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니엘2023-05-28 01:12:32
미차르라는 감염 질병에서 살아남기!
<사슴의 왕> 영화 시사회 후기
시놉시스
츠오르 제국은 아카파인들을 식민지로 삼아 지배했으나 미차르라는 감염 질병이 온 세상에 퍼져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다. 그 이후로 미차르는 종식되었는데 어느 날 츠오르 제국이 다스리는 소금 광산에서 들개 무리가 나타나 노예들과 병사들을 물어 죽인다. 그곳에서 살아남은 노예들 중에 반은 고아가 되버린 유나를 딸로 삼고 먼 여정을 떠나는데...
츠오르 제국의 황제는 미차르라는 질병이 아카파인들을 지배하고 부당하게 대우해서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믿고 있다. 또한 이 애니메이션에서는 영혼과 육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오는데 미차르에 걸린 시체들을 제사의들이 태우며 영혼과 육체는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반은 자신이 생각하는 영혼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자연의 모든 생명체들이 교감하는 게 영혼이라고 보는 것이다.
츠오르 제국의 황제는 내방 길을 통하여 아카파인들에게 지배의 정당성을 확인하고 미차르에 대한 저주를 극복하고자 한다. 황제의 오른팔 투림도 아카파인이었으나 무언가 음모를 꾸미고 있었고 반에게 첩자를 보내 죽이지 말고 잡아오라고 한다. 왜냐하면 미차르에 대한 면역력이 있는 반의 혈액으로 미차르를 없애려고 했기 때문이다.
반은 과거에 외뿔단의 대장이었고 큰 덩치와 괴력을 가지고 있는 사내이다. 자연과 교감을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미차르에 대한 면역이 있다. 그래서 상처도 금방 치유되고 나무로 만든 것들을 부숴버리거나 지워버린다. 츠오르 제국의 황제 아들이 말하길 예전에 전쟁이 있었을 때 외뿔단 6명으로 적군 중대를 다 쓸어버렸다고 언급한다. 그만큼 이 애니메이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츠오르 제국의 황제의 신임을 크게 받는 의사인 홋사이는 미차르라는 감염 질병이 저주가 아니라 의학으로 고칠 수 있는 질병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질병을 고칠 수 있다는 신념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그 원인을 알아내려고 하는 모습이 의사로서 책임감이 보였다. 또한 운명을 믿지 않고 스스로 바꿀 수 있다고 보는 사람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메세지는 생명체에 대한 이원론과 일원론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반의 말처럼 영혼은 자연과 하나이다는 것과 츠오르인과 아카파인들이 영혼과 육체는 분리되어 있다는 두 사상이 대립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이 영화는 코로나와 관련이 되어있다는데 필자의 주관적인 생각은 이렇다.
미차르라는 질병을 통해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탐색해 본다.
※ 씨네랩의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초대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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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헤어질 결심(2021)> 리뷰
이름은 언제나 존재 다음에 온다. 마찬가지로 관계에 있어 마음이란 최초에 발생하는 무엇이고, 행위는 눈 먼 채 마음을 따라가며, 이성은 한참 후 자신의 행동을 해부하는 과정에서 감정을 명명한다(설령 그것이 그릇된 이름이라 할지라도). 그런데 이 영화, 제목이 이상하다. ‘헤어질 결심’이라니. 어떠한 감정을 사그라뜨리기 위해 헤어지는 것이라면 그저 갈라서면 될 일인데, 물리적으로 멀어진 후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받아들이면 될 터인데, 이 영화는 헤어지는 행위에조차 ‘결심’이 필요하다고 한다. 감정과 행동이 진행되는 순서를 역행하겠다는 선언 이면에 가득한 건 망설임이다. 그러하니 영화 속 주인공의 이별이 쉬울 리가 없다.
<헤어질 결심>을 바라보는 데에는 참으로 다양한 방법이 있을 것이다. 박찬욱 감독 특유의 미쟝센에 집중할 수도 있을 테고, 그의 전작에서부터 이번 작품에서까지 이어지는 인물들의 모호하고도 비극적인 운명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 터다. 또한 21세기 한국 사회만이 담아낼 수 있는 현상을 파고들 수도 있을 것이며 히치콕의 영화를 끌어오는 방법도, 탕웨이와 박해일이라는 배우에 대해 집중해 보는 방법 또한 있겠다. 하지만 난 송서래(탕웨이)와 장해준(박해일)의 관계에 집중해 보고 싶다. 오랜만에 영화로 찾아온 박찬욱 감독이 꺼내든 ‘멜로’라는 장르를 아끼고 싶진 않으니까.
서래와 해준
<헤어질 결심>은 담당 형사와 피의자로 만난 남녀에게서 출발한다. 특별하지 않은 설정이지만, 이 이야기는두 사람이 품은 믿음으로 인해 레이어가 여럿 추가되며 현실만큼 복잡해진다. 나는 다른 이들과 다르다는 데에서 오는 자부심. 누가 뭐라 해도 꺾이지 않는 신념을 지닌 사람의 품위. 서래와 해준에겐 환경이 그들을 공격하더라도 척추를 꼿꼿이 세우고 세상의 모진 풍파를 이겨낼 수 있게 하는 힘이 있다.
서래는 어느 여름 해골 같은 몰골로 불법 입국한 중국인으로, 한국에서 녹록치 않은 삶을 살고 있다. 그의 삶에 풍파가 더해지는 데에 크게 일조한 사람은 서래의 한국인 남편 기도수다. 이 남자는 서래를 학대하고, 마치 자신의 소유물인 것처럼 그의 몸에 이니셜(KDS)을 새겨두기까지 했다. 하지만 서래는 자신의 처지가 곤란하기 그지없어 그를 떠날 수 없는 신세다. 이렇듯 어려운 상황에서도 서래는 간병 업체에서 ‘에이스’로 통하고, 자신보다 상황이 여의치 않은 동물들까지 살뜰히 보살피며, 무엇보다도 언제나 단정한 차림새를 유지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서래가 보여주는 특유의 기품은 그의 과거에서 비롯되는 듯하다. 독립군 참전자인 송서래의 외조부가 일러주었다는 가문의 땅, 호미산으로부터.
