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n0932023-08-23 15:06:18
영화 유체이탈
12시간마다 몸이 바뀐다.
12시간마다 몸이 바뀐다면 어떨까요?
여기, 주인공은 자신이 모르는 몸으로 변하면서
연결고리를 찾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요
신박한 스토리 소재와 화려한 액션이 돋보였던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영화 유체이탈자
그럼, 영화 유체이탈자 리뷰 시작해 볼게요!
기본 정보
장르 : 액션, 스릴러, 미스터리, 판타지, 느와르, 범죄, 드라마
감독 / 각본 : 윤재근
출연진 : 윤계상, 박용우, 임지연
개봉일 : 2021년 11월 24일
평점 : 7.50
스트리밍 : tvN , NETFLIX, 쿠팡
기획 의도
"누가 진짜 나인지 모르겠어요"
교통사고 현장에서 눈을 뜬 한 남자.
거울에 비친 낯선 얼굴과 이름,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또 바뀌었어, 낮에도 바뀌더니 밤에도 또"
잠시 후, 또 다른 사람의 몸에서 깨어난 남자.
그는 12시간마다 몸이 바뀐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기 시작한다.
그가 12시간마다 몸이 바뀌었던 사람들,
가는 곳마다 나타나는 의문의 여자까지,
그리고, 이들이 쫓고 있는 한 남자,
진짜 나를 찾기 위한 본능적 액션이 시작된다.
여담
영화 유체이탈자는 초반 신선한 설정을 잘 나타냈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아쉬움이 많이 남는 영화이다.
영화는 원래 2020년 개봉 예정이었으나,
1년 후인 2021년도에 개봉되었다.
후기 및 결말
영화 유체이탈자 결말
강인아(윤계상)은 메인 빌런인 박실장(박용우)의
거래 정황을 포착해 검거 예정이었으나,
이 과정에서 정체불명의 약이 터지면서
이안의 몸에 들어가게 되면서 사건이 발생된다.
여기저기 몸이 바뀐 이안의 진짜 몸은
병원에 있었고, 백상사가 숨을 거두게 되자
그의 영혼이 진짜 몸으로 돌아오게 되면서
영화는 끝이 납니다.
영화 유체이탈자의 초반 이야기 스토리와
짜임새와 연출 능력은 아주 좋았지만,
갈수록 아쉬운 스토리가 맘에 걸린다.
연진이로 아직도 핫한 인물
임지연의 또다른 연기력을 볼 수 있는 영화
윤계상의 1인 7역이라고 해도 아쉬울 게 없었던
영화 유체이탈자, 킬링타임 영화로 딱 좋은
영화라 추천드리고 싶다.
한줄평 : 화려한 액션과 연출력이 매력적인 영화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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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조2> 잘못된 첫 단추가 굴려 보낸 스노우볼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북미 수교를 앞두고 국제 마약 밀매 조직의 우두머리인 ‘장명준(진선규)'이 '잭(다니엘 헤니)'이 이끄는 FBI에 의해 뉴욕에서 검거되자, ‘림철령(현빈)'은 그를 인도받기 위해 미국으로 향한다. 그러나 장명준은 호송 중에 탈출에 성공하고, 그가 남한에 들어간 것을 알게 되자 철령도 다시 한번 휴전선을 넘는다. 한편 수사 실패 이후 광수대 복귀를 노리던 '강진태(유해진)'도 또 한 번 철령과의 공조 수사에 자원한다. 한 층 더 돈독해졌지만 여전히 서로를 의심하면서 공조 수사를 펼치던 철령과 진태. 그러나 눈앞에서 장명준을 놓친 잭이 남한에 오면서 세 형사 사이에서는 긴장감이 피어오르고, 미처 알지 못했던 장명준의 진짜 계획이 드러나면서 공조 수사는 위기에 봉착한다.
2017년 설 연휴에 개봉해 781만 관객을 동원했던 <공조>는 예상치 못한 흥행 성공을 일구어냈다. 현빈과 유해진의 케미가 돋보이는 가운데 짧은 분량 속에서도 시선을 사로잡은 윤아의 푼수 연기, 강렬한 악역의 존재감과 나름 짜임새 있는 액션의 조합이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낸 결과였다. 그래서인지 <공조2: 인터내셔날>은 전편의 성공방식을 고스란히 취하되, 규모를 착실히 키우며 관객들이 좋아할 만한 포인트로 잔뜩 무장한 종합 선물세트로 돌아왔다.
성공 공식을 답습한 <공조2>의 명암
실제로 <공조2>는 전작에 비해 한층 돈독해진 림철령과 강진태의 케미에 새로운 인물인 잭을 더해 더 다채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며 분위기를 환기한다. 민영과 철령의 로맨스 코미디도 잭 덕분에 삼각관계로 발전한다. 뉴욕에서의 총격전처럼 한층 커진 스케일이 돋보이는 장면도 눈을 사로잡는다. 이러한 결과물은 전편처럼 명절 연휴를 겨냥한 선택이 상업적으로 적중할 것 같다는 인상을 준다. 메가폰을 잡은 이석훈 감독이 <댄싱퀸>, <히말라야>, <해적: 바다로 간 산적> 등을 흥행시킨 전력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명절 연휴를 겨냥한 흥행이 점쳐지는 것과는 별개로 <공조2>의 결과물은 실망스럽다. 동일한 성공 방정식을 활용했지만 전편에 비해 영화의 톤과 분위기는 일정치 않다. 많은 이들이 좋아할 다양한 상차림을 펼친 것과 달리 정작 메인 디쉬는 없는 듯 보이고, 깊은 맛도 부족하다. 그래서 영화의 전반적인 완성도가 하락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 중심에는 장명준과 림철령이 있다. <공조2>는 새로운 인물인 장명준의 서사를 펼쳐 보이면서 스타트를 끊는데, 첫 단추에서 시작된 불협화음이 거대한 스노우볼로 이어진다.
<공조>와 <공조2>의 결정적 차이
당장 오프닝 장면부터 <공조2>는 전작과 매우 유사하다. 일전에 '차기성(김주혁)'의 범죄를 막으려다가 실패하고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던 림철령은 이제 장명준의 범죄와 탈출을 막는 데 실패하고 아끼는 동료를 잃는다. 이후 차기성처럼 남한으로 향한 장명준을 쫓아 철령은 다시 한번 휴전선을 넘어 내려오고, 진태를 만나 공조 수사를 펼친다. 여기까지만 보면 <공조2>는 전편이 개척한 길을 착실히 뒤따르는 듯 보인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바로 극의 주도자가 다르다는 점이다.
<공조>는 한 마디로 말해 림철령의 복수극이다. 자신이 신뢰했던 상관의 손에 아내를 잃은 철령의 복수심이 극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령의 시점에 몰입한 관객들은 자연히 차기성을 응징하고 싶다는 감정을 갖게 되고, 그 덕분에 감정의 밀도가 자연히 높을 수밖에 없다. 반면에 <공조2>는 장명준의 복수극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 사람들을 먹여 살릴 외화를 벌기 위해 당의 명령을 따라 군인의 명예도 버리고 마약 밀거래를 시작한 장명준. 그러나 그는 자신이 벌어온 외화가 북한 사람들이 아니라 권력자의 수중에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당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버리고 범죄자의 길을 택한다. 이후 북한 정권에 의해 가족이 처형당한 사실을 알고서는 북한 측 10억 달러의 비자금을 훔쳐 복수를 실행할 미끼로 삼는다.
따라서 작중 모든 사건과 에피소드는 장명준에 의해 발생하며, 공조를 펼치는 세 형사는 그 사건들에 휘말리는 수동적인 캐릭터에 불과하다. 그들은 장명준이 숨기는 진짜 목표와 계획을 알아내기 위해 동분서주할 뿐, 그의 큰 그림과 동기가 무엇인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좀처럼 파악하지 못한다. 그 결과 뉴욕이나 폐공장, 클럽 VIP룸과 북한 대사 숙소처럼 장명준과 주인공들이 직접적으로 대면하거나 충돌하는 시퀀스를 제외하면 이들 간에는 직접적인 관련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장명준과 세 형사의 서사는 하나의 이야기로 긴밀하게 엮이는 대신 다 따로 노는 듯 보인다.
