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작가2023-11-10 17:38:20
나는 몰랐던, 그래서 우리 모두 영원히 모르는 괴상함
영화 [괴인] 리뷰/ 해석
엔딩 크레딧이 올라올 때, 극장에 있던 모든 사람이 "어..?" 하는 비슷한 신음을 내뱉었다. 나도 물론 그중에 한 명이었다. 좀 더러운 표현일 수도 있지만, '뭐 누다가 끊긴 느낌'이랄까. 뭔가가 시작될 것 같은 때에 허무하게 끝을 맞이하는 기분이 들었다.
영화 [괴인]은 내가 보았던 그 어떤 영화보다 호흡이 길었다. 가장 길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계단에 가는 씬을 찍는다고 가정하면, 침대에서 주인공이 일어난 후 계단을 모두 오르는 소리를 다 들려준 후에 장면이 전환되는 식이다. 그런데 심지어 계단 꼭대기에서 기다리고 있던 앵글이 주인공이 모두 올라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가 내려갈 때까지 다시 기다린다.
이건 아마 화려한 액션이나 판타지에 익숙한 사람, 혹은 그것을 선호하는 사람에게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만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전부 담아냈기에 현실적으로 피부에 와닿을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고. 영화가 끝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감독이 필름을 거의 안 버리고 다 썼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기홍은 여러 가지 모습을 가졌다.
친구들 앞에서는 브랜드 옷을 걸치고 '네가 무슨 고생을 아냐', '언제까지 월급 받으며 살 거냐', '나는 하루 일당이 40만 원이다' 등등, 과도하게 자신을 뽐내고 잔소리를 줄기차게 늘어놓는다. 하지만 마트에서는 뒤에 줄 선 임산부에게 순서를 양보하기도 하고, 집주인과 있을 때는 조금 주눅 든 모습이기도 하며, 가족 앞에서는 자신의 일에 대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는 등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다.
문득 INFJ가 생각났다. 인프제는 흔히 '가면'으로 대표되는 MBTI이다.
인프제의 특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여러 개의 가면을 마음속에 걸어두고,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것을 바꿔 낀다. 그래서 종종 인프제를 두고 갑론을박을 펼치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재미있다. 누군가는 가면을 바꿔끼는 것이 음험하다고 하지만, 누군가는 나를 관찰해서 맞춤형 태도를 갖춘다는 것에 굉장히 감동하기도 한다. 어떻게 이렇게 잘 아냐고? 내가 바로 그 인프제 되시겠다.
인프제를 대표하는 말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을 뽑으라면, '인프제는 히틀러이면서 동시에 예수이기도 하다'라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반문하고 싶다. 우리 모두가 그렇지 않으냐고. 우리 내면에는 천사와 악마가 늘 공존하지 않던가. 당장 눈앞에 무거운 리어카를 끌고 가는 노인이나 좁은 골목에 떨어진 만원 지폐가 보인다면 내면의 소리가 부딪히며 갈등을 일으킬 것이다. 우린 그중 한 가지를 선택할 뿐이다.
*여기부터는 스포일러가 포함됩니다.*
"당신도 나처럼 이상하잖아요."
그런 점에서 기홍은 '괴인'이라는 제목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괴인이다. 괴이하고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을 더 많이 찾게 되는 그런 생명체. 그런 생명체들이 부딪히고 접촉하면서 세상에는 독특하고 별난 사건들이 만들어진다. 바로 이 영화처럼.
기홍은 자신의 차 위로 떨어진 범인을 우연히 찾아낸다. 범인은 집이 없어 길을 떠도는 소녀, 하나. 성인이라곤 하지만 이제 겨우 스무 살을 넘겼을까, 기홍은 안타까운 마음에 수리비를 사양한다. 그러나 이번에도 집주인 정환의 부추김으로 그녀를 집에 초대해 밥을 먹게 된다. 술을 마시고 밤늦게 집으로 하나를 돌려보내는데, 기홍은 밥값을 쥐여주며 택시를 태운다. 그렇게 모든 사건이 끝난 듯싶었다.
술 한 잔 더 하자고 정환에게 권유했지만 퇴짜를 맞은 아내 현정. 그녀는 별안간 남은 술을 들고 기홍을 찾아와 방으로 밀고 들어온다.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아쉬운 마음에 밖으로 나선다. 하필 그때, 돈을 돌려주러 온 하나가 집 문을 두드려 잠에서 깬 정환. 그리고 전화를 받지 않는 두 사람. 그렇게 영화는 또 다른 사건의 시작을 향해 흘러가며 끝이 난다.
우리 삶을 영화로 옮기면 영원히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연결된 사람에게서 또 다른 사람으로, 시선을 바꿔가며 새로운 사건은 계속 이어지니까. 그 순간에는 엔딩 크레딧의 존재가 의뭉스럽지만, 막상 돌이켜 보면 알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결말이었다.
기홍과 정환, 현정 부부가 살고 있는 집은 우리의 삶을 단면적으로 잘 보여준다.
양쪽에 현관문이 두 개인 전원주택이지만, 실질적으로 안에 들어서면 2층 계단을 통해 서로 집을 오갈 수가 있다. 정환은 거리낌 없이 계단으로 기홍의 방을 들락날락하지만, 기홍은 좀처럼 계단을 이용하지 않는다. 정환이 괜찮다고 해도 현관문을 이용한다.
이어져 있는 것 같지만, 이어져 있지 않을 수도 있다.
반대로 끊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어져 있을 수도 있다.
뫼비우스의 띠 같은 이 궤변은 하나라는 인물로 하여금 완성된다.
돈을 돌려주러 다시 찾아왔던 하나는 정환에게 부탁해 2층에서 머물게 된다. 아침이 되어 집에 돌아온 기홍이 본 것은 2층에서 자고 있는 하나의 모습이었다. 기홍이 그토록 끝끝내 잇고 싶지 않았던, 멀리하고 싶었던 집주인 부부와의 인연은 하나를 통해 억세게 매듭짓게 된다. 우리네 삶은 종종 이토록 허무하게, 부정해왔던 것을 마주하기도 한다.
살다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던 사람이 내 인생에 잊을 수 없는 이벤트를 만들어주기도 하고,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금방 떠나가 버리는 경험을 하곤 한다. 초연해지려고 애쓰지만 그런 순간마다 예측할 수 없는 반전에 놀라움을 머금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영화 [괴인]은 단순히 단어나 문장으로는 정의할 수 없는 우리 인생을, 그저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고 애쓴다. 비록 보는 순간에는 황당하지만, 다 보고 나면 계속 곱씹게 되는, 묘하게 빠져드는 영화였다.
* 이 리뷰는 씨네랩의 초청을 받고 크리에이터로서 참석하여 작성된 주관적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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