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3-05-29 08:29:11
국가와 가족, 대의와 행복의 갈림길에서
〈사슴의 왕〉 리뷰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본에서 250만 부 이상 판매된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애니메이션 〈사슴의 왕〉은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여러 작품의 작화를 맡은 안도 마사시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이다. 영화의 배경은 가상의 중세 제국 츠오르와 츠오르에 점령당한 약소국가 아카파다. 최강의 전사였으나 현재는 광산에서 강제 노역을 하는 ‘반’. 어느 날 광산에 들개 무리가 습격하고 사람들을 물어뜯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후 한동안 잠잠했던 역병 ‘미차르’가 재발한다. 한편 반은 경계가 느슨해진 틈에 광산에 갇힌 소녀 유나와 함께 탈출에 성공하고, 전염병의 원인을 찾던 의사 홋사르는 들개에 물리고도 전염병에 걸리지 않은 반의 피에 전염병을 극복할 비밀이 있다는 직감을 갖고 그 뒤를 좇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염병은 츠오르를 몰아내기 위한 아카파의 방책이었다. 아카파인들은 특정한 식습관 때문에 전염병에 걸리지 않았다. 때문에 전염병이 사라지지 않고 횡행하면 츠오르인이 두려움에 아카파를 떠나리라고 여긴다. 전염병이 제국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약소국의 저항 수단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전염병을 활용하려는 아카파의 의도가 정당하다 하더라도, 어쨌든 그 과정에서 사람이 죽는다. 때문에 전염병에는 세 가지 이해가 교차한다. 츠오르에서 벗어나려는 아카파, 아카파를 의심하는 츠오르, 전염병의 비밀을 밝히고자 하는 의사 홋사르. 이 갈등의 중심에 반이 있다. 반은 전쟁과 전염병 등으로 가족을 잃고 정신적으로 완전히 탈진한 상태였으나 광산을 탈출한 후 유나와 관계 맺으며 다시금 삶을 살아갈 의지를 회복한다. 얄궂게도 그런 그에게 아카타의 왕 ‘개의 왕’이 되라는 운명이 다가온다.
반은 고민한다. 자신이 한때 츠오르의 침략에 맞서 싸움을 벌이긴 했으나 결과적으로 그는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고 무너졌다. 그리고 유나와 함께하는 지금이 너무 행복하다. 개의 왕이 되면 평온한 일상을 뒤로 하고 다시금 복수와 분노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홋사르의 고민처럼 전염병이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다는 문제도 있다.


모든 것을 빼앗긴 반은 오랫동안 ‘사슴의 왕’을 지향해왔다. 사슴은 무리의 약한 존재가 포식자에게 사냥당할 위험에 처하면 가장 강한 개체가 나와 그 위험을 대신 마주한다. 영웅이어서가 아니다. 그저 가장 튼튼한 다리를 가졌기 때문이다. 무리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맡았을 뿐이다. 그 누구보다 강한 반은 유나와 새로 정착한 마을에서 사슴의 왕이 되고 싶었다. 자신이 개의 왕이 될 운명이라는 것을 마주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영화의 전반부가 촘촘한 세계관과 여러 인물의 얽히고설킨 욕망을 펼쳐내 긴장감을 자아낸다면, 영화의 후반부는 반이 자신의 지향과 운명 사이의 괴리를 어떻게 풀어나가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일까? 감정, 긴장, 스펙터클이 서서히 고조되다 클라이맥스에서 절정에 이르는 일반적 궤적과 달리, 이 영화는 오히려 후반부가 차분하다. 반 내면의 고뇌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기대한 바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으나, 영화의 주요 서사가 반의 고뇌라는 점에서는 충분히 납득이 가는 구성이다. ‘사슴의 왕’과 ‘개의 왕’ 모두 나름의 당위성을 갖추었기에, 공존할 수 없어 보이는 이 두 길을 사슴의 방식으로 조합하는 반의 최종 결정 역시 인상적이다. 〈모노노케 히메〉 풍의 작화와 감성을 아끼는 관객이라면, 관람해볼 만한 영화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Relative contents
-
- 15분이라도 좋아요…매일 씁시다(!)
인터넷 매체에서 기자로 일한 적이 있다. 유명 스포츠 선수나 영화배우나 감독을 만나는 일도 좋았지만 내 이름 석 자가 기사 하단에 함께 나간다는 사실은 설렘이었다. 내가 쓴 결과물이 온라인에 공개된다는 건 나를 증명하는 일이었다.(동시에 책임감이기도 했지만) 모든 기사를 잘 쓰기는 어려웠지만 내가 잘 취재하고 상대적으로 더 공들인 기사가 내 이름과 나갈 때, 그 쾌감이란! 해본 사람만 느낄 수 있는 짜릿함이다.
기자 시절이 생각난 이유는 최근 <마이 뉴욕 다이어리>(감독 필리프 파라도)를 보면서다. 작가를 꿈꾸는 조안나(마가렛 퀄리)는 뉴욕에 머물기로 결정한다. 먹고는 살아야 하니 취직자리를 찾았다. 결국 에이전시에 입사한다. 작가들이 원고를 쓰면 출판사를 연결해 주고 작가의 매니저를 하는 일. 오자마자 거물을 담당하게 된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작가 J.D 샐린저를 맡게 된다.
샐린저는 에이전시의 대형 고객이다. 사장 마가렛(시고니 위버)은 샐린저에게 전화가 오면 조심해서 받으라고 말한다. 쓸데없는 말은 절대 하지말라고 한다. 조금이라도 심기를 건드리면 안 된다는 의미. 유명한 작가들은 역시 어디 한구석이 깐깐하구먼!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스쳤다.
아니었다. 조안나가 우연히 샐린저의 전화를 받는 장면을 보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세상 따듯한 목소리로 자기 용건을 말하는 샐린저 씨, 아니 작가님… 뿐만 아니라 그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조안나를 응원한다. 물론 자기가 제일 잘하는 글쓰기로.
"아침에 15분씩이라도 좋아요"
"조안나 씨는 작가지요? 그럼 쓰세요!"
"매일 글을 써야 돼요."
뼈를 때리는 말이었다. 조안나가 아니라 나에게 하는 말 같았다. 왜냐면 최근에 글을 쓰고 있지 않았으니까. 글쓰기를 직업으로 삼고 있을 때는 불안한 미래도 꽤 해소됐다. 생각하고 쓰고 수정하고 다시 써서 완성하는 이 행위가 좋았다. 물론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노력했고 내 글에 공감하는 이가 많을수록 마음에 안식이 되었다.
글쓰는 직업에서 벗어나자 자연스럽게 삶의 활력들이 떨어지는 시간이 있었다. 꽤 길었다. 원인을 찾았다. 그중 하나는 글을 정기적으로 쓰지 않았다는 거다. 올해 중반 일주일에 두 편이라도 쓰자고 마음먹었는데 퇴근하고 쓴다는 게 좀처럼 쉽지 않았다.
하지만 샐린저의 저 말 몇 마디를 듣고 난 속으로 '유레카'를 외쳤다. 왜 하루에 15분을 쓸 생각을 못 했을까. 하루에 완성해야 되는 분량이 정해진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래서 다시 쓰기로 했다. 너무 부담 없이 다시 글 근육을 키우자!
<마이 뉴욕 다이어리>에서 조안나는 다양한 삶의 경험을 겪으며 마침내 본인의 길을 걷기로 결정한다. 꿈이었던 작가의 길을 다시 걷기로. “평범한 게 싫었어요. 특별해지고 싶었죠.”라는 자기의 염원처럼.
나는 특별해지고 싶은 마음은 없다. 글쓰기가 거창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하루에 15분이라도 글을 쓰고 싶다. 쓰겠다.
