짱징2023-10-18 15:52:57
시간 때우기 좋은 영화 '가문의 영광: 리턴즈' 가족끼리 보기는 금물
가문의 영광: 리턴즈
23.09.21 개봉
코미디, 15세 관람가
한국, 99분
감독: 정태원, 정용기
출연: 윤현민, 유라, 탁재훈 등
너무나 유명한 코미디 영화 시리즈인 가문의 영광!
11년 만에 시즌6 , '가문의 영광: 리턴즈'로 돌아왔는데요
시사회 때부터 평이 너무너무 안 좋았고
현재 네이버 평점도 6점대로 떨어졌는데 ㅋㅋ
전 네영카에서 나눔 받아 공짜로 봐서 그런지
재미없지만 생각보다는 괜찮았다~ 싶었어요
당연히! 15,000원 주고 볼 만한 영화는 아닙니다
넷플릭스 같은 데 뜨면 시간 때우기용으로 볼 만한 영화랄까요?
그도 그럴것이 촬영 기간이 올해 7~8월이더라구요?
추석 연휴를 노리고 급하게 제작한 영화 같은데
딱 그 정도 퀄리티가... 눈에 보이는 영화였습니다
아! 노파심에 미리 말씀 드리는 건데
추석 연휴 때 가족이랑 볼 만한 영화 절대 못 됩니다,,,
애초에 스토리부터가
진경과 대서의 원나잇으로 시작되기 때문에
계속해서 그렇고 그런 단어가 나와서...
특히 애들 데리고 가지 마세요 절대절대절대로
전설의 가문이 돌아왔다!
가문의 영광은 결혼?! 사생결단 결혼성사 대작전이 펼쳐진다!
돈과 권력을 쥐고 있는 전설의 장씨 가문!
가문의 수장 ‘홍회장’에게 골칫거리가 딱 하나 있는데,
비혼주의를 선언한 막내딸 ‘진경’이다.
어느 날 ‘진경’은 처음 본 남자 ‘대서’와 하룻밤을 보내게 되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장씨 가문은
일등 사윗감의 조건을 두루 갖춘 ‘대서’와 ‘진경’을 결혼시키기 위해
온갖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는데…
장씨 가문에게 던져진 지상 최대의 과제!
세기의 결혼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영화 <가문의 영광: 리턴즈> 줄거리
줄거리 요약은 이제야 봤는데......
왜 기껏 정해 놓은 로그라인을 따르지 않은 것인지 궁금하네요
저대로만 진행했어도 평점 7점 정도는 땄을 것 같은데요
비혼주의를 선언한 막내딸 진경을 결혼시키기 위한 대작전?
-> 진경이 비혼주의라는 건 캐릭터들 대화 중에 등장하지
처음부터 그녀는 비혼주의! 절대 연애, 결혼에 관심이 없음!
이라고 못을 박아 놓진 않아요...
애초에 첫 씬부터가 클럽 가서 남자가 주는 술 마시는 건데,,
대서와 진경을 결혼시키기 위한 장씨 가문의 음모?
-> 그게 에필로그 가서야 겨우 나와요
전 정말 이런 음모였던 줄 모르고 오 생각 외로 반전도 있네 했는데
그걸 줄거리에 이미 오픈해 놓다니...... 무슨 생각이지
어쩐지 왜 장씨 가문이 자꾸 대서에게 집착하나 했네요
리뷰 쓸 때야 그 비밀이 밝혀지다니 최악...... ㅋㅋ
'가문의 영광: 리턴즈'를 한 줄 평으로 남겨 보자면
<가문의 영광> 시리즈로 누렸던 영광을
꽁으로 또 먹고 싶어 리턴즈 한 영화 같다는 거예요
심지어 가문의 영광에서 활약하던 기본 캐릭터들도 안 나오고
윤현민, 유라 님이 주인공 격으로 흘러가는 거라서
걍 다른 영화 같아요
등장하는 캐릭터 많은데 제대로 정리되지도 않았고
스토리는 어딜 향해 가는 건지 정립되지 않았고
나름 웃겨 보겠다고 만든 몸개그도 생각보다 안 웃겨서 실망했어요
무엇보다 주인공 캐릭터에 호감이 가지 않는다는 건데요
대서는 진경과 원나잇(실은 아니지만 보이기론 그렇게 보이니까)을
한 것을 여자 친구 유진에게 바로 들켜요
그런데 유진 역시 남자 돈 빼먹는 여자라서
남자 친구인 대서의 원나잇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입니다
후반부로 가서는 유진이 다른 남자와 있는 걸 대서가 보는데
처음엔 뒤에만 숨어 있다가 (대사 칠 타이밍 기다렸다가)
"니가 왜 여기 있어?" 라며 되도 않는 모습을 보여요
감독님이 상황 정리하는 법을 모른다는 게 눈에 보이죠
호감 가는 캐릭터로 만들 거였으면
남자 주인공인 대서가 무조건 여자 친구가 없어야 하고
혹시 있더라도 찌질+댕청한 너드남 콘셉트,
그리고 여자 친구인 유진을 많이 사랑하며
유진은 뒤로 몰래 바람을 피우는 나쁜 여자였어야 해요
걍 여기 아메리칸 그잡채임,,,,,, 서로 꺼리는 게 없어요
이렇게 혹평을 했음에도 웃긴 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봤단 거예요
진짜 이해가 안 가는데...... ㅋㅋ
영화 시간 자체가 짧아서 그런가
이제 30분 지났을까 하고 시계를 봤는데
20분 남았더라고요 ㅋㅋㅋㅋㅋㅋ 진짜 웃김
암튼...... A부터 Z까지 잘 만든 구석은 없지만
혹시 특전 준다면 영화관 가서 봤겠지만...
그것도 아니라서,, 걍 아무도 안 볼 것 같다는
그런 후기입니다
*스토리: 1/5점
*연출: 1/5점
*영상미: 1/5점
*OST: 1/5점
*연기: 3/5점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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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벤 위쇼의 방
-벤 위쇼(Ben Whishaw) 배우론
* 언급하는 작품들의 핵심 전개 포함
* 2022년 5월에 완성한 글입니다.
벤 위쇼의 주인공들은 좀처럼 ‘세계’와 화합하지 못했다. <향수>(2006)나 <아임 낫 데어>(2007)의 ‘반사회적 예술가’(오정연, 2008.05.29. [씨네21])에서 시작해, <할로우 크라운>(2012)에선 한 나라의 ‘주인’이 돼서도 예정된 실패를 맞이하고 눈물을 흘렸다. <크리미널 저스티스>(2008)와 <런던 스파이>(2015)에선 ‘로맨스에 휘말려’ 누명을 쓴 청년, <브라이트 스타>(2009)에선 가난과 병에 시달리다 요절한 시인 존 키츠였다. 이는 인물의 소수자성과 연결되기도 했는데- <브라이즈헤드 리비지티드>(2008)의 세바스찬은 엄격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정체성을 부정 당하다 알코올에 중독됐고, <클라우드 아틀라스>(2012) 속 로버트 역시 남성에게 끌린다는 까닭으로 협박 당했으며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베리 잉글리시 스캔들>(2018), 노만의 사랑과 존재는 불법이었다.
허면 무대 위 벤 위쇼는 늘상 보편에 속하지 ‘못하고’ 고통 받는 대상이었는가? 그의 연기를 목격했다면 그렇지 않음을 알테다. 앞서 부러 표면적으로 요약했으나, 그의 주인공들은 늘 다양한 방식으로 억압에 맞서며 중심을 지켜냈다. 몹시도 흔들리며 괴로워하더라도, 여린 눈빛과 신체가 파헤쳐진 밑바닥엔 항상 꺾이지 않는 ‘곤조’가 있었다. 그게 사랑이건 정의건 예술이건, 넘어져도 놓지 않고 ‘세계’에 저항함으로써 주제를 관통하거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배우가 지은 독특한 감정의 집과 만나 탄생한 캐릭터성이었는데 -벤 위쇼의 인물들에겐 ‘벤 위쇼’가 가득했다.
연기법에 메소드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던 시기는 지났고, 그에 대한 불신을 공개적으로 표하는 배우들도 있으나, 여전히 메소드는 ‘serious acting’의 가장 추앙받는 방법론이다. 다만 현대에는 오프라인 GV나 인터뷰는 물론 수많은 플랫폼을 통해 관객이 당사자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스크린 밖의 배우를 짐작할 수 있게 되었고, 미디어는 대중이 배우의 본래 모습을 어느 정도 알고 있음을 전제로 ‘그가 자신과 아주 다른 이 인물이 되기 위해 얼마나 극단적으로 노력했는가’를 화제로 삼는다. 한편으로는 ‘배우 본인’의 모습만으로 팬덤이 형성되기도 하고, 어떤 배우들은 적극적으로 자신을 공개하고 닮은 역할을 맡음으로써 스크린에 자리 잡았다.
벤 위쇼의 케이스는 조금 특이하다. 스크린 밖의 모습은 공개하기를 꺼리면서 연기에는 그 자신이 묻어나는 것으로 보인다. 배우 개인을 알지 못함에도 관객은 (이상하게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앞에 언급했듯 인물의 특징에 유사성이 보이는 경우도 있으나 그게 다는 아니다. 그는 시대적 배경과 캐릭터성, 포지션을 막론하고 스크린 속에서 ‘자신’이 되곤 했는데, 그것이야말로 그 인물(:타인)이 되고 관객에 닿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기능적 조연일 때조차 어느 정도- 벤 위쇼는 화면에 마련한 제 방에서 주변 인물이나 서사와 소통하며 재빠르게 제자리를 찾았고, 영화/TV시리즈/연극 등 다양한 무대에서 그 범위를 넓혔다.
