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3-12-25 16:51:15
<레벨 문> | 차라리 스타워즈 스핀오프였다면...
넷플릭스 <레벨 문: 파트 1 불의 아이> 리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변방 행성 벨트의 한 농촌에 마더월드의 군대 임페리움을 이끄는 '노블'(에드 스크레인) 제독이 나타난다. 그는 촌장을 때려죽인 후 다시 돌아올 때까지 군대를 먹일 식량을 준비하라고 협박한 뒤 떠난다. 농촌 주민들이 공포에 질려 어찌할 바를 모르자, 과거 마더월드의 장교였던 자기 신분을 숨긴 채 지내던 '코라'(소피아 부텔라)가 마침내 목소리를 낸다. 어차피 노블 제독이 우리를 모두 죽일 테니, 그전에 그들과 싸울 준비를 하자고.
이에 친구 '군나르'(미힐 하위스만)와 함께 노블 제독에 맞설 전사를 찾아 나선 코라. 그녀는 항구 도시에서 만난 '카이'(찰리 허냄)의 도움을 받아 은하계 각지에 흩어진 숨은 전사들을 발견한다. 노예가 된 왕자 '타라크'(스타즈 네어), 갓을 쓴 검사 '네메시스'(배두나), 임페리움에 반기를 든 전설적인 장군 '타이투스'(자이먼 혼수), 저항군의 리더 '다리안 블러드엑스'(레이 피셔)까지. 그러고는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에 나선다. 마더월드의 폭정에 맞서 벨트를 구할 영웅들과 함께.

황새 쫓다 가랑이 찢어진 뱁새, <레벨 문>
<스타워즈>. 스페이스 오페라의 고전. 첫 등장 이후 40년이 지나도 인기를 유지 중인 미국의 신화. 사실 <스타워즈> 이야기는 명성에 비해 그다지 참신하지 않다. 좋게 말하면 왕도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클리셰로 가득하다. 조지 루카스가 조지프 캠벨의 연구를 차용한 결과물이기 때문. 캠벨은 여러 신화가 공유하는 모티브를 정리했고, 그 내용은 루크 스카이워커와 다스 베이더의 서사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대신 <스타워즈>는 다른 영역에서 독자적인 매력을 구축했다. 이야기는 평범해도, 그 이야기가 펼쳐지는 세계관은 특별했다. 다양한 행성과 생명체, 제다이와 시스의 갈등, 현실세계로 역수입된 광선검 결투, 임페리얼급 스타 디스트로이어와 X-윙 같은 전투기, 여러 외피의 드로이드까지. 익숙한 이야기를 따라가면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던 은하계를 탐험할 수 있는 게 <스타워즈>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
이는 넷플릭스의 <스타워즈>를 꿈꾼 잭 스나이더 감독 신작 <레벨 문: 파트 1 불의 아이>의 실수이기도 하다. 본래 스나이더가 <스타워즈> 스핀오프로 기획한 <레벨 문>. 이 프로젝트는 디즈니의 루카스필름 인수 후 취소됐고, 넷플릭스에서 되살아났다. 그런데 이상하다. <레벨 문>은 더 이상 <스타워즈> 세계관에 속하지 않는데, 여전히 <스타워즈>를 답습한다. 그 결과 <레벨 문>은 <스타워즈>의 강점 대신 약점만 노출하고 말았다.

첫 번째 실수: <스타워즈>의 세계를 답습하다
할리우드의 스페이스 오페라 영화가 <스타워즈>로부터 벗어날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스타워즈> 세계관을 부정하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것인가? 아니면 유사한 세계관 속에서 참신한 이야기를 보여줄 것인가? 가렛 에드워즈의 <크리에이터>는 전자라 할 수 있다.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의 감독인 그는 스타워즈 세계관의 근간인 '프런티어 정신'과 '오리엔탈리즘'을 정면으로 부정하며 독자적인 세계관을 그렸다.
<레벨 문>은 후자다. 이름과 외양만 다를 뿐, <스타워즈>의 세계관을 이어받았다. 마더월드와 은하 제국은 전 우주를 억압하는 군국주의 권력이다. 왕을 시해하고 권력을 찬탈한 섭정 벨리사리우스는 황제를, 반은 인간이고 반은 사이보그인 노블 제독은 다스 베이더의 변형이다. 그들의 관계도 유사하다. 황제가 다스 베이더를 겁박하고 이용했듯이, 섭정 역시 노블 제독을 장기짝으로 다룬다.
주인공 삼인방인 코라, 군나르, 카이는 루크, 레아, 한 솔로 삼총사를 연상케 한다. 루크와 레아의 성별과 신분을 맞바꾸고, 한 솔로를 더 비열하게 만든 게 전부다. 마더월드에 대항하는 저항군과 은하 제국에 맞서는 반란 연합은 규모도, 위상도, 역할도 유사하다. 일반 함선으로는 맞설 수 없는 함선 '킹스 게이즈'의 존재 역시 <스타워즈> 속 스타 디스트로이어의 대체재나 다름없다.
문제는 <스타워즈>의 본래 장점도 세계관이라는 것. 달리 말해 <스타워즈>가 40년이 넘도록 쌓아 올린 세계관을 답습한다면, 그 작품은 결코 <스타워즈>로부터 차별화될 수 없다. 실제로 <레벨 문>은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스타워즈>와의 비교를 끝끝내 피하지 못한다. 왜 이 영화가 <스타워즈>가 아닌 다른 제목을 달고 제작되어야 했는지 그 이유를 찾기 어렵다.

두 번째 실수: 또 다른 고전을 답습하다
그렇다면 <레벨 문>은 스토리텔링으로 승부를 봐야 했다. <스타워즈>의 도식적인 이야기와 확연히 다른, 참신하고 치밀한 이야기로 관객을 매료해야 했다. <레벨 문>은 그러지 못했다. <스타워즈>라는 클래식에 또 다른 고전, <7인의 사무라이>를 더했다. 자연히 <레벨 문>의 러닝타임 148분은 모두가 이미 알고, 예측할 수 있는 평범한 이야기로 가득 차 버렸다.
물론 잭 스나이더의 의도는 추측할 수 있다. 그의 연출작은 한 가지 경향성이 있다. '에픽'을 좋아한다는 것. 그는 자기 신념을 관철시키려는 인물의 투쟁을 웅장하고 장엄한 서사시로 그려내는 데 관심이 많다. <300>, <맨 오브 스틸>, <배트맨 대 슈퍼맨>, <왓치맨>, <저스티스 리그> 모두 마찬가지다. 바로 여기서 <스타워즈>를 배경으로 <7인의 사무라이>를 보여주려 한 이유를 유추할 수 있다.
사실 명작이라는 점과 별개로 <7인의 사무라이>는 스케일이 큰 영화가 아니었다. 한 농촌을 배경으로 도적 떼와 사무라이 7명이 싸우는 이야기였다. 잭 스나이더는 이 이야기를 서사시로 바꾸려 한다. 자유의 투사들이 정의롭지 않고 부당한 탄압에 맞서는 우주적 대서사시를 꿈꾼 셈이다. 그래서 그는 스타워즈를 빼닮은 세계관을 더해 도적 떼를 마더월드로, 7인의 사무라이도 마더월드에 복수하려는 영웅들로 바꿨다.
문제는 잭 스나이더의 큰 그림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점이다. 선악을 딱 잘라 나눈 이분법적인 구도는 이제 소구력이 없다. 당장 <스타워즈> 시퀄 시리즈도 은하 제국을 퍼스트 오더로, 반란 연합을 저항군로 변형했다가 발전한 게 없다는 비판을 못 피했다. 파시즘, 공산주의 같은 거악과 싸우는 시대가 아닌 상황에서 이분법적 구도는 구시대적이니까. 근래 히어로 영화, 첩보 영화가 괜히 선악 구분을 모호하게 만든 게 아니다.

세 번째 실수: 허점이 많은 플롯
큰 그림의 매력이 부족한 가운데, <7인의 사무라이>를 차용한 플롯도 안일하다. 벨트의 한 농촌을 구하기 위해 전사를 모으는 게 주된 내용이지만, 정작 코라가 조력자를 모으는 과정이 빈약하게 제시된다. 일례로 코라가 무슨 수로 타이투스 장군과 블러드엑스 남매를 찾을 것인지 그 계획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녀는 항구 도시 술집에서 타이투스 장군을 아는 사람을 찾아 헤매는 것 이상의 비전을 못 보여준다.
대신 술집에서 우연히 만난 카이에게 전적으로 의존한다. 우주선도 카이에게 빌리고, 티라크와 네메시스라는 전사도 카이에게서 추천받고, 벨트로 돌아가는 항로도 카이가 정한다. 즉, 마더 월드의 폭정에 저항하는 투사로서도, 섭정의 양녀이자 엘리트 군인으로서도 코라는 걸맞은 능력을 거의 보여주지 못한다. 그러니 우연의 일치일 뿐이고, 연속성도 부족한 코라의 여정에는 재미가 붙지 않는다.
