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3-11-15 16:39:46
만능 재주꾼 ISTP 배우ver.
ISTP가 말이 없는 이유 : 할말이 없으니까.
무관심한데 따수워...무기력해 보이지만 알잘딱깔센의 대명사, 극한의 효율중시인간 잇팁!
실제 mbti istp의 배우들 모아보았습니다. 따듯한 얼굴속 단호박이 보이는건 저뿐인가요? 껄실제 잇팁 배우들 모아보았습니다. 따듯한 얼굴속 단호박이 보이는건 저뿐인가요? 껄껄껄
ISTP의 대표 연예인으로는 박명수가 있죠. 만사 귀찮아 보이지만 자신이 맡은 일엔 최선을 다하는 잇팁.
"어쩔 수 없지" "그럴 수도 있지" "아니 그게 아니라" 이런 말버릇을 입에 달고 산다는데요.
물흐르듯 조용히 사회에 잘 적응하는 MBTI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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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들이랑 꼭 한번씩 따라하는 영화 명대사 모음
실생활에서 아주 유용하게 쓰이는 한국영화 명대사 모음 !! 다들 한번쯤 들어보셨죠~?
사실 이경영의 "진행시켜" 대사는 어떤 영화에도 나온적이 없다고하는데요.이경영 배우 특유의 어법과 화법이 비슷해서 밈으로 만들어졌나 봅니다 �
여러분의 최애 명대사는? 친구들한테 한번 써먹도록해요 우리�
cinepick!
비리 세관 공무원 최익현, 보스 최형배를 만나다! 1982년 부산. 해고될 위기에 처한 비리 세관원 최익현(최민식)은 순찰 중 적발한 히로뽕을 일본으로 밀수출, 마지막으로 한 탕 하기 위해 부산 최대 조직의 젊은 보스 최형배(하정우)와 손을 잡는다. 머리 쓰는 나쁜 놈과 주먹 쓰는 나쁜 놈, 부산을 접수하다! 익현은 탁월한 임기응변과 특유의 친화력으로 형배의 신뢰를 얻는 데 성공한다. 주먹 넘버원 형배와 로비의 신 익현은 함께 힘을 합쳐 부산을 접수하기 시작하고, 두 남자 앞에 나쁜 놈들의 전성시대가 펼쳐진다. 넘버원이 되고 싶은 나쁜 놈들의 한판 승부. 범죄와의 전쟁 하지만 1990년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되자 조직의 의리는 금이 가고 넘버원이 되고 싶은 나쁜 놈들 사이의 배신이 시작된다. 살아남기 위해 벌이는 치열한 한판 승부, 최후에 웃는 자는 과연 누가 될 것인가?
cinepick!
엄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형과 누나와는 다르게 간지나는 학창시절을 보내고 싶었던 짱구는 집안에서 유일하게 명문고에 진학하지 못해 골치덩이가 된다. 광춘상고는 교사들의 폭력과 학생들간 세력 다툼으로 부산일대에서 알아주는 악명 높은 학교. 광춘의 조회시간은 학교의 명성을 증명이라도 하듯 쓸만한 후배 물색으로 시작된다. 짱구는 입학 첫 날 ‘불법써클’몬스터의 카리스마에 압도 당하고…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약육강식의 세계를 알아갈 무렵, 학교폭력 가담을 이유로 짱구 일행은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된다. 짱구는 가까스로 정학만은 면하지만 다시 돌아온 학교에서 교내 불법 서클 ‘몬스터’의 유혹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렇게 몬스터의 후광을 업고 예쁜 여자 친구도 얻게 된 짱구, 쪽 팔리지 않고 싶었던 열여덟 짱구는 “바람”대로 폼 나는 학창시절을 보낼 수 있을까?
cinepick!
가구공장에서 일하며 남루한 삶을 사는 고니는 대학보다 가난을 벗어나게 해줄 돈이 우선인 열혈 천방지축 청년! 어느 날 고니는, 가구공장 한 켠에서 박무석 일행이 벌이는 화투판에 끼게 된다. 스무장의 화투로 벌이는 '섯다' 한 판! 하지만 고니는 그 판에서 삼년 동안 모아두었던 돈 전부를 날리고 만다. 그것이 전문도박꾼 타짜들이 짜고 친 판이었단 사실을 뒤늦게 안 고니는 박무석 일행을 찾아 나서고, 도박으로 시비가 붙은 한 창고에서 우연인 듯 필연처럼 전설의 타짜 평경장을 만난다. 그리고 잃었던 돈의 다섯 배를 따면 화투를 그만두겠단 약속을 하고, 그와 함께 본격적인 꽃싸움에 몸을 던지기 위한 동행길에 오른다.
cinepick!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을 만큼 뛰어난 미모의 소유자인 '금자'(이영애)는 스무 살에 죄를 짓고 감옥에 가게 된다. 어린 나이, 너무나 아름다운 외모로 인해 검거되는 순간에도 언론에 유명세를 치른다. 13년 동안 교도소에 복역하면서 누구보다 성실하고 모범적인 수감생활을 보내는 금자. '친절한 금자씨'라는 말도 교도소에서마저 유명세를 떨치던 그녀에게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그녀는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열심히 도와주며 13년간의 복역생활을 무사히 마친다. 출소하는 순간, 금자는 그 동안 자신이 치밀하게 준비해온 복수 계획을 펼쳐 보인다. 그녀가 복수하려는 인물은 자신을 죄인으로 만든 백선생(최민식). 교도소 생활 동안 그녀가 친절을 베풀며 도왔던 동료들은 이제 다양한 방법으로 금자의 복수를 돕는다. 이금자와 백선생. 과연 13년 전 둘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고, 복수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이 복수의 끝은 어떻게 될 것인가.
cinepick!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것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 뿐이다. 서울 하늘 한 켠, 섬처럼 떠 있는 한 호텔의 스카이라운지. 그 곳은 냉철하고 명민한 완벽주의자 선우의 작은 성이다. '왜'라고 묻지 않는 과묵한 의리, 빈틈 없는 일 처리로 보스 강사장의 절대적 신뢰를 획득, 스카이라운지의 경영을 책임지기까지, 그는 꼬박 7년의 세월을 바쳤다. 룰을 어긴 자는 이유를 막론하고 처단하는 냉혹한 보스 강사장. 그런 그에게는 남들에게 말 못 할 비밀이 하나 있다. 젊은 애인 희수의 존재가 바로 그것. 그녀에게 딴 남자가 생긴 것 같다는 의혹을 가진 강사장은 선우에게 그녀를 감시, 사실이면 처리하라고 명령한다. 희수를 따라 다니기 시작한 지 3일째, 희수와 남자 친구가 함께 있는 현장을 급습하는 선우. 하지만, 마지막 순간, 그는 알 수 없는 망설임 끝에 그들을 놓아준다. 그것이 모두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 믿으며 말이다. 그러나 단 한 순간에 불과했던 이 선택으로 인해 선우는 어느 새 적이 되어 버린 조직 전체를 상대로, 돌이킬 수 없는 전쟁을 시작하게 되는데...
cinepick!
고교 중퇴 후 맨주먹으로 거리의 양아치들을 싹 쓸어버렸던 오태식(김래원). 술먹으면 개가 되고 싸움을 했다하면 피를 본다는 그는 칼도 피도 무서워 하지 않는 잔혹함으로 ‘미친 개’라고 불렸다. 그가 가석방되었다. 태식이 괴롭혔던 민석은 형사가 되었고 태식의 시다바리였던 양기와 창무는 서로 적이 되었기에 사람들은 서로 다른 이유로 긴장한다. 그러나 태식은 그들과의 앙금은 모른다는 듯 손에 낡은 수첩 하나를 쥐고 그 안에 적힌 하고 싶은 일들을 해나간다. 목욕탕도 가고, 호두과자도 먹고, 문신도 지우고... 그 수첩은 그가 감옥에서 소망한 하고 싶은 일들뿐 아니라 앞으로 지켜야 할 세 가지 약속도 적혀있다. ‘술마시지 않는다’, ‘싸우지 않는다’, ‘울지 않는다’... 그 수첩을 줬던 덕자(김해숙)를 찾아가는 태식. 덕자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그를 친아들 이상으로 따뜻하게 맞아준다. 모르는 남자를 환대하는 영문을 몰라 어이없어 하며 태식에게 틱틱거리는, 그러나 왠지 밉지 않은 아줌마의 딸 희주(허이재). 이제 태식은 그들과 함께 희망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한다. 그러나 해바라기 식당 모녀를 제외한 모두는 태식을 믿지 않는다. 그리고 그 차가운 불신의 끝에서 아무도 상상 못 한 절망의 역습이 시작되고 있었다...희망은, 이루어질까?
cinepick!