분야를 가리지 않고 신체보다는 두뇌/‘심장’에 재능이 있는 자가 되었던 벤 위쇼는, 오히려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워 그 예리함을 입는다. 눈을 굴리는 건 남들의 눈치를 보기 위함이 아니다. 내면의 고민이나 불안, 혹은 오감으로 흡수되는 다량의 정보나 빠른 머리 회전 때문이다. 고개나 손목을 꺾는 것은 특정 이미지를 내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감각이 신체에 묻어 절로 그리 된 것이다. 이들은 끊임없이 느끼느라 외부의 시선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지만, 그렇다 하여 그들 모두가 저만의 세계에 갇혀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임 낫 데어>(2007)
‘세계’와 불화하며 비범하게 존재하다
여성을 대상으로 ‘비정상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남성. 앞 문장에서 연상되는 이미지는 <향수> 속 벤 위쇼의 그루누이를 설명하지 못한다. 행동의 폭력성과는 별개로 스크린 속 그의 몸짓은 오히려 남성/여성을 초월한 기이하고 불온한 선지자의 그것에 가깝다. 단편 <더 뮤즈>(2014), 뮤즈에게 집착하다 결국 익사하는 남자의 변태적 우울에도 닮은 데가 있다. 이들이 궁금해지는 것은, 그 ‘괴상한 욕망’이 벤 위쇼의 피부에 안착함으로써 ‘어느 정도’ ‘시대와 불화한 비범한 예술’의 정서를 입는 까닭이다.
<아임 낫 데어>, 덥수룩한 머리의 젊은 ‘시인’. 담배를 물고 삐딱하게 카메라를 향하는 그의 눈빛도 불온하다. 언뜻 ‘메인 롤’은 케이트 블란쳇의 ‘록스타’나 히스 레저의 ‘영화배우’, 리처드 기어의 ‘무법자’ 등 비중과 활동성이 높은 자들의 몫인 듯하지만, 흑백 화면에서 한 공간에 머무르며 말을 이을 뿐인 ‘시인’이야말로 가장 자유롭다. 그의 뾰족한 신체는 플롯들 사이의 중심을 잡고, 대사는 작품의 메시지를 관통한다. 유사하게, <클라우드 아틀라스> 속 로버트 프로비셔의 편지는 정교하게 뒤섞이는 서사의 기준을 잡고, 곡은 화면을 아우른다. <브라이트 스타>, 존 키츠의 운명이자 고통인 시 또한 사랑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작품 전체에 흐른다.
존 키츠는 화면에 잡히지 않은 채 타인의 언어를 통해 등장하고 퇴장했다. 그러나, ‘집구석에 박혀 있는’, ‘요새 슬픈 생각을 많이 하는’ 따위의 말이 불러일으킨 예상을 깨며- 세상 맑은 얼굴로 평가를 백지화했다. ‘날 똑바로 보라’고 요구하듯 첫인상을 남겼다. 병이 목숨을 앗아가기 전 이미 연인과 작별의 밤을 보내며 차분히 죽음을 예견했다. 어느 정도 자신을 ‘실패작’으로 여기더라도 사랑과 예술에 대한 확신만은 뚜렷한 채였다. 로버트 역시 스스로 마지막을 만든다. 유서 격의 편지와 함께 등장하기에 관객은 자연히 그가 삶을 ‘포기’하게 된 과정을 궁금해하게 되는데, 이 자살은 사실 ‘포기하지 않음’에 가깝다. 세상이 정한 바운더리에 속하지 않기에 무시당하고 협박당하지만, 제 존재를 의심치 않는다. 죽어가는 영혼을 곡에 담는 모습에는 절망이나 파멸의 정서가 없다. 초월적 아름다움의 흔적을 남기는 과정이자, 자신을 짓누르는 세계에 순응하느니 존엄하게 사라지겠다는 선언이다, 그가 편지에 적은 대로. (“진실된 자살은 세심한 준비와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야.”, “더 나은 세상이 있다고 믿어, 먼저 가 있을게.”)
<브라이즈헤드 리비지티드>, 세바스찬은 가난한 예술가가 아닌 귀족가 도련님이었으나, 세상에 ‘fit in’ 되지 못했다. ‘남색가’라는 꼬리표를 달고 ‘관람되며’ 처음 등장하는데, 그 역시 편견에 빼앗긴 첫인상을 제 언어로 재정립한다. 꽃다발과 편지, 이어 테디 베어와 행복에 대한 의심으로. 가족과 자신을 단호하게 분리하며 이방인을 자처하는 세바스찬의- 텅 빈 저택을 휘감는 위화감은, 미묘하게 구르는 벤 위쇼의 눈동자로 완성된다. 미래의 불행을 확신하고 ‘죄인’이 되어 슬픈 얼굴로 기도하면서도 절대 존재를 부끄러워하지는 않는다. “Just to fit in.그냥 너한테 맞추려고.”이라던 찰스에게, 그는 “Well, than don’t!그럼 하지 마!”이라고 말했다. 저들의 ‘선의’에 흔들리느니 차라리 스스로 망가지고 고립되기를 택했다. 사과하는 찰스의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는 그는 작별의 순간 “Not a word.한 마디도 하지 마.”라고 선을 긋던 존 키츠와 겹친다. 타인의 죄책감이 되거나 ‘구원’되기를 거부하며, 연약하나 평온한 모습으로 원하는 순간 이별(퇴장)을 선언한다.
<클라우드 아틀라스>, 침착하게 각도를 맞춰 입에 총구의 자리를 만드는 벤 위쇼의 동작은 분명한 정서를 섬세하게 전달했다. 시대의 룰에 억압당한 그의 인물들은 -병으로 인한 죽음이든, 권총 자살이든, 이민이든- 결국 제 식대로 ‘세계’와 헤어지기를 택하며 고유의 언어로 존재를 정의했다. 이 남다른 자들이 거의 거리감 없이 관객에게 닿았던 것은, ‘두꺼운 피부나 굳건한 심지로 대수롭지 않게 억압을 받아치거나 무시하’기는커녕, 오히려 몸을 숨길 요령 없이 최전선에 던져져 끊임없이 흔들리고 괴로워하면서도 결국 존재를 지켜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캐릭터 묘사의 일등공신은 절대 벤 위쇼였다.
<클라우드 아틀라스>(2012)
평범하고 무해한 마스크 속 내면의 힘
단편 <러브 헤이트>(2008) 속 ‘착하지만 수완 없는’ -증오조차 ‘제 hate에게 휘둘려’ 어설프게 표출하며, 욕이 가득한 메일을 쓰며 울먹이거나, 사람을 ‘죽이려’ 나서서도 주먹 한 방에 자빠지고 마는- 톰처럼, 벤 위쇼의 어떤 주인공들은 가장 평범하고 순수한 영혼이었다. 대개 사람이나 상황에 ‘말려’ 곤경에 처하고 위험에 노출되었는데- 그 ‘순수’는 대다수의 사람이 지닌 것은 아니어서, 관객은 이 영혼이 ‘더럽혀지지 않고’ ‘구해지기를’ 바라며 안타까워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고통 받는 피해자로만 남지 않는다. 어떤 식으로든 끝내 스스로를 구한다.
<크리미널 저스티스>, 벤의 변호사는 법정에서 평정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며 말한다, “Be yourself, Ben.네 모습 그대로 있으면 돼, 벤.” 벤 위쇼의 얼굴은, 작품이 ‘크리미널 저스티스’의 모순과 부정의를 강조하는 제1의 방법이다. 메시지를 분명히 하려면 주인공의 캐릭터성에 물음표가 생겨선 안 되고,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2006) 속 카세 료를 연상시키기도 하는 그의 ‘무해한’ 인상은 의심의 여지를 효과적으로 지웠다. (‘매력적인 보호자’와 로맨틱한 긴장감을 유지하다 ‘구원’되는 연약한 주인공의 남성형인 듯 하다 그것을 ‘배반’하기도 하는데,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제스처였음을 전하는 것도 벤 위쇼다.) 후반부 결코 전처럼 해맑지 못한 눈빛은 시스템에 의해 개인의 마음이 조각난 모양을 빚어낸다. 최종적 설득력은 대사나 행동 자체보단, 섬세하고 개인적인, ‘두려움을 내보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연기에 있었다. 특수한 상황임에도 인물과 같은 것을 겪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몸도 마음도 최대한으로 여린 듯 보이나 숨겨진 내면의 힘으로 포기하지 않는 캐릭터들. 연인의 죽음 이후 누명을 쓰고 괴로움과 혼란에 휩싸이지만 진실을 알아내려 애쓰는 <런던 스파이>의 대니, 실화를 바탕으로 한 <베리 잉글리시 스캔들>의 노만 스콧 또한 그 맥을 잇는다. 벤과 노만 모두에겐 법정에 서는 장면이 있는데, 강압적인 시선 한가운데 자리한 무방비한(무방비하나 무력하지는 않다.) 이미지가 이미 ‘결백’을 주장한다. 벤 위쇼는 ‘연기’하지 못하는 인간이 되어 모든 자극을 견뎌내며, ‘울음을 계속 참고 있는, 그러다 참지 못하기도 하는’ 모양을 유지한다. 그 터질 듯한 상태 그대로 결국 말들을 당당하게 뱉어내는 모습은, 고통스럽고 벅찰 수밖에.
