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3-09-19 21:01:23
[SICFF 데일리] 머리카락에 녹아 있는 기억
영화 <빵떡 소녀와 나>
SYNOPSIS.
애착 인형 이름은 제프 브리지스, 애정하는 밴드는 플리트우드 맥. 감수성 넘치는 베니와 똘똘한 사촌 돈의 특별한 우정
PROGRAM NOTE.
때는 1990년, 록밴드와 인형을 사랑하는 원주민 혈통 소년 베니는 어느 여름날 부모님에 의해 난생 처음 도시를 떠나 애리조나 원주민 보호구역 내 양떼 목장에 있는 할머니 집에서 지내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자애로운 외할머니, 빵떡 소녀라는 별명의 사촌 돈과 자유로운 영혼 루시 이모, 마초맨 삼촌 마빈을 만나게 되고, 잊지 못할 경험을 하게 된다. 성인이 된 베니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되는 이 영화는 도시 소년 베니의 시선 아래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삶을 섬세하게 들여다보는 작품이다. <조조래빗>을 연출한 타이카 와이티티가 총괄 프로듀서를 맡은 이 영화는 이제껏 거의 다뤄지지 않았던 원주민들이 중심이 된 가족 이야기를 유쾌하면서도 따뜻하게 묘사한다. 록밴드와 TV의 시대였던 90년 미국의 멜랑콜리한 활기, 촌철살인의 유머가 넘치는 미국 인디펜던트 영화의 정수를 느낄 수 있다. (최은영)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다룬 적이 있다. 머리카락에는 우리의 흔적이 남는다고. 프로그램에서는 국과수에서 머리카락을 분석하는 실험을 해 보였는데, 오랫동안 종사한 직업은 물론 최근 바다를 다녀왔다는 사실까지 맞출 수 있었다. 어딘가 오래 묻혀 있다 ‘미라’ 상태로 나온, 한때 살아있던 사람의 몸에서도 머리카락은 비교적 오래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몸이 발견될 때마다 뉴스 기사들은 하나 같이 “상태 양호”하다고 했다. 이런 머리카락을 통해 DNA를 분석하면 또 그 몸이 살아있을 때의 이야기가 주렁주렁 올라올 것이다.
이런 사실들을 파편적으로나마 알게 된 이후로, 가끔 머리카락이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머리카락 하나는 평소라면 그냥 방바닥에서 증식을 하는지 의심될 만큼 치워야 하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어떤 현장에서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어줄 수도 있겠지. 마찬가지로 내가 일상에서 대수롭지 않게 감고 말리고 빗고 넘기는 머리카락이, 누군가에게는 소중히 여길 무엇일 것이다.
<빵떡 소녀와 나>를 보고서는, 그게 그토록 애틋하고 찡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사실은 순전히 제목 때문에 고른 영화였다. Frybread를 빵떡이라고 번역할 귀여운 생각은 누가 했을까. 유난히 잘 붓곤 하는 얼굴을 스스로 빵떡이라고 종종 말하긴 해도 그게 표준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어엿하게 영화 제목으로 들어가 있는 걸 보니 기특하기까지(?) 했다. 기특한 우리 탄수화물과 탄수화물의 조합 같으니.
귀여운 제목에 귀여운 스틸컷을 보고 골랐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옥수수죽처럼 슴슴하고 든든한, 어쩐지 따스하고 구수한 내음이 나는 영화였다.
1990년 미국. 키치하게 반짝거리는 도시 한 가운데서 베니가 열중하는 것은 헤드셋으로 쏟아지는 밴드 음악과 손에 쥐어지는 크기의 인형 (본인 주장에 따르면 '액션 피규어') 두 개다. 인형 두 개로 베니가 나누는 대화는 대부분 긴장 일촉즉발의 갈등 상황이다. 외부로 표현되지 않는 소리들이 베니 안에서 왕왕 울릴 때, 부모님 손에 의해 여름방학 동안 할머니댁 행이 갑작스럽게 결정된다. 베니로서는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이럴 때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심각한 표정의 부모님의 긴장과 갈등이 이미 베니의 손 끝 인형에까지 묻어나고 있으니까.
한참을 달리고 또 달려 도달한 할머니 댁은 황량하기 그지없는 초원 한 가운데 있다. 지금은 다 집을 떠난 이모 삼촌들의 어린 시절 사진이 여전히 벽에 붙어 있는 곳. 영어를 할 줄 모르는 할머니와 나바호족 말을 할 줄 모르는 베니, 그리고 윽박지르기만 하는 삼촌. 그 사이로 빵떡이가 등장한다. 모두가 빵떡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이름은 '새벽Dawn'인 소녀가.
영화는 실제로 방학 동안 할머니댁에 맡겨진 아이들의 일상처럼, 슴슴한 모험의 맛으로 가득 차 있다. 분명 애들한테 물어보면 "심심해 죽겠어!"라고 대답하겠지만, 먼 훗날 돌아보면 가장 소중한 추억이 거기 다 고여 있는 것처럼 느껴질 그런 날들. 아이들에게 호의적이고 다정한 태도를 보이며 아이들 마음을 풀어주는 이모가 있는가 하면, 있는 상처 없는 상처 박박 긁어 결국 갈등을 표면화하고 마는 삼촌도 있다. 그들을 가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점점 쓸쓸해지는 풍경이, 그곳을 지키는 마지막 사람들 같은 스산한 기분이, 함께 올라온다. 지방 소멸을 걱정하는 동네의 마지막 젊은이 같은 기분이 든달까. 내가 한국인이라 지방 소멸이라는 단어가 나온 것이지, 저들에게는 잃어가는 원주민 문화의 흔적에 대한 감정일 것이다.
그리고 영어 배우기를 거부한, 나바호족 문화를 꼿꼿하게 지키는 할머니가 있다. 할머니는 양탄자를 만들어서 기념품 가게에 팔지만, 양탄자에 영혼이란 것이 있다면 그것만은 할머니 곁에 모조리 남아있을 것만 같다. 양탄자 무늬의 의미와 거기 담긴 상징들, 나바호족에게는 '진실보다 중요한' 상징들을 할머니는 손주들에게 이유식처럼 떠 먹인다. 할머니의 자장 안에서 나바호족의 문화는 보드랍고 편안하게 풀어진다. 비록 어른이 되면서 (영화에서는 서술되지 않는) 여러 원주민으로서의 어려움 속에서 제각각의 길을 가는 이모삼촌 삶의 궤적은 쓸쓸한 감정을 불러오지만, 아기의 '첫 웃음'을 축하하며 첫 웃음 잔치를 하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때로는 쓸쓸하고 때로는 아름다운. 이 영화 속 가족은 아주 애틋하거나 아주 냉담하지 않은, 그래서 나와 매우 다른 사람들임에도 어쩐지 더 일반적으로 느껴지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영화를 다 볼 때쯤이면 할머니 댁에 다녀온 기분이 든다.
이 영화에서 가족들은 많은 순간 서로의 머리카락을 만진다. 손주들의 머리를 정성껏 감겨 주고, 머리를 묶어 주고, 어루만져 주는 할머니의 사랑. 머리카락은 기억이라는 말은 DNA에 대한 과학적인 사실만이 아니라, 나바호족의 상징에서도 진실이다. 가끔은 사실보다 상징이 더 진실을 닮아 있는 세상에서,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지혜가 고요히 빛난다.
사실은 서로 다 알고 있던, 녹록지 않은 가족사를 이고 '빵떡 소녀와 나'는 앞으로도 성장해 갈 것이다. 아이라 해서 모르지 않는다. 머리카락이 자연스럽게 기억을 간직하듯, 가족 안에서 켜켜이 쌓이고 흐른 일들은 아이들에게도 고스란히 묻어난다. 그러나 할머니가 떠먹여준, 고요하게 빛나는 지혜와 상징이 촛불처럼 아이들의 삶을 밝혀주지 않을까. 나도 촛불 하나를 들고 영화관 밖으로 나서는 듯한 마음이다. 어쩐지 창포 향이 날 것 같은 기분. 지구 반대편 누군가의 이야기가 이렇게 우리네 이야기 같아도 되나? 아마 그게 영화의 힘이겠지. 이 기억 또한 내 머리카락에 남을 것을 안다.
9월 17일 20:00-21:29 롯데시네마 은평 7관
9월 18일 19:30-20:59 롯데시네마 은평 6관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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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담컨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장르
감독, 제작진, 배우, 장르, 줄거리 그 무엇도 알지 못한 채로 보기를 추천하기에 아무 정보도 기입하지 않겠다.
