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5-02-03 11:29:42
전근대의 질곡, 그리고 근대의 ‘예수’가 된 여자
영화 〈노스페라투〉

8★/10★
전근대와 근대 사이의 질곡, 누군가는 이를 끊어내야만 한다. 1838년 독일, 엘렌은 성적 환희에 젖은 표정으로 악마와 교합한다. 이날 이후, 엘렌은 악몽을 꾸고 심신미약에 시달린다. 한편, 엘렌의 남편 토마스는 거액의 부동산 계약을 위해 타지에 있는 올록 백작에게 향한다. 토마스가 떠나자 엘렌의 불안 증세는 점차 심해진다. 의사는 혈액순환에 ‘도움’이 되도록 엘렌에게 코르셋을 입으라 권한다. 발작 증세를 억누르기 위한 결박도 권한다. ‘예민한’ 여성에 대한 근대 의학의 일반적인 처방이었다. 그러나 엘렌의 증세는 악화일로다. 의사는 고민 끝에 한때 촉망받는 의료인이었던 미치광이 연금술사에게 엘렌을 데려간다. ‘현대식’을 표방하는 의사의 자기 패배 선언이다.
한편 엘렌의 고통이 점차 가중되는 동안, 토마스 역시 올록 백작과 만나 진이 빠지는 경험을 한다. 내내 그에게 끌려다니던 토마스는 마침내 올록이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깨닫고 도망쳐 나온다. 올록은 그런 토마스를 뒤따른다. 올록은 오랫동안 때를 기다렸다. 엘렌을 비롯한 또 다른 수하가 있는 도시로 향해 자신의 절대적 영향력을 확립할 때를.

올록이 도착하자 도시에는 금세 전염병이 퍼진다. 엘렌의 증세를 처치할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한번 패러다임의 충돌이 발생한다. 누군가는 이 전염병을 악마의 영향력이라 진단하고, 누군가는 그런 해석이 말이 되지 않는다며 거부한다. 그리고 이번에도 ‘현대적’이고 ‘합리적’인 해결책은 죽을 쑨다. 전근대에 대한 근대의 연전연패다.
이제 올록이 온 도시를 지배하기 직전이다. 엘렌이 나선다. 그녀는 내내 자신이 더는 올록을 섬기지 않는다는 점을, 이제는 올록이 아닌 남편을 사랑한다는 점을 강조했으나 결국 올록의 강요에 무릎을 꿇는다. 그러나 진심은 아니다. 그녀는 자신만이 올록을 전근대의 세계로 완전히 퇴장시켜 봉인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안다. 연금술 대 의학, 악마의 재림 대 전염병. 즉 전근대와 근대의 패러다임 전쟁에서 후자는 번번이 패배했다. 전근대의 질곡으로 표상된 악에 완전히 잡아먹힐 위기다. 그러자 근대적 분류‧인식 체계에서 늘 뒤처져 있다고 모욕당해온 여성인 엘렌이 그 모욕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악마 올록과 성적으로 교합해 해가 떠오르면 올록이 돌아가야만 하는 관을 파괴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번다. ‘마녀(악마에 대한 성욕)’, ‘히스테리(불안하고 신경질적인 여성)’라는 낙인을 기꺼이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 악마에게 소멸을 선사해 근대를 온전히 열어젖히는 예수로서 희생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엘렌이 숭고한 희생을 결심하는 결정적 동기가 남편에 대한 사랑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문, 경제적 필요에 얽매이지 않는 두 개인의 사랑이야말로 가장 근대적인 현상이다.

이 영화는 최초로 뱀파이어가 등장한 동명의 영화(〈노스페라투〉(1922))를 리메이크한 것인데, 100여 년이라는 시간이 주는 무게를 넉넉히 견딜 만큼 깊이 있는 상징을 적확하게 활용한다. 클래식한 연출을 동시대적으로 갱신해 몰입감을 유지하는 솜씨도 일품이다. 숨 막히게 몰아붙이거나 옴짝달싹 못 하게 하는 공포영화와는 거리가 있지만, 은근하게 장악하여 곱씹게 한다. 이전에 〈라이트하우스〉에서 본, 로버트 에거스가 그려낸 미지의 것에 대한 열망과 공포의 메타포가 더욱 세련되게 발전해 계승되었다는 데에 대한 반가움도 크다. 가히 ‘걸작’이란 평가를 받을 만한 영화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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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놈의 아름답고도 가슴 아린 사춘기
경고: 스포일러 주의!
사실 클로즈는 두 중학생 레오와 레미가 보여주는 우정 이야기가 아니다. 이 둘이 같은 침상에서 자고, 같이 오보에를 불고. 우정인 것도 아니고, 사랑인 것도 아닌 이 오묘한 관계. 이 관계를 보면 이 모습이 뭔지 규정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 이러한 시선 자체가 이들에게 가하는 폭력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것이 진짜 의도다.
레오와 레미의 우정은 중학교에 들어오면서 왜곡되기 시작한다. 철없는 친구들은 이들이 게이가 아니냐고 놀리기 시작한다. 그와 함께 레오는 레미 외의 친구들과 노는 재미를 알게 된다. 서로가 서로만의 세상이었던 이들의 세계에는 균열이 생긴다. 그리고 이 균열은 마침내 터져서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만들어낸다. 막 중학생이 된 이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가혹하다.하지만 상처를 만든 이유가 관계면, 그것을 치유하는 요인도 관계다. 레오의 부모님과 레미의 부모님도 사이가 매우 좋다. 가끔 레오가 레미 집에서, 레미도 레오 집에서 자는 걸 즐길 정도다. 이 부모님들은 비극이 터질 때 적극적으로 이들을 상처에서 보호해주겠다 자청한다. 아무런 조건 없이. 중학교의 사춘기 아이들은 철없이 이들을 게이라고 규정했음에도 말이다.
