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란2023-11-24 19:26:39
애도를 위한 애도
듣는 것보다 보는 것에 더 중심을 두고, 의미를 찾아내길 추천한다.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담겨 있습니다.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Show Me the Way to the Station, 2019
일본 | 드라마 | 126분
감독: 하시모토 나오키
애도를 위한 애도,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는 다분히 감정적이다. 관객에게 집요하게 잊고 있던 이별을 떠올리게 하고 상실에 허우적대던 과거를 다시 경험하게 한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겪어왔던 슬픔과 아픔을 꺼내게 한다. 그리고 스스로 원했던 것처럼 묻게 한다. 이미 알고 있지만, 어렴풋이 다들 짐작하고 그러려니 하던 '역'의 존재를 아이와 같은 입장에서 되묻는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대체 그 역은 어디 있는 걸까? 또 어디로 가는 걸까?"
여기서 우린 사야카가 말하는 '역'의 존재를 이미 잘 알고 있다. 가고 싶은 마음만으로는 절대 갈 수 없고 찾을 수도 없는 장소, 산 사람들은 결코 밟을 수 없는 영역.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야카의 옆에 서서 묻는 거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은 그럴 수 없는 아이러니함,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당연한 명제 때문이다.
그를 영영 잊어버릴까 봐 절절한 그리움과 괴로움조차 함부로 놓을 수 없는 그 마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다.
우린 그 행위와 시선, 모든 마음의 조각들을 엮어 시간의 길을 만들고 이를 '애도'라 부른다.

주인공의 내레이션이 장면 곳곳에 감정의 활력을 불어넣지만,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는 사실 언어(음성)가 제거된 무성영화라 해도 무방하다. 대사보다 인물의 행동으로 사건을 강렬하게 그리는 방식이 이 작품만의 남다른 표현 방식이다. 감독은 사건의 인과관계를 음성언어보단 인물들의 손짓과 눈빛으로 차근차근 전개하면서, 상실과 그리움을 화면 가득 채워 넣는다. 섬세한 몸의 언어와 절제되어있지만 풍부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연출 방식으로 관객의 공감과 감동 포인트를 쉽게 점령한다. 이 지점엔 반드시 영화의 스토리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모두 명확하게 이해했다는 전제조건이 필수인데, 이는 영화의 첫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철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던 사야카가 전철이 지나간 뒤 철로에 난 길을 건너는 장면까지 단 3분.
이 짧은 장면엔 길을 걷는 내내 허공에 팔을 뻗은 사야카의 모습이 전부다. 그러나 우린 아이를 통해 영화의 방향을 자연스럽게 눈치챈다. 아이는 아직 친구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이며, 이별로 인해 극심한 슬픔을 겪고 있다. 결국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는 '누군가를 잃은 이별'을 겪어내는, 인물의 애도 과정을 담은 작품이다.

루는 사야카에게 언제나 멋진 선물을 해준 존재다. 자신과 같은 외로움을 가진 반려견이었고, 하나뿐인 친구였으며 늘 곁에 있는 가족이었다. 말 그대로 루는 사야카에게 전부였다. 그렇기에 사야카는 단호하게 말한다.
"루는 절대 죽지 않았어!"라고. 심장병으로 죽은 반려견을 잊지 못해 현실을 강하게 부정하는 사야카의 현재는, 루와 함께 했던 과거의 추억과 끊임없이 교차된다. 계속 반복되는 과거 회상으로 우린 루가 사야카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확실하게 인지하고, 점점 더 사야카가 느끼는 고통을 이해하게 된다.
사야카는 다시 혼자가 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이는 이미 부모에게 강아지가 최대 10년 정도밖에 살지 못한다는 말을 들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준비된 이별과 그렇지 못한 이별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보이는 행위의 준비가 아니라 남들은 결코 볼 수도, 알 수도 없는 마음의 준비. 사야카는 루가 자신이 체험학습을 갔을 때 갑작스럽게 떠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루의 죽음은 사야카에겐 정말 먼 미래였으니까. 결국 환경적, 시간적 요인에 의한 죽음이란 불길하지만 예정된 조짐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던 아이는 결코 루를 떠나보낼 마음이 없다. 인간으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맞닥뜨려야 하는 자연재해와 다를 바 없는 상황에 놓인 사야카에게 애도란 그저 '어른들의 거짓말', '부정' 그 자체였다.

오래 살면 살수록 인간은 타인의 죽음에 익숙해지고 무뎌진다는 말을 나무라듯,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는 어린아이의 상실과 노인의 상실을 구분 짓지 않는다. 후세는 오래전 사야카 또래, 어린 아들(고이치로)을 사고로 잃었고, 사야카의 할아버지는 아내를 떠나보냈다. 두 사람 모두 사야카와 같은 준비된 이별이 아니었다. 사야카는 자신의 마음을 찌르는 고통이 후세와 할아버지가 느끼는 고통과 다르지 않음을 발견한다. 그들 역시 강하게 현실을 부정하면서도, 돌연 현실을 받아들이고, 또 갑자기 돌변하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슬픔과 그리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사야카는 그들을 보며 조금씩 자신을 둘러싼 상실을 풀어낸다. 상처를 치유해야 하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 것처럼 후세에게 루와 함께 한 이야기를 하며 과거를 추억하고, 반대로 자연스럽게 후세에게 그의 죽은 아들에 대해 듣는다. 아내가 마지막으로 마당에서 박꽃을 심었던 때를 회상하는 할아버지의 옆에 앉아 조용히 그의 손등에 손을 포개며 그를 위로하고, 또 할아버지에게 위로받는다.
