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onymoushilarious2023-06-26 11:30:24
유럽영화의 단점
넷플릭스 'W살인사건' 리뷰
가끔 유럽영화를 보는 일을 곧잘 한다. 이번에 본 영화는 그저 새로운 추리가 끌려서 봤을 뿐이었는데 그닥 좋은 선택은 아니었던 듯하다. 개연성이 없는 것은 아닌데 개연성이 모두 의도되었다는 것이 너무 잘 느껴진다. 그래서 매력이 반감된다.
1. 낯선 언어의 공격
이 영화는 모든 대사가 폴란드어이다. 그래서 단점까지는 아닌데 조금 낯설었다. 언어란 참 감정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는데 폴란드어는 어떤 intonation으로 감정을 표현하는지를 몰라서 당황하기도 했다. 결국 표정으로만 이해해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대로 듣는 재미는 있었다. 배우의 표정에 집중할 수 있었고, 악인의 표정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모든 일엔 장단이 있는 것이고 모든 일이 내게 불리하지만은 않은 것이다.
2. 개연성이 있긴 한데, 너무 의도성이 짙다
몇몇 유럽 영화들을 보면서 느꼈던 지점들이 있는데, 개연성이 있든 없든 모든 사건들이 의도성이 많이 보인다. 액션영화도, 추리물도 긴장감이 중요하고, 관객들에게 이 사건이 왜 있어야 하는지 납득시켜야 하는데, 유럽 영화들을 보고 있으며 감독이 나에게 말을 건네는 것 같다.
"이건 영화니까, 이 정도의 사건이 등장해줘야 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맥락이 조금 이상한 거 같아도 이해해줘. 영화적 허용 같은 거 있잖아."
라고 말이다.
예전에 영화 '킬러 인 브뤼셀'에서도 느낀 지점인데 관객들에게 이해시키는 과정 없는 모든 사건들이 그저 배치만 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개연성이 중요한 나에게는 이 총질을 하는 이유가 뭔지 납득이 안되어 재미가 정말 없었다. 그런데 이 'w살인사건'과 같은 영화에서 또 그런 걸 느꼈다. 관객이 우선이 아닌, 감독의 의도가 우선이 된 것 같은 느낌, 그래서 관객으로서 이해되지 않아 이잉?한 느낌.
3. 여러분도 범인이 누군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추리물을 보다 보면, 범인이 그냥 보일때가 있다. 배경이 시골마을인만큼 나오는 인물들도 많지 않으니 다들 누가 범인일지 예상이 가기도 하는데 이 영화는 그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주인공이 남편을 빨리 좀 버렸으면 했는데, 감독은 남편 캐릭터를 주인공의 성장으로 엮고 싶었던 듯하다. 그닥 좋은 선택은 아니었던 것 같은 게, 그저 답답했기 때문이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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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판타스틱 Mr. 폭스>
영화 〈판타스틱 Mr. 폭스〉
2009, 미국/영국, 87min, 웨스 앤더슨(Wes Anderson)
* 스포에 해당하는 내용이 있으니, 영화 감상 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노골적이지 않은, 설득적이지 않은 영화였고, 그래서 좋았다. 보통 하나의 이야기를 시작할때, 의식하지않더라도 자신도 모르게 이야기가 전달할 수 있는, 품고있는 교훈에 대해서, 그리고 의미에 대해서 자꾸만 생각하게된다.
이것은 물론 잘못된 것은 아니고, 일면 긍정적인 효과도 물론 있지만, 내가 생각하기엔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구성해가는 작가의 입장에선 오히려 이것들에, 즉 교훈과 의미들에 대해 과도히 집착하게 되고, 그들을 뒷바침하기위한, 또 그들에 적합한 구성들로만 서사를 채워나가게 되는 경우도 많이 생기는 것 같다. 그렇게 된 이야기들은 때때로 너무나 폭력적이다. 실제로 피가 난무하거나, 격한 말투를 사용해서 폭력적인 것이 아니라, 이야기 이면의 작가가 하나의 생각, 하나의 아이디어를 너무나 일방적이고, 단편적으로, 계속해서 피력하기 때문에 폭력적이다. 관객은 이러한 이야기를 경험하면서, 자신 나름의 여러 생각들을 전개해볼 수 있는 기회를 잃게된다. 왜냐면 작가가 감독이, 그들에게 다른 생각과 판단을 해볼 수 있는 틈을 전혀 내주지않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이 점에 있어선 매우 타영화들과 비교해보았을때, 독보적으로 자유롭다. 하나의 메세지, 주장, 교훈을 관객에게 일방적으로 설득하기 위해 모든 런닝타임과 인물, 소재, 상황과 사건들을 소비하지 않는다. 이 깨달음은 현재 내가 진행하고 있는 졸업 애니메이션의 이야기 구성과정에서도 스스로 간과하였고, 또 매몰되었던 오류를 재발견해볼 수 있는 기회로도 작용하여서 크게 배움을 얻을 수 있었다.
<판타스틱 Mr. 폭스>에서 이 폭스는 마치 웨스 앤더슨 같다고 생각되기도 했다. 왜냐면 그의 영화 속 이미지들과 사건의 전개를 보여주는 방식들이 정말 폭스가 말한 판타스틱, 즉 특별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당연 시각적인 효과와 구성이며, 그와 더불어 카메라의 움직임도 너무나 배울 수 있는 점이 많았다.
가장 먼저 시각적으로 이 영화에선 매우 신중한 프레임과 화면 구성이 인상깊다. 상투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이미지의 향연’, ‘컬러의 향연’이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정도로, 예술적인, 감각적인 다양성을 80분 내내 자극한다. 어떤 프레임에 영상을 멈춰세워도, 모든 장면들이 예술적이다. 이 사실은 조금은 충격적일 정도였다. 물론 영화를 보다보면 아름다운 장면들을 많이 마주하게된다. 특히 나에게 인생영화라 할 수 있는 영화는 무엇보다도 <블레이드 러너 2049>, <컨택트>와 같은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인데, 그 가장 큰 이유는 이 영화 또한 어떤 프레임에서 화면을 멈춰세워도 모두 예술작품과 같은 견고한 아름다움을 느끼게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유형의 시각적 효과를 줄곧 보여주는 영화는 사실 조금은 드물다고 생각되고, 그런 면에서 이 <판타스틱 Mr. 폭스>는 앞서 언급했던 영화만큼이나 끈질길만큼 정교한 화면을 보여준다고 생각되었다. 즉 수많은 화면들이 크고 작은 소재들과 다양한 컬러감들의 조합으로 굉장히 지루하지 않으면서도 철저한 균형을 보여주고 있었고, 수평과 수직으로 거의 대부분 화면이 구성되긴 하지만 그 속에서도 계속 다양한 깊이감을 매우 정면인 방향에서 드러냄으로서 단순히 지루한 평면으로 느껴지지 않고 확실한 직선적 공간감이 느껴진다. 물론 사건의 진행상황을 풀어내고 조망하는데 있어서, 인물들을 따라가는 단 하나의 방식만이 아니라, 아이콘적인 시각효과를 활용하거나, 미세즈 폭스가 그리는 그림을 이용하거나, 또 완전한 단면을 드러내면서 전체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는 등 다양한 방식들을 활용함으로서 관객이 진행되는 사건들을 좀 더 다른 시각적 소재들을 통해 재조명, 재인식할 수 있는 기회 및 환기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도 매우 인상적이다.
