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3-12-10 18:50:14
너의 자리는 어디인가
영화 <조이랜드> 리뷰 (사임 사디크 감독)

PROGRAM NOTE.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자신의 일에 열정적인 뭄타즈는 섬세한 남편 하이더르, 가족 내에서 절대자로 군림하는 시아버지 아만, 큰형 내외 및 그들의 네 딸과 함께 산다. 몇 년째 전업주부로 살던 하이더르는 카리스마 있는 트랜스젠더 뮤지션 비바의 백댄서로 취직하게 되고, 그와 동시에 뭄타즈는 전업주부가 될 것을 강요받는다. 하이더르는 첫 만남부터 강렬했던 비바에게 이끌리고, 뭄타즈는 원치 않는 임신으로 답답함을 느낀다. 자아가 확고한 뭄타즈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비바 뿐 아니라 흔들리는 성적 정체성을 가진 하이더르와 시아버지 아만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종교적이고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억압되고 착취되는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섬세하게 그려냈다. 사임 사디크 감독의 데뷔작 <조이랜드>는 칸영화제 주목할만한시선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박선영/2022년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POINT.
✔️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심사위원상을 비롯, 각종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들이 눈여겨본 영화
✔️ 파키스탄이라는 (한국 관객들에게는) 낯선 나라 영화인데, 어디서 <헤어질 결심> 냄새가 나요 킁킁
✔️ 파키스탄 출신 말랄라 유사프자이가 프로듀서로 참여. 말랄라는 여성 교육에 대해 꾸준히 목소리 낸 인물이니만큼, 여성을 보는 시각에 대한 우려를 접어도 좋아요
✔️ 보고 난 직후는 물론, 보고 난 이후에도 며칠씩 여운이 계속되는 영화
✔️ 믿고 보는 '슈아픽쳐스' PICK! <행복한 라짜로>, <말없는 소녀> 같은 수작을 우리와 연결해준 곳이에요
✔️ 12월 13일 개봉!

영화 <조이랜드>는 거대한 하나의 일가족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연로하여 휠체어를 탄 아버지, 큰아들 '살림'과 아내 '누치', 둘째 아들 '하이더르'와 아내 '뭄타즈'. 그리고 살림과 누치 사이 아이들까지. 한 마당을 공유하며 사는 모습이 마치 우리네 옛날 마당 깊은 집처럼도 보인다.
그러나 영화를 보다 보면 이내 일가족보다 훨씬 거대한 무언가가 그 마당에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인도-파키스탄 분리 독립 시기보다 훨씬 이전부터 이곳에 살았다고 아버지가 자랑스럽게 말하는, 이들의 땅 '라호르'는 파키스탄에서 둘째 가라면 아쉬울 만큼 유서 깊은 도시다. 다양한 왕조의 수도였던 곳, 한때 세계에서 손꼽히는 주요 도시이기도 했던 곳, 그러나 1940년대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 독립되던 시절 무수한 피가 흘렀던 곳. 차이가 차별이 되어 사람을 죽였던 곳. 그 모든 이야기는 역사의 뒤안길로 흘러갔을 텐데, 이제 더 이상 차이가 차별이 되는 일은 없을까?

#"단일한" 파키스탄 사람이에요
일가족의 고요한 마당에서도 차별은 넘쳐 흐른다. 딸 넷을 낳았지만 아들이 아니라서 실망하는 것도, "아들"이니 응당 염소 하나쯤은 잡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도, 아들에게 일자리가 생겼으니 자신의 커리어를 착착 쌓아 가던 며느리는 이제 전업 주부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도, 그러나 그 아들의 일자리가 "에로틱한 공연"을 하는 극장이라는 사실은 이웃들에게 좀 비밀로 해두는 것도.
게다가 이런 차별은 절대 "단일한" 기준을 가질 수 없다. 차별은 양날의 칼이므로, 힘을 쥔 쪽에도 상처를 남기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성차별에서 여성이 남성에 비해 약자지만, 힘을 쥔 남성들이 만든 차별의 굴레가 어떤 남성들에게는 '맨박스'가 되듯이. 다만 힘을 쥔 쪽은 규칙을 이리저리 변용하면서 상처를 피할 길을 도모해 볼 수 있다. 그렇게 차별은 이중 삼중의 잣대를 번복하여 만들어내고, 하나 둘 잣대가 늘어나다 보면 어느새 삐죽삐죽한 창살처럼 우리를 가둔다. 그 창살 안에서 버틸 재간이 없는 사람들이 튀어나올 때, "공동체를 지킨다"는 명목의 제재가 가해진다.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잣대들은 사실 공동체의 모두를 찌르고 있다. 힘을 쥔 쪽이라는 것도 결국 상대적 개념일 뿐이니까.

이 영화의 주요 인물들은 사실 모두 그 창살 바깥에 더 잘 어울리는 인물들이다. "전통적인 남성성"과 잘 어울리지 않는 하이더르, 트랜스젠더 비바, 전업주부의 삶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뭄타즈, 받아들였지만 그런 뭄타즈를 이해하는 누치, 심지어 전통의 적극적인 수호자처럼 보였던 아버지나 이웃집 파야즈 부인조차도...
단일하지 않은 차별의 기준들은 각자의 비밀들을 만들어내고, 그 비밀은 거울이 깨지듯 방사형으로 퍼진다. 그 자리의 어느 누가 과연 행복했을까?
마치 "애빌린의 역설" 같다. 집단의 구성원 누구도 원하지 않는 방향의 결정임에도, 모두가 자신의 의사와 상반되는 결정을 하게 되는. 전통이라는 미명을 덮고 있는 것 중 이런 애빌린의 역설이 얼마나 많을까.

