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댄스 열정을 불태우는 사춘기 딸 ‘수아’(최유리)와 함께 티격태격 일상을 보내는 맹수 전문 사육사 ‘정환’(조정석). 아침부터 수아의 생일 파티를 열던 정환은 창밖으로 동네 주민들이 과격한 스킨십을 하는 기괴한 장면을 본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던 정환은 그들이 서로를 깨물고 잡아먹는 모습을 본 후에야 좀비 바이러스의 존재를 깨닫고, 수아와 함께 서울에서 탈출해 어머니 '밤순'(이정은)이 사는 바닷가 마을 '은봉리'로 향한다.
하지만 탈출의 기쁨도 잠시, 정환은 수아가 좀비에게 물린 사실을 발견한다. 감염자를 색출해서 사살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정환은 고뇌에 빠지지만, 딸을 포기하지 않기로 한다. 감염 후에도 수아가 어렴풋이 사람 말을 알아듣고, 평소 좋아하던 춤과 음식에 반응했기 때문. 이에 정환은 호랑이 사육사로서의 경험을 살리고, 동네 친구 '동배'(윤경호)의 도움을 받아 좀비가 된 딸의 사회화 훈련을 시작한다.
공식은 이렇게 쓰는 거야
한국 코미디 영화는 모두가 아는 맛인 경우가 많다. 초반부는 기발한 설정으로 웃음을 자아내고, 후반부는 주인공들의 사연을 본격적으로 보여주면서 눈물을 자아내는 공식에서 대부분 벗어나지 않는다. 물론 근래에는 예외인 작품도 등장하고 있다. 이병헌 감독의 최대 흥행작 <극한직업>이나 예상외의 흥행을 기록했던 <핸섬보이즈> 등은 '선 웃음 후 신파'라는 공식을 탈피하면서 관객들의 호응을 끌어냈다.
동명의 네이버 웹툰을 영화화한 <좀비딸>은 새로운 흐름보다는 기존 공식에 충실하다. 갑작스러운 좀비 아포칼립스에서 한 아버지는 좀비에 물린 딸을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초반부는 좀비로 변해버린 딸을 교육하는 과정에서 일어날법한 여러 소동극으로 가득하다. 중반부부터는 그토록 아빠가 딸을 보호하려고 애쓰는 이유가 밝혀지면서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7번방의 선물>과 유사한 구조의 코미디다.
따라서 <좀비딸>은 자칫 무난한 공산품 같은 코미디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 좀비 영화를 더한 것도 별 도움은 못 될 뻔했다. <좀비딸>의 세계관과 설정은 좀비 영화의 기존 클리셰를 답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좀비딸>은 영리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영악하기까지 하다. 두 장르 모두 간과하던 '제삼자'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한국형 코미디와 좀비 영화 클리셰의 장점만을 화학적으로 결합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퇴장하지 않는 감염자
<좀비딸>의 세계관은 절대 낯설지 않다. <부산행>, <월드워Z>, <28년 후> 등에서 자주 접한 좀비 아포칼립스 그대로이니까. 바이러스로 인해 좀비들이 출몰했다는 것, 좀비를 제거하기 위해 군대가 투입되는 등 준전시 상태가 닥쳤다는 점, 좀비 바이러스를 제거할 수 있는 치료제가 임상실험을 앞두고 있다는 점까지. 전형적인 좀비 영화의 흐름에 충실하다.
단 한 가지가 다르다. 바로 감염자를 다루는 태도다. 일반적으로 좀비 영화에서 감염자는 철저히 주인공을 위기에 빠트리는 도구다. 설령 주인공이라 해도 감염자가 되는 순간에는 남은 캐릭터를 위한 제삼자로 위치가 그 즉시 바뀐다. 좀비에게 물린 즉시 그는 감정선을 자극하는 도구로써 소비된다. <부산행>에서 공유와 마동석이 감염되자마자 각각 딸과 아내와의 관계성에 방점을 찍어주면서 퇴장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그에 반해 <좀비딸>은 감염자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좀비로 변한 수아의 죽음을 보여줌으로써 정환의 부성애를 드러내는 단순한 스토리텔링과는 다른, 더 세련된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정환이 맹수 사육사라는 직업 특성을 살려 수아를 교육하고, 가족과 친구들이 그를 돕는 과정에서는 부녀지간의 정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좀비딸>은 이 변화를 놓치지 않는다. 좀비 영화 분위기는 살리되, 색다른 장르와 내용을 펼쳐 보일 기회로써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실제로 <좀비딸>은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이는 영웅적인 이야기에 가려져서 미처 보이지 않았던 감염자와 감염자 가족의 이야기를 펼칠 충분한 공간과 시간을 확보한다. 좀비 영화에서 빠지지 않던 액션과 스릴러 없이 코미디와 가족 드라마로만 러닝타임을 채워도 영화가 안 허전한 이유이기도 하다.