다음으로는 카메라의 움직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이 영화의 카메라는 역시 화면 구성과 비슷하게 매우 수직, 수평적인 움직임을 보여준다. 특히 완전한 수평으로 인물들 혹은 사건의 발생 등을 트랙킹하는 모습이 자주 드러난다. 이런 움직임은 물론 장단점을 지닌다. 강렬한 역동성을 강조해내기는 다소 부족함이 있을 것이고, 안정적으로 영화 속 세계를 조망하기에는 상당히 적합할 것이다. 결국 이것은 선택의 문제라 생각되고, 이런 조금은 차분한 카메라 무빙이 앞서 말한 아름답고 구성적인 프레이밍을 시각적으로 확실히 전달하는데 있어서, 난 매우 적합했다고 생각하며, 또 전에 언급한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도 이런 수직, 수평이 강조된 픽스된 화면과 차분한 카메라 움직임을 선택함으로서, 이 영화와 같은 아름답고 견고한 화면구성을 매우 잘 강조하고 있다.
이런 움직임의 구체적인 효과들도 물론 배울만한 점이지만, 내가 가장 크게 깨달음을 얻었던 부분은 사실 움직임의 이유에 대해 진심어리게 생각해볼 수 있었다는 데에 있었다. 즉 사실 영화를 보면서, 때때론 카메라의 움직임, 화면의 전환 등에 대해 이유를 알기가 어려운 경우가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이 스톱모션 영화는 정말 중요한 순간에, 매우 이유있는 방식으로 카메라 움직임을 드러낸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특정 인물에게 클로즈업을 하는 순간, 다른 방식으로 화면을 보여주는 순간, 또 비슷한 상황이나 인물들이 내뱉는 동일한 키워드들을 통해 장면을 연결 및 전환하는 순간 등 카메라의 움직임과 누구를 어떻게 화면에 담아낼 것인지에 대한 모든 타이밍과 방법들이 매우 타당하게 느껴지고, 이유없는 영화 속 순간들이 거의 부재한 듯이 느껴졌다. 이 점 역시 앞으로 어떠한 종류의 영상을 제작한다하더라도 매우 크게 배움을 얻어야하는 부분이라고 생각되었다.
처음 문단에서 말했었듯, 이 영화는 특정한 메세지나 교훈을 단정적으로 강요하지 않고있고, 그에 따라 나 역시 많은 가능성과 호기심을 가지고 각 영화 속의 인물들과 그들의 언행, 취향 등을 자유롭게 생각해볼 수 있었다. 맹목적인 하나의 메세지를 향해 모든 요소들이 질주하고 있지않는 이 영화에선, 역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각 소재들의 이야기가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에 재밌기도 하지만, 역시나 이 이유 덕분에 이 영화의 서사를 한 갈래로 설명해 풀어내기는 어려움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이 영화의 서사 속에서 가장 흥미로웠다 말하고 싶은 부분은 결국 각 개인들의 개성을 드러내는 것에 있는 것 같다. 이는 물론 미세즈 폭스가 아들인 애쉬에게 말하는 “그래도 다르다는 건 환상적인 일이잖니”라는 대사와도 매우 같은 맥락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개성은 사실 이 영화 속에서 난 인물들의 두려움을 통해서 가장 직관적으로 와닿았었다. 대표적으로 폭스는 늑대를, 미세즈 폭스와 카일리는 천둥을 두려워한다. 이와 관련하여 상당히 인상깊은 장면은 처음 보기스, 번스, 빈이 폭스의 집을 파기 시작할때, 그것을 알아차리는 폭스와 미세즈 폭스의 안방 안 모습이 드러나는 장면인데, 이 때 몇번의 컷들을 통해 여러번씩 드러나는 그 방의 벽면을 보면 천둥이 그려진 그림들이 가득한 게 강조되고 있다. 결국 미세즈 폭스의 두려움이 현실화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천둥은 결국 야생동물을 사냥하는 인간들에 대한 두려움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처음엔 잘 인식하기 어렵지만, 이 세 농부 사업가들의 공장을 견고히 지키는 매우 폭력적인 장치인 전기 울타리의 안내판이 나타나고나서는 분명하게 알 수 있게된다. 실제로도 미세즈 폭스는 폭스가 인간을 상대하는 위험한 행동을 두려워하며 그만두길 바란다는 점에서 이 천둥에 대한 두려움은 분명하게 그녀의 본성,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할 수 있다.
그리고 폭스가 두려워하는 것은 영화의 중후반부에서 알 수 있게되고, 그에 따하 앞서 이해할 수 없었던 그의 늑대에 대한 두려움을 이해할 수 있게된다. 폭스는 굉장한 절망적 상황을 마주하며, 하수구에 쏟아지는 폭포 앞에서 미세즈 폭스에게 자신의 솔직한 진심을 토로하는데, 이때 그는 영화의 제목과 같이 자신은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특별하게 환호받는 ‘판타스틱 Mr. 폭스’가 되기를 너무 바랬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직접적으로 자신이 바라는 바를 이야기하고 이 말에 따라, 당연 늑대는 ‘판타스틱’하지않은 자신의 모습을 상징하는 소재라 볼 수 있다. 실제로 늑대와 여우는 같은 개과이기도 하며, 둘 다 가족단위로 공동생활을 한다고 한다. 그러나 어쨌든 영화 속에서 드러나는 설정에 따르면, 폭스는 많은 다른 종의 동물들과 함께 마치 인간처럼 사회생활을 하며 살아가고, 늑대는 홀로 추운 산위에 우뚝 선채, 어떠한 옷차림도 갖추지 않은, 또 말이라는 타인과의 소통 수단도 익히지않은 매우 개인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로 나타난다. 즉 영화 후반부에서 폭스가 늑대를 실제로 마주하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장면은, 폭스가 막연하게 ‘판타스틱’한 존재, 즉 타인들에게 특별하고 대단한 존재로 갈채받지 못하게 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으나, 실제 그러한 자신의 분신같은 존재, 늑대를 실제로 마주하자 생각과 달리 그러한 모습도, ‘판타스틱’하지 않은 모습도 고유한 아름다움을 지닌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고 해석해볼 수 있다.
