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반적으로 꿈이란, 인간의 무의식을 기반으로 하거나 이러한 무의식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억압된 욕망이 투영되어 만들어진다. 즐겁고 행복한 꿈보다 어딘가 어긋나 있고 이상한, 불쾌하거나 불안한 꿈을 더 많이 꾼다. 불쾌한 꿈은 깨어난 이후 행복한 꿈보다 기억이 더 오래 지속된다. 이런 명제를 두고 보면 무의식은 의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의식이 있을 때 역시 우리는 행복한 기억들보다 불쾌하고 불안한 기억들이 더 자주 상기되고 더 크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꿈은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고 현실에서는 불가능할 법한 일들을 경험하게 한다. 이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폴이 다른 사람들의 꿈속에 등장해 비현실적인 방법으로 꿈의 주인을 죽이는 것처럼 말이다. 이야기의 초반, 폴은 자신의 딸을 시작으로 주변인들의 꿈에, 더 나아가 얼굴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타인들의 꿈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사람으로 반복해서 등장하게 된다. 그들의 무의식 속 폴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사람일까? 사실 우리는 이 꿈이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마음 한편으로 ‘폴’이라는 인물은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혹시나’라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만약 폴이 사람들의 꿈속에 처음처럼 그냥 가만히 서 있는 사람으로 등장했다면 호기심에서 그쳤을지도 모르겠다. 꿈속에서 자신을 죽이는 사람으로 처음 마주한 폴에 대한 두려움이 형성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할 수 있다. 이 사람이 평소에 어떤 행실을 가지고 살았던 그것은 우리가 상관할 바 아니라는 것처럼 말이다. 강렬한 꿈은 좀처럼 잊을 수 없기에 불쾌함은 오랫동안 지속되고, 꿈에서 나를 죽인 사람이 실제로 눈앞에 나타난다면 불쾌함이 자연스레 표출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우리는 잘 아는 사람을 좀처럼 증오하지 못한다.’는 윌리엄 해즐릿의 신조는 다르게 말하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증오하기 수월하다는 뜻으로 읽히기도 한다.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상상하는 것은 더욱 쉽다. 그렇다면 현실이 아닌 꿈에 나타나 나를 비현실적으로 죽이는 사람을 현실 속에서 혐오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일까? 즉, 인간의 무의식을 통해 나타난 꿈이 현실 속 혐오라는 폭력의 수단으로 사용되며 과연 이것이 합리화될 수 있겠느냐는 물음에 대해 우리는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겠다. <드림 시나리오>(2024)는 이렇게 납득이 되지 않는 이유(무의식)를 빌미로 꿈을 이용해 비현실적인 혐오가 난무하는 현대 사회를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는 영화다.
영화 속에서도 나왔듯 원래 모든 밈은 꿈이 된다는 말이 있고, 인터넷에 도배가 된 폴의 꿈을 꾸는 건 쉬웠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전부 폴에 대한 꿈을 꾸는데, 어떻게 자신만 꾸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반면 과연 정말 전 세계 사람들이 폴에 대한 꿈을 꾸었을까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기도 한다. 사람의 욕망과 심리라는 것은 자신은 특별하게 보이고 싶고 유행에 뒤처지는 것을 기피한다. ‘사람들은 꿈의 내용을 의미 있는 어떤 내용으로 대체하고 싶은 강렬한 욕망을 느낀다.’고 이야기한 프로이트의 말처럼 자신의 꿈이 사람들에게 주목받으며 공감받기를 원하고, 유행하는 것들을 따라가고 싶어 한다. 일명 도파민이라는 핑계로 자극적이면 자극적일수록 세상에 더욱 관심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하다. 자극적인 꿈의 내용에 폴을 집어넣어 실제 자신이 꾼 꿈이 아닌 허구의 이야기를 만들어 낸 사람들이 존재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꿈의 유행이 시작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역시 트렌드에 합류하여 주목받기를 바라는 욕심에 눈이 멀어 폭력에 가담한 것이 아니겠는가. 허구의 이야기는 누군가를 몰아가기에 아주 적합한 수단이다.