#지혜로운 사람은 바다를 좋아하고
영화에는 많은 공간이 등장하지 않지만, 하나하나 매우 인상 깊다. 어느 장소 하나 일면적이기만 한 곳이 없다. 마당과 집안 깊은 곳이 분명하게 분리되어 있는, 이 영화에 뭄타즈가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장면에서 유독 그 대비를 극명히 보여주었던 집. 사회에서 요구하는 엄격한 성별 역할을 내려놓는 공간이었던 극장. 모든 남성 관객들이 스스로에게만 유하게 적용되는 잣대의 틈으로"에로틱한 공연"을 보는 곳인 동시에, 비바에게는 반대로 그 모든 잣대의 창살을 내던지고 나와서 춤을 춘 장소였던 극장. 이름부터 기쁨을 품고 있는, '꿈과 희망의 공간'으로 상징되는 놀이공원 조이랜드. 누치와 뭄타즈가 잠시 일상의 고통을 잊고 소소한 일탈을 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정도의 일탈밖에 할 수 없는 삶의 무게와 거기서조차 존재하는 차별의 비릿한 시선을 느끼게도 하는 공간.

가장 역설적인 공간은 바다일 것이다. 비록 지금은 조악한 조명밖에 없는 방에서 바다의 흔적으로 들고 온 조개 껍데기 하나 덜렁 들고 있지만, 비바는 바다를 자유롭게 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평생 라호르에서만 살아온 하이더르 또한, 가보지 못했지만 사실 언제든 마음 먹으면 갈 수 있는 곳. 반면 카라치에 친척 집이 있어 언제든 해변에 가볼 수 있었음에도 옷이 젖는다는 이유로 발목밖에는 담가보지 못한 뭄타즈.
비바와 하이더르, 뭄타즈. 바다에 대한 이 세 사람의 기억과 접근성은 모두 다르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만은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바다를 좋아하고, 인자한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마치 <헤어질 결심>에서 "난 인자한 사람이 아닙니다. 난 바다가 좋아요." 말했던 서래처럼, 이들 또한 인자한 사람의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는 것.

이 영화가 "트랜스젠더와의 불륜 이야기"로 뭉뚱그리는 시각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영화는 트랜스젠더 비바가 '팜므 파탈'적인 매력으로 일가족을 무너뜨리는 이야기도 아니며 (진짜 아니다), 한 기혼 남성과 결혼 외부자 두 사람이 히히덕거리며 기혼 여성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이야기도 아니다 (진짜 아니다). 어쩐지 이 영화를 보면서 자꾸 생각났던 <헤어질 결심>이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듯이.
이 영화는 단지 그 세 사람 모두가 눌려 있던 구조를 보여준다. 그 거대한 구조 아래 세 사람이 어떤 존재였는지 보여주고, 이들이 각각 어떤 선택을 하는지를 보여준다. 두껍게 덮인 애빌린의 역설을 걷어내고 끝내 규칙에서 이탈하는 인간들의 자리가 어디인지 묻는다. 아름다운 인물들의 설렜던 마음을 손가락처럼 들어, 그 지점을 슬프게 가리킨다.

#뭄타즈의 이름
이 영화의 인물들이 모두 제각각의 이유로 "설레지만 슬픈" 인물이었지만, 내 눈에 가장 밟힌 인물은 뭄타즈이다. 나는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여성을 사랑하지 않는 방법을 모르므로. 파키스탄에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나로서는, '뭄타즈'라는 이름을 살면서 딱 두 번째 들었다.
처음으로 들은 이름 또한 현실에서 마주한 인물은 아닌데, 무굴 제국 황제 샤 자한의 아내였던 뭄타즈 마할이다. 샤 자한이 태어날 때만 해도 무굴 제국의 수도가 라호르였으니, 아주 인연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비록 그가 사망한 곳이자, 죽은 아내를 기리기 위해 어마어마한 건축 사업을 벌인 곳은 라호르가 아닌 아그라였지만. 그 미친 사랑의 결과물이 타지마할이다. 뭄타즈 마할의 무덤.
샤 자한은 뭄타즈를 몹시 "총애"하여, 전쟁터에도 데리고 다녔다 한다. 14번째 아이를 낳다가 사망한 후,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샤 자한은 타지마할을 짓기 위해 어마어마한 공력을 쏟아붓는다. 벽면에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일일이 대리석을 파고 돌을 박아 넣었으며, 이탈리아처럼 먼 곳에서 수입해온 자재도 있었다. 똑같은 모양의 검은색 건물을 하나 더 지어 두 건물의 그림자가 포개지게 만들고 싶었다는데, 나라가 휘청일 정도의 건축을 보다 못한 아들 손에 끌어내려지며 이 미친 사랑의 공작이 불발되고 만다.
듣다 보면 늘 양가 감정이 드는 이야기이다. 그 나라 백성이었다면 그따위 무덤 보기도 싫었을 것 같고, 그 모든 이야기가 옛 전설처럼 고여 버린 지금으로서는 아무튼 그 도시를 먹고살게 해 주는 랜드마크가 되었으니. 그러나 그 뭄타즈 마할의 이름과 포개지는, <조이랜드> 속 뭄타즈를 생각하면 서글퍼진다. 샤 자한이 뭄타즈를 무척 사랑했다는 것만은 의심할 수 없지만 (누차 강조하지만 "미친" 사랑이다.) 그 사랑이 뭄타즈를 행복하게 했을지는 잘 모르겠기에. 말랄라 같은 프로듀서가 있었다면, 14명의 아이를 낳으며 전쟁터를 따라다니지 않아도 되는 삶이었다면. 시대 정신조차 달랐던 때이니 뭄타즈가 무엇을 원했는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지만, 뭄타즈가 어떤 삶이든 선택할 수 있었다면, 다른 이야기의 가능성이 열려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임은 분명하다.

수백 년 전에 무덤에 갇힌 뭄타즈 마할도, 뭄타즈를 비롯해 각자의 창살에 갇혀 있던 이 영화 속 인물들도, 이 인물들이 표사하는 파키스탄 사회도, 그런 자유로운 선택지의 세상에 갑자기 짠 놓일 수는 없다. 그런 "조이랜드"는 우리에게 없다. 너무 아름답지만 멀고 아득한, 우리의 조이랜드.
그래서 이 영화가 마지막까지 쟁쟁 외친 소리가 며칠씩 여운으로 남아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보지 못한, 가보지 못할 조이랜드가 아득하게 슬퍼서. 말랄라가 어떤 마음으로 프로듀싱에 참여했는지, 어쩐지 조금 알 것도 같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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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1주차, 위클리 씨네 뉴스
안녕하세요.