뻔한 코미디 공식을 낯설게 만드는 법
예상 못 한 인물의 존재감을 부각하는 <좀비딸>의 화법은 코미디를 만드는 방식에서도 엿볼 수 있다. <좀비딸>에서 유머는 예상과 달리 정환과 수아 외의 인물들이 담당한다. 좀비들 사이에서 좀비 흉내를 내는 장면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코미디는 제삼자가 정환과 수아 부녀 사이에 끼어드는 순간 터져 나온다. 예를 들어 밤순이 효자손을 들고 좀비로 변한 손녀를 '참교육'하는 순간, 영화는 급격히 좀비 영화에서 코미디로 전환된다.
그 이후로도 <좀비딸>은 여러 제삼자를 차례대로 투입하면서 다양한 코미디를 보여준다. 일례로 정환의 동네 친구인 동배는 수아의 사회화 교육을 돕는 동안 수아에게 물릴 뻔한 위기를 겪으며 웃음을 자아낸다. 그다음은 정환의 첫사랑인 '연화'(조여정) 순서다. 일정 수준 사회화가 이뤄진 수아는 그녀가 근무하는 학교에 출석해서 다른 친구들과 함께 체육 수업을 듣는데, 이 시간은 여러 슬랩스틱으로 가득하다.
중요한 것은 제삼자들이 등장하는 순서다. 그들은 수아가 다시 인간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정환의 말을 믿는 정도가 높은 순서대로 투입된다. 즉, <좀비딸>은 수아를 대하는 태도가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고, 그들의 신뢰를 얻는 이야기인 셈이다. 상대적으로 낯선 사람들에게 수아가 노출되는 빈도가 늘어날수록 정환이 좀비가 된 딸을 훈련하기로 결심한 이유와 그의 과거사도 본격적으로 제시된다.
이를 통해 <좀비딸>은 '선 웃음 후 신파'라는 공식에 딱 들어맞는 환경을 영리하게 조성한다. 불신 가득한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숨겼던 개인사를 공개하는 장면이 눈물을 자아내면서 코미디 장르가 유려하게 신파로 전환되는 것. 놀이공원 시퀀스처럼 수아의 정체가 발각될 것으로 예상되었던 위기 장면을 한 차례 비트는 연출이 더해진 덕분에 신파로의 전환은 더 자연스럽고, 공식 그대로인 전개도 뻔하지 않은 느낌을 줄 수 있다.
관객이라는 제삼자
더 나아가 제삼자의 존재감은 <좀비딸>의 신파에 깃든 사회적 함의도 부각한다. 정환의 부성애가 애틋한 것과 별개로, 좀비로 변한 딸을 숨기고 훈련하기로 한 정환의 선택은 본질적으로 반사회적인 선택이다. 만약 그의 결정이 잘못되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감염되는 해악을 끼칠 수 있었기 때문. 이렇게 본다면 <좀비딸>은 개인의 자유와 선택과 사회의 질서와 안전이 충돌할 때 어느 공익을 우선시하는 게 바람직한지 묻는 영화다.
<좀비딸>은 이 질문을 제삼자에게 순서대로 묻고, 그들은 각자 나름의 답을 내놓는다. 할머니는 가족이라서, 경호는 친구라서 정환의 선택을 지지한다. 반면에 좀비로 변한 연인에게 공격당한 기억이 있는 여정은 수아의 상태를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정환을 믿지 않는다. 사살 명령을 받은 군인들 역시 수아가 말할 수 있다는 걸 보기 전까지는 총구를 내리지 않는다.
