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4-10-05 23:38:54
[BIFF 데일리] 이 여정에서 무엇이 보이나요?
영화 <그랜드 투어> 리뷰
DIRECTOR. 미겔 고메스(Miguel GOMES)
CAST. 크리스타 알파이아테(Crista ALFAIATE), 공살로 와딩턴(Gonçalo WADDINGTON) 외
PROGRAM NOTE.
1917년 양곤. 영국인 공무원 에드워드는 약혼녀 몰리와의 결혼을 앞두고 도망친다. 그래도 그와의 결혼을 결심한 몰리는 에드워드의 뒤를 쫓는다. 영화의 제목 <그랜드 투어>는 20세기 초에 유행했던, 인도에서 시작해 중국 또는 일본에서 끝나는 아시아 투어 여정에서 기인한다. 미겔 고메스는 2019년 그랜드 투어를 시작해 태국, 필리핀, 베트남, 일본 등에서 영상을 찍었다. 하지만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중국의 국경이 폐쇄되자, 감독은 스태프와 포르투갈로 귀국한다. 영화의 일부는 로마와 리스본의 스튜디오에서 촬영했다. 중국의 영상은 어떻게 확보했을까? 미겔 고메스는 중국 현지에 촬영팀을 꾸린 뒤, 포르투갈에서 원격으로 촬영을 감독했다. (시차 때문에 매일 밤 자정에 작업을 했다). <그랜드 투어>의 기적은 바로 여기에 있다. 두 연인의 여정을 카메라에 담으며 미겔 고메스는 자유롭고 총체적인 스펙터클을 창조한다. 영화에는 수확, 종교 축제, 오토바이 행렬 등 현대 아시아의 모습을 담은 매혹적인 아카이브 이미지, 그리고 주인공이 안개가 자욱한 강을 건너거나 매혹적인 밤의 숲을 가로지르는 모험 소설 속 상상의 아시아가 공존한다. 미겔 고메스는 <그랜드 투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영화에는 국가, 성별, 시대, 현실과 상상, 세상과 시네마 등 분리된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 거대한 투어가 있다. 나는 무엇보다 관객을 이 투어에 초대하고 싶다. 이것이 영화가 존재하는 이유라고 믿는다.” (서승희)

그랜드 투어는 본디 17세기 중반부터 유럽 상류층 자제들이 사회에 나가기 전 약 2-3년을 들여 신문물을 익히던 여행이다. 가정교사를 대동한 젊은 남성 귀족이 당시 유럽 문화의 최고 중심지였던 프랑스나 이탈리아로 향했다. 그러나 교통수단이 계속해서 발달되고 구시대의 계급 구조 또한 변화되면서, 그 의미가 점차 퇴색된다. 19세기가 되면 대륙횡단철도를 포함한 각종 철도, 수에즈 운하 등이 차차 개통되면서 <80일간의 세계 일주> 같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 배경이 된다.
20세기에는 제국주의의 광기가 시작되고, 이제 평범한 유럽인들도 식민지 관리를 위해 아시아로 향한다. 기이했던 이 시절은 문학의 역사에도 독특한 족적을 남긴다. 인도 벵골 지역에서 아편국 직원의 아들로 태어나, 추후 영국 본토 생활을 그만두고 근무지를 버마(미얀마)로 신청한 인도제국 경찰관, 조지 오웰은 <버마 시절>에 그 시절의 축축한 야만을 기록했다. 소설가이자 영화감독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베트남 사이공 공무원 아버지와 교사 어머니 사이에 태어나 ‘인도차이나 반도’ 곳곳을 다니며 살았고, 이는 <연인>으로 대표되는 그의 작품 세계에 계속해서 묻어난다.
2019년, 유럽의 한 영화감독 또한 행선지가 비슷한 여정을 꾸린다. 포르투갈 출신의 미겔 고메스 감독이 영화 <그랜드 투어> 촬영을 시작한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 에드워드는 1910년대 버마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이다. 7년째 약혼자 상태인 몰리와의 결혼을 코앞에 두고, 영국에서 찾아오는 예비 신부를 피하고 싶다며 갑작스러운 도주 길에 오른다. 범죄를 저질러도 저렇게 열심히 도망가지는 않을 것 같은데 저 도망은 대체 왜일까… 싶은 이 여정은 국경을 넘어 싱가포르, 태국, 필리핀, 베트남을 거쳐 일본, 중국에까지 이른다. 이 여정은 에드워드의 도주를 따르는 단단한 의지의 여성, 몰리의 행적을 통해 한 번 더 펼쳐진다. 즉 이 영화 스토리의 골자는 서로 겹쳐지기도 달라지기도 하는 두 개의 여정이다.

