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3-10-27 08:39:31
미국이라는 상속자에게 들려주는 편지
<플라워 킬링 문> 리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석유 터져 나온 오세이지족 보호구역, 미국 서부 오클라호마. 오세이지족이 부자가 된 이 땅에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 ‘어니스트 버크하트’(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나타난다. 오세이지족의 친구로 명성을 쌓은 삼촌 '윌리엄 킹 헤일(로버트 드 니로)'의 사업을 돕기 위해서.
택시 기사로 오클라호마에서의 삶을 시작한 어니스트. 어느 날 그는 ‘몰리 카일리’(릴리 글래드스톤)를 승객으로 만나고, 곧장 사랑에 빠진다. 몰리 역시 어니스트에게 첫눈에 반하고, 그들은 부부의 연을 맺는다.
하지만 그들의 결혼 생활은 이내 난관에 부딪힌다. 윌리엄이 조카를 통해 몰리와 그녀 가족의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으려는 음모를 실천에 옮겼기 때문. 몰리의 어머니와 자매가 하나 둘 죽어 나가는 가운데, 어니스트는 아내와 유산을 두고 잔인한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스코세이지가 스코세이지 하다
<플라워 킬링 문>은 1920년대 오클라호마에서 발생한 오세이지족 살해 사건을 다룬 영화다. 1870년대에 오세이지족은 캔자스 보호구역에서 강제 이주를 당했고, 결국 오클라호마에 보호구역을 매입했다. 이후 1890년대에 오클라호마 보호구역에서는 석유가 발견됐고, 석유 채굴권을 오세이지족 전체가 공유함에 따라 오세이지족은 벼락부자가 됐다.
하지만 오세이지족은 이내 자기 재산을 강탈당했다. 미국 정부가 도입한 후견인 제도 때문. 백인 남성이 오세이지족 은행 계좌를 관리하고, 미국 정부가 석유 로열티를 대신 맡으면서 오세이지족 자본을 노린 범죄가 난무했다. 이 난리통 중에는 백인에게 가족 모두를 잃은 오세이지족 여성의 사연도 있었다. 마틴 스코세이지는 데이비드 그랜의 동명의 논픽션에 기반해 그 비극의 시작과 끝을 차분히 비춘다.
소재만 봐도 <플라워 킬링 문>은 스코세이지다운 영화다. 그는 <갱스 오브 뉴욕>, <택시 드라이버>, <아이리시맨> 등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자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었다. 그들의 흥망성쇠를 통해 미국 역사의 역설을 성찰했다. '아메리칸드림'이 과연 자랑할 정도로 떳떳한지 질문을 던지면서. 이는 아메리카 원주민과 백인의 관계를 다루는 작품이 가장 스코세이지다운 이유이기도 하다. 가장 근본적인 시작점으로 되돌아간 셈이므로.
사랑과 상속의 줄다리기
<플라워 킬링 문>의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오클라호마에 온 어니스트가 몰리를 만나고, 삼촌 빌의 지시 하에서 몰리의 가족을 살해한 후 유산을 차지하는 이야기가 전반부다. 이후 FBI가 등장해서 어니스트와 빌의 범죄 행각을 추적하고 법정에 세우는 이야기가 후반부를 채운다. 이때 스코세이지는 전반부에 힘을 준다. 범죄 스릴러의 쾌감 대신 백인과 원주민의 드라마에 주목한다.
특히 어니스트와 몰리의 멜로가 핵심이다. 어니스트가 몰리를, 몰리가 어니스트를 사랑한 것은 분명하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영화는 두 남녀의 사랑 기저에 다른 감정을 깔아 둔다. 욕망과 두려움이다. 돈을 욕망하는 남편, 그런 남편에 대한 두려움. 부부가 사랑을 지키기 위해 각자 내면의 괴물과 치열하게 싸우는 모습이 3시간 넘도록 반복된다. 영화는 그들이 마지막 선택을 내리는 찰나에 비로소 대미를 장식한다.
더 나아가 영화는 이뤄질 수 없는 부부 관계를 통해 미국이라는 국가의 근간을 드러낸다. 사랑, 욕망, 두려움의 근원에는 '상속'이 있다. 오세이지족의 유산을 상속받겠다는 빌과 어니스트의 야욕. 영화는 그 야욕이 단순히 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이는 지난 세월 스코세이지의 필모그래피를 채운 문제의식과도 일맥상통한다.
'미국'이라는 공동체의 가치를 강조하면서 정작 공동체이자 가족의 일원이 된 사람들을 짓밟는 모순. 그에 힘입어 만들어 낸 '미국'이라는 사회적 자본. 그 자본을 상속받은 지금의 미국까지. 영화는 미국의 자본축적이 피와 불의의 역사였다고 가감 없이 말한다. 그래서일까? 오세이지족 사람들이 만들어낸 꽃과 미국의 첫 번째 성조기가 겹쳐 보이는 마지막 장면은 아름답지만, 처연하다.
미국인도, FBI도 아닌 오세이지족의 눈으로
물론 <플라워 킬링 문> 속 자성의 메시지는 자칫 뻔할 수도 있다. 미국 사회의 모순을 고발하는 작품은 한 둘이 아니니까. 그러나 이 영화의 메시지는 유달리 날카롭게 폐부를 찌른다. 오세이지족의 관점을 빠뜨리지 않기에 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어니스트가 화자인 것과는 별개로, 영화는 범죄자와 형사 사이에서 자칫 가려지기 쉬운 피해자를 조명하고자 노력한다. 그 덕분에 메시지에도 최대한의 진정성이 담겼다.
