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3-10-27 18:25:20
완벽주의자 킬러의 차가운 복수가 슬픈 이유
넷플릭스 <더 킬러> 리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프랑스 파리에서 암살 목표물을 감시하는 '킬러(마이클 패스밴더)'. 자는 시간도, 음식도, 심지어 심박수까지 철저히 통제하며 암살 대상을 기다리던 그는 예상치 못한 변수로 인해 타깃을 저격하는 데 실패한다.
처음으로 임무에 실패한 나머지 극도로 당황하며 간신히 은신처로 돌아간 킬러. 그러나 그 사이에 킬러의 '아내'(소피 샤를로치)는 보복을 당해 병원에 입원하고 만다. 이에 그는 아내를 공격한 두 명의 암살자 '짐승'(살라 베이커)과 '전문가'(틸다 스윈튼), 공격을 주도한 '변호인'(찰스 파넬)과 '의뢰인'(알리스 하워드)에게 복수하기로 마음먹는다.
즉시 여느 때처럼 냉철한 계획을 실천에 옮기는 킬러. 그러나 이번만큼은 완벽주의자 킬러도 뭔가 다르다는 걸 알아차린다. 그가 그 어느 때보다 심리적으로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기 때문.
데이비드 핀처의 노르딕(?) 누아르
데이비드 핀처가 12번째 장편 영화 <더 킬러>로 3년 만에 돌아왔다. 이번에도 넷플릭스의 손을 잡았다. 프랑스 작가 알렉시스 놀렌트의 그래픽 노블 원작을 <세븐>의 각본가 앤드류 워커가 각색했다. 무려 20여 년 전부터 마음에 둔 작품이라 하는데, 그 의지에 상응하는 결과물이 나온 듯하다. 베니스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됐고, 제80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됐으며,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관객을 만났다.
<더 킬러>는 여러모로 의외의 영화다. 핀처의 첫 누아르 영화라는 점이 새삼스럽다. 낯설기도 하다. 누아르 영화치고 전체적으로 건조하다. '킬러'는 심리적으로 좀처럼 동요하지 않는다. 차갑기도 하다. 킬러의 복수극을 5개 챕터로 나누어 보여줄 정도로 계획적이다. 그러다 보니 <조디악>, <나를 찾아줘>에 비해 임팩트가 약하다. 화면이 전환되는 몇몇 순간을 제외하면 핀처에게 기대하는 현란한 편집 솜씨도 부각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중요한 내용은 언제나 와플 사이에 감춰져 있기 마련이다. 핀처가 감정을 분출시키지 못하는 감독은 아니니, 왜 애써 감정선을 숨기려 하는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 건조함과 냉정함 사이의 행간을 들여다보면 핀처의 노림수는 이내 모습을 드러낸다. 답은 간단하다. 소설 같다. 비록 프랑스 작가의 원작을 영화화했지만, 마치 한 편의 북유럽 소설 같다. 더 구체적으로는 데이비드 핀처만의 노르딕 누아르에 가깝다.
관건은 암살 작전이 아닌 암살자
물론 <더 킬러>의 주인공은 탐정도 경찰도 아닌 암살자다. 북유럽도 배경이 아니다. 파리, 도미니코 공화국, 뉴욕 등 다양한 장소가 나오지만 북유럽은 없다. 그럼에도 <더 킬러>에서 노르딕 누아르의 그림자가 보이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영화의 톤과 매너 때문이다.
우선 사건이 아닌 인물 중심이라는 특징이 눈에 띈다. 노르딕 누아르에서는 셜록 홈즈 같은 뛰어난 탐정이 없다. 평범한 경찰이 주인공이다. 형사의 한계와 고충. 경찰 시스템과 사법 제도의 한계. 가해자와 피해자의 과거와 심리가 얽혀가면서 비로소 사건을 보여준다. <더 킬러>도 마찬가지다. 암살 작전은 중요하지 않다. 킬러가 죽이려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를 고용한 고객의 목적은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핵심은 암살자다. 킬러의 내레이션이 빈 공간을 차지한다. 파리에서 암살 작전을 준비하는 챕터 1이 대표적이다. 이 챕터에서는 킬러 외에 다른 목소리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살인이 갖는 의미. 암살을 하기 위해 필요한 철칙과 조건들. 때로는 냉소적이고 궤변 같기도 한 그의 상념으로 가득하다. 마이클 패스밴더의 킬러를 보면서 노르웨이 작가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가 떠오르는 건 우연이 아닌 셈이다. 마침 패스밴더가 영화 <스노우맨>에서 '해리 홀레'를 연기한 적도 있고.
강박증이라는 공통점
이때 킬러에게 초점을 맞추면 유달리 도드라지는 지점이 있다. 강박증이다. 그는 완벽주의자다. 표적이 묵는 호텔 방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으려 한다. 눈을 뜨자마자 표적을 관찰하기 위해 잠잘 때도 테이블 높이를 창문과 맞춰 둔다. 저격 시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항상 심박수를 체크한다. 밥도 효율적으로 먹는다. 햄버거에서 번을 빼고 단백질 위주로 영양분을 섭취한다. 목표를 위해 끝없이 기다리고, 유지하고, 인내한다.
이 강박증은 마냥 남 일이 아닌 것 같기에 흥미롭다. 업무의 강도가 높고, 비윤리적인 점만 빼면 그의 일은 일반 직장인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자기 본연의 리듬 대신 일에 맞춘 일상도 낯설지 않다. 제이 그리피스가 <시계 밖의 시간>에서 지적한 대로다.
분업화된 자본주의 시스템이 확립된 후 사람들은 삶에서 자율성과 창조성을 지운채 시계와 알람에 맞춰 살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시간 맞춰 칼같이 일어나고, 자기가 세운 계획을 완벽하게 이행해야 마음이 놓이는 킬러와 현대인을 분리해 말하는 건 무의미해 보인다.