영화/ OTT 전문 큐레이션 웹 매거진 씨네랩입니다:)
지난 한 주, 국내외 영화계에 어떤 소식이 있었는지
정리해 보는 '위클리 뉴스' 차례가 왔습니다!
그럼, 지난주에 어떤 이슈가 있었는지 살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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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롯데시네마, 2022 아카데미 수상작 상영회 개최
출처 | 네이버 영화
롯데시네마에서 2022 아카데미 수상작 6편을 상영한다고 밝혔다.
작품상을 차지한 <코다>, 감독상을 차지한 <파워 오브 도그>, 남우주연상을 차지한 <킹 리차드>,
각본상을 받은 <벨파스트>, 음악상, 촬영상, 미술상 등 6관왕을 차지한 <듄>,
국제장편영화상을 수상한 <드라이브 마이 카>까지 상영될 예정이다.
본 상영회는 31일부터 4월 12일까지 진행된다.
무주산골영화제, 서울 팝업스토어 운영
출처 | 무주산골영화제 인스타그램
제10회 무주산골영화제를 홍보하기 위해 서울 성수동에서 9일까지 팝업스토어를 운영한다.
팝업스토어에서는 영화제 가이드 매거진, 굿즈샵, 카페 등 다양한 즐길 거리가 준비돼 있다.
팝업스토어는 오전 11시부터 저녁 8시까지 운영된다.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 5년 만에 개봉 확정
출처 | 네이버 영화설경구 주연의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가 4월 27일 개봉을 확정했다.
이 영화는 동명의 연극을 원작을 한 작품으로, 학교 폭력을 다루고 있다.
<미싱타는 여자들>, 1만 돌파
출처 | 네이버 영화1970년대 소녀 미싱사들의 이야기를 조명한 작품인 <미싱타는 여자들>이 1만 관객을 돌파했다.
이 영화는 제25회 부산국제영화제 다큐멘터리 경쟁 부문,
제13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공식 초청되며 화제가 된 작품이다.
해외
넷플릭스, 윌 스미스 주연 <패스트 앤 루즈> 제작 미루다
출처 | Rotten Tomatoes윌 스미스가 지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폭행을 저지르면서 논란이 일어났다.
2일, 넷플릭스는 이러한 이유로 윌 스미스 주연의 <패스트 앤 루즈> 제작을 미루기로 했다.
브루스 윌리스, 실어증으로 연기 활동 중단
출처 | Rotten Tomatoes
브루스 윌리스의 가족은 그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윌리스가 최근 실어증을 진단받았고,
인지 능력에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 이로 인해 연기 활동을 중단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짐 캐리, 은퇴 언급출처 | Rotten Tomatoes짐 캐리는 <수퍼 소닉2> 개봉을 앞두고 홍보를 위해 출연한 NBC 방송에서
<수퍼 소닉2>를 마지막으로 쉬고 싶다며 은퇴 의사를 밝혔다.
씨네랩 에디터 camm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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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 마술을 믿습니까?
지난 5월 6일 넷플릭스의 <안나라 수마나라>가 전세계로 공개되었다. 개인적으로 영화 중에서 '뮤지컬 영화'를 가장 좋아하는 만큼 한국의 뮤지컬 미디어 작품이 어떻게 나올지 너무나 기대가 되었다. 바로 보고 싶었으나 최근 일이 너무 밀려 어제 날을 잡고 1화부터 6화까지 한번에 정주행했다.
앞서 말하자면 드라마는 정말 기대 이상이었다. 뮤지컬 영화(드라마) 특유의 감성과 볼거리를 최대한 잘 살리고자 노력한 것이 눈에 보였다. 네이버 웹툰 원작 <안나라 수마나라>와는 다소 그 분위기가 차이가 있지만 오히려 리메이크된 드라마의 분위기가 더 좋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이번 글을 통해 '뮤지컬 영화(드라마)'의 간단 이야기와 함께 <안나라 수마나라> 간단 리뷰, 볼까 말까 고민하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될 법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 <뮤지컬 영화> 어디까지 아세요?
▶ 사실 뮤지컬 영화는 아주 아주 오래된 장르의 영화이다. 오래된 영화를 좋아하시지 않거나 영화사, 영화학에 크게 관심이 없다면 대부분 <맘마미아> <라라랜드> <레미제라블> 정도로 뮤지컬 영화를 처음 접할 가능성이 큰데, 뮤지컬 영화의 시초는 무려 1927년 <재즈 싱어>이다.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넘어오던 시절, 음악과 효과음에 관하여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던 시기인 만큼 20년대 후반 부터 TV가 대중에게 보급되기 전까지인 50년대 까지는 정말 무수히 많은 뮤지컬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1938)>를 필두로 <환타지아(1940)>, <피노키오(1940)>, <아기코끼리 덤보(1941)>, <아기사슴 밤비(1942)> 등 디즈니사가 뮤지컬 형식의 애니메이션 작품을 최초로 시도한 시기도 이 당시이다.
▶ 다만 50년대 전세계적으로 TV가 차츰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영화 시장 자체가 상당히 침체되는데 이때 당시에 뮤지컬 영화는 특히나 심한 타격을 입는다. 그럼에도 지금까지도 뮤지컬 영화 최고의 작품으로 뽑히는 <파리의 미국인 (1951)>, <Singin' In The Rain (1952)>, <The Band Wagon (1953)>, <7인의 신부 (1959)> 4작품 개봉하여 뮤지컬 영화는 역사로 사라지진 않고 잘 버텨주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뮤지컬 영화 장르 특성상 20 ~ 30대 여성관객이 주를 이룬 터라 매니아틱한 한계가 있어 현재까지 넘어오더라도 다른 장르영화에 비하면 그 수가 현격하게 낮다. 그래서 가끔 한 번씩 나오는 뮤지컬 영화를 보면 개인적으로 환장하는 이유이다...ㅎ
※ 위에 언급된 작품 이야기도 더 디테일하게 하면서 뮤지컬 영화 자체에 대해서 더 길고 자세하게 이야기하고 싶긴한데 ,그렇게 하면 역사 수업마냥 너무 길고 재미 없어져서.. 나중에 반응이 좋으면 한 번 더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
? <뮤지컬 영화> 호불호가 왜 심한거야?
