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저2023-08-10 14:43:31
'크리스토퍼 놀란'이 만든 놀라운 세계
내가 영화를 보는 가장 큰 이유는 현실에서 잠시 다른 세상으로 떠나는 순간이 좋아서다. 2시간으로 옆 동네에서 저기 먼 우주까지 가 볼 수 있다니 얼마나 매력적인가. 다양한 세계의 이야기 속엔 아름다운 사랑도, 가늠할 수 없는 슬픔도, 소소한 행복도 있고… 공포나 두려움을 느끼는 상황들도 존재한다.
영화를 보는 동안 가질 수 있는 일상의 환기성에 큰 기쁨을 느끼다 보니, 영화를 보는 동안 긴장하고 있는 상태를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돈을 내고 왜 고통을 당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스릴러나 공포물을 극장에서 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런 내가 <메멘토>를 극장에서 본 것은 지금 생각해도 무슨 이유였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영화가 있을 수 있다니.’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오며 받았던 충격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이걸 만든 감독은 천재구나.”
당시만 해도 배우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감독까지 찾아보는 편은 아니었으므로, 천재적인 신인 감독 정도로 생각하고 지나갔다.
그리고 십년 뒤, 나의 인생 영화를 만났다. <인셉션>
무더운 여름, 등골이 서늘해진 느낌으로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
“와 ! 이거 만든 사람 천재구나”
집에 돌아와 처음으로 감독을 검색해 보며, <인셉션>을 만든 감독이 <메멘토>를 만들었음을 알게 되었다. 내 입에서 천재구나라는 말이 두 번 나오게 한 감독. 아…뭔가 반가웠다. <다크 나이트> 자칫 뻔하게 느껴질 수 있는 히어로물까지도 자신의 색을 잃지 않는 사람.
“기억은 기록이 아니라 해석이다.” 라는 메멘토의 대사처럼, 깊은 인상을 남겨준 그 두 번의 강렬한 경험의 기억은 <인셉션> 이 후, 나에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모든 작품을 믿고 보는 영화계의 최애 브랜드로 만들어 주었다. 좋아하지 않는 소재의 영화를 만들더라도 보고 싶은 감독.
솔직히 <인셉션> 이 후 나의 최애 감독이 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만든 모든 작품이 다 최고였다고 말할 수 는 없다. 하지만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전쟁영화를 좋아하지 않지만, <덩케르크>를 보게 만들고, 그가 만든 영화를 잘 이해 하고 싶어서 물리학 책을 찾아 보게 되는 것. 그리하여 내가 잘 안다고 생각 했던 것에서 낯섦을 발견하는 일 뿐만 아니라,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나의 관심사가 뻗어나가는 즐거움을 느끼게 되고, 나의 세계관이 확장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영화라는 매개로 나에게 선물 한 것들은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그의 신작 <오펜하이머>를 기다리는 이유는 그런 것이다. 영화를 보는 동안 다른 세상으로 떠나게 만들어 주는 2시간의 경험을 넘어 영화 이후, 나는 어떤 인사이트를 받게 될지, 그래서 나는 또 어떤 것을 탐구하게 되고 관심사를 확장해 나가게 될지 … 영화로 인해 내가 만나게 될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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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얼리티 가족 다큐멘터리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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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사자성 발언.
나는 여자다. 그리고 김씨다. 조부는 종가집 장손이었다. 무려 4대 독자! 그리고 대망의, 내 본적은 경상북도다. 나는 순혈이다. 지독한 가부장제의 순수혈통. 종친회에서 고칠 데를 손 봤다는 올칼라 족보를 만들었고, 여전히 나는 남동생의 동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우리 가족 소개 같은 숙제를 하면 아버지가 그리 말씀하셨다. 우리 집은 무슨 김씨 무슨 파 무슨 왕의 몇대손이며 우리 할아버지는 몇대 독자고 어쩌고 저쩌고. 어릴 때는 그게 자랑인 줄 알았더랬다. 그리고 좀 커서는 족보를 샀겠거니 생각했다.
커서 보니 쓸 만한 유전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도 나와 내 동생과 아버지와 할아버지 등등과 비슷한 모습일진대 무슨 놈의 대를 그렇게 이어야 하는지 이해가 안 갔다.
도대체 이 족보주의에서, 순수 혈통을 이어가서 얻는 게 무엇인가. 그 유전자를 굳이 길이길이 남겨야 하는가. 어릴 때부터 이해가 안 갔다. 물론, 뭐 내가 태어났을 때 딸이어서 아무도 병원에 안 오고, 내 이름이 뒤에 아들 낳는 이름으로 지어질 뻔하고, 족보에도 올려주지 않아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무슨 왕정 제도를 미시체계에서 이룩한다는 게 좀 우스우니까. 장남을 왕세자에 책봉하고, 훗날 왕위를 물려주는 것마냥 일개 가정에서 신수왕권설 같은 걸 주장하는 게 이상하니까.
자, 개인사를 주절주절 늘어놓은 까닭은 영화 <장손>이 픽션이기 때문이다. 픽션인데,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리얼리즘 픽션.
줄거리를 한 줄로 요약하자면 '경상북도 김씨 가족의 장손에 관한 이야기'다. 너무도 핍진하여 두 시간 동안 경상북도 김씨 가족의 차남의 장녀가 괴로움에 몸부림쳤던, 그 이야기.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 건
족보와 장손밖에 없다. 장손을 제외한 나머지는 흩어져야 산다. 영화는 가정 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층위의 갈등을 두 시간 동안 보여주는데, 그 갈등이 비단 가정 내에서만 발생하지는 않는다.
프랙탈은 일부를 확대해 보면 전체와 동일한 모양이 반복되는 구조를 말한다. 그러니까 '선산 김씨'네 가정은 대한민국의 프랙탈이다. 영화는 가족에 관해서 말하고 있으나 이 개인적이고 미시적인 서사가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은 '선산 김씨'네가 유난스럽지도, 특이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몇 개의 갈등이 중첩되면서 켜켜이 쌓인다. 그 갈등이 새삼스럽지도 않다. 제법 클리셰적인 갈등이다.
자기네 조상 제사를 지내는데 김씨 아닌 사람들만 모여 앉아 전을 부치고, 김씨들은 방문을 닫고 들어가 화투 치고 맥주를 마신다거나, 장손이 올 때까지는 에어컨도 안 틀어준다거나.
6.25 전쟁 때 빨갱이가 얼마나 잔인했는지 고장난 라디오처럼 말하는 노인과 노인의 얘기가 궁금하지 않은 손자, 사업으로 부자가 된 자식과 사는 게 녹록지 않은 자식. 애초에 돈 되는 공장은 아들 주고, 낡은 집은 딸을 준 유산 분배.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와 세대갈등과 남녀갈등이 총체적으로 한 가정에 녹아 있는 것이다. 이 부분은 전체와 동일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가족이 운영하는 사업체가 '두부 공장'이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두부가 바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 음식 아닌가.
두부를 잘 뭉치려면 쌩노가다를 해야 한다. 원래는 가정 내에서 만들었다(아는 척하는 이유는 내 외조모가 두부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선산 김씨네 두부공장 역시 처음에는 가정 내에서 조모인 오말녀가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오말녀는 며느리가 공장에서 찍어내는 두부가 못마땅하다.
두부 공장 씬에서 장남인 태근이 일하는 모습은 스케치로도 거의 잡히지 않는다. 대부분 며느리가 일하는 모습이다. 게다가 일하는 사람은 손녀사위다. 그런데 사장은 당연히 태근이다.
간단히 설명된다. 이 가정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여자와 여자와 여자와 여자들이다. 다시 프랙탈. 유사 이래로 놀고 먹은 여자는 소수다. 장손이라 해서 집안을 일으키고 어쩌고저쩌고 한 것만 같지만, 사실상 장손 혼자서 가정을 부양하고, 조상들을 제사지내주지 않는다.
