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4-05-04 16:54:19
[JIFF 데일리] 예상치 못한 사건의 연속
영화 <요가 연습>
<요가 연습>
시놉시스 : 최근 별거에 들어간 요가 강사 구스타보와 바네사. 터무니없는 상황과 관계를 연달아 맞닥뜨리면서 삶이 점점 복잡해진다. 참견쟁이 엄마,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수련생, 꽃피는 사랑 등 여러 난관에 부딪히면서 이 둘은 요가 수련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는다.
요가 영화인 줄 알았다
시놉시스를 보지 않고, 그저 영화 제목만 보고 선택했다. 요가를 약 1년 6개월을 해봤기에 호기심이 생겼다. '요가'를 다룬 영화는 어떻게 풀어나갈까? 그래서 고민하지 않고 예매했다. 근데 영화가 흘러가는 방향은 예상과는 달랐다. '요가'는 그저 수단이었다. 물론 중간 중간 '요가'에 대한 이야기, 자세를 하지만 스쳐가는 정도. 그래서 요가를 한 번도 접해보지 않는 관객들도 쉽게 다가갈 수 있겠다, 생각했다.
총체적 난국
주인공 구스타보가 운영하는 수련원. 총체적 난국이다. 수련 준비 시간에 지진이 일어나고, 구스타보의 말에 따라 사람들은 침착하게 밖으로 대피한다. 시간이 지난 후, 지진이 멈춘 후, 수련원에 돌아가니 여자 수련생 한 명이 '병풍'에 맞고 쓰러져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다. 이 뿐만이 아니다. 영화는 예상하지 못한 상황들의 연속을 보여준다. 계속되는 엄마의 참견, 걷다가 하수구에 빠지기도 하고, 요가 자세를 취하다 무릎 뼈가 나가기도 하고. 정말 영화는 총체적 난국이다. 영화의 감독인 마르틴 레흐만은 집착이라 할 정도로 엄격하게 단순하고 가벼운 영화 형식을 초기부터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일까, 영화가 단순하다. 그렇다고 해서 쉬운 영화는 아니다. 솔직히는 어렵다.
인생은 요가와 닮아있다
요가를 배웠을 때, 선생님이 항상 하던 말이 있다. "남들을 의식하지 않고 천천히 '나만의 속도로' 하다 보면 언젠가는 원하는 자세를 할 수 있다." 는 말이다. 그 말은 항상 마음속에 새긴다. 요가 자세에만 한정 된 말이 아닌, 인생과도 연관 되어있다. 내가 아닌 타인의 성공 혹은 타인의 인생만 의식하다보면 나만의 속도를 지키지 못하고 항상 탈이난다. 내가 주인공인 인생인 만큼, 나만의 속도로 살다보면 나도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다. 그래서 요가는 삶과 많이 닮아있다.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램 노트에 있던 '문성경' 프로그래머의 말에 따르면 '레흐만 감독은 요가와 마찬가지로 영화에서도 깨달음은 연습과 실천을 통해서만 달성된다는 것을 말하는 듯 한다' 고 한다. 그렇다. 영화는 구스타보의 깨달음은 연습과 실천을 통해 얻게 된다. 영화는 이 메세지를 강하게 보여준다.
EDITOR_RIA
상영 시간표
2024.05.02(목) 21:00 메가박스 전주객사 2관
2024.05.04(토) 10:00 CGV전주고사 8관
2024.05.06(월) 14:00 CGV전주고사 2관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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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 옆엔 누군가가 필요해
개봉 전 시사회에서 먼저 관람 후 작성된 리뷰입니다.
누구나 홀로서기를 꿈꾼다.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시절을 지나면서 가장 원하는 건 자유일 것이다. 부모나 선생님으로부터 잔소리를 듣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은 수많은 구속된 상황 속에서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목표다. 자유에 대해 바라보다 보면 주변의 도움이나 지원이 별거 아닌 듯 느껴질 때가 있다. 아무 도움이 없어도 스스로 해나갈 수 있다는 느낌은 어떤 사람의 도움도 거절하게 만든다. 절실하게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특히나 아주 가깝다고 할 수 있는 가족들과 사이가 좋지 않다면 더욱 그 도움은 받기 어려울 것이다. 한참을 보이지 않거나 옆에 없었던 사람이 나타나 도움을 주려한다면 당연히 그 사람의 진의를 의심하게 된다. 그리고 가능하면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노력할 것이다. 나이가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모두는 그런 상황에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데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다.
병으로 세상을 떠난 엄마를 그리워하는 아이 조지
영화 <스크래퍼>의 주인공 조지(롤라 캠벨)는 얼마 전 병으로 세상을 떠난 엄마를 그리워하면서 혼자 생활하고 있다. 조지는 아주 어릴 때 엄마 곁을 떠난 아빠의 존재를 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주변에 바로 도와줄만한 어른이 없다는 의미다. 정부의 지원으로 성인 보호자를 지정받아야 하지만 조지는 가상의 인물을 내세우면서 손쉽게 정부의 관리에서 벗어난다. 그렇게 십 대 초반의 아직 어린 조지는 혼자 모든 걸 관리하며 생활을 이어나간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조지는 친구와 함께 자전거를 훔쳐 용돈과 생활비를 해결하고 있다. 영화는 그 모습을 심각하게 보여주기보단 경쾌하면서도 조금은 건조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 자체는 범죄지만 그 일은 조지가 어쩔 수 없이 생활을 하기 위해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조지의 독립적인 생활이 이어지던 어느 날 집으로 아빠 제이슨(해리스 디킨슨)이 찾아오면서 불편한 동거가 시작된다.
영화가 집중하는 건 조지와 제이슨의 관계가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지에 대한 것이지만, 제이슨의 등장으로 혼란을 겪는 조지의 감정도 중요하게 다뤄진다. 조지는 아직 엄마를 잊을 수 없는 나이다. 그는 뭔가 잘 풀리지 않을 때면 보고 싶은 엄마를 보기 위해 집 밖을 나와 작은 골목에 들어가 휴대폰에 저장된 엄마의 동영상을 본다. 마지막으로 저장된 엄마의 모습에는 조지의 모습과 엄마의 모습이 함께 담겨있다. 그 동영상을 보는 순간은 조지에게 엄마와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다. 그렇게 영상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는 다시 집안으로 들어가 아무렇지 않게 해야 할 일을 한다.