▶ 뮤지컬 영화는 영화가 가진 시, 공간적인 제약 없이 조금 더 사실적으로 시각적 효과를 사용해 흥미를 유발하고 영화를 보면서도 마치 뮤지컬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영화이다. 그러다 보니 영화 이야기에 '노래'와 '안무'가 반드시 혼재되어 줄거리를 전진시키거나 등장인물을 발전시킨다. 즉, 기존 영화에서 당연하게 지켜지던 '인-과'와 '기-승-전-결'의 형태가 흔들리게 된다. 뜬금없이 등장하는 노래와 안무로 갑자기 모든 갈등 상황이 풀린다던가, 너무 슬픈 상황에 갑자기 주인공이 노래 한 곡 불렀더니 내적 발전을 이룬다던가 하는 것이 좋은 예시이다. 보통의 영화라면 갈등 해소를 위한 장치 혹은 사건이 있어야하고, 등장 인물이 내적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그만큼의 시련과 계기가 있어야하는데 '뮤지컬 영화'에는 이게 명확히 없다. 이렇듯 영화 감상에 있어 '서사(이야기)'를 중심으로 전해지는 대리만족이나 간접 체험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이라면 이런 것이 잘 지켜지지 않는 '뮤지컬 영화'는 다소 유치하고 '영화'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수 있다. 애초에 보통 영화는 시청자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뮤직비디오'는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이외에도 뮤지컬 영화를 선호하지 않는 다양한 이유가 존재할 수 있지만 아무래도 '뮤지컬 영화'가 갖는 이 고유의 특징 자체가 가장 크지 않을까 싶다.
▶ 반대로 '뮤지컬 영화'를 굉장히 좋아하시는 분들은 그런 서사 중심의 이야기 전달이 아닌 뮤지컬 영화의 '연출'자체에 관심을 갖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단순히 "노래가 좋아서 뮤지컬 영화 좋아하는 거 아니야?"라고 하기엔 영화 자체의 압도적 연출에 반해 그 '노래'를 들으면서 생각나는 그 '장면'들이 좋은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실제 뮤지컬에서는 할 수 없는 영화라는 미디어 장르에서만 가능한 극한의 상상력을 보여주는 '연출'은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매력적인 특징이다. 영화라는 공간을 정말 영화처럼 쓰는 장르는 당연코 뮤지컬 영화가 최고이다. 현대 영화에선 찾기 힘든 정말 다양한 미장센이 쓰이고 시각적으로 화려한 다양한 색채와 효과가 쓰인다. 오히려 영화라는 편집이 들어가는 미디어 작품에 가장 어울리는 장르가 아닐까. 이러한 뮤지컬 영화의 특징은 어떤 장르영화 보다도 한번 빠지면 쉽게 헤어나오기 쉽지 않다.
▶ 앞서 말했듯이 뮤지컬 영화는 서사나 등장 인물의 감정을 노래와 안무가 이끌어간다. 이 부분 역시 굉장히 매력적인 부분이다. "나 너무 힘들고, 슬퍼."라고 한 마디 대사로 전달되면 되는 주인공의 감정이 노래를 통해 전달하기 때문에 굉장히 서정적이고, 한 마디 대사보다는 길지만 오히려 감정선의 공유는 함축적이다. 이 함축적인 감정의 공유가 영화(드라마)를 보는 내내 지속되고 끊이 없이 관객의 마음을 울린다. 굉장히 뜬금 없는 타이밍에 나오는 '노래'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 굉장히 함축된 타이밍에 나오는 '노래'라는 것이다.
? <안나라 수마나라>는 어땠어? 볼까 말까?
▶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 <이태원 클라쓰>의 연출을 맡은 김성윤 감독님의 작품 <안나라 수마나라>는 굉장히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드라마 자체는 인생에 대한 아름다운 메시지를 담고 있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정서적인 지지를 받는게 쉽지 않은 사회에서 꼭 사회가 정한 기준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단 한 사람만 믿고 지지해준다면 마법과 같은 힘을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메시지 말이다. 너무나 동화같은 소재지만 현대를 살면서 이보다 필요한 게 있을까 싶기도 하다. 드라마는 총 6부작으로 '아이', '일등', '리을'의 관계를 통해 서로 발전하고 치유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이렇게 보니 감독님이 예전에 연출하신 <드림하이>가 생각도 나네요.. 보신 분이 있으시려나ㅋㅋ)
▶ 드라마가 '뮤지컬 드라마'라고 하여 크게 걱정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솔직히 엄청 심하게 '뮤지컬'적 요소가 강하지 않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애초에 김성윤 감독님이 <안나라 수마나라>를 "감성 성장 드라마"라고 규정했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에서 음악은 작품 속 인물의 성장에 따른 순간 순간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요소지 엄청나게 이야기의 중심 축을 이끌고 갈만큼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 개인적으로 '뮤지컬 영화'를 극불호 하시는 분이 아닌 이상 <라라랜드>정도는 엄청 재밌게 보진 않았지만 적당히 재밌게 봤다하시는 분은 한국적인 뮤지컬 드라마의 만남이 너무 어색하진 않으리라 생각한다. 혹시라도, 그래도, 애매하다면 1화 정도 보시고 나머지를 볼지 말지 결정하셔도 괜찮을 것이다. 1화 분위기가 거북하지 않다면 나머지 5개의 회차도 비슷한 분위기이다.
? <안나라 수마나라> 원작과는 어때?
▶ 개인적으로 웹툰이나 소설등으로 원작있는 작품의 영화나 드라마화에서 원작과 비교하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원작의 오래된 팬 분들이 무작정 깎아 내리는 것도 싫고, 매체 자체가 다른 두 작품을 그렇게 비교하는 게 그리 의미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안나라 수마나라>도 원작이 흑백 웹툰인 것에 반해 드라마 내내 상당히 화려한 색감을 자랑하고 빛을 굉장히 신경써서 사용한다. 나아가 각 캐릭터의 성격도 상당히 다르기 때문에 딱히 비교할 것이 없다. (원작과 다르다고 해서 작품이 나쁜 것은 아니지 않나.. 작품이 나쁘면 그냥 작품이 별로인것이지..) 다만 웹툰이든 드라마든 <안나라 수마나라> 속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는 변함이 없다. 개인적으로 원작의 팬이라면 원작과는 이런 차이가 있구나 하면서 감상하셔도 재밌을 것이고 원작을 아예 모르시는 분이라면 이런 소재의 뮤지컬 드라마가 있구나 하면서 감상하시면 좋을 것이다.