<베리 잉글리시 스캔들>의 경우 노만 스콧의 특수한 서사, 복합적인 내면과 매력을 드러내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한데, 벤 위쇼는 조심스러우나 방어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이를 수행한다. 노만은 제레미 소프의 서술을 통해 일종의 ‘안타고니스트’ 포지션에서 시작하지만, 짐작은 곧 깨진다. 감정과 ‘약점’을 다 드러내면서도 의식하지 못하는 그 속수무책의 순수. 모델로서 포즈를 취할 때도 어느 정도 수줍고, 협박을 해도 어설프다. 내내 흔들리면서도 자신의 존재를 즐겁고 당당하게 세상에 외칠 때, 엉엉 울고 나서도 활짝 웃을 때, 관객은 이것이 ‘노만 스콧의 이야기’임을 의심치 않게 된다.
<베리 잉글리시 스캔들>(2018)
비범하나 보편적인, 평범하여 특별한.
‘천재’라는 수식에 기자는 어울리는 업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디 아워>(2011-2012) 프레디의 재능은 절대로 비범하다. 그에 대해 의심하는 이는 없지만, ‘안 예쁜 태도’에 대해서도 모두 입을 모은다. 열변을 토할 때 그의 표정은 ‘관리’되지 않고 생생하게 굳어진다. 프레젠테이션보다 내용이 중요하고, 제 평판보다 진실이 중요해서다. 모두 어느 정도 연기하며 사는 세계에서, 홀로 연기할 생각을 않고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며 기꺼이 골칫거리가 되는 자. 프레디가 맘에 없는 말을 하는 대상은 벨 하나다. 감정을 덮으려 부러 장난을 걸거나 상대를 깎아내리지만, 아련한 눈빛이 진심을 다 드러낸다-기보단 숨기지 못한다. 외부 압박에 타협하지 않는, 남달리 똑똑하고 위트있는, 그러나 로맨스엔 젬병인- 주인공은 드물지 않다. 그러나 프레디 라이언은 유일하고 그 까닭은 벤 위쇼라는 이름으로 설명된다. “He sees extraordinary in ordinary.그는 평범함 속에서 특별함을 봐요.”(벨 롤리) 프레디가 그렇듯 벤 위쇼도 그렇다.
1화 첫 장면은 대뜸 클로즈업된 벤 위쇼의 얼굴, 거울을 보고 연설문을 읊는 모습이다. 따라서 관객이 보고 있는 상은 프레디 본인의 눈에 비친 것과 동일하다. 이처럼 작품은 자주 그의 시선을 따라가는데, 이 과정에서 관객은 그 뛰어난 감각이 인식하는 바를 어느 정도 느끼게 된다. 벤 위쇼가 샅샅이 드러내는 보편적인 감정의 떨림 덕이다. 그러고 보면 프레디는 여성을 ‘구하는’ 강하고 멋진 남성이기보단, 루스를 ‘돕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그늘지거나 잔뜩 얻어맞고 벨에게 발견되는 자다. 인간적인 ‘보통’의 정서를 지님에도 물러서지 않기에 더 ‘보통이 아닌’- 이 위대한 기자의 여정을 그저 ‘관람’하는 것이 아니라, 이입해 가슴을 졸이며 응원할 수밖에. 비범하면서도 보편적인, 평범하기에 특별한. ‘세계와 불화하는 그들’의 내면에 있는 힘을 벤 위쇼는 오롯이 소화해 전했다. 그 컴플렉스complex함을 절대 단순화하는 법 없이.
어떤 인물들: ‘유해한 세계’에 벤 위쇼가 편입되는 법
아르튀르 랭보, 존 키츠, 노만 스콧, 리처드 2세와 최근의 아담 케이까지. ‘실존 인물’에 그를 캐스팅하며 외모의 유사성은 애초에 결정적인 요소가 아니었을 테고, 기대한 바도 완벽한 ‘재현’과는 멀었을 것이다. 그가 ‘벤 위쇼 아닌 자’이려면, 애니메이션 곰이 되거나, 판타지적 디스토피아의 무감정이라도 입어야만 했을테니. 그러나 <패딩턴>(2015), 마음껏 정신없이 명랑했다가도 풀이 죽어 무방비하게 처량해지는 벤 위쇼의 정교한 미성이 사고뭉치 패딩턴을 ‘지구상 가장 순수한 생명체’로 만드는데 필수적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듯- ‘기능적 조연’들 역시 벤 위쇼를 통함으로 인해 달라진다.
<007> 시리즈나 <제로법칙의 비밀>(2013) 속 ‘박사들’ 외에 그가 맡은 일부 조연들은 어쩐지 의외다. 빈민가 소년, 시인, 기자, 귀족 자제, 심지어는 왕의 모습으로-세계의 법칙이/을 거부하는 자였던 벤 위쇼는, 몇 년 후 여성 주연 작품들에서 ‘유해한 규범을 기꺼이 따르고 재생산하는 남자들’이 되었다.(‘절름발이 남자’는 규칙을 어기지만, 세계에 편입되기 위함이었다.) 맡는 역할의 범위를 넓히며 늘 ‘특정한 주인공’이 될 필요는 없음을 증명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이 캐스팅으로 ‘효과’를 본 것은 사실 배우보다는 작품이다. ‘규범’이 현실적인 경우 개인이 아닌 불평등 자체에 집중하게 한다면, ‘영화적일’ 때는 화면에 미묘한 불쾌감을 부여한다.
<서프러제트>(2015) 속 남성의 유형은 다양하다. 습관적으로 폭력을 즐기는 자, 권력을 쥐고 놓지 않는 자,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법을 집행하는’ 자, 아내를 지지하는 자- 그들 모두가 ‘악해서’ 여성을 억압하는 게 아니라는 점은 중요하며, ‘대표적’ 가부장의 마스크를 벤 위쇼가 가져가며 이는 최대한으로 어필된다. 아내와 아들을 사랑하는 ‘착실한 남자’로 등장한 소니는, 모드가 여성 참정권 집회에 나가도 먼발치에서 예민하게 주시하거나 부드러운 말투로 걱정을 내비치는 정도였다. 그 ‘배려’의 정체는 인물의 불안과 함께 밝혀지고, 카메라는 그가 ‘자상한 남편’, 이어 아버지이기를 포기하는 순간을 노린다. 악의 없이 울먹이며 흔들리는 낯을 잠시 클로즈업함으로써, 이 남자가 그저 평범하고 유약하며 특권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가부장임을, 그 무책임한 몰인지가 그의 잘못이며 폭력과 차별을 유지하는 기반이 되었음을 강조한다.
<더 랍스터>(2015)는 남다른 이입이 특기인 벤 위쇼에게 언뜻 어울리지 않는 작품이다. 그러나 요구되는 연기 스타일이 일정함에도, 이곳의 배우들은 의외로 ‘텅 비지’ 않았다.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연출을 거듭할수록 더) 배우의 개성을 지우기보다 ‘세계’의 룰에 맞게 돋보이도록 조율하며, 행동과 정서가 뻔하게 이어지지 않도록 활용해 장면을 ‘흥미롭게’ 만든다. ‘비정한 여자’가 안젤리키 파풀리아의 얼굴을 통해 기본적 우울을 입듯, ‘수단을 가리지 않는 절름발이 남자’의 바탕에 있는 불안은 벤 위쇼의-기계적인 톤을 적절히 입고도 예민하게 구르는 눈동자를 통해 드러난다. <리틀 조>(2019), 크리스의 변화를 미묘하고 ‘극적’으로 드러내기에도 그는 가장 적합한 배우였다. 주인공 여성을 사로잡는 매력적 남성의 전형이 아닌, 잔뜩 긴장해 머뭇머뭇 데이트를 신청하는 소심한 연구원. 그 조심스러움, 어색함과 함께 무해함이 사라지고 결국 무감정하게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 크리스가 지닐 기이함을 예시카 하우스너는 벤 위쇼의 실루엣에서 찾았다. ‘변화’ 이후의 폭력성 역시 계산된 각도로 침착하게 주먹을 뻗는 종류의 것으로, 색다른 공포와 불쾌감을 야기한다. 엄격한 디스토피아에 편입되는 남성들, 그 유해함마저 벤 위쇼만의 것이었다. 특정한 ‘악인’이 되려 애쓰지 않고 ‘세계’를 거역하지 않는 선에서 저만의 위치를 찾는다.
<리틀 조>(2019)
예민함이라는 재능: 타인의 얼굴로 가장 솔직한 자신이 되다.
단순히 마른 것이 아닌 ‘가녀린’ 실루엣, 쉽게 긴장해버리는 근육. 같은 작품에 출연했던 동세대 잉글랜드 배우들: 톰 히들스턴(<할로우 크라운>)이나 짐 스터지스(<클라우드 아틀라스>), 매튜 구드(<브라이즈헤드 리비지티드>)와 같은 ‘남성 리드’가 되기 어려운 이미지고, 에디 레드메인(<대니쉬 걸>)의 ‘무던함’도 없다. 유사하게 ‘세상과 불화하는 천재’ 타이틀을 유독 많이 달았던 베네딕트 컴버배치처럼 ‘뭐든 가능한’ 마스크도 아니어서, 드물게 이성애 로맨스 서사의 주인공이 될 때도 제 1화자나 ‘관계의 리더’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많은 동료 배우와 평론가, 관객들로부터 ‘동세대 최고의 배우’라는 찬사를 받는 까닭의 핵심은 이 ‘예민함’에 있다. “주변 사람들보다 피부를 한 겹 덜 가지고 있는 것 같은”(트레버 넌), 남들보다 많은 정보를 처리하는 감각을 전제하는 천재성,은 ‘축복’이라고 하기엔 망설여짐에도- 그의 예민함은(‘예리함’으로 바꿔 적어서도 안 된다) 절대로 ‘결점’이 아니다.