폴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채로 등장했던 이전과는 다르게 몰리의 꿈에 그녀의 무의식 속 잠재되어 있던 성적 욕망을 드러내 보이는 역할로 나타난다. 이는 폴이 타인의 꿈속에서 처음으로 ‘행동’하는 순간이다. 이를 시작으로 가만히 서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폴이 점차 학생들의 꿈을 시작으로 이외 사람들의 꿈에 꿈의 주인을 죽이거나 몰리의 꿈과 비슷하게 성적인 욕망의 사람이 된다. 트라우마가 트렌드라는 폴의 말에 수긍하는 듯 트라우마라는 원인을 내세워 폴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 되었다. 사회의 암묵적인 룰이 된 셈이다. 현실에서는 아무런 짓도, 타인에게 해를 가하는 짓도 하지 않은 폴은 꿈으로 인해 가해자가 되어있다. 현실에서는 그를 죽이기 위한 조증 환자가 집에 침입하여 피해자가 된 폴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의 꿈속에서는 꿈의 주인을 죽이는 가해자가 된다는 말인가. 이는 다수의 사람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보다 한 명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 더욱 쉽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한 사람을 평가하는 말이 같다면 실제의 ‘나’는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그런 사람이 되어 있다. 악몽의 시작인 동시에 폴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합리화하는 것의 시작일 것이다. 입소문은 빠르고 꿈만큼이나 왜곡되기 쉽다. 꿈을 검열하고 왜곡하도록 강요하는 심리 상태 역시 무의식에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매주 수업에서 보는 교수가 꿈속에서 자신에게 위협을 가한다면? 나를 죽이려고 달려든다면? 꿈의 주인은 불안하고 실제로 ‘나’를 죽일지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인다. 이러한 꿈을 꾼 학생이 친구에게 꿈 이야기를 전파했다면 ‘혹시나’하는 불안으로 인해 다른 학생들에게는 자신을 죽이는 꿈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점차 다수의 사람 꿈속에서와 마찬가지로 실제로도 폴은 위험한 존재가 된다.
앞서 이야기한 과연 정말 전 세계 사람들이 폴에 대한 악몽을 꾸었을까에 대한 궁금증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자신을 죽였다는 정확한 꿈의 내용이 주변인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존재하지 않고 대부분 그저 ‘죽이는 꿈’을 꾸었다는 허황된 말들뿐이다. 정확한 근거가 없다는 뜻이다. 꿈에 근거가 어디 있겠는가. 자신이 꾸었다고 하면 꾼 것인데. 누가 이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까. 이로 인해 꿈으로 인한 선동은 다른 것들보다 선동되기 훨씬 수월하다. 개인의 말이 곧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질투는 타인의 성취나 유리한 입장에 배가 아프거나 괴로워하는 마음이다. 특별해 보일 것 없는 사람인, 존재감 없고 제대로 된 연구 논문 하나 내지 않은 채 여전히 명성 없는 대학교수인 폴이 갑자기 사람들의 꿈에 나타나게 되고 인기를 얻게 되는 것은 몇몇 사람들 입장에서는 질투가 나지 않았을 리 만무하다. 고작 많은 사람들의 꿈에 나왔다고 해서 한순간에 인기를 얻은 폴이 어떻게 눈엣가시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얼룩말처럼 무리에서 벗어나 혼자 튀었기 때문에 타깃이 되기도 쉬웠다. 어째서 사람은 현실이 아닌 가상의 꿈을 통한 개인의 상상과 생각을 가지고 한 사람에게 폭력을 가할 수 있는가? 우리는 왜 이렇게 쉽게 혐오에 휩싸이는가. 꿈이라는 가상을 현실까지 끌고 와 상대방에게 해를 가하는 것에 대해 그 누구도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 이때 그로테스크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학생들의 악몽 트라우마를 치료하기 위해 정서적 격발 기제를 푸는 심리 치료를 진행하지만, 트라우마를 치료하기는커녕 오히려 트라우마가 더욱 악화한다. 꿈으로 인한 불쾌감은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도 지속되기 때문에 학생들은 폴에게 자신들과 같은 불쾌감을 쥐여 주고 싶었다. 이후 폴의 차에 학생들은 낙서를 해 두고, 폴에게 욕설을 날리는 등 폴에게 실제로 위협을 가하며 이 상황을 핸드폰으로 찍거나 구경한다. 마치 이런 폴의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 학생들을 향해 격분하는 모습이 폴의 실체임을 이미 알았다는 듯 비아냥거리기에 바쁘다. 인간은 악을 갈망하는 마음이 있어서 나쁜 짓을 하며 이를 통한 만족을 얻게 된다는데,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방법은 혐오밖에 없다는 말일까. 어쩌면 학생들은 트라우마를 옳은 방법으로 치료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일 수도 있겠다. 혐오가 그들이 원했던 치료 방법일 수도 있겠지만.
