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3-10-10 19:40:37
[BIFF 데일리] 투박한 울림으로 기억하기
영화 <1923년 9월> 리뷰
Director] 모리 다츠야
Cast] 이우라 아라타, 다나카 레나, 나가야마 에이타, 히가시데 마사히로, 코무 아이, 토요하라 코스케, 에모토 아키라 외
Program note]
1923년 9월에 어떤 일이 있었나? 영화는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뒤 발생한 비극을 들여다본다.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자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소문이 퍼졌고 일본 군경과 무장한 일본인이 수많은 조선인을 학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사건의 진상은 아직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는데, 일본 감독이 이런 소재를 영화로 만들었다는 사실부터 눈길을 끈다. 1923년 9월, 가난한 15명의 일본 행상단이 후쿠다 마을에 도착한다. 의약품과 일상용품을 팔며 떠돌아다니는 그들은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자 생소한 지방 사투리를 쓴다는 이유로 조선인으로 오해를 받는다. 일본에서도 잘 안 알려진 후쿠다 마을 사건의 시작이다. 조선인 학살과 마찬가지로 후쿠다 마을 사건도 잊혀진 역사이다. 감독은 “99년이 지난 지금 이 비극적 사건을 아는 이는 거의 없다”고 말했고, 프로듀서는 “우리는 망각하게 놔두어서는 안된다. 알아가고, 기억하고, 소통하는 것은 항상 항거의 행위가 될 수 있다”는 제작 의도를 밝힌 바 있다. (남동철)

아주 어릴 때, 지금으로선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어떤 소설집을 읽었다.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단편 소설집이었고, 그 중에서는 어머니가 아이를 뒤뜰로 데려가 꽃잎으로 한글을 써 보내는 아련한 장면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끔찍한 이야기도 있었다. 관동대지진 이후 미쳐버린 것 같은 사람들이 사람들에게 ‘15엔 50전’을 발음해 보게 시킨 다음, 발음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죽창으로 찔러 죽이는 것이다. 그 소설집에서 죽창에 찔러 죽은 사람은 말을 더듬는 일본인 아이였다.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소설집에서 기억나는 장면이라곤 딱 그 두 장면뿐이다.
의도치 않은 조기 교육(?)으로, ‘후쿠다 마을 사건’이 낯설기만 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충격적이다. 자국민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자국민을 위협하는 가짜 뉴스를 뿌리고, 마치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가짜 뉴스의 뒤를 따라가던 끝에, 자국민을 위해 휘두른 무기는 자국민을 죽이고 만다. 그러나 이를 단순한 촌극으로 코웃음 치며 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자국민을 죽인 것이 “실수”였다면, 자국민이 아닌 자들을 죽인 것은 괜찮은가? 우물에 독을 풀었고 살인과 강간을 일삼는다는 거짓말을 뿌려 가며 조선인을 죽이려 한 사람들은 누구일까?

역사는 언제나 “피는 피로, 폭력은 폭력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주지시킨다. 극중에서도 몇 번이나 대사로 강조하지만, 사람들이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식의 루머를 받아들인 데에는 이유가 있다. “조선인들이 너무 많은 괴롭힘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논조이다. 그렇다면 괴롭히지 않으면 될 텐데, 가해자의 손에서 뻗쳐 간 폭력은 다시 가해자에게 불안으로 돌아간다. 쌍방의 폭력이 아닌 일방의 폭력이어서, 그 불안은 또 다시 피해자의 피를 흘린다. 바로 이런 이유로 식민 지배는 전쟁보다 참혹하다.
그게 1923년의 일이었다. 관동대지진 이후 너무 많은 조선인이 죽고, 후쿠다 마을 사건처럼 중국인이나 일본인도 죽고, 말도 안되는 참극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그 난리를 막아 보겠다고 내린 칙령들은 1925년 치안 유지법이라는 탈을 쓴다. 다시 조선인을 옥죄는 법이었다. 그 난리통에서 배운 게 아무 것도 없는 이들은 그 후로도 20년 동안 수많은 사람을, 생명을 수탈한다.

어느덧 관동대지진은 100년 전의 일이 되었고, 많이 잊혔다. 관동대지진 이후 있었던 어떤 일들이 그 후로도, 어쩌면 지금까지도 폭력의 굴레를 덧쓰고 있다는 것도 우리는 거의 인지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이러한 작품의 존재는 소중하다. 특히나 일본 감독이 만든 영화에서 1919년의 병천, 제암리 같은 지명이 대사로 똑똑히 들리는 순간은 놀라웠다. 병천은 아우내 장터, 즉 1919년 유관순 열사가 있던 곳이자 3.1운동을 상징하는 곳이며, 제암리는 그 이후 일본군이 보복성으로 민간인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사건이다.
일본 국적을 가진 이가 전쟁범죄를 똑똑히 언급하는 일이 얼마나 드문지 잘 알고 있기에, 그 순간은 놀라웠다.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을 구분하기 위해 발음이 미묘한 ‘15엔 50전’ 또한 영화에 또렷하게 언급되며, 일본에서 어렵게 살아가다 살해되는 조선인 캐릭터도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다. 그가 마지막으로 뱉는 대사는 분연히 외치는 자신의 이름 세 글자였다. 이런 영화는 앞으로도 쉽게 나오지 않을 것이다.

아쉬운 점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더없이 인간적이라는 점을 표현하고 싶었던 듯하나, 젠더 의식 이래도 되나 싶은 장면들이 있었고, 이야기의 진행을 위해서이기는 하나 “좋은” 일본인의 비율이 현실 대비 매우 높아, 보는 조선인 입장에서 기분이 미묘해진다. 게다가 “좋은” 일본인은 하나 같이 장신의 배우들이 맡아서, 사진을 ‘포토샵’ 처리해 프로파간다에 이용하던 일제가 생각나 또 기분이 기묘하다. 그러나 아쉽다는 말만으로 지나치기엔, 이런 영화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이다.

아주 정교하게 연출되고 적절하게 배치된 아름다운 문장이어서 마음에 오래 남는 대사들이 있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라든지, “추신, 나도 네 꿈을 꿔” 같은 대사들 말이다. 반면, 투박하게 놓여서 적나라하게 외치는 소리이기에 외면할 수 없는 대사들도 있다. 이 영화의 대사들이 그렇다. 당시의 일본 시민들이 그토록 지키고자 한 국가는 무엇인가? 그게 무엇이며, 그걸 지키기 위해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옳은가? 그 사람이 조선인이면 괜찮은 것인가? 무의미하고 잔혹했던 몰살은 기록하지 않아도 괜찮은가? 투박한 대사들은 100년 후의 우리에게도 울림을 준다. 나라를 빼앗기고 언어를 짓눌리고 목숨마저 죽창에 찔려 버린 어떤 사람들의 나라에서 그 울림을 목격하는 기분은 정말로 기묘했다. 이 영화가 던진 울림 이상의 작품들을 더 보고 싶어진다.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2023.10.04-13) 상영시간표]
10월 06일 20:00 CGV 센텀시티 3관 (097)
10월 09일 09:00 영화의전당 소극장 (289)
10월 11일 16:0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5관 (475)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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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랑종> 속임수와 혼란 사이에서 고개를 드는 신의 본질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집 안, 숲, 산, 나무, 논밭까지 자연의 모든 것에 혼이 깃들어 있다는 전통 신앙이 남아 있는 태국 북동부 이산 지역에서 가문의 대를 이어 조상신 ‘바얀 신’을 모시는 랑종(무당) ‘님(싸와니 우툼마)’. 신의 힘을 빌어 다른 존재의 혼을 침범한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제사를 드리며 지내던 그녀는 언니인 '노이(시라니 얀키띠칸)'의 남편 장례식에서 이상한 광경을 목격한다. 조카 '밍(나릴야 군몽콘켓)'이 마치 신병에 걸린 듯한 증상을 보인 것. 밍의 증상이 날이 갈수록 점점 심각해지자 님은 그녀가 신내림을 받아야 한다고 판단을 내린다. 이에 님과 동행하며 무당을 취재하던 촬영팀은 신내림의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밍과 님, 그들의 가족까지 카메라에 담기고 결정하고, 이들 모두는 밍에게 빙의한 존재로 인해 미스터리한 사건에 휘말린다.