해준 역시 서래와 비슷하다. 고지식할만큼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 입는 그는 어떤 피의자를 만날 때에도 무죄추정원칙을 고수한다. 미결사건을 잊지 않기 위해 책상 앞에 붙여두고 사건에 관련된 사소한 숫자마저 머릿속에 오래오래 보관하는 이 남자는 원리원칙에 충실하고 정중한 형사로, 서래의 말마따나 ‘현대인’ 치고 품위가 넘친다. 이러한 평가는 동료들 사이에서도 유효한데, 후배 수완(고경표)은 다른 형사들과 다르게 끝까지 사건을 물고 늘어지는 해준을 존경해 부산으로 전근을 왔을 정도이다. 그가 불의 앞에서 늘 달려나갈 수 있었던 힘은 자신의 원칙에 있다. 그런데 이것이 무너진다.
사랑과 미련과 그 밖의 모든 것들
멜로 영화이니 던질 수밖에 없는 질문을 먼저 해 보자. 두 사람은 언제 사랑에 빠졌을까? 영화는 답하지 않는다. <헤어질 결심>은 서래와 해준이 서로를 사랑하게 된 시점에 대해, 감독과 배우와 관객의 해석이 모두 다를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해준의 말마따나 서로가 같은 부류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에 마음이 서서히 물들었던 것일 수도 있지만, 사소한 단서조차 놓치지 않는 형사 해준이 ‘중국인이라 한국어가 서툰’ 서래의 의도가 변질되지 않도록 더욱 애써 유심히 살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자꾸만 시선을 주어야만 했던 정황 속에서 자연스레 자라난 것일 수도 있다. 두 사람의 사랑은 한 걸음 뒤의 시선과 녹음을 통해 상대방에게 몇 박자씩 늦게 도착하곤 했으므로. 정확한 것은 없다. 늘 그렇지만, 사랑에 빠지는 과정에서 분명한 것은 없으니. 어느 순간 돌이켜보니 사랑에 빠진 자신만 남는다는 그 단일한 결과만 제외한다면.
그런데 신기한 건, 둘 사이에서 주도권이 서래에게 있다는 점이다. 한국 사회계층의 최약자인 서래 말이다. 서래는 당장의 생존이 절실한 사람이었고, 덕택에 그는 사랑을 온전히 감각할 여유가 부족했다. 이는 서래보다 해준이 먼저 사랑을 자각한 계기가 됐다. 사랑 앞에서는 형사와 피의자라는 권력 관계가 순식간에 허물어진다. 기실, 형사인 해준은 본질적으로 사건이 발생한 후 뒤쫓아 가는 쪽이지, 먼저 사건을 일으키는 사람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그에겐 대단히 비겁한 측면도 있다. 아내 정안(이정현)에게 기도수 사건을 다르게 바꿔 전달하는 것처럼. 사실은 일찌감치 끝난 관계에 무의미한 인공호흡기만 달 뿐 해준은 적극적인 행위를 하지 않는다. 해파리처럼 모든 일을 밀어낼 줄 모른다. 그는 모든 것을 떠맡는다. 공평하게 모든 것을 신경쓰고자 한다는 건, 사실 그 무엇도 신경쓰지 않는다는 뜻이라는 걸 모른다는 듯.
해준이 이런 남자라는 사실은 서래에게 독이었을까, 약이었을까?
서래는 자신을 걱정하는 다정한 남자에게 묻는다. 자신은 왜 당신 같이 품위있는 남자를 만날 수 없을지에 대해. 답은 자명하다. 그에겐 양지바른 한국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미산은 그의 핏줄이 가진 땅이라는데 서래는 어떤 소유권도 주장할 수 없다. 정당성을 입증할 방법이 없다. 심지어 서래는 고소공포증까지 있는 외국인이자, 저 자신의 고국에 돌아가면 무기징역수가 되는 젊은 여성이다. 전문직에 해당하는 간호사 자격증을 가졌음에도 하루하루 독거노인을 돌보는 불안정한 일을 할 수밖에 없고,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제 뜻을 명확히 전달할 길이 없다. 서래는 상황을 깨뜨리고자, 운명을 거스르고자 노력하나 도돌이표처럼 돌아온다. 남편에겐 가축취급을 당하는 트로피 와이프로, 거듭하여.
그러나, 두 사람은 사랑 앞에서 변화한다.
회피하던 해준은 행동한다. 서래가 부탁하지 않아도 요리하고, 중국어를 몰래 공부하고, 우산을 씌워주며, 무엇보다도 서래를 고스란히 눈에 담는다. 죽음보다도 더 끔찍하게 여기는 감옥생활을 각오할 만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살인을 저지른 홍산오 사건처럼, 해준은 서래 앞에서 몇 번이고 자신의 원칙을 깨뜨린다. 해준 자신이 죽음보다도 더 치욕적으로 여기는 행동을 반복한다. 그렇기에 내가 언제 당신에게 사랑한다는 고백을 전했느냐고 따지는 해준의 말은 공허하다. 사건 수사를 위한 결정적 증거를 깊은 바다에 버리라는 말은 너무나도 명백한 고백이었으니까.
반면 해준을 만나기 위해 이포에 간 서래는 그와 헤어지겠다고 결심한다. 부산에서처럼 사건의 주동자가 되지 않고 한 발짝 뒤에서 해준을 바라본다. 언젠가 그에게 닿으리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품고 스마트 워치에 자신의 말을 녹음한다. 그런데 서래는 먼 발치에서 깨닫는다. 자신이 사랑한 남자가 원칙을 잃어 더 이상 올곧게 달려나갈 수 없다는 것을. 결국 서래는 해준과 같은 방식으로 사랑을 고백한다. ‘당신의 사랑이 끝났을 때, 내 사랑이 시작되었다’는 말을 녹음할 수 없는 환경에서 중국어로 말함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아무도 찾을 수 없도록 한다. 모든 사건을 품고 있는 스스로를 깊은 물 아래에 묻음으로써 사건을 무마한다. 서래는 그 누구보다도 세상의 우스꽝스러운 단면을 아는 사람이다. 어떤 이도 기억하지 못하고 입증할 수 없다면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던 것과 같다는 것을 안다. 서래 그 자신이 살아있는 증거이기도 했다. 한국은 서래에게 외조부의 땅을 돌려주지 않았으며, 중국에서의 서래를 기억하지 못했고, 기도수 사건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지 않았나. 그렇기에 그는 거침없이 해변에 스스로를 가두는, 무자비한 선택을 한다.
서래의 선택으로 인해 해준이라는 인간에겐 그저 긴긴 미련만이 남는다. 사랑한다는 직접적인 말을 한 번도 한 적 없는 이 남자는 앞으로 영원히 서래를 헤아리며 살아야 한다. 서래와 헤어진 후 셈했던 402일. 그가 없어 편히 잠들지 못했던 402일은 이제 수도없이 많아질 것이다.
