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저2023-10-12 10:21:16
'쳇 베이커' 가 들려 주는 공허한 마음의 재즈
가을 영화 하면, 어쩐지 제목부터 가을인부터 떠오른다. 포스터 부터 가을 풍경을 보여주겠다 작정한 <뉴욕의 가을>이나, 우리나라의 아름 다운 가을 풍경을 담고 있는 <가을로> 쓸쓸한 감성으로 가득 찬 <만추> 그리고 <시월애> (시월(10월)이 아니라 시(時)월(越)이지만) 쌀쌀한 날씨가 시작될 무렵 <시월애>나 <만추>를 떠올리는 이유는 영화의 장면보다 음악 때문이기도 한데, 서정적이고 차분한 선율이 가을의 감성과 잘 어울리기 때문일 것이다. 계절을 음악으로 떠올려보면, 여름이 신나고 통통 튀는 음표로 가득 차 있었다면, 가을은 조금 눅진한 느낌의 재즈 아닐까.
쳇 베이커의 음악과 삶을 다룬 <본 투 비 블루>는 다른 계절보다 가을에 보고 싶은 영화고, 듣고 싶은 음악이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의 음악에서는 청춘의 냄새가 난다.’ 고 했는데, 청춘의 음색을 지닌 그의 음악에서는 ‘가을의 차가운 공기’가 베어 있는 듯 하다.
아마 재즈를 잘 모르는 사람들도 쳇 베이커의 음악은 한 두곡쯤 들어 보았을 것이다. 영화 <본 투 비 블루>는 에단호크의 아련하고 섬세한 눈빛으로 쳇베이커의 어두운 시절을 그리고 있다. 영화는 1966년 이탈리아 교도소에 있던 쳇 베이커를 영화제작자가 꺼내주면서 시작된다. 교도소에서 나왔지만, 마약을 끊지 못하던 그는 마약상에게 심하게 맞고 앞니를 모두 잃고 나서 약물 치료를 시작한다. 그 무렵 제인과 사랑에 빠져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반겨주는 어머니와 다르게, 트럼펫 연주자 였던 아버지는 집안에 먹칠을 하고 있다며 그에게 그만 포기하라고 하는데… 쳇은 제인에게 약물을 끊기로 약속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쳇은 틀니를 끼고 피를 뱉어내며 트럼펫을 연습한다. 어쩌면 트럼펫은 삶의 이유가 된 건지도 모른다. 오디션을 보지만, 계속 탈락하게 되고 불안감 속에서 게으른 천재였던 그가 성실히 애쓰는 모습에 조금씩 회복하고, 작은 무대 부터 차근차근 다시 시작한다.
그리고 쳇은 전성기 시절 뉴욕에서 가장 유명한 재즈바인 버드랜드 무대에 다시 설 기회를 얻게 되는데…제인 없이 공연하게 된 불안감에 결국 마지막에 그는 나쁜 선택을 하고 만다. 영화는 내내 먹먹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외롭고 불안하지만, 영혼을 버려, 나를 부서야 했을까? 그의 짙고 깊은 음악과 대조되는 삶을 떠올린다. 최고라는 타이틀을 위해 약물에 의지해 온 그, 약에 기운으로 연주하는 그의 음악은 완벽했지만, 그 안은 비어 있다.
“천사의 혀로 노래하더라도 사랑이 없다면 시끄러운 심벌즈인 거야. 텅 빈 채로 올라가지 말란 소리야.”
"정교함이 떨어져인지 소리에 개성이 생겼어. 예전의 쳇 같지만 더 깊어."
치밀하고 정교하고 완벽 사람이 되기 보다, 개성있고, 매력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도 좋다고.
영화는 우리에게 더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들어 준다.
잘하고 싶고, 최고가 되고 싶었던 쳇의 마음과, 그를 사랑하 던 사람의 진심어린 조언이 담긴 마음을 생각하며
이 가을 쳇 베이커의 재즈를 들어 보길.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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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계가 희미해진 무대
그가 198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약 30년간 연출한 장편 영화는 단 다섯 편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이 다섯 편의 영화는 각자 뚜렷한 존재감을 발산한다. 이런 독특한 영화들을 탄생시킨 레오스 카락스는 늘 이야깃거리를 몰고 다니는 영화계의 기인이다. 카락스가 <홀리 모터스>(2012) 이후 9년 만에 세상에 내놓은 여섯 번째 장편 <아네트>(2021)에서도 역시 과감한 시도를 선보인다는 점이 흥미롭다. 제74회 칸 영화제의 개막작이었던 <아네트>는 카락스에게 감독상을 안겨주었다는 점에서 노감독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카락스는 올해 10월 부산국제영화제의 일정을 시작으로 서울의 관객들까지 찾은 뒤 국내일정을 마무리하고 출국했기 때문에, 국내 관객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설레는 마음으로 그의 신작 <아네트>를 맞이할 채비를 마쳤다. <아네트>는 27일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다.
<아네트>는 <홀리 모터스>에서 카락스가 허심탄회하게 늘어놓았던 이야기들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카락스는 <아네트>에서 <홀리 모터스>와 마찬가지로 고민 끝에 선언과 질문을 반복하며 관객을 난처하게 만든다. <아네트>가 살짝 낯설게 느껴질 수 있는 이유가 있다면, 우선 카락스가 고수해왔던 이미지들에서 벗어나 있는 듯한 몇몇 요소들 때문일지도 모르겠다(사실은 그렇지 않은 듯하다). 작지만 다부진 육체를 가진 드니 라방이 뿜어냈던 운동성과 물성은 할리우드에서 인기 있는 배우 아담 드라이버의 종횡무진 퍼포먼스로 대체됐다. 그리고 카락스는 커리어 최초로 미국의 밴드 스파크스(Sparks)와의 협업을 통해 뮤지컬 색채가 묻어나는 장르극을 기획했다. 그리고 영화의 극장 상영과는 별개로 카락스는 미국의 아마존과도 손을 잡았는데 이로 인해 OTT 포맷이 개입되는 등 <아네트>는 기존 카락스 영화를 둘러싼 요소들과 다르게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과 요구를 의식하려는 영화처럼 느껴진다.
