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중독2023-06-27 16:48:00
영화 음악의 거장에게 바치는 찬사
[영화 리뷰] 엔니오 : 더 마에스트로
※씨네랩 크리에이터로 초청받아 시사회 참석해 관람한 작품입니다.
<엔니오 : 더 마에스트로> 포스터 [출처: 씨네랩]
영화 음악의 거장을 기리는 영화
<엔니오 : 더 마에스트로>는 영화 음악의 거장인 엔니오 모리꼬네의 전기 영화이다. 그의 영화 같은 삶과 함께한 영화 음악들을 소개하는 내용으로 다큐멘터리의 감독은 가장 마지막까지 영화 작업을 함께하고 대표작인 <시네마천국>을 함께 만든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이 제작했다. 그는 엔니오 모리꼬네가 마지막 유언에 언급했을 만큼 나이를 뛰어넘은 친구이자 형제 같은 사이였다고 한다. 영화에서는 엔니오 모리꼬네 본인을 비롯하여 다수의 음악계 영화계 유명인사들이 출연하여 그가 살아온 삶과 그의 음악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 일대기를 보다 보면 엔니오 모리꼬네를 모르던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경외감이 들기 마련이다.
나 역시 엔니오 모리꼬네라는 이름만 알고 있었지 구체적으로 어떤 작품들을 만드셨는지는 잘 몰랐는데, 노래로 들어보면 귀에 익숙한 멜로디가 많이 있었다.
특히 우리나라에는 '넬라 판타지아'로 잘 알려진 영화 <미션>의 OST나, 황야의 무법자의 휘파람 소리를 들을 때 모두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이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 외에도 일평생 400편이 넘는 드라마와 영화의 음악들을 작업하셨다고 하니 그것만으로도 따라갈 수 없는 업적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이렇게 압도적인 작업량을 소화할 수 있었던 건 엄청난 능력에 기반한다. 앉은자리에서 악보를 작성하고, 피아노 앞에서 건반만 바라보고 작곡을 했다는 주변 지인들의 증언은 그가 얼마나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려준다.
심지어 엔니오 모리꼬네는 다소 실험적인 방법이나, 감독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분위기의 곡들을 기가 막히게 영화에 연결시켰는데, 처음에는 그의 말에 반대했던 감독들도 결과물을 보고 나면 엔니오의 음악이 가장 완벽한 곡이었다는 것에 동의했다. 그런 점에서 감독조차 생각 못한 것들을 음악으로 그려낸다는 것이 가장 경이롭게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엔니오 : 더 마에스트로> 스틸 컷 [출처: 씨네랩]
기록의 가치에 집중한 영화
영화는 감독이 5년 동안 진행한 인터뷰를 기반으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엔니오 모리꼬네의 어린 시절 처음 음악을 시작하게 된 순간부터 가장 마지막 대규모 투어까지 그의 음악 인생 모두를 2시간 30분 동안 그려냈다. 아쉬웠던 점은 내가 클래식 음악이나 영화 음악 쪽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중간중간 나오는 전문적인 이야기들이나 엔니오 모리꼬네가 작업한 음악들의 가치를 정확하게 느끼기는 어려웠다. 심지어 그가 영화 작업을 시작한 게 1960년대라서 대부분 처음 보는 영화들이라는 게 영화를 더 어렵게 만들었다. 하지만 해당 영화는 다큐멘터리이기 때문에 그러한 목적을 생각한다면 엔니오 모리꼬네에 대해서 알아감에 있어서 가장 최적화된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영화 음악을 좋아하거나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에 관심이 있다면 혹은 그가 만든 작품들을 많이 본 사람이라면 꽤나 흥미롭고 경이롭게 감상 할 수 있는 영화가 될 것 같다.
<엔니오 : 더 마에스트로> 스틸 컷 [출처: 씨네랩]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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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신경쇠약 직전의 뱀파이어(2014)> 리뷰
다비드 뤔 감독의 <신경쇠약 직전의 뱀파이어(2014)>는 할리우드에서 그려내는 신세대 뱀파이어 -인간 흡혈을 거부하거나, 인간 사회를 동경하며 적극적으로 참여하려 하는-와 달리 고딕풍 유럽 전설의 냄새를 잊지 않은 작품이다. '노스페라투(Nosferatu)'라는 별칭까지 활용하며 지극히 전통적인지라 현대에 이르러선 오히려 잊히고 만 뱀파이어의 전승을 구현한다. 마늘을 기피하거나, 강박적으로 숫자를 세고 관 속에서 잠들며, 햇볕을 피해야 한다던가, 누군가의 장소에 들어가기 전 반드시 허락을 받아야만 하는. 그러면서도 감독은 뱀파이어에게 숙명적으로 따라오는 '떠도는 자'의 운명을 삭제하고 범접 불가능한 초월자의 모습 대신 병적인 모습을 의도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영화의 무게를 반감시켰다. 이에 <신경쇠약 직전의 뱀파이어>는 가벼운 코미디로 즐기는 데에도 무리가 없을 뿐만 아니라 뱀파이어 소재를 다룬 여타 다른 작품처럼 인간 존재/주체에 대한 인식론적 담론 위에서 이해해도 괜찮을 듯하다.
이야기의 골자는 이렇다. 수백 년을 살아온 뱀파이어 폰 쾨즈뇜 백작(토비아스 모레티)은 자신의 부인인 엘사(자넷 하인)와의 삶에 염증을 느낀 지 오래다. 백작부인은 스스로의 모습을 잊은 지 오래인지라 끊임없이 쾨즈뇜 백작에게 자신의 외모를 묘사해달라고 요구하는데, 그 한 두 마디조차 이젠 지겹기 그지없다. 그런 그가 햇볕에 스스로를 내맡겨 자살하지 않은 까닭은 그저 오래전 환생을 약속한 연인 나딜라 때문인데, 끝을 알 수 없는 기다림에 지친 그는 프로이트 교수(칼 피셔)에게 심리 상담을 요청한다.
프로이트 교수에게 찾아오는 환자는 여럿이지만, 그의 집에 드나드는 또 다른 한 사람이 있으니 바로 화가 빅토르(도미닉 올라이)다. 그는 프로이트가 상담하는 환자의 꿈을 들으며 화폭에 옮긴다. 그런데 늑대인간과 관계를 맺고 어두운 숲 속을 헤매는 인물의 모델은 동일한 인물이다. 바로 자신의 여자 친구 루시(코넬리아 이반칸). 빅토르는 눈을 감고도 루시를 완벽하고도 아름답게 그려낼 수 있지만, 정작 루시는 빅토르가 그린 자신의 초상화를 못마땅해한다. 빅토르는 갈색 머리칼을 묶고 바지를 즐겨 입는 루시를 '있는 그대로' 재현하지 않고, 자신이 소망하는 구불거리는 금발과 드레스를 입은 모습으로 그리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뱀파이어를 다룬 영화/문학은 이분법적 구도 위에서 성립한다. 선과 악, 질서와 혼란 등이 그 간결한 예시다. 뱀파이어의 존재 자체가 불가능성을 상정하며 인간 존재가 꿈꿀 수 없는 극단의 세계를 기반으로 하니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예컨대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에서 묘사하는 뱀파이어는 죽은 자의 귀환을 이끌며 혼란을 발생시키는 두려운 자로 인간과 대비되었고, 영화 <뱀파이어와의 인터뷰(1994)> -원작은 앤 라이스의 소설이지만, 이 글에선 영화에 한정하여 이야기하도록 한다- 에서 뱀파이어 루이와 레스타는 뱀파이어로의 삶을 선택하였음에도 끝없는 허무와 혼란에 방황하고, 클라우디아는 성장과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고착화된 시간 속에서 참혹함을 느낀다. 이렇듯 뱀파이어 세계와 인간 세계의 뚜렷한 대비는 독자/시청자인 우리가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지를 다시금 돌이키게 되는 계기가 되곤 하는데, <신경쇠약 직전의 뱀파이어>는 그 궤가 다소 다르다. 뱀파이어가 사는 세계와 인간이 사는 세계의 레이어는 분명히 겹쳐있고, 그들이 영위하는 사회의 경계선은 불분명하다. 이러한 배경이 성립될 수 있었던 까닭은 영화를 이끄는 주요 동력은 뱀파이어/인간 세계의 대비가 아니라, 등장하는 주요 인물 각자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욕망이란 사회를 꾸리는 종족이라면 보편적으로 발생하는 무엇이지 않던가.
