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5-02-26 17:07:27
브루탈리스트 | 위로, 또 앞으로 나아가는 건축가의 삶
<브루탈리스트> 리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으로 건너온 유대인 건축가 ‘라즐로 토스’(애드리언 브로디). 사촌 '아틸라'(알레산드로 니볼라)의 집에서 지내며 미국 사회에 적응하려던 찰나, 그는 아틸라의 아내 '오드리'(에마 레어드)의 모함에 빠져 쫓겨난다. 건설 현장에서 일하며 냉혹한 현실을 견뎌내던 라즐로. 그런 그에게 아메리칸 드림의 기회가 찾아온다. 그의 천재성을 알아본 사업가 ‘해리슨’(가이 피어스)이 야심 찬 건축 프로젝트를 제안한 것.
건축가로서 재기할 기회를 잡은 라즐로는 열성적으로 프로젝트에 임하고, 빛의 경계를 넘나들며 브루탈리즘 양식이 돋보이는 대담하고 혁신적인 건물 설계안을 완성한다. 이에 더해 유럽에 있던 아내 '에르제벳'(펄리시티 존스)과 '조피아'(래피 캐시디)도 미국으로 건너올 것이라는 소식이 들리자 라즐로는 찬란한 미래를 꿈꾼다. 그러나 해리슨의 감시와 압박, 주변의 비난이 거세지면서 라즐로는 냉혹한 현실을 마주한다.
환상과 허상을 딛고 우뚝 서다
브래디 코베 감독의 <브루탈리스트>는 개봉 전부터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제81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은사자상-감독상과 국제비평가연맹상을 받고,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작품상, 감독상, 남우/여우주연상을 포함해 10개 부문 후보로 선정됐으니까. 영화 내적으로는 근래 보기 드문 15분 간의 인터미션을 포함한 3시간 34분 51초짜리 장편 영화라는 사실이 호기심을 키웠다.
영화 외적인 뉴스도 <브루탈리스트>를 향한 관심을 증폭시켰다. 제작 과정에서 AI를 활용한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 주연 배우인 에이드리언 브로디와 펠리시티 존스의 헝가리어 발음을 보정하는 데는 AI 음성 변조 기술을 사용됐고, 건축 도면 생성에도 AI 기술이 활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AI 기술로 인해 촉발된 미국의 작가 조합 파업과 배우 조합 파업 여파가 남아있는 가운데 논쟁에 불을 붙이는 뉴스였다.
하지만 <브루탈리스트>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바로 제목 그 자체였다. 215분의 러닝타임이 '브루탈리즘'이라는 과거의 건축 사조에 어떤 의미와 서사를 부여하고 쌓을지 의문이었으니까. <브루탈리스트>는 위로, 또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한 건축가의 품위 있는 서사시를 통해 호기심을 완벽히 충족시켜 준다. 아메리칸 드림의 환상과 허상의 폐부를 찌르는 고전을 펼쳐 보이기 때문. 단지 약간의 과욕이 옥에 티일 따름이다.
위로, 또 앞으로 나아가기
<브루탈리스트>는 프롤로그, 제1막, 인터미션, 제2막, 에필로그로 나뉘어 있다. 그중 프롤로그와 제1막 '도착의 수수께끼'는 라즐로가 미국에 정착하는 시기를 다룬다. 전반부는 이미지 두 개로 압축할 수 있다. 하나는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이미지다. 뉴욕에 도착한 배에서 자유의 여신상을 보는 라즐로. 이때 카메라는 그의 시점에서, 아래에서 위로 자유의 여신상을 비춘다. 자연히 여신상은 거꾸로 뒤집혀서 보인다.
다른 하나는 오프닝 크레디트를 장식하는 직진의 이미지다. 라즐로는 버스를 타고 뉴욕에서 필라델피아로 향한다. 이때 카메라는 버스 안에서 밖을 비추되, 버스 전면부로 보이는 풍경을 고정적으로 보여준다. 그 덕분에 목적지를 향해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이미지와 움직임이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이 둘을 합치면 제1막의 서사,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환상을 지탱하는 두 기둥이 모습을 드러낸다.
전자는 미국에 건너온 이민자들이 갈망하는 구원을 상징한다. 나치의 압제에 시달리다가 자유의 땅에서 새출발할 수 있다는 희망을 눌러 담은 셈이다. 이 이미지는 여러 형태로 변형된다. 해리슨의 의뢰로 라즐로는 '마가렛 리 밴 뷰런 센터' 설계를 맡는다. 이때 그는 유독 높이에 집착한다. 그에게 하늘에 가까워지는 것은 그 자체로 구원에 다가간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처음 본 미국 하늘에서 자유의 여신을 만났듯이.
후자는 이민자의 진취성을 상징한다. 희망이 현실로 이뤄지려면 어려움이 따르지만, 그럼에도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 라즐로가 사촌에게 배신당한 후에도 기어코 건축가로서 재기한 것처럼. 이는 라즐로가 설계한 커뮤니티 센터 구조와도 맞닿아 있다. 이 건물은 그의 수용소 생활을 상징하는 작은 방들 안에서 높은 천장을 올려다볼 때 하늘이 드러나는 구조가 핵심이다. 과거를 주춧돌 삼아 현재로 나아가고, 그 위에서 미래를 꿈꾸는 직진과 상승의 이미지로 가득한 셈이다.
인터미션이 만든 고전
이처럼 아메리칸 드림을 현실에서 이룰 듯한 제1막의 감흥은 인터미션 직전에 정점에 달한다. 라즐로는 모두에게 잊혔던 자기 커리어와 명성을 되찾고, 자신을 신뢰하며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기는 든든한 후원자를 만나고, 유럽에서 떨어져 지내던 아내 에르제벳과 조카딸 조피아도 미국으로 데려올 연줄까지 갖춘다. 삶이 원래 궤도로 돌아와 비상하는 바로 그 순간 인터미션이 주어지기에 그의 감격과 환희는 긴 여운을 남길 수 있다.
인터미션 동안 라즐로의 결혼식 사진을 보여주는 연출도 여운을 극대화한다. 이 사진은 아내와 조카딸의 이민 작업에 필요한 서류다. 라즐로의 아메리칸 드림을 완성할 가족이라는 마지막 조각인 셈이다. 그래서 인터미션은 감질난다. 거의 현실이 된 그의 아메리칸 드림이 보여줄 제2막이 궁금하니까. 이는 절반만 봐도 <브루탈리스트>를 고전으로 확신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 인물의 삶에 푹 빠지는 '시네마'다운 경험은 흔치 않기 때문.
