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3-11-06 16:45:25
'태혜지'를 잇는 3세대 여배우 9명
1세대엔 태혜지가 있다면 현재는 이 배우들이 자리하고 있죠! 3세대 여배우 특집. 땀범벅이 되어도,
피가 튀겨도, 그마저도 아름다운 청춘 스타들. 눈에 익은 배우들도 혹은 생소한 배우들도 보이실텐데요.
현재~미래의 드라마, 영화를 책임질 9명의 배우들을 소개합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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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저 좋아하는 마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
그저 좋아하는 마음으로
“빅밴드 재즈? 그게 뭐하는 건데?”
대단한 이유 없음! 눈부신 재능 없음! 거창한 목표 없음!
그래서 우린 스윙한다♬ 그 누구보다 재미있게♬
영화 <스윙걸즈>는 실패와 좌절을 딛고 꿈을 향해 나아가는 음악 청춘영화이다.
때는 여름방학, 13명의 고등학생들은 보충 수업을 받고 있다. 이들은 수업을 빼먹겠다는 마음으로 합주부에 도시락을 전달하는데, 여기서 도시락이 여름 땡볕에 상해버려 합주부 전원이 식중독에 걸리고 만다. 도시락을 받지 못한 나카무라를 제외한 합주부 전원이 입원하게 되고, 이 13명의 소녀들은 보충 수업에서 탈출하기 위해 그 자리를 대신하기로 한다.
이들은 보충 수업 땡땡이를 구실로 시작했던 재즈에 점점 진심이 된다. 입원했던 합주부원들이 다시 돌아오자 토모코와 소녀들은 다시 일상으로 (반)강제적으로 돌아가는데, 말로는 “원래 하기 싫었다”, “지겨웠는데 잘됐다”면서 얼굴은 울상이다.
결국 이들만의 재즈 밴드 ‘스윙걸즈’를 결성하고 악기 구입을 위해 고군분투하며 성공적인 밴드 활동을 위해 노력한다.
<스윙걸즈>는 예상치 못하게 발생하는 문제들이 오히려 변곡점이 되어 꿈을 향한 디딤돌이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원조 합주부 아이들이 식중독에 걸린 것도, 보충수업 땡땡이를 위해 밴드부에 들어가게 된 것도 애초에 계획에 없었던 일이니 말이다. 악기가 너무 비싸 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어려움을 겪지만 결국 그 마트가 그들의 무대가 되기도 한 것처럼 소녀들의 여정은 ‘틈’과 ‘실수’로 가득하지만, 오히려 그러기에 그들은 우정과 희망, 연대를 만들어 갈 수 있게 된다.
이는 소녀들의 꿈인 재즈에도 맞닿아있다. 재즈는 즉흥성, 실수, 자유, 독창성을 지향하는 음악 장르이다. ‘스윙걸즈’의 숨겨진 에이스 세키구치, 새침하지만 밴드에 진심인 요시에, 엉뚱발랄 토모코, 시크하지만 묵묵히 밴드의 중심이 되어주는 나오미 등 소녀들 (그리고 한 명의 보이)… 모두 각자의 뚜렷한 개성과 매력이 있기에 비로소 조화롭고 다채로운 재즈를 연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꿈꾸는 이들은 빛난다. 누군가는 형편없는 중고 악기로, 짧은 배움으로 뭘 하겠냐고 참견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재즈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스윙’하는 사람으로서 꿈을 향해 나아간다. 영화 <스윙걸즈>는 터무니없는 꿈은 없다고, 그러니 그저 좋아하는 마음 그 자체로도 꿈을 꿔도 괜찮다고 말하고 있다.
꿈을 꾸는 모두에게, 그리고 2000년대의 노스탤지어와 일본 청춘영화 특유의 따뜻하면서도 코믹한 감성을 만나고 싶은 사람들에게 <스윙걸즈>를 추천한다.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 시사회에 참석 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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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컴플리트 언노운 | 반골 음유시인의 시작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61년. 무명 뮤지션 '밥 딜런'(티모시 샬라메)이 뉴욕으로 향한다. 롤모델이자 시대를 대표하는 포크 가수 '우디 거스리'(스쿠트 맥네리)가 입원했다는 뉴스를 듣자마자 그를 만나기 위해 곧장 뉴욕으로 떠난 것. 우디를 만나고, 그를 위한 노래를 불러준 밥. 우디의 절친이자 우디 옆에서 밥의 노래를 들은 '피트 시거'(에드워드 노튼)는 밥에게서 남다른 재능을 발견하고, 그가 작곡한 노래를 선보일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해준다.
피트가 내어준 무대에서 펼친 밥 딜런의 공연은 '조안 바에즈'(모니카 바바로), '조니 캐시'(보이드 홀브룩)를 비롯한 뮤지션들의 귀를 사로잡는다. 더 나아가 뉴욕에서 만난 사랑 '실비 루소'(엘 패닝)의 응원 속에 작업한 앨범마저 성공을 거두자 밥은 새로운 포크의 상징으로 거듭난다. 하지만 밥은 겉잡을 수 없는 관심과 유명세를 견디지 못하고, 그는 상징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노래하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반골 음악가, 밥 딜런
전기 영화가 관객의 사랑을 받으려면 여러 조건이 필요하다. 우선 인물 자체가 흥미로워야 한다. 스티브 잡스가 대표적이다. 스티브 잡스가 사망하자 그의 인생을 조명한 <스티브 잡스>와 <잡스>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바 있다. 본인이 창업한 회사에서 쫓겨났다가, 회사가 위기에 빠지자 복귀해 회사를 살려낸 스토리는 그 자체로 극적이었기 때문.
하지만 인물이 전부는 아니다. 두 작품의 평가는 극과 극이었다. 호평은 전자에게, 혹평은 후자에게 집중됐다. 취사선택의 차이가 원인이었다. <스티브 잡스>는 미니멀한 형식으로 잡스의 인생을 재구성했다. 세 번의 신제품 프레젠테이션에만 집중했다. 주변 인물 간의 대화와 갈등을 통해 잡스의 인간됨과 성장을 자연스럽게 풀어냈다. <잡스>는 과유불급이었다. 애플 설립부터 복귀까지의 여정을 영화 한 편에 무리해서 밀어 넣었다.