<곡성>의 나홍진 감독이 기획/제작하고, <셔터>로 유명한 태국의 반종 피산다나쿤 감독이 연출을 맡은 <랑종>은 개봉 전부터 매우 잔혹하고 섬뜩한 작품이라는 후기로 인해 많은 관심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직접 마주한 <랑종>에서 가장 눈길이 간 곳은 예상외의 대목이었다. 그것은 바로 영화 전반을 장악한 테마인 '속임수'와, 그 눈속임의 연속이 조성하는 혼란과 공포, 그리고 그 사이에서 고개를 드는 신과 종교의 본질에 대한 고찰이었다.
우선 <랑종>의 테마인 속임수는 영화의 내용에서 찾을 수 있다. 당장 님이 무당이 된 이유부터 눈속임에서 비롯된다. 본래 무당이 될 운명이 아니었던 님은 언니인 노이가 자신에게 부적을 몰래 붙이고 본인은 성당에 나가는 등의 꼼수를 부린 결과 바얀 신을 모시게 되었다. 이렇게 한 명은 속고, 한 명은 속이는 자매의 역사는 영화에서 반복된다. 노이와 큰오빠 '마닛(야사카 차이쏜)'의 불협조로 인해 밍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없었던 님은 그녀의 증상에 대해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자신의 삶이 그 자체로 다른 이들을 속여 온 것일지도 모른다고까지 말한다. 노이도 예전에 바얀 신을 속였듯이 자신과 딸을 괴롭히는 악령을 속이려고 한다. 이에 더해 퇴마사 싼티와 밍, 마닛에 이르기까지 영화 속 주인공들은 끊임없이 서로를 속인다.
영화의 구조도 마찬가지다. <랑종>은 분명 공포 영화의 외관을 가지고 있다. 악령이 빙의한 밍이 갑작스레 생리하거나 공격적인 성향을 보이는 장면은 불쾌감과 경계심을 불러일으킨다. 애완견을 죽이고, 자해하고, 섹스를 갈구하는 등의 행위는 스크린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끔찍이 무섭다. 그런 그녀를 옆에서 보는 가족들의 심정, 악령으로 인해 자신이 모시는 신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님의 모습도 두려움과 공포를 부추긴다. 이때 <랑종>은 악령들에 의해 일가족이 고통받는 끔찍한 비극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야싼티야'라는 밍의 가문명이 적힌 인형이 클로즈업되는 순간, <랑종>이 보여준 공포영화의 겉모습은 속임수로 밝혀진다. 님과 밍의 가족이 아닌 밍을 지배하고 조종하는 악령들의 관점에서 볼 때 <랑종>은 기본적으로 처절하면서도 짜릿한 복수극이 되기 때문이다. 보험금을 노리고 공장을 방화한 밍의 할아버지로 인해 죽은 노동자들과 동식물의 혼, 노이가 불법인 장사를 지속하면서 도축한 개들의 혼은 그저 자신들이 당한 일을 가해자들에게 그대로 되돌려줄 뿐이다. 이는 다큐멘터리 촬영팀이 화장실까지 따라오며 관음적으로 촬영하는 것을 불쾌해하던 밍이 악령에 사로잡힌 뒤 카메라맨을 역으로 촬영하면서 공격하는 것으로 복수하는 장면과도 같은 선상에 놓여 있다.
이처럼 속임수가 겹치고 겹친 결과 주인공들은 혼란에 휩싸이고, 혼란 속에서 선과 악의 경계선까지 모호해지자 그들은 이내 극심한 두려움과 공포에 빠져든다. 밍의 가족과 님의 입장에서 밍에게 빙의해 자신들을 공격하는 악령들은 악이고, 바얀 신은 그들을 무찔러 줄 선한 존재다. 하지만 악령들이 정작 자신들과 조상들의 업보로 인해 만들어진 존재이다 보니 과연 그들을 순전히 악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자연히 의문스러워진다. 공포 영화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였던 악령과 밍의 가족 간의 관계가 복수극에서는 역전이 되고, 그 결과 악령이라 부르는 존재에 대한 선악의 구분은 이제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악령이 무조건적인 악에서 벗어나자 악령을 퇴치하려는 노력의 정당성도 미약해지고, 주인공들은 악령 앞에 무력해진다.
작중 바얀 신의 역할에도 같은 메시지가 담겨 있다. 바얀 신은 밍에게 위험을 경고하는 것 외에 철저히 침묵한다. 신을 자신의 몸에 모시는 님은 뛰어난 신통력을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밍이 보이는 이상 증세의 원인을 착오하고, 악령들에게 농락당한다. 악귀들을 물리칠 수 있는 마지막 순간에도 바얀 신은 마치 죽은 듯이 어떤 시도도 하지 않는다. 다만 바얀 신의 침묵은 신을 철저히 인간적인 관점에서 이해한 결론이기도 하다. 주인공들은 바얀 신이 자신들의 가문을 지켜주는 선한 존재이기에 이번에도 악령을 물리치거나 그 방법을 알려줄 것이라고 믿었다. 야싼티야 가문의 시점을 탈피하면 그들의 비극이 단지 그간 지은 업보를 되돌려 받는 것에 불과하며, 조상신인 바얀 신이 주인공들을 온전히 지키고 보살피는 것을 선한 일이라고 볼 수 있는지 의구심이 생긴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이는 악령에게도 그러했듯이 인간의 선악관이 신이라는 존재에 적용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과 다름없다.
따라서 작중 바얀 신이 죽은 것처럼 묘사되는 것은 사실 인간이 상상하는 신의 형상과 이미지가 파괴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바얀 신의 석상은 그저 인간이 만든 상징일 뿐, 그의 존재와 힘은 석상 밖에 온전히 존재한다. 이는 한평생 바얀 신을 모셔온 님이 마침내 신의 본질을 마주하고 깨달은 순간 두려움에 휩싸이고 퇴마의식이 효과가 있을지 의심하며, 무당으로서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랑종>은 신이 인간의 관념을 넘어서는 존재이고, 그 앞에서 인간은 신의 의지를 이해하기는커녕 그의 힘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으며, '선함'의 껍데기를 벗고 드러난 신의 본질은 그 자체로 두렵고 공포스럽다고 이야기하는 영화다.
사실 이러한 신에 대한 고찰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구약성경 속 등장인물인 욥에게서도 님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아무런 죄를 짓지 않고 살았던 욥은 신에 의해서 난데없이 재산과 가족, 자신의 건강을 모두 잃는다. 이에 마지막까지 신의 선의를 믿던 욥도 끝내 왜 자신에게 이런 고통을 주느냐고 신에게 따진다. 하지만 신은 그에 대한 답을 주지 않는다. 단지 폭풍 속에서 모습을 잠시 드러낸 그는 힘으로써, 두려움과 공포로 압도할 뿐이다. 압도적이고 절대적인 신의 힘 앞에서 욥은 인간적 관점에서의 도덕적 우위를 내세워보지도 못한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왜 자신이 아닌 딸에게 이런 불행을 주냐고 절규하는 노이, 선한 신이 악령들을 물리칠 거라 기대하지만 그 기대를 배신당하는 님과 닮았다.
다만 욥이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것과 달리, <랑종>의 주인공들은 새드엔딩을 맞는다. 그 이유를 영화는 믿음의 차이에서 찾는다. 욥은 마찬가지로 신에 대한 두려움을 토로한 성경 속 다른 예언자들, 쿠란 속 무함마드처럼 끝까지 신을 믿었다. 그러나 작중 등장인물들은 신이나 종교에 대한 믿음이 없다. 그들은 성당을 다니면서도 밍에게 신내림을 받게 하려 하고, 퇴마사를 믿지 못해 결정적인 실책을 저지르며, 바얀 신의 도움을 바라면서도 그에 대한 믿음이 없다. 회색 자동차에 '이 자동차는 빨간색이다'라는 스티커를 붙이면 자동차가 빨간색이 된다고 여기는 것처럼, 합리적이지 않고 말도 안 되는 듯 보이더라도 결코 믿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정작 실천으로 옮기지는 못한 결과 끝내 비극을 피하지 못한다.