서글프기만 했던 어린아이가 위로받고, 반대로 타인을 위로하는 장면은 인간과 인간이 서로를 의지하며 함께 고통을 이겨내는 가슴 벅찬 장면으로 연결된다. 영화는 이 따뜻하고 감동적인 장면들을 한 스푼의 환상과 버무리며 이야기의 몰입감을 높이고, 주제를 더 빛나게 한다. 길고 은은하게 퍼지던 루를 향한 사야카의 진심은, 고이치로와 캐치볼을 하는 후세의 기다렸던 웃음으로 인해 묵직한 파동을 만든다. 그리하여, 사야카가 후세를 보며 "무언가 굉장히 소중한 걸 본 것 같았다."라고 말한 대사는 모든 이의 마음에 돌고 돌아 끝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오고 만다.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는 애도를 위한 방식으로 '함께'하는 애도를 선택했다.
사야카는 후세와 함께 루가 떠나고 남은 빈자리를 그대로 '공석'으로 둘 줄 아는 방법을 터득한다. 둘은 슬픔과 두려움은 나누고 따뜻한 온기로 마음을 채우며, 알 수 없는 곳으로 영영 떠밀려가지 않도록 서로를 붙잡는다. 홀로 남겨진다는 불안과 다가올 외로움에 맞서 서로의 손을 맞잡고 떠나는 이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일, 그리하여 남겨진 자에게 주어진 삶을 씩씩하고 담담히 살아가는 일.. 사야카는 사라지는 것이 결코 떠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면서, 다시 미소를 되찾는다. 아이는 기억하기 시작하면서, 영원의 의미를 깨닫는다. 루는 언제나 자신의 곁에 있다는 사실, 영원을 말이다.
애도는 반드시 애도로 작별해야 한다. 강제가 아니라 스스로 어두웠던 방문을 열고 나와야 한다. 그 방이 자신의 마음속에 늘 존재한다는 걸 깨닫고 언제든 들어가 울고 웃을 수 있음을 굳게 믿어야 한다. 후세가 말한 역은 누구나 찾을 수 있고,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영화는 그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사야카에게 직접 끊어진 기찻길을 발견하게 했다. 그리고 모르는 척 사야카와 루의 비밀 장소를 우리에게 노출했다. 나만의 비밀 장소를 선정하는 건 애도를 향한 첫 번째 걸음이 분명하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사야카는 전철이 향하는 곳이 어딘지 궁금해하지 않을 것이다.
작별에 '고맙다'는 말 한마디가 덧붙으면, 아름다운 작별이 된다.
고맙게도 후세도, 할아버지도, 사야카도 모두 아름다운 작별을 했다.

우린 기억하는 일을 지겨워하지 않기에 늘 자신이 정한 중심을 잃지 않는다.
영화가 시작한 뒤 내레이션으로 들려오던 사야카의 목소리가 한순간에 어른의 목소리로 변한 걸 눈치챈다면, 이 말에 공감할 것이다. 사실 이 영화는 아이였던 사야카가 어른이 되어 '나의 중심, 루'를 추억하는 이야기였다.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는 과거로 내일을 말하는 법을 잘 아는, 능숙한 작품이다.
개인적으론 듣는 것보다 보는 것에, 귀를 쫑긋거리기보다 눈을 더 크게 뜨고 사야카를 바라보길 추천한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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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 까고 쏘고 쑤시는 마블 지저스의 MCU 입성기!
(이 글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단 까고, 쏘고, 쑤신다. 연신 쉬지 않는 구강 액션으로 촌철살인을 날린다. 대상은 바로 마블! 나락 끝까지 곤두박질치고 있는 마블의 현 상황을 이렇게 깔 수 있는 이는 단 한 명, 데드풀은 마블 저격수로 등장해 그 임무를 다한다. 자칭 마블의 메시아이자 마블 지저스라 말하며 이곳을 구원하러 왔다고 하는 그의 모습은 연신 자조적 웃음을 짓게 한다. 하지만 그의 임무는 이게 다가 아니다. 울버린도 데려와야 하고, 폭스 영웅들과 곳곳에 숨겨진 이스터에그도 소개해야 한다. 가끔 관객들과 대화도 하고, 재도약을 준비하는 마블의 빅픽처를 그려야 한다. 그래서 <데드풀과 울버린>은 보는 재미가 있지만, 때로는 그 재미가 반감되기도 한다.
데드풀은 이제 데드풀이 아니다. 어벤져스 면접 낙방 이후 상심이 커진 웨이드 윌슨(라이언 레이놀즈)은 슈트를 벗고 중고차 딜러로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을 산다. 여자 친구도 떠나고, 삶의 의욕이 없어진 그에게 남은 건 소중한 친구들. 이들과 생일파티를 즐기던 그는 시간 변동 관리국(TVA)에 끌려간다. 그곳에서 만난 미스터 패러독스(매튜 맥퍼딘)는 울버린(휴 잭맨)이 죽고 난 뒤 신성한 타임라인을 누군가는 구해야 한다며, 웨이드에게 의미 있는 임무를 맡기려 한다. 단, 친구들이 있는 세계는 완전히 파괴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고민에 빠진 데드풀은 시공간을 넘나들 수 있는 타임러퍼를 빼앗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그는 살아있는 울버린을 데려오기 위해 타임라인 여행을 하고, 끝내 한 명을 찾는 데 성공한다. 근데 하필, 동료들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술만 퍼마시는 최악의 울버린을 데려온 것. 자신의 계획을 바꿀 생각이 없던 패러독스는 TVA로 온 이 둘을 변종들의 쓰레기장이라 불리는 보이드로 보내버린다. 그리고 이들은 프로페서 엑스의 쌍둥이 동생 카산드라 노바(엠마 코린)를 만난다.