갑작스러운 아빠의 등장
갑작스러운 아빠의 등장은 조지에게 굉장한 혼란을 준다. 아빠 제이슨도 마찬가지다. 조지가 커가는 걸 보지 못했고, 시간을 보낸 적이 없는 딸의 앞에 나타나 어떤 것을 해야 할지 잘 알지 못한다. 제이슨은 조지에게 따뜻한 모습을 할 수도, 잔소리하는 모습을 할 수도 없다. 아빠지만 사실은 아빠 노릇을 할 수 없는 입장인 것이다. 그가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지난 과거에 대한 사과다. 영화 속 제이슨은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것을 깨닫는다.
제이슨이 선택한 건, 잔소리하는 아빠도 아니고 따뜻한 아빠도 아니다. 좀 더 다가가기 위해 친구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조지가 자전거를 훔치러 갈 때 슬쩍 따라가 같이 그 도둑질에 동참한다. 그리고 경찰로부터 도망가고 기차역에서 한참을 어린아이처럼 조지와 놀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렇게 두 사람의 거리감은 조금씩 줄어든다.
엄마와 아내를 잃은 두 사람은 서로 교류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 두 사람이 만나서 가까워지는 과정이 <스크래퍼>가 보여주고자 하는 이야기다. 무척 우울한 이야기일 것 같지만 영화는 이 두 사람의 모습을 우울하게 그리지 않는다. 어떤 때는 경쾌하게 또 유머러스하게 보여준다. 아주 슬픈 일을 경험하고 나서도 누군가에게 의지할 존재가 있다는 것을, 어쨌든 서로 의지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영화의 맨 처음 '한 아이를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문구가 나온다. 그 문구는 혼자서도 자랄 수 있다는 식의 문구로 수정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아이가 자라는데 누군가는 꼭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조지에게 아빠 제이슨이 나타났고 제이슨은 주변 이웃들과 교류도 시작한다. 완전히 혼자 있던 조지는 조금씩 마을 속으로 연결되기 시작한다. 그 시작은 제이슨의 등장이었고, 그 끝은 제이슨이 조지의 집에 살기로 결정한 순간이었다.
우울하지 않고 따뜻한 이 영화의 정서
조지와 제이슨이 좋은 부녀 관계가 되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이들은 서로가 어떤 결핍이 있고,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각자에게 서로가 필요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첫 만남에서 서로의 마음을 긁으며 속을 썩였지만 두 사람은 이내 상대방을 품어 안는다.
영화에는 조지가 방에 온갖 잡동사니를 모아 탑을 쌓는 장면이 나온다. 하늘에 있는 엄마에게 닿으려는 듯 쌓아 올린 작은 탑은 조지가 우울할 때마다 누워서 쉬는 방이다. 그 방은 일종의 치유의 공간이다. 제이슨이 그 방을 처음 본 순간, 아마도 그때가 제이슨이 조지의 아빠가 되기로 결심한 시점일 것이다. 그 공간은 추억의 공간이면서 위로의 공간이다. 조지가 만든 그 추모의 탑은 마치 조지의 마음속에 있는 잡다한 추억들의 집합소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조지의 마음이 바로 그때 제이슨의 마음에 닿았다.
영화 <스크래퍼>는 무척 따뜻한 영화다. 태어나 처음 만난 아빠와 딸이 조금씩 서로를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이 무척 잔잔하게 담겨있다. 영화를 연출한 샬롯 리건 감독은 이번 영화가 첫 장편 데뷔작이다. 이 따뜻한 이야기로 39회 선댄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영화는 결국 아이가 자라나는데 누군가가 꼭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무척 따뜻한 방식으로 조지의 삶을 비추는 영화는 슬픔을 억누르고 있는 조지가 다시 누군가의 도움으로 따뜻한 가족이 함께하는 삶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무척 경쾌하게 보여주고 있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다운로드하였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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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이 지워진 모두를 호명(號名)하는 영화 <갈매기>
[감독: 김미조 | 출연: 정애화, 이상희, 고서희, 김가빈, 김병춘 등 | 제작: 단국대학교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 | 제작지원: 롯데엔터테인먼트 | 배급/투자: ㈜영화사 진진 | 러닝타임: 74분 | 개봉: 2021년 7월 28일]
극의 초반부, 상견례장에 먼저 도착한 오복네 가족의 모습이 나온다. 그들이 앉아 있는 원형의 테이블은 가족을 떠나지 못하고 빙빙 맴돌아야만 하는 ‘오복’의 처지를 미리 일러두는 듯하다.
영화 <갈매기>는 우리가 사는 사회를 현실적으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놀라운 성취를 거뒀다. 재개발에 반대하는 시장 상인 ‘오복’은 재개발 시위에 함께하는 사람들과 밤늦게 술을 마시다 성폭행을 당한다. 기묘하다. 흔히 재개발에 의해 삶의 터전이 빼앗길 위기에 처한 사람들은 약자로 도식화되는데 여기서는 그 안에서 또다시 가해자와 피해자가 나뉜다. 이는 젠더적 관점에서 보편적으로 중요한 지점이다. 여성은 사회에서 자본주의의 구조적 착취와 젠더적 착취를 이중으로 겪는다. ‘오복’ 역시 영화에서 개발논리와 가부장제라는 이중의 착취구조를 온몸으로 견뎌내는데, 여성에게는 그의 삶이 보편적으로 느껴지게 된다.