그러한 관계가 클로즈가 진정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레오와 레미의 관계를 훼손시키는 환경, 그리고 그럼에도 이들을 돌봐주는 환경. 다만 영화는 이 2개를 극단적으로 대비시킬 생각이 없는 것 같다. 학교의 모습이든 부모님의 모습이든 순수하고 아름답게 연출된다. 다만 이런 연출이 아이들의 상처를 더 깊게 만드는 게 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과 비슷하다.
그들의 순수함에 어떤 잣대도 들이대지 말자. 그 대신 그 순수한 마음이 겪어야 했을 상실과 회복에 온전히 공감해주는 게 클로즈를 볼 때 요구되는 것들이 아닐까 싶다. 윤리적 판단을 다 떠나서 이처럼 아이들의 감정을 순수하게 그려내는 어려운 과제들을 클로즈는 해냈다. 부디 어른들은 다 알 수 없는 아이들만의 가슴 아린 이야기를 영화를 통해 체험해보길 바란다.
(위 글은 씨네랩 시사회 초청 뒤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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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꺼풀
눈꺼풀
-희생자를 위한 진혼곡
바닷가 자갈 틈에서, 산속 개울 아래서 크고 작은 미륵불이 보이는 섬, 노인은 이 섬을 찾는 사람에게 떡을 만들어 먹인다. 멀고 먼 길을 떠나는 여행자들은 이 섬을 찾아와 노인이 만들어준 떡을 먹으면 그가 떠나왔던 곳에서의 모든 기억이 사라지고, 그가 가야할 길만 기억하게 된다.
노인은 라디오로 세상 소식을 듣고, 떡을 만들어 달라는 전화를 받으면 절구에 쌀을 빻고, 우물에서 물을 긷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 떡을 찐다. 그렇게 하얀 백설기가 되면, 섬을 찾아온 사람은 떡을 먹고 사라진다.
어느 날, 라디오에서 세월호가 침몰했다는 소식이 들리고, 그 배에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던 학생들이 많고, 이 학생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는 방송 보도가 들린다. 그리고 바다에서 섬으로 쥐 한 마리가 헤엄쳐 오고, 그 쥐는 노인의 집 천정에서 부스럭거리며 노인의 잠을 방해한다. 노인은 쥐를 잡으려 나서고, 절구공이로 절구 위에 있던 쥐를 내리치지만 절구공이만 부러지고, 쥐는 다시 도망치다 섬에서 유일한 우물에 빠진다.
섬에 학생과 선생님이 도착하고, 노인은 어린 학생을 보더니 '어린 사람이 왜 이 섬에 왔느냐'고 역정을 낸다. 학생은 '떡을 먹으러 왔다'고 말한다. 노인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이 있으므로, 쌀을 빻아 떡을 만들려 하지만, 절구공이가 부러져 쌀을 빻을 수가 없다. 하는 수 없이 돌미륵불을 거꾸로 들어 쌀을 빻지만, 고통스러운 노인의 신음소리와 함께 돌미륵불의 목이 부러지고, 절구도 부서진다.
선생님은 물을 마시려 우물로 가지만, 우물은 이미 썩어버렸다. 노인은 망가진 절구와 목이 잘린 돌미륵불을 우물에 던진다. 절구와 돌미륵은 바다 깊이 가라앉고, 자욱한 모래먼지 속에서 돌덩이로 보이던 물체가 미륵불인듯, 사람인듯 눈을 감고 있는 돌같은 물체가 순간 눈을 번쩍 뜨고 정면을 바라본다.
오멸 감독은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한편의 진혼곡을 영화로 만들었다. 이 작품은 알레고리와 메타포로 일관하고 있지만, 아주 드물게 현실을 직접 언급할 때가 있다. '세월호 침몰'과 관련한 언론 보도를 다룰 때가 그렇다.
바다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이루는 삼도천을 상징한다. 바다는 세월호가 침몰한 바다이면서, 희생자들이 있는 삶과 죽음의 공간이자, 삶에서 죽음으로, 죽음에서 삶으로 이어지는 경계로써의 바다다. 이 바다를 건너면, 어떤 사람은 살아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고, 어떤 사람은 죽어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거나, 영영 바다에 살게 된다.
노인은 미륵불의 현현이고, 불쌍한 중생을 보듬는 부처이자 억울하게 죽은 영혼을 달래고, 위로하는 한없이 자애로운 보살이다. 노인은 섬을 찾아온 학생과 선생님을 보면서, 그들에게 떡을 해주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한다. 저 어린 것들이 대체 무슨 죄가 있어서 이 깊은 바다를 건너 노인을 찾아와야 했을까. 노인은 자신을 내던져 온몸으로 쌀을 빻지만, 주체할 수 없는 비애와 아픔 때문에 목이 잘리고 만다. 미륵불 마져도 이 어린 학생과 선생님을 구할 수 없다는 기막힌 현실, 죄 없는 사람들만 바다를 건너야 하는 이승의 불의를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노인은 이승을 떠난 사람이 먹어야 하는 떡도 만들지 않고, 떡을 만드는 도구인 절구와 절구공이를 바다에 버린다. 부정한 세상에서 갈 곳 없는 영혼들은 결국 떡을 먹지 못하고 사라지고, 목이 잘린 미륵은 저 바다밑 깊은 곳에서 수천 년, 수만 년을 기다려도 뜨지 않던 눈을 뜬다.