<데드풀과 울버린>은 이전 시리즈보다 한층 더 복잡하고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많다. 이전 <로키> 시리즈를 통해 등장한 TVA와 마블이 지향하는 멀티버스 세계관을 통해 이야기가 맞물리면서 영역은 확장되고, 그로 인해 다뤄야 하는 것들도 많아졌다.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이야기와 세계관이 더 커지는 건 당연지사지만, 마블에서도 아웃사이더 히어로였던 그에게 이번 확장은 그 자체로 새로움이자 큰 도전이다. 이는 인사이더, 즉 어벤져스의 일원으로서 활약할 수 있는 데드풀의 MCU 입성을 위한 통과의례로도 보인다. 초반에 어벤져스 면접 장면은 이를 증명한다.
이번 여정은 데드풀만 등장하는 게 아니다. 울버린도 동참한다. 울버린의 10번째 스크린 나들이라는 점에서 반가움은 크지만, 한편으로는 <로건>을 통해 장대하고도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한 캐릭터의 재등장은 우려 요소로 작용한다. 그럼에도 숀 레비 감독은 과감히 울버린을 합류시킨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이 캐릭터가 곧 20세기 폭스의 마블 히어로를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영화는 울버린을 통해 디즈니에 흡수된 20세기 폭스에서 선보였던 히어로를 소환하고 이를 통해 관객으로 하여금 향수와 자극한다. 극 중 울버린은 쟈니(판타스틱 4), 엘렉트라, 블레이드, 갬블, X-23, 퍼니셔, 데어데블 (퍼니셔와 데어데블은 입으로만 전해진다.) 등 <인사이드 아웃>의 ‘기억의 뒤편’과 비슷해 보이는 보이드에서 이들을 마주하며, 데드풀과 함께 안내자 역할을 담당한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카산드라와 최후의 대결을 펼치려는 이들을 도와주며 과거 동료들의 죽음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죄책감을 일부 씻어낸다. 더 나아가 과거 자신이 해내지 못했던 세상의 위기를 몸 바쳐 막아낸다.
울버린과 20세기 폭스의 히어로들이 대거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영화가 히어로를 대하는 자세를 엿볼 수 있다. <박물관이 살아있다!> 시리즈, <리얼 스틸> <프리 가이> 등 중요하고 인기 있는 이들이 아닌 주인공을 내세워 자신만의 영웅담을 만들었던 숀 레비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도 그 궤를 같이한다. 모든 이에게 환영받지 못하고 우리의 기억 속에 묻어뒀던 영웅들 또한 어벤져스 못지 않은 이들이었다는 걸 보여준다. 안티히어로 데드풀, 다크히어로이자 뮤턴트인 울버린은 어벤져스가 아니지만, 일련의 과정을 겪으며 나름의 최대치 능력을 발휘해 세상을 구하는 이들의 모습은 어벤져스 못지않은 영웅으로 보인다.
데드풀과 울버린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다. <엑스맨 탄생: 울버린>을 통해 이들은 함께 나온 적이 있는 탄생부터 함께할 운명이었다고 볼 수 있다.(휴 잭맨과 라이언 레이놀즈도 마찬가지다.) 이렇듯 겉모습은 물론, 성격도 판이하게 다른 데드풀과 울버린은 최적의 파트너다. 아웃사이더이자, 이기적 행동, 힐링 팩터(재생능력), 말 못 할 고통을 갖고 있다는 공통점 아래, 서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연합해 자신들에게 닥친 난관을 헤쳐 나가는 것 자체가 큰 재미로 다가온다.
영화는 세계관 확장과 울버린이라는 캐릭터의 합류도 몸집이 커졌지만 기존 시리즈의 맛을 살리는 데 주력한다. 핏빛 액션과 병맛 코미디, 19금 농담과 욕이 난무하는 콘셉트는 시리즈의 정체성이 되었는데, 감독은 데드풀과 TVA와의 초반 대결 오프닝 장면을 통해 이를 잘 보여준다. 엔싱크의 ‘Bye Bye Bye’에 맞춰 보여주는 버린의 멋진 살육(?) 율동 션은 디즈니에 인수되었어도 그 수위는 예전과 같다고 처음부터 못 박는 것 같다. 이후 보이드에서 설전을 벌이는 데드풀과 울버린의 대결, 카산드라와 한 판 대결을 펼치는 이들의 모습에서도 아드레날린이 분출되는 시리즈의 그 맛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이전 시리즈의 쾌감이 이어졌다고 말하기에는 부족하다. 울버린의 가세와 멀티버스로 인한 세계관 확장에 따라 정작 데드풀다운 맛은 다소 떨어졌다. 특히 해야 하는 이야기가 많은지라 이번 영화에서 데드풀은 호스트 역할에 충실한 느낌이 강하다. 물론 그의 심리적 고통과 이를 이겨내기 위한 그만의 과정과 노력이 등장하지만, 전편과 비교했을 때 느껴지는 부족함은 채워지지 않는다.
여기에 20세기 폭스 히어로들의 등장도 향수를 자극하지만 <스피어더맨: 노 웨이 홈>에서 느꼈던 감흥까지는 보여주지 못한다. 멀티버스 활용 면에서도 다각도로 머리를 썼지만, 기시감과 피로감은 여전하다. 더불어 알면 알수록 더 재미있는 이스터에그의 높은 진입장벽, 임팩트가 약한 빌런 활용도 등 마블 영화에서 지적되었던 부분이 반복되는 건 아쉬움을 남긴다.
