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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wr2023-11-20 07:37:09

기억할 만한 남성 돌봄자의 탄생

〈빅슬립〉 리뷰


6★/10★

 

  어느 평범한 출근길이었다. 집에서 나온 기영은 바람도 제대로 막지 못하는 평상 위에서 난로를 켠 채 잠든 청소년 길호를 본다. 기영은 우악스럽게, 그러나 왜인지 위협적이지는 않은 태도로 여기서 자지 말라고, 얼른 자리를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날 밤, 길호가 또다시 같은 곳에 있다. 기영은 자기 말을 듣지 않는 길호에게 짜증이 나지만, 그에게 다른 사연이 있을 거란 생각에 묘한 연민을 느껴 길호를 집으로 들인다. 밥을 먹이고 하룻밤을 재운다. 길호가 묻는다. “아저씨 저 불쌍하죠?” 기영이 답한다. “뭐가 불쌍한데? 내가 XX 더 불쌍하지.”     

 

  길호는 ‘가출팸’ 소속이다. 그러나 빈집 털이 등을 일삼는 친구들에게 거리감을 느껴 그들을 떠나 배회하다 기영의 집까지 왔다. 지금은 착실하게 공장에 다니며 생활하지만, 과거 ‘양아치 짓’을 했던 기영은 길호에 대한 동질감으로 그를 집으로 들인다. 처음에는 하루 이틀 정도의 호의만 제공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길호는 돌아갈 집이 없다. 길호는 못 이기는 척 길호가 집에 머무는 걸 허용한다.     

 

 

  이제부터 서로를 돌보는 두 남자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기영은 길호의 먹을 것을 신경 쓰고, 그에게 ‘좋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대체로 꼰대 취급받기 십상인 말들이지만 길호는 그런 말이 싫지만은 않다. 기영의 투박한 말 이면의 무언가에서 그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을 전달받았기 때문이다. 대체로 반항스럽고 퉁명스러운 길호의 말 역시, 우악스럽지만 위협적이진 않은 기영의 말처럼 그리 밉게만 보이지 않는다.     

 

  아무런 관계도 없는 서로를 돌보기 시작한 두 남자의 이야기는 잔잔한 감동을 자아낸다. 영화에서나 현실에서나 남성들이 곧잘 돌봄의 일방적 수혜자이거나 이미 존재하던 돌봄 관계를 파괴할 때가 많다는 점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기영과 길호가 특별한 사람이어서는 아니다. 기영은 집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화가 나면 거친 욕을 내뱉는 ‘남성적인’ 인물이다. 길호 역시 가출팸 생활을 하며 ‘비행’을 하는 데 익숙하다. 이렇듯 거친 남성성을 체현한 두 사람이라도 서로에 대한 아주 작은 관심만으로 돌보는 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는 〈빅슬립〉의 메시지는 시의적절하며 설득력이 있다.     

 

 

  돌봄과 그리 어울리지 않는 사람의 일상에도 이미 돌봄이 깃들어 있는지 모른다. 기영은 어머니가 ‘유산’이라고 남겨준 화분이 황당하지만, 그럼에도 정성들여 이들을 가꾼다. 식물이 죽지 않게 돌보는 법을 길호에게 가르쳐주기도 한다. 두 남자가 베란다에 쭈그리고 앉아 식물을 잘 돌보는 법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장면은 기이하고 따뜻하다. 물론 그런 둘에게도 위기는 온다. 둘은 처음부터 아무런 관계가 아니었기에 사소한 오해에도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기영과 길호는 이 과정을 겪어내며 우연적 돌봄 관계에 단단한 토대를 마련한다.     

 

  영화가 이들의 관계를 ‘대안 가족’의 형태로 묶어낸다는 점은 더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기영과 길호는 나들이에서 서로를 ‘결혼 못 한/결혼 못 할’ 남자로 부르며 웃는다. 이성애규범적인 생애 서사에서 ‘탈각’된 남성들의 연대를 남성적 울분과 소수자를 향한 분노로 풀어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실패’한 자들의 장난스러운 대화는 눈여겨볼 만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자연스레 ‘부자 관계’를 연상시킨다는 점과 더불어, 기영이 공장의 여성 동료와 차근히 친밀한 관계를 형성한다는 점은 두 남자가 형성한 관계를 기존의 가족 형태 내부에 재배치하려는 시도로도 읽히기도 한다. 이랑서 배우의 호연에도 불구하고, 기영의 여성 동료 캐릭터를 걷어내고 〈빅슬립〉을 감상해도 영화 얼개가 전혀 흐트러지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도 그렇다. 여기에 내내 길호를 다른 가출팸 친구들과 구분해 재현한다는 점, 즉 가출팸을 탈출하려는 길호의 의지와 그를 ‘구원’해주려는 기영의 마음이 더해지면 ‘정상가족’의 형태로 두 남자가 구축한 돌봄의 관계를 포괄하려 든다는 의구심이 더 강해진다. 물론 혈연으로 엮이지 않은 이들이 돌봄과 유대로 빚어낸 가족은 ‘정상가족’의 의미와 경계를 비판적으로 질문할 수도 있지만 말이다.     

 

  영화가 캐릭터와 플롯을 갈무리하는 방식에 대한 해석은 갈릴 수 있을 테지만, 어쨌든 두 남성이 구축한 돌봄 관계는 분명 인상적이다. 〈빅슬립〉은 기억할 만한 남성 돌봄자의 얼굴을 관객에게 각인시킨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작성자 . rewr

출처 . https://brunch.co.kr/@cyomsc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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