아, 러닝타임 정돈 괜찮겠다. 139분.
대체 뭐라고 표현할까.
마땅한 단어를 떠올리던 무렵, 박찬욱 감독의 한 줄 평을 발견했다.
야단법석 왁자지껄 아수라장 대환장파티에서 막 빠져나왔는데 거울로 보니 내 눈에 눈물이.
그래, 이거다. 영화의 첫인상은 '정신없다'였고, 언젠가부터 '감독의 정체가 뭘까' 싶었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땐 눈물 콧물 범벅된 마스크에 불쾌감을 느끼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난생처음 보는 종류의 영화였으니까.
컷 전환이 쉼 없이 빠른데도 러닝 타임은 2시간을 훌쩍 넘으니 실제보다 더 길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니 기깔나는 상영관에서 보는 걸 추천한다. 또렷한 색상 구현과 입체적인 사운드를 선보이는 돌비 시네마라던가.
메가박스 코엑스. 영화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아래로 늘어진 계단 한쪽에 털썩 앉았다. 전광판은 때마침 <에에원>의 짤막한 예고편을 무한 반복 중이었다. 사전 정보 없이 보고 싶어서 일부러 시선을 두지 않았는데, 소리는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I'll save you"였나. 뭘 구하겠다는 말이 반복해서 들렸다.
뭐지. 세상을 구하는 전사 이야기인가. 히어로 영화인가. 저 사람이 주인공인가 보다. 대충 예감하며, 오래 앉아야 하는 걸 대비해 화장실에 들렸다. 그리고 아쿠아리움 같은 돌비 시네마 입구에 들어서서 공연장 같은 좌석에 앉았고. 돌비 시네마는 이 시스템이 얼마나 대단한지 온몸으로 체감하게 한다. 애피타이저로 입맛을 돋우듯 영화를 보기 전 오감을 일깨운다. 두근두근. 괜한 기대감에 사로잡히던 찰나, 영화가 시작되었다.
그땐 몰랐다. 화장실에서 휴지를 뜯어왔어야 했단 걸.
*아래로는 스포가 이어집니다.
거울.
그게 영화의 시작이었다. 컷 하나인데 길이가 꽤 길었다. 거울 속에 비친 얼굴들은 웃고 있었던가. 무언가 말하는 것도 같았다. 천천히 거울 속으로 들어가듯 카메라가 가까워지고, 거울 안 세계로 화면 가득 들어찼다. 거울을 마주한 나와 거울 속 나. 하나이지만 둘이고, 둘이지만 하나다. 지금 생각하면 '우린 멀티버스 세계관입니다'를 대놓고 보여준 셈이다.
그러나 관람 중에 멀티버스를 생각하지 못했던 건 이어지는 장면이 워낙 정신없어서다. 책상 위를 한가득 메운 하얀 영수증들. 다소 꾸깃꾸깃한 영수증들은 시끄러운 소리를 냈고, 그걸 정리하는 건지 신경질을 내는 건지 모를 동작으로 주인공 '에블린'이 자신의 남편과 뭐라 뭐라 대화를 이어갔다. 국수 좀 봐달라, 아버지 생신인데, 세금 내야 하고, 조이가 여자 친구를, 영수증은 다, 세탁소가, 종잡을 수 없는 말들이 영어와 중국어를 마구 오가며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보는 이도 정신없는데 당사자들은 얼마나 더 정신이 없겠는가. 에블린은 남편 '웨이먼드'에게 이거 해라, 저거 해라 말하지만, 정작 웨이먼드는 어느 하나도 제대로 못한다. 밝고 쾌활한 목소리로 날카롭고 까칠한 에블린의 비위를 맞추는 듯했다. 여기에 그들의 딸, '조이'가 여자 친구 '베키'를 데려온다. 조이도, 베키도 환영받지 못한다. 특히 에블린에게서.
정신없이 얽히던 흐름이 뚝, 끊기던 때가 있었으니. 에블린의 아버지가 집에서 세탁소로 내려온 걸 발견하고서였다. 중국어에 서툰 조이가 할아버지에게 베키를 설명한 단어를 찾고 있을 때, 에블린이 말을 빼앗는다. 조이의 친한 친구라고. 그런 식이었다. 에블린은 조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먹고사는 데 급급해서라지만, 명백한 거부 의사였다.
에블린, 조이, 웨이먼드, 이들 가족은 아무도 행복하지 않은 상태에 놓였다. 웨이먼드는 이혼 서류를 내밀려고 했으나 이마저도 바쁜 상황에 내쳐졌고, 막상 목숨이 오가는 급급한 상황에 치닫고서야 에블린이 그 서류를 펼쳤다. 혼돈에 또 다른 혼돈인 거다.
세무사에게 세탁소 회계감사를 받는 게 무슨 목숨까지 걸 일이 되었을까? 바로 웨이먼드가 '알파' 세계의 웨이먼드로 바뀌는, 멀티버스 세계관이 열리고부터다. '조부 투파키'라는 거대 악이 세계를 뒤흔드는 중인데 에블린이 유일하게 대적할 수 있다는 거다. 당연히, 에블린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웨이먼드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 왔던, 꿈과 사랑이 넘치던 20대였으면 모를까. 지금은 쳇바퀴 같은 삶에 허덕대기 바쁜 시궁창 인생인데. 무슨 능력이 있다고.
그런데 이 말을 다르게 하면, 지금의 에블린이 택하지 않은 삶을 택한 에블린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거다. 능력 넘치는 버전의 에블린 말이다. 그렇다. 어딘가엔 웨이먼드를 따라가지 않고, 늦은 밤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가 쿵후 선생님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나고, 쿵후를 마스터해서 세계적인 액션 배우가 된, 돈/명예/커리어 어느 하나 놓치지 않은 에블린이 있다.
자, 이제 괴팍한 버전의 세무사 '디어드리'에게 맞설 쿵후 전문 배우 에블린이 필요하다.
이쯤 되어선 멀티버스의 개념과 스토리의 뼈대를 다 설명해서인가. 온갖 장르가 마구잡이로 뒤섞인다. 액션, 호러, 코미디, 시트콤, 블랙코미디, 공포, 드라마, 다큐멘터리, 스릴러, 로맨스, 애니메이션,... 장르의 멀티버스화라고나 할까.
멀티버스 세계관을 보여주느라 교차하는 장면이 많지만, 전체적인 톤앤매너는 비슷했다. 코미디. 다만 한없이 가볍고 허술한데 이상하게 매력적인 B급 영화인 것 같다가 진중하고 철학적인 상황으로 들어섰으니. 바로 돌들의 대화 장면이다.
물론 앞서 말했듯 전체 분위기는 코미디인지라 갑작스러운 전환에 영화관 전체가 웃음바다가 되었지만.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조부 투파키, 그러니까 조이의 멀티버스 중 한 모습이자 어찌 보면 본질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가 평온을 느끼는 건 자신이 돌인 세계가 유일하다.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누구에게 명령을 내리지도, 싸우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있는 때. 그러나 외로움은 느꼈는데, 자신처럼 모든 세계를 자유로이 넘나들게 된 에블린과 함께라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에블린이 동조했을까? 일상에 전전긍긍하던 에블린이라면 그랬을 거다. 이거야 말로 자신이 꿈꾸던 거라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 그런데 이때의 에블린은 이전과 다르다. 특별한 능력치를 지닌 에블린과 연결하여 뭐든 될 수 있어서, 세상을 구할 히어로라서 그런 게 아니라, 용서했기 때문이다. 실패로 점철된 자기 자신을.
It was beautiful.
에블린이 웨이먼드를 택하지 않은 덕에 유명한 배우가 된 세상을 경험한 후, 현재로 돌아와 남편 웨이먼드에게 했던 말이다. 꿈꾸는 표정 때문에 웃음이 절로 났지만, 마냥 재밌게 넘길 장면은 아니었다.
수천 번 생각했을 거다. 웨이먼드 대신 다른 걸 택했다면 자신의 삶이 이토록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았을 거라고. 매번 헤실대면서 긍정적으로만 굴지, 실속 없다고. 그 때문에 지금 이 모양 이 꼴이라고. 남 탓을 하는 건 신기하게도 자기 자신을 탓하는 것이다. 결국 모든 선택을 자신이 했기 때문이다.
실패하는 선택지만 쏙쏙 골라온 스스로가 얼마나 불쌍하고 멍청하게 느껴지겠는가. 비관의 늪에 빠지기 딱 적절한 상태로, 에블린은 살아왔다. 웨이먼드가 끝을 고한 것도 애정이 닳았다기보다는 괴로움 때문이었을 거다. 그와 함께 행복한 미래를 약속했는데, 자신은 에블린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고 말았으니까. 각자도생이 최선이라고 여겼을 거다.