이러한 전략을 위해 뱀파이어는 인간을 압도하는 존재로 설정되지 않았다. 물론 이슬람 광신도에게 사망했다는 연인 나딜라의 이야기나 성에 사는 귀족으로 이미지화된 쾨즈뇜 백작의 모습은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를 떠오르게 하는 대목이며, 한 마리의 야생늑대처럼 빠르고 강하며 흡혈을 망설이지 않는 백작부인의 모습은 뱀파이어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는 전설을 떠올리게끔 한다. 그러나 뱀파이어의 능력은 위계질서를 만들 만큼 강력하지 않다. 물리법칙을 어기는 종족임에도 백작은 심리적으로 지쳐 상담을 필요로 하거나, 과거에 잃은 사랑을 기다렸으며, 백작부인은 자신의 모습을 잊어 인간 화가 빅토르를 찾아간다. 자신의 욕망에 집중하는 뱀파이어는 결코 완전한 존재가 아니다. 더군다나 영화는 뱀파이어의 흡혈 장면에서 선악을 논하지 않고, 범법을 무신경하게 저지르는 뱀파이어의 고뇌에 대해 초점을 맞추지도 않는다. 영화 제목에 '뱀파이어'가 삽입되어 있고, 사건의 시작이 첫사랑을 잊지 못한 폰 쾨즈뇜 백작에게서 비롯되었다 하더라도, 뱀파이어라는 존재는 대상화된 타자이다. 달리 말하자면, 감독이 주목하는 인물은 다름 아닌 루시-혹은 루시의 욕망-다.
위에서 말했듯 루시는 갈색 머리칼을 묶고, 바지를 입은 차림으로 등장하는데, 레스토랑에서 점원으로 일하는 자신의 모습에 긍정하는 여성이다. 그렇기에 자신이 어떤 모습이든 사랑하겠다고 말했으면서도 은연중에 변화를 갈망하는 빅토르의 이중적 행태에 분노한다. 이런 상황에서 루시와 폰 쾨즈뇜 백작이 만난다. 프로이트 교수의 집에 놓은 루시의 초상화를 발견한 백작은 그가 자신의 옛사랑 나딜라와 놀라우리만큼 똑같이 생겼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챈다. 빅토르가 캔버스 위에 상상 속 루시를 구현했다면, 폰 쾨즈뇜 백작은 기억 속 나딜라를 루시를 통해 복원하고자 한다. 두 남자는 모두 루시 앞에서 사랑을 논하지만, 루시라는 인물이 지닌 본연의 욕망(존재하는 그대로 사랑받고자 하는 소망)은 거듭 소외된다.
백작부인의 욕망 역시 영화 내에서 소외당하는 듯 보이나, 이는 백작부인 개인으로서의 소외라기보단 뱀파이어 종족 자체의 불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라 보아야 합당할 것으로 보인다. 백작부인은 '여성 뱀파이어'로서 영화 내에서 전통적인 두 가지 역할을 수행한다. 첫째, 그는 폰 쾨즈뇜 백작보다 더 야성적으로 묘사됨으로써 사회가 관습적으로 요구하는 남녀의 역할을 전복하는, 완전한 괴물로서 기능한다. 둘째, 그럼에도 자신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라고 백작에게 요구하고, 루시와는 달리 치장에 매달림으로써 언뜻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다움을 잃지 않은 존재로 나타난다. 즉 백작부인은 한 명의 독자적인 개인이라기보다는, 문화 속 '여성 뱀파이어' 그 자체의 현현이기에 어떤 수를 써도 자신을 볼 수 없는 종족의 한계를 넘고자 하는 '채워지지 않는 자아의 욕구(박일아)'를 끊임없이 소망한다. 백작부인은 그러하므로, 최은주(2010)의 표현과 같이 "결코 존재가 가능하지 않은 존재"임을 증명하는 개인이었고, 욕망을 이뤄내지 못한 육체는 끝내 소멸한다.
반면 루시는 기나긴 여정 끝에 자신의 욕망을 성취한다. 굳이 '기나긴 여정'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이유는 루시가 뱀파이어가 되는 일이 적지 않게 고달팠기 때문이다. 그는 백작부인에게 물린 이후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프로이트 교수의 침대에 놓인다. 그곳에서 흡혈 충동을 느끼고, 인간과는 다른 힘을 얻었다는 우연한 깨달음을 통해 자신이 뱀파이어로 변했음을 알게 된다. 이 과정에서 루시는 자기 존재에 대해 조금도 섬뜩함을 느끼지 않는다. 낯섦에 방황하지 않고 루시는 오히려 자신의 힘을 긍정한다.
루시가 느낀, 기존의 정체된 자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해방감은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에서 루이가 한 선택과는 결이 다르다. 루이가 허무를 벗어나기 위한 일종의 도피성 선택을 하였다면, 루시는 뱀파이어로서 더욱 삶을 풍성하게 살 수 있음을 깨닫고 '뱀파이어 되기'와 '뱀파이어로 살기'를 선택한 셈이므로. 특히 뱀파이어로 변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피를 수혈하면 돌이킬 수 있다는 옵션이 존재했다는 점에서, 루시의 '뱀파이어 되기'는 일종의 선택지에 불과할 뿐 운명론적 관점에서 벌어지는 유일하고도 단일한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루시가 뱀파이어로 변했던 첫 번째 순간은 어떠한 정보도 없이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었으나 두 번째 순간, 루시는 쾨즈뇜 백작에게 선언한다. 뱀파이어로 살고 싶으며, 나딜라도 루실라도 아닌 루시로 살 것이라고.
이미지 출처: IMDb
많은 영화에서 뱀파이어로 변한 인간은 자신의 쾌락을 위해 윤리를 손쉽게 저버리고, 욕망을 발현하곤 한다. 그런데 <신경쇠약 직전의 뱀파이어>는 다르다. 이 영화는 뱀파이어를 사회의 거부, 개인의 불순응, 종족의 본능 등의 사유로 '떠도는 존재'라기보다는 일부분 '정착이 가능한 존재'로 묘사했다는 점에서도 한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루시의 욕망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것'이기 때문이진 않았을까?
강정구, 김종회 (2011)는 뱀파이어라고 하는, 현실에 부재하는 종족을 상상하고 창작물을 자아내는 일은 곧 "타자를 경유하여 인간 그 자신에게 향하는 것"이라 말한 바 있다. 이 영화에서 '뱀파이어'라는 존재를 빌어 전달하고 싶었던 인간/인간사회의 단면은 무엇이었을까? 이는 관람하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단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루시가 힘을 얻었을 때, 공포로 가득한 세상을 열어젖히지 않았다는 게 마음에 든다고. "‘나’의 이야기와 분리될 수 없는 너(이혜정, 2020.)"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지 않은 것이 좋다고.
★★★
참고문헌
강정구, 김종회 (2011). 뱀파이어라는 타자에 대한 상상. 비평문학(40), 7-30
박일아. (2013)."내면화를 통해 장르개념을 탈피한 새로운 유형의 뱀파이어 영화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이후 변화를 중심으로-" 현대영화연구 9.1 pp.32-56
윤은애 (2010). 라캉(Jacques Lacan)과 여성의 히스테리적 글쓰기. 우리문학연구, 29, 327-363.