<아네트>를 둘러싼 요소들은 곧 영화 산업과 관련한 질문들과도 연결된다. 팬데믹이 전 세계를 강타했고 극장가는 위기에 직면했으며, OTT 산업은 나날이 성장하고 있다. 주요 영화제들의 수뇌부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작품들을 수상 후보에 포함시키고, 상영작으로 선정하는 등 변화의 흐름을 마지못해 수용하는 모양새다. 일찍이 <홀리 모터스>에서 카락스는 죽음의 기운이 드리운 극장의 내부를 담아내면서 자신이 영화라는 매체이자 예술에 관해 느꼈던 감정들을 표현한 바 있다. <아네트>의 도입부 역시 이런 그의 생각과 멀리 떨어져 있어 보이진 않는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카락스가 직접 모습을 드러내고, 밴드 스파크스의 멤버들과 세션들이 녹음 부스에서 노래를 시작한다. 그런데 <아네트>는 <홀리 모터스>와 비슷한 층위를 공유하면서도 살짝 결이 다른 느낌이다. 주연 배우 드라이버와 마리옹 코티야르가 행진의 대열에 합류하고 배우들은 의상팀에게 옷을 건네받은 뒤 갈아입는다. 우리는 <아네트>의 이 오프닝 장면을 촬영 현장 그 자체로 보아야 할지 혹은 이 장면들 또한 영화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영화가 시작되는 장면에서 <홀리 모터스>는 적어도 분명하게 그 경계가 감지됐다면, <아네트>의 인물들은 그 경계를 아무렇지도 않게 은근슬쩍 넘나들고 있다. 그리고 영화는 그 움직임을 크게 강조하지도 않는다. 경계 자체를 의식하지 않으려는 모종의 의지 같은 것들이 느껴진다.
어쩌면 <아네트>는 무대에 관한 무대, 영화에 관한 영화로 읽힐 수도 있겠으나 조금 더 생각해보면 <아네트>는 입구와 출구의 경계마저 사라져 버린 무대 혹은 영화 그 자체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그리고 이 점이 <홀리 모터스>에서 이어지는 카락스의 내면과 연동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크레딧에서는 배우들이 단체로 관객에게 인사하고 영화가 어땠는지 말을 건넨다. <아네트>는 영화가 시작되는 순간조차도 관객들이 명확하게 분리된 경계를 감각할 수 없도록 했다. 그렇다면 출구는 있는가? 아니 애초에 입구를 설정하려 들지 않았으니 출구의 존재 가능성을 따질 수 있는 걸까? <아네트>는 입구와 출구를 지워버린 영화라는 매체에 관한 무대 그 자체가 되는 셈이다. <홀리 모터스>는 출구로 향하는 가능성을 남겨둔 듯 보이나 <아네트>는 회전문에 갇힌 채로 돌고 있는 상태가 되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 무대에는 누가 남아 있을 수 있는가. 우선은 예술가들, 그리고 관객들이다. 그리고 연출을 맡은 카락스 본인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와닿는 요소들이 있다면, <아네트>가 영화를 있게 만든 예술가들의 삶을 무대에만 남겨두면서도 한편으로는 삶 자체를 무대처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극 중 지휘자나 헨리가 현실 관객에게 말은 건네는 장면들을 지나칠 수가 없다. <아네트>의 경계가 분명하게 설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배우들이 맡은 배역을 연기하는 것과 가상의 배역에 동화된 채 세계 내부의 인물로 남는 것이 서로 완벽하게 구분될 수 없으므로 이들의 존재감이 드러나는 장면들은 일정 부분 무대처럼 보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영화 속 세계처럼 느껴지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영역을 오가는 듯한 모습을 선사한다. 단순히 제4의 벽을 깨는 시도와 살짝 다른 인상을 풍기는 셈이다. 말하자면 <아네트>는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관한 인식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 이는 영화 자체에 관한 논의를 유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영화를 둘러싼 요소들을 고찰하도록 이끌기도 한다. 기이한 분위기가 반복되는 <아네트>는 예술과 예술가들의 삶과 무대 그리고 영화에 관한 카락스의 인상적인 복귀 무대다. 그가 아니면 누가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는가.
본 콘텐츠는 '씨네랩'으로부터 초청 받은 '영화 <아네트> 시사회'를 통해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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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축한 대지 위에 그려낸, 가장 건조한 장르의 로맨스
나는 주로 혼자 영화 보는 것을 즐기는 부류의 관람객이다. 하지만 종종 영화관을 나서며 타인의 존재가 간절해지는 때가 있다. 정리되지 못한 채 쏟아지는 서로의 언어를 갈구하게 하는 영화를 만나고 난 후, 상기된 얼굴로 나와 바깥의 차가운 공기와 마주할 때 더욱 그렇다. 영화 <퍼스트 카우(First Cow)>는 바로 그런 영화다.
<와이드 스크린에 끝도 없이 펼쳐진 황야. 그 거칠고 메마른 땅 위를 고독하게 걸어가는 카우보이의 뒷모습. 뿌연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내달리는 말에 올라탄 개척자들...> 이러한 영화적 풍광은 아마도 영화 장르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서부 개척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라는 문구가 자연스럽게 상기시키는 관습적인 이미지일 것이다. 서부 개척사는 유럽 정착민들에게 역사적 자긍심을 고취하는 미국사의 토대라고 할 수 있다. 가장 미국적이라고 할 수 있는 웨스턴 장르는 따라서, 의도적으로 '개척되어야 마땅한 서부의 이미지'를 제시함으로써 문명과 야만이라는 이분법적 대립구도를 정당화한다. 웨스턴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말(馬)과 서부 영웅들의 존재감은 프런티어(frontier)를 확장하는 개척의 역사만을 포섭하는 주체의 의지를 드러낸다. 그 이면에 감춰진 '타자화된 개인들'의 역사가 흐려지는 지점이다. 켈리 라이가트(Kelly Reichardt)의 '축축한 웨스턴'은 바로 이 지점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서술해나가기 시작한다.
"the bird a nest, the spider a web, man friendship"
(새에게는 둥지가, 거미에게는 거미줄이, 인간에게는 우정이)영화의 오프닝 타이틀에는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지옥의 격언(Proverbs of Hell) 속 한 문구가 새겨져 있다. 새둥지와 거미줄. 그곳의 정주자들은 스스로 몸 뉘일 곳을 부지런히 쌓아 올려 삶을 일궈낸다. 그리고 한 시인은 인간의 우정을 그에 견줄 만한 것이라고 보았다.
영화는 전통적인 관점에서 주변인이라고 할 수 있는 킹 루(King-Lu)와 쿠키(Cookie) 이 두 사람의 우정을 통해 잊힌 서부 '정착사'의 토대를 그린다. 뒤집힌 채 배를 보이며 바둥거리는 도마뱀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 쿠키는 모피 사냥꾼들의 요리사다. 숲 속에서 버섯을 줍던 쿠키는 발가벗은 도망자 신세인 킹 루와 조우하고 그에게 덮을 것과 잠깐의 안식처를 제공한다. 이후 정착민 마을에서 재회하는 킹 루와 쿠키 두 사람은 술과 거주 공간을 그리고 서로의 꿈을 공유하며 우정을 쌓아 나간다.
Cookie : You speak good English.. for an Indian.(인디언치곤... 영어를 잘하는군요)
King-Lu : I'm not Indian.(난 인디언이 아닌데요.)
Cookie : Oh.
King-Lu: Chinese.(중국인이죠)
Cookie : I didn't know there were Chinese in these parts.(이쪽에 중국인들이 있는지는 몰랐네요)
King-Lu : Everyone is here. Everyone wants that soft gold. It's why you're here, isn't it?