▶ 최근 넷플릭스에서 주목받는 작품들이 장르물 중심이었기 때문에 '동화 같은 이야기'를 담은 <안나라 수마나라>를 통해 마음에 따뜻한 위로를 받고 아름다운 연출을 감상하시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추천하는 작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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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예술
마이 뉴욕 다이어리
줄거리
1995년 뉴욕, 대학생인 조안나는 우연히 여행 온 뉴욕에 머물며 작가의 꿈을 키우게 된다.
그러나 당장 수입이 없어 작가 에이전시에 비서로 취업하게 된 조안나.
출근 첫날부터 ‘호밀밭의 파수꾼’ 작가인 샐린저의 팬레터에 정해진 양식으로 답장하라는 지시를 받게 되는데…
'나'의 예술
숨은 의미 찾기
조안나의 곁에는 전남친 칼과 현남친 돈이 있다. 이들은 조안나의 삶의 방향을 바꿀 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들이다. 어느 사람의 곁에 있는지, 그 사람에 대한 감정이 어떠한지에 따라 조안나가 나아가는 방향이 시시각각 틀어지기 때문이다.
현남친 돈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허세에 찌든 예술가라고 할 수 있겠다.
돈은 독립서점을 운영하며 글을 쓰는 작가 지망생이다. 그는 오랫동안 새로운 책을 출판하지 않는 샐린저를 두고 '진짜 작가가 아니다'라고 비난하거나, 유명 잡지사를 비꼰다거나 하는 비판적인 태도를 보인다. 게다가 벌이가 시원찮으면서도 굳이 한 달에 500달러짜리 아파트를, 그 아파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조안나 이름으로 계약하거나, 조안나가 쓴 글을 보며 비웃는 등 여자친구에게는 지속적으로 무시하는 모습을 보인다. 본인이 제 글을 착실하게 쓸진 모르겠으나, 이런 모습들에서 그가 오랫동안 등단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자격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조안나는 그런 돈을 쉽게 떠나지 못한다. 사랑해서가 아니다, 그 모습이 자신과 닮아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조안나는 뉴욕에 우연히 여행 왔다가 이곳에 반해서 정착했다. 자신의 글로 성공하겠다는 일련의 목표를 세웠지만 오래 머물수록 그 목표와는 멀어진다. 작가 에이전시에서 일하면 작가와 가까워질 줄 알았건만, 오히려 글 쓰는 시간만 줄었다.
"넌 글도 안 쓰고 있잖아."
"나도 안 쓰는 건 아니야."
그녀는 남자친구와의 결혼 때문에 뉴욕을 떠나겠다는 친구에게 '넌 진지하게 작가가 될 마음이 없었구나'라며 은근히 비난하는 말을 한다. 그 말에 발끈 한 친구는 '돈은 글을 쓰고라도 있지'라면서 손 놓은 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조안나에게 팩트 폭력을 때려버린다. 그러자 조안나는 변명한다. 자신도 팬 레터에 답장하기 위한 편지들을 쓰고 있다면서.
그녀는 엉뚱한 곳에 집착하기 시작한다. 팬 레터에 답장하는 것이 자신이 이 뉴욕에 정착한 이유라도 되는 것처럼. 이는 돈이 사람들에게 자신이 작가 지망생이라고 떠벌리고 다니는 것처럼 일종의 회피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지금 어떤 모습인지를 직시하는 순간 무너져 내릴 것 같기 때문이다.
조안나는 변명은 점점 더 늘어난다. 글을 쓰고 있냐는 샐린저에게 그녀는 일이 바쁘다고 중얼거린다. 그렇지만 다 알고 있다. 자신이 변명할 뿐임을, 이미 자신이 처음 이곳에 와서 느꼈던 열정과 열의는 다 꺼져버렸음을.
그런 상황에서도 조안나가 돈을 쉽사리 떠나지 못하는 건, 지금이 안락해서이다.
경제적으로 시달리는 것뿐만 아니라, 피나는 노력을 할 자신이 없는 것이다. 이때의 피나는 노력은 단순히 등단이라기보단 자신이 하고자 하는 예술을 제 안에 정착시키는 과정이다. 사실 조안나는 자신이 뭘 하고 싶은지,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조차 모른다. 그저 대학 공모전에 한 번 당선되었다는 것 외에 그녀에겐 내세울 만한 자랑거리도 없다. 도무지 자신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자기 자신조차 모르기에, 차라리 변명하고 외면하는 지금 이 상황이 더 안심되는 것이다.
전남친 칼의 편지를 읽지 못하는 이유 역시 이와 같다.
잠깐 나오긴 하지만 칼은 플루트 연주자다. 자신만의 길을 확실하게 정해두고, 그 방향을 향해 올곧게 나아가는 예술가라고 할 수 있다. 조안나는 한때 그의 곁에 머물며 그에게 의존했다. 칼이 그렇기 때문에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되었다는 일종의 착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하고 싶은 건 다른 사람들 글이나 읽으면서 분석하는 게 아니라, 진짜 내 글을 쓰는 거야."
뉴욕에 머물기 전, 조안나는 제법 안정적인 길을 확보했으나 뉴욕에서 돈을 만난 후 마음이 바뀐다. 막상 불안정해도 자유로운 돈의 모습을 보니 그쪽에 속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는 돈에게 속한 이상, 이미 바뀌어버린 자신을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막상 자신이 명확한 방향을 정해 나아간다는 확신이 없으므로 칼에게 제대로 된 이별 통보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그녀는 이도 저도 하지 못한 채, 중간 어디쯤 꽉 끼어버린다.
조안나는 혼자 있는 시간에 드디어 샐린저의 책들을 접하면서 비로소 자신을 다잡게 된다.