현재 남편인 웨이먼드가 아니라 알파 웨이먼드를 더 의지하고 따르던 에블린을 생각하면 그럴 만하다. 싸움에 능하고, 자신에게 나아갈 방향과 방법을 제시하고, 단호하게 말할 줄 아는 웨이먼드를 훨씬 마음에 들어 했으니까. 배우의 삶을 사는 다른 에블린의 세상에 평생 머물고 싶어 했던 것처럼.
그러나 에블린이 알파 행성에서 온 이들과 완전히 대치 상태에 놓였을 때, 에블린도 조부 투파키처럼 파괴의 기로에 서려고 할 때, 에블린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하다. 남편인 웨이먼드의 절박한 외침으로 말이다. 그가 말했다. 우리 모두 솔직해지자고. 그 이전인가 이후였나. 이 말도 덧붙였다. 자신의 바보 같은 친절함은 생존 전략이라고. 우린 저마다의 방식으로 애쓰며 살아가고 있다고.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그런데 왜 지속적으로 싸우는가. 시작은 이유가 있었을 거다. 그런데 싸움이란 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목적이 흐릿해진다. 모르겠는 순간에 놓이는 거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지? 그러나 솔직하게 이 마음을 드러내는 순간 약점이 될 것만 같다. 싸움은 자신의 옳음을 과시하려는 행위이니까, 강해야 할 것 같은 거다. 모든 생명체는 위협을 느낄 때 그렇다. 검붉은 속 날개를 펼치는 곤충이나 독을 뿜는 전갈이나 뱀처럼.
인간은 주로 분노를 과시한다. 잔뜩 찌푸린 미간에 자극적인 욕설을 퍼붓고, 상대가 굴복할 때까지 극한으로 치닫는 거다. 제가 지닌 물리적 힘과 능력도 내세우며.
그런데 그깟 따사로운 마음이라니.
분노는 강하지만, 따스함은 유약하다. 유약하고도 솔직하다. 아프기 싫고, 누군가를 아프게 하기도 싫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무섭고, 나만 그만하고 싶은 것 같아서 더 무섭다는 걸 대놓고 내보인다. 전쟁터 한복판에 누워서 두 손 두 발 다 든 상태.
'적'이라고 상정한 존재들은 무시무시해 보인다. 하지만 집단이 아닌 각 개인으로 보다 보면, 한낱 인간일 뿐이다. 그들은 원하는 게 있는데 얻다 말하기도 뭣하고, 말한다고 해결이 되지도 않고, 혼자 앓고만 있는 거다. 에블린은 공격하는 대신 그들의 갈망을 들여다본다. 말 못 할 성적 취향이 있고, 신경 통증 때문에 고생 중이고, 자신의 단짝을 애절하게 찾는 각각의 사람.
솔직한 마음을 받아들이고 나니 그 누구도 공격할 여력이 없다. 발라당 바닥에 누워서 행복에 겨울뿐.
영화에서 줄곧 던진 메시지가 이랬다. 죽어라 싸우고 요란법석 피워봤자 한낱 우주 먼지인 인간들. 지구도 우주에 있는 크고 작은 행성들 중에 하나이다. 지구가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면, 인간이 전부라는 생각은 더더욱 말이 안 된다. 무수하디 무수한 존재 중에 하나인 우리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Nothing Matters.
별 거 아니기에 부질없다는 생각으로 삶을 내던지려던 인물, 혼돈 그 자체였던 조부 투파키였다.
그가 만든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암흑, 블랙홀. 영화에서는 이걸 까만 토핑이 박힌 베이글로 유쾌하게 표현하긴 했다만. 조부 투파키는 세상을 휩쓸 생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파괴할 수단으로 베이글을 만들었다. 모든 것을 마음껏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마음껏 될 수 있기에 되레 아무것도 의미가 없던 거다.
가운데가 뻥 뚫린 베이글의 모양새가 그의 표상이었는지도 모른다. 겉은 사악함의 결정체 같아서 모두에게 해를 끼칠 것 같지만, 실은 아무것도 없다. 비어있는 걸 감추기 위해 겉모습을 더더욱 화려하고 시끌벅적하게 꾸며냈는지도 모른다.
다 갖춘 그에게 필요한 건, 정말이지 인간다운 결론이긴 한데, '의미'이다.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해서 아무 의미가 없는 건 아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둘째 치고, 나 하나만 놓고 봐도 그렇다. 나는 나에게 의미 있는 존재다.
이 사실을 보여주는 데에 멀티버스 세계관만큼 적합한 게 있나. 에블린의 모든 선택이 무수히 많은 세상의 에블린을 만들었다. 각각의 에블린은 살아가면서 자신의 환경, 취향, 욕망을 따라 새로운 일을 겪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길을, 새로운 삶을 만들어간다. 아무것도 아닌 그토록 작은 먼지 하나가 이리도 다양한 굴곡을 헤쳐나갔단 말이다.
그러니 살면서 문득, 혹은 지금 당장 자신이 의미 없게 느껴진다면 여태까지의 삶을 돌이켜보자. 셀 수도 없이 많은 선택들을 말이다.
정말, 나 자신이 나에게 아무 의미 없었나?
세무사 디어드리와 에블린은 알파 세계관에서도, 현재 세계관에서도 앙숙이다. 디어드리는 이미 에블린을 문제 투성이라고 여기고, 그런 무지막지한 모습을 에블린은 융통성 없다고 느낀다. 그런데 손이 핫도그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둘은 애틋하고 사랑이 넘치는 관계다. 이런 대비는 클리셰 같은 걸까? 잘 몰라서 멋대로 판단하는 것이지, 알고 보면 나쁜 사람도 착한 사람이라고. 서로 사랑하기 공익 캠페인 같은 휴머니즘일까.
영화의 끝자락. 정해진 기한(당일 오후 6시) 내에 영수증을 다시 정리하라는 디어드리의 마지막 경고는 당연히, 산전수전 다 겪은 에블린이 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이때 에블린은 방망이를 들고 주저 없이 나아가 유리창을 시원하게 깨부순다. 답이 없으니 완전히 미쳐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에블린은 비로소 자기 자신을 드러냈다. 세탁기와 건조기로 그득한 이 공간이 얼마나 지긋지긋할까. 다 엎고 싶었을 텐데 그걸 꾹 참고 누르고 견디기만을 반복했다. 모두가 곪아 터지면서까지. 무모하고도 무책임한 행동. 그거야말로 에블린에게 가장 필요했다. 한 번쯤은 나 몰라라 하고 도망갔어야 했다. 못해먹겠다고.
에블린이 자신의 생존전략을 썼듯 웨이먼드도 자신의 전략을 펼쳤다. 그리고 디어드리는 일주일로 기한을 늘린다. 정말 마지막이라며. 대체 무슨 얘기를 했기에. 에블린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웨이먼드가 한 얘기는 단순한 사실이었다. 자신이 에블린에게 이혼 서류를 내밀었다고. 디어드리도 에블린에게 솔직하게 말한다. 자신도 그 느낌이 뭔지 안다고. 오묘한 동질감과 유대감이 생긴 둘.
마치 다른 핫도그 세계 속 에블린과 디어드리의 관계가 여기까지 이어진 느낌이었다. 에블린들은 전혀 다른 세상에서 전혀 다른 삶을 사는 게 아닌 것 같다. 라쿤에게 요리를 배운 '라따뚜기' 요리사의 이야기로 알게 되었듯, 우리는 혼자가 아니니까. '나'만 해도 내가 무수히 많아서. 지금의 나는 실패만 해왔을지언정 그게 전부가 아닌 것이다.
이 엄청난 교훈과 깨달음을 싣고 영화는 마지막 장면으로 향한다. 예전처럼 세무조사를 받으러 온 상황. 하지만 모든 것이 달라졌다. 함께 온 사람들과 그들 간의 관계, 디어드리와의 관계, 태도, 그 모든 것이. 이미지로 충분히 보여줄 수 있지만, 영화는 딱 한 마디로 전부를 보여준다.
죄송해요. 못 들었어요.
체면 차리느라 속마음 숨기며 애먼 일 벌이지 말고, 솔직 담백하게. 평가받을까 봐 움츠러들지 말고, 자신의 결핍 앞에서 당당히. 우스꽝스럽고, 멋지고, 재밌고, 지루하고, 진지하고, 덤벙대고, 약속을 잘 지키고, 늦고, 웃고, 우는 온갖 모습의 나 자신에게, BE KIND.