사운드 엔지니어 상우(유지태 분)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백성희 분)와 젊은 시절 상처한 한 아버지(박인환 분), 고모(신신애 분)와 함께 살고 있다. 어느 겨울 그는 지방 방송국 라디오 PD 은수(이영애 분)를 만난다. 자연의 소리를 채집해 틀어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은수는 상우와 녹음 여행을 떠난다. 자연스레 가까워지는 두 사람은 어느 날, 은수의 아파트에서 밤을 보낸다. 너무 쉽게 사랑에 빠진 두 사람... 상우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에게 빨려든다. 그러나 겨울에 만난 두 사람의 관계는 봄을 지나 여름을 맞이하면서 삐걱거린다. 이혼 경험이 있는 은수는 상우에게 결혼할 생각이 없다며 부담스러운 표정을 내비친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묻는 상우에게 은수는 그저 "헤어져" 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영원히 변할 것 같지 않던 사랑이 변하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우는 어찌 할 바를 모른다. 은수를 잊지 못하는 상우는 미련과 집착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서울과 강릉을 오간다.
cinepick!
"너, 나하고 일 하나 같이 하자" 경찰청 수사 기획과 강과장(최민식)은 국내 최대 범죄 조직인 '골드문'이 기업형 조직으로 그 세력이 점점 확장되자 신입경찰 이자성(이정재)에게 잠입 수사를 명한다. 그리고 8년, 자성은 골드문의 2인자이자 그룹 실세인 정청(황정민)의 오른팔이 되기에 이른다. "우리 브라더는 그냥 딱, 이 형님만 믿으면 돼야!" 골드문 회장이 갑자기 사망하자, 강과장(최민식)은 후계자 결정에 직접 개입하는 '신세계' 작전을 설계한다. 피도 눈물도 없는 후계자 전쟁의 한 가운데, 정청(황정민)은 8년 전, 고향 여수에서 처음 만나 지금까지 친형제처럼 모든 순간을 함께 해 온 자성(이정재)에게 더욱 강한 신뢰를 보낸다. "약속 했잖습니까... 이번엔 진짜 끝이라고" 한편, 작전의 성공만 생각하는 강과장(최민식)은 계속해서 자성(이정재)의 목을 조여만 간다. 시시각각 신분이 노출될 위기에 처한 자성(이정재)은 언제 자신을 배신할 지 모르는 경찰과, 형제의 의리로 대하는 정청(황정민) 사이에서 갈등하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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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내가 만드는 신의 뜻
삶의 방향성은 내가 직접 조정하며 가는 것이 맞을까? 정말 힘들거나 미래가 불확실할 때 우리는 누군가를 찾는다. 주변 사람들에게서 그 답을 찾지 못할 때나, 정말 너무 힘든 상황이 닥쳐오면 우리는 신을 찾는다. 예수나 부처 등 다양한 종교들이 그 힘든 상황을 위로해 준다. 마치 신의 뜻이 있었던 것처럼 그 모든 불행과 행복이 신의 뜻이었다고 믿는다.
종교가 주는 힘은 크다. 사람들은 종교를 통해 위로를 받고, 힘든 상황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종교는 희망을 주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를 준다. 하지만 동시에 종교는 우리를 정적인 상태에 머무르게 할 수도 있다. 종교적인 분위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종교의 정적인 특성은 때로는 사람들에게 수동적인 태도를 유도하며,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약화시킬 수 있다.
영화 <이매큘레이트>는 과연 신의 뜻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공포 영화다. 미국에서 이탈리아로 가면서 한 가톨릭 시설에 가게 된 주인공 세실리아(시드니 스위니)가 겪는 일이 스산하게 담겼다. 이매큘레이트라는 단어는 '무결점의', '순결한'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 영화는 이 단어가 가지는 의미를 중심으로, 세실리아의 경험을 통해 신의 뜻을 탐구한다.
[첫 번째 감정] 세실리아의 믿음
세실리아는 어린 시절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아주 젊은 나이에 가톨릭의 수녀가 되기로 결정하고 종교에 귀의하는 삶을 살고자 한다. 그래서 더욱 그녀는 신을 믿고 가톨릭을 믿는다. 그리고 그녀가 새롭게 만나게 되는 수녀들과 신부들을 전적으로 믿는다. 세실리아가 종교적 믿음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녀의 어린 시절 경험과, 그로 인해 형성된 강한 신앙심 때문이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그녀에겐 남아있는 가족이 없었고, 오직 신에 의지하는 것만이 자신이 살아갈 수 있는 길이라고 믿고 있다.
세실리아가 처음 이탈리아의 종교 시설로 갔을 때, 이탈리아어가 서툰 그녀지만 적극적으로 소통하려 하고 미소를 잃지 않는다. 그녀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그곳에 갔는지를 영화는 초반의 장면들로 보여준다. 종교 시설의 스산하고 공포스러운 분위기는 세실리아의 미소에 조금 밝아진다. 세실리아의 심리적 상태는 그가 가진 굳건한 믿음과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녀는 잘못될 리 없는 신과 절대적 선인 수녀와 신부들을 믿고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찾아올 무서운 일을 전혀 예측하지 못한다.
그녀에게 어떤 일이 찾아오든 그녀가 그것을 극복하고 적응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게 되지만 이내 그 생각은 바뀌게 된다. 그녀의 주변에 이상한 일들이 생기고, 몸이 이상한 것을 느끼게 되는데 세실리아는 그녀가 믿는 신부의 추천으로 산부인과 진료를 받게 된다. 오래된 초음파 기계 앞에 누워서 진료를 받고 있는 그녀의 표정에는 여전히 신에 대한 믿음이 있지만, 주변의 공기는 더욱 차가워진다.
[두 번째 감정] 신의 뜻
세실리아는 갑작스럽게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무런 성적인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임신했다는 상황은 무척 공포스럽다. 하지만 세실리아의 주변 인물들은 그것을 신의 뜻이라고 믿고 말한다. 영화는 그것이 마치 진짜 신의 뜻인 것처럼 이야기를 몰고 간다. 공포스러운 분위기가 고조될 때, 그 수도원의 나이 든 수녀에게 세실리아가 왜 자신이 임신했는지 묻는다.
수녀의 답은 충격적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그것은 신의 뜻이 아니겠냐"는 답변이었다. 사실 멀리 가지 않아도 역사적으로 이런 일은 무수히 많이 일어났다. 과거 역사적으로 잘못된 믿음 때문에 일어났던 십자군 전쟁도 그러했다. 종교적 신념이 왜곡되면서 일어난 이 전쟁은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다. 그나마 현재는 과학적 연구와 사회적 이해가 발전하면서 덜하지만, 여전히 비슷한 일은 발생한다.
그래서 이 수녀가 말한 신의 뜻은 엄청나게 잘못된 것처럼 보인다. 세실리아는 당연히 겁에 질렸고, 과연 그것이 신의 뜻인지를 본인도 고민하게 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과연 진짜 신의 뜻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만약 그것이 신의 뜻이라면, 그것은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일까? 영화는 그런 애매한 상황 속에 세실리아를 밀어 넣고 관객에게 기괴한 서스펜스를 전달한다.
[세 번째 감정] 세실리아의 의지
영화는 늙은 수녀의 그 말 이후 달라지는 세실리아를 보여준다. 후반부의 세실리아는 완전히 다른 인물이 된다. 그녀는 신에 대한 믿음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녀가 어떤 행동을 하든 그건 신의 뜻이라고 할 수 있다. 임신해서 배가 불러오는 상황에서도 세실리아는 자신의 의지를 점점 강력하게 표출하기 시작한다. 그건 그 이상한 상황에서 느껴지는 공포심에 의해 발생한 본능 같은 것이지만, 세실리아 스스로의 의지가 없다면 실행이 불가능한 일이다.