두 영화의 차이는 전기 영화의 매체적 한계에서 기인했다. 한 인물의 생애를 모두 보여주기에는 분량과 형식이 애초에 부적절한 것. 따라서 전기 영화는 확실한 주제나 아이디어에 닻을 내린 채 그 외의 내용은 과감히 생략할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영화의 의도가 관객에게 분명히 전달될 수 있다. 일례로 <오펜하이머>는 오펜하이머의 핵무기 개발과 청문회에만, <링컨>은 링컨의 수정헌법 제13조 발의 및 통과에만 집중했다.
제임스 맨골드 감독의 밥 딜런 전기 영화, <컴플리트 언노운>은 취사선택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았다. 사실 밥 딜런의 인생을 영화 한 편에 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시대를 노래한 음유시인', 밥 딜런은 60여 년 동안 정규음반만 40개를 발표할 정도로 오랫동안 꾸준히 활동했기 때문. 그래서 맨골드는 1961년부터 65년까지의 밥 딜런을 요약하는 한 단어를 세 가지 층위로 나눠서 보여주는 데 열중한다. 바로 '반골'이다.
반골의 음악
가장 먼저 돋보이는 층위는 밥 딜런의 음악이다. 이는 <컴플리트 언노운>의 오프닝 시퀀스가 흥미로운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 전기 영화치고 이 작품의 오프닝은 이상하다. 밥 딜런의 전기 영화인데 그보다 다른 사람들이 먼저 등장하기 때문. 영화는 '우드 거스리'라는 포크 가수가 출연한 방송과 함께 그의 음악을 들려주고, 그다음에는 '피트 시거'라는 가수가 포크 노래를 불렀다는 이유로 재판받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컴플리트 언노운>을 밥 딜런의 반골 기질을 압축한 작품이라고 보면 이보다 밥 딜런을 잘 소개하는 오프닝도 없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초창기 음악 세계를 지탱한 저항 정신의 겉뜻과 속뜻을 모두 들려주기에 최적화됐기 때문. 더 나아가 전체 영화 내용에 대한 요약, 암시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의 초창기 음악 세계는 물론, 그의 음악 스타일과 활동 영역이 돌연 달라진 이유를 넌지시 암시하고 있으니까.
우선 거스리가 출연한 TV 방송은 초창기 밥 딜런 음악 정체성을 알려주는 장치다. 미국 포크 음악의 전설인 그는 사회 운동 메시지를 노래에 담았다. 밥 딜런은 그로부터 노래에 저항 정신을 담아내는 법을 배웠다. 밥 딜런이 "그로부터 나는 가장 위대한 교훈을 배웠네"라고 노래했고, 그를 음악적 아버지로 부를 정도였다.
피트의 재판 장면은 1960년대 미국 사회에서 포크 음악은 단순히 한 음악 장르가 아니라 사회 저항 운동을 이끄는 주체였음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그의 노래에 담긴 변화에 대한 열망은 포크 음악을 만들고 듣던 음악가와 팬들에게 직관적으로 충격을 줄 수 있었다. 이는 밥 딜런이 데뷔와 동시에 포크 음악의 상징으로 떠오를 수 있었던 이유였다.
이 두 장면 덕분에 빕 딜런이 스타덤에 오르는 과정은 전형적이지만, 깊다. 밥 딜런, 거스리, 피트와의 만남이 군수산업에 대한 비판을 담은 ‘Masters of War'나 자유와 평등을 꿈꾸는 'Blowin’ in the Wind’ 등의 노래 가사에 담긴 저항 정신을 음미할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 밥 딜런이 노래를 만드는 과정에 삽입된 흑인 민권 운동, 쿠바 핵 미사일 사태, 케네디 대통령 암살 뉴스 등도 가사의 의미에 집중할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반골의 앙시앵 레짐
흥미롭게도 그의 반골 기질은 음악과 가사로만 표출되지 않는다. 그는 특정 도그마에 갇힌 채로 규정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타고난 예술가였으니까. 그래서 피트가 그에게 포크 가수냐고 물을 때, 그는 그저 포크를 좋아하고 포크를 할 뿐이라고 대답한다. 이 문답은 그의 반골 기질 중 또 하나의 층위를 보여준다. 바로 자기 정체성을 규정하는 외부의 권위와 교의를 거부하고 맞설 줄 아는 용기다.
포크의 스타가 밥 딜런. 피트와 동료들은 그가 상징적 존재로서 민중 운동과 사회 운동을 계속 이끌어야 한다고 압박한다. 이에 밥은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 마지막 날 일렉기타를 든 채 그 유명한 'Like A rolling Stone'을 답가로 불러준다. 포크의 저항 정신은 사회 운동의 도구여야 한다는 교의와 레짐 앞에서 포크 록 음악을 연주하며 공개적으로 맞선 것. 설령 자신을 향한 기대와 유명세가 파괴되더라도, 곧 '완전한 무명(Complete Unknown)이 되더라도 자기 정체성과 음악은 스스로 결정한다는 선언을 한 셈이다.
이 장면은 통쾌하면서도 안타깝다. "당신의 낡은 길은 빠르게 낡아가고 있어/새로운 길에서 비켜나 주세요"라고 노래한 밥 딜런의 ‘The Times They Are a-Changin’에는 열광하던 이들이, 정작 새로운 길을 만드는 이를 비난하는 모습이 한국 사회에서도 낯설지 않기 때문. 본인이 기득권인 걸 인지하지 못한 채 저항과 혁명을 논하는 이들에게 맞서는 쾌감, 그 변화를 스크린에서 만나야 한다는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끼는 이유다.
그렇기에 밥 딜런과 거스리의 만남이 장식하는 결말은 특히 감동적이다. 대부분의 동료들에게 배신자라고 비난받은 밥. 그는 과거 거스리가 선물한 하모니카를 돌려주려 하지만, 거스리는 밥이 계속 하모니카를 간직하라고 부탁한다. 밥의 변화가 배신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본질을 표현하는 방식임을 거스리만큼은 이해한 것. 이 만남 덕분에 우디 거스리를 보여준 오프닝과 결말은 의미심장하게 수미상관을 이룬다.
반골의 사랑과 상처
반골이라서 포크 가수로 스타덤에 오르고, 또 반골이라서 과감하게 음악적 도전과 변화를 추구할 수 있었던 밥 딜런. 하지만 반골 기질이 언제나 그에게 따스한 빛만 비쳐주지는 않았다. 누구에게도 쉽사리 털어놓기 힘든 상처와 그림자도 안겨주었으니까. <컴플리트 언노운>은 반골의 이면이라는 세 번째 층위를 두 여성과의 관계를 통해서 보여준다.
