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중독2023-06-27 16:48:00
영화 음악의 거장에게 바치는 찬사
[영화 리뷰] 엔니오 : 더 마에스트로
※씨네랩 크리에이터로 초청받아 시사회 참석해 관람한 작품입니다.
<엔니오 : 더 마에스트로> 포스터 [출처: 씨네랩]
영화 음악의 거장을 기리는 영화
<엔니오 : 더 마에스트로>는 영화 음악의 거장인 엔니오 모리꼬네의 전기 영화이다. 그의 영화 같은 삶과 함께한 영화 음악들을 소개하는 내용으로 다큐멘터리의 감독은 가장 마지막까지 영화 작업을 함께하고 대표작인 <시네마천국>을 함께 만든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이 제작했다. 그는 엔니오 모리꼬네가 마지막 유언에 언급했을 만큼 나이를 뛰어넘은 친구이자 형제 같은 사이였다고 한다. 영화에서는 엔니오 모리꼬네 본인을 비롯하여 다수의 음악계 영화계 유명인사들이 출연하여 그가 살아온 삶과 그의 음악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 일대기를 보다 보면 엔니오 모리꼬네를 모르던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경외감이 들기 마련이다.
나 역시 엔니오 모리꼬네라는 이름만 알고 있었지 구체적으로 어떤 작품들을 만드셨는지는 잘 몰랐는데, 노래로 들어보면 귀에 익숙한 멜로디가 많이 있었다.
특히 우리나라에는 '넬라 판타지아'로 잘 알려진 영화 <미션>의 OST나, 황야의 무법자의 휘파람 소리를 들을 때 모두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이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 외에도 일평생 400편이 넘는 드라마와 영화의 음악들을 작업하셨다고 하니 그것만으로도 따라갈 수 없는 업적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이렇게 압도적인 작업량을 소화할 수 있었던 건 엄청난 능력에 기반한다. 앉은자리에서 악보를 작성하고, 피아노 앞에서 건반만 바라보고 작곡을 했다는 주변 지인들의 증언은 그가 얼마나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려준다.
심지어 엔니오 모리꼬네는 다소 실험적인 방법이나, 감독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분위기의 곡들을 기가 막히게 영화에 연결시켰는데, 처음에는 그의 말에 반대했던 감독들도 결과물을 보고 나면 엔니오의 음악이 가장 완벽한 곡이었다는 것에 동의했다. 그런 점에서 감독조차 생각 못한 것들을 음악으로 그려낸다는 것이 가장 경이롭게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엔니오 : 더 마에스트로> 스틸 컷 [출처: 씨네랩]
기록의 가치에 집중한 영화
영화는 감독이 5년 동안 진행한 인터뷰를 기반으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엔니오 모리꼬네의 어린 시절 처음 음악을 시작하게 된 순간부터 가장 마지막 대규모 투어까지 그의 음악 인생 모두를 2시간 30분 동안 그려냈다. 아쉬웠던 점은 내가 클래식 음악이나 영화 음악 쪽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중간중간 나오는 전문적인 이야기들이나 엔니오 모리꼬네가 작업한 음악들의 가치를 정확하게 느끼기는 어려웠다. 심지어 그가 영화 작업을 시작한 게 1960년대라서 대부분 처음 보는 영화들이라는 게 영화를 더 어렵게 만들었다. 하지만 해당 영화는 다큐멘터리이기 때문에 그러한 목적을 생각한다면 엔니오 모리꼬네에 대해서 알아감에 있어서 가장 최적화된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영화 음악을 좋아하거나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에 관심이 있다면 혹은 그가 만든 작품들을 많이 본 사람이라면 꽤나 흥미롭고 경이롭게 감상 할 수 있는 영화가 될 것 같다.
<엔니오 : 더 마에스트로> 스틸 컷 [출처: 씨네랩]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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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월 첫째 주 극장 개봉 & 예정작 ?
안녕하세요.
영화/OTT 콘텐츠 큐레이션 웹매거진 '씨네랩'입니다.
한국영화의 반란! 블록버스터, 액션 영화 대거 출동예정! 지난주 <밀수>에 이어 <더 문> <비공식 작전>까지 쟁쟁한 영화들이 앞다투어 개봉할 예정인데요. 이번주 개봉예정작 같이 한번 알아볼까요?
비공식 작전
Ransomed
ⓒ 네이버영화
개요: 드라마 | 한국 | 132분
감독: 김성훈
출연: 하정우, 주지훈 등
개봉: 2023.08.02.
배급: ㈜쇼박스
시놉시스
“비공식적으로? 알아서 해라? 여기는 하루하루가 지뢰밭이에요” 1987년, 5년째 중동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외교관 ‘민준’(하정우). 어느 날 수화기 너머로 20개월 전 레바논에서 실종된 외교관의 암호 메시지가 들려온다. 성공하면 미국 발령이라는 희망찬 포부에 가득 찬 그는 비공식적으로 동료를 구출하는 임무에 자원해 레바논으로 향한다. 공항 도착 직후, 몸값을 노리는 공항 경비대의 총알 세례를 피해 우연히 한국인 택시기사 ‘판수’(주지훈)의 차를 타게 된 ‘민준’. 갱단까지 돈을 노리고 그를 쫓는 지뢰밭 같은 상황 속, 기댈 곳은 유일한 한국인인 ‘판수’ 뿐이다. 그런데 돈만 주면 뭐든 하는 수상쩍은 이 인간, 과연 함께 동료를 구할 수 있을까?
CINE PICK!
<비공식작전>은 실종된 동료를 구하기 위해 레바논으로 떠난 외교관 민준과 택시기사 판수의 버디액션 무비라고 합니다. 1986년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외교관이 납치돼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나선 사람들의 실화를 모티브로 창작된 이야기 입니다. 한국과 모로코를 오가며 촬영한 ‘비공식작전’은 몇몇 세트를 제외하고서는 대부분 모로코에서 촬영을 진행했다고 하며 감독은 리얼리티와 서스펜스, 유머, 액션, 영화적 쾌감을 극대화한 영화로 만들고자 노력했다고 덧붙였습니다.
더 문
The Moon
ⓒ 네이버영화
개요: SF, 액션, 드라마 | 한국 | 129분
감독: 김용화
출연: 도경수, 설경구, 김희애 등
개봉: 2023.08.02.
배급: CJ ENM
시놉시스
2029년, 대한민국의 달 탐사선 우리호가 달을 향한 여정에 나선다. 위대한 도전에 전 세계가 주목하지만 태양 흑점 폭발로 인한 태양풍이 우리호를 덮치고 ‘황선우’(도경수) 대원만이 홀로 남겨진다. 대한민국의 우주선이 달로 향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5년 전, 원대한 꿈을 안고 날아올랐지만 모두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공중 폭발로 산산이 부서졌던 나래호. 또다시 일어난 비극에 유일한 생존자인 선우를 지키기 위해 나로 우주센터 관계자들과 정부는 총력을 다하고 온 국민이 그의 생존을 염원한다. 선우를 무사 귀환시키기 위해서 5년 전 나래호 사고의 책임을 지고 산에 묻혀 지내던 전임 센터장 ‘김재국’(설경구)이 다시 합류하지만, 그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선우를 구출할 또 다른 희망인 NASA 유인 달 궤도선 메인 디렉터 ‘윤문영’(김희애)에게 도움을 청해보지만 그마저 쉽지 않다. 재국은 또다시 누군가를 잃지 않기 위해 마지막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 보는데…. 우주에 홀로 고립된 대원과 그의 무사 귀환에 모든 것을 건 남자 살기 위한, 살려내기 위한 고군분투가 시작된다.
CINE PICK!