영화 속 그 기도원은 이상한 믿음을 가진 집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믿는 잘못된 믿음은 깨뜨려야 할 장애물이 된다. 세실리아는 자신의 의지에서 비롯된 행동을 통해 신의 뜻을 만들어간다. 무언가 일어난 그 일 모두가 신의 뜻이 될 수 있다. 여전히 신은 말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신의 뜻이 될 수 있다면, 세실리아가 의지를 가지게 된 그 상황 자체도 신의 뜻이 될 수 있다.
세실리아가 보여주는 분노와 의지가 결국은 그 자신의 의지로 하는 것이 바로 신의 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세실리아가 수도원의 괴인들에 반하는 것이, 종교적으로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녀의 행동은 단순히 개인적인 반항이 아니라, 잘못된 종교적 신념에 맞서는 용감한 도전이다. 그녀의 의지는 종교적으로 올바른 길을 가기 위한 강력한 추진력으로 작용한다.
영화 <이매큘레이트>는 기본적으로 공포영화로서의 긴장감을 가지고 있지만, 그 공포 효과는 약했다. 공포 요소들이 충분히 무서운 장면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서스펜스를 유지하는 데 집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긴장감을 유지하며, 관객들을 끝까지 몰입하게 만든다. 공포 영화로서의 기본적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지만, 강렬한 공포 효과를 기대한 관객에게는 다소 아쉬움을 남길 수 있다.
영화 <이매큘레이트>는 세실리아가 자신만의 믿음을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을 공포라는 장르 안에서 보여준다. 배우 시드니 스위니는 이 역할을 통해 뛰어난 연기력을 선보였다. 그녀의 섬세한 감정 표현과 강렬한 연기는 세실리아의 복잡한 심리 상태를 잘 담아냈다.
이 영화를 연출한 감독 마이클 모한은 과거 작품인 <깊은 관계> 등에서 보여준 섬세한 연출 스타일을 이번 영화에서도 이어갔다. 그의 연출은 캐릭터의 내면을 깊이 파고들며, 관객에게 긴장감을 전달한다. <이매큘레이트>에서도 모한 감독의 특유의 섬세함과 치밀한 연출이 돋보인다.
영화 <이매큘레이트>는 종교적 믿음과 개인의 의지, 그리고 신의 뜻이라는 복잡한 주제를 다룬다. 세실리아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잘못된 믿음에 의지하기보다는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실리아의 변화는 단순히 외적인 변화가 아니라, 내적인 성장을 의미한다. 그녀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자신만의 믿음과 의지를 발전시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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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퍼맨 | 신 대신 인간의 길을 선택한 희망의 영웅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토록 깔끔하고 희망찬 <슈퍼맨>이라니
제임스 건이 만든 슈퍼히어로 영화 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와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 이들은 여러 공통점이 있다. 등장인물이 많은데, 대부분은 선의로만 움직이지는 않는 악당이거나 안티히어로가 대부분이었다. 적재적소에 삽입된 음악, 기괴함과 과장됨 사이를 오가는 B급 유머와 연출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중요한 공통점은 따로 있다. 두 작품 모두 단 하나의 키워드로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의도가 명확하다는 것.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키워드는 가족이었다. 1편에서 '스타로드'는 멤버들을 만나 엄마의 빈 자리를 채웠고, 2편에서는 바로 옆에 있었던 진짜 아빠 '욘두'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3편은 스타로드뿐만 아니라 로켓을 비롯한 모든 멤버들이 가족으로 거듭나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도 '평범함'이라는 키워드 하에서 나사 빠진 악당들이 가족이나 친구처럼 잊고 지내던 일상적인 가치를 회복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막 내린 DCEU을 대신하는 DC 유니버스의 첫 장편영화, <슈퍼맨>에서도 제임스 건의 역량은 빛난다. 모든 장면이 슈퍼맨 가슴에 새겨진 S라는 문양의 의미, 곧 '희망'이라는 가치를 구체화하기 위해 하나의 소실점으로 모이기 때문이다. 슈퍼맨과 떼놓을 수 없는 메타포를 영리하게 활용한 덕분에 부정 못 할 한계도 눈에 띄지는 않는다. 그 결과 <슈퍼맨>은 DC 유니버스의 첫 비행으로서 더 바랄 수 없을 만큼 희망차다.
추락하는 슈퍼맨
<슈퍼맨>은 과감하다. 선택과 집중이 확실하다. MCU의 <스파이더맨>과 <더 배트맨>이 그랬듯이 영웅의 탄생과 성장, 역경과 각성이라는 기본적인 구조 중 앞의 두 장을 짧게 요약한다. '크립톤 출신 칼-엘이 지구로 보내졌고, 인간 양부모 밑에서 클라크 켄트로 큰 끝에 슈퍼맨이 됐다'라는 이야기는 자막 몇 줄로 대신한다. 그 대신 <슈퍼맨>은 처음으로 적에게 패배한 뒤 남극에 곤두박질친 슈퍼맨을 비추면서 막을 올린다.
단순히 물리적인 추락만 보여주지 않는다. '슈퍼맨'(데이비드 코런스웻)을 정신적으로도 몰아붙인다. 그는 생물학적 부모인 '조-엘'(브래들리 쿠퍼)과 '라라'(안젤라 새러피언)의 메시지 덕분에 영웅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슈퍼맨은 희망을 상징하는 인물이고, 지구에서 선을 행하며 그 희망을 보여주라는 것. 이는 '고독의 요새'에서 태양 빛을 받으며 치료받을 때마다 반복해서 들으며 마음을 다잡는, 그의 초심이자 원동력이었다.
제임스 건은 슈퍼맨의 초심을 짓밟는다. 슈퍼맨을 죽이기 위해 연구에 몰두한 '렉스 루터'(니콜라스 홀트)는 '울트라맨'과 '엔지니어'라는 메타 휴먼을 만들어 슈퍼맨을 궁지에 빠트리고, 그의 뒤를 밟아서 고독의 요새를 찾아낸다. 슈퍼맨의 반려견, '크립토' 등을 제압한 루터는 슈퍼맨 부모님의 메시지를 발견하고, 지구로 오던 중 지워진 메시지의 뒷부분을 발견해 복원하는 데 성공한다.
그 내용은 충격적이다. 조-엘과 라라가 말한 희망은 칼-엘이 이해한 바와는 정반대였다. 그들은 약하고 어리석은 종족인 인간을 짓밟고, 지구를 정복하고, 크립톤인의 유전자를 퍼뜨려서 새로운 크립톤인의 희망이 되라고 아들에게 요구했다. 이 메시지가 공개된 후 슈퍼맨은 남극에 추락할 때보다 더 크게 내려꽂힌다. 믿었던 부모님에게 배신당한 그는 더 이상 희망의 상징이 아니니까. 이제 그는 정복과 공포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믿음과 사랑의 비상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구석에 몰린 슈퍼맨. 그를 구덩이에서 끄집어내는 것은 바로 칼-엘이 아닌 클라크 켄트다. 크립톤인과 슈퍼히어로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이 그를 구해내기 때문. 막 클라크와 연애를 시작한 '로이스 레인'(레이첼 브로스나한)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신은 기자로서 반항적이고, 모든 사람과 세상을 의심하는 반면, 클라크는 세상과 인간을 일단 믿는다고.
클라크의 믿음은 다양한 형태의 사랑으로 발현되며 그를 다시 슈퍼맨의 길로 이끈다. 로이스와의 관계만 봐도 알 수 있다. 클라크와의 관계를 끝내려고 결심했던 로이스. 하지만 궁지에 몰린 클라크가 먼저 사랑한다고 고백하며 신뢰를 보내자, 그녀는 마음을 고쳐먹은 뒤 루터의 음모를 파헤치고, 슈퍼맨을 위기로부터 구해낸다. 그녀의 취재가 없었다면 슈퍼맨은 루터가 만든 주머니 우주 감옥으로부터 지구로 귀하지 못했을 테니까.
부모 자식 간의 사랑도 결정적이다. 영웅 겸 기자로 지내며 양부모에게 전화 걸 시간도 없었던 클라크. 하지만 크립토나이트에 중독된 그가 기댈 곳은 결국 엄마 아빠뿐이다. 아빠 '조나단'은 그런 아들을 격려한다. 부모는 자식에게 터전을 마련해 줄 뿐이라고. 또 그 위에서 어떻게 성장할지, 루터가 찾아낸 메시지를 어떻게 해석할지는 너의 몫이라고. 그 덕분에 클라크는 여전히 슈퍼맨을 믿는 이들을 위해 싸울 힘과 의지를 되찾는다.