조모는 장손 판타지를 공고히 한다. 조부는 규범과 같은 상징체계에만 관심이 있다면 실질적으로 현실화하는 사람은 조모다. 장손이 올 때만 에어컨을 켜 주고, 장손의 어릴 적 이야기를 신화처럼 반복하고, 제사상에 올릴 음식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여자들을 감시하는 여자. 장손 판타지를 만들어내는 여자. 장손이라는 고귀한 존재를 만들어 희생을 합리화하는 여자. 어쩌면 장손은 고된 여자들이 만든 신화다.
그러니 사실 여자들이 뭉치지 않고 흩어지는 순간, 장손? 그게 뭔데.
가족의 미래
영화의 초반부에 제사 준비를 하면서 오말녀는 딸에게 '상조보험'에 가입하라고 재촉한다. 보살이 집안에 초상날 것을 예언했기 때문이다. 이 장면에서 관객은 '누구 하나 죽긴 죽겠구나' 하고 예상하게 된다.
누가 죽을까. 가족의 미래를 점쳐보자.
1. 김승필(장손의 조부)의 사망: 매우 자연스럽다. 나이도 많고, 대장암 수술을 해서 건강도 좋지 못하다. 제사를 꼭 자정에 맞추어 지내야 한다는 매우 고지식한 사람이다. 입만 열면 빨갱이 타령. 김승필이 사망한다면 자연스럽게 집안의 주도권이 김태근에게 넘어갈 것.
2. 김태근(장손의 부)의 사망: 장손의 모가 농담으로 하는 말. 하도 미워서 잘 때 한 대 때렸다. 죽지도 않고 왜 깼냐. 뭐, 슬프지만 장손이 있으니 괜찮지 않을까? 두부 공장과 관련된 이슈가 발생할 것. 공장은 서울에서 연기하는 장손에게 갈 것이냐, 공장에서 일하는 손녀사위에게 갈 것이냐.
3. 김성진(장손)의 사망: 큰일난다. 이 가족 망한다.
4. 오말녀(장손의 조모)의 사망: 집안의 대소사를 모두 책임지고 있는 실질적 가장. 오말녀는 현재 매우 건강하고 꼬장꼬장한 노인이다. 한글을 배우려는 의지가 강하다. 오말녀가 죽는다면 장손 판타지로 이어온 가정은 붕괴된다. 오말녀만큼 장손을 우쭈쭈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
5. 그 외 여자들의 사망: 서사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
영화에서 큰 사건이라 함은 누군가의 장례식이 될 것이다. 장례식은 별 탈 없이 잔잔하게 살던 가족에게 던져진 돌멩이가 아니다. 겉으로는 잔잔해 보이지만 수면 아래에는 겉잡을 수 없는 와류가 소용돌이치고 있다. 장례식을 계기로 드러났을 뿐.
<장손>은 2023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KBS독립영화상과 오로라미디어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영화를 보기 전 감독이나 출연진, 줄거리, 어떤 정보도 찾아보지 않고 갔다. 두 시간 동안 경북에 본적을 둔 여성을 미치게 만드는 솜씨에 무슨 상을 받아도 받았겠거니 예상만 했다.
이 영화에 다양한 매력이 있겠으나 그중에서도 탁월한 이미지를 꼽고 싶다. 오래된 한옥에 사는 노인들의 출입을 쉽게 하려고 문간에 걸어둔 동앗줄 같은 디테일. 동그란 손잡이가 달린 줄조차도 굉장히 의미심장해 보인다.
특히 마지막 장면은 압권인데, 장손 성진이 택시를 타고 떠나고, 성진을 배웅한 노인은 눈 쌓인 비탈길을 아주 오래 걷는다. 롱테이크로 잡아낸 그 장면은 마치 서편제 같다. 뭐 대단한 걸 하고 돌아서는 장면 같다는 뜻이다.
택시를 탄 성진의 얼굴에 아침해가 날카롭게 비친다. 성진은 눈을 찡그린다. 빛을 보는 대신 눈을 가려 버린다. 그런 디테일에서, 이 가부장제라는 망령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장손 성진의 손에서는 결코 낡은 시대가 종언되고 새로운 체제가 구축되지 않을 것임을 예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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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는 '그땐 그랬지' 정도의 픽션, 누군가에게는 현재 진행형의 고통, 또 누군가에게는 피해망상, 그리고 또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관습'.
<장손>은 픽션이 아니다. 리얼 다큐멘터리다. 추석 직전에 개봉하는 만큼, 가족과 함께 보면... 과연 괜찮을까?
장손(House of the Seasons, 2024)
감독: 오정민
출연: 강승호, 손숙, 우상전 외
러닝타임: 121분
개봉: 2024. 09. 11.
씨네랩에서 초청받아 시사회에 참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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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죠스는 인재(人災) 영화다
줄거리
애미티는 여름 피서객을 상대로 한철 장사를 하는 작은 해안 마을이다. 그러나 해수욕장 개장을 앞두고 축제 분위기의 마을에 비상등이 켜진다. 바다에서 상어한테 물어뜯긴 듯한 시체를 발견한 것. 바다를 싫어하는 경찰서장 브로디는 당장 해수욕장을 폐쇄하지만, 시장은 장사를 해야 한다며 경비를 강화하고 그대로 해수욕장을 열기로 한다.
결국 한 소년이 상어의 습격을 받게 되고, 시장은 그제야 상어를 잡아야 한다는 브로디의 말에 따른다. 많은 상어 사냥꾼이 몰려오지만, 브로디의 눈에 띈 건 딱 두 명. 상어를 연구하는 박사 '매트 후퍼'와 마을의 어부인 '퀸터' 선장. 세 사람은 함께 상어를 사냥하기 위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간다.
감상 포인트
1. 눈썰미 좋은 사람들한테는 티날 수 있지만, 나 같은 막눈에게는 상어가 제법 리얼하다.
2. 언제 일이 터질 지 모른다는 압박감과 공포감으로 보는 영화.
3. 죠스는 과연 천재(天災)일까, 인재(人災)일까.
감상평
'빠밤~ 빠밤~'
지금 아무런 음이 없는데도 노래를 흥얼거릴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죠스]라는 영화에서 이 음악이 얼마나 중요했는가를 알려준다. 엄청난 위험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끼게 하면서 평화로운 화면에서조차 긴장감을 느끼게 만드는 마력의 음악이다.
"무서운 장면 없이 무서운 영화."
컨저링이 개봉할 당시에 포스터에 적혀있던 말이다. 이 말의 시초가 바로 죠스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영화 [죠스]는 상어에 관한 이야기지만 상어가 나오는 장면은 손에 꼽는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완벽한 상어 모형을 만들고 싶어 했지만, 결국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로봇까지 만들었지만 물에 들어가니 고장 났다고.
오히려 그게 감독에게 발상의 전환을 안겨준 셈이니, 결과적으로는 좋은 일이었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상어 나오는 장면 없이 무서운 상어 영화"를 만든 셈이다. 수면 아래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다리, 그런 사람에게 다가오는 지느러미, 상어 시점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여기에 깔리는 음악까지. 더할 나위 없이 무섭다.
게다가 실제로 상어 사냥을 나갔을 때는 그들의 배에 접근하는 노란 부표만으로도 엄청난 긴장감을 보여주고, 부표의 거센 움직임으로 긴박한 전투를 보여주었다. 천재라고 부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도 옛날 작품이다 보니 모형이 리얼하진 않다. 전체적으로 튀어나오는 모습을 볼 때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왜 이 모형을 숨기고 싶어 했는지 알 것 같은. 하지만 말했다시피 나는 막눈이라서 그런지 '그래도 제법 리얼한데?'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같이 보던 동생은 모형인 게 너무 티 나서 순간 긴장감이 확 죽어버렸다고. 눈썰미 좋은 살마들은 웬만해선 흐린 눈 하고 보기를 추천.