(모두가 여기에 있죠. 모두가 모피를(혹은 노다지) 원하잖아요. 당신이 여기에 있는 이유도 그 때문 아닌가요?)(Google search : First Cow script, 의역이라 오역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들의 첫 만남에서 오가는 대화는(위) 서로 다른 얼굴과 언어를 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서사가 진행되며 이들의 목소리는 구별되지 않고 함께 들려온다. 부족의 언어로 인디언 사공과 소통하는 킹 루의 모습도 이질적이지 않게 다가온다. 이는 마치 오프닝 시퀀스에 등장하는 두 구의 백골이 스스로 그들이 누구인지 말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출신지나 피부색, 언어가 지워진 채 땅 속에 묻혀 나란히 누워있을 뿐이다. 킹 루의 말대로 그곳에는 모두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 위로 그곳의 역사가 세워진 것이다.
(좌)<믹의 지름길(Meek's Cutoff)>(2019) (우)<퍼스트 카우(First Cow)>
영화적 발화자의 범위를 넓혀가는 라이카트 감독의 전작 <믹의 지름길(Meek's Cutoff)>의 첫 장면을 잠시 돌이켜보자.(위 그림, 좌) 감독은 '물'과 '소'의 이미지를 관객과 처음으로 소통하는 지점인 오프닝 시퀀스에 담기로 선택했다. 그의 웨스턴이 정주, 즉 '뿌리내림'이라는 우리의 근원적인 욕구를 품고 있다고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감독은 캐스팅을 위해 펼쳐놓은 수많은 소들의 헤드샷(headshots)을 검토하는 중에 가장 큰 눈을 가진 소, Evie를 만났다고 한다. 영화에서 Evie는 흐르는 강의 물결을 따라 유유히 정착민들의 땅을 향해 다가온다.(위 그림, 우) 삶을 일구는 기본적인 조건인 물과 함께 흘러와 이 땅에 첫 발을 들이는 젖소의 모습은 경이롭게까지 느껴진다. 유목적 삶에서 벗어나 정착하기를 꿈꾸는 이들의 열망이 겹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현상학을 경유해 장소의 정체성을 연구한 에드워드 렐프(Edward Relph)는 인간의 실존을 거주, 즉 '뿌리내림'에서 찾았다. 렐프에 의하면 장소란 우리 자신을 외부로 지향시키는 출발점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에게 '진정한 장소감'이란 개인으로서 그리고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내부에 속해있는 느낌이다. 렐프의 의견을 빌리자면 우리의 일상을 지탱하는 장소감은 정주함으로써 얻어진 공동체적 감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블레이크가 사랑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는 우정을 정주의 자리에 넣어놓은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의 배경인 1820년대 킹 루와 쿠키가 도착한 곳은 새로 이주한 이들에게 뿌리내림의 역사가 부재한 곳이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상업적 자본주의의 논리다. 무엇이든 교환 가능한 것이 곧 가치가 되는 이곳에서 두 사람의 만남은 꽤나 낭만적이다. 서로를 향해 비스듬히 기대어있다는 안도감이 그들만의 교환가치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부유한 자본가의 소유인 젖소의 우유를 훔친다. 그들의 완전한 정주를 가능하게 할 빵을 만들어 팔기 위해서다. 한국인들에게 갓 지은 쌀밥의 모락모락 한 김에서 올라오는 달콤한 향이 '집'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듯, 유럽인들에게 우유를 넣어 갓 구운 빵 한 조각은 떠나온 그곳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자극한다. 쿠키가 구워낸 빵의 온기가 그들의 작은 거주공간을 가득 채우고, 허기진 이주민들의 마음을 채우는 동안 불안의 기운이 덮쳐온다. 그들은 과연 이 축축한 자투리 땅 위에서 계속해서 빵을 구워낼 수 있을까?
변용된 ‘스파게티 웨스턴’이 공간적 배경을 저 멀리 구대륙으로 옮겨 놓았다면, 라이카트의 <퍼스트 카우>는 프레임에서 내뿜는 분위기(atmosphre), 냄새까지 바꿔놓았다. <믹의 지름길>에서와 마찬가지로, 4:3 화면비율을 고집한 감독의 선택과 더불어 피사체와 카메라 간의 밀착된 거리는 다른 향을 뿜는 서부극을 빚어낸다. 그의 카메라가 포착하는 서부의 이미지가 양 옆으로 길게 뻗어 '점령하고 전복해야 할 황야'로 느껴지지 않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폐쇄적이고 빽빽한 감각이 프레임을 메운다. 그리고 그 안의 인물들은 그곳에서 새로운 깊이를 만들어낸다. 그렇게 서부의 메마른 모래먼지로 점철된, 가장 건조한 장르의 로맨스가 버섯이 피어나는 축축한 땅 위에 그려진다.
아직 역사가 기입되지 않은 그곳을 걸으며 영화는 우리에게 말한다.
"History hasn't gotten here yet, "
* 해당 리뷰는 씨네 랩(CINE LAB) 크리에이터 시사회 참석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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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니스 유령 살인사건> 고전과 호러의 묘한 만남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탐정 생활을 그만두고 베니스에서 은둔 중인 '에르큘 포와로'(케네스 브래너). 어느 날, 오랜 친구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아리아드네 올리버'(티나 페이)가 그에게 한 가지 부탁을 건넨다. 유명 강령술사 '조이스 레이놀즈'(양자경)에 대해 취재하고 있으니 그녀의 교령회에 참석한 뒤 정체를 밝혀달라는 것.
이에 포와로는 고풍스러운 저택의 여주인인 '로웨나 드레이크'(켈리 라일리)의 초대를 받아 핼러윈 밤에 열린 레이놀즈의 교령회에 참석한다. 1년 전 사망한 로웨나의 딸을 되살리는 교령회를 지켜본 후 모든 대사와 행동이 조작이라고 판단한 포와로. 그는 본격적으로 진상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그러나 괴한에게 습격당한 포와로는 정신을 잃고, 동시에 레이놀즈도 사고로 사망하면서 강령회의 진실은 미궁 속에 빠지고 만다.
에르큘 포와로와 호러의 묘한 만남
<베니스 유령 살인사건>은 아거사 크리스티의 추리 소설 <핼로윈 파티>를 영상화한 작품이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과 <나일 강의 죽음> 뒤를 잇는 세 번째 시리즈로, 케네스 브래너가 감독과 주연을 맡았다.
<베니스 유령 살인사건>은 모범적인 작법으로 고전을 풀어낸다. 익숙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맛을 제대로 살렸다. 사건 관련자를 모두 불러 모은 후에 탐정이 진상을 설명하는 결말이 대표적이다. 배경을 베니스로 바꾼 덕분에 클래식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주는 데도 성공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베니스 유령 살인사건>은 한계가 명확하다. 고전미를 위해 클리셰에 파괴하지 않다 보니 흐름에 뒤떨어진다. 클리셰를 파괴하며 관객을 놀라게 하는 데 몰두하는 근래 추리 영화 추세를 역행한다.
