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3-10-29 20:47:18
8톤 트럭 순애보와 인류애 사이
영화 <킴스 비디오> 리뷰
이 영화의 제목만 들었을 때는 비디오 세대의 순정 어린 추억 회상 영화일 거라고 막연히 상상했다.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비디오 가게' 뭐 그런 느낌 아니겠어?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본 이 영화는 전혀 달랐다. 그래 비디오의 추억이 맞긴 맞는데... 아련한 세피아빛 회고가 아니라... 아찔한 레트로 원색으로 얼레벌레 굴러가는 미친 이야기가... 이건 그냥 핸들이 고장난 8톤 트럭이었다.
<2023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노트>
OVERVIEW
영화는 지금은 사라진 킴스비디오가 갖고 있던 방대한 비디오 컬렉션의 행방을 추적하는 데이비드 레드몬을 따라간다. 킴스비디오는 55,000편이 넘는 인기 영화와 희귀 영화를 갖춘 뉴욕의 상징적인 비디오 대여점이었다. 영화의 형식과 트로프를 자유자재로 가지고 노는 감독의 추적은 기이하고 집착적으로까지 느껴진다. 이 추적은 시칠리아로 이어지고, 그곳에서 감독은 지역 정치의 거미줄에 걸려든다. 이 추적은 그를 한국으로도 데려간다. 그는 컬렉션의 미래에 영향을 줄 수 있기를 바라며 수수께끼의 인물 김용만 대표를 쫓는다.
REVIEW
킴스비디오는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사이 뉴욕 영화광들의 성지로 군림했던 비디오 대여점이다. 특히 이스트빌리지 세인트 마크스 플레이스의 본점은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55,000종의 희귀 예술영화와 언더그라운드 영화 비디오, DVD를 25만 회원들에게 대여하는 곳이었다. 우리에게 더욱 와닿는 점은 이곳의 창립자가 한국 이민자인 김용만 사장이라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넷플릭스 같은 온라인 대여 업체의 성장 등으로 문을 닫을 수밖에 없던 킴스비디오는 모든 컬렉션을 한꺼번에 받아줄 기관을 수소문했는데, 여러 대학의 제의를 뿌리치고 놀랍게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탈리아의 소도시 살레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다큐멘터리 <킴스비디오>는 그 뒤로 10여 년이 흐른 뒤 살레미를 찾아가 이 컬렉션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나아가 감독들은 그 컬렉션을 되찾아 올 방법을 강구하고 이를 실행에 옮김으로써 진정한 ‘시네필의 윤리학’을 보여준다. 스스로 시네필이라고 생각하는 분이라면 절대 놓쳐선 안 될 영화. (문석)
사업과 예술의 경계는 어디일까. 예술이라는 단어에서 풍기는 느낌과 달리, 그 경계는 아주 모호하고 많은 경우 겹쳐져 있다. 사업체인 동시에 언더그라운드 예술영화 수집과 공유의 장이었던 '킴스 비디오' 또한 그렇다. 여기서 '비디오 가게에서 일하다가 감독이 된' 쿠엔틴 타란티노의 이야기가 나왔고, 로버트 드 니로나 짐 자무쉬가 단골이었으며, 또 다른 단골 코엔 형제는 600달러에 달하는 연체금을 미납했다. 이렇게 킴스 비디오에는 무수한 영화와 영화인과 이야기가 겹겹이 쌓였다. 그 결과, 폐업을 앞둔 킴스 비디오의 물건들은 처리가 아닌 보관의 대상이었다. 유수의 대학이나 연구소에 보관을 맡겨도 될 만큼 거대한 컬렉션은, 뜻밖에도 사업체가 있던 미국이 아닌 이탈리아의 소도시로 들어간다.
'천만영화'들만 가득한 컬렉션이었다면 어찌저찌 대안을 찾을 수 있을 테니, 이토록 안타깝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킴스 비디오는 학생이 만든 단편영화나 세계 곳곳의 독립영화, 흥행은 고사하고 개봉조차 불투명한 영화들로 컬렉션을 이루어낸 곳이었다. 영화사에 다시 없을 유일무이한 보석 같은 곳. 이탈리아의 소도시에서도 그런 명성을 고려하여 컬렉션을 받아 보관하겠다고 제의한 것이었을 테고, 실제로 킴스 비디오를 다루겠다고 찾아오는 다큐멘터리스트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킴스 비디오의 사장, '용만 킴'은 그 모든 제안을 거절해 왔다. 그러면 대체 이 영화는 어떻게 세상에 나왔는가?
이 영화의 감독인 두 다큐멘터리스트, 데이비드 레드먼과 애슐리 세이빈 감독은 대뜸 촬영을 시작하고도 3년이나 지난 후에, 용만 킴 사장을 찾아가 촬영 영상을 보여주며 허락을 구했다고 한다. 그들의 눈에서 그만두라고 해도 그만두지 않을 뜻이 보였다는 용만 킴 사장은 둘의 촬영을 허락하지만, 아무리 사업가와 영화인으로서 잔뼈가 굵은 그였어도, 과연 이 영화에서 우리가 본 모든 이야기를 예측했을까?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핸들이 고장난 8톤 트럭이 나올 줄은 몰랐을 것이다...
큰 사전 정보 없이 이 영화를 보았을 때 느꼈던 기분 좋은 경악을 망치지 않기 위해, 영화 내용을 구구절절 나열할 생각은 없다. 다만 나는 이 영화를 전주국제영화제가 아닌 서울의 작은 상영관에서 보았음에도, 영화가 끝나자마자 어쩐지 영화제 현장에서처럼 박수를 뻑뻑 치고 싶었다는 것. 일행도 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 이동진 평론가의 한줄평 "영화에 미쳤거나 영화를 핑계로 미친 사람들의 거의 미친 이야기"라는 말에 고개가 아프도록 끄덕거렸다는 것.
핸들이 고장난 8톤 트럭을 보면서 입이 벌어지고 헉 소리가 절로 나오는데, 용만 킴 사장님은 "고다르가 도왔다면 할 말이 없다"며, "고다르라면 옳은 일을 했을 테니까 나는 동의한다"고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음... 저쪽도 만만치 않은 8톤 트럭이구만... 저 정도 해야 시네필 하는 거구만... (그 와중에 그 대사가 너무 멋있어서 어디 좀 새겨놓고 싶었다.)
무언가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순수하게 미쳐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즐겁지만 사실 내가 그런 사람이 될 자신은 없다. 왜냐하면 '순수하게 미쳐있는' 상태란 지속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순수하게 미쳐만 있기엔 세상이 너무 복잡하고 요구하는 것도 많으니까. 이런 세상에서 무엇 하나만을 깊이 바라보는 순애보는 얼마나 귀한가. 현실에서는 너무 쉽게 해지고 깨지고 닳는 그 마음이, 어느 정도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빚어내는 이런 작품을 보는 일은 얼마나 즐거운가.
"나는 그냥 잊히고 싶다. 그냥 루저니까." 라는 인터뷰를 남기고 영화계에 다시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다던 용만 킴 사장님은 선댄스 영화제에서 관객의 환호를 한 몸에 받았으며, 이제 영화에 대한 새로운 꿈을 꾸고 계시고, 국내 개봉을 기점으로 관객들도 만났다. 그치 이쪽도 8톤 트럭인데 영화계를 떠날 수는 없지... 싶으면서도, 이런 영화 후일담마저 너무나 즐겁고 유쾌한 것이다.
문득 생각해 본다. 나는 이런 8톤 트럭 순애보 이야기가 왜 이리 좋은걸까? 곰곰 생각해 보니, 그 '빠꾸 없는' 애정에는 감히 다른 부정적인 감정이 섞여들 틈새가 없기 때문인 것 같다. 킴스 비디오 컬렉션이 이탈리아 살레미에 도착한 이후로 방치된 시간을 되짚어보고, 비디오를 '구출' 하기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충분히 '빌런'으로 이해될 수 있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교과서적인 '이야기의 구조'에 따라 빌런을 설정하는 단순한 방법을 취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 단지 비디오를 구출해야겠다는 그 강렬한 애정에 모든 에너지를 집중한다.
그 안에서 '빌런'들도 정겹게 녹아들고, 이 영화의 모든 등장인물을 제법 너그러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어딘가에 고도로 집중된 애정은 인류애와 구분하기 어렵다. 얼핏 수렴과 발산으로 정반대처럼 느껴지는 그 애정의 방향성들은, 결과적으로 비슷하게 둥근 모양으로 그려진다. 둥글게 둥글게 손을 잡고 강강수월래를 그리는 모양으로.