또한 <갈매기>가 성폭력 피해를 이야기하는 방식의 윤리성은 다른 영화와 차별화된 지점이다. 영화는 ‘오복’의 성폭력 장면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10초도 되지 않는 블랙아웃 화면이 전부다. 관객은 블랙아웃 화면 이후의 전개를 통해서만 성폭력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성폭력 피해를 경험한 ‘오복’을 무기력한 피해자의 정형화된 모습으로 가두지 않는다. 평생을 가족에 헌신한 어머니 ‘오복’이 성폭력 피해를 당한 후 이를 오히려 자신을 돌보는 계기로 여기고 의연하게 결단을 하는 모습은 어머니 세대에 용기를 건넴과 동시에 성폭력 피해 경험자에 대한 보다 나은 영화적 묘사를 제시한다. 더욱이 가해자인 동료 상인 ‘기택’에게 별다른 서사를 부여하지 않는다. 영화는 ‘기택’의 가해 행위와, 행위 이후 시장 상인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오히려 기세등등한 모습만을 보여준다. 이는 그동안 성폭력 가해자에게 유독 너그러웠던 사회 인식에 대한 날카로운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성범죄 이후를 바라보는 문제의식 역시 명확하다. ‘오복’은 자신의 피해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동료 상인들을 설득하고 회유한다. 그러나 증인으로 나서는 상인은 아무도 없고, 경찰도 ‘오복’에게 확실한 증거를 마련하라고 한다. 여기서 이상한 점을 느낀다. 다른 범죄의 경우 기소가 되면 가해자가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유독 성범죄는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 그렇게 수많은 성범죄 피해자들이 정당한 권리를 찾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의 삶까지 저버리지 않았던가. 또한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드러난다. 특히 남편이 “성범죄는 여자가 응해야만 성립된다. 그것이 진리다.”라는 말을 툭 뱉는데 이런 사회의 잘못된 인식이 그간 여성을 성범죄 피해로부터 가두는 역할을 했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집을 나서는 첫째 딸에게 ‘오복’의 남편이 옥상에서 인사를 하는 장면. 탁 트인 꼭대기에서 웃으며 느긋하게 담배를 피우는 가장의 밑에는 사각형의 창문에 포획된 채 어두운 표정을 한 ‘오복’이 있다. 그리고 카메라는 첫째 딸의 시선으로 부모를 올려다보는데 이것은 종합적으로 가부장제 자체를 상징한다. 이밖에도 서늘하게 표현된 ‘오복’이 김치를 써는 장면. 롱테이크를 적극 활용하여 현실감을 높인 점 등 촬영에 공을 들인 흔적이 여기저기 보인다.
영화의 마지막은 ‘오복’이 가해자의 가게 앞에서 ‘나는 주오복 입니다’라고 적힌 호소문 피켓을 들고 1인시위하는 모습으로 끝난다. 자신의 실존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생각나는 엔딩이다. 삶의 한 축인 경제 공동체 ‘수산시장’과 그가 헌신으로 일군 ‘가족’이라는 운명 공동체 속에서 '오복'은 저마다의 필요에 의해 취해지고, 내팽개쳐졌다. 그러나 그는 이제 '나'를 챙기기 시작한다. 육지를 빙빙 돌던 갈매기 '오복'이 기어코 바다를 향하는 모습은 스스로를 돌보지 못했던 모두를 향한 생생한 호명(號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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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쾌한 주먹 뒤에 자리한 일말의 씁쓸함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가리봉동 소탕작전 후 4년 뒤, 금천서 강력반은 베트남으로 도주한 용의자가 현지 영사관에 자수했으니 그를 인도받아 오라는 미션을 받는다. 이에 베트남으로 향한 부반장 ‘마석도(마동석)'와 반장 ‘전일만(최귀화)'. 그들은 영사관에 갇힌 것을 꽤 만족스러워하며 하루빨리 한국으로 인도되기를 바라는 현지 용의자에게서 수상함을 느낀다. 찝찝한 마음에 베트남에 자리 잡은 한국인 조폭들 사이에서 수상한 사건이 없는지 수소문하던 마석도는 무자비한 악행을 벌이는 ‘강해상(손석구)'의 존재가 자수 이유였음을 알게 된다. 그는 더 큰 사달이 나기 전에 강해상을 체포하려 하나 예상치 못한 이유로 실패하고, 결국 ‘마석도’와 금천서 강력반은 과거의 인연인 '장이수(박지환)'의 도움을 받아가며 한국으로 되돌아온 강해상을 본격적으로 쫓는다.
2017년에 개봉한 <범죄도시>는 688만 명을 극장으로 불러들이며 역대 청불 영화 흥행 TOP3에 등극해 범죄 영화의 흥행 역사를 새로 쓴 바 있다. 당시 <범죄도시>는 강력한 주먹으로 범죄자들을 제압하는 한국형 슈퍼 히어로 마석도를 비롯해 그 잔혹함과 악랄함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 장첸(윤계상), 깨알 같은 감초였던 장이수 등과 같은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의 매력으로 무장했었다. 통쾌한 액션과 묵직한 한 마디에서 예상치 못하게 튀어나오는 유머는 그 매력을 극대화하기도 했다. 마석도와 금천서 강력반 형사들이 다시 한번 범죄조직 소탕에 나서며 5년 만에 돌아온 속편 <범죄도시2>도 마찬가지다. 전편의 장점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데 이어 예상치 못해 깊이까지 겸비한 <범죄도시2>는 성공적인 시리즈, 한국형 슈퍼 히어로 프랜차이즈의 미래에 청신호를 밝히는 듯 보인다.
진일보한 유머와 액션의 매력
우선 <범죄도시2>는 전편의 매력을 그대로 남기면서도, 그 매력을 보다 대중적인 형태로 탈바꿈시켰다. 일례로 전편에서 나쁘지 않은 타율을 자랑한 유머를 시작부터 더욱 강조한다. 물론 사무실에서 강력반 형사들이 주고받는 대사처럼 웃음을 노리는 게 분명한 초반 대사들은 다소 작위적인 인상을 주기는 한다. 그러나 베트남으로 떠난 전일만과 마석도 콤비의 상반된 캐릭터성이 빚어내는 갈등을 풀어내는 대목부터 영화의 유머 타율은 급격한 상승세를 탄다. 베트남 영사관에서도 오픈한 마석도의 '진실의 방'이 대표적이다. 또한 8편까지 계획된 시리즈물답게 전편의 등장인물과 명대사를 적재적소에 오마주한 대목도 웃음벨로는 충분하다.
진일보한 액션도 인상적이다. 우선 로케이션과 CG를 통해 구현해낸 베트남이 배경으로 등장하면서 스케일이 커졌다. 또 강력반 식구들의 합이 맞아떨어지는 카체이싱 시퀀스는 자칫 간과될 수 있었던 한 명 한 명의 개성을 강조해주며, 이는 마석도와 강해상 사이에서 험악해질 수 있었던 분위기를 환기시킨다. 무엇보다도 상극의 액션 스타일을 한 데 붙여 놓은 선택이 인상적이다. 마석도의 액션은 전편 그대로, 또 마치 <이터널스>에서 길가메시가 그러했듯이, 비교조차 되지 않는 파워로 상대를 찍어 누르는 형태로 묘사된다. 유달리 강하게 느껴지는 효과음은 마석도의 주먹 한 방에 담긴 징벌의 쾌감을 극대화한다.
