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깃발 아래(Under the Banner of Heaven)>(2022, FX)
<가재가 노래하는 곳(Where the Crawdads Sing>(2022, 올리비아 뉴먼)
<프레시(Fresh)>(2022, 미미 케이브)
* 위 작품들의 핵심 전개 포함
데이지 에드가 존스는 펜데믹 속에서 스타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연기에 관심을 두었던 그는 십 대 때 <Cold Feet>에 캐스팅 되며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후 HBO와 Fox, 연극 무대를 오가며 커리어를 쌓았다. 세상이 그를 주목하게 된 계기는, hulu 시리즈 <노멀 피플>. 상대역 폴 메스칼이 이후 <로스트 도터>나 <애프터썬> 등에 출연하며 인디/아트 필름 씬의 사랑을 받은 반면 데이지 에드가 존스는 메이저 방송사에 조금 더 머무르게 되었는데, 선택한 서사와 캐릭터에 어쩐지 겹치는 데가 있었다. 이 글에서는 그 특정한 작품들과, 에드가 존스의 영리한 연기가 빛을 더한 인물들을 다룬다.
<프레시>의 노아로 그를 처음 만났다. 특유의 솔직한 유쾌함, 단호함과 확실함이 인상적이었다. 현대적인 이미지와 능숙하고 몰입력이 뛰어난 퍼포먼스로 그를 기억했다. 다음번 스크린에서 만났을 때 에드가 존스는 몇십 년 전 분장을 하고 있었다. 한 작품에서는 살인 사건의 피해자, 다른 작품에서는 용의자였으나, 오히려 비슷한 위치에 있었다. 폐쇄적인 집단에서 대놓고 혹은 암묵적으로 낙인찍힌 여성들이었다.
60년대 작은 시골 마을, 숲 속 습지대 근처의 집에서 홀로 자란 카야는 마을 사람들에게 평생 따돌림을 당했고,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몰린다.(<가재가 노래하는 곳>) 80년대 유타 주, 이름있는 모르몬교도 가문의 막내아들과 결혼한 브렌다는 남편의 형제들에게 살해당한다.(<천국의 깃발 아래>) 현대 미국 어딘가, 우연히 만난 멋진 남자와 연애를 시작한 노아는 ‘인육 사업’을 하는 그의 집 지하실에 갇혀 ‘고기’로 팔릴 위기에 처한다.(<프레시>) 단편적으로 에드가 존스의 인물들을 설명했다. 카야와 브렌다는 아름다운/불경한 이방인 취급을 받았고, 카야와 노아는 데이트 상대였던 남성에게 배신당하고 위협당했다. 셋 모두 여성혐오적 폭력을 겪었다. 이 공통점의 원인은 외부에 있다.
그러나 세 사람이 상황을 인식하고 반응하는 방식 역시 닮아 있었다. 이들은 저항했다. 고통에 둔감한 것은 아니었다. 상처입고 괴로워하며 딛고 일어났다. 노아와 브렌다는 비슷한 처지의 여성들과 공감하고 연대했다. 카야와 노아는 끝내 제 손으로 프레데터를 처단했다. 브렌다는 결국 살해당하지만, 그의 행동은 타 여성들을 지켰고, 남편을 깨닫게 했고, 가해자들을 단죄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그들의 내면에서 나오는 에너지의 모양은 유사했고, 그 색은 각자 다르고 고유했다.
<천국의 깃발 아래> 첫 화, 시청자가 처음 목격하는 브렌다는 이미 죽어 있다. 피해자인 줄로만 알았던 그의 서사는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깊어진다. 주로 남편 엘렌의 회상을 통해 그려지나, 작품은 그를 외부의 해석이 들어간 대상보다는 의지와 감정을 지닌 한 사람으로 생생하게 다루기를 택한다. 주체적으로 모르몬교 원리주의자들에게 맞섰던 사람. 용기와 야망이 있고, 똑똑하고, 다정하고, 사교적이고, 센스있고, 판단과 대처 능력이 뛰어나고, 종교를 초월하는 올곧은 잣대를 지닌 여성. 에드가 존스는 엘렌이 알아채지 못했을 우울함이나 흔들림까지 기억의 단면에 녹여내는 데에 성공한다.