바로 그 이유로, 영화의 유령이 숱하게 등장하는 이 영화, 영화와 시네필에 대해 아주 깊고 진득하게 말하는 이 영화를 보고 나왔을 때, 나는 어쩐지 영화에 대한 애정뿐 아니라 온 인류ㅡ특히 나와 잘 맞지 않고, 내 기준에서 대척점에 서 있다고 생각되는 존재들ㅡ에 대해 조금 더 푸근한 마음을 품고 나왔다.
한편 숙제 같은 마음도 남았다. 이 영화의 "방식"을 (여러 가지 사유로) 따를 수 없는 다음 세대의 시네필들은, 어떻게 영화를 구출해낼 수 있을까? 복잡한 마음으로 지금 당면한 숙제들을 바라본다. 쉽게 부정할 수 없는 한국 영화 위기론, 지원금을 굳이 거절해 가며 철거를 (지금 이 순간에도) 강행하려 하는 아카데미 극장, 절반으로 삭감되어 버린 영화제 지원 예산...
<빅이슈>와의 인터뷰에서 용만 킴은 킴스 비디오의 철학이 "나무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맞게 하기 위해서는 뿌리가 튼튼해야 한다. 상업 영화로 돈을 벌되 그 뿌리는 언더그라운드, 독립영화 지원에 있다."였다고 밝히며, 한국 영화가 앞으로 더 발전하고 성공하려면 정책적으로 독립영화를 계속 지원하길 바란다는 말을 남겼다. <킴스 비디오>의 감독들은 과거의 영화를 구출해 냈는데, 이제 다음 시대의 시네필인 우리는 미래의 영화를 구출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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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반쪽의 이야기>, 닫힌 방을 연 멍청이들
*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넷플릭스보다 왓챠를 더 많이 보고 있다. 간이 콩알만 한 탓에 제목은 알면서도 차마 보지 못한 넷플릭스 오리지널이 수두룩하다. 궁금하긴 하지만 아직까지는 호기심이 쫄보를 이기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알게 된 게 <반쪽의 이야기>. 플라톤의 향연을 인용하면서 시작된 영화에서, 약간은 낮고 덤덤하게 나오는 주인공 엘리의 목소리가 좋았다. 다른 톤의 목소리였다면 처음부터 이렇게 와 닿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큰 틀에서는 익히 봤던 전개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전한 편지를 대필해 주는 것도, 마음을 얻기 위해 좋아하는 것들을 샅샅이 파헤치는 것도, 그러다 이상하게 정드는 것도. 아, 엘리가 애스터를 좋아하는 건 반전이 아니다. 처음부터 애스터를 바라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하지만 엘리의 목소리처럼 묘하게 다른 이야기가 있다. 목소리만큼이나 덤덤하고 시니컬한 엘리가 과제 대행 '거래'를 하는 점. 분량마다 금액도 정해져 있고, 과제 성적도 꽤 좋게 받을 수 있다. 돈독 올랐다고 하면 서럽다. 용돈벌이를 하는 게 아니라 전기 요금 등 생활비를 벌고 있다. 엘리를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로 여기면서도 과제 대행을 자연스럽게 맡기는 동급생들. 대부분은 무관심하고, 일부는 기차소리와 엘리 추라는 이름을 섞어 '처기처기 추추'라면서 기차소리로 놀려댄다. 플라톤의 사랑이란 주제로 대행 과제를 포함해 총 6개 과제를 내고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는 선생님. 엔지니어링 박사학위 등 전문성을 갖추고도 영어실력이 부족해 커리어의 시작인 줄 알았던 스쿼헤이미쉬에 주저앉은 아버지. 유쾌하고 재밌는 성격이었을 것 같은 사진만 남기고 일찍 세상을 뜬 어머니. 스쿼헤이미쉬 반은 갖고 있다는 지역 유지의 아들 트리그에게서 보이는 여유와 자신감, 트리그에게 열광하고 동경하는 수많은 학생들. 평생 이곳을 떠난 적 없는 사람들. 사람이 사는 곳엔 늘 문제와 상황이 난무하지만, 겉으로 평화로워 보인다고 해서 괜찮은 상태는 아니다.
누가 그랬나. 삼각형은 완전하고, 삼각관계도 완전하다. 엘리와 폴 모두 애스터를 좋아한다. 엘리는 교회를 가지도 않는데도 4년간 교회에서 피아노 반주를 했다. 애스터 아버지가 목사인 교회에서 과제 대행으로 바쁜 엘리가 황금 같은 주말을 두고 반주를 한다면? 별다른 설명은 없지만 애스터 때문일 거라는데 손모가지도 걸 수 있다. 매주 만났을 텐데도 애스터와는 별다른 친분이 없다. 우연히 마주쳐서 한 첫마디가 '난 엘리 추야' 하는 자기소개인 걸 보니 알만하다. 이름은 알지만 가까워지지 못했다. 엘리와 애스터 중 누구 하나 서로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폴의 이름 뒤에서 편지로, 고스트 메신저로 애스터를 만나게 된 후로 엘리는 정말 이해받는 기분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둘이 그렇게 잘 맞을 수가 없다. 추상화와 문학을 좋아하는 것도, 제법 진지한 고민을 털어놓는 것도.
눈빛 교환만 의미심장
왜 엘리와 애스터는 진작에 가까워지지 않았을까? 애스터가 학교의 "그 트리그가 좋아하는 예쁜 애"고, 엘리는 "과제 대행하는 중국애"라서? 트리그와 트리그 팬클럽에는 끌려다니면서 마음 맞는 아싸 친구와는 다닐 수가 없어서? 애스터를 좋아하지만 애스터는 엘리 같은 애는 모를 테니 멀리서 지켜보는 게 나아서? 학교에서의 이미지와 인간관계가 아니라면 종교 때문일까. 목사인 아버지가 엘리는 종교가 없어서 친하게 지냈다면 혹시 말리셨을까.
영화에서 나를 무너뜨린 대사는 이해받는 기분이 어떤 건지 아냐(You know what it's like to finally meet someone in your age who gets you?)는 엘리의 말 때문이었다. 세상에 누군가 나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도 어려운데, 내 또래고 내 근처에 있고, 심지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니. 그 순간만큼은 눈물 날 정도로 부러웠다. 마음을 건드리는 것들은 늘 내게 모자라거나 비어 있는 것들이다. 대사를 듣기 전까지는 아무 생각 없었는데 놀라울 정도였다. 어쩌면 평생 이해받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가서, 그래도 엘리 너는 행복하면 됐다 싶다가도, 그 대상이 끝내 나는 아닐 것 같은 생각이 들어버려서였을 것이다. 누구보다 반쪽에 진심이었던 건 아니었나 싶게.
4년 만에 처음 대화인 건지
하지만 그런 엘리와 애스터 사이에도 장벽은 있다. 애스터가 "상황이 다르고, 내가 달랐다면.."이라고 말하는 그 이유 때문이다. 엘리가 폴인 척하고 애스터와 연락을 했던 건 애스터에겐 분명 당황스럽고 배신감이 들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우리도 별로 화가 안 나는 게, 폴과 엘리의 결이 너무나 달라서 짐작을 못했을 리 없는 정도다. 글로는 멋진 말을 던질 줄 알고 관심사도 똑같은 사람이, 만나면 긴장했다고 얼어붙어서 대화가 몇 단어 이어지지도 않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글은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이고, 말은 침묵이 반이지만 어딘가 든든한 느낌이었던 것도.
애스터에게 약간은 실망했다면 미술 전공을 선택한 것 이외에 주체적인 결정을 내린 적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엘리 말대로 상황이 다르고, 내가 다를 일은 없다. 엘리가 트리그의 프로포즈에 안돼!라고 소리치지 않았다면 애스터는 못 이기는 척 트리그와 결혼했을 것이다. 엘리를 엘리라고 불러주지 않고, 농담이긴 하지만 heathen (이교도= 비종교인)이라고 불렀다. 엘리는 저 멀리 아이오와로 떠나갈 예정인데도. 다만 그녀가 보여준 대담한 선택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노천온천에 데려간 점. 그곳에서 야말로 가장 자연스럽고 적극적이고, 자신도 얼마나 이해받는 기분이었는지 표현했다. 그렇게 이해받는 느낌을 주는 사이더라도, 완전히 이해받는 건 또 다른 문제다. 완전히 이해받는 건 완전한 반쪽을 찾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니 무너질 필요는 없다. 이해받았던 순간과 그때의 마음만 잘 간직하더라도, 그 순간을 되감아 보는 것만으로도 버틸 만하다. 엘리가 대학 가서 보자고 하지 않나. 이 둘 사이는 두고 볼 만하다.