반면에 강해상의 액션은 날렵하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죄책감이나 도의를 피 한 방울만큼도 느끼지 못하며, 시신을 훼손하는 반인륜적인 행위에도 거침이 없는 그의 잔혹함을 고스란히 녹여낸 날렵함이다. 다르게 말하면, 어떤 환경이든 간에 순전히 살아남겠다는 동물적인 본능이 느껴지는 움직임이기도 하다. 동물적이라는 의미에서는 표범처럼 움직이는 블랙 팬서의 액션이 연상되기도 하는데, 강해상의 액션 시퀀스는 주로 롱테이크로 이어지기에 그의 동물적, 본능적 감각이 더 생생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액션이 유달리 맛있는 이유
이러한 액션이 더 맛있게 느껴지는 것은 더 거대해진 마석도와 달리 분량이 전작보다 15분가량 줄어든 영화의 짜임새 덕분이다. 사실 <범죄도시>는 마석도의 존재로 인해 이전의 형사물과는 사뭇 다른 볼거리를 선보인다. 이전까지의 형사물은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주인공과 빌런 사이에서의 팽팽한 서스펜스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에 반해 <범죄도시>는 마석도의 초인적인 힘, 빌런이 어찌할 수 없는 압도적인 피지컬을 활용하여 범죄자를 벌하는 쾌감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데에 몰두한다. 이는 속편인 <범죄도시2>에서 더욱 극대화된 포인트다. 그래서 전편과 달리 이번 영화에서는 범죄조직 간의 알력 싸움과 같은 요소는 전무하고, 마석도 일행의 수사 과정과 강해상의 악행만 담백하게 대비되어 묘사된다.
물론 이는 치명적인 단점이 될 수도 있었다. 어떻게 끝날지 쉽게 예측 가능한 영화이기에, 영화의 흐름 자체가 심히 단순해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영화는 마석도의 극단에 위치한 강해상의 캐릭터를 철저히 악마화하면서 징벌의 쾌감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이를 극복한다. 이는 전작의 빌런이었던 장첸과 강해상의 차이점으로, 강해상에게 장첸처럼 밈(meme)이 될 여지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 장첸과 강해상은 모두 철저히 '돈'을 목적으로 움직이다는 공통점이 있으며, 이는 범죄자를 미화시킬 여지를 간편하게 차단하고 있다. 다만 나름의 서사를 부여받아 매력적인 대사나 캐릭터성을 보여준 장첸과 달리, 강해상은 앞서 말했듯이 인간이라기보다는 동물에 가까운 악행만을 자행한다는 점이 결정적인 차이인 것이다.
전편 속 장첸(윤계상)과 위성락(진선규), 양태(김성규)는 저마다 매력이 있는 캐릭터였다. 영화 역시 악당들의 행각에 시간을 투자하며 경찰과 대결구도를 형성했다. 반면 강해상과 그의 동료에게는 그 어떤 서사도 없다. 베트남뿐만 아니라 필리핀에서도 활동했다는 짤막한 그의 행적을 제외하면 범죄자가 된 동기나 개인사는 일절 등장하지 않는다. 더 많은 돈과 피를 원하다는 것 외에 그를 특징 지을 수 있는 대사가 있는 것도 아니다. 또 영화는 그의 악행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는데, 간접적인 묘사로도 그 전모를 충분히 상상할 수 있으므로 강해상의 잔혹함은 더 강조되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서사의 빈자리를 온전히 액션으로 대체된 이 캐릭터에게는 이입할 여지가 전무하고, 강해상은 단지 마석도의 샌드백으로서 처절히 응징당할 때만 의의가 있다. 따라서 철저히 마석도의 활약상에 포커스를 맞춘 선택은 비록 단순하지만 의도한 효과를 120% 끌어냈다고 할 수 있다.
슈퍼히어로 영화로서의 <범죄도시2>
여기까지만 보면 <범죄도시2>에게는 단점도, 아쉬운 점도 없어 보인다. 성공한 전편을 넘지 못하는 소포모어 징크스를 충분히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진일보한 매력들은 이후의 시리즈를 더욱 기대케 만든다. 다만 호쾌한 주먹으로 강해상을 때려잡은 마석도의 존재와 그에게 열광하는 영화 내외의 반응은 약간의 씁쓸함도 남긴다. 특히 마석도를 한국형 슈퍼히어로라고 생각할 때, 그 씁쓸함은 더욱 진하다. 왜냐하면 슈퍼 히어로라는 존재는 그 자체로 동시대의 대중들의 상실감이나 결핍을 환상으로나마 치유하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히어로의 활약상이 많은 공감을 사고 큰 환호를 받을 때, 그 히어로가 활동하는 사회에는 깊은 흉터가 남아 있기도 하다.
실제로 2000년대 미국의 슈퍼 히어로들은 테러가 미국 사회에 끼친 영향을 반영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례로 아이언맨은 슈트를 만들어 아프가니스탄 테러 집단으로부터 탈출한 후 자기를 납치했던 테러리스트에게 복수를 가하는데, 이는 미군의 이라크 침공이 9.11 테러라는 트라우마가 낳은 보복성 공격이었던 현실의 반영이나 다름없다. <다크 나이트> 속 배트맨의 영웅적 활약이 역설적으로 더욱 강력한 악당인 조커를 끌어들이는 것도 중동에서 테러리스트를 제거하기 위해 파견된 미군이 오히려 ISIS와 같은 또 다른 테러 집단의 등장 원인이 되어버렸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유비라 볼 수 있다.
마석도의 주먹에 담긴 쾌감이 내심 씁쓸한 이유
그렇다면 마석도의 활약 기저에 깔린 한국 사회의 흉터는 무엇일까? 그것은 사회적 시스템에 대한 불신일 것이다. 형량을 나날이 강화하는 데서 알 수 있는 엄벌주의에 대한 갈망이 이를 잘 보여준다. 엄벌주의는 사회문제를 형사처벌로 대응하고, 처벌 수위를 더 높여야 한다는 인식이다. 어떤 문제가 발생하거나 해결되지 않는 것은 강한 처벌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가해자만 강하게 처벌한다고 해서, 해당 문제의 진실이 규명되는 것도 아니고, 피해자가 회복되는 것도 아니며, 재발방지가 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정인이 법'의 내용 중에는 처벌 강화도 있지만, 입양아가 죽는 사건이 또 있었던 것이 대표적이다. 즉, 문제를 초래한 구조 자체를 바꾸지 않는다면 범죄자와 가해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이 그 자체로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그런데도 이처럼 엄벌주의가 힘을 얻고 있는 것은 어떻게 보면 사회적으로 법과 제도에 대한 믿음이 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구성원들이 생각하는 것에 비해 처벌과 후속 대책이 미흡하기 때문에, 법으로 대표되는 사회적 시스템이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사회가 혼란스럽고, 정의는 실현되지 못하는 듯 보이며, 서로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가운데 부조리가 만연하면 누군가 강력한 힘을 통해 정의를 실현하기를 바라는 열망과 환상은 필연적으로 강해진다. 그래서 강하면 강할수록, 그 타격감이 좋으면 좋을수록, 효과음이 크면 클수록, 강해상과 범죄자들이 아파하면 아파할수록 마석도의 주먹을 향해 큰 탄성과 환호가 쏟아질 수밖에 없다. 베트남에서 현지 경찰과 영사관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나쁜 놈은 잡아야 한다는 사명을 끝까지 밀고 나가며 범죄 소탕에 일조하는 마석도의 모습도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현실에서는 국제적 문제가 될 수도 있는 일이지만, 그 열망을 채워주는 마석도의 뚝심이 주는 쾌감이 유머로 표출되는 것이다.