악몽으로 인해 폴은 교수로 있던 학교에서 정학을 당하고, 가족의 불화가 생기고, 학생들에게 조롱을 당하는 등 폴의 주변 사람들이, 심지어는 폴이 모르는 사람들 모두 폴에게 등을 돌린다. 더 이상 폴은 꿈과 상관없지 않다. 꿈속의 ‘남자’가 자신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폴과 달리 사람들에게 꿈속의 ‘남자’는 ‘폴’이 되었다. 누가 폴을 피해자라고 생각하겠는가. 사람은 자신이 피해자가 되는 건 쉬우며 가해자가 되는 것은 어렵다. 자신이 가해자의 입장에 설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한다. 어떤 경우에서든 자신을 보호하고 싶어 하며, 심지어 자신이 실제로 타인에게 해를 가하고 있음에도 자기합리화를 하기에 바쁘기 때문에 진짜 피해자를 구별해 낼 인지가 부족하다. 이렇게 폴은 무의식으로 인한 의식의, 피해자의 의견은 묵살되는 사회의 완벽한 피해자가 되었다.
사람의 상상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누군가를 벼랑 끝으로 내몰 수 있는 것도 전부 사람의 상상이다. 타인을 조롱하고 혐오하는 것은 끝이 없다. 심지어 다수의 사람이 한 사람을 향해 같은 비난을 쏟아내면 그것을 오롯이 받아내는 폴은 어떻게 될까. 폴은 자신이 자신을 죽이는 악몽을 꾼다. 폴이 현실에서 손가락질받으며 가해자라는 인식이 지속되고, 결국 폴마저 이러한 인식 속에 잡아먹힌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자기 내면이, 그 내면의 어두운 부분이 있지 않을까에 대해 스스로 의심하게 되고, 이는 무의식 속 잠재되어 있던 불안이 폴의 꿈을 통해 나타난다. 결국 폴은 이런 사회적 혐오에 처참히 무너진다. 그리고 이는 겉잡을 수없이 번져 끝내 자기혐오로 다가온다. 자기혐오는 자신을 죽이는 일이고, 자신을 죽이면서까지 자기를 혐오하는 무리에 들어가기 위해 애쓴다. 상상이 상상에서 그치지 않고, 무의식이 무의식에서 그치지 않은 결과인 셈이다.