그녀는 칼과 돈에게 의존하던 마음을 바로 세운다. 그들을 떠나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하고자 했던 예술이 무엇이었는지 갈피를 잡게 된다. 그녀는 여태껏 왔던 팬 레터를 읽으며 수없이 많은 질문을 고민하고 그에 대해 한 글자, 한 글자 친절한 답장을 시로 써낸다.
타인과 소통하고 그 안에서 위로와 격려를 건네는 것.
위로와 격려를 또 다른 편지로 써서 세상에 부치는 것.
그것이 그녀가 진정 바라던 예술의 형태였던 것이다.
다 써낸 원고를 잡지사에 갖다주고 나서야 조안나는 샐린저의 주머니에 팬 레터를 넣게 된다. 이제 팬 레터가 제 주인을 찾아가야 하는 때가 됐다고 판단한 것이다. 과연 샐린저에게 들어간 편지는 또 어떤 예술이 되어 나타날까. 그것을 기대하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내' 이야기?
감상평
한동안 멍했다. 상징을 뜯어내서 의미를 해석하려는 시도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그저 가만히 영화를 봤고, 영화를 보고 나오니 어떤 장면도 떠오르지 않았다. 영화 자체가 컷편집이 너무 많은 탓에 뜨문뜨문 기억나는 탓도 있지만, 아마 너무 내 상황과 맞아떨어지는 내용이라서 팩트 폭력 맞고 2000원 추가된 듯.
무언가에 도전한다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진 적이 있었다. 지금 당장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지쳐서 내가 멈춰있음을 인지하기도 힘들 만큼. 그럴 때면 어김없이 우울해졌다. 그리고 글이 좋으면서 싫었다. 애증을 품은 채 내 글을 읽으며, 나는 대체 왜 이러고 사는지를 끊임없이 물었다. 아무도 답해주지 않았다. 심지어는 나조차도.
요즘은 일부러 리뷰나 에세이를 따박따박 날짜 맞추거나 분량 맞춰서 쓰지 않는다. 정말 쓰고 싶을 때만 한다. 이 영화도 내가 보고서 리뷰 쓰고 싶다고 생각해서 봤다. 애초에 리뷰와 에세이 모두 내가 좋아서 시작한 거긴 하지만, 최근 들어 의무적으로 느끼는 것 같길래. 우선순위로 의무를 가져야 하는 건 소설인데 점점 뒷전으로 밀려나는 기분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마이 뉴욕 다이어리’는 인생에 정해둔 우선순위가 밀려나지 않게 항상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울림을 주는 영화였다. 젊은 날을 낭비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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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앵커 / The Anchor, 2022
1. 어디, 안 힘든 사람이 있겠다만...
영화의 주인공 "세라"는 9시 뉴스를 진행하고, 방송국의 간판 앵커로 표면적으로는 잘나가는 "커리어 우먼"의 표상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자들이 득세하는 회의장'에서 유일하게 여성으로 참여한 모습은 "유리천장"을 뚫어냈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이내 "세라"의 입에선 자신의 자리에 치고 올라오는 후배 "승아"를 깎아내리는 말이 나온다.대개, 이런 영화들이 빠지는 "자가당착"에는 "남성"은 나쁘고, "여성"은 바르게 묘사하는 것인데, <앵커>는 이에 빠지진 않는다.
"조직의 구조"로 들어가면서, '갑과 을'이 아닌 '을과 을'이 대립하는 구도를 그려낸다.
그도 그럴 것이 끝을 제외하고는 극에서 "세라"와 "승아"는 직접적으로 감정을 드러낸 적은 없다.
오히려, 그들의 감정을 건드린 건 "앵커"의 자리를 결정짓는 방송국들의 수뇌부들이니까...2. 너만 아니었다면?
"암세포들도 어쨌든 생명이에요."
<오로라 공주, 2013>긍정적이고 부정적인 상투적인 기분을 떠나 1. 숙주와 함께 하며, 2. 숙주의 생명을 다하면 같이 죽으며, 3. 무한히 성장한다.는 점에서 '태아와 암세포'는 꽤 많은 것들이 닮았다.
그런 점에서 극 중. "임신"으로 남편과의 불화를 겪는 "세라"와 "미혼모"의 이야기는 "경력단절 여성(a.k.a. 경단녀)"를 자연스레, 연상시키며 '과연, 여성의 "모성"은 임신과 함께 필연적인가?'라는 질문을 관객들에게 건넨다.강아지와 고양이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키우는 반려동물들의 종류는 날로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치타"는 아직 이뤄지지 못하는데 주된 이유로는 번식을 하지 않는다.
물론, 이 말고도 다양한 원인들이 있겠지만 이들의 서식지부터 드넓은 초원지대라서 천적들로부터 숨을 곳도 없다.
"대학생였지만, 딸의 출생으로 대학을 자퇴했고 남편이자 아이의 아버지의 정체는 몰라 가족들은 전화를 피했다"라며 딸과 함께 생을 달리한 "미혼모"와 함께 '임신'을 포기한 "세라"에게 "임신"은 축복보단 두려움, 생존이었을거다.3. 고통의 정도에 비례하는 재미
이런 사회적인 문제를 "사이코 스릴러"로 접목한 <앵커>의 모습은 재밌다.
이런 이유에는 '이야기의 개연성'과 '배우의 연기력'에 있을 텐데, 필자는 '배우의 연기력'에 좀 더 힘을 실어주고 싶다.
<써니, 2011>의 "본드녀", <한공주, 2014>의 "피해자"까지 맡은 작품 내에서 "천우희"분이 고통을 받으면 받을수록 재밌다고 느끼는 1인이다. (물론, <멜로가 체질, 2019>과 <비와 당신의 이야기, 2021>을 보면 연기의 스펙트럼이 넓다고 봐야겠지만...)
그런 점에서 <앵커>는 "천우희"분의 징크스가 그대로 이어진 작품이고, 그녀의 엄마로 등장하는 "이혜영"분도 버금가는 활약을 보여준다.다만, '이야기의 개연성'에는 아쉬움이 생긴다.
범인이 드러나지 않은 "미혼모"의 이야기는 극 중. "세라"의 "트리거(trigger)"로 운용하는 제법 범위가 넓다.
