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BBITGUMI2024-10-22 12:54:34
이토록 친밀한 존재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 <보통의 가족>(2024)






다들 이야기한다. 부모만큼은 자식을 믿어야 한다고. 하지만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때로는 거짓말을 하고, 그걸 알게 된 부모는 속상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온전히 아이를 믿는다는 건, 사실 말처럼 쉽지 않다. 어디까지 아이를 믿어야 할까? 아이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어느 정도까지 그 잘못을 추궁하고 훈계해야 할까? 부모라면 누구나 맞닥뜨리는 어려운 문제다.
영화 <보통의 가족>은 부모가 자식을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를 깊이 있게 탐구하는 작품이다. 제목에 '보통'이 들어가지만, 사실 영화의 주요 인물들은 사회적 지위와 좋은 직업을 가진 상류층이다. 이들의 자녀는 좋은 교육을 받고 최고의 환경에서 학창 생활을 보내고 있다. 영화의 원작은 네덜란드 작가 헤르만 코흐의 “더 디너”로, 원작과는 여러 차이점이 있지만 상류층 두 가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점에서 영화는 나름 의미 있는 선택을 했다. 이들의 지위는 자녀들의 법적 문제조차 덮을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 지점에서 부모로서의 역할과 자녀의 미래에 관한 고민이 복잡하게 얽힌다.
[첫 번째 감정] 형 재완의 안정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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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로서 성공한 재완(설경구)은 법적 문제가 생긴 상류층 자녀를 변호하며 형량을 최소화하려 애쓴다. 그가 변호사로서 내리는 판단에는 상대방이 저지른 일이 얼마나 나쁜지에 대한 윤리적 판단이 포함되지 않는다. 그는 단지 법적 테두리 내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고 그 방향으로 일을 진행한다. 그 과정에서 재완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냉정하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임무를 수행한다. 이러한 태도는 일을 진행하는 데 있어 그에게 안정감을 부여하며, 그 안정감은 자신의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힘을 마련해 준다.
딸이 노숙자 살인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재완은 평소 자신이 사건을 대하던 방식 그대로 상황을 처리하려 한다. 즉, 법적인 문제를 최소화하고 자신의 딸이 문제에 휘말리지 않도록 안정감을 유지하면서 상황을 해결하려 한다. 수십 년간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재완에게 이러한 방향성은 매우 자연스러운 선택이었고,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머릿속에 이미 그려졌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사건이 드러나지 않도록 노력하며, 굳이 밝히지 않으면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는다.
영화의 중반까지 재완은 이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무던히 애쓰며 동생 재규(장동건)와 재규의 아내 연경(김희애)과 계속해서 충돌한다. 재완에게는 도덕적인 판단보다는 안정적인 판단이 더 큰 힘을 발휘하는 순간들이 반복된다.
[두 번째 감정] 재규의 도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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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규는 종합병원의 유명한 의사다. 그는 어려움에 처한 환자를 돕고, 그 환자가 경제적으로 어려워 병원비를 내지 못할지라도 일단 치료하는 것을 우선시한다. 또한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를 집에서 모시는 인물로, 도덕성과 책임감을 가진 따뜻한 성격을 지녔다. 그의 아내 연경 또한 여러 봉사 활동을 하는 따뜻한 인물이다. 이 부부는 기본적으로 도덕성을 갖춘 사람들로 그려진다.
하지만 아들이 노숙자를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재규와 연경의 의견은 갈라진다. 재규는 아들을 신고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연경은 아무도 모르니 묻어버리자고 주장한다. 이 과정에서 이들이 가지고 있던 단단한 도덕성은 균열을 일으킨다. 연경은 그 도덕성을 계속 깨뜨리려 하고, 재규는 이를 붙잡고자 애쓰지만 아들의 눈물을 보며 결국 무너지고 만다.
영화의 중반까지 재규는 도덕적인 것을 지키자는 입장이었으나, 아들과의 대화를 통해 점점 흔들리게 된다. 중반 이후에는 재완이 도덕적 방향으로 나아가고, 재규는 안정적인 방향으로 변모한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아이들의 태도가 큰 영향을 미친다.
[세 번째 감정] 아이들의 도덕 불감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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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를 저지른 혜윤(홍예지)과 시호(김정철)는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와 틀에 박힌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아이들이다. 혜윤은 부모 몰래 좀 더 과감하게 행동하고, 시호는 소심하게 억눌린 생활을 이어가지만 결국 그 억눌림이 폭발하게 된다. 이들이 노숙자를 공격한 사건은 흐릿한 CCTV에 담겨 뉴스에 보도되지만, 그 누구도 이들을 의심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모들이 알아보고 추궁하는 상황이 된다.
영화 전반에 걸쳐 혜윤과 시호는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재규와 연경은 시호에게서 반성의 기미를 보았다고 느낀다. 이는 관객들이 쉽게 동의할 수 없는 부분으로, 혜윤은 전혀 반성하지 않으며 완전한 도덕 불감증을 보인다. 그 영향으로 시호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된다. 이들이 이렇게 된 것은 상류층 부모의 힘 때문일까, 아니면 원래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까?
이들은 정말 반성을 할 수 있을까. 영화를 보는 내내 그들에게 도덕적인 성향이 있을지를 궁금해하며 바라보지만, 적어도 관객들에게 그들은 그저 범죄를 저지른 철없는 10대로 보일 뿐이다. 하지만 부모들은 그들을 객관적 시선으로 바라보기 보다는 그들이 태어난 이후의 모든 것들을 판단해서 그걸 상황속에 녹여내 바라본다. 그러니까 전혀 객관적인 평가를 하지 못하게 된다. 결국 아이들의 도덕불감증이 부모의 도덕불감증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도덕은 마비된다.