상어보다도 내가 더 관심 있었던 것은 인간의 욕망이었다.
서장이 자신의 권위와 장사 수익만을 위해 해수욕장을 열었기 때문에 어린 소년이 희생당했다. 막을 수 있는 사고였다는 점에서 이건 인재(人災)였다. 그래서 아이의 엄마가 검은 장례식 복장을 입고 우는 장면에서는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개봉한 영화인데, 왜 내가 태어난 이후에도 이런 일들이 계속 일어날까.
게다가 그런 어머니를 옆에는 버젓이 거짓말하는 인물들이 서 있다. 바로 상어 사냥꾼들. 영화 내에서 유추해 보자면, 그들은 상어를 직접 잡은 게 아니라 어디서 가져온 상어를 잡아온 것처럼 말한다. 실제로 소년을 잡아먹은 그 상어가 아닌데도 말이다. 그리고 서장은 이 거짓된 사진을 앞세워 사람들을 안심시키려는 생각밖에 없다. 결국 희생자의 부모 앞에서도 욕망에 젖은 이기적인 인간들의 모습은 상어의 모습보다도 소름이 끼친다.
영화 [죠스]는 이런 인물들 간의 이야기를 많이 다루지 않는다. 그보다는 상어 사냥을 나가는 세 사람의 모습을 더 집중적으로 비출 뿐이다. 하지만 원작 소설에서는 이런 비판적인 이야기를 주류로 다룬다고 한다. 원작 소설이 있었다는 건 영화를 보고 알았는데, 오히려 영화보다 책이 나와 더 잘 맞을 것 같다.
더불어 세상이 많이 변했다는 걸 느꼈다. 상어를 잡는 사냥꾼들이나, 퀸트 선장을 보며 회의감이 들었다고 할까. 특히 퀸트 선장의 배에 수많은 상어 이빨을 보며 역겨웠다. 그냥 해수욕장을 비워서 먹이가 없다는 걸 알았으면 상어는 다시 해안가로 오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애당초 상어가 해안가로 온 이유도 먹이가 부족해서는 아니었을까.
여러 이익이 충돌하는 현대 사회에서 오로지 답은 없겠지만, 상어가 갑자기 나타난 데에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무엇이 변했을 때에는 모두 이유가 있다.
우린 때론 그 이유를 찾기보다 눈앞에 나타난 현상을 해결하는 데에 더 목을 맨다. 하지만 언제나 중요한 것은 '왜?'를 묻는 것이다.
영화 [죠스]에서도 사람들이 조금만 더 '왜'를 물었더라면 훨씬 나은 결과가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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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래의 꼬리처럼 힘차게
PROGRAM NOTE.
태어나자마자 엄마를 잃은 여섯 살 클레오가 사랑하는 보모 글로리아를 떠나보내며 겪는 이별과 상실의 과정을 그린 작품. 자신의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급히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 글로리아와 마지막 여름 휴가를 보내며 인생의 한 단계로서 이별의 의미를 받아들이려는 클레오의 이야기가 뭉클하고 따스하게 그려진다.
(2023년 11회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POINT.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쁘띠 마망>… 셀린 시아마를 좋아하세요? 셀린 시아마 감독의 모든 장편영화를 제작한 바로 그 제작사의 신작! 속속들이 아름다운 작품을 또 한 편 만나보세요
✔️ 안경을 쓰면서 바로 클레오로 변신했다는 놀라운 신인 배우, 루이스 모루아-팡자니! 클레오가 웃을 때마다 행복해졌어요
✔️ 겨울 코끝을 찡하게 만들어줄 따뜻한 작품. 생의 처음에 있던 것들을 헤아려보게 만드는 영화라서, 2024년 새해 첫 영화로도 좋을 것 같아요
✔️ 2023 칸영화제 비평가 주간 개막작, 2024 선댄스영화제 스포트라이트 부문 초청! 자꾸 시선이 가는 영화
✔️ 로튼 토마토 신선도 지수 100%! 받을 만 하지
✔️ 믿고 보는 조합, ‘그린나래미디어’ & ‘하이스트레인저’!
✔️ 2024년 1월 3일 개봉
#최초의 세계
이 영화의 원제는 ‘아마 글로리아(Ama Gloria)’, 그저 정직하게 ‘보모 글로리아’이다. 안경점에서 시력 검사를 하는 클레오의 모습과 함께 보이는 글로리아를 통해, 우리는 금방 꽤나 많은 것을 읽어낼 수 있다. 첫째, 그는 클레오의 어머니가 아니다. 둘째, 그는 클레오와 다른 뿌리를 갖고 태어났다. 셋째, 그럼에도 시력 검사 결과조차 도와주고 싶어할 만큼 그는 클레오에게 깊은 애정을 갖고 있다.
보모. 사어(死語)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어쩐지 빅토리아 시대 고전 소설에나 나올 것 같은 느낌의 단어다. 실제로 요즘은 ‘베이비시터’ 같은 표현을 더 많이 쓰기도 하고. 하지만 보모라는 말에는 더 끈적하고 진득한 느낌이 배어 있다. 한자로 ‘모母’ 자를 쓰고 있어 그런지, 옛날에 더 많이 쓰던 단어라서 그런 건지. <클레오의 세계> 속 글로리아 또한 베이비시터보다는 보모라고 부르고 싶은 존재다. 그건 단순히 클레오의 아기 시절부터 지금까지 쭉 오래 함께해왔다는 이유만은 아니다. 둘은 서로에게 온전히 기대는 존재다. 아이 얼굴의 밀가루를 털어주고, 놀이터에서 생긴 상처를 후 불어주는 사람. 걷고, 씻고 하는 모든 순간을 놀이와 웃음으로 채워주는 사람. 오래 전 읽은 소설 <봉순이 언니>의 문장이 떠올랐다.
그녀만이 우는 나를 달래주었고, 그녀만이 내 잠자리의 베개를 고쳐놓아 주었다. 그녀는 나와 마주친 최초의 세계였다.
클레오에게 글로리아는 최초의 세계다. 그렇기에 클레오는 글로리아를 작은 몸과 마음 다해 힘껏 사랑한다. 갑작스럽게 전화로 전해져 온, 글로리아 어머니의 부고 소식 앞에, 슬퍼하는 글로리아 옆에 조용히 앉아 통통한 뺨과 곱슬머리를 기대며 앉는다. 그렇게 클레오는 온 존재로, 글로리아의 슬픔에 고요히 귀를 기울인다. 때로는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다 이야기하는 작은 아이는, 조용히 흐르는 슬픔을 감쌀 줄도 알 만큼, 그만큼 자신의 최초의 세계를 사랑했다. 자신을 키우는 존재의 콧노래, 그가 숨죽여 이불로 작은 몸을 덮어주는 순간의 기억, 이런 것들은 어린 시절의 어느 정도를 차지할까. 평소 크게 기억하지 않고 사는 어떤 기억들이 사실은 나를 지탱하게 하고 있음이, 영화에서 부드러운 색채로 그려진 애니메이션을 타고 관객에게로 흘러온다.
#세계는 깨어지고 확장된다
그러나 힘껏 자신을 다 기댄 클레오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이별은 온다. 글로리아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이제 글로리아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장례를 치러야 하고, 어머니에게 ‘황혼 육아’로 맡겨두었던 자신의 진짜 아이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뜻했으므로. 그렇게 글로리아로 가득하던 클레오의 세계는 최초의 균열을 맞이한다.