영화 속 여정들은 17세기의 ‘그랜드 투어’와도, 19세기의 ‘80일간의 세계 일주’와도 그다지 닮지 않았다. 20세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제국주의의 광기와도 닮지 않았다. 그 닮지 않은 모양새를 아무 설명도 필요 없이 미장센으로 구현한다. 꿈을 비롯한 일부 장면을 제외하고 모두 흑백인데, 그 안에서 각지의 아름다움이 빛난다.
20세기를 재현할 때에는 환상적이다. 흑백이라 더 어렴풋하여 아름다워 보인다. 희뿌연 안개 낀 정글을 가로지르는 기찻길, 거기서 들리는 새 소리, 당시 부유한 사람들이 모여들던 싱가포르의 호텔, 방콕의 파티 현장 등은 모두 동양인 보기에 ‘적절’하다. 20세기 동남아 내 왕족의 부를 고스란히 재현하여 노골적으로 비춰 보이는 오리엔탈리즘을 피하고, 보는 동양인 마음 복잡스럽게 만드는 일 없이, 단순하게 영화를 영화로서 아름답다 느낄 수 있는 선을 적절히 지킨다.

소설을 읽어주는 느낌이 드는 내레이션 또한 국경선을 넘길 때마다 그 나라의 언어와 목소리로 새로이 펼쳐진다. 화면에는 현재 그 도시의 광경이 드러난다. 일본에 도착한 에드워드가 식당에서 마주한 일을 내레이션으로 설명하는 동안, 오사카의 작은 식당에서 국수인지 우동인지를 먹는 손님들의 모습과 음식을 내는 사장님 모습을 보여주는 식이다. 이 안에서 우리는 20세기 이야기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관객석에 있는 나의 동시대성을 밟고 서게 된다.
<걸어서 세계 속으로>에라도 나올 것 같은 검박한 장면들이 겹쳐 흘러간다. 거위 알을 줍고 야자 열매 껍질을 벗기는 농부, 연꽃을 수확하여 팔기 좋게 단으로 묶는 여성, 오토바이와 차량이 줄지어 다니는 도로의 모습… 무엇보다도 감독이 꽤나 감흥을 깊이 받은 듯한, 동남아 각국의 독특하고 아름다운 전통 인형무가 여러 차례 나온다. 덕분에 관객은 20세기와 21세기를 골고루 오가며 독특한 여행을 한다. 그러는 동안 내내 궁금해진다. 그런데 에드워드는… 저 정도로 싫으면 차라리 결혼을 파하든지 대체 왜 저렇게까지 도망가는 것일까?

에드워드의 여정은 행선지를 못박아둔 여행이 아니라, 탈출이라는 목적만을 못박아둔 여행으로, 목적을 위시하여 행선지는 계속해서 추가된다. 이는 에드워드의 여정뿐 아니라 그 뒤를 따르는 몰리의 여정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두 사람은 길 위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관계를 맺는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이유 모를 이 선형적 여정의 끝으로 점차 달려간다.
그리고 여정의 끝에서, 관객은 감독이 준비한 선물을 맞이한다. 이 선물은 거울처럼 관객을 비추며, 관객에 따라 다른 답을 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도 들었고, 여정에서 ‘왜’에 집착하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뾰족한 물음표를 보고 팔짱 끼고 본 영화가, 팔짱 끼고 미간을 찌푸린 내 머리 위로 시원하게 내리치는 죽비 같았다.

모든 영화는 감독이 내놓는 상차림이다. 어떤 영화는 든든하고 친근한 밥상 같고, 또 어떤 영화는 조금 까다로운 미식의 세계 같다. 이 영화는 자기 실력에 자부심을 가진 요리사가 화려하게 꾸며 올린 테이블 같았다. 곱씹을수록 더 매력적인, 하나하나 더 뜯어 알고 싶은 그런 상차림. 영화를 본 직후보다 시간이 갈수록 더 만족스러운 상차림이었다.
10/04 20:00 영화의전당 하늘연극장 (상영코드 083)
10/09 13:30 CGV센텀시티 1관 (상영코드 457)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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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F 데일리] 그렇게 가족이 된다
감독 : 고란 스톨레프스키 Goran STOLEVSKI
출연 : Anamaria MARINCA, Alina SERBAN, Samson SELIM, Vladmir TINTOR, Mia MUSTAFA, Dzada SELIM, Sara KLIMOSKA, Rozafa CELAJ, Ajse USEINI
시놉시스 : 여기, 한 지붕 아래에 사는 이들이 있다. 애인이 시한부 선고를 받자 여자는 졸지에 어린 딸 둘을 양육하는 어머니가 된다. 그리고 방탕한 나이트 라이프를 즐기던 남자는 운명의 장난처럼 이들의 법적 보호자 역할을 맡게 된다.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 국제장편영화 부문 출품작으로 선정된 <가족의 탄생>은 제목 그대로 가족이 탄생하는 이야기, 피를 나눈 가족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새롭게 가족을 만드는’ 과정 속에서 연대하는 이야기이다. 영화 전체적으로 타이트한 화면비와 핸드헬드 촬영, 빠른 컷 편집과 사운드의 완급 조절이 눈에 띄는데 이러한 구성, 장치들을 통해 관객들로 하여금 인물들의 마음과 감정, 정서의 변화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다. 더불어 (감독 스스로 GV에서 언급한 것처럼) 대중에게 잘 알려진 바흐나 쇼팽의 음악을 사용함으로써 소수자, 이민자들을 다룬 여타의 작품들과는 다른 보편적이고 대중적인 결을 만들어 낸다.