꿈속 누군가를 위협하는 존재로 등장했던 폴은 결국 현실에서마저 자신을 포함한 타인에게 위협을 가하는 존재가 된다. 단 한 번의 사고로 폴은 완벽한 피해자에서 예정되어 있던 완벽한 가해자로 변한다. 현실에서도, 꿈에서도 위협을 가하는 존재가 된 폴은 현실에서도, 꿈에서도 사라져 버린다. 꿈에서 사라진 폴이 점차 잊힐 때쯤 그렇게 혐오했던 폴을 다시 마케팅 수단으로 사용하는 ‘노리오’가 개발된다. 긍정적인 꿈을 꾸게 해 줄 수 있는 제품이고, 폴 없이는 존재하지 못했다고 하지만 다른 사람의 꿈에 나타나는 힘을 사람들을 겁주는 데 사용해 안타깝다는 말을 통해 여전히 폴에 대한 혐오와 증오가 남아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폴이 타인의 꿈에 나타나 꿈의 주인을 죽인 것이 폴의 자의였다고 확정 짓는 대목이다. 사람들의 상상은 더 이상 바꿀 수 없는 기정사실이 되어 버렸다. 예전의 감정은 되살릴 수 없듯 인생 역시 되돌릴 수 없기에 더 이상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닌 완벽한 혼자가 되어버린 폴은 무중력 상태가 되어 여전히 공중을 떠다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드림 시나리오>는 이러한 무의식이 현대 사회 속 혐오와 폭력이 ‘자기합리화’에 이를 수 있다는 결론을 낸다. 하지만 사실, 무의식에 근거한 혐오와 폭력이 자신에게만 합리화될 뿐 모두에게 실제로 합리화되지 않는다. 무의식에서 폭력을 당하는 것과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것, 당하는 것은 너무나 큰 차이다. 폴에게 폭력을 가한 사람들은 전부 무의식 속의 ‘누군가’가 아닌 의식이 명확히 존재하는 ‘인간’이다. 자신이 폭력을 가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이다. 피해자를 제외한 그 누구도 그것이 잘못되었다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 모두가 자기 행동에 동조하기 바쁘다. 세상은 변하지만, 사람의 근본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의 근본이 변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수 있지만 세상이 변함에 따라 혐오를 대하는 방법은 변해가는 세상에 맞게 달라져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는 혐오가 난무하는 사회 속에서 혐오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숨기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오히려 누군가를 먼저 앞서서 혐오하기에 바쁘다. 누군가가 선동을 시작하면 개인 속에 잠재되어 있던 혐오가 기어 올라와 기어코 폭력을 휘두른다. 폭력을 휘둘러야 만족하고 만다.
꿈만큼 현혹되기 쉬운 것도 없다. 우리는 꿈을 꾸면 그 꿈에 대해서 의미를 해석하기에 바쁘고, 불쾌한 꿈을 꾼다면 그 무의식 속 불쾌함이 의식까지 영향을 미치며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지속된다. 하지만 이러한 ‘불쾌감’이 누군가를 혐오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는 없다. 그 누구에게도 혐오 받을 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혐오 받을 권리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 속에서 어떻게 혐오할 권리는 존재하는가.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가. 생각이란 무엇이고, 또 이런 생각에 기초한 상상이란 무엇인가. 왜 우리는 생각과 상상을 끊임없이 타인을 포함한 자신의 혐오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을까. 생각이 혐오의 수단으로 흘러가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인가? 생각은 사실 단순해서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것이기에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 혐오로 흘러가지 않도록 막을 힘이 충분히 존재한다.
우리는 혐오가 유행이 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혐오가 밈이 된다. 우리는 정말 살면서 한 번도 타인을 혐오한 적이 없을까. 내가 사용하는 밈이 누군가를 혐오하는 문장이지는 않을까. 제삼자의 시선으로 본다면 그것이 명백한 혐오임에도 불구하고 혐오가 아니라고 자기합리화하고 있지는 않은가. 비판이라는 명목하에 비난이나 혐오를 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도 ‘나’를 잘 모르는데 어떻게 타인을 안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혐오가 혐오라는 것을, 혐오를 그만둬야 한다는 사실을 더 많은 사람들이 소리 낼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어쩌면 이런 용기를 내기 위해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누군가를 혐오하기보다 우선 이러한 현상이 합리화되는 사회를 충분히 의심하고 경멸해야 하지 않을까. 세상이 더 이상 폭력적이지 않을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