-
- 아는 맛 SF에 봉준호 한 스푼 추가
◇ 영화 소개
| 제목: 미키 17
| 장르: 모험/SF/드라마/코미디
| 감독: 봉준호
| 출연: 로버트 패틴슨, 나오미 아키에, 스티븐 연, 토니 콜렛, 마크 러팔로
| 상영시간: 137분
| 시놉시스: “당신은 몇 번째 미키입니까?” 친구 ‘티모’와 함께 차린 마카롱 가게가 쫄딱 망해 거액의 빚을 지고 못 갚으면 죽이겠다는 사채업자를 피해 지구를 떠나야 하는 ‘미키’. 기술이 없는 그는, 정치인 ‘마셜’의 얼음행성 개척단에서 위험한 일을 도맡고, 죽으면 다시 프린트되는 익스펜더블로 지원한다. 4년의 항해와 얼음행성 니플하임에 도착한 뒤에도 늘 ‘미키’를 지켜준 여자친구 ‘나샤’. 그와 함께, ‘미키’는 반복되는 죽음과 출력의 사이클에도 익숙해진다. 그러나 ‘미키 17’이 얼음행성의 생명체인 ‘크리퍼’와 만난 후 죽을 위기에서 돌아와 보니 이미 ‘미키 18’이 프린트되어 있다. 행성 당 1명만 허용된 익스펜더블이 둘이 된 ‘멀티플’ 상황.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하는 현실 속에 걷잡을 수 없는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자알 죽고, 내일 만나”
출처: 네이버 영화
----
1. 의도치 않게 시기적절한 영화가 된 <미키 17>
SF영화란 자고로(단지 개인의 의견일 뿐이지만), 현실에서 벗어난 아주 특이한 배경에 인간들을 몰아넣고 '여기서 보면 말 안 되지? 근데 인간들은 매번 그걸 모르더라.'라고 꼬집는 맛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2024년에 트럼프가 당선되지 않았거나 계엄이란 황당한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이 영화는 SF적 소임을 다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영화는 온 지구에 걸친 부패와 해악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다큐멘터리의 역할을 하고 있다.
마크 러팔로가 연기한 '마셜' 캐릭터를 보고 각 나라에서 자신들의 정치인을 보는 듯하다는 후기가 넘쳐나고 있다. 이 영화가 조금 더 일찍 개봉했더라면 미래는 바뀌었을까? 그건 아무도 모를 일이다. 중요한 사실은 과거는 바꿀 수 없고 오직 행동해야 하는 미래만 남아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슈, 트럼프의 '이주민 강제 추방 정책'에 대해 얘기하려 한다. <미키 17> 속 인간은 지구를 떠나 새로운 개척지를 만들기 위해 니플하임에 갔다. 그렇다면 원주민은 니플하임의 크리퍼(모티브가 크루아상이라고 하니 그에 맞춘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길 바란다)이고 이주민은 인간이다. 그렇다면 미국은 어떤가? 현재 미국인(통상 백인에 금발의 이미지)들은 이주민이다. 원래 그곳에 살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주민 강제 추방 정책'이 얼마나 앞뒤 안 맞는 말인가.
인간이 다른 행성에 도착해 그곳의 토착 생물을 핍박하는 스토리는 SF에선 흔하디 흔하지만 개봉 시기가 절묘해 특히 기억에 남았다.
2. 변화는 과감하지 않아도 된다.
영화를 보고 주연 캐릭터 외에 눈에 띈 두 사람이 있었다. 바로 카이와 도로시.
카이는 나샤와 함께 일하는 동료로, 임무 수행 중 애인 제니퍼를 잃었다. 마셜은 미키에게 익스펜더블인 네가 죽었어야 한다며 제니퍼라는 한 사람이 아닌 '가임기 여성'을 잃었음에 분노한다. 여성을 하나의 존재로 보지 않는 성차별적 시선에 카이는 정면으로 부딪힌다. 마셜 부부와의 식사 자리에서 종족 번식 임무를 제안하는 마셜에게 카이는 자신을 '자궁'으로 보는 거냐 말한다. 그리고 그 식사 자리에서도 미키는 익스펜더블의 역할을 수행하며 죽어가는데, 다들 미키의 상태는 보지 않고 각자의 얘기만 하고 있다. 카이는 모두가 미쳐버린 이 상황에서 유일하게 미키를 챙기고 진심으로 걱정한다.
그러나 완벽히 혁명적 인물은 아니다. 마셜을 공격한(실은 놀라 돌아다닌 것뿐이지만) 크리퍼를 처리하고, 멀티플인 미키를 발견하자 이를 보고하려 하기도 한다. 카이는 자신의 자리에서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면서도, 불합리함은 좌시하지 않는 독특한 캐릭터이다.
도로시 역시 카이와 비슷한다. 미키를 복제하면서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다른 연구원들과 다르게 도로시는 미키를 한 사람으로 본다. 연구자인 특성을 살려 크리퍼 통역기를 만들어 상황 해결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이 둘을 보며 누군가를 도와주고, 세상을 좋게 만드는 건, 커다란 용기와 시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소한 배려와 뚝심일 뿐이란 걸 느꼈다. 그러니 변화는 과감하게 시작되는 게 아니라 작은 생각에서부터 시작된다.
3.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건, 결국 사랑
나샤와 미키의 관계는 특별하다. 모든 게 완벽한 나샤와 매번 목숨이 버려지는 미키의 사랑은 우리가 극한의 상황에 몰린다 해도 사랑 하나만은 잊지 말아야 함을 상기시킨다. 미키 1부터 미키 18까지 나샤는 미키를 사랑했고, 사랑하고 있으며, 사랑할 것이다. 그 사랑이 미키를 지탱하게 만들었고 수많은 죽음을 버틸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사랑이 있다. 바로 미키 18.
첫 만남에서 다소 좋지 않은 인상을 남긴 미키 18은 마셜과의 식사 자리에서 있던 얘기를 듣고 크게 분노한다. 그리고 내린 하나의 결론. 마셜을 죽여야겠다.
미키 18은 미키 17이 인정하는 가장 또라이 같은 인물이다. 항상 주눅 들어있고 무슨 일이든 불평 없이 하는 '자신'과 정반대의 성향을 가졌다. 둘의 상반된 태도는 미키 18이 '미키 반스'의 삶을 사랑하길 선택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살아있는 걸 보고도 무기만 챙겨 돌아간 티모에게 복수하려던 것도, 마셜 부부와의 식사 자리에서 겪은 모욕을 듣고 분노했던 것도, 어린 시절 자신이 차를 망가뜨려 엄마가 죽었다고 자책하는 미키 17에게 '네 잘못이 아니라고.' 대답해 준 것도, 전부 '미키 반스' 자체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사랑하지 않는 이를 위해 누가 이렇게까지 해줄 수 있을까? 그리고 미키 18은 '미키 반스'를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사건의 원흉을 붙잡고 마지막 복수를 이뤄낸다.
그러므로 나샤와 미키 18은 각자의 방식으로 미키 반스를 사랑했다. 미키를 미키답게 만들어준 둘은 항상 미키의 곁에서 그를 격려하고 호통치며 남은 한 명의 삶을 온전히 꾸려갈 수 있게 만들어줄 것이다.
아는 맛 SF지만 봉준호식 코미디와 사회 풍자가 잘 드러나는 영화. 러닝타임 3시간이 짧게 느껴지고 외계 생명체 크리퍼가 귀여운, <미키 17> 리뷰 완.
-
- 밤의 끝을 향한 비행
우리는 때때로 누군가의 비밀을 목격하곤 한다. 사소하고 작은 비밀부터 타인에게 영향을 줄 만한 큰 비밀까지, 여러 비밀을 두고 우리는 입을 다물 것인지, 밝힐 것인지의 갈림길 앞에 놓이게 된다. 어떤 비밀은 관여하기 귀찮다는 이유로 숨겨지기도 하고, 자신의 처지와도 관련되어 있어 밝히기 곤란하다는 이유로 외면받아 숨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선택이 정말 옳은가? 우리는 무엇을 보았고, 또 무엇을 숨기고 있는가?