어지러이 얽힌 산과 바다
자, 이젠 시놉시스에서 눈을 돌려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된 상징을 이야기 해 보자. 영화에선 자연물인 산과 바다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을지로에서 태어났으면서 바다가 좋다고 하는 해준, 산을 가슴에 품고 바다를 건너온, 저가 돌보는 노인들에게 산해경을 읽어주는 서래. 두 사람에게 부여된 속성은 정안의 원전과 맞지 않는 힘이다.
서래와 해준 두 사람은 모두 산보다 바다를 선택하고, 공자의 말(智者樂水 仁者樂山)을 인용하며 스스로를 어진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런데 공자의 말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논어는 공자가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움직이고, 어진 사람은 고요하다." 그러하므로 더더욱, 나는 해준이 산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바다에 이끌리는 산이었고, 붕괴될지언정 침몰하지 않는 남자다.
다만 이러한 두 사람의 속성이 대단히 중요한 것은 아니다. 서래가 읽는 산해경 신화 속 이정표가 무의미하듯, 산과 바다의 경계는 영화 속에서 자주 흐려진다. 마치 산과 바다의 뿌리가 같기라도 한 것 마냥. 뚜렷한 상징으로 환원되는 장면은 차라리 해준의 집에서 서래가 샛노란 옷을 입고 있었던 씬과, 호미산에서 서래가 산에서 광원 자체가 된다는 점이지 않을까. 서래에게 해준의 존재가 잠시나마 구원이었듯, 해준의 삶에 있어 서래는 단 한 순간일지라도 분명한 빛이었다. 하지만 그런 서래가 바다에 잠긴다. 모래산이 무너지고, 바다의 깊은 구멍을 메운다. 서래의 소망은 충족되었다. 그는 해준의 미결 사건이 된다. 해준은 이제 떠오르는 태양 없는 바다, 안개만이 자욱한 해변을 영원히 걸어야 한다. 헤매는 자는 목소리를 높여 운다. 하지만 잃어버린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붕괴 이전으로의 회귀는 불가능하다. 어쩌면 서래가 바랐던 것은 이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벽에 내 사진 붙여놓고, 잠도 못 자고 오로지 내 생각만 해요, 영원히 결핍된 상태로 살아줘요, 당신을 완성시키는 마지막 조각이 언제나 나이길 바라요.
서래와 해준의 관계에만 집중하여 후기를 적었지만, <헤어질 결심>엔 현대 한국인이기에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들이 많았다. 나는 이 영화가 오로지 2022년 한국에서만 나올 수 있었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현재성'이라는 시간적 속성이 어쩔 수 없이 희미해지리라는 것을 생각하면, 내가 이 영화를 개봉한 해에, 이 나라에서 감상할 수 있었음에 대해 감사하게 된다.
이토록 끊임없이 지각하고, 미끄러지고, 실패하는 사랑을 매끄럽게 스크린에 담아낸 감독에게 박수를 보낸다. 획득하기 전 상실되는 사랑이란 파란색도, 초록색도 아닌 푸른색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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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일드 인 타임> - ‘사랑으로 물든 시간, 그 어딘가에서 살아갈 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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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일드 인 타임
개봉일 : 2020.01.09 (한국 기준)
감독 : 줄리언 파리노
출연 : 베네딕트 컴버배치, 켈리 맥도날드, 스티븐 캠벨 무어, 사스키아 리브스, 베아트리체 화이트
사랑으로 물든 시간, 그 어딘가에서 살아갈 너에게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신작 <모리타니안>의 개봉을 앞두고, 계속 그의 모습이 맴돌아서 오랜만에 이 영화를 꺼내봤다. <차일드 인 타임> 직역하자면 시간 속의 아이다. <차일드 인 타임>은 동명 소설 <차일드 인 타임>을 원작으로 제작된 영화로, 소중한 아이들의 유년기에 대한 통찰과 부모가 최대로 품을 수 있는 아이에 대한 사랑, 그리고 상처와 그 위로 솟아난 새로운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 영화를 처음 보는 순간, 어쩌면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지금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이 이야기는 유명한 동화 작가인 주인공 ‘스티븐’이 하나뿐인 딸 ‘케이트’를 잃어버리는 날부터 시작된다. 계산을 하기 위해 사랑스러운 딸의 손을 잠시 놓은 순간, 아이는 순식간에 스티븐의 시선 밖으로 사라진다. 바글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노란 코트’를 입은 여자아이를 찾는 건 어쩌면 어려운 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스티븐은 끝내 케이트를 찾지 못한다. 스티븐의 아내 줄리는 딸을 잃은 충격으로 함께 살던 집을 떠나고 스티븐은 홀로 남겨진다. 줄리는 케이트를 찾을 수 없을 거라 절망하고, 스티븐은 아직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한다. 하지만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뜨겁던 부성애는 스티븐의 가슴에 화상 자국을 남길뿐이었다.
생각해 보면 ‘모성애’를 그린 영화는 많지만 ‘부성애’를 그린 영화는 흔치 않은 것 같다. 아버지도 어머니만큼이나 아이들을 사랑하는데 말이다. <차일드 인 타임>은 그 흔치않은 부성애를 중심으로 스티븐의 시간을 그려낸다. 더불어 아직 유년기의 부재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스티븐의 출판인 ‘찰스’라는 인물을 통해 ‘유년기가 아이와 어른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는 잔잔하게 흘러가는 이야기 사이에 인물들에게 새로운 동기를 부여하는데, 이야기를 다소 애매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만드는 느낌을 받았던지라 조금 아쉽기도 했다.
하지만 그를 제외하곤 전체적으로 상당히 깔끔하고 담백한 영화였다. “난 아이를 잃은 부모야. 여러분 같이 울어요.” 하며 슬픔의 카펫을 무작정 깔아대는 것이 아닌, 피아노 건반을 누르며 새로운 음계를 하나하나 알아가듯, 슬픔의 무게를 천천히 더듬어가는 배우들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스티븐은 지금 내 눈앞에 보이지 않아도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을 나의 사랑스러운 아이에게 이 한마디를 보낸다. 사랑한다고. 곧 만나자고. 이 일상적인 한마디가 주는 울림은 예상보다 거대했다.