대부분의 시청자는 어떤 식으로든 브렌다와 데이지에게 반하고 말 것이다. 피범벅이 된 제이컵의 손을 조용히 닦아 주는 따스함과 사려깊음, 자신을 성적으로 착취하려는 교수를 도리어 이용하는 기지, ‘래퍼티가 와이프들’이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고 불평등한 관계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설득력과 용기… 배우의 집중력과 재치로 인해 더욱 돋보이는 장면들이다. 이미 한참 전부터 내 마음에 들어와 있었던 그에게 마침내/완전히 반했던 것은, 마지막 화, 브렌다가 생을 마감한 날의 순간들이 화면에 재생되었을 때였다.
남편의 형제들에게 살해 협박을 받는 상태,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브렌다의 뒷모습에는 불안한 망설임이 있다. 다이애나의 편지를 발견하자 온 몸이 가벼워진 듯 즐거워하고, 답장을 쓰며 생각에 잠긴다. 그 일련의 미묘한 심리 변화는 에드가 존스의 몸과 얼굴이 지닌 다채로운 결로 표현된다. 그리고 댄 래퍼티가 문을 두드린다. 건장한 두 남자에게 짓눌려 정신없이 울부짖지만, 틈이 보이자 기어가 아이가 있는 방문 앞을 막아서는 브렌다의 중심은 무너지지 않는다. 울며 설득하고 애원하다 어느 순간(아마도 저들이 자신을 죽이고 말 것임을 깨닫고), 가쁘게 몰아쉬던 숨을 서서히 다스린다. 저들의 멸망을 예언한다. 눈물과 피로 덮인 눈에 어린 빛은 성스럽고, 음성은 떨리지만 서늘하고 차분하며, 애절하고 풍부하다. 신적인 존재가 있다면 분명 그의 말을 들었을 것이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2022)
<천국의 깃발 아래>는 있었던 일을 따라가며 ‘피해자 브렌다 래퍼티’가 ‘누구’였고 무엇을 해냈는지 보여 주었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 또한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의 구성을 띠는 작품이다. 이번에 데이지 에드가 존스의 첫 포지션은 ‘용의자 캐서린 클라크’다. 영화는 에드가 존스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보안관을 피해 나무 뒤에 숨은 모습으로 처음 시각적 등장을 한 그는 이후 한동안 입을 열지 않는다. ‘표현’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힘껏 달아나고, 모터보트를 몰고, 물 속에서 헤엄치는 동작들에 묻어나는 것은 급박함보단 간절함. 그 정서는 이후 유치장이나 법정에서 고요하게 허공을 응시하거나 눈을 내리까는 제스처들과 연결되는데, 거기 말 못할 사연이 어려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마을 사람들의 시선으로 그를 “습지 소녀”로 응시하던 영화는, 오래 지나지 않아 그의 ‘목소리’를 돌려준다. 캐서린 클라크가 입을 열고 스스로를 ‘카야’로 칭하며, 이야기는 그의 입장에서 전개된다. 관객은 카야의 감정과 심리를 따라가며, 그가 무서워하면 공포를 느끼고, 상처 받으면 아파하고, 마음을 열면 함께 열게 된다. 그리고 무언가 숨기는 것이 있다면 감지하게 된다.
하나 고백하자면, 영화의 중반부 테이트와의 로맨스 서사가 이어지는 동안, 카야가 남성 중심 판타지의 영향을 받은 캐릭터는 아닌지 의심했다. 외딴 곳에 혼자 사는 ‘순수하고 순진한‘, 모든 것이 ’내‘가 처음인, 평소엔 티셔츠에 오버롤을 입다 ’나‘를 맞이할 때는 하늘하늘한 블라우스나 원피스를 입는, 전형적 뷰티 스탠다드를 착실히 갖고 있으면서 ‘야생적인’ 매력을 추가로 지닌, “다른 여자들과 달리 깃털을 보면 무슨 새인지 아는”(카야) 괴짜, 체이스의 대사를 빌리면 “somethin’ else”, “my marsh girl, nobody know, nobody sees, but me”. 의심은 곧 해소되었다. 카야는 입체성을 갖고 성장하는 인물, 앞선 묘사는 체이스가 왜곡한 “습지 소녀”일 따름이었다. 의심이 감동을 뒤덮지 않게 한 것은 에드가 존스의 진정성 있는 연기였다.