요즘도 편지 쓴다
엘리는 폴에게 여러 번 놀라곤 한다. 고민이 많은 엘리에 비해 폴은 그 고민을 말도 안 되게 쉽게 풀어버린다. 말도 나눠보지 않은 애스터를 '사랑'한다고 확신하고선 엘리에겐 사랑에 빠져 본 적 없는 것 같다며 정곡을 찌른다. 엘리가 뒤통수에서 따갑게 듣던 '처기처기 추추' 놀리는 소리에 맞서 소리쳐 준다, 사랑하는 건 노력하는 게 아니냐는 명언도 남기고, 사랑의 방식이 다양하다는 것도 겸허히 받아들인다..
영화를 보면 폴이 점점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단순하고 말 주변 없는 빙구라 생각하면 오산. 뭣도 모르고 짓는 미소도 약간 어설프게 뛰는 달리기 폼도 귀엽다. 이거 참 큰일이다. 귀여워 보이면 답이 없는데. 무엇보다 폴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애스터랑 말 한 번 해보지 못했지만 편지를 써보자. 누가 요즘 편지를 쓰냐고? 로맨틱하잖아. 말을 잘 못하니 엘리에게 도움이 필요하다고 찾아도 가고. 폴이 처음에 애스터에게 보내려던 편지를 살펴보자. 애스터 너는 똑똑하고, 착하고, 예뻐. 그중 2개만 해당되어도 너를 좋아했을 거란다. 우습게 들릴 수도 있다. 근데 정말 그럴까? 사실 저 조건이 맞추기 더 힘든 게 필요한 건 어지간히 다 들어있다. 실제로 호감을 갖는데 저보다 더 남다른 이유가 넘쳐날까? 단순 무식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게 답일 수도 있다. 폴이 글 솜씨나 말솜씨가 투박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생각이 얕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말은 잘 못해도 타이밍은 놓치지 않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애스터에게 타이밍 좋게 고백도 하고 손도 잡고 키스도 하고. 할 건 다 한다. 애스터가 폴과 함께 있으면 안전한 느낌이 든다는 건, 그런 든든함일 것이다. 실패할까 고민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되게 할지를 고민하니까.
폴에게 유일하게 뜨악한 건 풋볼 경기에서 득점한 후에 엘리에게 키스를 하려던 때였다. 갑자기 생뚱맞게 느껴질 수도 있었겠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다. 어머니는 늘 말씀하셨다. 꼭 저러다가 정든다고. 누구 이어주려고 도와주다가 둘이 좋아진다고. 저번 주까지 폴이 애스터랑 사귀게 됐다고 들떠하면서 키스하던 사이인 걸 떠올리면 '저놈이!' 하고 등짝을 때리고 싶은 건 사실이다. 엘리가 키스를 받아들였어도 참으로 이상한 상황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바로 뒤에 애스터가 나타나 버렸으니까. 조금만 잘못 나갔으면 장르가 치정물이 될 뻔한 순간. 폴을 지켜보다 보니 마음이 넘쳐서 키스로 확인하고 싶은 건 알겠는데, 그래도 먼저 하려던 말을 했어야 한다고 본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는 좀 궁금하다. 아쉬운 부분이다. 영화의 묘미가 대화에 많이 있었기 때문에 폴이 애스터에게 했던 고백과 어떻게 달랐을까는 상상에 맡기게 되었다.
타코 소시지, 그 맛이 궁금하다
폴이 왜 엘리를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분명하다. 엘리는 폴을 성장하게 해 준 사람이다. 엘리는 폴이 누군가를 좋아하는 저 세 가지 조건(똑똑하고, 착하고, 예뻐) 중 두 가지 이상 혹은 전부를 충족한다. 폴이 혼자서는 하지 못했던 일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애스터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줬다. 비록 시작은 편지 한 통에 50달러인 비즈니스였지만, 엘리가 각종 분야 선생님처럼 트레이닝해 주는 걸 보면 열정 페이라는 건 본인도 알고 있을 터. 타코 소시지를 응원하고 유명해질 수 있도록 음식 비평가에게 몰래 편지도 보내주었다. 맛있는 거 더하기 맛있는 거는 그냥 맛있는 거라며 영화 내내 밀어붙이던 타코 소시지. 그쯤 되니까 한 번 먹어보고 싶더라.
대화가 핑퐁 같다고 핑퐁 치면서 대화한다
그뿐인가. 엘리는 대화를 이어가는 법을 알려주고, 포기하고 싶거나 멍청하다고 느껴질 때 진심으로 응원했다. 15년 만에 풋볼 팀이 득점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게 해 준 것도 엘리다. 애스터를 좋아하지 않은 건 아니겠지만, 엘리와 있을 때 자연스러워 보였던 것도 사실이고. 엘리에게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을 짚어보라면, 엘리를 궁금해하기 시작했을 때다. 애스터를 더 잘 알기 위해 잠입 수사를 하던 중 엘리에게 배고프지 않냐고 물어본 차 안. 엘리 아버지와 어머니 이야기를 물어보기 시작했을 때. 마음을 확실하게 알게 된 건 엘리의 기타 소리를 길 건너편에서 들었을 때 보이던 그 표정부터였다. 피아노 조율을 망쳐서 졸업생 공연을 망칠 뻔한 엘리에게 네 곡을 연주하라며 도와주었을 때도, 뒤풀이에 가서 술에 취한 엘리를 챙기며 자신의 집에 데려왔을 때도. 애스터를 좋아하는 걸 알고 무너졌을 때도. 있는 그대로의 엘리를 응원하며 기차역에서 헤어지던 때에도. 엘리로 인해 폴의 눈빛은 참 많이도 변했다. 이렇게 한 사람에게 많은 눈빛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영화 속에 간단히 나온 '닫힌 방' 이야기를 떠올려 보면 엘리의 아버지, 엘리, 폴, 애스터, 모두 각자 닫힌 방에 있었다. 엘리의 아버지는 과거에 갇혀 있었다. 항상 모든 영화에는 최고의 순간이 있다던 아내를 떠올리면서 그 장면을 보았고, 엔지니어로서 시작점이 되었어야 할 스쿼헤이미쉬에선 기차역에서 기계조차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엘리는 스쿼헤이미쉬에 주저앉은 아버지가 마음에 걸려 떠나지도 못하고, 돈을 벌기 위해 원하지도 않는 과제를 했고, 원하지도 않는 대학에 장학금을 받고 가려고 했다. 폴은 스스로 말했듯 소시지 레시피를 바꾸고 싶지만, 넷째 아들이라 운영할 순서도 아니고,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레시피를 바꾸면 할머니, 어머니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표현하지 못했다. 애스터는 트리그와 결혼하고 싶어 하지 않았는데도, 자신의 아버지가 트리그네 집과 결혼 이야기를 하는 걸 보고 결혼하게 된다 해도 받아들일 모양새였다. 이들이 있는 스쿼헤이미쉬는 닫힌 방의 온상이다.
하지만 도로의 표지판에 쓰여있었던 것처럼, 뭔가가 스쿼헤이미쉬에 일어나고 있다. 모두들 조금씩 달라졌다. 엘리는 그리넬 대학으로 가는 길에 질색팔색하던 파인애플, 부엉이, 안경 쓴 애벌레 이모지를 쓸 수 있게 됐고, 폴은 음식 비평가들에게 좋은 평을 받고 자신만의 소시지 연구에 한창이다. 애스터는 포트폴리오를 준비해서 미술을 공부할 예정이다. 엘리의 아버지는 자신을 걱정해서 떠나지 못하는 딸을 대신해 그리넬 대학에 원서를 넣고, 가는 길에 든든히 먹으라고 만두도 빚어 넣었다. 이제는 멀끔하게 차려입고 기차역에서 쓰지 않던 기계를 작동하고 있다. 닫힌 방과 열린 문은 한 끗 차이다.
엘리와 폴이 영화를 본 어느 날, 엘리는 떠나는 기차를 쫓아오는 사람을 멍청이라고 말했다. 멍청하다고. 기차를 앞지르는 사람은 없다고. 그런 장면은 진부하다고. 하지만 그래서 바로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에게 똑같은 일이 일어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멍청한 건 맞지만, 겪어보면 멍청하다고 나쁜 것만은 아니지. 엘리와 폴이 보던 영화에서는 모두 슬프게 울고 마는 이별이었지만 엘리의 이별은 슬프지 않았다. 엘리의 눈물은 슬프지 않았고 아버지, 애스터, 폴 역시 울지 않았다.