달라진 주도자가 밀어버린 스노우볼
물론 장명준을 스토리텔링의 전면에 내세우는 선택은 나름의 순기능이 있다. 각 캐릭터에게 보다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제공되고, 그 공간에서 펼쳐지는 티키타카는 익숙함과 새로움 사이를 오가는 <공조2>의 매력 포인트이기 때문이다. 장명준을 매개로 잭이 공조수사에 투입되어 림철령과의 라이벌리를 조성한 결과 강진태의 큰 형 리더십이 돋보이는 것 대표적이다. 또 빌런과의 직접적인 연관성 혹은 복수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도 없기에 림철령은 한결 여유롭고 느긋해질 수 있으며, 그래서 철령과 진태의 관계에서는 익숙한 듯 새로운 면모가 엿보인다. 이에 더해 조연이었던 민영의 역할이 늘어나 로맨틱 코미디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변화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달리 말해 영화를 구성하는 다양한 에피소드 간의 집약성이 현저히 낮아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냉정하게 따져보면 사실 장명준은 철령에게 잔혹한 짓을 저지르지 않는다. 비록 뉴욕에서 철령이 동료를 잃기는 하지만, 눈앞에서 아내가 살해된 것에 비하면 정서적인 유대감이 느껴지지 않는 동료가 죽는 것은 몰입도를 높일 수 있는 기제라고 보기 어렵다. 즉, <공조2>는 전편만큼의 무게감이 느껴지는 동기를 대체할 수 있는 요소를 찾아야 했다. 이때 영화는 굳이 장명준과 주인공들의 관계성을 강화시키기보다는 장명준이라는 빌런의 캐릭터성을 강화하여 옅은 관련성을 가리려는 듯 보인다. 악역의 잔혹함이 위험성을 직관적으로 각인시켜 주인공들과의 대립에 개연성을 더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약 밀수를 통해 북한 정권의 비자금을 확보하고, 이를 통해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복수하려는 장명준의 서사는 전작의 악역이었던 차기성에 비해 꽤나 상세하게 제시된다. 전편의 철령만큼이나 장명준은 절박하고 다급해 보이는 캐릭터로 비친다.
그런데 정작 카메라의 포커스는 진태, 철령, 잭에게 쏠려 있고 장명준은 국면 전환이 필요한 순간에만 등장하기 때문에 영화는 언밸런스하고 거칠게 느껴진다. 민영이 호감을 느끼자 잭을 질투하는 철령이나 국정원 요원들과 갈등을 빚는 진태처럼 부차적인 장면들이 거듭 더해지다 보니 장명준의 존재감과 복잡한 서사를 소화해낼 충분한 비중과 분량은 미처 주어지지 않는다. 다양한 서브플롯 중 무엇을 희석시키고 무엇을 농축시켜야 할 지의 판단이 잘못된 것이다. 림철령과 잭이 아니라 현빈과 다니엘 헤니라는 배우의 이미지를 담기 위해 심심할 때마다 등장하는 슬로 모션은 이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전편을 좋아했을 관객들에게 추파를 보내기에 바빠 극의 전반적인 밸런스를 좀처럼 잡지 못하는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산만함
결국 전편이 이야기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액션과 코미디를 활용했다면, 이번 편은 액션과 코미디를 보여주기 위해 이야기를 짠 것처럼 보인다. 액션이 등장할 때, 민영과 함께 코미디가 나올 때, 강진태의 가족 드라마가 펼쳐지고 장명준의 범죄 행각이 묘사될 때마다 영화의 톤과 템포가 전혀 다른 작품을 이어 붙인 듯 널 뛰는 것이 그 방증이다. 그래서 악역인 장명준은 망설임 없는 잔혹한 악행과 독특한 비주얼, 림철령에 견줄 만큼 날렵한 액션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극에 녹아들지 못한다. 전편의 경우 전체적인 서사의 흐름이나 구조가 월터 힐 감독의 1988년 하드보일드 액션 영화 <레드 히트>와 지나치게 유사하다는 비판을 받았는데, 속편은 그보다도 못한 부실한 서사를 선 보이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공조2>는 산만하다는 인상을 피할 수 없다.
이에 더해 영화가 중심을 못 잡는 사이 커진 스케일 사이로는 구멍이 숭숭 뚫린 장면도 발견된다. 새로운 캐릭터인 FBI 형사 잭을 투입하기 위한 배경 설정이 대표적이다. 코로나 이전에 기획된 작품이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영화는 남북 공조에 미국을 개입시키기 위한 지렛대로 북미 관계의 개선이라는 소재를 끌고 온다. 북한과 미국이 안정적으로 정식 수교 관계를 맺기 위해 잭이 뉴욕에서 검거한 북한 측 범죄자 장명준을 림철령에게 인도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싱가포르에서 열리기로 했던 북미 고위급 회담이 서울에서 개최된다는 것이나 평창올림픽 당시 김영철의 방남을 연상케 하는 내용도 <공조2> 배경의 시점을 쉽게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문제는 북미 관계의 결말을 알고 있는 2022년 현재 시점에서, 추석을 앞두고 북한이 핵을 포기할 수 없다고 선언한 상황에서 이러한 배경 설정은 무리수로 느껴질 여지가 충분하다.
물론 이를 그저 영화 전개를 위한 가상의 설정으로 볼 수도 있다. '인터내셔널' 대신 촌티가 느껴지는 '인터내셔날'이 부제목인 데에는 첨예한 국제 정치의 현실을 스크린 속으로 끌고 오지 않겠다는 의도가 느껴진다. 또 명절에 걸맞게 웃기는 액션 영화로 남겠다는 <공조2: 인터내셔날>의 정체성과도 맞닿아있다. 비록 코미디가 신선하다고 보기 어렵고 휴지 대신 파리채를 쓰는 액션씬이 인상적이라고 보기도 어렵지만, 웃음을 강요하지 않으며 나쁜 놈은 벌 받고 착한 사람은 이기는 액션은 <공조2>가 목적을 이루는 데에 충분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공조2>의 완성도는 더욱 실망스럽다. <오징어 게임>, <수리남>처럼 명절을 겨냥한 장르물이 OTT로 공개되는 가운데 명절 영화라는 이유로 못 만든 영화라는 비판을 피해 가는 기획과 제작에 어떤 의의가 있을지 의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땅한 경쟁작이 없는 상황에서 빈집 털이에 가까운 <공조2>의 성공 역시 과연 유의미하다고 볼 수 있을지, 그 의문을 피할 길은 없어 보인다.
D(Dreadful, 끔찍한)
흥행만을 노리는 선물 세트에 담긴 한국 상업 영화의 절망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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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FF 데일리] 영화를 위한 영화
영화 리뷰에 앞서, 인상 깊었던 이야기를 짚고 넘어가고 싶다. 우선 영화의 장르는 예상컨데 코미디이다. 근데, 뒷자리 앉은 관객이 영화가 끝나고 나서 "나 울컥했어. 너무 슬퍼" 라는 말을 했다. 왜인지 이해와 공감이 충분이 가는 대사다. 코미디인데 왜 슬프냐면, 이 영화는 누군가에겐 다큐멘터리다.
영화 감독 '000'
영화는 제19회 전주국제영화제 대상을 받은 '지석'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연출인 줄알았는데 실화였다고 한다.) '지석'은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했지만, 오래 사귄 여자친구의 아버님에겐 그저 '영화 감독이라는 꿈을 꾸는 능력 없는 남자친구' 일 뿐이다. 그래서 시나리오를 쓰고 또 쓴다. 이번 시나리오 주제는? '장인을 죽이는 사위' . 이 시나리오를 가지고 제작사에 찾아가본다. 제작사에서는 "돈이 되는 영화가 아니다." 혹은 "저예산으로 찍을 수 있는 시나리오가 있다. 그걸 찍어달라"라는 부탁만 한다. 이들에게 지석은 그저 영화제에서 대상 받은 가성비 감독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감독 모임에선 그저 '감독'에 대한 한탄만 있다. '요샌 개나 소나 다 감독' '영화제목과 배우만 기억하는 요즘' 이라는 키워드로 불평불만을 쏟아내지만 결국 유의미한 소득은 없다.