테이트가 떠난 후 카야는 체이스와 연애를 시작한다. 유해한 남성성의 표본인 그가 행하는 당연하고 일상적인 기만에서는 악의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두 남자와 카야의 관계를 묘사할 때 대놓고 대조적인 연출이 사용됨에도, 카야의 감정을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는 없었다. 그 차이를 설명하려면 구구절절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 테이트를 향한 카야의 감정적 제스처에는 주저가 섞였을지언정 늘 일종의 확신이 있었다. 경계심은 점차 사라지고, 편안한 애정과 설렘이 들어섰다. 에드가 존스의 연기가 더 돋보였던 부분은 테이트보다는 체이스를 향한 표현의 흐름에 있었다. 경계와 의문, 단순한 흥미에 점차 관심이 더해지는데, 거기엔 한동안 불안이 함께한다. 체이스의 무례에 대한 거부감과 그 역시 떠나리란 불신 사이에는, 스스로의 마음에 대한 불확신 또한 있다. 시간이 흐르고 신뢰가 쌓이며 점차 익숙한 애정과 즐거움이 싹트지만, 거기엔 무언가 결여되어 있다. 몇 년 만에 돌아온 테이트를 바라보는 눈빛에 그- 언어로 모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체이스에게 오래된 약혼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카야는 호흡곤란 증세를 보인다. 그 정서는 테이트가 돌아오지 않았을 때의 아픔과는 종류가 다르다. 테이트에게 느낀 배신감과 서운함이 그의 특정한 행동과 떠난 가족들에 대한 기억이 엮이며 발생된 것이라면, 체이스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는 인간 자체의 됨됨이에 대한 깨달음으로부터 오는- 상대의 진심, 함께한 기억 전부를 뒤집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테다. ‘그들’이 “I can explain!”이라고 한다면 이후의 말을 들어 볼 의향이 생기는가/아닌가의 차이라고 할 수도. 에드가 존스의 심리 묘사가 카야가 체이스에게 ‘여지’를 줄 일은 없으리란 것을 납득하게 했다.
체이스는 곧 단순한 ‘나쁜놈’이 아닌 범죄자로 밝혀지고, 카야는 ‘포식자’를 처리한다. 영화는 그 비밀을 엔딩에 이르러서야 암시하지만, 사실 에드가 존스의 연기에 있는 디테일을 통해 미리 짐작할 수 있었다. 출판사 미팅에서 ‘수컷을 잡아먹는 암컷’에 관한 대화를 하던 중 카야는, “자연에 선과 악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살아남기 위한 제스처이기도 하죠.”라고 진지하게 말한다. 초점을 잃고 떨리며 내리깔리는 눈동자는, 그 대사를 학문적 서술보다는 사회적 선언이자 개인적 고백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결론적으로 작품은 가부장적/폐쇄적 사회 내 가정 폭력, 데이트 폭력, 레이시즘, 슬럿 쉐임, 그리고 무엇보다 ‘아웃사이더’들을 세상이 손가락질하고 삭제하는 방식을 카야의 삶 안에 녹였다. 그 중심에는 카야와 테이트의 판타지적 로맨스보다는, 습지(“가재가 노래하는 곳”)에 대한 카야의 사랑이 있었다. 그는 분노와 아픔을 타인에게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대신 습지와 자연에게는 마음껏 뿜어냈다. 마구 달리거나, 모래밭에 쓰러지거나, 가슴에 있는 응어리를 전부 담아 갈라지도록 소리를 지르거나, 저 먼 곳을 아련하게 응시하는 등의 움직임이 대사보다 더 많은 것을 들려주기도 했다.
