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3-09-17 22:28:23
[SICFF 데일리] 독립 사건을 독립 사건으로
영화 <벼랑 위의 남매>
SYNOPSIS.
여동생과 함께 산 정상으로 소를 몰아야 하는 소년. 아름다운 자연과 동물들, 귀여운 남매가 어우러진 모험이야기
PROGRAM NOTE.
부모님이 마을에 간 사이 에브라힘과 그의 여동생 일마는 산에서 소들을 돌본다. 에브라힘이 다리를 다쳐 바위벽 위로 올라올 수 없게 되자 일마는 혼자서 모든것을 해결해야 한다. 그녀는 씩씩하게 임무를 수행하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일마는 점점 불안해진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풍경 속 어린 남매의 이야기지만 그 안에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이 가득하다. 더구나 남매가 심각한 상황에 빠질수록 남매의 대화는 코믹하게 흘러간다. 팽팽한 긴장감과 무해한 웃음을 오가며 보는 이를 쥐락펴락하는 연출과 남매의 생동감 넘치는 연기가 매력적이다. 귀여운 남매의 일화에 소박한 가족의 애정과 신뢰가 깊이 스며있는 영화. 가족관객에게 추천하고 싶다. (함유선)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그 말을 증명하듯, 이 영화는 헬리캠으로 찍은 원경에서 시작한다. 아이들이 사는 세상, 초원과 염소 소리, 황금빛 햇살까지 담아내면서. 그 안에 아이들은 그림의 일부처럼 존재한다. 엄마와 아들, 딸과 아빠, 뛰고 손을 씻고 아빠의 입맞춤을 받고, 풍경의 일부로.
가족이 사는 방식은 더없이 검박하고 단출하여 아름답다. 일상을 영위하기 위한 노동을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나누어 한다. 모처럼 마을로 나가는 부모님의 '쇼핑 리스트'도 네 식구가 나란히 앉아 적는다. 이제 막 철자를 배우고 있는 듯한 막둥이, 딸 일마(Ilma)가 알쏭달쏭 헷갈려 하며 글자를 써 가면서. 얼핏 퉁명스러운 것 같아도 아이들이 원하는 건 또 하나씩 다 사주는, 화목한 가정이다. 남매도 적당히 남매답게 투닥투닥하며 사이가 좋은 것이 귀엽기만 하다.
부모님이 마을로 먼 길을 떠난 날, 에브라힘(Ebrahim)과 일마 두 사람은 부모님이 남겨주신 미션을 차곡차곡 수행한다. 양을 돌볼 것, 도토리를 말려둘 생각이니 양이 먹지 않도록 주의할 것, 피스타치오 열매를 좀 따둘 것. 동생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는 오빠 에브라힘에게는 "일마도 이제 다 커서 알 건 다 안다"는 말도 남겨둔다. 두 아이는 제법 능숙한 솜씨로 양을 친다. 둘러멘 가방 속 라디오에서는 '이란 국민 여러분' 어쩌고 하는 말이 흘러나오지만, 이들은 어느 나라의 국민보다는 그냥 이 땅의 일부로 사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러다 일마가 벌을 발견하면서 사건이 시작된다. 벌이 있다는 건 꿀도 있다는 뜻. 아빠가 분명 가지 말라고 했던 절벽 가에 매달려 꿀을 확인한 에브라힘은, 갑자기 등이 간지러워 손을 놓치면서 벼랑 아래로 떨어진다. 발목을 다쳐 올라올 수 없는 에브라힘과, 그 위에서 엉엉 울기 시작한 일마, 두 사람의 하루는 뜻밖의 점입가경으로 갈수록 고달파진다. 이 영화는 두 남매가 절벽에서 보낸 하루를 꼬박 담은 영화다.
#전통, 기대거나 혹은 반하거나
두 아이는 일단 재난영화의 법칙을 어겼다. 가지 말라는 금기가 있는 곳에는 가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이미 가버린 이상, 일이 벌어진 이상 두 아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이었을까? 어린 시절 각자가 배운 내용을 들추어 보자.
나는 엄마에게 "길을 잃어버리면 반드시 그 자리에 가만히 있을 것"이라고 배웠다. 그리고 혹시라도 (예를 들어 낯선 사람이 쫓아와 유괴의 위험이 있다던가 하는) 위험 상황에 처하면 아무 가게나 들어가 도움을 요청하라고 배웠다. 어느 가게를 들어가도 가게 주인과 부모님이 다 알음알음 아는 사이일 법한 작은 지역 사회였고, 20년쯤 전이니 지금과는 다른 가르침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아이들이 했어야 하는 제1의 행동은, 에브라힘으로서는 가만히 있는 것, 일마가 달려가서 어른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두 아이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는다. 지금이라도 달려가서 어른들을 불러오겠다는 일마를, 에브라힘이 말린다. 사유는 여자 혼자 다니다가 낯선 사람을 마주쳤을 때 실추될 "명예". 10살도 채 되지 않은 일마, 가축을 돌볼 때는 너무 어려서 돌보기 귀찮은 동생으로 여겨지는 일마가 바깥에 나가면 여자로 인식되어야 하는 현실을 말한다.
그밖에도 두 아이가 내린 선택 중에는 전통에 기대느라 '오... 저러면 안 될 것 같은데' 싶은 것들이 더 많이 있었다. 일마의 머리를 가리는 데 쓰는 스카프가 벼랑 아래로 내려가 에브라힘의 부어오른 발목을 감았다가, '혹시라도 낯선 사람을 마주칠 가능성' 때문에 다시 벼랑 위로 올려보내는 순간도 그렇고. 자칼이 다가왔을 때 여차하면 도망칠 수 있게 신발을 단단히 신는 대신 혹시나 하는 미신을 따르기 위해 신발을 거꾸로 신는 일마의 선택도 그렇고.
그러나 두 아이가 마음 기대는 곳 또한 전통이다. 불사조 깃털을 태우면 불사조가 도와주러 온다는 설화를 생각하며 불사조 깃털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설화 속 인물이 태우지 않은 깃털이 지금 어디에 있을까 궁금해 하는 오색찬란한 상상력은 아이들이 그 하루를 버틸 힘이 되어준다. 상태가 좋지 않아 나오다 끊겼다 하며 사건의 긴장감을 더하던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서른 마리 새' 시무르 설화 또한 그렇다. 잠깐이지만 두 아이를 미소짓게 한 일마의 노래 또한 입에서 입으로 배운 방식일 것이다.
불사조의 깃털은 전설 속에서 사람을 구해준다고 하지만, 사실 에브라힘의 등을 간질인 것부터가 깃털이었다. 전통과 관습은 절대 일면만 가질 수 없다. 사람을 따스하게 감싸고 기댈 곳이 되어주는 면과 갑갑하게 옥죄는 면은 야누스의 얼굴처럼 병존할 수 있다.
#현명하고 다정하고 용감하게
따뜻한 면과 갑갑한 면을 동시에 품은, 전통과 관습이라는 세계. 그 안에서 아이들은 자라왔다. 그래서 현명하고, 그래서 다정하며, 그래서 용감하다. 동시에 이따금씩, 그래서 비합리적이고, 그래서 무정해 보이고, 그래서 겁을 낸다.
그러나 전통이 가진 엄정한 면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충분히 현명하고 다정하고 용감하다. 에브라힘은 하늘의 기색과 양들의 행동을 바탕으로 날씨를 예측하고, 일마에게 적절한 대처 방법을 일러준다. 떨어지면서 입은 부상에 아프고 당황스럽지만, 일마가 너무 겁 먹지 않도록 소리도 지르지 않고, 선의의 거짓말도 적당히 섞는다. 일마 또한 오빠가 시킨 일을 충실히 하고, 시키지 않은 다정한 일까지 고사리 손으로 바지런히 한다. 자기들이 지쳐가는 와중에도 새끼 염소가 지쳐가고 있다며 불쌍히 여기고, 심지어 자칼까지도 안쓰러워한다.