끝으로 왓챠피디아에도 남긴 감상을 이곳에 한 번 더 공유해본다.
Nothing matters.
So please, be kind to EVERYTHING EVERYWHERE.
Then you realize the whole world ALL AT ONCE.
우리는 모두 아무것도 아닌 존재랍니다.
그러니 온갖 모습을 지닌 자신을 좀 사랑스럽게 바라봐 주세요.
나 자신의 의미가 완전히 새롭게 보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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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잘 알아요 <별의 아이>
* 제22회 전주국제영화제(오프라인상영작)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별의 아이 Under the Stars(2020)
일본, 드라마, 110분
감독: 오모리 다츠시
네, 잘 알아요 <별의 아이>
일본 한 가정집에서 아기가 자지러지게 운다. 미숙아로 태어나 약한 면역력 탓에 잦은 구토, 발진, 두드러기를 계속 달고 살았던 치히로. 부모는 딸을 위해 시도해보지 않은 의학적 치료방법이 없었고, 더 이상 해 줄게 없는 현실에 우는 자식을 바라보며 매일 밤 숨죽여 울어야 했다. 어린 언니까지 치히로의 뺨에 핀 붉은 연꽃이 사라지기만을 기도했지만 그들의 간절한 바람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어두운 동굴에 갇혀버린 그들을 구원한 건, 의료기술이 아닌 '금성의 은총'이었다. 우주의 기운을 담은 물 한 병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아기를 뒤덮은 붉은 연꽃을 사라지게 했고, 부모에게 다시금 희망과 행복을 선물했다. 이후, 치히로는 '금성의 은총' 외에 수많은 제품을 파는 '우주 에너지' 매거진에 "우주의 은총이 구한 생명"으로 당당히 소개된다.
언니가 빠진 가족사진, 별의 아이는 그렇게 탄생했다.
치히로를 낫게 해 준 금성의 은총은 사이비 종교가 가진 정교한 톱니바퀴 중 하나다. '우주 에너지'에 실린 수만 가지의 제품이 각각의 톱니바퀴로 우주의 무한한 공간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대놓고 맞물려 움직인다. 본래 믿음의 시초를 복기하는 건, 믿기로 한 '개인'에게 한정된, 하지만 무한하게 누릴 수 있는 기쁨이다. 적어도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부모는 현재 자신들이 원하는 삶고 살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우린 금성의 은총으로 시작된 그들의 '우주 에너지'를 향한 굳건한 믿음이 쉬지 않고 타오르고 있다는 점에 집중해야 한다. 치히로가 그 강한 믿음에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새 중학생 소녀가 된 치히로는 여전히 금성의 은총을 가방에 넣고 다닌다. 어릴 적엔 미남을 보고 자신은 물론 가족들의 얼굴까지 흉측하게 보인단 이유로 금성의 안경과 안약을 갖고 다니기도 했다. 부모는 작은 딸에게 생긴 문제의 답을 늘 '우주 에너지'에 찾았고, 문제의 작고 큰 차이점을 고려하지 않았다. 치히로는 이런 부모님의 요구를 지금까지 군말 없이 따랐으나, 그녀의 언니는 거부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집을 떠나 홀로 생활한 언니, 치히로는 언니의 부재를 인정하면서도 겉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입 밖으로 "언니는 가출한 거야."라고 내뱉는 순간 현실이 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생은 늘 "언니는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은 것뿐이야."라 얘기한다.
사건의 긴장감을 높이는 존재는 치히로의 언니 말고도 또 있다. 미나미 선생님, 어릴 적 에드워드 팔롱에 빠졌던 치히로의 가슴을 다시 뛰게 한 장본인. 치히로는 미나미에게 빠져 수업 내내 그의 얼굴을 그리며 영락없는 10대 소녀처럼, 다들 한 번쯤은 빠지는 지독한 짝사랑을 경험한다.
미나미는 그동안 암암리에 숨겨왔던 사이비 종교에 대한 치히로의 의문을 폭발시키는 촉매로 등장한다. 가출한 언니의 기억과 미나미를 향한 짝사랑이 맞물리는 일은 치히로에게 언젠가는 일어나야 할, 예정된 길이었다. 운동장에서 초록색 운동복 차림에 흰 수건을 머리 위에 올려놓고 금성의 은총을 뿌리며 나쁜 기운을 없애는 부모를 향해 "뭐하는 짓이야? 완전히 돌았네."라 일갈하는 미나미. 자신의 부모를 향해 조롱과 멸시를 주저하지 않는 짝사랑남을 지켜보던 치히로는 집에 들어가지 않고 무작정 어두운 도로를 달리기 시작한다.
"너 때문이야. 맨날 아팠잖아."
언니는 초등학생의 치히로에게 마지막으로 찾아와 별의 기운을 막는 커피를 마시며 '사랑'에 대해 털어놓는다. 별 볼 일 없는 남자를 선택한 건 그의 한숨 때문이라면서, 그의 한숨을 통해 나른한 안정감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가족의 울타리에서 충분히 느꼈어야 했던 걸, 언니는 커피만 마시는, 통칭 '쓰레기'에서 찾은 것이다. 치히로는 다신 돌아오지 않을 거란 쪽지를 남긴 언니와의 마지막 대화를 떠올리며 계속 달린다. 그리고 묻는다, 하늘로 붕 떠올라 소리 내 불러도 더는 볼 수도, 찾을 수도 없는 존재에게.
"어떡하지? 어떡하면 좋지? 언니! 이 모든 게 아팠던 나 때문이야? 언니!!"
평상시처럼 의식을 치르고 온 부모는 밥을 안 먹는다는 딸의 말에 만병통치, 흰 수건과 금성의 은총을 준비한다. 단 한 번도 저항한 적 없던 치히로는 그날 처음으로 격렬하게 거부한다. 머리에 얹어진 흰 수건을 악착같이 끌어내리며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 당황한 엄마와 아빠의 눈을 차마 바라보지 못했으나, 치히로는 그날을 기점으로 자신이 반드시 선택해야 함을 깨닫는다.
'나는 무엇을 받아들일 것인가?'
사실 치히로에게 우주 에너지의 균열은 어렸을 때부터 보였다. 그 작은 틈에 손가락을 넣고 크게 만들기 시작한 것도 치히로였다. 금성의 안경을 쓴 채, 그녀는 아픈 게 아니라 외모지상주의에 빠져있다는 뼈 때리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아니 그전에 금성의 은총을 공원 수돗물로 바꿔치기 한 삼촌과 언니의 만행을 알았을 때부터 이미 금이 간 믿음의 실체를 알고 있었다. 엄마와 아빠가 사이비 종교에 빠져 재산을 탕진하고 있다는 친구의 우스갯소리도, 다른 사람들이 금성의 힘을 믿는 부모와 자신을 어떤 눈길로 보고 있는지도 전부 다 알지만, 조용히 숨죽이고 있었을 뿐이었다. 어떠한 때를 기다려서? 아니, 자식을 위해 사이비 종교를 믿는 부모를 외면할 수도, 가만히 이렇게 숨죽여 살 수도 없기 때문이다. 사춘기 소녀의 마음에 자리한 두 갈래 길에서 치히로는 계속 도망치는 중이었다.
<별의 아이>는 고요하면서도 날카롭다. '사이비 종교'를 숨기거나, 볼드모트의 이름처럼 공포스럽게 포장하지 않는다. 부모가 사이비 종교에 빠지게 된 이유를 '딸을 향한 사랑이었다' 밝히는 동시에, 금성의 은총을 지금까지도 맹신하는 것 역시 같은 이유임을 친철히 설명한다. 표면적으로 익숙하게 소비해왔던 사이비 종교의 민낯을 밝히는 일보다 더 중요하게 다룬 건 치히로의 마음이었다. 지금 사건 한가운데에 서 있는 소녀의 마음은 어떤가. 스토리가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처럼 다가오는 건, 그녀가 금성의 은총 덕에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는 주장이 허무맹랑한 사실을 알고서도 제삼자에게 확인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모의 어리석음을 확실히 결론 내지도 않으면서 주인공의 심리를 천천히 풀어내는 점이, <별의 아이>가 사이비 종교가 아닌 인생의 중대한 선택을 앞둔 소녀의 성장을 주제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우린 담담해 보여, 애처롭게 느껴지는 치히로 때문에 치히로 부모를 보며 강렬한 혐오와 멸시보단, 답답함을 느끼는 동시에 모든 인물을 이해하게 된다.