이렇게 늑대를 만나는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이 영화를 각 개인의 개성을 중요한 핵심으로 보았던 이유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들에 있다. 결국 미세즈 폭스의 그림에선 천둥은 사라지지만, 허리케인이라는 새로운 견제와 위협의 대상이 등장하고, 나무 위에서 살다가 결국 하수구에서의 배고픈 삶으로 폭스의 행동들은 조금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또 다시 세 농부 사업가들의 슈퍼마켓을 약탈하는 위험한 행동을 개시한다. 이처럼 결과적으로 이 장면들은 그들의 타고난 본성이자, 성격들이 결국은, 어떻게 해서든, 어떤 방식으로든 반복적으로 발현될 수 밖에 없다는 걸 뜻하는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가지게한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Aya 작가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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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머지 절반의 몫은 엉망진창 내 인생의 명장면을 향해
※영화 〈반쪽의 이야기〉의 일부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작은 마을 스쿼하미시에 사는 유일한 아시아인 여성 엘리는 다섯 살부터 살아온 이곳에서도 딱히 마음이 가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 그나마 자신의 문학성을 알아주는 선생님만이 친구 비슷한 존재다. 선생님은 엘리가 같은 반 아이들의 에세이를 대신 써 주고 돈을 받는다는 걸 알지만 오히려 능력을 썩히지 말고 촌구석을 떠나 대학에 가라고 조언해준다. 하지만 엘리는 그럴만한 처지가 안 된다. 하나뿐인 가족인 아버지는 전문 지식을 갖췄음에도 영어가 서툴다는 이유로 허름한 시골의 기차역장 자리만 주어질 뿐이다. 무기력한 아버지의 보필에 곤궁한 집안 형편까지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대학 입학은 먼 나라 이야기다. 그러던 중 풋볼 선수 폴이 찾아와 짝사랑하는 상대 애스터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써 달라고 제안한다. 말주변은 없고 글솜씨는 더더욱 없는 폴 대신 엘리는 애스터와 편지를 주고받는다. 생각보다 애스터와 취향과 성격이 잘 맞는 엘리는 사실 예전부터 애스터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하지만 애써 감정을 숨긴 채 폴과 이어지도록 노력해본다. 대면이 필수인 데이트의 우여곡절 끝에 둘 사이에는 긍정적인 분위기가 형성되고, 엘리의 임무는 그렇게 끝나는가 싶었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감정의 화살은 자유자재로 날아간다. 엘리와 폴이 애스터의 공감을 얻기 위한 사전 조사는 첩보 작전을 방불케 했고, 공통의 목표 달성을 위해 붙어다니며 서로의 내면과 고민을 털어놓던 두 사람의 관계는 어쩐지 미묘하게 바뀌기 시작한다.
출처: NETFILX
엘리의 단호한 내레이션은 일찌감치 이 영화가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고 선언한다. 하지만 대필 편지 작가라는 오래된 레퍼런스를 변주한 이 로맨틱 코미디를 연애담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일단 고등학생이 짝사랑하는 대상에게 러브레터를 쓴다는, 지금은 생경하지만 어딘가 마음이 간질거리는 상황을 사랑 없이 논하기는 어려울 터. 하지만 통속적인 사랑 이야기 이상으로 영화가 빛나는 지점이라면, 낡은 서사가 가진 익숙함에 ‘나’와 ‘타인’을 이해하는 과정을 추가하며 얹은 캐릭터와 이야기의 힘일 것이다. 2020년 넷플릭스에서 공개되었던 이 매력적인 틴에이지 성장 영화 〈반쪽의 이야기〉는 아직 낯선 세상으로 뛰어들 준비가 안 된 사람들이 사랑하며 때로는 고민하고, 실패를 경험하고, 창피를 무릅쓰는 사람들의 이야기이자 진부하지만 언제나 새로우며, 포기하지 않는 그럴듯한 답을 찾아가는 작품이다.
텍스트와 음성이 전하는 진심의 공명
엘리에게 사람이란 인파가 뜸한 기차역을 지나치는 기차와 같다. 늘 같은 시간에 지나가지만, 늘 칸칸이 새로운 사람으로 채워지고 지나가는 신기한 그것. 하지만 엘리는 누군가에게 온 마음을 다하는 것이란 낡은 부스 안에서 앉아 가끔 시간이 되면 의무적인 신호를 보내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영화 속 기차역의 이별 장면에서 엘리는 그 작위적이고도 멍청해 보이는 사람의 감정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에서 사람에게 상처 받고 싶지 않았던 엘리의 묘책은 다가오는 타인을 그냥 지나가게 두는 것이다. 그래서 엘리는 최대한 자신 앞에 기차가 서지 않기를 바라며, 그의 잠을 깨우는 약한 진동조차 원하지 않는다. 영화의 첫 시퀀스는 엘리의 비평 능력이 폭발하는 머릿속을 애니메이션으로 묘사한 뒤 이 모든 것이 비좁은 부스 안에서 이뤄지는 대비를 보여준다. 엘리의 현실을 응축한 신이 지나고, 마음껏 재능을 선보이지 못한 채 용돈 벌이용으로 전락한 일상에 또 다시 기차가 찾아온다. 자신을 일으키는 미세한 떨림은 앞으로 다가올 삶의 변화를 암시한다. 어떤 이유든 엘리는 우연히, 혹은 때맞춰 다가오는 폴과 애스터를 지나치지 않기로 한다. 그 찰나의 선택이 가져온 파동은 찾아오기를 바라지 않던 진공의 삶에 정차한 절호의 기회다.
엘리는 시대의 고전 플라톤의 〈향연〉 속 사랑론을 구시대적 잔재라고 당당하게 외치지만, 사랑을 고백하는 구절은 떠올리기조차 고역이다. 엘리의 문학적 영감은 반작용에서 온다. 감정적 작용을 애써 침잠시킨 세월만큼 축적된 삶의 에너지는 자신의 말 대신 인용구와 영화 대사로 표출한다. 이는 엘리의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영화의 명대사 몇 마디를 읊조리는 것으로 잠시나마 감정을 표현할 뿐이다. 아마 살아 있을 때는 집 안의 생기를 책임졌을 엘리의 어머니를 잃은 뒤에 터득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둘만 남은 부녀는 감정의 촉매이자 원천이 사라진 집에서 영화와 책으로 표현을 대신한다. 사실 엘리 가족 말고도 영화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말을 온전히 전하지 못한다. 진정한 사랑과 사람을 거부한 채 안으로 겉도는 엘리, 내면의 본모습을 감춘 채 남들이 요구하는 대로 살아가는 애스터, 누구보다 깊은 진심을 가졌으나 전달만 하려면 버벅대는 폴까지. 영화는 나를 드러내기 어려운 사람들, 어쩌면 우리 모두의 고질병인 진심을 표현하는 법을 말하고, 쓴다.