밥의 반골 기질은 실비와 조안, 둘과 이어지는 계기가 된다. 사회 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실비는 여러 시위 현장에 그를 데려가면서 그의 음악 세계가 확장되고 깊어지는 환경을 만들어줬다. 피트 시거, 우드 거스리와 같은 결의 포크 가수였던 조안도 그가 반골이기에 그와 사랑에 빠졌다. 시대의 기득권을 비판하는 그의 노랫말을 들으면서 유망한 뮤지션 정도로 여겼던 그를 다시 본 것.
하지만 밥은 반골이라서 그들과의 관계를 이어가지 못했다. 고정된 관계성을 견디지 못한 그가 떠나고 되돌아오기를 반복했기 때문. 이때 두 여성은 각자 밥의 인간적인 상처를 하나씩 상징한다. 실비는 유명세에 짓눌려 고통받는 밥을 보여준다. 자신에게 열광하는 대중이 두려운 밥은 공포가 커질 때마다 실비를 찾는다. 하지만 실비는 그의 자유로움을 이해할지언정, 그와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했기에 그들의 관계는 진전되지 못한다.
조안은 예술가로서의 상처를 상징한다. 그와 조안은 항상 음악 때문에 싸운다. 합동 투어에서 신곡을 부르려다가 조안과 다툰 후 공연을 포기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는 밥의 반골 기질, 새로움에 도전하는 그의 음악 스타일이 동료들과의 더 큰 갈등을 유발할 것이라는 암시나 다름없다. 구체적으로는 자신의 음악 스타일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동료들을 향한 원망과 실망이 조안과의 연애에 압축되어 있는 셈이다.
불친절하지만, 끝까지 읽게 되는 시집
다만 <컴플리트 언노운>은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노래하는 음유시인'이라는 밥 딜런의 별명답게 영화도 한 편의 시와 같다. 압축적이고 간결해서 설명이 많지 않다. 그래서 불친절하다. 당시 좌파 진영, 사회운동가들의 갈등 양상이 짧은 뉴스 장면 등으로 스쳐 지나간다. 그러다 보니 그가 동료들과 갈등을 빚게 되는 과정이 매끄럽지 않다. 밥 딜런의 과거를 잘 모르는 관객이라면 갑작스럽다고 여겨질 정도다.
그 결과 클라이맥스인 뉴포트 페스티벌 공연은 덜 직관적이다. 설명이 부족하다 보니 그가 부른 노래에 담긴 의미도, 좌파 진영과 운동가들이 그에게 원한 역할을 그가 거부하는 쾌감도 명확히 전해지지 않는다. <보헤미안 랩소디>가 라이브 에이드 공연으로 프레디 머큐리의 인생 역경 극복 서사에 방점을 찍은 것과 비교하면 심심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다만 오히려 그래서 음유 시인의 전기 영화다워 보이는 게 아이러니다.
그래도 배우들의 역량이 설명의 공백을 일부분 채워준다. 5년 간 작품을 준비했다는 티모시 샬라메는 숱한 남우주연상 수상의 이유를 증명한다. 특히 <레이니 데이 인 뉴욕>에 이어 재회한 엘 패닝과의 비슷한 듯 다른 호흡은 영화의 감성을 극대화한다. 모니카 바바로도 <탑건: 매버릭> 속 '피닉스'가 전혀 생각나지 않는 노래 실력과 매력을 자랑한다. 그 덕분에 <컴플리트 언노운>이라는 시집을 도중에 덮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는다.
Acceptable 무난함
밥 딜런을 깊이 알면 알수록 배가되는 감동과 전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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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종착지는 불행이 아니야
정해진 대로 사는 것이 과연 정말 ‘나’의 행복에 가까운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네스트는 이러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꿈인 음악가로 살기 위해 좋은 직업을 가진 부모와 집안을 뒤로한 채 고향인 샤라비를 떠난 것이다. 망가진 바이올린을 고치기 위해 다시 돌아간 샤라비는 여전히 법을 정확하게 지키며 어네스트로 인해 음악이 금지되어 오로지 ‘도’만 소리 낼 수 있는 곳으로 변해 있다. 음악이 금지된 이유 역시 쉬이 납득할 수 없는데, 판사가 되기로 했던 어네스트가 도망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샤라비에 거주하는 모든 곰들의 멜로디를 앗아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현실’이라는 이유로 체제에 순응하는 곰들이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을 사랑하는 미파솔과 음악 부흥회는 사라진 멜로디를 되찾기 위해 여전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음악회를 통해 음악을 간직하고 있다. 법을 어기는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법이, 현실이 잘못되었다고 계속해서 알리는 역할을 한다. 셀레스틴은 이러한 샤라비의 현실에 순응하지 않고 계속해서 어네스트의 바이올린을 고치고, 음악을 되찾아 주기 위해 노력한다. 미파솔 다음으로 샤라비에 균열을 가하는 존재가 나타난 것이다.
판사라는 직업은 이미 좋다고 평가된 대상이다. 어네스트의 아버지 역시 그렇게 믿어왔기에 어네스트에게 계속해서 판사라는 직업을 강요한다. 자신 역시 음악을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샤라비에 거주하는 모든 곰들은 자신의 미래의 직업이 법으로 정해져 있다.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고 오로지 법에 따라 직업이 ‘결정되는’ 것인데 이것이 과연 행복에 가까워지는 길이라고 할 수 있을까. 행복은 나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정해진 대본에 자신을 맞추며 살아가는 것은 곧 자신을 잃어가는 것인데도 말이다.
모든 직업이 사회에 도움이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사회가 정한 ‘좋은 직업’에서 이탈하면 불행해질 것이라는 위협을 받는다. 이러한 방식으로 어네스트 역시 판사라는 직업에서 이탈했기에 어네스트가 사랑하는 음악이 금지되어 모두가 불행해졌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마치 그 결과를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우리가 그런 결과를 피하도록 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한 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닌 계속해서 나아가기 위해 현실을 거부하고 불합리한 체제에 불응하는 이러한 선회를 해야 하지 않을까.
어른들의 편협한 행복 대본에 아이들을 가두고 있었던 것이다. 대본의 약속에서 벗어났기에 어네스트는 셀레스틴이라는 소중한 우정도 만날 수 있었다. 셀레스틴과 어네스트는 서로가 원하는 행복에 가까워지는 열쇠라고 할 수 있다. 어네스트는 셀레스틴에게 가족을 만들어 줬으며, 셀레스틴은 어네스트가 사랑하는 음악을 다시 되찾아 주었다. 이렇듯 사회가 정해 둔 약속에서 벗어나는 경험은 늘 우리를 어딘가로, 어쩌면 더 넓은 세상으로 데려간다. 그리고 내가 원하던 행복에 가까워지는 길인 것이다. 누군가가 정해 준 목표를 현실로 만드는 것이 아닌, 자신의 목표를 현실로 만들어야 한다. 음표라는 취향을 찾다 보면 결국 멜로디라는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 틀림없기에.