각 캐릭터의 매력도 못 살렸다. 시리즈의 시작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각 인물을 소개하고 그들이 한 팀이 되는 과정만 잘 보여줘도 <레벨 문>은 제 역할을 하는 셈이다. 하지만 <레벨 문>은 그저 캐릭터를 나열할 뿐이다. 그들의 전사, 능력, 심경 변화, 팀에 합류하기로 한 동기 등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노블 제독의 입을 빌려 그들의 프로필을 하나하나 읊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코라와 군나르가 그들을 한 명씩 만나는 내용은 그저 다음 시리즈를 위한 발판 같아 보인다.

마지막 실수: 본연의 장점마저 잃었다
물론 잭 스나이더를 위한 변명이 있기는 하다. 그의 장점은 본래 스토리텔링이 아니다. 분량 제한이 없는 스트리밍 환경에서 공개된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 <아미 오브 데드>도 개연성이나 완급 조절 문제를 못 피했을 정도다. 대신 비주얼과 액션 연출은 특출 난 장점이었다. 그가 기획한 DCEU의 비주얼은 만화책을 찢고 나왔다는 평을 받았고, <300>과 <맨 오브 스틸>의 액션은 다른 블록버스터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레벨 문>에서는 잭 스나이더 본연의 장점을 찾기 어렵다. 비교적 저예산으로 스페이스 오페라에 걸맞은 비주얼을 보여주기는 했다. 렌즈 플레어 효과를 적극 활용한 총격씬과 폭발씬은 시선을 사로잡을만하다. 그러나 몇몇 장면에서는 그린 스크린에서 촬영한 티를 숨기지 못했고, 잭 스나이더의 특징인 슬로 모션도 남발돼 몰입도를 저해한다.
또 합을 맞춘 티가 많이 나는 액션씬도 기대 이하다. 코라가 마더월드 군인들과 싸우는 초반부, 네메시스가 광선검 비슷한 검을 든 채 거미 괴물과 맞서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에 더해 슬로 모션을 남발한 결과 생동감도 살지 않는다. 그나마 타라크가 배누를 길들이는 장면이 인상적이지만, 진부함을 피하지는 못했다. <아즈카반의 죄수>에서 해리가 히포그리프를, <아바타>에서 제이크가 이크란과 교감하는 장면을 빼닮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스타워즈> 스핀오프였다면 어땠을까 싶다. <스타워즈>의 일부라면 익숙하거나 진부한 설정도 '<스타워즈>니까'라는 이유로 용인했을지 모른다. 어쩌면 <로그 원>이나 디즈니+ 드라마 <안도르>처럼 호평을 받았을 수도 있다. 제다이와 시스의 대결, 광선검 액션을 반복하는 대신 색다른 이야기를 보여준 것만은 확실하니까.
애초에 기획과 아이디어에 대한 평가도 달라질 수 있다. <스타워즈> 자체가 서부극에 근간을 뒀고, 조지 루카스도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로부터 영감을 받은 흔적이 많기 때문. 그러니 '초심에 가까워진 시리즈' 같은 식의 평가가 나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스타워즈>가 아니면서 <스타워즈>를 닮으려 애쓰고 있으니, 모두 무의미한 가정일 뿐이다.
종합하면, <레벨 문>은 넷플릭스의 <스타워즈>라는 야심만 있을 뿐, 야심을 실현할 방법론은 볼 수 없는 영화다. 잭 스나이더에게 과제를 잔뜩 안겨준 듯 보이기까지 한다. 언뜻 흥미로워 보이는 아이디어의 스케일만 키우는 대신, 이야기의 밀도를 높이는 근본적 쇄신이 먼저라는 사실을 증명했기 때문. 그래야 잭 스나이더와 넷플릭스가 각각 삼부작으로 계획한 <아미 오브 데드>와 <레벨 문> 시리즈도 안정적으로 확장될 수 있을 테니.

Dreadful 끔찍한
<스타워즈>를 기대해도, 잭 스나이더를 기대해도 실망스러운 2시간 반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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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WFF 데일리] 새처럼 왔다 가는
SYNOPSIS
재능 있는 조각가인 리지는 새로운 전시를 준비하며 예술가로서의 삶과 가족, 친구 등 일상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문제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애쓴다. 리지는 사는 집의 주인이자 예술가 라이벌이기도 한 조와 사소한 사건들로 갈등을 겪고,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오빠 숀의 상태도 살펴야 하는 상황이다. 전시 개막일은 점점 다가오는데, 리지는 과연 무사히 전시회를 열 수 있을까? 〈웬디와 루시〉(2008),〈퍼스트 카우〉(2019) 등 미국 사회의 현재적 삶을 내밀한 시선으로 다뤄 온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신작. 2022년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화제작을 아시아 프리미어로 선보인다.
PROGRAM NOTE
〈쇼잉 업〉은 예술가를 주인공으로 삼지만 굴곡진 서사나 드라마틱한 사건과는 거리가 멀다. 전시를 앞둔 리지는 사소한 일들로 골머리를 앓는다. 예술가 동료이자 리지가 사는 집의 주인이기도 한 조는 보일러 고장 문제를 나 몰라라 하고, 흩어져 사는 가족은 저마다 리지에게 근심과 걱정을 불러일으킨다. 전시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작업에 집중할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짜증과 불안이 쌓여가지만, 주변에 그걸 알아채 주는 이는 없다. 켈리 라이카트의 주인공들이 줄곧 그랬듯 리지도 꽤나 고독한 인물이다. 오리건과 몬태나의 풍광 속을 확신 없이 지나던 이들처럼 리지 또한 삶의 어느 시기를 천천히 지나는 중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공통점. 이들에게는 곁을 내주고 돌봐야 할 동물이 있다.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여성감독 중 하나인 라이카트는 〈퍼스트 카우〉로 19세기 미국의 풍경을 바라본 뒤, 오리건의 작은 도시 포틀랜드를 배경으로 지역 예술가들의 활동과 끊임없이 무언가 만드는 삶의 모습을 포착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쇼잉 업〉에서 두드러지는 건 찰흙, 직물, 실 같은 우리 주변의 평범한 재료를 계속해서 만지는 손짓이다. 영화 속 인물들에게 예술이란 그처럼 매일의 반복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대단하고 유명한 대가가 아니라, 매일 끈기 있게 작업대에 앉는 평범한 예술가의 이야기가 전하는 단단한 울림은 25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슬로건 ‘우리는 훨씬 끈질기다’와 공명한다. 〈쇼잉 업〉을 통해 매일 무언가 만지고, 걷고, 돌보고, 일하는 움직임들로 지켜지는 소박하고도 경이로운 일상의 시간을 마주할 수 있길 바란다. [손시내 프로그래머]
*영화 <쇼잉 업>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보는 동안 ‘한동안 내가 피곤했군…’ 깨달으면서, 너무 좋다고 생각하면서도 눈이 살풋 감기는 걸 참지 못하는 영화들이 있다. 성격상 푹 잠들지는 못하고 아주 잠깐 졸다 깨다 반복하면서, 그래도 흐름을 놓치지는 않을 만큼만 눈을 감았다 뜨면서 보게 되는 영화들. 공교롭게도 그런 영화들이 내게는 다 참 좋은 영화들이었다. <애프터썬>의 주인공들이 침대에서 숨을 쉬는 박자에 맞춰 같이 눈을 잠깐 감기도 하고,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전작 <퍼스트 카우>도 주인공들이 부지런히 걷고 움직이는 동안 그 소리를 베고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둘 다 내 마음 속 명예의 전당에 붙어 있는 영화들이다.
<쇼잉 업>도 그렇다. 영화가 시작되면 벽면 가득,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다채로운 색상의 여성 상들이 있다. 그리고 책상 위에서 흙을 주물러 이 여성들의 모습을 현실로 데려오느라 바쁜 예술가, 리지가 있다. 일도 해야 하고, 사료가 떨어졌다고 역정을 내는 고양이 리키(연기를 진짜 잘하는 천재 고양이이다)의 사료 그릇도 채워 주어야 하고, 제각각의 삶을 살고 있는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대단하게는 못해도 기본 할 도리는 또 해 주어야 한다. 그 와중에 집에 온수는 안 나오는데, 집 주인이자 동료인 조는 온수를 고쳐줄 마음이 없으니, 온수로 샤워를 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또 헤매야 한다. 결국 전시회를 코앞에 두고 부랴부랴 연차를 낸다.
(으레 그렇듯) 모처럼 작정한 하루는 마음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고양이 리키의 습격을 받은 새를, 죽더라도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죽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집 밖에 내보낸 새를 친구 조가 구조할 줄이야. 전시를 두 개나 앞두고 있는 조의 부탁에 따라, 엉겁결에 떠맡은 비둘기 한 마리를 돌보는 것이 그 날 가장 주요한 일이 되어 버린다. 심지어 비둘기를 위한 최적의 환경을 만드느라, 작업실을 두고 2층에 올라가서 고양이를 가둬 둔 채로 작업을 한다.