영화가 제시하는 아이러니
<보통의 가족>은 후반부로 갈수록 두 형제의 태도 변화가 폭발력을 발휘하는 영화다. 도덕적인 재규가 자신의 신념에 반하는 행동을 하고, 안정적인 재완이 그 안정을 깨려는 행동을 한다. 두 사람의 모든 선택은 자녀를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관객은 깊은 고민에 빠진다. 만약 우리도 이들처럼 사회적 지위가 있다면, 재완처럼 자녀를 위해 범죄를 덮어줄 수 있을까?
영화는 지금 이 시대에 충분히 벌어질 법한 사회적, 가족적 딜레마를 던진다. 자녀가 범죄에 연루되었을 때, 우리는 얼마나 도덕적인 결정을 할 수 있을까? 아무도 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정말 도덕적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또한 영화는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점점 쪼개어지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가족에 대한 굴레가 얼마나 강력하게 유지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영화 속 부모들은 자녀를 위해 무엇이든 하려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 선택들은 때로는 가족의 결속을 위태롭게 만든다. 현대 사회에서 가족 구성원들은 각자의 삶과 가치관을 중시하게 되면서, 과거처럼 절대적인 신뢰와 희생을 기반으로 한 가족의 모습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서로를 보호하려는 이들의 모습은, 우리가 얼마나 이 관계를 유지하려 애쓰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모습은 가족이란 굴레가 무너져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강력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아이러니를 드러낸다.
이 영화는 허진호 감독의 오랜만의 복귀작으로, 2019년 <천문: 하늘에 묻다> 이후의 작품이다. 장동건과 설경구가 연기한 두 형제의 변화는 영화의 중후반부를 강하게 이끌며, 그들의 연기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색감의 대비와 캐릭터 간의 대립을 통해 사회적 문제를 드러내는 방식도 훌륭하다.
영화 <보통의 가족>은 최근의 사회적 문제를 가족의 이야기로 풀어내며, 우리에게 도덕과 안정 중 무엇을 선택할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지금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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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념품을 사고 내 이야기를 하고, <3000년의 기다림>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3000년의 기다림 Three Thousand Years of Longing, 2022 제작
호주 외 / 판타지 외 / 108분
감독: 조지 밀러
기념품을 사고 내 이야기를 하고, <3000년의 기다림>
삶은 나아가는 것이다. 나아가야 하는 '일'이다. 어떻게 가야 하는지는 각자의 몫으로 남겨둔다. 그게 사람이자, 인간을 대표하는 개인으로서 갖는 숭고한 의무다. 거창한 의식이기도 하고 과제도 맞지만, 그렇다고 과하게 무게 잡거나 겁먹을 필요는 없다. 삶과 삶을 잇는 방식을 찾는 건 내 몫이니까. '각자의 몫'에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에 관한 수단과 방법이 전부 포함되어 있다는 것만 잘 알고 있으면 된다. 그래야 타인에게 나를 공유해도 쉽게 꺾이지 않고 그와 함께 할 수 있다. 인생은 내가 '어떻게' 하고 있다는 걸 내 옆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만으로도 바쁘게 흘러간다. 공유가 공존이 되는 지점이다. 필요한 건, 헤쳐 나가기 바쁜 마음에 지치지 않는 활력을 주는 것이다. 활력, 이미 우린 오래전부터 그것을 탐구하고 또 원해 왔다. 적당히 행복하고 충분히 여유 있는 삶을 사는 '알리테아'마저도, 사실은 진심으로 가슴 깊숙이 무언가를 원하고 있는 것처럼. 지니가 말했듯, 갈망이 없는 인간은 없다. 인간에게 갈망은 결코 제거할 수 없는 내면의 주머니이자 삶의 수단과 방법이다.
영화 <3000년의 기다림>은 그것을 '이야기'라고 말한다.
출처: <3000년의 기다림> 스틸컷 (다음)알리테아는 서사학자로 수많은 이야기를 해석하고 풀어내 사람들에게 그것들을 전시하듯 설명하며 살고 있다. 모든 이야기에서 하나의 공통된 이야기를 찾는 일을 홀로 진행하고 있는데, 이는 그녀에게 남은 마지막 직업적 쾌락이자 참견쟁이 옆집 할머니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안전장치다. 겉으론 냉철하게 이야기가 가진 한계를 논하지만, 자기 일을 누구보다도 사랑하며 이야기를 귀히 여긴다. 다만 쉽게 흥분해 자신을 이야기 홍수에 던지지 않을 뿐이다. 현재 그녀는 자기 의지대로 삶의 항로를 정해 흘러가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원하는 기억과 원하지 않는 기억을 구분해, 후자를 상자에 넣고 봉인한 뒤 앞으로의 희망과 현재의 기쁨만을 누리고 사는 사람, 그게 바로 알리테아다.