이러한 시선에서 <범죄도시2>를 보면 마석도를 향한 환호와 응원이 자칫 변질되면 나타날 수 있는 악몽도 찾아볼 수 있다. 바로 강해상에게 납치당해 죽은 아들 '최용기(차우진)'의 복수를 하려는 '최춘백(남문철)'의 행적이다. 그는 아들의 실종신고를 하는 대신 직접 사람들을 보내 강해상을 죽이려 한다. 경찰과 형사로 대변되는 원칙을 믿는 대신 금융회사 회장인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과 경제력을 동원해 사적 제재에 나선다. 엄연한 피해자이지만, 그 또한 작중 도시 한복판을 혼란에 빠뜨리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한 인물인 것이다.
그런데 영화는 그의 행동에 대해 마석도와 동료들의 입을 빌려 그의 선택에 동정적인 시선을 보낸다. 영화 말미에 그가 불구속 수사를 받을 것이라는 단신을 제외하면 그를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장면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 또한 법과 경찰의 시스템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 표출된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오락적 쾌감을 최대치로 끌어올린 마석도의 주먹이 러닝타임 내내 화끈한 통쾌함으로 가득한 것도 사실이지만, 유달리 큰 주먹의 효과음 잔상에서 그 주먹이 필요한 이유가 남긴 씁쓸함을 맛볼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슈퍼 히어로인 마석도가 배트맨과 같은 자경단이 아닌 엄연히 형사라는 점에서 무너진 신뢰를 회복할 희망도 엿보이는 게 위안일 것이다.
<범죄도시2>는 분명 잘 만들어진 작품이다. 숱한 한국 영화의 속편들 중 이 작품만큼 명확한 로드맵을 지진고, 전편과 연계가 잘 이루어지며, 캐릭터들도 유지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단적으로 연초에 개봉했던 <해적: 도깨비 깃발>에서 전편과의 연결고리가 거의 보이지 않았던 것과 비교해 보면, <범죄도시2>가 보여준 시리즈의 가능성이 영화 내외적으로 얼마나 큰 성취인지 더 명확히 알 수 있다. 심지어 그 슈퍼 히어로가 단순히 오락으로 소비되지 않고, 속한 사회를 반추할 수 있는 거울도 되는 깊이를 지니고 있다면 이는 더할 나위 없다. 단지 앞으로 만날 마석도의 액션에서는 일말의 씁쓸함도 없이 온전히 쾌감이 깃들어 있기를 바랄 뿐이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다음을 기대케 하면서도, 마냥 기쁠 수 없는 한국형 슈퍼히어로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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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의 색을 말하다,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 포스터
플로리다 프로젝트 (The Florida Project, 2017)
제작 : 미국, 드라마 │ 감독 : 션 베이커
출연 : 브루클린 프린스(무니), 브리아 비나이트(핼리), 윌렘 대포(바비)
등급 : 15세 관람가 │ 러닝타임 : 111분" 꿈과 환상의 나라 옆에는 빈민가가 있다네 "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 스틸컷
미국의 남동쪽 플로리다 주에는 꿈과 환상의 나라, 디즈니월드가 있다. 여느 관광지나 그렇겠지만 디즈니월드의 주변에도 관광특수효과를 노리며 화려한 외양의 숙박시설들이 지어졌다. 예닐곱 살쯤 된 아이 '무니'가 사는 곳도 그런 곳의 일부다. 이름하야 '매직캐슬'. 몽환적인 연보라색 페인트로 뒤덮인 이곳은 동화 같은 분위기나 이름과는 달리, 홈리스(homeless)들이 모여 장기투숙을 하는 싸구려 모텔이다. 무니는 스물두 살 엄마 '핼리'와 함께 그곳에서 살고 있다.
아이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영양가 없는 와플이나 피자로 끼니를 때우고, 길거리에서 향수를 팔아 힘겹게 방세를 치르는 등, 무니의 엄마 '핼리'는 아이를 키우기에 너무나 무지하고 가벼워 보인다. 무니를 둘러싼 열악한 환경도 문제다. 방세를 못 내면 언제라도 쫓겨날 수 있는 허름한 모텔에는 투숙자들의 욕설과 폭력이 난무하고, 공용으로 쓰는 수영장에서 가슴을 내놓고 선탠을 하는 할머니가 사는가 하면, 아이들 곁에 얼쩡거리며 성범죄의 기회를 노리는 남성도 있다. 하지만 무니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한 아이이므로,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는 이곳에서의 하루하루가 그저 즐겁고 흥미로울 뿐이다.
" 관여하지 않고 보여주어 드러내는 휴머니즘 "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 스틸컷
사실 영화 초반부까지만 해도 '핼리'에게 엄마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저런 엄마와 함께 저런 환경에서 쭉 큰다면 어쩌면 아이의 미래는 정해져 있다고, 교육이나 복지의 혜택을 전혀 누리지 못한 채 엄마처럼 길거리를 전전하며 사는 빈민층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니 모녀의 이 미래 없는 삶에도 그들 나름의 일상과 사랑이 있다는 걸 서서히 영화를 보며 느낄 수 있었다.