어느 순간에 우리는 외로워하며, 사랑받지 못하고, 이해받지 못할 것이다. 놀랄 것도 없다. 외로움이 중력에 대한 물질의 반응이라면, 외로움은 이 지구 상에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 역시 존재한다는 걸 입증할 뿐이다.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하고 그 자체로 사랑하는 건 인류 역사를 관통한 영원한 숙제이니 엄두도 나지 않는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게 아니겠나. 안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기꺼이 몸소 멍청이가 되는 것. 망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괜찮은 그림에 대범한 선을 그려 넣는 것. 언제든지 상처 받을 수 있다는 걸, 나도 당신도 완벽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힘껏 노력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미 우리의 반쪽은 채워질 조짐이 보인다.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이 아쉽지 않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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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혜씨의 애틋하고도 치열한 삶을 응원하며
-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니얼굴> 시사회를 관람한 후 작성한 리뷰글입니다.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
<니얼굴>은 양평 문호리 리버마켓의 인기 셀러인 '은혜씨'의 이야기가 담긴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다운증후군을 가진 은혜씨는 문호리 리버마켓에서 그녀의 부스에 방문한 사람들의 사진을 찍고, 그 사진을 보며 얼굴을 그려주고 있다.
'니얼굴 작가' 은혜씨는 예쁘게 그려달라는 사람들에게 '원래 예쁜데요 뭘~'이라는 말을 넌지시 던지는 그런 사람이다.
은혜씨가 캐리커처를 그리게 된 계기는 그녀의 '어머니'였다.
은혜씨의 그림에서 특별한 재능을 찾아낸 그녀의 어머니는 은혜씨가 캐리커처 일을 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고, 캐리커처를 그릴 때도 옆에서 종종 조언을 해주었다.
영화의 곳곳에서 은혜씨의 어머니와 은혜씨가 투닥거리는 장면들이 나오는데, 이 순간들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은헤씨의 어머니 '장차현실'은 은혜씨의 든든한 조력자로서, 친구로서 그녀와 함께 수많은 사람들의 예쁜 얼굴을 기록하곤 한다.
영화에 나오는 은혜씨의 그림들을 보다보면 '참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얼핏 보면 투박해보이지만 어딘가 애틋한 느낌도 드는 그림들, 그리고 그림 속 얼굴들에는 사랑스러움이 깃들어 있다.
이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영화를 보는 내내 들곤 했는데 영화의 후반부에서야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발견했다.
바로 '은혜씨가 좋아하는 사람을 생각하면서 그림을 그려서'이다.
아마도 좋아하는 사람을 생각하며 그림을 그리던 은혜씨의 그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마음'이 모든 그림들에 투영되었고, 이 마음들이 스크린 너머의 나에게까지 전해진 것이 아닐까?
꽃잎은 시들어요
슬퍼하지 말아요
때가 되면 다시 필 걸
서러워 말아요
영화의 초반부, 은혜씨가 김정호의 노래 '하얀나비'를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 은혜씨의 전시회에서 우리는 그녀의 어린 시절부터의 성장과정이 담긴 사진들을 확인할 수 있다.
어쩌면 이 가사가 은혜씨와 그녀의 가족들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감히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자신만의 치열한 삶을 살아왔을 은혜씨, 그리고 이런 은혜씨의 그림에서 특별한 점을 발견하고 그녀를 조금 더 넓은 세상으로 인도한 어머니이자 화가인 장차현실, 이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담아낸 아버지이자 감독인 서동일.
이 영화를 통해 스크린 너머의 관객들에게까지 웃음을 전해줄만큼 많은 다정하고 행복한 순간들을 보냈을 그들이지만, 동시에 많은 서러운 순간들을 보냈을 그들이기에 '때가 되면 다시 필 걸, 서러워 말아요' 라는 가사가 더 와닿은 것 같다.
누군가의 삶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그 사람이 누구든 그를 조금 더 사랑하게 된다.
자신만의 이유를 가지고, 그리고 자신만의 기억을 가지고 치열하고 애틋하게 삶을 살아가는 스크린 속 주인공을 보다보면 나도 내 삶을, 그리고 주변인의 삶을 조금 더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삶을 조금 더 응원하게 된다.
다큐멘터리는 이런 힘을 가졌다. 생판 만나본 적도 없고, 대화 한 번 나눠본 적도 없는 사람이지만 그들이 구축해나가는 자신만의 삶이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 더 유쾌하고 따뜻했음 좋겠고, 괴롭고 버겁게 느껴지는 순간보다는 마냥 행복하고 다정한 순간들이 많기를- 하고 바라게 된다.
은혜씨가 내게 이런 깨달음을 알려 주었다.
그래서 참 고맙다, 은혜씨가.
많은 사람들이 영화 <니얼굴>을 통해 은혜씨의 밝고 유쾌한 미소와 그녀의 애틋한 삶을 꼭 마주하기를 바란다.
아마 영화관을 빠져나올 때는 관객 모두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담겨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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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이트 클럽> - ‘세계의 끝에서 끈덕지게 주먹을 뻗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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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트 클럽 (Fight Club)
개봉일 : 1999.11.13 (한국 기준)
감독 : 데이빗 핀처
출연 : 브래드 피트, 에드워드 노튼, 헬레나 본햄 카터, 미트 로프, 자레드 레토
‘세계의 끝에서 끈덕지게 주먹을 뻗다’
1999년, 새로운 숫자 2로 시작되는 2000년이 도래하기 직전, 세기말에 발표된 영화 <파이트 클럽>. ‘반항’과 ‘주먹’이 하나의 멋으로 통하던 그 시절의 감성이 그대로 담겨 있는 이 영화엔 세기말 감성과 그 시절의 멋, 그리고 새롭게 시작되는 천년에 대한 기대와 그에 대한 두려움이 뒤섞여 있다. 실제로 2000년을 앞둔 시기에 ‘2000년이 오면 지구가 멸망할 거다’라는 식의 괴담이 떠돌았다고도 하니.. 새로 다가올 시대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 사람들도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새로운 세기가 도래하고 산업은 점점 빠르고 거대하게 발전한다. 우후죽순 생겨난 공장들은 정해진 틀에 찍어낸 물건들을 빠른 속도로 사람들에게 공급했고, 그것은 새로운 문화가 되어 우리의 생활을 바꿔놓았다. <파이트 클럽>은 이런 획일화된 사회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한 남자가 입안에 고인 피를 뱉어내며 끈덕지게 주먹을 휘두르고 있는 영화다.
공장에서 찍어져 나오는 물건들과 똑같은 구조로 지어지는 아파트. 그리고 비슷하게 생긴 빌딩 숲 안에서 똑같은 컴퓨터를 바라보며 주어진 일을 해내는 하루. ‘남들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에 딱 어울리는 하루다. 자동차 리잭 심사관으로 일하고 있는 주인공 ‘잭’은 나름 괜찮은 수준의 월급을 받으며 생활하고 있다. 그는 열심히 모은 월급으로 번듯한 아파트를 샀고, 고급 가구들을 사 모으며 자신의 집을 채워가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잭은 언제부턴가 이유 모를 답답함을 느낀다. 특별할 것 없는, 부드럽다 못해 미끄러지듯 흘러가는 하루의 끝엔 아무것도 없었다.
인생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던 잭의 앞에 갑작스러운 사고와 함께 야생동물 같은 매력을 가진 ‘테일러 더든’이 나타난다. 누군가와 싸우기보단 피하기를 선택하던 잭과는 상극인 마음가짐을 가진 남자. 피하기보단 주먹 한 번을 휘둘러봐야 나를 알게 된다고 말하는 남자. 잭은 테일러를 통해 생애 처음으로 주먹다짐을 하며 엄청난 해방감을 느낀다. 사회에선 금기 또는 피해야 할 것으로 여겨지는 행동을 통해 느끼는 쾌감. 그것은 한 남자의 일상을 확실하게 뒤엎어버린다.
정해진 사회 규칙에 반항하고 싶은 날. 그런 날을 한 번쯤은 겪어보지 않았는가. 큰 건 아니더라도 에스컬레이터 거꾸로 오르기라든가.. 정해진 출근시간이 아닌 더 여유로운 시간에 유유히 출근하기라든가! 가끔 세상에 반항하고 싶어질 때, 중2병을 겪던 그때처럼 욕망을 주체할 수 없을 때 <파이트 클럽>을 추천한다. 리즈시절의 빵오빠 비주얼을 감상하며 괜히 나도 그처럼 쿨하고 야성적인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져보는 것도 나름 좋은 감상법이 될지도 모른다.