정령 지니의 등장은 우연을 가장한 영화적 필연이다. 그걸 알면서도 우린 딴지 걸지 않는다. 정말 기가 막힌 우연이라 인식한다. 영화가 가진 본연의 매력이기도 하지만, <3000년의 기다림>이란 창구로 보면 새롭다. 영화가 감동과 즐거움을 위한 영상이 아니라 이야기 그 자체가 되어버리는 걸 경험하기 때문이다. 알리테아가 기념품을 사는 순간, 우린 영화를 산다. 그녀가 유리병을 씻을 때 우린 지니를 피부로 느낀다. 영화가 이야기로 읽히고 들리고 보이는 시작점이다. 그럼 어떤 이야기인가?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다. 지혜가 될 수도, 경고, 위로, 나아가 동반자가 될 수도 있다. 중요한 점은 이야기가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필수 요소임을 영화(이야기)가 다시 한번 친절하게 상기시킨다는 점이다.
더구나 <3000년의 기다림>엔 거부할 수 없는 묵직하면서도 유연한 리듬이 있다. 그냥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보다 살아 숨 쉬는 이야기를 할 줄 아는 사람을 더 좋아하는 것과 같다. 모든 현상을 이성적으로,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시대에 감성이 충만한 동화는 환영받을 수밖에 없다. 흔히 얘기하는 '옛날 옛적에-' 감수성이 병 속에서 나온 지니의 거대한 발바닥으로 실체화되다니,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우연인가.
출처: <3000년의 기다림> 스틸컷 (다음)
정령 지니의 등장으로 알리테아는 자신이 단칼에 끊어냈다고 자부하던 악몽을 떠올린다. 어쩌면 그 과거를 잊는 게 그녀의 진짜 갈망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여튼 알리테아는 끝까지 고집스럽게 결혼, 유산, 이혼이란 간단한 키워드로 자기의 어둠을 나열한다. 별것이 아닌 건 아니지만, 이미 넘어온 파도이며 다신 넘을 일 없는 파도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세상에 자신의 고통을 단 몇 단어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물론 그녀는 분명 여기에 존재하는 인간이지만, 그 누구도 알리테아를 아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알 수 없는 자, 이름이 있지만 아무도 진짜 이름을 부를 수 없는 여인. 알리테아는 스스로 이야기를 쓰지 않겠다고 결정했기에 여전히 고여있다. 지니는 차가운 이성으로 무장한 그녀에게 자신의 장대한 흔적들을 쭉 늘어놓는다. 늦은 밤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듯이, 정적인 언어에 말맛을 추가하고 그때 그 감정을 흠씬 버무린다. 인간이 가진 갈망에 대해, 그 갈망에 빠진 인간을 사랑한 초월적인 존재에 대해, 그리고 마침내 알리테아에게 요구한다, 나의 이야기를 위해 소원을 빌어 너의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라고.
알리테아는 정령에게 사랑을, 아니 시바와 제페르를 향한 그만의 정열을 소원한다. 지금까지 살아있고, 존재하는 사랑의 역사를 통째로 원한 걸 보면, 그녀의 진짜 소원은 외로움과 허무, 고통을 말끔히 잊게 해줄 충만한 사랑임이 틀림없다. 자신의 자유를 포기할 정도로 헌신적인 그의 사랑은 알리테아에겐 악몽을 담는 또 다른 상자였다. 그날 밤, 지니는 소금 통에 자발적으로 들어가 알리테아와 런던으로 떠난다.
출처: <3000년의 기다림> 스틸컷 (다음)
하지만, 모든 이야기 끝엔 무시무시한 경고장이 붙는다. 이를 서사학자 알리테아가 모를 리 없다. 점차 몸이 약해지는 지니를 보며 그녀는 깨닫는다. 이 이야기의 진짜 끝을 말이다. 이 세계가 버거운 지니에게 필요한 건, 알리테아로부터의 자유뿐이다. 정령의 이야기는 정령이 주인공이다, 알리테아의 소설 주인공이 그녀 자신인 것처럼. 그리고 주인공은 언제나 자기 의지로 마지막 선택을 하고, 새로운 시작을 위해 결정한다. 알리테아는 지니에게 어디든 당신이 있던 곳으로 가 자유롭게 살라고 소원을 빈다.
다시 그녀의 어둠, 지하 공간이 등장한다. 지니의 흔적을 봉인한 상자를 들고 지하로 내려가는 알리테아. 지니의 상자가 지하에 선반에 자리한 순간, 한 챕터를 마무리하듯 불이 딱 꺼진다. 그 힘찬 신호탄으로 두 인물의 이야기는 다시 흘러가기 시작한다. 알리테아는 이제 안다, 어떤 것이든 상자에 평생 봉인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오랜 머뭇거림 끝에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 그녀는 글을 쓰며, 자신을 찾아오는 지니와 순간순간을 함께한다. 그의 기운을 느끼고 그의 사랑을 온전히 받으면서, 그것이 앞으로 펼쳐질 자기 삶의 충분한 원동력임을 선언한다.
출처: <3000년의 기다림> 스틸컷 (다음)
이야기는 이야기로 끝난다. <3000년의 기다림> 역시 3000년의 기다림으로 끝난다. 거대한 대서사시로 느껴지는 이 웅장함과 원대함이 서늘함을 전달하기도 하지만, 이야기의 힘을 아는 자에겐 거부할 수 없는 숨결로 남는다. 소원을 빌고 싶은 마음을 앞지른 설렘과 카타르시스 덕이다.
삶, 활력, 소원, 이야기. 뒤집어도 무방하다. 이야기, 소원, 활력, 삶.