25편의 단편과 3편의 장편 만에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을 수 있었다는 감독은 (마케도니아, 루마니아 쪽엔 경험 많은 배우가 없어) 연기 경험이 없는 다양한 출신의 배우들을 직접 찾고, 작업하는 과정에서 함께 부대끼며 ‘가족이 되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고 말했다. 배우, 스태프들과 동료 이상의 관계로 거듭나는 영화적 경험이 작품에, 그리하여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된 느낌. 그의 차기작 또한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또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상영 일정 : 10-05 11:00 영화의전당 시네마테크 / 10-06 16:00 영화의전당 소극장 / 10-10 17:00 CGV 센텀시티 7관
작성 : 민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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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즈 앤 올>, 비극적 운명에 저항하기
<본즈 앤 올>, 비극적 운명에 저항하기
살면서 가장 어려운 일은 자신의 운명을 거부감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욕망이라는 동기가 생성되기도 전에, 가치 판단이 불가한 순간에 불쑥 세상에 던져졌다. 성별, 가족, 재능, 재력, 외모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는 우리의 선택 밖에서 무작위적으로 선별된 것들이다. 그것이 만족스럽든, 불만족스럽든, 거룩한 운명이든, 하찮은 운명이든 한 번 정해진 것은 돌이킬 수 없다. 성별이 여자인 것이 못마땅하고, 폭력적이고 가난한 부모 밑에서 자란 것이 일생의 불행이며, 도무지 재능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평범함과 초라한 용모가 한이지만, 이 어쩔 수 없는 비가역성은 타인이 개입할 수 없는 개인의 문제에 국한된다. 우리는 타인의 운명에 대해, 그리고 타인은 나의 운명에 대해 결코 신경 쓰지 않는다. 그렇게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을 받아안고 어느새 그것의 의미와 가치를 온전히 인지하게 되는 순간, 충족되지 않은 것을 채우려는 욕망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모든 개인이 각자의 욕망을 추동하면서 내면은 얼룩지고, 관계는 균열이 나며, 사회는 복잡다단해진다. 얽히고설킨 욕망들이 충돌하는 가운데 운명에 굴복한 사람들은 종국에 사회에서 소외되고 만다.
그러나 진짜 비극은 물려받은 운명이 사회의 통념, 그리고 도덕과 윤리에 위배될 때다. 그 예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공감과 감정의 기능을 담당하는 전두엽의 기능이 선천적으로 퇴화한 사람들을 우리는 사이코패스라고 부른다.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고 두려움과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이코패스들은 그 특성 때문에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상대를 통제하고 실속만 얻으려 하며, 극단적인 경우에는 극악무도한 연쇄살인마가 되어 사회를 공포에 잠식시킨다. 여기에 자신의 죄를 인지하면서도 죄를 저지르고, 공감하지 않아도 공감하는 척 연기하는 소시오패스도 존재한다. 특기할 만한 점은 사이코패스보다 더 부정적인 것으로 알려진 소시오패스 성향의 사람들이 100명 중 4명꼴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만약 이런 성향의 사람들이 폭력에 노출된 채 자랐거나, 그러한 트라우마에 잠식되어 있다면, 이후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은 급격하게 커진다.
유전적인 요소와 환경적인 요소가 결합될 때, 그 위력은 개인의 통제권을 상회한다. 식인 성향을 운명으로 물려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본즈 앤 올>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정체성을 찾는 과정에 있는 소녀 ‘매런’과 그녀의 남자 친구 ‘리’는 식인이라는 끔찍한 본성을 운명으로 물려받은 뒤, 각각 어머니와 아버지의 식인 행위를 직접 목격한 자들이다. 두 사람은 끔찍한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어쩔 수 없이 사람을 죽이고 시체를 파먹는 잔혹한 행위를 해야만 한다.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는 인간 사회의 가장 강력한 법적 질서는 이들 앞에서 무용하고, 이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 불분명하다. 설사 사람을 먹는 ‘이터’들에게 막심한 책임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무리한 요구처럼 보인다.
