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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wr2023-05-29 08:29:11

국가와 가족, 대의와 행복의 갈림길에서

〈사슴의 왕〉 리뷰

6★/10★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본에서 250만 부 이상 판매된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애니메이션 〈사슴의 왕〉은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여러 작품의 작화를 맡은 안도 마사시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이다. 영화의 배경은 가상의 중세 제국 츠오르와 츠오르에 점령당한 약소국가 아카파다. 최강의 전사였으나 현재는 광산에서 강제 노역을 하는 ‘반’. 어느 날 광산에 들개 무리가 습격하고 사람들을 물어뜯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후 한동안 잠잠했던 역병 ‘미차르’가 재발한다. 한편 반은 경계가 느슨해진 틈에 광산에 갇힌 소녀 유나와 함께 탈출에 성공하고, 전염병의 원인을 찾던 의사 홋사르는 들개에 물리고도 전염병에 걸리지 않은 반의 피에 전염병을 극복할 비밀이 있다는 직감을 갖고 그 뒤를 좇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염병은 츠오르를 몰아내기 위한 아카파의 방책이었다. 아카파인들은 특정한 식습관 때문에 전염병에 걸리지 않았다. 때문에 전염병이 사라지지 않고 횡행하면 츠오르인이 두려움에 아카파를 떠나리라고 여긴다. 전염병이 제국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약소국의 저항 수단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전염병을 활용하려는 아카파의 의도가 정당하다 하더라도, 어쨌든 그 과정에서 사람이 죽는다. 때문에 전염병에는 세 가지 이해가 교차한다. 츠오르에서 벗어나려는 아카파, 아카파를 의심하는 츠오르, 전염병의 비밀을 밝히고자 하는 의사 홋사르. 이 갈등의 중심에 반이 있다. 반은 전쟁과 전염병 등으로 가족을 잃고 정신적으로 완전히 탈진한 상태였으나 광산을 탈출한 후 유나와 관계 맺으며 다시금 삶을 살아갈 의지를 회복한다. 얄궂게도 그런 그에게 아카타의 왕 ‘개의 왕’이 되라는 운명이 다가온다.

 

  반은 고민한다. 자신이 한때 츠오르의 침략에 맞서 싸움을 벌이긴 했으나 결과적으로 그는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고 무너졌다. 그리고 유나와 함께하는 지금이 너무 행복하다. 개의 왕이 되면 평온한 일상을 뒤로 하고 다시금 복수와 분노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홋사르의 고민처럼 전염병이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다는 문제도 있다.

 

 

  모든 것을 빼앗긴 반은 오랫동안 ‘사슴의 왕’을 지향해왔다. 사슴은 무리의 약한 존재가 포식자에게 사냥당할 위험에 처하면 가장 강한 개체가 나와 그 위험을 대신 마주한다. 영웅이어서가 아니다. 그저 가장 튼튼한 다리를 가졌기 때문이다. 무리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맡았을 뿐이다. 그 누구보다 강한 반은 유나와 새로 정착한 마을에서 사슴의 왕이 되고 싶었다. 자신이 개의 왕이 될 운명이라는 것을 마주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영화의 전반부가 촘촘한 세계관과 여러 인물의 얽히고설킨 욕망을 펼쳐내 긴장감을 자아낸다면, 영화의 후반부는 반이 자신의 지향과 운명 사이의 괴리를 어떻게 풀어나가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일까? 감정, 긴장, 스펙터클이 서서히 고조되다 클라이맥스에서 절정에 이르는 일반적 궤적과 달리, 이 영화는 오히려 후반부가 차분하다. 반 내면의 고뇌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기대한 바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으나, 영화의 주요 서사가 반의 고뇌라는 점에서는 충분히 납득이 가는 구성이다. ‘사슴의 왕’과 ‘개의 왕’ 모두 나름의 당위성을 갖추었기에, 공존할 수 없어 보이는 이 두 길을 사슴의 방식으로 조합하는 반의 최종 결정 역시 인상적이다. 〈모노노케 히메〉 풍의 작화와 감성을 아끼는 관객이라면, 관람해볼 만한 영화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작성자 . rewr

출처 . https://brunch.co.kr/@cyomsc1/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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