핼리는 정기적 일거리가 없지만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 방세를 내려고 노력하고, 스물둘 한창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이를 거부하는 남자와는 데이트하지 않는 엄마이다. 아무리 자격이 없다는 소리를 들을지언정 핼리는 핼리 나름대로 딸 무니를 아끼고 사랑하고 있었다. 매직캐슬의 매니저 '바비'도 그런 의외성을 느끼게 하는 인물이었다. 바비는 겉으로는 방세를 내지 않으면 쫓아낼 듯 구는 딱딱한 관리인이지만, 실제로는 무니와 핼리가 처한 상황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도우려고 하는 따뜻한 사람이다. 알게 모르게 그에게 의존하는 무니와 핼리는, 마찬가지로 겉으로는 무심한 척 하지만 바비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아무리 생각 없이 사는 사람들의 막장 라이프인 듯해도, 카메라는 그 안에 우리가 모르는 구석을 샅샅이 들추어 따스함을 발견한다. 그런 카메라의 시선에는 섣부른 동정이나 비난이 없다. 그저 매직캐슬의 투숙자들이 겪는 사실만을 보여줄 뿐이다. 하지만 영화 중반부를 넘어서자 나는 이 무심한 듯 비추는 이 휴머니즘적인 이야기에 완전히 젖어들었다.
" 그 엄마가 틀렸다고 어떻게 확신하는가 "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 스틸컷
이런저런 사정으로 더 이상 방세를 내기 힘들어진 핼리가 결국 성매매에 발을 들였을 때에도, 마냥 그녀를 욕할 수 없었던 건 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방세를 내야만 무니와 함께 살 수 있고 밥을 먹일 수 있다는, 엄마 핼리의 일념이 느껴졌으니까. 단칸방인 그곳에서 몸을 팔며 돈을 받는 동안, 무니는 엄마가 크게 틀어놓은 힙합을 들으며 오랜 목욕을 한다. 욕실 밖에서 엄마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른 채, 매일 그렇게 목욕이 반복된다. 핼리는 잘못된 일을 하고 있으며, 어린 무니는 아무것도 모르고, 카메라는 모녀의 삶을 우리에게 알리되 관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눈물이 흘렀다.
누군가의 신고로 아동보호국에서 결국 무니를 데리러 왔을 때, 그 복잡한 심경은 피크를 쳤다. 절대로 아이를 뺏기지 않으려는 핼리의 발악과, 마찬가지로 절대로 엄마에게서 떨어지지 않겠다는 무니의 몸부림은 너무도 슬펐다. 그러나 이 열악한 환경에서는 아이가 분리되는 게 맞다는 어른으로서의 판단도 내 안에 존재했다. 핼리가 나쁜 엄마여서가 아니라, 핼리가 처한 환경이 아이를 해칠 것을 알기에. 이 모든 감정이 얽기고 설켜 마음속에서 싸움이 일었다. 이런 환경에서라도 아이를 사랑하는 엄마와 두는 게 맞는가, 아니면 더 좋은 환경으로 아이를 보내는 것이 맞는가에 대한 답은, 그래서 영화가 끝난 뒤에도 쉽게 내려지지 않았다.
영화가 어느 한쪽의 태도를 취하지 않고 사실만을 비추는 까닭은 아마도 그런 이유였을 테다. 자본주의의 가난이란 애초에 그런 것이기 때문에. 어린 딸을 두고 성매매를 하는 핼리에게 잘못이 있음을 알면서도, 가난한 모녀에게 별다른 구제의 손길을 내밀지 못했던 사회를 탓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단지 개인의 무능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는 홈리스 현상 역시 같은 선상의 문제다. 그러니 동정을 하면 핼리의 잘못된 선택을 지지하는 꼴이 되고, 비난을 하면 사회의 불평등을 외면하는 꼴이 된다. 영화는 그저 적절한 리얼리즘을 통해 관객이 이 양가감정을 충분히 느끼게 하고 싶었으리라.
" 수많은 '무니'와 '핼리'가 진짜 퓨처랜드에 이르기를 "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 스틸컷
영화의 마지막. 아동보호국으로부터 분리되기를 거부하며, 무니는 단짝 '젠시'에게 찾아간다. 젠시는 근처의 모텔 '퓨처랜드'에 살며 무니와 매일매일을 함께했던, 마찬가지로 홈리스의 딸이다. 가난을 대물림받을 미국 극빈층의 아이들. "이제 너를 못 볼지도 몰라"하며 무니가 울먹이자, 젠시는 무니의 손을 와락 잡고 있는 힘껏 뛰어 디즈니월드로 향했더랬다. 디즈니월드 옆에 살면서도 가난해서 정작 한 번도 가본 적 없던 그곳에, 숨기 위해 뛰어들어간 아이들. 그 모습은 너무나 귀엽고 발랄했지만, 한편으론 슬프고 미안했다. 아이들에게 펼쳐질 현실이 동화가 아니란 걸 알고 있기에.
눈부신 연보라색 건물 외벽, 매직캐슬이니 퓨처랜드니 하는 웅장한 이름들. 그러나 그 안에는 당장 이번 주 방세로 걱정하는 여러 삶들이 모여있다. 들여다보지 않으면 모르는, 막연한 동정이나 막연한 비난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삶이. 이런 영화를 보고 나면 다소 무력해지는 기분은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세상이 좋아질 거라는 희망은 가져봐야 되겠지. 아이들이 디즈니월드로 뛰어들었던 것처럼.
플로리다에 있는, 또는 어느 나라에나 있을, 수많은 무니와 핼리들의 안녕을 막연하게나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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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의 가해자가 오늘의 피해자가 되다
어제의 가해자가 오늘의 피해자가 되다
영화 <유포자들> 리뷰
감독] 홍석구
출연] 박성훈, 김소은, 송진우
시놉시스] “핸드폰이 사라지고, 나는 N번째가 되었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꿈꾸던 남자 도유빈. 자신의 오랜 친구 공상범의 유혹에 이끌려 클럽에서 잊지 못할 하루를 보낸다. 그리고 사라진 전날 밤의 기억과 핸드폰 누군가로부터 걸려온 한 통의 전화 수화기 너머 범인은 3천 3백만 원을 구해오지 않으면 그 영상을 세상에 공개하겠다고 한다. 오늘 밤, 숨기고 싶었던 모든 것이 잠금해제 된다.
몰카범의 피해자에 대한 이야기가 꾸준히 영화화 되고 있는 시점에서 영화 <유포자들>이 비슷한 소재를 어떻게 풀어냈을까 걱정반 기대반으로 영화관을 찾아갔다. 사실 뻔한 내용이기에 이미 그동안 많이 접했던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면 어쩌나 내심 걱정을 많이 했었는데 피해자의 성별을 교차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이질감을 전해주어서 새로웠던 작품이었다.