아이들도 알 건 다 안다. 그래서 그 균열의 순간은, 어둠 속에서 훌쩍훌쩍 우는 클레오의 모습. 떼쓰지도 조르지도 못하고 창틀만 꼭 붙잡은 클레오의 눈물 속에서 일방적 순간이 된다. 그러나 진짜 클레오가 균열을 감지하는 건, 오히려 방학을 맞아 글로리아의 고향 섬에 놀러 가서 작은 방에 몸을 뉘이는 순간이다. 가족들과 찍은 글로리아의 사진을 보며, 클레오는 처음으로 감지한다. 내 모든 것인 사람에게, 그에게는 내가 모든 것이 아님을 처음 깨닫는 순간.
그 순간, 머릿속에서 딱 클레오만했던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초등학교 1학년 소풍 날이었고, 1학년이니까 보호자의 동행이 허락되었으며, 우리 엄마는 나뿐 아니라 동네 이웃집 아이와 동행하고 사진을 찍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간호사로 근무하고 계셨던 아주머니는 미안한 얼굴로 아이를 챙겨달라고 연신 부탁했고, 그 모든 사정을 다 알고 있었음에도, 엄마가 나 없이 다른 친구와 둘이서만 다정하게 앉아 이야기를 하거나 같은 프레임의 사진에 찍히는 걸 보는데, 기분이 상당히 묘했다. 한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조합을 목격했다는 생경한 기분이었으나 뭐라고 설명하지 못한 감정이었는데, 이 영화를 보면서 그때의 내 마음이 이해된 것이다.
굳이 <인사이드 아웃>에서 빙봉이 사라지는 슬픈 장면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성장은 언제나 상실을 동반한다. 내가 알던 세계가 조각나는 아픔을 거친다. 그러나 깨지고 다친 세계는 무너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틈으로 더욱 확장된다. 글로리아에게 자신이 모든 것이 아님을 깨닫는 클레오의 여정은 쉽지 않았지만, 이를 통해 글로리아는 물론 글로리아의 가족들과도 연결된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님을 차츰 배우고, 중심이 아닌 채로도 건강한 관계를 맺어갈 수 있다는 것. 우리는 그것을 성장이라고 부른다. 영원히 애정의 중심에만 살 수는 없는 것이다. 글로리아뿐이었던 “클레오의 세계”는 이렇게 또 조금 확장되었다. (이 영화 제목 번안은 정말 멋지다.)
#그 후로도 우리는 자라겠지만
이 영화는 제목 그대로 “클레오의 세계”가 확장되는 아릿한 성장의 시간을 따뜻하고 다정하게 바라보는 동시에, 클레오를 둘러싼 사람들에게서도 사랑스러운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주인공의 성장담을 서술하기에 벅차 허덕이는 영화가 아니라, 모든 인물의 성장은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담은 넉넉한 작품이다.
자신이 낳은 아이들 대신 자신이 낳지 않은 누군가의 아이를 돌보고 사랑하며 사는 여성의 삶, 섬에 줄곧 살지 않았다는 이유로 기묘한 텃세를 받으며 그 거리감 안에서 다시 생활을 꾸려 가는 글로리아의 삶. 오랫동안 떨어져 있어 조금은 떨떠름한 분노의 대상인 엄마를, 동생도 아닌 클레오와 공유해야 하는 세자르의 삶. 어쩌면 상실과 성장을 계속하는 건 클레오만이 아니다.
방학은 끝나고, 여정은 반드시 어딘가에서 막을 내린다. 이별은 필연적이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애정 어린 돌봄을 필요로 하는 동시에, 그 애정의 바깥으로 가지를 뻗어야만 성장할 수 있는 존재이다. 유년시절을 꼬박 메운 글로리아의 애정 바깥으로, 클레오는 나아가야만 한다. 바다를 헤엄치는 고래의 꼬리처럼 힘차게. 때로는 힘껏 존재를 던지듯 다이빙하고, 또 때로는 다른 이의 손에 의지하여 뭍으로 올라오면서. 그러면서.
왜 이렇게 그 장면들마다 눈물이 났을까. 개인적인 기억의 편린이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오래 전 인도에서 “돌보던” 아이들을 두고 비행기에 오르면, 불 꺼진 밤 비행기에서 조용히 줄줄 울던 날들이 떠올라서. 따로 떨어져 행복해져야 하지만, 서로 사랑하는 걸 잊지 않아야 하는 그 마음이 무엇인지 너무 잘 알아서. 집이라고 부르는 곳을 두 군데 이상 가져버린 사람들은 그리움이라는 감정과 떨어질 수 없다는 걸 배워 버려서. 그래서.
딱 클레오만한 나이였을 때의 나, 글로리아 같은 상황이었을 때의 나… 이 영화는 내 안의, 이제 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기억들을 톡톡 끌어올렸다. 이 영화는 이렇게 보편적인 정서를 통해, 우리 기억과 감정의 문을 두드린다. 누구에게나 처음으로 인지하는 ‘온 세상’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 그리고 누구나 그 사람의 애정 바깥으로 찢겨 나와 성장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누구나 이 영화에서 자신의 조각을 엿보게 될 것이다. 꼭 글로리아나 클레오와 같은 경험이 없더라도.
이 영화의 다정한 시선 속에서, 84분 동안 나는 또 무언가를 찢고 조금 자랐다. 이토록 부드러운 색채와 사랑스러운 감각 속에서 자랄 수 있다면, 상실도 두렵지 않다. 고래 꼬리처럼 이 영화를 품고, 또 열심히 발장구를 쳐본다. 생을 향해서.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초청받아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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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기꾼 계 자강두천의 볼만한 대결
영화의 시작은 심플하다. 전후 상황에 대한 설명 없이 그저 시체를 집 바닥에 숨기고 집을 불태워버린다. 시체의 정체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 주인공이 죽인 건지, 그저 죽은 사람을 발견하고, 자신이 의심받을까봐 그렇게라도 처리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영화는 아무런 설명을 해주지 않는다. 영화 초반에 주인공, 스탠턴은 특별한 대사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그 누구보다도 추진력이 있었다. 그 추진력의 바탕이 된 그의 과거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성공하는 사람이라면 가질 법한 야망이 있는 남자였다. 그런 야망과 영리함에 반한 여자가 있었는데, 그녀는 그가 잠시 몸을 숨긴 유랑단에 소속된 외로운 여자였다. 두 외로운 남녀가 눈이 맞아 더 넓은 세상으로 뛰쳐나가는데, 이들의 미래는 순탄하기만 할까?
1. 내용이 예상가지만 그래도 끝까지 보게 된다
영화 초반에 감독은 관객들에게 굉장히 불친절하다. 스탠턴이 왜 유랑단에 숨어들어가게 되었는지, 대사가 암시하듯 그의 과거에 아버지와 관련한 안 좋은 추억이 있는 듯한데, 그 추억이 무엇인지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는다. 다만, 그의 과거가 어떠했을지 짐작만 가능할 뿐이다. 하지만 짐작만으로는 그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가 왜 그렇게까지 야망을 표출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는지 그저 대사가 주는 암시로 짐작만 하기에는 납득이 잘 안되었었다.