〈반쪽의 이야기〉는 주요 소재인 대필 편지라는 상황으로 엘리와 폴, 애스터의 텍스트가 음성이 되고, 음성이 현실이 되는 공명의 과정을 찬찬히 더듬어간다. 대필 편지와 문자 메시지가 주를 이루는 영화는 텍스트와 음성의 불일치가 가져오는 오해와 단절, 수신 불량의 이야기다. 폴이 엘리에게 자기 대신 편지를 부탁하면서부터 말과 글의 주체는 달라지고, 표현에 서투른 이들은 소통을 위해 알아들을 수 없는 진심을 전달하고자 남의 손을 빌려야 한다. 이는 영화 곳곳에서 뒤섞이고 변주한다. 대화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이들은 고해소부터 편지, 휴대전화까지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은 모조리 동원하며 비대면 소통을 진행하고, 감독은 표현이 어색한 인물을 스크린 양 끝으로 보낸 채 대화를 이어간다. 폴과 애스터의 첫 데이트에서도 앞에 앉은 폴 대신 애스터의 눈은 엘리의 문자 메시지를 향한다. 폴의 모습에서 엘리의 이야기를 만나는 인식의 불일치는 웃음을 자아낸다. 하지만 시대와 문화의 제동으로 전면에 나설 수 없을뿐더러 그마저도 서툰 엘리의 진중함 앞에 관객은 사려 깊게 그의 진심을 눈여겨보게 된다. 나설 수 없기에 인용이 더 편했던 엘리는 짝사랑 상대였던 애스터로 결핍된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터득했고, 점차 말문이 트이며 애스터에게 거의 진심에 근접한 말들을 털어놓기에 이른다. 플라톤부터 오스카 와일드, 빔 벤더스에 사르트르까지 인용하던 영화는 대망의 성당 삼자대면 장면에서 마침내 엘리 추의 목소리로 애스터에게 감정을 전한다. 그리고 다른 누구도 아닌 엘리의 입으로 엘리의 말을 전한다. 드디어 영화는 엘리의 말을 인용하고, 그렇게 엘리의 공명은 또 하나의 걸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된다.
반쪽을 찾으려 하지 않는 이야기
엘리스 우는 전작 〈세이빙 페이스〉와 이번 〈반쪽의 이야기〉 두 편의 영화에 공히 고루한 세계에 외떨어진 인물을 등장시킨다. 주인공을 둘러싼 세계에는 개인과 충돌하는 소규모 커뮤니티의 오랜 신념이 지배한다. 미국 속 아시아 문화를 간직한 이민자 집단과 백인 기독교 중심의 보수적인 시골 마을은, 어떤 이에게 따뜻한 온기를 간직한 공허한 독방과도 같다. 존재가 부정되고 일체성을 압박받는 공간은 엘리스 우가 떠올린 현실의 지옥이다. 언제나 내 편이 되어 줄 것만 같던 집단의 공고한 관습에 홀로 반기를 드러내는 것만큼 스스로를 상처 주는 일도 없으니 말이다. 〈반쪽의 이야기〉는 언뜻 평범해 보이는 일상이 비밀을 간직한 누군가에게 지옥으로 다가온다는 명제에 집중하며 수렁에서 빠져나올 비책을 알려준다.
〈닫힌 방〉의 관계성에 〈시라노〉의 서사를 입힌 엘리스 우는 〈반쪽의 이야기〉로 가족의 굴레에 생채기를 낼 용기와 깨달음을 말한다. 가족의 인정을 위안 삼지만 정작 마음 둘 공간이 아쉬운 인물들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진심을 글에 담는다. 애스터와 폴(을 대신하는 엘리)가 주고받는 편지 속 〈닫힌 방〉의 세 사람은 뒤틀린 관계 속에서 탈출을 거부하고, 방문이 열려있어도 나가지 못한다. 영화는 사르트르의 희곡을 레퍼런스 삼아 “타인이 지옥인” 세상의 다음 단계를 일러준다. 엘리와 애스터의 처음이자 마지막 데이트는 마치 천상계에서 진리의 정수를 발견하는 고전소설의 주인공 같다. 오직 둘 뿐인 신비로운 호숫가에서 서로의 속마음을 교감하는 형상은 그 옛날 〈향연〉에 적힌 고대의 인간처럼 두 개의 얼굴, 네 개의 팔다리다. 그렇게 엘리스 우는 반쪽을 찾으려 필사의 노력을 다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삶이란 저 멀리 사라진 서로의 반쪽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이미 옆에 있지만 눈치채지 못했던 나의 나머지 절반을 깨닫는 과정이다. 다시 사르트르의 방으로 돌아가자. 타인이 내 절반이 아님을 깨닫는다면 우리가 알던 지옥은 더는 작은 방이 아니게 되고, 관계에 목매지 않는 결연한 나의 눈으로 곧 열린 문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는 반쪽을 찾지 않고 깨달을 뿐이다.
지옥을 자각하는 확신의 과정
우리가 타인을 깨달았다면 다음 단계는 이곳이 지옥임을 깨닫는 것이다. 노신부는 잊지 말라는 듯 반복된 성경 구절을 내뱉고, 성당에서는 사탄이 의심을 타고 우리에게 찾아온다고 되뇐다. 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긴 편지 한 통으로 의심이 자란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스쿼하미시의 성에서 엘리와 폴, 애스터는 모두 불경한 죄인이다. 세 사람은 각자의 두려움에 갇혀 가면을 쓰고 거짓을 말한다. 레즈비언이라는 정체성을 숨기고, 미술의 꿈을 접은 채 가족의 뜻에 순종하고, 열등감에 주눅 들어 잠재된 능력조차 발휘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자신을 의심하고 진실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엘리와 폴은 대필 편지를 쓰고 애스터는 거짓된 사랑을 이어간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인간은 ‘두려워하고 거짓말하고 의심하는 자들’을 쫓아낼 성을 지었고, 신을 의심하는 자들은 바깥의 지옥으로 떨어진다(계 21:8). 하지만 엘리스 우는 단호하게 말한다. 거짓은 헛되지 않았으며 황홀한 파국은 반드시 찾아온다고.
거짓을 말하는 죄 많은 백성은 오히려 의심을 열쇠로 내가 선 이곳이 지옥이었음을 깨닫는다. ‘일이 벌어지는 곳’ 스쿼하미시 (영화 초반의 안내 푯말 “It’s happening in SQUAHAMISH”)는 사실 마을과 ‘어울리지 않는’ 일들은 아예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사라지는 곳이다. 스쿼하미시에서 마을 유일의 아시아인 가족이 받는 인종 차별과 성소수자의 정체성, 가족주의에 묻힌 개인의 꿈은 있지도 않았던 일로 치부한다. 따라서 주인공 세 명이 성당에서 서로의 진실을 털어놓는 장면은 더 묵인하지 않겠다는 고해성사이자 강박적인 안온함보다 위태로운 불안을 지지하겠다는 지옥으로부터의 선언이다. 내가 있는 공간이 곧 지옥임을 깨닫는 순간, 나를 감싸던 세계는 깨어진다. 이들 셋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각자의 말을 늘어놓는다. 이곳이 어디인지, 내 반쪽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아는 세 사람만이 상황을 이해할 뿐이다. 좋은 작품을 과감히 망가뜨려야 걸작을 만날 수 있듯, 나만의 소시지, 나만의 그림,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이들에게 지옥은 기꺼이 문을 활짝 열 준비를 끝마쳤다.