느리고 유장한 화면만으로도 이 작품이 얼마나 깊게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희생자를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우리는 살았지만, 산 것이 아니고, 살아있는 동안 결코 잊을 수 없는 화인같은 슬픔을 가슴에 새기게 되었다.
그것은 민주주의라는 제도로 뽑은 대통령이 더할 나위 없이 무능하고, 천박하며, 야비하고, 악랄한 쥐새끼 같은 존재였고, 인간이 아닌 존재, 저주받아야 마땅한 악귀같은 존재가 대통령이며, 공무원이며, 국회의원이며, 검찰, 경찰, 해경이며, 패륜집단이 저지른 야만의 학살이자, 집단 살해극이었고, 그 결과의 참담함은 다수의 국민들 가슴에 찍힌 고통이다.
7년. 아직도 세월호 참사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고 있고, 가해자들은 잘 먹고,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 달마가 눈꺼풀을 잘라 낸 것은 무엇을 보려는 것이었을까. 두눈을 부릅뜨고 끝까지 지켜봐야 하는 것은 저 악마들, 가해자들의 기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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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F 데일리] 하나의 사건을 바라보는 세 사람의 시선을 마주하다.
김효은 감독의 <새벽의 Tango>는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비전 부문에 초청된 영화이다. 일상을 파고드는 과거의 사건들과 그 사건을 바라보고 행동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아내었다. 입체적인 인물과 다양한 감정이 묻어 나오는 그런 작품이었다. 이연, 권소현, 박한솔 배우의 열연으로 특별함을 더하고 잔잔하면서도 강렬한 이야기에 빠져들게 만든다.
시놉시스
친구에게 사기당한 뒤 숙식 제공 공장에 숨어들 듯 들어와 일자리를 잡은, 매사가 분명하고 직설적인 지원. 누구에게나 상냥하며 스스로도 언제나 낙관적인 지원의 룸메이트 주희. 어린 나이에 일을 시작해 조장을 달게 된 꽤나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한별. <새벽의 Tango>는 이들의 이야기다. 어느 날 공장 동료에게 사고가 일어나는데, 이 사건에 연루된 세 사람의 반응과 해법은 놀랄 만큼 다르다. 인물 간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정서적 난감함 혹은 그 난감함을 넘어서는 감동은 입체적인 캐릭터 구축과 유연한 감정 축적으로 점점 더 강력해진다. <새벽의 Tango>는 관계의 실패와 복구에 관한 신중한 질문이고, 성격과 운명에 관한 흥미로운 예시이며, 마침내는 귀하고 아름다운 것의 상실에 관한 애틋한 애도다. (정한석)
영화리뷰
친구에게 사기당한 지원은 급하게 일자리를 찾아 공장에 들어오게 된다. 새로운 환경 속에서도 휘둘리지 않고, 누구에게도 여지를 주지 않으려는 지원과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낙관적인 룸메이트 주희가 만난다. 전에는 마주하지 못했던 친절함에 어색해 거리를 두기도 했지만 그들은 점차 가까워진다. 하지만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소문이 퍼지면서 그들이 멀어지는 계기가 되는데...
소문에 휘둘리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사실은 진실이 되고, 더욱 무성해져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때문에 누구나 감당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소문이라는 건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진실과 거짓이 교묘히 섞여 마치 그게 사실인 것처럼 만든다. 타인의 불행을 유머로 소비하고 행복을 질투하는 사람들은 그 일을 손쉽게 소비하는 것이다. 그 말을 재미있게 소비하면서도 그 말에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오히려 그 당사자를 욕하곤 한다. 그처럼 말과 잘못에 대해 책임지려 하는 사람은 드물다. 심지어 누구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에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이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씁쓸하게 느껴진다. 유일하게 그 책임을 지는 주희가 이상한 사람처럼 느껴지고, 그의 행동에 불편함을 느끼는 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가 떳떳하지 못해서인 건 아닐까.
이 영화는 참으로 씁쓸하다. 하지만 감정의 호수로 빠져드는 듯한 묘한 매력이 있는 영화이다. 영화 속에서는 새벽이라는 시간대는 사람이 유일하게 솔직해질 수 있는 시간, 그리고 특별함을 나눌 수 있는 시간대로 작용한다. 타인에게 휘둘릴 수 있는 낮과는 달리 낯선 땅고를 '새벽'에는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 된다. 조금씩 쌓아가는 미묘한 감정을 깨닫기도 전에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생각지도 못한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결말에 더할 나위 없는 허망함을 느꼈지만 숨을 수 있는 새벽의 시간에 머물고 싶었던 지원이 낮의 시간대로 나아가게 만드는 결정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희망적으로 느껴졌다. 이처럼 삶은 때론 지나치게 잔혹하면서도 희망을 주는 모순을 담고 있다. 우리 모두가 겪는 감정의 복잡함과 순간 속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새로운 선택을 하고 결정에 책임을 지며 성장해 나간다. 새벽의 고요함에서 시작된 지원의 여정은 낮의 복잡한 현실로 나아가는 하나의 과정이다. 상실에서 고귀한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상영 시간
10월 5일 20:00 영화진흥위원회 표준시사실
10월 8일 20:0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3관
10월 9일 20:00 영화진흥위원회 표준시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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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리즈' 시절은 언제일까?
* 이 글은 영화사 진진의 언론/배급 시사회에 참여한 후 작성한 리뷰입니다.
* 약간의 스포일러 주의!