엑소 멤버 겸 배우 도경수가 <더 문>으로 여름 극장가를 찾아왔습니다. 도경수가 연기한 선우는 분자 물리학을 전공한 UDT 출신으로 등장하는데요. 배우들에 호연과 더불어 마치 우주와 달에 있는듯한 느낌을 주며 몰입도를 극대화 했다는 평입니다.
다섯 번째 흉추
The Fifth Thoracic Vertebra
ⓒ 네이버영화
개요: 드라마, 스릴러 | 한국 | 65분
감독: 박세영
출연: 문혜인, 함석영, 온저연, 홍승기 등
개봉: 2023.08.02.
배급: 인디스토리
시놉시스
"너의 증오가 날 꽃피웠어" 헤어진 연인의 매트리스에서 피어나 사랑과 슬픔을 먹고 자란 곰팡이 꽃 인간의 척추뼈를 탐하며 생명체가 되는데... 이상하고 아름다운 스트레인저 <다섯 번째 흉추>
CINE PICK!
<다섯 번째 흉추>는 침대 매트리스에서 피어난 곰팡이 꽃이 인간의 척추뼈를 탐하며 생명체로 탈바꿈하는 여정을 이상하고 아름답게 설득해낸 박세영 감독의 장편영화 데뷔작입니다. 제26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첫 공개되어 3관왕을 휩쓸며 화제가 되었고, 이후 제48회 서울독립영화제 장편경쟁 최우수작품상, 캐나다 판타지아국제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언급 선정 등 국내외 유수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살바도르 달리 : 불멸을 찾아서
Salvador Dali : In Search of Immortality
ⓒ 네이버영화
개요: 드라마 | 스페인 | 110분
감독: 데이비드 푸졸
출연: 살바도르 달리
개봉: 2023.08.02.
배급: 마노엔터테인먼트
시놉시스
"나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이다, 천재들은 죽지 않는다!” 끝나지 않은 초현실 콘체르토! 살바도르 달리의 삶과 사랑, 그리고…. 불멸!
CINE PICK!
스스로 불멸할 것이라 믿었던 살바도르 달리는 20세기 미술에 큰 족적을 남긴 스페인 출신 화가이며 화가, 조각가, 영화제작자, 소설가, 포토그래퍼로도 유명합니다. 녹아내리는 시계, 바닷가재 전화기, 추파춥스 로고, 입술모양 소파 등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은 물론, 영화 감독인 월트 디즈니, 알프레드 히치콕과도 협업하는 한편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 제작자이기도 합니다.
몬스터 패밀리 2
Monster Family 2
ⓒ 네이버영화
개요: 애니메이션, 코미디, 가족 | 독일, 영국 | 103분
감독: 카리야마 슌스케
출연: -
개봉: 2023.08.02.
배급: 메가박스중앙㈜
시놉시스
몬스터에서 인간으로 겨우 돌아온 ‘위시본’ 패밀리! 새 가족이 된 전설 속 몬스터 ‘바바 야가’와 ‘렌필드’의 결혼식 날, 그들은 슈퍼 소녀 ‘밀라’에게 납치당한다. 이들뿐 아니라 드라큘라, 예티, 네시, 그리고 킹 콩가까지!! ‘위시본’ 패밀리는 ‘밀라’에 의해 전 세계 몬스터들이 납치된 것을 알게 되는데… 몬스터들을 구하기 위해 다시 몬스터로 변한 ‘위시본’ 패밀리! 과연 ‘위시본’ 가족은 몬스터들을 구하고 다시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CINE PICK!
2017년 개봉한 <몬스터 패밀리>는 고독한 드라큘라의 저주로 한순간에 몬스터가 되어 버린 위시본 가족의 인간 복귀 프로젝트로 약 40만 관객을 동원한 흥행 애니메이션인데요. 그 인기를 이어갈 <몬스터 팸ㄹ리2>는 더욱 커진 스케일과 풍성한 볼거리로 화제를 모으고 있습니다. 위시본 패밀리가 인간이었을 때보다 훨씬 빠르고 강력한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극장 개봉 영화, 총 다섯 편의 영화를 소개해 드렸는데 어떠셨나요?
그럼 남은 한 주도 건강하게 보내시길 바라며, 지금까지 씨네랩 에디터 Amy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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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은 짧지만 깁니다
엔니오 모리꼬네라는 이름은 영화를 좋아하지 않아도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하다. 혹여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더라도 몇 곡을 듣고 나면 아, 이 곡이 그 사람이 쓴 거였어? 라는 반응을 들을 수 있다. 영화나 음악에 관심있는 이들이라면 엔니오 모리꼬네가 그 유명한 '넬라 판타지아'를 작곡하고도 오스카를 수상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알고 있기도 하다. 본인조차 평생 작곡한 곡의 수를 알지 못했을 만큼 수많은 곡을 작곡한 모리꼬네는 그야말로 20세기와 21세기에 걸친 영화음악계의 대부였으며, 그런 만큼 모리꼬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다. 모리꼬네의 친구이자 동업자였던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은 모리꼬네의 생전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를 기리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했고, 덕분에 관객은 그의 사후에 만들어진 다큐멘터리임에도 모리꼬네 자신의 이야기를 스크린을 통해 만날 수 있게 됐다.
대부분의 다큐멘터리가 그렇듯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는 모리꼬네의 인터뷰를 제외하고도 모리꼬네를 알았던 이들과 모리꼬네에 대해 잘 알았던 주변인 혹은 영화음악 후배들의 인터뷰로 가득 차 있다. 90세가 넘도록 장수했음에도 죽는 순간까지 영화음악을 놓지 않았던 모리꼬네의 음악은 2시간 36분에 달하는 러닝타임에도 다 담아낼 수 없을 만큼 장대했다. 영화는 빠른 속도로 모리꼬네를 포함해 수많은 이들의 인터뷰를 통해 숨가쁘게 모리꼬네의 인생을 소개한다. 모리꼬네와 동시대를 살아왔던 토르나토레 감독에게는 모리꼬네의 초창기 작품들이 익숙하겠지만 상대적으로 평균 나이대가 낮을 수밖에 없는 관객에게 영화 초반은 신선한 동시에 지루할 수밖에 없다. 서부영화의 거장 세르지오 레오네와 모리꼬네가 협업을 했다는 사실에(정확히는 그만큼 모리꼬네가 나이가 많았다는 사실에) 놀라는 관객도 많지만 그만큼 레오네의 이름 자체가 생소한 관객도 분명 존재한다. 토르나토레 감독은 모리꼬네의 인생 초반 업적도 소개하고 싶은 욕심에 다양한 관객을 배려하지 못하는 우를 범한다.