하지만 아이들이 가진 현명하고 다정하고 용감한 면이 가장 빛난 장면으라면, 나는 극악의 상황에서 일마를 달래던 에브라힘의 대사를 꼽고 싶다. 아빠 말대로 일마도 알 건 다 알 만큼 컸기에, 이 파국을 시간 순으로 배열한다면 가장 앞쪽에는 자신이 벌을 보고 오빠를 부른 일이 놓일 거라는 걸 안다. 아직 어린 일마에게 받아들이기 너무 어려운, 패닉이 몇 번이나 찾아오는 상황 속에서도 일마는 엉엉 울면서 오빠에게 미안해 한다. 자기가 신에게 죄를 지어서 그런 것 같다는 말도 한다.
그런 일마를 에브라힘은 부드럽게 달랜다. "사랑해, 일마. 네가 뭘 잘못했어?" 더불어, 벌과 꿀을 발견한 것은 잘못이 아님을 명확히 한다. 일마가 가장 듣고 싶어하는 말과 함께. "마을 세 개를 다 합쳐도 네가 가장 용감해."
두 아이의 나이를 합쳐도 스물이 되지 않을 것 같은데, 서른이 넘은 내가 너무 배우고 싶어하지만 잘 되지 않는 것을, 에브라힘은 이미 알고 있다. 그건 바로 독립 사건을 독립 사건으로 보는 능력이다.
시간 상 앞에 놓였다고 해서 반드시 인과 관계인 것은 아니다. 그 합리적 사고 방식을, 에브라힘은 알고 있다. 전통이 이따금 그들에게 묻힌 비합리적이고 무정해 보이고 겁 나는 마음과 태도 속에서도, 아이들은 자기만의 힘으로 현명하고 다정하고 용감한 것이다.
#Somewhere between the rocks
영화를 보면서 '아동 보호'라는 말을 많이 떠올리긴 했다. 안온한 보호가 부재한 상황을 통해 아동 보호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는 영화이기도 했으므로. 불사조의 깃털도 튼튼한 밧줄도 없는 아이들에게 목소리 높여 부를 호칭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묘하게 안심하게 하는, 그런 안전망이 모든 아이들에게 있길 바라게 만드는 영화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 안전망은 어른들이기 이전에 아이들 자체라는 생각도 들었다. 에브라힘을 절벽에서 끌어올려 줄, 그래서 에브라힘에게 내일을 선사할 힘은 어른들에게 있겠지만, 아이들의 미래는 에브라힘과 함께 이 바위 틈 어딘가에 걸려 있다는 생각.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Somewhere between the rocks 바위 사이 어딘가'인데, 거기야말로 불사조의 깃털 같은 미래가 깃들어 있다는 생각 말이다.
이유는 현명하고 다정하고 용감한 아이들의 면면 그 자체. 자기 나름대로 사투를 벌인 하루가 꼬박 지나고 나서야, 에브라힘은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를 부르고 일마는 멀리서 어른들을 모시고 달려온다. 비로소 문제의 해결점으로 나아갈 수 있는 합리적인 방법이 등장한 것이다. 하루만큼 더 현명하고 다정하고 용감해진 아이들이, 이렇게 세상을 안전히 살아갈 방법을 또 하나 배운 아이들이 자라난다.
독립 사건을 독립 사건으로 볼 줄 아는 아이들의 시각으로 전통과 관습을 해석해 간다면, 전통와 관습이 사람을 옥죄는 면보다 따뜻하게 감싸주는 면이 더 강력하게 기능하지 않을까? 사실 여성이 머리카락을 스카프로 가리는 것과 여성(을 비롯한 가족)의 "명예 실추"는 각각 별도의 독립 사건이다. 여성이 혼자 걷다가 낯선 사람을 마주치는 것과, 그에게 해코지를 당하는 것 또한 논리적인 인과 관계가 없다. 범죄가 일어난다면 범죄와 인과 관계를 맺는 것은 가해자의 행위뿐일 테니까.
그러므로 에브라힘의, 그리고 그 에브라힘의 애정 어린 말로 위로를 받은 일마의 성장으로, 바위 틈 어딘가에 매달려 있는 미래는 점차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이란에서 머리카락을 자유롭게 드러낼 수 있는 미래 또한. 모든 독립 사건이 독립 사건으로 존재하는, 지금보다 가뿐하고 산뜻한 미래를 꿈꿔 본다.
9월 15일 13:30-14:52 롯데시네마 은평 7관
9월 16일 10:00-11:22 롯데시네마 은평 3관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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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게 호러영화야 서부영화야
각자의 머릿속에 믿고 보는 배우가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는 김윤석 배우가 그에 속한다. <추격자>부터 <암수살인>까지 그 중후한 목소리가 너무 멋있다. 그리고 연기를 조금만 잘하나? 북한 사람부터 연변, 또 도박꾼에 액션 영화까지 가지각색으로 잘하니 그야말로 만능 배우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김윤석 배우는 잘생겼지만, 할리우드에 마찬가지의 맥락을 가진 배우가 있으니 그는 베네딕트 컴버배치라고 생각한다. 역시나 액션부터 멜로, 탐정까지 연기를 고루 잘하니 과연 할리우드의 김윤석이 어색하지 않다.
이런 그가 <모리타니안>에 이어 신작을 발표했다. 내가 좋아하는 커스틴 더스트와 제시 플레몬스와 합작해 서부극 영화에 출연했다. 올해만 해도 <더 스파이>에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까지 개봉 예정이거나 이미 했었어서 그야말로 소처럼 일한 셈이다. 내년에 <닥터 스트레인지 인 멀티버스 온 매드니스>까지 나온다고 한다. 아마 그의 팬이라면 아마 눈호강 대잔치가 열리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아. 특히 이 작품에 대해 쓰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 4편의 개봉 예정 및 이미 상영한 작품 중 가장 탁월한 것이 될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마 아카데미나 칸의 남우주연상 후보에도 오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김윤석 배우의 필모그래피로 치면 <추격자>와도 같은, 그야말로 커리어하이를 기록한 작품이 된 것이다. 12월 1일부터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 하니 모바일 환경에서 볼 수 있는 분들의 시청을 권한다.
1) 진짜 호러영화인가요?
제목에 호러라고 적긴 했지만 사실 서부극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감독 제인 캠피온이 그동안 여성 서사 중심의 영화를 만들어와 이 작품도 그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근데 이 작품엔 그런 것 없다. 완전 상마초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또 영화라는 문화예술 매개체의 근본은 서부극 아닌가? '서부극'과 '마초'의 이미지로 연상되는 플롯이 어느 정도는 딱 알맞게 전개된다. 그리고, 후반부에서 완벽하게 전복된다.
2) 난이도가 있는 영화인가요?
난 난이도가 있는 편이라 생각한다. 전반부에 필의 동생 조지와 로즈가 결혼한다. 로즈에게는 어쩐지 병약한 아들이 있다. 피터다. 피터는 병약한 존재다. 필은 미망인이었던 로즈뿐만 아니라 피터까지 별로 안 좋아한다. 잘 씻지도, 꾸미지도 않는 필. 1)에서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나르시스트인 필에게 여성이 끼어들 틈이란 없다. 근데 이런 성격이 나머지 세 인물과 잘 맞냐? 아니다. 이 인물의 부정교합에서 오는 성격 안 맞음이 영화의 서스펜스를 좌지우지한다. 근데 이건 어디까지나 시네마에 익숙한 사람들이 봤을 때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말해보자면 영화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이라면 졸릴 수도 있다. 나는 그래서 극장보다 태블릿 PC로 보는 쪽을 더 추천한다. 또 여러 떡밥을 점점 쫓아가며 하나하나 해소하는 작품이기 때문에 놓치면 이해가 어려울 수도 있다. 이 점에서 재생 바를 옮겼다 내렸다 할 수 있으니 극장보다 집에서 보는 게 이해가 더 될 거라고 생각한다.