오프닝이 대표적이다. 영화는 오세이지족 구역의 생활상을 비춘다. 오클라호마에서 석유가 터지고, 부유해진 이들. 양복을 입은 그들은 백인 기사를 거느리며 자동차를 타고, 백화점에서 쇼핑을 즐기며, 골프를 치며 시간을 보낸다. 이 몽타주는 이질적이라서 더 의미심장하다. 필름 속 오세이지족은 다른 미디어에서 흔히 접한, 통념 속에 갇힌 아메리카 원주민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석유라는 행운 덕분에 손에 쥔 부를 미국인다운 방식으로 즐기는 모습일 뿐이니 지극히 자연스럽다. 하지만 논리적 귀결과 달리 이 몽타주는 여전히 이질적이다. 나도 모르게 아메리카 원주민을 '미국인'에서 배제하는 편현합의 발로 대문이다. 이는 스코세이지의 의도처럼 느껴진다. 영화가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 백인들의 익숙한 이데올로기를 파괴하면서 앞으로 들려줄 이야기의 진수를 암시한 셈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영화는 잊혔고, 잊힐 수밖에 없는 오세이지족의 생활상을 가능한 자세히 기록하려 한다. 템포를 과하게 잡아먹는 게 아닌가, 극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인가 싶을 정도다. 예를 들어 오세이지족 언어는 날 것 그대로 영어 자막 없이 삽입됐다. 그들의 장례, 결혼, 유아세례 비슷한 기념 풍습도 스크린 위에 재현된다. 심지어 오세이지족이 믿는 사후세계도 등장한다.
필연적인 호불호
다만 <플라워 킬링 문>은 결코 상업 영화라고 할 수 없다. 영화의 완성도를 끌어올리는 모든 부분이 대중성을 갉아먹기 때문이다. 러닝타임만 해도 그렇다. 3시간 26분에 달하는 분량 덕분에 영화는 어니스트, 몰리, 빌의 변화를 사냥개처럼 포착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 분량 때문에 영화의 접근성은 자연히 높아진다. 후반부에 FBI가 등장하며 템포를 끌어올리는 등 탁월한 완급조절을 자랑하지만, 한계도 분명하다. 스코세이지 영화를 많이 접했다면 전제적인 스토리텔링과 구성, 주제가 익숙하기에 더 지루한 느낌도 있다.
기술적인 측면도 마찬가지다. 와이드 한 촬영법, 롱테이크와 이동하는 카메라 장면 덕분에 인물의 감정선과 영화의 주제에는 힘이 실린다. 다만 그로 인해 고전 영화와 현대 영화가 섞인 느낌도 든다. 자칫 올드할 수 있다는 말이다. 시나리오가 변경됨에 따라 배급권이 파라마운트에서 애플 티비로 넘어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영화를 보고 나면 파라마운트의 결단을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다.
배우들의 연기도 호불호가 갈린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로버트 드 니로는 안정적이다. 다만 충격적이지는 않다. 특히 디카프리오의 경우 본인이 극을 주도할 때 빛나는 배우이기는 하지만, 이번만큼은 <장고: 분노의 추적자> 속 '캘빈 캔디' 같은 역할을 맡는 게 좋지 않았을까 싶다. '어니스트' 역을 선택한 디카프리오 대신 FBI 형사 '톰 화이트'를 연기한 제시 플레먼스의 존재감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래도 조연을 보는 재미는 쏠쏠하다. 누구보다도 '몰리'를 연기한 릴리 글래드스톤이 눈길을 잡아끈다. 사랑과 두려움이 치열하게 싸움을 벌이지만, 그 싸움을 숨기려 최대한 애쓰는 인물을 표정만으로 표현해 낸다. 그 감정선을 따라가기 위해 얼굴을 보다 보면 마치 모나리자 그림을 보는 것처럼 신비롭고 매력적이다.
끝내 기대치를 넘어서는 엔딩
하지만 예상을 벗어나는 엔딩 덕분에 <플라워 킬링 문>의 호불호는 이내 잊힌다. 영화는 남은 이야기를 에필로그 형식으로 보여주려 한다. 주요 인물이 재판 이후 어떤 삶을 살았는지 보여줄 차례이므로. 대부분의 영화는 이 순간을 익숙한 방식으로 처리한다. 실제 자료 화면이나 사진에 자막을 더하는 식으로.
스코세이지는 다르다. 그는 직접 영화에 출연한다. 단순히 모습을 비추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무대 위에 올라 낭독극의 화자가 된다. 감독 본인의 음성으로 인물들의 남은 이야기를 직접 들려준다. 낭독을 통해 영화가 보여준 이야기를 다시 한번 강조하는 듯하다. 피해자들을 위로하고, 지난날을 반성하는 이야기. 앞으로도 같은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시작점을 잊지 않겠다는 이야기.
이에 더해 스코세이지다운 방식으로 영화의 위기에 스코세이지가 대처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영화는 결국 이야기라고. 설령 달라지는 일은 없더라도 이야기를 만들고, 들려주고, 보여주는 게 이야기꾼의 유일한 역할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마블 영화를 테마파크라고 지적하며 서사를 들려주는 '시네마'의 공간이 줄어드는 세태를 비판했던 것처럼. <플라워 킬링 문>의 끝이 어느 때보다도 노장의 진심으로 가득한 마무리인 이유다.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마지막 낭독 덕분에 완성된 영화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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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선하고 발칙한 상상력, <조인성을 좋아하세요>
오늘의 영화는 바로,
신선하고 발칙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영화 <조인성을 좋아하세요>입니다.
ⓒ 네이버 영화
정보
개요 드라마 | 한국 | 19분
감독 정가영
출연 정가영 등
줄거리
영화감독 가영은 조인성을 캐스팅하고 싶다. 아직 시나리오는 없지만.
<조인성을 좋아하세요>의 T.M.I
ⓒ 다음 영화
<조인성을 좋아하세요> 속 조인성 ?
조인성 배우가 캐스팅 된 과정은 영화와 비슷하다. 정가영 감독은 소속사에 시나리오를 보냈고,
조인성 배우가 직접 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출연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게다가 조인성 배우는 영화에
노 개런티로 출연을 했다고 한다.
촬영 날 감독과 통화 하면서 음성을 동시 녹음을 했는데, 조인성 배우가 네 번의 테이크를 가면서 각 테이크마다
다른 애드립을 해줬다고 한다.
"신선하고 발칙한 상상력"
ⓒ 네이버 영화
연출자라면 누구나 꿈 꿔 봤을 상황. 그러한 상상이 현실이 되고, 그 현실이 영화로 실현이 되었을 때,
그 쾌감이 얼마나 컸을까. 영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한 편의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점이 너무 좋았다.
정가영 감독의 신선한 상상력에 더해 발칙한 대사의 향연이 영화의 매력을 배로 늘렸다.