다른 의미로도 인터미션은 인상적이다. 인터미션 덕분에 라즐로의 감정선은 제1막의 끝과 제2막의 시작에서 극명히 대조되며, 아메리칸 드림의 그림자를 직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 밝은 미래를 확신한 라즐로. 하지만 아내와 조카딸을 기차역에서 재회한 순간 그의 기대는 부서진다. 하체가 마비된 아내와 실어증에 걸린 조카딸은 그가 상상한 가족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 그가 애써 외면하던 현실이 가족의 모습으로 등장한 셈이다.
환상 뒤에 숨은 허상
제2막 '아름다움의 견고한 본질'은 라즐로가 목도한 현실,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을 구체화한다. 허상은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이중성이다. 미국인은 이민자를 환영하는 듯하나, 그들이 주류 사회에 동화되지 않으면 차별한다.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라즐로가 겪는 고초가 방증이다. 일례로 커뮤니티 센터 내에 교회를 짓기로 합의한 후에도 지역 사회는 라즐로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그의 의도를 불신한다.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의 횡포다. 라즐로와 해리슨의 관계 변화가 대표적이다. 처음에는 라즐로가 해리슨보다 우위에 있다. 라즐로는 해리슨이 애걸한 끝에 그가 제안한 커뮤니티 센터 프로젝트를 수락한다. 하지만 건설 프로젝트는 필연적으로 막대한 자본이 필요하고, 선의로 시작된 후원자와 수혜자 관계는 점진적으로 수직적인 위계 관계로 비틀린다. 그렇게 해리슨은 돈을 목줄 삼아 라즐로를 통제하려 한다.
왜곡된 관계는 다른 영역에서 갈등을 초래한다. 라즐로 가족은 해리슨 가족으로부터 인격적 모욕을 당한다. 라즐로는 만찬 자리에서 해리슨에게 구두닦이 취급을 당하고, '해리'(조 앨윈)는 조피아에게 추근거린다. 가치관도 충돌한다. 철로 사고로 인해 부상자가 발생했을 때, 라즐로는 예술가로서 프로젝트를 강행하려 한다. 그에 반해 해리슨은 회사 이미지가 악화될 것을 우려해 공사 현장 직원을 모두 해고하고 프로젝트를 중단한다.
환상 뒤에 숨은 허상은 건축적으로도 암시된다. 제1막에서는 빛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고뇌가 중점이었다. 커뮤니티 센터에 교회를 설계할 때 라즐로는 햇빛을 어떻게 십자가 모양으로 다듬을지를 고심했다. 마치 아메리칸 드림의 빛을 보여주는 듯하다. 반면에 제2막에서는 건물의 그림자 안에 깃든 추악함이 두드러진다. 공사가 재개된 후, 채석장 동굴 안 터널에서 해리슨은 술과 마약에 취한 라즐로를 강간한다. 그 이후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라즐로와 제1막 끝에서 환희에 찬 그를 비교하면 이보다 극적인 추락도 없다.
브루탈리즘이 마련한 구원의 길
아메리칸 드림의 이중성이 밝혀지는 과정을 쫓다 보면 제목 '브루탈리스트'의 의미도 서서히 분명해진다. 사전적으로 브루탈리즘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의 재건 과정에서 등장한 건축 사조를 뜻한다. 이전의 모더니즘이 추구하던 기능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게 특징이다. 적은 수의 창문과 기하학적 구조를 외장 없이 노출된 콘크리트 건축물로써 표현하는 양식이다.
극 중 라즐로는 브루탈리즘 양식의 특징을 구원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듯하다. 그는 위양을 꾸미지 않고 콘크리트 구조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특성을 솔직함의 미덕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그는 재개된 커뮤니티 센터 건축에 열과 성을 다한다. 자신의 상처와 절망, 구원을 향한 희망, 그의 탈선과 집착까지도 숨기지 않은 채로. 아메리칸 드림의 '잔인함(brutal)'에 '브루탈리스트(brutalist)'답게 맞서는 셈이다.
실제로 제2막의 후반부는 솔직한 고백의 향연이다. 라즐로는 아내가 미국에 도착한 이후로 숨겨왔던 마약 투여 사실을 고백한다. 에르제벳은 해리슨이 라즐로에게 저지른 만행을 그의 가족과 사업 관계자들 앞에서 폭로한다. 더 나아가 그들은 마침내 아메리칸 드림 앞에서도 솔직해진다. 환상과 허상을 모두 거두어 내고 현실만 직시한다. 그래서 그들은 조피아가 이민 간 이스라엘로,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로 한다.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으로 인해 그들의 선택은 종교적으로도 의미심장하다. 특히 라즐로와 해리슨의 대비가 눈길을 끈다. 유대인이라서 배척받은 라즐로는 구원받지만, 해리슨을 비롯해 그를 배척한 이들은 구원받지 못했으니까. 라즐로는 자신의 건축물이 그랬듯이 신 앞에서 떳떳해졌다. 그 솔직함은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그의 회고전이 열릴 정도로 높아진 명예로 보답받았다.
반면에 독실한 개신교도라던 해리슨은 죄악을 숨기려다가 파멸했다. 그는 라즐로를 강간했다는 진실이 밝혀지자 커뮤니티 센터 교회의 그림자 속으로 실종된다. 그 순간 햇빛 대신 달빛으로 만들어진 역십자가는 그의 비극적 최후를 암시한다. 이 대조적인 결말에 다다르면 <브루탈리스트>를 호평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민자라는 보편성과 유대인 건축가라는 특수성의 접점을 이렇게까지 깊고 다층적으로 파고들기는 어려울 테니까.
시대의 반영 또는 과욕
다만 에필로그는 옥에 티다. 이민자 서사와 유대인 서사 사이에서 절묘하게 잡았던 균형을 잃어버리기 때문. 라즐로는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열린 본인 회고전에 조피아와 함께 참석한다. 그 자리에서 조피아는 라즐로의 건축세계를 설명하는 연설을 한다. 마가렛 리 밴 뷰런 센터의 디자인은 라즐로가 지냈던 강제수용소를 재현한 것이고, 그의 건축 세계에서는 과정보다는 목적지가 중요했다고.
