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3-09-17 22:28:23
[SICFF 데일리] 독립 사건을 독립 사건으로
영화 <벼랑 위의 남매>
SYNOPSIS.
여동생과 함께 산 정상으로 소를 몰아야 하는 소년. 아름다운 자연과 동물들, 귀여운 남매가 어우러진 모험이야기
PROGRAM NOTE.
부모님이 마을에 간 사이 에브라힘과 그의 여동생 일마는 산에서 소들을 돌본다. 에브라힘이 다리를 다쳐 바위벽 위로 올라올 수 없게 되자 일마는 혼자서 모든것을 해결해야 한다. 그녀는 씩씩하게 임무를 수행하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일마는 점점 불안해진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풍경 속 어린 남매의 이야기지만 그 안에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이 가득하다. 더구나 남매가 심각한 상황에 빠질수록 남매의 대화는 코믹하게 흘러간다. 팽팽한 긴장감과 무해한 웃음을 오가며 보는 이를 쥐락펴락하는 연출과 남매의 생동감 넘치는 연기가 매력적이다. 귀여운 남매의 일화에 소박한 가족의 애정과 신뢰가 깊이 스며있는 영화. 가족관객에게 추천하고 싶다. (함유선)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그 말을 증명하듯, 이 영화는 헬리캠으로 찍은 원경에서 시작한다. 아이들이 사는 세상, 초원과 염소 소리, 황금빛 햇살까지 담아내면서. 그 안에 아이들은 그림의 일부처럼 존재한다. 엄마와 아들, 딸과 아빠, 뛰고 손을 씻고 아빠의 입맞춤을 받고, 풍경의 일부로.
가족이 사는 방식은 더없이 검박하고 단출하여 아름답다. 일상을 영위하기 위한 노동을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나누어 한다. 모처럼 마을로 나가는 부모님의 '쇼핑 리스트'도 네 식구가 나란히 앉아 적는다. 이제 막 철자를 배우고 있는 듯한 막둥이, 딸 일마(Ilma)가 알쏭달쏭 헷갈려 하며 글자를 써 가면서. 얼핏 퉁명스러운 것 같아도 아이들이 원하는 건 또 하나씩 다 사주는, 화목한 가정이다. 남매도 적당히 남매답게 투닥투닥하며 사이가 좋은 것이 귀엽기만 하다.
부모님이 마을로 먼 길을 떠난 날, 에브라힘(Ebrahim)과 일마 두 사람은 부모님이 남겨주신 미션을 차곡차곡 수행한다. 양을 돌볼 것, 도토리를 말려둘 생각이니 양이 먹지 않도록 주의할 것, 피스타치오 열매를 좀 따둘 것. 동생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는 오빠 에브라힘에게는 "일마도 이제 다 커서 알 건 다 안다"는 말도 남겨둔다. 두 아이는 제법 능숙한 솜씨로 양을 친다. 둘러멘 가방 속 라디오에서는 '이란 국민 여러분' 어쩌고 하는 말이 흘러나오지만, 이들은 어느 나라의 국민보다는 그냥 이 땅의 일부로 사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러다 일마가 벌을 발견하면서 사건이 시작된다. 벌이 있다는 건 꿀도 있다는 뜻. 아빠가 분명 가지 말라고 했던 절벽 가에 매달려 꿀을 확인한 에브라힘은, 갑자기 등이 간지러워 손을 놓치면서 벼랑 아래로 떨어진다. 발목을 다쳐 올라올 수 없는 에브라힘과, 그 위에서 엉엉 울기 시작한 일마, 두 사람의 하루는 뜻밖의 점입가경으로 갈수록 고달파진다. 이 영화는 두 남매가 절벽에서 보낸 하루를 꼬박 담은 영화다.

#전통, 기대거나 혹은 반하거나
두 아이는 일단 재난영화의 법칙을 어겼다. 가지 말라는 금기가 있는 곳에는 가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이미 가버린 이상, 일이 벌어진 이상 두 아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이었을까? 어린 시절 각자가 배운 내용을 들추어 보자.
나는 엄마에게 "길을 잃어버리면 반드시 그 자리에 가만히 있을 것"이라고 배웠다. 그리고 혹시라도 (예를 들어 낯선 사람이 쫓아와 유괴의 위험이 있다던가 하는) 위험 상황에 처하면 아무 가게나 들어가 도움을 요청하라고 배웠다. 어느 가게를 들어가도 가게 주인과 부모님이 다 알음알음 아는 사이일 법한 작은 지역 사회였고, 20년쯤 전이니 지금과는 다른 가르침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아이들이 했어야 하는 제1의 행동은, 에브라힘으로서는 가만히 있는 것, 일마가 달려가서 어른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두 아이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는다. 지금이라도 달려가서 어른들을 불러오겠다는 일마를, 에브라힘이 말린다. 사유는 여자 혼자 다니다가 낯선 사람을 마주쳤을 때 실추될 "명예". 10살도 채 되지 않은 일마, 가축을 돌볼 때는 너무 어려서 돌보기 귀찮은 동생으로 여겨지는 일마가 바깥에 나가면 여자로 인식되어야 하는 현실을 말한다.