동정과 연민 끼어들지 못하는 킬러의 세계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더 킬러>의 복수극은 평범하지 않다. 자기 세계의 모순을 발견했지만, 외적 가치를 이미 내면화했기에 끝내 떨쳐내지 못하는 환자의 치유기에 가깝다. 그가 외부 세계를 대하는 방식의 변화를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챕터 1에서 핀처는 킬러의 시점과 청각만을 강조한다. 카메라는 그의 시점을 비추고, 음악과 소음도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울려 퍼진다. 달리 말해, 그의 세상에는 그만이 존재한다.
이를 확대하면 분리되고 고립된 사람들의 세계가 나타난다. 여러 파편이 있다. 런던에서도 파리에서도 뉴욕에서도 사람들은 선글라스를 낀 독일인 관광객에게 관심이 없다. 설령 그가 아마존을 이용해 살인 계획을 세우고 실천에 옮긴다 해도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다. 그렇게 사람들은 다들 비슷비슷하게 표준화된 일상을 영위한다. 맥도널드와 스타벅스처럼.
이 세계에서는 동정과 연민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코인에 눈이 멀어 자기가 죽이려 한 킬러가 복수를 위해 찾아와도 의뢰인은 그 이유조차 짐작 못하는 사회이니까. 킬러의 내레이션이 동정과 연민보다 냉정함과 계획을 우선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가득한 이유다.
바로 이 지점에서 <더 킬러>는 더더욱 노르딕 누아르 같다. 노르딕 누아르의 특징 중 하나가 시대상의 충실한 반영이기 때문. 노르딕 누아르 작가는 사회를 고발한다. 소설 속 지명, 연도, 현장에 대한 묘사까지 무엇 하나 놓치지 않는다. 마치 거울처럼 사회상을 반영한다. 핀처도 마찬가지다. <더 킬러>를 통해 자본과 권력으로 치환될 수 없는, 인격의 존엄성 같은 고유한 영역이 존재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복수의 성공이라는 비극
그러면서도 <더 킬러>는 일말의 희망을 간직한다. 수십 번 반복했던 작업인데 킬러는 자꾸 실수를 범한다. 변호사, 짐승, 전문가, 의뢰인으로 타깃을 좁혀가는 사이 살인은 공허해지고 의미 없이 흘러간다. 무엇을 위한 복수인지, 자신마저 납득하지 못할 위기를 맞는다. 그 사이로 불길이 튀어나오며 장르적 쾌감도 조금 깃든다. 줄곧 냉정하고 건조하던 영화는 온 집안을 부술 것처럼 처절한 액션 시퀀스를 선보인다.
그러면서 킬러가 바라보는 세계는 조금씩 변한다. 서서히 남의 이야기가 들리고 보인다. 특히 전문가와의 대화가 정점이다. 값비싼 레스토랑에서 마주 앉은 킬러와 전문가. 전문가가 묻는다. 이 직업에서 회의를 느껴본 적이 언제냐고. 일을 하면서 언제 마지막으로 스스로에게 문제가 있다는 걸 인정해 봤냐고. 그 순간 킬러는 흔들린다. 조각상 같던 그가 위스키를 단숨에 비워 버린다. 단답이지만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물론 그는 자기 세계에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애써 외면한다. 계획대로는 아니더라도 완벽한 삶을 복구해낸다. 하지만 곱씹어 보면 복수극은 마냥 기쁘지 않다. 언제나 완벽하려는 자기 노력이 그럴 가치가 있는지 의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심은 언제나 꼬리에 꼬리를 물기 마련이다. 킬러의 마음에 깃든 이 건조한 희망의 존재는 큰 액션이나 제스처 없이도 틸다 스윈튼의 존재감이 압도적이고, 많은 대사 없이도 패스밴더의 연기가 일품인 이유다.
핀처가 보는 현대인
어떤 면에서 극 중 킬러는 <소셜 네트워크> 속 마크 저커버그처럼 보이기도 한다. 페이스북 CEO로서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을 연결하는 허브의 중심에 선 그. 하지만 마지막 순간 그는 외톨이다. 절친도, 동업자도, 심지어 변호사마저 그를 떠났다. 그는 전 여자친구에게 친구 신청을 보내고, 받지 못할 답을 처량하게 기다린다. 자기가 만든 세계에서 고립된 후에야 자기가 놓치고 산 게 뭔지 어렴풋이 깨닫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는 킬러의 차가움과 냉철함이 장르적 쾌감을 거쳐 쌀쌀하게 이어지는 이유와도 맞닿아 있다. 즉, 킬러는 암살자이기 이전에 비극적인 현대인의 초상을 비추는 인물이다. 언제나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는 도로 청소차나 쓰레기 수거차는 킬러와 현대인의 삶을 함축하는 듯하다. 에릭 메서슈미트 촬영 감독의 영상미, 애티커스 로스와 트렌트 레즈너의 음악과 어우러지면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적 질서를 겨냥한 문제의식과 메시지는 스크린을 뚫고 나와 관객에게 직관적으로 전해진다.
결국 데이비드 핀처는 킬러의 일상을 장르적으로 접근하는 척하면서 하나의 거울을 가져다 놓는 셈이다. 나르시시즘 섞인 킬러의 독백와 업무 과정을 통해 화면 너머의 자기 자신을 보도록 유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것이야말로 곱씹어 볼 가치가 있는 <더 킬러>의 발견이 아닐까 싶다. 어떤 장르든 핀처는 영화를 잘 만든다는 증명뿐만 아니라.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핀처, 패스밴더, 스윈튼 팬 모두가 사랑에 빠져 곱씹을 누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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