치히로는 미나미에게 놀이터에 있던 이상한 사람이 자신의 부모님이라 고백한다. 하지만 미나미는 이미 잔뜩 화가 나 있다. 학교 내에 치히로와 자신이 사귄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고, 결국 그는 학생들 앞에서 치히로를 대놓고 저격한다. 그림에 몰두해 수업을 듣지 않고, 이상한 물을 마시는 치히로를 꾸짖는다. 그의 폭발로 인해 치히로는 사이비 종교에 빠진, 가까이는 하고 싶은 않은 동급생이 되어버린다. 미나미의 불같은 화에 심장이 멎을 듯 얼어버린 치히로. 그녀는 자신을 위로하는 두 친구에게 억울한 듯, 정말 부모님은 한 번도 감기에 걸린 적이 없다고 말한다. 항상 품었던 물음에 친구는 멋쩍게 웃으며 "나도 감기 한 번도 걸린 적 없는데..."라며 대화를 끝맺는다.
이렇게 <별의 아이>는 계속 치히로가 바라보는 사이비 종교의 허점을, 그 틈을 그녀의 주변인들의 입술을 통해 폭로한다. 앞서 말했듯, 아주 고요하면서도 날카롭게 관객의 비난할 기회를 순식간에 앗아간다.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하지 않았던 사이비 교주가 돌연 치히로의 눈을 통해 등장하는 순간, <별의 아이는> 달라졌을 거다.
엄마와 아빠 몰래 외조부의 장례식장에 홀로 나타난 치히로. 커피를 마시는 치히로에 놀란 삼촌은 조카만이라도 사이비 종교에서 구출하고자 마음먹는다. 치히로에게 고등학교를 삼촌네 집에서 다녀도 좋다는 말과 함께, 너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고 설득한다. 하지만, 소녀의 선택은 단호하다. 집에 돌아가서 부모님과 함께 살겠다는 것.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음에도 두 눈을 힘 있게 뜬 채, 치히로는 부모님을 선택한다.
"네 알아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긴 고민 끝에 치히로가 받아들인 건, 자신을 위해 금성에 헌신하는 부모님이었다. 금성의 기운도, 은총도, 에너지도 아닌 이 모든 걸 신의 뜻으로 여기는 아빠와 엄마. 친구들과는 다른, 너무나 이질적인 삶에 회의를 느끼기도 했으나 아이는 자신을 향한 가족의 사랑을 외면할 수 없었다. 동시에 더는 아팠던 자신의 탓으로 돌릴 수도 없었다. 이미 시간은 흘러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부모님을 만들었으니까. 현실을 부정하는 일은 바보 같은 짓이다. 언니가 언젠가는 찾아올 거란 확신은 어리석고, 부모님에게서 도망치려는 건 무책임한 일임을 이젠 인정한다.
마지막, 치히로는 부모님을 따라 사이비 종교 예배에 참석한다. 사이비 종교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니 믿길 정도로 엄청난 수의 신도와 함께 예배를 드리는 치히로. 신도들 사이에서 서로를 애타게 찾던 치히로와 그녀의 부모는 늦은 밤, 숲 속으로 들어간다. 밤하늘을 수놓은 별을 함께 보기 위해. 금방이라도 별이 쏟아질 것 같은 하늘 아래, 하나로 똘똘 뭉친 치히로의 가족. 아기를 낳았다고 연락을 해온 언니의 소식을 전하면서 "참 잘 된 일이지?"라 말하는 엄마의 얼굴엔 행복만 보인다. 그녀의 얼굴을 보며 소름이 돋지 않는 건 왜였을까. 그들은 다 같이 별똥별이 떨어지는 걸 보기 위해 오랜 시간 그 자리에서 떠나지 않을 거다. 찰나의 순간을 포착해야만 볼 수 있는 별똥별이 치히로와 부모에겐 다른 의미로 다가오겠지만,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사촌 오빠에게 "내 걱정은 하지 마."라고 웃으며 말하던, 삼촌 가족을 만난 뒤 홀로 해변에 서서 바다를 응시하던 치히로가 떠오른다. 가만히 넘실거리는 파도를 보며, 자신의 길을 생각했겠지. 받아들이는 순간, 다른 길이 보인다는 걸 알았을 거다. 물론 그들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겠지. 그러나 치히로는 달라졌다. 영화가 내놓은 건 객관식 보기가 딱 하나인 문제였고, 우린 답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그럼, <별의 아이>의 마지막 장면이 아름답게 보일 거다.
그리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혼란스럽겠지, 치히로는 모든 걸 알면서도 '선택'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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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램> 종교, 인간, 자연 사이를 경계 없이 넘나들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눈 폭풍이 휘몰아치던 크리스마스 날 밤 이후 '마리아(누미 라파스)'와 '잉그바르(힐미르 스나에르 구오나손)' 부부는 양 목장에서 태어난 신비한 아이 '아다'를 선물 받는다. 새끼 양과 인간의 모습이 공존하는 이해할 수 없는 형상을 한 아다이지만, 이미 한 차례 아이를 잃은 바 있는 부부는 아다에게 극진한 사랑을 베푼다. 그러나 우연히 주어진 선물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마리아는 점차 아다에게 집착하기 시작하고, 그녀의 집착은 잉그바르의 형 '피에튀르(비욘 흘리뉘르 하랄드손)'의 등장과 함께 절정에 도달하면서 비극의 시작을 알린다.
발디마르 요한손 감독의 공포 영화 <램>은 기본적으로 기독교적 배경과 밀접하게 연관된 작품이다. 크리스마스 밤을 배경으로 하는 첫 장면부터 그렇다. 알 수 없는 존재가 목장을 찾아온 뒤 한 마리의 양이 임신을 하고, 반은 양이고 반은 인간인 아기 아다를 낳는다. 기독교 교리상 예수가 완전한 신이자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라는 상이한 특성이 공존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떠올려 보면, 크리스마스에 태어난 아다의 존재는 예수에 대한 비유로 보인다. 예수가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어 인간의 죄를 씻어낸다는 점에서 예수가 흔히 어린양에 비유된다는 점, 아다를 입양한 여성 주인공의 이름이 다름 아닌 마리아인 점도 영화에 기독교적 색채를 더한다.
하지만 영화가 성경의 상징을 빌려왔을 뿐 내용까지 반복하지는 않기에 <램>은 종교적 관점에서도 이해할 수 있고, 그 반대의 관점으로 해석 가능하다. 우선 종교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램>은 신의 섭리에 도전한 인간을 향한 징벌을 다룬 영화로 볼 수 있다. 마리아와 잉그바르는 우연히 입양하게 된 아다가 본인들이 잃은 아이 대신 찾아온 축복이라고 생각해 극진한 사랑을 베푼다. 그런 그들에게, 특히 마리아에게 아이를 그리워하는 울음소리를 내는 어미 양의 존재는 자신의 모성애를 위협하는 존재라서 거슬릴 따름이다. 그래서 그녀는 어미 양을 죽인다. 앞서 보았듯이 아다가 예수의 알레고리라면 어미 양은 마리아에게 예수를 보내준 신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이런 마리아의 행동은 신이 정한 소명을 거부하고 신에게 도전하는 행위나 다름없다.
마리아와 잉그바르가 잠시 아다를 잃어버리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부부가 잠시 각자의 생업을 하느라 아다를 신경 쓰지 못한 사이 아다는 사라지고, 아다를 찾아 헤매던 부부는 초원에서 어미 양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아다를 발견한다. 이는 요셉과 마리아가 12살이 된 예수를 예루살렘에서 잃어버렸다가 성전에서 학자들과 토론하는 예수를 발견한 사건과 동일해 보인다. 특히 엄마 양과 함께 있는 아다의 모습은 신이 아버지(하느님)의 집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느냐고 되묻는 어린 예수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그런데 그 직후 두 마리아의 행동은 정반대다. 성경 속 마리아가 이 모든 사건을 마음속 깊이 간직한 채 신에게 순응하는 반면, 영화 속 마리아는 어미 양이 아다를 뺏으려 했다고 여기며 화를 내고 내쫓으려고 한다. 그 외에도 간음과 같은 마리아의 다른 죄가 묘사되는 것까지 고려하면, 영화의 결말은 자신이 거부한 신에 의해 징벌 혹은 응징당하는 인간의 모습을 포착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램>은 정반대의 해석도 가능하다. 성경의 이야기 구조를 뒤튼 새로운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기에 오히려 자유의지와 욕구라는 인간성에 대한 고민을 담은 영화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또 이는 대사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화면과 소리를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는데 초점을 맞춘 효과이기도 하다. 영화 내에서는 특정 상황 또는 장면의 의미가 무엇이다라고 명확히 대사로 정의하는 대목이 거의 없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것은 받아들이는 관객의 생각과 상황, 선입견과 편견에 따라 그 의미가 정반대로 달라질 수 있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마리아의 모성애다. 이미 한 차례 상실을 겪은 바 있는 그녀는 뜻밖에 주어진 아다를 자신의 아이로 받아들여 그 상실감을 채우려고 한다. 이때 아다가 온전한 인간의 형상을 갖추고 있지 않았기에 마리아에게는 그를 양으로 키울지 아니면 인간으로 키울지 선택할 수 있었는데, 그녀는 모성애라는 감정과 욕구에 충실한 선택을 한다. 즉, 갓 태어난 아이를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고 깊이 슬퍼하는 것이 운명이었다면, 그녀가 아다를 입양하는 것은 정해진 운명을 거부하고 새로운 삶의 길을 개척하려는 인간의 의지가 두드러진다. 신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의 추구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저 신의 섭리를 거스른 인간에게 닥친 비극 같던 영화의 결말도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영화는 모든 사건이 끝나고 다소 허망해 보이는 표정을 짓던 마리아가 눈을 감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뱉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는 마치 상실과 슬픔으로 정해진 길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친 것이 더 큰 상실이라는 비극으로 되돌아오더라도, 마냥 운명에 순응할 수는 없다는 인간의 모순적이고 갑갑한 심경을 대변하는 듯하다.