이혜정 (2020). 내러티브 윤리학과 여성주의 주체 – 내러티브 윤리학은 여성주의 주체에 어떻게 기여하는가 -. 철학연구, 127-148.
최은주 (2010). 「성별화된 몸, 그 의미와 잉여의 두께-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 영미문화 제10권 3호 한국영미문화학회 275-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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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마이 뉴욕 다이어리(2020)> 리뷰
고백한다. 뉴욕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데도(어쩌면 그렇기 때문일지도) 나는 이 도시에 대해 막연한 환상을 품고 있다. 우뚝 솟은 마천루에 온갖 신경을 빼앗기지 않을까 싶으면서도, 어쩐지 내 안의 허영심을 충족시켜줄 것만 같은 세계적인 도시. 괜히 맥북이나 고풍스러운 책 한 권을 들고 센트럴 파크에 앉아 있어야 할 것만 같은, 그런 곳.
온갖 정보가 발달해 사실 뉴욕 지하철은 한국의 것보다 못하고, 뉴욕이든 서울이든 결국 서양화된 도시이기에 생각보다 ‘그럴싸한 건’ 없다는 말을 숱하게 들었음에도 미디어가 만들어낸 환상적 이미지는 내게서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 영화 속 주인공 조안나(마가렛 퀄리)는 어떨까.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1989)》가 개봉한 시점에서 고작 몇 년 지나지 않았던 시절의 미국에서 자란 조안나는, 더군다나 작가 지망생이기까지 하다. 좁은 플랫에서 원고와 싸우고, 카페에서 글을 쓰는 친구들과 예술적 교감을 나누며 청춘을 개척하고픈 열망을 지닌 청춘. 그에게 뉴욕이 어떤 의미였을지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나 역시 일정 부분 그런 꿈이 있기에, 더욱더.
조안나가 뉴욕에 있게 된 건 우연과 운명의 합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안나가 이토록 오래 머물게 될 줄은, 조안나도 그의 친구 제니(세아나 커스레이크)도 짐작하지 못했으므로. 잠시 머물고자 했던 뉴욕이었으나 조안나는 안정적이되 심심하기만 한 버클리에서 뉴욕으로 아예 거처를 옮긴다. 충동적인 결정이었던 듯 보이나 그는 빠르게 적응한다. 다만, 많은 이들이 오가는 대도시는 이방인에게 열린 공간이지만, 열려있다는 것이 늘 환대의 의미와 동일하진 않다는 것을 조안나가 깨닫는 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렇듯 마이 뉴욕 다이어리(원제: My Salinger Year)는 주인공 조안나의 여정을 따라가는 성장 드라마다. 평범한 건 싫고, 특별해지고 싶다는 치기 어린 소망을 품은 주인공이 마주한 뉴욕이라는 흥미로운 공간. 그는 새로운 사랑을 찾기도 하고, 일자리를 구하기도 하지만, 그의 이름으로 렌트를 구한 집은 어딘가 어설프고, 작가를 꿈꾸는 그가 하는 일은 팬레터에 기계적으로 답장을 보내는 일에 불과하다. 이윽고 조안나는 결심한다. 진심이 담긴 팬레터에 'JD 샐린저 씨는 팬레터를 받지 않습니다, ' 따위의 무의미한 대답을 타이핑하는 일을 지속할 수 없다고. 그러자 언뜻 잔잔해 보였던 일상에 파문이 일기 시작한다.※ 이하 스포일러 주의
조안나가 일하게 된 곳은 마가렛(시고니 위버)의 작가 에이전시다. 마가렛은 조안나를 고용하는 순간부터 단호하게 말한다. 작가(지망생)는 자신의 비서로 고용하지 않는다고. 조안나는 김이 샐 법도 한데, 복도에 걸린 애거서 크리스티나 스콧 피츠제럴드의 사진에 전율을 느낀다. 실망도 하지만, 조안나는 꿈을 버리지 않는다. 마가렛이 자신을 알아봐 주고 좋은 기회를 마련해 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아주 하지 않았던 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조안나는 자신이 읽어본 적도 없는 J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에 매혹된 이들에게 경직된 답장을 쓰던 중 그들의 진심에 성심성의껏 답하기 시작한다. '홀든'이라는 주인공의 이름도 적극적으로 인용하며 제법 그럴싸하게 쓰기도 하고, 절박해 보이는 학생에겐 교훈적인 답장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답장을 받은 이가 뉴욕 사무실까지 찾아와 되묻는다. 내 진심이 담긴 편지를 멋대로 읽어본 당신의 답장이 규격화된 답장보다 더 나을 이유가 무엇이냐고.
조안나 래코프라는 이름이 소녀의 입술 밖으로 튀어나온다. 우스꽝스러운 이름이라고 했다. 빈정거림이 분명한데도 조안나는 그 말에 반박하지 않는다. 자신은 허락되지 않은 대화에 끼어든 이방인에 불과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가 사라지고 조안나는 복도를 걷는다. 조안나의 소망 중 하나가 '특별해지는 것'이었다는 것을 상기해보자. 그는 뉴욕이라는 메트로폴리탄에서 작가라는 단독자가 되고자 버클리의 삶을 버렸고 버클리에서 만났던 남자 친구와는 연락을 줄였다. 그러나 조안나의 손에 남은 건 무엇인가? 그는 등단한 시인이라는 것을 감췄고 영혼에 반하는 일을 주 업무로 삼았다. J.D. 샐린저가 그에게 당신은 작가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시인이라고 얼떨결에 대답했던 조안나는 하루에 15분씩 자신만의 글을 쓰긴커녕 타인의 삶을 흉내 내어 답장하는 일만 지속하고 있었으며, 상사인 마가렛에겐 조안나라는 유능한 비서로 인식되기보단 '샐린저에게 익숙한 환경'으로 인식될 뿐이었다.
조안나가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뉴욕에 와서조차 오래도록 읽지 않았다는 건 적지 않게 흥미롭다. 업무를 진행하며 왜 샐린저의 팬들이 이 책에 그토록 집착하는지 궁금했을 법도 한데 말이다. 그러나 이 지점이야말로 지금껏 조안나의 성장이 지연된 이유일 것이다. 그는 많은 일을 겪으면서도, 그 심장부로 파고들지 않았다. 워싱턴으로의 짧은 귀향과 돈(더글라스 부스)의 부재를 경험한 후에야 조안나는 자신이 돈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대니얼(콤 피오레)의 죽음을 통해서야 조안나는 인간 마가렛을 알게 된다. 작가 에이전시에서 일하는 것과, 뉴욕에서 일상을 이어가는 것은 허영심을 충족시켜줄 수 있을 진 모르겠으나 작가라는 꿈을 이뤄주진 못한다. 꿈은 외면을 모방하는 것만으로 성취할 수 없는 것이므로.
타인의 마음뿐만 아니라 자신의 마음 깊은 곳까지 살펴본 조안나는 우울을 떨치고 나아갈 동력을 얻었다. 친구 제니가 뉴욕을 떠나는 것을 배웅하며 연인이었던 돈과 동거한 공간을 떠나지만, 그것이 버클리로 돌아간다는 의미는 아니다. 또한 후임자가 나타날 때까진 맡은 업무를 모두 하겠다고 말한 만큼, 조안나의 출근은 순식간에 중단되지 않는다. 하지만 카메라는 자신의 이름이 적힌 원고를 소중히 든 조안나를 똑똑히 비춘다. 뉴요커 건물에 도착한 조안나의 원고가 어떤 미래를 맞이할지 우리는 모르지만, 감독은 스크린을 통해 조안나를 작가로 호명했다. 그렇기에 관객은 알 수 있다. 샐린저가 말했듯 조안나는 이제 매일같이 자신만의 글을 쓸 것이라는 걸. 꿈에 그리던 모습으로 거듭났다는 사실을.