영화 감독 '지석'은 극단 출신이다. 극단 동기였지만 지금은 대스타가 된 '명성'이 '지석'의 영화만 같이 해준다면, 투자와 나머지 캐스팅은 쉬워진다. 하지만 극단 시절 여자를 사이에 두고 다툰 그들은 멀어진 상황. '지석'은 창피함을 감수하고 '지석'을 찾아가지만... 소득은 없다.
그녀의 등장
그러던 중, 등장한 '미란'. '미란'은 어디서 본 듯, 한 그런 조단역을 맡았던 여배우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 미국에서 살며 배우의 꿈을 접고 행복하게 살던 중 시한부에 걸린 것. 그런 남편이 5억을 투자할테니 '지석'에게 영화를 찍어달라고 부탁한다. 나름(?)의 고민을 하던 지석. (사실 고민은 3초컷) 결국 '미란'과 함께 영화를 찍기로 한다.
스태프들도 구하고, 배우 오디션도 보고, 헤드들도 구하고. 예산이 넘쳐나니 로케이션 헌팅도 즐겁다. (지석의 전작품은총 예산이 3,000만원 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그들에게 시련이 생긴다.
눈이 즐거운 카메오의 출연
'어! 나 저 배우 아는데'의 연속이었다. 박호산·봉만대·모그·대도서관 등 화려한 카메오들로 구성되어있다. 인상 깊었던 카메오의 장면은 '잘나가지 않는 감독'들의 모임에서 실제 '모그 음악감독'이 출연해서 놀랐다. (아래 사진)
영화를 위한 영화
사실 영화를 전공해서 독립 단편영화를 촬영한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 영화를 보니 참 애틋했다. 심지어 대학생이었던 시절 영화 제작 PD를 맡았을 땐, 한끼 식사를 1,400원 야채김밥을 할 지 좀 더 무리해서 2,000원의 봉구스 밥버거를 할 지가 최대 고민이었다. 지금은 현장일을 하지 않았기에 잊고 있었는데 '영화로 만들려고'를 보니 마음이 아팠다. 아직 상업 영화가 아닌 현장은 이렇구나.
그럼에도 '영화' 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사람이 있기에, 지금 내가 있는 전주국제영화제가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이 영화에 주고 싶은 키워드는 영화를 위한 영화다.
정형석 감독님은 사실 이 작품으로 알게되었는데, 이 작품이 다섯 편째 장편 영화라고 한다. 정형석 감독님이 궁금해지는 영화다.
EDITOR_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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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램> 종교, 인간, 자연 사이를 경계 없이 넘나들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눈 폭풍이 휘몰아치던 크리스마스 날 밤 이후 '마리아(누미 라파스)'와 '잉그바르(힐미르 스나에르 구오나손)' 부부는 양 목장에서 태어난 신비한 아이 '아다'를 선물 받는다. 새끼 양과 인간의 모습이 공존하는 이해할 수 없는 형상을 한 아다이지만, 이미 한 차례 아이를 잃은 바 있는 부부는 아다에게 극진한 사랑을 베푼다. 그러나 우연히 주어진 선물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마리아는 점차 아다에게 집착하기 시작하고, 그녀의 집착은 잉그바르의 형 '피에튀르(비욘 흘리뉘르 하랄드손)'의 등장과 함께 절정에 도달하면서 비극의 시작을 알린다.
발디마르 요한손 감독의 공포 영화 <램>은 기본적으로 기독교적 배경과 밀접하게 연관된 작품이다. 크리스마스 밤을 배경으로 하는 첫 장면부터 그렇다. 알 수 없는 존재가 목장을 찾아온 뒤 한 마리의 양이 임신을 하고, 반은 양이고 반은 인간인 아기 아다를 낳는다. 기독교 교리상 예수가 완전한 신이자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라는 상이한 특성이 공존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떠올려 보면, 크리스마스에 태어난 아다의 존재는 예수에 대한 비유로 보인다. 예수가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어 인간의 죄를 씻어낸다는 점에서 예수가 흔히 어린양에 비유된다는 점, 아다를 입양한 여성 주인공의 이름이 다름 아닌 마리아인 점도 영화에 기독교적 색채를 더한다.
하지만 영화가 성경의 상징을 빌려왔을 뿐 내용까지 반복하지는 않기에 <램>은 종교적 관점에서도 이해할 수 있고, 그 반대의 관점으로 해석 가능하다. 우선 종교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램>은 신의 섭리에 도전한 인간을 향한 징벌을 다룬 영화로 볼 수 있다. 마리아와 잉그바르는 우연히 입양하게 된 아다가 본인들이 잃은 아이 대신 찾아온 축복이라고 생각해 극진한 사랑을 베푼다. 그런 그들에게, 특히 마리아에게 아이를 그리워하는 울음소리를 내는 어미 양의 존재는 자신의 모성애를 위협하는 존재라서 거슬릴 따름이다. 그래서 그녀는 어미 양을 죽인다. 앞서 보았듯이 아다가 예수의 알레고리라면 어미 양은 마리아에게 예수를 보내준 신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이런 마리아의 행동은 신이 정한 소명을 거부하고 신에게 도전하는 행위나 다름없다.
마리아와 잉그바르가 잠시 아다를 잃어버리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부부가 잠시 각자의 생업을 하느라 아다를 신경 쓰지 못한 사이 아다는 사라지고, 아다를 찾아 헤매던 부부는 초원에서 어미 양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아다를 발견한다. 이는 요셉과 마리아가 12살이 된 예수를 예루살렘에서 잃어버렸다가 성전에서 학자들과 토론하는 예수를 발견한 사건과 동일해 보인다. 특히 엄마 양과 함께 있는 아다의 모습은 신이 아버지(하느님)의 집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느냐고 되묻는 어린 예수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그런데 그 직후 두 마리아의 행동은 정반대다. 성경 속 마리아가 이 모든 사건을 마음속 깊이 간직한 채 신에게 순응하는 반면, 영화 속 마리아는 어미 양이 아다를 뺏으려 했다고 여기며 화를 내고 내쫓으려고 한다. 그 외에도 간음과 같은 마리아의 다른 죄가 묘사되는 것까지 고려하면, 영화의 결말은 자신이 거부한 신에 의해 징벌 혹은 응징당하는 인간의 모습을 포착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램>은 정반대의 해석도 가능하다. 성경의 이야기 구조를 뒤튼 새로운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기에 오히려 자유의지와 욕구라는 인간성에 대한 고민을 담은 영화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또 이는 대사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화면과 소리를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는데 초점을 맞춘 효과이기도 하다. 영화 내에서는 특정 상황 또는 장면의 의미가 무엇이다라고 명확히 대사로 정의하는 대목이 거의 없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것은 받아들이는 관객의 생각과 상황, 선입견과 편견에 따라 그 의미가 정반대로 달라질 수 있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마리아의 모성애다. 이미 한 차례 상실을 겪은 바 있는 그녀는 뜻밖에 주어진 아다를 자신의 아이로 받아들여 그 상실감을 채우려고 한다. 이때 아다가 온전한 인간의 형상을 갖추고 있지 않았기에 마리아에게는 그를 양으로 키울지 아니면 인간으로 키울지 선택할 수 있었는데, 그녀는 모성애라는 감정과 욕구에 충실한 선택을 한다. 즉, 갓 태어난 아이를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고 깊이 슬퍼하는 것이 운명이었다면, 그녀가 아다를 입양하는 것은 정해진 운명을 거부하고 새로운 삶의 길을 개척하려는 인간의 의지가 두드러진다. 신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의 추구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저 신의 섭리를 거스른 인간에게 닥친 비극 같던 영화의 결말도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영화는 모든 사건이 끝나고 다소 허망해 보이는 표정을 짓던 마리아가 눈을 감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뱉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는 마치 상실과 슬픔으로 정해진 길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친 것이 더 큰 상실이라는 비극으로 되돌아오더라도, 마냥 운명에 순응할 수는 없다는 인간의 모순적이고 갑갑한 심경을 대변하는 듯하다.