선의와 우정의 역할도 크다. 클라크는 '그린랜턴'(네이선 필리언), '호크걸'(이사벨라 메르세드), '미스터 트래픽'(에디 가테지)이 자신을 '저스티스 갱'의 일원으로 안 받아주는 와중에도 그들에게 신뢰를 보냈다. 그들은 슈퍼맨이 나설 수 없는 순간에 그의 손과 발이 되어줌으로써 믿음에 보답한다. 함께 투옥된 '메타몰포'(앤서니 캐리건)도 마찬가지다. 그는 소형 인공 태양을 만들어서 슈퍼맨을 일시적으로 회복시켜서 탈옥시키고, 슈퍼맨은 그의 아들을 구해준다. 이 묘사 또한 선의에 기반한 상호 신뢰가 곧 슈퍼맨의 힘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S라 쓰고 희망이라 읽다
사람과 세상을 향한 클라크 켄트의 믿음은 곧 슈퍼맨이 상징하는 희망이라는 가치로 발전한다. 루터가 그를 정치적 곤경 빠트린 덕분이기도 하다. 루터는 보라비아의 '구르코스'(즐라트코 버릭) 대통령과 손잡고 자한푸르를 침략하여 슈퍼맨의 국제 분쟁 개입을 유도한다. 이때 슈퍼맨은 미국 정부와의 어떤 협의도 없었기에 정치적 논란의 한가운데에 서고, 루터가 고독의 요새에서 찾아낸 메시지는 여기에 기름을 붓는다.
이 논란의 핵심은 로이스와의 인터뷰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토록 강력한 외계인이 정부의 뜻을 따르지 않은 채 독단적으로 행동하도록 방치해도 되는가?' '누가 슈퍼맨에게 그러한 권리와 책임, 권한을 주었는가?'와 같은 질문이 바로 핵심이다. 비록 세계관은 다르지만,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에서 의회 청문회까지 불려 나갔던 헨리 카빌의 슈퍼맨과 비슷한 상황에 부닥쳤다고 볼 수 있다.
루터의 윽박도 그 연장선에 있다. 정부로부터 슈퍼맨 사살 권한을 위임받은 그는 슈퍼맨에게 이렇게 말한다. 인간을 위협하는 외계인은 마땅히 시기, 의심, 경계의 대상이라고. 오히려 그러지 않는 게 무책임한 태도라고. 이때 슈퍼맨의 답이 인상적이다. 그는 자신이 외계인이 아닌 인간이라고 답한다. 자신도 옳고 그름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한 인간이기에 자기가 옳다고 믿는 정의를 따를 자유를 마땅히, 또 당연히 가진다는 것.
그의 답은 미국적인 의미의 자유와 일맥상통한다. 총기 규제를 대하는 태도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미국인들에게 자유는 상당히 폭넓은 범주의 권리다. 한 인간의 이성 및 비판적 사고에 대한 확신, 개인이 개인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하는 자유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자유로운 인간이 결국 옳은 길을 찾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자, 자유로운 인간을 향한 기대와 희망, 곧 슈퍼맨의 S가 뜻하는 바라고 할 수 있다.
미래지향적이거나, 구시대적이거나
물론 슈퍼맨이 상징하는 희망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보라비아와 자한푸르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이스라엘-가자 지구의 직유처럼 보인다는 점에서는 국제 정치적 맥락과 떼놓고 보기 어렵다. 미국 패권주의를 반복하는 듯한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신념대로 자한푸르 시민들의 자유를 지키려 했다는 슈퍼맨의 대사에서는 세계 경찰로서 전 세계에 자유 민주주의를 전파해 왔다고 자부하는 미국 근현대사가 겹쳐 보인다.
슈퍼맨의 S가 과연 현시점에 유효한 가치일지도 물음표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이제 현대 사회와 떼놓을 수 없는 표현이다. SNS와 알고리즘에 중독된 사람들이 정치적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있으니까. 극 중 렉스 루터가 슈퍼맨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입히려고 원숭이들을 동원해 SNS 댓글 조작을 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개개인에게 인간의 이성과 비판적 사고를 기대할 수 있는지는 의문일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슈퍼맨의 인간 찬가는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될 여지를 남긴다. '인간의 창의력, 가능성, 절제력을 그래도 한 번 더 믿어보자'라는 미래적이고 희망적인 격려 내지는 다짐의 메시지일 수도 있지만, 보는 이에 따라서는 철 지난 구시대의 믿음처럼 느껴질 수도 있으니까. 결국 이 딜레마는 제임스 건의 <슈퍼맨> 시리즈와 DC 유니버스가 더 많은 관객을 근본적으로 설득하기 위해 앞으로 풀어내야 할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신이 아닌 인간을 선택하다
흥미롭게도 제임스 건은 <슈퍼맨>의 한계를 역이용한다. 익숙한 종교적 메타포로 한계를 감싸면서 슈퍼맨의 이미지와 가치를 보편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메시지로 승화한다. 예수가 바로 그 메타포다. 현재로부터 30년 전에 칼-엘이 지구에 도착했고, 3년 전부터 슈퍼맨 활동을 시작했다는 오프닝 자막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내용은 30살에 공생활을 시작해서 3년 만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부활한 예수의 인생과 몹시 유사하다.
이 관점에서는 <슈퍼맨>을 칼-엘/클라크 켄트의 겟세마니 동산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잡혀가기 전날 밤, 예수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성부에게 기도하며 갈등한다.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을 동시에 갖춘 그는 죽음으로써 인류의 죄를 대속하라는 의무감과 죽음을 앞둔 인간이라면 느낄 수밖에 없는 두려움 사이에서 고뇌한다. 모두가 알다시피 예수는 긴 고뇌의 끝에 신의 뜻을 따른다.
슈퍼맨도 마찬가지다. 평생을 믿고 따랐던 친부모의 유언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깨달은 순간, 그도 겟세마니 동산에서 갈등한다. 친부모의 뜻대로 인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우월한 능력을 지닌 일종의 '신'으로서 그들을 지배할지, 아니면 지금껏 그래왔듯이 인류의 수호자이자 희망의 상징으로 거듭날 것인지. 슈퍼맨은 신성을 선택한 예수와는 다른 길을 간다. 그는 크립톤인이 아니라 한 명의 인간으로서 루터의 계략에 맞선다.
<슈퍼맨>의 후반부는 다양한 장면을 통해 그의 선택을 드러낸다. 루터와의 전투를 끝난 뒤 고독의 요새에서 태양 빛을 쬐며 치료받는 슈퍼맨. 이제 그는 친부모의 메시지 대신 인간 부모님과 시간을 보냈던 어릴 적 영상을 틀어놓는다. 이에 더해 전투가 끝난 직후 그의 정체를 숨겨주는 최면 안경을 쓰지 않은 상태로 로이스와 키스하는 것 역시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선택한 슈퍼맨을 보여주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액션이 덜 화려해도 임팩트 있는 이유
신이 아니라 인간이 되기를 선택한 슈퍼맨의 이미지는 시각적으로도 구현된다. 그 중심에는 태양이 있다. 슈퍼맨 힘의 근원이 노란 태양인만큼 그간 슈퍼맨 영화에서는 슈퍼맨의 초인적인 능력, 곧 신성을 상징하는 도구로 태양을 활용하곤 했다. 잭 스나이더가 묘사한 슈퍼맨도 그가 자기 소명을 깨닫고 처음으로 비상할 때, 또 한 번 죽었다가 부활했을 때 그는 언제나 태양을 마주 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다르다. 슈퍼맨이 칼-엘이 아니라 클라크 켄트가 되기로 한 이상, 태양 역시 그 결심을 직관적으로 제시하는 도구로 활용된다. 루터가 만들어낸 차원의 틈이 메트로폴리스 도시를 둘로 쪼갤 때, 슈퍼맨은 무너지는 건물 밑에 깔릴 뻔한 여성을 구해낸다. 이때 먼지를 뚫고 나온 슈퍼맨에게 태양 빛이 내려 꽂히는 장면은 언제나 밝게 빛날 인류의 보호자이자 인간의 희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액션 연출도 그 연장선에 있다. 중반부까지는 기대를 어긋난다. 압도적인 위력도 못 보여주고, 크립토나이트 때문에 힘을 못 쓰는 슈퍼맨은 당혹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영화의 의도에는 더 잘 부합한다. 정신적으로 회복한 뒤, 곧 인간의 정체성을 선택한 후에야 각성하는 슈퍼맨의 서사를 시각적으로 이시키니까. 눈에서 레이저를 쏘며 사방에서 밀려든 루터의 비행 군단을 초토화하는 클라이맥스는 그 정점이다.