3) 다른 배우들의 연기는 어떤가요?
훌륭하다. 일단 제시 플레먼스와 커스틴 던스트가 부부 역할로 나오는데, 실제로도 이 둘은 연인이라고 한다. 여기서 오는 리얼리티(?) 때문인지 형과 부인 사이에서 영리하게 줄 타는 동생 조지의 모습을 잘 살렸다. 또 커스틴 던스트도 뛰어난 연기를 펼쳤다. 극에서 필이 대놓고 로즈를 괴롭히지는 않는다. 근데 점점 로즈의 정신과 신체가 피폐해져 가는데 이를 보여주는 호연을 펼친다. 완전히 상상력에 의존한 고통 내면 연기인데, 칸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값을 한다. 또 아들 피터 역을 맡은 배우도 후반부에서 내용이 뒤집히는데 주요한 키포인트가 되는 역할을 한다. 이 네 명의 기본적인 특색 외에 네 가지 인물이 각자 던지는 떡밥에서 온 부조화가 극의 서스펜스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이를 구현할 만큼 치열한 기싸움을 연출한다.
4) 어떤 영화로 정의할 수 있을까요?
나는 혐오에 관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필은 과부인 로즈와 그의 아들 피터를 혐오하는 인물이다. 대놓고 싫어하는 것도 맞는데 한 가지로 일반화한다는 점에서 넓은 의미의 혐오도 적용된다. 마초적인 입장을 고수하며 여성 혐오와 피터에 대한 분노를 터트리는 필. 이렇게 혐오를 내포하는 마음의 기제에 어떤 것이 깔려있는지를 영화는 보여준다. 후반부에 영화가 전복된다고 썼던 부분이 이 이유인데, 필이 그렇게까지 했던 이유가 '마초스러움'을 강요하는 시대에 대한 자격지심에서 왔다는 걸 이해한다면 필의 심리상태와 왜 네 인물이 끊임없이 어그러짐에도 한 가지 키워드로 밧줄처럼 엮이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블랙 위도우>같이 약자에 위치에 있는 인물이 누군가를 구원해주는 줄거리도 아니고, <그린 북>같이 연대를 통해서 극복하는 스토리도 아니다. 그런데 제인 캠피온은 이 작품을 혐오의 비틀기를 통해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은근하게 비꼬고 있다.
5) 플롯 외의 부분은 어떠한가요?
일단 영상미가 뛰어나다. 뉴질랜드의 아름다운 풍광을 잘 어울리게 찍었다.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가 시너지가 되는 부분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극의 설정상 야생동물이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와야 하는데 전혀 어색함이 없다. 음향은 라디오헤드의 기타리스트 조너던 그린우드가 연출했는데 첼로를 통해서 극의 서스펜스를 유지하는데 크게 기여한다.
1줄 요약 : 예술영화 축에 속하기 때문에 스릴러 장르영화 팬은 살짝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예술영화 맛만 보고 싶다면 좋은 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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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벽한 타인
스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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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이 영화가 나왔을 때 다양한 반응이 있었다. 아직까지도 기억나는 건 '우리는 저런 게임 해도 광고나 게임초대 밖에 안 온다'는 후기다. 나도 그럴 것 같다.\
월식이 일어나던 날, 호수이자 바다인 영랑호에서 불장난(사실 얼음낚시이지만)을 하다 주먹다짐을 했던 어린이들은 약 40년 뒤, 또 다시 월식이 일어나는 날 석호와 예진의 집들이에서 새로운 불장난을 한다.
40년 지기 친구들과 그 아내들이 휴대폰으로 오는 모든 알림들을 공유하는 게임.
이 영화는 낯선 게임의 형식을 빌려 내부의 클리셰들, 너무 흔한 가정들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배신과 타자성 보다는 오히려 풍자에 가깝다.
더 바랄 것도 없을 정도로 완벽해 보이는 석호-예진 부부. 그들의 공부 잘하고 착한 딸.
유방 성형외과 의사인 석호는 자상하고 가정적이며, 정신과 의사 예진은 딸에게 엄격한 엄마다.
대학생 때 혼전임신으로 낳은 딸인 만큼 딸이 자신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예진의 아버지도 의사인 걸로 보아, 처음부터 석호가 결혼을 승낙받는 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석호는 예진 몰래 투자한 속초 리조트에 사기를 당한다. 정신과 의사인 예진은 성형을 정신적 문제라고 인식하고, 성형외과 의사인 석호는 정신과 의사를 꿀 빤다고 여긴다. 하지만 예진은 가슴 성형수술을 예약했고, 석호는 정신과 치료 6개월차다.
한국 영화, 아니 한국 가정의 클리셰들을 몽땅 모아둔 것 같은 태수-수현 부부를 들여다 보자.
고시 뒷바라지 해서 변호사 만들어 놓았더니 이제는 식모 취급하는, 보통 성격 아닌 어머니를 모시고 살지만 "우리 엄마 그런 사람 아니야!"를 외치는, 아내 모르게 다른 여자와 야한 사진을 나누는 태수. 친구 아내의 옷차림을 보고 "너무 꽉 끼는 거 아니야?"라며 평가질까지.
엄마로, 아내로, 며느리로 살면서 자존감이란 자존감은 뉘집 개나 준 듯한 수현.
문학반 수업을 들으며 살아있음을 느낀다는 레파토리는 제법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문학반 다니는 사람에게 예진을 험담하는 것도 낮은 자존감에서 온다. 자기 자신이 없으면 남이 기준이 되니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음주운전 후 수현 대신 태수가 자수을 하면서 죄책감까지 가중된다. 죄책감과 자존감은 디커플링.
거기다 슬쩍슬쩍 몰래 술도 마신다. 알콜중독과 자존감은 커플링.
준모-세경 부부를 보자. 준모는 부잣집에 맨몸으로 장가간 남자의 전형이다. 사업병에 걸려 온갖 사업을 벌이고, 망하고, 그리고 또 하고.
뒤에서 호박씨 까면서 앞에서는 천하에 둘도 없는 사랑꾼인 척. 사업장의 어린 알바생과 바람피우는 것까지 완벽하다.
그러면서도 친구들 사이에서는 늘 무시받는, 사업이라도 해서 '사장님' 소리를 들어야만 자존감을 올릴 수 있는 한없이 약한 존재.
한편 세경은 여기서 가장 평범하고 상식적인 사람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세경은 말한다. "결혼할 생각 없었어요. 저 인간이 하자고 하자고 해서"
마지막으로 애인 '민서'를 데리고 오겠다고 했지만 몸이 아프다며 혼자 온 영배.
다니던 학교도 그만두고(사싱 잘리고), 친구들끼리의 골프 약속에도 소외된다. 40년지기 친구에게도 사실 애인은 민서가 아니라 '민수'임을 비밀에 부친다.
게임은 점점 과열되고, 그만 두자고 하는 사람과 한번 폭로되면 '나만 당할 수 없다'는 심정으로 불난 곳에 기름을 붓는다.
서로를 속이고, 속였다는 것이 발각되는 걸 관음하는 것이 관객의 역할이다.