“세 시간 만에 모든 인생사를 겪고 자살을 결심하는 젊은이”(벤 위쇼, 2004.04.29. [인터뷰: AP Archive]), 비니에 후드티 차림으로 약병과 주머니칼을 꺼내며, ‘사느냐 죽느냐’를 논하-기보다 온몸으로 겪-는 트레버 넌의 ‘뉴 햄릿’은, 벤 위쇼의 운명과도 같았다. 아니, 이 역할의 운명이 그였다고 하는 것이 더 옳겠다. 이 주연 데뷔 퍼포먼스로 그는 수없이 공연되고 인용됐던 대사가, 관념에서 떠도는 대신 관객의 가슴에 내려앉게 하고 말았다. <할로우 크라운>, 리처드 2세의 슬픔이 밴 엷은 미소에는 귀족과 군인들 사이에서 중심을 잡으려 분투했던 열 살의 어린 왕마저 비친다. 그는 짓무른 눈가에 자기파괴적 저항과 조롱의 뉘앙스를 드리우고 스스로 ‘폐위’ 씬을 써내려가며 ‘텅 빈 왕관’의 의미를 들이밀었다. “시저를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로마를 더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외치며 안경을 든 손을 섬세하게 놀리던 브루투스가 그랬듯, ‘폭정’으로 수식되기도 하는 리처드 2세의 말년 역시, 벤 위쇼와 만나 풍부하고 ‘현대적’이기까지 한 정서를 입었다. 현대의 일반인과는 한참 먼 이 셰익스피어의 남자들이 벤 위쇼와 만나면, 어찌하여 ‘인간’으로 다가와 버리는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나 자신이 되고 싶지 않다.”(벤 위쇼, 2022.01.29. [인터뷰: The Guardian])던 그는, ‘모순적’이게도 스크린을 통해 가장 적나라한 자신이 된다. ‘연기하지 않는’ 이들을 연기하는 벤 위쇼는 그들인 동시에 ‘벤 위쇼’이며, 보고 있는 관객 하나하나다. 그가 불어넣는 개인적 에너지는 작품 전체로 확장되어 관객을 인물의 내면으로 끌어들인다. 그것은 평범과 비범, 특수와 보편을 가리지 않는다. 중세 왕의 대사조차 개인적 감성을 완벽히 드리워 읊어버리고, ‘특별할 것 없는’ 청년일 때도 남달리 고통 받는다. 어떤 전형성조차 저다운 방식으로 수행한다. 배우로서 ‘이점’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특징을- 벤 위쇼는 애써 지우고 ‘다른 사람’이 되려 하지 않고, 타인/인물이 자신의 피부에 착륙하여land on one’s skin 파고들도록 허락한다.
배우가 게이인 캐릭터를 연기하면, ‘OOO게이’라는 검색어가 자동으로 따라붙고, ‘아니라는 부정’이나 커밍아웃에 대한 기대(유명인의 커밍아웃은 퀴어의 가시성visibility을 높이고 인식을 향상시킬 가능성을 지니기도 하지만, 여기서 ‘기대’는 그러한 정치적 영향력을 고려한 종류의 것이 아닌 단순 가십을 위한 ‘기대’를 일컫는다.)가 뒤따른다. 벤 위쇼 역시 그에 시달렸고 아웃팅outing으로 성 지향성이 대중에 알려졌으나, 이후로도 소수자적 정체성을 ‘공개’하거나 숨기려고 애쓰지 않았다(벤 위쇼, 2016.04.03. [인터뷰: The Guardian]) 이미지가 굳어지기를 걱정해 의식적으로 ‘다른 방향의’ 배역을 맡지도, 반대로 전략적으로 특정한 이미지를 대중에 ‘어필’하지도 않았다. “배우들은 어떤 것이든 구현하거나 표현할 수 있고, 그 자신이 무엇인가,로만 정의되어서는 안 된다.”(벤 위쇼, 2019 골든 글로브 백스테이지 인터뷰)고 벤 위쇼는 말했다. 그의 인물 중엔 게이도 바이도 스트레이트도 있으며, 이는 표현의 깊이나 방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스스로 ‘양쪽 모두의 에너지에 매료된다’(벤 위쇼, 2022.01.29. [인터뷰: The Guardian])고 말하기도 했듯, ‘남성성’ 혹은 ‘여성성’의 전형을 답습하지 않고 -그것을 ‘거부하거나 깨트린’다기보다는- 다만 가장 정직한 인간이 된다. 카메라 앞에서 기꺼이 무방비해지는 그 솔직함과 용기 역시 재능이다. <리틀 조>의 서사를 가져온다면, 그야말로 가장 ‘리틀 조 행복 바이러스’에 덜 감염된 사람 중 하나일 테다.
아르만도 이안누치식 찰스 디킨스 각색에서 ‘밉상 빌런’ 유리아 힙의 옷을 입기도 했던 그는, <파고>(시즌4, 2020)에서는 총을 겨누고 협박하다가도 “내겐 아내가 있어요.”, “난 아내가 없는데 내가 죽으면 개밥은 누가 줘요.” 따위의 말에 눈가를 떨고 마는 ‘정이 가는 범죄자’ 라비 밀리건의 복잡한 캐릭터성을 한 톤 낮춘 목소리에 드리웠다. 프로듀싱을 겸한 <디스 이즈 고잉 투 허트>(2022)에서는 좀처럼 ‘정이 가지 않는unlikable’’(벤 위쇼, 2022.01.29. [인터뷰: The Guardian]) 프로타고니스트 아담 케이가 되어 바쁘고 예민하게 이 병실 저 병실을 오가거나 우울하게 입꼬리를 내렸다. 벤 위쇼는 여전히 범위를 제 식대로 넓히기를 멈추지 않고 있다.
공연예술계에 혈연이 없음에도 젊은 나이에 무대 정가운데에 올랐던 그의 연기에는 초반부터, ‘타고난 천재성’ 따위 문구 없이는 수식하기 힘든 완전함과 특별함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흔치 않은 재능’이란 흔한 표현으로 얼버무리는 것 역시 안 될 말이다. 그가 지나온 예술의 여정엔 소수적 정체성을 지닌 내성적 남성으로서의 경험과 고민의 과정, 그것을 드러낼 용기와 감수성, 인물을 존중하는 섬세한 접근법, 어느 하나로 정의되기를 거부하는 배우로서의 프라이드와 철학이 녹아 있다.
연기는, 벤 위쇼가 타인을 자신의 공간에 초대하는 방법이다. 세상이 화면 밖의 그를 궁금해할 필요나 권리는 없다. 그는 어느 정도, 데뷔 초부터 그 선언을 마쳤다. 연기예술가 벤 위쇼에 대해 알고 싶다면 그의 예술을, 픽션의 옷을 입은 채 내보이는 자신을 들여다보면 된다. “Give him a mask, and he’ll tell you the truth.가면을 씌워 주면, 그는 진실을 말할 거야.” (1998, <벨벳 골드마인>, 오스카 와일드 재인용)
* 주 참고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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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 첫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12월 첫째 주도 잘 보내셨나요?
갑자기 저번 주부터 기온이 확 내려가며 눈 소식이 있기도 했죠.
이제는 롱패딩 없이는 외출하기 힘들 정도로 날씨가 많이 추워졌습니다.
모두 감기 걸리지 않게 따뜻하게 입고 외출하시길 바랍니다:)
씨네픽과 함께하는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과 한 주 동안 진행했던 씨네픽 예측 이벤트인
12월 첫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순위 예측'도 같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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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주말 박스오피스
1. <올빼미> (-)
▶ 개봉 첫 주말에 이어 2주차 주말도 역시나 <올빼미>가 1위를 차지하였다. 전주보다 높은
좌석 판매율을 보이며 장기 흥행 질주가 예상된다. 각본, 연출, 연기 삼박자가 조화로운
수작이라는 평을 받으며 열띤 입소문의 열기로 높은 관객수를 보였다.
주말 동안 (12월 2일 ~ 12월 4일) 관객 수 55만 3,132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176만 3,680명을 돌파하였습니다.
2. <압꾸정> (NEW)
▶ 마동석이 이끄는 마동석 유니버스의 새로운 세계관 속 코미디 장르의 작품인 <압꾸정>은
배우들의 코믹 연기가 돋보이는 영화로 킬링타임용으로 보기 좋은 영화이다.
주말 동안 (12월 2일 ~ 12월 4일) 관객 수 21만 4,164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36만 4,541명을 돌파하였습니다.
3. <탄생> (NEW)
▶ 조선 근대의 길을 열어젖힌 개척자 청년 김대건의 여정을 그린 대서사 영화로 세대와
종교를 뛰어넘는 영화를 선보였다. 주말 동안 (12월 2일 ~ 12월 4일) 관객 수 7만
5,564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12만 386명을 돌파하였습니다.
▶씨네픽의 이번 주 129회 예측 이벤트는 12월 1주차 주말 박스오피스 순위 예측 이벤트입니다.
씨네픽 참가자분들이 예측해주신 박스오피스 순위 예측 결과는 어땠는지 다 같이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씨네픽 유저 예측 결과
정답자 비율(%)
▶ 한 주 동안 많은 씨네픽 유저분들이 박스오피스 순위를 예측해 주셨는데요.
그래프를 살펴 보면, 1위와 2위를 차지할 영화는 뚜렷하게 보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위의 경우 정답자 비율 역시 높았습니다. 3위의 경우, <탄생>,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
<데시벨> 등 다양한 영화를 예상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참여해 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리며, 씨네픽은 다음 주에 더 재밌고 유익한
제130회 씨네픽 이벤트로 인사드리겠습니다! :)
4. <극장판 뽀로로와 친구들: 바이러스를 없애줘!> (NEW)
▶ 12월 1일에 개봉한 뽀로로 극장판은 아무래도 아이들과 함께 부모님이 동반하여 관람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평일보다는 주말 관객 수가 확연히 많았다.