얼핏 듣기에는 조피아의 연설이 라즐로가 추구한 건축 세계의 핵심만 짚어주는 듯하다. 하지만 화자가 라즐로가 아닌 조피아라는 점을 생각하면 연설의 뉘앙스가 미묘해진다. 극 중 조피아는 유대인들이 조상의 땅이었던 팔레스타인 지방에 유대 민족 국가를 건설하는 게 신의 사명이라고 믿는 강성 시오니스트로 묘사됐기 때문. 그녀의 신념은 라즐로와 에르제벳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의 이민을 강행할 정도로 굳건하다.
이 맥락에서 조피아의 연설은 다양한 종교적, 역사적, 예술적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주던 <브루탈리스트>의 이야기를 유대인 정체성과 시오니즘 이데올로기 안에 가두는 것처럼 느껴진다. 구원을 원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시오니즘을 추구하는 이야기로 탈바꿈하는 셈이다. 특히 영화의 시작과 끝에 라즐로가 아니라 조피아가 등장하기에 시오니즘 메시지는 더욱 강조된다.
물론 주인공을 유대인으로 설정한 이상 시대상을 반영한 불가피한 결과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수단을 가리지 않고 목적을 추구한 시오니즘이 2025년에도 끝나지 않은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을 유발한 현실을 고려한다면, 에필로그는 <브루탈리스트>의 유일한 오점이 아닐까 싶다. 에필로그에서 욕심 한 숟갈만 덜어낼 수 있었다면 보편성까지 갖춘 명작이자 고전으로 기억되리라는 점에 두말할 여지가 없을 테니까.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유대인 이민자의 과거와 현재가 지어 올린 아메리칸 드림의 빛과 그림자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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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울과 절망에 감염된 사람들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전염성이 있다. 기분이 좋을 때, 기분이 나쁠 때 그리고 우울할 때 느끼는 감정들은 나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에게까지 전달된다. 내가 가진 감정을 말로 표현할 때도 있지만 표정과 몸짓에서 드러나는 그 감정은 은은하게 주변에 스며든다.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도 그 감정이 전달되지만 잘 모르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그 감정은 충분히 전달될 수 있다. 일상에서는 그것을 느끼기가 조금 어렵겠지만 공통의 관심사를 가지고 방문하는 스포츠 경기장이나 공연장은 감정이 퍼지는 것을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곳이다. 그런 장소에서 느껴지는 일종의 동질감은 굉장히 빠르게 전체 공간으로 퍼져나간다. 그렇게 희로애락은 강하게, 때론 조금 은은하게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영향을 주고 있다.
여러 감정 중 우울과 절망은 꽤 전파력이 있다. 누구나 자신의 내면에 어두운 기억이나 감정을 가지고 있다. 평소에는 그것이 잘 나오지 않지만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나 주변의 도움이 필요할 때 그런 안 좋은 기억과 감정이 튀어나올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아무리 이성적이고 밝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잠시 우울한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나온 우울한 감정은 주변 사람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주고 그것을 보는 상대방에게도 우울의 감정이 옮겨갈 수 있다. 좋게 보면 같은 감정을 주고받는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자칫 잘못하다간 모두가 우울의 구덩이에 빠져 괴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그리고 그 우울과 절망은 자신이 오염시킬 누군가를 찾는다.
우울과 불안이 전염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 <스마일>
영화 <스마일>은 우울과 불안이 전염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공포영화다. 영화의 주인공인 로즈(소시 베이컨)는 정신과 전문의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그가 병원에서 환자들을 다루는 모습과 간호사들과 소통하는 모습은 무척 이성적으로 보인다. 영화 초반에 그가 등장하는 모습들에서 우울함과 불안이라는 감정을 볼 수 없다. 아마도 로즈는 우리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사람보다 좀 더 이성적으로 느껴지는 사람일 것이다. 그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의 감정을 이해하면서 적절하게 통제할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앞에 환각과 심각한 불안 증세를 보이는 여자 대학생이 나타난다. 로즈는 그 응급환자에게 똑같이 이성적으로 접근하지만 그 환자는 어느 순간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으며 로즈의 앞에서 자신의 목을 그어 자살한다.
로즈는 그 환자의 우울과 불안을 고스란히 경험했고 그 우울과 불안이 가져오는 최악의 결과를 눈앞에서 목격했다. 그 자신은 인지하지 못했지만 그것을 경험하면서 전달된 우울과 불안은 이성적이었던 로즈의 마음을 조금씩 들쑤신다. 영화는 로즈가 조금씩 우울과 불안에 잠식되어가는 과정을 차근차근 보여주고 있다. 처음에는 별일 없는 듯 넘어가고 주변과 교류도 하지만 이상한 환영을 보고 놀라면서 조금씩 평상심을 잃는다. 영화가 보여주는 이런 일련의 과정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우울증 환자들의 초기 모습처럼 느껴진다. 본인도 그 증상에 대해 심각하게 느끼지 않고 주변 사람들도 크게 신경 쓰지 않지만 어느 순간 예민해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거나 주변 사람들이 무언가 정상적이지 않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때가 그 증상이 심각해질지 아니면 다시 원래의 감정으로 돌아올지를 결정하는 것 같다.
이 영화는 공포영화의 문법을 사용하는 이야기인 만큼 사람들이 죽는 법칙을 만들어두고 있다. 우울과 불안을 느끼는 사람이 자살하는 것을 목격하는 사람은 그 저주가 전염된다. 영화에서는 그것을 일종의 저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실제로도 누군가의 자살을 목격하는 것은 또 다른 우울과 불안을 야기한다. 그건 실제로 저주라고 할 수는 없지만 목격한 사람에게는 트라우마로 오랜 시간 남고 정신적으로 꽤 힘든 시간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영화 <스마일>을 다 보고 나면 주인공이 겪는 심리적인 변화가 일종의 저주뿐만 아니라 그동안 그가 가지고 있던 내면의 우울과 불안이 폭발하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만큼 그가 우울과 불안에 잠식되는 과정이 무척 실감 나게 담겼다.