《마이 뉴욕 다이어리》는 자전적 에세이를 바탕으로 하기에, 영화의 마지막은 너무나 당연한 결말이었다. 그럼에도 러닝타임이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까닭은 영화 곳곳에 녹아 있는 인간적인 유머와, 90년대의 뉴욕을 겪어본 적 없는 나까지 향수에 젖게 만드는 따뜻한 스크린의 색감 때문이 아닐지. 무시무시하고 악랄한 악역이나, 회복하기 어려울 만큼의 끔찍한 사건 없이도 인간은 성장할 수 있다. 그저 조금만, 조금만 더 본질적인 것에 집중한다면, 우리 역시 조안나처럼 20대를 따스하고 애틋하면서 한편으론 엉뚱하고 우습기도 한 시절이었다고 회고할 수 있으리라 나는 믿는다.
★★★
*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한 후, 주관적 견해에 따라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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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우주의 보존 가능성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서로를 탐색하던 남녀는 연극을 끝내려고 한다. 영원할 것만 같은 미래를 기약하는 두 사람. 하지만 <얼라이드>는 연인이 공유하는 전형적인 에피소드를 예상보다는 적게 나열하고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지금부터다. 끝날 줄만 알았던 연극이 다시 시작되었다는 징후가 포착되는 순간, 완전히 걷어낸 줄로만 알았던 베일이 몇 겹 더 남았다는 섬뜩한 사실에 직면한다. 마리안이 자신을 속여왔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흔적들에도 불구하고 맥스는 현실을 부정한다. 애초에 그에게 각인되어 있던 건, 감정을 연기하는 유능한 공작원의 스킬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숨결과 온기다. 그래서 맥스는 끈질기게 확인해야만 한다. 맥스는 마리안에게 우리 관계는 진실된 것이냐는 질문을 던진다. 마리안은 그만큼 불투명한 인물이다. 단지 그녀가 첩보 공작에 능통하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읊는 대사 한 마디 때문이다. 마리안의 말처럼 감정을 연기하는 일은 진실을 대체할 수 있을까. 서로 밀착한 채 숨소리를 속삭이고 입을 맞추다가도 슬며시 포옹하지만, 그 이면에는 끝내 지워낼 수 없는 긴장감이 맴돌고 있다. 나도 상대를 속이고 상대도 나를 속이는 쌍방의 가면극에서 과연 벗어날 수 있을까.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평생을 첩보와 공작 활동에 몸담아 왔던 두 사람에게 진실과 거짓을 구분 짓는 일은 일종의 숙명이면서 동시에 가장 진절머리 나는 장애물과 같다. 이들 세상엔 감상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 그들의 세계를 지탱하는 건 의구심과 냉혹함이다. 마리안과 결혼하려는 맥스를 향해 동료들은 임무로 맺어진 인연은 위험하다며 회의감을 표출하지 않는가. 맥스와 마리안이 서로의 감정을 공유하고 사랑을 나누는 순간들은 그래서 온전히 투명할 수 없다. 순도 높은 진실 혹은 거짓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건 그런 불투명의 세상을 온전히 수용하는 일뿐이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따지려 드는 순간, 사소한 일상의 순간들이 모두 검열과 판단의 대상으로 돌변하기 때문이다.
소우주의 생성
카사블랑카에서 두 사람이 처음 만나던 때가 떠오른다. 맥스가 어딘가를 바라보는 모습, 맥스의 시점 숏, 그리고 이어지는 클로즈업의 매혹적인 조합. 일찍이 접선 장소로 향하는 동안 연락책은 맥스에게 그가 만날 사람에 관한 두 가지 정보를 건넸다. 자주색 그리고 벌새. 맥스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자줏빛 드레스를 입은 한 여인이 서 있다. 하지만 이내 여인은 프레임을 벗어나 버린다. 재밌게도 이 여인에 가려져 있던 다른 사람이 맥스의 눈을 사로잡는다. 역시 자주색 옷이다. 의자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자줏빛 드레스를 입은 여인의 뒤태. 그리고 이어지는 숏에는 옷에 수놓인 벌새 그림이 있다. 그리고 카메라가 시선을 위로 옮기면, 그의 눈길을 알아챈 여인이 고개를 아주 살짝 돌려 곁눈질로 맥스와 눈을 맞춘다. 두 사람은 접선 장소에서 서로 만나야 하는 사람에 관한 정보를 사전에 고지 받았다. 맥스가 마리안을 확인한 뒤 미소를 살짝 머금으면 마리안도 따라서 미소를 지으면서 합의된 퍼포먼스가 시작된다. <얼라이드>의 리듬을 재단하는 구간이 있다면, 바로 이 장면이다. 아니 정확히는 마리안이 맥스의 시선을 감지한 순간부터 두 사람이 위장 결혼 연기에 돌입하기 바로 직전까지의 시간이 아닐까.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지만, 한편으로는 상대를 향한 미약한 믿음과 기대감을 드러내야만 한다. 평생을 위태롭게 부유하는 스파이들은 팽팽한 긴장감을 음미하는 존재들이다.
사막의 모래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차 안에서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떠올려 보자. 카메라는 아주 천천히 돌면서 두 사람을 응시한다. 이들의 시공간에 녹아들고자 하는 욕망이 반영된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장면은 호흡이 긴 롱테이크가 아닌, 짧은 숏이 계속해서 분절적으로 이어 붙은 형태로 구성된다. 마치 이들의 관계를 형상화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들만의 세계 속에서 그들은 서로 감정을 나누고 있지만, 그들의 소우주에서 벗어난 외부의 시선이 개입되는 순간 이 불안정한 세계는 온전히 유지될 수 없다. 따라서 영화는 순순히 인정하는 셈이다. 그들의 관계 자체를 바라볼 때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일은 중요치 않으며, 우리는 그들의 시선과 몸짓을, 그리고 그들 사이의 무드나 기류 등을 바라볼 수는 있지만, 그 자체로 불완전한 상태에 놓여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그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자유는 어쩌면 돌이킬 수 없는 이벤트가 발생하기 직전에만 감당할 수 있는 찰나의 순간들이다. 말하자면 유예된 시간일까. 불현듯 팀 버튼의 <미스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2016)이 떠오른다. 이 영화에서도 역시 맥스나 마리안과 같은 존재들이 등장하는 건 아닐까. 2차 세계대전이 진행 중이던 1943년의 어느 날. 한 어린이집이 독일군 전투기의 폭격으로 파괴된다. 아이들을 보살피는 페레그린 선생님은 자신의 특수 능력을 이용해 타임 루프를 만들어낸다. 폭격을 맞아 집이 파괴되기 직전까지의 시각으로부터 역으로 24시간을 되돌린다. <얼라이드>의 스파이들은 팀 버튼의 판타지 설정에 노출된 존재들은 아니지만, 그들 역시 나름대로 ‘폭격 직전의 24시간’을 만끽하고 있는 건 아닐까. 마리안과 맥스가 그들에게 닥쳐올 운명적인 순간들 사이를 일종의 폭풍의 눈처럼 여기고 있지 않나 싶다. 그래서 그 순간만큼은 그 어떤 것도 개입될 수 없는 두 사람만의 시공간, 즉 둘만의 소우주로 변모한다.
