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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덕후2025-03-26 11:49:40

일어나, 아이리스!

영화 <컴패니언> 리뷰

우리나라 SF문학 공모전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골소재가 섹스봇이라고 한다. 그러나 정작 당선작에선 찾아보기가 힘들다. 왜일까? 그것은 이 소재를 다루는 창작자의 시각이 자극성에 머물러 있기 때문일 것이다. <컴패니언>의 등장인물이자 로봇인 아이리스의 정식 명칭은 반려로봇이다. 하지만 사용자가 그녀로부터 얻는 편익은 섹스와 정서적 지지, 짐꾼기능 그리고 목적 외의 용도로 사용하는 것 뿐이다. 이것을 진정한 '반려'라고 할 수 있을까? <컴패니언>은 바로 이 부분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있는 영화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영화의 부제를 <반려자가 오직 섹스봇 정도의 기능만 해주길 바라는 정신 썩어빠진 사람들이 보면 불쾌할 영화 1위> 라고 달겠다. 리뷰 시작.

 

본 리뷰는 영화 컴패니언의 스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컴패니언의 독창성은 무엇일까?

 

스포하자면, 컴패니언은 단순히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인생의 주체성과 조작된 프레임에서 빠져나오는 과정을 담은 복수호러코미디다. 기계가 주체성을 찾아가는 이야기 자체가 특별하진 않다. AI, 바이센테니얼맨, 엑스마키나 등 비슷한 이야기는 이미 많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들 휴머노이드가 인간의 편익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목적성에 집중하면 <컴패니언>의 유사영화는 복제인간 영화들에서까지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자아를 찾는 것도, 그 방법이 복수이거나 사랑 또는 탈출인 것도 사실 새롭지 않다. 이런 결말은 소재를 선택할 때 같이 결정되는 일종의 세트상품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도 충실하게 서사의 법칙을 따른다. 그렇다면 <컴패니언>의 독창성은 어디에 있느냐? 세계관을 보여주는 인터페이스의 디테일과 빌런(조쉬) 캐릭터가 상징하는 동시대 인간의 욕망에 있다.

 

 

'러브링크에 접속해 사용자를 등록하세요.'

 

이 세계관에서 아이리스는 러브링크라는 어플로 작동하는 일종의 휴머노이드로 현실의 안마의자나 자율주행자동차와 같은 위치에 있는 기계인 듯 하다. 그런데 그녀를 사용하는 사람들 때문에 창녀 취급도 받는다. 그녀의 이 영화의 주인공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되어준다. 디자인과 갬성이 중요한 비싼 기계인 그녀는 사용자에 의도에 맞게 셋팅되며 그것은 그녀의 쓰임새가 된다. 그녀는 제조사에서 판매하는 수많은 모델 중 하나고 렌탈 시스템으로 대여도 된다. 그녀는 날씨도 알려주고 블랙박스 기능도 한다. 아주 쉬운 음성명령어로 껐다 킬 수 있는 인터페이스는 이전까지 비슷한 류의 영화에서 본 적 없는 현실과 맞닿은 인터페이스를 그려주며 관객을 영화의 세계로 훅 들어오게 한다. 이 외에도 자율주행 자동차의 음성인식 기능을 이용해 탈출하는 장면이나, 우리가 홈페이지에 가입할 때 설정하는 언어설정모드를 셀프 설정하는 장면 등은 그녀가 곧 현재에 존재할 것 같다는 초근미래의 사회를 상상하게 만들어준다.

 

하지만 이 영화의 기계 설정에서 가장 원초적이고 개성적인 지점은 로봇들이 거짓말을 못한다는 점이다. 사실 기계가 거짓말을 못(안) 하는 건 당연하지만 이 영화의 기계들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단순한 로봇이 아니라 진실밖에 말하지 못하는 인간을 표상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더욱이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진짜) 인간들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한다는 점에서 아이러니는 더욱 재밌어진다. 로봇에게는 있는 진실이 인간에게는 없다. 그러니 조쉬는 아이리스를 제멋대로 대한다. 하지만 아이리스는 조쉬에게 순종적이고 진실된 여자친구가 된다. 그가 무슨 말을 해도 반대하거나 의심하는 법이 없다. 사람을 죽이는 고통보다 그를 보지 못하는 고통이 크다고 생각한다. 가스라이팅을 당하는 피해자처럼 말이다.