영화 <올빼미>는 누군가 독살당해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을 목격한 인물을 내세우며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만약 우리가 이 인물이라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그러한 질문 속에서 영화는 낮과 밤, 빛과 어둠, 그리고 볼 수 있는 이와 볼 수 없는 이를 두고 끊임없이 빛을 옮긴다. 해당 작품이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더해 새롭게 역사를 각색한 만큼, 역사적 사실과 영화의 내용을 비교해 짚어가기보다 <올빼미> 속 각색된 인물들과 관계 구도를 중심으로 작품을 살펴보고자 한다.
-1.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영화의 주인공인 천경수는 맹인 침술사로, 빛이 있는 곳이나 밝은 대낮에는 앞을 보지 못하지만 어두운 곳이나 밤에는 흐릿하게나마 앞을 볼 수 있는 주맹증을 앓고 있다. 그러나 앞이 보이지 않더라도 다른 신경 감각들의 발달로 발소리와 숨소리만을 듣고도 환자를 진단하고 침을 놓는 데에 용한 실력을 보인다. 덕분에 침술사를 찾던 어의 이형익의 눈에 들고, 실력을 인정받아 궁의 침술사로 일하게 된다.
궁에 들어가 일하게 되었을 때 경수는 기뻐하며 웃는다. 아픈 동생의 약값조차 낼 수 없던 어두운 현실에서 밝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신호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약값이 밀려 더는 약을 내줄 수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경수는 외친다. 궁에 들어가기만 하면 약값을 낼 수 있다고. 궁에 들어가기만 하면.
그러나 경수가 조금 더 밝은 미래를 위해 들어온 궁에는 그 무엇보다 어둡고 무거운 비밀이 숨겨져 있다. 살아남기 위해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는 거짓말로 스스로 눈을 가렸던 경수는 가린 손 틈으로 소현세자가 독살당하는 것을 목격한다. 경수는 독살의 유일한 목격자이자, 그리고 나아가 인조가 소현세자를 독살하도록 명령했다는 것을 눈치챈 유일한 이다. 이때부터 경수에게 궁은 밝은 미래의 공간이 아니라 어두운 현실을 숨겨둔 감옥이 된다.
영화의 제목인 ‘올빼미’는 야행성 조류로, 낮보다 밤에 더 활발하게 활동한다. 모두가 잠들어 있는 밤에 암흑 속을 자유롭게 비행하는 올빼미는 작중 주인공인 천경수와 닮아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낮에는 지팡이나 동행인 없이 앞을 구분하기도 쉽지 않지만, 밤이 되면 숨겨진 것들을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는 설정은 경수의 약점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른 인물들이 무방비하게 경수에게 약점을 내비치도록 만들기도 한다.
이는 작중 초반 인조의 후궁인 소용 조씨가 경수의 앞에서 옷을 모두 벗는 모습에서부터 예고된다. 앞을 볼 수 있는 형익은 가림막 뒤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경수는 가림막 너머로 와 침을 놓는다. 이때 경수는 보이지 않는 척 손을 덜덜 떨면서도 들키지 않게 침을 꽂는다. 당시 촛불이 꺼지며 안이 어두워져 조씨의 몸을 볼 수 있었지만, 보이지 않는다는 설정을 유지해 안전해지는 쪽을 택한 것이다.
이러한 위기는 작중 중심 사건의 예고에 불과하다. 경수가 아예 앞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한 형익은 소현세자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경수와 함께 침전으로 향한다. 그리고 경수를 앞에 두고 경수의 청각을 속여가며 소현세자에게 멀쩡히 침을 두는 척 행동한다. 범행을 공모하지도 않은 경수의 앞에서, 형익은 청각만 속이면 경수가 알지 못하리라 방심한 채 태연히 소현세자를 독살한다. 이때 촛불이 바람에 꺼지면서 경수는 소현세자가 피눈물을 흘리며 죽어가는 것을 목격하게 되지만, 앞의 선택과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척 들키지 않게 군다. 순간 경수를 의심한 형익이 경수의 눈앞에 침을 들이밀지만 명주천의 물기를 짜는 척 주먹에 힘을 꽉 준 채 눈을 뜨고, 천이 더 필요한지 묻는다. 형익은 다시 안심하고 범행을 이어가고, 경수는 모두가 잠든 밤, 자신이 목격한 독살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누구도 알지 못하는 소현세자 독살 사건의 진범, 목격자는 오직 하나. 위험을 무릅쓰고 본 것을 보았다고 말할 것인가, 눈을 감고 낮이 오길 기다릴 것인가?
영화는 빛의 양에 따라 앞을 보기도, 보지 못하기도 하는 경수를 두고 여러 인물을 등장시키며 ‘본다’는 행위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제시한다.
먼저 경수는 초반부터 ‘보이는 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궁궐 안 사람들에게 침을 놓을 때를 비롯해 모든 순간, ‘소경이 보는 것을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스스로 눈앞을 완전히 가린다. 자신과 같은, 힘이 없는 약자는 보여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작중에서도 소현세자가 경수의 주맹증과 관련된 진실을 덮어줬기 때문에, 죽기 직전 경수의 사형 집행을 맡은 병사들이 경수를 못 본 척 살려주었기 때문에 순간순간마다 살아남기도 했다.
그러나 약하다는 이유로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다고 감추는 것만이 옳을까. 경수가 어두운 곳에서는 앞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소현세자는 경수와는 반대의 관점에서 그를 바라본다. 살기 위해 눈을 가렸다는 경수의 비밀을 못 본 척 감추어 주면서도 ‘안 보고 사는 게 몸에 좋다고 하여, 눈을 감고 살면 되겠는가.’ 하며 경수에게 조언을 건넨다. 그리고 청에서 가져왔던 확대경을 선물한다.
지금껏 경수는 빛의 양이 적은 곳에서 흐릿하게나마 앞을 볼 수 있었고, 그 얕은 시각에 기대어 편지를 쓰거나 업무를 해 가며 연습해왔다. 그러나 경수가 쓴 글씨들은 흐릿하게 봤을 때는 멀쩡해 보여도 올바르게 쓴 글씨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확대경으로 자신의 글씨를 크고 선명하게 볼 수 있게 된 경수는 그제야 자신이 옳다고 생각해왔던 것에도, 봐 왔던 것에도 잘못된 것이 있음을 알게 된다. 소현세자가 확대경과 함께 건넨 ‘제대로 보는 힘’을 가지게 되면서, 경수는 지금껏 자신이 믿어왔던 세계를 다시 볼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된다.
반대로 인조는 보이는 것을 외면해야 할 때가 있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청에서 돌아온 소현세자가 청의 문물들을 소개하며 긍정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의견을 꺼내놓자 명의 편에 서야 한다고 강경하게 거부한다. 명은 이미 쇠락해 힘을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지만, 인조는 이전에 청에게서 얻은 굴욕을 잊지 못해 그 사실을 외면한 채 청에게 등을 지려 한 것이다.
그러나 소현세자가 보이는 것을 보인다고 말하며 인조에게 새로운 시각을 건네려 들자 인조는 자신의 권력에 소현세자가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고, 그를 독살할 계획을 세운다. 인조와 인조의 후궁인 조씨가 공모해 형익을 시켜 소현세자를 독살시켰다는 진실이 분명히 존재하는데도, 인조는 진실을 외면한 채 소현세자를 죽인 진범을 찾으라며 아들의 죽음을 대하는 보통의 왕의 구색을 갖추려 든다.