케네스 브래너는 추리극에 호러를 더해 이 딜레마를 풀어내려 했다. 절반은 성공했다.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는 음산한 분위기는 분명 인상적이다. 그러나 절반은 실패했다. 내용물은 그대로고 포장지만 달라진 나머지 전체적인 결과물은 묘한 인상을 남긴다.
미장센으로 살려낸 호러
<베니스 유령 살인사건>은 첫 장면부터 호러 분위기를 강조한다. 멜로드라마 요소가 짙었던 전작 <나일 강의 죽음>과는 시작부터 다르다. 다른 영화에도 자주 등장한 베니스 풍경부터 그렇다. 대각선 구도로 건물을 촬영하고, 광각으로 왜곡되는 부분을 만들어 불안감을 키운다. 포와로가 깜짝 놀라 꿈에서 깨는 장면도 호러 영화 느낌이 강하다. 작은 방과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이 만나 명암 대조가 강렬한 화면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소재 자체의 매력을 영리하게 살려낸 도입부도 인상적이다. 영화는 한 가지 괴담을 소개하며 분위기를 고조한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고아원에 갇혀 죽은 아이들이 있다. 그들이 유령이 되어 자기들을 버리고 도망간 의사와 간호사에게 복수한다.' 이런 내용이다. 배경과도 잘 어우러진다. 핼러윈을 맞이한 베니스, 운하와 곤돌라, 가면무도회의 조합은 마치 <오페라의 유령> 같은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관객의 감각을 일부러 건드는 연출도 눈에 띈다. 특히 청각적인 요소가 돋보인다. 갑작스레 휘몰아치는 바람, 새들의 날갯짓, 고택 어디에서든 울려 퍼지는 문소리와 시계 소리 등이 현장을 생생히 들려준다. 중간중간 삽입된 귀신 소리, 유령이 움직이는 소리, 컵이 깨지거나 칼에 찔리는 소리도 분위기를 환기하고 공포심을 심어주는 데 유용하다.
호러만으로는 버겁다
하지만 호러 요소를 이용해 목적을 달성했는지는 의문이다. 눈길을 사로잡는 미장센을 즐기는 재미는 확실하나, 새로운 겉모습이 추리물의 본질적 한계까지 가리지는 못했기 때문. 원작 자체가 1969년에 출판된 만큼, 뻔한다는 인상을 지우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실제로 추리 과정이나 범인을 숨겨 놓는 기법은 힘들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가장 범인이 아닌 것 같은 인물이 범인으로 밝혀지는 결말도 스테레오 타입이다.
몇 안 되는 근거를 보여주는 방법 역시 평이하다. 주로 클로즈업을 통해 결말을 예상케 하는데, 너무 티를 내다보니 복선이나 암시로서 역할을 해내는 데 실패한다. 구성도 익숙하다. 포와로는 모든 인물을 붙잡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증거를 추적하기보다는 인물의 사연과 관계를 파악한다. 그러니 속도가 붙질 않는다. 온도는 오르지만, 좀처럼 끓지 않는 물 같다.
각 캐릭터의 존재감도 문제다. 모든 인물에게 조금씩 분량을 분배하면서 이야기를 끌어나가려면 각 캐릭터의 매력이 확실히 살아날 필요가 있다. 그런데 개개인의 존재감이 부족하다 보니 관객의 눈길을 붙잡아 두기 어렵다. 결국 푸아로의 원맨쇼만 보일 뿐, 사연과 캐릭터, 추리는 흥미를 끌지 못한다.
이는 전편과 비교해서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점이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에는 페넬로페 크루즈, 조니 뎁, 윌렘 데포, 주디 덴치, 미셸 파이퍼, 데이지 리들리가, <나일 강의 죽음>에는 갤 가돗, 아미 해머, 엠마 맥키, 레티티아 라이트가 출연했다. 그에 비하면 누구 하나 케네스 브래너 이상의 존재감을 보여줄 배우가 없다. 코로나 기간에 개봉한 <나일 강의 죽음>이 흥행에 실패한 후폭풍이 드러나는 지점인 듯하다.
시대의 한계를 넘지 못하다
물론 작법이 고전적이라는 이유로 영화의 완성도가 항상 부족한 것은 아니다. 추리극, 특히 후더닛 장르에서는 훌륭한 반례가 있다. 라이언 존슨의 <나이브스 아웃>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나이브스 아웃>은 아거사 크리스티의 추리극 작법을 충실히 따랐다. 동시에 블랙코미디 요소를 더해 여러 사회 문제를 영리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1편은 미국 사회의 구성원을 상징하는 캐릭터를 대거 등장시켜 나날이 폐쇄적으로 변하는 미국 사회의 분위기를 비판했다. 2편도 팬데믹이라는 전 세계적 사건을 적극적으로 반영해 나날이 심화되는 부의 양극화와 자본에 중독된 사회상을 지적했다. 즉, 가장 현실적인 문제를 영화에 반영하면서 추리극 장르의 시대적 한계를 역으로 극복한 셈이다.
안타깝게도 <베니스 유령 살인사건>에서는 이런 영리함이 없다. 현대 관객이 사건 속으로 자연스럽게 이입될 여지가 많지 않기 때문. 영국이 배경이었던 장소를 베니스로 바꿔도, 호러 장르를 적극 이용해도 고풍스럽다는 인상을 좀처럼 지울 수 없다. 원작과의 차별화에는 용이해도, 장르적 한계를 넘는 데는 도움이 안 된다.
그래도 우리가 고전을 찾는 이유
그럼에도 <베니스 유령 살인사건>에는 남다른 매력 한 가지가 깃들어 있다. 인간에 대한 이해와 공감에 바탕을 둔 고전의 품격이 그것이다. 이 힘은 작가 애거사 크리스티라와 감독 케네스 브래너 양쪽으로부터 나온다. 우선 애거사 크리스티의 작품에서 범죄는 평범한 사람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일반적인 감정으로 인해 발생한다. 그렇기에 푸아로는 사건 해결뿐만 아니라 그 감정을 보듬는 일까지 도맡아야 한다.
이 특징은 케네스 브래너의 손길을 거치며 극대화된다. 그 결과 <베니스 유령 살인사건> 트라우마 극복기나 다름없다. 영화는 범인도, 또 다른 유발자도 제2차 세계 대전의 상흔 때문에 범죄에 빠진 사연을 보여준다. 강령술사가 마냥 사기꾼으로 보이지 않는 것도, 유달리 영화 속 아이들에게 눈길이 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전쟁의 사망자와 피해자의 상처를 제때, 제대로 보듬어야 한다고 거듭 일깨운다. 배경을 굳이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의 베니스로 바꾼 이유이기도 하다.
이는 에르큘 포와로의 이야기와도 맞닿아 있다. 포와로는 번아웃으로 인한 슬럼프에 빠졌다. 모든 의뢰를 거부하고 은둔했다. 숨어버린 탐정이 권태기를 극복하는 모습은 영화 내용과 겹쳐 보인다. 또 케네스 브래너의 자전적인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전작 '벨파스트'에서 전쟁과 갈등으로 인한 유년의 아픔이 유독 오래 남는다는 깨달음과 경험을 보여준 바 있다. 그래서 영화의 결말은 특히나 심금을 울린다.