공교롭게도 영화를 본 당일 美 ‘2024 코믹콘’을 통해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빌런 닥터 둠 역을 복귀, 루소 형제가 메가폰을 잡고 공개될 <어벤져스>의 새 시리즈가 발표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울버린(20세기 폭스 히어로 포함) 복귀는 단순한 이벤트성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게 되었다. 기존 어벤져스에 데드풀, 울버린 등 뮤턴트들의 합세는 득이 될지 실이 될지 지켜봐야 할 듯. 그러고 보면 일명 마블 심폐소생술 프로젝트의 신호탄을 <데드풀과 울버린>이 한 셈인데, 그럼 별 수 있나! 봐야지! 참고로 쿠키는 두 개다. 하나는 감동 그 자체, 하나는 폭소를 자아낸다. 살신성인의 자세로 참여한 크리스 에반스에게 깊은 감사를 전한다!
사진 제공: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평점: 3.0 / 5.0
한줄평: 마블 지저스가 되기 위한 데드풀의 일보 후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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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첫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베놈: 라스트 댄스>가 개봉 2주 차에도 국내와 북미에서 주말 관객 수 1위를 지켰습니다.
이전 시리즈보다 다소 낮은 오프닝 스코어로 출발해 향후 성적이 주목되었으나, 전 세계 박스오피스 수익이 2억 달러(약 4,143억 원)를 돌파하며 우려를 잠재웠습니다.
국내에서는 누적 관객 수 130만 명을 돌파하였고, 북미에서는 9,000만 달러의 누적 수익을 거두며 흥행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특히 이번 주에는 프랑스에서 650만 달러(약 89억 7,650만 원), 일본에서 380만 달러(약 52억 4,780만 원), 중국과 멕시코에서 각각 7,060만 달러(약 974억 9,860만 원), 1,340만 달러(약 185억 540만 원)의 수익을 거두며 시리즈의 건재함을 증명했습니다.
그러나, 타 슈퍼히어로 영화들보다 적은 예산인 1억 2,000만 달러 (약 1657억2000만원)로 제작된 <베놈: 라스트 댄스>는 이러한 흥행에도 시리즈 1, 2편의 성적에는 미치지 못할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국내 박스오피스에서는 <극한직업> 이후, 류승룡, 진선규가 의기투합한 <아마존 활명수>와 <보통의 가족>이 주말 박스오피스 2, 3위를 기록했으나, 각각 누적 관객 수 36만 명, 59만 명에 그치며 다소 아쉬운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북미에서는 <와일드 로봇>이 다시 2위를 탈환하며 장기 흥행에 나서고 있습니다. 지난주 2위를 차지했던 <스마일 2>가 3위로 내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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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5주 차, 최신 씨네 뉴스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 13개 최다 후보의 주인공 <에밀리아 페레즈>를 연출한 자크 오디아르 감독이 한국 개봉을 맞아 첫 내한이 성사되었습니다.
자크 오디아르 감독은 아카데미 시상식이 끝난 3월 중순 영화의 개봉에 맞춰 한국을 방문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여자로 다시 태어나고 싶은 갱단 보스와 아무것도 몰랐던 그의 아내, 새 삶을 선물할 변호사가 엮이게 되는파격적이고 화려한 뮤지컬 영화 <에밀리아 페레즈>는 오는 12일 개봉을 앞두고 있습니다.
폴 토마스 앤더슨 신작, 추가 세부 사항 공개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신작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공개되었습니다.
해당 작품에서 보니와 클라이드 같은 역할을 맡게 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테야나 테일러가시민운동가로서 알라나 하임, 레지나 홀의 캐릭터가 소속되어 있는 반정부 그룹에 가담하게 되고,
악역을 맡은 숀 펜은 백인 우월주의 그룹에 합류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번 신작은 PTA의 가장 상업적인 시도로 여겨지며, 러닝 타임은 약 3시간으로 알려졌습니다.애초 <One Battle After Another>는 2025년 8월 8일 극장 개봉 예정이었으나,
가을 개봉으로 변경되거나, 9월 베니스 영화제에서 세계 최초로 공개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데이미언 셔젤, 에빌 나이벨의 전기 영화 감독 예정
<바빌론>의 상업적 실패 이후, 차기작 소식이 들리지 않던 데이미언 셔젤 감독이 스턴트맨 에빌 나이벨 전기 영화를 연출할 예정입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연을 맡을 것으로 예상되는 이 작품은 1974년 아이다호 스네이크 강을 오토바이로 뛰어넘으려 했던나이벨의 야심찬 도전을 다룬다고 합니다. 그는 오토바이 스턴트로 유명한 미국의 퍼포머, 엔터테이너였지만, 자신을 비판하는 책을
쓴 남성을 야구 방망이로 폭행한 사건으로 인해 자신의 경력을 무너뜨린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찰리 카우프만 신작,
에디 레드메인&테사 톰슨 출연 확정
이도 게펜의 단편 소설 ‘Debby's Dream House’을 각색한 작품인 찰리 카우프만의 차기작에 에디 레드메인과 테사 톰슨이 출연할 예정입니다.
이번 베를린국제영화제 EFM에서 비밀리에 소개된 것으로 알려졌으며,사람들을 위해 꿈을 제조하지만 결국 그들에게 악몽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다고 합니다.
이번 작품은 2025년에 제작을 들어갈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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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이라는 불가해한 존재 ‘마이어로위츠 이야기’
어린 시절 상처받은 경험을 객관화해서 말할 수 있게 됐을 때, 심지어 농담의 소재로 삼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더 이상 그 경험에 휘둘리지 않는 어른이 된 게 좋아진다. 어떤 날엔 내가 쓸모 있는 자식이 되어야 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게 됐고, 또 어떤 날엔 내 부족함이 엄마를 불행하게 할까 봐 불안했다. 그리고 그 경험이 어떤 형태로 내 삶에 관여했는지 설명할 수 있게 된 지금, 비로소 어린 시절에서 분리되는 통쾌함을 느낀다.