그밖에도 두 아이가 내린 선택 중에는 전통에 기대느라 '오... 저러면 안 될 것 같은데' 싶은 것들이 더 많이 있었다. 일마의 머리를 가리는 데 쓰는 스카프가 벼랑 아래로 내려가 에브라힘의 부어오른 발목을 감았다가, '혹시라도 낯선 사람을 마주칠 가능성' 때문에 다시 벼랑 위로 올려보내는 순간도 그렇고. 자칼이 다가왔을 때 여차하면 도망칠 수 있게 신발을 단단히 신는 대신 혹시나 하는 미신을 따르기 위해 신발을 거꾸로 신는 일마의 선택도 그렇고.
그러나 두 아이가 마음 기대는 곳 또한 전통이다. 불사조 깃털을 태우면 불사조가 도와주러 온다는 설화를 생각하며 불사조 깃털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설화 속 인물이 태우지 않은 깃털이 지금 어디에 있을까 궁금해 하는 오색찬란한 상상력은 아이들이 그 하루를 버틸 힘이 되어준다. 상태가 좋지 않아 나오다 끊겼다 하며 사건의 긴장감을 더하던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서른 마리 새' 시무르 설화 또한 그렇다. 잠깐이지만 두 아이를 미소짓게 한 일마의 노래 또한 입에서 입으로 배운 방식일 것이다.
불사조의 깃털은 전설 속에서 사람을 구해준다고 하지만, 사실 에브라힘의 등을 간질인 것부터가 깃털이었다. 전통과 관습은 절대 일면만 가질 수 없다. 사람을 따스하게 감싸고 기댈 곳이 되어주는 면과 갑갑하게 옥죄는 면은 야누스의 얼굴처럼 병존할 수 있다.

#현명하고 다정하고 용감하게
따뜻한 면과 갑갑한 면을 동시에 품은, 전통과 관습이라는 세계. 그 안에서 아이들은 자라왔다. 그래서 현명하고, 그래서 다정하며, 그래서 용감하다. 동시에 이따금씩, 그래서 비합리적이고, 그래서 무정해 보이고, 그래서 겁을 낸다.
그러나 전통이 가진 엄정한 면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충분히 현명하고 다정하고 용감하다. 에브라힘은 하늘의 기색과 양들의 행동을 바탕으로 날씨를 예측하고, 일마에게 적절한 대처 방법을 일러준다. 떨어지면서 입은 부상에 아프고 당황스럽지만, 일마가 너무 겁 먹지 않도록 소리도 지르지 않고, 선의의 거짓말도 적당히 섞는다. 일마 또한 오빠가 시킨 일을 충실히 하고, 시키지 않은 다정한 일까지 고사리 손으로 바지런히 한다. 자기들이 지쳐가는 와중에도 새끼 염소가 지쳐가고 있다며 불쌍히 여기고, 심지어 자칼까지도 안쓰러워한다.
하지만 아이들이 가진 현명하고 다정하고 용감한 면이 가장 빛난 장면으라면, 나는 극악의 상황에서 일마를 달래던 에브라힘의 대사를 꼽고 싶다. 아빠 말대로 일마도 알 건 다 알 만큼 컸기에, 이 파국을 시간 순으로 배열한다면 가장 앞쪽에는 자신이 벌을 보고 오빠를 부른 일이 놓일 거라는 걸 안다. 아직 어린 일마에게 받아들이기 너무 어려운, 패닉이 몇 번이나 찾아오는 상황 속에서도 일마는 엉엉 울면서 오빠에게 미안해 한다. 자기가 신에게 죄를 지어서 그런 것 같다는 말도 한다.
그런 일마를 에브라힘은 부드럽게 달랜다. "사랑해, 일마. 네가 뭘 잘못했어?" 더불어, 벌과 꿀을 발견한 것은 잘못이 아님을 명확히 한다. 일마가 가장 듣고 싶어하는 말과 함께. "마을 세 개를 다 합쳐도 네가 가장 용감해."
두 아이의 나이를 합쳐도 스물이 되지 않을 것 같은데, 서른이 넘은 내가 너무 배우고 싶어하지만 잘 되지 않는 것을, 에브라힘은 이미 알고 있다. 그건 바로 독립 사건을 독립 사건으로 보는 능력이다.
시간 상 앞에 놓였다고 해서 반드시 인과 관계인 것은 아니다. 그 합리적 사고 방식을, 에브라힘은 알고 있다. 전통이 이따금 그들에게 묻힌 비합리적이고 무정해 보이고 겁 나는 마음과 태도 속에서도, 아이들은 자기만의 힘으로 현명하고 다정하고 용감한 것이다.