결국 <베니스 유령 살인사건>은 추리극과 호러의 만남을 어떻게 받아들이냐가 관건이다. 원작과 전편으로부터 달라지기 위해 노력한 대목이 있고, 관객에게 어필할 만큼 눈에 띄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그 노력의 결과가 '흐름을 따라잡지 못한 추리 영화'와 '시대를 따라가려는 노력이 더해진 고전 재해석'으로 갈릴 수밖에 없을 뿐.
마지막으로 한 가지 흠을 덧붙이자면, 개봉 시기가 의문이다. 소설 원작 제목부터 작품 분위기나 내용에 이르기까지 9월 한복판보다는 핼러윈 시즌이 개봉 시점으로 더 적절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시리즈 3편인데도 불구하고 개봉 후 반응이나 화제성이 미비하기에 남는 아쉬움이다. 소재, 장르가 겹치는 <잠>이 바로 한 주 전에 개봉해서 관객을 먼저 흡수한 상황도 악영향을 줬을 테지만.
Acceptable 무난함
올드함에 지치거나, 고전미를 음미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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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위적이라 더 인간적인, 짐작으로부터의 이별
"진짜라는 게 뭘까요. 전 다 솔직했는걸요."
〈최악의 하루〉의 은희는 온종일 거짓말을 하다 하루가 간다. 하지만 영화 속 저 연극 대사 장면 속 은희만큼은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상한 일이다. 남자친구 현오 앞에서는 적극적인 청춘의 발랄함을, 운철 앞에서는 비극적 사랑에 가슴을 졸이는 애달픔을 연출하던 그가, 유독 남이 써 놓은 대사를 그저 연기할 뿐인데 그게 진짜 같다니. 남산 벤치 건너편에 그럴듯한 소품이나 상대 배우는 없다. 오로지 혼자서 극의 상황에 몰입한다. 어쩌면 일상이 연기이고, 연기가 진실인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지 않나 생각을 해 본다. 내 앞에 거를 것 없는 바로 그 순간 오롯이 등장하는 나의 모습은 이 모든 게 연기라는 것을 알고 있어도 숨길 수 없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사는 사회에서는 때에 걸맞은 가면을 챙겨야 한다. 그게 나쁘다기보다는, 일부 불편함을 감수한 채 모두와 공생하는 방법은 종종 자신에게 거짓말을 해야 할 때가 있다는 당위적 명제다.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굳이 남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약간은 편하게 대해도 되는 상황에서 본래의 모습은 튀어나온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면을 벗을 수 있는 때는 언제인가. 혼자일 때가 아니라면 아마 가족과 함께일 때였을 것이다.
다시 은희에게 돌아가서, 이렇게도 생각해 보자. 은희의 대사가 모두 진실이라면, 자기 전 죄 없는 이불만 연거푸 걷어찼을 그날의 은희는 다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진실은 뭘까.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하거든요. 당신들을 믿게 하기 위해서는."
정신을 집중해야만 상대방을 속일 수 있다는 그 어려운 퀘스트를 은희는 실패하고 만다. 왜냐하면 영화 속 남자들이나, 바깥의 관객 모두 은희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의 심사에 ‘백 퍼센트’란 없다. 오직 가능성과 짐작만 있을 뿐. 은희는 거짓말을 했지만, 그 안에는 다소간의 진실이 담겨있다. 우리는 모두 진실이면서 거짓인 삶을 산다. 똑 부러지는 이분법은 적어도 사람 사이에는 없어 보인다.
길었던 서론을 마치며, 영화 〈페어웰〉의 거짓말은 가족이라는 가능세계에서 지극히 인위적인, 그리고 인간적인 사흘간의 모험을 장식한다.
거짓말의 거짓말에 대하여
〈페어웰〉은 오프닝 크레디트부터 ‘Based on an actual lie’를 전제한다. 룰루 왕 감독은 자전적 이야기이자 그 소재가 거짓말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친절한 설명으로 영화를 풀어나간다. 할머니의 시한부 사실을 숨긴 채 마지막 가족 모임을 준비하는 가족들의 고군분투와, 생각의 차이가 만드는 다각적인 갈등의 스토리는 거짓말이 초래한 진땀 빼는 장면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것만이 영화의 전부는 아니다. 영화 속 거짓과 노골적인 거짓말을 해 보겠다는 앞선 선언조차도 실은 거짓말이다. 〈페어웰〉이 정말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란 ‘거짓말의 거짓말’, 즉 가족과 정에 대한 이중부정의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가족에게는 내 본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고 이야기했지만, 사실 가족만큼이나 진실한 나를 보여주기 힘든 존재도 없다. 그래서 서로의 감정은 쉽게 토라지고 상처 받는다. 비슷한 문화를 공유하는 우리 역시 명절마다 오랜만에 만난 친척과 묘한 기싸움이나 고부간의 갈등을 보고 자랐으니, 영화의 장면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멀리 있으면 신경 쓰이고, 가까이 보면 또 다투고 마는 가족의 모습은 미국과 중국이라는 서로 다른 가치관 앞에 혼란스러운 빌리의 시선에서 더욱 이질적이다. 유교 문화권에서는 미덕인 행위가 뉴욕 출신 빌리에게는 불법이 되어 버리는 상황은 낯선 충격이다. 다만 감독은 가치나 성격, 입장의 간격에도 불구하고 진실은 어디에나 있고, 심지어 거짓의 상황에도 유효하다고 말한다.
출처: 다음 영화
〈페어웰〉은 거짓말과 진실을 적절히 섞은 끝에 따뜻하며 엇나간, 진심 어린 소동극을 만들어낸다. 영화 초반 식사 장면에서는 빌리의 아버지가 전하는 죽음에 관한 짧은 농담이 등장한다. 그 내용이란 한 가족이 죽음이라는 소재를 돌려서 말하려 노력하다가 벌어지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인데, 이는 영화에서 할머니를 제외한 모든 가족이 합심하여 벌어지는 일련의 상황과 일치한다. 거기에 어머니가 이미 그 농담을 들고 먼저 웃는 장면은 부모를 먼저 떠나보낸 비슷한 경험을 먼저 겪은 어머니의 상황과도 들어맞는다. 이렇듯 실없이 던지는 장난이란 의미의 농담에도 진실은 반드시 숨어있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창춘의 할머니는 뉴욕의 손녀에게 염려의 말을 건넨다. 이런저런 거짓말로 할머니의 걱정을 둘러대며 전화통화를 하던 빌리는 길을 가다 잠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다. 통화 중에 누구와 얘기했냐는 할머니의 질문에 빌리는 ‘친구와 대화를 했다’라고 말한다. 이는 거짓말이지만 또한 진실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난 관객은 빌리에게 누구보다 온 마음을 주고, 빌리 역시 가득히 담은 사랑을 보냈던 친구는 할머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모할머니가 언니의 병명을 숨기기 위해 지어낸 ‘양성 음영’은 현재의 심각성을 알려주는 ‘양성’과 별것 아닌 거짓 병명인 ‘음영’의 합성어이다. 아프긴 하지만 또 그렇게 아프지는 않다는 복합적 의미처럼, 영화 곳곳에는 이렇게 수많은 거짓말 속 진실이 담겨있다.