주말 동안 (12월 2일 - 12월 4일) 관객 수 7만 2,969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7만 7,685명을 돌파하였습니다.
5. <원피스 필름 레드> (▲4)
▶ 탄탄한 팬층을 지닌 원피스의 극장판 <원피스 필름 레드>가 개봉 주에는 TOP 5 안에
들어서지 못했지만, 12월 첫째 주 주말에는 4단계 올라 5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주말 동안 (12월 2일 - 12월 4일) 관객 수 6만 4,693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11만 9,039명을 돌파하였습니다.
북미 주말 박스 오피스
▶ 국내와 달리 <Black Panther: Wakanda Forever>가 4주째 주말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였다. <The Violent>가 개봉하며 순위에 변동이 일어났다. <나이브스 아웃:
글래스 어니언>이 순위권 밖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Black Panther: Wakanda Forever>는 주말 동안(12월 2일 - 12월 4일) 매출액은
17,593,000 (한화 약 228억)의 매출액을 달성했으며, 총 누적 매출액은 393,724,077
달러 (한화 약 5,102억)를 달성하였다.
<북미 박스오피스 TOP 5>
1.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 > 1,759만 달러 (누적 3억 9,372만 달러)
2. <VIolent Night> 1,330만 달러 (누적 1,330만 달러)
3. <스트레인지 월드 > 492만 달러 (누적 2,551만 달러)
4. <더 메뉴> 355만 달러 (누적 2,472만 달러)
5. <Devotion> 279만 달러 (누적 1,380만 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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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픽의 12월 첫째 주 박스오피스 분석 콘텐츠는 여기까지입니다.
이번 주도 건강한 한 주가 되기를 바라며
씨네픽은 다음 주 월요일, 이 시간에 또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씨네랩 에디터 Hiz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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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상 도전을 멈추지 않는 배우 박소담 #톺아보기
안녕하세요!
영화/OTT 큐레이션 매거진 '씨네랩'입니다.
국내 극장가의 박스오피스 2위, 한국영화 박스오피스 1위를 달리고 있는
영화 <특송>에서
특송 전문 드라이버 ‘은하' 역을 맡아 원톱 주연으로서 열연을 보이고 있는
박소담 배우를 톺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려 합니다! :)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매번 도전하는 자세와 놀라운 연기력으로 관객들에게 항상 영화적 만족을 선사하는
배우 '박소담' 톺아보기!
그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1. 프로필(Profile)
이름 : 박소담
출생 :1991년 9월 8일
국적 : 대한민국
직업 : 배우
2. 배우 박소담의 성장과정
박소담 배우는 학창시절에는 수학을 매우 좋아했다고 합니다.
자연스럽게 배우를 꿈꾸기 전에는 수학교사가 되는 것이 꿈일 정도였다고 하는데요.
박소담 배우는 연기쪽으로 진로를 정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기과에 진학하여 본격적인 배우로서의 꿈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3. 배우 '박소담'의 초기작
박소담 배우는 2013년 단편영화 <더도 말고 덜도 말고>가 공식적인 데뷔작으로 알려졌으나,
본격적으로 얼굴을 알리게 된 건 엄태화 감독의 <잉투기>입니다.
극 중 류혜영 배우의 학교친구로 출연하여 짧지만 인상깊은 연기를 선보였습니다.
이후 영화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에서 '홍연덕' 역할을 맡았고 조금씩 대중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합니다.
특히 김윤석, 강동원 주연의 <검은 사제들>에서 악령에게 빙의된 역할을 맡아 큰 화제가 됐고,
박소담 배우의 삭발 투혼부터 연기력까지 모두 극찬받으면서 많은 대중들에게 배우 박소담을 각인시키는 큰 계기가 됩니다.
영화 <검은 사제들>
4. '박소담'의 주요 필모작
- 2015년 작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 연덕 역
출연진 : 박보영, 엄지원, 박소담, 공예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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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숙학교로 전학 온 극 중 박보영의 단짝친구 역할.
외톨이가 된 박보영을 옆에서 지켜주고 위로해주는 조력자 역할을 맡았다!"
- 2015년 작 <검은 사제들>, 영신 역
출연진 : 김윤석, 강동원, 박소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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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서울 뺑소니 교통사고 이후 의문의 증상에 시달리고
악령에게 빙의된 연기와 역할을 위해 삭발까지 감행하는 투혼을 보였다”
- 2016년 작 <설행_눈길을 걷다>, 마리아 역
출연진 : 김태훈, 박소담, 최무성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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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들이 운영하는 고요한 산 속의 요양원의
수녀 마리아 역할을 맡아 요양원을 찾은 알코올 중독자인 정우(김태훈)와 교감을 통해
그를 위로해주고 치료해준다"
- 2018년 작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 주은 역
출연진 : 박해일, 문소리, 정진영, 박소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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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중 송현(문소리), 윤영(박해일)이 머무른 민박집의 딸 '주은'역
윤영의 주위를 맴도는 자폐증을 가진 인물이다"
- 2017년 작 <대창 김창수>, 한영희(특별출연) 역
출연진 : 조진웅, 송승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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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중 인천 감옥소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린
독립신문 기자 '한영희' 역할"
- 2019년 작 <기생충>, 기정 역
출연진 : 송강호, 이선균, 조여정, 최우식, 박소담, 장혜진, 이정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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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택 가족의 딸인 '기정' 역 이자 기우(최우식)과의 남매사이
극 중 미술교사 '제시카'로 속여 다송의 미술 선생님으로 동익(이선균)의 집에 들어온다.
기택 가족 중 가장 현실감각이 있는 인물"
- 2020년 작 <후쿠오카>, 소담 역
출연진 : 권해효, 윤제문, 박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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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 책방의 유일한 젊은 손님이자
당최 속을 알 수 없는 여자 '소담' 역"
- 2022년 작 <특송>, 은하 역
출연진 : 박소담, 송새벽, 김의성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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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치 못한 배송사고로 걷잡을 수 없는 사건에 휘말린 특송 전문 드라이버 ‘은하’.
성공률 100% 특송 전문 드라이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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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박소담 배우의 #톺아보기 시간은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박소담 배우를 좀 더 알게 되고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
그럼 씨네랩은
다음 주에 더 멋있고 아름다운 배우 #톺아보기 시간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안녕~~
P.S 혹시 #톺아보기 배우로 추천하고 싶거나 관심있으신 배우들이 있으면
주저말고 편안하게 댓글로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씨네랩 에디터 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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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니 빌뇌브의 운명론
운명이란 무엇인가. 이는 아주 오래된 질문이다. 성경에서부터 공상과학소설까지 운명에 대한 고민을 끊임없이 되풀이해 왔다. 그리고 이는 문학에서 영화까지 매체를 달리하면서도 이어진다. 드니 빌뇌브는 운명이란 주제를 거듭해서 표현했다. 〈그을린 사랑〉(2011)부터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2015), 〈블레이드 러너 2049〉(2017)까지 오이디푸스 신화, 전쟁, SF 등 다양한 소재를 이용해 운명과 자아를 탐색해 왔다. 특히, 소설을 원작으로 한 〈컨택트〉(2017), 《듄》 시리즈(2021-2024)는 운명에 대한 탐색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영화다. 특히, 〈컨택트〉, 《듄》 시리즈 모두 공상과학소설을 원작으로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며, 각 작품에서 운명을 대하는 방식에서의 차이가 드니 빌뇌브의 운명에 대한 감독으로서의 관점을 파악하는데 유의미하다. 그렇기에 이 두 작품을 바탕으로 드니 빌뇌브의 운명론을 탐색하고자 한다. 두 작품의 공통점을 통해 드니 빌뇌브의 영화에서 드러나는 운명의 의미을 정의하고, 〈컨택트〉와 〈듄〉과 〈듄: 파트2〉에서 나타나는 운명 양상의 차이를 살펴 드니 빌뇌브의 운명론을 밝혀보도록 하겠다.
먼저, 〈컨택트〉, 《듄》 시리즈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운명의 양상을 살펴 드니 빌뇌브의 운명을 정의하자. 그의 운명론은 ‘예지자의 등장’, ‘상대 문화의 습득’, ‘수행의 서사’라는 세 가지 공통점이 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운명을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지배하는 초인간적인 힘. 또는 그것에 의하여 이미 정하여져 있는 목숨이 차저.’라고 정의한다. 즉,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입장에서 운명이라 부르기 위해서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알아야 하고, 그것이 미래에 실현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예지자의 존재가 중요하다. 두 영화에서의 예지자의 등장을 살펴보면, 〈컨택트〉에서는 헵타포드, 《듄》 시리즈에서는 베네 게세리트가 그 예지자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헵타포드는 외계 생명체로서, 인간과 다른 체계의 언어를 사용하고, 베네 게세리트는 그들만이 공유하는 문화가 있다. 두 존재 모두 외부의 독자적 문화를 가진 존재라는 측면에서 이방인이다.
또한, 헵타포드는 우주에서 온 존재이고, 베네 게세리트는 우주를 떠돌기 위해 필요한 존재로, 두 존재 모두 지금 있는 곳 너머의 공간을 상상하고 그 상상을 실현할 수 있는 존재다. 여기서 상상이라는 개념은 아주 중요하다. 혹자는 인간의 특성을 상상력으로 정의할 정도로, 상상은 인류 문명 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없는 것을 떠올리도록 하여, 욕구를 만들고 목표를 갖게 하며 변화하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규칙과 사회를 만들고 체계화된 제도를 만든다는 점에서도 유의미하다. 이러한 상상을 자극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두 존재는 인간의 종적 성질 및 원초적 욕구와 맞닿아 있다.