<3000년의 기다림>은 전부 다른 우리의 노선을 존중하면서,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사실 하나를 끄집어낸다. 삶의 탄생과 죽음, 그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한 웅덩이까지 단 하나의 줄로 꿸 수 있는, 끊기지 않는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줄기 바로 계속 되뇌고 읊조렸던 '이야기'다. 결국 삶과 이야기는 하나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죽음에서 벗어나 죽지 않는 이야기로 계속 살아 숨 쉬는 것이다. 늘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인간에겐, 잠들지 않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풀어낼 인간이 필요하다. 이 인물 혹은 이야기, <3000년의 기다림>과 같은.
그녀와 그처럼, 우리도 언제 어디서든 기념품을 사고 내 이야기를 하면 된다.
어떤 이야기든 좋다, 다만 다시 시작할 마지막이 오면 끝에 꼭 이 말을 덧붙이자.
"내 이야기는 실화다. 하지만 동화라 해야 믿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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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대한 감동을 초과하는 퀴어 영화
7★/10★
사실 〈퀴어 마이 프렌즈〉의 소개글을 보고 ‘적당한’ 감동을 기대했다. 보수적인 기독교 공동체에서 성장한 감독 아현과 남성 동성애자 강원, 강원의 커밍아웃으로 세계가 흔들리는 듯한 충격을 받은 아현, 그리고 카메라를 들고 7년간 강원의 모습을 담는 아현……. 몰랐던 세계를 조금씩 알아가며 서로를 이해하고 마침내 행복해지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그러나 〈퀴어 마이 프렌즈〉는 기대한 감동을 초과한다. 이 영화가 퀴어‧우정을 다루는 영화의 전형성을 비껴 가기 때문이다. 핵심은 ‘실패’다. 강원과 자신이 지나온 혼란의 시간을 갈무리한 뒤, 아현은 퀴어문화축제 무대에서 공연하는 강원의 모습으로 영화를 마무리하려 계획했다. 여러 어려움을 자긍심으로 승화하는 강원의 공연과 이를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카메라에 담는 아현의 모습은 영화의 완벽한 결말, 꽤 괜찮은 해피엔딩이 되어줄 터였다. 하지만 정신적‧심리적 문제로 힘겨워하던 강원은 무대에 서지 못한다. 그리고 〈퀴어 마이 프렌즈〉는 여기서부터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우정과 성장이란 무엇인지를 질문한다.
퀴어문화축제에 참석한 아현이 축제 참가자들과 반대편의 혐오세력을 번갈아 바라보는 장면이 있다. 아현은 생각한다. ‘강원이 아니었다면 나는 어디에 서 있을까?’ 그녀가 편안함과 당위성을 느끼며 성장해온 세계에서 동성애는 죄악이었다. 친한 친구였던 강원의 커밍아웃이 아니었다면 아현은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오히려 확신에 찬 표정으로 길 건너편에서 축제 참가자들에게 소리를 질렀을지도 모른다. 아현이 그들과 달랐던 건 딱 하나, 강원이 그녀의 친구였다는 점이다. 즉, 아현은 강원과의 관계맺음으로 자신이 속했던 세계를 '배반'하고 세계를 확장해왔다.
이 확장은 아현과 강원 관계의 ‘역전’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대학원을 졸업했지만 30대가 되도록 번듯한 직장을 구하지 못했고 결혼도 하지 못한 아현은 ‘정상적인’ 성인에게 으레 기대되는 삶의 궤적에서 자꾸 멀어지는 중이다. 그런 아현의 서사는 미국 시민권 취득해 미군으로 복무하고, 애인과의 오랜 파트너십을 형성한 강원의 서사와 대비된다. 이성애와 동성애라는 차이에만 주목했을 때는 삶의 무게추가 아현 쪽으로 기운 듯 보이지만, 구체적 삶의 조건을 쌓아가는 과정에서는 이 관계의 균형의 뒤집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강원은 삶에 온전히 안착하지 못한다. 명확한 이유를 알 수 없는, 아마도 퀴어라는 정체성과 관련이 있을 정신적‧심리적 문제가 계속 그를 붙잡기 때문이다. 요컨대 둘은 모두 ‘실패’하고 무너진다.
서로 다른 두 인물의 실패는 기묘한 방식으로 포개진다. 강원이 퀴어문화축제 무대에 서지 못한 날 밤, 둘은 지금껏 하지 못한 말을 털어놓는다. ‘속 깊은 대화’라기보다는 ‘격정적 토로’에 가까운 대화였다. 아현은 영화감독과 강원의 친구라는 두 정체성이 혼동되는 상황, 즉 영화가 아니었다면 자신이 강원을 살뜰히 챙기지 않았을 거라는 의심에 반박한다. 강원은 미칠 것 같이 힘들고 혼자 있기만으로도 벅찬데 카메라와 아현을 자기 삶에 들여야만 하는 상황에 부담을 표한다. 이 장면에서 ‘두 실패한 자’들은 자신의 바닥을 내보인다. 그리고 ‘실패’를 토대 삼은 둘의 우정은 더는 끊어낼 수 없을 정도로, 축축하고 질척하게 다져진다.