결국 작업의 속도나 방향은 삶에 생겨나는 일들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술가도 인간이니까, 어떤 상황이든 아랑곳 않고 작업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무리 마감이 코앞이어도 고양이와 비둘기에 둘러싸인 하루를 보낼 수도, 그럴 수도 있다.
어찌 보면 비효율적인 태도일 수도 있다. 사무실 동료가 낄낄거리며 말했듯이, 비둘기를 병원에 데려가고 비둘기가 스트레스를 받았다며 조심하는 것이 이상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어쩌면 이 마음이 예술가를 예술가로 만드는 것은 아닐까? 어딘가에 묻혀 있는, 세상에 가시적이지 않았던 느낌과 마음과 감정과 에너지를 가시적인 형상으로 이 세계에 끌어오는 일이다. 다른 데 가서 죽었으면 생각할 수는 있어도, 끝내 외면하지는 못하는 시선 끝에 그 형상이 걸려 있는 건 아닐지.
마음은 마음이고, 손은 손이다. 바삐 작업하는 리지의 손, 그리고 리지가 일하는 학교 곳곳의 학생들이 작업에 몰두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손을 움직여서 무언가를 그리거나 만들고 싶어진다. 그리거나 오리거나 붙이거나 칠하거나 짜거나 뜨는 그 모든 일에 단 한 순간도 재능이 있어본 적 없는 나지만, 그럼에도 자차분히 손을 놀려 보고 싶어진다. 고되지만 행복한 일일 것이다.
책상 위의 작업물과 나, 둘만이 존재하는 시간의 느낌을 안다. 고되고 행복한. 외롭지는 않지만 고독한. 기쁘지만 덜컥 겁이 나는. 동시에 그 모든 것이 마음 같지 않은 답답함도 안다. 그래도 리지는 직업인이 될 만큼 익숙하고 실력이 좋은 예술가니까, 가마에서 잘못 타버린 것을 제외하면 자신이 만들어가는 세계에 있어서는 더없이 초연하지만, 나는 그렇지도 못해서 하나하나 동동거리기만 한다. 그런데, 이거 죄다 행복한 고민이다. 인생은 절대, 작업물과 나 둘만 존재하는 시간으로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직업인이자 예술가로 어엿하게 인정받는 리지에게도 신경 쓸 게 많은 남루한 일상이 있다. 파티에 빠져 온수기를 모른 체하는 친구에게 화가 나는 날들. 가뜩이나 가족이며 전시회의 치즈까지 신경 쓰이는 게 한두 개가 아닌데 비둘기의 건강까지 신경이 쓰이고. 예술가의 삶이라 해서 예술로만 채워지지는 않는다. 답답한 대화가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터져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인간의 삶은 으레 그렇다.
그러나 푸드덕거리는 힘찬 날갯짓으로 그 모든 답답한 대화를 탁 끊는 비둘기처럼, 그런 새처럼 나에게 왔다 가는 것들이 있다. 예술가의 삶이든, 예술가가 아닌 나의 삶이든.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의 반복 위로, 사뿐 날아올라 반짝 빛나는 것. 내겐 영화가 그렇다. 어두운 영화관에 나를 틀어박아 두고 잠시 빛나는 생각들로 나를 채우고 나오면, 복잡했던 마음이 위로를 얻기도 하고 답답하던 감정의 맥락이 끊겨 있기도 하니까.
그리고 나서도 또 걸어가는 리지와 조의 뒷모습을 본다. 작업은 계속되고 인생도 계속된다. 오고 가는 것들과 답답한 것들 사이, 인생은 그렇게 계속된다. 그 모든 것들 안에서, 우리는 계속 끈질길 것이다. 앞으로도 쭉.
2023.08.24 17:30-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KOFA 2관
2023.08.27 20:00-21:48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MX관
2023.08.29. 13:30-15:18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MX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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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전한 욕망의 자리는 없다
SYNOPSIS.
더 나은 당신을 꿈꿔본 적 있는가?
한때 아카데미상을 수상하고 명예의 거리까지 입성한 대스타였지만, 지금은 TV 에어로빅 쇼 진행자로 전락한 엘리자베스(데미 무어). 50살이 되던 날, 프로듀서 하비(데니스 퀘이드)에게서 “어리고 섹시하지 않다”는 이유로 해고를 당한다. 돌아가던 길에 차 사고로 병원에 실려간 엘리자베스는 매력적인 남성 간호사로부터 ‘서브스턴스’라는 약물을 권유 받는다. 한 번의 주사로 “젊고 아름답고 완벽한” 수(마가렛 퀄리)가 탄생하는데... 단 한 가지 규칙,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지킬 것. 각각 7일간의 완벽한 밸런스를 유지한다면 무엇이 잘못되겠는가?
‘기억하라, 당신은 하나다!’
POINT.
✔️ 청소년 관람불가 다양성 영화가 50만 관객을 동원한 사례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이후 최초라고.
✔️ 이 미친 흥행은 이 영화가 '잘 만든 영화' 이상의 무엇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영화가 당신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 당신은 그 말을 듣고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궁금해요. 고어한 장면이 있음에도 저는 이 영화를 자꾸 슬프게 되돌아보게 되는데, 여기에는 이 영화 바깥 우리 사회의 이야기들이 깔려 있어 그렇습니다. 저에게는 이 영화가 끝나지 않네요.
✔️ <에.에.올>의 양자경에 이어, 이 영화를 통해 데미 무어 또한 배우로서의 능력을 빛내 보이는 동시에, 그걸 폄하해 온 사람들에게 멋진 한 마디를 남겼습니다.
✔️ 그러나 배우와 메시지만 주목 받아서는 안된다 싶을 만큼... 편집과 연출도 좋았어요.
내면세계와 외부 세계 사이의 암묵적 갈등을 내포하고 있는 이 이야기는 본질적으로 욕구에 관한 이야기다. 시험해본 적 없는 새로운 자유가 주어질 때 함께 솟아나는 불안에 관한 이야기이고, 여자가 성별과 여성성에 관한 깊고 견고하게 뿌리박힌 오래된 규칙들을 시험할 때 솟아나는 죄책감에 관한 이야기다. 자아와 문화의 충돌에 관한 이야기이며, 여전히 여성의 권력에 대해 심히 양가적 태도를 취한 세계, 욕구와 수치심을 똑같은 정도로 불러일으키고야 마는 세계 안에서 여성의 욕망을 속박하고 있는 고삐가 덜컥 풀어졌을 때 생기는 일에 관한 이야기다. 갈수록 더 시각에 치중하고 상업성이 짙어지는 세계, 여성의 형태가 무자비할 정도로 외현화되는 세계, 여성의 욕망에 관한 관념이 너무나 협소한 틀 안에 갇혀 있는 세계에서 한 여성이 자신의 몸과 자신의 욕망에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기가 얼마나 어려운지에 관한 이야기다. 전통적인 심리 구조와 사회구조가 얼마나 오래도록 멀쩡히 버티고 서 있을 수 있는지에 관한 이야기이고, 여전히 소녀들에게 자기부정의 씨앗이 뿌려지고 권장되는 방식에 관한 이야기이며, 40년에 걸친 법적·사회적 변화가 진정한 대안적 변화를 아직 일구어내지 못한 까닭에 우리가 행위 주체성과 주도권을 지니고 있다는 느낌이나, 자신의 욕구는 건전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만족시켜도 될 타당성과 자격을 지니고 있다는 확신이 부재한다는 이야기다.
캐럴라인 냅 에세이 <욕구들: 여성은 왜 원하는가>의 문장들이다. 2003년 출간된 책이지만, 마치 <서브스턴스>를 보고 쓴 감상평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 문장들이다. 즉 이 문제는 수십 년 지나도록 변하지 않았으며, 엘리자베스의 에어로빅에서 수의 쇼로 넘어갈 때 느껴지는 것처럼 "갈수록 점점 더 시각에 치중하고 상업성이 짙어지는" 동시에 "여성의 형태가 무자비할 정도로 외현화되"고 있다. <서브스턴스>가 영화관을 나서도 끝나지 않는 이야기인 이유다.
우리가 지독한 외모 지상주의의 세상을 살고 있다는 것은 이제 당연스럽게 여겨지는 명제지만, 그 정도는 모두에게 같지 않다. 나이와 성별에 따라 다른 잣대가 드리워지는 이 세상에서, 여성 노화에 대한 거부감은 사실 신체 기능 상실이나 죽음에 대한 공포 이전에 사회적인 어떤 것을 상실하게 되는 상황에 대한 공포에 가깝다. 그리고 후자는 결코 전자에 비해 작지 않다.