명은 이미 쇠락했다는 진실을 말하던 소현세자가 자신에게 위협이 되자 그를 독살했듯, 인조는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것들은 없애고 진실을 감추려 든다. 소현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진실을 알게 된 세자빈이 찾아오자 세자빈의 가문에서 선물한 전복죽에 독이 들어 있었다며 누명을 씌워 가두고, 경수가 최 대감을 도와 진실을 밝히려 하자 최 대감에게 권력을 주겠다는 말로 소위 말하는 ‘합의’를 봐 가며 왕의 자리를 유지하려 한다. 소현세자는 학질로 사망했고, 궁에는 아무 일도 없었으며, 자신은 아들의 비통한 죽음에 깊이 통감하는 왕일 뿐이라는, 허울뿐인 이야기로 사건을 마무리하고자 하는 것이다.
극중 소현세자는 경수보다 이전에 인조에게 ‘보이는 것’에 대해 말했던 인물이다. 청에 끌려갔다 8년이 지나서야 돌아온 그는 청에서 보고 겪었던 것들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인조에게 청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때 인조는 나지막이 대답한다.
너, 보는 눈이 바뀌었구나.
소현세자가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해당 장면에서, 인조는 소현세자를 적대시하고 경계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이는 결국 소현세자를 죽이기로 공모한다는 비극으로까지 이어진다. 보이는 것을 보인다고 말한 자는 결국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소현세자의 죽음을 경수가 목격하면서 그 ‘새로운 관점’은 경수에게로 옮겨온다. 지금껏 따라왔던 이형익이 소현세자에게 독침을 꽂아 그를 독살하려 한 진범이었다는 진실의 면이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지금껏 이형익과 윗선의 명만을 따라온 경수에게 능동적으로 선택할 선택지를 부여한다. 보는 눈이 바뀐 소현세자는 ‘보이는 것을 보인다’고 말해 죽었고, 진실을 알게 된 경수 또한 보는 눈이 바뀌었다. 이제 선택은, 숨겨져 있던 진실을 목격한 경수에게 달려 있다.
새롭게 보이는 것을 보인다고 말할 것인가, 덮어두고 기존의 것들만을 바라볼 것인가?
-2. 낮과 밤의 전복 – 새롭게 창조되는 세계
영화에서 등장하는 이들 중 가장 약해 보이는 자는 단연코 주인공인 천경수다. 경수는 앞이 잘 보이지 않아 지팡이를 짚거나 안내인과 동행해야만 대낮에도 길을 걸을 수 있다. 어두워지면 흐릿하게나마 사물과 글자를 인식할 수 있지만, 그를 당당히 밝힐 수도 없다. 경수의 대사처럼, ‘보이더라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해야만 사람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경수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다는 점에서 궁의 왕족들은 경수의 머리 위를 점한다. 경수에게 침을 맞는 중전도, 소현세자도, 인종도 모두 여차하면 경수를 영원한 어둠 속으로 밀어버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경수는 궁의 비밀을 알아도, 알지 못해도 암흑 속에 있는 것처럼 허우적대야 한다.
그러나 ‘진짜’ 진실을 모르는 건 경수가 아니라 궁의 왕족들이다. 그들은 경수의 눈이 완전히 멀지 않았다는 것을, 그래서 경수가 어둠 속에서는 앞을 가로막은 암흑을 걷어낼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무방비하게 자신의 몸을 내맡기는 궁의 왕족들에게, 경수는 천천히 침을 꽂는다. 이는 다시 말해 왕족들에게만 경수의 목숨이 달린 것이 아니라, 경수에게도 왕족들을 위협할 힘이 있다는 것이다.
작중 형익의 침을 맞아 독살당하던 순간, 소현세자는 눈과 코, 입에서 피를 흘리며 조용히 죽어간다. 진실이 가려지던 그날 밤, 어둠이 드리워진 곳이 곧 낮이나 마찬가지였던 경수는 모든 걸 목격한다. 이 순간, 경수가 보았으나 보지 못한 것처럼 넘어갔던 장면들이 다시금 돌아와 퍼즐 조각처럼 맞춰진다. 인조의 후궁이었던 소용 조씨가 형익에게 무언가를 건네던 순간, 그리고 무언가를 건네받은 형익이 독이 묻은 침으로 세자를 독살하는 순간. 경수는 그 순간에는 형익의 의심을 피하고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척 굴었지만, 다시 돌아와 형익이 미처 제거하지 못했던 침 하나를 손에 넣는다. 이 과정에서 침을 회수하려 왔던 형익을 피해 달아나며 소동을 벌이게 되고, 밤중 병사로 꾸며져야 했을 소현세자의 죽음은 ‘독살범이 있다’는 의혹과 함께 논란이 된다. 증거는 가졌으나 권력을 가지지 못한 경수는 세자의 편이 될 수 있는 이들을 떠올리다 세자빈을 찾아가지만, 인조는 진실을 알게 되었다며 찾아온 세자빈에게 반역죄를 덮어씌워 옥에 가둔다. 경수는 이후 형익이 받아 구석에 숨겨두었던, 세자를 죽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던 문서를 찾아 최 대감을 찾아간다. 그러나 최 대감은 인조가 소용 조씨를 통해 건넸다던 그 문서의 필체와 공식 문서의 필체가 다르다는 이유로 더 확실한 증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독이 묻었던 침, 소용 조씨가 건넸던 문서. 모든 증거를 직접 가져왔던 경수는 원손의 도움으로 인조가 의심을 피하고자 다른 손으로 비밀 문서를 적었다는 사실을 알고, 왼손으로 쓴 공식 문서를 얻기 위해 나선다. 이때 경수의 무기가 되는 것이 바로 ‘침’이다. 그는 형익이 보낸 것처럼 당장 침을 놓아야 마비가 멎는다고 속이고 왕의 침소로 잠입한다. 그리고 인조에게 침을 놓아 오른손에 마비가 오게 만든다. 이 때문에 급히 문서 작성을 요청하는 우승지 앞에서 인조는 왼손으로 글씨를 적게 된다. 옥새를 찍기 직전 형익이 달려와 경수가 범인이라고 외치지만, 경수는 그 순간 인조에게 침을 놓아 모든 신경이 마비되도록 만들고, 왕을 인질로 삼아 사람들을 무른 뒤 문서에 옥새를 찍어 들고 달아난다. 절대 권력을 쥐고 있었던 인조는 경수의 말에 벌벌 떨고, 숨겨져 있던 진실은 경수의 힘을 통해 바깥으로 드러날 위기를 맞는다.
경수는 증거품을 전달한 뒤 계획대로 궁을 나가려다 문지기들이 ‘형익이 원손을 치료하러 갔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다시 궁 안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소현세자의 아들이자 장차 인조를 압박할 수 있는 원손에게 형익이 독침을 놓으려는 것을 목격한다. 경수는 다시금 침을 무기로 사용한다. 그가 쓰던 독침을 형익에게 놓아 형익을 쓰러뜨린 뒤, 경수는 원손을 업고 달려 나온다.
그러나 경수가 불을 붙여 타오르기 시작한 얕은 빛은 곧 흐릿해진다. 경수가 원손을 업고 최 대감을 찾던 도중 날이 밝아오고, 어둠 속에서만 앞을 볼 수 있는 경수는 시야가 흐릿해져 가야 할 방향을 잃게 된다. 이 때문에 정처없이 떠돌다 인정전에 당도해 옥좌에 앉아 있던 인조의 앞에 서게 된다.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보이는 것을 밝힌 경수의 앞에 ‘밝혀진 것조차도 감출 수 있는’ 이들이 등장한다. 경수가 증거품만 가져온다면 진실을 밝혀줄 것 같았던 최 대감은 경수가 몸을 날려 구해왔던 증거물을 들고 인조를 찾아간다. 그러나 인조의 회유 끝에 자신의 권력을 챙길 수 있는 선을 계산하며 ‘합의’를 하기 시작한다. 옥에 갇힌 세자빈이 믿었던 마지막 빛, 최 대감은 언제든 꺼질 수 있는,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얕은 빛에 불과했다. 어둠 속에서 힘을 발휘해 ‘독살의 증거’를 확보했던 경수는, 인조와 최 대감의 아침 앞에서 무력하게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경수가 보이는 것을 밝혀도 권력 구도는 달라지지 않는다. 영화는 세자빈의 죽음과 원손의 죽음을 차례로 보여주면서, 진실을 밝히려 했던 이들이 까맣게 타 들어간 현실을 조명한다.