파이트 클럽 시놉시스
비싼 가구들로 집 안을 채우지만 삶에 강한 공허함을 느끼는 자동차 리잭 심사관 ‘잭’.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의 거친 남자 ‘테일러 더든’과의 우연한 만남으로 본능이 이끄는 대로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어느 날, “싸워봐야 네 자신을 알게 된다”라는 테일러 더든의 말에 통쾌한 한 방을 날리는 잭. 두 사람은 여태껏 경험해보지 못한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파이트 클럽’이라는 비밀 조직을 결성하고, 폭력으로 세상에 저항하는 거대한 집단이 형성된다. 하지만, 걷잡을 수 없이 커진 ‘파이트 클럽’은 시간이 지날수록 의미가 변질되고, 잭과 테일러 더든 사이의 갈등도 점차 깊어져 가는데…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모두 복사본의 복사본의 복사본 같다.”
똑같은 외관과 구조로 지어진 아파트. 똑같이 생긴 티비속에서 흘러나오는 똑같이 생긴 보급형 가구에 대한 광고. 잭은 가구 광고를 보고 있는 자신을 “이케아 제품으로 보금자리를 꾸미는 노예 대열에 합류했다.”고 표현한다. 똑같이 굴러가는 사회 속에서 자연스레 정해진 표준에 맞추기 위해 일을 하고, 집을 사고 집을 꾸민다. 하지만 잭은 공허함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공허함 뒤에는 괴로운 불면증과 무기력함이 뒤따른다.
잭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병으로 인해 진짜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들의 위로 모임에 참석한다. 잘빠진 가구가 아닌 커다란 사람의 품에 안겨 눈물을 토해내는 건 생각보다 효과가 좋았다. 매일같이 쏟아지는 위로에 중독된 잭은 여러 모임을 전전했고, 그곳에서 또 다른 거짓말쟁이 말라 싱어를 만난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이고, 죽지 않는 것이 비극이라 외치며 도로를 거침없이 가로지르는 이상한 여자. 만약 그녀를 지금이 아닌 다른 시간대에 만났다면 위로 모임을 나누는 사이가 아닌 아름다운 연인 사이가 될 수 있었을까-하고 잠시 생각해보지만, 눈앞에 서 있는 까만 머리의 여자를 다시 보니 그건 절대 아닌 것 같다. 말라 싱어는 강하게 잭의 시선을 잡아끌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말라 싱어보다 더 흥미로운 존재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잭이 테일러 더든을 만난 건 높은 하늘 위였다. 출장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잭의 옆인 비상구 좌석에 앉아 안전카드를 읽고 있는 남자는 비상구 좌석 승객이 맡게 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며 표정을 구긴다. 뒤이어 테일러는 남들은 모두 따르겠다고 말하는 안전 수칙이 알고 보면 위험을 순응하게 만드는 규칙이라며 이상하다고 말한다. 모든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순응하는 것들을 다시 들춰내 의심하는 사람이라니. 잭은 그런 테일러를 매우 흥미롭게 바라본다. 비행기에서 잠시 만나는 일회용 친구치고는 꽤나 흥미로운 남자였다.
“소유물에 지배당하지 말라”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집에 도착한 잭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소중한 그의 아파트가 불에 타고 있는 것이다. 그는 망연자실한 상태로 홀린 듯 테일러에게 전화를 건다. 테일러는 흔쾌히 잭과 술 한 잔을 하고, 자신의 집에서 함께 지내도 된다고 말한다. 그 후 잭은 테일러를 따라 지금껏 경험하지 못했던 일탈을 하나씩 경험해나간다. 사회적 규범, 정상적인 범주, 남들과 같은 삶을 의미하는 잭의 아파트가 불에 타던 날, 잭은 테일러와 함께 틀을 벗어나게 된다.
테일러는 이렇게 말한다. 아파트와 고급 가구들은 소유물이고, 소유물은 사람을 지배한다고. 그는 있는 그대로 흘러가는 영사기 속 릴 테이프를 가만두지 못했고, 정해진 코스대로 흘러가는 고급 호텔의 음식에 테러를 저지른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다수에 의해 기본이라 정해진 것이라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따르지 않는 인물이다.
“싸우고 나선 모든 것의 소리가 작아지고, 모든걸 감당할 수 있게 된다.”
쾌감이 사람의 원초적 본능이란 것, 무의식중에 남들과 다른 것을 원한다는 것.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할 것이다. ‘파이트 클럽’은 싸우면서 쾌감을 느끼고, 사회에서 규제한 금기를 어기며 색다른 클럽활동으로 추앙받는다. 잭과 테일러는 결국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안정적인 것이 아닌 쾌감과 특별함이란 사실을 모아 ‘파이트 클럽’이라는 이름을 만들게 된다.파이트 클럽의 위치는 식당 밑 지하. 활동 시간은 손님들이 모두 나간 후 늦은 시간이다. 다른 이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난 후, 땅밑에서 뒤늦게 열리는 파이트 클럽은 모든 걸 내려놓을 수 있는 곳이자 나의 밑바닥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테일러는 아직도 망설이고 있는 잭의 손에 흉터를 남기며 “모든 걸 잃었을 때만 모든 걸 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된다”고 말한다. 잭은 테일러가 남긴 상처를 통해 마지막까지 쥐고 있던 것들을 내려놓게 된다.
잭은 지원자들을 받아 군대를 양성하고 대혼돈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테일러와 잭이 동일 인물이란 것이 밝혀지기 전엔 ‘(상상 속)테일러의 군대’라고 표현되지만, 애초에 잭(진짜 테일러)이 소집한 군대다.) 잭은 지원자들에게 여러 가지의 테러 계획을 하달하며 도시를 휘저어 놓다가 고환암 환자 모임에서 만난 짝꿍 밥을 잃고 충격을 받는다. 큰 덩치로 잭을 폭 감싸 안아주던 눈물 동지의 죽음은 테일러를 만나기 전에 존재했던 본성을 불러온다. 잭은 뒤늦게 경찰서에 계획을 자수하러 가지만, 대혼돈 프로젝트 팀원에게 목숨을 위협받고, 자신이 테일러 더든이라는 혼란함만 안은 채 경찰서를 빠져나온다.
“우린 같은 사람이니까.”
잭과 테일러는 같은 사람이다. 테일러는 삶을 바꾸고 싶어 하던 잭이 찾아낸 탈출구였고, 그 사실을 인지하게 된 순간 영화의 릴이 교체되듯 한순간에 대혼돈 프로젝트의 주인공이 바뀌어버린다. 집에 불을 지른 것도, 말라와 사랑을 나눈 것도, 군대를 소집한 것도, 파이트 클럽을 만든 것도 모두 잭, 진짜 테일러 더든이었다. 영화 초반엔 잭이 테일러와 처음으로 주먹질을 하며 아드레날린을 느낀 것으로 표현되지만, 그것 또한 잭이 홀로 벌인 싸움이었다. 잭이 지부장의 사무실에 들어가 지부장에게 폭력을 당한 것처럼 혼자 싸움을 연출해내던 장면은 이 반전을 위한 복선이었을지도 모른다.
“난 눈뜨고 있어.”
잭은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테일러의 모습이 환영이란 것을 알게 된다. 사실 진짜 테일러는 자신이라는 것도. 잭은 테일러의 존재를 없애기 위해 자신에게 총을 발사한다. 건물은 계획대로 폭파되고, 잭은 말라와 손을 잡는다. 잭은 자신이 누군지, 어떠한 욕망으로 가상의 테일러 더든을 만들어냈는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깨닫게 된다.
정해진 사회규범 속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던 진짜 테일러 더든(잭)은 자신이 원하는 모습의 거친 테일러 더든을 만들고, 그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파이트 클럽을 만든다. 가상의 테일러 더든이 존재하고 ‘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그는 처음엔 테일러를 무조건적으로 따르며 그의 말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파이트 클럽 회원들 사이에서 ‘테일러 더든’이라는 이름이 전설처럼 떠돌기 시작하자 “나도 파이트 클럽의 창시자인데..”라며 자신도 절반쯤의 공이 있음을 인정받고 싶어 한다. 이것은 더 이상 잭(진짜 테일러)이 가상의 테일러 더든에 기대는 것이 아닌 본체 자체의 삶을 바꾸고 싶다는 욕망이 커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잭은 대혼돈 프로젝트의 계획을 말해주지 않는 테일러에게 섭섭함을 나타내고, 이내 테일러가 집에서 사라진다. 더 이상 가상의 테일러 더든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잭의 욕망이 커졌기 때문이다.
잭, 아니 진짜 테일러 더든은 자신이 가진 자아 중 한 가지인 ‘평범한 회사원 테일러 더든’의 모습으로 살아가다가 현실의 권태가 정점을 찍은 순간 숨겨놔야만 했던 자아 ‘파이트 클럽의 창시자가 될 테일러 더든’을 불러온다. 왜 이런 모습을 숨겨야 했냐고 묻는다면, 현 사회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답하겠다.