노아 바움벡의 <마이어로위츠 이야기>의 다 큰 남매들도 어린 시절에 관한 불만을 터뜨린다. 이들은 자의식 강한 예술가 아버지로 인해 각기 다른 상처를 받으며 자랐다. 아버지의 작품 활동과 재혼으로 인해 누군가는 방치되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과한 관심을 받았다. 부모 자식 관계도 각각의 인간관계라 그 사이에서 주고받는 감정은 균질하지 않다. 아버지 해롤드는 매슈의 이름을 딴 조각 작품을 남겼지만 대니라는 작품도, 진이라는 작품도 남기지 않았다. 이는 성장 과정에서 남매들 사이의 질투와 열등감을 유발했고, 여전히 다 큰 어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첫째 아들 대니가 “아빠는 나를 이류 시민처럼 취급했”다고 분통을 터뜨릴 때, 둘째 아들 매슈는 “아빠 관심이 나한테만 집중돼서 내 인생이 개판이 됐”다고 소리친다.
영화에서 주로 갈등을 겪는 쪽은 두 이복형제와 아버지다. 반면 유일한 딸인 진이 아버지와 부딪히는 장면은 없는데, 갈등에 참여하지도 못할 만큼 소외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두 아들들은 아버지의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혹은 자신의 성공을 인정받지 못해 힘들었지만 진은 힘들 기회조차 없었다. 진의 입장에서는 아버지에게 분노하는 것조차 부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여전히 아버지의 인정을 갈구하는 대니나 매슈와는 달리, 어떤 관심도 받지 못했기에 오히려 기대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있었을까. 그래서 진은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 가족에서 나로 사는 게 어떤지 너흰 절대 몰라.”
어느 날 삶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느낄 때, 혹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머뭇거릴 때 어릴 적 유약한 자아가 나를 발목 잡고 있음을 불현듯 깨닫는다. 유년시절의 케케묵은 장면들이 떠오르고, 그 장면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걸 알게 된다. <마이어로위츠 이야기> 속 세 남매들이 다 큰 어른이 되어서도 어린 시절을 들먹이며 싸우는 장면이 웃기고 한심해도 짠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 해롤드가 병상에 눕게 되면서 남매들은 어쩔 수 없이 이 상황을 함께 헤쳐 나가게 된다. 아버지를 극진히 돌보고, 간호사의 처치를 함께 받아 적고, 의사에게 항의한다. 가족 내 역할과 되풀이되는 갈등으로 인해 찐득하게 달라붙은 감정들이 고통스럽지만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어쩔 수 없는 보살핌이 가능해진다. 가족이라는 존재의 이상한 점은 이런 것이다. 대화를 시작하면 해묵은 감정이 먼저 튀어나와 부딪히곤 하지만 위기의 순간에는 서로를 돕게 되는 것. 가족은 완전한 화해도, 영원한 원망도 불가능한 존재들이다. 그런 불가해한 순간을 맞이하는 건 가족끼리만 가능하다.
진뿐만 아니라 이 가족 안에서 대니로도, 매슈로도 사는 것 또한 그들 자신만 아는 고통이다. 그렇지만 아버지 앞에서 힘든 감정은 자식들끼리만 이해할 수 있다. 영화 속에서 낡은 짐 속에 나뒹구는 선글라스는 서로 네 것이라며 가족들의 손을 여러 차례 옮겨 다니는데, 영화 말미엔 매튜와 대니가 서로 자신의 것이라 주장한다. 한 가족 안에서 자란다는 건 그런 것 같다. 복잡하고 엉망인 유년 시절의 기억이 네 것인지, 내 것인지 확실하지 않아서 그게 내 감정이기도, 네 감정이기도 한 것. 그게 우리의 정서가 되는 것. 아버지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는 대신 다 큰 자식들은 상처받은 서로를 감싸 안는다. 함께 시간을 보내서 좋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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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터슨〉이 한국에서 나이를 먹는다면
감독이 자신의 부모를 촬영한 다큐멘터리 영화 〈작은새와 돼지씨〉는 여간해서는 거리두기가 어려운 영화다. 가사노동을 하는 작은새와 경비원으로 일하는 돼지씨는 오랫동안 부부로 살았다. 두 딸을 낳고 키웠고, 함께 슈퍼를 운영하며 생계를 이었다. 그들이 거주하는 소박한 아파트에는 그들이 함께한 세월이 묻어난다. 작은새와 돼지씨는 풍족하지는 않지만 떳떳하게 살아온 서민 부부의 전형이다.
작은새는 수줍음 많은 다정한 여자고 돼지씨는 노래와 춤을 좋아하는 호탕한 남자다. 여느 부부처럼 그들은 서로에게 기대기도 하고 투닥거리기도 한다. 배가 볼록 나온 돼지씨가 소파에 누워 작은새에게 발톱을 깎아달라고 하는 장면, 발에 가시가 박한 작은새가 돼지씨에게 이를 빼달라고 하는 장면, 넌지시 그리고 조심스럽게 상대에 대한 묵힌 불만을 털어놓는 장면 등등. 핵가족의 형태로 살아본 적 있는 사람은 이들 장면을 변주할 자신만의 수많은 경험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낯설고 ‘민망한’ 장면도 있다. 사랑보다는 동지애로 살아가는 수많은 평범한 부부가 한때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이었음을 일깨우는 장면 말이다. 영화에는 작은새와 돼지씨가 주고받은 연애편지가 소개된다. 간드러지는 표현으로 서로를 갈구하는 두 사람에게서 우리는 그들이 함께한 세월을 상상하게 된다. 더불어 각박한 현실을 함께 해치며 삶의 토대를 다져온 그들이 지금과는 영 다른(?) 감정을 주고받은 연인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감정이 여전히 그들에게 소중히 간직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맺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관계를 성찰케 한다. 오래 지속되는 관계는 어떻게든 변한다. 여기에 어떻게 깊이를 더할 것인지가 관건이다. 둘만이 가능한 방식으로 서로를 지탱하며 버텨온 작은새와 돼지씨의 관계는 여기에 작고 사랑스러운 참조점이 되어준다.