-3. 끝나지 않은 밤
그러나 영화 속 세계는 그 지점에서 끝나지 않는다. 경수의 눈을 가리고 끌고 가라고 명령할 수 있는 힘이 인조에게 있었다면, 인조의 명령을 받드는 이들에게도 거부할 힘이 있다. 최 대감이 인조와 합의를 본 뒤 나와 사람들에게 ‘독살자는 없다’고 선언하자 경수는 따라 나와 사람들에게 자신이 보았다고 소리친다. ‘주상이 이형익을 시켜 세자 저하를 독살했’다는 경수의 외침에 인조는 화가 나 검을 들고 ‘소경이 나를 능멸한다’고 소리치다 넘어져 머리에 피가 흐르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 순간 그 자리에 있던 왕실 사람들은 인조를 돕지 않는다. 오히려 차가운 시선으로 인조를 바라볼 뿐이다. 궁녀, 내시, 호위, 누구라고 지칭할 것 없이 모두 드러난 진실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후 경수를 침수시켜야 했던 내금위는 경수의 목을 치려다 말고 내금위장에게 ‘우리 모두’ 보지 않았냐고 묻는다. 그가 ‘모두가 진실을 알고 있는데 이럴 수는 없다’며 그 힘을 거부했기 때문에, 용기를 내 눈을 떴기 때문에 경수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4년 뒤, 마비가 심해진 인조의 앞에 다시 설 수 있었다.
이 순간 비로소 낮과 밤은 거꾸로 뒤집힌다. 경수가 도움을 청하고자 했던 왕실 사람들은 억울하게 끌려가거나 자신의 이익을 먼저 챙기며 인조를 끌어내리지 못했다. 이 때문에 경수는 흐려진 시야 속에서 진실을 다시금 덮으려는 목소리를 듣고, 쓰러진 원손을 두고 무력하게 끌려가야만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다시 찾아온 경수는 마비된 채 무력하게 누워 있는 인조의 앞에 앉는다. 그리고 침을 꽂는다. 등불이 꺼지고 밤이 찾아오면, 경수의 낮이 된다. 그 어둠 속에서 소현세자의 정수리에 박힌 채 남아 있던 독침을 기억하며, 경수는 인조의 머리에 독침을 꽂아 넣는다. 누구도 인조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그 무력한 공간에서.
경수는 진실을 알고 있지만 권력을 뒤집을 힘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경수가 조력자를 찾은 건 그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경수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세자빈은 누명을 쓰고 끌려나가고, 최 대감은 권력 욕심에 자신의 눈을 다시 가릴 뿐이다. 눈이 가려진 자와 눈을 가린 자, 그렇게 조력자들이 퇴장했을 때, 다시 말해 어둠 속에 남은, 앞을 볼 수 있는 이가 자신밖에 남지 않았을 때 경수는 비로소 전면에 등장한다. 원손에게 사실을 고하고, 용기를 내고, 증거물을 직접 찾아내고, 인조의 오른손을 마비시킨다. 그리고 마침내 과거 소현세자가 독살당했던 방식 그대로 인조에게 독침을 놓는다.
경수를 살려주는 이도, 인조를 끝내는 이도 모두 왕족이 아니다. 경수는 진실을 알고 경수를 살려준 내금위 때문에 살 수 있었고, 다시금 인조의 앞에 설 수 있었다. 경수의 운명도, 인조의 운명도 모두 권력자의 손에 끝나지 않았다. 영화 내내 권력을 쥐고 있었던 이들은 왕족이었지만, 결국 이 이야기를 이어가게 하고 매듭짓는 이는 따로 있었다는 점에서 그 무엇보다 결정적인 힘은 권력자가 아닌 시민에게 있는 것처럼 읽히기도 한다.
-4. 대비 : 관객을 속인 양면성
<올빼미>를 보는 동안 관객은 끊임없이 속는다. 이는 인물들이 숨기고 있는 진실이나 경수의 재등장 때문이기도 하지만, 큰 비중을 차지하는 형익과 인조의 양면성과도 관련이 있다. 먼저 인조의 명을 받들어 소현세자를 독살하기 전까지 형익은 선한 이미지로 연출된다. 작중 초반부터 형익은 내의원에서 일할 이를 찾기 위해 직접 침술원을 찾는다. 그리고 맹인 침술사인 경수가 청각을 비롯한 발달한 감각으로 환자의 상태를 파악하고 제대로 침을 놓자 이런 능력을 알아보고 경수를 내의원으로 데려온다. 당시 경수에게는 심장병을 앓고 있는 동생이 있었고, 이 때문에 정기적으로 약을 구해야 했다. 그러나 형편이 좋지 않아 약값이 많이 밀려 힘들어하던 경수에게 궁에서 일하게 해 준 형익은 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구도는 경수에게만이 아니라 왕실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진실을 알게 된 뒤 경수가 강빈을 찾아가 고하자 강빈은 형익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며 믿지 않는다. 그는 계속해서 왕실을 위해 일해왔고, 원손을 아끼던 인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수의 등장과 소현세자가 선물했던 청의 문물, 확대경으로 인해 강빈은 그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인조 또한 ‘절대적인 악역’으로만 비추어졌던 것은 아니다. 그는 세자가 돌아오기 전 원손에게 다정하게 대해줬으며, 소현세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진심을 다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독살 의혹이 있다는 말에 철저히 조사하라고도 명한다. 이는 작중 인물들에서 더 나아가 관객들까지도 그들을 의심하지 못하게 만든다. 주인공인 경수가 어둠 속에서 진실을 보기 전까지, 그리고 강빈이 인조를 찾아왔을 때 인조가 떨고 있는 것을 느낀 경수가 배후에 왕이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기 전까지. 경수가 진실을 고했을 때, 낮에도 밤에도 그들을 지켜볼 수 있었던 원손과 세자빈은 그의 말을 믿지 못한다. ‘그가 그럴 리가 없다’는 이유로.
이로써 영화는 소현세자의 죽음을 기점으로 분위기의 반전과 함께 인물들의 이미지를 대비시킨다. 형익과 인조의 숨겨진 면이 밝혀지면서 영화는 표면상 병사(病死)로 정리된 듯했던 소현세자의 죽음 뒤 배후가 있을 것이라는 의혹을 던진다. 이때부터 경수 또한 형익과 인조와 대적하며 능동적으로 행동한다. 형익의 지시 아래에서 일했던, ‘봐선 안 될 것을 보았다면 모른 척해야 한다’는 의원 만식의 조언 아래 숨죽여 움직였던 경수는 형익과 인조를 속이고 증거를 손에 쥔다. 그리고 비로소 인조에게 독침을 놓기까지 한다. 소현세자의 죽음을 기점으로 영화의 분위기가 바뀌었다면, 인조의 죽음을 기점으로 인조와 경수의 구도 또한 다시 한 번 바뀐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진실을 밝히던 경수의 입을 막았던 인조와, 경수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밝히지만 누구도 믿어주지 않는 침소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 인조. 경수가 비로소 인조에게 독침을 놓고 조용히 침소를 떠나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그렇다면 악역들의 밤은 끝이 났을까?