#Somewhere between the rocks
영화를 보면서 '아동 보호'라는 말을 많이 떠올리긴 했다. 안온한 보호가 부재한 상황을 통해 아동 보호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는 영화이기도 했으므로. 불사조의 깃털도 튼튼한 밧줄도 없는 아이들에게 목소리 높여 부를 호칭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묘하게 안심하게 하는, 그런 안전망이 모든 아이들에게 있길 바라게 만드는 영화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 안전망은 어른들이기 이전에 아이들 자체라는 생각도 들었다. 에브라힘을 절벽에서 끌어올려 줄, 그래서 에브라힘에게 내일을 선사할 힘은 어른들에게 있겠지만, 아이들의 미래는 에브라힘과 함께 이 바위 틈 어딘가에 걸려 있다는 생각.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Somewhere between the rocks 바위 사이 어딘가'인데, 거기야말로 불사조의 깃털 같은 미래가 깃들어 있다는 생각 말이다.
이유는 현명하고 다정하고 용감한 아이들의 면면 그 자체. 자기 나름대로 사투를 벌인 하루가 꼬박 지나고 나서야, 에브라힘은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를 부르고 일마는 멀리서 어른들을 모시고 달려온다. 비로소 문제의 해결점으로 나아갈 수 있는 합리적인 방법이 등장한 것이다. 하루만큼 더 현명하고 다정하고 용감해진 아이들이, 이렇게 세상을 안전히 살아갈 방법을 또 하나 배운 아이들이 자라난다.
독립 사건을 독립 사건으로 볼 줄 아는 아이들의 시각으로 전통과 관습을 해석해 간다면, 전통와 관습이 사람을 옥죄는 면보다 따뜻하게 감싸주는 면이 더 강력하게 기능하지 않을까? 사실 여성이 머리카락을 스카프로 가리는 것과 여성(을 비롯한 가족)의 "명예 실추"는 각각 별도의 독립 사건이다. 여성이 혼자 걷다가 낯선 사람을 마주치는 것과, 그에게 해코지를 당하는 것 또한 논리적인 인과 관계가 없다. 범죄가 일어난다면 범죄와 인과 관계를 맺는 것은 가해자의 행위뿐일 테니까.
그러므로 에브라힘의, 그리고 그 에브라힘의 애정 어린 말로 위로를 받은 일마의 성장으로, 바위 틈 어딘가에 매달려 있는 미래는 점차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이란에서 머리카락을 자유롭게 드러낼 수 있는 미래 또한. 모든 독립 사건이 독립 사건으로 존재하는, 지금보다 가뿐하고 산뜻한 미래를 꿈꿔 본다.
9월 15일 13:30-14:52 롯데시네마 은평 7관
9월 16일 10:00-11:22 롯데시네마 은평 3관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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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다렸다, 이런 영화.
영화
하이파이브
판타지 / 대한민국 / 119분
-감독: 강형철
-배우: 이재인, 안재홍, 라미란, 김희원, 유아인, 오정세, 진영
예고편부터 얼마나 기다렸던가, 올라오는 짤들을 보면서 얼마나 눈을 흐리며 영화관 가기를 고대했는가!
영화관가서 보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신나고 재미있는 영화 정말 오랜만이었다.
갑자기 초능력을 얻은 한국형 서민 히어로물이 아니라 배우들의 차력쇼를 보았다. 아니, 조연마저도 연기 구멍이 없었다.한국형 신파? 쬐금 나오다가 말아서 그것조차도 좋았다. 딱 그정도가 나와서 좋았다고 할까나. 물론 CG가 어색하다는 말이 있지만 뭐 어때! 그런 영화인데!
강형철 감독님이 <써니> <과속스캔들>의 감독이라 그런 느낌이 난다고 했지만 오히려 <극한직업> 이병헌 감독님의 냄새가 났다. 영화 쪽 보다는 <닭강정>의 이병헌 감독님 같았다. 끝없는 말장난과 뇌절과 뇌절을 거듭하는 티키타카가 내 맘에 쏙 들었다.
이름을 부를 수 없는 배우가 되어버린 것 같은 유아인 배우와 안재홍 배우의 합이 매우 좋다.
일 터지기 전에 얼마나 일을 많이 해 놓은 건지 모르겠지만 이병헌 배우와 더불어 '연기로 보답할게요'의 표본이 될 수도... 유아인 배우가 최근에 좀 무거운 캐릭터를 많이 했었는데 생각해보면 저런 깨방정 캐릭터를 정말 잘 하는 사람이었던 걸 잊고 있었다. 유아인 배우가 아니라면 저걸 누가 소화할 수 있었을까?
안재홍 배우야 이쪽 분야(!) 갑이니까! 아! 그래서 <닭강정>이 더 생각 났을지도!
언제 저렇게 컸는지 귀여운 이재인 배우의 연기는 딱 그 나이의 청소년이었다. 아빠랑 싸우기도 하고 장난도 치는. 김희원, 라미란, 오정세 배우야 뭐 이름만 들어도 보증수표니까.