"한정적이지만"
ⓒ 네이버 영화
<조인성을 좋아하세요>를 보면 여러 방면에서 한정적인 요소가 많이 눈에 띄었다.
한정적인 공간, 한정적인 매개체, 한정적인 인물 등,
정가영 감독은 이러한 한정적인 요소에서도 다채로운 영화를 보여주었다.
19분이라는 짧은 시간 속, 원 로케이션을 통해 한 사람의 이야기를 몰입감 높게 전개했다.
"자연스러움"
ⓒ 네이버 영화
영화를 보다 보면 이러한 생각이 들곤 한다. '이거 진짜 연기인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대사, 그리고 그 대사를 하는 연기톤 모든 게 너무 실제 같았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영화 제목처럼 조인성 배우에게 빠져들게 되겠지만,
사실 무엇보다도 정가영 감독의 팬이 될 것이다.
정가영을 좋아하세요
"이런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 짧지만 강렬한 영화를 찾고 있다?
- 상상력이 돋보이는 영화를 찾고 있다?
- 엄마 미소를 짓게 만드는 영화를 찾고 있다?
신선하고 발칙한 상상력이 가득했던!
지금까지 영화 <조인성을 좋아하세요>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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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랩 에디터 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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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4주 차, 최신 씨네 뉴스
많은 사랑을 받았던 픽사의 애니메이션 <코코>가 새로운 속편으로 돌아옵니다.
디즈니 CEO 밥 아이거는 <코코 2>가 현재 픽사에서 제작 중이며, 2029년 개봉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전편과 동일하게 리 언크리치와 애드리안 몰리나가 감독직을 맡을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현재 픽사는 <코코 2> 외에도 <엘리엇>, <호퍼스>, <토이 스토리 5>, <인크레더블 3>, <카 4> 제작 및 개봉을 앞두고 있습니다.<제이슨 본> 프랜차이즈, 넷플릭스로 넘어가나
유니버설 스튜디오가 <제이슨 본> 프랜차이즈의 판권을 잃으며, 현재 다른 스튜디오들 사이에 경쟁이 붙은 가운데,
과연 새로운 주인이 누가 될 것인가에 이목이 쏠리고 있습니다.
스카이댄스, 애플, 넷플릭스가 로버트 러들럼 재단과 접촉하여 판권 인수를 논의 중이며,시리즈의 부활이 목표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맷 데이먼이 다시 주연을 맡을지, 혹은 완전히 리부트될지의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데이빗 레이치 감독 신작, 니콜라스 홀트 출연 확정
<아토믹 블론드>, <스턴트맨>을 연출한 데이빗 레이치 감독의 신작에 니콜라스 홀트가 출연을 확정 지었습니다.
제목 미정의 이 작품은 은행 강도단이 소셜 미디어를 이용해 실시간으로 범죄를 중계하며,경찰과 쫓고 쫓기는 두뇌 싸움을 벌이는 이야기를 다루는 스릴러 영화입니다.
또한 애초 레이치 감독이 내년 촬영 예정이었던 <오션스 일레븐> 시리즈의 신작보다먼저 제작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시드니 스위니, 레딧 원작 영화 주연 맡는다
드라마 <유포리아>로 스타덤에 오른 배우 시드니 스위니의 차기작 소식입니다.
고등학교 영어 교사 조 코트(Joe Cote)가 인터넷 사이트에 올린 단편 소설을 워너 브라더스가 영화화한 프로젝트며,<플라워 킬링 문>, <포레스트 검프> 등을 집필한 에릭 로스가 각색을 맡은 작품입니다.
원작은 한 젊은 여성이 10년 전 실종된 18세 소녀인 척하며 그 가족을 속이고,결국 그들에게 범죄를 저지르려 한다는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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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벽은 문이다.
이 글은 2023년 11월 1일 개봉 예정인 영화 [앵그리 애니]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글을 퍼가거나 인용 시 출처를 반드시 밝혀주세요.
말하기 힘든 것들을 입에 담아야 할 때가 있다. 게다가 그 주제가 금기에 가까워 혼잣말하는 것조차 천둥같이 울릴까 봐 움찔할 때가 있다.
영화 [앵그리 애니] 속 여성들의 고개도, 목소리도 한껏 바닥에서만 맴돌게 하는 그 "힘든 것"은 바로 낙태이다. 시행하지 않으면 현재 자신의 삶을 포기해야만 하는 것은 틀림없지만. 이를 향한 암묵적인 동의에도 불구하고 쉽게 입술을 열 수 없게 만드는 사회적 분위기는 그녀들에게 죄책감이라는 이름의 두꺼운 코트까지도 어깨 위에 하사한다.
그들의 굽은 어깨에 손을 얹어준 것은 생소하기 짝이 없는 MLAC(임신중지와 피임의 자유를 위한 운동) 단체였다. 뜨개질바늘로 이뤄진 애니의 이전 낙태가 잘못되었으며 안전하게 이뤄져야 할 의무가 있다고 다독여주는 통에. 애니는 걷잡을 수 없이 자신을 휘감던 두려움을 잠시 내려놓고 따스한 손길에 마음을 녹인다.
여전히 차가운 수술대 위에서 두 번째 낙태 수술을 끝낸 애니는 안도감과 후련함을 담은 눈물을 흘리며 그제야 미소 짓는다. 마치 축배를 올리듯 MLAC운동가들이 건넨 물을 마시며.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을 것이다
자신의 인생이 아주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방향을 바꿀 것이라고는. 그리고 그 변화가 시작되는 계기가 자신처럼 임신 중절 수술을 받다 사망한 자신의 이웃 때문이라는 것도. 자칫 자신의 죽음일 수도 있었던 그녀의 죽음 앞에서, 황망히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느꼈던 애니는 좌시하지 않기로 한다. 아직 두려워 완전히 쳐다볼 수는 없지만. 자신의 등 뒤에서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저 벽을.
애니, 벽을 바라보다
사진 출처:씨네랩/다음 영화
애니는 고개를 빤히 들어 자신이 마주한 벽을 바라보았다. 등 뒤의 두려움을 몰아내고 온전히 벽을 쳐다보기 까지도 꽤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승리한다 했건만. 큰 용기를 가지고 마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벽은 바람 한 조각조차 통과하지 못할 것처럼 매정해 보였다.