유능한 스파이들과 어린이집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소우주를 감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페레그린과 아이들은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일과를 실행하고, 폭격 시간이 가까워지면 뒷마당에 모두 모여 시간을 되돌린다. 그렇게 다시 살아갈 하루를 얻는다. 페레그린이 시간을 되돌리는 데 성공하면, 아이들은 마치 신년 행사를 즐기듯 환호하면서 유예된 시간의 입구에 들어서는 일을 기념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폭격을 앞둔 환호라니! 전쟁이 가져오는 죽음의 기운과 삶을 보존할 수 있는 소우주의 생성이 충돌한다. 이 감정적 파편의 얽힘으로 인해 생성되는 무드가 <얼라이드>에서 다른 방식으로 변주된 듯하다. 물론 두 영화의 연결고리는 경력이 탄탄한 연출자(로버트 저메키스와 팀 버튼)가 같은 해에 내놓은 할리우드 영화라는 우연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두 영화가 전쟁으로 얼룩진 시대상마저도 공유한다는 사실이 맥스네 가족과 어린이집 사람들을 이어준다. <얼라이드>에서도 어린이집이 직면했던 순간과 유사한 장면이 나온다. 포탄에 맞아 작동 불능 상태가 된 독일군 전투기가 스파이 부부의 집을 향해 추락한다. 다행히 비행기는 두 사람의 집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간다. 맥스와 마리안은 공포에 질려 몸을 잔뜩 움츠린 채 그 찰나를 버텨낸다. 비행기는 집과 충돌하지 않았고, 그들은 생존했다. 어린이집 아이들은 살아남지 못했고, 페레그린은 시간을 되돌렸다. 그래서 <얼라이드>에서 중요한 건 카메라가 짧은 시간 동안 온갖 감정들이 스쳐 가는 가족의 얼굴을 분명하게 담아냈다는 사실이다. 운명적인 사건이 발생하기 직전 생성되는 소우주, 그 유예된 시공간이 뿜어내는 인상이 <얼라이드>를 매혹적인 텍스트로 만든다.
의심과 균열: 경유하는 이미지들
격추된 비행기가 두 사람을 공포에 떨게 했던 상황보다 훨씬 전부터 이미 균열의 징조가 감지된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조그마한 불신이 개입되는 순간, 끈끈했던 관계는 급격하게 동력을 잃는다. 결국, 그들의 관계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모호함을 안은 채 서로의 흐릿한 형상을 그 자체로 긍정하는 일이다. 그래서 <얼라이드>는 묘한 영화다. 한편에는 감정선을 따라 들끓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박자를 타는 멜로의 텐션이, 다른 한편에는 진실과 거짓을 오가면서 상대를 교란하거나 교란당하는 난감함이 도사리고 있다. 이에 따라 <얼라이드>의 무드를 재단하는 건 불투명한 이미지들이다. 명징한 존재감을 피력하는 이미지가 아닌, 그 자체로 의뭉스럽고 부정확한 지점을 굳이 숨기려 들지 않는 이미지들 말이다. 매개물과 경유지를 거친 뒤 도달하는 불투명한 형상들이 영화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맥스의 미소가 슬쩍 번지는 장면. 브래드 피트라는 배우의 관록과 그가 연기하는 맥스에 들러붙은 캐릭터의 매력이 섞여 생긴 묘한 물성이 스크린 바깥으로 확장된다. 배우로 인해 맥스의 이미지가 형성되는 건지, 맥스로 인해 브래드 피트의 이미지가 재감각되는 건지 헷갈리게 될 수밖에 없는 순간이 반드시 찾아온다. 이건 마리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정체를 숨긴 자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아는 배우 마리옹 코티야르다. 영화 속 맥스와 마리안은 그만큼 투명하게 감각될 수 없는 의뭉스러운 인물이 된다. 모호한 속성의 인물들이 서로 주고받는 엷은 미소는 작전의 출발점이다. 이 미소엔 실수 없이 부부 연기를 무사히 완수하자는 공동의 의도 또한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또렷할 수 없는 <얼라이드>에선, 이 미소마저도 몇 겹의 베일로 섬세하게 둘러싸인 듯 적당히 흐릿한 감정을 형상화한다. 두 사람의 미소에 무엇이 배어 나올까. 매력 있는 상대를 봤을 때 묻어 나오는 자연스러운 호감일 수도 있고 상대의 정체를 단번에 꿰뚫었다는 스파이의 육감일 수도 있다. 그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은 가운데 확실한 한 가지가 있다. 두 사람이 지금 이 순간을 함께 보내야 한다는 사실. 믿든 안 믿든 마음에 들든 안 들든, 두 사람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다. 만나야만 하는 상대를 만나게 된 것. 두 스파이를 파고드는 이 운명론적인 무드가 불확실한 기운을 견뎌낸 채 보존될 수 있다.
두 사람은 언제나 모호한 요소를 있는 그대로 수용한 채 서로를 응시한다. 이때 잘 보존되던 소우주에 자그마한 균열이 생기는 원인은 모두 인식의 오류로부터 비롯된다. 그런 맥락에서 <얼라이드>의 몇몇 구간들을 유심히 살필 때, 거울에 비친 형상과 반사된 이미지들이 자연스레 포착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마리안은 맥스에게 사람들을 어떻게 속여야 하는지, 어떤 착장과 말투로 파리지앵 다운 특성을 각인시켜야 하는지 상세히 일러준다. 이때 옷장 문짝에 달린 거울과 화장대의 거울에 맥스와 마리안의 형상이 편입된다. 문득 눈에 띄는 장면들이 있다. 임무를 위해 맥스에게 필요한 정보를 건네주는 마리안의 모습과 거울에 비친 맥스가 함께 담긴 투 숏, 그리고 맥스가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듣고 있는 상황에서는 화장대 거울에 말을 이어가는 마리안의 형상이 부분적으로 담기는 구간들이 보인다. 하지만 중요한 건 따로 있다. 마리안이 맥스의 목에 목걸이를 채워주는 장면만큼은 자질구레한 대사가 없다. 여기엔 두 사람의 물리적 거리가 가까워졌다는 사실, 그리고 가까워진 거리를 의식하는 호흡과 시선을 잠시 교환하면서 생기는 묘한 긴장감만이 있다. 위장과 거짓으로 둘러싸인 거울 이미지들 틈으로 진솔한 감정의 텐션이 지배하는 물리적 감각 교환이 은근슬쩍 끼어든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맥스는 마리안이 뒤돌아 탈의하는 모습을 옷장 문짝의 거울을 통해 바라본다. 이때 맥스의 질문은 사실 후반부에 결정적인 단서로 작용해 두 사람의 소우주를 뒤흔드는 어떤 흐름과 맞닿아 있다. 마리안은 흘긋 뒤를 응시하고 그 모습은 거울을 통해 맥스에게 가닿는다. 정체를 숨긴 마리안은 어쩌면 경유하거나 매개되는 이미지를 통해 처음부터 주장하는 것 같다. 맥스는 과연 마리안을 똑바로 응시할 수 있었던 걸까? 애초에 거울을 거쳐서 불완전하게 응시할 수밖에 없던 건 아닐까. 과연 맥스에게 진실은 남아 있는 걸까. 의심하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상대의 일거수일투족을 훔쳐보게 된다. 맥스는 그래서 세수를 한 뒤 거울을 통해 마리안을 바라보려고 한다. 똑바로 볼 자신이 없다는 두려움, 확신과 의심이 뒤엉킨 복잡한 속내는 바로 거울을 거쳐서 도달하는 시선의 불완전한 몸부림으로부터 잘 드러난다. 나도 상대를 온전히 응시할 수 없고, 상대도 나를 온전히 응시할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되면 어느샌가 두껍게 쌓인 베일을 건드릴 수 없는 상태가 된다. 그렇다면 남은 건 다소 극단적인 방식이다. 소우주를 유지하거나 파괴하거나. 타협이 있을 수는 없다. 그들은 이미 많은 기회를 놓쳐버렸다. 맥스든 마리안이든 두 사람에게 어쩌면 이건 필연적인 결말일 수밖에 없다.