나는 이따금 노년의 나 자신을 떠올리곤 한다.
머리가 희게 세고 얼굴은 주름투성이가 된 나 자신은, 글쎄, 어쩐지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눈 깜짝할 사이 서른이 되어버린 나와 환갑이 되어버린 나의 부모님이 그렇듯, 내가 살아있는 생물인 이상, 별 다른 사고가 나지 않는다면, 노년은 언젠가는 온다. 나도 언젠가는 할머니가 될 거라는 소리다.
우리는 흔히 멋진 노년을 그리곤 한다. 선글라스를 멋드러지게 끼고서 타탄 무늬 스커트를 빼 입은 백발의 멋쟁이 할머니. 그게 내가 막연하게 그리는 할머니인 나 자신이다. 이 상상에는 다음과 같은 전제가 숨어 있다. '늙고 초라하고 평범한 할머니가 되고 싶지는 않다'는. 소위 '외롭고 사회에 뒤쳐지는' 슬픈 할머니가 되고 싶지는 않다는 소리다. 초라해지고 싶지 않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특별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는 내가 아직 젊어서 가질 수 있는 오만이기도 하다. '나는 저렇게 늙지 말아야지'하는 그 생각에는, '저렇게'에 해당하는 많은 노인들에 대한 멸시 혹은 측은함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마치 나에게는 그런 늙음이 닥치지 않을 것이라는 것처럼.
이것은 비단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노인과 늙음에 대한 편견과 업신이 도사리고 있다. 국경 밖을 나가도 상황은 비슷하다. 물론, '멋지게 늙고 싶다'는 소망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우리도 모르게, '멋진 노년'의 범주를 지나치게 축소해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어떤 삶이나 얼마든지 찬란할 수 있다.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을 조금만 달리한다면!
영화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는 바로 이러한 노년의 '리즈 시절'에 대한 이야기이다.
1. 고독과 병듦
남편인 슈지가 세상을 떠난 이래, 모모코의 삶은 단조롭기 짝이 없다. 둘 뿐인 자식은 거의 연락을 하지 않다시피하고, 늙은 몸과 마음은 병들었다. 그녀의 벗이라고는 부산스러운 상상 친구들 뿐이다. 다람쥐가 쳇바퀴 돌듯 불 꺼진 부엌에서 저녁을 만들고 늘 하던 대로 텔레비전 앞에 앉는 그녀의 모습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외로운 노인의 삶 그 자체이다. 이렇다 할 말동무도 없는 모모코는 우울하다. 더 이상 잠에서 깨지 않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기도 하고, 언젠가 치매에 걸려 모든 것을 잊을까 두려워하기도 한다.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마음 붙이는 것은 빙하기 이전 지구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다.
그녀는 왜, 이제는 화석이 되어 사람들에게 잊혀져 가는 원시 생물들의 역사를 공부하는 걸까? 어쩌면 그녀는 수억 년 전 지층에 묻힌 그들의 처지에 자기 자신의 신세를 대입해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 때 찬란했을 역사를 지녔으나 이제는 박물관이나 백과사전에 그저 전시될 뿐인 삶은, 세상과 모모코 자신이 바라보는 '노인 모모코'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2. 어제와 오늘의 찬란함
그런 그녀에게도 빛나던 시절이 있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정략 결혼으로부터 도망쳐 나와 신여성이 되겠다고 다짐했던 젊은 여인은 다름 아닌 모모코였다. 젊고 잘생긴 남자를 만나 연애를 하고, 그와 귀여운 자식들을 낳아 삶을 이어나갔던 것도 바로 그녀였다.
영화 곳곳에서 그녀는 그 앳된 시절을 회상하며 그것을 지금의 모습과 대비한다. 그 순진하고 열렬하던 때와 비교했을 때 '지금'의 모모코는 너무나도 초라해 보인다. 인생의 동반자와 아이들을 위해 전념한 삶 끝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은 것처럼 보이고, 그녀의 인생은 그렇게 쓸쓸하게 종착점으로 향하는 것 같다.
그러나, 모모코는 그 많고 많은 회상 끝에 그녀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겠노라 결심한다.
이미 죽은 남편이나 실망과 슬픔만을 안겨주는 자식, 혹은 그 어느 찬란한 젊은 날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 나아간다. 그것은 고립되겠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쓸쓸한 노년'이라는 편견에서의 자주와 독립이다. 지금까지의 그녀가 '차마 의지하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면 이제부터는 '스스로를 의지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비로소 그녀에게 기꺼이 손을 내미는 주변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고, '모모코'라는 삶의 운전대를 잡아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녀의 공상 안에서, 그녀는 더 이상 화석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매머드이다.
겉보기에 그녀의 삶은 크게 달라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그녀는 여전히 쓸쓸한 독거 노인일 것이다. 그러나 그게 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모모코는 모모코대로 혼자서 전진할 것이고,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삶은 충분히 '리즈 시절'이리라.
노년의 여인을 소재로 삼고 있는 만큼 영화의 전개나 구성은 매우 단조롭다.
무언가 스펙터클하거나 뚜렷한 기승전결을 바라고 감상한다면 이 영화의 재미를 찾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이 영화는 뭐랄까, 좀 슴슴한(싱거운) 집밥 같다. 흰 밥에 절임 반찬 몇 가지가 전부인 소박한 밥상.
처음에는 뭐 이런 걸 밥이라고 내놓았나 싶다가도, 오래 씹고 음미하다보면 단맛이 난다.
그러다가 이따금, 짭짤한 무짠지를 아삭아삭 씹는 것같은 절묘함이 스크린을 감싼다.