겉도는 와중에도 서로에 이끌리며 부딪쳤던 시절이 지나고, 엘리는 걸작을 그릴 대담한 선을 찾으러 스쿼하미시를 떠난다. 사랑의 반쪽이 만나고 헤어지는 그 뻔한 기차 장면처럼 절대 울지 않겠다 맹세했던 엘리는 달리는 기차 밖에서 뛰어오는 폴을 보며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하지만 엘리는 그 진부한 감정을 이제 이해할 수 있다. 엉망진창에 예측하는 대로 이뤄진 적이 없는 사랑의 기억은 가장 특별하면서도 보편적이고, 그렇기에 낡아 빠졌다는 것을. 엘리는 울음을 그치고 주변을 바라본다. 이 안의 사람들도 어쩌면 자신이 만든 인생 최고의 대사 한 구절쯤 품고 있을 것이라는 작은 깨달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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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MZ Docs] 어디에나 사람이 있다
빅 데이터의 축 The Axis of Big Data
감독: 저우타오 Zhou Tao
러닝타임: 58분
시놉시스: 〈빅 데이터의 축〉은 중국 귀주성 산악 지대에 위치한 대규모 데이터 센터의 주변 환경을 탐험한다. 이 영화는 데이터 센터 자체를 전면에 내세우는 대신, 이 시설을 품고 있는 산악 지형을 섬세하게 담아낸다. 영화는 풍경의 본질을 포착하며, 데이터 센터 인근과 그 너머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생활상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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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매일 인공지능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말을 듣곤 한다. 특이점에 도달했다, 학습하지 않은 내용을 스스로 깨달아 새로운 능력을 함양했다, 인간은 인공지능에게 지배될 것인가, 기타 등등.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이 인공지능이라면, 그 재료는 아마 데이터가 아닐까 싶다. 인공지능은 방대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학습한다. 빅 데이터는 그 이름처럼 어마어마한 데이터일진대, 그 데이터를 보관하는 데이터 센터 역시 엄청난 전력을 소비한다.
2022년 카카오 데이터 센터 화재 사건을 떠올려 보면, 데이터가 인간을 얼마나 지배하는지를 알 수 있다. 고작 카카오가 잠시 멈추었을 뿐인데 큰일이라도 난 듯 호들갑스러웠다.
그러면서 동시에 생각하게 된다. 4차 산업혁명이 일어난 지금, 누군가는 인공지능을 활용하여 최첨단을 달리는가 하면 또 누군가는 태어나서 스마트폰이라고는 만져본 적이 없다. 이는 증기기관이 발명되었는데도 걸어서 또는 가축을 타고 이동했던 사람들이나, 전기 시스템이 만들어져도 촛불을 켜고 살던 사람들이나, 컴퓨터의 전원도 켜 본 적 없는 사람이 존재함과 마찬가지다.
가끔은 그 괴리가 이상하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세대와 아예 그것을 만져본 적도 없는 세대가 공존한다는 사실이.
저우타오가 카메라에 담은 세계도 비슷하다. 데이터 센터 주변의 풍경을 섬세하게 탐방한다. 데이터 센터의 풍경으로 시작한 시선은 데이터 센터 밖을 향한다. 카메라는 가치 판단이나 평가 없이 그저 귀주성의 사람과 자연, 동물을 따라 횡단한다.
나무토막과 포대를 든 노인, 등이 굽은 노인, 허수아비, 일하는 노인, 사진을 찍는 관광객, 담배를 피우는 남자, 우비를 입고 사진을 찍는 관광객 가족, 잡초를 태우는 남자, 물가의 닭, 물고기, 흑염소....... 패치워크처럼 기워진 풍경이다.
푸른 농촌의 풍경과 희뿌연 안개, 그 속에서 점멸하는 데이터 센터의 불빛이 기이한 이질감을 만들어낸다.
챗GPT 등 인공지능은 사람도 아니면서 사람의 시늉을 한다. 물어보는 말에 재깍 대답하고, 답이 풀리지 않는 문제의 답을 알려 준다. 이제 사람이 필요하지 않다. 그림을 그려 달라 하면 그림을, 노래를 만들어 달라 하면 노래를 만든다. 모르는 문제도 사람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다.
그러나 과연 기계만의 일일까. 모든 것의 뒤에는 사람이 있다. 챗GPT의 데이터를 걸러내는 작업은 케냐의 노동자가 시간당 2달러도 받지 못하고 처리했다. 최첨단 데이터 센터가 필요한 줄은 알지만, 그 데이터 센터가 건설된 주변에 마을이 있다는 사실은 간과한다.
우리가 누리는 혜택은 어쩌면 누군가를 착취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언제나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너무도 쉽게 잊힌다.
이번 DMZ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좋았던 부분은, 비극장 상영 프로그램이었다. <빅 데이터의 축>은 극장 상영도 했지만, 상영관이 아닌 곳에서도 볼 수 있었다. <빅 데이터의 축> 역시 레이킨스몰 2층의 전시공간에서 상시상영되어 오며가며 관람하게끔 설치되었다.
다큐멘터리가 어떠한 서사나 의미를 갖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지도 않는다. 그러나 어떤 지점에서의 균열, 일상적 풍경에서의 낯설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지점에서부터 사고하는 것은 인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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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일정
9/28(토) 17:30-18:28
9/30(월) 14:00-14:58
그 외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기간(9/26-10/2) 동안 레이킨스몰 2층 마리나갤러리 연속 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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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칠일(三七日), 미신과 믿음 사이
- 감독: 박강
- 출연: 서현우, 류아벨, 심은우
- 장르: 드라마, 스릴러, 미스터리
- 국가: 대한민국
- 러닝타임: 102분
- 개봉: 2022년 11월 24일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영화를 보실 분들은 보신 뒤에 읽어보세요!
삼칠일, 아이가 태어나고 스무하루째 되는 날이다. 이를 세이레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기간 동안은 금줄을 쳐서 가족이나 이웃의 출입을 삼가게 하고, 특히 부정한 곳에 다녀온 사람은 출입을 절대 금한다고 한다. 우리집도 동생이 태어났을 때 금줄을 걸었고, 동네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당연히 하는 것이 금줄을 거는 것이었다. 물론 그 금줄이 이렇게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나에게 미신을 믿느냐고 물으면 맹신하지는 않지만 믿는다. 불교여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삼재가 있는 해에는 신중하고, 안 좋은 꿈을 꾸면 조심했다. 친구들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할아버지 장례가 있고 얼마 뒤에 있던 친구의 결혼식은 참석하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깔려있었던 것은 당연했다.
장례식장에 다녀오면 작은 아이를 만나는 것에 신중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건 삼칠일 이런 문제가 아니라 장례식장에는 병균이나 아기들에게는 치명적인 세균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다녀와서는 안 만나는 게 좋기 때문에 생긴 이야기라고 알고 있었다. 어쨌든간 우리나라 사람들은 종교가 어찌 되었던 간 이런 가벼운 미신, 혹은 징크스는 꼭 하나씩 가지고 있다. 이게 심해지면 맹신이 되는 거고.
우진(서현우 배우)은 미신을 믿지 않지만 잘 믿는 아내와 장모님의 말을 따르는 사람이었다. 직업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몸에 좋다는 한약을 지어서 누군가에게 선물하기도 팔기도 한다. 한의학이나 한약, 다린 약 등을 미신으로 보고 있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은 어쩌면 우진의 모순된 모습을 보여준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아이가 태어나고 삼칠일이 지나지 않은 시점, 전 여자 친구의 부고 문자를 받는다.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들지만 도의적으로 가려고 결정한다. 도의적일지 죄책감일지 알 수는 없지만 장례식장에서 우진은 전 여자 친구의 세영(류아벨 배우)의 쌍둥이 여동생인 예영을 만난다. 죽었다고 했는데 살아 돌아온 것 같은 똑같은 모습에 소름이 돋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을 것이다. 6년이나 만났다면서 쌍둥이 인 줄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에서 우진이 세영을 어떻게 대했는지 예상되기도 했다.