교사라는 직업이 가진 압박감을 표현하다
미래에 사회를 이끌어나갈 아이들을 교육하는 곳인 학교. 이 학교에서 학생들의 교육을 전담하는 이는 교사다. 그렇기에 모범을 보여야하고 위험한 행동을 해선 안되는 직업이기도 하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전형적인 선생님의 상이 있기에 이에 벗어나면 시정 요청이 쉽게 들어오는 직업군 중 하나다. 그래서 일까? 몰카 유포와 관련된 다양한 영화들에서 피해자로서 종종 볼 수 있는 직업이 바로 교사였다. 이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로 피해자인 유빈의 직업이 고등학교 교사다.
교사로서 교단에 서서 아이들에게 수업을 하면서 유빈은 동영상이 언제 퍼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이면서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동영상이 공개되는 망상을 겪기도 하고, 이로 인해 아이들이 자신을 비웃고 욕하는 것까지 상상을 하며 힘들어한다. 모범을 보여야하는 직업에서 스스로의 행동이 그렇지 못했다는 자책과 빠르게 자신의 행실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갈 수 있다는 집단이라는 공포감이 주는 압박이 굉장히 클 수밖에 없다는 직업군이라는 점이 이번 영화에서도 잘 표현이 되고 있었다.
피해자에는 성별이 없다
이제까지 많은 작품들에서 피해자는 여성, 가해자는 남성이라는 프레임이 작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 사례를 보면 여성 피해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남성 피해자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이번 작품 <유포자들>에서 몰카 피해자로 남성과 여성 모두를 설정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성범죄의 피해자에는 성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으며 또한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이 작품에서는 잘 보여주고 있었다. 그 방법이 바로 주인공이 가해자와 피해자가 동일인물로 설정한 것이었다.
영화 속 주인공 유빈의 성적 취향은 관계를 가지면서 영상을 찍는 것이다. 그런 그의 취향을 알았던 친구 상범은 유빈의 핸드폰을 고쳐준다는 핑계를 가지고 유빈의 핸드폰에 있었던 동영상들을 불법 음란 사이트에 업로드했고, 여자친구는 이로인해 일상을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만 했다. 그런 여자친구에게 유빈은 3,000만원이라는 돈을 내밀며 ‘우리 인간적으로 해결하자’라며 비인간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고등학교 선생님이 된 유빈은 결혼을 앞둔 상황에서 클럽에서 만난 여자들의 꼬임에 넘어가게 되고, 그 과정에서 찍힌 몰카 동영상으로 인해 자신이 당했던 것과 똑같은 일을 당하게 된다. 과연 유빈은 남성으로서 살아가는 자신의 인생에서 이러한 몰카 동영상으로 인해 자신의 인생이 흔들릴 것이라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해본 적이 있었을까? 자신이 여자친구와의 관계 영상을 찍으면서 가해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어도, 절대 피해자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기에 자신에게 닥친 이 상황에 더욱 멘탈이 붕괴되고 정상적인 해결방법을 찾지 못한 것이 아닐까 싶다. 마지막으로 진범을 잡고 자신의 몰카를 유포한 이와 마주본 장면에서 ‘인간적으로 해결하자’는 말을 들으며 과거 자신이 했던 말과 똑같음을 깨달은 유빈은 얼굴이 일그러진다. 가해자의 얼굴에서 피해자인 자신의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영화는 가해자 유빈과 피해자 유빈이 서로 마주보며 마무리된다. 그만큼 이 작품은 성범죄의 피해자와 가해자에는 정해진 성별이 없으며, 가해자 역시 언제든지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시각적으로 잘 구현한 작품이었다.
영화 <유포자들>은 불법 촬영이라는 무거운 소재였지만 기존에 통용되던 성별을 역전시킴으로써 그리고 가해자와 피해자를 동일인물로 설정함으로써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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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이 만들어낸 가장 마법적인 공동체의 신화
안토니아스 라인 Antonia's Line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안토니아(빌레케 반 아믈로이)는 어머니(도라 반 더 그로엔)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온다. '목소리 큰 남자들이 조용한 여자들을 짓밟는' 한적한 마을은 안토니아를 반기지 않는다. 강인하고 주체적인 안토니아는 딸 다니엘(엘스 도터만스)과 함께 땅을 일구고 공동체를 꾸려나간다. 안토니아는 너른 품으로 마을의 소외된 인물들을 끌어안는다. 안토니아의 긴 식탁은 풍요와 사랑으로 가득 찬다.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은 안토니아부터 사라까지 4세대에 걸친 모계의 일대기를 그린다. 목가적인 농촌의 풍경을 바탕으로 펼쳐지는 이들의 삶은 계절의 변화처럼 순환하며 계속해서 이어진다.
식탁의 공동체
이들의 주요 생계수단은 땅, 즉 농사다. 안토니아의 곁에 모여든 사람들은 자연스레 농사일을 함께 하게 된다. 처음에 농사일을 도울 사람은 딸 다니엘뿐이었으나 루니 립이나 디디와 같은 사람들이 함께하기 시작하며 일손은 점점 늘어났다.
안토니아의 사람들이 모이는 구심점은 단연 식탁이다. 넓은 마당에 놓인 기다란 식탁은 마음 놓고 먹고 마시며 웃고 이야기할 수 있는 휴식처이다. 식탁을 중심으로 한 이들의 관계는 혈연관계에서 벗어난 진정한 의미의 '식구'이다. 식탁 중심의 공동체 안에서 구성원들은 각자의 방향으로 성장한다. 이들을 살찌우는 것은 테이블 위의 음식이 아니라 안토니아를 기반으로 다져진 단단한 신뢰다. 누군가 갑작스레 이 식탁의 손님으로 찾아오더라도 문제는 없다. 자리에 숟가락 하나만 더 놓으면 그만이다.
안토니아는 마치 건국 신화의 주인공처럼 느껴진다. 안토니아의 정착기는 황무지를 일구어 새로운 마을을 만드는 것과 다름없다. 안토니아를 주축으로 한 공동체는 기존의 남성 중심적 질서의 흐름을 바꿔놓는다. 어떤 여성도 소나 돼지처럼 대우받지 않고, 조금 느리거나 튄다는 이유로 돌을 맞지 않는다. 안정과 풍요 속에서 자라나는 사람들의 바탕에는 안토니아라는 굳건한 땅과 식탁의 공동체가 있다.