인간 영웅이 막을 연 '신들과 괴물들'
물론 단점이 없지는 않다. 제임스 건 특유의 b급 유머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나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가 아닌 <슈퍼맨>이다 보니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효과적인 유머일 수도 있지만, 그와 동시에 극의 흐름을 끊는 장애물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이에 더해 DC 유니버스의 첫 영화라는 점을 고하더라도 세계관에 대한 별다른 설명 없이 갑자기 쏟아져 나오는 빌런과 히어로의 향연은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 있다.
니콜라스 홀트의 연기력과는 별개로 렉스 루터도 아쉽다. 캐릭터 자체는 입체적으로 구축했다. 슈퍼맨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그를 질투한 나머지 그를 죽이려는 찌질한 악당이자, 과학 기술로 슈퍼맨에 대항할 메타 휴먼을 만들어낸 천재 과학자이고, 미국 국방부의 협력사를 이끄는 유능한 CEO다. 하지만 분량이 부족했던 나머지 비인간성의 총집합이자 슈퍼맨의 아치에너미라는 루터의 정체성을 온전히 보여주지는 못한 듯하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이는 앞으로 DC 유니버스가 소개하고 풀어낼 이야기가 그만큼 많다는 뜻이라 볼 수 있다. 인간의 길을 선택한 슈퍼맨이 '신들과 괴물들'인 부제가 붙은 DC 유니버스 챕터 1의 시작을 끊은 게 퍽 의미심장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적당히 가벼운 분위기를 유지하면서도 진중한 희망의 메시지로 무장한 제임스 건 표 <슈퍼맨>보다 더 나은 새출발, 새 비상도 상상하기는 어렵다.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신이 아닌 인간을 선택한 영웅의 희망찬 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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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늦어버린 나의 사랑, <퀴어>
퀴어 Queer, 2025 / 137분
감독: 루카 구아다니노
이미 늦어버린 나의 사랑, <퀴어>
출처: 영화 <퀴어> 스틸컷주인공 ‘리(다니엘 크레이그)’의 사랑은 난해하고 희한하며 불안하고 때때로 위험하다. 그가 퀴어이자 마약 중독자여서가 아니다. 평생 갈구하는 사랑을, 그 자신조차 확실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모양이고 어떤 냄새가 나며, 어떤 촉감을 갖고, 어떤 단어들로 이뤄졌는지 도통 알 수 없다. 그저 끊임없이 원한다는, 반복적인 행위(중독) 말고는 누구도 리의 사랑을 명확한 형태로 느끼고 볼 수 없다. 오프닝을 수놓는, 그의 침대와 소파, 책상 위에 널브러진 책, 선글라스, 여권, 담배, 권총, 마약만 봐도 알 수 있다. 리가 하는 사랑이 얼마나 어지럽고 난잡하며 불길한지 말이다. 그러나 <퀴어>는 그의 사랑에 거부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부여한다. 남성미 넘치는 패션과 멕시코시티 거리를 활보하는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혼란스러운 사랑을 독특한 미장센으로 치환한다. 인물과 환경, 인물 간의 관계를 자연의 일부로 인식하도록 했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같은 방식이다. 특별한 점은 아름답게 포장되었음에도 그의 사랑은 여전히 위태롭게 보인다는 점이다.
출처: 영화 <퀴어> 스틸컷<퀴어>는 이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 채 사는 리의 불안정한 삶을 3부작 형태로 나눈다. 1부엔 유진에게 갈구하는 리의 사랑을, 2부엔 완벽한 유진과의 합일을 꿈꾸는 리의 모험을, 마지막 3부엔 모험의 시작이 곧 끝이었음을 리 스스로 선언하는 선택을 담는다. 특히 외적으로 뿜어내는 아름다움과 내적으로 곪아가는 추함의 간극을 직접 보여주면서 이에 따른 고통도 (타인의 관점은 철저하게 배제된) 리만의 관점으로 구성해 전달한다.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랑을 깨닫게 해주는 영화적 장치는 어디에도 없다. 관객에게 ‘리’란 사람 자체를 보여주는 일 말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도 당연히 없다. 영화는 리의 대변인에 불과하다. 관객이 직접 <퀴어>를 통해 리를 해체하지 않는 이상, 어떠한 극적인 변화도 기대할 수 없단 얘기다.
그렇다면 대체 그에게 사랑은 뭘까. 어떤 것을 정의하지 못해서, 영화 내내 한순간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전전긍긍할까. 바로 그의 혼란한 정체성이다.
리는 자신이 퀴어임을 인정하지만, 절대 퀴어라고 소리 내 밝히지 않는다. 본인의 정체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떼어내려 애쓰는 데, 이를 ‘난 퀴어가 아니야, 정신과 육체가 분리된 거야’라고 표출하며 혼돈을 제어하기는커녕 합리화한다. 그리곤 또 어쩔 수 없다는 듯, 하루살이처럼 여러 술집(바)을 돌아다니며 퀴어를 찾아 하룻밤을 보낸다. 그러다 다시 외로워지면 새 사랑을 갈구하기 위해 길거리를 떠돈다. 이 역시 중독이 분명하지만, 리는 중독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게 중독은 곧 이상이고, 현실로부터의 완전한 도피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자기 정체성 확립을 포기한 현실 속에서, 리의 자기 파괴적 행위는 자연스럽게 이상 세계와 연결되고, <퀴어>는 환영이 가미된 추상적 표현과 다양한 상징을 활용해, 직설적으로 전달한다. 리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변하지 않는 인물이란 진실을 말이다.
출처: 영화 <퀴어> 스틸컷일생에 단 한 번 만날 수 있다는, 진정한 사랑(유진)을 발견했을 때도 그는 변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자기 파괴를 일삼으며 유진에게 다가간다. 그의 손길을 느끼기 위해서, 몸도 마음도 돈도 다 내어주고, 가문의 저주가 자신에게 변태적 성향을 주입한 거라며 자기 비하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리는 유진에게 쉽사리 사랑받지 못한다. 그와 사랑을 나누지만, 그가 퀴어인지, 아닌지 모르고 심지어 직접 묻지도 못한다. 유진도 자기 정체성을 결정 내리지 못한 듯, 모호한 태도를 보이지만, 리와는 다르다. 현실과 이상을 명확히 구분해 행동하는 유진과 그렇게 할 줄 모르는 리는 전혀 같은 인물이 아니니까.
리의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가장 친한 ‘조’는 하룻밤 상대들이 자기 물건을 도둑질하는 걸 알면서도, 호텔이 아닌 집에서 계속 데이트를 즐긴다. 그들이 아무리 내 것을 훔쳐 달아난다고 해도, 나의 자아와 신념, 삶은 결코 앗아갈 수 없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퀴어 커뮤니티(그린랜턴)를 이끄는 ‘두메’ 또한 본인 삶의 방식을 긍정한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며, 퀴어임을 부끄러워하거나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직 리만이 경계가 불명확하다. 그를 제외한 모두가 자기를 ‘무엇’이라 창하며 정의할 때, 리는 끝까지 침묵한다. 본인의 입에서 나온 말을 절대 귀로 들을 수 없다는 듯 집요하기까지 하다. 그 결과, 리는 혼재된 두 세계에 갇힌 채 끊임없이 고통스러워한다. 유진을 원하는 갈망에 영혼까지 분리되지만 그를 만질 수 없고, 팔다리가 잘린 여성에게 툭하면 정체성을 고발당하고, 마약이 주는 황홀함 없이는 현실에서의 기다림을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서로를 돕고 함께 하며 삶을 견뎌야 한다는, 어릴 적에 만난 현명한 퀴어의 가르침이 무색할 정도로, 리는 지나치게 소극적이고 심각하게 자기중심적이다.