<해당 리뷰는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은 시사회 참석 후 작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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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아이들은 자란다
“모든 아이들은 자란다. 단 한 사람만 빼고.” 소설 <피터 팬>의 유명한 첫 문장이다. 영원히 자라지 않는 소년 피터 팬은 탄생 1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풋사과 같은 동심의 표상으로 사랑받고 있다.
아무도 어른이 되지 않는 환상의 나라 네버랜드, 그곳을 인도하는 악동 피터 팬의 이미지는 다양하게 각색되고 변주되어 왔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뮤지컬, 온갖 노래 가사에까지 녹아들었음은 물론이고, 기존의 해석을 뒤집는 시도도 이어졌다. 피터 팬의 대칭적 인물인 후크 선장을 통해 피터 팬을 이해해 보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리고 이제 6월 30일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는 영화 <웬디>는 웬디의 입장에서 네버랜드와 피터 팬의 세계를 펼쳐낸다.
이야기의 중심에 웬디를 두는 순간 우리는 피터 팬과 네버랜드의 매력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던 사실들을 마주하게 된다. 110년의 세월 동안 인류가 이뤄온 진보의 시선까지 감안하면, 피터 팬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재구성하는 것이 과연 매력적인 결과물로 이어질 수 있을까 의심스러워진다. 그래서인지 벤 제틀린 감독은 이야기의 뼈대만 남겨놓고 완전히 해체해,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가장 태고적인 그림들로 피터 팬의 세계를 재조립했다.
*시사회에 참석하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국내 개봉일은 6월 30일입니다. (문화가 있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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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피터 팬>을 읽다 보면 어쩐지 도망치고 싶어 진다. 정확히는 웬디에게 피터 팬을 떠나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 진다. 피터 팬은 웬디를 엄마 역할로 데려왔고, 웬디는 엄마라는 단어와 거의 동의어처럼 묶인다. 그러나 동시에 피터 팬과 웬디 사이에는 서로를 독점하고 싶어 하는 애정도 엿보인다. 그래서 <피터 팬>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같은 측면이 엿보인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웬디뿐 아니라 팅커 벨, 타이거 릴리까지, 피터 팬을 사랑하고 서로를 질투하며 맴도는 위치에만 놓여 있다. 상대가 원하는 마음을 주는 단계로는 나아가지 않고, 유아처럼 그저 애정을 배부르게 받아먹고만 싶어 한다.
네버랜드에서는 누구도 자라지 않는다는 말만큼은 명확히 지켜지고 있어서, 후크 선장조차도 어린아이 같다. '엄마'가 있는 소년들을 부러워하고, 가장 암울한 순간에 스스로를 3인칭으로 칭하는 것 또한 피터 팬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가 악행을 행하는 방식은 기묘하게 모범생 아이 같은데, 사립학교 시절 배운 올바른 품행을 기준 삼아 그 역방향으로 달려가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사망하는 순간까지 피터 팬의 품행을 지켜보고 있는 후크는 대칭을 이루는 또 하나의 피터 팬이자, 피터 팬에게 집착하는 또 하나의 인물이다.
다시 말해 모든 캐릭터가 피터 팬만을 맹목적으로 향하고 있다. 물론 주인공을 중심으로 서사가 굴러가는 것이 당연하기는 하지만, <피터 팬>에서는 유독 모든 인물들이 피터 팬의 부수적인 존재로만 기능하는 느낌이다. 특히 웬디는 받아주고 챙겨주며 양육하는 모성의 이미지만을 끊임없이 요구받는다. 피터 팬과 소년들만의 요구가 아니다. 원작 소설에서는 후크 선장과 해적 일당조차 피터 팬 무리를 무찌르고 웬디를 데려와 엄마로 삼고 싶어 한다.
영화 <웬디>는 웬디라는 캐릭터에서 우선 엄마의 이미지를 걷어내어, 웬디가 제 발로 설 수 있게 한다. 그 결과 이야기는 웬디가 아주 아기였을 때부터 시작한다. 기찻길 옆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엄마의 품에 안겨 달걀도 같이 깨고 손님맞이도 하면서 자라는 아주 작은 아이. 디즈니 삽화에서 보던, 허리 선을 강조한 드레스나 머리 리본 같은 건 없다. 이 영화 속 웬디는 맑은 색 귀걸이 정도를 제외하면 장식이라곤 하나 걸치지 않은, 잠옷에 가까운 티셔츠 차림이다. 원작에서보다 훨씬 공상적이고, 자기 세상이 뚜렷한 아이가 되어 있다.
웬디에게서 끊어진 단어, 피터 팬과 소년들이 집착하던 ‘엄마’, ‘모성’은 이제 대자연으로 갈음된다. 대자연도 한없이 부드럽고 품어 주기만 하는 공간으로만 묘사되지는 않는다. 아이들은 화산을 터뜨리고 물에 뛰어들며 자연의 품에서 마음껏 뛰어놀기도 하지만, 화산 폭발이나 거친 파도를 피해 뛰기도 한다. 게다가 네버랜드의 대자연에도 쓰레기는 쌓여 있다.
팅커 벨과 타이거 릴리는 아예 극에서 사라졌다. 피터 팬을 사랑하고 허영심을 부리면서 웬디를 질투해 이야기에 곤경을 더하곤 했던 팅커 벨은 등장하지 않는다. 아메리칸 원주민 전사 캐릭터인 타이거 릴리는 훌륭한 전사라고 묘사되면서도 부여된 역할은 고작 피터 팬 손에 목숨을 구하는 것, 그 후로 피터 팬의 대사 속에서 ‘엄마가 아닌, 의미 있는 누군가’가 되고 싶어 한다고 언급되어 팅커 벨과 웬디의 질투심을 자극하는 것이 전부였다. 피터 팬을 돋보이기 위한 장식적인 기능만 수행하던 캐릭터들은 과감히 잘라냈다.
