어려운 일이 되기도 한다. 로라는 가정에서 아내와 엄마의 역할이 그러했다.
이웃에 사는 친구인 사교적인 성격의 키티는 아이를 원하지만 자궁에 문제가 있어 입원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키티를 향한 로라의 감정은 아마 사랑일 것이다. 로라는 남자를 사랑하지 않지만, 그들이 힘든 전쟁을 치르고 돌아왔기 때문에 아내, 여성, 가정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말한다. 남자들의 희생에 대한 보답이 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로라의 행복은 어디에도 없다. 로라가 꿈꿔왔던 생활은 댄이 꿈꾸던 생활과 달랐을 것이다. 로라의 삶은 댄의 꿈을 위해 사라져야만 했다.
버지니아는 언제나 글에 몰두해 있어 주방 일에 소홀했다. 고용인들은 그런 버지니아에게 불만이 많다. 버지니아 역시 고용인들이 불편하고 무섭다. 남편인 레너드는 한가하게 산책이나 하는 버지니아가 부럽다고 하지만, 버지니아는 답답한 시골 생활에 숨이 막혀 죽기 직전이다. 분주한 런던의 거친 생활이 그립다. 버지니아는 그가 느끼는 삶과 죽음의 강렬한 대비를 소설에 담아낸다.
"당신을 만족시키는 게 내 유일한 생존 목적 같아"
클라리사는 리처드의 파티를 열어주려 하지만 시상식과 축하 파티는 리처드에게 아무 의미도 없다. 아침이 오는 것, 햇빛을 쬐는 일, 약을 먹는 일, 자부심과 용기를 연기하는 일은 리처드를 비참하게 만들 뿐이다. 자신의 병과 살아남은 몸을 강조하면 할수록 리처드는 죽음에 강하게 이끌린다.병에 걸린 리처드를 수년간 간호한 사람은 클라리사 본이었다. 그는 리처드가 부르는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호칭에 갇혀 버렸다. 댈러웨이 부인이 되어버린 클라리사는 리처드를 떠날 수 없었다. 리처드가 싫어해도 파티를 열어야 했고, 그가 살도록 만들어야 했다. 클라리사는 리처드와 있을 때에만 비로소 살아있는 기분을 느꼈다.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 속 첫 문장처럼 세 가정의 하루는 꽃과 함께 시작된다. 꽃은 집에 활기를 불어넣지만, 화병에 꽂힌 아름다운 모습은 오래가지 못한다. 좁은 화병에서 며칠, 운이 좋다면 그보다 조금 더 살다 시들어 버린다. 그 유한한 활기와 생명력은 인간의 그것과 흡사하다. 클라리사는 인간의 꺼져가는 생명력을 꽃이 대신 채워주기라도 할 것처럼 리처드의 방을 꽃으로 채운다.
버지니아는 레너드를 위해 살았고, 로라는 가정을 위해 살았고, 리처드는 클라리사를 위해 살았다. '서로를 위해 산다'는 말은 서로를 에워싸는 감옥이 되기도 한다.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빛나는 삶
영화의 가장 첫 장면은 1941년 영국에서 시작된다. 버지니아 울프의 병세는 점점 더 악화되었고, 결국 최선의 선택을 한다. 레너드는 좋은 남편이었고, 이들은 많은 역경을 넘어온 끈끈한 부부이자 동료였다. 버지니아는 자신 때문에 레너드의 삶이 힘들어지는 것을 더 이상 원치 않았다. 그는 레너드에게 편지를 남긴 채 강가로 향한다. 편지에 죽음을 선택하는 이유 같은 것은 적혀 있지 않았다. 얼마나 사랑했고, 행복했었는지만 남아 있을 뿐이다. 버지니아의 죽음과 편지는 영화의 처음과 끝에서 영화의 메시지를 강조한다.로라가 자살을 결심하고 이웃에게 리처드를 맡겼을 때 아이는 알았다. 어쩌면 그 이전부터 짐작하고 있던 진실은 엄마가 자신을 떠나리라는 것이다. 로라는 결국 삶을 선택했다. 하지만 가족을 떠났다. 삶을 선택한 로라와 죽음을 택한 아들 리처드는 더욱 강렬한 대조를 이룬다.
영화의 리처드는 소설 <댈러웨이 부인> 속 셉티머스와 가장 흡사한 인물이다. 전쟁의 후유증과 의사들에게 고통받던 그는 아내 레치아 앞에서 창문으로 몸을 던진다. 리처드가 클라리사 앞에서 창문으로 몸을 던졌듯이 말이다. 자신이 느끼는 모든 감상을 쓰려는 작가로서 리처드의 모습은 버지니아와 비슷하다.