소우주의 파괴
비행기 추락 이후, 맥스는 끝내 비극적인 운명에 한 발 더 다가간다. 진실을 파헤치는 그가 마주한 건 그들의 소우주가 더는 존속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격추되는 비행기로부터 살아남은 순간이 진작에 그들의 운명을 암시하고 있던 건 아닐까. 일종의 경고인 셈이다. 맥스는 경고를 받고도 소우주를 보존하려는 욕망 대신 깨부수려는 본능에 몸을 맡긴다. <얼라이드>는 맥스와 마리안의 세계에 관한 영화다. 그들의 소우주가 생성되고 보존되는 듯하다가도 끝내 균열을 수습할 수 없어 파멸로 향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 <얼라이드>의 매력을 극대화하는 요소는 그 어떤 장르 요소도 아닌, 바로 두 사람의 시공간을 바라보는 방식에서 비롯되는 건 아닐까. 그들의 소우주는 필사적으로 지켜내야만 하는 의지로 지탱되지 않는다. 그저 운명의 흐름, 우연의 개입이 느슨해진 필연의 논리. 이 정해진 경로에서 인물들은 부유하고 진동하고 오인하고 방황한다. 그러다가 베일이 마침내 걷히는 순간, 두 사람은 각자 운명을 수용한다. <얼라이드>의 인물들은 비극적인 결말을 온전히 곱씹은 뒤 관객과 작별을 고한다. 맥스의 이야기는 다시 의뭉스러운 베일 속으로 매몰된 채 딸에게 구전될 것이다. 그리고 마리안의 이야기는 내레이션과 함께 서서히 옅어져 갈 수밖에 없다. 끝내 관객을 파고드는 건 흑백 사진이다. 한 장의 사진마저도 역시 진실과 거짓의 판별이 불가능해진 어떤 소우주의 보존 가능성을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어쩌면 맥스와 마리안만이 그 사실에 가장 가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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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 비판 영화 추천 '다음 소희' (feat. 전주 콜센터 현장실습생 자살사건)
다음 소희
23.02.08 개봉
드라마, 15세 관람가
한국, 138분
감독: 정주리
출연: 김시은, 배두나 등
칸 영화제 국제피평가주간 폐막작으로 선정된 '다음 소희'!
전주 콜센터 현장실습생 자살사건을 소재로 하였대요
영화관 개봉했을 때부터 너무 보고 싶었는데
드디어 넷플릭스에 떠서 보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실화를 기반으로 하는 것들은,
특히나 이런 가슴 아픈 이야기를 소재로 하는 것들은
재미있다 재미없다 평가하기도 망설여지더라고요
영화를 영화로만 평가해야 하는데도 괜히 마음이 약해져서 ㅠㅠ
냉정하게 말해 보자면 평타는 친 것 같습니다
실화를 소재로 삼는 작품들은 어느 정도 픽션을 가미해서
재미있게 만들거나, 더 슬프고 화나게 만들던데
'다음 소희'는 딱 이야기 자체를 보여 준 느낌이었거든요
담담하고 우악스럽지 않은 영화입니다
이제 사무직 여직원이다?"
춤을 좋아하는 씩씩한 열여덟 고등학생 소희
졸업을 앞두고 현장실습을 나가게 되면서 점차 변하기 시작한다
"막을 수 있었잖아 근데 왜 보고만 있었냐고"
오랜만에 복직한 형사 유진
사건을 조사하던 중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그 자취를 쫓는다
같은 공간 다른 시간,
언젠가 마주쳤던 두 사람의 이야기
우리는 모두 그 애를 만난 적이 있다
영화 <다음 소희> 줄거리
전주 콜센터 현장실습생 자살사건 먼저 설명 드리자면
2017년 1월 특성화고 졸업을 앞두고 있었던 학생이
인터넷, 휴대전화 계약 해지를 방어하는 'SAVE팀'에서
현장 실습생으로 일하며
우울증과 업무 스트레스에 시달렸는데요
현장실습 표준 협약서에 적힌 근무 시간 7시간도 지켜지지 않고
160만 5천 원이라는 월급도 지켜지지 않았대요
게다가 할당된 고객 객응대 횟수를 못 채웠다는 이유로
야근하는 일이 잦았다고 합니다
그 결과 근무 4개월 만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었고요
다음 소희의 줄거리도 이와 똑같습니다
추가한 게 있다면 소희가 춤을 좋아한다는 것 정도죠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춤이었던 거 같아요
춤을 추다가 형사인 유진을 만나게 된 거기도 하고요
다만 소희만 유진이 춤추는 걸 지켜봤고
유진은 소희에게 관심이 1도 없던 캐릭터였기 때문에
소희의 사망에 분개하는 게 개연성에 맞나? 싶긴 했어요
유진이 세상에 관심 없는 자신을 자책했기 때문이라면
또 말이 되긴 하지만요?
저는 이런 영화가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세상에는 차별받는 사람이 너무 많고
또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실습생이라는 이유로 인센티브를 받지 못하고
유일한 대기업 취업자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그만두지도 못하게 하고......
집은 가난해서 소희가 그만둘 수 있는 상황도 아녔고요
그렇다면 소희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누가 있나요?
(영화 내에선) 오로지 유진뿐이었습니다
유진 역시 너무 늦게 알아 버려서 타이밍을 놓쳤지만
소희의 남자 친구인 태준에게는 자신이 힘이 되어 주죠
어른이 아이에게 꼭 보호자가 돼야 한단 건 아닙니다
그저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눈길 한 번 주는 것만으로도
아픔이 있는 사람들에겐 큰 힘이 될 수가 있잖아요
그리고 그 시작은......
콜센터 직원에게 막말하지 않는 것부터 아닐까요
받을 때 안녕하세요~ 끊을 때 감사합니다~ 하는 것만으로도
그 분들껜 큰 감동으로 다가온다고 하더라고요
다음 소희가 생기지 않도록
관심과 변화가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하는데
이게 딱!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김시은 님 보니하니 오디션 때부터 봤었는데 ㅋㅋㅋ
이렇게 연기 뛰어난 배우로 성장하셨을 줄은 몰랐어요!
배두나 님 연기력은 당빠 믿고 보는 거였는데
소희 역 김시은 님이 다 이끌어 주신 영화 아닌가 싶습니다
*줄거리: 4/5점
*연출: 2/5점
*영상미: 1/5점
*OST: 1/5점
*연기: 4/5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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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잘라야 할 텐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바다 너머, 인간이 사는 육지 세상이 궁금한 인어공주 '에리얼'(할리 베일리). 어느 날, 그녀는 우연히 바다 위로 올라갔다가 폭풍우를 만나 난파된 배에서 '에릭 왕자'(조나 하워킹)의 목숨을 구한다. 에리얼은 첫눈에 그와 사랑에 빠지지만, 아버지이자 바다의 왕 '트라이튼'(하비에르 바르뎀)은 절대로 바다 위 인간 세상에 나가서는 안 된다고 엄명을 내린다. 이에 에리얼은 바다 마녀 '울슐라'(멜리사 맥카시)와 거래해 목소리를 잃는 대가로 다리를 얻어 육지로 향하고, 새로운 운명을 찾아 나선다.
모두를 실망시킨 <인어공주> 재해석
2010년대 초중반부터 디즈니는 자사 애니메이션 영화를 실사화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이 프로젝트는 많은 흥행작을 만들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정글북>, <알라딘>, <라이언 킹>, <미녀와 야수>는 전 세계에서 10억 달러 이상을 벌었다. 하지만 논란이 가장 많은 영화는 따로 있었다. 바로 <인어공주>다.
<인어공주>는 제작 단계부터 논란의 중심에 섰다. 원작 파괴가 문제였다. 주연을 맡은 할리 베일리는 애니메이션 원작 속 에리얼과 달리 흑인이었다. 에리얼의 빨간 머리도 흑인 특유의 드레드 머리로 바뀌었다. 한쪽에서는 시대적 변화를 반영한 재해석이라고 옹호했다. 반대쪽에서는 원작 파괴라고 비판했다. 에리얼을 닮지 않은 배우가 출연해 리메이크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었다.