하지만 명확하게 납득이 가지는 않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다음에 이 남자가 어떻게 살아갈지, 어떤 갈등이 있을지 혹은 어떻게 추락할지 어렴풋이 예상이 가능할 만큼 뻔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지루하지는 않았다. 영화의 크레딧이 가면서 꽤 곰곰이 생각했던 부분이었다. 내용이 드라마틱하지 않았는가? 아니다. 내용도 이정도면 드라마틱하긴 했지만 꽤나 클리셰들이 많았다. 욕망이 가득한 남자가 갈 곳이 결국 어디겠는가? 당연히 타락인 것을. 그리고 그 타락의 과정에서 등장한 묘령의 매력적인 여인, 릴리스 박사의 존재도 주인공의 목적 실현에 도움이 되는 듯하다가도 그의 집중력을 흐릿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본드걸과 비슷한 역할이어서 찾으려면 다른 영화에서도 그런 역할을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 영화에 몰입해서 볼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이었을까 되짚어보면, 결국 연출의 힘이었던 것 같다.이 영화가 연출이 정말 좋은 영화임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인물 하나하나의 감정이 알 것 같으면서도 그렇다고 단정을 지을 수는 없도록 미스터리함을 유지하는 배우들의 표정에서도 느낄 수 있었고, 그런 배우들의 표정을 잘 담을 수 있도록 점진적으로 클로즈업하는 카메라 워킹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다시 되돌아보니, 오히려 초반에 캐릭터에 대한 인식을 헷갈리게 한 것도 오히려 이 영화가 가진 클리셰를 미스터리로 푸는 데에 도움이 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 포스터에서는 근 10년간 나오지 않았던 반전이라고 홍보했던데, 그 정도로 반전이었는가라고 생각해 본다면,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 결말로 인해 이 영화, 굉장히 잘 만들어진 영화라는 인상은 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2. 기예르모 델 토로인 듯 그렇지 않은
오히려 영화 크레딧이 올라갈 때, 더 놀랐던 점이 있다면, 감독이 기예르모 델 토로였다는 점이었을 것이다. 양심선언을 하자면, 난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영화를 본 적은 없다. 하지만 과거에 LA시립뮤지엄에 놀러갔다가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작품 세계를 총망라한 영화 소품들을 모아놓은 전시회를 갔던 적은 있었다. 그 때, 이 감독의 작품 세계에 대해 얼추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그 때, 느꼈던 이 감독에 대한 인상은
"아니, 기괴하고 고어(gore)한 생물체를 왜 이렇게 많이 등장시킨 거야? 이 감독 진짜 특이하고, 웃긴(좋은 쪽으로) 사람이다."였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딱히 외관적으로 기괴한 생물체는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각기 다른 사람들의 행위들이 죄다 기괴하다. 서커스를 배경으로 진행되는 영화의 초반부에 "먹고 살기 위해서"라는 슬로건을 마음 속에 품고, 비인류적인 행위(멀쩡한 사람을 데려다가 반불구를 만드는 일)도 서슴치 않고, 다른 이들을 위로한다는 명분 아래 사기치는 것도 당연시되는 그 서커스 사회 자체가 이미 기괴하고, 고어하다. 외관적으로 기이해 보이지 않아도 이미 그 사회 속에 들어가서 주인공이 적응하는 것만 봐도, 이 주인공 또한 범상치 않은 인간임을 보여준다. 주인공을 묘사한다면, 그가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있었던 새디즘적 기질과 기괴한 환경이 만들어낸 괴물, 딱 그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감독의 의도를 감히 뇌필셜로 유추해 본다면, 이 영화는 더 이상 외적으로 솟구쳐 표현된 기괴함보다는 인간의 내면에 깊게 자리잡은 울퉁불퉁한 욕망의 위험성에 대해 고찰해 본 그의 시간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스탠턴은
3. 나쁜 놈 위에 나쁜 놈
“사람들을 속이는 게 아냐, 사람들이 스스로를 속이는 거지”
스탠턴은 사람을 속이는 일에 대해 점점 대담해지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돈이고, 돈 많은 사람들에게서 돈 버는 게 왜 나쁘냐는 식이다. 하지만 릴리스 박사는 좀 다르다. 영화를 보는 중간중간 왜 이 여자는 이 위험한 게임에 동참하는 것인지 도저히 목적이 뭔지 찾을 수가 없었다. 명백하게 돈 때문에 이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끝으로 갈수록 이 여자가 더 큰 빌런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마치 막장 드라마를 볼 때의 시원함을 느꼈다. 스탠턴과 같은 나쁜 놈들에게 큰 깨달음을 주는 것은 회개도 아니고, 착한 사람들의 존재가 아니다. 결국, 더 나쁜 캐릭터가 등장해 뚜들겨 패놓아야 비로소 자신의 현실을 인지하게 되는 것이다.
애매모호하게 나쁜 놈 위에 날고 기는 더 나쁜 사람으로 분한 릴리스 박사가 오히려 이 영화의 리얼 주인공일지도 모르겠다. 영화 중반부에 등장해 후반부의 스릴러를 담당하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영화 초반부에서는 스탠턴이 소시오패스 같았는데, 영화를 다 보면, 결국 이 세게의 최강 소시오패스는 릴리스 박사임을 깨닫게 된다. 그녀는 돈도 아니고, 스탠턴의 파멸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 뿐이었기 때문이다. 순수하게 본인의 즐거움을 위해서 움직인 것이기 때문에 공부도 즐거워서 하는 이를 이기지 못한다고 하듯, 스탠턴은 그녀를 이길 수가 없었다. 애초에.
4. 총평
결국 스탠턴은 본인이 다른 이에게 행하던 사기를 다른 이에게 똑같이 당하고 만다. 자신이 만든 덫에 다른 이들만 잡아넣은 게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빨려 들어간 셈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계속적으로 되돌아봐야 하는 것 같다.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이 맞는지, 너무 달리기만 하느라, 놓친 것은 없는지 등등을 점검해보아야 한다. 뭐, 과거에 매여서 후회하라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만든 덫에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지는 않은지 최소한의 점검 정도는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가고 있는 길이 최소 틀린 길은 아닌지 인지한다면, 당신의 욕망에 눈을 가려진 스탠턴이 되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 당신의 삶은 최소한 불행하진 않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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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술력은 증명했으나 감동은 이어가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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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을 정말 재밌게 봤기에 실사화된 작품 역시 기대하고 봤었던 영화 <라이온 킹>. 하지만 실사화된 작품에서는 그 묘미를 잘 살리지 못해서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실사화를 해서 되는 작품이 있고, 아닌 작품이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영화 <라이온 킹> 시놉시스
새로운 세상, 너의 시대가 올 것이다!
어린 사자 ‘심바’는 프라이드 랜드의 왕인 아버지 ‘무파사’를 야심과 욕망이 가득한 삼촌 ‘스카’의 음모로 잃고 왕국에서도 쫓겨난다.
기억해라! 네가 누군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던 ‘심바’는 의욕 충만한 친구들 ‘품바’와 ‘티몬’의 도움으로 희망을 되찾는다. 어느 날 우연히 옛 친구 ‘날라’를 만난 ‘심바’는 과거를 마주할 용기를 얻고,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아 위대하고도 험난한 도전을 떠나게 된다.
*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라이온 킹>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
실사화 하나는 정말 끝내줬던 작품
영화를 보는 내내 감탄을 금치 못했던 디즈니의 CG. 우리의 기술력이 여기까지 발전했다!!를 대놓고 보여준 작품이었다. 정말 그럴만했다. 사자의 수염 하나, 새의 깃털 하나, 지나가는 벌레 하나, 정말 실제의 모습과 다름없이 있는 그대로 똑같이 만들어놨기 때문이다. 약간 내셔널지오그래픽을 보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이 2시간 가량의 영상을 랜더링 돌리는데 얼마나 걸렸을까? 정말 대단하다 하는 경외심을 느낄 정도였다.
그런데 실사화를 해서 독이되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정말 안타까웠던 점은 그 대상이 잘못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라이온킹을 실사화 하다보니 동물들의 표정이 다 사라져버린 것이다. 라이온킹의 매력은 등장하는 동물들의 익살스러운 표정연기다. 하지만 실사화가 된 사자와 다른 동물들에게 인간의 표정을 대입하기에는 힘들었을 것이다. 왜냐면 실사화라는 개념은 실제 있는 동물과 비슷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표정을 넣어버린다면 그것은 실사화와 맞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점이 안타까웠다. 그냥 입이 움직이면 대사가 흘러나오고 표정이 없다보니 딱히 감정이 잘 느껴지지 않아서 답답하고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또 실사화를 기가막히게 잘해서 감탄을 하게 되고,,, 좋았다가 실망했다가 오락가락했던 작품이었다.