출처: 영화 <퀴어> 스틸컷결국, 리는 유진을 데리고, 텔레파시를 가능하게 한다는 미지의 식물(야헤)을 찾아 나선다. 정글에서 야헤를 연구한다는 식물학자에게 생필품으로 환심을 사고, 마침내 야헤를 접한다. 자기 심장을 토해내면서 시작된 환각은 리는 물론이고 유진의 존재론적 의구심과 정체성에 대한 불확실성에 불을 붙인다. 강렬한 환각으로 자신이 구분한 세계에서 길을 잃은 유진은 리에게 고백한다. 자신도 퀴어가 아니며, 정신과 육체가 분리된 자라고. 텔레파시를 통해, 유진과 완전하고 안전한 사랑을 꿈꿨던 리는, 결정적인 순간 또다시 포기한다. 떠나는 유진을 잡지도, 완전히 보내주지도 못하는 악순환에, 제 발로 들어간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리가 다시 멕시코시티로 돌아온다. 조는 리의 등장에 기뻐하지만, 여전히 똑같은 친구에 진심으로 안타까워한다. 리에게 남은 거라곤 아무리 후회해도 절대 바뀌지 않는 현실과 숱한 후회로 만들어진 환각에 속에서 여느 때와 다름없이 허우적대는 일뿐이니까.
<퀴어>는 리가 마지막까지 머뭇거릴 걸 확신했다. 그가 겪는 고독함, 외로움, 절망도 필연적이기에, 현실과 이상의 혼재도 변함없을 거라 장담했다. 야헤의 진실을 미리 경고해 준 직원의 말처럼, 야헤(사랑)는 그가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주는 약물도, 텔레파시 능력을 주는 선물도 아닌, 이미 망가진 자기를 비추는 거울이었으니까. 아름다움 위로 보이는 추함의 균열이, 거울 속에도 이토록 선명히 존재하는데 어떻게 모른 체 할 수 있겠는가.
출처: 영화 <퀴어> 스틸컷이야기 끝에 선, 리는 혼돈 속에서 유진을 계속 그리워하다, 결국 자기 손으로 그를 총으로 쏴 죽여버린다. 유진이 죽기 직전, 눈물을 흘리며 자기 꼬리를 문 뱀(우로보로스)이 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데, 이 한 장면으로 <퀴어>는 그간의 혼란스러웠던 리를 단번에 설명한다. 죽은 유진은 그의 사랑이기 이전에, 리가 자기 정체성을 깨달은 순간 외면한 자아이다. 즉 유진을 죽인 건, 늙은 리의 육체지만 사실은 한참 과거의 젊은 리의 정신이란 점이다. 어지러운 사랑도, 중독 증상에 대한 합리화도, 그가 평생 벗어나지 못하는 까닭도 다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물론 리는 그저 온전히 이해받고 싶었을 거다. 본인이 없애버린 사랑은 전혀 모른 채, 난해하고 복잡한, 그래서 자신조차 외면한 나를 사랑으로 꽉 채워줬으면 했겠지. 그러나 후회하기엔 이미 늦어버린(놓쳐버린) 사랑이고, 무슨 수를 써도 벗어날 수 없는 나의 비극이다.
출처: 영화 <퀴어> 스틸컷혼자가 된 노년의 리가 쓸쓸히 침대 위에 눕는다. 눈을 감고 유진을 떠올리자, 어느새 나타나 리의 다리 위에 자기 다리를 살포시 올린다. 유진의 사랑일까, 그가 다시 불러온 이상인가. 그렇다면 그의 사랑은 긴 기다림 끝에 비로소 자기 형태를 보이게 되었는가. 답은 이미 나와 있고 <퀴어>의 의도는 변함없다. 리가 원한 게 마음 가득한 대화뿐이라고 하더라도.
어른 버전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기대한다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퀴어>는 잊을 수 없는 첫사랑으로 자기 정체성을 깨닫게 된, 아름답고 따뜻한 영화는 절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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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판타스틱 Mr. 폭스>
영화 〈판타스틱 Mr. 폭스〉
2009, 미국/영국, 87min, 웨스 앤더슨(Wes Anderson)
* 스포에 해당하는 내용이 있으니, 영화 감상 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노골적이지 않은, 설득적이지 않은 영화였고, 그래서 좋았다. 보통 하나의 이야기를 시작할때, 의식하지않더라도 자신도 모르게 이야기가 전달할 수 있는, 품고있는 교훈에 대해서, 그리고 의미에 대해서 자꾸만 생각하게된다.
이것은 물론 잘못된 것은 아니고, 일면 긍정적인 효과도 물론 있지만, 내가 생각하기엔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구성해가는 작가의 입장에선 오히려 이것들에, 즉 교훈과 의미들에 대해 과도히 집착하게 되고, 그들을 뒷바침하기위한, 또 그들에 적합한 구성들로만 서사를 채워나가게 되는 경우도 많이 생기는 것 같다. 그렇게 된 이야기들은 때때로 너무나 폭력적이다. 실제로 피가 난무하거나, 격한 말투를 사용해서 폭력적인 것이 아니라, 이야기 이면의 작가가 하나의 생각, 하나의 아이디어를 너무나 일방적이고, 단편적으로, 계속해서 피력하기 때문에 폭력적이다. 관객은 이러한 이야기를 경험하면서, 자신 나름의 여러 생각들을 전개해볼 수 있는 기회를 잃게된다. 왜냐면 작가가 감독이, 그들에게 다른 생각과 판단을 해볼 수 있는 틈을 전혀 내주지않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이 점에 있어선 매우 타영화들과 비교해보았을때, 독보적으로 자유롭다. 하나의 메세지, 주장, 교훈을 관객에게 일방적으로 설득하기 위해 모든 런닝타임과 인물, 소재, 상황과 사건들을 소비하지 않는다. 이 깨달음은 현재 내가 진행하고 있는 졸업 애니메이션의 이야기 구성과정에서도 스스로 간과하였고, 또 매몰되었던 오류를 재발견해볼 수 있는 기회로도 작용하여서 크게 배움을 얻을 수 있었다.
<판타스틱 Mr. 폭스>에서 이 폭스는 마치 웨스 앤더슨 같다고 생각되기도 했다. 왜냐면 그의 영화 속 이미지들과 사건의 전개를 보여주는 방식들이 정말 폭스가 말한 판타스틱, 즉 특별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당연 시각적인 효과와 구성이며, 그와 더불어 카메라의 움직임도 너무나 배울 수 있는 점이 많았다.
가장 먼저 시각적으로 이 영화에선 매우 신중한 프레임과 화면 구성이 인상깊다. 상투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이미지의 향연’, ‘컬러의 향연’이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정도로, 예술적인, 감각적인 다양성을 80분 내내 자극한다. 어떤 프레임에 영상을 멈춰세워도, 모든 장면들이 예술적이다. 이 사실은 조금은 충격적일 정도였다. 물론 영화를 보다보면 아름다운 장면들을 많이 마주하게된다. 특히 나에게 인생영화라 할 수 있는 영화는 무엇보다도 <블레이드 러너 2049>, <컨택트>와 같은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인데, 그 가장 큰 이유는 이 영화 또한 어떤 프레임에서 화면을 멈춰세워도 모두 예술작품과 같은 견고한 아름다움을 느끼게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유형의 시각적 효과를 줄곧 보여주는 영화는 사실 조금은 드물다고 생각되고, 그런 면에서 이 <판타스틱 Mr. 폭스>는 앞서 언급했던 영화만큼이나 끈질길만큼 정교한 화면을 보여준다고 생각되었다. 즉 수많은 화면들이 크고 작은 소재들과 다양한 컬러감들의 조합으로 굉장히 지루하지 않으면서도 철저한 균형을 보여주고 있었고, 수평과 수직으로 거의 대부분 화면이 구성되긴 하지만 그 속에서도 계속 다양한 깊이감을 매우 정면인 방향에서 드러냄으로서 단순히 지루한 평면으로 느껴지지 않고 확실한 직선적 공간감이 느껴진다. 물론 사건의 진행상황을 풀어내고 조망하는데 있어서, 인물들을 따라가는 단 하나의 방식만이 아니라, 아이콘적인 시각효과를 활용하거나, 미세즈 폭스가 그리는 그림을 이용하거나, 또 완전한 단면을 드러내면서 전체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는 등 다양한 방식들을 활용함으로서 관객이 진행되는 사건들을 좀 더 다른 시각적 소재들을 통해 재조명, 재인식할 수 있는 기회 및 환기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도 매우 인상적이다.