뿐만 아니라 네버랜드 한켠에 사는 아메리칸 원주민과 인어들 모두 사라졌다. 후크 선장과 해적들도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등장시켜 이야기를 전개해 간다. 원작 소설에서는 110년 전이라는 시대의 한계 때문에 원주민과 해적을 설명할 때나 소년들이 영국 이야기를 할 때 기묘하게 제국주의적 냄새가 풍기는데, 이를 걷어낸 것이다. 이에 그치지 않고 피터 팬을 비롯한 몇몇 소년들을 유색인종 캐릭터로 만들었다.
다 뜯어진 신발에 낡은 재킷을 걸친 채로 기차 위에 앉아, 어둠 속에서 눈을 희번덕거리며 웃는 피터 팬의 존재는 단연 새롭다. 풀잎 같은 초록색 옷을 입고 소꿉놀이 같은 생활을 하던 피터 팬의 이미지를 기억하고 좋아했던 사람들에게 다소 충격적인 비주얼이다. 공통점을 찾자면 진주 같은 젖니가 빛나고 있다는 정도.
이렇게 걷어낼 것을 모두 걷어내고 완전히 새롭게 지어 올린 <웬디> 속 네버랜드와 웬디, 피터 팬은 원작에 비해 다소 야생적인 색깔을 띤다. 네버랜드뿐만이 아니다. 켄싱턴 공원과 반듯하게 정리된 침실 대신 지나가는 기차에 덜컹거릴 만큼 위험해 보이는 웬디의 집, 빛나는 요정 가루 대신 금방이라도 쇳내가 날 것 같은 화물 열차와 바닥에 구멍이 난 조각배로 이동하는 피터 팬은 분명 우리가 알던 피터 팬의 세계에 비해 거칠다.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지만, 성장이라는 주제만 놓고 본다면 원작보다 조준점이 명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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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성장은 반드시 상실을 동반한다. 어린 날 공상으로 지어 올린 세계가 처참히 부서지는 것을 목격하면서, 때론 그조차 잊어가면서 아이는 어른이 된다. <피터 팬> 원작은 이를 격렬히 거부한다. 사실 성장을 거부한다기보다 책임과 의무를 거절하고 싶어하는 마음에 가깝다. 소년들이 웬디의 집에 하나씩 안착해 학교에 다니고, 나는 법을 잊고, 직업을 갖는 동안 피터는 줄곧 아이로 남아 있다. 그리고 웬디의 딸을, 또 그 딸을, 계속해서 네버랜드로 데려간다.
원작의 웬디는 가볍게 날아가는 딸과 피터 팬의 뒷모습을 보며 씁쓸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나이 들었다는 당연한 사실에조차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반면 팅커 벨이 죽었다는 것조차 기억하지 못해 웬디를 경악하게 했던 피터 팬은, 결국 아무 감정에도 책임지지 않으면서 ‘엄마’를 이용한다. 봄맞이 대청소 때마다 웬디가 네버랜드를 방문하겠다는 약속은, 그렇게 무책임하게 승계된다. 결말까지 철저하게 피터 팬만을 위한 방향성이다.
원작과 달리 영화 <웬디>는 성장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보인다. 영화 속 웬디는 피터 팬뿐 아니라 모든 캐릭터들의 성장을 주도해 낸다. 대자연 ‘엄마’의 힘을 이끌어 내고, 추억을 뒤져 기쁨을 끄집어내고,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성장이라는 모험을 긍정하면서. 웬디와 피터 팬은 원작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결말을 맞는다.
영화 <웬디> 속 피터 팬과 네버랜드는 안전하지도 부드럽지도 않지만, 기묘한 위계가 역할을 부여하는 원작과 다르다. 모험으로 가득 차 있을지언정 끝내 잘 될 거라는 막연한 안정감이 있던 디즈니 버전과도 다르다. 불안정하지만 변화에 열려 있고, 그래서 현실적이고 현대적이다.
이러한 세계에서라면 우리는 영화 속 웬디와 아이들처럼 자기 세계를 공고히 하고, 그 위에 찾아오는 도전을 받아들이며,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것을 성장이라 불러도 될 것이다. 한때 아이였던 우리도 여전히 한 뼘씩 마음의 키를 키우며 이 세상을 건너고 있다. 영화는 그런 우리를 직면하고 긍정한다. 그렇게 모든 아이들은 자란다. 단 한 아이도 빠짐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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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와 믿음에 대한 피상적 접합을 벗어나다
신은 있을까. 신의 존재는 ‘믿음’으로써 현현해질 수 있을까. 당신의 앞에 두 개의 문이 있다. 왼쪽에는 ‘믿음’, 오른쪽에는 ‘불신’이다. 신을 믿고, 그의 존재를 믿는다면 왼쪽 문을 열면 된다. 신의 존재를 믿을 수 없고, 온전히 이를 과학의 영역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 자라면 오른쪽의 문을 열어라.
<헤레틱>은 외딴집에 몰몬교를 전도하는 두 소녀가 방문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친절해 보이지만서도 한편으로는 수상해 보이는 집주인 ‘미스터 리드(휴 그랜트)’는 영화의 초반부부터 관객들을 긴장시킨다. 아내가 음식을 대접하려고 한다며 시간을 끄는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수상케 생각하기 쉽다. 수상한 미스터 리드의 모습을 두 소녀가 눈치채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금세 이야기는 팽팽한 긴장의 줄 위에 놓인다. 카메라는 완전히 두 소녀 ‘반스(소피 대처)’와 ‘팩스턴(클로이 이스트)’를 비추고, 관객은 그들이 느끼는 긴장감에 온전히 빠져들어야만 한다.
자신이 종교를 ‘연구’했다며 자신이 알아낸 이야기를 공유하려는 미스터 리드와 두 소녀 간의 이야기는, 공간이 점점 집의 내부로 들어갈수록 미스터리 속으로 빠져든다. 미스터 리드는 집의 안쪽에 있는 방에서 그 둘을 맞이하며 종교가 가지고 있는 ‘허점’에 대해 설파하고, 두 소녀의 믿음을 흔든다. 수상한 남자의 집에서 그들은 도망쳐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선 양쪽에 놓인 문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믿음’, 혹은 ‘불신’. 그들은 어느 문을 열고 수상한 집에서 탈출하게 될 것인가. 탈출은커녕 자신들의 목숨마저 놓칠 것인가.