넘버의 가치를 담지 못하다
가장 실망스러웠던 부분은 넘버였다. 그 유명하다는 Circle of Life를 살리지 못할 줄은 몰랐다. 애니메이션 속 Circle of Life는 굉장히 짜릿했는데 실사로 보니까 그 감정이 덜해지는 바람에 보는 내내 당황스러웠다. 더불어 비욘세가 불렀다고 해서 엄청 기대했던 넘버 역시,,, 극 속에 녹아들었다기 보다는 순간적으로 콘서트장으로 바뀌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이것은 영화인가,, 콘서트장인가..? 이렇게 튀어도 되는 것인가..? 혼란했다.
애니메이션의 감동을 따라잡을 수 없었던 영화 <라이온킹>. 디즈니의 기술력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실사화의 안 좋은 예로 남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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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꼼꼼히 판 묫자리, 깔끔하지 않은 뒷정리
<파묘>의 강력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단 결론부터 쓰자면 <파묘> 재미있게 봤다. 하지만 동시에 아쉬운 부분도 분명히 있는 영화였다. 왜 아쉬웠을까? 설명하기 이전에 이 이야기의 줄거리부터. 박지용(김재철)이 화림(김고은)에게 의뢰할 것이 있다. 바로 자기 집안에 관한 문제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화림의 동료 봉길(이도현), 아는 아저씨였던 영근(유해진)과 상덕(최민식)이 출동한다. 영화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이야기로 삼고 있는데, 이 도중 사람이 죽거나 다치고 또 알지 못했던 진실이 드러나는 것이 줄거리의 중심이라고 볼 수 있겠다. 당연히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상덕과 화림이고, 영근과 봉길이 상덕과 화림을 지원하는 사이드킥쯤 된다. 왜 <파묘>는 이렇게 줄거리를 만들었을까? 그것은 장재현 감독이 친일파라는 소재를 다루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인물들은 영화를 이끌어가며 여러 사건들을 마주한다. 그중 가장 대표격인 사건은 박지용의 집안이 친일행각에 가담했던 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 사실 하에 박지용의 끔찍한 죽음을 비롯해 상덕의 보국사 방문이나 봉길의 부상 같은 일이 일어난다. 하지만 이 영화가 다루는 사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첩장'이다. 이 영화는 그 무엇보다 세로로 관을 묻고 그 위에 가로로 덧댄 형태를 핵심 모티브로 활용해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우선 글쓴이에게 이 파묘라는 것을 통해 첩장이라는 모티브를 제시하는 것 자체는 신선했다. 일단 '파묘'라는 단어, 여러분은 들어본 적 있는가? 들어본 적은 있어도 이걸 직접 하는 것은 보기 힘들다. 글쓴이는 평범한 벌초정도는 해봤어도(요즘은 그마저도 안 한다지만) 묘를 판다는 것 자체를 본 적이 없다. 그나마 단어 뜻은 유추할 수 있는 정도다.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곧 기괴함을 느끼기 쉬운 조건이 된다. 그리고 이 파묘라는 행위는 오컬트라는 장르와 매우 친해지기 쉽다. 사람이 죽어있는 묘를 들춘다는 것은 죽은 자의 영혼과 가까이 있다는 걸 의미한다. 이는 곧 영화의 등장인물들이 유령, 귀신같은 초자연적인 일들에 노출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동력 중 하나인 직업영화로서의 박력도 이 '파묘'라는 설정 덕에 힘을 얻는다. 묘는 본질적으로 조상님이 들어가 계신 곳이다. 그리고 무당은 이 들어가 계신 조상님 내지는 하늘의 신과 대화하는 직업군이다. 주인공 화림이 이야기에 개입하는 이유가 자연스레 성립하는 것이다. 이는 상덕의 직업인 풍수지리사에도 적용되는 부분이다. 풍수지리사는 '좋은 땅을 찾는' 직업이다. 그러려면 땅에 서려있는 기운을 분석해야 하는데 이는 상덕과 화림의 협업이 필연적이라는 근거가 된다.
이야기의 주제에 대한 관점에서, 파묘라는 것은 그 의미 자체만으로 친일파라는 소재를 소환하기에 적합하다. 왜? 파묘는 무덤의 근원을 파헤치는 일이다. 친일파는 근원이 어디인지 쉽게 와닿지 않는 사람들이다. 누가 보면 원래 일본인인 것처럼 조선과 대한제국을 팔아넘긴 자들을 친일파라고 하지 않나? 일제강점기 때 했던 창씨개명을 생각해 보면 그 의미가 더 쉽게 다가온다. <파묘>에서 보여줬던 첩장의 모티브가 여기에도 적용된다. 친일파는 진짜 근원지를 숨기고 다른 인간인 척하는, '그냥 미국 부자'나 '세로로 묻힌 관'같은 존재인 것이다. 또한 현재 2024년 일제강점기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역사에 대한 파묘가 필요하다. 이들이 언제부터 득세했는지 그 근원지를 좇는 것이다. 윗문단과 이 문단을 종합하자. 이 영화는 파묘와 첩장이라는 모티브를 메시지와 이야기를 끌고 가는 원동력의 양 측면에서 성공적으로 잘 가져왔다. 이 똑똑한 선택을 강조라도 하듯 <파묘>는 영화의 핵심 사건에 이 모티브를 끌고 온다. 이 영화에서 진짜 흑막이라고 볼 수 있는 세로로 묻힌 관을 빠르게 규명할 수 없었던 이유는 원인을 진작에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현대사회에서 친일파들이 득세했던 그 근원지를 명확하게 찾을 수 있을까? 쉽지는 않을 것이다. '첩장'처럼 곳곳에 둘러싸여 있는 장벽들이 많은 것이 그 이유다.