하지만, 후반부로 진행할수록 "세라"와 그녀의 엄마 "소정"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이야기를 저 멀리 치워버린다.
이를 연기하는 배우들에게 잠시 까먹을 수 있겠지만, 부피가 커진 보릿자루에도 눈길이 자꾸만 가는 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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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과 일본이 같은 재료로 다르게 끓여낸 이 영화
최근 넷플릭스를 통해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라는 영화가 오픈했다. 제목만 보고 감이 왔는데, 이 영화는 일본에서 한 차례 개봉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내용이 같을 텐데, 한국판만 보면 되는 것 아닐까'라고 생각했지만 생각을 고쳐먹고 둘 다 봤다. 결론적으로 두 영화 모두 소재와 플롯 진행만 비슷하고 세부적인 것들은 판이하게 다르게 세팅되어 있는 극본이다. 하지만 두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같은데, 두 영화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알아보자.
1. 등장인물의 배치가 같지만 역할이 다른
이 시나리오에는 공통적으로 핸드폰을 떨어뜨리는 사람이 있고, 그걸 줍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떨어뜨리는 사람 주변에 그를 사랑하는 애틋한 관계의 사람들이 더러 등장한다.
일본판에서는 핸드폰을 떨어뜨리는 것은 남자이고, 그걸 주운 범인은 떨어뜨린 당사자의 폰을 해킹하며 그의 여자친구를 노린다. 성적인 도착증이 있는 남자의 성범죄임을 강조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관계가 핸드폰을 떨어뜨린 마코토와 그의 여자친구 아사미의 굳건한 사랑이다. 아무리 해킹을 통해 범인이 이들을 교란시켜도 결국 이들을 구해내는 것은 이들의 사랑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판으로 오면, 마코토와 아사미 vs 범인의 구도가 달라진다. 애초에 범인이 한 여성이 떨어뜨린 핸드폰을 줍는다. 하지만 피해를 당한 여성인 나미와 범인의 1:1 대결이 눈에 띈다. 일본판에서는 여성 혼자 범인을 상대하는 것은 힘이 드니 그를 지키는 남자가 필요한 것 같았다면 한국판에서는 그저 피해자와 범인의 한판 승부 같은 느낌이 강하다. 그래서였을까 개인적으로는 남녀에 대한 구분 없이 피해자와 가해자의 직접 대결이 돋보이는 만큼 한국판이 한층 더 빠르고 시원한 전개였다고 생각한다.
또한 일본판에서는 엄마의 학대로 인해 성적인 도착이 생긴 범인을 그렸다면, 한국판에서의 범인은 출생 신고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아 그를 사회 안전망으로 이끌어줄 참된 어른이 없었음을 암시하긴 하지만 특별히 성적인 도착증이 보이진 않는다.
2. 범인은 추적해 내는 과정
일본판에서는 범인이 누구일지 추적하는 과정이 메인 플롯이기도 하다. 마지막에 가서야 범인이 누군지 등장하는 전통적인 추리 전개를 보여준다. 마지막에 범인이 밝혀지며 놀라움을 자아내게 되긴 하지만 그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해서 몇 가지 무리수가 보이기도 한다. 범인이 누구인지 추리해 내는 것이 영화를 보게 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에 중간에 범인일 법한 인물들을 낚시하기도 하는데, 그중 하나가 신입 경찰인 마나부이다. 그가 범인과 똑같이 여성의 긴 머리칼에 대한 집착이 있음을 보여주며 '이 사람이 범인일까'하는 의심을 심어주는데, 그 모습이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어 오히려 범인은 아닐 것이라는 확신을 들게 한다. 엄마에게 학대를 당해 사랑받지 못한 유년에 대한 보상 심리로서 여성의 머리카락에 집착하는 모습을 가졌다는 범인과의 공통점으로 범인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경찰이 있다는 설정이 영화의 매력을 반감시키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아사미가 범인을 인식하는 것은 납치되고 나서이기 때문에 아사미와 마코토는 경찰이 출동하기 전까지 그저 범인에게 당하기만 한다.
하지만 한국판에서는 처음부터 범인을 보여주고 시작한다. 그래서 범인이 어떻게 나미를 농락하는지 보여준다. 범인을 초반부터 의도적으로 보여주는데, 그래서인지 오히려 범인의 교활함과 잔인성이 부각된다. 한국판에서는 일본판과 다르게 몰카도 등장하는데, 범인은 철저히 사이버 범죄가 인간의 삶에 해할 수 있는 극단의 상황으로 몰고 간다. 이는 나미의 생활 전선에도 영향을 미치기에 극단에 몰리자, 나미는 범인의 존재를 인식하고 범인을 교란하기에 이른다. 일본판과는 달리 피해자가 주체성을 가지고 자신이 당하고 있는 이 상황을 반전시켜 보려고 발버둥 치는 부분이 매력적인 서사 포인트이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나미를 각성시키는 것은 남자가 아니라 아버지라는 점에서 남녀 간의 사랑이 소재로 한 일본판과는 다르게 한국판에서는 가족 간의 사랑이 두드러진다.
3. 궁극적인 두 영화의 공통점
두 영화 모두 현대 사회에서의 SNS로 다져진 사랑, 신뢰, 우정 등은 알량한 말에 불과하고 끝나는 것은 한순간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유야 어떻든 두 영화 속 범인들은 극단의 외로움에 지쳐 복수 심리로 자신처럼 나미도 철저한 외로움의 세계로 끌고 가려는 의도가 보이고 그 절망의 순간에서 사람을 죽이면서 자신만의 쾌락을 느끼는 사이코패스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결국 SNS의 얄팍한 관계성뿐만 아니라 진정성 있는 1:1 만남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SNS 속 관계도 인정받을 만한 관계라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갈수록 위험해져 가는 사회의 안전망이 되어줄 정도인지 반문하게 되는 영화이다. 두 영화 모두 스마트폰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주며 스마트폰의 분실이 생각한 것보다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누군가 마음만 먹으면 내 정보는 언제든 털릴 수 있는 세상이니까. 그가 마음만 먹지 않았을 뿐인지도 모른다.