인간을 먹어야 하는 기구한 운명을 가진 사람에게 가능한 최선의 윤리적 선택은 이미 죽은 사람을 먹는 것이다. 그러나 끼니를 해결할 때마다 죽은 사람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방관이다. 죽을 위기에 처한 사람이 그대로 죽기를 관망하는 것. 매런이 설리반을 처음 만났을 때 설리반이 하던 행동이다. 그러나 위의 두 가지 윤리적 카니발리즘은 아주 제한적이고 일시적이다. 그런 상황은 운 좋게 주어지는 것이지 마법처럼 매번 만들어낼 수 없다. 그러니까 결국 이터들은 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다. 사람을 죽이고 시체를 먹어야 한다.
이 논리적 정당성에 제어를 거는 인물은 매런이다. 그녀는 아버지의 보살핌 덕분에 오랫동안 식인을 하지 않았다. 그런 경험으로 말미암아 그녀는 굳이 사람을 먹을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말하자면 그녀는 운명을 정면으로 거스르려 하는 영웅이다. 그 반대편에 리와 설리반이 있다. 두 사람은 매런과 달리 식인이라는 본성에 순응하며 각자의 원칙에 따라 최선의 윤리적 카니발리즘을 행한다. 리는 인격이 떨어지는 미숙한 자들을 먹고, 설리반은 죽어가는 사람을 기다렸다가 마침내 의식을 잃으면 그 시체를 먹는다. 두 인물은 용인될 수 없는 일에 최소한의 윤리를 실현한다는 점에서 닮았지만, 여기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설리반은 ‘설리반’이라는 본명을 놔두고 자신을 ‘설리’라고 부른다. 달리 말하면, 그는 물려받은 설리반이라는 운명 대신 추후에 친구들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진 ‘설리’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규정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노년의 설리반에게 운명은 이미 희미해질 대로 희미해져 사실상 지워진 것과 다름없다. “우리 안에 있는 게 뭐든 먹여야 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 설리반은 식인이라는 운명을 자신의 자유 의지로 착각하고 사는 기만자다. 그는 죽어가는 사람을 관망하는 방식으로 식인을 하며 최소한의 윤리를 실현하지만, 여기에는 그러고 싶지 않은 감정에서 기인하는 탄식이나 죄책감 같은 맥락이 없다. 한 마디로 그는 이 운명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다. 그는 자기만의 원칙을 세워 놓고 그 안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자다. 그러니 그의 입장에서 운명을 거스르려고 분투하는 매런의 자유 의지는 그간의 자기 삶을 부정하는 사악한 행위인 셈이다. 설리반이 매런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연유 때문이다.
반대로 리는 자유 의지가 거세된 철저한 운명론자다. 그는 가혹한 운명의 진흙탕에서 허덕이다가 끝내 주저앉고 만 패배자다. “먹거나, 자살하거나, 너희 엄마처럼 갇혀 사는 거야.”라는 그의 대사는 타인을 먹는 것이 현재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변명을 무기력하게 드러낸다. 그래서 그의 내면에는 헤아릴 수 없는 죄책감과 분노, 슬픔, 안타까움, 공허함 등의 깊고도 다양한 감정들이 소용돌이처럼 뒤섞여 있다. 그런 점에서 리가 매런과 함께 설리반을 살해하는 장면은 다분히 상징적이다. 무력하게 운명에 순응하며 살던 리가 설리반이라는 운명의 기만자를 처단하는 것은 그가 매런처럼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살겠다는 의지를 적극적으로 표명하는 행위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내적 변화를 겪는 인물인 리는 비극적이게도 변화의 시발점에서 죽고 만다. 이때 흥미로운 것은 리의 죽음의 과정이 위에도 언급한 바 있는 그의 대사 “먹거나, 자살하거나, 너희 엄마처럼 갇혀 사는 거야.”를 하나씩 이행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타인을 먹으며 살던 리는 매런과 사랑에 빠지면서 운명에 대한 시각을 바꿔 어느 소박한 집에 갇혀 살듯 지내다가, 설리반의 칼에 찔린 후에는 자신을 먹어달라는, 사실상 자살과 다름없는 부탁을 매런에게 요구한다. 칼에 찔리긴 했지만, 당장 생을 마감할 정도의 치명상을 입은 것은 아닌 리가 의사에게 가지 않고 매런에게 자신을 먹어 달라고 부탁한 것은, 어쩌면 식인을 하지 않는 생활, 즉 운명을 거스르는 일을 그만 중단하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본다면 그가 매런에게 자신을 먹어 달라고 부탁한 것은 그녀에게 다시금 이터로서의 운명을 받아들이라고 암묵적으로 조언한 것이다. 