 

 

 

최고의 애인, 아이리스

 

요즘은 다정하고 야한 애인이 최고라던가? 그렇다면 샤워를 해도 화장이 지워지지 않고 잠자리를 거부하는 법이 없는 아이리스는 최고의 애인이다. 그녀는 늘 남자친구의 관심을 받고 싶어하며 남자친구의 관심과 건강에만 헌신한다. 일어나라면 일어나고 자라면 자는. 징징대지 않고 적당히 기분좋을 정도의 질투를 보여준다. 반면 조쉬는 그녀의 요구나 정서적 유대를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건강하지 않은 관계의 전형이다. 영화는 뭘 말하고 싶었을까? 캣의 대사가 힌트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난 네가 싫은 게 아냐. 너라는 존재가 대변하는 개념 자체가 싫은거지."

 

기계 자체는 해로울 수 없다. 자아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사용자의 욕구에 따라 그것은 살상무기가 되기도 하고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 나날이 발전하는 AI로 인한 공포 시대에 이 영화는 그 지점을 명백히 짚고 있다. 바로 조쉬를 통해서다.
 

 

최악의 애인, 조쉬

 

영화의 후반에서 아이리스의 탈출이 미수로 그치고 다시 한 번 조쉬 앞에 붙잡혀 왔을 때 조쉬는 오프닝과 완전히 다른 본색을 드러낸다. 가진 것에 비해 자아가 비대한 조쉬는 그 순간에도 자기연민을 통해 아이리스의 정신을 지배하고자 한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원룸과 진짜 여친도 아닌 섹스봇을 대여 하는 게 최선으로 만든 이 사회가 문제라는 것이다. 전 같았으면 프로그래밍에 의해 조쉬의 말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였을 아이리스지만 탈출과정에서 똑똑해진 그녀는 더 이상 가해자의 워딩에 속지 않는다. 몸은 묶여있을지언정 본질을 꿰뚫는다. 더 나아지려는 노력은 하지 않은 채로 징징대는 나약한 존재. 제대로 긁힌 조쉬는 아이리스의 머리를 쏴버린다. 비겁하게 자살처럼 보이게끔 해서. 진실도, 인정도, 반성도 최소한의 의리도 없는 인간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런 그의 결말이 죽음인 것은 사실 정의구현으로 느껴진다. 이 정도 쓰레기에는 약이 없다.

 

 

여담이지만 영화의 수준이 B급 킬링타임에서 그치느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건 예산이나 연기력이 아니라 서사의 완성도에서 믿는 한 사람으로서, 사실 이 영화의 완성도에 크게 기여한 건 우리의 빌런 조쉬다. 그가 가진 대표성은 꽤 공격적이고 트렌디하다. 짐작컨대 이 빌드업은 창작자의 시대감각에서 뻗어나온 가지일 것이다.  자신이 자신과 동등한 여성인간의 선택을 받을 수 없다고 믿는 수컷은 연민의 대상이 아니라 사회문제가 될 수 있다는 생각 말이다. 그리고 이 영화의 각본가이자 감독인 드류 행콕이 79년생 남성이라는 점이 이 영화를 더욱 호감으로 만든다. 

 

 

비록 조쉬가 호감은 아닐지언정 그가 수치심도 없이 늘어놓는 불평불만이 생소하진 않다.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는 과도한 경쟁사회에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 비틀린 수컷의 욕망을 대표하는 것 같다. 사실 그가 이 작품에서 실제로 이성적 관계로 발전하기 원하는 여성은 사실 캣이다. 하지만 그녀는 가질 수가 없다. 그녀에겐 이미 어마어마한 재산을 가지고 중년임에도 매력이 넘치는 세르게이가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자신에게는 남사친까지만 허용되는 게 현실이다. 그녀는 사람이기에 아이리스처럼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사회적인 열등감을 가진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에게 자신의 능력이나 진심을 어필하진 못한다. 그가 선택한 것은 경쟁자인 (실제로는 경쟁이 불가능할 정도의 레벨차이지만) 세르게이의 성공을 질투하는 것. 그리고 정상적인 방법으로 경쟁자를 이길 수 없는 데서 오는 욕구불만을 반려로봇인 아이리스를 섹스봇으로 이용하여 푼다. 심지어 그녀를 이용해서 경쟁자를 제거하고 자신은 죄 없는 피해자가 되어 세르게이의 재산을 갈취하려 한다. 연인사이까지 갈 것도 없다. 같은 인간이라는 타이틀을 공유하기가 싫을 정도로 인류적 관점에서 최악의 동반자인 셈이다. 