더 나아가 아이슬란드의 자연 배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연출 방식은 마리와 아다의 이야기를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보다 넓은 시점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또 다른 길을 보여준다. 사실 이 영화는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로 가득하다. 마리아와 잉그바르 부부를 제외한 모든 것으로부터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자연이 지닌 초자연성이 드러난다. 죽은 것이 부활하기도 하고, 알 수 없는 존재가 생명을 선사하며, 한 대상이 전혀 다른 대상으로 변하기도 한다.
그런데 영화는 이러한 현상이나 사건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광활한 초원, 높은 산맥과 그 산마저 가려버리는 짙은 안갯속에 매우 작은 부분을 차지하는 인간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 결과 자연이 지닌 초자연적 힘은 이해하기보다는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대상처럼 보인다. 제도 종교에서 정의하는 신의 모습이나 규율, 교리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 범접할 수 없는 광활하고 광대한 자연의 힘 앞에서 인간은 저항할 수 없고 굴복할 수밖에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비록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선택하고 살 수 있지만, 자신들의 선택이 낳은 자연의 결과와 반응 앞에서는 한없이 무력한 존재이기에 겸허해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렇게 자연의 힘 앞에 압도되는 분위기는 <램>이 통상적인 호러 영화는 결이 다르더라도 결국 '호러' 영화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영화의 내용이나 구조, 주제와는 별개로 마케팅적인 측면에서 <램>은 실망스러운 작품일 수 있다. 좋게 말하면 관객들의 니즈를 잘 캐치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낚시를 잘했기 때문이다. <램>의 포스터를 보면 미국의 독립영화제작사인 A24의 로고가 강조되어 있다. A24가 <유전>, <미드 소마>처럼 예술성과 독창성을 모두 인정받은 공포영화를 제작해 관객들의 신뢰를 받고 있는 사실을 셀링포인트로 삼은 것이다. 문제는 A24가 <램>의 배급사이기는 하나 제작사는 아니라는 것이고, 그 결과 <램>은 여러모로 기대와는 다른 영화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는 영화를 그 자체로 온전히 감상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또한 종교와 인간, 자연과 인간 사이의 모호한 경계와 관계를 넘나드는 영화이고, 영화의 형식도 그리 친절하지는 않다 보니 난해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신중하게 끈기를 가진 채 이 기묘한 가족의 일상을 들여다보아야 비로소 영화가 무엇을 말하는지가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하고, 한 번의 관람으로는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난해함과 고민 끝에 무수한 해석이 가능한 것이 <램>만의 매력임을 인정하고 나면, 왜 이 영화가 제74회 칸영화제서 독창성상을 수상하고 제54회 시체스영화제에서는 작품상, 여우주연상, 신인감독상 3관왕을 차지했는지 그 이유를 실감하는 것만큼은 어렵지 않다.
A(Acceptable 무난함)
수없이 곱씹어야 느껴지는 결이 다른 공포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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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F 데일리] 투박한 울림으로 기억하기
Director] 모리 다츠야
Cast] 이우라 아라타, 다나카 레나, 나가야마 에이타, 히가시데 마사히로, 코무 아이, 토요하라 코스케, 에모토 아키라 외
Program note]
1923년 9월에 어떤 일이 있었나? 영화는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뒤 발생한 비극을 들여다본다.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자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소문이 퍼졌고 일본 군경과 무장한 일본인이 수많은 조선인을 학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사건의 진상은 아직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는데, 일본 감독이 이런 소재를 영화로 만들었다는 사실부터 눈길을 끈다. 1923년 9월, 가난한 15명의 일본 행상단이 후쿠다 마을에 도착한다. 의약품과 일상용품을 팔며 떠돌아다니는 그들은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자 생소한 지방 사투리를 쓴다는 이유로 조선인으로 오해를 받는다. 일본에서도 잘 안 알려진 후쿠다 마을 사건의 시작이다. 조선인 학살과 마찬가지로 후쿠다 마을 사건도 잊혀진 역사이다. 감독은 “99년이 지난 지금 이 비극적 사건을 아는 이는 거의 없다”고 말했고, 프로듀서는 “우리는 망각하게 놔두어서는 안된다. 알아가고, 기억하고, 소통하는 것은 항상 항거의 행위가 될 수 있다”는 제작 의도를 밝힌 바 있다. (남동철)
아주 어릴 때, 지금으로선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어떤 소설집을 읽었다.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단편 소설집이었고, 그 중에서는 어머니가 아이를 뒤뜰로 데려가 꽃잎으로 한글을 써 보내는 아련한 장면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끔찍한 이야기도 있었다. 관동대지진 이후 미쳐버린 것 같은 사람들이 사람들에게 ‘15엔 50전’을 발음해 보게 시킨 다음, 발음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죽창으로 찔러 죽이는 것이다. 그 소설집에서 죽창에 찔러 죽은 사람은 말을 더듬는 일본인 아이였다.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소설집에서 기억나는 장면이라곤 딱 그 두 장면뿐이다.
의도치 않은 조기 교육(?)으로, ‘후쿠다 마을 사건’이 낯설기만 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충격적이다. 자국민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자국민을 위협하는 가짜 뉴스를 뿌리고, 마치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가짜 뉴스의 뒤를 따라가던 끝에, 자국민을 위해 휘두른 무기는 자국민을 죽이고 만다. 그러나 이를 단순한 촌극으로 코웃음 치며 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자국민을 죽인 것이 “실수”였다면, 자국민이 아닌 자들을 죽인 것은 괜찮은가? 우물에 독을 풀었고 살인과 강간을 일삼는다는 거짓말을 뿌려 가며 조선인을 죽이려 한 사람들은 누구일까?
역사는 언제나 “피는 피로, 폭력은 폭력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주지시킨다. 극중에서도 몇 번이나 대사로 강조하지만, 사람들이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식의 루머를 받아들인 데에는 이유가 있다. “조선인들이 너무 많은 괴롭힘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논조이다. 그렇다면 괴롭히지 않으면 될 텐데, 가해자의 손에서 뻗쳐 간 폭력은 다시 가해자에게 불안으로 돌아간다. 쌍방의 폭력이 아닌 일방의 폭력이어서, 그 불안은 또 다시 피해자의 피를 흘린다. 바로 이런 이유로 식민 지배는 전쟁보다 참혹하다.
그게 1923년의 일이었다. 관동대지진 이후 너무 많은 조선인이 죽고, 후쿠다 마을 사건처럼 중국인이나 일본인도 죽고, 말도 안되는 참극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그 난리를 막아 보겠다고 내린 칙령들은 1925년 치안 유지법이라는 탈을 쓴다. 다시 조선인을 옥죄는 법이었다. 그 난리통에서 배운 게 아무 것도 없는 이들은 그 후로도 20년 동안 수많은 사람을, 생명을 수탈한다.
어느덧 관동대지진은 100년 전의 일이 되었고, 많이 잊혔다. 관동대지진 이후 있었던 어떤 일들이 그 후로도, 어쩌면 지금까지도 폭력의 굴레를 덧쓰고 있다는 것도 우리는 거의 인지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이러한 작품의 존재는 소중하다. 특히나 일본 감독이 만든 영화에서 1919년의 병천, 제암리 같은 지명이 대사로 똑똑히 들리는 순간은 놀라웠다. 병천은 아우내 장터, 즉 1919년 유관순 열사가 있던 곳이자 3.1운동을 상징하는 곳이며, 제암리는 그 이후 일본군이 보복성으로 민간인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사건이다.
일본 국적을 가진 이가 전쟁범죄를 똑똑히 언급하는 일이 얼마나 드문지 잘 알고 있기에, 그 순간은 놀라웠다.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을 구분하기 위해 발음이 미묘한 ‘15엔 50전’ 또한 영화에 또렷하게 언급되며, 일본에서 어렵게 살아가다 살해되는 조선인 캐릭터도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다. 그가 마지막으로 뱉는 대사는 분연히 외치는 자신의 이름 세 글자였다. 이런 영화는 앞으로도 쉽게 나오지 않을 것이다.