언제까지나 숨어 지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매런은 리의 간곡한 부탁을 들어준다. 그녀는 그의 살아 있는 몸을 먹어 치운다. 그렇다면 이제 매런은 다시 식인 본성을 발현하며 살게 되는 걸까. 그러나 물려받은 운명론적 자아와 새롭게 확립해가는 자유의지론적 자아를 구분하지 않으려는 처절한 윤리 의식을 지녔던 매런이 쉽게 변화할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영화는 이후의 매런의 삶을 조금도 보여주지 않기에 그 어떤 것도 예측할 수 없다. 시간이 흘러 그녀가 제2의 설리반이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여기서 확실한 건 그녀의 삶이 비극적이라는 것뿐이다. 태어난 순간 그녀의 삶은 비극으로 점철될 운명이었다. 그렇다면 그런 그녀에게 우리는 어디까지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그녀는 좌우지간 사람을 죽이고 시체를 먹은 반인륜적 존재 아닌가. 이 어려운 문제는 우리 삶과 연계하여 적용하면 더욱 까다로워진다. 사이코패스 혹은 소시오패스에게 우리는 어디까지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그들이 저지른 이기적 행동, 차가운 태도, 타인을 통제하는 행위, 극단적으로는 범죄에 이르기까지. 행동의 결과는 분명하게 존재하지만, 그에 대한 책임은 분산될 수밖에 없는 미궁 같은 구조 속에서, 매런과 리처럼 사랑만으로 이 복잡함을 돌파할 수 있을까. 사랑은 분명 초월적인 면이 있고 무엇보다 숭고하고 아름답지만 현실적이지는 않다. 적어도 사랑이 이에 대한 해결책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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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셋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안녕하세요! 영화/OTT 전문 큐레이션 웹 매거진 씨네랩입니다.
지난 토요일과 일요일은 날씨가 정말 좋았는데요, 다들 즐거운 시간 보내셨나요?
그럼 오늘은 3월 셋째 주 주말 동안의 박스오피스 분석 결과를 공유해 드리겠습니다.
시작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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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주말 박스오피스
3월 셋째 주 국내 주말 박스오피스 순위
3월 셋째 주 주말에는 총 112만 2천여 명의 관객이 극장을 찾았는데요, 한 주간 총 163만 9천 명의 관객이 다녀가 지난주(175만 2천 명) 대비 93% 수준의 관객 수를 기록했습니다. 신작들의 개봉에도 불구하고 지난주에 이어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이 2주 연속 주말 박스오피스 정상을 차지하였으며, <더 퍼스트 슬램덩크> 역시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박스오피스 2위를 지켜냈습니다. 뒤를 이어서 지난 15일 개봉한 김다미, 전소니 주연의 <소울메이트>가 3위에, DC 유니버스의 신작 <샤잠! 신들의 분노>가 4위, <귀멸의 칼날: 상현집결, 그리고 도공 마을로>가 5위에 올랐습니다. 이로써 주말 박스오피스 1위~5위 중 세 편이 모두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의 차지가 되어 극장가 앨본 애니 열풍의 위력을 다시 한번 증명하였습니다.
1. <스즈메의 문단속>(-)
동일본 대지진을 소재로 고등학생 스즈메가 재난을 부르는 문을 닫기 위해 분투하는 내용을 담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스즈메의 문단속>이 개봉 이후 2주 연속 주말 박스오피스 1위를 지켜내고 있습니다. 주말 동안 1456개 스크린에서 71만 2천여 명의 관객을 불러 모으며 누적 관객은 195만 1106명을 기록하였는데요, 개봉 첫 주 주말 관객수였던 69만 4251명보다 높은 결과치입니다. 이로써 <스즈메의 문단속>은 흥행 독주를 이어갈 뿐만 아니라 예상보다 빠른 흥행 속도로 개봉 12일 만에 200만 관객 돌파를 목전에 두게 되었습니다.
2. <더 퍼스트 슬램덩크>(-)
지난주에 이어 2주 연속 주말 박스오피스 2위를 차지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 역시 <스즈메의 문단속>과 마찬가지로 지난주보다 8.0%가량 증가한 관객 수를 기록하였습니다. 주말 관객 10만 7515명으로 누적 관객 수는 415만 5087명을 돌파하였는데요, 일본 역대 애니메이션의 국내 흥행 순위 1위의 기록을 갈아치운 뒤에도 멈추지 않는 흥행 질주에 과연 500만 관객 유치까지 가능할 지에 귀추가 모아지고 있습니다.