게임-스릴로 흥분되는 순간은 잠깐이다. 그 이후는 타인의 사생활을 들여다 보는 관음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스마트폰은 그 자체로 메타포다. 마치 타인의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화려한 생활을 관음하며 그 뒤에 어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불행이 있을 것이라 상상하는 것, 상상이 현실이 되는 순간만을 기다리는 것.
그리고 그 순간이 왔을 때, 완전무결하지 않은 타인에 대한 비난은 너무도 쉽다.
그렇기에 기존 포스터에서 차용하지 않는 방식인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기'는 마치 "너, 나 보고 있었지?"라고 말하는 듯 서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훔쳐보고 있는 걸 다 안다는 듯 여유로운 미소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동성애자.
자존감이 낮은 이가 SNS에서 화려한 삶을 거짓으로 꾸미듯이ㅡ물론 자존감도 높고 화려한 사람도 있겠다만은ㅡ세경을 제외한 모든 이들은 친구들에게도 자신의 본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
사회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영배와 보통 수준의 자존감을 가진 세경을 제외하고, 나머지 인물들은 결핍 그 자체다.
인정받고 싶지만 능력이 없는 준모, 책임감 없지만 책임감 있는 척 해야 하는 태수, 아내에게 금전적으로 달리는 석호, 자신을 잃어버린 수현, 성(性)적으로 억압된 예진.
예진의 억압된 성은 희한한 방향으로 가지를 친다. 첫째가 딸 소영에게 보이는 반응이 그렇다. 스무 살이 넘은 딸의 연애사를 일일이 간섭하며, 딸의 가방을 뒤져 기어이 콘돔을 찾아낸다.
딸이 만나는 남자를 격렬하게 거부하며 딸에게 순결을 강요한다. 둘째로는 유방 성형외과 의사인 남편으로 말미암은 신체 컴플렉스다.
성형은 정신적 문제임을 인지하지만, 결국 가슴 수술을 감행하려 한다. 그것이 자신의 여성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앞의 두 가지 요소는 자신의 삶과 몸을 완전히 부정한다.
마지막으로 준모와의 관계다.
<인셉션>에서처럼 세경이 빼 놓은 반지가 테이블 위에서 멈추지 않고 돌아간다. 그 순간 관객들은 이 모든 일이 가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실제로 영화 끄트머리에서는 게임을 아예 하지 않았다는 설정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돌아가는 차 안, 준모는 예진에게 온 문자를 확인한다. '자기랑 있고 싶었어'
하필이면 준모일까. 남편은 의사고 태수는 변호사, 준모는 사업병 걸린 백수다. 그럼에도 준모를 선택한 것은, 억압된 욕망의 육화 그 자체가 아닐까.
계산 없이 몸만 생각할 수 있는 상대.
마지막까지 관객의 관음 욕망을 채워준다. 이로서 가상이라고 여겨졌던 1시간 50분을 진짠가, 가짠가 헷갈리게 한다. 하지만 알고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진짜라는 것을. 그리고 진짜라고 믿고 싶은 건 아닐까.
태수의 말처럼 누구나 '공적인 삶, 개인의 삶, 비밀의 삶이라는 세 가지 삶'을 살고 있음이 영화의 주제일 수도 있겠다.
그리하여 옆에 있는 타인들을 속이며 '완벽한 타인'들로부터 결핍을 채워가는, 그것은 너무도 익숙한 풍경이다.
영랑호에서의 불장난으로 시작된 이 영화는 한강이 보이는 서울 고급 아파트에서의 불장난으로, 친구 아내와의 불장난으로ㅡ불장난이라 순화하고 싶지는 않지만ㅡ 끝난다.
어쩌면 '완벽한 타인'이라는 제목은 40년지기 친구도, 가족도 아닌 자신의 결핍을 채워주는 그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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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첫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100만 돌파!!
국내 박스오피스 ✍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가 2주 연속 주말 박스오피스 정상에 올랐습니다. 누적 관객 수 100만 명을 넘어서며 흥행세를 이어가고 있는데요. 한편 강동원 주연의 <설계자>는 29일 1위에 올라섰으나 주말 박스오피스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가 정상을 탈환하며 2위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죽었다>는 100만 돌파를 목전에 두고 3위를 기록했습니다.
북미 박스오피스 ✍
<가필드 더 무비>가 흥행 신드롬을 일으키며 1위에 올랐습니다. 존 크래 신스키 감독의 애니메이션 <이프>도 덩달아 2위에 올랐는데요. 한편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가 주말 관객 수가 대폭 감소하며 3위로 내려앉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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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슐렝 3스타의 요리에, 지극한 사랑에 홀린다
- 8★/10★
근래 개봉한 영화 중 이렇게 긴 요리, 식사 시퀀스가 있었나 싶다. 길어질수록 황홀했다. 화려함과 정갈함을 동시에 갖춘 요리 과정은 눈길을 사로잡고, 그 음식의 맛과 향을 상상하면서는 충족될 수 없는 미각, 후각적 자극에 기분 좋은 답답함이 샘솟았다. 편안하면서도 예의를 갖춘 만찬장, 요리하는 사람을 소외시키지 않는 시식 장면은 예민한 관객을 안심시키기에 충분했다.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이 두 사람의 사랑을 타고 흐른다는 점이 영화를 아름답게 만든다.
도댕과 외제니는 프랑스의 한 시골 마을에서 20년간 살며 함께 요리해왔다. 두 사람의 실력과 호흡은 이미 유명하다. 마을을 지나는 유라시아 왕자가 도댕을 초대해 자기 셰프를 시켜 과시적 요리를 뽐낼 정도다. 도댕에게 자신 역시 그만큼이나 훌륭한 셰프가 있다는 점을 으스대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유라시아 왕자와 달리, 도댕과 외제니의 음식은 누군가를 기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순수한 미각의 절정, 최고의 요리를 만드는 자기 자신과 상대에 대한 경의, 요리가 만들어내는 행복, 요리에 담긴 이야기와 의미가 더 중요하다.
도댕과 외제니의 주방에서 견습생으로 일하는 폴린은 두 사람의 케이크를 먹고 눈물을 흘릴 뻔한다. 새롭고 황홀한 맛이었을 뿐더러 타고난 미각을 가진 자신에 대한 기대와 애정이 듬뿍 담긴 두 사람의 진심을 입안으로 들어온 음식을 통해 감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두 사람이 실력이 어떠한지, 어떤 태도와 마음가짐으로 요리하는지를 온전히 설명하기는 '불가능'하다. 요리 장면과 식사 장면을 직접 봐야만 한다. 계속 요리하고 먹는 영화의 전개에 생경함을 느끼기도 전에 빨려들고 몰입하게 된다. 자신은 요리로 대화한다는 외제니의 말이 허튼 소리가 아니라는 점을 케이크를 먹고 눈물 흘릴 뻔한 폴린만큼이나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영화가 펼쳐내는 이야기는 이들 요리가 품은 맛과 감정을 더한층 증폭한다. 당연하게도, 도댕은 외제니를 사랑한다. 그런 호흡으로 20년간 함께 요리해왔는데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두 사람은 종종 육체적 관계를 맺기도 했다. 그러나 외제니는 오랫동안 도댕의 청혼을 거절했다. ‘부부’라는 관계가 두 사람이 오랜 기간 함께하는 과정에서 이제는 아주 조금만 남은 자신만의 영역을 지키는 벽을 허무는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 외제니를 존중하면서도 끊임없이 갈망하는 도댕의 눈빛은 간절하고 애달프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며, 외제니는 마침내 도댕의 청혼을 수락한다. 그러나 두 사람 사랑의 결실이 꽃피운 가을은 오래 가지 못한다. 몸이 아픈 외제니가 쓰러지고, 이내 생을 마감한다. 도댕은 깊은 시름에 잠긴다. 요리도 그만둔다. 외제니가 없는 주방에서 다시 요리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외제니는 이 모든 일을 예감했던 것일까. 오랜 상실 끝에 도댕은 또 다른 실력 있는 요리사를 만난다. 심지어 조금은 흥분한 듯 보인다. 외제니를 상실한 이후 처음으로 의욕적인 모습을 보인다. 외제니가 도댕의 청혼을 오랫동안 거절한 이유도 아마 이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그녀는 자신이 도댕의 ‘아내’가 아닌 ‘요리사’일 때 도댕이 더 행복하리라는 점을 알았다. 아내인 동시에 요리사일 때보다, 요리사이기만 할 때 도댕이 느낄 상실의 크기가 더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외제니의 오랜 거절은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선택인 동시에 사랑하는 도댕을 위한 결정이기도 했다. 그녀가 마침내 도댕의 청혼을 수락한 것은 도댕이 자기 없이도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도댕은 외제니를 애타게 원했지만, 외제니 역시 자신이 도댕만큼이나 상대를 사랑하고 존중하고 있음을 도댕의 사랑을 거절함으로써 역설적으로 표현했다. 도댕이 직설적이고 솔직했다면, 외제니는 완숙하고 사려 깊었다.