그렇게 점점 우울해지는 주인공 로즈의 주변에 있던 가족들과 가까운 사람들은 하나둘씩 멀어져 가고 등을 돌린다. 그리고 로즈는 시간이 갈수록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한다. 그럴수록 절망은 커지고 상황은 안 좋아진다. 한 사람 정도 도움을 주는 사람이 생기지만 로즈가 외치는 도움의 외침은 외부로 강력하게 분출되지 못한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갑갑하고 불안해진다. 영화 속 인물의 불안한 감정이 관객들에게도 잘 전달된다는 이야기다.
정통 공포영화보다는 심리 호러에 가까운 이야기
이 영화를 연출한 파커 핀 감독은 <잠들지 못하는 로라>라는 단편영화를 연출한 적이 있다. 2020년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상영된 이 단편 작품에서도 감독은 불안과 공포를 무척 효과적으로 시각화해서 보여준 적이 있다. 이 영화에서도 계속 악몽을 꾸는 주인공이 불안과 공포에 잠식되어가는 과정을 무척 실감 나게 묘사했으며 그것이 관객들에게도 그대로 전달되었다. 영화 <스마일>은 파커 핀 감독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불안의 잠식 과정을 그대로 장편 영화에 녹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공포 영화답게 영화에는 깜짝 놀라게 하는 장면이나 기괴한 장면들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몇몇 깜짝 놀라게 하는 장면을 제외하면 그렇게 공포스러운 장면이 많이 포함되어 있지는 않다. 그래서 조금 하드 한 공포영화를 기대한 관객들에게는 조금 심심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래도 심리적인 공포를 좋아하는 관객들에게는 이 영화가 꽤 무섭게 느껴질 것 같다. 가장 이성적으로 보였던 주인공이 우울과 불안에 잠식되어 회색빛으로 변해가는 듯한 묘사는 충분히 공포스럽다.
누군가가 죽는 모습을 보면 저주가 옮겨간다는 측면에서 영화 <링>을 떠올리게 한다. <링>은 녹화된 영상을 보면 일주일 안에 죽는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는데, <스마일>도 저주에 걸린 사람이 죽는 모습을 목격하면 일주일 안에 죽는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링>의 또 다른 버전이라고 볼 수 있겠다. 저주의 원인까지 파악은 못하지만 그 저주의 법칙을 알아내고 피하려고 애쓰는 모습에서 자연스럽게 <링>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일종의 오마주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에는 제목인 <스마일>처럼 웃는 장면이 그렇게 많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반대의 모습인 우울과 불안은 영화 내내 등장해 관객에게 공포를 선사한다. 기괴한 웃음도 소름 끼치지만 점점 고립되는 주인공의 모습과 내면의 불안과 사투를 벌이는 모습이 더 큰 공포를 전달한다. 정통적인 공포영화의 시각에서 보면 다소 아쉬운 점이 있지만 사람들의 심리적인 변화 과정을 공포스럽게 담았다는 측면에서는 꽤 훌륭한 공포영화로 만들어졌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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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찰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 '레이'님의 콘텐츠입니다. 출처는 하단의 주소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들은 일반 관객이 이해할 수 없는 범주를 향해 나아가지 않는다. 대중적이지 않은 소재를 다루면서도 대중이 공감할 수 있는 지점에서 멈추는 카메라는 현실과 극의 경계에 머물며 관객이 불편해지기 시작하는 시점에 도달한다. <언노운 걸>, <소년 아메드>와 같은 영화들은 다르덴 형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해도, 극중의 배경에 대해 몰라도 이해하는 데 거의 지장이 없다. 대단히 일반적인 관객을 상정하는 이들 카메라는 그러면서도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 선에 머문다. <토리와 로키타> 속 토리(파블로 실스 분)와 로키타(졸리 음분두 분)에게 벌어지는 폭력은 유혈사태와는 거리가 멀고 로키타를 클로즈업하여 폭력을 가리거나 로키타에게서 거리를 둠으로써 폭력을 간접적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로키타를 향한 폭력은 토리에게 직접적으로 보이지 않거나 폭력의 사후에 발견된다. 폭력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으면서, 그리고 피해자의 감정적인 모습을 포착하지 않으면서 관객에게 폭력의 심각성을 알리는 고단수의 관찰은 한편으로는 폭력으로부터 관객을 무감각하게 유리시키기도 한다.
성폭력을 위시한 폭력을 묘사할 때 묘사자는 2차 가해와 폭력 포르노로부터 끊임없이 스스로를 검열해야 한다. 폭력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는 문제의 심각성을 환기하고 이목을 집중시키는 효과를 내지만 때로는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가 되기도 하고 모방범죄를 일으키기도 한다. 또한 폭력을 묘사하기 위해 진행된 촬영 과정에서 재연 배우가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들에서 카메라는 결코 포르노의 선을 넘지 않지만 관객의 다소 냉담한 반응을 감수해야 하기도 한다. 영화상 로키타가 겪는 첫 성폭행은 대단히 간접적으로 묘사되기에 일부 관객은 알아차리지 못할 가능성마저 있다. 흥미롭게도 로키타가 겪는 성폭행에 대한 묘사는 서사가 진행되며 직접적인 묘사로 나아가는데(그러면서도 카메라는 로키타에 대한 섹슈얼한 시선과는 거리가 멀다), 관객의 시선과 토리의 시선이 일치해간다. 일부 둔한 관객은 알아차리기조차 쉽지 않은 첫 성폭행 장면에서 토리는 아예 배제되어 있다.
토리와 로키타의 현 상황에 대해서만 묘사하던 카메라는 영화 초중반이 되어서야 이들이 겪고 있는 문제를 드러낸다. 토리에게는 발급된 체류증이 로키타에게는 발급되지 않았고, 따라서 토리와 로키타는 헤어질 위기에 처한다. 로키타가 체류증을 정말 발급받아야 하는 상황인지, 이 둘이 친남매가 맞기는 한지, 로키타가 돈을 부친다는 부모는 친부모인 것인지 카메라는 현실적인 영역에는 결코 들어서지 않는다. 카메라의 관심은 오직 합법적으로 벨기에에 머물 수 없는 로키타와, 로키타와 헤어져야 하는 토리가 겪는 폭력적인 상황 뿐이다. 즉 다르덴 형제의 카메라는 정치적인 영역으로 전력을 다해 발을 내딛지 않는다. 체류증이 발급되지 않은 로키타와 헤어져야 하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토리의 질문은 로키타를 향한 온정적인 시선을 요청하는 듯 보이지만 정작 로키타의 상황은 정확히 설명되지 않는다. 토리의 질문은 로키타에 대한 그리움으로써 묘사될 뿐 로키타의 체류증에 대한 당위성으로 이용되지 않는다.