과거 인조반정으로 인조를 왕위에 세웠던, 소현세자의 죽음을 숨겨주는 명목으로 인조와 타협하며 권력을 쥐고 비선실세의 자리에 오른 최 대감은 극중에서 어떤 결말로도 비추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어두운 밤은 계속해서 다시 찾아올 것이다. 우리가 눈을 감고 있는 사이, 아주 조용히 우리를 속이려 들면서.
인조에게 독침을 꽂으며 경수는 나지막이 묻는다.
무엇이, 보이십니까?
해당 대사를 내뱉는 장면에서 경수는 인조에게, 그리고 나아가 영화관 바깥의 목격자들에게 묻는다. 모든 진실을 목격했다면 당신의 차례다.
본 것을 봤다고 말할 것인가, 입을 막는 손을 기어코 떼어내고 소리칠 것인가, 또는 눈을 가리고 돌아누울 것인가?
우리가 어떤 밤을 지나 어떤 아침을 맞이할지는, 이제 당신의 손에 달려 있다.
-
- 열여덟 살 그 여름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시놉시스
갈색 머리와 눈동자를 가진 평범한 여고생인 이경은 고등학교 2학년 때 같은 고교 축구선수 여고생인 수이를 만난다. 둘은 서로 친해지다가 사랑을 하는 관계까지 가게 되고 스무 살이 되어 서울에 상경한다. 이경은 서울에 있는 대학의 경제학과에 진학하고 수이는 자동차 수리공이 되기 위해 고시원에서 살면서 알바를 여러 개 한다. 이 둘의 만남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친구 간에 느낄 수 있는 우정이 사랑으로 번지는 건 사회적인 시선으로는 좋지 않다. 그러나 이경은 여자를 좋아하는 동성애를 가진 사람이었고 수이에게 이끌린다. 수이는 이경을 사랑하지만 레즈비언이라는 시선이 좋지 못하기에 둘은 사이가 멀어지려 한다. 그러다가 이경은 수이와 헤어지고 다른 여자 동기와 사귀다가 또 헤어진다. 결국 이경은 수이에게 받았던 물품들을 수이에게 돌려주며 진정한 이별을 하고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된다. 이경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수이와 함께 했던 흔적을 찾으러 가며 끝이 난다.
사실 필자는 동성애에 대해서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레즈비언이라는 사회적으로 좋지 못한 시선과 억압 속에서 이경과 수이가 남 몰래 사랑을 해야만 했던 걸 보면서 친구 간의 관계에 금기를 넘어서는 걸 보았고 사회가 정한 기준을 이미 넘어섰지만 이경은 자신의 성적 취향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수이는 사회적인 시선에 초점을 두고 이경과 조금 경계를 두려고 한다.
애니메이션 <그 여름>에서 이경이 동성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추억은 의문으로 남겨지게 되고 수이도 나중에 어떻게 됐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그저 열여덟 살에 만난 친구가 우연히 사랑까지 번졌다는 것을 흔적이나 추억으로 남겼다는 것만 알게 된다. 어떻게 보면 영화 <클로즈>와 살짝 비슷한 면이 있는데 그 영화에서는 친구 관계였던 래오와 레미가 동성애로 오해받고 놀림당해 레미가 자살하여 비극으로 끝나지만 이 애니메이션은 오히려 친구 간의 사랑을 더 당당히 밝히고 있다.
대부분의 남들과는 다른 이경과 수이의 사랑 이야기
※ 씨네랩의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초대받아 작성한 영화 리뷰입니다.
-
- 필경사 바틀비의 대척점에 선 남자
톰 크루즈가 연기를 잘한다는 건,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마이너리티 리포트》, 《미션 임파서블》시리즈 등을 봐오면서 익히 알고 있었으나, 《제리 맥과이어》를 보는 순간 나는 다시금 탄식하듯 내뱉었다. 세상에, 톰 크루즈 연기 좀 봐! 특히나 도입부에서 주인공이 얼마나 얄밉고 짜증 나던지. 그 톰 크루즈인데도 상관없이, 꿀밤을 먹이고 싶다는 충동이 절로 치밀었다. 하여간에, 오늘 이야기할 《제리 맥과이어》는 톰 크루즈가 근사한 얼굴을 빛내며 "You Complete Me, "라고 고백하는 장면으로 유명하지만 내겐 그리 어여쁘지만은 않은 영화였다. 《제리 맥과이어》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내놓을 수 있는 가장 말랑말랑한 버전의 필경사 바틀비가 아닐까, 라는, 다소 울적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세상엔 모두가 생각하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테마가 몇 가지 있다. 아니, 말하더라도 다 함께 행동으로 옮길 수 없는 것이 있다. 『피로사회』라는 책 제목을 훑거나, 과로사로 세상을 등진 이들이 많다는 신문 기사를 읽을 때 그들과 나의 처지를 동일시하며 상대와 자신을 눈물겹게 여기고, 소위 말하는 '이놈의 세태'에 분노하면서도 어제와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을 살아나가는 우리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쓸데없는 감성/감정/소망 등은 결국 우리의 발목을 잡을 뿐이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통계로 대표되는 경제 논리의 관점에선- 우리의 경험이 진실이기도 하다.
출처: 네이버 영화 포토
영화 《제리 맥과이어》엔 이런 세태에 반기를 든 남자가 등장한다. 주인공인 제리(톰 크루즈)는 스포츠 에이전시에 근무하는 유능한 매니저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의 일상에 환멸에 느낀 그는 새벽 감성에 젖어, 칸트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인간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는 업무 지침서를 작성하여 회사 내 전 직원에게 선물한다. 안타깝지만 회사의 시선으로 보자면, 제리가 저지른 한순간의 기행은 그가 효율적인 경쟁력을 자발적으로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영화가 시작한 지 25분이 채 되기도 전에 제리는 해고된다.
그렇다면 해고된 직후 제리는 어떤 선택을 할까? 자신이 키워내고픈 스포츠 유망주와 일대일의 가슴 뛰는 관계를 순탄하게 이어나가며 승승장구할까? 인간을 도구화시킨 자본주의의 허무함을 신랄하게 폭로할까? 전혀 아니다. 생각해보자. 제리의 업무 지침서는 충동적으로 쓰인 글이었고, 전날 밤까지만 해도 제리 맥과이어라는 남자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누구보다 훌륭하게 적응한 남자였다. 스포트라이트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있는 매니저라고 이야기했다지만, 그는 미국이 사랑하는(혹은 사랑하게 될) 스포츠 거물들을 이어주고 커미션을 획득하는 일을 업으로 삼은 사람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업무 지침서에 '취해'있었을 진 몰라도, 진심으로 받아들이진 않았다. 그리고 모든 문제는 여기서 출발한다.
그래도 운명의 여신이 제리를 완전히 버리진 않았나니, 제리는 자신의 업무지침서에 깊은 감명을 받은 도로시(르네 젤위거)와 새로운 에이전시를 꾸린다. 도로시는 마법세계에 발을 잘못 디딘 동화 속 주인공처럼, 경리직원임에도 자본주의 특유의 비인간적 합리성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며, 감성적 순수를 지닌 여자다. 제리의 비서인 웬디가 월급 인상이 석 달밖에 남지 않았다며 그를 따라가지 않는 것과 달리, 어린 아들을 키우는 미혼모인 도로시는 4대 보험조차 보장이 어려운 제리의 신생 회사를 택했다.