<헤레틱>은 종교에 대한 믿음의 담론을 소재로 영화의 서사를 전개한다. 믿음이란 무엇일까. 그 내면에는 수많은 철학적 고민이 내재한다. 미스터 리드는 반스와 팩스턴의 몰몬교를 향한 믿음을 계속해서 반박한다. 스스로 의심하게 만든다. ‘내가 믿고 있는 것이 진정한 믿음에서 온 것인가.’, ‘신은 믿을 수 있는 존재가 맞는가.’ 수수께끼 같은 미스터 리드의 시험이 반복되고, 반스와 팩스턴은 계속해서 그 시험에서 물러나지 않으려 한다. 미스터 리드의 시험과 의심들에 빈틈없이 채워진 서스펜스들은 단순히 두 소녀만을 긴장시키지 않는다. 관객들마저 완전히 동화시킨다. 오히려 관객들 자신도 그 상황에 놓인 듯이 질문하게 만든다. ‘내가 반스와 팩스턴이라면 어떤 선택과 도전을 할 것인가.’
영화가 어쩌면 믿음과 불신이 아닌 ‘제3의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작품 속에서 ‘나비’의 존재가 꽤 중요한 입지를 가진다. 워낙 많은 종교적 요소가 엮여 어떤 것에 집중해야 할지 때론 혼란스럽다. 그러나 나비를 염두에 두는 것은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나비는 ‘호접지몽’을 배경에 두고 있다. 장자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는데, 꿈에서 깨고 나니 자신이 인간의 몸을 한 것이 믿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자는 꿈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지금의 모습이 나비로서 꾸는 꿈의 일부인지 혼란스러워한다. 이러한 점에서 삶의 덧없음이 드러난다는 의미가 전해져 내려왔다. 미스터 리드도 이에 관한 내용을 언급하고, 영화의 엔딩에서도 나비가 프레임 안으로 날아든다. 엔딩이 일종의 ‘결론’의 역할을 한다는 영화 텍스트 분석적 관점에서 보면 이 나비의 존재가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헤레틱>은 믿음과 불신 그 너머의 ‘무용함’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 봄 직하다. 믿음 혹은 불신의 감정을 느끼고 그것에 매여 살아가는 삶은 얼마나 무용한 것인가. 결국 태어나고 죽는 것까지의 그 과정에서 믿음 혹은 불신이 할애되는 과정은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겠는가. 생존과 죽음의 경계에서 반스와 팩스턴이 자신들의 믿음에 관해 딜레마를 느끼듯, 삶의 본질 앞에서 믿음이라는 존재는 그 얼마나 한없이 초라해지는가.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이 이교도라는 뜻을 가진 ‘헤레틱’이라는 단어를 제목으로 사용한 점이 더욱 눈길을 끈다. 우리가 속히 말하는 ‘사이비’에 빠진 이들에게 삶과 죽음 그 사이에서 자신보다 믿음이 더 중요케 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존재하는지 알 길이 없는, 심지어는 자신이 신의 전령이라며, 신의 대행이라는 궤변을 늘어놓는 사이비 교주들에게 자신의 삶을 모두 바치는 것이 진정한 삶다운 삶이라 볼 수 있는가. 그런 점에서 영화 종반부에 접어드는 과정에서 보이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반스와 팩스턴을 찾기 위해 마을을 돌던 목사가 그들은 뒷전에 둔 채 미스터 리드의 집 앞에서 그에게 몰몬교를 전파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는 긴장감을 풀어주고, 약한 웃음을 유발하는 일종의 환기 역할을 하는 장면인데, 그 하위 텍스트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덧없음’의 가치가 숨겨져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단순히 이런 텍스트적 의미를 떠나서도 영화가 서스펜스로부터 공포를 유발하기 위한 여러 장치들을 교묘하게 배치한 것이 인상적이다. 호러 장르에 맞게끔 종교와 믿음에 관한 소재를 적절히 뒤틀어낸 것도 놀라운 점이다. 빈틈없이 치고 나가는 이 작품에는 어떤 단점이 존재하는지 궁금해질 정도다. 개봉 전 관람을 한 관객들의 반응 중에는 “영화가 후반으로 갈수록 힘을 잃고 갈팡질팡한다”는 평이 있었다. 영화의 텍스트가 아닌 전반적인 조화를 눈여겨본다면 충분히 가능할 만한 지적이었다. 심지어 글에서 언급한 텍스트적 논점들 또한 교묘하게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징검다리는 상실한 채 띄엄띄엄 연결된 이야기들이 눈에 밟힌다.
그럼에도 흥미로운 소재와 장르의 혼합이 꽤 눈부신 작품으로 관객 앞까지 오게 된 것은 호평할 일이다. 종교와 호러는 흔히들 결부해 영상으로 만들어 왔지만, <헤레틱>은 어찌 보면 1차원적이라 할 수 있는 피상적 접합에서 벗어나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매우 흥미로우면서도 볼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 말할 수 있다. 호러 작품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보니 여름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듯하다. 극장에서 잘 만들어진 호러 영화 한 편으로 올해도 무더울 여름을 준비해 보는 것은 어떨까. <헤레틱>은 4월 2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 씨네랩 크리에이터 자격으로 시사회에 참석한 뒤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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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사와 외계인이 써내려 간 사상누각 SF 판타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2022년 현재, 인간의 몸에 가두어진 외계인 죄수의 탈옥을 막기 위해 지구에 상주 중인 로봇 ‘가드’(김우빈)’와 ‘썬더(김대명)’. 인간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원칙 하에서 이들은 지구의 여러 시간대에 죄수를 가둬두고, 자동차와 비행선으로 변신할 수 있는 썬더를 통해 시간여행을 하며 죄수들을 감시한다. 그러던 어느 날, 고려시대 말로 이동해 탈옥한 죄수를 검거한 가드와 썬더는 의도치 않게 인간의 아기를 현재로 데려와 키우기 시작한다. 한편 고려말 도사 ‘무륵(류준열)'은 현상금을 받기 위해 신검을 찾으러 나서다가 요괴를 만나고, 마찬가지로 신검을 찾는 ‘이안(김태리)'과 속고 속이는 쟁탈전을 벌인다. 두 신선 ‘흑설(염정아)'과 ‘청운(조우진)'도 마찬가지로 요괴의 존재를 감지하고 신검을 좇는 가운데, 밀본의 수장 '자장(김의성)' 도사도 신검 쟁탈전에 가담한다.