그런데 박진영 배우. 아이돌 출신이라는 게 무색할 만큼 연기를 잘 한다. <악마판사>에서 보여줬던 눈빛들과 다르게 악역도 잘 한다. 신구 할아버지를 삼켰다는 숏츠들을 많이 봤는데 진짜 어떻게 그렇 몸짓을 할 수 있나 신기했다. 최근에 똑같이 아이돌 출신인 김준영 배우만큼 다작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기대가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것은 소재가 '도교'라는 것이다. 역사 교과서에서 본 것 같은 기증자가 누군지 매우 궁금하기도 하고 ㅎㅎ 최근에 괴물과 도교를 소재로 글을 쓰고 있어서 그런가 더 몰입이 되었다.
개봉하면서 <아라한 장풍대작전>이 많이 언급되고 있는 이유도 그럴 것이다. 문신이 옮겨 가는 것이 비슷하기도 하니까 그렇겠지. 그 영화에서도 여러 캐릭터들이 깨방정이 맛나게 나온다. 안성기 배우도 살짝 합류하고 절정은 쿠키영상의 봉태규 배우라고 볼 수 있다. 두 영화에서 결이 비슷한 건 류승범 배우와 유아인 배우려나?
영화의 줄거리를 말 안하려니 배우들 이야기만 잔뜩했지만 아직 영화관에 있을 때 꼭 한 번 보기를 바란다. 누구는 뭐 이런 걸 영화관에서 보냐고 할 수도 있지만 세상에 꼭 '그런' 영화들만 개봉하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는 영화이고, 후속작이 만들어지려나 기대가 되는 영화이기도 하다.
아, 물론 후속작이 안 만들어지는게 대문자 I에 가까운 서민 히어로들의 히어로 생활에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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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잔의 달달하고 따스한 믹스커피처럼
겨울 = 추억
겨울이라는 계절이 올때쯤이면 항상 몇 가지 냄새가 마중나온다. 솜으로 덮여진 패딩에서 나오는 작년 이맘때 쯤의 냄새. 이사 하기 전의 집에서 1층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나오는 엘리베이터의 냄새, 그리고 어렴풋이 기억만 남는 사람과 한 겨울에 재미있게 놀던 그 때의 웃음 냄새. 겨울을 알리는 낯익은 냄새를 맡게 되면 그 동안 잊고 지냈던 겨울의 추억들이 찬바람처럼 코 끝을 때리고 스쳐 지나간다.
<창밖은 겨울>은 이런 정겨운 냄새를 가득 품은 영화이다. 작년 겨울을 다시 되돌릴 수는 없지만 그 때가 찰나의 순간 동안 진하게 생각나는 것처럼, 과거의 추억이 스며드는 영화이다. 내 시절 이야기가 아님에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이 영화는 겨울을 추억이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이상진 감독이 생각하는 추억의 의미는 무엇인지, 미련인지 소중한 기억인지 생각해보면서 보면 더욱 재미있을 것이다.
이상진 감독 <창밖은 겨울>
2022 년 11월 24일 개봉
추억을 담아내는 인물
석우 - 영화감독
석우는 영화감독을 준비했었다. '영화'는 현재의 상황을 카메라로 담아내는 의미도 있지만, 다르게 보면 과거의 아름다움을 간직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카메라가 기억 저장소라고 불릴만큼, 사진보다 더 강렬한 추억을 담아낸다. 석우는 영화감독을 하며 과거의 기억들을 담아내는 일을 하였다. 과거를 그리워하는 석우처럼, 그리고 영화를 그리던 시절이 담긴 석우의 방문이 여전히 열려있는 것처럼 말이다.
영애 - 유실물 보관서 직원
영애는 유실물 보관서에서 근무한다. 잃어버린 물건들은 곧 기억으로만 남은 추억들이다. 영애는 추억을 보관하는 일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 추억이라는 것이 꼭 귀중하고 값진 것은 아니라는 흥미로운 접근을 한다. 어떨 땐 추억을 일부러 버리기도 하고, 추억이 아닌 후회와 미련으로 다가오기도 하다. 아무튼 이런 모든 일들을 영애는 관리하고 있다.
추억을 연결하는 방식
MP3
혹시 예전에 사뒀던 MP3가 지금도 있다면, 한 번 들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이 영화는 MP3와도 닮았다. 그 때에는 죽어라고 들었던 명곡들, 대중가요들, 지금은 촌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는 노래들을 듣다보면 그 시절 열광했던 나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노래를 들으며 등하교 하던 모습, 친구와 컵볶이를 사먹던 모습, 부모님과 함께 수목원에 다녔던 모습. 지금은 볼 수 없는 모습들이 기억난다. 영애와 석우는 이렇게 만난다. 마치 추억을 그리워하듯, MP3에 집착을 하며 가까워진다. 과거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추억을 그리워하며 서로의 겨울을 공유하는 듯하다. 고작 MP3 하나 때문에 이런 인연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그만큼 그 때의 겨울이 인상 깊었고 추억으로 간직되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느낀 점
<창밖은 겨울>은 낡은 보따리에 담긴 소중한 추억을 먼지를 풍기며 하나씩 푸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럴때마다 그 때 그 시절의 냄새가 동시에 풍긴다. 마치 겨울을 맞이하듯. 그 속에는 어떤 추억들이 담겨 있을까.