더 나아가 아이슬란드의 자연 배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연출 방식은 마리와 아다의 이야기를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보다 넓은 시점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또 다른 길을 보여준다. 사실 이 영화는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로 가득하다. 마리아와 잉그바르 부부를 제외한 모든 것으로부터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자연이 지닌 초자연성이 드러난다. 죽은 것이 부활하기도 하고, 알 수 없는 존재가 생명을 선사하며, 한 대상이 전혀 다른 대상으로 변하기도 한다.
그런데 영화는 이러한 현상이나 사건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광활한 초원, 높은 산맥과 그 산마저 가려버리는 짙은 안갯속에 매우 작은 부분을 차지하는 인간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 결과 자연이 지닌 초자연적 힘은 이해하기보다는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대상처럼 보인다. 제도 종교에서 정의하는 신의 모습이나 규율, 교리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 범접할 수 없는 광활하고 광대한 자연의 힘 앞에서 인간은 저항할 수 없고 굴복할 수밖에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비록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선택하고 살 수 있지만, 자신들의 선택이 낳은 자연의 결과와 반응 앞에서는 한없이 무력한 존재이기에 겸허해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렇게 자연의 힘 앞에 압도되는 분위기는 <램>이 통상적인 호러 영화는 결이 다르더라도 결국 '호러' 영화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영화의 내용이나 구조, 주제와는 별개로 마케팅적인 측면에서 <램>은 실망스러운 작품일 수 있다. 좋게 말하면 관객들의 니즈를 잘 캐치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낚시를 잘했기 때문이다. <램>의 포스터를 보면 미국의 독립영화제작사인 A24의 로고가 강조되어 있다. A24가 <유전>, <미드 소마>처럼 예술성과 독창성을 모두 인정받은 공포영화를 제작해 관객들의 신뢰를 받고 있는 사실을 셀링포인트로 삼은 것이다. 문제는 A24가 <램>의 배급사이기는 하나 제작사는 아니라는 것이고, 그 결과 <램>은 여러모로 기대와는 다른 영화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는 영화를 그 자체로 온전히 감상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또한 종교와 인간, 자연과 인간 사이의 모호한 경계와 관계를 넘나드는 영화이고, 영화의 형식도 그리 친절하지는 않다 보니 난해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신중하게 끈기를 가진 채 이 기묘한 가족의 일상을 들여다보아야 비로소 영화가 무엇을 말하는지가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하고, 한 번의 관람으로는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난해함과 고민 끝에 무수한 해석이 가능한 것이 <램>만의 매력임을 인정하고 나면, 왜 이 영화가 제74회 칸영화제서 독창성상을 수상하고 제54회 시체스영화제에서는 작품상, 여우주연상, 신인감독상 3관왕을 차지했는지 그 이유를 실감하는 것만큼은 어렵지 않다.
A(Acceptable 무난함)
수없이 곱씹어야 느껴지는 결이 다른 공포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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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편, 참을 수 없는 부담?
2018년. 국내에 개봉한 영화 <마녀>는 318만명의 성적을 기록했다.
손익분기점 230만명을 살짝 넘기는 수준으로 인상적인 흥행은 아니었지만, <신세계, 2013> 이후 <대호, 2015 - V.I.P., 2017>의 연달은 실패를 겪었던 "박훈정 감독"에게는 시사하는 바가 컸다.
<V.I.P., 2017>에서 "여성"을 상대로 한 일부 장면들의 묘사에 비난까지 받았던 그이기에 "여성 캐릭터"를 앞세운 <마녀>의 성공은 그에게 변화이자 도전이었다.
그리고 이에 한껏 고무된 감독은 이내 속편 제작을 밝히기까지 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긴가민가했다. - 그도 그럴 것이 <신세계2013> 도 "프리퀄"의 형식으로 속편 제작을 말했지만, 이내 "시퀄"의 드라마까지 언급되었지만, 무산되었으니까...
여기에 판권을 가진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와의 제작비 규모에 따른 이견이 존재했고, 아시다시피 "워너"는 한국 영화 투자를 철회했다.
이후 "NEW"가 <마녀>의 라이선스를 가져옴에 따라 <마녀 2>는 <신세계 2>보다 먼저, 그의 첫 시리즈가 되었다.1. 김다미가 없는데, 마녀라굽쇼?
제목에도 쓰여있는 '넘버링(2)'은 이 영화가 시리즈이자 후속작임을 알려준다.
이는 전작과의 비교는 불가피하다는 이야기로 '잘 계승했을까?'라는 전작 팬들의 기대 혹은 걱정 섞인 질문으로 연결된다.
결과부터 말하면, 이번 <마녀 2>는 전작보다 아쉬움이 많았다.
이런 이유에는 결국, 기존 판권을 가졌던 "워너"와의 주요 갈등 원인이었던 '이야기의 스케일(혹은 제작비의 압박)'로 보인다.전작의 주인공 "자윤"을 살펴보면, 자신이 누군지도 모른 채 양부모의 손에서 자란다는 설정이 있다. - 이는 <롱 키스 굿 나잇, 1996>부터 시작해 <본 시리즈, 2002-16>까지 '클리셰'적인 부분이다.
그럼에도, 이를 하나의 반전으로 적용했고 이 과정에서 "김다미"라는 배우를 관객들에게 소개하며 그녀의 영화라고 각인까지 시켰다.
근데, 이번 <마녀 2>에서는 "김다미"가 나오지 않는다는 건 무슨 상황인가? (엄밀히 말하자면, 카메오 수준이다)2. 언니랑 싸우면 되겠어? 안되겠어?
근데, 이런 방식은 처음이 아니다.
"M. 나이트 샤말란"이 선보인 <23 아이덴티티, 2017>만 보더라도, 이후 쿠키에서 <언브레이커블, 2000>의 "브루스 던"이 등장하는 "이스트레일177 트릴로지"가 그런데, 서로 다른 영화의 주인공으로 선과 악을 대표하는 두 캐릭터는 이후 <글래스, 2019>에서의 대결을 예고시켜 관객들의 기대치를 끌어모았다.
이처럼 이번 <마녀 2>의 주인공 "소녀"와 전작의 "자윤"의 만남은 3편에서의 대결을 그리는 것은 아닐까?하지만, 이번 <마녀 2>의 "소녀"는 전작의 "자윤"보다 못한 느낌이다. (언니보다 못한 느낌이랄까?)
이런 이유에는 극 중. "백총괄"이 "자윤보다 소녀가 더 강하다"라는 설정상 정리도 있지만, 한국 혹은 한 시골과 연구소에 그친 전작에 비해, 전 세계적으로 넓혀진 스케일도 있다.
극 중. 연구소에서 나온 "소녀"를 쫓기 위해 본사의 "조현"과 "장"외에도 중국, 미국(조력자) 등 다채로운 언어들을 보듯이 캐릭터들까지 많아진 규모 확장은 <마녀 2>뿐만이 아니라 후속작들이 으레, 밟아온 규칙이다. (오히려, 작아졌다면 그게 더 섭섭하다) - 그러나, 그만큼 이야기의 밀도가 옅어지는 건 어쩔 수 없던 것일까?3. 파워 인플레에 희생된 배우님
전작에서 "자윤"을 구해준 양부모와 동네 친구 등의 캐릭터들은 그녀의 일상적인 모습을 담기도 했지만, 이내 "반전(능력 각성)"이라는 장치에 효과적으로 다가왔다.