자신이 직접, 그리고 혼자서 벽을 부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이 문에 잔뜩 끼어 있는 이끼라도 제거하지 않고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이 문득 들었다. 마치 자신이 중절 수술을 받을 때 손을 꼭 잡고 노래를 불러주었던 운동가처럼. 애니는 MLAC를 찾아오는 여성들의 불안한 마음에 자신의 투박한 손을 조용히 얹어주기로 마음먹었다.
임신 중절을 원하는 그녀들은 하나같이 임신이란 문제에 있어서 가장 불안한 주체였으며. 죄책감마저도 오롯이 홀로 짊어진 채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수많은 자기 검열을 뚫고 MLAC단체의 문턱을 어렵게 넘어섰다 해도, 그녀들은 최후의 순간에 종교적인 문제를 이야기하며 죄악이라 하거나, 그냥 낳겠다며 현장을 떠나기도 했다.
그러나 애니는 그녀들을 비난하지 않았다. 겁쟁이라며 깎아내리지도 않았다. 이 모든 모습은 애니가 여성운동에 참여하기 전의 모습과도 정확하게 일치했고. 수없이 많은 여성들의 이런 모습이야 말로 자신이 마주해야 할 벽이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이토록 간단하고 별 것 아니었냐는 말과 함께 수술 후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는 여성을 보며. 애니는 깨닫는다.
결국 자신을 비롯한 모든 여성들을 떨게 했던 것은. 이 벽자체가 아니라 벽보다 더 큰 두려움을 자아내는 덕지덕지 붙은 이끼에서부터 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끼 따위 제거해서 무엇이나 할 수 있으려나.라는 일말의 의심마저도 말끔히 지운채. 애니는 이끼가 사라져 본모습을 볼 수 있게 된 문과 눈을 맞추며 되뇔 수 있었을 것이다.
바꿀 수 있다.라고.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해야만 할 때
사진 출처:씨네랩/다음 영화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벽을 똑바로 바라본다 하여 무너져 내린다면. 목표를 가로막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 세상일 테니까.
무엇보다 영화 속 여자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은 그녀들의 남편들의 모습과도 같았다.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묻지도, 그렇다고 알아채려는 노력도 하지 않은 채 지레짐작으로 새 모카포트를 선물하는 무심함. 자신의 아내를 감시하고 폭력을 행사하며 마음대로 휘두르려 하는 눈먼 강경함. 그녀들이 하는 일 따위가 세상을 바꿀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 무시에 더불어 여전히 수술의 주체인 여성들이 조금은 논의에서 빠져있는 듯한 안일함까지.
출산과 더불어 또 한 번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는 수술 앞에 싸우면서도. 애니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은 이런 양립할 수 없으면서 자신의 옆에 악착같이 붙어 존재하는 것들이 일으키는 마찰을 감당해야 했다.
비록 모두를 위한 최선의 결정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영화 속 애니의 선택에 대부분 박수를 보낼 수는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선택에 후회하지 않았으며, 욕심을 내지 않았다. 흔히 이런 상황에서 비유되곤 하는 "외줄 타기"같은 현실에서. 애니는 이 좁고 험난한 길을 끝까지 걸어가기 위해 떨어뜨려야 할 것이 있다면 기꺼이 손에서 놓아버렸다. 자유낙하하며 자신과 멀어져 가는 것들에 대한 소중함만을 마음속에 꼭 안은 채. 그녀는 다시 턱을 들어 길을 걸었다.
또한 이 과정 속에서 그녀는 알게 되었다. 손에 쥐어진 것이 불필요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잘만 이용한다면 자신의 위태로움을 좀 더 잘 들여다보고 자세를 바로 잡을 기회가 된다는 것을.
마치 벽이 와르르 무너지기만 해야 하는 존재가 아닌. 문이 되어 기꺼이 열고 다음 세계로 입장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같은 식사, 다른 마음.
사진출처:씨네랩/다음 영화
영화 속 인물들은 완벽하지 않다.
의무감에 불타올라 화염병을 던지지도 않고. 당장 국회로 뛰어들어가 감정으로 호소하며 큰소리치지도 않는다. 비장한 음악을 깔며 어떤 이의 희생 앞에 눈물을 짜내지도 않는다. 누군가를 신격화해서 그 사람의 이름이 지구 밖에서도 들릴 것처럼 칭송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현재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고. 자신의 생각을 용기 내어 남들 앞에서 꺼내 입 밖으로 내뱉는다.
또한 온전히 옳은 인물도 존재하지 않는다.
극의 중간중간 들어차 있는 토론들과 이야기를 들으면서.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이 반드시 존재하고. 그녀들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잠시 영화와 거리를 두게 되는 장면들도 있다. 옳음이라는 큰 갈래에서는 동의하지만, 소소한 것들에서 부딪치는 장면들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영화는 소위 "극적인"요소들을 배제함으로써 현실감을 더하고. 현실 속에서 극복해야 하는 진짜 문제들을 냉정하게 바라본다. 또한 그 과정에서 인물들에 대한 미움이나 반감이 생기기보다, 완벽하지 않고 흔해 빠진 "애니"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도 현 문제에 대해 화낼 수 있고 변화할 수 있으며. 연대를 형성해 힘을 보탤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영화의 메시지를 가장 잘 나타내는 장면을 꼽으라 한다면. 임신 중절수술을 마친 후 함께 파스타를 나눠먹는 부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언뜻 영화 [친절한 금자 씨]에서 거사 후(?) 케이크를 나눠먹는 장면을 연상케 하기도 했다. 앵그리 애니의 식사 장면과 비교해 보았을 때. 가장 큰 다른 점이라 한다면. 자율성과 음식을 먹는 대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박찬욱 감독님은 그 장면이 제사 후에 음식을 나눠먹는 의식 같은 장면이라고(+그 케이크 혈액으로 만든 거 아님) 말씀하셨다. 그러나 제사에(?) 참여한 이들에게는 자율성이 조금은 배제되어 보였다. 약간은 입을 닫게 하기 위한 장치도 있었으며 분노를 쏟아내고 난 뒤에 다가온 식사에서도 살아남은 자 들을 기쁘게 하는 식사는 아니었다.(영화가 나쁘다는 게 아님.)