게다가 두 존재는 모두 주인공을 각성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헵타포드는 언어를 전달함으로써, 베네 게세리트는 고통을 줌으로써 각 영화의 주인공을 각성시킨다. 그리고 그 각성의 과정은 주인공이 이전에 겪어 본 적이 없는 무언가이며, 그것을 통해 극심한 감정을 겪는다. 딸의 죽음을 알게 된다거나, 죽을 듯한 고통을 겪는 것처럼. 그리고 이로 인해, 두 주인공은 새로운 선택의 문제를 부여받는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이 각성 또한, 이전에 두 주인공이 선택한 결과라는 것이다. 하지만 각성 이전의 선택과 이후의 선택은 차이가 있다. 이전의 선택은 누군가에 의해 제안된 것 사이의 선택이라면, 각성 이후의 선택은 목적 의식을 기반으로 한 자발적 선택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 자발성에는 정해진 미래라는 외부의 압력이 존재하나, 그 순간만은 주인공이 스스로 선택하는 듯 보인다. 즉, 각성은 주인공의 선택의 결과이며, 그에 따른 대가를 만들고, 그 이후 보다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 즉, 드니 빌뇌브의 운명에서 상상과 결부된 존재로서 주인공을 각성시키는 이방인인 예지자는 필요조건인 것이다.
또한, 이 각성의 과정에서 드니 빌뇌브는 플래시 포워드를 사용한다. 드니 빌뇌브는 미래를 보여주기 위해 플래시 포워드를 독특하게 사용한다. 그의 플래시 포워드는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하나, 영화의 시작에서 플레시 포워드를 플래시 백처럼 시킨다. 그로 인해, 그것이 단순한 환상인지, 과거에 있었던 일인지, 미래에 있을 일인지 관객을 한번에 인지할 수 없다. 둘, 클로즈업 쇼트나 롱 쇼트로 단편적인 이미지만을 제공한다. 그는 플래시 포워드로 각성의 순간을 표현하며, 운명을 보여주는데, 이는 시퀀스가 아닌 쇼트로 단편적으로 표현되며, 일상적인 스케일의 화면이 아닌, 극도로 확대되었거나 축소된, 그리고 극도로 멀리 있거나, 가까이 있는 화면으로 표현하여 이질성을 극대화한다. 마지막으로 내레이션의 존재다. 그의 플래시포워드는 예지자에 의한 각성으로 야기됙기에 보여지는 이미지와 다른 음성이 삽입된다. 그리고 이는 주로 내레이션으로 삽입되며, 영상과 음성의 격차가 발생한다. 이러한 특징은 각성 순간의 혼란을 표현하며, 예정된 미래로 인해 관객이 느낄 허무와 수동성을 옅게 하고, 모호함에 의한 긴장감과 주인공의 적극성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다음으로, 상대 문화의 습득을 살펴보자. 이는 앞선 예언자에 의한 각성과 연결된다. 하지만 단순히 예언자에 의한 각성을 넘어 더 능동적인 문화 습득이 이루어지는 부분도 있다. 예언자에 의한 각성은 앞선 문단에서 살폈으니, 후자만 다뤄보자. 먼저, 〈컨택트〉를 보면, 가장 두드러지는 문화 차이는 헵타포드의 문화와 인간의 문화다. 그리고 이들의 소통은 언어를 매개로 이뤄진다. 그런데 이 외에 또다른 문화 차이의 축이 존재한다. 이는 물리학자와 언어학자의 차이다. 이는 물리학에서의 관점 차이와 언어학에서의 음성-문자 차이로 나타나며, 소설에서 보다 잘 드러난다. 먼저, 관점 차이를 살펴보면 언어학자와 물리학자는 페르마의 원리를 통해 소통하는 것을 찾을 수 있다. 페르마의 원리는 빛의 굴절 현상을 다른 측면에서 해석하는 것으로 이 또한 문화의 차이가 드러나는 것이다. 또한, 다른 측면에서는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 사이의 차이가 나타난다. 소설에서는 보다 상세하게 설명되며, 이 둘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게 다뤄지나, 영화에서는 그 과정까지 세세히 묘사되지는 않는다.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으로 실현되지 못한 몇 가지의 문화 차이가 있으나, 어찌하였든 이 차이를 담은 원작을 선정하였다는 점에서 드니 빌뇌브는 문화 수용이 운명을 수용하는 과정과 연관됨을 명백히 밝힌다.
역시나 《듄》 시리즈에서도 문화 수용이 드러난다. 오히려 상대의 문화 수용은 《듄》 시리즈에서 더 잘 드러나는데, 특히 눈에 띄는 문화의 수용은 프레멘과의 교감이다. 그 외형이나, 영화에서의 설정을 살펴보면 주인공은 과거 유럽 가문의 후계자를 상징하고, 프레멘은 그들이 침략한 곳의 원주민을 상징한다. 주인공은 자신의 가문이 멸하자, 프레멘의 터전으로 들어가고 그들의 삶의 방식을 배운다. 이처럼 두 영화에서 모두 다른 문화를 수용함으로서 운명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묘사된다.
마지막으로 수행의 서사를 살펴보자. 드니 빌뇌브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과정과 운명을 받아들인 이후의 과정에서 수행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컨택트〉는 그 영화 전체가 수행에 관한 이야기이다. 헵타포드에게 가기 전, 언어학자는 외계 생명체가 출몰했다는 뉴스가 나와 학생들이 강의에 나오지 않는데도 강의를 하러 대학에 나가는 사람이다. 그것을 수행해야만 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헵타포드에 의해 비극적인 미래를 알게 되었을 때조차, 그 행위를 기꺼이 수행한다. ‘그럼에도 하는’ 사람인 것이다.
《듄》 시리즈에서도 미래를 수행하는 행위는 중요하게 다뤄진다. 〈듄〉에서 아직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기 전인 주인공은, 현재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듄: 파트2〉에서는 이 모습이 더 흥미로운 양상을 띤다. 〈듄: 파트2〉에 오며, 주인공의 정체성에 대한 갈등은 심화되고, 지금 해야 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것과 할지 고민하는 것 사이의 갈등이 반복된다. 즉, 지금의 수행과 미래의 수행 사이의 갈동이 지속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로써 끝내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이 지점에서 아주 흥미로운 점이 나타난다. 바로, 이 운명을 거스르는 수행을 하려는 자의 등장이다. 변화한 주인공으로 인해 조력자가 반동 의지 가져 발생하는 변화는 운명에 의한 수행의 다른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지껏 수용적 수행만이 강조되다, 소설에서 영화로 재창작하며 비중이 확대된 인물이 반동적 수행을 하려는 의지를 품는 것으로 마무리됨으로써 또다른 차원의 운명론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확신의 수행이든 의심의 수행이든 간에, 그리고 수용의 수행이든 반동의 수행이든 간에, 어찌하였든 드니 빌뇌브는 운명에 의한 실천, 즉 수행을 강조한다. 행위로 이어짐으로써 운명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두 영화 모두 운명을 수행하는 서사를 갖추는 것이다.
즉, 드니 빌뇌브의 운명론은 운명을 예지하는 자에 의한 운명의 시작, 차이 수용으로 인한 운명의 과정, 수행으로 인한 운명의 완성으로서 정의될 수 있다. 특히 이 세 요소 중, 앞의 두 전제 예지자의 존재와 상대의 문화 수용은 모든 작품에서 비슷한 양상을 띤다. 이는 운명의 ‘예정된 미래’의 가정인 내재적 의미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명을 실현하는 ‘수행’의 측면에서 〈컨택트〉, 〈듄〉, 〈듄: 파트2〉는 서로 다른 태도를 견지한다. 그로 인해, 세 영화는 하나의 영화가 아니라 각자의 서사를 쌓아가는 다른 영화로서 존재한다. 먼저, 〈컨택트〉를 살펴보자. 〈컨택트〉에서의 수행은 ‘행위적 태도’라고 정의할 수 있다. 행위적 태도란 말 그대로 ‘하는 것’, ‘행위’ 그 자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즉 행하는 것 자체가 운명의 완성이라는 것이며, 이는 이후 언급될 다른 태도에 비해 다소 조작적이고 가치중립적인 태도라 할 수 있다.
〈컨택트〉에서 드러나는 행위적 태도는 실존주의와 연관이 있다. 드니 빌뇌브는 이 영화에서 인간 개인과 개인의 주체성과 존재성을 강조한다. 그렇기에 가장 중요한 행위는 ‘선택’이 되고, 영화의 끝에 다다라 자유의지의 문제를 고민하게 된다. 〈컨택트〉는 외계 생명체 헵타포드의 등장과 함께 시작한다. 소설에서는 헵타포드가 지구에 온 이유가 설명되는데, 이는 “지구에 방문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다. 또한 ‘행동’이 원서에서 ‘연기’라는 의미도 갖고 있는 “performance”로 표현되며, 모든 것이 정해진 미래로의 착실한 수행이며, 이는 정해진 각본대로의 연기와 닮았음를 의미한다.
이는 실존적 측면에서 자유의지의 문제를 야기한다. 아무리 현재에서 바꾸고자 노력해도 어차피 올 미래가 있다면, 그 미래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결과로 상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예정된 미래를 가정하는 운명의 개념은 실존적 측면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일이다.
하지만 드니 빌뇌브는 정해진 미래에 대한 수행을 자유의지의 결과로 해석한다. 이는 주인공의 선택을 통해 드러낸다. 이를 관찰하기 전에 영화에서 운명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야 한다.
영화의 시작, 아이의 웃음 소리와 함께 주인공의 내레이션이 나온다. 어느 정보 없이 첫 장면을 마주한 관객은 자연스레 이것이 플래시 백이라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일련의 사건을 거쳐 영화의 결말에 다다르면, 첫 장면이 플래시 백이 아닌 플래시 포워드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렇게 순환하는 구조를 갖춘 영화의 형식은 운명의 ‘이미 예정됨’을 구조적으로 드러낸다.