반면 클라리사는 삶을 사랑한다. 세 명의 여성 중 소설 속 클라리사 댈러웨이와 가장 비슷한 인물이다. 리처드의 죽음은 벅차다. 그렇지만 곁에 있어 주는 샐리와 딸이 있어 버틸 수 있다. 죽음으로 인해 과거의 행복했던 순간들은 선명해진다.
로라와 클라리사는 어떻게든 삶을 선택하기로 마음먹은 인물들이다. 로라는 엄마이기를 포기했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감내해야 할 선택으로 받아들인다. 누구도 용서해 주지 않겠지만 로라는 삶을 선택했다. 리처드의 죽음은 로라에게 죄책감과 책임감이다. 클라리사와는 다른 방식으로 삶을 선명하게 느끼게 한다.
버지니아의 죽음으로 시작해 인물들의 삶을 관통하고 다시 그 모든 이야기의 시작인 작가의 죽음으로 끝나는 영화의 구성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라고. 죽음 속에서 빛나는 삶의 소중함을 느끼라고 말한다.
결국 1800년 대 여성의 이야기는 2000년대 여성에게도 전해져 함께 흘러간다. 이는 <댈러웨이 부인>이 가진 메시지가 가진 보편성을 증명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시대가 지나도 빛이 바래지지 않는 이야기를 만들었다. 기나긴 소설의 생명력은 짧디 짧은 작가의 삶과도 대비된다. 버지니아는 죽었지만 <댈러웨이 부인>은 살아남았다.
영화 속 레너드가 '왜 누가 죽어야 하느냐'라고 묻자 버지니아는 '죽은 이들로 인해 살아남은 이들이 삶의 소중함을 깨닫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죽음을 맞이하는 건 시인이자 선지자'라고 대답한다. 위대한 시인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그의 빛나는 메시지는 앞으로 100년은 더 남아 많은 이들의 삶의 소중함을 일깨워 줄 것이다. 클라리사이자 리처드이자 셉티머스이자 로라인 버지니아 울프는 삶을 사랑했다. 삶을 있는 그대로 사랑한 뒤 영원히 그 시간을 간직했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코두 작가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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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 밤마다 다른 사람 같은 남편의 낯선 모습.
2023년 9월 6일에 개봉한 장편 영화<잠>는 유재선 감독의 데뷔작이다. 칸 국제영화제 비평가 주간, 제56회 시체스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 토론토 미드나잇 매드니스 섹션, 판타스틱 페스트와 같은 영화제에 초청되면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이 영화는 일상에서 가질 수 있는 공포를 극대화하여 차별화된 공포를 선보인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공포의 주체가 됐을 때의 상황 포착하여 더욱 몰입감 있게 다가온다. 과연 나라면 그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보게 된다.
자다 깬 현수가 내뱉은 혼잣말은 정말 누군가가 들어온 것처럼 일상을 공포로 가득 메운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일들이 점차 크기를 키워 가기 시작하는데, 몽유병을 진단받으며 치료할 수 있다는 의지를 불태운다. 하지만 그런 결심도 무색하게 밤마다 낯선 사람이 된 것 같은 현수의 이상 행동은 점차 더 위험해진다. 심지어는 곧 태어날 아이까지 위험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 두려워진다. 믿기 힘든 광경은 온갖 노력을 하는 수진에게 있어서 몽유병인지 현수 안에 깃든 초자연적인 존재인지 알 수 없어지게 만들기 시작한다. 과연 수진과 현수는 그 상황을 해결해 나갈 수 있을까.
가장 가깝고 사랑하는 사람이 폭력의 주체로 변해갈 때, 마주하는 공포를 포착한다. 그 대상이 결코 나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생각이 아니라 함께 극복해 나갈 수 있다는 믿음에서 찾아오는 신뢰였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이상행동을 하는 현수보다 더 두렵게 다가오는 건 계속해서 이어지는 상황으로 인해 잠을 이루지 못하는 수진이었다. 나아지지 않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초자연적인 힘을 빌리기까지 하면서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것인데, 그 과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굉장히 광기 어리다. 몽유병 당시 자기 행동을 기억하지 못하는 현수와는 다르게 수진은 현수의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에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랬기 때문에 설명되지 않는 것을 증명하고 이전과 같은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려는 발버둥을 친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지켜봤던 현수가 수진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그대로 따라준 것 또한 '함께' 상황을 견뎌줬던 수진 때문이었다. 정말 이 영화의 결말 뒤엔 극복한 두 사람이 서 있을까.