이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따뜻한 아메리카노 같은 영화는 아니다. 작은 종이컵에 담긴 믹스커피와 같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2000년대 성인의 겨울을 담아내는 것 같지만 지금 세대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정도로 따스하다. 어쩌면 현재 어린 세대가 이 영화를 통해서 당시의 순정과 낭만을 느껴봤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무심히 떠나보내는 것은 후회와 미련이 아닌 추억으로 남는 과정이라는 것. 그리고 이것은 요즘 시대에 필요한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잔잔하게 위로하고 소박하게 사랑하며 순간을 추억으로 담아낸다. 어느 때보다 힘들고 추운 이번 겨울, 달달한 믹스커피와 같은 영화로 속 따듯하게 위로 받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씨네랩 크리에이터로 시사회 참여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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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주년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 개막, 온 가족이 다함께!
올해로 10주년을 맞이하는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SICFF)가 바로 내일 6월 15일부터 22일까지 씨네큐 신도림, 서울생활문화센터 신도림, 문화철도959 등의 장소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해 시민들을 맞이합니다. 10주년과 동시에 어린이날 제정 100주년이 되는 기념비적인 해로 어린이들이 주체적으로 말하고, 어린이들이 하는 말들에 모두가 귀 기울이겠다는 뜻을 담은 “어린이를 듣다(All Ears to the Children)”를 슬로건을 내세우고 있죠. 그 어느 때보다 코로나19로 인해 답답하고 위축되었던 시간을 지내온 만큼 학부모와 아이들이 함께 참여해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긍정적인 행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경쟁, 비경쟁 부문 총 157편의 작품들
전 세계 47개국 157편의 풍성한 라인업과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어린이와 가족을 포함해 저와 같이 영화를 사랑하는 시네필들의 취향도 채워줄 전망입니다. ‘어린이를 듣다’란 주제로 경쟁부문에서는 세계 각국 아이들의 다양한 삶과 생활을 담아 현실적 문제를 보여주는 ‘키즈비전’, 한국 사회라는 맥락 안에서 어린이, 청소년의 상황과 그들의 시선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키즈포커스’, 꿈, 다문화, 폭력, 이주, 사랑, 이혼, 상실과 죽음까지 성장과정에서 다뤄지는 주제와 그로 인해 형성되는 정체성의 문제를 어린이의 감정과 언어로 선보이는 총 30편의 단편이 모인 ‘키즈 크리에이티브’, 전 세계 어린이, 청소년 감독들이 오롯이 자신만의 세계에 집중하며 창의적인 생각을 펼쳐낸 작품들을 만나는 ‘키즈 챌린지’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비경쟁부문은 어린이의 모습을 통해 그들이 느끼는 여러 가지 상황들과 감정들을 어른들의 시선으로 담은 ‘넥스트 제너레이션’, 다음 세대에 아이들을 위한 어른들을 위한 ‘어른들을 부탁해’, 연령별 아이들의 특성에 맞춘 다양한 장르가 있는 ‘씨네키즈’, 지난 10년간 아랍의 문화를 소개한 아랍영화제 속 상영작들로 구성된 ‘영화제 교류전’과 남녀노소 모두가 어린이가 되어 즐길 수 있는 해리포터 시리즈를 볼 수 있는 ‘10x100 특별상영’ 섹션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어린이들의 생각과 시선을 알아보는 이벤트
이 밖에도 이번 영화제에는 10주년을 맞이하며 관람객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이벤트가 기획되어 있습니다. 크게 4가지로 나누어져 있는데 영화를 관람한 뒤 관련 주제를 통해 전문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영화 보며 놀아요’, 문화철도 959 야외테라스에 즐거운 공연과 상영이 함께하는 기찻길 옆 극장으로 꾸며진 ‘함께 놀아요’, 현재 한국의 영상문화산업 내의 문제점들을 논의하며, 앞으로 어린이가 건강하게 즐길 수 있는 미디어 환경 조성을 위한 디지털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의 필요성을 다루는 ‘문제적 포럼’, 아동 권리와 어린이가 생각하는 인권에 대해 알아보는 ‘행동하는 어린이’로 편성되어 있습니다.
단연 눈길을 끄는 파트는 어린이의 시선이 담긴 해설을 통해 관람 전 내용을 상상해 보는 ‘영화를 보며 놀아요’ 중 ‘키즈 도슨트’로 이번 영화제에서 처음 선보이는 프로그램입니다. 어린이 영화에 대한 키즈 도슨트들의 이야기를 듣고 새로운 시각으로 관람하는 신선한 방식이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17일 금요일 16시와 18일 토요일 12시에 진행되오니 아이들의 상상력과 새로운 시선에 관심이 가신다면 참여해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외에도 아카데미 수상작 ‘코다’를 본 후 수어사전을 만들고 있는 이현화 학예연구사님과 함께 수어도 또 다른 언어라는 것을 알아보는 씩씩한 토크, 이번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의 크로스 아이콘이자 성인 배우로 스펙트럼을 확장해가는 배우 김환희와 함께 나누는 ‘액터스 토크’, 영화 감상과 그 주제에 대한 수업을 통해 폭넓은 이해를 즐길 수 있는 ‘비주얼 리터리시’ 등 알차고 뜻깊은 프로그램이 많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개막작 〈울야는 못말려〉
개막작은 독일, 룩셈부르크, 폴란드가 공동제작한 영화 ‘울야는 못말려’로 천문학을 사랑하는 12살 소녀 울야가 같은 반 친구가 운전하는 영구차를 타고 동유럽을 가로질러 소행성 충돌을 보러 가는 여정을 담은 작품입니다. 2021년 베를린국제영화제 수정곰상에 노미네이트되며 주목을 받았고, 크리스티앙 국제어린이영화제 최우수 어린이영화상을 비롯해 유수의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작품성을 입증했다는군요. 시종일관 흐르는 유쾌한 분위기 속 어린이들의 생각을 억압하고 존중하지 않는 기성세대의 모습을 코믹하게 그려내 모든 세대에게 즐겁지만 가볍지만은 않은 메시지를 전달해 줄 것 같습니다.