고급스러운 물건을 사며 행복을 느껴야 하고,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다수가 정한 평범함에 물들어야만 했던 남자의 공허함이 끌어낸 또 다른 자아는 자신의 고통을 명확하게 비추는 거울이 된다. 건물이 무너지고 도시에 잠깐의 혼란이 찾아온다 해서 견고하게 조직된 사회가 흔들릴 거란 보장은 없다. 하지만 아주 잠깐이라도 완전한 해방감을 누릴 수 있었다면 테일러의 ‘대혼돈 프로젝트’는 성공한 것이라 봐도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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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 같은 나와 물 같은 네가 서로 끌리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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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멘트 시티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뭐든 열심히 하는 두 사람. 불 남자와 불 여자는 누가 봐도 천생연분이다. 부부가 된 두 사람. 원래 고향이었던 파이어랜드를 등지고 엘리멘트 시티로 이사한다. 쓰는 언어부터 달랐던 두 사람. 이름을 말하는 것도 어려워한다. 입국심사를 담당하는 풀 원소 공무원이 말한다. “그럼 버니와 신더는 어떤가요” 남자는 버니, 여자는 신더가 됐다. 몸만 달랑 온 두 사람. 엘리멘트 시티에 가게 하나를 얻어서 잡화상점을 운영한다. 어려운 사회생활. 그래도 자라는 앰버를 보면 그동안의 피로가 싹 가신다. 어느덧 성장한 앰버. 엄마와 아빠의 희망이었던 딸. 의젓한 딸은 나이 든 아버지를 대신하기 위해서 종업원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고 있다. 하지만 마음대로 될 리가 없다. 온 인류를 뒤져서라도, 아니 온 원소를 다 뒤져서라도 진상 손님이 없는 세상은 아무 데도 없다. 여러모로 화를 돋우는 원소들. 앰버는 타고난 성질 때문인지 오늘도 욱해버렸다. 화를 낸 탓에 불에 탄 가게들. 수리는 어렵지 않았지만 아버지에게 생긴 마음의 빛을 지우기는 어렵다.
몸이 약해진 듯한 아버지 버니. 얼른 노력을 해서 아버지의 가게를 물려받고 싶다. 당연하지. 이 가게는 부모님의 희망이었으니까. 약해지는 아버지를 본다는 것은 마음이 아픈 일이다. 마음속에 있던 응어리가 해소될 기회가 왔다. 어느 날 아버지 버니가 딸 앰버에게 하루만 가게를 맡긴다는 말을 들은 것이다. 어깨에 힘 들어간 앰버. 첫 스타트는 좋았다. 그러나 시작만 좋았다. 여지없이 달려든 진상손님. 답답함이 터져 다시 가게가 불에 그을린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혼자 어디 가는 척했기 때문에 아무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점이다. ‘난 왜 그렇지?’ 자괴감에 빠져있을 때쯤 비상사태가 발생했다. 불에 탄 파이프에서 물이 흐르는 것이다. 우수수 떨어지는 물벼락. 그런데 그 물에서 갑자기 한 남자가 등장했다. 엉엉 울며 등장한 이 남자. 자기소개를 전한다. “안녕. 난 웨이드!”
디즈니x픽사의 상상력
전년 <소울>과 <루카>로 대형 홈런을 친 디즈니와 픽사의 신작이다. 사실 최근의 디즈니는 그렇게 타율이 좋지 못하다. 가장 근작인 <인어공주>는 수많은 논란이 오히려 마케팅 요소로 작용하는 듯이 흥행 성적이 시원치 않다. 뿐만 아니라 디즈니는 아예 디즈니플러스 론칭 이후 헛방만 치고 있다. 그나마 ‘가오갤’이 체면치레에 성공했다. 상대적으로 기대치가 많이 떨어진 디즈니. <버즈 라이트이어>라는 ‘토이 스토리’ ip를 사용한 결과물로(픽사가 협업하긴 했지만)도 영 지지부진했기 때문에 디즈니의 성적표가 점점 서늘한 경고처럼 느껴진다.
이 <엘리멘탈>은 디즈니의 상상력을 잘 구현한 작품으로 보인다. 또 픽사가 갖고 있는 낭만과 동심의 이야기를 잘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 <코코>에서 보여준 사후세계와 <소울>에서 볼 수 있었던 태어나기 전의 세계를 잘 구현했다. 사실 <코코>에서 볼 수 있었던 저승 묘사는 우리 삶 속에서 익숙한 장면이 어느 정도 있다. 비단 우리만 해도 ‘신과 함께’에서 저승을 봤었는걸? 영화는 이 익숙한듯한 묘사를 살짝 틀어서 변화구를 던졌다. 공간적 배경이 멕시코의 어느 마을이었다. 멕시코 토속적인 소재들과 저승이라는 세팅, 또 이승-저승을 왔다 갔다 하는 주인공의 특성을 합쳐 독특한 비주얼을 만들었다. 전적으로 사람 사는 듯한 느낌 1/3 멕시코 정취 1/3 저승의 이미지 1/3을 결합시킨 것이다. 이 <엘리멘탈>은 <코코>와 다른 점이 있다. 바로 원소들의 세계라는 점은 그 어떤 영화도 시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 처음부터 끝까지 상상해서 만들었다. 어디서 본 적 없는 도시. 시각적으로 눈정화가 되는 비주얼도 예쁘지만 신기한 건 다른 지점에 있다. 우리가 현대사회를 살아가면서 생기는 여러 도시문제가 있다. 젠트리피케이션을 위시로 한 각 도시의 원도심 문제가 그렇다. 이 마을에서 엘리멘트 시티는 이마저도 구현한 듯하다. 바로 불 종족들이 사는 도시와 물 종족들이 사는 도시가 좀 떨어져 있다는 것이 감독의 디테일을 살렸다는 점에서 신기했다. 이는 장소로서의 특성만 구현한 게 아니라 이야기의 전개에 있어서도 도시의 양극화 문제는 핵심으로 작동한다. 이게 영화가 인종문제와 이주민들의 적응문제를 다뤘다는 점에서 이 역시 작품이 잘 살린 연출지점이라고 볼 수 있다.
빠지면 섭섭하지
이 영화를 만든 피터 손이라는 사람은 한국계 미국인이다. 1970년대에 부모님이 미국으로 건너가서 정착해 가정을 이루셨다고 한다. 자전적인 코드가 들어갔다고 볼 수 있는 셈이다. 이 때문인지 영화 곳곳에서 한국인과 미국인을 비유하는 묘사가 몇 있다. 우선 불 종족인 앰버 가족이 쓰는 언어다. 이 캐릭터들은 초반에 등장할 때 자막 처리가 안 되어있다. 영화가 디즈니/픽사에서 제작되었다는 걸 상기시키면 이 이유가 어느 정도는 느껴지는 듯하다. 또 이 불 종족은 뜨거운 음식을 좋아한다. 게다가 앰버가 아버지 버니를 부를 때 '아슈파'라고 부른다. 이 세 가지는 한국인에 대한 비유이기도 하다. 첫째 언어와 관련된 부분은 이주민들이 한국어를 쓴다는 점에서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두 번째 뜨거운 것에 대한 비유는 역시 김치, 고추장을 위시로 한 매운 음식에 대한 묘사라고도 볼 수 있는 셈이다. 셋째. 호칭 '아슈라'는 아마 '아빠'라는 단어에서 온 듯하다. 그리고 영화에서 어떤 인물이 남기면서 무슨 코멘트를 남긴다. 이 기점 찍고 주인공 어머니가 어떤 소재에 대해 앰버에게 코멘트를 하는 신이 있다. 이 부분 잘 보면 우리 한국인들이 자라면서 겪는 유교문화에서 벤치마킹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 위에서 서술한 la라는 곳의 지리적 특성을 봐도 그렇다. 당시 미국에 정착한 한인들이 la에 자리 잡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누수문제라던가 치안에 있어 약점을 가진, 그러니까 땅값이 저렴한 곳에 거주지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 부분을 도시의 미관부터 시작해 이야기의 서사 중심으로 배치했다는 점은 영화에서 충분히 강점으로 뽑을 만하다. 이외에도 미술로 대표되는 물과 풀, 공기가 할 수 없는 것들에 능통한 모습들이 아시아인에 대한 비유처럼 느껴지기도 하다.