진심의 역설, 짐작하는 우리
할머니 한 명을 속이기 위해 빌리의 가족이 실행하는 대규모 프로젝트는 가족의 진심을 전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가족과의 식사 자리에서 고모와 어머니 간의 신경전은 미국과 중국이라는 생활환경의 차이와 함께 자녀 교육으로 이어진다. 자식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타국에 보내는 부모의 심정은 부모의 죽음 앞에서도 애써 밝아야 하는 자식의 마음과 연결된다. 하지만 그 안에 정작 할머니는 없다. 슬픔을 감추고 행복한 여생으로 마무리하기 위해 무지의 상태로 두는 것은 좋은 의도지만 당사자가 빠진 당사자의 삶이다. 모르는 척하며 슬픔을 인정하지 않는 가족의 선택은 오히려 남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편의주의적인 사고다. 아무것도 모르고 정리도 못 한 채 삶을 마무리해야 하는 할머니의 생각을 누구도 물어봐 주지 않는다. 오직 빌리만 할머니의 입장에 관심을 두고 함께 눈을 맞춘다. 할아버지의 묘 앞에서 마치 살아 돌아온 것처럼 대하듯 영화의 가족은 죽어가는 사람보다 죽은 사람에게 더 신경을 쓰고, 점차 모인 이유보다 모임 자체에 더 몰두한다. 그 과정에서 관객은 산 사람의 일상보다 기계적인 예식 절차에 주인공이 될 사람들은 뒷전으로 치이고 마는 관혼상제의 역설을 마주한다.
논리학의 가능세계에서는 단언할 수 없는 명제에 새로운 진리의 양상을 적용한다. 형식적으로 참과 거짓을 정하던 기존의 추론이 들어맞지 않은 경우가 생겨서다. 우리의 현실은 여러 가능성이 담긴 세계를 상상할 수 있다. 그곳에는 할머니가 돌아가시지 않을 세계도 있으며 빌리가 미국인이 아닌 세계도 있을 것이다. 단언하기 어렵다면 더 넓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흔히 참이면서 거짓인 것은 없다고 이야기하지만, 우리의 삶이 언제는 뜻대로 돌아간 적이 있던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는 시공간에 사는 인간은 높은 확률로 가족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우를 범한다. 할머니의 삶이 삼 개월 남짓 남았다는 확률을 단언할 수 없듯 말이다. 어디든 완벽한 것은 없다. 행복도, 거짓말도, 사람도 활짝 열어둘 필요가 있다고 영화는 말한다. 그리고 섣불리 짐작하지 않아야 한다고도. 하지만 빌리의 가족만 보아도 그렇게만 살기 어렵다는 것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무언가를 결론 내려고 하는 사람의 노력조차도 참으로 인간적이지 않을 수 없다.
어두운 밤길에 은희와 료헤이는 거짓 같은 ‘최악의 하루’를 지나 해피 엔딩을 꿈꾼다. 걱정하지 말라는 마지막 말조차 거짓말로 들리는 건, 완벽한 것은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어서일까. 그러니 거짓과 진심이 얽힌 서로에게 구십 구 퍼센트의 가능성을 들고도 YES OR NO를 판단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어 보인다. 그래도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곁에 있다면, 모든 가능성의 끝에서 단언해도 좋다. 어쩌면 이 세계에서 가능한 행복이란 복잡한 계산보다 단 한 번의 기함으로 탄생할지 모를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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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해자를 위한 엘리베이터는 없다.
이 글은 영화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최근 유퀴즈에 출연한 김종기 이사장은 학교 폭력 근절에 앞설 수밖에 없었던 아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듣기만 해도 마음이 끊어지는 것 같은 그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것에 마음이 아팠고, 몇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더 심한 형태로 버젓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최근 촉법소년을 필두로 청소년들에게서 발생하는 범죄에 대해 다루는 작품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영화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는 직설적인 제목에 연기 귀신들로 채워진 듯한 출연진을 앞세워 관객들을 찾아왔다.
이 영화는 학교 폭력의 현실을 얼마나 정확히 직시하고 있을지. 포스터 가득한 비장하고도 비열한 분위기를 영화에서는 어떻게 표현하고 있을지 기대된다.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권력 없는 아이들.
사진 출처:다음 영화이 건물은 왜 엘리베이터가 없어.
피해자의 핸드폰 (불법) 감식을 위해 강호창이 허름하다 못해 내일 없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건물 계단을 오르며 한 말이다.
강호창의 한 몸을 편하고 빠르게 목적지까지 데려다줄 존재. 출발은 같은지 몰라도 도착하는 속도만큼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다르게 만들 수 있는 존재. 엘리베이터는 영화에서 권력이나 재력(돈)의 동의어처럼 느끼게 하는 장면이다. 결국 이 "엘리베이터"의 유무는 학교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가르는 잣대가 되었다.
피해자 김건희는 사회적 배려 전형으로 국제 학교로 오게 된 인물이고. 가해자들은 그 점을 이용했다. 바꿔 말하면 가해자들은 권력과 돈이 든든한 방패가 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점이 건희를 바닥에서 기게 만들었고. 가해자들은 건희를 보며 키득거릴 수 있게 만들었다.
무언가 부족하다 해서 미워해야 할 근거는 되지 않으며. 반대로 가졌다 해서 없는 사람들을 무시할 수는 없다. 자신의 손에 쥐어진 것이 당연해지는 순간. 강호창처럼 투덜거리게 된다. 왜 원래 "있어야"할 것이 없냐고. 그것은 "없는" 너희의 잘못이지 있는 상태에 익숙해진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이다.
문소리, 설경구 두 정상회담.;뭔가 엄청나다.
사진출처:다음 영화배우 설경구와 문소리는 영화 [오아시스]에서 만났다.
배우로서의 초반 커리어를 쌓아가는데 서로의 이름은 시너지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긴 세월 동안 자신의 자리에서 스스로를 빚어내는데 혼신의 힘을 다했고. 서로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을 법한 내공을 가진 배우가 되어 이 영화에서 재회했다.
젊은 시절(?)의 두 배우는 감정을 폭발시키거나 파격적인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힘이 들어가 있었다면. 이제 두 사람은 자신의 나이와도 얼추 맞아떨어지는 역할로 한 화면에서 만났다.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옷을 가장 점잖지만 스스로를 돋보이게 할 수 있는 편안한 옷을 입은 모습으로.