그런 점에서 이번 속편의 "경희 - 대길 남매"의 역할도 이와 다를 것이 없지만, 어째서인지 똑같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는 전작과 똑같은 레퍼토리에 받아들이는 이야기가 피로한 점과 "연구소를 나갔다"라는 중요한 사실을 말하고 시작한 이유가 크다.그래서, 이들을 주역으로 올리기 위해 "용두"라는 악당을 등장시킨다. - 특히, 본사의 "조현"과 "장"이라는 악당들보다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함에도 큰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
무엇보다 더 강한 악당들의 존재에 위상마저 깎이는 "파워 인플레이션"까지 보여줘 아쉬움만이 가득한 행보를 보여준다.
물론, "소녀"의 각성을 위한 캐릭터라고 하나 '이를 위해서, 135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을까?'라는 군더더기 가득한 의문과 함께 향후 시리즈의 앞날도 불안하기만 하다.· tmi. 1 -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가고 1개의 쿠키 영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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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CFF 데일리] 기울어진 세상을 헤엄쳐
SYNOPSIS.
위험에 빠진 아이, 이상하고 귀여운 수호 동물과 마주치다
PROGRAM NOTE.
절친 타이스와 함께 수영 대회를 준비 중인 열한 살 소녀 아마. 아마는 스스로 네덜란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세네갈 출신인 아마의 부모님은 망명 신청을 거절당해 더이상 합법적으로 네덜란드에 거주할 수가 없다. 어느 날 남동생과 엄마가 불시에 잡혀가고, 도망친 아마는 아빠를 찾아 헤매던 중 거대한 호저가 자신을 따라오고 있음을 알게 된다. <나의 수호신>은 네덜란드에 있는 수많은 불법 이민자들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현실에서 착안한 판타지 영화다. <나의 수호신>은 자신의 집이라 생각했던 곳에서 쫓겨나는 상황에 직면한 아이의 이야기를 통해 ‘집의 의미’를 묻는다. 이민자 이슈는 현대 사회에서 가장 큰 논란 중 하나이지만, <나의 수호신>은 인권이라는 큰 틀 안에서 우정과 연민의 힘으로 해피엔딩을 맞는 동화 같은 이야기를 통해 현실의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기를 소망하는 작품이다. (최은영)
우리가 사는 도시를 집어들고 가방 털 듯 탈탈 털면, 거기서 후두둑 떨어지는 동물들은 개, 고양이, 햄스터… 같은 것만이 아닐 거라는 이야기를 어디에서 읽었더라. 생각지 못한 동물들이 후두둑 떨어질 거라는, 정글에서나 볼 거라고 생각했던 동물들이 실은 우리와 같은 도시에 살고 있다는 그 말을.
그렇다면 사람은 어떨까. 나와 비슷한, 아주 닮지는 않았어도 대충 엇비슷한, 그리고 나와 다르지만 대충 예상했던 사람의 범위, 그 바깥의 누군가를 분명 마주하게 되지 않을까.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도시 한복판에서 마주칠 거라 생각하지 않듯이.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익숙한지 아닌지 고작 그 문제다. 누군가의 상상력 하나로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이 우리에게 너무 익숙해진 것처럼.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그려 본다면, 우리 모두 똑같이 그릴 수 있을 것처럼.
우리의 주인공 아마는 그렇게 도시를 탈탈 뒤집으면 조금 당혹스러울 법적 지위를 가진 채로, 네덜란드 로테르담에 살고 있다. 성격도 밝고, 공부도 잘하고, 네덜란드 최고의 수영 선수를 보며 꿈을 무럭무럭 키우고 있는 될성부른 수영 유망주 어린이이기도 한데, 대회 하나를 나가려고 해도 ‘써도 될 것’과 ‘써서는 안될 것’을 신중하게 골라내야 하는 처지에 있다.
아마가 사는 집은 그 자체로 하나의 마을 같다. 아이들을 씻기고 자신도 씻기를 즐겨 하는 이웃이 샤워기를 틀면 계단참으로 물이 주르륵 흐르는, 그만큼 연결되어 있는. 그러나 아마의 가족은 이런 상황에 불평을 일삼기보다 자연스러운 생활의 풍경으로 받아들이면서 살고 있다. 아빠와 장난칠 때나 썼던 소금 통 하나를 사러, 그 심부름 하나로 아마의 생활이 영영 달라질 때까지는.
집에 있던 아마의 어머니와 동생은 “불법 이민자”여서 잡혀 가고, 아마는 놀이터에 숨어서 일을 나가신 아빠를 기다린다.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아마의 세상이 전체적으로 기울어 있음을 관객은 이내 깨닫게 된다.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앵글이 항상 기울어 있다. 학교도, 경찰서도, 집 바깥도, 전부 다 기울어 있다. 아마가 아빠를 찾아 들어간 “드 로테르담” 건물, 아빠의 일터 또한.
이 기울기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것이다. “불법 이민자”에 대한 편견은 말할 것도 없고, 아마는 스스로가 네덜란드 사람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자랐기 때문에, 자신이 불법 이민자이고 그 편견 속에 살아가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사무직과 청소 일에 대한 편견도 가지고 있다. 아버지가 일한 업체의 이름은 Sunshine services이지만, 역설적으로 선샤인이라고는 전혀 빛나지 않는 밤에만 일하고, 밤으로 취급받는다. 세계가 기울어 있는 것이 사실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 서글픈 현실에 갑자기 거대한 호저가 나타난다. 영화 자막에서는 고슴도치로 번역되었지만, 호저는 고슴도치와 다르다. 꿀벌과 말벌 정도의 차이랄까. 고슴도치가 가시를 있는 힘껏 세워도 멀리서 (그러니까 그 가시가 나를 공격하기 않을 거리에서) 보면 귀엽겠지만, 호저가 가시를 세우는 모습을 멀리서 보면… 그로테스크하다.
나는 호저라는 생물이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호저를 처음 봤는데, 심지어 인도의 동물원에서 야행성 동물들을 모아 놓겠다고 조명을 있는 대로 침침하게 해 둔 어둠 속에서 그 가시가 파르르 서는 모습으로 처음 보았다. 뭔데 저거. 뭐야. 왜 무서워. 무서움을 익히 아는 다른 동물보다, 전혀 모르는 생물의 가시가 더 무서웠다. 알고 보니 호저는 정말 만만치 않은 생물이었다. 호저의 가시에 공격을 받으면 맹수도 배겨낼 재간이 없다.
그러나 이 영화, <나의 수호신> 원제인 ‘토템’답게, 이 영화 속 거대한 호저는 귀엽기만 하다. 도시 속의 사람은 내지 못한 위로의 울음소리를 호저가 낸다. 제목이 <나의 수호신>인데 자막에는 ‘토템’으로 나와, 수많은 어린이 관객들이 엄마에게 “토템이 뭐야?”를 물어야 했음은 아쉬운 포인트지만… (참고로 네이버 국어사전에 따르면 토템은 “부족 또는 씨족과 특별한 혈연관계가 있다고 믿어 신성하게 여기는 특정한 동식물 또는 자연물. 각 부족 및 씨족 사회 집단의 상징물이 되기도 한다.”)
커피 머신도 사랑이 필요하다며 쓰다듬는 사람이 있는 도시에서, 아마는 그저 호저와 함께 걷는다. ‘상상 속의’ 존재가 아니라면 같이 걸을 상대도 없는, 대도시 속 외로운 아이의 삶. 집이었던 곳은 경찰과 개의 손에 마치 범죄자의 소굴처럼 취급되며 서슴 없는 수색의 대상이 되지만, 호저는 깡통 차기 놀이 상대가 되어 준다. 마치 전통 속 여우 사냥의 한 장면처럼, 아마가, 사람이, 개에게 쫓기는 장면이 현실에서는 연출되지만 호저는 파르르 가시를 세워 아마를 지켜준다.
극중에서 호저를 볼 수 있는 인물은, 아마와 마음의 결을 같이 하는 이들뿐이다. 애초에 아마의 옆에 서 있었던 이들을 제외하면, ‘그리오grio’ 그러니까 가수이자 시인인, 노래로 이야기를 전해 이야기가 사라지지 않게 하는 일을 사명으로 품은 이들밖에 없다. 이는 영화를 포함한 예술의 기능 중 주요한 한 지점을 짚는다. 기울어진 세상에서도 노래는 계속되어야 함을.