그래서 선과 악이라는 인간적 관점에서 벗어나 신과 종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랑종>의 공포는 일반적인 공포영화의 그것과는 결이 다소 다르다. 종교와 신이라는 이미지에서 일반적으로는 고려되지 않는 공포, 신비함 안에 내재되어 있는 두려움, 강력한 힘 앞에서 무력한 인간상을 끄집어 올리기 때문이다. 종교학자 루돌프 오토가 <성스러움의 의미>에서 말한 대로 “절대적으로 엄청난 것, 거의 악령적인 것,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 영원한 창조력의 수수께끼와 불가해성, ‘전혀 다른 것’으로서 우리의 모든 개념적 사고를 조롱하는 것, 그러면서도 우리의 마음을 심층에서 움직이며 매혹하고 동시에 깊은 공감으로 충족시키는 것”이 영화 경험 그 자체로 표현된 것이다.
실제로 <랑종>의 구조나 형식은 이러한 주인공들의 경험과 체험, 그리고 주제의식을 온몸으로 느끼도록 설계되어 있다. 우선 영화는 바얀 신이라는 선을 따르는 님을 주인공으로 내세워서 그녀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따라가게 한다. 바얀 신과 악령이라는 명확한 선악 구도 안에서 악령을 퇴치하는 이야기에 빠지게 만드는 것으로, 이는 영화의 길잡이였던 님이 퇴장하는 순간의 임팩트를 극도로 높이는 장치다. 비 내리는 정글 안에 홀로 남아 길을 알 수 없는 것 마냥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종잡을 수 없는 혼란 속에 등장인물들은 물론 관객들도 함께 빠트리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영화는 중반부까지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현실성과 사실성을 극도로 끌어올림과 동시에 순간적으로 페이크 다큐에서 벗어나는 장면을 꾸준히 삽입하며 기괴함과 두려움을 조금씩 수면 위로 드러낸다. 뒤이어 후반부에서는 주인공들이 마주하는 여러 극한의 잔혹함과 공포감을 본격적으로 체험시켜준다.
다만 페이크 다큐 형식은 영화의 힘을 잃게 만드는 문제점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 원인은 두 가지다. 우선 영화가 갈수록 아무런 설명 없이 우연과 운에 기대는 다소 극적이고 억지스러운 전개를 선보이다 보니 후반부의 내용은 현실감을 강조하는 형식이 소화하기에는 과하게 느껴진다. 예를 들어 <파라노말 액티비티>를 연상케 하는 카메라 구도로 밍을 관찰하는 장면이나 마지막 퇴마의식에서 카메라가 카메라맨들이 공격당하는 모습을 가장 잘 담을 수 있도록 세팅되는 상황에서는 해당 화면을 애써 사실적으로 만들려는 작위적 장치가 숨겨지지 않는다. 또한 보기 드물었던 점프 스퀘어를 비롯한 여러 호려 영화의 클리셰가 후반부에 집중된 것도 원인이다. 너무 짧은 순간에 강렬한 자극이 반복해서 등장하다 보니 피로함을 주고, 더 나아가 영화의 전반부와의 이질감을 키우면서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다 보니 중반부까지 조성되는 으스스함, 언캐니(uncanny)함과 서스펜스에 비해 후반부는 다소 맥 빠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 결과 <랑종>은 기대한 바가 무엇인지, 영화의 촬영 방식과 형식에 동의하는지, 주제의식과 메시지가 얼마나 강하게 느껴지고 다가오느냐에 따라서 평가와 호불호가 극과 극을 오갈 수밖에 없는 영화다. 누군가는 나홍진 감독과 <곡성>의 명성에 비하면 최소한의 장르적 재미조차도 잡지 못한 조잡한 공포 영화라고 느낄 수 있다.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쓸데없이 잔인하고 관음적인, 개인의 신념과 사상에 따라서는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울 정도로 불쾌한 영화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관점에서 볼 때 <랑종>이 신의 본질과 종교를 구성하는 근간에 대해 흥미로운 질문을 던지는 영화라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려운 것만은 분명하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상황을 조성하는 힘에 비해 풀어내는 기교가 부족했던 신과 종교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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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바스찬이 뛰어놀던 알프스가 여전히 아름다운 이유
<벨과 세바스찬>은 프랑스와 스위스 국경의 한 마을에서 살고 있는 6살의 세바스찬과 양을 해친 개라고 오해받은 개 벨의 우정을 그린 참으로 귀여운 영화이다. TV에서 나오는 <벨과 세바스찬, 계속되는 모험>을 먼저 보고 전작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화의 배경은 알프스산맥이다. 그러다 보니 전작과 후속작을 연달아보면 눈 쌓인 알프스와 푸르른 알프스를 연달아서 볼 수 있게 된다.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을 영상 잘 담고 있다. 산을 넘어가면 '미국'이라서 엄마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세바스찬에게는 미안하지만 그곳은 아주 아름다운 스위스였다. 이런 스위스의 알프스 산맥을 본따서 '산악관광'을 하겠다는 무리가 있으니 아름다운 영상을 보면서도 사실은 속이 시끄러웠다.
스위스는 알프스산맥이 나라의 1/4을 차지는 나라이다. 나라 면적에 대비 산림면적이 높은 순으로는 OECD 국가에서 두 번째이다. 우리나라도 호랑이 등허리에 태백산맥이 흐르고 있고, 토지 면적 대비 산림의 비율은 63%로 OECD 국가 중 네 번째이다. 순서로는 상위권이지만 산림의 울창함은 매우 떨어진다. 울창함을 따지는 기준은 사실은 모호하다. 그래도 전 세계적으로 쓰이는 단위인 ha당 임목축적(1ha(100 m×100m)당 나무의 축적, ㎥/ha)이 있으니 비교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산림청에 의하면 2015년 기준으로 우리나라는 146㎥/ha, 뉴질랜드 392㎥/ha, 스위스 353㎥/ha이다. 비율만 높았지 나무의 나이와 크기는 2.7배 정도 작은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가 겪었던 전쟁의 역사에서 수목의 수탈과 훼손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그만큼이라도 성장한 것에는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
스위스와 우리나라를 비교한 이유는 우리나라의 모든 산지 개발, 산악 관광에는 '스위스'가 핑곗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간혹 중국의 장가계도 핑곗거리가 된다. 다른 나라에 가 보니 좋아서 벤치마킹해야 한다는 것은 한옥과 전혀 관계없는 지역의 지체장이 전주에 갔더니 한옥이 좋아 보여서 우리도 한옥을 하자 주장하던 어리석음과 너무 닮아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설악산 오색케이블카'와 지리산 산악열차라 불리고 있는 '하동 알프스 프로젝트'이다.
그렇다. 스위스 산악열차는 정말 유명하다. <걸어서 세계 속으로-606회>를 보면 열차를 타보고, 자연을 느끼고 싶은 마음이 물씬 든다. 그런데 이 산악열차가 관광 때문에 만들어진 것일까? 자답하자면 그렇지 않다.
스위스 철도의 역사는 길다. 철도는 1800년대 중반부터 철도를 놓고 운영했고, 스위스의 대표적인 지역인 융프라우는 16년이라는 공사 기간이 걸려 1912년 처음 개통되어 이제 막 100년이 지났다고 한다. 이전에는 석탄을 이용한 열차였지만 지금은 석탄을 이용하지 않는다. 융프라우의 산악열차는 관광하기 위한 이동수단으로 유명해져서 많은 사람이 찾고 있지만 실제의 목적은 '관광'이 아니다. 여전히 이 지역 사람들은 이 열차를 출·퇴근용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래서 스위스의 열차들은 정시 출발, 정시 도착을 엄격하게 지키고 있다. 산 아래의 마을에서 출발해서 마을을 이동하는데 4회 이상의 열차를 갈아타야 하고, 이를 이용하기에 불편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곤돌라도 마찬가지다. 즉 우리나라의 지하철과 같은 것이다. 이런 역사와 내용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른 나라의 지하철을 벤치마킹 해와서 관광열차를 만들겠다니 속이 터질 노릇이다. 우리나라를 찾는 관광객들이 지하철을 많이 이용한다고 다른 나라에서 관광 개발로 벤치마킹하지는 않는데 말이다.