SF와 판타지의 만남을 보여주는 영화 <외계+인> 1부는 <범죄의 재구성>부터 <타짜>, <전우치>, <도둑들>, <암살>에 이르기까지 흥행불패를 이어온 최동훈 감독의 7년 만의 신작이다. 류준열, 김우빈, 김태리, 소지섭, 염정아, 조우진, 김의성, 이하늬 등의 스타 배우들이 총집합했고, 387일이라는 한국 역사상 최장 프로덕션 기간을 자랑한다. <승리호>처럼 한국형 SF를 표방한 것이나, 올여름 격돌할 이른바 한국영화 Big 4 중 첫 번째이기에 기대가 더 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외계+인> 1부는 실망스럽다. 여러 이유를 꼽을 수 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영화의 초점은 산만하고, 감독의 장점인 하이스트 장르의 특징이 발현되려는 찰나에는 리듬감이 툭툭 끊기는 느낌이 든다. 배우들의 열연에도 불구하고 일부를 제외하면 캐릭터들의 매력도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외계+인>은 감독의 전작이자 한국형 히어로 혹은 무협 판타지 영화였던 <전우치>의 확장판이라 할 수 있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지점에서 sf와 판타지라는 상이한 장르적 특성을 미처 고려하지 못한(혹은 않은) 듯 보인다.
우선 <외계+인> 1부는 여러 측면에서 <전우치>와의 유사성을 보여준다. 도사 무륵의 첫 등장은 모의고사 지문으로도 등장했던 전우치의 등장씬을 오마주하며, 과거에서 현재로 이동한 <전우치>처럼 <외계+인> 1부도 시간여행을 펼친다. 두 신선 흑설과 청운이 코미디를 도맡는 것은 신선 3인방을 연상시키고, 고양이로 변신하는 좌왕과 우왕은 유해진이 연기했던 초랭이를 보는 듯하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도사가 등장해 여러 시련 끝에 스승이 알려주지 않는 비기를 득도한다는 전개도 전우치의 성상 서사와 정확히 일치한다. 사람의 모습을 한 채 숨어 지내며 피리를 노리던 요괴 '화담(김윤석)'처럼 외계인이 사람의 모습을 취한 채 신검을 쫓는 것 역시 공통점이다.
이는 바꿔 말해 <외계+인> 1부가 제목에서부터 강조하고 있는 외계인의 존재가 <전우치>를 더 큰 세계관을 확장시키기 위한 핵심 도구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전우치>가 일방향적으로 과거에서 현재로 이동하는 데 그쳤으니, 영화는 더 많은 도사와 더 복잡한 시간 여행기를 보여주려 한다. 그렇다고 이미 한 차례 활용한 빌런인 요괴를 등장시킬 수 없기에 전혀 다른 존재인 외계인을 등장시켜 현재와 과거를 자유로이 넘나들고 세계관을 키운다. 그래서 외계인은 철저히 수단적으로 활용된다. 외계인 캐릭터는 생동감이나 입체감이 부여받지 못한다. 그들의 존재는 위기를 자아내고, 시간 여행의 문을 열어서 사건의 발단을 만드는 것으로 활용가치가 충분하다. 그 문을 넘어서면 더 많은 도사와 주변인들이 과거의 현재 사이에서 펼치는 화려한 티키타카가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까지만 보면 외계인을 투입한 선택은 그 역할을 충실히 다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될수록 도구적인 외계인 활용법은 두 가지 문제를 발생시킨다. 하나는 무색무취한 외계인의 등장은 결국 SF 장르의 스펙터클이라는 외피만 취하는 것과 다르지 않고, 이로 인해 SF와 판타지라는 장르 사이에서 영화가 좀처럼 균형점을 찾지 못한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외계인을 통해 깔아 둔 판 위에서 펼쳐져야 할 여러 캐릭터들의 티키타카가 그 자체로 큰 재미를 끌어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일단 <외계+인> 1부는 SF 장르와 판타지 장르가 일반적 인식과 달리 결합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는 점을 간과했다. SF와 판타지는 초자연적이고 초현실적인 현상을 다룬다는 공통점을 갖지만, 그것을 풀어내는 방식에 있어서는 차이점이 있다. 판타지 영화는 초자연적 세계와의 경계를 없애버리는 장르에 가깝다. 이 세계의 것이 아니라서 이해하기 어려운 마법과 같은 현상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태도를 취한다. 그래서 <반지의 제왕>, <해리 포터>, <나니아 연대기>과 같은 판타지는 현실에 발붙이는 대신 초월적 세계를 주무대로 삼으며, 선악의 대립에 기초한 형이상학적 윤리관이 영화의 주제의식을 장식한다. 반면에 SF 영화는 알려지지 않은 초자연적 세계를 향해 돌진하는 영화에 가깝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을 통해 당장은 이해할 수 없으나 미래에는 이해할 수 있을 현상과 세계에 대해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설명을 요구한다. 이때 과학기술의 발달은 인간의 주체적 노력이 이끌어내기에 SF는 판타지와 달리 당장 현실의 문제에 발 딛고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SF 영화가 재현하는 세계에는 당장 오늘의 현실적 문제가 투영된다. SF 영화 속 세계는 알아볼 수 있는 모습으로 시작하지만, 마지막에는 새로운 발견과 기술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세계의 변화를 일으킨다. 이 지점에서 SF 영화에는 과학의 발달이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낙관만큼이나 인간의 기계화나 혹은 기계의 인간화로 인한 디스토피아적 미래에 대한 우려가 자연히 깃들 수 있다. 그래서 SF 영화를 관통하는 가장 큰 주제는 과학과 관련된 사회 제도와 구조와 관련이 깊을 수밖에 없다. 즉, SF 영화는 과학에 근간을 둔 스펙터클을 통해 오히려 인간들이 마주하고 있는 문제를 드러내는 통로이며, <터미네이터>, <아바타>, <쥬라기 공원> 등의 SF 명작들은 제각기 사회적 문제를 다룬다. 선악의 대립 끝에 선의 승리를 통해 기존의 세계관과 질서를 반복하는 판타지가 보수적이라면, SF는 진보적인 장르인 것이다. 이는 SF 작가 테드 창이 "판타지는 집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라면 SF는 세계가 변화하는 이야기"라고 요약한 이유다.
단순히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돋보이는 시각적 효과를 활용한 스펙터클을 보여주는 데에만 치우친 많은 한국 SF 영화는 이 대목에서 번번이 좌절을 맛봤다. 현재나 혹은 과거 사회상에 대한 의식이 느껴지지 않는 이질적인 세계를 상상해 스크린에 띄운 결과 영화에서는 현실과 미래에 대한 낙관적 전망도, 부정적 우려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는 SF 영화의 세계관을 기대하는 관객과의 소통 부재를 일으키는 결정적 이유다. 뒤집어 말하면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담긴 봉준호 감독의 <괴물>이나 환경오염과 기후 변화로 인한 미래상을 그려낸 <설국열차>와 넷플릭스의 <승리호>가 나름대로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원동력이기도 하다.