다채로운 프로그램과 다양한 시선이 담긴 다양한 영화들이 함께할 10주년을 맞이해 새로운 페스티벌 거듭난 제10회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SICFF), 현재 무료 상영과 여러 프로그램의 경우 매진이 꽤 되어서 많은 분들이 함께하는 즐거운 행사가 될 듯합니다. 이웃분들도 가까우시거나 관심이 가신다면 참여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블로거 활동을 하면서 코로나로 인해 EIDF와 부천판타스틱 은 온라인으로만 접했는데 처음으로 현장을 가보게 되네요. 모두 행복한 한주 되시고요. 저는 내일 또 영화제 소식으로 찾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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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가 묵과한 현실의 비정함이 만들어 낸 비극.
2017년 콜센터에 현장 실습을 나갔던 고등학생이 목숨을 잃었던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 '다음 소희'가 2월 8일에 개봉했다. 현실과 맞닿아 있는 이야기가 사회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영화와 현실이 하나가 되는 순간을 그린다. 그렇게 이어진 영화는 같은 공간에 서있지만 서로를 볼 수 없는 시간 속의 그들을 재현하며 이야기를 전달한다. 이런 일이 반복되는 이유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굳건함으로 맺는다. 영화관을 나가면 끝날 이 이야기들은 여전히 끝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남아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시스템은 여전히 그 형태로 방식만 바뀐 채, 변하지 않는 환경과 버티고 있는 사람들만이 존재했다. 언제든지 대체할 수 있다는 암묵적인 규칙에 의해 가장자리에 놓인 이들이 더욱 소외될 수밖에 없는 환경을 조성한다. 그렇게 성인 노동자에 비해 취약한 환경에 놓인 학생들은 그 사실을 모른 채,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소희도 역시 그 학생들 중에 한 명에 속했다. 현장실습생으로서 콜센터 근무를 시작하게 되고 자신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성희롱을 비롯한 폭언, 극한의 감정노동에 시달린다. 또한 성인 상담사에게도 업무 강도가 높다고 알려진 해지방어 업무를 맡게 되면서 더욱 내몰린다. 어디에도 말할 수 없었던 소희는 회사와 학교 그리고 가정을 뒤로한 채 돌아오지 못한다.
너무 당연하게 여겨졌던 냉혹한 현실은 유독 누군가에게 추운 겨울이었다. 쉴 새 없이 불어닥치는 바람의 틈사이로 비쳐오는 햇살은 소희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같이 일하던 누군가가 죽어도 슬픔을 애도할 수 없었고 부당함을 그저 받아들여야 했던 그 상황들이 참으로 버거웠을 것이다. 아무리 외쳐도 침묵을 강요하는 이 사회가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며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소희를 침묵의 방에 가뒀다. 이상과는 괴리감이 있는 이 현실 속에서 그 빈자리는 또 다른 사람으로 채워진다. 각자의 이름을 달고 일어나는 비극에 사회는 그저 방관하며 수많은 소희를 외면한다.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변화할 수 없는 사회의 구조는 계속 반복된다.
1부처럼 느껴졌던 소희의 이야기가 끝나고 소희의 발자취를 뒤따르는 형사 유진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어떤 것에도 동요하지 않던 유진은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고 소희를 외면했던 사회에 분노한다. 본질적인 목적보다는 실적에 의한 실적을 위한 것들로 가득한 것들이 얼마나 생채기를 냈을지 감히 상상도 되지 않는 것이다. 같은 공간, 다른 시간에서 마주한 소희의 모습은 현실의 벽에 가로막힌 수많은 무력감으로 점철된 상태였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다. 그저 개인적인 일에 불과했던 일들은 누구도 책임지지 않으려는 이 비극은 형체만 달라질 뿐 또 다른 대상을 찾아 그 자리를 유지한다.