아쉬운 점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더없이 인간적이라는 점을 표현하고 싶었던 듯하나, 젠더 의식 이래도 되나 싶은 장면들이 있었고, 이야기의 진행을 위해서이기는 하나 “좋은” 일본인의 비율이 현실 대비 매우 높아, 보는 조선인 입장에서 기분이 미묘해진다. 게다가 “좋은” 일본인은 하나 같이 장신의 배우들이 맡아서, 사진을 ‘포토샵’ 처리해 프로파간다에 이용하던 일제가 생각나 또 기분이 기묘하다. 그러나 아쉽다는 말만으로 지나치기엔, 이런 영화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이다.
아주 정교하게 연출되고 적절하게 배치된 아름다운 문장이어서 마음에 오래 남는 대사들이 있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라든지, “추신, 나도 네 꿈을 꿔” 같은 대사들 말이다. 반면, 투박하게 놓여서 적나라하게 외치는 소리이기에 외면할 수 없는 대사들도 있다. 이 영화의 대사들이 그렇다. 당시의 일본 시민들이 그토록 지키고자 한 국가는 무엇인가? 그게 무엇이며, 그걸 지키기 위해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옳은가? 그 사람이 조선인이면 괜찮은 것인가? 무의미하고 잔혹했던 몰살은 기록하지 않아도 괜찮은가? 투박한 대사들은 100년 후의 우리에게도 울림을 준다. 나라를 빼앗기고 언어를 짓눌리고 목숨마저 죽창에 찔려 버린 어떤 사람들의 나라에서 그 울림을 목격하는 기분은 정말로 기묘했다. 이 영화가 던진 울림 이상의 작품들을 더 보고 싶어진다.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2023.10.04-13) 상영시간표]
10월 06일 20:00 CGV 센텀시티 3관 (097)
10월 09일 09:00 영화의전당 소극장 (289)
10월 11일 16:0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5관 (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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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쿵푸팬더는 퀴어 영화인가?
여전히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등장으로 평가되는 1편, 매력적이고 유머러스한 빌런이나 주연들 간 깊어진 친밀감에 정들었던 2편. 그러나 많은 시리즈물이 그러하듯 <쿵푸팬더> 역시 편수가 늘수록 초기 영광을 따라잡지 못하는 듯하다.
생각해보면 쿵푸팬더 시리즈의 전략은 언제나 간단하고 명확했다. 주인공만큼이나 매력적인 빌런들에게 주인공이 해내지 못하는 걸 죄다 맡겨버리는 식으로 균형을 맞추는 것.
주인공 포에게 극단적으로 발랄한 성장 서사를 부여해 기존의 성장형/먼치킨 히어로 영화들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냈지만, 그 부작용으로 무거운 원숙미가 극단적으로 부족해진다. 포는 입양아라는 사실도 생각 외로 잘 받아들이고 새로 찾은 친아빠와도 1초 만에 친해지는, 사실상 대디 이슈가 없어 더 드문 남성형 히어로다. 포를 대신해 타이렁과 솅 공작의 애증 어리고 가슴 아픈 개인사가 그 무게를 짊어진다. ‘기’를 운운하며 이야기를 포의 뿌리가 되는 팬더 마을과 영계까지 끌고 간 3편부터 약간 길을 잃은 느낌이긴 했지만 그나마 우그웨이 대사부의 숙적인 카이를 등장시켜 ‘사연 많은 빌런’의 명맥을 이어갔다.
그러니 4편의 가장 큰 문제는 빌런의 존재감이 너무나 약하다는 점이란 데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카멜레온의 속성을 차용한 디자인까지는 기존의 맹수들과 달랐던 2편의 우아한 솅 공작을 떠올리게 해 기대가 컸지만, 구멍이 많아도 너무 많은 카멜레온의 백그라운드 탓에 관객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카멜레온은 한미하고 천한 출신과 여자라는 점, 그리고 ‘작은 몸집’ 때문에 쿵푸 수련원들이 자신을 받아주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마스터 시푸와 오인방의 맨티스가 있는데 정말로 작은 몸집이 문제가 될 수 있는가? 타이그리스와 바이퍼가 있는데 (물론 성비는 또 당연하게 구색 맞추는 척만 했지만) 여성으로서 쿵푸에 도전하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게다가 그가 영계에서 불러낸 전작의 빌런들 중에는 분명 의미없이 소진된 캐릭터들이 있다. 일찍이 제 입으로 “쿵푸 실력으론 대적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부족한 화력을 메꾸기 위해 제국주의 시작점의 상징인 대포를 택했던 솅 공작이나, 포와의 마지막 싸움으로 말미암아 영혼_삭제_진짜삭제_휴지통에서삭제 된 줄 알았던 카이가 ‘빌런 쿵푸 마스터’로 재등장하는 건 의아함만을 남긴다.
‘동아시아계’ 감독을 기용해 시리즈 자체의 전제가 내포한 오리엔탈리즘의 한계를 극복하려던 노력도 무화되고, 포의 새로운 여정은 마치 바이킹처럼 배를 타고 먼 이국으로 나아가는 침범의 궤적을 따른다. 심지어 항구에서의 출항이 가능할 것인지 아닌지를 두고 쉽게 납득되지 않을 정도로 긴 러닝타임을 할애하는데, 이 이야기 구조는 전형적인 호메로스식 오디세이의 전통을 따른다(아가멤논은 딸 이피게네이아를, 오디세우스는 젊음 20년을 바치고서야 ‘출항’할 수 있었다).
그간 할리우드에서 뒤늦게 주목받기 시작한 아시안 배우들이 대거 기용되어 주연 자리에 앉긴 했지만, 결국 4편의 전반적인 얼개는 앵글로 아메리칸 관객들에게 가장 익숙한 설화로 ‘회귀’한 것이다.
아쉽고 부족한 개연성을 채워주는 건 이 영화를 퀴어 애니메이션 영화로 읽어볼 수 있다는 상상이다. 어쩌면 1편부터 차근차근 전개되어 온 퀴어 코드는 4편에서 포의 두 아버지들 - 양부 국수 장인 거위 핑과 살찐 판다 친부 리 아저씨 -의 기이한 동행으로써 드디어 만개하는데, 이들의 ‘함께 함’에 대한 포의 자연스러운 수용은 어쩐지 게이 부부가 사랑으로 키운 아들의 반응을 연상시킨다.
생각해보면 쿵푸팬더엔 처음부터 애들 보는 영웅 애니메이션과 사뭇 다른 무언가가 존재했다. 시작점에선 나 역시 자각 없는 초등 꼬꼬마였기에 ‘여전사’ 타이그리스에 기이할 정도로 끌리고 동일시하려는 나 자신을 좀 민망하게 생각했던 것도 같지만. 16년 지나 추억의 애니메이션에서 ‘동족의 흔적‘을 비로소 발견했다고 느낀 퀴어 당사자로서 기쁘게 읽어낸 네 가지 증거들로 이 시리즈의 퀴어함을 논증해보고 싶다.
1. 쿵푸팬더에는 명시적 러브라인이 없다.
아픔을 딛고 성장해 마을, 국가, 세계의 영웅으로 차츰 몸집을 불려나가는 영웅의 서사엔 언제나 그의 애인(들)이 있다. 순애보거나 아니거나의 차이만 존재할 뿐. 에반게리온에도 이누야샤에도 배트맨에도 있는 사근사근하지만 강단 있는 여성 애인과 결정적일 때 터프한 남성 영웅의 조합이 <쿵푸팬더>엔 없다. 오히려 시종일관 터프한 타이그리스와 순둥하고 멍청한 포의 역전적 조합이 있긴 하지만, 2편에서 크레인의 입을 떡 벌어지게 한 그 둘의 포옹을 ‘사랑의 시작점’으로 해석하기엔 무리가 있다. 이 포옹은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다고 오해되던 타이그리스가 ‘도무지 진지할 수 없’는 조증 같던 포의 성장과 우정을 그리기 위한 장치이기 때문이다. 포의 슬픔과 고뇌를 타이그리스가 진심을 담아 위로하며 서로의 영혼을 제대로 응시하기 시작한 장면이지, 안젤리나 졸리와 잭 블랙이 탈 쓰고 연기하는 동물들이 서로의 페로몬을 감지한 장면이 아니다.