다음으로는 카메라의 움직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이 영화의 카메라는 역시 화면 구성과 비슷하게 매우 수직, 수평적인 움직임을 보여준다. 특히 완전한 수평으로 인물들 혹은 사건의 발생 등을 트랙킹하는 모습이 자주 드러난다. 이런 움직임은 물론 장단점을 지닌다. 강렬한 역동성을 강조해내기는 다소 부족함이 있을 것이고, 안정적으로 영화 속 세계를 조망하기에는 상당히 적합할 것이다. 결국 이것은 선택의 문제라 생각되고, 이런 조금은 차분한 카메라 무빙이 앞서 말한 아름답고 구성적인 프레이밍을 시각적으로 확실히 전달하는데 있어서, 난 매우 적합했다고 생각하며, 또 전에 언급한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도 이런 수직, 수평이 강조된 픽스된 화면과 차분한 카메라 움직임을 선택함으로서, 이 영화와 같은 아름답고 견고한 화면구성을 매우 잘 강조하고 있다.
이런 움직임의 구체적인 효과들도 물론 배울만한 점이지만, 내가 가장 크게 깨달음을 얻었던 부분은 사실 움직임의 이유에 대해 진심어리게 생각해볼 수 있었다는 데에 있었다. 즉 사실 영화를 보면서, 때때론 카메라의 움직임, 화면의 전환 등에 대해 이유를 알기가 어려운 경우가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이 스톱모션 영화는 정말 중요한 순간에, 매우 이유있는 방식으로 카메라 움직임을 드러낸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특정 인물에게 클로즈업을 하는 순간, 다른 방식으로 화면을 보여주는 순간, 또 비슷한 상황이나 인물들이 내뱉는 동일한 키워드들을 통해 장면을 연결 및 전환하는 순간 등 카메라의 움직임과 누구를 어떻게 화면에 담아낼 것인지에 대한 모든 타이밍과 방법들이 매우 타당하게 느껴지고, 이유없는 영화 속 순간들이 거의 부재한 듯이 느껴졌다. 이 점 역시 앞으로 어떠한 종류의 영상을 제작한다하더라도 매우 크게 배움을 얻어야하는 부분이라고 생각되었다.
처음 문단에서 말했었듯, 이 영화는 특정한 메세지나 교훈을 단정적으로 강요하지 않고있고, 그에 따라 나 역시 많은 가능성과 호기심을 가지고 각 영화 속의 인물들과 그들의 언행, 취향 등을 자유롭게 생각해볼 수 있었다. 맹목적인 하나의 메세지를 향해 모든 요소들이 질주하고 있지않는 이 영화에선, 역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각 소재들의 이야기가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에 재밌기도 하지만, 역시나 이 이유 덕분에 이 영화의 서사를 한 갈래로 설명해 풀어내기는 어려움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이 영화의 서사 속에서 가장 흥미로웠다 말하고 싶은 부분은 결국 각 개인들의 개성을 드러내는 것에 있는 것 같다. 이는 물론 미세즈 폭스가 아들인 애쉬에게 말하는 “그래도 다르다는 건 환상적인 일이잖니”라는 대사와도 매우 같은 맥락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개성은 사실 이 영화 속에서 난 인물들의 두려움을 통해서 가장 직관적으로 와닿았었다. 대표적으로 폭스는 늑대를, 미세즈 폭스와 카일리는 천둥을 두려워한다. 이와 관련하여 상당히 인상깊은 장면은 처음 보기스, 번스, 빈이 폭스의 집을 파기 시작할때, 그것을 알아차리는 폭스와 미세즈 폭스의 안방 안 모습이 드러나는 장면인데, 이 때 몇번의 컷들을 통해 여러번씩 드러나는 그 방의 벽면을 보면 천둥이 그려진 그림들이 가득한 게 강조되고 있다. 결국 미세즈 폭스의 두려움이 현실화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천둥은 결국 야생동물을 사냥하는 인간들에 대한 두려움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처음엔 잘 인식하기 어렵지만, 이 세 농부 사업가들의 공장을 견고히 지키는 매우 폭력적인 장치인 전기 울타리의 안내판이 나타나고나서는 분명하게 알 수 있게된다. 실제로도 미세즈 폭스는 폭스가 인간을 상대하는 위험한 행동을 두려워하며 그만두길 바란다는 점에서 이 천둥에 대한 두려움은 분명하게 그녀의 본성,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할 수 있다.
그리고 폭스가 두려워하는 것은 영화의 중후반부에서 알 수 있게되고, 그에 따하 앞서 이해할 수 없었던 그의 늑대에 대한 두려움을 이해할 수 있게된다. 폭스는 굉장한 절망적 상황을 마주하며, 하수구에 쏟아지는 폭포 앞에서 미세즈 폭스에게 자신의 솔직한 진심을 토로하는데, 이때 그는 영화의 제목과 같이 자신은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특별하게 환호받는 ‘판타스틱 Mr. 폭스’가 되기를 너무 바랬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직접적으로 자신이 바라는 바를 이야기하고 이 말에 따라, 당연 늑대는 ‘판타스틱’하지않은 자신의 모습을 상징하는 소재라 볼 수 있다. 실제로 늑대와 여우는 같은 개과이기도 하며, 둘 다 가족단위로 공동생활을 한다고 한다. 그러나 어쨌든 영화 속에서 드러나는 설정에 따르면, 폭스는 많은 다른 종의 동물들과 함께 마치 인간처럼 사회생활을 하며 살아가고, 늑대는 홀로 추운 산위에 우뚝 선채, 어떠한 옷차림도 갖추지 않은, 또 말이라는 타인과의 소통 수단도 익히지않은 매우 개인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로 나타난다. 즉 영화 후반부에서 폭스가 늑대를 실제로 마주하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장면은, 폭스가 막연하게 ‘판타스틱’한 존재, 즉 타인들에게 특별하고 대단한 존재로 갈채받지 못하게 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으나, 실제 그러한 자신의 분신같은 존재, 늑대를 실제로 마주하자 생각과 달리 그러한 모습도, ‘판타스틱’하지 않은 모습도 고유한 아름다움을 지닌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고 해석해볼 수 있다.
이렇게 늑대를 만나는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이 영화를 각 개인의 개성을 중요한 핵심으로 보았던 이유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들에 있다. 결국 미세즈 폭스의 그림에선 천둥은 사라지지만, 허리케인이라는 새로운 견제와 위협의 대상이 등장하고, 나무 위에서 살다가 결국 하수구에서의 배고픈 삶으로 폭스의 행동들은 조금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또 다시 세 농부 사업가들의 슈퍼마켓을 약탈하는 위험한 행동을 개시한다. 이처럼 결과적으로 이 장면들은 그들의 타고난 본성이자, 성격들이 결국은, 어떻게 해서든, 어떤 방식으로든 반복적으로 발현될 수 밖에 없다는 걸 뜻하는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가지게한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Aya 작가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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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로소 진짜 자신의 운전대를 잡게 된 모든 이들에게.
*스포일러가 포함된 리뷰이니 원치 않으시거나 관람 전이신 분들은 뒤로 가기를 눌러 주세요
하마구치 류스케가 돌아왔다. 이번 12월은 그의 달이라고 해도 될 만큼, 두 작품이 국내 관객들에게 무사히 안착했다. 바로 <해피 아워>와 <드라이브 마이 카>이다. 먼저 개봉한 <해피 아워>는 사실 2015년에 현지에서 개봉했지만, 한국에는 무려 6년이나 흐른 지금 개봉을 한 것이다. <해피 아워>가 개봉 후 몇 주 뒤 바로 <드라이브 마이 카>가 개봉을 하는데, 이렇게 같은 감독의 작품 더군다나 해외 감독의 작품이 연달아 개봉하는 것은 국내에서 매우 이례적이다. 또한 러닝 타임도 어마어마하다. <해피 아워>는 328분, 무려 5시간 반 그리고 <드라이브 마이 카>는 179분, 약 3시간이다. 그만큼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을 찾는 국내 관객들이 많아졌다는 뜻도 되겠지만, 동시에 두 작품을 만날 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도 되지 않을까.