이렇게 순환하고 예정된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영화의 구조 안에서,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 우리가 보는 주인공의 모습은 주체적이다. 그녀는 강의를 나가고, 정부의 요청에 응대하고, 매일같이 우주선에 올라가는 ‘그럼에도 하는’ 사람이고, ‘기꺼이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모든 사람은 외계 생명체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취할지 적대적인 태도를 취할지, 우주선에 어떤 사람을 보낼지, 어떤 방식으로 소통을 시도할지를 선택한다. 이는 그들이 주체적인 선택을 하고 있으며, 그 결과 최선의 결과을 얻었음을 표현한다. 그리고 끝내 운명을 맞닥뜨렸을 때, 다시 첫 장면의 내레이션을 떠올리며, 플래시 포워드로 묘사된 그 미래는 운명에 대한 막연한 수행이 아니라 적극적인 수행임을 알게 된다. 비로소 관객은 이를 통해, 일종의 투쟁처럼 보이기도 하는 영화 속 인물의 적극성이, 운명에 대한 수행이 수동적 행위가 아닌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이며, 기꺼이 운명을 행하는 일임을 깨닫는다. 드니 빌뇌브는 이를 통해 운명 수행의 행위적 태도를 드러내며, 운명을 수행하는 데에 있어 인간의 자유의지가 개입할 수 있음을 밝힌다.
《듄》 시리즈는 〈컨택트〉와 달리 보다 가치가 개입된 측면의 수행을 다룬다. 각자의 수행에는 목적이 있으며, 그 의도성에 따라 옳고 그름이라는 가치판단이 발생한다. 그런데 이 때의 양상이 〈듄〉과 〈듄: 파트2〉에서 다르게 나타난다. 그렇기에 마치 한 편의 영화 같은 이 두 편의 영화는 운명의 측면에서 따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먼저, 〈듄〉을 살펴보자. 〈듄〉에서 묘사되는 운명의 수행은 메시아적 태도다. 메시아적 태도란 종교적 의도성을 갖춘 운명관으로, 구원을 목적한다.
〈듄〉은 주인공이 자신의 운명이 무엇인지 받아들이는 과정을 주요 골자로 한다. 성경을 모티프로 가지고 와, 진행되는 서사는 점지된 운명과 그를 수행해야하는 인물의 갈등이 주를 이룬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단순히 성경에서 묘사되는 운명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드니 빌뇌브는 주인공을 예지자가 의도한 바와 다르게 태어난 구원자로 설정하며, 운명이 완전한 통제가 불가능함을 시사한다. 즉, 운명은 거시적으로는 예지되는 반면, 미시적으로는 통제를 벗어나는 순간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운명의 벗어남은 주인공의 부모, 즉 개인의 의지의 산물로서, 개인의 욕망과 의지를 통해 바뀔 수 있는 운명의 불완전성을 암시한다.
여기서 묘사되는 주인공은 예수적 인간으로, 혼자서 모든 짐을 짊어진 인간이다. 또한 그의 운명은 구원을 목적으로 하며, 가장 성스럽고 완전에 가까운 존재로서 묘사된다. 하지만 그는 통제에서 벗어나 의도와 다르게 태어난 존재란 점에서 불완전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괴리에 의해서 주인공은 혼란을 겪는다. 결국 운명에 대한 부정에서 인정으로 넘어가는 이 서사에서는 운명을 인식하는 수준에서 멈추고, 이를 온전히 수용하는 것까지 나아가지 못한다. 운명의 존재를 인지하고 자신의 존재에 대한 고민을 갖기 시작하는 데서 멈추는 이 영화의 운명관은 이후 〈듄: 파트2〉에서 발전된다.
〈듄: 파트2〉에서는 운명에 수용적 태도와 거부적 태도의 갈등으로서 수행에 대한 태도가 설명될 수 있다. 주인공은 본격적으로 자신의 운명에 대해 고민하며 이를 수용할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이 갈등은 운명에 의해 연결된 두 여성 캐릭터로 표항된다, 수용적 태도는 어머니로서, 거부적 태도는 챠니로서 드러나며 운명에 대한 내적 갈등을 심화한다. 끝내 수용을 택하는 주인공의 자세는 햄릿적 인간을 닮았으며, 운명에 대한 고민은 말 그대로 “to be or not to be”의 문제인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그가 선택한 수용적 태도는, 퀴사츠 해더락을 낳는 계획된 운명을 바꾸려 했던 자인 어머니로서 상징된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미 거부적 태도를 드러냈던 예지자로서, 예지의 각성제인 ‘진실을 밝혀주는 독약’을 마심으로서 수용적 인간으로 변화했다는 점에서 운명에 대한 상반된 태도를 흥미롭게 표현한다. 특히, ‘진실을 밝혀주는 독약’을 마시는 것이, 주인공 또한 운명에 대한 수용적 태도를 견지하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각성제로 인한 운명의 수용을 시각적, 서사적으로 짜임새 있게 표현한다. 게다가 수용적 태도를 상징하는 그녀는 선택 주체인 주인공의 어머니로서, 애인보다 더 강력한 운명이라 할 수도 있을 혈연으로 연결된 자라는 점에서도 수용적 수행의 상징으로서의 흥미로운 점을 지닌다.
어머니의 운명에 대한 태도의 변화는 챠니와 겹쳐 보이며, 마치 챠니 또한 이러한 변화를 겪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의심을 야기한다. 하지만 드니 빌뇌브는 챠니가 운명에 대한 거부적 수행을 결심하는 장면에서 영화를 마침으로서, 새로운 태도의 가능성을 남기고, 운명에 대한 수용만이 유일한 선택지가 아님을 밝힌다. 소설에서 상대적으로 비중이 적었던 챠니에게 많은 역할을 부여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괄목할 부분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세 편의 영화를 나란히 놓고 비교하면 드니 빌뇌브의 운명 수행에 대한 태도가 변화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컨택트〉와 《듄》 시리즈 사이의 시간 간격이 있었따는 점과 〈듄〉과 〈듄: 파트2〉는 함께 제작되었다는 것이다. 즉, 운명에 대한 행위적 수행에서 의도적 수행으로의 변화는 그의 운명관의 변화로서 이해할 수 있는 반면, 메시아적 수행과 상반된 수행은 연관지어 이해해야 한다.
《듄》 시리즈에서의 〈듄〉과 〈듄: 파트2〉 서사적, 주제적 측면에서 분석했을 때, 〈듄〉은 〈듄: 파트2〉를 위한 준비 단계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기에 드니 빌뇌브의 운명관은 메시아적 태도를 통해 운명 수행에서의 의도 개입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햄릿적 태도를 통해 상반된 수행의 포용으로 변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운명 그 자체도 ‘절대로 변화할 수 없는 것’에서, ‘변화 가능성이 극도로 낮은, 하지만 변화할 수도 있는 것’으로 다르게 인식하기 시작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드니 빌뇌브의 운명론에서 자유의지 개입의 여지가 높아졌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컨택트〉에서 《듄》 시리즈로 넘어오며, 백인 서사 비틀기가 강화되었음을 확인함으로서도 알 수 있다. 백인, 남성 중심의 서사에서 외부인, 여성 중심의 서사를 강화하는 것은 그의 영화 전반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이다. 주로 소설보다 남성 인물의 비중이 줄고, 여성 인물의 비중이 늘어났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외계인의 언어를 습득하고, 원주민의 문화를 습득한다는 점에서 식민지 강탈의 서사와 백인에 의한 원주민 구원 서사를 해체하고 소통과 화합의 서사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컨택트〉에서는 외계의 언어를 가져오는 과정에서 외계어와 인간어 사이의 약화된 우열관계가 묘사되고, 상호 간의 문화 공유이기보다는 선물주기식의 일방적인 공유에 그친다는 점에서 운명에 대한 단편적인 측면만을 보여준다는 한계가 발생한다. 반면 《듄》 시리즈에서는, 한편에서 프레멘과의 상호작용에서 단순히 언어 공유를 넘어 그들의 지역에서 생활하고 문화에 융화된다는 점에서 비튼 서사를 보여주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결국 백인 남성 메시아와 그를 추종하는 원주민의 이미지를 부여함으로써, 그리고 그 신념 또한 백인에 의해 주입된 신념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백인 중심의 서사를 함께 보여준다는 점에서 보다 복합적인 운명관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를 수용하는 주인공과 거부하는 챠니를 통해 백인 남성 중심 서사와 운명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를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그렇기에 드니 빌뇌브는 〈컨택트〉에서는 자유의지를 수용의 측면에서만 다룬 것을 넘어, 《듄》 시리즈에서는 메시아가 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등 거부의 측면에서도 운명의 수행을 탐구한다.
이처럼 드니 빌뇌브는 두 편의 공상과학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를 통해, 자신의 운명론을 드러냈다. 그는 예지된 미래를 수행하는 수행자로서의 역할을 살피며, 개인의 자유의지를 깊이 있게 이야기했다. 예정된 것 속에서, 예정된 것을 기꺼이 해내기도 하고, 예정되지 못한 것을 열렬히 해내기도 하며, 운명을 수용하든 그렇지 않든 기꺼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선택하는 인물을 통해, 그는 운명 속에서도 인간의 자유의지가 성립할 수 있음을 역설한다. 그렇기에 그의 운명론은 공허하지 않고 투쟁적이며 적극적이다. 살아있는 자들의 살아있는 운명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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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호함의 미학, <해피 엔드>와 <달콤한 인생>
오늘 학생과 얘기하다가, 사람들은 미묘한 관계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해피 엔드>를 본 관객들은 두 사람의 감정이 사랑인지 우정인지에 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헷갈린다). 만에 하나 둘이 키스를 하는 장면이 있었다면 이 영화에 대해서 지금처럼 계속 생각해 보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키스는 미묘함을 끝내는 확실한 방법이다. 퀴어 영화에서 스킨십은 영화의 독해가 불가능한 이성애중심주의적 관객들을 위한 장치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런 퀴어 영화는 퀴어 비평으로 읽어 볼 만한 재미가 있는 작품들이 드물다.