그러니까 〈프렌치 수프〉는 오랫동안 서로를 존중하며 사랑한 두 사람, 즉 저돌적인 남자와 속 깊은 여자가 자신의 방식으로 상대를 보듬고 아끼는 지극한 사랑 이야기다(외제니의 방식이 특히 인상 깊은 이유는 그녀의 방식이 훨씬 더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미슐랭 3스타 셰프가 요리감독을 맡았다는 요리에 감각이 홀리고,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고 배려하는 마음에 또 한 번 홀린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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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파이더맨:노 웨이 홈>거미 소년이 살아갈 익명의 삶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미스테리오’의 계략으로 인해 세상에 정체가 탄로 난 스파이더맨 ‘피터 파커(톰 홀랜드)’는 영웅으로 포장된 미스테리오를 죽인 살인자로 몰리면서 갑작스레 평범한 고등학생으로서의 일상을 잃어버린다. 문제는 본인뿐만 스파이더맨의 조력자로 알려진 여자친구 'MJ(젠데이아)'와 절친 '네드(제이콥 배덜런)'의 대학 진학까지 막힌 것. 이에 피터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닥터 스트레인지(베네딕트 컴버배치)’를 찾아가 피터 파커가 스파이더맨임을 온 세상이 잊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실패한 닥터의 마법 때문에 뜻하지 않게 열린 멀티버스에서 피터가 스파이더맨이라는 사실을 아는 빌런들이 속속들이 등장하고, 불시착한 빌런의 처리를 두고 피터는 닥터 스트레인지와 충돌하면서 더 큰 위기 속으로 빠져든다.
MCU로 돌아온 스파이더맨의 세 번째 이야기인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은 여러모로 어깨가 무거운 작품이었다. 우선 닥터 스트레인지를 등장시켜 향후 MCU가 펼칠 멀티버스의 맛을 보여주고, 다음 영화인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에 대한 기대감을 키워야 했다. 그린 고블린, 일렉트로, 닥터 옥토퍼스와 같은 과거의 빌런들과 추억이 된 두 스파이더맨의 복귀를 통해서는 지금까지 제작된 스파이더맨 프랜차이즈에 대한 헌사도 바쳐야 했다. 또 이른바 '홈커밍' 트릴로지의 대미를 장식할 필요도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이 이 수많은 과제를 한 가지 주제 안에서 엮어낸다는 점이다.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는 바로 익명성이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속 피터의 이야기를 간략히 요약하면 스파이더맨이 피터 파커라는 사실을 잊게 만들어 익명을 되찾고자 하는 사투라고 할 수 있다. 당장 피터의 얼굴이 뉴욕의 모든 전광판에 등장하는 오프닝은 영화 속 모든 사건의 직간접적 발단으로 작동한다. 실제로 익명성의 상실은 피터와 주변 사람들의 실제 삶까지 망가뜨리며, 이에 피터는 자신은 물론 친구들까지 대학 진학이 어려워진 상황을 타개할 방법으로 자신의 익명성을 회복하고자 한다. 닥터 스트레인지의 주문이 실패로 돌아간 후 나타난 빌런들이 공통적으로 스파이더맨이 피터 파커라는 사실을 안다는 점, 또 빌런들을 막을 수 있는 궁극적인 해결책이 더 강력한 익명성의 획득이라는 사실도 이번 스파이더맨 영화가 말하려는 바를 잘 보여준다.
이때 익명성이라는 특성이 현대 사회의 삶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는 점에서 작중 피터의 모습은 마치 현대인의 잔혹동화 같기도 하다. 피터에게 익명성이 뉴욕의 빌딩 사이를 웹(web) 스윙하며 스파이더맨으로서 살아갈 기회이자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패였듯이, 현대인에게도 익명성은 웹(web)을 통해 연결된 인터넷 공간을 열어주고 그 안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방어수단이 된다는 공통점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보호막을 잃은 피터가 무차별적인 비난의 표적이 된 것은 이른바 현실 속 '신상 털기'의 히어로 영화적 묘사나 다름없고, 이는 21세기를 살아가는 누구에게나 악몽과도 같은 상황에 대한 간접 경험이라 할 수 있다. 피터가 학교 복도나 집 앞에서 수많은 카메라와 시선 앞에 서야만 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렇게 익명성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노 웨이 홈>을 본다면 영화의 주요 소재인 멀티버스와 빌런들 및 또 다른 스파이더맨의 등장도 팬서비스 이상의 행간을 지님을 알 수 있다. 영화가 익명성의 야누스적 얼굴에 대한 경계심과 책임질 줄 아는 개인에 대한 희망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익명성은 본질적으로 무한한 해방감과 동시에 그 못지않은 비도덕성을 내재한다. 그러다 보니 수많은 SNS와 커뮤니티, 게임에 존재하는 수많은 익명의 '나'는 자유롭게 행동하는 만큼 수많은 갈등을 빚을 수 있으며, 그 갈등과 충돌은 때때로 인터넷 공간 밖의 현실 공간에 존재하는 '나'에게까지 실질적인 피해를 안기기도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MCU의 피터는 현실의 '나'이고, 스파이더맨이 존재하는 수많은 멀티버스는 익명의 '내'가 살아가는 수많은 공간이며, 피터가 스파이더맨임을 알고 찾아온 빌런들은 익명의 '내'가 만들어낸 충돌에 대한 메타포라고 할 수 있다. 닥터 스트레인지의 마법이라는 쉽고 매끄러운 해결방법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것도 피터의 고민과 고난이 현실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에 결코 동화적으로 해결될 수 없음을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즉, 피터 파커로서의 삶과 스파이더맨으로서의 삶을 모두 살려는 게 문제라는 닥터 스트레인지의 말은 피터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이름들 간에 균형점을 찾지 못해 현실의 삶과 일상이 무너지는 모든 이들을 향한 지적인 셈이다.