세영의 죽음은 자살이었다. 우진과의 사이에 아이도 있었지만 죽었다. 이게 원인이었다고 했다.
아이가 유산되었다고 했을 때 우진의 말이 잊히지 않았다고 말했다고 예영이 전했다. 끝내 무슨 말을 했는지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아마 "다행이다."이지 않았을까? 세영이 그렇게 무너진 이유로 타당하다. 더구나 예영이 왜 유산되었는지 알아봤다고 했다. 우진은 다른 사람들, 자신의 아내에게까지 줬던 아이와 산모에게 좋은 한약을 세영에게도 줬었다. 건강원에서 우진은 아이가 생기는 약, 아이가 없어지는 약이 있을 리가 없다고 확신에 차서 말했다. 그 약이 문제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우진이 준 약을 아무 의심 없이 먹은 세영은 아이를 잃었고, 우진은 좋아했다. 그리고 우진은 건강원에서 지어온 약들이 그런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면서도 좋은 약이라고 하는 것을 아내, 더불어 처형에게까지 줬다. 우진은 그 약의 효과를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부정하기도 해야 했다. 자기는 잘못이 없어야 하니까.
장례식장에서 돌아오며 아내가 양복 주머니에 넣은 액막이 팥을 버려버렸고, 문 앞의 소금은 뿌리지 않고 들어왔다. 그러자 자꾸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결국 액땜을 하기 위한 다른 행동은 처형의 아이를 유산하게 만들었다. 아니, 정말 그 액땜으로 인해 생긴 문제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의심 가는 것은 그뿐이다. 이제 우진은 미신을 믿을 수밖에 없다. 죽은 세영이 자신과 자신의 아이에게 저주를 내린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그는 그녀의 장례식, 심지어 발인까지 함께 한다.
우진이 세영이 저주한 것이라고 의심하는 것에는 '죄'가 있기 때문이다. 임신했던 세영에게 잘해주지 못했던 죄책감, 세영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게 만든 죄의식, 아이를 죽게 만든 죄악. 흔히 그런 말들이 한다. 잘못한 게 없으면 무섭지도 않다고.
우진은 금줄을 언제나 선뜻 뛰어넘지 못한다. 아내가 무서워서 일수도 있다. 하지만 아내가 무서웠다면 장례식도 가지 말았어야 맞지만.
금줄은 '신성한 곳임을 표시하는 새끼줄'이다. 갓 세상에 태어나서 삼칠일도 되지 않은 아이, 그리고 그 어머니는 신성하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다. 그런 금줄은 아이가 태어났을 때만 거는 것이 아니다. 장을 담을 때, 잡병을 쫓고자 할 때, 성황당 같이 신성한 영역을 나타낼 때도 쓴다. 신성한 곳을 표시하는 것도 있지만 부정한 사람의 접근을 막으면 잡귀의 침범을 방어할 목적으로도 하고 있는 것이다. 악귀가 뛰어넘거나 다가가지 못하는 선이 금줄이다. 그 금줄을 우진은 아빠지만 건너가는 것을 두려워한다.
우진은 장례식에서 세영을 데리고 온 것이 아니라 세영의 장례식에 가면서 스스로가 악귀가 된 것이다. 어쩌면 세영의 아이를 죽였을 때 이미 악귀가 되었지만 잊고 있었던 것을 세영이 깨워줬을지도 모른다. 이제 괜찮아진 아이가 세영과 같은 버릇을 했을 때 우진의 선택이 나오지 않았지만 아마 최악을 선택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우진은 이미 금줄을 넘은 악귀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 그래서 의문이었던 것은 우진의 아내(심은우 배우)는 어떻게 자유롭게 금줄을 드나들었냐는 것이었다. 당연히 엄마니까, 엄마는 아이를 지켜야 하는 존재니까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아내도 우진과 같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세영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친구가 보낸 문자에 6년 사귄 여자 친구라는 문구를 보고 안 것이 아니었다. 세영의 이름을 보고 바로 알았고, 친구의 문자를 확인해 본 것은 우진이 또 장례식장 혹은 발인식에 갈 것인지를 확인해 본 것뿐이었으리라.
바로 '세영 씨 장례식장'이라고 한 것이 세영의 존재를 알고 있었음을 알고 있는 대목이기도 했지만 아이가 아팠던 것에 대한 분노를 세영에게 하는 것 역시 우진과 세영 사이에 있었던 아이의 존재까지 알고 있었음을 시사했다. 더불어 세영의 장례식장에 가서 예영을 봤지만 별로 놀라지 않았던 것에 아마 예영의 존재까지 알고 있었을 것으로도 예상된다. 아니면 세영과 같은 얼굴을 한 예영 때문에 우진이 흔들렸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우진은 세영과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결혼을 했다. 친구들도 모를 정도로 빠르고, 비밀스럽게 진행되었다. 그냥 상상을 하자면 우진은 세영과 같이 살면서 현재의 아내와 바람을 피웠을 수도 있다. 아니면 아내가 우진을 좋아해서 아이가 없어지는 약을 준 것일지도 모른다. 아내 역시 우진처럼 세영의 죽음, 세영의 장례식, 예영의 존재를 두려워한다. 아내가 미신에 빠진 것은 자신의 죄를 알고 있어서 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아내는 이미 우진보다 먼저 금줄을 뛰어넘은 악귀였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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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았고, 생각보다 막 스릴 있거나 미스터리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쁘지 않았다.
시사회가 끝나고, 질문도 생각하고 있었는데(아내가 언제부터 세영의 존재를 알고 있었는가에 대한 것) 서현우 배우 얼굴 보고 다 까먹었다. 세상에, 배우님 대체 방송 카메라 빨을 왜 이렇게 안 받으시는 건가요? 너무 잘생기셔서 계속 배우님 얼굴만 구경했다. 그러고 넷플릭스로 '연예인 매니저로 살아남기' 나온 것까지 정주행하고 또 봤다. 그리고 다시 한번 느꼈다. 배우님 화면빨 진짜 안 받는다고. 하- 배우에게 좋은 말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실물 미남이다. 그걸 못 담는 카메라가 원망스러울 정도다.
※ 본 리뷰는 씨네랩으로부터 시사회에 초청받아 관람한 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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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캔디맨, 캔디맨, 캔디맨, 캔디맨… 캔디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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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과 2021년의 〈캔디맨〉 포스터
*글에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 김춘수 시인의 시 〈꽃〉의 한 구절이다. 명확한 형태를 지니지 못한 채 부유하던 ‘그’는 호명을 통해 꽃이라는 구체적 물질성을 부여받는다. 누군가의 이름을 공들여 불러주면 추상적인 것이 물질이 되고, “무엇이 되고 싶다”는 욕망을 지닌 존재('그')의 욕망은 현실이 된다. 호명은 존재를 소환하는 정치적 행위다.