차일드 인 타임 시놉시스
유명한 동화 작가 ‘스티븐’에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딸 ‘케이트’가 실종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딸의 부재는 행복한 부부였던 ‘스티븐’과 ‘줄리’의 사이까지 멀어지게 만들고, 상실감 속에서 매일을 견뎌나가던 두 사람은 일상 속에서 소중한 흔적들을 조금씩 발견하기 시작한다.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부재중인 걸 왜 굳이 알려요?"
스티븐은 외출할 때마다 곧 돌아온다는 말과 번호를 적은 쪽지를 현관문에 붙인다. 그를 본 이웃은 “부재중인 걸 왜 굳이 알려요?”라고 말하며 스티븐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스티븐은 왜 자신의 부재중을 알리는 걸까. 그 이유는 잃어버린 딸 케이트 때문이다. 이미 잃어버린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스티븐은 케이트에 대한 그리움을 떨쳐내지 못한다. 과연 어떤 부모가 어린 자식의 부재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스티븐은 자신이 없는 사이에 딸이 집에 돌아온다면, 딸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찾아온다면 언제든 나를 부를 수 있도록 매일같이 쪽지를 붙인다. 스티븐에게 케이트는 세상의 전부였고, 여전히 스티븐의 세상엔 케이트가 가득 차있다.케이트가 실종된 후 줄리는 모든 걸 포기하고 더 이상 여기서 살 수 없다며 스티븐과의 별거를 결심한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스티븐은 1년 만에 줄리를 만나기위해 시골집으로 향한다. 스티븐은 집으로 가는 길에 운명처럼 노란 코트를 입은 여자아이의 환영을 따라가게 되고, 그곳엔 ‘더 벨’이라는 이름을 가진 술집이 있었다. 술집 안엔 한 여자가 앉아있었고, 스티븐은 뭔가에 이끌리듯 여자를 쳐다본다.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동네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낀 스티븐은 어머니를 통해 그 술집에 얽힌 신기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더 벨’은 스티븐의 어머니가 스티븐의 아버지에게 임신 소식을 알리던 술집이었고, 그 시절 어머니는 아름다운 아이 한 명이, 태어나기 전 스티븐이 창밖에서 자신을 바라봤다고 말한다. 아무도 믿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스티븐의 어머니는 그 아이가 태어나기 전 스티븐이었을 것이라 믿으며 살아왔다.
그리고 줄리와 스티븐도 어머니와 비슷한 경험을 한다. 줄리는 창문 너머에 서있는 스티븐의 머리색을 꼭 닮은 남자아이를, 스티븐은 줄리의 소식을 듣고 급하게 탄 지하철에서 같은 남자아이를 마주치게 된다. 남자아이는 줄리와 스티브가 시선을 돌리는 순간 감쪽같이 사라진다. 그 아이는 곧 태어날 두 사람의 아들을 의미한다.
"케이트를 계속 사랑해 주렴. 사랑하는 것과 그리워하는 건 달라."
부모는 자신이 살아가는 모든 시간 동안 자신의 아이를 사랑하고, 아이들은 그 모든 시간 안에 존재한다. 스티븐은 3년이란 시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케이트를 그리워하고, 사랑한다. 그는 크리스마스 때면 케이트를 위한 선물과 트리를 준비하고, 케이트의 방을 항상 깨끗하게 정돈해둔다. 아이가 당장 뛰어들어와도 바로 누워 한숨 잘 수 있을 만큼 말이다. 이제 7살이 되었겠지만 케이트는 여전히 내 어린 딸이고, 10년이 지나 만난다 해도 스티븐에겐 여전히 내 어린 딸이다. 그리고 곧 생길 사랑하는 아들은 어릴 적 스티븐이 그랬듯, 시간을 거슬러 자신의 부모님 앞에 잠시 나타났다 사라진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 그 순간마저도 부모는 아이를 사랑하기에 이런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게 아닐까."어딘가에 있어"
스티븐은 눈앞에 보이진 않지만 어딘가에 있을 사랑하는 아이에게 무한한 사랑과 그리움의 감정을 바친다. 이러한 이유로 케이트의 환영이 계속해서 스티븐의 주변을 맴돌았던 걸지도 모르겠다."너에 대한 모든 걸 다 기억하고 싶어."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웃던 어린 딸, 카트에 앉아 빠르게 달려달라며 부탁하던 어린 딸, 작은 손가락으로 힘 있게 내 손을 잡아오던 어린 딸. 스티븐은 케이트를 잃고 오래도록 동화를 쓰지 못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이제야 새로운 소년에 대한 동화를 쓰기 시작한 스티븐은 욕조 안에서 숨을 참는 시간을 늘려간다. 그리고 그의 상처도 아주 조금씩, 옅은 흉터를 남기며 회복되고 있었다. 스티븐은 케이트를 잃어버리고 무조건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제 스티븐은 ‘찾아야 한다’라고 말하기보단 ‘어딘가에 있어. 곧 만날 수 있어.’라고 말한다. 사실 스티븐은 케이트가 돌아올 확률은 기적에 가깝다는 것을,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애초에 알고 있었겠지만.. 그 잔혹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스티븐과 줄리의 상처는 새로 찾아온 사랑스러운 아들의 존재로 인해 조금씩 아물기 시작할 것이다. 스티븐은 케이트의 손을 잡고 줄리가 누워있는 병실로 들어간다. 그리고 케이트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줄리의 손을 잡는다. 하지만 그것을 ‘스티븐과 줄리가 케이트를 잊어가고 있다.’라는 뜻으로 해석할 순 없다. 두 사람은 여전히 케이트를 사랑하기에 어린 딸은 그들의 사랑과 기억, 그 시간 속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엄마 아빠는 케이트를 사랑하니까.
"아이를 찾고 있어. 금지된 아이를. 그 아이를 찾아야 돼."