영화를 보니 어느 쪽도 만족하지 못할 것 같다. 일단 흑인 인어공주는 나름 자연스럽다. 덴마크가 미국령 버진아일랜드를 식민지로 삼은 역사를 반영해 배경을 카리브 해로 바꿨기 때문이다. 에리얼을 닮은 외모는 아니지만, 할리 베일리의 연기와 노래도 전반적으로 나쁘지 않다.
하지만 비판을 피할 수는 없다. 원작 설정을 재해석하고 변경한 이유를 제대로 납득시키지 못한다. 오히려 당위와 설득력을 부여할 수 있는 대목을 외면한다. 그렇게 월트 디즈니 컴퍼니 100주년 기념작 <인어공주>는 새로운 해석을 기대한 관객도, 원작의 실사화를 바란 관객도 모두 실망시킨다.
공허한 재해석
새로운 <인어공주>가 힘을 준 대목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다양성이다. 에리얼과 에릭의 로맨스는 소통과 다양성을 추구하자는 이야기다. 영화는 에리얼과 트라이튼의 갈등을 통해 다른 문화를 포용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에릭 왕자의 서사를 더해 메시지를 뒷받침한다. 그와 '셀리나 여왕'(노마 두메즈웨니)의 대립을 통해 세상에 존재하는 편견과 선입견을 깨야 한다고 말한다.
에리얼과 에릭의 로맨스는 동병상련에서 시작된다. 편견과 선입견으로 무장한 부모는 자녀를 억압한다. 트라이튼은 인간이, 셀리나는 바다의 신과 인어가 잔인하고 야만적이라고 말한다. 반면에 두 주인공은 그들의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를 동경한다. 다른 문화를 궁금해하고 기꺼이 수용하려 한다. 두려움 없는 그들은 서로의 세상을 배우면서 사랑을 싹 틔운다. 더 나아가 완고한 부모까지도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인어공주>의 재해석은 공허하다. 원작과 다른 이야기가 두드러지지 않아서 메시지가 밋밋하다. 바다와 육지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있었다는 설정이 대표적이다. 트라이튼 왕은 인간이 에리얼의 엄마를 죽였다고 암시한다. 인간 왕국의 왕도 바다 때문에 죽었고, 에릭 왕자도 표류하다가 구조됐다고 언급된다. 영화는 육지와 바다 사람이 서로 배타적인 이유를 설명하면서 갈등을 극복하는 로맨스를 강조한다.
그런데 정작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법이 너무 평이하다. 육지와 바다 사이에 있었던 일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없다. 대사 몇 마디로 그친다. 그러다 보니 추가된 서사는 뇌리를 잠시 스쳐 지나갈 뿐이다. 전반적인 흐름에도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한다. 결국 영화는 인어와 인간의 운명적인 사랑이라는 큰 틀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인간과 인어가 화해하는 결말도 그저 동화다운 교훈을 주는 결말에 그치고 만다.
흑인과 카리브해의 역사
더구나 다양성이라는 주제를 깊게 파고들 수 있는 소재를 손에 들고도 제대로 활용하지 않는다. 흑인 인어공주를 비롯해 카리브 해라는 공간적 배경과 드레드 머리는 손쉽게 소비된다. 이들을 이용해 다양성과 관련된 사회적, 역사적 문제를 깊숙이 살펴보려는 시도는 없다. 그저 관객의 상상력과 지식에 맡길 따름이다.
카리브해는 역사적 맥락이 깃든 장소다. 덴마크 작가 안데르센이 <인어공주>의 원작 동화를 썼고, 덴마크는 제국주의 시대에 카리브해 일대를 식민지로 삼은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령 버진아일랜드가 대표적이다. 중심지인 '샬럿아말리에이'만 해도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5세의 왕비인 헤센카셀의 '샤를로트 아말리에'로부터 이름이 유래했다. 작중 에릭 왕자가 유럽과 교류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총리를 비롯한 지배층 대다수가 백인으로 묘사되는 이유다.
이때 덴마크와 카리브해, 그리고 흑인 주인공이라는 조합은 곧장 한 가지 역사적 키워드를 떠올리게 한다. 바로 노예무역이다. 구체적으로는 아프리카, 유럽 열강,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어지는 삼각 노예무역이다. 덴마크는 영국, 포르투갈 등과 함께 노예무역 당사자 중 하나였다. 카리브해는 아프리카 출신 흑인 노예들의 종착지 중 하나였다. 19세기에 법적으로 금지하기 전까지는.
그런데 <인어공주>는 이런 역사적 맥락을 제거한다. 흑인 노예가 수입되는 시대에 흑인 여왕은 백인 왕국을 통치하고, 백인 왕자는 흑인 인어공주와 결혼한다. 시대상을 고려하면 어색할 수밖에 없는 광경이다. 흑인 인어공주를 등장시키고 배경을 카리브 해로 변경해 놓고도 마치 제작진이 그 함의나 맥락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도 보인다. 영화가 흑인이라는 키워드를 고민 없이 편의적으로 활용하는 듯한 인상이 남는다.
드레드 머리는 단순한 헤어스타일이 아니다
이에 더해 <인어공주>는 에리얼의 머리도 표피적으로 활용한다. 사실 드레드 머리는 단순한 헤어 스타일이 아니다. 아메리카에 정착한 흑인 노예들에게 아프리카 특유의 헤어 스타일은 부끄러운 대상이었다. 드레드(Dread)라는 용어 자체가 '끔찍하다(Dreadful)'는 단어에서 비롯될 정도였다. 그래서 그들은 백인 헤어 스타일을 따라 하려고 노력했다. 약품을 동원해 머리를 피다가 상처를 입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20세기 중반 흑인 인권 운동이 힘을 가지면서 흑인들은 자기 본연의 헤어 스타일을 유지하기 시작했다. 드레드 스타일도 이맘때 퍼져 나갔다. 즉, 드레드 머리는 백인 중심 사회에 동화, 통합되지 않겠다는 흑인 사회의 의지를 보여주는 정치적 상징이다. 동시에 아메리카 흑인들의 아픈 역사를 함축한 상징이다. 따라서 카리브해, 흑인 인어공주, 드레드 머리라는 헤어 스타일이라는 소재를 종합하면 새로운 인어공주는 흑인 인권 운동을 상징하는 강력한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아이콘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영화는 이러한 복합적인 의미에 전혀 주목하지 않는다. 의미심장한 소재를 그저 표피적인 의도로 활용할 뿐이다. 주인공이 흑인이라는 사실을 강조할 목적으로. 포크 사용법을 모르는 에리얼이 포크로 드레드 머리를 다듬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대신 운명적인 사랑이라는 안전한 스토리에 의존한다. 캐스팅 논란이 무색할 정도다. 흑인 인권 운동과 관련된 다양한 쟁점을 영화에 녹여낸 <블랙팬서>와 비교해 보면 새로운 <인어공주>는 더 안일해 보인다. 칼을 뽑았는데, 무도 자르지 못한 셈이다.
큰 도움은 되지 않는 완성도
심지어 영화 자체의 완성도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장점보다 단점이 눈에 띄기 때문이다. 우선 <라이온 킹>과 비슷한 문제점이 있다. 동물을 너무 사실적으로 묘사하다 보니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 심지어 이번에는 포유류가 아닌 해양 생물이라서 더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화면도 어둡다. 실사 영화로 구현된 어두운 바닷속은 광원이 부족해서 어둡다. 장면을 부각할 조명도 마땅치 않다. 결국 흑인인 에리얼은 어두운 배경 속에 갇혀 버린다. 그녀를 지켜보기가 어렵다. 할리 베일리에 맞추어 연출하려는 노력이 부족해 보이는 대목이다.