이 연쇄 덕분에 <좀비딸>은 관객에게도 자연스럽게 질문을 던질 수 있으며, 이때 현실과 영화의 틈은 관객을 괴롭게 한다. 현실에서 우리는 사회 질서를 우선해야 한다고 합의한 바 있다. 팬데믹 초창기에 정부는 감염자 동선을 공개했고, 감염자가 많았던 특정 지역을 사실상 봉쇄한 전례도 있다. 하지만 정환에게 공감하고 눈물을 흘릴수록 그의 선택을 비난하기는 어려워지고, 또 이전의 합의가 옳다고 말하기도 힘들어진다.
영악한 선택과 집중
바로 이 대목에서 <좀비딸>의 신파는 이른바 '공업적 최루탄 신파'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을 손에 쥔다. 익숙한 장르적 설정, 관습, 공식을 영리하게 활용하여 설계한 구조가 관객을 자연스럽게 이야기 속으로 포섭한 덕분에 두 공리의 충돌과 딜레마를 고찰하게 만드는 힘이 정환의 눈물에 깃들기 때문이다. 제3의 역할과 인물을 연쇄적으로 강조한 <좀비딸>의 스토리텔링에 영리하다는 호평이 아깝지 않은 이유다.
그러나 <좀비딸>의 가능성은 곧 한계이기도 하다. 메시지와 담론의 층위를 더 깊이 만들 기회를 잡은 순간, 그 기회를 살릴 용기의 부재가 동시에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 사회에서는 정환의 선택을 온전히 긍정하기 어렵다. 팬데믹 때도 한국이 다른 서구권 선진국들에 비해 정부 주도의 권위주의적 방역 정책을 취한 만큼, 개인의 자유를 최우선에 둬야 한다는 정환의 소신은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않게 여겨질 공산이 크다.
이를 고려해서인지는 몰라도 <좀비딸>은 질문을 던지되, 그 파급력을 축소하려 든다. 현실감이 느껴질수록 정환의 부성애보다는 그가 일으킬 사회적 여파를 필연적으로 고려하게 될 테니, 애초에 그 상황을 조성하지 않으려 한다. 현실적이고 논쟁적인 사회적 담론에 발은 걸치되, 그에 대해 확실한 답을 제시할 자신감까지는 없었던 셈이다.
매력적인 균형감
하지만 <좀비딸>은 영악하다. 복어독을 다룰 자신이 없으면 복어에 아예 손을 대지 않아야 하듯이, 가능성을 현실화할 자신은 없으니 철저히 한계를 가리는 데에 집중한다. 작품의 완성도는 아쉬워지더라도 상업영화로서는 안정된 선택만 골라 한다. 일례로 응봉리 바깥세상의 상황은 수아 친부가 등장해 위기가 고조되기 전까지는 언급되지 않는다. 좀비 바이러스 치료제 개발을 둘러싼 사회적 대립과 갈등도 정환의 슬픔과 피로를 강조하는 장치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으로 묘사된다.
같은 맥락에서 원작 내용도 각색했다. 정환과 유사한 처지에 있었던 다른 시민들의 사연이나 존재는 모두 생략됐다. 결말도 달라졌다. 좀비를 숨긴 정환의 선택이 일으킬 논란은 다뤄지지 않고, 정환 덕분에 치료제를 개발할 수 있었다는 다소 급작스러운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린다. 즉, 관객의 시선을 철저히 정환의 부성애 쪽에만 붙들어 놓는다.
그와 동시에 배우들을 대중적인 이미지와는 조금씩 다르게 활용해서 허점을 가리기도 했다. 코믹한 이미지가 강한 조정석이 유머보다는 아버지로서의 절절함을 강조하는 연기를 보여주는 사이에 이정은, 윤경호, 최유리 세 배우가 코미디를 나눠서 담당하는 식이다. 조여정에게도 명성에 비해 적은 분량을 주면서도 코미디에서 신파로 장르가 바뀌는 전환점을 맡겼다.
결과적으로 <좀비딸>은 식상함과 참신함, 코미디와 신파, 상업성과 작품성 사이에서 모두 균형을 잡는 데 성공했다. 비록 사회적인 측면을 다룰 때 한발 더 나아가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남지만, 기획된 조화를 깨지 않았다는 측면에서는 마냥 비판하기도 어렵다. 이처럼 영리한, 더 나아가 영악한 균형감이야말로 영화 할인 쿠폰 관객을 겨냥한 여름 극장가 대전에서 <좀비딸>이 승자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일 테니까.
Acceptable 그럭저럭
지금 한국 코미디 영화에 바랄 수 있는 최선의 영악함과 균형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