영화를 보고 나면 '잠'이 두려워진다. 편안한 공간에서 잠을 깊이 자야 하지만 그러지 못한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상황이 밤이 오지 않길 바라는 상황으로 이어져 더욱 두렵게 느껴졌다. 극 중 현수가 앓고 있는 몽유병은 수면장애이기 때문에 잠이 든 상태에서 무의식적으로 움직여 이상행동을 보이는 증상이다. 걸어 다니는 것뿐만 아니라 타인을 공격하는 행동을 하므로 더욱 위험할 수 있다. 당사자가 기억을 못 한다는 사실과 주변 사람에게 남는 기억이 다르기 때문에 그 부분이 잘 드러났다. 잠과 관련된 영화가 많기 때문에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지 궁금했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 잠과 그 과정을 다뤄낸 이야기 전개 또한 예상을 뛰어넘는다. 가장 익숙하고 필수적인 '잠'을 영화를 보는 순간만큼은 낯설게 만드는 영화의 화법이 신선하면서도 또 색다르게 느껴졌다. 결말 부분은 상당수 호불호가 갈릴 수 있지만 감독의 다음 작품이 궁금해지는 영화였다. 무엇보다 정유미 배우와 이선균 배우의 연기가 너무 인상 깊게 남았다.
영화의 결말이 다소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은 쉽게 풀리지 않은 부분을 해석의 여지로 남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열린 결말에 3가지 가설을 세워봤다.
첫 번째, 수진의 망상이었다.
우선, 수진의 망상이라고 생각하게 된 부분은 몽유병을 앓는 현 수로 인해 잠 못 이루는 밤이 길어지며 받게 되는 스트레스로 인해 본인 또한 수면에 상당한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있지 않았던 일을 착각하는 일도 상당해 병원에도 가게 된 것 같다. 현수는 노력하는 수진을 저버리고 싶지 않아서 말에 따라줬고 그 끝에도 점점 심해져 가는 수진을 위해서 '연기'한 것이다. 실제로 오랜 기간 동안 잠들지 못해 눈이 새빨개지고 정신 병원에 입원하게 되는 것을 보면 망상의 일부분처럼 여겨진다.
두 번째, 진짜 빙의된 상황이었다.
실제로 현수가 밑의 집 할아버지에 빙의됐다. '누가 들어왔어요'라는 말은 정말 빙의가 돼서 한 말이다. 또한, 할아버지 사망 후 귀신이 된 날짜와 현수의 몽유병 증상이 나타난 날짜가 동일하다. 또한 특히 '개', '아이'라는 말을 한 것을 보면 할아버지가 틀림없다. 부적을 붙이고 굿을 하는 행위를 통해서 악영향을 모두 막았고 수진의 모든 행위가 할아버지가 무사히 정각 전에 성불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특히 딸을 말을 듣고 현수라면 하지 않을 행동을 통해서 현수의 몸에 할아버지가 깃들어 있음을 보여준다.
세 번째, 그저 몽유병이다.
현수는 심각한 수면장애인 몽유병을 앓고 있었다. 오래된 단역 배우 생활을 전전하며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았으며 '누가 들어왔어요'라는 말은 드라마 대본의 대사였다. 치료를 받아 봤지만 어려움을 겪었고 마침내 치료에 성공하게 된다. 반면, 수진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상황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설명되지 않는 것을 납득하기 쉬운 것을 믿게 되었다. 원래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거리가 먼 일들을 생각하고 행한다.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믿고 싶은 것을 믿는 인간의 본연의 모습이 수진을 통해 드러났다. 현수는 그런 수진을 위해 그녀가 믿고 싶은 현실을 '연기'한다. 의사가 말했듯 이상 행동이 늘 일어나는 건 아니기 때문에 미신과 관련된 행위는 우연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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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재력을 터뜨리지 못한 고루한 위인전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자라난 십 대 소년 '김대건(윤시윤)'. 그는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모방 신부의 권유를 받아들여 먼저 공부를 시작한 '최양업(이호원)', '최방제(임현수)'와 함께 유학길에 나선다. 마카오에 도착한 김대건은 최방제가 열병으로 사망하고, 전쟁으로 인해 마닐라로 대피하는 등 숱한 역경을 겪으면서도 착실히 신학 공부를 이어간다. 심지어 기해박해 당시 아버지 '김제준(최무성)'을 비롯해 수많은 천주교 신자가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더욱 큰 신앙심을 키워나간다. 길고 긴 세월 끝에 마침내 부제 서품을 받은 그는 조선으로 되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여러 방면으로 입국을 시도하고, 바다와 육지를 누비며 조선 최초의 가톨릭 신부가 되기 위한 발걸음을 내디딘다.