<벨과 세바스찬>에서 자꾸 눈이 가는 것은 귀여운 벨과 세바스찬만이 아니다. 바로 수려한 경관이다. 우리가 산을 가는 이유는 산에 있는 호텔이나 시설 때문이 아니다. 산이 아름다워서이고, 도시와 떨어진 자연환경을 느끼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스위스에서 벤치마킹 해와야 하는 것은 대체 뭘까? 스위스가 산악관광만으로도 먹고살 수 있게 된 것은 아름다운 자연환경 때문이지 보조해주는 수단인 열차와 케이블카 때문이 아니다.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스위스는 관광으로 잘 살기 위해서 더 많은 개발을 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열차가 있기 때문에 능선을 파헤쳐서 도로를 내지 않았고, 융프라우는 전기차만 이용한다(경유차는 비상시에만 이용한다고 한다). 집 앞에 넓은 마당을 두고도 집 앞까지 차를 끌고 가지 않는다. 몸이 불편하더라도 공해가 없는 청정마을을 유지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정말 벤치마킹하려면 이러한 올곧은 생각까지도 벤치마킹해야만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케이블카를 타러 가기 위해 혹은 산악열차를 타러 가기 위해 가는 길이 불편하니 도로를 더 넓혀야 한다고 주장하고, 쉴 곳이 없으니 산 정상에 호텔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스위스의 자연보호는 이런 간단한 것에 그치지 않는다. 세계 보호지역데이터베이스(WDPA)의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583개소의 보호지역을 지정해서 전체 육지면적의 8%를 보호 및 관리하고 있다고 되어 있다. 그에 비해 스위스는 5,893개소의 보호지역을 지정해서 10%나 되는 면적을 보호하고 있다. 개소로도 면적으로도 큰 차이가 있다. 스위스의 국립공원에는 케이블카가 단 한 대도 설치되어 있지 않다. 보호지역 내부로도 거의 설치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법적 보호지역으로 지정해 놓고 '올림픽' 같은 국제 행사 때문에 특별법을 만들어서 해제하기도 했으니 양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많은 차이가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산악관광의 길은 놀라울 정도로 1차원 적이다. 스위스가 꼭 정답도 아니겠거나와 그들의 보호 정책을 함께 공부했다면 보호지역을 개발하자는 말과 보호지역을 개방하자는 말을 쉽사리 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이미 보호지역과 많은 산림 지역에 스키장, 케이블카 등 많은 관광시설들이 들어와 있다. 그곳들도 과거에 분명 산림이었는데 개발이 되었고 아직도 부족하다며 특별법 만들어서 개발하려고 하니 나무와 숲에 기대어 사는 동·식물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
케이블카를 설치하려고 지자체인 양양군이 사업자로 나선 설악산은 국립공원이고, 산 그 자체로 천연기념물이며, 스위스 융프라우처럼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천연기념물인 산양의 서식지이기도 하다. 하동군도 마찬가지다. 산악열차를 설치하려고 하는 지리산도 국립공원이고, 천연기념물이자 멸종위기종인 반달가슴곰의 서식지이기도 하다. 심지어 반달가슴곰은 국립공원공단에서 복원사업을 진행하고 있고 이미 방사를 진행한 지역이기도 하다.
설악산 케이블카와 지리산 산악열차는 환경적인 문제와 경제적인 문제로 진행이 중단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악산 케이블카를 진행하는 양양군에서는 환경영향평가 부동의를 인정하지 못하겠다면서 '행정심판'을 청구했고, 결국 중앙행정심판위원회는 그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알프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하동군에서는 정상의 호텔을 제외하고 산악열차와 케이블카는 다시 진행하겠다고 선언했다. 설악산 케이블카가 다시 진행되는 마당에 하동이 재추진하지 않을 이유는 없어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의 산은 나름대로의 충분히 매력이 있다. 산악열차나 케이블카가 아니면 올라가지 못하는 그런 산도 없다. <벨과 세바스찬>과 <사운드 오브 뮤직>의 알프스는 우리의 것이 아니고 우리의 것이 될 수 없다. 고유의 매력을 살리는 관광자원 개발을 할 수 있는 인재들이 우리나라에는 충분히 많이 있는데 그들은 아이디어를 모을 생각조차 없는 것 같다.
자연을 정복하듯 만나러 가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여유를 느끼러 가는 사람들이 훨씬 많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연과 환경의 훼손을 동반하는 개발은 아주 멀리 내다보고, 아주 오래 고민해야 한다. 훼손은 한순간이지만 회복은 어렵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글의 마지막은 <환경스페셜-설악산은 쉬고 싶다>의 멘트를 빌려오려고 한다.
"자연을 만나러 간 국립공원에서조차 우리는 속도와 편리를 내려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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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죽음은 늘 우리 곁에 있지만, 사람들에게는 그저 외면하고 싶은 두려움의 대상일 뿐이다.
죽고 나서 가족들이 마주할 공허함,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두려움, 허무함.
그렇게 우리는 늘 죽음을 추상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다큐멘터리 숨은 장례지도사와 유품정리사 등 죽음과 삶 사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 죽음을 구체적으로 시각화한다. 고인이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공간을 정리하고, 관에 들어가기 전 고인의 몸을 깨끗하게 하는 등 죽음이라는 추상적 개념 뒤에 숨어있는 누군가의 모습들을 조명한다.
우리에게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허무함
다큐멘터리에서는 ‘삶이 허무하다’는 대사가 나온다. 한때 사업으로 부를 쌓았던 사람도, 과학 기술로 상을 받았던 사람도 죽음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내세울 수 없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우리가 현생에서 이룬 것들은 가져갈 수 없기에 죽음은 더욱 허무하고 두려워진다.
잊혀짐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았다는 증거는 관공서에 남은 단 3줄의 기록뿐이다. 나에게는 전부였던 세상이, 내가 죽은 후에도 평온하게 잘만 돌아간다는 것. 나를 기억해주는 사람과 흔적은 점차 사라지는 것. 죽음이 두려운 또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죽음을 그저 두려워하고 피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다큐멘터리 숨이 전하는 메시지도 단순한 두려움은 아닐 것이다.
물론, 어떤 이야기 속에서도 죽음은 여전히 우리에게 외면하고 싶은 대상이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그 두려움 속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일이다. 죽음이라는 끝 앞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로 세상을 살아가야 할까? 죽음이 우리에게 전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리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두려움의 시선으로만 바라봐야 하는 걸까?
우리는 언젠가 모두 죽음을 맞이한다. 그렇기에 죽음의 의미를 마주하고 배우려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시사회에 참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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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한 시선으로 특별하지 않음을 말하다.
<디어 에반 한센(Dear Evan Hansen)>, <나, 다니엘 브레이크>, <말아톤>, <7번방의 선물>과 같이 장애를 겪고 있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영화는 비록 상업영화에 비해 현저히 적은 수이기는 하지만, 국내외 영화계에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앞서 예시를 든 영화들처럼, 장애와 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들은 흔히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놓인 인물을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해당 인물이 어려움과 고난을 겪게 되는 모습을 통해 ‘사회적 약자인 주인공의 고난→ 조력자 혹은 특정 사건과 만남→ 주인공의 극복/ 희망’과 같은 클리셰를 사용해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러한 영화의 전개는 관객에게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혹은 상상해보지 못한 상황을 이해하고, 몰입해볼 기회를 제공하며, 영화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인물에 대한 이해와 통찰을 강화한다. 그러나 이러한 진행방식은 영화의 전반을 중심인물을 중심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어, 때로는 영화의 중심인물이 아닌 주변 인물들이나 그들이 겪는 사건, 영화 전반에 걸쳐 숨겨져 있는 의도와 영화의 주제에 대한 이해도와 관심도를 하락시킨다는 단점을 보이기도 하며 ‘주인공의 고난과 극복’이라는 전형적이고 반복적인 클리셰에 관객이 흥미를 잃게 될 가능성 또한 있다. 이런 ‘사회적 약자’라는 같은 소재를 가진 영화들의 어떤 공통적인 이야기 전개 방식 속에서 영화 <나는 보리>가 갖는 시선은 특별하다. <나는 보리>는 농인을 바라본다. 소수가 아닌 다수로서, 장애인 가족이 아닌, 비장애인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한 가족으로서,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소통하는 존재로서, 그리고 농인과 청인을 다르지 않은 시선에서 말이다.