감정을 헤아리는 따뜻함과 해결되지 않은 참혹함이 뒤섞여 착취를 먹고 자라는 친절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무의미한 방관의 침묵의 시간이 끝나고 무기력한 외침이 시작되며 작지만 명확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 이야기는 그저 개인적인 일일 뿐인 걸까. 버텨내지 못한 소희의 탓일까? 더 크게 소리치지 못한 탓일까? 너무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들은 그저 누구도 책임지지 않은 현재만 남아 현실을 감춘다. 무언가를 고치기 위해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영화는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진정으로 바라보아야 할 현실적인 문제를 바라보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누군가에 의해 희미해질지도 모를 이들의 목소리가 사라지지 않게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한다. 또 다른 소희가 나오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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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 1주 차, 최신 씨네 뉴스
영화관을 찾는 발걸음이 줄면서 한국 관객들에게 하는 호소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고 있는데요.
이에 대해 배우 정우성은 동료 배우들에게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12월 1주차 씨네뉴스 같이 살펴보아요!
마약 혐의 유아인 영화<승부> 잠정 보류
영화 <승부>가 넷플릭스와 배급사 측에서 잠정 보류한다는 입장을 내놓았습니다. <승부>는 스승과
제자이자 라이벌이었던 한국 바둑의 두 전설인 조훈현과 이창호의 피할 수 없는 승부를 그린 영화로 당초
올해 중 넷플릭스에서 공개될 예정이었으나, <승부>의 주연인 유아인이 지난 2월 마약 혐의에 연루되면서
공개가 무기한 연기되었습니다.
영화 <괴물> 한국서 히로카즈 2번째 흥행작 기록?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새 영화 <괴물>이 한국에서 두번째 흥행작으로 기록될 것으로 보입니다.
<괴물>은 개봉 후 첫 주말인 1~3일 5만명을 추가해 누적 관객수 11만명을 기록 중이며, 최고 흥행작은
<브로커>입니다. 기존 12만 8천여명을 기록한 2위를 지키고 있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넘어설
예정으로 보입니다.
거장 오즈 야스지로 특별전
독립예술영화 전용관 아트나인은 오는 12~31일 <오즈 야스지로 탄생 120주년 특별전>을 연다고 밝혔습니다. 일본 영화 미학을 구축한 거장인 오즈야스지로 감독의 특별전에서 그의 대표작 <만춘> <오차즈케의 맛> <동경이야기> <동경의 황혼> <안녕하세요> <꽁치의 맛>이 상영된다고 합니다.
<노량: 죽음의 바다> 12월 20일 개봉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가 오는 20일에 개봉하면서 <서울의 봄>에 이어 관객들의 발길을 붙잡아 둘 수
있을지 주목되고 있습니다. 임진왜란 발발 후 7년, 조선에서 퇴각하려는 왜군을 완벽하게 섬멸하기 위한
이순신 장군의 최후의 전투를 그린 전쟁 액션 대작으로 이순신 3부작 프로젝트의 마지막 작품이 될
예정입니다.
“한국 영화 어렵다는말 염치없다”
배우 정우성이 지난 11월 30일 유튜브 채널 [성시경 먹을텐데]에 출연하면서 ‘한국 어렵습니다, 극장
어렵습니다’라는 구호가 무색하며 염치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극장 개봉하는 너희 영화들만
영화관에서 봐달라고 하지. 평상시에 한국 영화 개봉하면 극장 가서 보느냐고 쓴소리를 하고 싶다”라고
밝혔습니다.
영화 소품 적힌 위조지폐 늘어
한국은행이 위조지폐 유통 방지를 위한 대응책을 논의했습니다. ‘영화 소품’이나 ‘specimen’등의 문구가
적힌 위폐가 제작돼 주로 고령층 상인들이 운영하는 전통시장과 노점상 등에서 많이 유통되는 점을 지적했으며 위조 기술이 원화 위조에 악용되지 않도록 경계심을 가져야한다고 언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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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수가 미련한 것이라 하는 사람들에게
사진출처 ⓒ넷플릭스
더 글로리 (The Glory, 2022)
채널 : 넷플릭스, 16부작 (파트 1 완결) │ 장르 : 범죄·스릴러·드라마 │ 연출 : 안길호│ 극본 : 김은숙 │ 출연 : 송혜교, 임지연, 염혜란, 박성훈, 정성일 外 │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도깨비> 김은숙 작가의 또 다른 장르
<더 글로리> 김은숙 작가의 필모그래피 대부분은 로맨스였다. 천년의 시간을 넘어선 사랑 <도깨비>, 독립운동이라는 배경이 있었지만 어쨌든 ‘유진 초이’와 양반집 아가씨의 사랑을 다루었던 <미스터 선샤인>,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신사의 품격>이 있고 <파리의 연인> 도 있었다. 그래서 흑화 된 송혜교를 전면에 내세운 이 드라마가 ‘김은숙 작가’의 것인 줄 몰랐다. 이번에 새삼 느끼는 바이지만 글 잘 쓰는 사람에게 역시 장르란 아무 장벽이 되지 못하는 듯싶다. 나는 리모컨을 내려놓지 못했고, 정주행으로 밤을 꼴딱 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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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있고, 어디에나 있던 학폭