28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던 히스 레저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아이 앰 히스 레저>에는 히스 레저의 인터뷰는 당연히 포함되지 않았고, 짧았던 생애를 강렬한 불꽃처럼 살아냈던 그를 자세히 소개할 시간이 있었다. 히스 레저가 배우 이외에도 뮤지션으로도 활동했다는 것과 그가 연출했던 뮤직비디오를 소개하고 무엇보다도 사후 오스카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다크 나이트>의 조커 역을 연기했을 때의 히스 레저를 파헤치며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조커 연기가 사인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짚고 넘어간다. 요절한데다 배우라는 직업 특성상 히스 레저의 필모그래피는 모리꼬네의 그것과 비교도 안 되게 짧기에 영화는 여유를 두고 히스 레저라는 인물 자체에 깊이 다가간다. 반면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는 모리꼬네 자체보다는 모리꼬네가 헌신했던 영화음악에 더 치중하며, 어느 한 곳에 방점을 찍는 대신 수많은 영화음악을 조금씩 맛보는 전략을 택했다. 그러다보니 관객은 모리꼬네의 수많은 음악 가운데 더 친숙한 음악을 한번 더 만나거나 미처 몰랐던 모리꼬네의 일면을 만나보는 경험은 하지 못한다.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가 다른 곳도 아닌 돌비관에서 시사회를 진행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많은 이들이 아마도 영화를 통해 '넬라 판타지아'를 위시한 아름다운 모리꼬네의 음악을 다시 한번 웅장한 사운드로 들을 수 있으리라 짐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기대가 무색하게 영화는 모리꼬네의 기나긴 삶과 수많은 업적을 담아내느라 정작 그의 음악을 한 곡이라도 제대로 다루지는 못한다. 비록 <미션> 속 '넬라 판타지아'가 달성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모리꼬네가 오스카를 수상하지 못했다는 것과 당시 모리꼬네가 느꼈던 심정, 그리고 오스카 회원들이 느꼈던 미안함이 담겼으나 이는 모리꼬네가 '넬라 판타지아'를 통해 관객에게 전달한 감동에 비할 바는 아니다. 모리꼬네가 순수음악 대신 영화음악을 택하는 바람에 음악계에서 인정받는 데 지난한 세월이 걸렸다는 것이 모리꼬네의 일생에 걸친 업적을 소개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었을까. 이후 영화는 결국 오스카가 모리꼬네에게 공로상을 수상했고, 마침내 그가 <헤이트풀8>를 통해 늦은 나이에 오스카 음악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었음을 소개하면서 모리꼬네에게 오스카란 무엇이었을까를 관객에게 의문으로 남긴다.
이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2시간 36분을 꽉 채운 인터뷰와 자료들로 인해 러닝타임은 숨가쁘게 지나간다. 또한 모리꼬네의 초창기 음악에는 익숙하지 않은 관객에게 평생에 걸쳐 영화음악에 헌신했던 그의 삶에 몰랐던 면이 있었음을 소개하기도 한다. 특히 서부영화에 모리꼬네가 끼친 영향을 영화를 통해 접하고 나면 세르지오 레오네의 영화들을 찾아보고 싶게끔 만든다. 어찌 보면 그가 작곡했던 서부영화 음악들을 통해 쿠엔틴 타란티노와 같은 현시대의 감독들이 성장할 수 있었고, 결국엔 <미션>이 아닌 서부영화의 계보를 이은 타란티노의 영화를 통해 모리꼬네가 오스카를 수상했다는 점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정서처럼 보이기도 한다. 헐리웃뿐만 아니라 본국인 이탈리아 영화계, 때로는 왕가위와 구로사와 아키라를 포함한 아시아 영화의 작업도 마다하지 않았던 모리꼬네의 종착점이 시작점과도 같은 서부영화였다는 점은 다소 두서없어 보이는 이 영화 속에서 모리꼬네의 삶에 대한 힌트로 작동한다.
많은 위인들 중에서도 모리꼬네처럼 평생에 걸쳐 한 분야의 업적을 수도 없이 쌓고, 또 장수했던 이는 많지 않다. 토르나토레 감독은 한 발짝 떨어져 모리꼬네의 삶을 관망하기보다는 친구로서 모든 면을 조명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관객은 조금은 두서없지만 모리꼬네를 향한 애정이 듬뿍 담긴 찬사를 긴 러닝타임으로 만날 수 있게 됐다.
*본 리뷰는 씨네랩의 시사회 초청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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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의 논리로 선 땅에서 예술의 정수를 쌓아 올리다!
3시간 35분. 극장에서 인터미션 마주할 수 있게 한 <브루탈리스트>는 잊지 못할 영화적 경험을 안긴다. 영화 외적일 뿐만 아니라 영화 내적으로도 잊지 못할 경험을 전한다. 왜 이 영화가 이렇게도 길수밖에 없는지, 긴 시간 동안 왜 우리는 미국으로 간 한 유대인 건축가가 돈의 논리로 선 땅에서 예술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목도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끝내 알게 된다. 마치 기나긴 터널을 묵묵히 버티며 끝내 밝은 빛을 맞는 느낌처럼, 영화는 끈질기게 자유를 갈망하는 라즐로의 고통의 나날을 촘촘하게 쌓아 올린다.
파시즘을 피해 미국행을 택한 건축가 ‘라즐로 토스’(애드리언 브로디). 하지만 그를 기다리는 건 자유의 삶이 아닌 이민자로서 겪는 냉혹한 현실이다. 사촌의 일터에 얹혀살고 가구를 만드는 일을 하지만, 자신의 재능을 100% 발휘하지 못하는 현실은 참기 힘들다. 부유한 사업가인 해리슨(가이 피어스)의 서재를 리모델링하는 일을 맡고 유려한 공간을 만드는 데 성공한 그지만, 결과는 되려 거친 항의를 받는다. 결국 사촌 집에서 쫓겨난 라즐로는 막노동으로 근근이 먹고산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에게 버럭 소리치던 해리슨이 찾아와 과거 일을 사과하며, 자기 집에 초대를 한다. 이에 응한 라즐로는 그에게 건축물 설계 제안을 받는다.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 여긴 라즐로. 하지만 예산, 시대를 앞선 건축 양식 등 장애물을 만나고, 또 다른 시련을 겪는다.
| 자유의 여신상이 거꾸로?
“자유롭다는 착각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노예다”
<브루탈리스트>라는 영화를 설계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건 자유다. 극 중 등장하는 괴테의 말처럼 라즐로는 파시즘의 공포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찾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온다. 그리고 어두컴컴한 배에서 올라와 자유의 공기를 마신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는 건 온전한 자유가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깊은 늪이다.
영화 초반을 생각해 보면 라즐로에게 미국은 자유의 나라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자유의 여신상이 거꾸로 비친 것만 봐도 그렇다. 라즐로에게 그리고 더 나아가 아메리칸드림을 이루기 위해 배를 타고 미국으로 온 이민자들에게 자유의 여신상은 온전히 그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 어쩌면 이 여신은 온전히 그리고 똑바로 미국인들에게만 자유를 선사하는 아이콘일 수 있다.
이렇듯 라즐로는 이민자로서 본의 아니게 차별을 받는다. 한 예로 자신을 미국인으로 칭하고, 기독교 신자인 사람을 아내로 맞이한 사촌은 라즐로의 유일한 구원자인 동시에 철저한 배신자로 나온다. 이유는? 돈값을 못 해서다. 의도가 어떻든 그가 설계한 서재를 보고 화가 난 해리슨 때문에 공사비를 못 받은 사촌은 이 모든 잘못을 라즐로에게 돌리고, 그를 쫓아낸다. 아무리 혈연관계라 해도 미국에서는 이용 가치가 없는 이민자를 곁에 둘 이유가 없다. 어찌 보면 전쟁으로 고향을 도망쳐 나왔지만, 결국 돈의 논리로 선 미국에서도 그가 누릴 자유는 없는 것이다.
| 아메리칸드림 속에 숨겨진 이민자의 수난근근이 하루하루를 버텨가던 라즐로에게 산타가 나타난다. 바로 해리슨이다. 라즐로가 만든 서재 덕분에 유명세를 탄 덕분에 해리슨은 라즐로를 곁에 두고 자신에게 특별하고, 사람들에게 영원히 기억에 남을 건축물을 지어달라고 한다. 이를 승낙한 라즐로는 그 즉시 헤어 나올 수 없는 족쇄에 채워진다.
미국과 자본주의의 결정체로 보이는 해리슨은 돈으로 라즐로의 재능을 산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착취한다. 겉으로는 선의를 배푸는 척하지만, 그의 속내는 어떻게든 라즐로의 재능을 빼먹을 궁리만 하는 것. 이런 속내는 시간이 지나면서 수면 위로 올라오는데, 자신이 고용한 이들의 입을 통해 경비 감축 등의 이유로 라즐로를 압박한다. 라즐로의 예술성만큼이나 해리슨에게 중요한 건 돈이다.