어쨌든 나 또한 이분법의 논리에 빠져 있었고, 영화 시놉시스를 쓰는 수업시간에도 인물들의 감정선은 명확해야 한다고 늘 가르쳤다. 하지만 이제는 모호함의 미학에 대해서 조금은 알 것 같다. 모호함의 미학이 존재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 삶과 비슷한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 인생에서는 모든 것이 불확실성에서 시작한다.
공교롭게도 어제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본 <달콤한 인생>도 모호함에 관한 영화였다. 조폭인 이병헌이 자기 보스랑 맞짱을 뜨는 이유는 ‘왜 흔들렸는지’ 말을 못해서다. 몇 년 전 이 영화를 보았을 때는 이병헌의 질문만이 강조되어 들렸다. “그때 나한테 왜 그랬어요?” 그런데 어제 다시 보니 대답을 안 한 건 이병헌이 먼저였다. 답답해 미칠 노릇이다. 관객은 영화를 추동하는 그 핵심적인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명확히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랬기에 이 영화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것 같다.
김지운 감독은 <달콤한 인생>으로 한국의 느와르 장르를 해 보고 싶었는데, 그 안에는 사실 한 남자의 어떤 섬세한 심리가 중심에 있다고 말했다. ‘모호함’이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그런 모호함에 관한 것들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같았다고. <해피 엔드>와 <달콤한 인생> 두 영화 모두 모순적인 제목을 갖고 있다는 점도 눈에 띈다. <해피 엔드>는 해피 엔딩으로 끝나지 않고, <달콤한 인생>도 달콤한 인생을 그리지 않는다. 영제는 <A Bittersweet Life>로 더욱 직접적이다. 우리는 어쩌면 명확히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경계에 있는 것을 더욱 사랑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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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스트 어웨이
캐스트 어웨이
오랜만에 영화를 다시 봤다. 처음 봤을 때와는 사뭇 다른 감정과 느낌이 들었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는 흔히 말하듯 '현대판 로빈슨 크루소'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다시 보면서, 이 영화는 자신의 삶을 어떤 이유에서인지 일정 시간 잃어버린 남자가 자기의 삶을 찾아가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페덱스(물류회사)에 근무하는 척 놀랜드(톰 행크스)는 화물을 싣고 이동하는 비행기에 탑승했다 비행기가 원인을 알 수 없는 사고로 추락하면서 무인도에 떠밀려 살아난다. 그는 생존을 위해 거의 원시인 수준으로 활동하며 무인도에서 약 4년의 시간을 보내다 마침내 뗏목을 묶어 섬을 탈출해 다시 문명사회로 돌아온다.
모두 척 놀랜드가 죽은 줄 알고 장례까지 치렀지만, 정작 척 놀랜드가 나타나자 사람들은 놀라움과 반가움으로 좋아하는 한편, 죽은 사람이 살아온 것에 대해 당혹스러워한다. 척 놀랜드의 시각에서 보면, 자신은 전혀 변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람들은 자기를 이상하게 바라본다.
여기서, 척 놀랜드가 홀로 무인도에서 살았던 4년의 시간을 다르게 생각해보면, 척 놀랜드가 깊은 우울증 또는 정신적 문제로 병원에 입원해 지냈다고 그려볼 수 있다. 영화에서 보여지는 무인도의 생활은 척 놀랜드의 상상이거나 비유일 수 있다.
무인도에서 혼자 살아가는 상황은 보통의 사람에게 일어날 확률이 거의 없다. 하지만 척 놀랜드는 무려 4년을 혼자 살아간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는 동물이기에, 척 놀랜드는 바다에 떠내려온 화물에서 배구공을 발견하고, 배구공에 이름을 붙이고, 인격화한다. 배구공의 이름은 '윌슨'이다. 배구공을 만든 제조 회사의 이름이거나, 배구공 브랜드겠지만, 여기서 '윌슨'은 척 놀랜드의 또 다른 자아라고 할 수 있다.
척 놀랜드는 항상 '윌슨'을 가까이 두고 생활한다. 그는 윌슨에게 다정하게 말하지만, 어느 때는 화를 내기도 하고, 짜증을 부리기도 한다. 자신의 감정을 '윌슨'에게 투사하는 것이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자신을 투사해 감정을 발산하지 않으면 진짜 정신병에 걸릴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하는 행동일 수 있거나 이미 정신병 상태에 있는 척 놀랜드가 '윌슨'을 자기와 동일시하는 현상이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을 경우, 그 사람의 뇌 활동을 이미지로 만들어 보면, 척 놀랜드가 무인도에서 생활하는 것처럼 매우 단순하면서 황량한 상태임을 알 수 있다. 척 놀랜드의 생활은 매우 단조로워서, 아침에 일어나 물을 찾아 마시고, 하루 두 끼 또는 세 끼를 위해 채집, 사냥하는 활동을 한다. 그에게는 '문명'에서 비롯한 지적 활동을 할 수 있는 도구나 대상이 없는데, 그건 그의 뇌 활동 즉 정신의 상태가 문명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를 암시 또는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홀로 4년의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외부의 충격에 척 놀랜드는 깨어난다. 바닷가에 떠밀려온 것은 문명이 만든 흔적이었고, 그것은 무인도에 갇혀 있던 척 놀랜드에게 정신적, 심리적, 육체적 충격을 가한다. 섬에 갇힌 채 탈출할 엄두를 내지 못하던 척 놀랜드는 문명의 조각을 보면서 탈출의 희망을 갖는다. 그리고 탈출하기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시작한다.
척 놀랜드가 죽음을 각오하고 거센 파도를 헤치며 섬을 탈출하는 과정은, 척 놀랜드의 정신이 놓인 상태 즉 우울증이나 정신병 처럼 현실에서 멀어진 상태에서 다시 정상의 현실로 돌아오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준다. 그리고도 바다 위에서 거의 죽음 직전에 이르렀을 때-바다는 인간의 의식, 무의식을 상징한다-극적으로 구출된다. 척 놀랜드는 다시 문명사회이자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로 진입한 것이다.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왔지만, 과거의 척 놀랜드와 지금의 척 놀랜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애인, 친구, 동료들은 돌아온 그를 반겨주지만, 한편으로 그가 사라졌던 시간만큼 낯설고 당혹스러워한다. 깊이 사랑하던 애인은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해 아이를 낳았고, 동료들은 친절하지만 예전과는 사뭇 멀게만 느껴진다. 척 놀랜드가 그들과 떨어져 있어야 했던 시간과 공간이 그들과의 유대를 낯설게 하고, 어색하게 만든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척 놀랜드라는 '인간'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척 놀랜드는 자신이 떠났던 '문명사회'로 다시 돌아왔지만, 스스로도 그 환경이 어색하고 낯설다. 불과 4년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그 이전과 앞으로도 결코 다시는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청년 남성이 군대, 특히 미국에서는 실제 전투에 참가하는 분쟁지역의 군대에서 복무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이 '낯섦'에 대해 깊이 공감할 것이다. 그들은 불과 2-3년의 짧은 군복무를 하지만, 그때 겪은 전쟁의 트라우마는 평생 남게 된다. 그리고 그 트라우마로 인해 군복무 전의 '나'와 이후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척 놀랜드는 아마 정신적인 문제로 독방에 갇혀 있었을 수 있고, 그가 겪었던 4년의 시간은 그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걸 바라보는 애인, 동료들의 시선을 척 놀랜드가 모를 수 없고, 그로 인해 감정적 단절과 소외를 느끼게 된 것이다.
결국 척 놀랜드는 다시 길을 떠난다. 그가 알던 모든 사람과 그가 살던 곳에서 멀리, 아무도 알지 못하고, 어디인지도 모르는 곳으로. 그리고 그 낯선 곳에서 오히려 편안함을 느끼고, 낯선 곳에서 만난 사람에게 호감을 갖는다. 이것은 척 놀랜드가 자신의 삶이 바뀐 것을 인식하고, 새로운 삶에 적응하려는 무의식적 행동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영화는 언뜻 해피엔딩처럼 보이지만, 깊은 고통과 슬픔을 내재한 채 살아가야 하는 한 인간의 가슴 아픈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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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소공포증을 증발시킨 곧 역주행을 불러올 실화 영화[결말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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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1주 최신 개봉영화(이터널스, 세버그, 시그널X, 크림, 퍼스트 카우)
[WEEKEND CHOICE MOVIE] 2021년 11월 1주차 #개봉영화
#최신영화#영화추천 #영화예고편
영화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https://blog.naver.com/rainb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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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패트리어트> 메인 예고편
손안에 쥔 국가의 운명!
한때 CIA의 촉망받는 요원이었던 ‘스테이시’는
한순간 국가로부터 버림받는다.
그런 그녀가 손에 쥐고 있던 것은
다름 아닌 세계 3차 대전에 대한 기밀 정보.
그녀에게서 정보를 빼내기 위해
갖은 세력들이 접근해 위협을 가하기 시작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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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블랙의 신부> 공식 티저 예고편
"저희 렉스(REX) 에서 좋은 인연 만나게 되실겁니다" 욕망이 거래되는 상류층 결혼 정보 회사 렉스(REX) 7월 15일, 그녀의 복수가 시작된다! 《블랙의 신부》 7월 15일, 오직 넷플릭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