영화는 언제나 양날의 검을 지니고 다닌다. 바로 러닝타임이다. 예술 영화처럼 실험적인 작품이 아닌 이상, 일반 관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상업 영화가 통상적인 러닝타임을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심지어 최근에는 2~3시간가량도 길어서 100분 내외로 러닝타임이 줄어드는 추세다. 이는 단점이자 동시에 장점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원작이 있거나 실존 인물의 이야기를 다룰 때 러닝타임이라는 한계는 치명적이다. 절대적인 시간 자체가 부족하니 원하는 만큼 풍부한 이야기를 담을 수 없다. 가장 영상화가 잘 된 소설 중 하나로 손꼽히는 <반지의 제왕> 시리즈만 해도 원작 속 온갖 설정과 장면들을 3시간이 넘는 분량 안에 담아내는 데 실패한 바 있다.
하지만 때로는 독특한 장점이 된다. 제작진이 상상력을 자유롭게 발휘해 창의적인 접근법을 택할 수만 있다면, 다양한 이야기와 감정선을 집약적으로 풀어내는 색다른 재미를 선사할 수 있다. 창업자 간의 소송전을 통해 현재와 과거의 시점을 자유롭게 오가며 '페이스북'이라는 거대한 SNS의 탄생을 그려낸 데이비드 핀처의 <소셜 네트워크>, 세 번의 신제품 발표 프레젠테이션 직전 순간에만 집중해 스티브 잡스라는 인물의 내밀하고도 복잡한 개인사를 폭발력 있게 보여준 <스티브 잡스>가 대표적이다.
안타깝게도 최초의 조선인 가톨릭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일대기를 영상화한 <탄생>은 러닝타임의 한계를 깨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영화는 정직하고 고전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김대건 신부의 생애를 시간순으로 스케치한다. 일단 한국 천주교의 초창기를 간단하게 알려주는 자막으로 시작해 소년 김대건이 신부가 되기로 마음먹는 계기를 보여준다. 김대건이 학우인 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중국으로 향하고, 마카오와 마닐라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모습도 스쳐 지나간다. 부제 서품을 받은 김대건이 조선에 입국할 경로를 찾는 여정도 적잖은 분량을 차지한다. 간신히 조선에 입국한 후 다시 상하이로 향해 사제 서품을 받고, 조선으로 되돌아와 사목활동을 이어가다가 끝내 체포되고 순교하는 김대건의 모습은 후반부를 장식한다.
영화는 김대건의 일생에서 분기점이라 할 만한 그 어떤 순간도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151분이라는 한정된 분량 안에 25년간의 이야기를 전부 배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탄생>은 모든 사건을 최소한으로 다루며 굉장히 빠르게 전개된다. 그 과정에서 역사적 사건의 맥락은 대부분 생략되고, 필요한 장면만 선택되어 재현된다. 의주 국경을 넘어 조선으로 들어오는 김대건의 모습이 대표적이다. 국경 근처에서 천주교 신자들과 접선한 그는 국경을 따로 넘은 후 한 나무 밑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다. 약속이 끝나자마자 카메라는 바로 나무 밑에 서 있는 신자들의 모습과 멀쩡하게 접선 장소에 등장하는 김대건을 비춘다. 과정은 사라지고 사건의 결과만 보여준다. 그러다 보니 <탄생>은 자연히 전반적으로 급하고 드문드문하다. 영화라기보다는 영상화된 위인전에 가까운 보이는 이유다.
위인전의 방식을 답습한 대가는 크다. 김대건이라는 인물을 매력적인 캐릭터로 포장하는 데 실패했고, 그는 여전히 전형적인 위인상에 갇혀 버린다. 김대건은 남들보다 늦게 공부를 시작했지만 주경야독하며 따라잡을 정도로 끈기 있고, 목숨을 걸고 만주와 조선 북부를 돌아다닐 정도로 강단이 있다. 다른 약자들이 피해 보는 걸 가만 볼 수 없을 정도로 인정이 많고 따뜻하다. 심지어 그 누구보다도 새로운 세상에 빨리 눈 뜰만큼 사고가 유연하고, 신앙심이 깊은 만큼 조국을 향한 충성심도 강하다. 결함 없이 모범적이다. 그러다 보니 그의 성장과 변화는 그저 서술될 뿐 설명되지 않아서 설득력이 부족하고 지루하다.
물론 그의 감정선을 따라 뚝뚝 끊기는 에피소드들을 연결하려고도 노력한다. 큰 효과를 보지 못했을 뿐이다. 그의 감정선이 다른 인물들과의 상호작용 안에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김대건 신부와 신학교에서 그를 가르친 다른 신부들과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숱하게 이별하고 재회하고, 목숨을 걸고 조선에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동지들이지만 그들과의 관계는 스토리텔링에 크게 영향을 주지 못한다. 단지 지금까지 김대건이 어떻게 지냈고,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정보를 전달하는 선에서 그친다. 긴 세월 동고동락한 최양업과의 관계성도 크게 다르지 않다. 대다수 캐릭터는 김대건이 처한 상황의 변화를 강조하는 데서 역할이 끝난다. 그 결과 김대건 외에 다른 인물들은 기억에 남지 않고, 굵직한 배우들의 출연도 잠깐의 서프라이즈에 그치고 만다.