끝없는 사랑과 상실, 그리고 회복의 메시지와 더불어 이 영화가 건네고 있는 두 번째 메시지는 ‘유년기의 중요성’이다. 이건 스티븐의 출판인이자 정치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찰스의 이야기다. 스티븐의 동화 출판을 돕고, 동시에 정치계에서 일하고 있는 찰스는 어느 날, 갑자기 모든일을 관두겠다고 선언한다. 정치권에서는 말도 안 되는 육아 교육서를 제작하고 있었고, 총리는 스티븐에게 찰스를 감시(?) 해달라고 부탁한다.찰스는 도시를 벗어난 시골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찰스는 비 오는 날 숲을 가로지르고, 숲 한복판에 곧 쓰러질듯한 아지트를 만들고, 이상한 음료수를 마시며 자신의 음모를 가위로 자른다. 그는 마치 다여섯살 난 남자아이와 비슷한 행동을 반복한다. 찰스는 마음속에 있는 ‘금지된 아이’를 찾아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 금지된 아이는 ‘자신의 유년시절’을 뜻한다. 찰스가 모든 일을 관둔 이유는 ‘책임지는 삶’에 지쳤음과 동시에 사회에서 통하는 ‘찰스’라는 존재에 대한 모든 걸 내려놓고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며, 누구도 나의 이름에 말도 안 되는 추측과 커다란 기대를 걸지 않는 ‘유년시절’. 그는 유년시절을 그리워하거나, 그에 대한 결핍을 잊지 못하고 있는 듯 보인다. 수많은 종류의 글 중 ‘동화’를 출판하는 출판인이 된 것도 그 이유 때문일 것이라 생각된다. 찰스는 어른이 되기 싫었던 걸까, 아니면 어른이 되고 보니 어른이 싫었던 걸까.
일부 정치인들은 말도 안 되는 육아교육 제도를 내놓고 있고, 진짜 아이를 키워본 스티븐은 그에 반대한다. 그리고 찰스는 그에 대한 강력한 반대를 표하듯 나무에 목을 매단다. 스티븐은 찰스의 장례식에서 그를 ‘유년기의 소중함을 알던 사람’이라고 언급한다. 빗속에서 뛰노는 찰스의 모습과 맑은 웃음을 흘리며 아빠를 돌아보는 케이트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순간, 나는 유년기에 대한 진한 향수를 느꼈다. 찰스는 그때로 돌아가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찰스는 구두와 반바지, 셔츠와 니트를 입은 모습으로 발견된다. 통상적으로 구두와 셔츠, 니트는 어른의 옷, 편안한 반바지는 어린 남자아이의 옷이라는 이미지를 주게 되는데 찰스는 어른과 아이의 옷을 반반 섞어놓은 듯한 착장으로 발견된다. 땅에 떨어진 채 발견된 구두 한짝은 그가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치며 벗겨진 것이리라. 찰스는 어른 찰스를 벗어던지기 위해 몇 번의 발버둥을 쳐야 했을까. 결국 죽기 전까지도 그것을 완벽하게 벗어던지지 못한 찰스가 가엾게 느껴진다.
이런저런 슬픔이, 사무치는 그리움이, 끝없는 사랑이 가득했던 시간이었다. 부모가 사랑하는 아이에게 보내는 그리움과 애정이 담긴 시간들엔 아마 유효기간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 <차일드 인 타임>을 보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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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하지 않은 우리 모두를 위한 기적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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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그랬다. 스무살 남짓하던 시절, 나도 체리필터의 'Happy day'라는 노래처럼 내가 요절할 천재가 아닐까 의심했다. 이상, 랭보, 모짜르트, 에곤 쉴레처럼. 어쩌면 나도, 이토록 아무것도 아닌 나도 사실 세상이 몰라주는 천재일지 모르는 일 아니겠나.
하지만 이제 요절이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젊지도 않고, 나를 포함한 우리 대부분은 기가 막히게 똑똑하지도, 그렇게 멍청하지도 않은, 그저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라는 걸 안다. 내가 딱히 특별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참 쉽게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을 듣고 자란 대한민국의 어린이들은 반드시 어른이 되면 무언가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남들 만큼 해서는 남들보다 뛰어날 수 없다는 지겨운 레토릭이 아직까지도 반복되므로 우리 삶의 목표는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앞서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결국에는 남들과 크게 다르지도 않은 내가 실망스럽다가, 때로는 남들보다 못한 내가 서러워 남들만큼이라도 살았으면 싶다. 내 인생은 도대체 왜 이럴까 싶을 때, 우리가 찾는 건 바로 기적.
나 빼고 다 특별한 세상
엔칸토는 이민자 가족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다. 이 평화로운 마을의 중심에는 마드리갈 가족이 있는데, 마드리갈 가족은 모두 한 가지씩 특별한 마법을 쓸 줄 안다. 딱 한 사람, 미라벨만 빼고.
미라벨은 힘이 세서 무엇이든 들 수 있는 루이자, 꽃을 피워내는 이사벨라, 무엇이든 들을 수 있는 돌로레스, 무엇으로든 변할 수 있는 카밀로, 날씨를 조절할 수 있는 페파 이모, 음식으로 모든 병을 낫게 해주는 엄마, 그리고 마법은 못 쓰지만 마드리갈 가족과 결혼한 친인척들과 함께 산다. 마법을 쓸 수 있는 나이가 되면 문이 열리고 방이 생기는데, 왠일인지 미라벨에게는 그 문이 열리지 않았다.
미라벨만 빼면 모든 것이 완벽하고 평화로운 이 가족에게 새로 마법을 받게 될 아이가 있었으니, 바로 미라벨과 아기방에서 같이 지내던 안토니오다. 안토니오가 문을 열자 넓고 넓은 자연이 펼쳐진다. 동물과 의사소통하는 능력이 생긴 것. 미라벨은 침울해진다.
그때 미라벨은 이상한 현상을 목격한다. 집(까시타)이 갈라지며 흔들린다. 그 사실을 가족들에게 말하지만, 할머니 알마는 미라벨이 마법을 받은 안토니오를 시샘한다고만 생각한다. 그렇게 미라벨은 모두가 특별한 세상에서 소외된다.
배척의 기억
까시타가 흔들린 뒤 미라벨은 루이자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캐치한다. 사실 루이자는 사실 힘에 대한 강박이 있었다. 무거운 것을 들지 못할까봐, 실수할까봐 언제나 불안하다. 그런 의미에서 루이자의 능력은 은유적이며 수많은 K-장녀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사벨라도 마찬가지이다. 예쁜 꽃을 피워내며 뭇 마을 남성들의 이상형, '완벽한 여성' 이미지에 갇혀 살아야 하는 이사벨라도 루이자와 마찬가지로 '할머니가 실망할까봐' 전전긍긍한다. 원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까지 해야 할 판이다.
알마가 처음 엔칸토에 들어와 살게 된 때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알마와 남편 페드로는 전쟁 때문에 세쌍둥이 아기들을 데리고 피난길에 나선다. 어쩌면 첫 번째 배척이 아닐 수도 있다. 이들은 이민자이고, 본토에서 쫓겨나는 신세이니 이미 수차례 배척받은 역사가 있을 것이다. 적군에게 쫓기는 이들은 가시적이고 확실한 배척을 경험한다.