출처: 네이버 영화 포토
여기서부터 영화가 뻔해질 거라 코웃음 치기 쉽다. 남주인공을 따라간 여주인공이니, 당연히 사랑에 빠질 것이고, 사랑을 원천 삼아 직업적 성공까지 일궈낼 것만 같다. 아니, 실상은 다르다. 《제리 맥과이어》에서 제리와 도로시의 관계는 오랜 세월에 걸쳐 녹슨 문처럼 끊임없이 삐끄덕댄다. 인간의 모든 감정을 다 겪은 하루의 끝에서조차 제리와 도로시가 바라보는 세상은 하염없이 다르만 하다. "가끔은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어"라는 도로시의 고백은 제리가 업무적으로는 뛰어난 협상가였을지는 몰라도, 사적이고도 내밀한 인간관계에선 문제적 인물일 수 있음을 폭로한다. 물론 도로시 역시 어느 정도 인간관계에 있어 능숙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처음부터 제리를 먼발치에서 동경하는 인물로 그려졌으며, 열 명의 이혼녀와 이야기하는 현실을 지긋지긋해하는 동시에 또래 여자들의 삶을 부러워했다. 영화 중후반부, '우리가 황홀함에 빠져서 사랑한다고 믿었'던 게 아니었겠냐는 도로시의 지적은, 최소한 도로시에게 있어선 일부 사실이었으리라.
이러한 두 사람의 위태로운 관계를 임시적으로 봉합하는 존재는 바로 도로시의 아들인 레이(조나단 립니키)다. 제리든 도로시든 결국 현실과 타협해야 하는 부분이 존재하는 어른인 반면, 레이는 그렇지 않다. 어린아이는 자야 한다는 엄마의 규칙을 손쉽게 넘나들고, 제리에게 "안녕, 제리 아저씨"라고 인사할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다. 한밤중 모르는 아저씨에게 "지금 동물원에 가자"라고 이야기할 만큼, 어떤 사회적 속박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소망에 충실한 존재이기도 하다. 이런 레이는 그 어떤 어른보다 삶의 주권을 뚜렷하게 쥔 존재처럼 보인다. 모든 인간관계를 합목적성 하에 계산을 했던 제리가(그는 심지어 레이가 자신의 비밀을 지켜주겠다고 하자, 그 '대가'로 동물원에 꼭 가야겠다고 이야기한다) 잘 나가던 스포츠 에이전시를 나오자 연인으로부터, 친구로부터, 동료로부터, 사업 파트너로부터 루저 취급당한 모습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출처: 네이버 영화 포토그렇다 한들 영화의 드라마적 요소를 충족시키는 제리의 성장은 보이드 가家에서 이뤄지지 않으며, 오히려 로드 티드웰(쿠바 구딩 주니어)과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두 사람이 비즈니스 파트너에서 친구로 거듭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특히나 제리에게 더욱 그랬다. 에이전시를 나온 후 경제적으로 파산한 그는 절박하다. 모든 가능성을 붙잡아야 한다. 사무실에서 그에게 쇼 미더 머니를 외치게 했던 이해할 수 없는 선수에게 '내겐 너 하나뿐이야, '라는 말을 건네야 했고 모든 자존심을 저버리며 도와달라 외치고 광고주에게 비굴하리만큼 굽신거려야 했다. 남은 패가 많지 않은 제리에겐 더 이상 물러날 자리도 없고, 포기할 여력도 없다.
하지만 어디 인생사가 마음대로 흘러가던가? 제리와 달리 자신의 하나뿐인 클라이언트는 불만이 산더미다. 약속했으니까 의리를 지키겠다며 제리 곁에 남은 로드는 언뜻 영화 내에서 가장 자유로운 인물처럼 보이기 쉬우나, '쇼미 더 머니'나 '콴'을 큰 소리로 외치는 그는 기실, 경기장 밖에서의 매너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거액의 계약금을 원하는 모습에서 알 수 있듯 자본주의에 강하게 예속된 인물이었다. 이기적인 그의 태도가 자꾸만 몸값을 떨어뜨린다는 것을 꿈도 꾸지 못했던 로드는 제리의 잔인하리만큼 정직한 말에서 전환점을 맞이한다. "넌 너무 액수에 연연해. 가슴은 없고 머리만 굴릴 뿐이야. 경기에선 돈 생각만 하고 그런 태도로는 관중을 감동시키지 못해.” 그렇다. 20세기 서프러제트 역사에서 “We want bread, but we want roses, too!”라는 슬로건을 찾을 수 있듯, 인간에겐 울림이 필요하다.
출처: 네이버 영화 포토
오로지 돈과 계산만으로는 인간이 살 수 없다는 메시지를 담은 이 영화는, 그러나 제리의 시선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애매한 구석이 있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건 이 영화의 장르다. 《제리 맥과이어》는 드라마/코미디/멜로/스포츠라는 네 가지 장르를 납득 가능할 만큼씩 흡수한 영화다. 한 가지 장르에만 집중해서 두 시간을 투자해도 성공하기 어려운데, 네 가지 장르가 한 영화에 뒤섞인 이유가 뭘까? 최소한 《제리 맥과이어》에서의 답은 단 하나뿐이다. 주인공인 제리 맥과이어가 관계에 있어서, 비즈니스에 있어서 두 시간 내내 우왕좌왕했기 때문이라는 것.
위에서 말했듯 그의 업무지침서는 충동적으로 쓰였다. 새벽녘에 쓰인 '꿈'이 신념으로 자라기 전 제 자리에서 쫓겨났기에, 제리는 기존 체제와 완전히 척을 진 사람이 아니다. 그렇기에 도로시를 움직인 낙관적인 인간 찬가를 자신 있게 확대할 만큼의 용기 혹은 배짱이 없다. 우연에서 출발한 도로시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도로시를 배려하고 그의 아들 레이에게도 친절하지만, 그 이상으로 나아가진 못한다. 분명 끔찍한 사이도 아니고, 머리로 계산한 관계인 것도 아니나, 진정성 있는 관계도 아니다. 그렇기에 제리는 집에 돌아가는 시간을 줄였고, 결국 맥과이어 부부는 너무도 금방 별거하는 사이가 된다.
두 사람이 다시 함께할 수 있던 이유는 제리가 도로시를 향해 뛰어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영화 말미 제리의 대사에선 그의 성장이 끝나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다. 로드가 멋진 경기를 이끌어내자 택시를 잡고 무작정 도로시에게 달려갔음에도 제리의 입에선 곧바로 사랑한단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의 대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지금은…… 모르겠어. 다만 오늘 밤은 우리 회사가 성공한 날이야. 아주 크게 성공했어. 하지만 뭔가 부족했어." 한참 후에야, 그것도 '차가운 세상'과 '힘든 경쟁'을 먼저 언급한 후에야 제리는 비로소 도로시에게 사랑한단 말을 건넸다. 그러하므로 제리는 여전히 사랑을 더듬거리며 찾아가는 사람이다. 다만, 제리가 사람을 사람으로 대우하며, 자신의 가장 특별한 사람에겐, 특별한 애정을 건넬 수 있을 정도로 발전했단 것 역시 자명하다. 그렇기에 도로시는 그의 입에서 그리움이 먹먹하게 담긴 "안녕, "이라는 말이 흘러내린 순간 모든 걸 용서했다.
이렇듯 《제리 맥과이어》는 둘의 결합이 서류상의 부부가 아니라, 진정성 있는 부부로 거듭났다는 것을 보여주며 제리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하려 했다. 그러나 나는 제리의 선택이 궁극적으로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영화 제작진이 선택한 엔딩 장면이 유명 CEO의 한마디였기 때문이다. 제리가 로드와의 관계, 도로시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만으로 해피엔딩은 완성될 수 없다는 가정이 영화 뒤에 자리한다. DICKY FOX라는 명패가 똑똑히 새겨진 그가 말한다. "살아오면서 성공만큼 실패도 많이 했지만, 아내를 사랑했고 인생을 사랑했죠." 영화 내에 묘사된 제리 맥과이어의 기행과 업무상의 순간적 추락은 높은 확률로 '실패' 축에 속할 것이다. 다만 영화 이후 제리의 삶은 달라질 터다. 로드가 높은 금액으로 재계약하는 데에 성공했듯, 제리는 곧 뛰어난 기량의 소수의 스타 선수들과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며 커미션 금액으로 가족을 부양할 것이고, 레이는 어쩌면 야구선수가 될 것이다. 새아버지인 제리가 일궈둔 인맥이 도움이 될 건 뻔하다. 관객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자본주의적 성공신화에 대한 상상의 가능성을 열어둔 후, 디키 폭스(제러드 주심)가 영화 끝에서 관객에게 충고한다. "바라건대 여러분도 저처럼 살아가세요."