최종적으로 다르덴 형제의 카메라가 도달하고자 하는 곳은 어디인가. 체류증이 필요한 이들에 대한 온정적인 시선인가, 이들을 둘러싼 역사적인 혹은 현실적인 문제들인가. 카메라는 이들 중 어디에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며, 오직 약자를 이용하려는 가해자의 뒷모습만을 끊임없이 쫓아 들어간다. 토리와 로키타는 합법적인
앵벌이노동이 불가능한 상황이기에 너무나도 쉽게 불법적인 아르바이트에 동원된다. 이들이 발을 들인 공간은 애초에 불법이므로 그보다 더한 폭력이 발생하더라도 공권력의 개입은 도리어 위협이 된다. 이는 공권력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인 토리와 로키타가 경찰을 보자 오히려 피하려고 하는 장면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폭력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는 카메라는 사실은 폭력의 막다른 골목을 향하고 있는 셈이다.카메라가 관객의 온정적인 시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유는 지극히 합리적이다. 일반인의 온정이 아닌 정치적인 문제가 해결되어야 토리와 로키타의 상황이 개선되기 때문이다. 언뜻 정치적인 선으로 넘어가지 않으려 애쓰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의 시선은 사실은 가장 정치적인 상황을 상정한다. 토리가 질문을 퍼붓는 면접관조차도 이들을 돕고 싶어하지만 규정이 변경되지 않는 이상 로키타는 체류증을 발급받을 수 없다. 다르덴 형제의 전작들, 특히 <언노운 걸>의 시선도 마찬가지였다. 의사 제니(아델 에넬 분)가 진료 시간이 끝나 더 이상 진료하지 않아 발생한 의료사고는 제니의 잘못으로 치부될 수 없다. 언뜻 개인의 잘못들로 점철된 것만 같은 사회는 사실은 집단적인 오류에 기반하고 있으며, 다르덴 형제의 카메라는 역설적으로 가장 개인적인 곳으로 렌즈를 들이대어 이를 폭로한다.
한쪽 다리를 다쳐 토리와 함께 모래 언덕을 하강하는 로키타의 모습은 이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신체의 일부만을 다쳤을 뿐이지만 이동 자체가 불가능해진 로키타에게 남은 선택지는 토리만을 보내거나 토리와 함께 급속도로 하강하는 것이다. 로키타와 하강하기를 선택한 토리에게는 아직 두 다리라는, 즉 체류증이라는 선택지가 있다. 하지만 스스로 도망칠 수 없는, 즉 체류증이 없는 로키타는 어디로도 갈 수 없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이들을 비추는 카메라는 그저 멀리서, 지켜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없는 관객의 시선을 대변할 뿐이다.
*본 리뷰는 씨네랩의 시사회 초청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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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AN 데일리] 책 한 권이 촉발한 사회적 패닉
사탄의 부름(Satan Wants You)
메리 고 라운드 부문
숀 홀러, 스티브 J. 아담스 감독
Canada/2023/90min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80년. 미국에서 《미셸은 기억한다(Michelle Remembers)》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미셸이라는 이름의 여성이 어린 시절사탄 숭배자들에게서 14개월간 학대되었다는 게 요지였다. 동물을 잔인하게 도살하는 장면을 강제로 목격하게 하고, 죽은 태아를 숭배 의식에 활용하는 등 미셸의 폭로는 끔찍한 내용으로 가득했다. 책은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다. 미셸은 그녀의 상담가이자 책을 함께 쓴 로런스와 투어를 다니며 사람들에게 자신의 기억을 들려줬다. 아버지의 폭력과 방치에 지친 어머니가 사탄 숭배자였고, 미셸을 단체에 넘겼다는 사실은 이 사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더욱 증폭시켰다.
그러나 미셸의 폭로와 ‘성공’을 다루던 영화 〈사탄의 부름〉은 이내 방향을 튼다. 주지하다시피, 지금은 누구도 당시 미 전역을 들썩였던 사탄 숭배자를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다. 도대체 그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사탄 숭배 범죄는 실재했을까? 〈사탄의 부름〉을 따라가 보자.
미셸과 로런스가 화제가 되자 자신도 미셸과 같은 사탄 숭배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줄을 이었다. 심지어 한해 200만 명의 아동이 사탄 숭배자들에게 납치되어 희생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사탄 숭배 집단은 그만큼 핫한 이슈였다. 그러자 일부 상담가와 정신 건강 전문가들이 지금이 기회라는 듯 자신이야말로 사탄 숭배 전문가라고 나섰다. 사탄을 판별하는 ‘자격증’까지 생겨났다. 일부 경찰은 ‘주님의 경찰’을 자처하며 사탄 숭배 범죄를 소탕하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즉, 사탄 숭배 퇴치는 거대한 시장, 문화적 현상이 되어 공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끼쳤다. 요컨대 미셸과 로런스의 ‘사탄 공포’ 장사는 ‘대박’을 쳤다.
사탄 몰이는 무고한 피해자를 양산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사탄 숭배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을 별 의심 없이 낙인찍었고, 사법체계 역시 이들을 재빠르게 처벌했다. 아동 학대 사건의 두터운 사회적 맥락은 소거된 채 모든 것이 사탄 숭배자 탓으로만 단순화됐다. 사탄 숭배자들의 범죄 증언에 조금이라도 비판적 시각을 보이는 사람은 ‘사탄 숭배자’가 아니냐며 추궁받았다. 사탄 숭배라는 압도적 진실은 그 어떤 의심도 허용하지 않았다.
도대체 이 모든 일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영화는 《미셸은 기억한다》 신드롬이 환자의 취약성과 상담사의 야심이 결탁한 결과, 그리고 이를 선정적으로 소비한 사회의 합작품이라고 말한다. 로런스는 그저 그런 평범한 의사로만 남을 수는 없다고 고민하던 찰나 영화 〈악몽(Sybil)〉을 봤다. 어릴 적 끔찍한 학대의 경험으로 악몽을 꾸는 인물이 주인공인 영화였다. 그러던 중 정신적 문제로 고통을 겪은 미셸을 소개받는다. 로런스의 머리가 번득인다. 로런스는 미셸의 고통과 자신의 야심을 교묘히 결탁해나간다. 미셸의 고통에 자신의 상상력을 덧씌워 이를 ‘사실’로 만들고자 한 것이다.