영화는 파묘라는 소재를 여기에서 활용하고 끝내지 않고 한 차원 더 깊게 들어간다. 파묘를 하는 이유. 알 수 없는 것의 근원을 찾기 위해. 그 이면에 깔린 것은? '무엇인지 알지 모른다'라는 일종의 무기력함이다. 사실 이 무기력함과 무지라는 감정은 오컬트의 클래식과도 같다. 알 수 없는 것에서 온갖 방해꾼이 몰려들어와 공포감이 조성되는 걸 활용하는 영화가 많았다. 비단 <악마의 씨> 같은 영화가 그랬으니까. 아, <악마의 씨> 개봉한 지 50년도 더 넘었다. 현대의 장재현 감독은 정서적인 측면에서 더 나아가 이 '알지 못한다'라는 또 하나의 모티브를 강박적으로 반복한다. 사실 이 영화에서 인물들이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다. 가령 박지용 일가의 묘와 관련된 부분이 그렇다. 우리 조상들은 쇠말뚝을 뽑아내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해온 것으로 영화 안에서 묘사된다. 하지만 그 절을 오랫동안 지켜온 스님도 사진 속 안의 인물들이 뭐 하는 사람들인지 제대로 몰랐다. 박지용의 조상이 들어간 관에 대한 부분도 이 무지에 관한 부분을 녹여낸 장면이다. 관을 화장하면 다 해결될 거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 아래에 묻힌 또 다른 관이 있던 것은 이 영화가 인간의 무지와 무기력함을 드러내는 다른 근거다. 봉길이 부상을 입은 후에 의사가 내린 진료도 이 인간의 무지를 드러내는 부분이기도 하다. 결국 의사들이 아닌 화림과 친구 무당들이 봉길이 의식을 찾지 못하는 이유를 알아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영화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볼 수 있는 장면에서 무지와 무기력함을 활용한 서스펜스를 보여준다. 박지용이 혼자 방 안에 있는데, 전화가 온다. 발신자는 상덕이다. 그런데 때마침 문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상덕이다. 공포에 질린 지용. 지용은 당연히 전화를 건 사람이 상덕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영화는 이 장면에서 지용만 속이지 않는다. 상덕이 호텔 건물로 올라가는 걸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으면서 관객을 속이기 위해 전화부터 건다. 전화가 진짜 상덕일 거라고 속임수를 둔 것이다. "창문 열어!"라는 소리를 듣고 난 다음의 관객은 '전화가 가짜구나'라는 걸 깨닫고 이내 이 영화의 박력에 압도당하게 된다. 이 장면은 그냥 단적으로 '뭐가 근원인지(진짜 상덕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서스펜스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영화의 첫 장면은 '이 영화가 이 모티브를 다룰 것이에요!'라고 선언하는 것 같았다. 겉으로 보기에 일본인인지 한국인인지 구분이 안된다는 의미는 '그 대상의 원인과 실체를 규명할 수 없음'을 드러낸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모티브는 <파묘>의 카메라나 조명에서도 읽을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상덕은 유달리 혼자 움직인다. 그리고 카메라는 성실하게 이를 활용한다. 묘 근처에 혼자 있는 상덕의 모습을 황량하게 보여주면 주인공이 겪는 무기력함을 깊게 체감할 수 있다. 그리고 밤을 활용한 장면도 일부 있다. 화면 구도도 고의적으로 이 고립감과 답답함을 강조하기 위해 촬영된 부분도 어느 정도 있고, 채도 대비나 사무라이 귀신의 형상을 처음 찍는 방식을 봐도 관객이 대상을 쉽게 파악할 수 없게, 그러니까 이것이 뭐가 원인인지 간단하게 이해할 수 없게 설정했다. 영화의 기술적인 부분 역시 이와 통하는 것이다. 이에 연장선상에서 <파묘>의 카메라는 굳이 담지 않아도 될 것도 담았다. 초반부 영근이 물건을 훔치는 장면이다. 이 장면만 보면 후에 관을 열 사람이 영근일 것 같지만 영근은 그 시간에 국밥 먹고 있었다. 이 관을 여는 연출도 외부에서 누군가가 문을 여는 듯한 연출이기도 했지만 전적으로 '원인을 쉽게 판단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카메라의 힘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화가 이렇게 '파헤침'과 '원인을 알 수 없음'이라는 모티브를 반복한 이유가 무엇일까? 글쓴이는 '여우가 뱀의 허리를 끊었다'라는 플롯을 각본으로 형상화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영화는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또 '파헤치는' 일이 여러 번 반복되지만 '파묘'하는 행위는 두 번으로 나뉜다. 허리를 끊은 플롯을 구사하는 것이다. 초반부. 박지용의 집안에서 일아난 일을 알지 못해서 묘를 파헤친다. 그 결과 박지용의 집안이 친일파 집안이라는 것을 알아낸다. 후반부. 세로로 된 관을 뽑아 결국 오니를 타도하는 데 성공한다. 초반부와 후반부가 나뉜다는 것은 그 지점을 나눈다는 분기점이 있단 의미이다. 초반부와 후반부를 가로지르는 구분선은 박지용의 죽음과 조부상을 화장하는 일이다. 박지용은 죽으면서 상덕에게 '여우가 뱀의 허리를 끊는다'라고 말한다. 이 이야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눴다는 점은 당연히 그 구분선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또 다른 부분에서 이 영화가 플롯을 친일파로 치환하고 있다. 사실 이 치환과 비유를 굳이 설명해도 되지 않은 이유가 있다. 이야기의 도착지에 대해 생각해 보면 쉽다. 이 신체와 유령으로 치환시킨 일제의 만행은 결국 '한반도의 흐름을 끊은 것'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플롯의 결과만 따져봐도 이를 읽을 수 있다. 하지만 글쓴이는 이 영화가 더 디테일하게 들어간 부분이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이 영화의 인물들에게 상처를 내는 캐릭터는 모두가 알고 있듯 사무라이 귀신과 친일파들이다. 이 요소들이 어떤 인물에겐 치명상을 입혔다. 그 인물은 봉길과 상덕이다. 곧 젊은 남자와 나이 든 남자다. 젊은 남자와 나이 든 남자는 과거 조선과 대한제국을 이끌던 원동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즘이야(그리고 더 독려받아야 할 필요가 있지만)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내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과거에는 그런 영향이 없었다고 보는 것이 거짓말이다. 이 둘은 사실 이야기의 흐름상 죽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데 굳이 허리를 다치거나 생명에 지장이 가지 않을 정도로 부상을 입는다. 왜? 젊은 남자와 나이 든 남자로 암시한 조선/대한민국 사회의 허리를 친일파가 끊어버린 것을 암시해야 하기 때문임과 동시에 상업적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야 하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영화는 한반도를 인간의 생로병사로 치환한 부분이 더 있다. 이에 대한 근거로 글쓴이는 두 가지를 들고 싶다. 결혼과 아이, 그리고 죽음과 노인이다. 결혼이라는 사건만 빼면 나머지 두 캐릭터가 이야기에서 그렇게까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광심(김선영)이 굳이 임신할 필요 없고 첫째로 공격당하는 대상이 아이가 아니어도 된다. 마찬가지로 생사를 오가는 인물이 할아버지 일 필요도 없다. 하지만 굳이 이 둘에게 이런 속성을 부여한 것은 이유가 무엇일까? 고의적으로 이 한반도를 둘러싼 생명이 태어나고 죽는 것에 영향을 주는 친일파들을 묘사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사실 탄생과 죽음이 우리 인간사의 전부라는 점은 당연지사다). 여기에 덧붙여 <파묘>의 유령이 박지용 일가를 전부 죽이겠다고 선언한 것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은 글쓴이 입장에서 영화가 흑막을 악마화하기 쉽기 때문에 넣은 대사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대상들이 가한 상처를 더 이상 과거와 현재에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미래까지 향할 것'이라는 경고처럼 들리기도 했다.
이렇게 영화가 치밀하게 친일파와 그들의 악행들을 묘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글쓴이는 상덕의 대사에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 자손들이 밟을 땅 아니냐!"라는 대사는 자연스러웠다. '원인을 알 수 없어 벌어진 문제'에 대해 근원을 찾아 없애겠다는 대사가 흐름을 깬다고 볼 수 있을까? 글쓴이는 아니라고 본다. 비슷한 맥락에서 이 영화에 유령의 실체가 등장한 것도 나름 근거가 있다고 본다. 원인을 찾아야 하고, 그에 응당하게 해결하기 위해선 직접적으로 그 대상이 눈에 들어오는 게 합리적이다. 또 그 귀신이 엄청난 크기의 귀신인 것도 나름 그 역사의식에 대한 코멘트 같기도 했다. 그 당시의 일본 군국주의는 아시아에 그 정도의 공포를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끔찍한 상처를 낸 존재이기도 하다. 이런 연출들은 당연히 상업적으로도 기승전결이 명확한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고른 선택지이기도 하지만 이야기의 내적 논리에도 걸맞은 흐름이기도 했다. 그리고 상업영화로서 일반적으로 공감하기 쉽다. 보이지 않은 것이 사라졌다는 찜찜한 결론보다 눈에 보이는 게 없어졌다는 엔딩이 이해하기 쉽다. 눈에 보이는 대상이니까. 다만 이런 연출들을 어느 정도는 '그럴 수 있지' 싶다가도 무조건 잘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연결들이 매끄럽지 못하기 때문이다.