1. 경계를 허무는 시선
‘코다(CODA:Child Of Deaf Adult)’는 농인인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난 청인 자녀를 뜻하는 용어로, 2020년에 개봉한 김진유 감독의 <나는 보리>는 ‘코다(CODA)’인 소녀 ‘보리’의 일상과 그런 보리를 통해 바라보는 세상을 담은 영화이다. 김진유 감독은 실제 농인인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난 ‘코다(CODA)’로, 영화<나는 보리>는 김진유 감독의 유년기를 바탕으로 한 자전적인 이야기로부터 시작되었다. 때문에 <나는 보리>의 주인공이자, ‘코다(CODA)’인 소녀 보리는 김진유 감독의 어린 시절이 투영되어있는 인물이라고도 볼 수 있다. <나는 보리>의 주인공인 11살 ‘보리’는 어린 시절 김진유 감독처럼 농인인 부모님을 대신해 은행 업무를 보고, 음식을 주문하고, 물건을 구매하는 등 주로 가정 내에서 아이보다는 어른들이 하게 되는 일들을 도맡아 한다. 영화 속 “나는 누나 귀 안 들리는 거 싫어. 치킨 못 먹어.”라는 농인 동생 정우의 대사를 통해서, 아침에 혼자 알람을 듣고 일어나 가족들을 깨우고 등교하는 보리의 모습을 통해서, 보리가 “내일 할아버지 집에 갈거야.”라는 갑작스러운 엄마의 말에도 따라나서 엄마와 동생의 몫까지 기차표를 구매하고, 택시 앞자리에 탑승해 길을 안내하고, 수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할아버지와 농인인 엄마 사이에서 수화를 통역해주는 장면을 통해서 보리의 가족들이 생활의 얼마나 많은 부분을 보리에게 맡기고 의지하고 있으며, 보리가 가족들 사이에서 어떠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을지 짐작해볼 수 있다. 그렇지만 영화는 보리가 이러한 책임들을 도맡음으로써 결코 불행하다거나 힘겹다거나, 가족들이 보리에게 과도하게 의존하여 보리가 없이는 아예 생활이 불가능하다는 식으로 묘사하지는 않는다. 분명히 불리하고 힘든 요소를 지니고 있음에도 영화에서 보리네 가족은 따스함과 서로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넘치는 화목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어떻게 보면 가족 구성원 내에 농인이 없는 일반 가정보다 더욱 화목한 모습으로 말이다. 이는 은정이가 자신의 부모님은 항상 바쁘고 매번 걸려오는 전화와 부모님의 심부름은 다 자신의 몫이라고 투덜대며 보리를 부러워하는 장면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이렇게 화목하고 따뜻한 가족의 묘사는 농인인 부모님과 청인인 자녀로 구성되었지만, 보통의 가족들처럼 따뜻하고 화목했던 김진유 감독의 가정환경이 반영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렇게 화목한 가족 내에서도 왠지 모르는 소외감을 느끼는 인물이 있는데, 바로 ‘보리’이다. 들리지 않는 부모님 혹은 동생 정우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다수에 속하는 청인 ‘보리’ 말이다. 이러한 설정은 <나는 보리>가 농인의 문화와 세상을 특별하지 않게 바라봄으로써 가지는 미덕을 돋보이게 해준다. 보리는 가족들 사이에서 생활하며 느끼는 알 수 없는 소외감에 매일 아침, 자신도 부모님과 동생처럼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기도 하며, 심지어는 소리를 잃기 위해 MP3를 최대 음량으로 키워 이어폰을 귀에 바짝 꽂은 채 음악을 듣거나 물에 귀를 자주 담그면 청력이 감퇴한다는 TV 속 해녀의 인터뷰를 보고 직접 바다에 뛰어들기도 한다. 이러한 보리의 행동과 소외감은 일반 청인 관객들이 보기에 이질적이고 쉽게 공감할 수 없으며 한편으로는 충격적이라는 평가도 받는다. 그러나 이런 보리의 심리와 행동, 영화의 설정이 <나는 보리>의 진정한 가치를 드러낸다.
가족 내 유일하게 들을 수 있는 존재로서, 사회적으로 우리가 흔히 다수라 말하는 청인에 속함에도 보리가 농인으로 사는 삶을 원하는 모습을 통해 <나는 보리>는 장애인은 약자, 청인은 일반인이라고 흔히 우리가 말하는 이분법적 사고와 농인의 삶을 남다르게 바라보고 불편할 것이라 섣불리 동정하는 우리의 선입견을 깨트려주기 때문이다. <나는 보리>에는 농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특별하지 않기를 바라는, 있는 그대로의 농인을 보여주고 싶은 감독의 의도가 그대로 드러난다. 앞서 말했듯, 보리는 물품을 구매하고, 음식을 주문하고, 은행 업무를 보는 등 흔히 보호자가 해줄 법한 일들을 모두 맡아 하는데, 이렇게 가족들의 생활편의를 도울 뿐 아니라 보리는 사회로부터 가족들을 보호하기도 한다. 이는 보리가 동생 정우의 축구경기 출전과 엄마와 함께 옷을 사는 장면을 통해 알 수 있다. 동생 정우 역시 농인인데, 정우는 축구 실력이 뛰어남에도 귀가 들리지 않아 경기 수행이 어려울 것이라는 이유로 출전선수가 아닌 후보 선수로 지목된다. 이에 정우가 후보선수라는 것을 알게 된 보리는 이장님인 아버지를 둔 친구 은정이를 통해 정우가 축구경기에 출전할 수 있도록 돕는다. 또한, 보리가 엄마와 단둘이 옷가게를 방문한 장면에서 보리는 옷가게의 직원들이 자신과 엄마가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이유로 무시와 비하를 서슴지 않고, 옷 가격 또한 원가보다 높게 책정해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이후 보리는 잘못된 거스름돈을 점원에게 돌려주며 엄마에게 부당한 대우를 하는 모습을 목격했고, 자신은 들리지 않는 척하고 있었을 뿐 사실은 우리에게 어떤 행동과 말을 했는지 다 보고 들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표현한다. 이렇게 보리는 가족의 도우미와 더불어 보호자의 역할도 소화한다.
그렇다면 청인인 보리는 다른 이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까? 가족들의 도움 없이도 모두 스스로 잘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보리가 가족을 돕듯, 보리 또한 가족의 도움과 관심, 사랑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은 영화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보리는 불꽃놀이를 보러 가족과 함께 시장에 나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중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부모님의 손을 놓친다. 안내방송을 해도, 전화를 걸어도 들을 수 없는 부모님과 동생이기에 이들을 찾을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 보리는 막막하기만 하다. 이 순간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내내 밝고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던 보리는 처음으로 11살 제 나이 또래처럼 어린아이 같은 울음을 터뜨린다. 영화는 이렇게 가족 내에서 보호자의 역할을 하는 보리 또한 가족들의 보살핌과 도움이 필요하며, 우리가 사회적 약자라고 생각하는 농인도 도움을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큰 힘과 도움이 되어 주는 존재라는 걸 알려준다. 다음 소주제에서 더 언급하겠지만, <나는 보리>와 유사한 작품으로 미국에서 개봉한 <코다>라는 음악 영화가 있는데, 이 작품에서도 ‘코다(CODA)’인 주인공 소녀가 “지금까지 가족 없이 뭘 해본 적이 없어요.”라며 망설이는 모습을 통해 <나는 보리>와 마찬가지로 평소에는 자신이 가족들을 도와야 하지만 역으로 자신도 가족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걸 보여준다. 이렇게 영화 속에서는 청인과 농인이 모두 도움이 필요한 존재이기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만큼 강한 존재이기도 함을 보여주는데, 결국 <나는 보리>가 이야기하는 바는 이러한 영화의 장면들과 보리의 아빠가 보리에게 반복해서 뱉는 말을 통해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들리든, 들리지 않든 우린 똑같아.” <나는 보리>가 바라보는 청인과 농인은 연약한 존재이자 때론 강한 존재로서 장애의 유무와 관계없이 그저 똑같은 한 사람일 뿐이다.