미셸 역시 여기에 적극 동참한다. 정신적, 심리적 문제를 가진 환자에게는 의사의 관심과 흥미가 보상이다. 자신의 아픔을 인정받고 공감받고 싶은 환자는 의사들이 유도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기억을 왜곡할 수 있다. 둘 사이의 로맨스는 이 현상을 더 가속화했다. 이렇게 로런스와 미셸은 각각 유명해지고 싶다는 욕망과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을 교환해 시대를 풍미한 스캔들의 계기를 마련했다. 여기까지가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초래한 사건의 전모다.
〈사탄의 부름〉은 1980년대 미국에서 있었던 일을 다룬다. 하지만 권한, 영향력, 돈을 갈망하는 사회적 관심 끌기의 문제는 당시 미국의 일만이 아니다. 《미셸은 기억한다》 유의 스캔들은 지금까지도 다른 형태로 수없이 반복되어왔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사람들의 감정이 어떻게 뭉치고 흩어지는지, 그 감정의 흐름이 기존의 권력 구조와 만났을 때 어떤 파괴적 효과를 자아내는지에 관한 흥미로운 통찰로 가득하다. 가톨릭교회는 이 사건을 사람들이 더는 신을 믿지 않는 시대에 경종을 울리는 계기로 활용하고자 했고, 언론은 그저 신이 나서 ‘사탄 숭배’ 보도를 이어갔으며, 공권력과 사법 체계는 극도로 무능하기만 했다. 사탄 숭배 비난이 보수적 도덕의 강화로 이어졌음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단순히 과거의 흥밋거리를 다루는 것을 넘어 감정의 사회, 문화, 정치적 효과를 고민하게끔 하는 영화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을 통해 기자로 초청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제2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는 6월 29일부터 7월 9일까지 온오프라인에서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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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F 데일리] 그래도 살아간다
세상에는 아무리 소리쳐도 세상 사람들에게 닿지 못하는 외침들이 있다. 거대 자본, 거대 권력들이 소시민들의 일상에 개입할 때에 외침들은 그저 묵살되어 버린다. 여기, 다리가 없지만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카자흐스탄의 한 가장이 있다. 그는 아내와 사별하고 아들과 함께 사는데, 아들이 참 효자다. 아들은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아버지의 결혼 상대를 찾아주고 싶어 친구와 함께 '아버지 신붓감 찾기 프로젝트'를 감행한다. 이 부자는 신붓감을 찾아 온전한 가족으로 거듭날 수 있을까? 하지만 길이 참 험난해 보인다.
1. 간단한 플롯 속 노골적인 듯 하면서 함축적인 복선들
이 영화의 플롯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어린 아이의 시선에서 아버지, 멜리스의 짝을 찾아주고 싶은 아들, 갈라스의 순수한 마음이 돋보이고, 그 과정에서 참 눈치없는 갈라스의 친구는 특유의 순수함으로 갈라스의 속을 뒤집어놓기도 한다. 그게 이 영화의 개그 포인트이자 웃음을 유발하는 지점인데, 영화가 어수룩한 것 같으면서도 지루하지 않았던 것이 영화 중간에 이런 개그포인트들이 간혹 등장해 주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영화 속 배경이 되는 마을은 주민들이 별일없이 살아가는 평범한 마을일 것 같지만 고르바초프가 통치하던 소련 말기, 공산주의에 대한 신념을 관성처럼 지니고 사는 사람들이 많은, 아직 레닌을 잊지 못한 사람들이 사는 그런 시골 동네로 그려진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장애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인 것 같은데, 멜리스는 다리가 없고, 보건소에 가면 두 팔이 없는 사람도 있고, 어딘가 정신을 놓은 듯한 사람이 마을을 돌아다니며 악을 써대기도 한다. 이 정상적이지 못한 마을의 사람들은 어쩌다가 이 마을에 모였을까 생각하게 된다. 처음에는 예전에 우리 나라에서도 한센병 환자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관리했던 것처럼 그런 식으로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모아놓은 마을인 걸까 싶었다.
하지만 영화를 보다보면 함축적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했지만 노골적으로 보이는 복선들이 있다. '반핵 운동'이라는 단어가 종종 등장하고, 마을이 핵 실험지로 이용되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정부를 무조건적으로 믿는 사람들이 대립하는 장면들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서 이 마을은 핵 실험의 대상이 된 마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영화 속 시대적 배경이 미국과 소련이 핵 개발경쟁이 극에 달했던 시기이기 때문에 왜 영화 속 사람들이 다 장애를 안고 살았는지 알 수 있다. 핵 실험을 진행하던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핵에 노출될 수 밖에 없었기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병이 생기고 있거나 병을 안고 태어나는 경우가 다반사였던 것이다. 멜리스가 갈라스에게 소련 시기의 주문처럼 외우게 했던 이념적 말들을 통해 반핵 운동이 일고 있는 와중에도 아직도 국가가 주입시킨 이념적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다. 어떤 분들은 함축적인 표현을 했다고 하시던데, 오히려 나는 그 복선들이 노골적으로 표현되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함축적으로 보이려는 형식적인 면모가 있긴 했지만 너무 의도가 잘 보여서 영화를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은 없었던 것 같다.
2. 자신이 살아온 삶을 넘어 사고하지 못하는 존재, 그 존재는 곧 인간.
멜리스는 짜증나리만큼 체제에 순응하면서 살아간다. 불만을 딱히 표현하지도 않고, 자신의 욕망을 대놓고 드러내지도 못한다. 고르바초프 때면 공산주의 이념주의도 많이 시들해 졌을 시기일 텐데도 아직도 레닌을 잊지 못하고 국가가 만들어놓은 벽을 깨트리지 못한다. 레닌이 만들어 놓은 세상 이외에는 다양성 있는 사회에 대한 경험이 없어 그럴 것이다.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기에 그저 정부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는 그들의 현실을 보고 있자니, 아직도 이념 논리로 정치 갈등을 유발하시는 어떤 분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마치 세상에는 진보, 보수 두 가지의 인간만 있다고 생각하고 세상을 거시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을 간혹 가다 보게 된다. 인터넷 상에서도 수없이 보게 되지만 1:1로 대화하는 와중에도 갑자기 그런 의견들을 주창하시는 분들을 보곤 한다. 그럴 때마다 개인주의에 찌든 비교적 젊은 인간이 보기에는, 왜 세상을 저렇게 거시적인 논리로만 이해하려고 하실까 싶을 때가 있다.