남편을 잃고 오열하는 알마에게 마법의 힘이 생긴 것은 힘이 있는 자를 쉽게 쫓아내지 못하기 때문일 터. 알마는 이 힘을 마을(이민자들이 모여 사는)에 써야 한다고 다짐한다. 그 마음도 처음에는 선의였으나 점차 강박적으로 바뀐다. 안토니오가 동물과 대화하는 능력을 얻게 되자 '이 능력을 어떻게 쓸지'부터 생각하니 말이다.
마을의 운명이 마드리갈 가족의 손에 달렸다는 것은 너무도 부담스러운 일이다. '배척받음'이라는 트라우마는 가족과 마을을 똘똘 뭉치게 만들었다. '가족을 위하여'라는 알마의 집착은 능력을 가진 자식들에게 대대손손 내려온다.
거시적으로는 국가적인 배척에 대한 공포이지만 미시적으로는 가족 내 배척에 대한 공포이다. 힘들어도 마을의 궂은 일을 다 해내는 루이자, 언제나 웃으며 꽃을 피워주어야 하는 이사벨라, 맑은 날을 유지하기 위해 기분을 통제해야 하는 페파 등 모두가 그렇다. 마법 능력이 없는 미라벨은 마법을 못 쓴다는 이유로 다시 한 번 배척된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배척당하기 딱 좋은, 약간 정신이 나간 모양새의 브루노.
브루노에 대해 말하면 안 돼
브루노는 마드리갈 가족의 유일한 우환이다. 집안에 걱정거리가 있는데도 마드리갈 가족은 쾌활해 보인다. 비결은 그것에 대해 함구하는 것. 프로이트 식으로 보면 '억압'한다. 아예 모르는 척 해버리면 편하다. 불편한 진실을 직면하는 데는 큰 용기가 필요하니까. 그렇게 브루노는 가족 내에서 잊힌(이라고 하지만 잊을 수 없는) 사람이 된다.
미래를 볼 줄 아는 브루노의 능력은 아주 거칠게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신내림 같다. 신내림이 과학적인지는 모르겠으나 신병을 앓을 때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기도하고, 그렇지 않다면 정신과 치료를 받기도 한다. 그러니까, 사회통념적으로는 약간 정신 나간 사람 같다는 의미이다. 엔칸토의 배경이 남미의 어느 지역이니 카톨릭 문화에서는 악마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미친 사람이 있는 가정은 배척당하기 쉽다. '내놓기 부끄러운 자식'은 가족 내에서도 언급해서는 안 된다.
얼마 전 장애인 시위의 정당성이 도마에 올랐다. 왜 출퇴근 시간에 지하철에서 시위를 하느냐는 비난이 난무했다. 그동안 장애인 집회는 꾸준히 있어 왔다. 그렇게들 원하는 평화적인 방식으로. 그러나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과격한 시위는 누구도 그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의 반증이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에 우리나라는 길거리에서 장애인을 볼 수 없는 나라가 되었다.
그러니 브루노는 자발적으로 사라진다. 그 누구도 브루노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거의 볼드모트 같은 존재로, 이름조차 언급할 수 없다.
마법은 못 써도 궁금한 건 많은 미라벨은 가족들 몰래 브루노의 방에 간다. 수많은 계단과 무시무시한 동굴을 헤쳐 나간 뒤 발견한 환영 속에서는 무너져내리는 까시타와 그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
브루노 역시 까시따가 무너지는 환영을 봤다. 미라벨의 말이 묵살당하듯 그 누구도 브루노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는다. 그는 정신 나간 형제이고 미라벨은 재능 없는 자식이다.
우리가 찾았던 기적
미라벨은 까시타가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해 혼자 동분서주한다. 완전히 혼자는 아니고, 브루노와 함께. 공동체에 완전히 속하지 못한 두 사람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족들이 마법의 속박에서 자유로워질수록, 자아를 깨달아갈수록 까시타는 위태로워진다.
결국 브루노의 예언은 이루어진다. 까시타는 무너지고, 가족들은 마법의 힘을 잃는다. 이 모든 것을 자신의 탓이라 여긴 미라벨은 집을 나간다. 결국 아무것도 아닌, 못나고 부족한, 가족들에게 피해만 입히는 자신 때문에.
마드리갈 가족은 엔칸토를 이끌어갔지만 이제 모든 것을 잃었다. 하지만 마법이 그들의 모든 것은 아니었나 보다. 그동안 마드리갈 가족의 신세를 져 왔던 엔칸토 마을 주민들이 모두 합심하여 마드리갈 가족의 집을 짓는다. 루이자의 괴력을 쓰지도, 이사벨라가 예쁜 꽃으로 집을 꾸미지도 않고 그저 서로의 힘으로. 더 이상은 가족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마침내 집이 다 지어지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문이 열린다. 문을 연 사람은 바로 미라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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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수많은 실패들을 해 왔다. 너무 많아서 일일이 나열하기도 어렵다. 그때마다 나를 힘들게 하는 건 실패 그 자체이기 보다는 나는 왜 이것밖에 안 될까 싶은, 아무리 노력해도 좀처럼 좋아지지 않는 나 자신이었다.
누구나 한 번쯤 눈 앞에서 문이 닫히는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을 거다.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을 때, 나를 받아주지 않겠다는 굳건한 의지 앞에서 무너지지 않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내가 기다렸던 기적이 무엇이었을까. 로또 당첨이었나. 잘 모르겠다. 지금 내가 글을 쓰고 누군가가 이 글을 읽고, 지금 무사히 살아있고 내일도 기적적으로 살아있어 밥을 먹고 일을 한다는 사실이 기적인가 싶다. 순순히 열려 주지 않았던 문을 미라벨이 스스로 여는 것이 기적이고, 특별한 능력이 있든 없든 환대하는 마음이 기적을 만든다.
어디에도 내 자리가 없는 것 같아서, 그 어떤 문도 열리지 않아서, 차라리 사라져버리고 싶었던 모든 보통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쓴다.
관람 포인트
스토리나 캐릭터가 마음에 안 들더라도 OST가 당신의 마음을 훔칠 것이다. 루이자가 힙합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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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자의 이삭을 주우며 살아가는 사람들
어릴 때부터 알고 있던 밀레의 명화 <이삭줍는 여인들>을 보고 아녜스 바르다가 현대 사회의 모습까지 확장해서 영화를 진행 시킨 점이 특색 있었다.