데이지 에드가 존스에겐 적당히 거리를 두다 그렇게 한순간 스스로를 내던져 버릴 수 있는 감각이, 용기와 무방비함이 있다. 첫인상은 가녀리고, 그 안에 독특한 장난기가 있다. 상처와 우울이 자리할 공간 역시 있다. 더 들어가면 단단한 핵이,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싸울 강한 면모가 있다. 습지에서 수영하고 낚시를 하는 등 스턴트를 직접 소화했다는 사실은 어쩐지 당연하게 다가온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2022)
낭만적이고 올드한 멋이 있는 작품, <가재가 노래하는 곳>. 같은 해에 공개된 <프레시>는 장르, 시대적 배경, 연출 스타일… 무엇하나 같지 않은 영화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 주인공의 삶을 중심으로 굴러간다면, <프레시>의 중심에는 상황과 사건이 있다. 그러나 카야와 노아가 겪은 폭력의 핵은 비슷한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특수한 주인공을 내세운 시대극인 <가재가 노래하는 곳>에 드러나는 폭력의 양상은 ‘평범’하고, <프레시>의 특수한 설정은 현실의 ‘평범’한 비정상성을 적나라하게 비유한다. ‘프레데터 남성을 피해 여성이 처단하고 그 과정에 남성 ’구원자‘가 끼어들기를 허용하지 않는’ 전개도 닮았다. 카야에게는 어떤 아련함, 사연 가득한 여백이 있어야만 했다. 영화는 그의 삶 전체를 다룬다. 카야가 사건을 프로세스하고, 타인과 교감하고, 행동을 취하는 방식은 과거의 경험과 엮여 설명된다. 반면 <프레시>는 개개인의 서사보다는 현 시점에 일어나는 사건을 중심에 둔다. 물론 노아에게도 과거사가 있고 영화에 잠깐 언급되기도 하지만- 중요하게 다루어지지는 않는다.
로맨틱 코미디로 시작해 이스케이핑 스릴러, 슬래셔까지 발을 걸치며 장르를 노련하게 바꾸는 영화. 이런 작품에서 배우는 매 장면 ‘기능을 수행’하면 되는가?(당연히 아니지만,) <프레시>의 감독과 배우들은 오히려 인물들의 개성을 돋보이게 하는 방식으로 영화의 매력을 살려 몰입을 이끌어냈다. 주연 배우들의 재치있고 깔끔한 연기는 세련되고 스타일리시한 연출과 최상의 조합을 이루었다. 데이지 에드가 존스는 다층적인 심리를 두르고 훌륭하게 균형을 잡았고, 세바스찬 스탠은 가면을 바꿔 쓰며 기꺼이 '야수beast’와 ‘광대’가 되었다. 그들이 변화하는 다이나믹에 따라 맞춘 호흡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 대한 완전한 이해로부터 온다. 이들은 모든 장르를 능숙하게 소화하며 ‘기가 막힌’ 연기를 선보이는 가운데, 관객이 메시지에 주목할 수 있도록 톤을 적절히 조절했다.
그 매력은 오프닝, ‘최악의 데이트’ 씬부터 드러난다. 인종차별에 성차별을 일삼고 스카프를 음식에 빠트리기까지 하는 남자. 노아는 예의는 차리는 와중 남자에게 휘둘리지 않고, 그가 ‘어떤 놈인지’ 파악한다. 대놓고 불쾌감을 표하지는 않으나, 기울어진 고개, 일그러진 눈썹과 입술, 애매한 효과음으로 적당히 거부감을 드러낸다. 배우의 자잘한 재치다. 아마 이 장면부터 시청자는 노아에게 공감과 호감을 모두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플롯도 플롯이지만, 노아와 스티브의 캐릭터를 여러모로 잘 구성했다는 감탄이 나왔는데, 배우들 본연의 매력을 바탕으로 한 듯 보이기도 했다. 노아는 꾸밈없고 솔직하다. 제 대사처럼 “f*** it”의 태도가 있다. “미국 악센트 데뷔”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자연스럽고 쿨한 말투. 스티브가 “동물을 먹지 않는다”고 하자 보이는 울상은 또 얼마나 ‘재미있는’지. ‘문제 없이’ 로맨틱한 만남을 가질 시기, 두 사람은 불편함 없이 매우 잘 어울린다. 이것이 바로 ‘케미스트리’. 세바스찬 스탠은 일부러 제 주위 허들을 낮추며 묘하게 상대의 경계를 늦추고, 데이지 에드가 존스는 노아답게 ‘당신의 마음에 들기 위한’ 제스처보다 ‘당신이 마음에 든다’는 표현을 건네며 순간을 온전하게 즐긴다. 그러나 스티브가 목적을 위한 다음 수를 두며, 노아의 얼굴 한구석엔 긴장이 들어선다. 노아는 내내 불안해했다. 자각하지 못하더라도 무의식중에 이미 ‘이게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에드가 존스는 이 ‘보편적 불안’의 정체를 이해하고 드라마 안에 녹였다.