그런데, 그 분들이 사셨던 시대들을 곱씹어 본다면, 어쩌면 반공이라는 단어가 익숙한 세대이실 수도 있고, 반공을 지나 민주화라는 단어가 익숙하신 분들에게 거시적인 논리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지극히 개인적인 MZ세대(이 단어 정말 싫어하지만 워낙 매스미디어에 많이 등장하니 그냥 쓴다.)의 말들은 어쩌면 생각없고 가시돋친 말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눈에는 거대 논리에는 관심이 없고 개인의 행복이 우선시 되어야 사회 시스템에 대한 관심도 생겨난다고 말하는 젊은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얼마나 유약해 보일까. 전쟁이 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독재 정권이 당연시 되지 않는 사회를 살고 있는 청년들은 이제 개인의 행복을 논해야 할 시기가 왔기에 그들의 논리를 펴는 것 뿐이지만 보고 느낀 것이 다른 세대들에게 이 주장은 너무 유약해 보일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생각해봐야 할 것은 우리도 이 멜리스, 갈라스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각자 자신이 살아온 사회에서 가장 유행하는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래서 내가 경험하지 못한 사회에 대한 이해가 전무하다는 점에서 말이다. 자신의 경험에서 한치 앞을 벗어나지 못한다.
3. 비정상적인 사회에서는 비정상이 정상일 수 밖에 없다.
영화를 보다보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미쳤다는 그 남자가 가장 정상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이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냥 내가 미쳐버려야 살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은 미쳤다고, 이 마을은 위험에 빠져 있다고 악을 쓰기라도 해야 안에 있는 울분이 사라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마치 억압된 사회에 대항하다가 정부에 끌려가 고문당해 정신을 놓은 사람은 아닐까 상상해 보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은 미쳤다고 하지만 오히려 그 누구보다 브레인일 지도 모른다.
카자흐스탄 영화라고 해서 낯설었는데, 메시지도 의미가 있고, 생각보다 흡입력 있는 영화라고 생각하면서 관람했다. 영화제에 와서 영화를 보는 경험은 참 내가 가보지 못한 영역을 맛볼 수 있다는 점에서 참 가치있는 경험이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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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킬링타임 영화 더킹
영화 더킹을 아시나요?!
킬링타임 영화로 추천하고 싶어
가지고 왔어요~
조인성과 정우성 류준열까지
비주얼과 연기력이 좋아 보는 맛이 있는
영화 더킹 리뷰 시작해 볼게요~
기본 정보
장르 : 범죄, 드라마, 스릴러, 느와르, 블랙, 코미디, 액션, 시대극, 정치, 피카레스크
감독 / 각본 : 한재림
출연진 : 조인성, 정우성, 배성우, 류준열, 김의성, 김아중
개봉일 : 2017년 01월 18일
평점 : 8.39
스트리밍 : NETFLIX, Wavve
기획 의도
대한민국의 왕은 누구인가?
무소불위 권력을 쥐고 폼 나게 살고 싶었던 검사 태수는
우여곡절 끝에 권력의 설계자 한강식을 만나
핵심 라인을 타고 승승장구 하게 된다.
정권이 교체되는 중요한 시기,
새로운 판을 짜며 기회를 노리던 이들 앞에
예상치 못한 위기가 닥치는데.
여담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스토리를 전개하며
몇몇 실제 정치인들의 언급과 풍자 역시 과감하게 보여주는 뻔한 내용일 뻔했지만
화려한 영상과 내레이션을 통해 영상 전달을 잘했다.
아직도 많은 대한민국의 부패한 검사들의 사건사고가 발생하면
영화 더킹이 소환되곤 한다.
후기 및 결말
영화 더킹 결말을 살펴보자면
승승장구하던 박태수(조인성)은
한강식(정우성)에게 크게 배신당하고 친구인 최두일(류준열)도 잃게 되며
지난 과거에 대한 후회를 하게 된다.
모든 걸 잃고 나서야 깨우친 박태수는
한강식을 잡기 위해 장인과 아내(김아중)의 도움을 받아
정치를 하기로 결심한다.
장인어른의 야당의 핵심 인사를 소개해 주며
검찰 비리를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연다.
검찰 개혁과 불우한 가정환경의 아이들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말의 동정 표를 휩쓸게 되며
태수가 당선이 되었는지 알 수 없게 열린 결말로 끝이 난다.
열린 결말로 끝난 영화 더킹은
마지막에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을 집어넣은 게 아닐까 싶다.
투표의 중요성. 왜 우리가 투표를 해야 하는지!
영화 더킹은 킬링타임으로
정말 매력적인 영화라고 생각한다~
심심할 때 한 번씩 보기 좋은 영화 더킹 추천드립니다
한줄평 :
"내가 당선되었냐고? 떨어졌나고?
그건 나도 궁금하다. 왜냐하면 그건 당신이 결정할 일이니까.
당신이 이 세상의 왕이니까"
-영화 더킹 대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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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노년 레즈비언 부부, 돌봄의 확장과 섹스의 재정의
6★/10★
어느 노인 레즈비언 부부의 이야기를 덤덤히 담아내는 다큐멘터리 영화 〈두 사람〉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마지막에야 나온다. 가정용 사이키 조명 아래서 두 노인이 천천히 움직이며 만들어내는 블루스의 몸짓은 뒤따라 나오는 말, ‘우리에게는 약과 로션을 발라주는 게 섹스다’와 기막힌 짝을 이룬다. 수현과 인선은 서로에게 몸을 살짝 기댄 채 자신들만의 몸짓을 만들어내고, 늙어 약해진 몸에 약과 로션을 발라주며 스킨십을 한다. 두 사람이 40여 년의 세월 동안 함께 쌓은 관계가 빚어낸 친밀성‧돌봄 모델은 자못 단단해 보인다.