이는 천주교 신자이거나 한국 천주교에 대한 배경지식이 충분하지 않은 이상 감정적으로 동요하거나 고조될 장면이 거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례로 조선에서 사목 활동을 하던 앵베르 범 주교가 자수하는 장면은 천주교 신자에게 매우 인상적일 것이다. 한국 천주교가 받은 숱한 박해의 참상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수많은 순교자의 사연을 알고 있다면 그의 용기와 신앙심은 애처로우면서도 감동적이다. 그러나 신자가 아니라면 해당 장면은 그냥 역사적 사건을 건조하게 재현한 장면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제한된 시간 내에서도 김대건이라는 인물을 재해석할 잠재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탄생>의 결과물은 더욱 안타깝다. 사실 그 당시 김대건 신부는 단순한 종교인 그 이상의 존재였다. 그는 조선 사람이 꿈꾸기 어려울 정도로 넓은 세상을 먼저 목격한 선구자였다. 영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중국어, 라틴어를 구사할 줄 알아서 통역가로 활동했고, 영국에서 만든 세계지도를 번역하기도 했다. 그는 조선 조정이 체포부터 처형까지 3개월이나 지체할 정도로 아까워했던 지식인이었다.
영화도 '지식인 김대건'의 면모를 강조하려 한다. 급변하는 국제 질서 속에서 자신이 보고 배운 내용을 어떻게 '조선인'으로서 활용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김대건의 내면을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나름대로 당시 시대상을 묘사하기 위해 적잖은 노력을 기울인 이유다. 영화는 아편 전쟁을 겪으며 무너지는 청나라의 현실과 중화 질서가 무너졌는데도 여전히 바다 밖 세상에 무감각한 조선의 실상을 대조한다. 또 러시아의 남진 정책을 영국이 견제하는 '그레이트 게임' 속에서 제국주의 열강들이 조선에 야욕을 뻗쳤던 시대상도 꼬집는다.
단순히 시대적 배경을 나열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김대건의 구체적인 행적을 묘사하며 재해석에 힘을 더하기도 한다. 그는 조선에서 평화적인 포교와 교역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며 프랑스 군을 설득한다. 프랑스 군의 힘을 빌린다면 천주교 신부라는 지위를 더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나, 조선인으로서 조국과 프랑스의 무력 충돌을 방지하는 걸 더 우선한 것이다. 그와 상하이 주재 영국 영사와의 대담도 인상적이다. 김대건은 대담이 끝난 후 조선이 머지않아 서양 국가들의 사냥감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한다. 그레이트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조선의 지정학적 가치가 상당하다는 사실을 영국 측이 이미 파악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김대건의 모습은 분명 '최초의 사제'로 고정된 이미지를 뒤흔드는 신선한 해석이다.
하지만 <탄생>은 끝내 전통적인 일대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마지막 장면만 봐도 이 작품이 결국에는 종교적 영화로 귀결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영화는 김대건의 참수형을 끝으로 마무리되는데, 카메라는 김대건의 피가 흐르는 장면을 과하다 싶은 정도로 길게 잡으면서 그의 순교를 극도로 강조한다.
그 때문에 김대건이라는 인물에 대한 재해석 시도는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 종교적 관점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김대건의 모험가이자 근대적 지식인으로서의 면모가 빛나는데, 마지막 순간 조선의 첫 신부이자 순교자라는 고정된 이미지로 회귀하기 때문이다. 거칠게 말해 신부 김대건이 아니라 조선인 김대건을 다루려는 시도는 그저 수박 겉핥기에 불과한 셈이다.
오히려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재해석의 가능성을 보여주면서도 결말까지 종교적 색채를 빼지 않은 결과 한 작품으로서의 구심점마저 약해진 까닭이다. 이처럼 매력적인 재해석 방법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 가능성도 보여줬지만, <탄생>은 결국 평범하고 뻔한 종교인의 전기 그 이상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을 스스로 잠재우고 만다.
물론 한국 천주교 교회가 볼 때 김대건 신부의 생애를 영화화하는 작업은 충분히 매력적인 시도였을 것이다. 2021년이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이기도 했고, 이를 기념하는 김대건 신부의 조각상이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 외부 벽감에 세워지기로 결정된 사실이 공표되기도 했다. 또 한국사를 공부하다 보면 최소한 이름은 한 번 정도 접할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니 관심을 받기에도 적합했을 것이고, 기존 사극 영화에 자주 등장한 인물도 아니므로 신선한 시도인 것은 맞다.