이 영화의 초입에서 엘리자베스(데미 무어)는 두 가지를 다 경험하는데, (1) 자동차 사고로 병원에 가는 상황 (2) 진행해 왔던 에어로빅 쇼를 "더이상 젊고 예쁘지 않다"는 이유로 그만두게 된 상황 중 관객의 뇌리에 더 강렬하게 남는 것은 두 번째 상황 쪽이다. 물론 스토리상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지만, 만일 엘리자베스가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고 그 부고 소식을 인터넷 뉴스 연예면에서 접했다고 해도 대중이 재생산하는 쪽은 두 번째 이야기였을 것이다.
이런 사회적 기반 위에 등장했기에 <서브스턴스>는 몸을 둘로 나누는 비현실적 현상을 담은 영화임에도 더없이 현실적 현상을 담은 영화로 기억될 영화가 되었다.
여성의 욕망: 내 욕망과 사회의 욕망 구분하기
영화 속 상황처럼 극단적인 상황을 접하지는 않지만, "기왕이면" 좀더 예쁘고 좀더 젊어 보이면 좋다는 정도의 생각은 절대 다수의 여성이 할 것이다. 남성들이 기초 청결에서 약간만 나아간 수준으로 외모를 챙겨도 그루밍족이니 뭐니 하는 기사가 쏟아지지만, 외모를 위한 여성들의 노력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취급되다 못해, 그 트랙 바깥에 서겠다는 사람들에게 "자기 관리"를 하지 않는다느니 뭐라느니 하는 비난으로 이어진다.
문장으로 쓰면 당연한 소리 같지만 사회에서 이 사실을 매일매일 느끼는 사람을 많지 않다. 이 메시지는 대놓고 트랙 바깥에 선 사람이 아니라면, 비난이 아니라 격려의 형태로 비틀어 전달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면 더 예쁘고 좋잖아. 이렇게 하면 더 건강하기도 할걸? 착하기까지 할걸? 각종 미덕을 뒤섞어 쏟아놓는 말들 안에서, 여성은 사회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처럼 받아들이기 쉽다.
엘리자베스는 "젊고 예쁘지 않다"는 (더 늙은) 하비의 입에서 나온 말로 후려치기 당하며 일자리를 잃었다. 그리고 하비의 욕망과 판단은 곧 엘리자베스의 욕망과 판단으로 내려앉는다. 복도를 가득 메운 엘리자베스의 사진은 "젊고 예뻤던" 시절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가 착실히 쌓아온 커리어라고 볼 수도 있는데, 하비 뿐 아니라 엘리자베스 본인조차 자신을 내공이 어마어마한 진행자로 바라보지 않는다. 과거의 자신을 비추어 보며 자신을 멸시하는 엘리자베스의 시선은 사회에서 그에게 실어 올린 것이다. 동시에 엘리자베스는 오랜 기간 "자신을 잘 돌보라"며 여성들에게 동일한 메시지를 전달해 온 사람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어딘가에서 시작된 사회적 욕망은 여성의 안에서 여성과 동일시되고, 남성이 말할 때보다 더 효과적으로 확대 재생산된다.
그러나 그 욕망이 시작된 지점, 하비의 입에서 여성은 새우와 과연 얼마나 다른 대접을 받고 있는가. 하비가 쩝쩝거리며 뜯어 먹는 새우 장면이 불쾌한 이유는 단순히 위생적인 거부감을 주기 때문만이 아니다. 철저하게 타자화되어 있는 살덩어리의 자리가, 하비가 여성에게 부여하는 자리라서 더욱 그렇다. 이러한 구조에서 생존하기 위해 많은 여성들이 정작 스스로의 욕망에는 둔감해지고, 사회적 욕망에 스스로를 체화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세상에는 각종 기이한 일이 일어난다. 신경이 몰려 있어 잘못 건드리면 위험해질 수 있는 턱을, 심장만큼 중요하다는 종아리 근육을... 미용이라는 정갈한 단어에 담은 사회적 욕망을 사유로 찢고 째고 주사를 놓으며 상처 낸다. 사람 몸이 레고로 만들어진 것도 아닌데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는, 어디 살을 파내서 어디 다른 데 갖다 붙이라는 그로테스크한 광고가 영화관 가득 쩌렁쩌렁 울린다. 몸이 이물질로 인식해 면역 반응이 일어날 보형물을 몸에 집어넣는다.
이 모든 신체 학대 행위는 "노력"이라는 말로 포장된다. 더 예뻐지기 위한 노력. 자기 관리. 그리고 엘리자베스와 수로 찢어진 두 개의 신체,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엘리자베스의 모습이 말해준다. 그동안 우리가 자기 관리라고, 미용, 노력이라고 불러온 것들의 상당수가 자기 학대였음을. 그리고 사회의 욕망을 이미 체득한 우리는, 누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스스로 괴롭히는 법을 이미 가장 잘 알고 있다.
사회의 욕망: 그거 그렇게 대단한 건가요?
그렇다면 우리가 시나브로 체득하고 있는 사회의 욕망은 과연 우리의 신체와 정신 건강을 다 갉아먹을 가치가 있는 것인가. 그 대답은 새우를 씹는 하비에게서 들을 수 있다.
하비가 엘리자베스를 해고하고 새로운 얼굴을 찾겠다는 결정을 하기까지, 과연 얼마나 '업무적인' 과정과 고민이 있었을까? 시청률, 독자 의견, 인터넷 반응... 숫자 하나라도 보았을까? 숫자 이면의 흐름을 읽으려는 노력이 있었을까? 아닐 것 같다. 그러니까 '무엇이 끝났느냐'는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답도 못하는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자신만만하게 확신에 찬 사람처럼 움직인다. 말초적인 자극에만 의존하는 그의 방식이 결과적으로 먹히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때도 먹혔고, 섹슈얼한 느낌을 전면에 내세운 수의 쇼에서도 시청률로 돌아왔다. 하비 같은 인간이 많으니 하비 같은 인간이 주먹구구 방식으로 먹고 살면서도, 최소한의 예의조차 갖추지 않는 개저씨 직장인이 되는 것이다.
에어로빅을 하는데 꼭 수영복 같은 전신 타이즈를 입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전신 타이즈 아래로 쭉 뻗은 엘리자베스의 허벅지를 보며 여성들은 또 한번 사회적 욕망을 잘 체득한 결과물을 모범사례처럼 학습한다. 만일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가 타이즈 아닌 옷을 입어 보자 했다면, 수많은 여성들이 타이즈를 비호했을 것이다. 자세가 잘 보여야 좋은 자세를 취할 수 있다든지 하고 타이즈의 효용성을 강조하면서. 비슷한 일은 오늘날의 운동과 레깅스를 둘러싼 논쟁에서도 일어난다. 그리고 그런 날들의 결과, 이제 신체를 더 부분적으로 클로즈업하고 효과를 더 많이 넣은 수의 쇼가 등장한다. 뽀얗게 필터를 씌운 쇼 안에서 반짝거리는 수의 신체는 마치... 뽀샤시한 생닭에 스프링클을 뿌려 놓은 느낌이 든다. 최소한 인간의 신체다운 느낌마저 줄어들고 있다.
생각해 보면 무수하게 쏟아졌던, 각종 연예인 이름 뒤에 '후덕'하다는 단어를 붙여 기사를 내던 시절의 연예면을 그냥 둔 결과, 이제 연예기사와 댓글들은 여자 연예인의 신체를 부위 별로 품평한다. 허리나 다리를 언급하던 옛날 기사들도 역겹기 그지없었으나, 승모근이 어쩌고 중안부가 어쩌고 하는 내용을 보면 정말 인간을 고깃덩이로 보고 있나 싶어 할 말이 없어진다. 더 끔찍한 것은 그런 시선이 내게 체화되고, 승모근과 중안부의 차이를 인지하는 능력이 이전보다 좋아졌다는 점이다. 하비의 쇼는 계속되고 있다. 자기 자신은 화장실에서도 꽤나 시간이 걸리는 주제에, 25세 이상 여성의 가임 능력을 따지고 있는 찌질하고 나약한 남성성이, 어린 여성의 반짝거리는 재능을 내세워 '성공'을 얻어가는 쇼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이브 문건이 떠오른다.)
내 안에 체화된 사회적 욕망을, 그 욕망이 얼마나 하잘것없는 것에서 시작된 것인지를 깨닫는 것은 여성으로서 즐거운 경험이 아니다. 깨닫는다고 해서 당장 내가 머리 깎고 절로 들어갈 수 있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밀가루와 물이 뒤섞여 반죽이 된 것처럼, 나는 여성의 몸을 품평하는 사회적 시선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로 나 자신을 바라볼 수가 없다. 살이 찌면 빼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마음에 안 드는 신체 부위가 있다. 여기서 온전히 초연할 수 있는 사람 몇이나 될까. 그래서 엘리자베스의 선택이 때로는 한심하고 답답해도, 그를 미워할 수 없다. 슬플 뿐이었다.