현실과 상상을 넘나드는 연출이 바로 이러한 무 짠지 역할을 한다.
처음 스크린 너머로 매머드와 원시인을 보았을 때는 무척 당황했지만, 보다보면 그건 그것대로 별미다.
개인적으로 이런 종류의 '힐링' 일본 영화가 그다지 취향이 아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보내는 메시지 자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런 매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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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에 또 구하러 와줘
SYNOPSIS.
무성영화 시대의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스턴트맨 ‘로이’는 같은 병원에 입원한 호기심 많은 어린 소녀 ‘알렉산드리아’와 친구가 되고, 매일 다섯 무법자의 환상적인 모험 이야기를 해준다. 이야기는 현실과 상상이 뒤섞이면서 ‘알렉산드리아’를 신비의 세계로 데려간다.
POINT.
✔️ '우리는 모두 펩시를 마시죠' 하면서 전세계를 오가는 축구공을 담았던 옛날 광고를 아시나요? 그 광고의 감독이 전세계를 오가는 이야기를 담아온 영화를 기대하시면 됩니다. 전세계 18개국에서 촬영했다네요.
✔️ CG를 쓰지 않고 촬영한 전세계 곳곳의 아름다운 모습은 딱 지금 극장에서 보아야 합니다. "압도적인 영상미"라는 진부한 표현에 고개를 끄덕이는 경험.
✔️ 두 주연 배우가 너무 아름답습니다. 이야기를 시작하는 리 페이스의 목소리와 표정, 그리고 실제로 대본 속 상황이 사실인 줄 알고 연기했다던 카틴카 언타루의 모습.
✔️ 이야기와 영화에 바치는 헌사. 이야기 혹은 영화가 나를 "구했다"고 느낀 경험이 있는 분이라면, 누구라도 사랑하실 수밖에 없을 것.
끝나는 순간 시작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지는 영화가 있다. 여러 의미에서 이 영화도 그러하다. 장엄한 세계 곳곳의 풍광을 배경으로 풍성한 이야기가 겹겹이 펼쳐진다는 점에서 한 번 더 보고 싶은 영화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무슨 내용일까 궁금해 하며 처음 볼 때와, 영화를 이미 보고 내용을 알고 볼 때 다른 감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흑백 "영화" 같은 장면들. 멈춘 듯한 풍경 속에서 슬로우가 걸린 역동적 몸짓들. 이는 타이틀 이후 병원의 장면들로 이어진다. 병원의 아이들 또한 멈춘 듯한 풍경 속에 있다. 어떤 아이는 고요하게 눈망울에 슬픔을 올리고, 어떤 아이는 악 쓰듯 우는 곳에서, 알렉산드리아만이 아이들이 고유하게 갖는 감각을 유지한 채 병원을 두루 탐험하고 있다.
그곳에서 로이와 알렉산드리아는 서로를 발견한다. 그림자가 거꾸로 맺히는 것을 보며 (언젠가 영화가 될 이야기를 찾듯) 헤매고 있던 알렉산드리아와, 그의 이름에서 알렉산더 대왕의 이야기를 읽어내는 것으로 대화의 물꼬를 트는 로이는, 어떻게 보면 영혼이 닮아 있는 사람들이다. 어디서든 이야기를 찾아내고야 마는 사람들. 언제든 앉은 자리에서 곧바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는 사람들. 애쓰지 않아도 이야기를 캐낼 수 있고, 상상 속에서 장엄한 풍경까지 그려낼 수 있는 사람들.
그러한 존재들이라고 해서 세상살이가 녹록하다는 보장은 없다. 로이는 이야기에 기꺼이 뛰어들었다가 상처 입고 절망한 존재다. 두 사람 모두 추락(the fall)을 경험하면서 이 병원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들의 추락은 단순히 신체의 추락과 부상만이 아닌, 이야기의 실패와 거기서 기인하는 영혼의 절망과도 연결되어 있다. 로이는 영화 판에서 더이상 스턴트를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고, 사랑의 서사도 실패했다. 알렉산드리아는 아직 너무 어린 탓에 아버지와 집을 잃은 모종의 사건을 온전한 서사로 정리하지 못한 채, 조각난 상처를 어딘가에 안고 있다. 서로를 발견한 것은 어쩌면 이들 안의 추락인지도 모른다.
그들의 이야기는 곧 의기투합한다. 로이는 절망으로 가는 길에 도움을 받고자, 알렉산드리아에게 이야기를 계속해서 들려준다. 이야기 속 악당, 이름부터 끔찍하다는 뜻인 오디어스(odious)는 이야기 초입에서 마치 신과 같은 속성을 갖는다. 무소부재(omni-present)하고 전지전능하다. 전심으로 가리고 막아도 뚫고 들어오며(인도인), 사람을 지배하고(오타 벵가), 법과 제도 위에 군림하며(루이지), 내밀한 소망까지도 모두 알고 있다(찰스 다윈). 더 끔찍한 것은 오디어스 본인에게 아무 유익이 없는, 나비 날개 같은 소망을 부수는 행위를 굳이 하는 자라는 점이다. 오디어스는 어느 날 갑자기 다가오는 불행, 추락의 얼굴을 하고 있다.
이야기 속 인물들은 오디어스의 뜻대로 서로를 죽고 죽이는 대신 각자의 특기를 살려 오디어스에 저항한다. 그러나 온전한 절망, 온전한 추락으로 향하겠다는 마지막 '소망'마저 좌절되면서, 로이는 자신의 절망을 이야기에 투영하고 오디어스를 향한 저항은 허무하리만큼 쉽게 끊어져 간다. 잔인한 죽음을 차례차례 목도하며, 로이는 그 죽음이 자기 차례까지 오기를 기다려 이야기를 끝내려 한다.