그러나 이 영화에서의 식사 장면은 누군가를 기리는 것이 아닌 앞으로 자신을 위해 든든한 한 끼를 함께 한다는 점. 그리고 자원한 사람들이 모여 이뤄져 있다는 점에서 조금 더 희망적이고 든든한 식사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파스타 자체는 맛없어 보였다. 제발 뭘 좀 많이 넣어서 먹으라고.)
아주 작고 힘없어 보이는 연대에서 시작된 그들의 웃음이. 조금 더 확대되어 더 많은 사람을 위한 길이 되기를 기대하게 되는 장면이었다.
마치면서
세이브 박지원 대표님, 씨네 21 김소미 기자님
GV에서도 나온 이야기이지만.
나 역시 애니가 마지막으로 했던 선택을 바라보며 생각할 것이 많아졌다.
과연 정규 의료인(으로 추정)이 되는 길을 걷는 것이. 근본적으로 애니가 가지고 있던 불만이나 두려움, 혹은 화를 누그러뜨릴 수 있게 될 가장 확실한 방법일까. 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은 것이 참 많았다.
물론 잘 해낼 것이다.
애니는 영화 속에서 가장 입체적인 인물이며, 과격하지는 않지만 적극적으로 스스로의 운명을 바꿔나가기를 주저하지 않은 인물이니까. 살아남기 위해 앞만 보고 자전거 페달을 밟던 그녀는 온데간데없고, 이제 주위를 둘러보며 자전거를 타는 그녀를 보며 울컥하고 눈물이 날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런 불안하지만 아름다운 시작을 앞둔 애니가, 자신을 바꾸고 움직이게 만들었던 계기만큼은 영원히 잊지 않았으면 했다. 결국은 조금 더 장기적으로 옳은 선택을 조금 더 많이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또 다른 애니들을 탄생시킬 수 있게 되기를.
또한 애니에게도 그러했듯이.
1970년대와 비교했을 때 별반 달라진 것이 없는 현실의 모든 벽들이 다시 한번 문이 되기를 빌어보았다.
[이 글의 TMI]
1. 토마토카레에 꽂혀서 토마토 멸종시키는 중
2. 군고구마도 덩달아 씨가 마르는 중
3. 파프리카, 당근도 코끼리처럼 먹어치우고 있다.
4. 다들 감기 조심하세요. 저처럼.(걸렸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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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씨네랩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영화 관람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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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위한 마음, <풀타임>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풀타임 Full Time, 2021
프랑스 / 88분
감독: 에리크 그라벨
나를 위한 마음, <풀타임>
<풀타임>은 일상의 반복을 외피이자 내피로 효과적으로, 또 효율적으로 사용한다. 이혼 후 두 아이를 홀로 키우는 엄마, 쥘리의 출퇴근이 이야기의 뼈대이자 전부지만, 그것이 영화가 내놓은 모든 것은 아니다. 여러 가지 요소를 섞어 복잡하게 느낄 수 있지만, 자세히 보면 굉장히 간단한 방법으로 명확한 이야기를 멈추지 않고 이어간다. 망설임 없이 표면 서사와 심층 서사를 능숙하게 넘나드는 쥘리의 일상은 환경, 온도 등에 따라 몸의 색을 바꾸는 카멜레온처럼 다가온다. 두 서사 사이의 간격을 자기 마음대로 조절하기도 하는데, 그로 인해 너무나 평범해 쉽게 지나치기 쉬운 하루를 역동적인 사건으로 느끼게 하고, 그 결과 별거 아닌 것을 한순간에 마음 쓰게 만든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아이들을 옆집 할머니에게 맡기고 기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 뛰는 쥘리가 특별한 지점 없이도 관객의 마음을 졸이게 하는 건,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출처: 영화 <풀타임> 스틸컷 (다음)
영화는 도로를 뛰고 있는 것 같은 쥘리의 거친 숨소리로 시작한다. 하지만 그녀는 깊은 잠에 빠져있다. 꿈에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알람 소리로 눈을 뜬 순간부터 쥘리는 숨 돌릴 틈 없이 움직인다. 직장에 늦지 않기 위한 뜀박질로 시작해 집에 무사히 돌아오기 위한 뜀박질로 끝나는 하루. 스펙터클한 일상을 더 완벽하게 완성하는 건 따로 있다. 시끄러운 파리의 소음만큼이나 가슴을 갑갑하게 만드는 쥘리의 문제들. 교통을 마비시킨 대규모 파업과 갚지 못한 대출 빚, 옆집 할머니의 직언, 연락 부재중인 전남편, 사랑하는 아들의 파티 준비까지, 쥘리는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쳇바퀴 안에서 바쁘게 살고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자발적으로 수많은 문제에 하나를 더 추가했다는 점이다. 쥘리는 오래전부터 직장 상사 몰래 이직을 꿈꾸고 있었다. 이미 5성급 호텔에서 동료 직원들을 평가할 수 있는 고참 룸메이드로 일하고 있지만, 마케팅 회사를 더 원한다. 호텔 룸메이드 처우보다 조건이 좋은 건 당연하고, 궁극적으로 과거 잘했던 일을 늦지 않게 다시 하고 싶기 때문이다. 더 나은 환경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 더 좋은 조건에서 자신의 능력을 펼치고 싶은 마음, 더 확실하고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 아이들을 키우고 싶은 마음. 쥘리의 강력한 동기는 호텔 룸메이드란 현실 속 직업을 위태롭게 만들기 시작한다.
출처: 영화 <풀타임> 스틸컷 (다음)
우린 때때로 앞에 산적한 일들을 해결하기 위해 중요한 일과 진짜 중요한 일을 나누곤 한다.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모두 잘 해낼 수 없을뿐더러 곰곰이 생각해보면, 대부분 일의 순서를 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여기면 될 일이니까. 난제 역시 다르지 않다. 그러나 쥘리는 자신의 문제에 순서를 배정하지 않는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다. 사람들이 말하는 순서가 사실은 선택이란 단어를 감추기 위해 쓴 용어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다. 쥘리에게 선택은 있을 수 없다. 그녀의 현실에서 선택은 사치다. 어쩔 수 없는 선택조차 허용되지 않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사건들은 거미줄처럼 연결되어서 하나를 포기하면 전부를 포기해야 한다. 달리는 열차에 손을 뻗어 맘에 안 드는 열차 칸을 뜯고도 기차를 움직이게 할 수 있는 나이는 이미 한참 지났으니까.