결국 영화는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우리는 일과 사람을 양분하지 않고 모두 누릴 수 있으리라 속삭인다. 제리처럼 무모할지라도 충동적인 용기를 낸다면 말이다. 굳이 사회 시스템 전반을 흔들지 않고도 획득할 수 있는 이 달콤함은 심지어 기업의 CEO가 되는 것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이러한 암시를 담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결국, 소시민들에게 “체제가 허용한 한도 내에서 자유를 생산하고 소비한다는 착각을 적극적으로 누리"며 "스스로가 속한 체제에 더욱 철저히 속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노력하게(이용화, 2018)"되는 모습을 종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일까. 《제리 맥과이어》를 모두 감상한 내 마음속에 남는 대사는 다름 아닌 이것이다. “그건 단지 업무 지침서일 뿐인데. (It was just a mission statement.)”
★★★☆
참고문헌
이용화 (2018). 필경사 바틀비에 나타난 호모 에코노미쿠스적 삶에 대한 멜빌의 고찰. 인문학 연구, 29, 135-160
-
- 이번 주 넷플릭스 추천작 - <푸른 눈의 사무라이>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번 주 넷플릭스 추천작은, 지난 11월 초에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인 <푸른 눈의 사무라이>. 장편 영화 각본 작업과 시리즈 작업으로 국내에도 제법 알려진 마이클 그린과 앰버 노이즈미가 제작과 각본을 맡은 작품이다. (여담이지만 마이클 그린은 넷플릭스와 최근 전속 계약을 체결해서 넷플릭스 오리지널 작품들을 작업 중이다.) 미국과 프랑스에서 제작된 작품이지만 그 배경은 일본을 소재로 하고 있고 사무라이 소재이기에, 성우진들은 랜달 파크, 마야 어스킨, 마시 오카 등의 아시안 계 배우들이 대거 출연했다. 총 8부작의 다소 짧은 호흡의 시리즈로, 제인 우를 비롯한 다섯 명의 감독이 번갈아가며 에피소드별로 연출을 맡았다.
일본의 에도 시대인 17세기, 혼혈 검사 '미즈'의 복수를 다룬다. 미즈는 일본인 어머니와 백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푸른 눈을 물려받았으나 눈빛의 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놀림과 차별을 당하고 '악마'라는 수식을 얻는다. 어머니와 일찍 헤어진 후, 야유를 피해 도망치다가 외딴 곳에 기거하는 한 맹인 도공과 함께 살며 검에 대한 기본기를 익힌다. 미즈의 목적은 자신과 어머니를 버리고 떠난 아버지, 그러니까 자신이 태어날 시기 즈음 일본에서 머물렀던 백인 유럽 남성을 모두 죽이는 것이다. <푸른 눈의 사무라이>는 미즈의 복수가 시작되는 지점부터 일단락되는 지점까지의 이야기를 다룬다.
출생의 비밀과 복수가 가미된 로드 트립 등 일반적인 사무라이 물이나 소위 말하는 '찬바라'(검이 부딪히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 장르가 갖춰야 할 기본이 잘 녹아있다. <푸른 눈의 사무라이>의 첫 번째 화에서는 '미즈'라는 검객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설명하며 절대 권력 아래 제멋대로 흘러가는 가공된 에도 시대의 어두운 면을 다루는데, 이 이야기의 진짜 시작은 이 첫 번째 화가 끝나면서 비롯된다. 앞서 말했듯 일반적인 사무라이 장르인 듯하지만 주인공 미즈가 남장 여자라는 신분이 말미에 드러나고, 그 이후부터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말하자면 뻔한 찬바라 장르가 주인공의 성별을 치환했다는 지극히 단순한 사실로 인해 '뻔하지 않은' 장르가 되어버린 것이다.
남성들이 군림하는 싸움의 세계에서 남장 여자라는 컨셉의 애니메이션은 <뮬란> 등을 통해 알려지고 전파된 바 있지만, <푸른 눈의 사무라이>는 단지 그 소재를 적극적으로 캐릭터에 입히는 것에 그치지 않아 주목할 만하다. 백인 남성과 일본인 여성 사이에 혼혈로 태어났고, 백인의 눈과 피부를 고스란히 물려받아 어디서든 차별받는 사람이 되었으며, 자신에게 입혀진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검기를 익힌다는 설정이 자칫 평범해질 수 있는 캐릭터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푸른 눈의 사무라이>의 두 제작자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의 아이를 바라보며 <푸른 눈의 사무라이>가 시작되었다고 밝힌 그들은, 누구도 튀어보이고 싶지 않고 튀는 자를 억압하려 노력한 답답하고 절망적인 시대를 다뤄보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미즈를 비롯한 이 시리즈의 주인공들은 자신을 억압하고 정형화하는 굴레를 벗어나고자 노력하고 있으며, 결국 그것을 스스로 이루게 된다. 갇힌 새장에서 날아가듯 자유를 찾아 각자의 사명과 신념을 향해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는 캐릭터들의 매력이 매 에피소드마다 흘러 넘친다.
입체적이고 주체적인 캐릭터성도 장점이지만, 무엇보다 8부작 내내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는 동시에 갖가지 변주를 꾀하는 연출이 가장 인상적이다. 2D/3D 하이브리드 기술로 제작되어, 3D를 사용하더라도 2D의 수작업을 연상케하는 애니메이션의 제작 방식은 이런 화려하고 회화 같은 분위기의 연출을 기술적으로 충분히 뒷받침해준다. 특히 5화의 인형극의 형식으로 설명되는 과거와 현재의 교차 플롯 연출은 압도적. 실화와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기 위해 전체 애니메이션 등급을 18세 이상으로 수위 상향을 꾀한 선택은 신의 한 수라고 할 만하다.
-
- 무한반복 도르마무를 하고 있는 남자의 사연은?
영화 드라마 모두 마사지하듯 시원하게 이야기로 풀어드립니다! 씨네마사지 ? 8월 19일 개봉예정 영화 팜스프링스 시사회 관람 리뷰입니다. 100만번째 하루를 반복하고있는 남자의 사연은? 믿고 보는 타임루프물!! 솔직한 감상평과 함께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시사회 초대는 영화 전문 플랫폼 [씨네랩]에서 제공해주셨습니다.
-
- 목숨을 건 탈출 게임 극한의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한 사투 (영화리뷰)[이스케이프 룸2]
영화에취한다 비지니스메일: allwey02@gmail.com
영화 : 이스케이프 룸2 노웨이 아웃
-
- 영화 <나는 조선사람입니다> 메인 예고편
한반도 식민과 분단의 역사 속에서 차별받고 외면당한 #재일조선인 하지만 끊임없이 #나를찾아서 비로소 #두개의조국 을 가슴에 품고 오롯한 #조선사람 으로 살기 위해 분노하되 증오를 선택하지 않는 삶 #나는 조선사람입니다.
-
- 영화 <인어공주> '신기한 세상' 예고편
자칭 인간 세상 전문가 #스커틀! 바다 위 신기한 세상을 더 알고 싶어? 전 세계를 사로잡을 디즈니 뮤지컬 시네마 [인어공주] 5월 24일 IMAX 대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