혹자는 엘리자베스가 "여전히 아름다움"을 들어 그를 한심해 한다. 그러나 이는 엘리자베스와 똑같은 사고 방식이다. 아름다움의 잣대 자체에서 벗어나지 않고서는 결국 시간 문제일 뿐이다. 거울을 봤을 때 조금 더 주름이 없었거나 조금 더 마음에 드는 옷을 입었거나 새 립스틱을 발랐다면 엘리자베스가 당당하게 프레드와의 약속에 나갈 수 있었을까? 거울을 보지 않았어야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한심하게 느껴질 수는 있지만, 엘리자베스에게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지 않기는 어려운 일이다. 특히 여성이라면.
나의 욕망: 완전한 자리는 없겠지만
그러면 어쩌라고요. 매일매일 소리도 없이 확대 재생산되는, 여성의 몸에 대한 시선은 별것도 아닌 지점에서 시작된 주제에 끔찍하게 증폭되다 못해 내 안에서도 울려퍼지는데. 엘리자베스가 능멸의 말을 듣고 이리저리 밀쳐지고 끝내 터져 나갈 때, 하비 같은 인간들은 피를 좀 뒤집어쓴 외에는 무사했다. 슬프지만 현실에서 숱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부분 단위로 품평 당하는 자리에 세워진 수 같은 여자들이 부족한 면면을 이유 삼아 욕을 바가지로 먹을 때 뒤에서 새우나 씹고 이나 쑤시며 무사한 배를 두드리는 이들의 시선이 너무 많은 것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 나의 욕망이 오롯이 홀로 서는 것이 과연 가능한 걸까? 캐럴라인 냅의 문장들을 더 들어보자.
그래서 이대로 충분한가? 상태가 비교적 괜찮은 날, 더없이 괜찮은 날 나에게 그렇게 묻는다면 나는 내게 주어진 축복을 하나하나 꼽아볼 것이고, 힘들게 얻어낸 친밀한 관계들에 대해, 두려움을 상대로 한 작은 승리들에 관해, 친구들과 개와 숲과 일에 관해 말할 테지만, 그래도 완전한 확신을 갖고 대답하지는 못할 것이다. 완전히 확신하는 답, 최종적인 휴식의 장소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침내 모든 욕구를 이해하고 충족하는 일, 가장 높은 봉우리에 도달하는 일이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대신 흡족함의 순간들, 별안간 몸과 마음과 정신이 나란히 연결되는 순간들이 있고, 마치 우주가 보낸 선물처럼 기대하지 않고 있을 때 찾아오는, 내가 잘 먹여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들이 있다. 이런 순간들은 더없이 소박하게 포장되어 도착한다. 내 개가 보내는 사랑의 시선으로, 친구와 나누는 농담으로, 여기서 느끼는 애정의 불씨, 저기서 느끼는 이해로. 그 순간들은 내가 막 노를 젓기 시작할 때 수면을 비추는 아침 햇빛 속에서, 완벽한 한 끼 식사, 완벽한 한 문장, 어떤 손길, 어떤 눈빛 속에서 온다. 마침내 이 삶에서 얻는 가장 좋은 것일지도 모를 순간들이 있다. 섬광처럼 스치는 만족감, 얼핏얼핏 희미하게 반짝이는 희망의 빛과 맛, 파이처럼 깊이 음미하며 완전히 누려야 할, 금세 지나가는 순간들이.
엘리자베스가 이런 문장들로 이야기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몸과 마음과 정신이 나란히 연결되"어서, "애정의 불씨"와 "이해" 안에서 이따금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면.
엘리자베스의 이야기는 오늘도 현실에서 울려퍼지고 있고, <서브스턴스> 약물은 액티베이터 약병에 담겨 있지만 않을 뿐, 숱한 광고물과 방송과 알고리즘 곳곳에서 우리에게 내리꽂힌다. 좀처럼 필사를 하지 않는 편이지만, 오늘은 캐럴라인 냅의 문장을 종이에 사각사각 적어 보면서 천천히 음미해야겠다.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지만, 만족스러울 수는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주면서. 아무튼 나를 돌보고 사랑하는 법은 평생 배워야 할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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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 같은 나와 물 같은 네가 서로 끌리는 이유
엘리멘트 시티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뭐든 열심히 하는 두 사람. 불 남자와 불 여자는 누가 봐도 천생연분이다. 부부가 된 두 사람. 원래 고향이었던 파이어랜드를 등지고 엘리멘트 시티로 이사한다. 쓰는 언어부터 달랐던 두 사람. 이름을 말하는 것도 어려워한다. 입국심사를 담당하는 풀 원소 공무원이 말한다. “그럼 버니와 신더는 어떤가요” 남자는 버니, 여자는 신더가 됐다. 몸만 달랑 온 두 사람. 엘리멘트 시티에 가게 하나를 얻어서 잡화상점을 운영한다. 어려운 사회생활. 그래도 자라는 앰버를 보면 그동안의 피로가 싹 가신다. 어느덧 성장한 앰버. 엄마와 아빠의 희망이었던 딸. 의젓한 딸은 나이 든 아버지를 대신하기 위해서 종업원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고 있다. 하지만 마음대로 될 리가 없다. 온 인류를 뒤져서라도, 아니 온 원소를 다 뒤져서라도 진상 손님이 없는 세상은 아무 데도 없다. 여러모로 화를 돋우는 원소들. 앰버는 타고난 성질 때문인지 오늘도 욱해버렸다. 화를 낸 탓에 불에 탄 가게들. 수리는 어렵지 않았지만 아버지에게 생긴 마음의 빛을 지우기는 어렵다.
몸이 약해진 듯한 아버지 버니. 얼른 노력을 해서 아버지의 가게를 물려받고 싶다. 당연하지. 이 가게는 부모님의 희망이었으니까. 약해지는 아버지를 본다는 것은 마음이 아픈 일이다. 마음속에 있던 응어리가 해소될 기회가 왔다. 어느 날 아버지 버니가 딸 앰버에게 하루만 가게를 맡긴다는 말을 들은 것이다. 어깨에 힘 들어간 앰버. 첫 스타트는 좋았다. 그러나 시작만 좋았다. 여지없이 달려든 진상손님. 답답함이 터져 다시 가게가 불에 그을린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혼자 어디 가는 척했기 때문에 아무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점이다. ‘난 왜 그렇지?’ 자괴감에 빠져있을 때쯤 비상사태가 발생했다. 불에 탄 파이프에서 물이 흐르는 것이다. 우수수 떨어지는 물벼락. 그런데 그 물에서 갑자기 한 남자가 등장했다. 엉엉 울며 등장한 이 남자. 자기소개를 전한다. “안녕. 난 웨이드!”
디즈니x픽사의 상상력
전년 <소울>과 <루카>로 대형 홈런을 친 디즈니와 픽사의 신작이다. 사실 최근의 디즈니는 그렇게 타율이 좋지 못하다. 가장 근작인 <인어공주>는 수많은 논란이 오히려 마케팅 요소로 작용하는 듯이 흥행 성적이 시원치 않다. 뿐만 아니라 디즈니는 아예 디즈니플러스 론칭 이후 헛방만 치고 있다. 그나마 ‘가오갤’이 체면치레에 성공했다. 상대적으로 기대치가 많이 떨어진 디즈니. <버즈 라이트이어>라는 ‘토이 스토리’ ip를 사용한 결과물로(픽사가 협업하긴 했지만)도 영 지지부진했기 때문에 디즈니의 성적표가 점점 서늘한 경고처럼 느껴진다.
이 <엘리멘탈>은 디즈니의 상상력을 잘 구현한 작품으로 보인다. 또 픽사가 갖고 있는 낭만과 동심의 이야기를 잘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 <코코>에서 보여준 사후세계와 <소울>에서 볼 수 있었던 태어나기 전의 세계를 잘 구현했다. 사실 <코코>에서 볼 수 있었던 저승 묘사는 우리 삶 속에서 익숙한 장면이 어느 정도 있다. 비단 우리만 해도 ‘신과 함께’에서 저승을 봤었는걸? 영화는 이 익숙한듯한 묘사를 살짝 틀어서 변화구를 던졌다. 공간적 배경이 멕시코의 어느 마을이었다. 멕시코 토속적인 소재들과 저승이라는 세팅, 또 이승-저승을 왔다 갔다 하는 주인공의 특성을 합쳐 독특한 비주얼을 만들었다. 전적으로 사람 사는 듯한 느낌 1/3 멕시코 정취 1/3 저승의 이미지 1/3을 결합시킨 것이다. 이 <엘리멘탈>은 <코코>와 다른 점이 있다. 바로 원소들의 세계라는 점은 그 어떤 영화도 시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 처음부터 끝까지 상상해서 만들었다. 어디서 본 적 없는 도시. 시각적으로 눈정화가 되는 비주얼도 예쁘지만 신기한 건 다른 지점에 있다. 우리가 현대사회를 살아가면서 생기는 여러 도시문제가 있다. 젠트리피케이션을 위시로 한 각 도시의 원도심 문제가 그렇다. 이 마을에서 엘리멘트 시티는 이마저도 구현한 듯하다. 바로 불 종족들이 사는 도시와 물 종족들이 사는 도시가 좀 떨어져 있다는 것이 감독의 디테일을 살렸다는 점에서 신기했다. 이는 장소로서의 특성만 구현한 게 아니라 이야기의 전개에 있어서도 도시의 양극화 문제는 핵심으로 작동한다. 이게 영화가 인종문제와 이주민들의 적응문제를 다뤘다는 점에서 이 역시 작품이 잘 살린 연출지점이라고 볼 수 있다.