그래도 디즈니 영화로서 최소한의 재미는 갖췄다. 에리얼과 에릭이 거대해진 울슐라와 맞서 싸우는 후반부 해상 전투신은 인상적이다. <캐리비안의 해적: 낯선 조류> 경력자답게 롭 마샬 감독이 클라이맥스에 걸맞은 스펙터클을 그려냈다.
울슐라와 트라이톤 왕의 역할도 지대하다. 코미디 배우로 알려진 멜리사 맥카시는 선입견을 제대로 깼다. 오빠 트라이톤의 권력을 갈망하고 복수를 꿈꾸는 마녀 울슐라라의 광기와 카리스마를 제대로 보여준다. 하비에르 바르뎀도 무게를 잡아준다. 그의 연기 덕분에 가족을 지켜야 하는 아버지의 슬픔과 외로움은 극대화된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디즈니
<인어공주> 애니메이션 영화는 디즈니의 상징과도 같은 작품이다. 20세기 중후반 침체기를 겪은 디즈니가 새로운 전성기인 '디즈니 르네상스'를 알린 시작점이 <인어공주>였기 때문이다. 이는 디즈니가 창사 100주년을 맞이한 올해에 <인어공주>를 공개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인어공주>는 그 상징성과 중요도에 미치지 못했다. 과감하지 않은 사회적 메시지는 원작의 도전 정신에 미치지 못한다. 1989년에 애니메이션이 보여준 능동적인 여성상에 비하면 이번 영화가 무슨 메시지를 담았는지 의문스럽다. 만듦새와 볼거리 역시 현재 디즈니의 위상과 자본력을 생각하면 아쉬움이 크다. 그 결과 100주년을 맞이해 더 화려하고 세밀해진 디즈니 성의 미래는 마냥 밝지 않아 보인다.
Dreadful 끔찍한
충분한 고민 없는 재해석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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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랑종>부터 <더 그레이트 샤크>까지! 올 여름 화제의 공포영화 BIG 3
2021년 더욱 강력해진 죠스의 등장을 알리는 <더 그레이트 샤크>부터 초자연적인 현상을 담은 호러 <랑종>, <귀문>까지 무더위를 한방에 날리기 위해 여름 극장가에 찾아온 공포 영화 BIG 3가 화제를 모으고 있다.
개봉 전부터 뜨거운 입소문의 '그' 영화! <랑종>
먼저, 오는 7월 14일 개봉 예정인 <랑종>은 태국 산골마을, 신내림이 대물림되는 무당 가문의 피에 관한 세 달간의 기록을 그린 영화로, <곡성>의 나홍진 감독과 <셔터>의 반종 피산다나쿤 감독이 손을 잡아 화제를 모았다. 나홍진 감독이 집필한 원안에 반종 피산다나쿤 감독이 오랜 리서치를 통해 태국 현지에 맞게 각색하여 연출한 영화는 몰입도 넘치는 서사와 생동감 넘치는 연출이 더해져 전에 없던 웰메이드 호러 영화로 탄생되었다. 뿐만 아니라, 영화 속 펼쳐지는 미스터리한 현상은 촬영 감독조차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게 할 만큼 실제 상황에서 발생하는 듯한 날것의 공포를 선사해 장르의 또 다른 세계로 끌어들일 예정이다.
체험형 공포의 새로운 패러다임! <귀문>
오는 8월 개봉 예정인 <귀문>은 1990년 집단 살인 사건이 발생한 이후 폐쇄된 귀사리 수련원에 무당의 피가 흐르는 심령연구소 소장과 호기심 많은 대학생들이 발을 들이며 벌어지는 극강의 공포를 그린 작품으로, 배우 김강우가 생애 최초 공포 연기에 도전해 기대감을 더한다. 또한, 극 중 한정된 공간에서 펼쳐지는 기이한 사건은 예측불허 긴장감을 자아내며 생생한 공포를 예고한다. 여기에, 한국 영화 최초로 2D부터 ScreenX, 4DX까지 다양한 포맷으로 동시 제작된 영화는 여러 호러 장면들을 생생하게 선보이며 리얼함을 배가시킬 전망이다.
더욱 강력해진 죠스의 등장! <더 그레이트 샤크>
이와 함께, 오는 8월 5일 개봉을 앞둔 <더 그레이트 샤크>는 초자연적인 소재를 담은 공포 영화와 차별화 된 원초적 공포의 정점 샤크 무비로 관객들을 사로잡을 예정이다. <더 그레이트 샤크>는 비행기 사고로 바다 한가운데 표류하게 된 5인의 여행객이 굶주린 식인 상어 떼의 습격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숨 막히는 사투를 벌이는 극한 서바이벌 스릴러다. <47미터> 시리즈 제작진이 참여해 신뢰도를 높인 <더 그레이트 샤크>는 할리우드 최고의 액션 블록버스터 <아쿠아맨>, <고질라 VS. 콩> 제작진까지 가세해 상어 비주얼과 바다 배경을 생생하게 구현해 완성도를 끌어올리며 관객들로 하여금 공포의 최대치를 경험하게 할 것이다.
가만히 있어도 불쾌지수가 올라가는 무더운 열대야 속,
오늘 소개한 세 편의 공포 영화와 함께 더위를 시원하게 날려보자!
씨네랩 에디터 J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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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vielog #27] 물회와 함께 펼쳐지는 남녀의 느와르- 낙원의 밤
신세계, 마녀의 박훈정 감독이 신작 낙원의 밤을 들고 돌아왔습니다.
엄태구와 전여빈, 차승원 배우와 함께 돌아왔는데요.
극장 개봉을 하지 않고 넷플릭스에서 단독 공개가 되었어요.
박훈정 감독의 신작을 기대하시는 분들이 많았을텐데, 영화는 다소 아쉬움이 남습니다.
엄태구 배우나 전여빈 배우의 연기는 좋은데, 이야기를 보면서 관객들에게 주인공들의 감정들이 잘 전달되지 않았던 것 같고 중얼거리는 대사가 잘 들리지 않아 불편했어요.
느와르 장르의 색깔은 들어가 있지만 일단 어색하게 만나서 연대의 끈이 생기는 남녀의 드라마가 중점적으로 이어집니다.
영화에 대한 자세한 평은 영상을 참고하세요!^^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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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보이스> 메인 예고편
부산 건설현장 직원들을 상대로 걸려온 전화 한 통.
보이스피싱 전화로 인해 딸의 병원비부터 아파트 중도금까지,
당일 현장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 같은 돈을 잃게 된다.
현장작업반장인 전직형사 서준(변요한)은 가족과 동료들의 돈 30억을 되찾기 위해
보이스피싱 조직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중국에 위치한 본거지 콜센터 잠입에 성공한 서준,
개인정보확보, 기획실 대본입고, 인출책 섭외, 환전소 작업, 대규모 콜센터까지!
체계적으로 조직화된 보이스피싱의 스케일에 놀라고,
그곳에서 피해자들의 희망과 공포를 파고드는 목소리의 주인공이자 기획실 총책 곽프로(김무열)를 드디어 마주한다.
그리고 그가 300억 규모의 새로운 총력전을 기획하는 것을 알게 되는데..
상상이상으로 치밀하게 조직화된 보이스피싱의 실체!
끝까지 쫓아 반드시 되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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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이스 로드> 메인 예고편
캐나다 매니토바주,
다이아몬드 광산 폭발 사고로 갱도에 매립된 26명의 광부들.
이들을 구출할 유일한 방법은 제한시간 내
해빙에 접어든 아이스 로드를 횡단해 구조용 파이프를 운반하는 것뿐.
영하 50도에 달하는 극한의 추위와 눈 폭풍이 도사린 ‘하얀 지옥’ 위니펙 호수 위
불가능한 미션의 수행자로 선택된 전문 트러커 ‘마이크’는
대형 트레일러 3대와 구조팀을 이끌고
예측불가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는 아이스 로드를 달리기 시작하는데…
주어진 시간은 단 30시간,
살기 위해 멈추지 말고 질주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