경계의 리더십
안토니아는 힘과 폭력에 의한 굴복이 아니라 받아들임의 방식으로 사람들을 모은다. 안토니아의 방식은 기존의 남성적 방식과도 다르고 흔히 여성에게 기대하는 '헌신적인 모성'의 성격과도 다르다. 안토니아는 무리의 우두머리로서 책임을 지고 구성원들을 이끌어나간다. 그와 동시에 이들의 의사를 존중한다.
안토니아의 리더십은 경계를 지어주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어떤 관계에서든 협상의 태도를 보인다. 이를테면 결혼을 청하는 농부 바스가 찾아왔을 때의 대화가 그렇다. 일단 그의 요구를 듣는다. 아내와 엄마를 원하는 바스의 제안을 안토니아는 단호히 거절한다. 남편도, 아들도 필요 없다고 딱 잘라 이야기한다. 다만 남자가 해줄 수 있는 일을 도와주면 식사에 초대하겠다고 제안한다. 상대가 원하는 것과 자신이 원하는 것을 분명히 파악한 뒤, 자신이 줄 수 있는 만큼의 것을 제시한다. '너는 여기까지 올 수 있고 나는 여기까지 내줄 수 있다.'는 태도다. 서로의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걸로 그만인 것이다. 힘으로 제압하거나 상대를 깔보지 않으며 서로의 의사를 존중하는 세련된 리더십을 보여준다.
폭력적인 남성성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피트에 맞서는 시퀀스도 안토니아의 리더십과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중요한 대목이다. 안토니아는 총을 가지고 가지만 그 용도는 위협에 그친다. 총구는 시종일관 피트를 겨누고 있지만 그에게 발사되지는 않는다. 안토니아는 피트에게 경계를 정해줌으로써 그를 처벌한다. 마을을 떠날 것, 다시는 눈에 띄지 말 것. 다만 여기에 협상의 여지는 없다. 자신의 무리에 위해를 가한 자에게 내리는 심판에 협상은 필요 없다. 총구를 단단히 겨눈 팔과 저주를 퍼붓는 단호한 얼굴 뒤로 마을 남자들이 서 있는 장면은 안토니아가 이미 마을에서 리더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신이다.
신화와 창조성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아들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익숙하다. 단순히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딸의 이야기를 한다고 특별하다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여성들에게 새로운 신화를 선물한다. 그리고 그 신화의 바탕에는 여성들의 고유한 능력인 임신과 출산이 있다. 4대에 걸쳐 펼쳐지는 모계의 이야기가 가능한 것은 여성이 지닌 창조성 덕분이다.
다니엘이 딸 테레스를 가지게 되는 경위를 생각해보자. 다니엘은 아이를 원했지만, 남편과 결혼은 원치 않았다. 다니엘과 안토니아는 아이를 얻기로 한다. 여기서 남자의 역할은 한 번의 성관계를 함께 하는 것이 전부다. 그 남자가 누구인지 우리는 알 필요도 없고, 남자 역시 자신의 아이가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없다. 딸 테레스는 다니엘의 딸이 분명하다. 이 모든 과정은 자연스럽고 산뜻하게 그려진다. 감독은 중요하지 않은 아버지의 역할보다 생동감 넘치는 여성들의 모습에 주목한다.
이들의 창조력은 비단 임신과 출산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다니엘은 그림으로, 테레스는 음악과 수학으로, 사라는 글로써 창조력을 뿜어낸다. 이들의 삶에는 폭발적인 창조력이 꿈틀거리고 있고 계속해서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안토니아의 죽음이 '끝'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이야기는 자손들에 의해 불멸할 것이다. 안토니아 개인은 그저 필멸의 생을 지닌 인간이지만, 그가 창조한 자손과 질서와 공동체가 이어져 불멸할 것이다. 필멸하되 불멸하는 인간의 기나긴 흐름이 담겨있다. <안토니아스 라인>의 신화적인 면은 이 불멸성에서 드러난다.
환상의 이미지
작품 속에서 다니엘과 사라는 종종 환상의 이미지를 마주한다. 안토니아의 어머니 일레곤다의 장례식에서 다니엘은 관에서 일어나 흥겹게 노래 부르는 할머니의 환상을 본다. 예수 조각은 고개를 움직이고 천사 동상은 날개로 신부를 내리친다. 라라에게 사랑에 빠지는 순간 다니엘의 눈앞에 펼쳐지는 이미지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다. 교회의 교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서도 다니엘은 이미 절대자의 허락이라도 받은 듯 당당하고 유쾌하다. 그렇기에 교회의 세속적인 신부가 아무리 다니엘과 안토니아를 힐난해도 자리를 박차고 나올 수 있다. 다니엘은 종교와 신화의 위에서 자유롭다.
다니엘이 미술적인 환상을 본다면 사라의 환상은 조금 다르다. 안토니아의 증손녀인 사라가 가족의 구심점인 식탁을 보며 죽은 이들의 환상을 보는 신은 이 작품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일레곤다, 크룩 핑거, 미친 마돈나와 신부, 레타, 디디의 남자 형제들, 루니 립은 사라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식탁 옆에서는 젊은 모습의 안토니아와 바스가 춤을 춘다. 감독은 높은 곳에서 모든 것을 아우르며 지켜보는 사라의 시선을 따라 하이앵글의 풀숏으로 이 장면을 담아낸다.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이 꿈같은 장면은 안토니아의 가족을 거쳐간 죽은 이들을 다시 식탁으로 소환한다. 실제로 사라가 그들을 아는지 상관없다. 안토니아의 삶의 궤적은 사라에게도 각인되어 이어진다. 마당에서 펼쳐진 환상적 이미지는 안토니아의 죽음으로 이어지며 작품의 마지막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우리는 영화의 내레이터이기도 한 사라가 모든 것을 지켜보며 훗날 자신의 언어로 표현해내리라는 것을 안다. 안토니아의 마지막 아침에서 시작해 주마등 같은 그의 젊은 날들은 사라를 통해 계속해서 이야기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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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2차대전 독일군에 의해 고립된 연합군 병사들의 최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실화를 바탕으로한 전쟁영화 덩케르크(2017)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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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엄마의 왕국> 메인 예고편
기억을 잃어가는 엄마🤱 기억을 찾아가는 아들👨 평화로운 왕국이 붕괴되었다! [엄마의 왕국] 7월 24일 개봉 확정 & 미스터리 가득한 메인 예고편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