수현과 인선은 1985년 베를린에서 만나 1990년부터 함께 살기 시작했다. 두 사람 모두 파독 간호사였고, 인선은 파독 광부와 결혼한 상태였다. ‘남자 같은 여자’인 수현이 인선에게 예쁘게 핀 꽃을 따다 선물하며 두 사람의 관계는 본격화되었다. 오랜 세월을 함께한 두 사람은 은퇴했고, 인선은 이종문화간 호스피스를 창립했다. 독일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공적‧사적 돌봄의 기회가 취약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위한 호스피스였다. 간호사로서의 전문성과 이민자로서의 정체성이 결합된 자리에서 피어난 자발적 사명감의 발로였을 테다.
인선은 호스피스 일과 더불어 한국과 독일 등에서 강연과 집필을 이어가는 중이고, 수현은 퀴어 퍼레이드를 비롯한 여러 소수자‧약자 집회에 참석하고 한인 교회 활동에도 열심이다. 영화는 두 사람이 각각 가정과 일터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차근히 담아내는데, 느릿한 두 사람의 몸동작과 말은, 집 안에서도 바깥에서도 그들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오랜 생활의 연장이라는 것을 보여줄 만큼 안정적이다. 행동과 말 하나하나에 두 사람이 오랜 세월 동안 함께 일구고 반복해온 무언가가 깃들어 있는 듯한 느낌이다. 소박한 한국 음식을 차려놓고 함께하는 식사, TV에 나오는 송해 씨의 노래를 함께 흥얼거리는 모습, 호스피스에서 우울한 얼굴의 이주민을 따뜻한 태도로 환대하는 인선의 얼굴, 어느 이웃 백인 노인의 상처를 꼼꼼히 체크하고 돌보는 인선의 모습 등은 이를 분명하게 증명한다.
서두에서 언급했듯, 두 사람의 오랜 관계성이 수렴하는 곳은 친밀성과 돌봄이 결합된 하나의 인상적인 관계 모델이다. 인선의 암이 재발하고, 수현은 그런 인선을 간병한다. 수현의 인선 간병은 두 사람이 간호사이자 호스피스 종사자, 레즈비언으로서 환자와 사회적 소수자를 돌봐왔던 것의 연장에 놓여 있다. 서로를 사랑한 두 여성이, 자기 역량이 닿는 곳까지 돌봄을 확장하다, 늙고 병 들면서 돌봄 역량을 다시금 서로에게 집중하는 모양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이 마주한 사회적 상황과 신체적 역량에 따라 그 범위가 조정되었을 뿐, 인선과 수현은 누군가를 돌보고 서로를 사랑하기를 멈춘 적이 없다. 두 사람의 블루스와 섹스에 대한 ‘급진적’ 재정의가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건 이 때문이다. 영화 서사의 연장에서, 두 사람의 몸짓과 말에 지난 수십 년간의 돌봄‧친밀성 역량이 응축되어 있음을 분명히 감각할 수 있는 것이다.
친밀성과 돌봄이 긴밀하게 연계된 하나의 모델에 대한 제시와 더불어, 두 성소수자 노인이 오랫동안 함께 살며 소박하고 행복한 일상을 일궈왔다는 것도 그 자체로 의의가 있다. ‘너의 미래는 불행할 것이다’라는 말은 늘 퀴어에 대한 저주에 포함되어 있고, 퀴어 당사자는 돌봄의 공적 체계가 미비하다는 데 분노하면서도 ‘막연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종종 위축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존재는 그 자체로 혐오 세력의 저주에 대한 반례다. 물론, ‘퀴어하다’의 근원적 의미를 생각해봤을 때, 이성애 친밀성 모델을 동성 간 관계로 그대로 대체하는 것에 대한 대중 매체의 반복적 재현이 진정으로 ‘퀴어한’ 미래에 관한 상상력을 특정한 방식으로 고착화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가 들기도 한다. 그러니 두 사람의 관계를 ‘지향해야 할’ 미래가 아닌 ‘참조할 만한’ 미래의 하나로서 주목하는 게 어떨까? 두 사람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관계성만큼이나 멋들어질 또 다른 미래를 위한 자리를 남겨두기 위해서 말이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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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적 도깨비 깃발, 명절용 오락 영화 그이상, 그이하도 아닌 속편!
설 연휴를 앞두고 해적 도깨비 깃발이 개봉했습니다.
2014년에 개봉했던 1편에 이은 속편이죠.
속편이지만 영화 속 시기와 캐릭터는 모두 바뀌었어요.
이번엔 의적과 해적이 만나게 됩니다.
거의 비슷한 구도를 가지고 있지만 조금은 다른 모습을 보이는데요.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참고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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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제가 매주 일요일마다 영화에세이를 전달 드리는 Rabbitugmi 영화 이야기 뉴스레터에도 관심을 가져주시고 많은 구독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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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말포함】어른은 없다, 주름진 아이만 있을 뿐
#기쿠지로의_여름 #스포일러_없는 #리뷰
최신 일본 영화를 리뷰하고 추천합니다
영화 '기쿠지로의 여름'을 소개합니다여러분의 구독과 좋아요는
제게 가장 큰 힘이 됩니다!※ 작가 슈라 원칙
1.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2. 어그로를 끌지 않는다
3. 수익을 먼저 생각하지 않는다
4. 함부로 남을 비방하지 않는다※ 연락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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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instagram.com/b.writerBut he knows the way that I take;
when he has tested me,
I will come forth as gold.
Job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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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행복의 나라> 2차 예고편
1979년 10월 26일, 상관의 명령에 의해 대통령 암살 사건에 연루된 ‘박태주’와 그의 변호를 맡으며 대한민국 최악의 정치 재판에 뛰어 든 변호사 ‘정인후’의 이야기 NEW는 영화, 음악, 드라마, 극장사업 등 다양한 엔터테인먼트의 분야를 아우르는 미디어 그룹입니다. NEW 영화사업부의 유튜브 채널을 구독하시고 NEW 영화 예고편, 미공개 독점 영상 등을 가장 먼저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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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도주 중 : 배틀 로얄> 공식 예고편
럽들이 참가하는 리얼리티 서바이벌 시리즈 《도주 중: 배틀 로얄》이 왔다. 헌터들의 추격을 피해 오래 버티면 버틸수록 쌓여가는 상금. 마지막까지 탈출에 성공한 자에게는 엄청난 금액이 주어지는데. 겁에 질려 항복할 것인가? 아니면 상금과 명예를 위해 끝까지 달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