4. 총평
둘 중에 하나를 봐야 한다면 한국판만 봐도 되겠다고 생각한다. 한국판이 가진 서스펜스가 더 밀도 있고 일본판 특유의 현대인의 삶을 설명하려는 구구절절한 대사가 없어서 빠르게 몰입할 수 있다. 전개와 결말이 완전히 다른 영화지만 결론적으로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기에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한국판을 추천한다. 아, 그리고 임시완 배우의 연기는 너무 잘해서 짜증이 날 정도였다. 그 맑은 눈이 살인자 연기에까지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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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운디네>: 인어공주에게 다른 남자가 있다면?
도시개발 전문 역사학자이자 박물관 관광 가이드 운디네가 운명적인 사랑이라 믿었던 사람에게 실연당한 후 절망한 그녀 앞에 나타난 산업 잠수사인 크리스토프로 인해 그녀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하는 이야기를 그린 아름답고 신비로운 사랑 영화 <운디네>가 베를린영화제 은곰상 수상에 이어 12월에 열린 유러피언 필름 어워드에서도 여자연기자상을 받는 영예를 누리며 올해의 마지막 아트영화로 개봉 전부터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작품성을 인정받은 영화일수록 이야기의 바탕을 이루는 모티프와 배경지식에 대한 이해가 필수일 때가 많다. 올해 11월에 개봉한 캐나다 이민자의 현실을 그린 영화 <안티고네>는 그리스 신화와 소포클레스의 비극으로 유명한 오이디푸스 왕의 딸 ‘안티고네’ 이야기를 모티프로 해서 만들어졌고, 내년 1월 개봉을 앞둔 북유럽 로맨스 영화 <블라인드>도 안데르센 동화 ‘눈의 여왕’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이런 모티프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으면 영화를 표면적으로만 감상하기 쉽다. 더구나 영화 <운디네>의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은 감독은 문학, 예술, 사회, 역사, 정치의 영역을 넘나들며 영화를 매우 다층적으로 구성하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뛰어난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갖춘 영화 <운디네>를 200% 즐기기 위해 영화에 대한 두 가지 맥을 짚어본다.
영화 <운디네>는 운명이라 여겼던 남자로부터 실연당한 여인 ‘운디네’ 앞에 다른 남자가 나타나면서 벌어지는 사랑과 운명에 관한 드라마로 독일 ‘운디네’ 설화에 기반하고 있다. 운디네는 본디 물의 정령으로 인간과 사랑에 빠져 결혼하면 영혼을 얻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상대가 배신하면 그를 죽이고 다시 물로 돌아가야 하는 비극적 운명을 지녔다.
운디네 설화는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시기에 여러 문학과 예술에서 다양하게 변주되는데 대표적인 작품으로 안데르센의 “인어공주”와 푸케의 중편 소설 “운디네”가 있다. 특히 독일 전후 작가로 유명한 잉게보르크 바흐만의 “운디네가 간다”(<삼십 세>에 수록, 문예출판사)는 영화 <운디네>에 매우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감독은 바흐만 작품에서 남성 판타지인 운디네 설화를 남자 주인공이 아닌 운디네가 직접 이야기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바흐만의 소설 속에서 배신은 남자들이 저지른다. 여성의 관점에서 이 저주를 끊는 것이 올바른 내러티브 방식이라 보았다”라며 여성의 관점을 강조했다.
영화 <운디네>에서 운디네는 자신을 배신한 남자를 죽이고 물로 돌아오라는 운명의 부름을 받는다. 하지만 갑자기 그녀 앞에 새로운 사랑이 나타난다. 과연 그녀의 선택은 무엇인가? 이것이 <운디네>의 중요한 감상 포인트 중 하나이다.
운디네 설화와 함께 알아두면 좋을 두 번째 감상 포인트는 1989년까지 동서로 나뉘었던 베를린의 역사이다. 베를린의 도시 개발 역사는 영화 속 박물관 투어 가이드로 일하는 운디네의 입을 통해 여러 번 언급된다. 페촐트 감독은 통일 이후 무분별한 도시 개발을 비판하며 베를린을 “자신의 역사를 계속 지워나가는 도시”로 규정한 바 있다. 분단의 상징이었던 장벽은 빠르게 뜯겨져 나갔고 그 자리에 거대한 기차역과 번쩍이는 쇼핑몰이 “흉물스럽게” 들어섰다. 베를린의 과거는 신화와 동화가 살아 숨 쉬는 세계였지만 지금의 베를린은 과거를 무자비하게 지워버리는 공간으로 쉽게 옛사랑을 버리고 새로운 사랑을 찾아가는 현대적 욕망과도 오버랩된다. 따라서 동화의 세계에서 온 운디네가 현대의 베를린에서 버림받는 것은 숙명과도 같다. 그녀는 자신의 숙명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맞서 싸울 것인가? 이것이 <운디네>의 영화적 긴장과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지점이다.
아름답고 슬픈 로맨스이면서 동시에 동화적 상상력으로 현대 사회를 비판하고 있는 영화 <운디네>는 12월 24일에 개봉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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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청춘적니> 메인 예고편
17살, 빈 교실에서 우연히 마주친 '링이야오'에게 첫눈에 반한 '뤼친양' 그의 순수한 고백에 '링이야오' 역시 호감을 느끼며 두 사람은 사랑을 쌓아 나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사랑이 전부일 거라고 생각했던 10대와 달리 20대에 들어선 두 사람은 점차 현실적인 문제들로 지쳐가고, 마침내 두 사람이 사랑한 지 10년이 되는 날, '뤼찬양'은 '링이야오'를 위해 운명적인 선택에 기로에 서게 되는데.. "내 청춘 속 누구보다 빛났던 너, 세상 끝에서 다시 함께하게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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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어시스턴트> 30초 예고편
꿈에 그리던 영화사에서
보조 직원으로 일하게 된 ‘제인’
어떤 일도 능숙하게 처리하는
그녀의 일상은 평범해 보이지만,
사소한 사무실 정리부터 상사의 개인적인 스케줄 관리까지
하루 종일 몰아치는 잡다한 업무에 지쳐간다.
그러한 일상이 반복되던 중
어느 날, 신입사원으로 채용된 한 여성이 찾아오면서
회사 내 부조리함을 마주하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