그때 알렉산드리아가 이야기에 뛰어든다. 로이가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을 즐겁게 듣고 있었지만, 알렉산드리아도 그림자로 장난을 치고 눈을 한쪽씩 깜빡거리며 언젠가 영화가 될 것들을 일상에서 보는 존재였다. 더 이상 구하러 올 사람이 없는 이야기에 씩씩하게 뛰어든 알렉산드리아는 로이를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반복해서 사랑을 말함으로써, 그리고 이야기 속 투영된 로이의 존재(She loves "you")를 명명함으로써 이야기를 구원한다.
이야기 속에서 짐승 소리를 내며 무수하게 몰려들었던 오디어스의 부하들은 물론, 신의 속성을 가진 것처럼 느껴졌던 오디어스 본인조차 결국 한 작은 사내가 된다. 절망은 결국 걷어낼수록 작아져 마침내 한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크기가 된다.
그렇다면 절망을 걷어내고 우리를 구하는 것은 누구인가. 해피엔딩이 없는 이야기라면 기꺼이 그 안에 뛰어들어 스스로 해피엔딩을 만들어내는 존재. 서사를 사랑해서 세상을 구하는 존재. 이야기 안에 자기를 다 던지는 존재. 설령 실패하더라도 다시 서로를 명명하여 끝내 다시 살아가게 하는 존재.
누군가에게는 영화로, 누군가에게는 영화에 전심을 다한 (스턴트 배우를 비롯한) 영화인으로, 누군가에게는 이야기로, 또 누군가에게는 사랑으로... 읽힐 그 존재. 영화 <더 폴>은 우리에게 그 존재를 데려온다. 때로는 패기 있고 멋지지만 때로는 좌절하며 쓰러져도... 괜찮다. 우리 안의 짐승 같은 절망이 나를 어둡게 덮칠 때, 기꺼이 나의 이야기에 뛰어들어 나를 구해줄 무언가(혹은 누군가)가, 우리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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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벨 문> | 차라리 스타워즈 스핀오프였다면...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변방 행성 벨트의 한 농촌에 마더월드의 군대 임페리움을 이끄는 '노블'(에드 스크레인) 제독이 나타난다. 그는 촌장을 때려죽인 후 다시 돌아올 때까지 군대를 먹일 식량을 준비하라고 협박한 뒤 떠난다. 농촌 주민들이 공포에 질려 어찌할 바를 모르자, 과거 마더월드의 장교였던 자기 신분을 숨긴 채 지내던 '코라'(소피아 부텔라)가 마침내 목소리를 낸다. 어차피 노블 제독이 우리를 모두 죽일 테니, 그전에 그들과 싸울 준비를 하자고.
이에 친구 '군나르'(미힐 하위스만)와 함께 노블 제독에 맞설 전사를 찾아 나선 코라. 그녀는 항구 도시에서 만난 '카이'(찰리 허냄)의 도움을 받아 은하계 각지에 흩어진 숨은 전사들을 발견한다. 노예가 된 왕자 '타라크'(스타즈 네어), 갓을 쓴 검사 '네메시스'(배두나), 임페리움에 반기를 든 전설적인 장군 '타이투스'(자이먼 혼수), 저항군의 리더 '다리안 블러드엑스'(레이 피셔)까지. 그러고는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에 나선다. 마더월드의 폭정에 맞서 벨트를 구할 영웅들과 함께.
황새 쫓다 가랑이 찢어진 뱁새, <레벨 문>
<스타워즈>. 스페이스 오페라의 고전. 첫 등장 이후 40년이 지나도 인기를 유지 중인 미국의 신화. 사실 <스타워즈> 이야기는 명성에 비해 그다지 참신하지 않다. 좋게 말하면 왕도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클리셰로 가득하다. 조지 루카스가 조지프 캠벨의 연구를 차용한 결과물이기 때문. 캠벨은 여러 신화가 공유하는 모티브를 정리했고, 그 내용은 루크 스카이워커와 다스 베이더의 서사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대신 <스타워즈>는 다른 영역에서 독자적인 매력을 구축했다. 이야기는 평범해도, 그 이야기가 펼쳐지는 세계관은 특별했다. 다양한 행성과 생명체, 제다이와 시스의 갈등, 현실세계로 역수입된 광선검 결투, 임페리얼급 스타 디스트로이어와 X-윙 같은 전투기, 여러 외피의 드로이드까지. 익숙한 이야기를 따라가면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던 은하계를 탐험할 수 있는 게 <스타워즈>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
이는 넷플릭스의 <스타워즈>를 꿈꾼 잭 스나이더 감독 신작 <레벨 문: 파트 1 불의 아이>의 실수이기도 하다. 본래 스나이더가 <스타워즈> 스핀오프로 기획한 <레벨 문>. 이 프로젝트는 디즈니의 루카스필름 인수 후 취소됐고, 넷플릭스에서 되살아났다. 그런데 이상하다. <레벨 문>은 더 이상 <스타워즈> 세계관에 속하지 않는데, 여전히 <스타워즈>를 답습한다. 그 결과 <레벨 문>은 <스타워즈>의 강점 대신 약점만 노출하고 말았다.