그리고 이 모든 순간에 예술이 있다. 우리는 보통 새롭고 혁신적인 예술에만 가치를 부여한다.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충격적인 방식으로 확장해주는 예술 말이다. 그러나 예술의 가치는 하나가 아니다. 작은새와 돼지씨는 일상의 감정을 승화시키는 수단으로 예술을 한다. 작은새가 자기 내면을 표현한 서예와 그림, 돼지씨가 경비 노동을 하며 쓴 시는 예술의 가치가 하나가 아님을 보인다.
〈작은새와 돼지씨〉를 보며 짐 자무쉬 감독의 영화 〈패터슨〉이 떠올랐다. 주인공은 미국에서 버스 기사로 일하는 패터슨이다. 그는 매일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고, 똑같은 버스를 운전하며, 같은 동료의 불평을 듣는다. 퇴근 후에는 아내의 실험적인(맛없는) 요리를 먹고, 어제 간 길로 개를 산책시키며, 어제와 같은 술집에 가서 어제와 같은 술을 마신다. 그러나 다른 것도 있다. 그는 매일 조금씩 다른 시간에 일어난다. 버스에 탄 승객과 그들이 나누는 대화 내용도 매일 달라진다. 동료의 불평 내용도 바뀐다. 아내는 매일 집을 새롭게 꾸미고, 그녀가 만든 머핀 위 하얀 설탕 물결도 매일같이 달라진다. 술집의 대화는 어제와 이어져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패터슨은 매일 다른 시를 쓴다. 패터슨에게 시는 따분하고 지루해 보이는 일상을 평온하고 소박한 차이의 반복으로 인식하게끔 해주는 새로운 언어다.
아마도 패터슨이 한국에 산다면, 그가 나이를 먹는다면 작은새, 돼지씨와 닮은 모습이지 않을까 싶다. 특별할 것 없는 삶이지만 예술을 통해 발견되지 않은 의미를 들춰내고 스스로를 빛낸다는 점에서 말이다. 돼지씨와 작은새가 오래도록 예술과 함께 일상을 살아내기를, 그리하여 그들을 닮은 모든 가족의 일상을 특별한 것으로 만들어주기를 바란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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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이 뒤섞인 난맥상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법정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승패를 가리는 장소라고 믿으며 각종 꼼수와 편법에 능통한 변호사 '정인후'(조정석). 그는 감옥에서 암에 걸린 아버지의 가석방을 약속받자 대통령 암살 사건에 연루된 정보부장 수행비서관 '박태주'(이선균) 대령의 변호를 맡기로 결정한다.
군인 신분 때문에 재판 기회가 한 번 밖에 없는 박태주. 하지만 그는 변호인에게 쉽사리 협조하지 않는다. 원칙주의자인 그의 눈에 정인후는 양아치니까. 그가 내란을 사전에 공모했는지, 아니면 위압에 의해 명령을 따랐는지가 재판의 쟁점인 가운데 박태주는 거짓 혹은 편법 증언을 요구하는 정인후와 거듭 부딪힌다.
한편, 10.26 사태를 계기로 박정희의 후계자가 되어 권력을 잡겠다는 야욕을 품은 합수부장 '전상두'(유재명). 박 대령 재판을 자기 발판으로 삼기로 결정한 그는 실시간으로 재판관에게 쪽지를 전달하고 재판을 도청 및 녹음하며 정인후의 노력을 물거품을 만들기 시작한다.
무위에 그친 역발상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그의 경호원들은 박정희 대통령 외 5명을 사살했다. 이 사건의 재판을 다룬 <행복의 나라>는 시간적으로도, 영화적으로도 어중간하다. 사건의 전후사정이 이미 영화화돼 대성공을 거뒀기 때문. <남산의 부장들>은 김재규의 동기를, <서울의 봄>은 사건 이후 12.12 군사반란을 영화화했다. 심지어 둘은 장르도 달랐다. 전자는 누아르를, 후자는 전쟁 영화의 속성을 강조했다.
이에 <광해, 왕이 된 남자>와 <7년의 밤>을 연출한 추창민 감독은 역발상을 했다. 10.26 사태나 주동자인 김재규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 대신 상대적으로 관심을 못 받은 공범 박흥주 육군 대령과 그를 변호한 태윤기 변호사에게 주목했다. 특히 그들의 인생사를 각색해 극명하게 반대되는 삶을 살아온 두 인물의 관계성에 초점을 맞췄다. 그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위하게 되는 과정을 법정물로 포장해 감동을 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행복의 나라>는 역발상의 힘을 스스로 포기했다. 신념과 규칙에 충실한 삶 대 생존을 위해 유연해야 하는 삶이라는 대립 구도를 깊게 파고드는 대신 쉬운 길을 간다. 무조건적인 악역 전두환을 전면에 내세워 스케일을 키우고 군사 정권과 민주 시민의 대립을 강조한다. 문제는 같은 이야기로 천만이 넘는 관객의 뇌리에 각인된 선배들이 있다는 것. 결국 노선을 바꾼 순간 <행복의 나라>는 자기 자리를 잃고 말았다.