3. <소울메이트>(NEW)
지난 15일 개봉한 <소울메이트>는 개봉 첫 주말 관객 7만 2662명, 누적 관객 11만 8661명을 동원하며 박스오피스 3위로 데뷔하였습니다. 영화 애호가들로부터 사랑받은 중국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2017)를 리메이크한 작품으로 배우들의 호연과 섬세한 연출에 힘입어 ‘성공적인 리메이크’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한창 흥행 열풍에 탑승한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들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4. <샤잠! 신들의 분노>(NEW)
청소년 히어로를 앞세운 성장 히어로물이자 DC 유니버스의 신작인 <샤잠! 신들의 분노> 역시 개봉 첫 주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들의 강세에 밀려 주말 관객 수 4만 1661명, 누적 관객 6만 3135명으로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2019년 개봉한 전편 <샤잠!>과 비교하였을 때는 대동소이한 성적으로, 북미 박스오피스에서는 1위로 데뷔해 국내에서 유난히 주목받지 못하는 느낌이 크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5. <귀멸의 칼날: 상현집결: 그리고 도공 마을로>(⬇︎1)
개봉 이후 팬들을 대상으로 꾸준히 관객몰이 중에 있는 <귀멸의 칼날: 상현집결, 그리고 도공 마을로>는 이번 주말 3만 1405명의 관객을 모으며 박스오피스 순위 5위를 기록, 누적 관객 수는 49만 4853명을 달성하였습니다.
북미 주말 박스 오피스
<북미 박스오피스 TOP 5>
1. <샤잠! 신들의 문노> 3,050만 달러 (누적 3,050만 달러)
2. <스크림 6> 1,750만 달러 (누적 7,602만 달러)
3. <크리드 3> 1,537만 달러 (누적 1억 2,770만 달러)
4. <65> 580만 달러 (누적 2,242만 달러)
5.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매니아> 407만 달러 (누적 2억 583만 달러)
국내에서는 외면받고 있는 <샤잠! 신들의 분노>가 북미에서는 개봉 첫 주 오프닝 수익 약 3050만 달러(한화 약 398억 원)를 기록하며 주말 박스오피스 1위를 달성하였습니다. 그러나 개봉수익은 거의 최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성적으로, 2019년 개봉했던 1편의 수익보다 44%가량 감소할 전망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지난주 1위와 2위를 기록했던 <스크림 6>와 <크리드 3>는 샤잠에 밀려 이번 주말 각각 2위와 3위로 한 계단씩 떨어지게 되었는데요, 두 작품 모두 누적 매출액 7600만 달러, 1억 2770만 달러로 시리즈 내 최고 수익을 거둔 작품으로 거듭날 예정일 정도로 좋은 성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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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픽의 3월 셋째 주 박스오피스 분석 콘텐츠는 여기까지입니다.
이번 주도 건강한 한 주가 되기를 바라며 씨네픽은 다음 주 월요일 이 시간에
또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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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 / Farewell my concubine
/ 줄거리 /
매춘부인 엄마에게 버림받고 경극단에서 생활하게 된 두지.
두지는 경극단에서 혹독한 훈련과정을 수행한다.
그러면서 동료인 시투와 돈독한 사이가 되었고,
결국 시투에게 남몰래 사랑의 감정을 품게 된다.
고된 노력의 결과로 그들은 유명한 경극배우로 거듭나게 된다.
그리고,
사랑하는 시투와 사랑하는 경극을 평생하고픈 두지는
시투가 주샨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상처를 받게 되고
이 계기를 통해 그들의 사이는 점점 갈라진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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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낀점 /
한 사람의 인생을 통해 한 국가의 역사를 안다는 것이 이런것일까?
감정과 사회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가는 두지의 인생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특히, 두지가 시투와 경극에 느끼는 사랑의 감정과 그것을 갈망하는 듯한
모습은 사랑의 결핍속에서 자라난 두지의 사랑받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신경전은 있었지만 곁에서 두지를 보살펴 주던 주샨,
두지에게 둘 도 없는 친구였던 시투가 떠난
마지막씬에서
두지의 모습이 마치 패왕의 마지막 모습과 겹쳐보였다.
패왕이 배신한 우희, 그 우희가 진정한 패왕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난 사실 이 영화의 영제를 보고 정말 놀랐다.
' Farewell my concubine '
나의 첩에게 보내는 마지막(작별) 인사..
시투가 두지에게 고하는 마지막 인사이자
고달픈 삶을 살던 두지를 위로해주는 말인것 같다.
그리고 뭐랄까 진짜 그냥 영화 내용 그대로를 압축해서
잘 표현한 것 같다.
+
이 영화를 통해 장국영이라는 배우에게 빠지게 된 것 같다.
내가 근래에 본 영화배우들 중에 연기를 가장 잘하는 것 같다.
아니 어쩜 그렇게 연기를 하지?