2. 다르고도 같은 소녀들– 영화 <코다>의 루비, <나는 보리>의 보리
<나는 보리>의 보리와 유사하게 ‘코다(CODA)’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를 그린 영화가 있는데, 바로 2021년 미국에서 개봉한 <코다>이다.
두 영화의 주인공 보리와 루비는 모두 코다 중에서도 가족 내에서 유일하게 소리가 들리는 자녀 'OHCODA’이자, 미성년자 코다 ‘KODA’에 속한다는 점, 그리고 영화가 청인과 농인의 화합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나, 두 영화 속 소녀의 가정 환경이나 농인의 세계를 묘사하는 방식, 그리고 인물의 선택에서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나는 보리>에서 보리의 관심이 가족들과 보내는 크고 작은 이야기들과 학교, 친구들과의 관계에 집중되어 있다면, <코다>의 루비는 졸업과 성인을 앞둔 나이로 진학과 가족의 생계 등 자신의 삶과 가족으로부터의 독립을 고민하는 데에 몰두한다. 두 영화에서 내가 가장 주목했던 차이는 보리는 가족들과 동일시 되어 자신도 소속감을 느끼기를 바라는 반면, 루비는 가족의 품에서 벗어나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기를 원한다는 점이었는데, 이는 단순히 졸업 학년과 11살이라는 인물의 나이 차이 때문에 나타난 차이 만은 아닐 것이며, 두 소녀의 가정 환경과 제작자(감독)의 배경과 우리 사회에 깊게 자리 잡은 문화적 배경 또한 영화의 관점과 주인공의 선택에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루비의 가족은 아빠와 오빠가 운양하는 어선으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해 가는데, 일정치 않은 수입과 틈만 나면 중간에서 이익을 떼가는 중개업자들 때문에 루비의 진학비용 걱정은 물론, 늘 생활비 걱정을 안고 지낸다. 또한, 루비의 가족은 가족 내의 강한 유대와 결속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루비의 엄마가 식사할 때 다른 행동을 하지 못하게 이야기하는 장면이나 가족의 일에는 꼭 모두가 함께 자리하게 하는 장면을 통해 루비의 엄마가 가족의 소통과 결속을 강조하는 인물로 그려지는데, “그거 알아? 엄마도 세상 밖으로 나와야 해.”라는 루비의 대사와 “들리는 년들은 나랑 말 안 해.”라는 엄마의 대사에서 유추해볼 수 있듯, 사실 엄마의 이러한 행동은 청인과의 교류는 두려워하며 피하고, 농인에 공감할 수 있는 가족 내에서 소속감과 안정감을 유지하려는 엄마의 방어기제이다. 그리고 이렇게 가족 내의 유대를 강조하는 엄마의 행동과 자신도 부양의 대상이라는 인식이 저절로 심어지게 되는 루비네 가정의 분위기와 환경은, 루비가 가족에게서 벗어나 세상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더욱 부추겼을 것이다. 반면, 보리의 가족은 루비네 가족과 같은 입장으로, 농인으로서 겪는 불편함과 어려움이 분명 있음에도 따뜻하고 화목한 가정의 본보기라고 표현해도 어색함이 없을 정도로 따뜻한 모습을 보인다. 오히려 <나는 보리>에서 보리의 부모님은 큰 부담이 될 수 있는 수술비조차도 전혀 상관없다며 정우와 보리의 귀를 위해선 큰 비용지출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코다>에서는 가족의 생계수단이던 낚시도 <나는 보리>에서는 보리 아빠의 오랜 취미이자, 어린시절부터 아빠의 유일한 친구가 되어 준 존재, 아빠와 보리가 속마음을 교감하게 되는 시간과 배경으로 나타난다. <코다>는 미국에서 제작된 영화이며 원작 영화인 <미라클 벨리에>는 프랑스에서 제작되었고, <나는 보리>는 우리나라의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국내에서 제작되었다. 이에 루비와 보리의 선택 차이에는 우리나라보다 비교적 이른 나이의 면허취득과 독립을 맞이하는 서양의 문화와 개인주의, 그리고 한국의 가족공동체 정신과 협동, 한국의 ‘정’이라는 이데올로기 또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가정과 사회에 대한 루비와 보리의 관점과 선택에서는 차이를 보이지만, 두 영화 모두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농인과 청인의 경계를 허물고, 화합과 이해에 도달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점은 같다. <코다>의 경우 영화의 후반부. 음악 영화답게 음악을 통해 주제를 드러낸다. 루비의 오디션과 대학 진학을 내내 반대하던 루비의 부모님은, 교내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루비의 모습과 루비의 노래에 환호하는 관객의 모습, 그리고 그 누구보다 노래를 사랑하는 듯한 루비의 태도를 보고 오디션 당일 아침, 직접 운전을 해 오디션장까지 함께 간다. 오디션장에서 루비가 부르는 노래는 “Both sids now”. 앞서 말했듯, 영화의 메인 사운드 트랙이자 주제를 나타내고 있기도 한 이 루비의 오디션 곡은 “하려던 일들이 많았지만 구름이 내 앞을 막았지. 이제 구름을 양쪽에서 보게됐어. 위와 아래에서”, “이제 사랑을 양쪽에서 보게 됐어. 주는 쪽과 받는 쪽에서”, “이제 인생을 양쪽에서 보게 됐어. 이기는 쪽과 지는 쪽에서”와 같이 성장하며 주변에 있던 것들에 대해 달라진 이해와 시선에 대한 가사를 담은 곡으로, 루비가 ‘코다(CODA)’로서 살아가며 때로는 농인인 가족이 자신의 인생의 장애물이라고 생각했던, 때로는 농인 가족 속에 속한 유일한 청인이 자신이 소외된 존재인 것처럼 느껴졌던, 때로는 다른 가족들과 다른 자신의 가족이 부끄럽고 이해할 수 없었던 루비가 이제는 농인과 청인의 입장 양쪽 모두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으며 가족을 이해하게 되었음을 노래한다. 그뿐만 아니라, 오디션 현장에 몰래 들어온 가족들을 위해 루비는 노래를 부름과 동시에 가사에 맞추어 수화를 하는데, 이 장면을 통해 영화 <코다>는 루비의 성장과 이해, 농인과 청인의 교류와 화합을 완벽히 실현시킨다.
<코다>가 서로 다르다고 생각했던 이들의 이해와 화합에 중심을 두었다면 <나는 보리>는 서로 간의 이해와 더불어 ‘코다(CODA)’로서 살아가는 보리의 자아정체성 확립과 농인과 청인과의 경계를 허무는 것을 중점적으로 다루며, 농인도 청인과 다를 것 없는 평범한 한 사람이라는 점을 더 강조해 말한다. <나는 보리>의 미덕은 바로 이렇게 농인 가족이 등장하지만, 비장애인 가족과 다르지 않은 보편적 정서를 다룬다는 점에 있다. 다름보다는 같음을 느끼게 하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허물게 한다. 실제로 나는 보리의 김진유 감독은 “처음부터 장애를 어떻게 다루겠다는 거창한 목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보리의 감정에 집중했고, 그 감정선을 따라 보리 가족의 모습을 묘사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기존의 장애를 다룬 영화와 차별점을 갖게 된 것 같다.”라며 특별한 의도를 담기보단 오히려 그저 농인을 향한 시선이 특별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을 뿐이라고 인터뷰에서 말한 적이 있다. 영화 <나는 보리>의 후반부에서, 보리는 시장에서 구매했던 부적인 ‘악마의 눈’을 바다에 던지는데, 이러한 보리의 행동을 통해 일시적이지만 농인의 입장을 직접 체험해보고 사회의 차별적인 시선을 경험해본 보리가 더 이상 가족에 대한 타인의 차별적인 시선이나 편견을 의식하지 않게 되었으며 ‘코다(CODA)’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타인의 시선이 어떻든, 자신에게는 그 누구보다 평범하고 소중한 가족의 의미를 확립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나는 보리>는 보리가 도로와 바다 사이 좁은 방호벽 같은 길 위를 양팔을 벌린 채 균형을 잡으며 걸어가는 모습이 배우들의 이름과 함께 등장하며 마무리되는데, 도로도 바닷가도 아닌 사이 도로 방호벽 위를 조심조심 걸어가는 보리의 모습을 통해 농인과 청인 사이에 놓여있는 ‘코다(CODA)’ 보리의 정체성과 농인과 청인의 경계를 허무는 시도를 완성한다.