<외계+인> 1부는 익숙한 실수를 반복한다. 외계인들의 행성이 전쟁으로 인해 초토화된 후 평화에 반대하는 '설계자'를 비롯한 이들을 지구의 인간 속에 가두고 있다는 설정에서는 현실 세계를 향한 비판적 시선이 그다지 와닿지 않는다. 구체적인 장면 없이 대사로만 전달될 뿐만 아니라, 반전과 평화를 추구한다는 주제의식 자체도 지나치게 일반론적이다. 그나마 모든 것을 수치화하는 가드와 썬더가 인간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인간의 감정처럼 계량화 할 수 없는 요소들의 중요성을 깨닫는 대목에서는 인간성이 사라지는 세계에 대한 비판의식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 내용은 고려시대를 배경을 한 도사들의 이야기에 밀려 제대로 된 서사와 분량을 배분받지 못하며, 결국 급작스러운 전개로 인해 메시지에 설득력이 실릴 틈이 없다. 가드와 썬더를 제외한 모든 캐릭터가 <전우치>의 연장선상인 판타지적 세계관에 속해 있기에, SF의 외적 요소를 제외하면 지향점이 근본적으로 다룬 SF영화의 스토리는 좀처럼 하나의 영화에 통합되지 않는다.
최동훈 감독이 기자간담회에서 "한국적인 방식으로 <어벤져스>만큼 재밌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라고 밝힌 대목에서는 이 실수가 더욱 극명히 드러난다. 당장 그 <어벤져스>도 판타지와 SF의 세계를 혼합하는 데 긴 시간을 투자해야 했기 때문이다. 일례로 고도로 발전한 과학이 마법이라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가 중심이 된 시리즈에 신화 속 인물인 토르는 좀처럼 섞이지 못했다. <토르> 시리즈의 1편과 2편은 판타지도 sf도 아니라는 혹평을 들었고, 배경을 완전한 외계 행성으로 바꾼 3편부터 세계관에 녹아들 수 있었다. 그렇기에 <외계+인> 1부도 단순히 기능적으로 SF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판타지와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이정표를 목표로 했다면 더 많은 준비가 있어야 했다. 판타지와 SF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필요한 이야기를 충분히 전개할 수 있는 구조와 구성, 시리즈의 편수와 영화가 아닌 넷플릭스 시리즈와 같은 배급 방식에 이르기까지 더 고민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다만 이는 최동훈 감독이기에 남는 아쉬움이기도 하다. 불안정한 세계관에서 이야기를 끌고 나가려면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역으로 이는 최동훈 감독의 특기였다. 그의 영화들은 자세한 설정과 배경 설명, 구체적인 세계관을 토대로 관객을 끌어들이지 않는다. 한눈에 들어오는 특출 난 캐릭터들, 그리고 그들의 입에서 관객의 귀로 곧장 꽂히는 매력적인 대사들로 무장한다. 관객의 눈과 귀를 현혹해 부족한 점을 가리고 러닝타임 내내 최동훈 감독의 시나리오를 따라 영화를 즐길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유달리 최동훈 감독의 작품은 명대사와 기억에 남는 캐릭터가 많다. 십수 년이 지나서도 명대사와 캐릭터를 재발굴할 수 있는 영화인 <타짜>, 모의고사 지문으로도 등장해 화제가 된 <전우치>, 전지현의 대표작인 <도둑들>과 이정재의 성대모사하면 빠질 수 없는 영화인 <암살>에 이르기까지.
<외계+인> 1부에서는 이러한 매력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부실한 세계관의 허점을 눈감고 넘어갈 수 있는 매력적인 포인트가 없다. 물론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한 도사들의 이야기는 나름대로 인물들의 매력을 어필한다. 흑설과 청운의 콤비는 등장인물들 중 가장 고타율의 유머를 자랑한다. 어느 시점부터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과거와 현재의 접점을 따라 전형적인 이야기를 보여주는 무륵과 이안도 2부에서 풀릴 그들의 이야기에 대한 최소한의 기대감은 심어준다. 나름의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자장 도사도 극의 무게감을 잡아준다.
문제는 현대 시점이다. 외계인 캐릭터를 철저히 도구적으로 설정한 결과 그들과 맞서 싸우는 가드는 일인다역을 소화하는 김우빈의 열연에도 불구하고 원맨쇼를 펼치는 듯 느껴진다. 그와 합을 맞춰야 할 또 다른 캐릭터인 썬더도 문제가 적지 않다. 전투가 벌어지거나 가드가 일을 할 때 달걀 모양의 로봇인 썬더가 말하는 "비상", "위험하다", "생명력 9%"와 같은 유치한 대사의 내용이 다급한 톤과 묘한 부조화를 일으키면서 흐름을 깨기 때문이다. 그가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캐릭터인 점, <스타워즈> 시리즈에 등장한 C3PO와 R2D2처럼 로봇 캐릭터가 SF 영화에 매력을 더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유달리 아쉬운 대목이다.
결국 <외계+인> 1부는 한국 영화에서 여전히 생소한 SF와 판타지 간의 이종결합을 시도했다는 의의는 있을 지라도, 상업영화로서 최동훈 감독의 명성에 걸맞고 그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결과물은 아닌 것 같다는 인상만을 남긴 채 내년에 개봉할 2부를 기약한다.
P(Poor, 형편없는)
한국형 SF 판타지의 도전 그 자체를 칭찬하기에는 반면교사도, 롤모델도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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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th #JIMFF 박영광 감독님 interview ?♀️ 제18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상영작 #낮은목소리 의 박영광 감독님 본격 탐구! ?♀️ #하이스트레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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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MFF 공식 웹 데일리팀이 직접 취재한 제천국제음악영화제 현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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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쟁 상영작 [낮은 목소리]의 박영광 감독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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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워크 먹여살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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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은 여러분의 큰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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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해변의 에트랑제> 메인 예고편
오키나와 외단섬, 해변 벤치에 혼자 멈춰있는 소년 '미오' . 그런 미오가 몹시 신경 쓰이는 소설가 지망생 '슌'
우연한 계기로 가까워졌다 생각한 순간, 미오가 돌연 섬을 떠난다.
그리고 3년 후, 그토록 그리워하던 서로를 다시 만난 둘은 이제 마음을 알아가며 서툴지만 따뜻한 사랑을 시작하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