만약 강원이 아현의 기대대로 퀴어문화축제에서 멋지게 무대를 마무리하고, 영화가 거기서 끝난다면 어땠을까? 물론 그것만으로도 적당할 것이다. 모든 퀴어가 불행할 필요는 없고, 자신이 겪은 문제를 춤으로 승화해내는 강원의 모습은 분명 감동을 자아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피엔딩’은 아현과 강원의 현실을 '왜곡'한다. 그들은 현실에서 불안하고 괴롭기 때문이다. 그날 하루의 공연이 모든 것을 반전시켜 줄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패’의 순간에 천착한다면? 아현과 강원, 그리고 영화가 애초에 계획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과정은 개별 관객이 가지고 있을 실패의 순간과 접속하며 그들의 위치를 ‘관람자’가 아닌 ‘참여자’로 전환해낸다. 그리고 영화는 망해버린 자리, 남은 건 서로밖에 없는 상태에서 끙끙대며 버텨낼 방법을 함께 고민하자고 제안한다. 이것이 바로 〈퀴어 마이 프렌즈〉가 기대를 초과하는 감동을 자아내는 지점이다. ‘모든 실패한 자’들이 아현과 강원의 여정에 동참할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다. ‘나에게 너의 세계를 열어줘서 고마워’라는 아현의 내레이션은 관객이 강원과 아현에게도 똑같이 건넬 수 있는 말이다. 불행한 현실을 비트는 해피엔딩도 좋지만, 그런 현재마저도 긍정하는 ‘실패’에 관한 영화도 좋다. 〈퀴어 마이 프렌즈〉가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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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공포 시리즈물의 전설, 12년 만의 귀환!
한국 공포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여고괴담> 시리즈를 기억하시나요?
영화 <여고괴담> 시리즈는 여고에서 벌어지는 각기 다른 미스터리한 사건들을 다룬 한국형 학원 공포물로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 정통 공포 영화로 자리매김하며 국내 관객들의 많은 주목과 사랑을 받은 작품입니다. 최강희, 박예진, 공효진, 송지효 등 지금은 너무나 유명하지만 당시에는 신인이었던 역량있는 여배우들의 스타 등용문 역할을 한 것으로도 유명한데요. 1998년 <여고괴담> 1편을 시작으로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여고괴담 3 - 여우 계단>, <여고괴담 4 - 목소리>가 연이어 제작되었고, 2009년 <여고괴담 5 - 동반자살>을 끝으로 한동안 여고괴담 시리즈를 볼 수 없어 팬들의 아쉬운 목소리가 들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길고 길었던 아쉬움을 뒤로 하고 드디어 올 여름, 한국 웰메이드 공포 영화 <여고괴담> 시리즈의 새로운 부활을 알리는 <여고괴담 여섯번째 이야기: 모교>가 오는 6월 개봉을 확정지었다는 소식이 들려 화제입니다.영화 <여고괴담 여섯번째 이야기: 모교> 포스터
영화 <여고괴담 여섯번째 이야기: 모교>는 과거의 기억을 잃은 채 모교의 교감으로 부임한 '은희(김서형)'가 학교 내 문제아 '하영(김현수)'을 만나 오랜 시간 비밀처럼 감춰진 화장실을 발견하게 되고 잃어버렸던 충격적인 기억의 실체를 마주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번 작품은 특히 2009년 <여고괴담 5- 동반자살> 이후 12년의 기다림을 마치고 돌아오는 새로운 시리즈로서 그 의미가 남다른데요. 그동안 국내 영화계에서는 좀처럼 만나볼 수 없었던 한국 공포 영화 장르의 부활을 통해 침체되어 있는 극장가에 활력을 불어 넣어줄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한국 공포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여고괴담> 시리즈는 매 작품마다 학교를 무대로 신선한 소재와 사회에 화두를 던지는 메시지, 그리고 혁신적인 촬영 기법을 선보여 왔습니다. 또한 스타 등용문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많은 배우들을 배출한 바 있는데요. 이번 <여고괴담 여섯번째 이야기: 모교>는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사건과 잃어버린 기억의 실체를 마주하게 되면서 서서히 조여오는 공포를 밀도 있는 서사와 강렬한 서스펜스로 그려낼 예정입니다. 특히 <SKY 캐슬>, <마인> 등 아우라만으로 분위기를 압도하는 믿고 보는 배우 김서형과 최근 화제에 화제를 몰고 온 드라마 <펜트하우스>로 강렬한 열연을 선보인 김현수의 호러 케미로 한시도 긴장을 놓을 수 없는 극강의 공포를 예고해 더욱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한국형 공포 영화가 그리워지는 올 여름, 오랜 기다림 끝에 돌아온 <여고괴담 여섯번째 이야기: 모교>를 통해 공감 가득했던 오싹한 재미를 또 한번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씨네랩 에디터 J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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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포용일까, 포섭일까?