이 그림을 보면 따뜻함, 평온함을 느꼈는데 아녜스 바르다는 이 그림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각자의 이유로 버려진 음식을 줍는 사람들, 우리 사회가 주목하지 하지 않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같은 그림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느낌을 떠올리고 그것을 영화로 제작했다는 점이 왜 아녜스 바르다가 누벨바그의 거장이라고 불리는지 깨달을 수 있었던 영화였다.
또 줍는다는 행위가 처음에는 생계가 어려운 사람들이 하는 행위,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행위라는 이미지가 바로 떠오른다. 그렇지만 이 영화가 진행될수록 환경을 위해서, 예술을 위해서 줍는 사람들 등등 다양한 이유와 자신만의 신념을 위해 줍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그래서 길에서 무언가를 줍는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 영화를 보면서 바뀌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버려진 것들도 주인공이 될 수 있고 그것이 누군가의 손을 거쳐 새로운 모습, 새로운 탄생 품이 되는 영화의 흐름이
처음엔 버려진 물건을 줍는 사람들과 왜 줍는지 이유에만 집중이 되었다면, 나중에는 버려진 물건들 에게도 시선이 갔다.
그리고 영화의 분위기는 일상적인 사람들의 삶을 담고 있어 전체적으로 따뜻한 분위기였지만, 그 일상을 통해 현대 사회의 과소비와 대량 생산 등 현대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전에 봤던 다큐멘터리와 달랐던 점은 어떠한 주제가 있으면 그 주제에 대한 다른 사람의 인터뷰, 자료들, 주인공의 삶 위주로 나온다.
근데 이 영화는 타인의 일상을 찍으면서 자신의 이야기도 하고 자신의 손을 보여주고 직접 버려진 물건을 주워 오는 것을 찍는 등 감독님의 참여가 직접적으로 보였다. 그 점이 기존의 다큐멘터리와 다르고 마치 일기를 보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가장 좋았던 장면은 곰팡이가 마치 추상화 같아서 좋아한다는 장면이다. 곰팡이를 보는 것조차도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보는 아녜스 바르다의 시선이 특별했다. 액자 프레임 안에 곰팡이를 담으니까 정말 하나의 작품처럼 보였다. 또한 이 장면도 남들이 신경을 쓰지 않는 것, 더럽다고 생각하는 소재를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이 영화 주제와 굉장히 잘 어울리는 장면이었다.
결말 부의 폭풍우 속에서 이삭 줍는 여인들의 그림이 인상 깊었다. 이 영화 처음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평온해 보이는 이삭 줍는 여인들의 그림이 나왔다. 이 영화가 끝난 후 누군가에게는 줍는다는 행위가 생존, 신념, 가치 있는 행위라고 생각을 다시 해보게 되었다. 결말에는 같은 이삭 줍는 여인들이지만, 폭풍 속에서 이삭을 줍고 있다. 누군가에겐 줍는다는 것이 폭풍우 같은 환경에서 버티며 줍는다는 것을 표현하였고, 이 영화의 흐름과 주제가 마지막 그림 한 장으로 정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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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맨스 영화를 좋아하신다면, 너의 결혼식 추천드립니다.
혹시 로맨스 영화 좋아하시나요?!
그렇다면?! '너의 결혼식' 보셨나요?!
많은 분들이 이미 봤을 거라고 생각은 들지만?!
혹시, 아직 안 보신 분이 있다면 제가 영업 좀 하겠습니다!
영화 '너의 결혼식' 재미있어요! 보세요!
첫사랑의 그리움과 설렘을 한곳에 모아 향수를 느끼게 해준 작품
'너의 결혼식'리뷰 시작합니다!
기본정보
장르 : 로맨스, 드라마
감독 / 각본 : 이석근
출연진 : 박보영, 김영광
개봉일 : 2018년 8월 22일
평점 : 9.01
스트리밍 : tvN , NETFLIX, 웨이브, 왓챠
기획의도
"기억하나요? 당신의 첫사랑?"
고3 여름, 전학생 '승희 (박보영)'를 보고 첫눈에 반한 '우연 (김영광)'
승희를 졸졸 쫓아다닌 끝에 마침내 공식 커플로 거듭나려던 그 때!
잘 지내라는 전화 한 통만 남긴 채 승희는 사라져 버리고,
우연의 첫사랑은 그렇게 막을 내리는 듯 했다.
1년 뒤, 승희의 흔적을 쫓아 끈질긴 노력으로 같은 대학에 합격한 우연.
그런데 그의 앞을 가로막은 건... 다름 아닌 그녀의 남자친구!
예술로 빗나가는 타이밍 속, 다사다난한 그들의 첫사랑 연대기
등장인물
한승희 (박보영)
3초의 운명을 믿는 여자
"이 사람이구나 느낌이 오는 시간이 3초래"
황우연 (김영광)
승희만을 바라보는 순정 직진남
"사랑은 타이밍이다. 근데, 그건 정말 극복이 안 되는 걸까?"
여담
중국에서 <니적혼례>이라는 제목의 영화로 리메이크 되었다.
너의 결혼식 주인공으로 김영광이 아닌 강하늘이 남자 주인공으로 물망에 올랐으나
다른 작품과 촬영시기에 맞물리면서 최종 김영광으로 낙점이 되었다고 한다.
(강하늘도 정말 잘 어울릴것같지만! 그래도 난 김영광!)
후기 및 결말
결말부터 살펴보자면
사랑에 타이밍이 있다는 말을 믿으시나요?!
못 믿으신다면 영화에서 승희와 우연의 자꾸 엇갈리는 타이밍 속에 한탄하고 안타까워하지만
결국 운명을 이기지 못해 서로는 헤어지며 서로 응원하며 영화는 끝이 납니다.
(역시... 처사랑의 불변의 법칙인가....)
영화 '너의 결혼식'은 첫사랑과의 추억을 한껏 끄집어 내면서
너,나, 우리, 모두에게 있었던 첫사랑의 향수와 기억을 끄집어 내주는 영화였습니다.
무엇보다 이런 역할의 최적화된 박보영의 사랑스러움과 김영광의 어리숙하지만
한여자만 바라보는 듬직함이 만나 더욱더 재미있게 봤던 작품 입니다.
영화는 9점대로 높은 평점을 유지하며 믿음과 어디하나 모진곳이 없는 완벽한
향수를 그리던 영화라 저는 추천합니다!
오늘밤..