그녀를 둘러싼 사건들은 죄다 단기간에 확실한 답을 찾기 어려운 일들이었다.
쥘리는 참고 견디는 일에 익숙하다. 익숙함에 젖어서 다른 일을 게을리한다는 얘기가 아니라 자신의 문제를 피하지 않고 직면하는 것에 능숙하진 않지만 최선을 다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그녀에게 익숙함은 현실을 버티게 하는 힘이다.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교통 파업은 교통마비의 원인이지만 쥘리에겐 주어진 환경일 뿐이다. 자연재해와 같아서 남 탓은 불가능하다. 물론 교통마비 현상이 쥘리의 고통을 가장 극대화하고 즉각적으로 보여주지만, 쥘리의 적대자는 아니다. 그녀를 위태롭게 하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들이며 자기 자신이다.
출처: 영화 <풀타임> 스틸컷 (다음)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두 아이를 돌봐주는 옆집 할머니의 오지랖(주제넘은 말)에 성심성의껏 대답하고, 그만두겠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그녀에게 꽃다발을 선물한다. 하루는 부탁하다가 다른 날엔 할머니의 말에 동의하는 척하고 또 다른 날엔 애처롭게 애원한다. 양육비를 보내지 않는 전남편에게 매일 전화하면서 자괴감과 무력함을 느끼지만 내일이 되면 다시 그에게 전화해 음성메시지를 남긴다. 면접을 보러 다니는 와중에 아들의 생일 파티를 위한 준비를 잊지 않고 카풀과 차 렌트로 출퇴근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능하게 한다. 마케팅 최종면접을 위해 그동안 쌓아놓았던 호텔 룸메이트 마일리지도 거침없이 사용한다. 내가 이렇게 몇 년간 헌신했으면,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란 심보로 말이다. 그 일이 사실상 그녀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나쁜(?) 일이다. 가능한 모든 힘을 쥐어짜고 기용할 수 있는 자신의 인적자원을 이용한 결과, 쥘리는 호텔에 출입하지 못한 채 길거리에서 일자리를 잃는다. 과거 나를 위해 했던 일들이 현재 나의 발목을 잡는 원인이 됐다.
한 번쯤은 말도 안 되는 사건을 벌이거나 난동을 피우며 해결되지 않는 화를 표출할 법한데, 그녀는 묵묵히 벌어진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 집중한다. 교통마비가 끝나기를 견디는 것처럼, 옆집 할머니가 마음을 바꾸길 기다리듯이, 최종면접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바라듯이, 쥘리는 끝까지 자신에게 올 긍정적 신호를 기대한다. 그 모습이 너무 간절해 안쓰러워 보이지만, 상관없다. 우린 그녀를 당연하게 응원하고, 쥘리는 모두가 예상했듯 합격 소식을 들을 예정이기 때문이다.
출퇴근이 전부인 <풀타임>을 단단하게 지탱하는 힘은 쥘리를 향한 관객의 진한 공감에 있다.
출처: 영화 <풀타임> 스틸컷 (다음)
사실 달라지는 현실은 없다. 여전히 쥘리의 출퇴근은 난항일 거다. 아니 이젠 그 안전한 직장을 잃지 않기 위해 그전보다 훨씬 빨리 일어나 뛰어다녀야 할 것이다. 아이들을 봐줄 사람도 찾아야 하고, 답답한 전남편에게 똑같은 음성메시지를 남기겠지. 하지만 쥘리는 끝까지 파업을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전남편과 직장 중간에 위치한 파리 외곽에서 꿋꿋하게 두 아이를 키웠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니까. 쥘리는 보통 사람들을 대변한다. 적당히 합리적이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이성을 가진 사람이다. 나아가 가끔은 과한 요구도 나를 위해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보통 인간이다. 개인적인 문제들이 곪아 터지면 사회적인 문제가 된다는 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것이 언제든 나의 현실이 될 수 있고, 사회 문제로 대두됐다 해서 그 고통이 말끔하게 해결될 수 없음을 본능적으로 인지하고 있다.
처음부터 그녀는 우리처럼 살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으로, 보통의 삶을 치열하게 사는.
단단하게 잡고 있는 것들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나만 힘들고 나만 어려운 세상에 살고 있다며 더는 나오지 않는 한숨을 토해내려 애쓰는 날도 있다. 쥘리의 일상이 그랬다. 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넘어지거나 고꾸라지지 않는다. 그녀는 '나'를 위한 삶을 살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현실에 맞춰 사는 게 아니라, 최선을 다해 자기가 원하는 인생의 길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희망적인 결실까지 얻었으니 해피엔딩은 당연한 결과다. 평범함이 위대함이 되는 건 쉽다. 물론 아찔하기도 하지만, 포기하지 않을 용기를 갖게 한다. <풀타임>이 시작부터 끝까지 관객과 함께 쥘리를 달리게 한 건 그 대단함에 숨어있는 힘을 눈앞에 보여주기 위함이다.(영화 내내 들리는 소음과 어지러운 카메라 무빙도 같은 목적을 위해 달려왔다.) 따라서 첫 장면부터 관객의 무관심을 관심으로 바꾸는 힘엔 조금의 다급함도, 조급함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변화무쌍한 현실을 견디는 나에게 작은 위로와 위안을 전달한다. 그리고 난 그게 참 반가웠다.
출처: 영화 <풀타임> 스틸컷 (다음)
자연스럽게 쥘리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이 곧 나를 위한 마음이 될 때, 마침내 영화는 그녀를 멈춰 세운다.
멈추지 않고 돌아가는 놀이기구 앞에서 새로운 출발을 앞둔 쥘리의 모습.
홀로 멈춰 있지만, 그녀는 이미 뛰고 있다.