덕분에 한 사람이 퇴장하면 한 사람은 등장하고. 누군가가 울고 있다면 또 누군가는 그 모습을 경멸스럽게 쳐다볼 뿐이지만. 그들 사이에는 그 어떤 어색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한 인물에게 힘이 치우치지 않은 장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편안해진다. 그만큼 두 배우가 누구에게도 짐을 전가하지 않는 배우가 되었다는 뜻일 테니까.
두 배우의 영화를 보고 자란 내겐, 스치듯 안녕을 고하며 지나쳐가는 모든 장면들이 그저 귀하게만 느껴진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나쁜 이유.;주인공이 가장 나쁘다.
사진출처:다음 영화영화 속 보호자들은 그 누구 하나 나무랄 데 없이 이기적이고 나쁘다. 아이들에 대한 걱정보다는 자신의 명성을 떨어뜨릴까 두려워하는 듯한 느낌이 더 강하게 느껴진 행동들을 하기도 한다. 이들이 앞다퉈 자신의 자식들을 권력의 그림자 안으로 숨기는 와중에도. 영화 속에서 가장 "나쁜 놈"을 꼽으라면 나는 결말로 가기도 전에 강호창이라고 말할 것이다.
강호창, 혹은 영화는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태도를 취한다.
자신의 아들도 학교폭력의 피해자라는 것이 밝혀진 뒤에야, 강호창은 자신의 직업의식을 십분 사용한다. 무시했던 피해자의 어머니에게 고개를 숙이고, 진실을 위해서라면 어디든 달려간다.
영화는 후반부에 강호창이 아들의 누명을 벗겨주기 위한 노력을 하는 과정들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그다지 돈독해 보이지도 않던 아들과 아버지의 사이는 이때부터 둘도 없는 부정(父情)의 탈을 쓴다.
이 과정에서 실제 피해자인 건우의 존재감은 완전히 소멸하게 된다. 그러니 강호창이 법정에서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는 장면이 좋게 보일 리가 없다.
후반부의 반전(?)을 빼고서라도. 선택적으로 정의를 부르짖는 강호창의 모습은 촌극에 가깝다.
마치면서
흔히 하는 말처럼 연기 구멍이 느껴지지 않는 영화다. 그러나 영화 속 메시지는 아쉽게도 피해자보다는 설경구 부자의 억울함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이걸 보며 대체 무엇을 느껴야 할지 잘 알 수가 없다. 마지막 장면이야 예상을 했지만.
트릭은 너무 쉽고. 정작 써야 할 증거들은(자동차 블랙박스, 수표 일련번호 등) 법정에서 들이밀지도 않는다. 그저 감정에 호소하는 것만 같은 법정 신(Scene)이 나쁘게 느껴지는 이유다.
[이 글의 TMI]
영화관에서 팝콘 등의 음식물을 잘 먹는 편은 아니지만.
내 의지로 하지 않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사이의 간극은 생각보다 컸다.
2022년 4월 25일 이후로 팝콘을 상영관에서 먹을 수 있게 되어서, 기분도 낼 겸 팝콘 하나를 샀다. 이직 후 주 4일 근무라 쉬는 평일 아침 조조영화를 보며 먹는 팝콘은. 당분간은 꽤 기분 좋은 경험으로 마음에 남아있을 것 같다.
물론 와그작거리는 소리가 거슬려 한동안은 사 먹을 리 없겠지만.
#니부모얼굴이보고싶다 #최신영화 #영화추천 #설경구 #문소리 #영화리뷰 #영화리뷰어 #책원작영화 #네이버인플루언서 #영화인플루언서 #내일은파란안경 #브런치작가 #Munalo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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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지옥의 화원(2021)> 리뷰
작년 이맘때의 나는 옛 홍콩 영화를 탐닉했다. 홍콩 느와르 영화의 전성기가 자신의 찬란했던 시절과 맞닿아 있던 아버지는 이 소식을 꽤 반겼으나, 곧 반가움은 실망으로 바뀌었다. 내가 깔깔거리며 보고 있던 영화는 아버지의 취향과 완전히 다른 영화들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와호장룡(2000)>이나 <영웅본색(1986)>, <아비정전(1990)>도 인상깊게 보았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꽂힌’ 건 <소림축구(2001)>는 물론, <도성(1990)>, <도학위룡(1991)>부터 <007 북경특급(1994)>, <홍콩 레옹(1995)>과 같은 영화들, 그러니까 주성치의 손이 닿은 코미디물이었다. 나는 러닝타임 내내 과장된 현실을 뻔뻔하고 능청스럽게 이어나가는 그 특유의 우직함을 좋아했다. 그래서일까. 누군가는 ‘병맛 액션 영화’라고 소개하는 <지옥의 화원(2021)>은 내게 있어, 102분이 10분처럼 느껴진 영화였다.
세키 카즈아키 감독의 <지옥의 화원(2021)>은 앞서 말한 코미디 특유의 뻔뻔함을 이어나가면서도, 미묘하게 제 4의 벽을 뚫을 듯 말 듯 한 대사를 시도한다. 짧게 말하자면 클리셰를 비트는 시도를 간간히 하는, 코미디/액션 장르 영화란 소리다. 기실, 영화의 시놉시스는 소위 ‘일진 만화’의 뼈대를 고스란히 답습한다. 오죽하면 등장인물들조차 너무나 만화 같은 상황이지 않냐고 투덜댈 정도이니 두말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각본가는 <지옥의 화원>이 기존 장르 영화와 동일한 전철을 밟지 않도록 주요 인물의 성별과 무대를 혁신적으로 바꿨다. 그렇다, 말도 안되는 이유로 시비를 걸고 상대방의 ‘구역(회사)’을 차지하기 위해 피가 터지도록 싸우는 이들은 모두 여성 회사원, 그러니까 ‘OL’ 이다. 잠깐, 논리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일단 현실에서 사용하는 이성은 이 영화를 감상하기 전 잠시 내려놓는 편이 좋다.
※ 스포일러 주의
구체적으로 스토리를 따라가보자. 나오코(나가노 메이)가 근무하는 미츠후지 상사는 언뜻 우리네 회사처럼 평범해 보인다. 그러나 어디든 ‘파벌’이 존재한다는 나오코의 말마따나, 이곳은 군웅할거 시대를 맞이했다. 미츠후지 내부엔 타케 시오리(카와에이 리나)가 이끄는 영업부의 광견파, 안도 슈리(나나오)가 이끄는 개발부의 악마파, 그리고 칸다 에츠코(오오시마 미유키)가 이끄는 제조부의 대괴수파가 존재하는데, 한 하늘에 세 개의 태양은 존재할 수 없는 일인지라 격투와 혼란이 계속되는 실정인 거다. 이 혼란을 잠재우려면 압도적인 강자가 필요했고, 정의로운 싸움꾼인 란(히로세 아리스)이 입사한 순간 평화가 찾아온 듯 했다. 그런데 아뿔싸. 란이 그 근방에서 최강자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다른 도전자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주인공 나오코는 란과 친해진 상황이었던지라 자꾸만 ‘그쪽 세계’와 조금씩 연루되기 시작한다. 특히 지상 최고의 여직원이라는 오니마루 레이나(코에키 에이코)가 있는 톰슨과의 싸움이 붙었을 때 나오코는 인질이 되고야 마는데, 이 지점에서 나오코는 마치 만화처럼 ‘등장인물의 친한 친구’정도의 입지에서 벗어나 ‘숨은 실력자’로 각성한다. 이러한 줄거리를 듣다 보면 <지옥의 화원>이 전반적으로 대단히 신선한 영화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뚜렷한 야망이나 목표가 있지 않은 회사원의 피 튀기는 싸움, 좁았던 여성 코미디의 입지를 넓히는 발상, 경계를 넘나드는 대립 구조와 같이 클리셰를 비틀며 따라가는 특유의 우스꽝스러움이 끝내, 폭소를 자아낸다.