글쓴이가 장점을 위에 길게 썼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 대한 불호평을 납득할 수 있는 이유는 장점과 단점이 명확하게 대비되는 것에서 온다. 영화가 스스로의 발목을 여우가 뱀의 허리를 끊듯 끊어버린 것이다. 이 영화의 크게 나눈 1부와 2부는 두 이야기로 나눌 수 있다. 그것이 등장하는 것과 등장하지 않는 것. 전자는 장재현 감독이 그동안 보여줬던 오컬트 외길인생으로 돌파하고, 후자는 크리쳐가 등장하는 크리쳐물로 변한다. 뿐만 아니라 인물의 동기도 명확하다. 1부에서 인물들은 5억이라는 쉽지 않은 돈을 받기 위해 노력하거나 / 불가해한 악을 규명하기 위해 힘쓴다. 하지만 2부에선 그 동기를 쉽게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갑자기 상덕이 직업윤리에 투철한 인물이 되거나 그냥 직장상사, 하사 관계인 줄 알았던 화림과 봉길의 과거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또 1부와 2부의 지향점을 드러내는 방식도 명확하게 꽂히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비가 된다. 1부는 할아버지 관을 태울 것인가 / 혹은 아닌가로 갈등한다. 2부는 정보량이 갑자기 느닷없이 많아지는 바람에 글쓴이는 자세한 것들을 나무위키를 읽고 이해했다. 이 과정에서 이야기의 흐름에도 어긋나는 부분이 있다. 가령 주인공 4인방이 보국사로 가는 과정과 '곰'이라는 동물에 관한 부분이 그렇다. 그런 꼴을 굳이 하고 벌초를 하러 갈 이유가 있을까. 그리고 그 관문에서 검문하던 인물들은 너무 쉽게 이들을 통행시켜 주는 것은 아닌가. 차라리 그 인물들이 없어야 되는 것 아닌가 싶었다. 그 산에 곰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이라면 보국사의 스님에게는 연락했을까. 산에서 사무라이 귀신의 한바탕이 열릴 때 곰은 과연 무얼 했는가. 상덕이 크게 부상당한 것치고 오랜 시간 동안 방치되는 것 아닌가. 공권력이 아예 기능하지 않는 세계관인가. 이야기의 중심을 아주 꽉 쥐고 있다가 후반부에 최소한만 유지하고 풀어지는 플롯 때문에 이런 디테일한 요소들이 이물질처럼 다가온다.
왜 이 이야기의 흐름이 최소한만 유지하고 풀어졌을까. 글쓴이는 인물들 간의 동기를 영화가 명확하게 전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1부는 오컬트. 2부는 판타지. 영화가 장르를 바꾸지 말란 법은 없다. 가령 <헤어질 결심> 같은 경우 기도수를 죽인 인물을 추적하다가 서래와 해준의 사랑이야기로 결론을 내는 것만 봐도 그렇다. 다만 이 <파묘>는 <헤어질 결심>과는 다르게 이야기를 하나의 동력으로 끌고 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 동력은 인물 간의 동기부여다. 가령 도입부에 잠깐만이라도 상덕이 무슨 축구 국가대표팀 경기를 보면서 애국심이 투철한 인물로 묘사됐다면, 풍수지리사라는 직업에 대해 굉장한 자부심을 느끼는 인물이었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 있었더라면, 평소 직업윤리를 잘 지키는 인물이었더라면 상덕의 대사에서 당위성이 생긴다. 또 상덕이 이 영화의 핵심 사건에 매달리는 이유에 조금이라도 근거가 생긴다. 마찬가지로 화림과 봉길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봉길이 다쳤다. 화림은 그걸 알면서도 위험을 감수한다. 글쓴이는 당연히 화림이 저 때 저 선택을 할 거라고 생각했다.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이런 류의 관계는 보통 로맨스로 결론 내리는 게 일반적이니까. 그리고 <파묘>는 그 선택지를 고른 것으로 보인다. 봉길이 무당이 된 이유가 화림을 좋아해서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만약 봉길이 화림을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그 사무라이 귀신을 보고 도망치지 않았을까? 의협심이 강하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후 화림의 행보까지 감안해 본다면 둘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을 것 같다. 하지만 영화는 이것까지 담으면 이야기가 난잡해진다고 판단했는지 도입부에 이를 생략해 버린다. 아무 암시도 없다 봉길이 화림을 살리는 선택만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봐왔던 이미지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급작스럽다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캐릭터 영근 역시 마찬가지다. 영근은 상덕을 굉장히 신뢰한다. 이 '굉장히 신뢰한다'라는 대사가 직접적으로 '난 형님만 믿어요~'식의 대사로 전개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이 영화를 보고 '저 사람은 상덕을 친 형처럼 모시니까 저렇게 행동해!'라고 유추하기 때문이다. 근데 영화는 그 유추의 근거를 주지 않는다. 단지 상덕의 입에서 "여기까지 따라와 줘서 고맙다"라고 말한 것이 전부다. 그 이외에 이에 감정이입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유해진, 최민식 배우가 술 먹고 노는 장면을 쉽게 그릴 수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관습적으로 영화를 봐온 것에 기댔기 때문이다.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글쓴이는 상업영화로서의 노선과 하고 싶은 주제 사이에서 어느 정도는 갈팡질팡 했기 때문인 것 같다. 뿐만아니라 원래 대놓고 등장하지 않는 귀신이 등장한 이유. 도입부에 인물관계를 드러낸 이유. 다 속도감 있고 시원한 전개를 위해 과하게 디테일을 생략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빚어진 빈약한 인물서사 때문에 영근의 대사 "말뚝의 99%는 거짓"이라는 말도 뭔가 숙제처럼 들린다. 차에서 "야 김상덕 좀 일어나 봐!"라는 대사도 유해진 배우가 잘 살린 거지 감정선이 급작스럽다고 생각했다. 그 상황에서 둘이 반말까지 하는 사이인가? 이는 영화에서 "우리 비즈니스 관계지만 부탁 하나 하자"는 대사 때문에 더 두드러지는 단점이다. 영화가 인물들의 인간관계성에 전혀 생각하지 않은 건 않다는 걸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는 치명적인 것으로 보이며, 이야기의 몰입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장르적으로 '왜 오컬트 맛 만 줘요'라는 비판을 듣기 아주 쉽다.
이 <파묘>는 장재현 감독이 <검은 사제들>과 <사바하>에 이어 세 번째로 만든 오컬트 영화다. 이런 이유로 이 <파묘>를 기대하시는 분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글쓴이는 이 분들에게 오컬트를 기대하지 말라고 말한다. 왜? 오컬트로서의 장르적 특성을 후반부에 포기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에 응당한 근거들을 갖춘 것 같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들이 어느 정도는 흐름에 맞게 전개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느슨한 밀도를 감당하지는 못했던 <파묘>. 난 재밌어도 이 영화의 불호평에 공감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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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토토리! 우리 둘만의 여름> 티저 예고편
아름다운 대자연으로 캠핑 여행을 떠난 ‘베가’와 ‘빌리’.
5살 나이에 딱 걸맞게 모든 게 신나기만 한 ‘빌리’와 달리,
9살 나이에 걸맞지 않게 어른스러운 ‘베가’는
병원에 있는 엄마의 특명을 받아 아빠와 동생 챙기기에 바쁘다.
그런데 아뿔싸! 아빠가 강가 바위 틈으로 추락했다!
아빠를 구하기 위해 왔던 길을 거슬러 가보지만,
곧 드넓은 숲속에서 길을 잃고 만다.
모든걸 포기하고 싶은 그 순간, 떠오른 엄마의 한마디.
“포기할 거야? 아니면 슈퍼히어로가 될 거야?”
내 안의 슈퍼파워를 깨우는 마법의 주문!
다 함께 외쳐봐! 토~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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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옥수역귀신> 메인 예고편
절.대.로 혼자 볼 수 없는 이 곳! 극강의 공포가 극장을 덮쳐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