반대로 웨이드는 백인 사회를 비유하고 있다. 처음 버니와 샌더가 입국심사를 할 때 바로 영어를 쓰는 모습이 그렇다. 또 '물'이라는 것의 본질적인 속성을 생각해 보면 더 백인에 가깝게 느껴진다. 이 백인이 없으면 엘리멘트 시티 자체가 있을 일이 없는 것이다. 영화 내적으로 가장 흔하게 보인다는 점도 백인이라는 비유에 걸맞다. 그리고 글쓴이가 더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풀은 2차 대전 당시 미국으로 건너간 유대인들을 상징하는 듯하다. 왜? 풀이라고 하는 것이 물을 통해 성장하는 존재다. 유대인들이 미국을 먼저 건너가서 만들었다고 보는 건 아예 무리가 있다. 미국사회가 만들어지고 유대인들이 정착한 것이 우선순위이기 때문이다. 이런 지점을 생각해 보면 풀 종족이 후에 어떤 인물로 묘사되는지가 어떤 사람들에 대한 비유가 되는 듯하다. 다른 종족은 공기 종족이다. 역시 구름 종족으로 대표된다. 이 종족의 특성은 스포츠다. 이 스포츠에 대한 묘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본다면 이 종족이 어떤 사람들을 보여주고 있는지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다. 게다가 이 종족이 엘리멘탈 시티에 온 순서를 생각해 보면 역시 어렵지 않게 근거로 매길 수 있다.
이런 소소한 묘사가 영화에서 재미있는 특징이 되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좀 아쉽다고 느낀 부분도 역시 이 점에서 온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풀과 공기에 대한 묘사가 너무 적은 느낌? 인종주의적인 코드가 들어가 있고 이 인물들이 하하 호호 다 잘 지내는 게 핵심인 것 치고 두 종족이 좀 기능적인 측면이 있다. 또 너무 스테레오 타입으로 인물을 쉽게 세팅한 감도 없지 않아 있다. 글쓴이가 생각하는 영화의 가장 큰 단점이다.
반대가 끌리는 이유
영화에서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로맨스다. 두 캐릭터는 본질적으로 엮일 수 없는 존재다. 물과 불이라는 걸 상상해 보면 특히 더 그렇다. 하지만 영화는 이를 이야기 구성으로 주파하고 있다. 영화는 불, 그러니까 앰버의 특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앰버는 욱하면 무섭다. 한 번 크게 화를 내면 주위에 있는 것들을 불태운다. 이 특성은 정확히 반대로 웨이드가 갖고 있다. 중간에 누군가의 집에 가는 신에 있다. 여기서 어떤 문제가 벌어진다. 웨이드는 앰버는 가능하지만 웨이드는 불가능한 능력 묘사가 나온다. 이 가능/불가능의 대조는 영화 내내 반복되며 작품의 핵심소재인 '한 줄의 대사'로 도착한다. 이는 웨이드와 앰버의 대조점을 조명하던 영화의 이야기를 뒤엎는듯한 테마이기도 하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영화의 4 원소로 멋지게 풀어낸 것이다. 이를 캐릭터의 서사로서만 푼 것은 아니다. 시각적으로 두 캐릭터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연출도 영화에서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영화에서 살짝 아쉽다고 느끼는 부분은 이 로맨스를 위해서 이야기가 후반부에 맥이 빠진다는 점이다. <인사이드 아웃>에서 빙봉으로 온갖 눈물은 다 나오게 하던 디즈니 x픽사치 고는 좀 관성적으로 이야기를 푼 느낌이 있다. 좀 예상되는 느낌? 또 영화 핵심 사건이 아무리 애니메이션이라지만 해결되는 과정이 디테일이 약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다. 후반부 아름다운 장면을 위해 아름답게 서사를 살짝 희생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또 이민자들 간의 관계를 지엽적으로만 접근했다는 것이 후반부의 문제해결 과정에 아쉽다고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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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명세에 기대려고 한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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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간의 한 대학에서 수학하고 있는 일개 대학원생 케이트는 세상을 뒤집을 새로운 발견을 한다. 그 발견으로 세상은 뒤집히다 못해 파괴될 것이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저 멀리에서 날아오고 있는, 보이지도 않는 혜성에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관심만 없으면 괜찮은데, 케이트와 그녀의 발견을 지지하는 랜들까지 사이코로 몰아가고, 성적으로 희화화하기도 한다. 세상이 멸망할만큼의 강력한 혜성이 날아오고 있다는데, 사람들은 이런 소식을 그저 지식인의 유난으로 치부하고, 가십으로 소비할 뿐더러 다음 대선 뉴스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 심지어 현 대통령인 올리언까지 이 뉴스를 자신의 지지율에 이용할 생각만 한다. 세상이 멸망한다는데, 이 과학적 팩트를 정치선전에 사용하겠다는 윗대가리들이나 그 선전에 이용당하고 있는 국민들이나 참 여러모로 가관이다. 과연 케이트와 랜들은 이 역경을 뚫고, 사람들을 구해낼 수 있을까? 아니 이들의 말을 진지하게 듣게 만들 수나 있을까?
1. 언론의 역할이란 무엇인가 곱씹게 하는 신랄한 블랙코미디
나는 제작자가 아니지만 감독, 제작자는 혜성이라는 소재는 그저 거들 뿐이고, 이면적으로는 사회를 비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영화는 블랙 코미디 형식으로 전개가 되는데, 코미디의 대상이 되었던 소재는 정치, 언론이었다. 감독은 미국의 토크쇼의 앵커들이 케이트의 발견에 대해 보도할 때, 보였던 "참을 수 없는 가벼운"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언론은 사실을 보도하는 집단이 아니라 사실을 "시선을 사로잡도록 편집"을 한 후에 내보내는 집단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듯 보인다. 결국 언론은 가치중립적인 사실, 팩트를 시청자들의 입맛에 맞게 가공해서 내보내는 곳이기 때문에 시청자들이 보수 지지층인지, 진보 지지층인지에 따라서, 또는 젊은 사람인지 노년층인지에 따라 다르게 가공한다. 예상컨대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언론은 뉴스를 오락적으로 소비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는 채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섹시한 여성 아나운서 그리고 유머러스한 남자 아나운서의 티키타카를 주 무기였던 프로그램에 케이트와 랜들이 전달하고자 했던 위기 경보는 프로그램 특성상 맞지 않았다. 재밌으려고 본 프로그램에서 세상이 멸망한다는 소식을 듣는데, 누가 진지하게 들을 수 있을까. 하지만 이런 슬픈 아이러니 상황에서 다시 곱씹게 되는 건 언론은 더이상 엔터테인먼트가 가미되지 않으면, 주목받을 수 없는, 그저 가벼운 매체가 되어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시청률이 중요한 언론사는 사람들의 주목을 살 수 없으면 생존할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지만 진실을 알리려고 동동대는 케이트와 랜들을 보고 있자니, 참 야속한 현실이 아닐 수 없었다. 미국의 옐로우 저널리즘을 보면서 우리 나라의 언론도 크게 다르지 않음을 통감하며, 동질감마저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올리언의 역할이 참 얄미웠다. 트럼프가 모티프라던데, 정치 선전에 심혈을 기울이는 정치인 캐릭터를 보고 있자니 블랙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결국 이 영화에서 가져갈 메시지적 포인트는 결국 두 과학자의 확신의 찬 외침은 정치인들의 확신의 찬 연설 듣는 것과 다르지 않고, 일반인들에게는 그저 선동으로만 보였다는 것이다. 더 이상 무엇이 진실인지 구분지을 수 없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메시지만이 명확했을 뿐이었다.
2. 배우들의 유명세에 너무 의지해 버린 나머지 개연성을 챙기지 못한 플롯
보고 있자니, 이 영화는 혜성으로 인해 세상이 종말하는 플롯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감독은 하나의 이슈가 터졌을 때, 세상이 종말하든 말든 그에 대해 각자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하며, 소통이 불가한 현 상황을 풍자하고 싶었던 것 뿐이었던 듯하다. 하지만 관객들에게 그런 화두를 던지고 싶었던 거라면, 왜 굳이 혜성이라는 소재를 사용했어야 하는 걸까. 영화를 보면서도 개연성에 대한 의문은 계속 들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혜성이 날라온다고 하면, 응당 기대되는 인물들의 반응, 예를 들어, 분위기가 심각해지며, 이 난관을 헤쳐나가야 할 드림팀을 꾸린다든지 하는 플롯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이 정보를 믿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에 초점이 맞추어져 이 두 과학자들이 조롱을 당한다. 이런 내용은 새롭게 다가올 수도 있지만 보면 볼수록 읭?스러운 부분도 넘쳐났다. 감독은 상식을 뛰어넘는 인물들의 행동을 통해서 웃음을 유발하고 싶었던 것인지, 불편한 감정을 유발하고 싶었던 것인지 의도를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려다가 실패한 느낌이었다. 비판도 하고 싶고, 웃음도 주고 싶은 감독의 마음이 이해가 가지만 둘 다 잡으려다 개연성을 놓친 것 같은 느낌이랄까.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캐스팅 하나는 정말 기깔나게 잘 했다. 주연급 배우들은 말할 것도 없고, 카메오로 티모시 샬라메, 아리아나 그란데가 나오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유명 배우들이 역할과 상황에 모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느냐라고 한다면, 단연코 아니었다고 말할 것이다. 이들의 연기력이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아무래도 블랙코미디인만큼 그들의 연기가 오버스러웠기 때문인지 그들의 정극 연기가 익숙해져 있는 나로서는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정극 연기자들의 코미디 연기가 어색했기 때문인지, 내가 그들을 바라보는 관점이 문제였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생각이 더 필요한 부분이다.