첫 번째 실수: <스타워즈>의 세계를 답습하다
할리우드의 스페이스 오페라 영화가 <스타워즈>로부터 벗어날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스타워즈> 세계관을 부정하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것인가? 아니면 유사한 세계관 속에서 참신한 이야기를 보여줄 것인가? 가렛 에드워즈의 <크리에이터>는 전자라 할 수 있다.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의 감독인 그는 스타워즈 세계관의 근간인 '프런티어 정신'과 '오리엔탈리즘'을 정면으로 부정하며 독자적인 세계관을 그렸다.
<레벨 문>은 후자다. 이름과 외양만 다를 뿐, <스타워즈>의 세계관을 이어받았다. 마더월드와 은하 제국은 전 우주를 억압하는 군국주의 권력이다. 왕을 시해하고 권력을 찬탈한 섭정 벨리사리우스는 황제를, 반은 인간이고 반은 사이보그인 노블 제독은 다스 베이더의 변형이다. 그들의 관계도 유사하다. 황제가 다스 베이더를 겁박하고 이용했듯이, 섭정 역시 노블 제독을 장기짝으로 다룬다.
주인공 삼인방인 코라, 군나르, 카이는 루크, 레아, 한 솔로 삼총사를 연상케 한다. 루크와 레아의 성별과 신분을 맞바꾸고, 한 솔로를 더 비열하게 만든 게 전부다. 마더월드에 대항하는 저항군과 은하 제국에 맞서는 반란 연합은 규모도, 위상도, 역할도 유사하다. 일반 함선으로는 맞설 수 없는 함선 '킹스 게이즈'의 존재 역시 <스타워즈> 속 스타 디스트로이어의 대체재나 다름없다.
문제는 <스타워즈>의 본래 장점도 세계관이라는 것. 달리 말해 <스타워즈>가 40년이 넘도록 쌓아 올린 세계관을 답습한다면, 그 작품은 결코 <스타워즈>로부터 차별화될 수 없다. 실제로 <레벨 문>은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스타워즈>와의 비교를 끝끝내 피하지 못한다. 왜 이 영화가 <스타워즈>가 아닌 다른 제목을 달고 제작되어야 했는지 그 이유를 찾기 어렵다.
두 번째 실수: 또 다른 고전을 답습하다
그렇다면 <레벨 문>은 스토리텔링으로 승부를 봐야 했다. <스타워즈>의 도식적인 이야기와 확연히 다른, 참신하고 치밀한 이야기로 관객을 매료해야 했다. <레벨 문>은 그러지 못했다. <스타워즈>라는 클래식에 또 다른 고전, <7인의 사무라이>를 더했다. 자연히 <레벨 문>의 러닝타임 148분은 모두가 이미 알고, 예측할 수 있는 평범한 이야기로 가득 차 버렸다.
물론 잭 스나이더의 의도는 추측할 수 있다. 그의 연출작은 한 가지 경향성이 있다. '에픽'을 좋아한다는 것. 그는 자기 신념을 관철시키려는 인물의 투쟁을 웅장하고 장엄한 서사시로 그려내는 데 관심이 많다. <300>, <맨 오브 스틸>, <배트맨 대 슈퍼맨>, <왓치맨>, <저스티스 리그> 모두 마찬가지다. 바로 여기서 <스타워즈>를 배경으로 <7인의 사무라이>를 보여주려 한 이유를 유추할 수 있다.
사실 명작이라는 점과 별개로 <7인의 사무라이>는 스케일이 큰 영화가 아니었다. 한 농촌을 배경으로 도적 떼와 사무라이 7명이 싸우는 이야기였다. 잭 스나이더는 이 이야기를 서사시로 바꾸려 한다. 자유의 투사들이 정의롭지 않고 부당한 탄압에 맞서는 우주적 대서사시를 꿈꾼 셈이다. 그래서 그는 스타워즈를 빼닮은 세계관을 더해 도적 떼를 마더월드로, 7인의 사무라이도 마더월드에 복수하려는 영웅들로 바꿨다.
문제는 잭 스나이더의 큰 그림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점이다. 선악을 딱 잘라 나눈 이분법적인 구도는 이제 소구력이 없다. 당장 <스타워즈> 시퀄 시리즈도 은하 제국을 퍼스트 오더로, 반란 연합을 저항군로 변형했다가 발전한 게 없다는 비판을 못 피했다. 파시즘, 공산주의 같은 거악과 싸우는 시대가 아닌 상황에서 이분법적 구도는 구시대적이니까. 근래 히어로 영화, 첩보 영화가 괜히 선악 구분을 모호하게 만든 게 아니다.
세 번째 실수: 허점이 많은 플롯
큰 그림의 매력이 부족한 가운데, <7인의 사무라이>를 차용한 플롯도 안일하다. 벨트의 한 농촌을 구하기 위해 전사를 모으는 게 주된 내용이지만, 정작 코라가 조력자를 모으는 과정이 빈약하게 제시된다. 일례로 코라가 무슨 수로 타이투스 장군과 블러드엑스 남매를 찾을 것인지 그 계획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녀는 항구 도시 술집에서 타이투스 장군을 아는 사람을 찾아 헤매는 것 이상의 비전을 못 보여준다.
대신 술집에서 우연히 만난 카이에게 전적으로 의존한다. 우주선도 카이에게 빌리고, 티라크와 네메시스라는 전사도 카이에게서 추천받고, 벨트로 돌아가는 항로도 카이가 정한다. 즉, 마더 월드의 폭정에 저항하는 투사로서도, 섭정의 양녀이자 엘리트 군인으로서도 코라는 걸맞은 능력을 거의 보여주지 못한다. 그러니 우연의 일치일 뿐이고, 연속성도 부족한 코라의 여정에는 재미가 붙지 않는다.