또다시 자신이 가진 시간을 전부 다 꺼내놓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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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첫째 주 극장 개봉 & 예정작
2024년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2025년의 첫 시작을 여는 영화들을 소개합니다!
금주에는 한국 영화 대작 <보고타: 마지막 땅의 기회>부터 북미 개봉 첫 주만에 6,200만 달러를 벌어들인 <수퍼 소닉3>, 4K로 돌아온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불후의 명작 <밀레니엄 맘보>, 믿고 보는 제작사 A24의 대작 <시빌 워: 분열의 시대>까지!
2025년에도 극장에서 만나요!밀레니엄 맘보
Millennium Mambo개요: 드라마 | 대만, 프랑스 | 105분
감독: 허우 샤오시엔
주연: 서기, 고첩, 투안 춘하오, 첸 이수안, 타케우치 준
개봉: 2024.12.31.
배급: ㈜에이유앤씨, (주) 하이스트레인저줄거리
그녀는 하오하오와 헤어졌지만 그는 늘 그녀를 찾아냈다. 주술이나 최면에 걸린 것처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녀는 늘 돌아왔고 스스로 다짐했다. "은행에 있는 50만 대만달러를 전부 써 버리면 그를 영영 떠날 거야"
그녀는 클럽에서 잭을 만났다. 잭은 항상 그녀를 데리고 다녔고 그녀를 가장 친한 친구처럼 대해 줬다.
이 일은 10년 전인 2001년의 일이었다. 세계는 21세기를 맞이했고, 새로운 밀레니엄을 축하했다.보고타: 마지막 기회의 땅
Bogota: City of the Lost개요: 범죄 | 대한민국 | 107분
감독: 김성제
주연: 송중기, 이희준, 권해효, 박지환, 조현철, 김종수
개봉: 2024.12.31.
배급: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줄거리
희망 없는 인생, 기회는 바로 그 곳에 있었다. 1997년 IMF의 후폭풍을 피하지 못한 국희(송중기)와 가족들은 지구 반대편 콜롬비아 보고타로 향한다. 낯선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한인 상인회의 권력을 쥔 박병장(권해효) 밑에서 일을 시작한 국희.
성실함으로 박병장의 눈에 띈 국희는 박병장의 테스트로 의류 밀수 현장에 가담하게 되고, 콜롬비아 세관에게 걸릴 위기 상황 속에서 목숨 걸고 박병장의 물건을 지켜내며 박병장은 물론 통관 브로커 수영(이희준)에게도 강렬하게 존재감을 각인시킨다.
곧 수영이 국희에게 위험한 제안을 하고, 이를 눈치 챈 박병장 또한 새로운 계획을 세우며 국희를 시험에 들게 한다.
본인의 선택으로 보고타 한인 사회의 판도를 바꿀 수 있음을 체감한 국희는 점점 더 큰 성공을 열망하게 되는데…수퍼 소닉3
Sonic the Hedgehog 3개요: 애니메이션 | 미국 | 110분
감독: 제프 파울러
주연: 짐 캐리, 벤 슈와츠, 제임스 마스던, 티카 섬터, 이드리스 엘바, 키아누 리브스
개봉: 2025.01.01.
배급: 롯데엔터테인먼트줄거리
더 빠르고 더 강해야만 한다!
초특급 히어로 소닉 VS 사상 최강의 라이벌 섀도우의 수퍼 빅 매치!
너클즈, 테일즈와 함께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던 초특급 히어로 소닉. 연구 시설에 50년간 잠들어 있던 사상 최강의 비밀 병기 "섀도우"가 탈주하자, 세계 수호 통합 부대(약칭 세.수.통)에 의해 극비 소집된다.
소중한 것을 잃은 분노와 복수심에 불타는 섀도우는 소닉의 초고속 스피드와 너클즈의 최강 펀치를 단숨에 제압해버린다. 세상을 지배하려는 닥터 로보트닉과 그의 할아버지 제럴드 박사는 섀도우의 엄청난 힘 카오스 에너지를 이용해 인류를 정복하려고 하는데…
초특급 히어로 소닉 VS 사상 최강의 라이벌 섀도우!
전 세계를 파괴하려는 섀도우를 막기 위한 파워업 액션 어드벤처가 시작된다!시빌 워: 분열의 시대
Civil War개요: 액션 | 미국 | 109분
감독: 알렉스 가랜드
주연: 커스틴 던스트, 케일리 스패니, 와그너 모라, 스티븐 헨더슨, 제시 플레먼스, 닉 오퍼맨
개봉: 2024.12.31.
배급: (주)마인드마크줄거리
세상이 둘로 갈라졌다. 당신은 어느 편인가?
극단적 분열로 역사상 최악의 내전이 벌어진 미국. 연방 정부의 무차별 폭격과 서로를 향한 총탄이 빗발치는 상황 속에서 기자 ‘리(커스틴 던스트)’와 ‘조엘(와그너 모라)’, ‘새미(스티븐 핸더슨)’, 그리고 ‘제시(케일리 스페니)’는 대통령을 인터뷰하기 위해 워싱턴으로 향한다.
내 편이 아니라면 바로 적이 되는 숨 막히는 현실, 이들은 전쟁의 순간을 누구보다 생생하게 마주하게 된다.이것은 영화가 아니다. 진짜 공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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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F 데일리] 고립과 정박, 그러나 실재
DIRECTOR. 루루 헨드라(Loulou HENDRA)
CAST. 셰니나 시나몬(Shenina CINNAMON), 아르스웬디 베닝 스와라(Arswendy BENING SWARA), 앙가 유난다(Angga YUNANDA), 유수프 마하르디카(Yusuf MAHARDIKA) 외
PROGRAM NOTE.