중국 영화 당국이 11월 17일 수요일, 할리우드 개봉작인 <듄>과 <007 노 타임 투 다이>를 지역 극장에서 한 달 추가 상영하기로 결정하며,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가 2달 내내 세계 최대 영화 시장에 걸려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10월 22일 개봉작인 <듄>은 12월 22일까지, 10월 29일 개봉작인 <007 노 타임 투 다이>는 12월 29일까지 상영될 예정인데요. 세계적으로 극장이 살아나는 연말 상영이 확정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입니다.중국 시장에서 영화들은 기본 한 달 동안 상영되는 것이 원칙이지만, 흥행이 보장된 영화의 경우 두 달까지 연장될 수 있는데요. 그 이상의 장기 상영은 '선전 영화'를 위해 자리를 내어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2020년 7월부터 2021년 4월까지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약 3달 동안 상영되었던 할리우드 대작들 덕분에 중국 시장도 한 숨 돌릴 수 있었 던 건 사실인데요. 이 시기에 할리우드 영화들이 중국 시장 매출 회복에 도움이 된 것이 이번 연장 상영에 기여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듄>과 <007 노 타임 투 다이>가 팬데믹 이후 할리우드 첫 연장 상영작의 주인공이라는 것은, 2021년 5월 이후 그 어떤 영화도 중국 시장에서 1달 이상 상영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는데요. 심지어 지난 5월 21일 개봉한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가 중국 시장에서 2억 400만 달러를 벌어들였음에도 불구하고, 7월 1일 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 영화 상영을 위해 한 달 만에 극장에서 내려가기도 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8월 말 개봉한 <프리 가이> 역시 9,480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충분한 흥행 성적을 달성하였음에도, 10월 1일 국경절로 인하여 극장에서 내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 동안 세계 최대 시장이 된 중국 시장에서 할리우드 대작들이 연장 상영을 따낸 것이 제작사 입장에서 반가운 소식임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듄>과 <007 노 타임 투 다이>가 연장 상영 기간동안 기타 중국 영화들에 밀려 충분한 스크린 수를 확보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되기에 큰 매출 상승을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현재까지, <듄>은 중국에서 세계 매출의 약 10분의 1에 해당하는 금액인 3,900만 달러 (약 2억 4900만 원)의 수익을 올렸으며, <007 노 타임 투 다이>의 경우, 전 세계 매출 7억 달러 중 6,290만 달러를 중국 시장에서 벌어들였는데요. 이는 중국 시장에서 각각 흥행 수입 영화 7위와 4위에 해당하는 기록입니다.
향후 더 커질 가능성이 큰 중국 시장인 만큼, 할리우드 대작들이 중국 작품들 사이에서 얼마나 큰 팜을 가져갈 지 그 귀추가 주목되는 바입니다.
위드코로나와 함께 다양한 영화들이 극장을 찾아주고 있는 요즘
극장 영화들과 함께 영화로운 나날 보내시길 바랍니다.
씨네랩 에디터 Camm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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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카> 진짜 바다 괴물을 찾아가는 성장담 <루카> 리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바다 밖 세상을 궁금해하면서도 두려워하는 바다괴물 소년 '루카(제이콥 트렘블레이)'는 우연히 만난 친구 ‘알베르토(잭 딜런 그레이저)’를 따라 물 밖으로 첫 발을 내딛는다. 인간세상 전문가를 자칭하는 알베르토에게 걷는 법 등을 배우며 이탈리아 리비에라의 아름다운 해변 마을을 구경하는 루카는 잔뜩 흥분하지만, 동시에 언제든 물에 닿아 인간의 모습에서 바다괴물로 돌아갈까 걱정하며 마음을 놓지 못한다. 그러던 중 새로운 친구 ‘줄리아(엠마 버만)’를 만나 수영, 사이클, 파스타 빨리 먹기 3종 대회에 참가하게 된 루카와 알베르토. 그들은 우승 상금으로 꿈에서도 바라던 스쿠터를 사서 자유롭게 멀리 여행할 희망에 부풀어 오른다.
픽사의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 <루카>에서는 여러 영화들의 그림자가 느껴진다. 당장 루카가 지상 마을의 모습을 흥미롭게 관찰하는 장면이나 지상과 수중 사람들 간의 갈등과 대립이 기본 구도인 것은 제임스 완 감독의 <아쿠아맨>을 떠올리게 한다. 바다 괴물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상이한 태도를 묘사하는 점은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셰이프 오브 워터>와도 유사점이 있다.
다만 <루카>의 중심 플롯이 결국 한 소년의 성장담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루카>는 티모시 샬라메를 세계적인 스타덤에 올려놓은 작품,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와 특히 닮았다. 단지 두 소년이 자전거를 타면서 나른한 햇살이 내리쬐는 이탈리아의 오후를 즐기는 공통의 장면이 있기 때문은 아니다. 두 영화 모두 한 소년이 다른 소년, 소녀와 사랑과 우정을 쌓고, 그들로부터 새로운 세상과 그 세상 속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는 성장담을 다루는 점이 같아서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엘리오는 마르치아와 올리버 둘 모두와 사랑에 빠진다. 그와 마르치아의 사랑은 청소년기에 접어든 소년만이 느낄 수 있는 달콤한 첫사랑이다. 한 소년이 성인으로 발돋움하면서 더 넓은 세상을 깨닫게 되는 상징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그와 올리버의 사랑은 달콤함 사이에 감춰져 있는 씁쓸한 맛의 사랑이다. 특히 성적인 긴장감이 도드라지는 그들의 사랑은 첫사랑의 상흔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는 한 소년이 넓어진 세상 안에서 진짜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영화 속에서는 동성애라는 성적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루카>에서 루카와 알베르토, 루카와 줄리아의 우정은 엘리오, 마르치아, 올리버 간의 사랑과 다르지 않다. 마르치아와 사랑이라는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올리버와 함께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엘리오처럼, 루카도 알베르토와 지상 세계를 경험하고 줄리아와 함께하는 시간을 통해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목표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당장 알베르토는 루카를 바다 밖으로 이끌어 준 첫 친구이고, 그래서 루카는 세상을 알베르토의 시선을 공유한다. 엘리오와 마르치아의 사랑이 호기심 왕성한 십 대의 사랑인 것처럼 루카의 마음속은 그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 탐험가의 흥분으로 가득해진다. 한편 루카에게 줄리아는 올리버와 같은 존재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사랑의 아름다움을 알려준 올리버처럼 줄리아는 바다 괴물과 사람이라는 정체성의 충돌로 괴로워하던 루카에게 새로운 길을 알려준다. 그녀는 바다괴물이 갈 수 있는 학교로 그를 초대하면서 두 정체성이 공존할 수 있음을 알려주며 그의 성장을 돕는다. 이러한 주인공 삼인방의 관계성 덕분에 <루카>는 특히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와 닮았다.