생각해보면 해리슨이 이 건축물을 짓는 건 돌아가신 어머니를 기리기 위한 것도, 마을 공동체를 위한 것도, 역사적으로 길이 남을 예술 건축물을 짓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명예 도취. 있어 보이기 위한 과식욕의 매개체를 만드는 것뿐이다. 예산 때문에 단 몇 미터를 줄이는 것에 분노하는 라즐로를 겉으로 이해하지만, 그의 감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해리슨의 모습은 마약 같은 명성을 지속적으로 이어 나가기 위한 수단으로 예술가를 착취하는 자본가들의 모습과 일치한다.
자신이 갖지 못한 그 예술성을 탐닉하고 어떻게든 동경을 넘어 빼앗고 싶어 하는 모습. 해리슨을 연기한 가이 피어스는 ‘록펠러와 살리에리 중간쯤’이라고 묘사할 정도로 자신의 캐릭터를 설명한 바 있다. 해리슨의 모습은 유럽의 아름다움을 오로지 돈으로 사서 만들려고 했던 미국의 민낯과도 일치한다. 이를 보여주듯 극 중 해리슨은 라즐로는 정신적으로, 성적으로 착취한다. 결국 미국은 이런 예술가들의 피와 땀, 눈물을 통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1.66:1의 화면비, 비스타비전이 주는 폐쇄성<브루탈리스트>는 현재는 거의 쓰지 않는 비스타비전으로 촬영되었다. 브래디 코베 감독이 이 화면비를 고수한 이유는 무엇일지 생각해보면, 라즐로 등 이민자들이 느끼는 폐쇄성을 오롯이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 보인다.
영화는 조피아의 취조실로부터 시작되고, 이어지는 장면은 짙은 어둠 속 배 안에서 가판으로 올라가는 라즐로의 모습이다. 마치 감옥처럼 느껴지는 통로를 어떻게든 탈출하려는 그의 모습이 보이는 데, 보는 입장에서는 시네마스코프와 달리, 비스타 비전만의 폐쇄성이 느껴진다. 이후, 이 화면비로 보이는 라즐로의 여정 또한 어딘가 모르게 갇힌 듯한 느낌을 전한다.
결국 영화는 이 비율을 통해 미국에 와서도 온전히 자유를 찾지 못하고 감옥에 갇힌 듯한 라즐로의 모습을 보여준다. 비로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각형의 감옥에서 스스로 나오지 못하는 그의 모습. 어떻게 해서도 벗어날 수 없는 그만의 감옥은 그가 마약을 끊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브루탈리즘을 소재로 한 영화는 건축처럼 대칭과 반복 등의 구조적 특징을 오롯이 펼친다. 조피아의 얼굴로 시작해 조피아의 얼굴로 끝내는 영화는 인터미션을 기준으로 1막 ‘도착의 수수께끼’, 2막 ‘아름다움의 견고한 본질’은 수미쌍관 구조를 가져간다. 특히 혼자던(1부), 가족과 함께 하던(2부)는 미국이란 땅에서 그는 자유가 아닌 감옥신세라는 걸 동일하게 보여준다. 극중 에르제벳이 말한 것처럼 이들에게 미국은 썩은 나라이며, 말을 하지 않던 조피아는 결혼과 동시에 약속의 땅이스라엘로 떠난다.
| 중요한 건 과정이 아니라 예술이자 목적지!
끝내 완성한 건축물은 해리슨이 아닌 라즐로의 것이다.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나라에서 죽어가는 예술혼은 끝내 지난한 여정을 관통하며 우뚝 솟아오른다. 이 건축물은 파시즘으로부터 도망친 이후 보이지 않는 그의 마음속 아픔과 인생이 녹아 있다. 후반부 라즐로를 강간한 사실을 에르제벳의 입을 통해 공개된 이후 해리슨은 이 건물로 도망치는데, 그때 비로소 이 건축물의 내부가 온전히 공개된다. 마치 자신과 에르제벳이 경험했던 감옥이 이 공간에 녹아져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어둡고 폐쇄적이며, 기도 공간에서는 햇빛에 비치는 십자가를 통해 비로소 자유를 느끼게 한다.
라즐로의 내상과 에르제벳의 외상이 합쳐져 완성한 듯한 이 건축물은 결국 이 부부가 겪은 아픔과 인생을 응축한 것과 다름없어 보인다. 브루탈리즘은 ‘날것 그대로의 콘크리트’(Béton brut)라는 어원이 말해주듯, 아무런 장식 없이 콘크리트로 구축한 이 건축물은 누군가에게는 흉물처럼 보인다. 하지만 누군가에는 시련과 고난을 버텨 끝내 자유를 찾고자 노력한 이들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나이가 든 조피아는 라즐로의 예술을 전시하는 비엔날레 행사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삶이 아무리 유린당해도 중요한 건 목적지이지 여정이 아닙니다.” 미국의 삶을 접고 예루살렘에 온 라즐로가 조피아에게 했던 이 말은, 고통의 나날을 보냈지만, 어떻게든 삶의 인장을 남긴 라즐로와 에르제벳, 그리고 수많은 이민자를 향한 찬사다. “어떤 격변이 있어도 오래 살아남는 것을 만들기 위해 건축을 한다”는 라즐로의 답은 이민자들의 역사를 바탕으로 세워 올려진 미국의 본질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과연 미국은 누가 세웠는가!
사진제공: 유니버셜 픽쳐스
평점: 4.0 / 5.0
한줄평: 돈의 논리로 선 땅에서 예술의 정수를 쌓아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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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지적 썸머시점에서 바라본 <500일의 썸머>
(위 글은 결말을 포함한 영화 전반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미래다'라는 슬로건으로 유명한 대기업 광고에는 이런 문구가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보단, 싫어하는 것을 하지 마세요.' 나도 모르게 그 문구가 뇌리에 박힌 탓인지 이후 몇 번에 연애에서 종종 그 말이 떠올랐다. 처음엔 나를 보며, 다음엔 상대방을 보며. 영화 <500일의 썸머>는 한때 톰이었고, 썸머였던 우리들의 연애를 그린 로맨스 아닌 로맨스영화이다.
기념일에 흔히 쓰이는 카드를 만드는 회사에서 재직 중인 톰과 썸머. 톰은 그곳에서 카드에 들어갈 문구를 만들고, 썸머는 사장의 비서직으로 일하던 중 톰은 남몰래 썸머를 마음에 품는다. 그렇게 홀로 호감을 가졌던 톰은 우연찮은 기회에 썸머와 가까워지게 되고, 회식에서 그녀와 묘한 기류를 풍긴 그는 이후 썸머의 키스로 그녀와 한층 더 가까워진다. 그렇게 썸머와 남몰래 비밀연애를 하는가 싶었던 톰. 그러나 썸머는 그에게 '나는 진지한 관계는 싫어'라며 선을 그어버리고, 데이트에 찐한 스킨십에 썸이라고 하기엔 다소 농도 짙은 두 사람의 관계가 톰은 그저 답답하기만 하다. 운명을 믿는 톰과 사랑을 믿지 않는 썸머의 불확실한 연애는 썸머의 이별선언으로 막을 내리는가 싶더니, 회사 동료의 결혼식장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과연 도통 답을 내려주지 않는 썸머는 톰에게 있어 나쁜 여자이기만 한 걸까.
