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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수2025-03-23 23:44:23

책임과 회피, 장손의 선택

영화 <장손>(2023)에서의 운전을 중심으로

운전면허를 딴 지 어느덧 1년이 지났다. 보통은 수능이 끝난 뒤나 군대에 가기 전에 따는 경우가 많으니 나는 상당히 늦게 딴 편인데, 당장 운전할 일이 없다는 이유로 혹은 왠지 자신이 없다는 핑계로 면허 취득을 오랫동안 미뤄왔기 때문이다. 어쨌건 지금은 여러모로 운전의 편리함을 느끼고 있다. 특히 보람을 느끼는 때는 아버지를 대신해 내가 운전대를 잡을 때다. 그것은 2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가족들을 태우고 이동시켜야 했던 아버지의 자리에 잠시나마 내가 앉아보는 일이다. 어디까지나 잠깐 동안의 일이지만.

 

금동현 영화사연구자는 오정민 감독의 <장손>(2023)을 이야기하며 가부장 사회에서 운전이 남성에게 지우는 책임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장손>에서 운전은 집안 기성세대 남성의 몫이고, 장손인 성진은 홀로 기차나 택시를 탄다. 이를 성진이 자신에게 부여되는 책임을 (의도했든 아니든) 유예하거나 외면하려는 태도로 본다면 언뜻 이해되지 않던 몇 장면을 함께 이야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성진은 장손으로서 가족 모두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바로 그 사실을 불편해 한다. 그가 가족 간의 자리에 항상 늦게 등장하고, 일찍이 퇴장하려는 건 가족에 적극적으로 섞이기를 거부하고 외부자의 입장을 택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두부공장을 이어받지 않겠다는 건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겠다는 호기로운 선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업이라는 이름의 책임과 부담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이는 때로 두려움이나 비겁함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가령 고모-고모부와의 관계에서는 어떤가. 성진은 입원 중인 고모부를 보러 가자는 고모의 제안에 응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고모부와의 만남을 기약 없이 지연시킨다. 이것이 성진이 가족애가 없거나 냉혈한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는 고모부의 사고에 대해 책임을 느끼고 있지만, 그것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보인다. 우여곡절 끝에 병원을 찾아가지만 입원실에는 들어가지 않고 고모부의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다. 복도 의자에 앉아 꽃바구니만 고모에게 전하고 돌아설 뿐이다. 고모와 고모부를 부모님같이 생각했다는 말이 무색하게.

 

가족사진을 찍은 김에 조부모의 영정 사진을 따로 찍어 달라는 아버지의 요청을 성진이 거부한 것 역시 두려움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영정 사진은 지금의 얼굴에 죽음을 포개어 보는 일이고, 앞으로 다시 못 볼(지도 모르는) 얼굴을 마주하는 일이다. 성진은 그 죽음에 맞닿지 않기 위해 영정 사진을 찍지 않지만, 예상치 못한 할머니의 이른 죽음으로 결국 할머니의 영정 사진은 그날 성진의 카메라로 찍은 가족사진이 된다. 성진은 자신이 찍은 그 사진을 직접 액자에 담아 기차를 타고 장례식장에 도착하는데, 고모부의 입원실에서와 마찬가지로 빈소에 들어가기 직전 망설인다. 그 잠깐의 머뭇거림 역시 할머니의 영정 사진을 자신이 직접 놓아 드려야 한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 그로부터 나온 유예와 지연의 리액션이 아닐까. 함께 언급해야 할 장면이 있다. 성진의 마지막 장면이기도 한, 두 번째 택시 장면. 할아버지가 그의 손에 쥐여 준 통장엔 매달 백만 원 씩, 오천만 원이 입금된 내역이 적혀있다. 성진은 그것이 고모가 매달 백만 원씩 모은 돈, 돌아가신 할머니가 관리했다던 고모의 돈이라는 것을 안다. 그때 성진의 얼굴 위로 눈부시게 내리쬐는 햇빛은 그 돈의 출처를 알고 있는 세상(영화 밖 관객)의 응시에 다름없다. 그러니까 성진이 눈을 찡그리고 손으로 막아도 막아지지 않을 응시. 어떤 유예와 지연의 리액션으로도 그가 떨쳐내지 못 할 책임. 부채의식. 성진은 그 택시를 타고 서울로 갈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언젠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야 한다. (아마도 할아버지의 장례식 때?) 그때까지 성진은 그 책임과 응시로부터 얼마나 멀어질 수 있을까. 할아버지가 준 비밀을 언제까지 지킬 수 있을까. 성진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다음 장면, 할아버지 승필이 계속해서 산 깊은 곳으로 들어가 사라지는 마지막 시퀀스가 더 서늘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어쩌면 그렇게 성진의 비밀도 깊은 곳으로 들어가 끝내 사라질지도 모르겠다는 씁쓸함 때문이다.

작성자 . 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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