그러면서도 <루카>는 디테일한 측면에서 애니메이션다운 시각적 상상력을 뽐내며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그림자를 벗어난다. 주인공의 성장을 보여줄 때 이 영화는 주인공의 외적 변화 혹은 깊은 상실감이나 아픔이 담긴 표정 등을 비추지 않는다. 대신 매 순간마다 주인공의 세계 그 자체가 확대되는 모습을 펼쳐 보인다. 예를 들어 알베르토와 함께 오토바이로 세계를 여행하는 루카의 상상은 오토바이와 인간 사회에 대한 정보가 늘어갈수록 세부 묘사가 조금씩 달라진다. 루카가 표현하는 밤하늘과 우주가 달라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알베르토와 만난 직후 루카의 하늘에는 별과 달 대신 물고기가 떠 있지만, 줄리아에게 우주에 대한 설명을 들은 후 그의 밤하늘은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
특히 루카의 세계가 변하는 과정은 성장담에 독특한 시각적 재미를 더할 뿐만 아니라 영화의 메시지와 관련된 중요한 대목을 보여주기에 더욱 인상적이다. 루카의 상상과 밤하늘의 변화는 그의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태도를 반영한다. 그는 만나고 느끼고 배우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자신의 세계에 접목시키면서 인식을 확장시킬 줄 안다. 그에게는 자신이 모르는 것, 자신과 다른 것에 대한 경계나 두려움보다 그것들을 알아가려는 의지와 배웠을 때의 기쁨이 더 크기 때문이다. 이는 루카의 세계가 확장되는 첫 발걸음을 이끌어 주지만 정작 본인은 분리된 두 세계를 연결하려는 의지가 약한 알베르토, 바다 괴물을 사냥하기 위해서 이리저리 날뛰는 에꼴레의 모습과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이다. 더 나아가 바다괴물 본래의 모습을 한 채 제노바에 있는 학교로 향하는 그의 모습이 감동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이처럼 그 어떤 장벽, 경계, 장애물도 없는 루카의 태도와 세계는 <루카>가 괴물 영화의 기존 문법을 뒤엎는 스토리텔링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 된다. 많은 괴물 영화는 인간의 시점에서 낯선 존재인 괴물이 누구인지를 정의하고, 정의에 따라 괴물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을 주된 내용이자 캐릭터들의 목적으로 삼는다. 앞서 언급한 <셰이프 오브 워터>만 하더라도 양서류 인간이 여주인공인 엘라이자에게는 사랑의 대상이고, 미국 정부에게는 탐구의 대상이자, 그를 연구하는 스트릭랜드 박사에게는 증오의 대상으로 비추어지며, 이러한 태도의 차이는 갈등을 유발한다.
이러한 괴물 영화의 공통된 태도의 뿌리는 리처드 커니가 쓴 <이방인 신 괴물>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대부분의 이방인, 신, 괴물은 인간 심리의 심연에 존재하는 균열의 증거"라고 이야기한다. 또한 그에 따르면 괴물과 같은 존재는 "친숙한 것과 낯선 것, 같은 것과 다른 것 사이에서 우리가 어떻게 분열되는지 말해준다". 더 나아가 그는 인간은 낯선 것에 대한 경험을 이해하고 적응하는 대신, 주로 그들을 배제하고 아웃사이더로 치부하며 거부해왔다고도 덧붙인다. 야만인을 뜻하는 그리스 단어 'βάρβαρος(barbaros)'가 그리스어를 쓰지 않아 의사소통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인 이방인으로부터 유래했듯이. 그 결과 어떠한 정의로도 붙잡히지 않고, 우리의 정체성과 관련된 규범들에 도전하며, 세계에 대한 이해의 한계에서 탄생하는 존재인 괴물은 여러 신화와 이야기를 거쳐 영화에 이르기까지 살아 숨 쉴 수 있다.
<루카>는 이러한 괴물 영화의 오래된 기제를 뒤집는다. 인어와 용을 닮은 바다괴물을 주역으로 삼고 인간을 이방인으로 만들면서 친숙함과 낯섦, 같은 것과 다른 것, 주체와 타자의 관계를 뒤바꾼다. 이렇게 괴물과 인간이 서로의 자리를 맞바꾼 상황에서 주인공 루카의 행보는 긴 시간 동안 인간이 낯섦과 다름을 대한 방식과는 사뭇 다르다. 위험한 괴물이자 증오의 대상으로 알려진 인간이지만, 루카는 함께 자전거를 타고 파스타를 먹으면서 인간을 탐구하며 그들의 세계에 적응해 나가고 줄리아와 줄리아의 아빠를 도와주면서 공존할 수 있는 공감의 대상으로까지 인식한다.
이러한 루카의 개방성 및 포용성은 괴물, 곧 타자와 이방인이라면 무조건 배척하는 에꼴레와 같은 일반 사람들의 고정관념, 편견 및 자기중심적 태도와 대조를 이루며 보는 이들마저 낯부끄럽게 한다. 또한 자신과 다른 이들을 두려워하고 내쫓으려 하는 이들이야말로 바다괴물인 것은 아닌지를 성찰하게 만들면서 다양성의 공존이라는 가치를 강조하는 메시지에도 힘을 싣는다. 커니의 표현을 빌리자면 <루카>는 바다 괴물을 통해 "우리 안의 지옥을 끄집어내고,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영화인 것이다.