어느 댓글에서 영화 <500일의 썸머>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처음엔 톰이 불쌍하다가도 영화를 두번째 볼 때에는 썸머가 이해된다고.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 나도 이제 갓 스무 살이 되었던지라 도통 이 영화에 공감할 수 없었다. 200일에서 50일로, 300일에서 10일로 쉴 새 없이 오고 가는 영화의 서사도 그러하였고, 톰에게 좀처럼 마음을 내주지 않는 썸머가 못내 야속하였다. 한마디로 이 영화를 호구 같은 한 남자가 어장관리녀에게 치이고 치이는, 여자가 쓰레기와도 다름없는 그저 그런 멜로 영화로 치부해부린 것이다. 영화의 첫인상이 그랬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내가 좋아하는 이동진 기자가 뽑은 로맨스 영화 1위라는 것도 당최 이해되지 않았으며 종종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현실 연애라는 것도 좀처럼 공감하지 못했다. 그러나 서른을 바라볼 즈음에 다시 본 톰과 썸머는, 꽤나 현실적이었다. 어릴 땐 보이지 않았던 톰의 우유부단함과 썸머의 이중적인 속마음. 그리고 그녀가 결혼을 결심한 이유까지. 어쩌면 어려서라기보다도 몇 번의 연애가 종지부를 맺으며 깨닫게 되는 일종의 연륜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느덧 나는 톰의 사랑보다 썸머의 자기방어에 공감이 가는 사람이 되고만 것이다.
이 영화를 전지적 썸머의 시점으로 본다면 이러하다.
회식에서 만취한 톰의 친구는, 톰이 썸머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썸머는 이를 다시 톰에게 물었지만, 톰의 대답은 어정쩡할 뿐이었고 그런 톰에게 '친구로서?'라고 되묻자 톰은 그렇다고 답해버렸다. 이후 썸머는 복사실에서 톰에게 먼저 키스를 했고, 그녀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연애는 그녀가 시작한 연애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둘이 레코드 가게에서 데이트를 하던 중 톰은 시종 링고스타를 좋아하는 썸머의 음악 취향을 장난삼아 웃어넘기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뮤지션에 대해서 '나도 잘 몰랐어'라며 말하는 썸머에게 '내가 들려줬잖아'라며 답한다. 둘이 함께 영화 '졸업'을 보았을 때, 썸머는 극장에서 나와 그 영화를 보고 여운이 가시지 않아 울음을 멈추지 못했고 그런 그녀를 보며 톰은 '괜찮아. 그냥 영화일 뿐이잖아.'라며 그녀를 달랜다. 썸머가 좋아하는 뮤지션을 톰은 시종 장난처럼 놀려댔고, 그녀가 영화를 보고 나와 울음이 멈추지 않았을 때 그는 맛있는 것을 먹자며 데려갈 것이 아닌 왜 그 영화가 그녀를 울게 만들었는지 물었어야 했다. 그러니까 지금 그녀가 밥맛이 없던 것은 배고프지 않아서가 아닌 함께 있어도 외로운 이 남자와 더 이상 같이 있고 싶지 않아서인 것이다.
게다가 그녀가 그렇게 펑펑 운 영화 <졸업>의 마지막 장면은 결혼식장에서 여자 주인공을 데리고 도망쳐 나온 남자와 그런 그를 무작정 따라나온 여자. 그리고 두 사람이 앞으로의 일이 걱정되듯 웃음기가 사라진 채 멍하니 정면만을 응시하던 순간이었다. 마치 세상에 둘만 남겨진 것 같던 찬란한 시기가 끝나고 서로에게 익숙해진 나머지 권태로워지는 연애의 말로처럼.
함께 싱크대며 가구들을 살펴보며 신혼부부처럼 장난을 치던 두 사람. 다소 들떠 보이는 톰에게 썸머는 나는 진지한 관계는 원치 않아라며 그에게 먼저 선을 그었지만, 그는 '알았다'라며 그녀를 이해하듯 넘어간다. 돌아서면 남인 연인 관계에서 우리는 헤어질 일 없다는 듯이 천진난만하게 구는 톰에게 그녀는 역설적으로 나는 진지해지고 싶지 않아라며 상대방에게 확신을 얻기 바랐지만, 톰은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리 만무했다.
썸머와 술집에서 데이트를 하던 와중, 별안간 웬 남자가 그녀에게 추파를 던졌고 옆에 있는 톰은 남자친구냐는 그 남자의 말에 그저 친구라며 그 상황을 나서지 못하고 방관할 뿐이었다. 그러다 별안간 톰이 그 남자에게 주먹을 날렸는데 그 이유는 남자가 썸머에게 치근덕거려서가 아닌 톰 자신을 '찌질이'로 표현한 것에 분개했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와 그는 썸머에게 너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말하지만, 썸머는 날 위해서가 아니라 널 위해서라며 답한다.) 결국 크게 다투고 만 두 사람. 이후 썸머는 먼저 그의 집으로 찾아가 화해를 청하고 그 상황에서 톰은 '나는 너와 어떤 관계든 상관없어.'라며 마치 썸머를 배려하는 듯 말했지만, 이 시점에서만이라도 톰은 한발 더 나아가 그녀에게 직진해야만 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애인이랑 다름없어'라며 화를 내고 돌아간 남자의 집에 비를 뚫고 찾아간 여자가 들을 대답으로는 퍽 맘에 드는 대답은 아닌 것이다.
썸머는 그에게 이별을 고하고 그는 썸머와 다시 재회할 요량으로 회사까지 그만둬버린 그녀에게 메일을 보내지만 그녀는 '이제 정말 친구가 될 수 있겠지.'라며 답한다. 이후 직장동료 결혼식으로 향하는 배 안에서 다시 재회한 두 사람. 썸머는 그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걸었고, 건축가가 꿈이었던 톰이 읽고 있던 '행복한 건축'을 핑계 삼아 말을 붙인다. 이후 결혼식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두 사람. 썸머는 톰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고, 톰은 운명처럼 썸머와 재회할 마음에 들떠 그녀를 찾아가지만 그가 들고 간 선물은 그녀가 좋아한 뮤지션의 앨범도 아닌, 보고서 펑펑 울어버린 영화의 DVD 내지는 O.S.T 앨범도 아닌 자신이 읽고 있던(자신이 좋아한) '행복한 건축'이었다.
그날 썸머의 결혼반지를 발견한 톰은 시간이 흘러 회사를 그만둔 후 평소 자신이 좋아하던 언덕에서 머리를 식히던 중, 자신을 기다리던 썸머와 재회한다. 톰은 썸머에게 '그날 결혼식장에서 왜 나랑 춤췄어?'라고 묻지만 썸머는 '그냥 그러고 싶었어.'라며 답한다. 그런 그녀에게 톰은 '그냥 춤이 추고 싶었구나.'라며 대답해버리지만, 썸머가 단순히 '춤'이 추고 싶어 이미 남이 돼버린 그에게 다가가 먼저 말을 걸고, 결혼식장에서 함께 춤을 추고, 자신의 집에 초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건 썸머가 톰에게 그리고 톰에게 미련이 남은 자신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는 아니었을까.