서사를 완벽하게 가르는 오프닝 크레딧이 흐르고, 노아가 깨어난다. 어리둥절하지만 일상적인 상태로 있다가, 상황을 파악하고 패닉해 울먹이기까지. 에드가 존스는 노아의 심리 변화를 투명하게 드러낸다. 관객은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 볼’ 수 있다. 그는 단지 겁에 질려 있기만 한 것이 아니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선택에 대해 후회하며 자책하고 있다, 제 잘못이 아님에도. 두려움에 잠긴 목소리, 짐짓 가다듬고 또렷하게 내보내지만 고르지 못한 발성, 점점 일그러지는 눈가, 구석에 박힌 채 움츠러들어 굳은 등과 어깨, 가빠오는 숨… 이러한 디테일은 계산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와 작업한 감독들이 말하듯 ‘본능’이다. 관객의 집중력을 붙들고, 노아에게 이입하게 만드는 연기다.
노아에겐 단계-페이즈가 있다. 조금 뜬금없지만 매혹적이고 달콤한 연애를 하는 전반부, 완전히 좌절해 ‘피해자’로 스스로를 소비하게 하는 후반부-의 초반, 괴로움을 딛고 어둡고 냉정하게 계획을 세우는 중반, 그리고 다른 여성들과 힘을 합쳐 스티브를 처단하는 결말.(이렇게 이름 붙여도 된다면, 원치 않았던 ‘히어로’로의 불필요한 ‘성장’이라고 할까.) 그 사이 노아의 눈가에 드리워진 그늘에 일종의 자괴감은 있을지 몰라도, 스톡홀름 증후군에 빠지거나 감정을 교류한 페니를 두고 홀로 나간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가 구체적으로 등장하지 않아도, 우리는 노아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꾸밈없고, 유머러스하고, 독립적이고, 솔직하고, 영민하다. 일상 속에서 드러난 인간성은 위기에 처했을 때 형태를 달리해 나타난다. 따라서 그가 금방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탈출을 시도하는 전개는 설득력이 있다. 실패하고, 노아는 모르핀과 무기력한 증오에 취해 멍하고 살짝 무덤덤하기까지 한 상태가 된다. 홀로 있을 때나 스티브를 마주할 때보다는 같은 처지에 있는 옆방 페니와 대화할 때 날것의 감정을 드러내는데, 테이트나 습지에게 마음을 터놓는 카야가 떠오르기도 한다.
스티브가 자신을 “다른 여자와 다르”게 대했다는 것을 알고, 노아는 참을성 있게 탈출과 복수를 노린다. 섣불리 관심을 꾸며내기보단 떠보며, 저쪽에서 다가오게 한다. 스티브가 그랬듯 상대의 페이스에 맞춰 주며 서서히 자신의 페이스에 말려들게 하는 작업. 스티브가 원피스를 ‘선물’하며 마음에 드냐고 묻자, 삐딱하게 누워 뱉는 “It’s pink.”에 있는 틈과 톤, 스티브가 나가자 옅은 미소를 거두는 흐름. 심리를 적당히 숨기는 시니컬한 태도가 왠지 노아의 다음 시도는 성공하리란 예감을 하게 한다. 노아는 계획을 입 밖으로 내지 않지만, 시청자는 에드가 존스의 표정과 자세가 내보내는 아우라를 통해 ‘노아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짐작할 수 있다. (놀랍지 않은가.)