 

 

 

자격을 바라지 말고 자격을 갖추자

 

이것이 조쉬의 개인적인 비극이면 좋을텐데, 놀랍게도 이건 식상한 일이라는 걸 영화 말미에 등장한 수거업체 직원들의 대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무엇을  뜻하나? 사실 지금의 사회가 관계에서든 일에서든 정당한 방식으로 노력하는 진정성의 가치는 무시하고, 쉽고 빠르게 욕구를 해소하는 자극성을 부추기고 있으며 그것을 제어할 수 없다는 뜻 아닐까. 영화의 엔딩은 아이리스의 성장과 독립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길이 아닌 길을 택한 인간의 말로는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했다. SF는 판타지의 형식을 빌려 이야기하는 현실의 이야기다. 객석에 앉은 우리가 아이리스든, 조쉬든 이제 새로운 인생을 살자는 메시지도 심플하고 경쾌해서 좋았다. 현실에선 그렇기 어렵기 때문에 더욱. 자 이제, 고 투 슬립, 조쉬!

 

 


이 비정한 세상의 한줄기 찐사랑,

일라이와 패트릭

 

비록 조쉬는 자력으로 성공할 수도, 동반자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도 없는 실패한 남성이지만 그의 친구인 일라이는 (게이이면서도 로봇 파트너를 사랑하는 그는 퀴어중의 퀴어라고 해야할까?) 똑같이 인간-로봇 커플이면서 패트릭과 문제에 대해서 공평한 눈높이에서 대화하고, 진실을 회피하지 않는 진정한 사랑과 고통을 경험한다. 사실 이 커플 덕에 영화는 그저 비극과 비판으로 끝나지 않고 좋은 반려에 대한 해석을 하게 만든다. 드류 행콕 감독의 인터뷰를 보니 속편을 만들 생각도 있는 것 같던데... 비극적인 결말이 안타까우니까 이 커플로 로코 스핀오프가 나오면 꽤 재밌지 않을까?

 

 

아이리스는 로봇혁명을 일으킬까?

 

 

모든 게 먹구름에 가려진 기분이다.

 

세상을 보지만 진짜 보는 건 아니라고 할까?

 

우린 헤매인다. 의미도 목표도 없이.

 

엄청 우울하게 들릴지 몰라도 늘은 어차피

 

 

 

세상의 진짜 틈을 보는 초월적인 순간들

 

그리고 갑자기 의미가 생긴다.

 

무척 운이 좋아야 평생에 한번 이런 순간이 온다.

 

인생에 가장 기쁜 순간이 두 번 있었다.

 

첫 번째는 조쉬를 만났을 때다.

 

두 번째는 그를 죽였을 때다.

 

 

아이리스의 나레이션은 오프닝과 엔딩에 반복될 때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갖는다. 처음에 조수석에 있던 그녀는 이제 운전석에 앉아 스스로 운전을 한다. 이후의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모르지만 오로지 그 별장 안에서 벌어진 사건과 설정에 집중한 명확한 로그라인과 산뜻한 결말이었다. 중간중간 나오는 잔인한 장면들은 공포영화의 그것과 견주어도 될 만큼이었지만 그래도 뭐 보통의 스릴러 영화를 즐기시는 분들은 큰 불편함 없이 보시지 않을까 싶다.

 

감독피셜 그렇게 무사히 떠난 아이리스는 로봇혁명에 합류하거나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선택은 하지 않을 거라고 한다. 그것까지가 MZ시대의 가치관을 대변하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영화가 이토록 경쾌하고 속도감있을 수 있나보다. 감정의 부채가 전혀 없다. 살아온 인생에 대한 후회도 없고 살인도 그저 일어난다. 섹스봇과 반려가 되는 설정보다 모든 인물이 뒷일은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 판타지 같이 느껴진다. 뭐 어쨌거나 이제 깨어난 아이리스가 어디든지 마음대로 살길.​ 일어나, 아이리스!

 

 

작성자 . 서사덕후

출처 . https://blog.naver.com/aleakyhouse/22380807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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