빠지면 섭섭하지
이 영화를 만든 피터 손이라는 사람은 한국계 미국인이다. 1970년대에 부모님이 미국으로 건너가서 정착해 가정을 이루셨다고 한다. 자전적인 코드가 들어갔다고 볼 수 있는 셈이다. 이 때문인지 영화 곳곳에서 한국인과 미국인을 비유하는 묘사가 몇 있다. 우선 불 종족인 앰버 가족이 쓰는 언어다. 이 캐릭터들은 초반에 등장할 때 자막 처리가 안 되어있다. 영화가 디즈니/픽사에서 제작되었다는 걸 상기시키면 이 이유가 어느 정도는 느껴지는 듯하다. 또 이 불 종족은 뜨거운 음식을 좋아한다. 게다가 앰버가 아버지 버니를 부를 때 '아슈파'라고 부른다. 이 세 가지는 한국인에 대한 비유이기도 하다. 첫째 언어와 관련된 부분은 이주민들이 한국어를 쓴다는 점에서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두 번째 뜨거운 것에 대한 비유는 역시 김치, 고추장을 위시로 한 매운 음식에 대한 묘사라고도 볼 수 있는 셈이다. 셋째. 호칭 '아슈라'는 아마 '아빠'라는 단어에서 온 듯하다. 그리고 영화에서 어떤 인물이 남기면서 무슨 코멘트를 남긴다. 이 기점 찍고 주인공 어머니가 어떤 소재에 대해 앰버에게 코멘트를 하는 신이 있다. 이 부분 잘 보면 우리 한국인들이 자라면서 겪는 유교문화에서 벤치마킹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 위에서 서술한 la라는 곳의 지리적 특성을 봐도 그렇다. 당시 미국에 정착한 한인들이 la에 자리 잡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누수문제라던가 치안에 있어 약점을 가진, 그러니까 땅값이 저렴한 곳에 거주지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 부분을 도시의 미관부터 시작해 이야기의 서사 중심으로 배치했다는 점은 영화에서 충분히 강점으로 뽑을 만하다. 이외에도 미술로 대표되는 물과 풀, 공기가 할 수 없는 것들에 능통한 모습들이 아시아인에 대한 비유처럼 느껴지기도 하다.
반대로 웨이드는 백인 사회를 비유하고 있다. 처음 버니와 샌더가 입국심사를 할 때 바로 영어를 쓰는 모습이 그렇다. 또 '물'이라는 것의 본질적인 속성을 생각해 보면 더 백인에 가깝게 느껴진다. 이 백인이 없으면 엘리멘트 시티 자체가 있을 일이 없는 것이다. 영화 내적으로 가장 흔하게 보인다는 점도 백인이라는 비유에 걸맞다. 그리고 글쓴이가 더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풀은 2차 대전 당시 미국으로 건너간 유대인들을 상징하는 듯하다. 왜? 풀이라고 하는 것이 물을 통해 성장하는 존재다. 유대인들이 미국을 먼저 건너가서 만들었다고 보는 건 아예 무리가 있다. 미국사회가 만들어지고 유대인들이 정착한 것이 우선순위이기 때문이다. 이런 지점을 생각해 보면 풀 종족이 후에 어떤 인물로 묘사되는지가 어떤 사람들에 대한 비유가 되는 듯하다. 다른 종족은 공기 종족이다. 역시 구름 종족으로 대표된다. 이 종족의 특성은 스포츠다. 이 스포츠에 대한 묘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본다면 이 종족이 어떤 사람들을 보여주고 있는지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다. 게다가 이 종족이 엘리멘탈 시티에 온 순서를 생각해 보면 역시 어렵지 않게 근거로 매길 수 있다.
이런 소소한 묘사가 영화에서 재미있는 특징이 되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좀 아쉽다고 느낀 부분도 역시 이 점에서 온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풀과 공기에 대한 묘사가 너무 적은 느낌? 인종주의적인 코드가 들어가 있고 이 인물들이 하하 호호 다 잘 지내는 게 핵심인 것 치고 두 종족이 좀 기능적인 측면이 있다. 또 너무 스테레오 타입으로 인물을 쉽게 세팅한 감도 없지 않아 있다. 글쓴이가 생각하는 영화의 가장 큰 단점이다.
반대가 끌리는 이유
영화에서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로맨스다. 두 캐릭터는 본질적으로 엮일 수 없는 존재다. 물과 불이라는 걸 상상해 보면 특히 더 그렇다. 하지만 영화는 이를 이야기 구성으로 주파하고 있다. 영화는 불, 그러니까 앰버의 특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앰버는 욱하면 무섭다. 한 번 크게 화를 내면 주위에 있는 것들을 불태운다. 이 특성은 정확히 반대로 웨이드가 갖고 있다. 중간에 누군가의 집에 가는 신에 있다. 여기서 어떤 문제가 벌어진다. 웨이드는 앰버는 가능하지만 웨이드는 불가능한 능력 묘사가 나온다. 이 가능/불가능의 대조는 영화 내내 반복되며 작품의 핵심소재인 '한 줄의 대사'로 도착한다. 이는 웨이드와 앰버의 대조점을 조명하던 영화의 이야기를 뒤엎는듯한 테마이기도 하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영화의 4 원소로 멋지게 풀어낸 것이다. 이를 캐릭터의 서사로서만 푼 것은 아니다. 시각적으로 두 캐릭터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연출도 영화에서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영화에서 살짝 아쉽다고 느끼는 부분은 이 로맨스를 위해서 이야기가 후반부에 맥이 빠진다는 점이다. <인사이드 아웃>에서 빙봉으로 온갖 눈물은 다 나오게 하던 디즈니 x픽사치 고는 좀 관성적으로 이야기를 푼 느낌이 있다. 좀 예상되는 느낌? 또 영화 핵심 사건이 아무리 애니메이션이라지만 해결되는 과정이 디테일이 약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다. 후반부 아름다운 장면을 위해 아름답게 서사를 살짝 희생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또 이민자들 간의 관계를 지엽적으로만 접근했다는 것이 후반부의 문제해결 과정에 아쉽다고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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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MFF 인터뷰] 배우와 황동희가 일치하는 순간까지 달려가고 싶습니다
배우와 황동희가 일치하는 순간까지 달려가고 싶습니다
제18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 한국경쟁 장편 영화로 선정된 '나의 여신'은 전통 무속을 심도 있게 재현하면서 특히 굿의 음악적, 무용적 측면을 사실적으로 담아낸 영화다. 8월 12일, 하소생활문화센터 산책에서 황동희('나의 여신' 부계석 역) 배우님과의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영화 '나의 여신'에 대해서 소개해주세요.
'나의 여신'이란 작품은 민속학자 선호가 제주도 최고의 심방(무당)을 연구하기 위해서 소미(무당의 조수)가 되려고 하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저는 선호 이전에 원래 심방의 소미였던 부계석 역을 맡았는데요.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소미가 되려고 하는 선호를 견제하는 역할입니다.
부계석이라는 역을 소화하기 위해 추가로 준비하신 거나 공부하신 게 있으신가요?
직접 제주도 굿을 보기도 했고 한국무용과 현대무용도 배웠습니다. 또 사설도 읽었고 이자람 님에게 판소리를 배우며 준비했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것을 배우시느라 힘들었을 것 같아요.
우선, 제가 굿이나 국악 분야를 처음 접하다 보니, 헷갈렸어요. 저는 네 박자에 익숙한데 국악은 세 박자이기도 하고… 그래서 준비하는 과정에서 되게 힘들었는데 손수현 배우님이 국악 전공이셔서 굉장히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북 치는 법부터 하나부터 열까지 다 가르쳐 주셔서 재미있게 촬영했습니다.
굿과 국악은 영화 음악으로 접하기에 흔하지 않은 소재라고 생각해요.
어제 개막식에서 작품 소개 나오는데 서양 음악들이 되게 많더라고요. 근데 <나의 여신> 작품을 소개할 때만큼은 딱 토속적인 음악이 들리니까 신비롭기도 하고 아주 궁금하기도 하고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옆에 같이 있던 관객분들도 끄덕끄덕하면서 보시더라고요. 그래서 국제음악영화제이고 제천에서 열리는 만큼 '나의 여신'이 한국에 대한 그런 토속적인 음악도 알리는 좋은 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여신'에서 음악의 역할은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음악에 따라서 영화가 되게 다르게 보이더라고요. 저는 촬영하면서 오케이 컷 모아 놓은 편집본도 보고, 사운드가 입혀졌을 때, 영화 음악이 삽입되었을 때도 보는데 음악을 어떤 걸 넣는지에 따라서 영화가 완전 다르게 바뀌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음악의 힘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만큼 음악이 영화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부계석을 떠올렸을 때 생각 나는 음악은 무엇인가요?