애니메이션을 답습한 스토리텔링과 일본식 만담
영화 내 주인공이 만화책을 독파하며 자랐다는 설정 때문일까. <지옥의 화원>은 일본이 강세를 보이는 애니메이션풍 스토리텔링과 액션, 캐릭터 설정 등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렇기에 영화 속 캐릭터는 입체적 인물형이라 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대개는 평면적이되, 각자의 특성을 크게 부풀린 성격을 띤다. 이러한 설정의 연장선으로, 많은 캐릭터가 당연한 상식과 동떨어진 삶을 사는 듯 보인다. 카페에서 다짜고짜 싸움을 걸고, 지상 최고의 여직원이라는 타이틀에 목을 매며 산에서 수련을 하는 것처럼. 드라마 장르가 아니기 때문에 수용 가능한, 철저하게 도식화된 캐릭터성은 코믹 장르 영화와 성공적으로 결합하며 웃음을 극대화시킨다. 또한 영화 내에선 싸움이 계속되어도 각각의 갈등이 가진 깊이는 놀라우리만큼 얕고 가벼워, 영화가 전개되는 내내 대단한 기능을 하는 위기나 전환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물의 성장은 102분에 걸쳐 탄탄히 다져진 서사를 통해 이루어진다기보단, 몇 개의 계기를 기준점으로 폭발할 뿐이다.
또한 <지옥의 화원>은 드라마 <콩트가 시작된다(2021)>나 애니메이션 짱구 시리즈 등을 비롯한, 일본 문화산업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만담’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만담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엉뚱한 한 명과, 그 한 사람에게 바른 상식으로 딴지를 거는 스탠딩 개그의 일종인데, 한국에선 잘 통하지 않는다고 알고있는 일본식 개그의 한 형태이다. 예컨대 란이 음료수 캔을 찌그러뜨리고 탕비실을 떠났을 때, 시오리나 아츠키가 란의 손이 끈적해지진 않았을까 걱정하거나, 캔을 제대로 분리수거하지 않은 사실을 걱정하는 모습 등이 해당될 터다. 여러 변형을 주며 고조되는 분위기를 잠시 꺾어주는 일본식 만담은 영화 내에서 여러 번 등장한다. 긴장을 한 풀 꺾는 개그 스타일은 취향을 심하게 타고, 이따금은 사회적 맥락을 알아야 더 크게 웃을 수 있어 추천이 어려운 경우가 많은데, <지옥의 화원>에 등장하는 만담은 동아시아의 보편적 정서 내에서라면 쉽게 웃을 수 있을 듯 했다.
코미디가 그려내는 사회의 단면
코미디 장르가 다른 장르에 비해 가볍게 여겨지긴 하지만, 문화를 담아내는 하나의 장르이기에 본질적으로 삶을 이야기할 수도 있고, 블랙 코미디 등을 통해 사회나 권력자를 비판하는 기능을 수행하기도 한다. 어쩌면 그저 웃음을 전달할 뿐이라는 편견을 매개로 삼아 작가의 메시지를 더욱 강렬하게 전달했을지도 모른다. 아리스토파네스는 <구름>을 통해 소피스트를 풍자하지 않았나.
어쨌든 이는 코미디에서도 해당 문화권의 사회를 살필 충분한 단서가 마련되어있다는 뜻이다. 한없이 가벼워보이는 <지옥의 화원>도 예외는 아니다. 영화가 수많은 여성이 등장해 코믹 액션을 벌이는 활극임에도 우리는 일본 사회에서 여성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역추적할 수 있다. 란이 최고의 OL이 되겠다며 수련하는 장면에서 무수히 연습하는 것은 복합기 사용법과 전화를 받는 것이고, 지상 최고의 OL이라는 호칭을 가진 여성조차 C레벨에 이르지 못한다. 회사에서 혈투를 벌이는 여성을 그린 영화조차 OL의 성취에 대해선 별다른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은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화려한 색감을 통해 란과 나오코의 삶이 어떻게 교차되었는지를 보여주면서도, 나오코가 꿈꾸던 ‘평범한 삶’ – 즉 싸움 없는 삶과 평범한 사랑의 획득으로 귀결되는 엔딩을 ‘승리’라고 못박는 모습은 영화 내내 힘으로 대표되던, 어떠한 전복적 가능성을 말소시킨다. 이수현(2018)은 여성 코미디에 대해 인용을 통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자기 자리를 이탈하는 위반적인 여성들의 반란은 단순히 젠더 간 가부장적인 관계를 도치시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남녀의 구분의 근간을 흔드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Rowe, Kathleen).” 그저 ‘웃고 끝내면 되는’ 코믹 액션 영화에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게 과하다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래 전 영화 <미녀는 괴로워(2006)>에서의 ‘코미디’가 무엇을 대상화하며 웃었고, 사회적 인식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창작물이 담아낸 웃음이 어디로 향하는지, 그것이 정말 가볍게 다뤄져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서는 사회적/창작 윤리 형성에 대해 논의할 수 없지 않을까.
이러니 저러니 해도, <지옥의 화원>은 한 해가 저무는 연말, 연이은 약속으로 지쳐가는 내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웃음 종합선물세트였던 것 같다. 작품 외적으로는 자막이 다소 아쉽긴 했지만 말이다. 그렇다 한들, 말도 안되는 세계에 빠졌다 돌아올 수 있었던 102분이 어디 쉽게 구해지던가? 소년만화를 보면서도 '주인공처럼 살고 싶다'는 상상을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10대의 내가 이런 열정으로 가졌더라면 어땠을까 괜스레 생각하며 더 웃었다. 엄동설한 속, 일상을 잊을 만큼 뜨거운 웃음을 원한다면 정말이지 꼭 봐야 하는 영화.
참고문헌
유양근 "일본 코미디영화의 웃음 코드와 기능 ―2013~2014 흥행작을 중심으로―" 日本學硏究 53 pp.171-194 (2018) : 171.
이수현 "장르로서의 한국 코미디영화와 코미디 감수성/관객성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박선영, 『코미디언 전성시대: 한국 코미디영화의 역사와 정치미학』 (소명출판, 2018)" 한국극예술연구 61 pp.371-381 (2018) : 371.
★★★
*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한 후, 주관적 견해에 따라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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