본격적으로 국내에는 지난 2019년 개봉한 <아사코>로 이름을 날렸다.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이 생긴 두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는 한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 멜로 영화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영화를 본격적으로 파헤쳐보면 일본의 대지진과 쓰나미의 흔적 속에서 방황하는 청춘의 목소리가 숨겨져 있었다. 장르와 플롯의 틀 속에서 완전한 류스케의 해석을 한 번에 읽어내기는 어렵지만, 개봉 당시 국내 씨네필들에게서 아주 열렬한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나 또한 <아사코>를 관람하고 난 후의 나의 주관적인 감상과 다른 관객들의 깊이 있는 해석을 비교하는 재미가 아주 컸었는데 이번 <드라이브 마이 카> 또한 어떤 매력이 있을지 매우 기대가 되었다. 지난 제 26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단숨에 매진을 기록하며 뜨거운 관심을 받고, 제 74회 칸 영화제 각본상 그리고 최근 LA 비평가 협회 최우수 작품상까지 수상하면서 전 세계가 주목을 한 번에 받고 있는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를 개봉 전 프리미어 상영으로 미리 만나볼 수 있었다.
영화는 겉보기에는 정말 아름다운 부부 가후쿠와 오토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하지만, 이내 남편 가후쿠는 아내 오토의 외도를 목격하게 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내 오토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게 된다. 2년 후, 히로시마의 연극제에 초청을 받아 작품의 연출을 맡게 된 가후쿠가 그곳에서 자신의 전속 운전사 ‘미사키’를 만나게 되고, <드라이브 마이 카>는 그저 건조했던 둘 사이에 깊은 공감의 연대가 피어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줄거리가 명확하게 한 줄로 요약되지 않는 영화다. 그만큼 러닝타임이 길기도 하고 (약 179분) 한번에 영화적인 재미를 찾는 작품이기보다 천천히 그리고 묵묵하게 영화가 제시하는 텍스트를 해석해야 하는 작품이다.
영화는 단 두 가지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다. ‘차’ 그리고 ‘연극’ 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다 시피, 영화의 주요 소재는 바로 ‘차’이다. 그리고 당연히 가후쿠와 미사키 두 사람은 차에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가후쿠는 우선 ‘차’라는 공간이 그의 최적의 연극 연습 공간이었다. 가후쿠는 상대 배우의 대사를 녹음해 준 아내 오토의 테이프를 매일 틀며 대사를 외운다. 그에게 있어 ‘차’는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이자 누구에게로부터 방해 받지 않는 사적인 공간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집에서 아내 오토의 외도를 목격한 뒤로부터는 이런 성질이 더욱 강해진다. 어떻게 보면 그 이후에는 ‘연극 연습’이라는 틀 안에 그의 상처를 애써 외면하는 공간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미사키에게 ‘차’란 상처가 가득한 공간이다. 미사키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에게 학대를 받고 자랐으며, 새벽에 일찍 출근하는 어머니를 차에 태우면서 아주 섬세한 운전을 강요받았다. 그 덕에 운전 실력이 아주 뛰어난 미사키는 운전사라는 직업을 가졌지만 어릴 적 그녀의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이렇게 ‘차’라는 공간에서 각자 나름의 상처와 좌절감을 각자만의 방식으로 다뤄왔던 가후쿠와 미사키. 매일 운전을 하면서 목적지를 향해 달려도 마음속에서 그들은 수없이 방황하고 멈춤을 반복한다. 무미건조한 일상을 달려 왔던 이 둘이 마침내 만났을 때, 그들은 진짜 목적지를 향해 달려갈 수 있게 된다.
두 번째 키워드는 바로 ‘연극’이다. 영화의 8할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러시아의 유명 극작가 안톤 체홉의 「바냐 아저씨」라는 연극이 영화에서 대단한 지분을 가지고 있다. 가후쿠가 수도 없이 연습했던 연극 그리고 연출자로서 연극제에 출품하는 연극이 「바냐 아저씨」이고, 영화에서 자주 가후쿠와 배우들이 이 「바냐 아저씨」 대본 연습을 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영화 초반에는 이 극본의 대사가 무작정 흘러나오기 때문에 무슨 의미이지하고 의문이 들 수 있는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대사들의 의미가 또렷해진다. 「바냐 아저씨」의 설명을 가져 오자면, ‘개인의 고립과 소통의 단절 속에서 반복되는 절망과 후회를 보여주며 삶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라고 나와 있다. 영화를 다 본 후, 이 연극의 설명을 읽었을 때 정말 소름이 돋았다. 저 설명이 바로 <드라이브 마이 카>가 시사하는 바와 정확히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 수도 없이 연습해온 대사들과 연기, 아주 가까이 있었지만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익숙해져버린 모든 것이 다 자신을 향해 있었던 것이다. 배우들이 읊기도 하고 본인이 읊기도 했었던 대사들 하나하나가 결국 자신을 향하는 메시지였다. 단순히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던지는 화법보다, 모든 것이 ‘연극’으로 통하는 전체적인 구성을 통해 인물들에게 그리고 관객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방식이 매우 고급스럽고 아릅답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감정을 끌어올려주는 류스케의 화법은 관객들에게 또 하나의 색다른 경험을 선사한다.
영화에서 다루는 연극 <바냐 아저씨>에는 매우 독특한 특징이 하나 있다. 바로 배우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모두 다르다는 점이다. 배우들이 연기를 하는 동안 뒤편 스크린에서는 모든 대사가 각국의 언어로 번역된 자막이 나온다. 영화 전반적으로 이 연극의 대본 연습을 하는 과정들이 나온다. 배우들은 각자 맡은 역할의 대사가 끝나면 책상을 가볍게 노크한다. 각 배역의 대사가 모두 다른 언어로 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차례가 끝났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다. 어떻게 보면 심오해 보일 수도 있고 긴 러닝 타임을 생각하면 다소 친절한 설정은 아니다. 개인적인 감상과는 별개로 영화를 보고난 뒤 왜 류스케 감독이 이런 설정을 넣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직관적으로 바라봤을 때, 배우들은 언어를 초월한 연대 속에서 연기한다. ‘언어’는 비록 다르지만 모두 같은 감정과 상황을 공유하고 있다. 이 점이 핵심이다. 「바냐 아저씨」는 물론 주인공 가후쿠와 미사키를 향한 위로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기는 하지만 동시에 ‘살아 가야 한다.’는 것이 보편적으로 어떤 위로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도 보여준다. 언어를 초월한 연대에서 외치는 ‘살아가야 한다.’라는 말은 어떠한 위로의 방식보다도 강력하다. 살면서 다른 언어로 위로 받아 본 경험이 있는가. 나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없었지만, 각자 다른 언어의 형태로 와닿는 이 메시지는 같은 언어 열 마디보다 훨씬 압도적이고 생생했다. 류스케가 만들어낸 섬세하고 정교한 이 위로는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도 못할 것이고, 그리고 앞으로도 따라하지도 못할 것이다.
두 가지 특징을 모두 다 훑어 봤을 때, 영화가 정확하고 깔끔하게 정리되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해석과 리뷰들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느낀 바는 이렇다. 결국,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차’란 가후쿠와 미사키의 주체성을 나타낸다. 매일 똑같은 길을 반복해서 돌고 있는 가후쿠와 미사키. 동시에 그들 내면의 깊은 상처도 오랜 시간 쳇바퀴 도는 듯 반복된다. 종이와 펜을 생각해보자. 펜을 들고 종이에 원을 그린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린다. 그 원들이 반복되면, 점점 원 안이 채워지면서 진해지고 이내 점이 된다. 그리고 이내 그 농도를 버티지 못한 종이에 구멍이 생긴다. 그 구멍을 통해 그 원은 비로소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가후쿠와 미사키도 마찬가지다. 같은 곳을 수도 없이 빙빙 맴돌다 비로소 만나게 된 서로는 앞으로 나아가게 할 원동력이 된다.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해져버린 운전처럼, 매일 같은 곳을 덤덤히 맴돌았던 서로는 마침내 진짜 자신의 ‘차’를 운전할 수 있게 된다. 즉, 자신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또렷하게 들여다보게 된 그들 사이로 새하얀 눈이 내린다. 새카맣게 타버린 그들의 마음을 새롭게 녹여주듯이. 비로소 진짜 자신의 운전대를 잡게 된 전 세계 모든 이들에게 바치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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