드라마는 학폭을 다룬다. 행복을 사치처럼 여기며 마른 북어처럼 살아가는 동은(송혜교)이 바로 학폭의 피해자다. 어딘가에는 가 해자를 용서하거나 애써 잊어버리려는 피해자들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동은이 입은 피해는 그럴 수 있는 범위를 진작에 넘어섰다. 동은의 몸에는 화상 자국이 가득하다. 부잣집 딸이자 가해자인 연진(임지연)이 십수 년 전 남긴 상처다. 하지만 성인이 되었어도 그 상처들은 동은의 몸에 마치 인장처럼 물리적으로 남아있을 뿐 아니라, 고기를 굽는 장면만 보아도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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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꼭 복수해야만 했을까
학폭을 당해보지 않아서 잘 몰랐다. 어딜 가나 인성이 개차반인 애들은 있는 법인데, 그렇다고 꼭 복수까지 해야 할까. 그 복수를 할 시간에 차라리 나에게 투자하고 더 잘나지면 그게 이기는 거 아닌가. 하지만 회를 거듭하면서 깨달았다. 피해자인 내가 용서하지 못했는데 가해자는 스스로를 용서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끔 찍한지를. 가해자 연진은 사과를 돈으로 할 수 있다고 믿기에 “꼴 값 떨지 말고 원하는 액수를 부르라”고 말한다. 하지만 어느 때나 강력한 해결책이 되는 돈은, 애석하게도 상처받은 영혼만큼은 치 유할 능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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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은 지능이라고 했지, 아마
최근 스탠퍼드 대학의 한 심리학 교수가 ‘공감은 지능’이라는 내 용의 논문을 발표한 적 있었다. 선택받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삶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공감도 죄의식도 연민도 느끼지 못하는 연진을 보며, 나는 다시 한번 확신했다. 공감은 지능이 맞고,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최악의 결핍이고 결여라고. 어쩌면 그들도 어딘가로부터 받은 정서적 학대로 인해 공감지능 이 고장 나버린 ‘피해자’일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그 결여가 또다 시 애꿎은 사람을 학대해서는 안 될 것이다. 피나는 노력으로 가해자가 되지 않으려 노력해야 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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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리끼리는 사이언스
10대 시절 동은을 괴롭힌 학폭 가해자들이 30대가 되어서까지 연진을 중심으로 어울려 다니는 것을 보면 정말이지 ‘끼리끼리’ 가 과학이 아니면 뭔가 싶다. 뭐, 당연하겠지만 그런 애들의 우정 은 참 얕기도 얕다. 누군가를 짓밟을 수 있는 마음은 십수 년을 관계해온 절친에게라고 예외가 아니니까. 서로가 서로를 헐뜯고, 더 큰 다이아반지를 자랑하려 애를 쓰고, 가난한 친구를 ‘데리고 쓰던 애’라고 표현하는 그 얕은 우정. 물론 그 애들이 받아야 할 죗값은 더 커야 마땅하겠지만, 어쩌면 그들이 사는 곳은 이미 지옥이 아닐까 생각했다. 우정도, 진심 어린 소통도 없는 본인만 모르는 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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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은 사람들의 먹먹한 연대
부수고 복수하고 결국 파멸로 향해가는 스토리라인 속에서 유일하게 웃음을 주는 포인트가 있다면 그건 바로 현남(염혜란)과 동은의 연대가 아니었나 싶다. 현남은 남편에게 맞고 사는 또 다른 피해자다. 물론 동은은 자기 복수를 하기도 바빠 누구와 연대 같은 걸 할 여유조차 없어 보이지만, 사람의 천성이란 건 역시 바 뀔 수 없는 걸까. 서로의 복수를 위해 거래를 하는 중임에도,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현남이 자꾸만 동은의 눈에 들어온다. 잔잔하게 흐르는 연대의 기운이 흐뭇하면서도 또 마음 아팠다. 밟히고 상처받아도 마르지 않는 선한 기운들이 느껴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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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복수가 성공하길 누구보다 바라
앉은 자리에서 계속 <더 글로리>의 ‘다음 화’를 넘기다 보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처음엔 ‘굳이 복수를?’했던 마음이 어느새 ‘완 전 밟아버려!’ 하는 마음으로 바뀐다는 것을. 감정이입이 이렇게나 무섭다. 동은을 멀리서 지켜보며 사랑과 응원이 섞인 무언가를 하는 꽃미남 의사 여정(이도현)도, 나중엔 동은의 화상 자국을 보며 말하지 않던가. 함께 칼춤을 추는 망나니가 되어주겠다고. 한없이 여리고 어질어서 끝내 가해자를 용서하는 여주인공이 아니라서 좋았다. 누군가의 상처는 절대로 잊혀지지 않는다. 그렇 기에 나 역시 그 망나니의 복수가 꼭 성공하기를 바라는 바다.
별점 ★★★★★
복수가 미련한 것이라고 하는 사람들, 용서가 답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빨간색 헌사. 때때로 어떤 상처는 영원히 한 영혼을 갉아먹는다.
인스타그램 @woodumi
유튜브 『따수운 독설』
메일 deumj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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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왓챠 <시맨틱 에러> 티저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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