3. 보리가 보여주는 농인의 세상
<나는 보리>에서 보리는 가족들과 같아지고 싶다는 마음에 농인이 되기 위한 노력 중 하나로, 물에 귀를 자주 담그면 잘 들리지 않는다는 TV 속 해녀의 말에 직접 바다에 뛰어들며, 이상 없이 무사히 구조되었음에도 보리는 이후로 계속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 척, 자신도 농인이 된 척 행동하는데, 이렇게 농인으로서 생활하는 동안 보리는 농인을 향한 사회의 시선을, 가족들이 농인으로서 겪었을 어려움과 외부에서 받았을 차별들을 경험하게 된다. 앞서 <나는 보리>의 미덕은 농인 가족이 등장함에도 비장애인 가족과 전혀 다른 바 없이 느껴지는 보편적인 정서를 다룬다는 점이라고 하였는데, 이렇게 영화 전반에 걸쳐 경계를 허물고, 보편적인 정서를 다루지만, 보리가 직접 농인의 입장으로 살아가는 생활들을 담음으로써 일상 속에서 농인이 겪게 되는 불평등한 차별과 시선 또한 짧은 내에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 또한 <나는 보리>의 또 다른 미덕이라고 볼 수 있다.
보리가 가족들처럼 농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친구들은 학교에서 이전과 확연히 다른 태도를 보인다. 보리와는 상의 없이 보리에게 화장실 청소 당번임을 통보한다던가, 은정이와 보리가 나란히 앉아있는 모습을 보았음에도 보리를 투명인간처럼 쏙 빼놓고 은정이에게만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식으로 말이다. 학교와 또래 친구들 내에서뿐만 아니라 보리는 주변 어른들에게서도 평소에는 보지 못했던 모습들을 보게 되는데, 부모님 대신 정우와 농인이 된 척하는 보리를 데리고 병원에 간 고모가 ‘착한 거짓말’이라는 명분으로 병원에 다녀온 후 엄마, 아빠에게 수술하게 되면 정우가 앞으로 축구를 하지 못할 것이라는 의사의 말을 전하지 않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또한, 엄마가 함께 간 옷가게에서는 보리와 엄마가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이유로 몰래 점원들끼리 상의하여 더 높은 가격으로 옷을 판매하는 것을 보게 되며, 지나가는 보리를 본 동네 어른들이 “어린 것이 딱해서 어떡해.”라며 들리지 않게 된 보리를 안타까워하며 안쓰러운 시선으로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을 바라보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보리가 농인인 체를 하며 겪게 되는 주변의 변화와 상황들은 우리가 영화 밖 현실사회에서 농인을 바라보는 태도를 잘 반영하고 있다. 모두가 그렇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우리 사회는 흔히 장애를 섣불리 안타깝다는 식으로 바라보거나 ‘힘들겠다’라는 식으로 동정 같은 공감을 한다. 작은 시선, 별 의미 없는 말 한마디일 수 있지만, 때로는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툭툭 나오는 시선과 말들은 당사자의 마음에 꽂히기도 한다. 이렇게 영화 속에서 11살 소녀가 특별히 큰일 없이 지나가는 소소한 일상 속에서 차별을 경험하도록 한 것에도 농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특별하지 않았으면 하는 김진유 감독의 바람과 유년 시절 감독이 겪었던 감정, 그리고 그의 자전적인 이야기들이 바탕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김진유 감독은 “제가 만났던 농인 부모 중 60% 정도가 자녀가 농인으로 태어나길 바랐다. 농인이라는 것 자체가 불편하지 않고,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인터뷰한 바 있는데, 이를 통해 사회에서 우리가 농인을 볼 때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경향이 개입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감독이 영화에서 보리가 직접 농인을 체험하게 함으로써 농인이 일상 속에서 빈번하거나 흔하게 겪게 되는 어려움을 보여주고, 그 어떤 가정보다 따뜻하고, 온전하고, 화목한 가정의 분위기를 그림으로써 현실에서의 농인을 향한 특별한 시선을 제거하고자 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4. <나는 보리>에 대한 글을 마치며
영화 <나는 보리>는 농인의 삶을 이야기함과 동시에 ‘코다(CODA)’라는 익숙하지 않은 용어와 존재를 알리고, 이런 ‘코다(CODA)’ 소녀를 주인공으로 설정함으로써 단순히 농인의 생활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 농인과 청인,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분하는 경계를 허물고 농인 가족이 특별하지 않은 보통의 가족임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한, 보리가 농인이 되고 싶어 하는 바람을 통해 관객들에게 보편적인 사고에서 전환된 시각과 관점을 제공한다는 점에서도 큰 의의를 지닌다.
<나는 보리>의 김진유 감독은, “장애인 가족도 비장애인과 다르지 않다는 식의 묘사도 하고 싶지 않았고,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농인 가족의 평범한 일상과 자신이 살았던 모습만을 보여줘도, 대중이 농인을 조금 더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라고 인터뷰에서 생각을 밝힌 바 있다. 이러한 감독의 애정 어린 시선이 영화 <나는 보리>와 그것을 보는 관객에게도 통한 것일까. <나는 보리>의 보리네 가족은 보는 사람의 마음도 더불어 따뜻해질 정도로 그 누구보다 화목하고 행복해 보이며, 영화를 통해 그들의 삶과 ‘코다(CODA)’로서 살아가는 보리의 삶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을 더 이해하고, 그들과 더 가까워지고 싶다는 마음이 저절로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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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혹적인 연대의 꿈틀거림
박찬욱 감독의 작품은 <공동경비구역 JSA>,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이후로 4번째로 다가간 작품이다. 두 작품 역시 굉장히 재밌게 본 영화이고, <아가씨> 역시 기대하며 봤다. 결과는 기대 이상의 재미를 느꼈다. 아직 박찬욱 감독의 작품들을 많이 보진 못했지만 앞서 두 작품과 비교를 한다면 <아가씨>가 조금 더 위트 있는 재미를 던진다. 그러나 반대로 퀴어 요소와 귀족 남성의 모순을 꼬집는 주제, 어두운 필름 촬영기법으로 영화를 다 본 후 여운을 남긴다. 달콤한 막대사탕 같은 영화 같다.
#사진 밑으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아가씨> 스틸컷
제작진
영화는 칭찬할 게 많다. 시나리오도 시나리오 이거니와, 시나리오 배경인 1930년대 일제시대 건축 양식과 실내 장식, 귀족 의상과 장신구 등 미술팀과 의상, 분장팀의 노력과 준비성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촬영도 뛰어났다. 히데코(김민희)를 씻겨주는 장면에서 숙희(김태리)의 시선으로 바라본 히데코의 모습과 같이 등장인물 시선으로 바라보는 촬영으로 영화를 흥미 있고 몰입도 있게 볼 수 있다. 카메라 렌즈는 '아나모픽 렌즈'를 사용해 고풍스럽고 고급진 귀족 느낌을 내며 영화가 한층 더 깊이 있게 만들어준다. 편집은 또 어떠한가. 제1부는 숙희의 시점으로 영화가 전개되고, 제2부는 히데코, 제3부에서 이 두 시선이 통일되어 현재로 나아간다. 그렇다면 이 둘의 시선을 관객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영화는 몽타주 기법으로 편집한다. 덕분에 우리는 복잡해 보일 수 있는 인물 관계도나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상황, 문제점들을 단번에 이해하고 영화에 몰입할 수 있게 한다. 이것이 종합예술의 마술이지 않는가!