다만 의도와 목적을 담아낼 그릇을 잘못 고른 선택이 뼈아프다. 사실 김대건 신부의 생애는 워낙 스케일도 크고 공간적 배경도 다양한 만큼 영화보다는 드라마로 만들기 적합한 소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러닝타임의 한계가 뚜렷한 영화를 그릇으로 골랐을 때는 보다 도전적인 스토리텔링 방식이 필요했다. 특정 순간이나 사건에 집중해 김대건 신부의 몇몇 모습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시도가 더 적절해 보이는 것이다. 실제로 부제 신분으로 조선에 입국한 직후부터 체포되어 순교하는 날까지만 다루더라도 영화가 보여주고자 한 김대건의 참모습 대부분을 충분히 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고루한 위인전, <탄생>의 만듦새가 끝내 아쉬운 이유다.
D(Dreadful, 끔찍한)
실제 인물의 업적과 배우들의 라인업이 아까운 범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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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자 너머에 사는 아이들
이 글은 씨네랩에서 초청 받은 시사회를 관람한 후 작성한 리뷰입니다.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으니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린이날 하루 전이었다. 나는 영화 한 편을 보러 갔다. 예고편도 챙겨보지 않아 어떤 내용일지에 대해 전혀 모르고 보러 간 영화였다. 그리고 극장에서 내가 마주한 것은, 음, 글쎄. 흔히들 '어린이날 전야에 보는 영화'를 생각하며 떠올릴만한 그런 종류의 영화는 아니었다. 내가 본 것은 어느 그림자의 가장 밑바닥, 채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의 삶이었으니 말이다.
우리는 때떄로 우리 살기 바쁜 나머지 이웃이나 그 너머의 삶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곤 한다. 나만 해도 그렇다. 세계는 눈부시게 발전했고 사람들은 어디에서든지 얼마쯤은 먹고 살만 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기아와 난민, 전쟁과 마약 따위는 언제나 뉴스와 신문을 빼곡히 채우고 있지만 나는 그것이 어쩐지 나와는 너무나 먼 이야기처럼 여겨져서 그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보지 않으려고 했다는 게 더 옳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설령 내가 그곳에 눈을 돌리지 않는다고 해도, 세상에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그런 그림자 속을 사는 이들이 있다. 이를테면 영화 <토리와 로키타> 속의 두 사람이 그렇다.
토리와 로키타는 벨기에에 사는 난민 남매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둘은 서로를 유일한 가족으로 삼고 서로를 애틋해하지만, 세상은 그리 녹록치 않고 두 사람은 매 순간 벼랑 끝에 몰린다.
학대 정황이 포착된 토리와는 달리 로키타는 체류증을 받지 못했다. 체류증이 없으면 그 땅에서 일하지 못하고, 일하지 못하면 돈을 벌지 못하고, 돈을 벌지 못하면 로키타는 난처해진다. 돈 나갈 구석이 너무 많았으니까. 고향 카메룬에서는 엄마와 동생들이, 도시 내에선 그를 밀입국 시켜 준 브로커가 호시탐탐 그의 주머니를 노리고 있었다. 이 낯선 땅에서 만난 유일한 가족인 토리와 함께 하기 위해서라도 돈은 필요했다. 그래서 어린 로키타는 그 체류증이 너무나 절실했다. 로키타가 너무나 소중했던 토리에게도 그랬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서 그렇듯, 어떤 절실함은 돌이키지 못할 후회를 낳곤 한다.
로키타가 체류증 발급 심사에서 떨어졌다고 하자, 베팀이라는 남자는 체류증을 위조해주겠노라 한다. 자신이 제안한 '수상쩍은 일'을 승낙한다는 조건을 내걸면서. 베팀은 이를테면 토리와 로키타의 상사였다. 두 사람은 밤마다 몰래 복지 센터를 빠져나와 그가 건네는 마약을 배달하는 일을 했다. 베팀은 어린 소녀를 거리낌없이 성적으로 유린하는 사람이었고, 로키타는 그런 그가 건네는 푼돈이 끔찍했을테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하여 로키타는 스스로 비극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아니, 떠밀려 들어간다.
토리와 로키타의 삶은 지난하다. 어른들은 상냥하지 않았다. 탐욕스럽고 잔혹하거나 매정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아이들은 더 손쉽게 착취되거나 무시되었을 것이다. 두 사람이 법의 이면에 있는 일에 손을 대지 않았더라면 상황이 더 나았을테지만, 그들에게 정말로 그러한 기회가 주어졌을까? 로키타는 정당하게 일하고 싶어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고, 그림자 너머의 일은 너무나 쉽게 손에 닿았을 것이다.