마이는 모든 것을 잃었다. 그리고 지금은 바다 위에 부유하는 허름한 수상가옥에서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 오래전 땅에서 가족과 함께 살았던 다약 원주민인 그녀는 광산 개발로 인해 땅을 빼앗기고 한 노인에 의해 구조되어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부모님도 잃고 친척들과의 연락도 끊기게 된다. 십 년 넘게 바다 위에서 생존하지만 뭍에는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땅에 발이 닿기만 해도 혼절해버리기 때문이다. 위험하고 불길한 장소가 돼버린 땅이지만 그녀는 땅과 그 위의 생명들을 그리워한다. 낡고 무너져가는 집이 언제까지 물 위에서 버텨줄지도 알 수 없다. 인도네시아의 신예 루루 헨드라 감독의 <생존자의 땅>은 트라우마에 갇힌 인간의 몸부림과 내면적 성장에 대한 영화적 고찰이다. (박성호)
감독은 탄광 지역 개발로 삶이 불안해진 인도네시아의 한 도시를 보며 이 이야기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자마자 불안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갈지 궁금해졌다. 영화는 소음에 가까운 거대한 기계음만 들어간 까만 화면으로 시작해, 이내 기울어진 물 위의 집을 보여주며 우리에게 그 불안과 그에 맞서는 인간의 힘을 세밀히 흘려 보낸다. 물건들이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는 집을 차곡차곡 정리하는 마이와 할아버지의 노력으로.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대다수의 한국인은 자신이 섬에 속한 존재가 아님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한 면이 막힌 반도에서의 삶은 이따금 섬의 생활을 그려보게 하는 측면이 분명 있지만, 온전히 바다에 둘러싸인 섬에 사는 삶과는 분명 감각이 다르다. 여기에 재해처럼 예기치 못하게 찾아오는 일들까지 더해지면 불안은 배가된다.
심지어 이 영화의 주인공 마이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물러난 곳에 있다. 땅을 밟으면 코피를 쏟으며 기절하는 마이의 증세는 심리적 사유 외로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영화는 이러한 증세가 찾아오기까지 마이의 삶에 있었던 굴곡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이따금 대화에서 드러나는 할아버지의 삶과 마이 부모님의 죽음 이야기를 통해 막연하게 짐작하게 할 뿐이다. 확실한 건 현재 마이가 거의 유령에 가까운 존재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른 인간들이 쉽고도 자연스럽게 하는 행위에 제약을 얻은 존재.
그 때문에 마이의 집은 물 위에 배로 떠올린 곳이다. 기본적으로 고립을 특성으로 하는 공간이다. 키우는 닭 또한 흙 없이 갑판 위에 뿌린 모이를 쪼는 것밖에 할 수 없고, 많지 않은 마이의 대사는 대부분 할아버지를 향해 집에 대한 불안이나 욕구를 표현하는 내용으로, 거칠고 짤막하게 구성된다. 마이의 세계는 말로 재구성되는 양이 많지 않다.
할아버지 친구의 손자이자 마이에게 계속해서 친절한 손을 뻗어 오는 유스, 인도네시아의 군사문화 잔재의 기운이 드러나는 제복을 입고 외부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라와, 두 사람을 만날 때에도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마이의 욕구는 단순하다. 다친 물소를 돌보고 싶고, 땅을 밟고 싶다. 이외에 대사로 발화되지 못한 마이의 마음들은 배를 타고 나가서 만날 수 있는 고목에 속삭임으로 전달된다.
고목 옹이에 입을 대고 마음을 전하는 마이는 결국 뭍의 존재들을 믿지 말라던 할아버지의 손녀다. 조상을 향한 할아버지의 기도는 비록 원하는 방향으로 응답된 적이 없지만, 조상들이 자신의 언행을 지켜보고 있고 그 결과에 따라 현실에 손길도 미치고 있다고 믿는 마음 또한 실재(實在)를 중시하는 마음을 드러낸다. 물소의 주인이 누구인지 이야기할 때 사진을 보여주는 라와와 달리, 실재만을 믿고 증거로 채택하는 유스 또한 같은 할아버지와 같은 세계관을 공유한다.
그래서일까? 이들을 땅 너머로 몰아낸 자들의 존재는 영화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 탄광 회사는 두어 장면을 제외하면 말 속에서만 존재하고, 영화는 그들을 묘사하는 데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다. 실재를 믿는 사람들의 영화에 실재하지 않음으로써 탄광 회사의 위치는 명확해진다. 그리고 더더욱 기계적이고 비인간적인 존재감을 갖게 된다. 마이와 할아버지가 처한 답답한 고립과 정박의 상황을 그들은 알지도 못한다. 검은 화면에 기계음만 들어가 있던 첫 장면과, 바로 이어진 마이의 집 장면의 의미가 더욱 깊어진다.
사진으로 증거를 삼는 라와, '자기 인생은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면서 할아버지의 결정은 들어주지 않는 삼촌의 존재는 마치 그 탄광 회사의 그림자 같다. 자기 이득을 위해 말을 이리저리 가져다 붙이고, 실재하는 것을 직면하기보다는 말이나 사진으로 재구성된 것들을 믿고 싶어 한다. 얼핏 보면 합리적이고 무고해 보이는 선택들이지만, 이 선택들이 누군가를 땅 끝으로, 땅 너머로 몰아내고 있음을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영화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다. 탄을 가득 실은 거대한 콘테이너 배가 스크린을 가로지를 때, 그 앞에 작은 조각배를 띄우고 두 다리 단단하게 선 사람의 뒷모습이다. 마치 이 영화 자체 같은 장면이었다. 환상의 악기 연주와 아름다운 춤처럼, 이 영화처럼, 불안을 흩뿌리는 탐욕에 맞서 고립되고 정박된 존재들은 늘 유약하다. 그러나 인간적이고, 그래서 아름답다. 고립되고 정박되었어도 이들은 두 다리로 여기에 실재한다. 현실 속의 마이와 같은 존재들이 어디 있는지, 나는 또 어디에 있는지, 묵직한 질문을 던져주는 영화였다.
10/04 16:00 영화의전당 소극장 (상영코드 078)
10/05 10:00 CGV센텀시티 3관 (상영코드 157)
10/09 10:00 CGV센텀시티 7관 (상영코드 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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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노웨어 스페셜> 메인 예고편
서른네 번째 생일을 맞은 창문 청소부 ‘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그에게는 마지막으로 할 일이 있다.
바로 네 살짜리 아들 ‘마이클’에게 새로운 부모를 찾아주는 것.
세상에 혼자 남을 아이를 위해 ‘존’은 특별한 부모를 찾는 여정을 시작한다.
“아직 어리지만, 말도 잘 듣고 예절도 잘 지켜요.
내 아이를 키워줄, 새 부모를 찾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