또한 영화는 빌런들의 대척점에 서 있는 존재인 스파이더맨을 소환해 해결방안에 대한 힌트를 보여준다. 서로 다르지만 또 같은 존재로서 동질감을 느끼는 스파이더맨들은 공통의 경험을 토대로 위로와 격려, 그리고 조언을 건네며 트라우마의 극복을 돕는다. 이때 멀티버스를 넘나드는 스파이더맨 간의 연대는 인터넷 공간 속을 부유하던 서로 다른 '나', 수많은 부캐들과 본캐 사이의 만남과 일치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삶의 균형을 찾지 못한 뼈아픈 대가를 치러야 했던 피터가 또 다른 피터들을 만나 방황을 끝낼 힘을 얻었듯이, 현실의 '나' 역시 익명으로서의 삶을 포기할 수 없는 세상이라면 내적으로 단단해져서 삶의 주도권을 쥘 수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삶의 주도권이 곧 책임감을 뜻한다는 점에서 '큰 힘에 따르는 큰 책임을 깨닫는' 스파이더맨의 성장 서사 역시 새로운 보편성을 갖는다. 본래 고등학생에 불과한 피터 파커가 거미에게 물려 엄청난 근력과 특수한 능력을 지닌 영웅이 되는 것은 청소년기에 누구나 겪어야 하는 신체적 변화를 상징한다. 또 그러한 변화 속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가고, 그 과정에서 아픔과 슬픔을 겪어야 하는 스파이더맨의 모습은 청소년에서 성인이 되어가는 우리 모두의 고단함이 함축되어 있다. 즉,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라는 이 유명한 대사는 슈퍼히어로가 되는 것 이전에 온전한 성인이자 개인이라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덕목을 정의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큰 힘과 큰 책임의 범주를 익명성이라는 맥락 안에서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은 한 명의 성인으로 성장하기 위한 보다 현대적인 조건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그 결과 원래도 성장 영화였던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변화한 시대에 발맞추는 새로운 성장 서사로 탈바꿈한다.
이에 더해 익명성에 따르는 책임감이라는 메시지는 빌런에게도 새로운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스파이더맨의 도덕성과 선량함이 영화 내내 강조되는 이유와도 직결된다. 작중 팟캐스트 진행자 혹은 유튜버처럼 묘사된 JJJ의 방향 설정에 따라 많은 이들이 대중이라는 익명에 기대어 스파이더맨을 비난하듯이, 현실에서도 가짜 뉴스 유포와 사이버불링은 더욱더 만연하고 있다. 영화는 이런 상황을 예방하고 고쳐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결국 익명으로 활동하는 개개인의 도덕성과 책임감에서 찾고자 한다. 그래서 개개인의 선량함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는 행간을 담아낸 "누군가를 돕는 것은, 모두를 돕는 것이다(When you help someone, You help everyone)"라는 대사는 피터가 진정으로 친절한 이웃이자 익명의 히어로인 스파이더맨으로서 다시금 활동하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또한 MCU의 스파이더맨이 이전의 시리즈들과 달리 스파이더맨답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아온 것을 고려할 때, 익명성에 중점을 둔 이야기 전개는 '홈커밍' 트릴로지를 영리하게 마무리하는 최선의 선택처럼 보인다. 사실 토니 스타크가 선물한 최첨단 나노 슈트와 화려한 어벤져스 인맥을 가진 MCU의 스파이더맨에게서는 가난하지만 친절한 이웃이라는 소시민적 이미지를 찾기 어려웠다. 또 마블의 유일한 고등학생 히어로라는 사실을 고려하더라도, 지난 두 편에서 너무나도 손쉽게 사고를 저질러 버리는 피터는 스스로 책임을 질 줄 아는 영웅이라고 하기 어려웠다. 철저히 정체를 감추는 슈퍼히어로라는 정체성도 스스럼없이 통성명하는 스파이더맨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MCU의 스파이더맨은 스파이더맨보다도 아이언맨의 후계자라는 이미지가 더 확고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가운데 마블은 스파이더맨의 본래 특징이기도 한 익명성에 스포트라이트를 맞춰서 두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주제를 계승함과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을 덧붙이는 데 성공했다. 일관되면서도 현대적인 주제와 메시지를 통해 MCU의 일원으로서, 동시에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일원으로서 어엿한 영웅의 탄생을 그려낸 것이다. 그렇기에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은 재미와 감동 사이로 쓸쓸함과 짠함이 흘러나오는 복합적인 매력이 넘치는 작품으로 관객들을 만날 수 있었다.
물론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에도 인상적인 스토리텔링과는 별개로 몇몇 단점이 존재한다. 일단 수많은 캐릭터의 과거가 철저히 대사로만 언급되다 보니 이전에 나온 총 일곱 편의 스파이더맨 영화를 보지 않았거나 그 기억이 희미한 경우 영화의 전개를 따라가기 어렵다는 본질적인 한계가 존재한다. 또한 <어벤져스: 엔드게임>처럼 닥터 스트레인지의 마법이 실패하는 장면 등 영화의 수월한 전개를 위해 개연성을 포기한 몇몇 대목이 눈에 띈다.
무엇보다도 블록버스터 영화로서의 볼거리가 기대에 못 미치는 인상을 남긴다. 비록 2억 달러가 채 되지 않는 제작비가 블록버스터 영화치고 적은 수준이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어설픈 CG 장면이 몰입을 저해하는 경우가 종종 보이기 때문이다. 닥터 스트레인지의 마법으로 인해 뉴욕의 공간이 뒤틀리는 장면은 <닥터 스트레인지> 1편 속 유사한 장면과 비교했을 때 부자연스러움을 숨길 수 없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자유의 여신상에서 펼쳐진 전투도 그 배경이 지나치게 어두워서 어떤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것인지를 알아보기 어렵다는 문제를 노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에게 기념비적인 작품이라는 평가가 주어지는 것은 결코 과하지 않아 보인다. 이는 프랜차이즈의 일원으로서 서로 다른 제작사의 시리즈를 한 데 묶고, MCU의 일원으로서 멀티버스라는 세계관의 확장에도 한 몫하며, 홈커밍 트릴로지를 마무리 짓는 최종장으로서 그간의 비판점을 해결하는 어려운 미션을 준수하게 엮어낸 것만으로도 정당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현대적이면서도 일관된 익명성이라는 주제와 메시지를 통해 스파이더맨의 성장을 깔끔하게 마무리 지은 만큼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은 독립된 작품으로서도 호평받아 마땅한 슈퍼히어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익명이라는 거미줄을 잡고 마침내 영웅이 된 거미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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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속도로로 무작정 달리는 것이 능사가 아니듯
잔인한 세상
고개를 숙인다. 어이구. 감사합니다. 오늘도 가장 기우는 바쁘다. 열일중인 기우. 가장의 책임감은 그런 것이다. 오늘도 사회생활에 여념이 없다. 그런데 이 사회생활은 다른 것과는 좀 다르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제가 장모님 댁에 가는 길인데, 지갑을 잃어버려서요. 혹시 2만 원만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집에 도착하면 바로 이체해 드리겠습니다." 돈을 빌리는 기우. 아니, 사실 기우는 돈을 구걸하고 있다. 지나가는 행인을 유심히 관찰해서 선해 보이는 사람에게 접근하는 것이다. "카카오페이 쓰시죠?"라는 질문은 휴대전화가 안 된다는 말로 넘어간다. 또 "고향이 어디예요?"라고 묻는 질문에는 "마산"이라고 얼렁뚱땅 대답한다. 사기를 칠 거면 똑똑하게 쳐야 한다는 말이 저절로 생각난다. 하지만 기우와 지숙 가족에게 그런 건 없다. 생존은 당장 내일 걸려있는 문제기 때문에. 집도 없고 휴대전화도 없다. 옷은 당연히 없다. 의류수거함에서 아무거나 주워 입을 뿐이다. 당장 받은 2만 원으로 사는 건 컵라면이다. 짜파게티, 신라면, 뭐 그런 것들로 일상을 보내는 기우네 가족. 아내 지숙은 위태로운 일상 속에서 희망 없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눈앞에 있었는데. 영선은 꿈속에서 깨어난 것 같다. "아들! 그 옷 별로야. 엄마가 셔츠 사놨으니까 그거 입고 가." "아냐. 싫어. 나 이거 입고 갈래" "야! 어디가!" 영선은 아들이 떠난 집에서 혼자 앉아 있었다. 분명히 다시 올 것이라고 믿었다. 없구나. 아니었구나.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사실 해주지 못했던 것이 해준 것보다 훨씬 더 많았다. 그렇게 막연하게 기다리고 있으면 돌아올 거라고 믿었다. 소리 없이 우는 영선. 아들을 기억할 수 있는 돌산에 올라 먼 곳에 시선을 옮긴다. 눈을 감는다. 떠오르는 건 일 생각뿐이다. 가구점으로 출근하는 영선. 영선은 중고 가구점을 운영하고 있는 CEO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다른 지역으로 원정을 나서는 영선. 한 휴게소에 도착했다. 어딘가에 앉아서 음식을 주문한다. 갑자기 어느 곳에서 따가운 눈빛이 느껴진다. 뭐지? 음식점 출구 유리문 앞에서 아이들이 눈 빠져라 영선을 구경하고 있었다. 뭐지? 아이들의 눈빛에 마음이 가는 영선. 자리를 정리하고 다시 차 문 앞으로 간다. 어떤 남자가 말을 걸었다. 머리는 길었고 수염도 제멋대로다. "선생님! 제가 사실 지갑을 잃어버려서요. 2만 원만 빌려주시면 집 간 다음 바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남자의 곁에는 아까 봤던 아이들이 있다. "아빠! 우리 배고파. 아무것도 못 먹었잖아." 아. 쟤들 아무것도 못 먹었구나. 시선이 가는 영선. 남자의 손에 2만 원을 쥐어주고 5만 원까지 줬다. 계좌번호 필요 없어요. 애들 맛있는 거 먹여요. 그렇게 잊고 집으로 가는 차를 탄다. 다음번에 만날 거라고 생각 못 했다. 마음에 담아눴던 응어리를 남자에게 푼 것뿐이니까. 그리고 머지않은 미래에 기우와 지숙 가족, 영선은 다시 만난다. 다시 고개를 드는 희망. 채워지지 않던 마음속 구멍에 조금이라도 닿을 것 같은 인연이다. 이 가족(들)의 행방은 어떻게 될까?