학창시절의 달콤한 로맨스를 끄집어내며
"너의 결혼식" 영화 한편 어떠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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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의 이야기로 현재의 문제를 살펴보는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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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을 쓰던 대학원생 무렵 논문 심사가 끝나고 보상으로 영화관에 가서 본 작품이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었다. 여성 캐릭터 3명이 메인 역할을 한다는 점에 끌려서 보고 싶었던 작품이었다. 기대가 조금 컸기에 실망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지만 정말 오래간만에 영화관에서 눈물 흘리며 보고 나온 작품이었다.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시놉시스
“마이 드림 이즈 커리어우먼” 1995년, 토익 600점만 넘기면 대리가 될 수 있다! 입사 8년차 동기인 말단 여직원들이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 모였다. 실무 능력 퍼펙트, 현실은 커피 타기 달인인 생산관리3부 오지랖 ‘이자영’과 추리소설 마니아로 뼈 때리는 멘트의 달인 마케팅부 돌직구 ‘정유나'. 그리고 수학 올림피아드 우승 출신, 실체는 가짜 영수증 메꾸기 달인 회계부 수학왕 ‘심보람’은 대리가 되면 진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 부푼다.
내부고발이라도 하게? 나서지 마. 우리만 다쳐. 잔심부름을 하러 간 공장에서 검은 폐수가 유출되는 것을 목격한 ‘자영’은 ‘유나’, ‘보람’과 함께 회사가 무엇을 감추고자 하는지, 결정적 증거를 찾으려 한다. 불가능해 보이는 싸움, 세 친구는 해고의 위험을 무릅쓰고 고군분투를 시작한다. 아이 캔 두 잇, 유 캔 두 잇, 위 캔 두 잇! 회사와 맞짱 뜨는 용감한 세 친구의 이야기다.
성장주의와 그림자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서 자주 등장하는 대사는 '오늘의 너는 어제의 너보다 성장했어!' 이다. 마케팅팀 부장이 팀원들을 독려할 때 자주 사용하는 대사였다. 이 대사처럼 영화는 성장과 발전만이 대한민국이 살 길이라는 신념 아래 경제 부흥을 일궜던 1980, 90년대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눈부신 성장의 이면에는 칠흙같은 어둠도 같이 있다는 것을 잘 드러내고 있었다. 우연하게, 한 순간의 실수로 페놀이 유출되었고, 이를 알아차렸지만 성장에 방해되는 해당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덮어버리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성장에 중동되어 점차 곪아가는 부위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그래서 결국 절단을 할 지경이 되어서야 후회를 하고 수습에 나서는 모습을 통해 비뚤어진 성장주의를 잘 드러낸 작품이었다.
연대의 힘을 보여주다1980, 90년대의 비뚤어진 성장주의를 비판하면서도 이 영화는 현 시점에도 다양한 시사점을 제공하는 작품이었다. 현대사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개인주의를 다시금 생각해보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연대의 힘을 굉장히 강조하는 작품이다. 힘이 잆는 말단 직원 한 사람이 회사를 구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사람들이 여러명 모여서 힘을 합치면 권력과 자본 앞에서도 승부를 볼 수 있다는 어쩌면 조금은 판타지적이지만 연대의 힘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었다.이러한 연대 속에서 현재 우리 사회가 너무나도 개인주의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고, 우리 사회의 문제를 연대의 힘을 활용해 어떻게 풀어갈 수 있을지 확장해서 생각해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워라벨의 의미는 무엇일까?
개인적으로 이 작품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던 대사가 있었다. '내가 일하는 회사가 조금 더 좋은 일을 하는 곳이었으면 좋겠어.' 이자영이 사람들을 규합하는 장면에서 했던 대사이다.
어찌보면 당연한 말이다. 어떤 사람도 나쁜 일을 하는 회사에서 일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다음 이자영은 그래서 자신이 회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적극적으로 찾아보고, 회사와 함께 성장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찾아본다. 다시 말해, 자신의 자아실현을 회사와 함께 이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이 장면을 통해서 워라벨이 무엇일까?하는 의문점이 들었다. 조금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직장과 일상의 균형이 맞아야 한다는 워라벨은 그 이면에 직장은 '스트레스를 받는 공간', '삶을 영위하기 위해 돈을 버는 곳'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일상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며 스트레스를 풀고, 직장에서 번 돈으로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시간을 의미한다. 워라벨을 추구하는 것이 사회의 트렌드로 자리잡으면서 필자 역시 그렇게 살고 싶었다.
하지만 이 영화 속 이자영의 모습을 보면서 하루에 최소 8시간을 보내는 직장에서는 삶의 풍요를 느낄 수 없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워라벨이라는 이분법적인 분리 때문에 직장 생활에 대한 회의감을 더욱 조성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과 함께 내 삶의 풍요를 직장에서도 일상에서도 같이 일궈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수학천재 보람에게 부장에 항상 하는 말이었던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라는 말이 회사 때려치우고 너 하고 싶은대로 살아라가 아니라 회사든 일상이든 내가 위치한 소속에서 자신의 생각대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찾아서 살라는 말로 필자에게는 다가왔다.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유쾌하게 웃으러 영화관에 갔다가 감동을 받고, 사회에 대해 다양한 생각을 하게 만들어주었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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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올드보이 속 대사로 알아보는 복수의 섬뜩한 의미
뒤늦게 올드보이를 감상한 후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올드보이가 도대체 왜 명작인지 모르겠다고. 그래서 만들었습니다.
복수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구원이란 어디에서 오는지,
오대수와 오이디푸스는 어떻게 닮아있는지,
오늘은 영화 속 대사와 오이디푸스 신화를 빌려 올드보이를 이야기합니다.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있습니다.
엔딩 BGM : https://youtu.be/KlVcvBkk-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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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행복의 속도> 30초 예고편
꽃, 바람, 새 그리고 나뭇길...
해발 1,500미터 천상의 화원 ‘오제’
‘이가라시’와 ‘이시타카’는
산장까지 짐을 배달하는 ‘봇카’이다
70~80kg의 짐을 지고 같은 길을 걷지만
매 순간 ‘오제’의 길 위에서
자신의 시간을 채워가는 '이가라시'
반면 '봇카'를 널리 알리고 싶은 '이시타카’
닮은 듯 다른 두 사람이 건네는 이야기
지금, 당신은 어느 길 위에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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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글리치> 공식 티저 예고편
자친구가 지구에서 사라졌다.....?! 범인은 바로 외계인?! ????? 전여빈 X 나나의 찰떡 케미 200% 지금까지 세상에 없던 멀티장르 버라이어티 추적극 《글리치》 10월 7일, 오직 넷플릭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