각 캐릭터의 매력도 못 살렸다. 시리즈의 시작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각 인물을 소개하고 그들이 한 팀이 되는 과정만 잘 보여줘도 <레벨 문>은 제 역할을 하는 셈이다. 하지만 <레벨 문>은 그저 캐릭터를 나열할 뿐이다. 그들의 전사, 능력, 심경 변화, 팀에 합류하기로 한 동기 등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노블 제독의 입을 빌려 그들의 프로필을 하나하나 읊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코라와 군나르가 그들을 한 명씩 만나는 내용은 그저 다음 시리즈를 위한 발판 같아 보인다.
마지막 실수: 본연의 장점마저 잃었다
물론 잭 스나이더를 위한 변명이 있기는 하다. 그의 장점은 본래 스토리텔링이 아니다. 분량 제한이 없는 스트리밍 환경에서 공개된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 <아미 오브 데드>도 개연성이나 완급 조절 문제를 못 피했을 정도다. 대신 비주얼과 액션 연출은 특출 난 장점이었다. 그가 기획한 DCEU의 비주얼은 만화책을 찢고 나왔다는 평을 받았고, <300>과 <맨 오브 스틸>의 액션은 다른 블록버스터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레벨 문>에서는 잭 스나이더 본연의 장점을 찾기 어렵다. 비교적 저예산으로 스페이스 오페라에 걸맞은 비주얼을 보여주기는 했다. 렌즈 플레어 효과를 적극 활용한 총격씬과 폭발씬은 시선을 사로잡을만하다. 그러나 몇몇 장면에서는 그린 스크린에서 촬영한 티를 숨기지 못했고, 잭 스나이더의 특징인 슬로 모션도 남발돼 몰입도를 저해한다.
또 합을 맞춘 티가 많이 나는 액션씬도 기대 이하다. 코라가 마더월드 군인들과 싸우는 초반부, 네메시스가 광선검 비슷한 검을 든 채 거미 괴물과 맞서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에 더해 슬로 모션을 남발한 결과 생동감도 살지 않는다. 그나마 타라크가 배누를 길들이는 장면이 인상적이지만, 진부함을 피하지는 못했다. <아즈카반의 죄수>에서 해리가 히포그리프를, <아바타>에서 제이크가 이크란과 교감하는 장면을 빼닮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스타워즈> 스핀오프였다면 어땠을까 싶다. <스타워즈>의 일부라면 익숙하거나 진부한 설정도 '<스타워즈>니까'라는 이유로 용인했을지 모른다. 어쩌면 <로그 원>이나 디즈니+ 드라마 <안도르>처럼 호평을 받았을 수도 있다. 제다이와 시스의 대결, 광선검 액션을 반복하는 대신 색다른 이야기를 보여준 것만은 확실하니까.
애초에 기획과 아이디어에 대한 평가도 달라질 수 있다. <스타워즈> 자체가 서부극에 근간을 뒀고, 조지 루카스도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로부터 영감을 받은 흔적이 많기 때문. 그러니 '초심에 가까워진 시리즈' 같은 식의 평가가 나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스타워즈>가 아니면서 <스타워즈>를 닮으려 애쓰고 있으니, 모두 무의미한 가정일 뿐이다.
종합하면, <레벨 문>은 넷플릭스의 <스타워즈>라는 야심만 있을 뿐, 야심을 실현할 방법론은 볼 수 없는 영화다. 잭 스나이더에게 과제를 잔뜩 안겨준 듯 보이기까지 한다. 언뜻 흥미로워 보이는 아이디어의 스케일만 키우는 대신, 이야기의 밀도를 높이는 근본적 쇄신이 먼저라는 사실을 증명했기 때문. 그래야 잭 스나이더와 넷플릭스가 각각 삼부작으로 계획한 <아미 오브 데드>와 <레벨 문> 시리즈도 안정적으로 확장될 수 있을 테니.
Dreadful 끔찍한
<스타워즈>를 기대해도, 잭 스나이더를 기대해도 실망스러운 2시간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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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개 드세요 연상호씨, 당신 아직 죄인 아닙니다
** 스포일러에 민감하신 분들은 영화를 보시고 감상해주세요!
** 영화에 대한 비난이나 비하의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영화 '염력'을 개봉하자마자 관람했습니다.
한국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신선한 시도였기에, 많은 호불호가 갈릴 거라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염력의 장단점과 캐릭터 특징을, 2분 안에 주관적으로 압축하여 빠르게 정리해봤습니다. (이 때문에 영상 편집 퀄은 다소 떨어질 수 있습니다)영상 속에 아기자기하게 많은 재미요소가 들어가있으니 재밌게 감상해주세요 :)
여러분은 어떠셨나요?
왓챠에서 '진상명' 팔로우 하시면 빠른 평 업데이트를 보실 수 있습니다 :)
#염력 #연상호 #류승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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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어웨이크> 공식 예고편
알 수 없는 현상이 전 세계를 덮친다.
모든 전자 기기는 사용 불능 상태가 되고, 인류는 잠들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린다.
극도의 혼란에 빠진 세상.
과거의 상처를 간직한 전직 군인 질(지나 로드리게스)에게 이 현상을 치유할 열쇠가 있을지 모른다.
그녀의 어린 딸이 그 열쇠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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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길복순> 1차 예고편
제73회 베를린 영화제 초청작 죽을 때까지 숨길 것. 숨기지 못한다면 죽일 것.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킹메이커》 변성현 감독 넷플릭스 영화 《길복순》 3월 31일, 오직 넷플릭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