좋은 스타트
일단 영화 초반부가 훌륭했다. 기우가 지나가는 행인 아무나 붙잡는다. 근데 머리카락이 아주 길어서 눈앞을 찌른다. 또 의상도 여름에 입는 린넨 셋업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행인의 리액션을 카메라가 보여준다. '이거 뭐야'하는 눈빛. '빨리 드리고 오자'하는 말투까지. 이 가족의 과거 행적이 영화 후반부에 제시되기는 한다. 그런데 영화는 구구절절이 설명하지 않는다. '왜 알바를 안 구하고 저러고 있지?' '어떤 사연이 있어서 저럴까?'의 질문을 굳이 하지 않아도 깔끔한 설정으로 모든 이해를 구한다. 감독의 캐릭터 이해도가 빛난 부분이다.
또 라미란 배우가 맡은 영선 캐릭터도 적지 않은 분량을 줘야 하는 캐릭터다. 초중반부를 넘어서 극을 이끌어야 하는 인물이니 만큼 이 사람의 동기부여를 보여줘야 한다. 잠깐잠깐의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이 인물의 뒷배경을 보여주는 영화. 이 사람의 회한만큼이나 중요한 건 현재의 부부관계가 어떤가?라는 질문이다. 뻔해 보이지만 사실감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영화의 개성을 부여한다. 이를 위해 라미란 배우가 연기를 엄-청 잘했다. 어떤 산에서 아들을 그리워하며 슬퍼하는 장면이 있다. 여기서 라미란 배우는 스크린관을 장악하며 왜 이 사람의 후의 행보가 합리적일 수밖에 없는가를 보여준다. 이 인물 영선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어두운 인물이다. 그동안의 세월 동안 아들을 잃었다는 미안함과 미련을 영화로 보여줄 수는 없을 것이다. 당연하지. 그러면 러닝타임이 한 6개월쯤 될 것이다. 감정적인 깊이가 느껴지는 건 전적으로 이 모습을 보여주는 배우가 얼마나 이 감정을 드러낼 것인가? 에 달려 있을 것이다. 이 산에서 슬퍼하는 장면, 살짝 어두워 보이는 내면, 중후반부 특정 인물과의 하이라이트 신까지 라미란 배우는 영화의 설득력이라는 굉장히 중요한 과제를 아주 잘 소화했다. 구체적으로 쓰자면, 영화 전체적으로 '굳이..?' 싶은 인물의 행보가 반복된다. 이 부분에 균열이 가면 영화의 전체적인 몰입감이 전부 떨어질 것이다. 이를 먼길로 안 돌아도 각본의 흐름과 연기로 구현한 감독의 똑똑함이 돋보였다.
이 사람이 이 정도였나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 두 배우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첫 번째는 정일우 배우다. 내 기억 속 정일우 배우는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연기하던 모습이 가장 마지막이다. 이 분이 드라마에서는 굵직한 필모그래피를 유지하며 경력을 이어간 것 같다. 솔직히 윤시윤 배우와 얼굴 헷갈렸다. 그 말은 즉슨 이 배우 얼굴을 오랜만에 봤다는 뜻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느꼈던 점은 앞으로 정일우 배우를 선명하게 기억할 것 같다는 것이다. 정일우 배우는 많은 분들이 좋아할 것 같은 연기를 보여줬다. 이 캐릭터의 특징은 아동학대를 가하는 사기범죄자라는 점과 극에서 보여주는 굉장히 큰 단점이다. 전자의 경우를 생각하면, 이 인물의 사기 행적이 절대 똑똑해서 벌이는 행동이 아니라는 것이 중요한 특징이다. 그러려면 뭔가 엉성한 행동이나 표정이 돋보여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정일우 배우는 말투 하나하나 나사 빠진 느낌을 보여준다. 그리고 후반부 이 인물의 행보는 이야기 전개에서 핵심 키포인트가 된다. 화려한 연기를 보여주며 이상한 후반부 전개에 기름을 붓는 좋은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뭔가 마음에 안 들었던 이야기 전개지만 이 배우의 연기 하나만으로도 조조할인 티켓 값이 충분했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 김슬기 배우다. 초반부. 이 배우는 말을 그렇게 많이 하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가장 기우가 이끄는 가족이다. 지숙은 수동적인 입장에서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다. 게다가 가장 기우는 '어떤 특징'으로 인해 휘청거린다. 남편이 막 나가는 사기꾼이 되고 아이들이 끼니로 라면을 때워도 싫은 말 하나 안 하는 지숙. 이 지숙의 유약함은 초반부에 천천히 보여주다가 중반부가 되고 나서 특정 계기를 통해 변한다. 이 이후부터 세상의 따뜻한 손길에 감회 되며 안에 품고 있었던 단단한 내면을 세상에게 보여준다. 전반부의 연기를 후반부가 반박하는 듯한 퍼포먼스가 필요했다. 이 김슬기 배우는 중반부 이후부터, 소심하면서도 선한 내면으로 깊은 인간이자 어머니로서의 힘을 보여준다. 영화에서 지숙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중요성은 영화의 메시지와도 관련이 있다. 여기서 인물이 관객과 극 중 다른 캐릭터들을 설득하지 못하면 영화의 몰입감이 떨어질 텐데, 이 배우는 모든 감정적인 비틀기를 설명하는 좋은 연기를 보여준다. 글쓴이는 하이라이트 신에서 소름 돋았다.