다른 세상의 이야기였다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이것은 지독하게도 선명한 현실의 단면이다. 스크린 밖에는 여전히 수많은 토리와 로키타가 있다. 그들은 어쩌면 영화 속에서보다 더 날카로운 흉터를 안고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에게는 서로를 살게 하는 토리와 로키타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어쨌든 간에, 그들은 존재한다. 거기에 있다. 우리가 의도했든 그러지 않았든 간에 외면했던 그 그림자 너머에.
이러한 착취적인 삶은 우리와 완전히 유리된 것일까?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이 자본주의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언제나 누군가를 착취하거나 누군가에게 착취 당한다. 쥐가 고양이에게 잡아 먹히고, 고양이가 개에게 물리고, 개가 나무 몽둥이에게 맞아 죽고 말았다는 이탈리아의 유명한 노랫말(극 중 토리와 로키타가 불렀다.)처럼 말이다. 한국만 하더라도 난민 문제가 대두된 바가 있고, 불법 체류자 문제는 오래 전부터 신문의 한 면을 장식하다 못해 식상할 지경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들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온갖 정치적인 문제 이전에 그들이 정말로 사람다운 대우를 받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비극이 손 닿을 만큼 가까운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은 너무나 슬프고 끔찍한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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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각적인 영화를 묻거든 길복순을 보게 하라
감각적인 영화를 묻거든 길복순을 보게 하라
영화 리뷰 <길복순>감독] 변성현
출연] 전도연, 설경구, 김시아
시놉시스] 청부살인이 본업이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이벤트 회사인 MK ENT. 소속 킬러 길복순은 작품은 반드시 완수해 내는 성공률 100%의 킬러이자, 10대 딸을 둔 엄마다. 업계에서는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에이스지만, 딸 재영과의 관계는 서툴기만 한 싱글맘인 그는 자신과 딸 사이의 벽을 허물기 위해 퇴사까지 결심한다. MK ENT. 대표 차민규의 재계약 제안의 답을 미룬 채, 마지막 작품에 들어간 복순은 임무에 숨겨진 진실을 알게 된 후, 회사가 허가한 일은 반드시 시도해야 한다는 규칙을 어기게 된다. 그 소식을 들은 MK ENT.는 물론, 모든 킬러들의 타겟이 되고야 마는데… 죽거나 죽이거나, 피할 수 없는 대결이 시작된다.
#스포일러 주의#스타일리쉬 그 잡채
영화 길복순을 보다보면 스토리가 정말 뻔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지루하지 않게 영화를 볼 수 있었던 이유는 영화 시퀀스 자체가 굉장히 감각적이다. 여타 다른 액션 영화에서는 보지 못했던 촬영 기법과 편집 기법들이 등장해서 눈이 즐거웠던 작품이었다. 복순이 딸 재영이 담배 피는 것을 알게 되자 이를 시뮬레이션 돌려보면서 어떻게 하면 마음의 문을 닫은 딸과의 거리감을 좁힐 수 있을지 상상한다. 이 과정에서 시뮬레이션인듯 현실인듯 그 경계가 모호하게 편집을 했던 장면이 있었는데 그 다음 장면에서도 또 시뮬레이션이 아닐까 하는 관객의 생각과는 다르게 바로 현실로 돌아오면서 관객과의 밀당을 제대로 했던 장면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마지막 길복순과 차민규의 1:1 대결 씬에서는 그 시뮬레이션의 절정을 보여준다. 실력적으로는 차민규가 절대우위에 있기에 차민규는 길복순의 수를 하나씩 생각하면서 길복순의 공격에 맞춰서 복순을 죽이는 장면들을 상상한다. 처음에는 현실처럼 이를 그려내다가 이렇게 길복순이 죽는다고? 허무하게?라는 감정이 들 때쯤 다시 길복순의 공격이 시작되면서 이 장면들이 차민규의 상상 속이라는 것을 관객들에게 알려준다. 그리고 이러한 상상이 차민규의 집무실 모든 공간에 꽉 채워지면서 너무나도 많은 차민규가 너무나도 많은 길복순을 하나씩 죽이는 장면을 보여준다. 이러한 장면을 통해서 기술적으로 차민규가 절대적 우위에 있음을 보여주면서 과연 길복순은 어떠한 수를 내놓을지 관객으로써는 기대가 되는 장면이었다. 이처럼 영화 길복순은 감각적인 연출을 통해서 관객과의 밀당을 잘 한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시리즈가 더 낫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아쉬운 부분은 있었다. 영화가 아닌 드라마로, 시리즈로 만들어졌다면 캐릭터들의 서사과 깊이감이 더욱 살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너무나도 들었던 작품이었다. 사실 길복순이라는 캐릭터를 제외하면 다른 모든 캐릭터는 소비적으로 쓰였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영화였다. 다들 길복순과의 단편적이고 평면적인 관계를 보이고 있어서 캐릭터별 매력을 느끼기에는 굉장히 아쉬운 작품이었다. 그래서 이 작품이 만약 드라마로 만들어졌다면 캐릭터별 서사를 쌓고, 그 속에서 길복순과의 관계를 보여주고, 마지막에 가서 모두 자신의 이익을 위해 길복순과 적이 되어 그녀를 공격할 때 오히려 더 길복순의 입장에 더욱 감정적 동조를 느낄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짙게 남았다. 사실 영화 길복순은 화려한 액션신을 볼만했지만 길복순의 선택에 대해서, 그리고 길복순이 처한 환경에 대해서 관객들이 함께 공감할 만큼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성은 딸을 제외하고는 보여지지가 않아서 그녀의 선택에 따른 책임에 함께 불안해하거나 슬퍼하거나 안도하기에는 힘들었던 작품이었다.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