처음 저녁 ‘식사’에 초대되어 스티브의 ‘스토리’를 듣는 노아의 얼굴엔 혐오와 공포가 들어서나, 이 단어들이 주는 느낌처럼 전면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스티브는 모르고 관객은 알 수 있는 균형. ‘미트볼’을 입에 넣었을 때 노아의 혀가 감지하는 것은 씹는 음식의 맛이 아니다. 방금 전 스티브가 설명한- 여성을 극단적으로 상품화해 소유하길 원하는 “1퍼센트 중의 1퍼센트” 남성들에게 ‘씹히고 삼켜지는 맛’이다. 작품은 편집으로 이를 은유하는데, 에드가 존스의 낯빛에도 그 감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인육의 값에 대한 노아의 반응 “That’s crazy.”를 스티브는 ‘말도 안 되게 비싸다’는 뜻으로 넘겼으나, 관객은 노아의 억양과 고갯짓, 눈빛에서 ‘그런 짓을 벌이는 인간들이 있다니 미쳤다’라는 의미를 읽어 낼 수 있다.
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화장을 한 노아는 시니컬한 농담을 하며 웃는다. 마주 웃는 스티브의 얼굴엔 ‘순수한’ 즐거움이 있다. 그러나 노아의 웃음에는 자조, 경멸, 증오, 공포가 전부 섞여 있다. 스티브의 시선이 닿지 않는 순간-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며 긴장해 있는 눈빛과 나란히 보면, 무너지거나 폭발하지 않기 위해 부러 유머를 택한 것 같기도 하다. 노아는 화제를 돌리지 않고 ‘고기’를 소재로 하는 농담을 지속하는데, 처한 상황, 어쩔 수 없이 해야 했던 역겨운 행동을 외면하는 대신 직시하고 해결하려는 의지를 반영한 것이 아닐까.
<프레시>에는 노아와 스티브가 춤을 추는 장면이 두 번 나온다. 초반, 그들이 (적어도 노아의 입장에서는)평범한 데이트를 하고 있을 때, 그리고 노아가 스티브의 ‘포로’인 채로 ‘디너 데이트’를 할 때다. 전자의 끝에 스티브는 노아에게 (꿍꿍이가 있는) 여행을 제안했고, 후자의 끝에 노아는 스티브를 (해하기 위해) 침대로 이끈다. 이 의도적인 연출은 에드가 존스가 입은 정서로 완성된다. 온몸에 가득했던 순수하고 생생한 즐거움은 이제 없다. 그 동그랗고 생기 없는 눈에는 어떤 의지, 목적, 광기, 장난기마저 있다. 우여곡절 끝에 두 여성과 함께 탈출한 노아는, 만신창이가 된 스티브에게 총을 겨누고, 그가 자신에게 했던 대사, “Come on, give me a smile.”을 돌려준다. 그… 누아르스럽기도 한 씬에는 노아가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겪은 과정이 죄다 엉켜 있었다. 배우가 지닌 가능성 역시.

<프레시>(2022)
세 작품을 관람하는 동안 데이지 에드가 존스에게서, 노련한 커뮤니케이터, 영리하고 지혜로운 전사, 현명하고 열정적인 학자, 솔직하고 친근한 연인, 진실되고 정 많은 친구를 발견했다. 캐릭터의 포지션에 한계가 있었던 <천국의 깃발 아래>를 제하면- <프레시>에서도 <가재가 노래하는 곳>에서도 에드가 존스는, 작가/감독이 원하는 방향대로 인물을 소화함을 넘어- 온전히 제 언어로 체화하는 스토리텔러였다. 유사성이 있는 역할들을 맡았으나, 그 연기에는 무한한 깊이와 폭이 있었다, 스스로를 아주 놓아버릴 수 있는. 그건 앞서 언급했듯 하나의/복합적인 감정에 몸을 내던져 터트린다는 뜻이 될 수도, 타인에게 자신을 완전히 맡긴다는 뜻이 될 수도, 혹은 자신을 아주 내려놓아 차분해진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