장국영이 영화에서 눈물 한방울씩 뚝뚝 떨어트릴때 내 눈물도 떨어질뻔한게
한두번이 아니다.
이게 막 엄청 슬픈 상황이 아닌데도 그냥 눈물이 울컥했다.
진짜 우리나라 신파영화 처럼 감정을 강요하는게 아니라
내가 먼저 그 감정에 동요되었달까.
동성간의 사랑을 그린 비슷한 느낌의 서양권 영화를 볼때랑은 다른 감정이었다.
그리고, 그 아역도 어쩜 그렇게 연기를 잘하지..?
+
이걸 보기전에 중국의 근현대사를 잘 알고 갔더라면 좋았을걸.
-
- 춤을 춘다, 춤을 춘다,
!!!!!스포일러 주의!!!!!
"아무도 없는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면 소리가 날까?"
파랑의 우울에 관해서 써볼까 한다. 드라마가 끝나고 난 뒤, 나는 파랑이가 별이라고 생각을 했다. 파란 별이 표면온도가 가장 높다는 말도 있으니까. 드러내지 않고 있다가 마지막에서야 자신을 봐달라는 식으로 밝게 빛나다가 폭발해서 사라져버린 별.
파랑이가 연극으로 선택한 작품은 신파랑이 보내는 마지막 신호였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꺼져가는 태양 또한 파랑이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로봇 세 명은 파랑이가 기다리고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만약 마지막 인류학자가 정말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나는 태양이 왜 꺼져가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그 질문을 했다면 아마 이런 대답이 돌아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더 이상 자신의 춤이 닿으리라 생각하지 못하겠고, 더 이상 자신의 춤을 봐줄 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 그의 춤이 닿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연극을 준비하면서 느꼈을 것이다. 아무도 그의 결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아무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파랑이가 마지막으로 극단의 일원들을 만나고 다녔을 때, 닿지 않은 것이 아닌 머리카락을 태워 억지로 끊어버린 것이었단 걸 알았을 때 파랑이의 눈빛은 … 정말 깊고 어디론가 빠져버릴 것 같았다.
파랑이의 집 또한 나에게는 굉장히 인상 깊었다. 야외에는 어지럽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어지럽게 뒹굴고 있었다. 하지만 집 안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면 텅 비어있다. 나는 그것이 파랑이의 내면 같다고 생각했다. 파랑이의 우울한 파랑으로 가득 찬 것 같이, 퍼런 색의 소주병으로만 가득 차 있다.
파랑이는 모든 사진에서 항상 웃고 다녔다고 했다. 사실 나는 파랑이가 왜 계속 웃고 다녔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속은 너무 고칠 수 없이 망가져 겉옷이라고 주섬주섬 꺼내 입었던 것일까? 돈도 없고 망가져서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약도 사지 못하고 근육통약으로 어영부영 상처를 덮었다. 그 사이사이 빈틈으로 우울의 파랑이 물 밀려오듯이 밀려왔다. 결국에는 죽을 사람이란 걸 알았다. 하지만 드라마가 끝난 후 적어도 나에게는 닿았다고 말하고싶다.
우리는 각자 닿을 일 없이, 각자의 궤도를 떠도는 별들이다.
별과 별 사이 수억 광년의 거리.
속삭이듯 말해서는 평생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난 온 몸으로 춤을 춘다.
그 별의 당신에게는 아직 판독 불가의 전파에 불과하겠지만,
언젠간 당신의 안테나에 닿길 바라며,
춤을 춘다, 춤을 춘다, 춤을 춘다.
- 파랑이의 연출 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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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에 대한 철학과 제약회사의 음모는 어울리지 않아, 영화 <올드>
해골과 사람의 다리가 반반으로 처리된 이 기이한 포스터를 보고 검색 한 번을 안해봤을 사람이 어디있을까? 그리고 해변에서 순식간에 나이가 들어버린다는 설정은 사람들로 하여금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기대감을 가지고 본 영화 <올드>. 하지만 기대에 무색하게 안타까움이 짙었던 작품이었다.