멋진 액션과 딸과의 관계 회복이라는 두 가지 큰 주제 속에서 이 영화를 관통하는 소재가 있다. 바로 ‘용기’다. 다양한 용기 중에서도 자신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다. 딸 재영은 레즈비언으로 같은 반 친구와 사귀고 있었고, 이를 알게된 남학생이 재영과 한달 동안 사귀면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재영은 싫다고 말하는 과정에서 남학생에게 상해를 입히고 정학을 당하게 된다. 처음 이유를 말하지 않았던 재영은 결국 용기를 내서 엄마 복순에게 커밍아웃을 하고, 당황한 엄마는 이렇다할 말도 없이 회사 전화를 받고 쌩하고 나가버린다.
그렇게 킬러들과 싸움 이후 집으로 돌아온 복순은 다시금 재영과 마주하고, 대화를 나눈다. 그 과정에서 복순은 재영에게 자신이 솔직하게 킬러라고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딸이 국정원이냐고 물어보자 ‘엄마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라며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재영은 보안상 말할 수 없다는 국정원의 규칙을 지킨다고 생각을 하고, 복순은 이런 재영을 보면서 솔직한 딸과 달리 자신은 자신의 직업을 솔직하게 말할 수 없는 자신의 행동을 보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마지막으로 차민규 대표와의 1:1 대결씬에서도 차민규는 길복순의 손에 죽기로 이미 결심을 한 상태였고, 이를 딸 재영에게 보여주기 위해 cctv를 연결해 재영에게 보내준다. 재영은 결국 자신의 엄마 복순이 한 남자를 무자비하게 죽이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확인하게 되고, 이를 알게 된 복순은 하지 않던 기도를 하며 집으로 달려간다. 자신이 솔직하게 먼저 딸에게 밝히지 못했다는 자책과 후회, 그리고 딸이 엄마의 모습을 보고 놀라진 않았을까 하는 걱정, 딸 재영이 이런 엄마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어떨까 하는 두려움. 재영이 자신이 레즈비언임을 밝히기 전까지 느꼈을 오만가지의 감정들을 똑같이 느끼며 집으로 향한다. 하지만 재영은 그런 엄마에게 자신이 본 영상을 모른척하며 엄마를 품어준다. 재영과 복순이 겪는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 두 모녀의 관계 회복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과정 속에서 기회가 왔을 때 솔직하게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얼마나 대단하고, 또 필요한지 잘 보여주고 있었다.
영화 길복순은 감각적인 연출과 함께 나름의 주제를 잘 전달하고 있었던 작품이었다. 다만 드라마로 만들었으면 훨씬 더 탄탄한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약간의 아쉬움도 함께 남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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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큐!! 극장판 / 쓰레기장의 결전 / 많이 보는 데는 이유가 있구나 / 쇼요와 켄마의 매력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극장판 하이큐!! 쓰레기장의 결전"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이 엔드크레딧 끝나고 제대로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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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더 체어> 공식 예고편
어느 명문 대학에서 유색인종 여성 최초의 학과장이 탄생한다.
하지만 영문학과는 모진 파도를 맞고 있는 중.
온갖 요구가 정신없이 들이치고, 기대치는 높기만 하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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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토르 : 러브 앤 썬더> 메인 예고편
얘들아, 팝콘 준비했지? ?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우주의 한 바이킹이야 토르 오딘슨..." [토르: 러브 앤 썬더] 메인 예고편 대공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