넓고 탁 트인 감옥
영화의 중요한 소재 중 하나인 고속도로는 영화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공간이다. 고속도로는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곳이다. 당연히 자유롭다. 그런데 공간이 열려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자유를 느낄 리는 없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기우 가족은 이 범주에 속한다. 사실 이 고속도로 휴게소가 마음에 안 들면 딴 데 가면 그만이다. 차비가 없어도 두 다리가 있으니 걸어갈 수 있다. 그렇게 위치를 자주 바꿀 수 있는 인물들이지만 역설적으로 이 세팅은 인물들에게 갑갑함을 강조한다. '고속도로'에서만 먹고 잘 수 있다는 것이 인물이 처한 입장을 부각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물 내면에 속속들이 박혀있는 심리 묘사가 더 두드러지는 느낌이 든다. 예를 들어 영선이 뭔가를 먹는데 기우의 아이들이 눈이 빠질 것 같이 쳐다본다. 이런 묘사는 이 인물들이 자유롭기 때문에 더 답답한 게 두드러지는 설정이다. 뿐만 아니라 고속도로 휴게실 화장실에서 머리를 감는 장면이 있다. 또 어떤 장면에는 드넓은 주차장에 텐트 하나 덩그러니 있다. 이런 공간 세팅이 가장 강화되는 부분은 기우 가족이 휴게실 화장실에서 무언가를 하는 장면이다. 이런 고속도로 휴게실이란 설정은 구걸이라는 행동을 묘사하는 선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내면까지 묘사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런 공간의 대비는 영선의 가구점으로 치환된다. 영선의 가구점은 당연히 고속도로 휴게실보다 좁다. 또 한 장소에 중고 가구들도 다닥다닥 붙어있으니 뭔가 촘촘해 보인다. 또한 영선의 가구점의 어떤 공간에서 인물들이 굉장히 중요한 행동을 한다. 이 방도 그렇게 넓어 보이지 않는 곳이다. 그럼 당연히 답답해진다. 그러나 영화에서 고속도로 휴게실이 인물의 처지를 옥죄어오던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이는 오히려 캐릭터들의 입장을 자유롭게 만들어주는 소재가 된다. 사람들이 어떤 공간에서 무얼 하는지를 보면 인간의 본능적인 부분과도 닿아있다. 이런 좁고 넓음의 아이러니는 영화의 주제적인 측면과도 닿아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혈연만큼이나 정서적인 유대감이 우리가 살면서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두 가족의 대비되는 상황이나 이미지가 계속 반복되는데, 영화에서 이를 빼먹지 않고 본다면 쉽게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 닿지 않을까 하는 글쓴이의 생각이다.
그게 왜 거기서 나와
이렇게 좋은 점도 뚜렷한 영화지만 사실 아쉬운 부분이 더 크다. 일단 기우 캐릭터다. 이 기우 캐릭터는 특정 계기를 지점 찍고 1,2부로 나뉘었을 때, 첫 번째 장의 주인공이라고 볼 수 있다. 이 1부까지 이어지는 캐릭터 세팅은 좋았다. 겉으로 센 척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대놓고 약한 인물의 대사와 서사로 잘 넘어간다. 중반부가 된다. 이 인물은 캐릭터에게 응당 정해진 섭리를 따라가는 듯하다. 그런데 갑자기 이를 거부한다. 이 거부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방식이 아무리 영화라도 그렇지 좀 너무했다. 핍진성이라는 단어가 있다. 이런 문화예술매체에서, 아무리 가상의 세계라도 수용자가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에 대한 단어다. 이 핍진성이 아예 무너지는 정도였다. 그렇게 인물은 어떤 행동을 여러 장소에서 돌아다니면서 계속한다. 그런데 이를 제지하는 시도 자체가 없다. 영화에서 특정 집단이 무능력하게 묘사되는 건 흔한 클리셰지만 이 정도면 뻔한 정도를 넘어서 단체로 태업하나? 같은 느낌이다. 아니 그렇게 전반부에서 온갖 방식을 보여줬으면서 이런 건 그냥 넘어가면 어떡해?
이 인물의 서사가 영화의 흐름을 깨는 건 후반부에 특히 그렇다. 인물들의 사정이 변하면서 각자 입장을 보여주는 선택을 한다. 여기까지는 굉장히 합리적이다. 또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보면 '그럴 수 있겠다' 싶다. 그렇게 영화가 같은 피만큼 끈끈한 무언가가 있었으면 좋았을 걸 괜히 사족을 붙인다. 영화 형식에서 가장 하이라이트라고 볼 수 있는 신이 있다. 이 신에서 한 인물이 벌이는 모든 행동이 다 이상하다. 그냥 단지 그 이미지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영화의 모든 이야기를 깔아뭉갠 것이다. 영화 사건의 인과관계도 어긋난다. 동선도 이상하다. 앞에서 썼던 핍진성의 측면에서도 아예 어긋난다. 영화 전개뿐만 아니라 주제적인 측면인 '유대감'이라는 것과도 잘 안 맞는다. 영화가 우리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볼 때 여러 답이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가지각색으로 갈리는 영화의 역할이지만 분명한 것은 기우라는 캐릭터를 어떻게 설정해야 우리 사회에 더 도움이 될까?라는 부분이다. 글쓴이는 이 글을 쓰면서도 다시 생각해봤다. 이 기우 같은 사람이 우리 현대사회에 있을 때, 과연 이 영화의 방식이 합리적일까?를. 캐릭터를 가학적으로 사용한 것과는 다른 문제다. 정일우 배우의 호연으로 더 두드러지지 않았다 뿐이지 굉장히 과한 시선이 돋보였다.
가족의 의미를 되묻다
이 글을 쓰는 글쓴이나 독자분들이나 가족만큼 소중한 존재가 있을 것이다. 글쓴이도 있다. 오늘 특별한 초대장을 받은 것도 그 영향이다. 나 역시 그런 사람들에게 애정을 갈구하고, 또 그만큼 이 마음들을 베푸려고 한다. 반대 측면에서도 이를 바라볼 수 있다. 가족에게 굉장히 큰 상처를 받게 되면 혈연관계가 아니더라도 특정 인물에게 깊은 신뢰를 보내게 된다. '영원한 인간관계는 없다'라는 말은 사실 내적으로 모순을 품고 있다. 그 마저도 영원한 명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인간관계에 대해 영화는 여러 번 생각하게 만든다. 내가 가진 상처는 무엇인지. 이 상처가 나의 어떤 행동으로 이어질지. 그리고 그 상처가 좀 더 나은 내가 되어 타인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 따뜻한 손을 내민다는 것이 이 사회에 어떤 방식으로 작동할지. 약한 사람들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볼지. 영화는 두 가족을 병치시키며 관객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든다. 이에 김슬기, 라미란, 정일우, 백현진 네 배우의 뛰어난 호연으로 사람들을 몰입시킨다. 그러나 이 영화가 새롭다는 생각은 잘 들지 않았다. 올해 개봉한 <브로커>에서도 상현, 동수 캐릭터의 인과응보가 철저했고, 소영 캐릭터에 입체감을 부여하면서 유사 가족으로서의 유대감을 묘사한 것이 기억에 선명하다. 이 뿐인가? <매그놀리아>의 OST를 차용해서 용서와 회한에 대해 다룬 것도 영리한 선택지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브로커>가 과연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보여줬던 클래스를 볼 수 있는가? 에 대한 의문이 있다. 이상한 연기 디렉팅. 몇몇 지나치게 자극적인 대사들, 막내 동생은 영화에서 하는 일이 무엇인가? 까지 그가 <어느 가족>에서 우리가 봤던 인물 세팅이라고 볼 수 없는 그런 조악함이 영화에서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쓴이는 <브로커>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가학적인 캐릭터 세팅이 아니더라도 영화는 하고자 하는 말을 더 전달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후반부를 들어내도 전체적인 흐름에 어떤 지장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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