3. 총평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팬이라면, 한 번 정도는 킬링타임용으로 보면 좋을 듯하다.
삶의 활력을 더해줄 가벼운 코미디 장르를 찾고 계신다면, 이거 말고, 차라리 브루클린 나인나인을 추천한다.
돈룩업에 대한 리뷰를 쓰다가 브루클린 나인나인을 추천하는 꼴이라니, 하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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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F 데일리] 선한 인물은 아니지만 비난할 수 없는 어떤 여자의 이야기
한국영화의 오늘 부문에 선정된 황슬기 감독의 <홍이>는 2022 영화진흥위원회 독립예술영화 제작지원작이다. 사회의 불안정한 현실과 개인의 내면적 갈등을 세밀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각기 다른 이해관계를 지닌 인물들이 얽힌 이야기인 만큼 인간관계의 소중함과 동시에 복잡함을 깊이 있게 다루어 내고 있는 작품이다.
영화 정보
감독
황슬기
출연진
장선, 변중희, 이유경, 기윤
시놉시스
홍이에게는 가난함의 사정이 많아 비밀과 오해도 많다. 치매 초기에 접어든 엄마를 외딴 요양원에서 자신의 단칸방으로 모셔 오면서도, 홍이가 바란 건 엄마가 아니라 엄마의 통장이다. 지나간 연애는 갚지 못한 빚과 험악한 말들로 얼룩져 있고, 이제 막 시작된 연애는 잘해 보고 싶은 나머지 위태로운 거짓말로 치장된다. 그러는 동안 꿈은 여전히 먼발치에 있고 젊음은 조금씩 시들어간다. 제20회 부산국제영화제 올해의 배우상 수상자인 장선의 예민한 연기는 인물 홍이를 거의 미스터리 그 자체로 만든다. 물러나지 않는 불행과 행복에의 안간힘 사이에서 홍이는 오늘도 대책이 없고 해석이 요원한 의문의 인물이다. <홍이>는 인물과 관계에 관한 집요하고도 서늘한 묘사력으로 관객의 심정을 흔들어 놓는다. (정한석)
감독
황슬기
출연
장선, 변중희, 이유경, 기윤
영화리뷰
빚에 시달리는 홍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을 한다. 아침에는 학원에서 중년 여성들에게 국어를 가르치고, 낮에는 공사장에서 일하고 있다. 고립된 생활을 반복하던 그녀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현실에 지쳐 치매에 걸린 엄마를 요양원에서 모셔와 자신의 빚을 갚기 위해 이용하게 된다. 처음엔 죄책감을 느꼈지만 빚을 갚고 데이트를 즐길 여유가 생기기 시작하자 점점 엄마의 돈을 몰래 쓰는 것이 아무렇지 않게 된다. 일과 일상을 병행하며 엄마의 간병까지 더해진 버거운 일상이 반복되자, 홍은 또 다른 선택을 고민하게 된다.
그녀의 일상에 성큼 다가갈수록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엄마에 대한 문제를 자신이 책임져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그 의지를 실천하는 마음에 감동하기도 잠시, 결국 그 마음속에는 ‘목적’이 존재했다는 것이 밝혀진다. 그 선택을 비난할 수는 없지만, 스스로에게 불행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왜 모르는 걸까? 이렇게 의도치 않게 불러온 오해 혹은 이기심으로 인해 불행을 계속해서 반복했고, 그 결과는 오로지 그녀가 책임져야 할 것이었다. 아무리 치장해도 덮을 수 없는 본모습을 그녀도 사랑하지 않는데, 그 누가 그녀를 사랑할 수 있을까.
예상치 못한 사건과 감당하기 힘든 일들은 그녀가 벌인 일들이지만 자각할수록 자신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학습된 무기력은 무책임한 일상을 반복하게 만들었으며 그 결과는 갚지 못해 쌓인 빛과 감당할 수 없는 거짓 말뿐이었다. 그녀가 한 거짓말의 대가는 그 이득보다 더 날카롭고, 또 가혹하게 되돌아온다. 본인이 자초한 일이라는 생각도 물론 들었지만 그녀가 이 모든 것을 책임지기엔 너무 과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러날 생각도 없이 성큼 다가오는 불행과 안간힘을 다해 뻗는 행복은 그녀에게 사치일 뿐인 걸까. 그럼에도 이 사소한 행복조차 쟁취하지 못하는 그녀가 왠지 모르게 안타까웠다. 부디 불행에 익숙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홍의 일상을 그려낸 이 영화에 쉽게 빠져들기는 힘들다. 영화를 보면 볼수록 모순된 감정에 매몰된다. 그녀는 선한 인물도 아니며 오히려 비호감을 살 수 있는 ‘오해’와 ‘이기심’으로 똘똘 뭉쳤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에 대해 감히 함부로 비난할 수 없다.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리고 현재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홍이라는 인물의 일부분만을 본 셈이지만, 그녀를 상당히 입체적으로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선하게 보이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속셈이 있는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며 원하는 것을 쟁취하려는 그 모습은 복잡한 인간성을 잘 담아내고 있다.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인 시선을 넘어서 각자 가진 내면의 갈등을 영화의 시선을 통해 마주하게 만든다.
영화 <홍이>는 다양한 일자리를 전전하며 고군분투하는 인물을 중점으로 두어 현대 사회의 불안정함과 개인의 복잡한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연민의 시선보다는 차가움과 직관적인 시선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접근은 인물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하면서도 삶의 복잡성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든다. 또한, 배우 장선이 마치 영화 속의 ‘홍이’라는 인물이 된 것처럼 감정 표현이 돋보이는 압도적인 연기가 인상 깊다. 거짓말을 하면서 흔들리는 눈동자, 떨 목소리 혹은 언성을 높이는 목소리를 통해 그녀의 감정 변화를 섬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완벽하게 그녀에 대해 공감하기는 어렵지만 그녀의 내면을 깊이 이해하고 갈등과 고뇌를 공유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다. 또한 복잡한 가족 관계를 풀어내며 눈앞에 다가온 초고령화 사회의 미래를 생각해 보게 만든다. 이 부분에 대해서 더 자세하게 다루어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도 존재한다.
영화 상영 일정
10월 6일 16:0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3관
10월 7일 10:3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5관
10월 9일 10:00 영화진흥위원회 표준시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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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재키의 링> 공식 예고편
아카데미 수상 배우 할리 베리가 주연 및 감독을 맡은 스포츠 드라마로, 감동을 선사한다. 모두가 실패한 인생이라고 고개를 젓는 상황에서 파이터로서, 엄마로서 자신의 삶을 되찾는 인간 승리의 여정이 그려진다. 불명예를 안고 링을 떠나온 종합격투기 선수 재키 저스티스(할리 베리). 마지막 경기 이후 계속되는 불운과 사그라들지 않는 분노, 후회로 수년의 시간을 보낸 그녀가 매니저 겸 남자친구인 데시(아단 칸토)의 설득으로 냉혹한 언더그라운드 격투장의 링 위에 선다. 재키의 실력을 단숨에 알아본 격투 리그 프로모터(셔미어 앤더슨)는 그녀에게 영광스러웠던 과거를 돌려주리라 약속하고, 재키는 그렇게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다. 그러나 핏덩이일 때 양육을 포기했던 아들 매니(대니 보이드 주니어)가 그녀를 찾아오면서 감정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기 시작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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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내 여자를 본 사람 있나요?> 예고편
90년대 초 세르게이와 키라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헤미안 커플이었다.
그들은 영화를 사랑하는 인텔리였다. 하지만 그들의 행복하고 로맨틱한 스토리는 힘든 드라마로 변했다.
키라는 다른 도시, 다른 삶, 다른 사랑을 향해 도망쳤다.
하지만 세르게이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남아 이혼 후 머지않아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17년이 지난 후 여전히 아름답고 성공한 키라는그녀의 마음을 영원히 세르게이에게 주었기 때문에 더 이상 행복할 기회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