거대한 사건 속 개인적인 이야기
장르만 놓고 보면 <행복의 나라>는 <변호인>과 비슷해 보인다. 둘 다 비슷한 시대를 배경으로 한 법정물이니까. 하지만 두 영화의 지향점은 전혀 다르다. <변호인>은 분노를 연료로 삼아 달리는 작품이었다. 무고한 피고인을 간첩으로 조작하는 군사정권의 무도함과 그에 맞서는 변호인의 투쟁. 이 명확한 선악 구도에 송강호라는 배우의 연기력을 더하니 마치 들끓는 불과도 같은 영화가 만들어졌다.
<행복의 나라>는 다르다. 선악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은 가운데, 동등한 위치에서 마주 보고 있는 변호인과 피고인의 관계성이 핵심이다. 살인을 저지른 피고인의 행위를 어떻게 해석할지를 두고 두 주인공은 첨예하게 대립한다. 정인후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성공을 꿈꾸며 판검사가 되려다가 실패한 변호사다. 법정은 옳고 그름을 가르는 곳이 아니라 이기고 지는 곳이라는 대사에는 그의 인생이 축약되어 있다.
그 반대편에는 박태주 대령이 앉아 있다. 그는 중앙정보부 비서실장인데도 판자촌에 집이 있을 정도로 청렴한 군인이다. 요직에 있지만 권력을 마다하고 최전방 전출을 거듭 요청한 참군인이기도 하다. 영화는 10.26 사태를 매개로 완전히 다른 두 삶을 충돌시킨다. 배경은 대한민국의 향배를 뒤바꾼 거대한 사건이지만, 정작 내용은 철저히 개인적인 이야기인 셈이다.
감독의 전작인 <광해, 왕이 된 남자>와도 유사하다. <광해>도 중심 사건은 광해군을 축출하기 위한 정치극이었다. 하지만 정작 주된 내용은 개인적인 이야기였다. 충(忠)으로 무장한 유학자 '허균'(류승룡)이 광해군으로 위장한 광대 '하선'(이병헌)과 지내면서 자기 신념과 사상의 문제를 깨닫고 새 나라와 새로운 왕을 꿈꾸게 되는 티키타카야말로 천만 관객을 휘어잡은 원동력이었다. <행복의 나라>도 마찬가지다.
두 인생의 충돌로 빚은 법정극
전혀 다른 삶의 궤적과 신념을 지녔다 보니 정인후와 박태주의 첫 만남은 엉망이었다. 정인후는 철저한 원칙주의자 군인 박태주를 좀처럼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관등성명, 상명하복이 권위주의의 발현에 불과하다며 비웃는 사람이니까. 박태주도 다르지 않다. 그의 관점에서 보면 법정에서 온갖 편법을 써가며 승리를 추구하고, 정의가 아니라 돈과 이익을 위해 변호를 맡는 정인후는 단지 변호사일 뿐, 신뢰할만한 변호인이 아니다.
1차 공판만 해도 정인후는 자기 의도대로 재판에 임한다. 군인이니 군법에 따라 단심제 군사 재판을 받겠다는 박태주. 정인후는 그를 설득하는 대신 자기 의견을 관철시키려 한다. 군사 재판은 받지만, 단심제는 3심제로 바꿔달라며 위헌심사요청을 한다. 위헌심사요청이 기각되자 재판관을 교체해 달라며 재판을 여론 싸움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
2차 공판부터는 다르다. 정인후는 점차 피고인의 입장과 신념이 녹아든 전략을 수립한다. 군인에게 명령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하며 그저 명령을 따른 박태주의 책임을 부정하는 식이다. 대통령을 살해한 후 정보부가 아니라 육군본부로 가자는 의견을 박태주가 냈다는 진술에 착안해 내란죄 혐의를 부인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박태주도 정인후를 만나 변한다. 동료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재판을 포기하려던 그. 그는 군인이고 원칙주의자면 규칙대로 재판장에서 최선을 다해 싸워서 책임을 지라는 정인후의 일갈에 마음을 다잡는다.
이는 법정극 특유의 쾌감으로 이어진다. 감정 호소로 일관한 <변호인>과 달리 <행복의 나라> 속 재판씬은 판세가 거듭 뒤집히다 보니 꽤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이에 더해 흐름을 가져오려고 머리를 쥐어짜면서 변호인과 피고인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한 팀이 되는 이야기가 병행되니 복합적인 재미가 만들어진다. 진정한 인권변호사가 되어가는 정인후를 보면서 박 대령이 웃음과 하이파이브로 화답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익숙한 맛으로 돌파하는 고구마
정인후와 박태주가 한 팀이 되어가는 과정은 자칫 고구마일 수 있다. 비록 역사를 반영한 것이기는 하나, 박태주라는 캐릭터가 다소 과하게 올곧은 인물로 묘사되기 때문. 자기는 죽고, 아내와 두 아이만 남아 험난하게 살아야 할 상황에서도 그는 자기 신념을 좀처럼 꺾지 못한다. 상관도 못 버리고, 명령에 충실한 군인이라는 자부심도 저버리지 못하고, 대통령을 살해했지만 옳은 일을 했다는 확신도 내려놓지 못한다.