게다가 ‘접촉’을 ‘독점적 연애’의 시작점으로 보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인 헤테로-모노아모리-이성애적 세계관이 <쿵푸팬더>의 길거리엔 부재한다.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부부는 가끔 목격되지만 그들 사이 손잡거나 입 맞추는 애정행각이 단 한 번도 없고, 젊은/미혼의 커플로 보이는 이들이 없고, 실수로 서로를 터치했다가 얼굴 붉히며 가까워지는 클리셰적 썸의 단계가 없단 뜻이다. 아주 친밀해 보이는 동종의 동물 주민들의 젠더는 대부분 판별되지 않는다. 일단 크기부터 그들이 어른인지 아이인지 구분할 수 없고 서넛 이상의 친구 혹은 파트너들이 군집을 이뤄 몰려다니는 경우도 많다. 이처럼 여러 ‘분류’를 위한 경계는 의도적으로 흐려져있다. 반대로 모든 성애적 관계가 너무 표백된 탓에 이 풍경을 거의 무성적/무성애적 마을이라고 멋대로 희망회로 돌려 해석해도 좋을 지경이다.
헤테로 이성애 외의 모든 것을 비가시화시키는 미국발 애니메이션의 전통에 빗대어보자면 1편부터 꾸준히 모든 성애를 비가시화시켜온 쿵푸팬더의 때이른 시도는 가히 혁명적이다. 2024년에 이르자 4편까지 나온 장수 시리즈는 도리어 ‘가장 PC한’ 그림을 ‘미리’ 준비해둔 선구안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만 같다.
2. ‘커플’의 부재에 비해, ‘아빠들’ 사이의 퀴어한 동거/동행은 점점 더 도드라진다.
거위 핑과 팬더 리의 관계는 3편 막바지의 화해를 이룰 때부터 조금 묘했고, 4편 등장부터 본격적으로 묘해지기 시작한다. 먼저 포는 양부와 친부를 통틀어 ’dads’라고 애정을 함뿍 담아 부르는데, 영미권 영상 콘텐츠에 익숙한 이라면 이 복수형 호칭이 그간 지칭해온 시트콤 속 나이 든 게이 커플을 즉각 세 쌍 이상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한번 흠칫하고 이들이 영위하는 일상이 좀 과하게 노부부 바이브라는 데에서 두 번 흠칫하게 된다. 핑은 여느 때처럼 국수를 만들어 팔고, 리는 이걸 조금 돕긴 돕는데 철없고 느려 큰 도움은 되지 못하는 듯하고. 핑은 리를 면박주고 불안해하며 포를 걱정하고, 리는 핑의 호들갑을 유들유들 달래며 별일 없을 거라 하고. 당연히 스킨십은 없지만, 왜인지 길거리의 토끼 혹은 돼지 커플이 훨씬 더 담백해 보일 정도로 핑과 리 사이 거리감이 박살나있다.
슬슬 대놓고 장르 전환을 시도하겠다는 건가 아니면 내가 이제 너무 썩어버린 동성애꾼인가 눈을 의심케 하는 평화로운 국수 가게 시퀀스가 지나고 나면 ‘아빠들’은 점점 더 의뭉스러운 결정을 내린다. 바로 다 큰 아들을 여전히 공동 걱정, 공동 양육, 공동 구원하기 위해 멀고 위험한 여정을 떠난다는 것. 길 위에서 그들은 서로를 구해주고 투닥대며 오롯이 둘만의 시간을 쌓아간다. 포에 대한 애정으로 결속된 대안 가족이지만 이제는 포 없이도 포를 생각하며 즐거운 2인 관계를 유지하는 아빠들. 항구 위 벼랑의 술집에서도, 주니퍼 랜드의 위험천만한 성벽 위에서도 아빠들은 아들만큼이나 서로를 챙기는데, 역시 최소 50년을 함께 한 파트너 같은 신뢰와 과감함으로 빚은 액션이 반복된다.
포와 젠만큼이나 핑과 리의 버디무비가 이번 영화의 주요한 플롯이고, 두 아빠에게 주어진 스포트라이트와 할애된 시간이 주인공 못지않다는 걸 생각하면, 혹시 이 둘의 (변화해가는) 관계성에 관객이 그만큼 주목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닐지?! ㅎㅎ(제발요)
3. 영화의 사제 관계는 언제나 사제 이상의 내밀함과 애틋함을 내포한다.
누구나 1편의 최고 명장면으로 꼽을 만한, 타이렁과 시푸의 벼락으로 시작해 마지막 일격으로 끝나는 비극적 재회. 그 시퀀스에서 타이렁은 몇십 년간 지하 감옥에 묶여 저주했다던 스승을 때리며 거의 눈으로 핥고 있고, 시푸는 갓난아기부터 먹이고 키운 ‘그 애’를 힘껏 사랑했던(하는) 기억을 떨칠 수 없어 치명타를 모조리 맞아주며 애달파한다. 쓰러진 시푸가 후회를 말하자 타이렁은 아주 크게 흔들리고, 바로 다음 순간 타자의 개입이 없었다면 시푸를 거의 용서할 뻔한다.
유서 깊은 중국 무협지들이 웬만한 BL 뺨을 후드려갈기는 남남 간의 우정 아닌 사랑 같은 우정을 얼마나 고전적으로 묘사했는지, 그 명맥을 이은 근현대 작가들 역시 예술적으로 섹슈얼하고 질척이는 동성의 나이차 많은 사제 관계를 놓지 않고 무협BL이란 혼종까지 만들어낸다. 그리스에 사제-스폰서-유사 부자 관계를 맺는 미소년과 중년 남성이 있었다면 중국에는 무협 게이가 있었던 셈인데, 쿵푸팬더의 요상하게 질척이는 사제/유사 부모 관계는 이 두 갈래 문화의 영향을 모두 받았기 때문일 거라고 혼자만의 사교적 해석을 해본다.
카멜레온과 젠, 젠과 한의 삼각관계 역시 만만치 않다. 스토리텔러의 역량이나 시간 배분에 조금 부족함이 있었을 뿐 두 스승 역시 ‘악한 짓을 영원히 같이 해줄 줄 알았던 너’에 대한 집착을 놓지 못하고 제자 젠에게 못마땅함을 표한다. 젠은 둘 다에게 죄책감을 포함한 복잡시러운 감정을 품고 있고 그래서 자주 머뭇거린다. 첫 편에서 시푸와 타이렁이 보여준 아주 끈적하고 집착적인 애증이 4편에선 카멜레온과 젠과 한을 통해 재연된 것이다.
특히 카멜레온과 젠을 통해, 몇천 년 간 남성 중심적이었던 무술 세계와 그에 대한 문헌/미디어 묘사에서 한 발자국 나아가, 또한 남남 간 호모섹슈얼한 우정의 배타성과 상투성에서 벗어나, 여성과 여성의 상호 협력/배신/질시와 애착을 다루려 했다는 점을 조금 더 높이 쳐주고 싶다. 16년 된 시리즈가 업데이트를 멈추지 않고 (남의 나라 거 죄다 베껴왔으니 응당 그래야겠지만) 최선을 다해 올바른 트렌디함까지 챙긴 모범 사례로 볼 수 있겠다.
4. 한이라는 젠더뉴트럴한 캐릭터가 등장한다.