이 영화 시나리오를 받고 계석 역할을 보면서 위플래쉬의 'Caravan'이 계속 떠올랐습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음악이기도 하고 되게 도전적이고 호전적이고 분노와 억압이 많이 담겨 있어서 그 점이 계석의 모습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의외로 국악이나 전통음악이 아니네요? 그렇다면 부계석을 위한 테마 곡을 만든다면, 그 곡의 제목은 무엇으로 하고 싶으세요?
계선을 보면서 되게 불안정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만약에 테마 곡 제목을 정한다면 ‘Unstable’로 정하고 싶습니다.
촬영하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으신가요?
제가 그때 선배님들과의 첫 촬영이라 너무 긴장하고 얼어 있어서 불안정한 상태 그 자체였는데 선호 역할을 맡으신 윤선우 배우님이 “끝나고 내 방으로 와라.” 이렇게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너무 긴장해가지고 잘못했나? 실수했나?’ 생각하면서 갔는데 맥주랑 치킨을 사다 놓고 기다리고 계셨어요. 그리고 손수현 배우님이 모영리당을 위한 우정 링과 첫 촬영 기념 책을 사 주셔서 덕분에 긴장 다 풀리고 되게 재밌게 촬영했었습니다.
배우 황동희의 앞으로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배우로서 대중들에게 인정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저의 이름 자체가 배우가 될 수 있도록, 모든 장르를 불문하고 일치되는 순간이 올 때까지 하는 게 제 목표입니다.
글: 하이스트레인저 신효림, 김민서
사진: 하이스트레인저 김혜지
에디터 : 김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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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재가 ‘불법’인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내는 법
8★/10★
동쪽 시장에서 아버지가 동전 2개로 작은 쥐를 사오셨네
그런데 고양이가 와서 작은 쥐를 먹어버렸네
아버지가 시장에서 산 쥐를
…
이번에는 개가 고양이를 먹었네
아버지가 시장에서 산 쥐를 먹은 그 고양이를〈Alla Fiera Dell‘Est〉라는 이탈리아 노래 가사 일부다. 유럽, 북미 등으로 이주한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부르던 노래라고 한다. 노래는 계속 이어진다. 쥐는 고양이에게 먹히고, 고양이는 개가 삼켜버리고, 개는 지팡이로 두드려 맞고, 막대기는 불에 탄다. 더 강한 존재가 더 약한 존재를 먹거나 제압하는 일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이민자들이 이 노래를 부른 이유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노래 가사 속 약한 존재들의 운명이 여기저기서 치이기만 하는 자신들의 처지와 닮은 데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적 거장 다르덴 형제의 신작이자 칸영화제에서 75주년 특별기념상을 수상한 〈토리와 로키타〉는 두 이민자 청소년의 이야기를 담았다. 영화는 로키타가 벨기에 어딘가에서 체류증 허가를 얻기 위한 심사를 받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로키타는 자신이 이미 벨기에에서 체류증을 받은 토리의 친누나라고 주장하며, 어린 동생 토리와 함께 있기 위해서 자신 역시 체류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심사관의 질문이 뒤따른다. 말투는 차분하지만 질문의 내용은 날카롭다. 로키타는 조금씩 수세에 몰리고 끝내 공황 장애가 와서 약을 먹고는 눈물로 인터뷰를 마무리한다.
로키타가 거짓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키타는 토리의 친누나가 아니다. 토리는 아프리카에서 횡행한 마녀/주술사 사냥의 표적이 되어 학대와 린치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점이 인정되어 체류증을 발급받았다. 반면 로키타는 체류증을 발급받아 가사노동자로 일하며 고향의 가족에게 돈을 보내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나 서로 다른 이유로 유럽에 체류 중인 토리와 로키타는 같은 보육원에서 생활하며 어느덧 친 남매보다 더 끈끈한 사이가 된다. 로키타는 토리를 지극히 아끼고 돌봐주며 토리 역시 로키타가 체류증을 발급받을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한다. 요컨대 토리와 로키타는 유럽 사회의 가장 낮고 험한 곳에서 그 무엇도 끊어낼 수 없는 우정의 관계를 만들어낸다.
다르덴 형제는 이번에도 누군가의 삶을 극화하여 소비하는 대신 다큐멘터리를 연상케 하는 기법으로 토리와 로키타의 우정과 삶을 차분히 담아낸다. 마약 배달 및 재배, 이주 브로커의 갈취, 성착취 등이 등장하지만 이 소재들은 이주자들의 취약함을 과잉 극화하는 데 활용되지 않는다. 토리와 로키타가 조금씩 벼랑 끝으로 밀려나는 과정과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서로를 향한 우정과 사랑이 더 깊어지는 과정에 카메라의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합리한 상황에서 불가능한 관계를 일구어낸 토리와 로키타는 끝내 비극을 마주하고 만다. 체류의 ‘합법성’을 따지는 일이 한 인간 존재를 ‘불법’으로 내몰고, 가장 취약한 자들이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단단하게 만들어낸 관계는 폭력적으로 응징당한다.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며 안보, 국경, 안전과 같은 가치들은 대폭 강화되었고 이 가치를 ‘훼손’하는 존재들은 곧바로 강한 비난‧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즉 이주자들은 ‘국민/민족 정체성’을 헤친다는 오래된 비난과 더불어 새로운 차별과 배제의 언어에도 대응해야만 했다. 이주자들은 더한층 공공의 안녕을 위협하는 존재의 표상이 되어버렸고 그만큼 연대, 포용, 환대의 가치 역시 약화되었다. 〈토리와 로키타〉가 다르덴 형제의 전작에 비해 비관적이라는 관람평이 이어지고 있다. 악화된 현실의 반영일 것이다. 그러나 이민자와 정주자의 관계가 이런 식으로만 맺어져야 할 이유는 없다. 토리와 로키타가 주고받은 우정과 사랑이 전체 사회로 확대되지 못할 이유도 없다. 억지로 꺾여버린 토리와 로키타의 우정에서,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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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화의 씁쓸한 뒷면
이 글은 영화 [판의 미로]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저는 조기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한글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탓에 혼자서 책조차 읽을 수 없었습니다. 받아쓰기는 늘 30~40점을 오갔죠. 엄마는 속이 터져 한글 개인 과외라도 시켜야 하나 말아야 하나라는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속 편한 아빠는 그런 거 다 때 되면 한다며 저를 품에 안고 파란 물고기가 바다로 간 이야기를 서른마흔다섯 번째로 읽어주셨죠.
딸이 드디어 한글을 깨우친 그날. 아빠는 신이 나 술에 취한 상태에서 제게 동화책 다섯 권을 선물해 주셨고 그 책은 부부 싸움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난생처음 그림보다 글자가 많은 책을 선물 받았는데 그 내용이 바로 동화의 실제 모습. 그러니까 팥쥐와 팥쥐 어머니의 알고 싶지 않은 결말이 담겨있는 '잔혹동화'였기 때문입니다. (참고 1)
덕분에 저는 생애 최초로 받은 조기 교육의 결과 동화가 얼마나 잔혹한지 알게 되었고 산타 따윈 없다는 것을 너무도 일찍 알게 된 시니컬한 아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엄마는 아빠가 사준 동화책에서 아는 글자가 나왔다며 환호성을 치는 저를 보며 쟤를 어쩌누.라는 말을 늘 하셨었는데. 결국 이렇게 커 버리고 말았죠.
영화 [판의 미로]는 스페인 전쟁(내전) 상황에서 오필리아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 상황을 이겨내는 이야기를 판타지로 그려내고 있는 작품입니다. 이제 겨우 한글을 깨친 제가 읽은 진짜 동화처럼 잔혹하고 또 잔인하지만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특유의 기이함과 신비함이 섞여 정말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죠.
영화 전체가 암울하고 어둡지만 오필리아의 환상과 현실의 대비로 인해 더더욱 아름답고 슬픈 영화입니다.
이게 어찌 15세란 말이요
나도 무섭다고요.
사진출처:구글 YTN Science/익숙하지 않거나 모른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죠.
개봉 당시, 이 영화는 15세 관람가였습니다. 포스터만 봐도 동화 같은 분위기의 판타지 영화라고 생각했기에 많은 학생들이 부모님과 함께 영화관을 방문했죠. 그 결과 개봉관마다 학생이고 보호자고 할 것 없이 울어 젖혔다는 전설의 영화가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동화의 기본 공식을 익히 알고 있죠.