이처럼 전지적 썸머의 입장에서만 본다면, 되려 썸머를 욕하던 관객들은 절로 그녀의 태도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굳이 이처럼 세세하게 이럴 땐 이러했고 저럴 땐 저러했어라고 말하지 않더라도, 톰이 건축가의 꿈을 잊지 않도록 응원해준 썸머와 그런 썸머를 마냥 괴짜로만 바라보는 톰의 시선은 이 연애가 왜 종지부를 찍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보여준다. 썸머의 파티에 초대되어 그녀의 친구들과 합석한 자리에서 친구는 톰에게 꿈을 물었고, 자신의 하는 일은 비록 카드에 문구를 쓰는 일이지만 사실 건축가가 꿈이라는 말 대신 마치 자신의 현재 직업에 대해 굉장히 만족해하는 듯한 대답을 내놓는다. 그런 그를 보며 씁쓸한 표정을 짓던 썸머. 그녀에게 있어 '건축가를 꿈꾸는 톰'은 톰의 어린 시절 로망이 아닌, 그녀가 그에게 쏟은 마음 중 일부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썸머대신 톰을 나무라며 욕을 해야 옳은 것일까. 마지막 썸머의 말처럼 그저 톰과 썸머는 서로가 서로의 짝이 아니었을 뿐이다. 사랑에 있어 확신이 없는 썸머와 순수하게 운명을 믿는 톰. 사랑에 있어 상처받아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공허함과 허전함을, 사랑은 그저 아름답다고 믿는 톰이 알리는 만무했고 그런 톰에게 있어 쉽게 확신을 내주지 않는 썸머 역시 그의 입장에서 본다면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톰은 사랑이 아름답다고 믿었지만 그 사랑을 쟁취하는 것에 있어서는 운명보다는 행동이 먼저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썸머는 사랑은 없다고 말하면서도 사랑해주기를 바라며 애매하게 톰을 밀쳐냈다. 어쩌면 연애도 싫다던 썸머가 자신이 무슨 책을 읽는지 물어봐 주는 낯선 남자와 결혼까지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톰과의 연애를 통해 그녀가 느낀 어떤 무엇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사실 '난 사랑은 믿지 않아'라며 톰을 밀쳐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하며 사랑이 있다고 믿고 만 것은 아닐까. 썸머는 톰을 사랑하지 않아서라기보다, 톰보다 자신을 더 사랑했기 때문에 그와 헤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썸머는 일찌감치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톰이 사랑한 것은 자신이 아닌, 자신을 사랑하는 그의 모습 내지는 그저 '여자친구' 혹은 '연애 상대'일뿐이라는 것을. 그가 술집에서 낯선 남자와 주먹다짐을 하던 날, 그와 영화를 보던 날, 그가 그녀가 초대한 파티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그녀에게 선물로 준 그 순간, 그녀는 서서히 마음을 닫아버렸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마치 썸머가 괴짜였기 때문에 둘의 연애가 끝이 난 것이 아니라고 말하듯 그녀가 서운해했을 모든 장면들을 영화의 엔딩으로 공을 들인다. 그리고, 영화는 마지막 나레이션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톰은 더 이상 운명을 믿지 않기로 했다고. 뜨거운 여름이 지나 선선한 가을이 오듯 톰이 용기 내어 데이트 신청을 건넨 여자의 이름이 'fall(가을)'인 것은 단순한 각본가의 재간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 <500일의 썸머>는 러브스토리가 아니다. 우리는 때때로 누군가에게 톰이었다가, 썸머였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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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채로운 캐릭터와 게임 원작이 함께 빛나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한때는 명예로운 비밀결사 '하퍼'의 일원이었지만, 하퍼의 맹세를 깬 후 아내를 잃고 딸 '키라'(클로이 콜먼)를 책임져야 할 홀아비가 된 '에드긴'(크리스 파인). 그는 ‘홀가(미셸 로드리게스), ‘사이먼’(저스티스 스미스), ‘포지’(휴 그랜트)와 함께 도적질을 하며 생계를 이어간다. 그러던 어느 날, 포지의 친구 ‘소피나’(데이지 헤드)는 에드긴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부활의 서판’을 훔치자는 것. 아내를 다시 만날 생각에 들뜬 에드긴은 동료들과 함께 집을 나선다. 그러나 모험은 실패하고, 그는 홀가와 함께 감옥에 갇힌다. 시간이 흘러 탈옥에 성공한 에드긴과 홀가는 부활의 서판을 되찾기 위한 팀을 다시 꾸린다. 옛 동료인 마법사 사이먼, 변신의 귀재 드루이드 '도릭’(소피아 릴리스), 언제나 진지한 팔라딘 '젠크’(레게 장 페이지)까지. 제각기 아픔을 지닌 이들은 한 팀이 되어 지상과 지하, 삶과 죽음을 넘다 드는 모험에 나선다
<D&D>, 할리우드 판타지 영화의 명맥을 잇다
2000년대 초반 할리우드는 판타지 영화의 세상이었다. <반지의 제왕>, <해리 포터>,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 등이 쏟아져 나오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빛이 비치는 곳에는 그림자도 있는 법. 2010년대 이후 히어로 영화에 밀려난 판타지 영화의 기세는 예전 같지 않다. <호빗> 시리즈가 체면치레를 했다는 평가를 받았을 뿐, <나니아 연대기>를 비롯한 후발주자는 좀처럼 기를 피지 못했다. <신비한 동물사전> 시리즈 역시 해리 포터 팬들에게 실망만 안긴 채 마무리됐다. 그나마 HBO <왕좌의 게임>과 <하우스 오브 드래곤>, 넷플릭스 <위쳐>처럼 드라마 쪽에서 흥행작을 배출하는 중이다.
끊긴 듯 보이는 할리우드 판타지 영화의 명맥을 이어가겠다고 선언한 영화가 있다. 바로 <던전 앤 드래곤: 도적들의 명예>(이하 <D&D>)다. 디오라마 게임판 위에서 장시간에 걸쳐 펼쳐지는 테이블톱 롤플레잉 게임(TRPG, Table-top Role Playing Game)인 '던전 앤 드래곤'을 영상화한 이 작품은 게임 시리즈 속 유명 세계관인 '포가튼 렐름'을 무대로 삼은 판타지 활극이다. 사실 외관만 놓고 보면 <D&D>는 진부하다. 기사와 마법사 등장하고, 드래곤과 괴물들, 난쟁이 등이 판치는 세상은 더 이상 신선하지 않다. 그러나 <D&D>는 대중을 사로잡는 데 실패한 다른 판타지 영화들과는 달리 관객의 눈길을 계속해서 붙잡아 두는 마력을 갖고 있다. 마치 마블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이하 <가오갤>)를 보는 듯한 다채로운 캐릭터들의 합이 그 정체다.
<D&D>, 중세 판타지 버전 <가오갤>?
<D&D>에는 캐릭터가 많다. 빌런을 제외한 주연 캐릭터만 해도 다섯 명이나 된다. 캐릭터가 많다 보면 영화는 자칫 균형을 잃기 십상이다. 캐릭터 비중의 균형은 무너지고, 서사는 꼬인다. <D&D>는 다르다. 원작이 롤 플레잉 게임이라는 점을 살려 한 명 한 명에게 명확한 역할과 특성을 맡긴다. 캐릭터가 복잡하지 않으니 영화의 서사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원작 게임의 설정에 집착하지 않기에 더 효과적이다. 하퍼를 착한 비밀결사, 레드 위저드를 악의 온상으로 간단하게 묘사하는 식으로 간단히 알려주고 넘어가기 때문이다. 또 캐릭터 간의 극명한 차이점은 예상치 못한 유머 포인트다. 그 덕분에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중세 영웅담은 유쾌한 활극으로 거듭나는 데 성공한다.
그런데 <D&D>의 캐릭터는 사실 낯설지 않다. 각 인물의 특성이 <가오갤>의 주인공들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중세 유럽의 음유시인이라 할 수 있는 에드긴은 시종일관 류트를 든 채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을 십분 활용해 동료들을 이끌어 나간다. 이 대목은 음악 빼면 시체인 스타로드, 피터 퀼을 연상시킨다. 홀가는 검, 도끼, 쇠사슬 등 웬만한 무기를 모두 다 다루는 전사다. 시니컬한 성격 덕분에 에드긴과 재밌는 콤비도 이룬다. 가모라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마법사 사이먼은 로켓을 닮았다. 스타로드와 투닥거리면서도 필요한 장비를 뚝딱 만들어내는 로켓처럼, 사이먼은 에드긴과 시종일관 갈등을 빚으면서도 마법 아이템의 능력을 적재적소에 활용한다. 어떤 동물로도 변할 수 있는 드루이드 도릭은 온몸을 변형해 동료들을 지원하는 그루트처럼 활약한다. 마지막으로 매사에 진지해 유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팔라딘(성기사) 젠크는 힘은 강하지만 사고방식이 독특해 대화가 힘든 드랙스를 재해석한 결과처럼 보인다.