<쿵푸팬더>의 주연급 동물들은 대체로 성별이 잘 구분되는 외모/목소리 지표를 가졌지만, 젠의 길거리 스승이자 좀도둑 소굴의 왕인 아르마딜로 한은 도통 성별을 패싱할 수 없는 외관이다. 때문에 목소리나 젠과 맺는 관계를 보고 여성 인물로 어림짐작했다. 이 캐릭터의 성우가 키호이콴이라는 사실을 읽기 전까지는… 영화 보는 동안엔 아주 잠깐의 혼란 끝에 그를 중년 여성으로 추측하곤 카멜레온-젠 다음 하나의 지렛대를 더 끼워 넣어 레즈비언 삼각관계;로 냠냠쩝쩝 해독할 결심에 신나 있었는데 이럴 수가… 하지만 결론적으론 키호이콴의 높고 짹짹대는 목소리가 한이라는 캐릭터의, 이 영화의 (조금은 허술한) 텍스트를 풍부히 하는 데에 무척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시리즈를 통틀어 가장 수수께끼 같은 젠더/섹슈얼리티의 소유자인 한은 1편부터 꾸준히 거슬렸던 몇몇 여성 캐릭터의 디자인에 대한 아쉬움을 어느 정도 상쇄해준다. 바이퍼의 속눈썹과 머리 꽃 장식, 케이트 허드슨이 연기한 3편 팬더 마을의 메이메이의 전형적인 꾸밈이나 ‘여성스러운’ 모션들, 이번 4편의 젠이 보여준 - 어느 정도 <주토피아>의 닉&주디를 반분해 섞은 듯한, 그러나 - 허리만은 잘록하다거나 역시 속눈썹은 길다든가 하는 전형적인 여성 신체 이미지의 재현. 더 나아간다면 루시 리우와 안젤리나 졸리라는 할리우드의 대표적 아이콘들이 그간 고수해온/기대받아온 이미지(그들이 이 시리즈에 0순위로 캐스팅된 이유기도 한)를 조심스럽게 파쇄하는 가능성으로 이 젠더플루이드적 존재를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한의 종잡을 수 없는 매력적인 목소리는 아콰피나가 녹음한 젠의 허스키하고 낮은 목소리와 퍽 잘 어울리기도 한다.
물론 <쿵푸팬더> 시리즈가 대놓고 ‘퀴어를 긍정’한다거나 정치적으로 정교하고 선명한 의도를 가진 영화는 아니다. 다만 이 시리즈는 (마치 일틱이란 ‘칭찬’ 들으면 어쩔 도리 없이 안도하는 퀴어들처럼) 은은하게 또 자연스럽게, 퀴어를 퀴어같지 않게, 그냥 섞여든 존재로 보이게 만드는 데에 열심이라고 느꼈다. 정신 산만하게 만드는 말재주와 푸짐하게 스크린 반 이상을 채우는 비주얼이 장점인 포가 제공하는 화려한 액션에 넋놓다 보면, 달리는 포 옆에서 손잡고 걸어가다 깜짝 놀라는 선량한 돼지 주민 1&2가 둘 다 남자로 패싱되는 차림새든 말든, 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네가 날 버렸녜 어쨌녜 서로 지지고 볶고 울고 짜는 젠더리스한 조연들이 연인보다 훨씬 점성 높은 애착을 주고받든 말든 별 상관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건 정말로 별일이 아니라는 아주 은근한 암시. 이 시리즈의 역할은 어쩌면 딱 거기까지인 것 같다. ‘쿵푸’와 ‘기’라는 중국사적으로도 소중하고 두께가 엄청나기도 한 문화적 정신적 유산을 그냥 할리우드식 ‘귀여운’ B급 성장형 히어로 클리셰 액션 뽕빨물로 한데 섞어버린 것처럼, 퀴어 역시 적절한 농도의 - 우정 그리고 (공동) 양육과 거의 구분할 수 없는 - 당연한 사랑과 애착으로 자리 잡고 ‘일반’과 함께 한데 섞여 있다.
혹은, 머나먼 이국에서의 문제/악당을 처리하고 ‘내 영토’로 돌아와 새로 찾은 완전한 이방인인 후계자에게 권좌를 물려준다는 4편의 작법을 고려한다면, 이 이야기의 퀴어함은 20세기 반역적 퀴어함 혹은 21세기 힙하고 소비적인 퀴어함보다는 그리스 신화 시기의 남성애에 여전히 더 가까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이건 내게는 다같이 끓여먹는 은은한 퀴어 단추수프(특: 뭐가 들어갔는지 넣은 사람도 모름)... 은은하게 주입하는 퀴어 조기교육처럼 느껴지는 애니메이션이었다. 그래서 허술하더라도 곱씹을수록 더 귀엽게 생각되는 면이 있었다. 쿵푸팬더 5는 제작이 불분명하다고 하고 아직까지 공식적으로나 희망적으로나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다고들 한다. 오래된 시리즈의 오래된 팬으로서 이제 여기서 그만해도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을 - 실은 3편부터 - 계속 품고 있기는 하지만. 만약에 이 모든 추측, 자기최면, 설득, 착즙이 단 5%라도 사실과 맞닿아있다면, 이 말썽쟁이 시리즈가 덜그럭덜그럭 순조롭게 진행돼서 속편을 가져와줬으면 좋겠기도 하다. 유소년기 퀴어에게 혁신이었고 어쩌면 자각의 출발점 중 하나였던 영화가 생명력을 쥐어짜내서 나아가는 ‘진짜 끝’을 좀 더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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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 구심점 없이 흩어지는 이야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깊은 숲에서 펜션을 운영하는 '전영하'(김윤석). 그는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의 소원이 담긴 펜션을 소중히 운영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앞에 께름칙한 손님 한 팀이 나타난다. 어린 남자아이와 함께 펜션을 예약한 '유성아'(고민시). 그녀는 아이에게 지나치게 무관심하고, 묘한 분위기를 풍기면서 영하를 불편하게 만든다.
다음날 아침, 영하는 유성아가 새벽 일찍 떠났다는 사실을 알아챈다. 관심을 보이던 LP판에는 혈흔을 묻혀 놓고, 화장실은 락스로 깨끗하게 청소했으며, 수장 두 건을 없앤 채로. 직감적으로 유성아가 데려 온 아이를 살해했음을 눈치챈 영하. 하지만 그는 남은 증거를 불태우고 모른 척하기로 결심한다. 혹시나 소문이 나면 펜션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르니까. 1년 뒤, 유성아가 그의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보상받지 못한 호불호
작품성과 대중성. 영화, 드라마 제작진이 언제나 고민할 딜레마다. 다른 예술도 다르지 않지만, 특히 영상 매체는 막대한 제작비를 필요로 하기에 항상 대중성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대중성이 언제나 옳은 길인 것도 아니다. 안정적으로 보이는 선택이 그 반대인 경우도 많다. 대중은 언제나 새로운 자극을 원하니까.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OTT의 성장은 반가울 수밖에 없다. OTT가 불러온 긍정적인 변화 중 하나는 작가와 제작자의 두려움이 줄었다는 것. 크리에이터의 비전에 크게 개입하지 않으니 이전까지는 관객 수나 시청률, 대중의 호불호를 우려해 제작하지 않던 작품이 빛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부작용도 나오고 있다. 대중성과 괴리되는 작품이 늘어나면서 OTT의 파급력도 예전 같지 않다는 느낌이 적지 않다.
<부부의 세계>의 모완일 감독이 연출한 넷플릭스 드라마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도 마찬가지다. 실험적인 스릴러다. 관련 없어 보이는 과거와 현재를 느린 호흡으로 교차하다가 마지막에야 모든 감정선을 폭발시킨다. 서스펜스보다 메시지에 초점을 맞춘 듯 보이고, 대중적으로 익숙한 작법이 아니니 호불호도 필연적이다. 하지만 호불호를 불사한 선택이 역으로 드라마 전체의 만듦새를 무너뜨린 나머지 실험은 무위에 그쳤다.
돌 맞은 개구리 이야기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간단하다. 우연히 범죄자와 마주쳐 피해자가 된 이들의 사연이다.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범죄자가 던진 돌에 맞은 개구리가 그 상처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비춘다. 과거 모텔 사업을 하던 '구상준'(윤계상)은 연쇄살인범 '지향철'(홍기준)을 만난 후 가정이 무너진다. 현재 펜션을 운영하는 영하도 사이코패스 살인자 유성아를 고객으로 만난 뒤 일상이 파괴될 위기에 처한다.