영화 〈캔디맨〉은 호명과 주체성의 문제에 흑인을 대상으로 한 인종 폭력 문제를 결합한 미스터리‧공포 영화다. 1992년에 처음 개봉한 후 두 편의 후속작이 나왔고, 올해는 흑인 문제와 미스터리 장르를 성공적으로 결합하여 자신만의 영역을 넓히고 있는 조던 필 감독(〈겟 아웃〉, 〈어스〉 연출)이 각본을 써 새로 만들어졌다. 완성도가 떨어지는 〈캔디맨2〉, 〈캔디맨3〉은 제외하고, 1992년과 2021년에 같은 이름으로 개봉한 두 〈캔디맨〉의 궤적을 따라가 보자.
두 영화의 핵심 소재는 모두 도시 괴담이다. 거울을 보고 캔디맨의 이름을 다섯 번 부르면, 손목이 잘려 피가 뚝뚝 흐르는 팔에 갈고리를 꽂은 캔디맨이 나타나 이름 부른 자를 잔인하게 살해한다는 게 괴담의 내용이다. 흑인 빈민가였던 카브리니 그린이 재개발된 후에도, 캔디맨 괴담은 끊이지 않고 전승되었다. 두 영화의 주인공은 모두 처음에는 캔디맨 괴담을 믿지 않다가, 호명을 통해 캔디맨을 소환한 후, 하락 혹은 상승의 길을 걷는다. 그리고 여기에 윤리, 정치가 결합된다.
1992년 〈캔디맨〉의 주인공 헬렌 라일
먼저 1992년의 〈캔디맨〉이다. 도시 전설에 관한 논문을 쓰는 헬렌 라일은 캔디맨 괴담에 흥미를 느낀다. 그녀는 도시 전체가 일상적 공포를 전설적 존재 탓으로 돌리는 상황에 문제의식을 갖는다. 때문에 캔디맨 괴담을 연구하면 사람들이 괴담을 믿는 구조적‧실제적 원인이 드러날 거라 생각한다.
헬렌은 캔디맨 괴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흑인 빈민가로 향한다. 그런데 그녀가 캔디맨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피가 낭자한 잔혹한 범죄가 잇따라 발생하는데, 현장에는 늘 정신을 잃은 헬렌이 있다. 헬렌을 걱정하던 사람들은 점차 그녀를 의심하고, 결국 그녀를 정신병원에 감금하기에 이른다.
헬렌이 사회와 멀어질수록, 캔디맨과는 더욱 가까워진다. 캔디맨은 수시로 나타나 자신과 함께 불멸의 존재가 되자고 속삭인다. 헬렌은 자신을 둘러싼 절망적 상황에 휩쓸려 캔디맨의 제안을 수락하지만, 그의 말이 거짓임을 깨달은 후에는 캔디맨이 희생물로 삼으려 납치한 어린아이 앤소니를 구하는 윤리적 선택을 내린다. 그러나 한순간이나마 캔디맨의 제안을 수락한 대가는 가혹했다. 앤소니를 구하는 과정에서 끔찍한 부상을 당한 헬렌은 억울함을 해소하지 못한 채 또 다른 캔디맨이 되어 도시를 부유한다.
어린 앤소니를 구하는 헬렌(1992)
이번엔 2021년의 〈캔디맨〉이다. 주인공은 앤소니다(헬렌이 캔디맨에게서 구한 그 앤소니가 맞다). 그는 새로운 그림을 그리지 못해 힘든 시기를 보내는 남성 화가로 성장했다. 괴로워하던 앤소니는 캔디맨 괴담을 듣고 예술적 영감을 얻어 작품을 만들어 낸다. 작품의 이름은 〈Say my name〉이다. 사람들이 장난 삼아 캔디맨을 '호명'하라는 작품의 요청에 따르면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파국이 시작된다. 앤소니는 무시받던 자신의 예술이 캔디맨의 부활과 더불어 화제가 되자 묘한 쾌감을 느낀다. 그런데 캔디맨이 활보할수록 앤소니에게도 변화가 생긴다. 앤소니가 캔디맨과 연결된 존재임을 암시하는 증거가 점차 늘어만 간다. 혼란 끝에 앤소니는 자신이 캔디맨의 희생물이 될 운명이었음을, 미친 여자라는 오명으로만 남아 있는 헬렌 덕에 살아남았음을 알게 된다. 앤소니는 결국 캔디맨이 되어 예정된 운명에 굴복한다.
2021년 〈캔디맨〉의 주인공 앤소니
1992년의 헬렌은 앤소니를 캔디맨으로부터 구해줬다. 그러나 2021년의 앤소니는 이 사실을 알고 난 후에도 캔디맨이 되었다. 왜 앤소니는 헬렌이 목숨을 걸고 그의 운명을 바꿔줬음에도 이를 되돌리려 하는 걸까? 캔디맨이 되는 것이 ‘윤리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앤소니의 선택을 이해하기 위해선 캔디맨 괴담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알아야 한다. 1992년 영화에도 캔디맨이 어떻게 탄생했는지가 나온다. 하지만 영화는 이를 캔디맨이 뿜는 공포를 극대화하는 자원으로만 활용한다. 하지만 2021년의 영화는 캔디맨의 탄생을 더 적극적으로 독해하여 영화의 주제로 가져온다. 1992년의 영화가 극한의 공포 속에서도 앤소니를 구해 내는 헬렌 개인의 윤리에 집중했다면, 2021년의 영화는 캔디맨을 흑인이 감당해 온 폭력의 계보에 맥락화시킴으로써 불합리한 인종 폭력을 고발한다.
최초의 캔디맨은 흑인 화가였다(앤소니의 직업도 화가다). 그는 지역의 저명한 백인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했는데, 그러다 한 유력 백인의 딸 ‘헬렌’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맡는다. ‘불행히도’ 그들은 사랑에 빠지고 임신을 한다(1992년의 영화에서 캔디맨이 같은 이름을 가진 연구자 헬렌에게 집착하는 이유다). 헬렌의 아버지는 격분하여 흑인 화가에게 잔혹한 응징을 가했다. 그의 팔을 자른 후 갈고리를 박아 넣었고, 온몸에 꿀을 발라 벌에게 쏘이게 했으며, 괴로워하는 그를 불에 태웠다. 즉 최초의 캔디맨은 흑인 남성에 가해진 린치의 희생자였다.
캔디맨이 죽지 않은 건 흑인 린치가 중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캔디맨’이란 이름은 아이들에게 칼날이 든 사탕을 나눠준다는 누명으로 린치를 당한 흑인 남성의 사례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린치를 당한 흑인 남성들은 분노, 공포, 원한을 응집한 캔디맨으로 다시 태어나 무차별 복수를 감행한다. 캔디맨의 살인을 흑인 대상 린치에 '균형을 잡는 폭력’으로 볼 수 있는 이유다.