추창민 감독은 고구마를 익숙한 맛으로 뚫어버린다. 정인후의 아버지와 박 대령을 겹쳐 보이게 한다. 개척 교회 목사로서 시위하는 학생들을 돕다가 수감되고, 가족을 돌보지 못한 아버지. 정인후는 자기 신념대로 살아야 하는 아버지를 머리로는 받아들이지 못해도 가슴으로 이해해 간다. 그리고 이 과정은 그가 박태주를 만나는 장면과 이어진다. 그 덕분에 자칫 답답할 뻔한 전개는 가족애로 변환되어 더 큰 감동을 자아낸다.
물론 다소 양식적인 스토리텔링이기는 하다. 사건과 무관한 인물을 통해 시대적 사건에 접근하면서 특히 감정선을 자극해 웃음과 눈물을 동시에 유발하는 전형적인 한국 영화의 화법이니까. 야매 변호사였다가 사건을 맡은 후 진정한 인권 변호사로 거듭나는 성장 서사는 정인후나 <변호인>의 송우석이나 다를 바 없다. 또 정인후와 아버지의 관계성도 이러한 맥락에서는 신파를 의도한 구조 배치로 보일 수밖에 없다.
과욕과 함께 무너지다
하지만 과욕을 부리기 시작하면서 <행복의 나라>는 이내 본연의 색을 잃는다. 의외로 초중반부까지 이 작품은 10.26 사태의 배경이나 실체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다. 부마 민주 항쟁이 대학살로 이어지는 것을 막고, 민주화를 앞당기기 위한 김재규의 결단 정도로 언급할 뿐이다. 애초에 핵심 플롯 자체가 정인후와 박태주 둘에게만 초점이 맞춰져 있으니 이는 의도적인 공백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후반부로 갈수록 영화는 12.12 군사반란을 필두로 실제 사건에 가까워진다. 그러니 역사적 맥락의 공백이 서서히 두드러지면서 영화의 만듦새도 무너진다. 배경이어야 할 사건이 돌연 주인공이 되다 보니 묻어 두었던 의문점이 한 번에 터져 나오기 때문. 일례로 중반부까지만 해도 매력적이었던 입체적인 인물상은 중심점을 잃고 흩어진다. 정인후의 경우 단지 박태주를 살리려는지 민주주의 투사가 되려는지 알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박태주도 명령에 의한 피해자인지,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한 투사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그가 청렴한 군인이고 신념에 맞는 명령을 따랐으니 민주주의 투사로 여겨야 하는지, 군사 정권에 협력한 군인을 살리는 게 과연 민주주의를 위한 항거인지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다. 10.26 사태의 본질과 맥락을 외면한 채로 시작한 미시적인 이야기를 무리하게 거시적으로 확장시키는 과정에서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모양새다.
이에 더해 장르적으로도 균형을 잃는다. 12.12 군사반란이 시작되는 순간부터는 <서울의 봄>과의 비교를 피할 수 없으니까. 그렇다고 <서울의 봄>처럼 쿠데타 과정을 자세하거나 긴장감 넘치게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결국 10.26 사태는 지우고 12.12 군사 반란을 부각한 선택은 법정극이라는 장점도 희석시키고, <행복의 나라>만의 개성을 깎아먹는 악수가 되고 만다.
전두환이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
마지막으로는 극 중 전상두, 곧 전두환을 다루는 방식도 <서울의 봄>과 비교를 피할 수 없다. 황정민의 전두광과는 달리 유재명의 전상두는 상대적으로 일차원적이다. 전자는 들끓는 성공욕,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싶어 하는 보스 기질, 위기 때마다 빛나는 간교함이 어우러진 입체적이고 현실적인 캐릭터였다. 반면에 전상두는 그저 권력을 잡기 위해 살인도 거리낌 없이 저지르는 절대악으로만 묘사된다.
그 결과 전상두의 존재감이 커질수록 영화는 편의적으로 느껴진다. 전두환이 의문의 여지없는 악역이기는 하나, 그를 덮어두고 비난하면 메시지가 뻔해지고 재미도 덜해지기 때문. 정인후가 전상두 면전에서 욕을 하는 골프장 시퀀스가 통쾌하거나 희열이 느껴지는 대신 지루하고 늘어진다고 여겨지는 이유다. 슈퍼맨처럼 압도적인 힘을 지닌 히어로를 잘못 활용해 액션의 긴장감과 쾌감을 모두 놓친 <저스티스 리그>와 비슷하다.
그렇기에 <행복의 나라>가 전두환이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포기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유독 짙다. 악명 높은 한 인물 대신 비교적 덜 알려진 이들의 서사에 우직하게 집중했다면 한국 현대사를 다룬 이전 시대극들과는 또 다른 한 편의 드라마가 탄생될 가능성이 분명히 있었으니까. 조정석과 이선균, 다시는 재회할 수 없는 두 주연의 연기도 함께 빛이 바래기에 더욱 안타깝다.
Acceptable 무난함
시대의 그림자에 가려진 개인을 비추기에는 조명이 너무 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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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비우스, 이게 최선인가? , 제작사 소니의 또다른 실수
소니가 영화 판권을 가지고 있는 스파이더맨 유니버스의 악당 캐릭터인 모비우스의
단독영화가 개봉하였습니다.
개봉 전 꽤 기대를 불러왔던 영화였는데요.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기대에 훨씬 못미치는 영화였습니다.
배우 자레드 레토의 재능이 또 한 번 소비되어버리고 마는 작품입니다.
캐릭터의 매력도, 액션 장면의 매력도, 이야기의 재미도 잡지 못한 영화네요.
아마도 앞으로 소니에서 제작될 스파이더맨 유니버스에서 계속 보게 될 것으로 보이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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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밤 우릴 찾아오던 괴물,
어쩌면 우리가 부른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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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enee - Mons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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