영화 <올드> 시놉시스평범한 가족여행이 시작된다. 아내는 약국에서 경품에 당첨돼서 리조트 숙박권을 얻게 된다. 가족들은 리조트 측의 배려로 다른 팀과 함께 리조트에서 벗어난 외딴 곳에 있는 아름다운 해변으로 휴양을 떠난다. 하지만 그 해변은 한 번 들어가면 다시 나올 수 없는 그런 곳이었다. 해변을 나가려고 시도를 할 때마다 정신을 잃고 다시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기절한 채로 발견된다. 그리고 6살, 11살이던 아이들이 갑작스럽게 성장하여 성인이 되고, 아이를 갖고, 출산을 경험하기에 이른다. 아름답지만 이상한 해변에서의 시간 30분이 원래 세계의 1년과 같다는 것을 주인공들은 뒤늦게 깨닫고 이 곳을 벗어나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이 이후로는 영화 <올드>의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혼란스러운 감정을 잘 표현하다
영화를 다 보고 혼란스러운 감정이 들었지만 그래도 인상적인 부분은 카메라 무빙이 굉장히 좋았다는 점이다. 친구와 함께 이 영화는 도대체 무엇인가..? 하며 산책을 하면서도 둘다 동의를 했던 부분이 카메라 구도를 정말 잘 잡았다는 것이었다. 등장인물들의 혼란스러운 감정이 잘 느껴지도록, 급박하고 위급한 상황임이 잘 드러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흔들리는 컷들을 배치하단던지 수평이 맞지 않는 구도를 취한다던지 시각적으로 불편하게끔 만들어서 등장인물의 혼란스러움과 암담함을 굉장히 잘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방법이 매번 쓰이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는 관찰자적인 시점으로 그들을 바라보게 만드는데 결정적인 순간이 그들의 감정에 확 몰입할 수 있도록 밀당을 잘해서 더더욱 그 혼란스러움을 배가 되게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시간에 대한 철학을 스릴러로 풀어낸 것인줄 알았지
제목이 올드(old)였기에 늙어감에 대해, 죽음에 대해, 삶에 대해 감독의 철학적인 시각을 다룬 작품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M. 나이트 샤말란의 특징답게 이러한 교훈을 스릴러라는 소재를 잘 활용해서 굉장히 잘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했었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느낀 감정은 이것이 스릴러가 맞던가..? 그냥 ‘30분이 1년이다’라는 설정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 아닌가.. 도대체 어디가 스릴러이지..? 당황스러웠다.
전작 23아이덴티티에서 학대에 대한 아픔을 다중인격이라는 소재를 통해 풀어내서 그 연결고리가 굉자이 이질적이면서도 설명이 가능했기에, 그리고 스릴러의 요소가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있어서 쫄깃한 맛도 있었다. 하지만 올드는 아니었다. 스릴러의 요소가 부각이 되지도, 그렇다고 시간이 빨리간다는 새로운 소재도, 이를 통해 풀어내고자 했던 시간에 대한 철학도 제대로 풀어내질 못했다. 다 하다가 만 느낌이었다. 그저 그래서 영화의 주제에 대한 큰 울림을 받지는 못했다.
이렇게 급발진 하기 있기?
영화에 실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후반부에 너무나도 다이나믹하게 급발진을 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 가족들은 왜 아름답지만 무서운 저 해변으로 끌려갔으며 호텔 지배인은 왜 그들을 보내고 감시를 하는가? 이에 대한 해답을 그저 신약 개발을 위한 제약회사의 잘못된 선택!!이라는 사회 경제적 음모로 퉁쳐버린다. 그래서 서로 다른 주제의 영화를 갑자기 합쳐버린 느낌마저 들었다.
영화 중후반까지 열심히 끌고가던 시간에 대한 탐색적인 자세가 갑자기 제약회사의 음모로 치환이 돼서 굉장히 시시한 느낌이 들었다. 차라리 원인과 결과를 설명해주지 않고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인간이 느끼는 공포심에 대해 집중하고 그 변화에 초첨을 맞춰나갔더라면 이렇게까지 큰 실망을 안겨주진 않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영화였다.
영화 <올드>는 시간에 대한 철학적 사유가 내재된 작품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던, 어찌보면 포장을 참 잘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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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블라인드 후기
영화직관하는 남자 영직남의 “블라인드”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없어요~#로맨스, #멜로, #블라인드, #유럽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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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블러드 레드 스카이> 공식 예고편
[2021년 7월 23일, 넷플릭스 공개]
의문의 병을 앓는 여자.
치료를 위해 어린 아들가 밤 비행기에 오른다.
이륙 후, 비행기가 테러리스트들에게 점령당하자 여인은 생존 싸움을 시작한다.
그간 힘겹게 숨겨온 어둠의 힘을 뿜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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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파리의 별빛 아래> 메인 예고편
"밤하늘을 수놓은 별빛만큼
수많은 이들이 홀로 어둠을 견디고 있단다"
홈리스와 난민 소년, 소외된 그들이 만든 파리의 기적!남모를 상처와 사연으로 홈리스의 삶을 살게 된 '크리스틴'
세상의 외면과 냉대 속에서 삶을 이어가던 크리스틴 앞에
머물 곳도 엄마도 잃은 아프리카 난민 소년 '술리'가 나타난다.
서로 말도 통하지 않지만 크리스틴은 술리의 엄마를 찾기 위해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을 견디며 자신이 꾸려 온 모든 걸 던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