헬렌을 협박‧유혹하는 캔디맨(1992)
1992년의 영화는 캔디맨이 형체 없이 소문, 꿈, 공포로만 존재한다고 말하며, 2021년의 영화 속 캔디맨은 거울 안에서만 움직일 수 있다. 그런 캔디맨이 물리적 공간에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건 사람들이 캔디맨을 믿고 그를 호명할 때, 즉 그의 추상성에 물질성을 부여할 때다. 사람들이 여전히 그의 이름을 잊지 않고 불러주기에 캔디맨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 한번, 사람들이 캔디맨을 잊지 못하는 건 여전히 흑인이 린치를 당하기 때문이다. 흑인의 생명값이 백인보다 낮게 매겨져 하찮게 여겨지는 한, 캔디맨은 영원히 죽지 않고 ‘호명’되어 ‘복수’를 이어갈 것이다. 그러므로 “내 얘기를 모두에게 전해”라는 2021년 캔디맨의 마지막 말은 흑인 린치에 대한 엄중한 경고다. 흑인 린치가 멈추지 않으면 캔디맨도 멈추지 않는다. 흉흉한 도시 괴담은 흑인을 향한 물리적 폭력이 중단될 때에야 사라질 수 있다.
폭력에 대항하는 원한적 주체로서의 캔디맨이라는 호명은 주류사회에 포섭되지 않은 소수자의 경험‧분노가 왜 미스터리‧공포의 영화 장르로 이어졌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해되지 못하는’ 소수자의 감정은 ‘이해할 수 없는’ 공포의 대상이 되어 우리 주변을 횡행한다. 소수자가 겪는 폭력이 이해 불가능한 미스터리로 남는 한 캔디맨은 불멸이다. 캔디맨을 향한 공포는 인종차별 사회의 자업자득이다.
캔디맨, 캔디맨, 캔디맨, 캔디맨… 캔디맨. 다섯 번의 호명 이후에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 사회는 도래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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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왓챠로 볼만한 봄 영화 추천 11편
넷플릭스, 왓챠로 볼만한 봄 영화 추천11편
지난 주말에 벚꽃이 피고 개나리와 진달래를 구경할 겸 산책에 나섰어요. 오랜만에 꽃구경이라 그런지 그간 추워서 움츠려들었던 몸도 기지개를 펴보았지요. 그렇게 한 시간 정도 걷다보니 벚꽃영화는 뭐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네이버에 봄 영화 검색하면 우선순위로 나열되는 전형적인 영화들 말고 봄이 되면 떠오르는 봄 영화 11선을 꼽아봤어요.
#나의 소녀시대 (我的少女時代·2015)
“비록 넌 작고, 바보같고 게다가 다른사람을 좋아하기까지 하지만 그렇다 해도 나는 여전히 너를 정말 좋아해” 소위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너가 좋다는 류의 고백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플립 (Flipped·2010)
“어떤 사람은 평범한 사람을 만나고, 어떤 사람은 광택이 나는 사람을 만나고, 어떤 사람은 빛나는 사람을 만나지. 하지만 모든 사람은 일생에 단 한번 무지개 같이 변하는 사람을 만난단다. 네가 그런 사람을 만났을 때 더 이상 비교할 수 있는 게 없단다.” 예쁜 동화 같은 이 영화로 힐링하세요!
#4월 이야기 (四月物語·1998)
“성적이 안 좋은 내가 대학에 합격했을 때 담임선생님께서는 '기적'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어차피 '기적'이라고 부를거라면, 난 그걸 '사랑의 기적'이라고 부르고 싶다“ 벚꽃이 휘날릴 때 풋풋한 첫사랑의 설렘이 제격이겠죠!
#봄날은 간다 (One Fine Spring Day·2001)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라면... 먹고 갈래요?“ 누구에게나 봄날이 있지만, 그 계절이 언젠가 지나가기 마련이다.
#족구왕 (The King of Jokgu·2013)
“남들이 싫어한다고 자기가 좋아하는 걸 숨기고 사는 것도 바보 같다고 생각해요” 시대가 꿈을 사치라고 일갈하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도전하는 것이야 말로 청춘의 특권이죠.
#22 점프 스트리트 (22 Jump Street·2014)
"SCHMIDT XXXXED THE CAPTAIN'S DAUGHTER!!!!!!" 대학교 신입생으로 위장취학한 두 형사가 마약 단속을 벌인다.
#미드나잇 인 파리 (Midnight In Paris·2011)
“여기 머물면 여기가 현재가 돼요. 그럼 또 다른 시대를 동경하겠죠. 상상속의 황금시대. 현재란 그런거예요. 늘 불만스럽죠. 삶이 원래 그러니까.” 우디 앨런이 동경하는 1920년대의 낭만으로 우리 모두를 초대한다.
#캐빈 인 더 우즈 (The Cabin In The Woods·2012)
“잘했어, 좀비팔“ 봄방학을 맞은 다섯 친구들이 놀러간 숲 속의 오두막에서 뜻밖에 호러 종합 선물세트를 받고 환호(?)한다.
#머니볼 (Moneyball·2011)
“야구는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어” 스토브리그가 끝나는 봄이면 새로운 시즌이 개막한다.
#빅피쉬(Big Fishl·2003)
“때론 초라한 진실보다 환상적인 거짓이 더 낫을수도 있다 더군다나 그것이 사랑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이라면” 팀 버튼은 자신의 아이가 태어나고서야 그동안 사이가 좋지 않았던 아버지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를 위한 이 영화에는 행복과 희망이 가득 차 있다.
#만춘(晩春 Late Spring·1949)
오즈 야스지로는 ‘늙어가는 아버지를 애처로워하는 딸, 자식의 결혼을 걱정하는 부모’라는 소박한 가족이야기로 가장 극적인 변화를 포착한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하고,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성숙과 상대방에 대한 배려다.
* 본 콘텐츠는 블로거 영혼아이 TERU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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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흑인 보스는 눈부신 사람 / 영화 그린 북
영화 그린 북(Green Book) 2018
-대여, 소장 https://serieson.naver.com/search/sea...
-Music Midorii(미도리) - 野芥(노케) N04
Artist : Midorii(미도리)
Album : 七隈線 (나나쿠마선)
Song : 野芥(노케) N04
Link : https://youtu.be/jazSBo2r99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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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캔디맨> 메인 예고편
들어봤니? 미지의 존재 캔디맨
비주얼 아티스트 '안소니'는 새 작품 구상을 위해 어릴 적 살던 도시로 돌아가고, 그곳에서 오래 전부터 떠돈 괴담을 듣고 매혹되면서 '캔디맨'에 대한 충격적인 비밀을 알게되는데...
불러봤니? 죽음을 부르는 남자 캔디맨
세상을 뒤흔든 미지의 존재 캔디맨,캔디맨,캔디맨,캔디맨,,,
한 번만 더 부르면 그가 나타나게 되는데..
용기가 있다면 그의 이름을 불러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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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데드 보이 탐정단> 공식 예고편
데드 보이 탐정단을 소개한다. 절친이자 귀신인 에드윈과 찰스는 인간 세계 최고의 탐정이다. 사악한 마녀, 지옥, 죽음의 신 데스로부터 탈출하는 등 함께하기 위해서라면 못 할 것이 없는 두 사람. 영매 크리스털과 그녀의 친구 니코의 도움을 받아 인간 세계에서 벌어지는 가장 미스터리한 초자연적 사건들을 해결한다. 《데드 보이 탐정단》의 원작은 닐 게이먼의 인기 코믹 시리즈로, 이번 작품은 넷플릭스의 샌드맨 세계관을 새롭게 확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