닮은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는 캐릭터들이 하나의 팀을 이루는 과정도 <가오갤>과 비슷하다. <D&D>는 의지할 가족을 잃은 이들이 모여 새로운 가족을 이루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본래 질서의 수호자인 비밀결사 하퍼 중 하나였던 에드긴은 하퍼의 맹세를 저버린 결과 아내를 잃고 도적이 된 도망자다. 홀가는 다른 종족인 남편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본인 종족에서 쫓겨나고, 결국 남편과 이혼한 외부자다. 사이먼은 최고의 마법사인 '엘민스터'의 후손이지만, 선조의 명성을 조금도 쫓아가지 못한 채 떠돌아다니는 실패자다. 드루이드인 도릭은 오래전 악마의 피가 섞인 혈통이라는 이유로 인간 세계에서 배척된 소수자다. 젠크는 악의 무리인 '레드 위저드'의 사상과 지향을 거부해서 쫓겨난 추방자다. 이들은 모험을 통해 애정을 싹 틔우고, 하나의 가족으로 거듭난다. 그래서 <D&D>는 유쾌하지만 마냥 가볍지는 않은 활극이다. 은은하게 감동적이다. 사이좋게 체포되고 도망 다니던 은하계의 사고뭉치들이 한 팀이자 가족이 된 <가오갤>처럼.
원작의 힘을 빌려 차별화에 성공하다
<가오갤>의 중세 판타지 버전 같아 보이는 <D&D>. 그러나 <D&D>를 그저 <가오갤>의 아류로 취급할 수는 없다. 원작 게임의 요소들을 적절히 녹여내면서 독특한 개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일례로 에드긴과 홀가는 새 팀원을 모으기 위해 이곳저곳을 여행하는데, 영화는 그 과정에서 복잡한 설명 없이도 넓은 세계관의 장소나 역사, 종족들을 자연스럽게 등장시킨다. 도릭이 팀에 합류하는 과정을 통해 '우드엘프'라는 종족을 소개하고, 그들과 인간의 악연을 설명한다. 또 젠크를 영입하면서 악당인 소피나와 레드 위저드의 과거사 및 목적을 알려주기도 한다. 원작에 등장하는 각종 아이템을 스토리텔링에 결부한 지점도 흥미롭다. 작중 주인공들은 모험 중에 자기 상처를 직시하고,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트라우마를 떨쳐내면서 개인적으로 성숙해지고, 팀으로서도 단단해진다. 이때 영화는 분기점마다 아이템을 하나씩 등장시키면서 이야기를 매끄럽게 전개한다.
사이먼이 '분리의 투구'를 사용하는 게 대표적이다. 그는 투구를 조정하는 과정에서 고고조 할아버지인 엘민스터의 환상을 만나고, 그 만남을 통해 자기 한계를 넘어서는 데 성공한다. 공간을 초월하는 통로를 뚫어주며 모험 내내 활약하는 '여기저기 스태프'의 등장도 비슷하다. 전 남편을 다시 만난 후 마음에 상처를 입고 관계를 완전히 정리하기로 결심한 홀가. 그녀는 과거 전 남편에게 선물했던 지팡이를 다시 챙겨 나온다. 그런데 그 지팡이가 알고 보니 '여기저기 스태프'였던 것으로 밝혀진다. '부활의 서판'도 마찬가지다. 모험이 시작될 때 이 마법 도구는 에드긴이 하퍼로서의 맹세를 깬 업보로 잃은 아내를 되살려 낼 수단이었다. 그러나 모험이 끝날 때, 이 서판은 그의 아내를 살려내지 못한다. 대신 에드긴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다섯 주인공이 하나의 가족으로 이어지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제목에 걸맞은 액션과 볼거리도 게임의 매력을 스크린 위로 적절히 불러온다. 주인공들은 '언더 다크'라는 지하 세계에 내려가 던전에 사는 드래곤을 만나고, 필사적으로 도망친다. 이 추격전은 마치 관객이 게임을 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일반적인 드래곤이 아니라 비만 체형을 자랑하는 드래곤이 등장하다 보니 신선한 재미도 있다. 또 후반부에는 하이썬 경기라는 일종의 미궁 탈출 게임에서 촉수 달린 흑표범 같은 괴물이나, 사람을 녹이는 슬라임 괴물처럼 원작 게임에서 모습을 비춘 바 있는 생명체를 등장시켜 긴장감을 더한다. 각 캐릭터의 능력을 고루 활용한 클라이맥스도 인상적이다. 비록 액션의 스케일이 크다고 할 수는 없어도, 다양한 볼거리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끝내 극복하지 못한 한계
물론 아쉬운 점도 있다. 빌런의 활용법이 발목을 잡는다. 소피나가 지나치게 일차원적으로 소비된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기 때문이다. 소피나는 주인공 일행 모두를 패퇴시킬 정도로 강력한 마법사다. 에드긴을 배신하도록 포지를 부추기고, 포지마저 자기 계획을 위한 꼭두각시로 이용할 정도로 교활한 면모도 있다. 에드긴을 붙잡기 위해 그의 딸로 위장해 덫을 놓는 장면에서는 그녀의 능력이 극대화된다. 하지만 소피나는 영화의 최종 빌런에 걸맞은 위압감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다음 시리즈를 위한 발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레드 위저드의 교주라고 할 수 있는 '스자스 탐'(이언 핸모어)을 소개하고, 악의 근원인 그가 어떻게 세력을 키우려 하는지 알려주는 도구다. 그래서 소피나가 주인공들을 위기로 몰아넣으면서 긴장감을 자아내는 장면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들이 한 단계 성장하기 위해 꺾어야만 하는, 또 꺾을 수 있는 전형적인 악역이라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암시된 까닭이다.
'괜히 휴 그랜트를 캐스팅한 게 아니구나'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악역, 포지가 있어서 아쉬움은 더 크다. 스테레오 타입인 소피나와 극명한 대비를 이루기 때문이다. 부활의 서판을 얻으려는 모험이 실패로 귀결되자, 포지가 자기를 속인 줄 모르는 에드긴은 그에게 서판과 딸을 부탁한다. 감옥에서 탈옥한 후, 에드긴은 맡겨둔 서판도 되찾고 딸과 재회하기 위해 포지를 찾아간다. 하지만 그는 보물도, 딸도 되찾지 못한다. 포지가 키라를 가스라이팅하고, 그녀의 애정을 악용해 부녀의 재회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포지는 옛 동료인 에드긴을 붙잡아 포상금까지 챙기려 한다. 이처럼 포지는 동료애도, 가족애도, 부성애도 철저히 자기 이익을 위해 이용한다. 한 가족처럼 끈끈해지는 에드긴 일행과 정반대의 모습으로, 그들과 사상적으로 대립하는 셈이다. 이는 별다른 능력을 지니지 못한 사기꾼 포지가 소피나를 제치고 진짜 악역의 자리를 꿰찰 수 있는 이유다.
축구에는 육각형 스트라이커라는 표현이 있다. 결정력, 몸싸움, 연계 능력, 스피드, 시야, 패스, 슈팅 등 공격수가 가져야 할 모든 능력치를 고르게 가진 선수를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에는 숨겨진 진의가 있다. 육각형이 큰 선수에게는 완벽한 공격수라는 칭찬이지만, 그렇지 않은 선수에게는 무색무취하다는 비판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등장한 판타지 영화 <D&D>는 다행히도 전자에 가깝다. 익숙하지만 정감 가는 캐릭터의 향연, 원작을 몰라도 즐길 수 있는 액션, 원작을 알면 더 반가울 볼거리, 예상외의 진지함이 묻어져 나오는 스토리까지. 모두가 만족할 둥글둥글한 매력이 넘친다. 루키가 기대 이상의 데뷔전을 치른 이상, 이제 중요한 건 그의 다음 발걸음이다. 과연 육각형을 더 키울 수 있을지 기대하면서 속편을 기다려본다.