비유와 상징
영화가 재밌었던 이유는 대사의 농담도 있었지만, 앞으로의 전개를 예측할 수 있는 상징물들과 비유 표현들이 영화를 흥미롭게 만든다. 가령, 백작이 히데코를 다 넘어왔다는 신호로 "다 익은 거 같다"라는 대사와 함께 먹은 복숭아의 과즙은 백작이 히데코를 유혹해서 둘의 관계를 붙게 하겠다는 의미가 있다. 또, 숙희가 히데코 몰래 방을 뒤지면서 발견한 밧줄은 히데코를 챙겨줬던 죽은 이모를 히데코가 기억하게 하는 기억의 매개체이자 히데코가 이모와 똑같이 자살할 것이라는 앞으로의 예측, 실제로 자살하려고 끈을 묶었지만 숙희가 히데코를 붙잡으며 죽지 말라고 애원하는 장면에서는 숙희와 진실과 마음을 터놓고 진정한 연인이 되는 사랑의 매개체로 추측할 수 있다.
모순
<아가씨>는 크고 작은 모순으로 나뉘어 있다. 큰 모순은 당시 귀족 남성 사회의 모순이다. 귀족이라면 귀품 있고 매너와 지성이 풍부한 사람일 거 같지만 그들은 히데코(김민희)가 읽어 주는 야한 소설의 내용을 듣고 흥분하며 야한 소설을 사기 위한 경매장에 들락날락 거리는 불순한 존재들로 나온다. 특히 경매장을 운영하는 코우즈키(조진웅)는 어린 히데코를 협박하고, 추행하여 그녀가 강제로 야한 소설을 낭독하도록 만들게 한다. 그들의 모습들은 그저 발정 난 개처럼 야한 것밖에 모르는 불순한 귀족 남성들이기에 일반적인 귀족에 대한 모순이라고 볼 수 있다.
작은 모순은 히데코와 숙희의 사랑이다. 히데코 인생을 망치러 온 그녀의 구원자인 숙희는 히데코를 정신병원에 가두고 백작(하정우)과 함께 히데코의 재산을 차지하려는 계획을 세워 히데코 하녀로 곁에 있는다. 하지만 점차 히데코와 숙희는 사랑에 빠지고 둘은 백작과 코우즈키를 피하여 사랑의 도피를 한다. 퀴어 요소는 이성애라는 범위에서 모순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들이 사랑하는 건 모순이라고 할 수 없다. 사랑에 빠진 건 죄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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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국극을 이어가겠다는 처연하도록 결연한 의지
여성국극을 이어가겠다는 두 예술가의 처연할 정도로 강렬한 의지가 일렁이는 이 영화에서, 전반부의 한 장면과 후반부의 한 장면은 데칼코마니처럼 포개진다. 3세대 여성국극인 박수빈과 황지영은 여러 곳을 다니며 여성국극을 비롯해 판소리 등을 공연한다. 시설을 갖춘 공연장뿐 아니라 민속촌, 복지관, 지역 축제 등 무대는 다양하다. 종종 민망한 순간이 생긴다. 뭔가 볼거리가 있나 싶어 스윽 들어왔다가 이내 발길을 돌리는 관광객이나 축제 참여자들은 공연자를 머쓱하게 만든다. 무대를 준비하는 자와 관람하는 자 사이에 열정의 불균형이 심각하다는 것은 두 사람의 예술 활동이 그리 녹록치 않다는 의미일 터다.
두 사람의 공연장은 일본 여성가극단의 공연장과 극적인 대비를 이룬다. 2층으로 된 전용 무대를 가진 일본 여성가극단은 탄탄하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 무대를 관람한 두 사람은 무언가를 이어나가는 양국 예술가 사이의 커다란 격차에 부러움을 느낀다.
영화의 후반부는 일본 여성가극단 공연장과 비슷한 규모의 무대에 두 사람이 1세대, 2세대 여성국극 레전드를 모아 함께 공연을 올리기까지의 여정을 담아낸다. 어느 해 저무는 바닷가에 앉은 박수빈, 황지영의 모습에 더해지는 박수빈의 내레이션처럼, 사라질 위기의 여성국극을 ‘3년만 더 해보자’는 다짐을 더 길게 연장하기 위한, 또 다른 시작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한 공연이었다.
두 사람이 연출자를 섭외하고, 여성국극 레전드 선배들을 만나고, 그들의 서로 다른 의견과 작품 해석을 어렵게 조율하고, 관객과 후원자를 모집하기 위해 접대하는 모습은 처연할 정도로 결연하다. 노래방에서 자신보다 한 세대 높은 (대부분은 남성인) 어른들과 술을 주고받고 노래를 부르며 어떻게든 공연을 성황리에 꾸리려 노력하는 박수빈의 모습이 특히 그렇다. 이 모습은 우리가 ‘예술가’를 상상할 때 쉬이 떠올리는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모든 예술에는 무대 위의 아우라를 가능케 하기 위한 질척거리는 현실이 있기 마련이다. 불콰한 얼굴로 맞은편의 사람들에게 호소하고 설득해내려는 박수빈의 모습이 강렬하게 강인시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기어이 그토록 부러워하던 일본 여성가극단의 공연장을 한국에서 여성국극으로 재연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한다. 93세 배우와 93년생 배우가 함께 무대에 올라 여성국극의 명맥이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라는 두 사람의 의지를 선배, 관객들과 함께 증명해 보이는 것이다. 두 사람이 운영하는 여성국극 단체가 한 지역 예술의전당에 상주 단체로 자리 잡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이 영화의 결말 역시 이 연장에 있다.
1950년대 전성기를 누린 여성국극은 여성들만으로 무대를 꾸린 무대 예술로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전쟁 이후 가부장적 젠더 질서가 훼손된 틈새에서 피어난 예술로 ‘남자 같은 여자’들이 연기한 남역이 특히 인기를 끌었다(영화가 보여주듯이, 오늘날 예술의전당 여성국극 오디션에서도 지원자들은 대부분 남역을 원한다). 이를테면, 2세대 레전드 이옥천이 짧은 머리로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고 중성적인 목소리로 이 영화에 처음 등장할 때 뿜어내는 젠더 위계를 위반하는 미학을 예술 장르로 만들어낸 것이 바로 여성국극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성국극은 1960년대가 되며 빠르게 인기를 잃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여성국극을 연구한 몇몇 논문이 말하듯이, '가부장적 자본주의 국가' ‘초남성주의적 발전주의 국가’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여성국극 배우들과 그 팬들이 형성한 젠더 역동성이 더 이상 사회적으로 용인되기 어려워졌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다시 남성이 주체가 되어 근대와 미래를 열어가려는 사회, 여성에게 ‘본연’의 역할로 회귀하기를 요구하는 사회에서 여성국극이 설 자리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성국극이 처음 나온 지 80여 년이 훌쩍 넘은 지금, 그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젠더 질서가 재편되고 있는 지금이 어쩌면 여성국극의 새로운 계기가 되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 ‘전통도 꿈꾸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박수빈의 포부가 새로이 펼쳐질 계기 말이다. 〈정년이〉 등으로 다시금 환기된 여성국극에 대한 관심이 박수빈, 황지영의 간절함과 만나 '끊어질 듯 이어지고 사라질 듯 영원한 것'보다는 조금 더 힘 있는 방식으로 여성국극을 이어갈 계기가 되길 바란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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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승리호>
어느날, 사고 우주정을 수거한 ‘승리호’는 그 안에 숨어있던 대량살상무기로 알려진 인간형 로봇 ‘도로시’를 발견한다.
돈이 절실한 선원들은 ‘도로시’를 거액의 돈과 맞바꾸기 위한 위험한 거래를 계획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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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정글 크루즈> 메인 예고편
<캐리비안의 해적> 디즈니 제작! 이번엔 아마존이다!
미지의 세계 아마존에서 관광객들에게 최고의 스릴을 선사하는
재치 넘치는 크루즈 선장 프랭크(드웨인 존슨).
고대 아마존의 전설을 쫓아 영국에서 온 식물 탐험가 릴리 박사(에밀리 블런트)가
의학의 미래를 바꿀 치유의 나무를 찾는 여정에 함께 할 것을 제안하면서,
순탄치 않은 모험을 시작하게 된다.
달라도 너무 다른 두 사람은 아름답지만 온갖 위험이 도사리는 열대우림으로 함께 모험을 떠나고
수많은 역경과 초자연적인 힘을 마주하게 된다.
고대 나무에 얽힌 비밀이 드러날수록 릴리와 프랭크는 더욱더 커다란 위험에 처하고
인류의 운명도 위태로워지는데…
전설을 믿는다면 저주도 믿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