이에 더해 개구리에게 돌을 던지는 또 다른 사람들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 살인자뿐만 아니라 기자나 경찰, 자극적인 이슈에 몰입한 이들 또한 돌을 던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극 중 기자와 경찰 모두 그럴듯한 대의나 정의감 대신 특종이나 자기만족을 위해 상준과 영하를 이용하니까. 신문사 기자는 지향철 관련 특종을 잡으려 상준과 인터뷰하려 하고, '윤보민'(하윤경/이정은)도 연쇄살인범을 만나보고 싶다는 마음에 상준을 이용한다.
이 상황에서 개구리에게는 두 선택지가 있다. 상준처럼 과거에 갇힌 채 무너질 것인지, 아니면 상준의 아들인 '기호'(박찬열)처럼 자기 방식으로 과거와 맞서 싸워 트라우마를 이겨낼 것인지. 이 지점에서 무관해 보이는 과거와 현재는 접점이 생긴다. 아직 유성아와의 악연이 끝나지 않은 영하는 상준이 될 수도 있고, 기호가 될 수도 있으니까. 따라서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영하가 어떤 결정을 할지 쫓는 심리극이라 할 수 있다.
잘못된 역할의 부작용
그러다 보니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일반적인 스릴러와는 느낌이 다르다. 중반부까지는 미스터리 드라마에 가깝다. 두 주인공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전개돼야 비로소 그들의 공통점이 눈에 들어오기 때문. 그들의 접점을 눈치채기 전까지는 전체적인 흐름을 종잡을 수가 없을 정도로 모호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스릴러를 기대한 시청자 입장에서는 필연적으로 호불호가 갈릴 수밖에 없다.
여기서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악수를 뒀다. 각 캐릭터에게 역할을 잘못 부여하면서 이질감을 극대화한다. 사실 상준과 영하의 시점으로 나뉜 이야기를 접합하려는 시도가 없지는 않다. 윤보민이 그 접착제다. 과거 신참 형사로서 상준 사건에 참여했고, 지금은 새로 부임한 소장으로서 영하 사건에 개입하는 윤보민. 드라마는 그녀를 매개로 접점이 없는 두 아버지의 이야기를 엮어내려 한다.
그런데 정작 윤보민은 철저한 관찰자다. 그녀가 주도적으로 두 사건을 해결한다기보다는, 두 주인공이 어려움을 겪을 때 옆에서 조망할 뿐이다. 여기에 더해 그녀 자신의 이야기도 과거와 현재 두 시점에서 따로 펼쳐진다. 그 결과 윤보민이라는 캐릭터 때문에 드라마는 오히려 구심점을 잃어버린다. 두 이야기를 엮기 위해 만든 인물 때문에 오히려 서로 다른 세 개의 이야기가 동시에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 결과 후반부로 갈수록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가지가 너무 많아진다. 각 플롯이 각자 할 말만 한다. 영하와 유성아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려고 하면 상준의 이야기가 끼어든다. 성인이 된 기호가 등장하면서 상준의 플롯은 더 복잡해지고, 기호와 영하의 접점을 묘사하는 동안에는 유성아가 잠시 잊히는 느낌마저 든다. 차라리 철저히 윤보민의 시점에서 과거와 현재를 오갔다면 난잡함이 덜하지 않았을까 싶다.
미진한 캐릭터 활용
이에 더해 반전을 주려고 전개를 꼬는 중에 메시지와 스토리의 모순도 노출하고 만다. 그 중심에는 유성아가 있다. 사실 시청자 입장에서 그녀는 좀처럼 알 수 없는 인물이다. 그녀가 동기가 뭔지, 그녀가 왜 아이를 살해했는지, 왜 영하의 펜션에 집착하는지. 그녀의 행동과 표정 하나하나가 이해할 수 없어서 두렵다. 그러다 보니 영하가 돌 맞은 개구리가 되는 과정에도 몰입하기 쉽다. 영하만큼이나 시청자도 영문을 알 수 없기 때문.
하지만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사족을 덧대 매력을 스스로 가린다. 재벌가 출신 사이코패스라는 개인사가 드러는 순간, 유성아는 개성을 잃는다. 그녀는 이제 익숙한 한국형 악역이다. 그러니 그녀에 대한 신비감이나 공포감도 일순간 사라지고, 그녀가 원우먼쇼로 지탱해 온 서스펜스도 단숨에 사라진다. 그녀가 그린 그림, 펜션 인테리어, 고민시의 연기가 어우러지며 자아낸 답답한 분위기마저 불친절한 과시로 보이기 십상이다.
결국 드라마의 주제마저 모호해진다. 사고와도 같은 범죄자와의 만남이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의 핵심 소재다. 그런데 유성아의 가족사는 그 사고를 통속적인 가족극으로 뒤바꿔 버린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 딸, 유성아가 아버지 영하의 사랑을 받은 딸, '의선'(노윤서)을 노리는 꼴이다. 즉, 메시지를 집약하고 있는 상준과 영하의 접점 대신 유성아와 영하의 딸의 차이만 부각되면서 평범한 범죄 드라마로 귀결된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충분히 흥미로웠다. 범죄자나 형사의 시점이 아니라 피해자 관점에서 진행되는 스릴러라는 특징이 확실했다. 범죄 사건 피해자의 고통보다 사건의 자극성에만 열광하는 세태를 지적하는 의도도 시의적절했다. 그저 일관된 방향성을 잡지 못한 나머지 주요 플롯이 중구난방으로 흩어졌을 따름이다.
결국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애매한 스릴러, 평범한 넷플릭스 작품 중 하나로 남는다. 캐릭터가 인상적이지도 않고, 특별한 메시지가 뇌리에 꽂히지도 않는다. 전달 방식이 독특하지도 않다. 그나마 고민시라는 배우의 필모그래피에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라는 사실이 수확이라면 수확이지 않을까.
Poor 형편없음
산해진미도 요리사가 레시피를 잘못 선택하면 무의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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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좀비를 뚫고 라스베가스의 금고를 털러가자! - 아미 오브 더 데드 리뷰
잭 스나이더의 신작 좀비 영화 아미 오브 더 데드가 넷플릭스에 공개되었어요.
이미 많은 분들이 보셨을 것으로 예상되는데요.
잭 스나이더가 리메이크 했던 새벽의 저주에서 빠른 좀비로 인해 만들어졌던 스피디 함을 기대하시는 분들은 조금 실망하실 거에요.
이번 아미 오브 더 데드는 새벽의 저주의 속편도 아니고 약간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어요.
알파 좀비라고 하는 지능을 가진 좀비가 등장하고, 사회도 구성하죠.
일반 좀비들은 여전히 느리지만 알파 좀비의 일원은 빠르게 뛰어다녀요.
그리고 좀비가 있는 구역이 라스베가스로만 한정됩니다. 어느 정도 통제에 성공한 모습이죠.
주인공들은 라스베가스의 어느 금고로 가서 돈을 가져오려고 합니다.
하이스트 영화의 틀에서 전개되어서 팀을 조직 하는 것 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액션도 후반부에 집중되어 있어요.
그래도 과거 좀비 영화의 B급 감성과 A급 화면들이 적절히 잘 믹스된 것 같아서 저는 재미있게 봤어요.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클릭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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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흥신소-라떼극장]"소풍왔어 소풍?"시실리2km
영화 흥신소 - 라떼극장 EP.11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영화 "시실리 2km"를 보며 소중한 추억을 떠올려보자
친구가 훔친 다이아를 되찾기 위해 도착한 마을 '시실리'
비협조적인 마을 주민, 예상치못한 귀신과 만나며 일은 점점 꼬여만 가는데...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조폭들이 했던 게임의 정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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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 2> 티저 예고편
게임은 절대 멈추지 않는다. 모두 준비되었는가? 《오징어 게임》 시즌 2, 12월 26일 공개. 오직 넷플릭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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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윙스 오버 에베레스트> 메인 예고편
에베레스트 악명 높은 죽음의 구간 '데드존'에 기밀문서를 실은 항공기가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최고의 산악 구조대 팀인 '윙스'는 자신들을 인도 정부 관료라고 소개한 인물들에게
문서의 추락 지점까지 안내해달라는 수상한 의뢰를 받게 되고, 그들과 함께 위험한 등정을 시작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