착하고 순진한 주인공이 세상의 모진 풍파를 만나며 시련을 겪지만 결국 극복하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답니다.로 끝나야 디폴트죠.(인어공주 제외) 하지만 이 영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이야기의 큰 줄기 자체가 스페인의 내전 이야기를 하고 있죠. 한국 영화 [밀정]을 생각하면 편하실 겁니다. 내부의 스파이가 있고 그를 통해 정보를 얻어 혁명을 일으키려 하는 이야기가 주가 되죠. 그 혼란 속에서 어린 오필리아는 임신한 엄마와 낯선 환경 속에 있게 되고. 그 안에서 만난 요정들과 작고 큰 모험을 떠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아무리 동화에 나오는 "의붓"이라는 단어가 붙은 사람들이 나쁘다고 하지만. 이 영화의 대위는 그 수위를 이미 진작에 넘어버린, 너무도 잔인한 사람입니다. 의심 하나만으로 멀쩡한 사람을 활자 그대로 때려죽이는. 오필리아의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 뱃속의 아들만을 사랑하는 남자입니다. 고지식하고 자신의 명예를 누구보다 생각하는 그런 자존심 밖에 남지 않은 사람 말입니다. 그가 벌이는 살인 혹은 살육의 행각은 지금의 제가 보아도 보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오필리아의 모험 속에 나오는 괴물들 마저 기괴하기 짝이 없죠. 콩쥐팥쥐에서 나왔던 두꺼비는 귀여울 정도로 험악하게 생긴 두꺼비와 오물은 물론. 모든 아이들을 울리기 충분했던 그 "손바닥 괴물"까지 나옵니다. 요정이 잡아먹히는 건 뭐 말할 것도 없죠. 저는 정말 이걸 다 오필리아가 겪었다면 다시 기억을 찾아 공주가 된다 해도 PTSD에 걸릴 것이라는 걱정이 더 앞섰을 정도였습니다.
마치 제가 어릴 적 접했던 동화의 진짜 모습, 혹은 숨겨진 동화의 잔혹한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너무도 익숙해진 달의 앞면이 아닌 숨겨졌던 달의 못생긴 뒷모습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고 우리가 몰랐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닌 것처럼. 이 영화는 그런 동화나 판타지가 가진 아름다움을 걷어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동화를 잃어버린지 오래인 어른들 틈바구니의 오필리아를 통해서 말이죠.
물론 배급사는 진짜 반성(?) 해야 합니다. 15세라뇨.
제가 보면서 먹던 딸기가 목에 걸렸을 정도였습니다. 너무 무서웠어요.
기예르모 델 토로, 세계관 최강자
역시 덕후가 세상을 바꾼다.
사진 출처:구글 etoland/이걸 디즈니가 받아줬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제겐 팀 버튼 감독과 비슷한 색깔을 가진 사람입니다. 음울하고 어둡죠.
제가 색깔과 냄새로 이 두 감독을 구분하는 방법은 하나입니다.
팀 버튼 감독은 총천연색에 가깝고, 녹기 시작한 눅진한 사탕에 가깝습니다. 뒷맛이 개운하지 않은 텁텁함이 있죠.
그에 반해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달빛에 비치는 물체의 그림자 같은, 무언가 생명력이 빠져 가는 죽음과 삶 그 경계에 가깝습니다. 대충 꿈도 희망도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덕후들에겐 늘 시련이 존재합니다. 이 재능을 알아주는 사람이 잘 없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만의 길을 가기 시작했고 우리에게 그들의 유니버스로 올 수 있는 초대장을 꾸준히 날렸죠. 기괴하지만 각인되기 쉬운 그들의 예술세계는 이제 그들의 이름을 딴 장르로 기억이 될 수 있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원더랜드가 되었습니다.
기예르모 감독의 취향(?)은 괴수물이었습니다.
물론 장르의 특성상 취향을 심하게 타는 경향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그가 가진 재능이 점점 영화 안에서 발휘되는 것을 보는 맛이 있는 감독이었죠. 다른 세계, 혹은 차원에서 불러들인 것 같은 생명체가 튀어나올 때마다 저는 환호성을 지른 것을 보면, 아마도 이 감독 특유의 감성을 제가 좋아하나 봅니다.
이 영화의 판(Pan)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외국에서는 염소(혹은 양)가 악마 혹은 나쁜 기운을 불러오는 장난의 정령 같은 느낌의 동물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그로테스크 한 (혹은 쏘우에 가까운) 모습으로 재현해 낸 감독을 보며 저는 또 한 번 내적 댄스를 춰야 했죠.
그의 또 다른 영화인 shape of water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제 개인적인 이야기와 합쳐졌기 때문에 더더욱. 저는 이 불행한 결말과 크리처를 사랑하는 감독에게 홀라당 빠져들 수 있었습니다.
저랑 똑같이(?) 음울한 동화를 보고 자랐지만 감독은 세계적인 감독이 되었고. 저는 그냥 덕후가 되었네요.
이게 나라냐.그래서 결말은 해피엔딩인가요?
꼭 해피엔딩 이어야 하나요.
사진 출처:구글 뉴스 포인트/오필리아 너무 사랑스러움. 드레스 입었을 때 너무 깜찍했다.
오필리아는 마지막에 죽습니다. 의붓아버지가 될 뻔했던 대위가 쏜 총에 맞아서.
그리고 그녀의 피가 지하세계로 가는 마지막 관문에 닿아 그녀는 지하 세계 공주로 있었던 기억을 되찾고 백성들의 사랑 속에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가 이 영화의 끝입니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그녀는 죽은 상태죠.
결말의 해석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뉩니다.
오필리아가 실제 지하 왕국의 공주였다는 사람들과 전쟁 때문에 힘들었던 아이가 그것을 피하기 위해 만든 판타지일 뿐이라는 부류로 말입니다.
저는 후자에 가깝습니다.
오필리아는 아직 아이입니다. 엄마의 죽음을 비롯한 자신 주변에서 생긴 많은 변화들이 아이에겐 방어 체계를 불러일으켰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그것이 극대화된 것이 자신이 만든 판타지 속의 세계인 것이죠. 그 어떤 목소리도 낼 수 없고 목소리를 냈다 해도 무시당하는 상황에서 이 조그만 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자신의 존재가 인정받는 곳으로 도망치는 것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주위에서 들은 정보를 통합해 그 세계 안으로 자신이 숨어버린 것이죠.
그렇기에 결말은 더더욱 안타깝고 아픕니다.
오필리어는 고통만 가득한 기억을 안고 죽어버렸지만 그 와중에도 자신은 행복할 것이라고 믿고 있죠. 이승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말입니다. 다시 말해 이 작은 아이는 살아있는 동안 별로 행복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렇게 생각하면 영화관을 찾았던 아이들이 울었던 이유도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공주님이 죽어버렸으니. 자신들에겐 익숙한 결말이 아니었던 것이죠. 해피엔딩이 디폴트가 아닌 동화는 그들에겐 아직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을 테니까요.
슬프고 아름답고. 그럼에도 이해가 간다.
동화가 당신을 부를 때.
한글을 제대로 쓰지도, 읽지도 못하던 아이는. 잔혹 동화를 읽고 나서 더 잔혹한 세상을 조금은 더 견딜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그때 도피하는 방법을 배워버린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오필리아처럼 말이죠.
그렇기에 지금도 악착같이 동화를 꿈꾸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마 제가 처한 현실이 힘들다는 뜻이기도 하겠죠.
아이의 모습으로 본 전쟁의 힘듦과 무서움을 잘 그린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씁쓸함과 행복함이 공존하는 영화의 결말에 다다르면 더욱 그러하죠. 이젠 오필리아도 저도. 그리고 여러분도 판타지가 아닌 현실 속에서 행복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말입니다.
참고 1
아직도 기억이 난다. 정말 글이 그림보다 많은 책이었고 나는 내용보다는 내가 아는 글자를 찾아 읽기 바빴음. 근데 엄마의 입장에서는 다섯 살짜리 애가 "엄마 이거 젓갈!! 엄마 팥쥐가 젓갈!! 젓갈 되었대!!! 맞지!!"라고 하니 속이 뒤집어질 수밖에. 그 말에 엄마는 아빠를 베란다로 쫓아냈다고 함.
참고 2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영화 중 크림슨 피크, shape of water, 판의 미로 이 세 편을 가장 좋아함. 감독은 멕시코 사람이었나 그런데 우리나라 전래동화처럼 거기 민화? 도 장난 없다고 한다.
[이 글의 TMI]
1. 정형외과 갔다 옴. 의사 선생님이 운동 일주일에 세 번 이상 안 할 거면 병원도 오지 말라고 함.
2. 집 꾸미는 재미에 폭 빠짐. 아 물론 며칠 안 가겠지.
3. 패딩 찾아야 하는데. 까먹었다.
4. 택배가 하도 와서 이젠 나도 움찔움찔 놀랄 지경.
5. 오늘은 빨리 자야지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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