A(Acceptable, 무난함)
캐릭터의 합을 내세워 우직하게 나아가는 반가운 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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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리 크로이처의 <코르사주>
본 글은 씨네랩을 통한 시사회 관람 후 리뷰를 요청받아 쓴 글입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주디스 루이스 허먼이 쓴 <트라우마>에는 유대인 강제 수용소에 관해 언급한다. 그는 강제 수용소에서 최악의 상태는 자살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최악의 상태는 아무런 능동적 행위 없이 수용소의 흡수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상태”에 관한 이야기다.
<코르사주>는 엘리자베트 황후에 대해서 다룬다. 영화 속에서도 등장하지만 엘리자베트가 프란츠 요제프에게 발탁(?) 된 까닭은 오로지 그녀의 외모 때문이다. 그는 그녀가 자신의 옆에서 인형처럼 서있기를 바랐다. 누구라도 황후에 대한 환상은 있겠지만, 알려진 것처럼 왕이나 왕비는 생각처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서론에서 유대인 강제 수용소에 대해 언급한 이유 중 하나가 신체적 자유에 대한 문제다.
물론 황후의 자리와 강제 수용소에 끌려간 유대인을 비슷한 처지라고 볼 수는 없다. 신체적 자유를 박탈당한 인간이라는 관점에서만 보았을 때 그들은 저항해야 한다. 저항해야만 주체적 자리를 얻을 수 있다. 최근 여성 서사들은 주체성이 가장 큰 이슈처럼 보인다. <코르사주>도 어김없이 주체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코르사주>가 여타 영화와 다른 점은 주체적 인간의 자리에 가는 방법을 죽음으로 선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관객들에게는 생소하겠지만 엘리자베트는 첫 번째로 낳은 딸이 세상을 떠났고, 시어머니와 깊은 갈등이 있었으며, 1889년 아들 황태자가 자살했고, 60세에 살해당한 비운의 황후로 알려져 있다. 다만 영화에서 그녀는 40살에 생을 마감했고, 그 이후의 삶은 그녀의 대리자가 이어간 것으로 그린다. 마리 크로이처 감독이 40살의 엘리자베트에게 주목한 이유는 그 시기부터 그녀가 자신의 삶을 위해 투쟁한 시기라고 느꼈다고 한다.
실제로도 우울증에 시달렸던 그녀는 정신병에 관심이 많았고, 영화 속에서 그려졌던 것처럼 축일 선물로 완벽한 시설을 갖춘 정신 병원을 원했다고 한다. 이 영화는 디테일을 계속해서 쫓아가야 한다. 영화 속에서 정신 병원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은 아마 시기적으로도 히스테리가 주목을 받기 직전의 시기였을 것이고, 고증을 위한 설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녀가 죽음의 문턱으로 향하는 처절한 몸부림의 설정이다. 정신병원에 누워있는 두 여자 중 한 명은 간통으로 정신을 놓았고, 또 다른 여자는 아이를 잃었다. 엘리자베트는 두 여자가 각각 겪은 경험을 지금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랑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고 일부러 말에서 떨어진다. 죽음에 대한 첫 몸부림. 그리고 그녀는 황제 프란츠 요제프가 딸과 여행을 가겠다는 요청에서 딸을 데리고 가지 못하게 하자 창밖으로 투신한다. 죽음에 대한 두 번째 몸부림. 하지만 그녀는 미치지 않고 끝내 정신을 붙들고 있다. 히스테리란 무엇인가. 정서적 충격을 해소할 수 없을 때 우리의 몸이 그 충격을 해소하기 위해 증상을 발현하는 방어기재라고 프로이트가 말해주지 않았던가. 엘리자베트는 정서적 충격을 온전히 주체적 몸짓으로 받아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매 순간 그런 방식으로 자살 시도를 하는 것은 충동적인 것이며 다분히 의도적이지만 전적으로 의식적인 행위라고 볼 수는 없다. 자신의 욕망을 정면으로 대면하고 끊임없이 투쟁하여 행위 자체를 이성적 판단에 의해 끌어올렸을 때 우리는 주체성을 획득할 수 있다. 이 과정은 우리가 이성적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윤리라고 한다. 그녀가 자신의 머리를 자르고, 마약을 하는 것 또한 주체성을 획득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이런 비관적인 행동이 어떻게 주체성을 위한 과정이라고 묻는다면 영화가 대답해 줄 것이다. 엘리자베트가 단발머리를 하고 마당에 앉아 다른 이들과 음악을 들을 때 그녀가 느끼는 해방감을 바람으로 표현한다. 그 바람은 그곳에 앉아있던 이들 중 엘리자베트에게만 향한다. 이 쇼트에서 느껴지는 해방감과 처연함은 그녀의 선택이 그녀의 몸을 파괴할지라도 그건 그녀의 권리라고 주장한다. 아니, 어쩌면 그 선택은 그녀에게는 의무라고 일컬어도 무방할지 모르겠다.
그녀의 세 번째 자살 시도는 성공으로 끝난다(고 생각 한다). 영화가 따라온 것은 그녀가 진정한 자신의 이성적 판단에 의해 몸을 던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자살 시도는 충동적이었다. 하지만 세 번째 자살 시도에서는 황제이자 남편에게, 그리고 딸과의 작별 인사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건 직후에 시도하지 않는다. 편안하고, 우아하게 그녀는 “바다”에 몸을 던진다. 그리고 나면 그녀의 우아하고 자유로운 춤이 이어진다.
2022년 12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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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트릭스, 다시 돌아올 필요가 있었을까?
매트릭스 시리즈의 4편인 매트릭스 리저렉션이 개봉했습니다.
마지막 3편이 나오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다시 만들어지게 된건데요.
거의 완벽히 이야기의 결말이 지어진 시리즈에 더 할말이 있었을까요?
센세이셔널한 액션 장면이 인상적이었던 과거 시리즈의 영광을 이어갈 수 있을까요?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확인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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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rix Resurrection, the fourth part of the Matrix series, has been released.
After a long time, the last three films were released, and it was made again.
Was there anything else to say about the series that almost perfectly ended the story?
Can we continue the glory of the past series, where sensational action scenes were impress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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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웬디> 메인 예고편
‘피터팬’ 탄생 110주년 기념,
새로운 주인공, 새로운 시각의 All New ‘피터팬’!기찻길 옆, 작은 식당이 세상의 전부인 소녀 ‘웬디’는
내면에 차오르는 호기심과 모험심으로 매일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그러던 어느 날, ‘피터’가 나타나고
‘웬디’와 쌍둥이 형제 ‘더글라스’, ‘제임스’를 이끌고 여정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로 어른이 되지 않고 영원히 어린이로 살 수 있는
신비로운 섬에 도착하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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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새로운 팀' 예고편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텐 링즈’의 힘으로 수세기 동안 어둠의 세상을 지배해 온 ‘웬우’
'샹치’는 아버지 ‘웬우’ 밑에서 암살자로 훈련을 받았지만 이를 거부하고 평범함 삶을 선택한다.
그러나 ‘샹치’는 목숨을 노리는 자들의 습격으로 더 이상 운명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하고,
어머니가 남긴 가족의 비밀과 내면의 신비한 힘을 일깨우게 된다
벗어나고 싶은 과거이자, 그 누구보다 두려운 아버지 ‘웬우’를 마주해야 하는 ‘샹치’
악이 될 것인가? 구원이 될 것인가?
마블의 새로운 시대,
세상에 없던 힘이 탄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