‘온 세계가 당신의 조국’이라는 네온사인이 무의미하게 빛나는 거대한 도시에서, 정작 도시 안에서 평생을 자란 사람을 밀어내는 도시에서, 아마는 호저의 등에 올라 기울어진 세상을 걷는다. 이 차가운 현실에, 이야기 하나를 놓는다. 그 순간 세상은 변한다.
기울어진 세상에서도 ‘상자 바깥에서, 틀을 깨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쩌면 그들이 그리오grio의 후예, 그러니까 이야기가 잊히지 않도록 하는 이들인지 모르겠다. 아마가 외로운 여정을 걷는 내내 곳곳에서 아마를 먹이는 손길이 있었듯이, 이 외로운 도시를 가방 뒤집듯 탈탈 털면, 생각지도 못한 동물들이나 사람들과 함께, 환대의 손길 또한 함께 후두둑 떨어질 것이다.
아마는 앞으로도 기울어진 세상을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아마의 정체성은 ‘네덜란드인’에서 ‘경계인’으로 달라졌을 것이다. 사실은 우리 모두 경계인임을 우리는 언제 깨달을 수 있을까. 여기 계속 사는 거냐는 질문, 아마와 타이스 두 아이의 물음에 부모님의 대답은 동일했다. “그래, 당분간은.” 이사를 가든 추방을 가든, 결말이 어떻든 우리 여기서 당분간은 살아갈 존재들임은 동일하다. 도시를 뒤집어 탈탈 털면 후두둑 떨어질 존재들이라는 사실만큼은 동일하다.
그게 다르게 취급되는, 기울어진 세상을 우리 살아가지만, 이 기울어진 세상에서 노래와 환대의 손길은 계속되니, 새처럼 날아드는 그 손길과 멜로디를 따라 계속 헤엄쳐갈 일이다. 씩씩하게!
9월 15일 20:00-21:37 롯데시네마 은평 5관
9월 17일 16:00-17:37 롯데시네마 은평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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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 / Lars and the Real Gi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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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 / Lars and the Real Gi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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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거리 /
남에 대한 배려가 깊고 착한 심성의 ‘라스’(라이언 고슬링). 결혼한 형의 바로 옆집에 살고 있는 그는 너무나도 수줍음이 많은 청년이다. 직장에서 관심을 보이는 여자 동료의 호의도 모른척하고, 매번 식사에 초대하는 형수도 부담스러워 어떻게든 피하는 데에만 급급한 대표 소심남.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여자친구를 소개하겠다고 하자 외롭게 사는 그가 안쓰럽기만 했던 형과 형수는 뛸 듯이 기뻐하며 라스와 여자친구를 저녁식사에 초대한다. 그런데 숫기 없는 그가 조심스럽게 소개한 여자친구 ‘비앙카’는 다름 아닌 리얼 돌(Real doll)!!
너무 놀라 말을 잇지 못하는 형 부부에게 첫 여자친구 소개를 무사히(?) 마친 라스는 그 날 이후 비앙카를 교회와 직장 파티에 데려가고, 어릴 적 즐겨 놀던 호숫가에도 함께 가는 등 본격적으로 데이트를 시작하는데…
주변 사람들에게는 당황스러운, 하지만 라스에게만은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 ‘비앙카’. 과연 엉뚱 기발한 라스의 첫 연애는 성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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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상 /
영화를 선택하게 된 이유..는.. 딱히 없고 그냥 끌려서 보게 된 영화다.
그러다 보니 별 기대도 없었고, 줄거리에 '리얼돌'을 여자친구라고 데리고 온 주인공의 이야기라길래 오타쿠같은 주인공의 이야기겠거니.. 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주인공 라스에게 리얼돌 비앙카는 단순한 연애상대가 아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비앙카는 라스에게 있어서 소통창구인 것 같았다.
라스는 비앙카를 중간매개체로 사람들과 소통을 한다.
그가 사람들한테하고 싶었던 말들을 비앙카의 일인것처럼 말하며 본인의 마음을 간접적으로 들어내는 점을 보면, (이건 나의 생각)
어쩌면 라스에게 있어서 비앙카는 소통창구 이상의 존재였던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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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온전히 받아주고, 자신을 온전히 들어낼 수 있는 존재
그동안 이런 존재가 라스에게 부재했음을 영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자신을 낳다가 돌아가신 어머니,
항상 우울하셨던 돌아가신 아버지,
이런 집안이 싫어 성인되자마자 집을 나가버린 형,
그리고 그곳에 덩그러니 남겨진 라스.
이후 형의 결혼으로 결국 차고에서 생활하게 된 라스.
라스에게는 의지할 곳이 없었다.
그리고 '영원'이라는 것도 없었다.
다들 그의 곁을 떠나가버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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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는 자신의 곁에 '영원히' 있어 줄 비앙카를 맞이함으로써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상처를 하나하나 치유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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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나를 외면한 줄만 알았는데,
사실 다들 나를 너무 사랑하고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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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서는 라스도 라스지만,
이웃사람들의 태도도 정말 인상깊다.
특히, 카린.
자신의 친남동생도 아닌 자신의 남편의 남동생이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며
항상 자신을 거부하는데도 그 모든 것을 이해하고 헤아려주는 모습이 너무 감동적이었다.
라스의 모든 일들에 같이 슬퍼해주고, 같이 기뻐해주는 모습이 정말 인상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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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내용도 내용이지만, 라이언 고슬링의 연기도 잊을 수 가 없다.
왜, 라이언 고슬링 하면 떠오르는 영화에 이 영화가 들지 않는지 모르겠다.
내가 본 라이언 고슬링의 영화들 중 가장 인상깊은 영화였고,
가장 인상깊은 연기였다.
다른 배우가 대체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라이언 고슬링은 라스에 정말 잘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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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인상깊은 씬
1) 라스가 비앙카보고 죽지말라고 울부짖는 씬
2) 라스가 마고의 곰인형한테 CPR해주는 씬
(심지어 이 씬은 라이언 고슬링의 애드리브였다고..정말 귀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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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한동안은 누가 나한테 영화 추천해달라 하면 이 영화를 추천해줄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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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킹스맨 : 퍼스트 에이전트》 영국 역사 속 실제 기록 그리고 1차 세계대전 역사ㅣ킹스맨 프리퀄ㅣ
? 영화 '킹스맨:퍼스트 에이전트 (King's Man, 2020)' 예고편 분석영상
- 스태프
제작사: 20세기 폭스, 마브 스튜디오, 클라우디 프로덕션
배급사: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 모션 픽처스,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장르: 액션, 스릴러
감독: 매튜 본
제작: 매튜 본, 데이빗 리드, 애덤 볼링
각본: 매튜 본, 칼 가이듀섹
원안: 매튜 본
출연진: 해리스 디킨슨, 레이프 파인스, 젬마 아터튼, 다니엘 브륄, 자이먼 혼수, 스탠리 투치 외
음악: 헨리 잭맨
개봉일자: 2020년 9월 18일-킹스맨 시리즈 프리퀄
1차 세계대전 배경
#킹스맨퍼스트에이전트 #킹스맨 #킹스맨퍼스트에이전트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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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오는 날 헤어져본 사람...? 연애할 때 찌질해지는 순간들 (500일의 썸머, 연애의 온도) 연애 영화 현실 리뷰
영화 드라마 모두 마사지하듯 시원하게 이야기로 풀어드립니다!
씨네마사지 ?
씨네마사지 비주얼 특집!?
YG 케이플러스의 비주얼 모델들이 떴다!
모델돌 ATO6의 현우와 용국, 모델 출신 배우 고이진 그리고 여연희 까지~
훈훈한 남녀들을 모아놓고 달달한 연애영화를 주물러 봤습니다
#500일의썸머 #건축학개론 #연애의온도 #에이투식스 #ATO6 #현우 #용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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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provided by 브금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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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텍사스 전기톱 학살 2022> 공식 예고편
텍사스의 외진 마을에서 살가죽 가면이 사라진 지 50여년. 꿈에 부풀어 이곳에 도착한 젊은 친구들이 그가 숨어 살던 은신처를 건드리고 말았다. 이제 다시 깨어난 살인마가 무시무시한 정체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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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가족의 색깔> 메인 예고편
남편 ‘슈헤이’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슌야’와 단둘이 남게 된
‘아키라’는 오랜 시간 왕래가 끊긴
슈헤이의 아버지 ‘세츠오’를 찾아간다.
세 사람은 어색한 동거를 시작하고,
아키라는 철도를 좋아하는 슌야를 위해
기관사가 되기로 결심하는데···
우리는 진짜 가족이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