이처럼 인간 외부의 시점으로 인간 세계를 관찰하는 작업은 사실 픽사 애니메이션에서 낯설지 않다. 픽사는 괴물들의 회사, 살아 움직이는 장난감, 사람의 기분을 조종하는 감정들, 사후 세계의 영혼들, 천방지축 물고기, 요리하는 쥐 등 다양한 관점에서 일상의 이면을 들여다보기 때문이다. 가장 최근에 개봉했던 <소울>만 하더라도 일상적인 삶의 의미를 무너뜨리면서 진짜 삶의 목표에 대해 재고할 기회를 준 바 있다. 이렇게 영화를 보는 관객 스스로의 일상과 삶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성찰적 메시지는 아이들과 어른들을 모두 매혹시키는 픽사만의 특별함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픽사의 전작들과 비해 <루카>의 완성도는 더러 아쉬움이 남는다. 우선 루카가 인간과 지상 세계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 나가는 과정을 기발하고 세심하게 묘사한 것에 비해 그의 주변 인물들이 인식을 바꾸는 과정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철인 3종 경기를 기점으로 루카의 가족들, 친구들, 마을 사람들은 서로를 향한 적개심을 누그러뜨리는데, 이 과정은 픽사가 흔히 보여주는 반전 없이 예상대로 평이하게 전개된다. 그러다 보니 애니메이션 영화임을 감안하더라도 결말에서 맥이 풀리는 것을 막을 길은 없다. 또한 통상적으로 픽사 영화 속 주인공이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모험을 펼치는 것과 달리 주인공이 특정 장소에 적응하는 이야기를 다루다 보니 미야자키 하야오의 느낌이 짙어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루카>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힘과 감동에 비하면 연출이나 스토리텔링 상의 아쉬움은 그리 크지도 않고, 길게 남지도 않는다. 모든 장벽과 경계 없이 다양함이 동등하게 공존하는 세계를 만들어가는 루카의 성장담과 엔리코 카라로사 감독의 전작, 단편 애니메이션 <라 루나>의 연장선상에 있는 듯한 아름다운 영상미는 모든 단점을 가리고도 남기 때문이다.
A(Acceptable, 무난함)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셰이프 오브 워터>가 픽사스럽게 만난 9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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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이 아닌 일제강점기를 다루다, 영화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
한창 논문을 쓰던 무렵 예능프로그램인 <선을 넘는 녀석들>을 보다가 영화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이 일제강점기 만주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실 당시에 영화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을 패러디한 것만 보고 영화를 제대로 보지 않아서 작품의 시대상이 일제강점기라고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제대로 한 번 봐야지 하며 영화를 시작했다.
영화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 시놉시스
딱 한 놈만 살아남는다!
1930년대, 다양한 인종이 뒤엉키고 총칼이 난무하는 무법천지 만주의 축소판 제국 열차에서 각자 다른 방식으로 격동기를 살아가는 조선의 풍운아, 세 명의 남자가 운명처럼 맞닥뜨린다.돈 되는 건 뭐든 사냥하는 현상금 사냥꾼 박도원, 최고가 아니면 참을 수 없는 마적단 두목 박창이, 잡초 같은 생명력의 독고다이 열차털이범 윤태구. 이들은 서로의 정체를 모르는 채 태구가 열차를 털다 발견한 지도를 차지하기 위해 대륙을 누비는 추격전을 펼친다.
정체 불명의 지도 한 장을 둘러 싼 엇갈리는 추측 속에 일본군, 마적단까지 이들의 레이스에 가담하게 되고… 결과를 알 수 없는 대 혼전 속. 과연 최후의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한국영화에서 서부극이라니
한국영화에서 서부극은 살펴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카우보이들이 말타고 돌아다닐 황야도 없을뿐더러 그 영화의 분위기가 한국 정서와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라는 배경은 영화 속에서 많은 것을 허용해줄 수 있는 시대적 배경이라는 생각이 이번 영화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을 보면서 느껴졌다.
너무나도 뼈아픈 시대인 것은 사실이지만 서부극의 배경조차 되지 않는 한국에서 시선을 만주로 조금만 돌려서 그곳에서 서로를 죽이는 총잡이들의 이야기를 다룰 수 있는 시대적 배경이 되어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영화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은 그 영화 자체보다 이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일제 강점기라는 시기가 어떻게 활용되는지 그 궁금증이 생기게 만들어준 작품이었다.
일반적으로 국내 미디어에서 잘 다뤄지지 않는 소재인 재즈 음악이라던지 중세풍 귀족 사회의 모습이라던지 심지어 영화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과 같은 서부극의 배경처럼 과도기적이었던 그 시기에서만 유일하게 발견되는 다양한 사례들을 연구해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절 타령을 여기서도 해볼까?
우리나라 영화에 항상 바라는 점은 겨울이라는 영화적 문법에 갇히지 않는 다양한 계절감의 영화를 보고 싶다는 것이다. 무너가 암울한 시기의 작품을 볼 때면 비슷한 계절감에, 비슷한 내용에 소재와 주인공만 약간씩 달라지는 느낌이어서 뭔가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있다.
그런데 영화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 작품은 서부극을 표방하다보니 그간 일제강점점기 작품들 중에서 보지 못한 이 건조함을 보고 굉장히 새로운 시도에 좋게 다가왔다. 다른 역사 작품들에 비해서 그 무게감이 확실히 떨어지고 말도 안되는 컨셉으로 맥락과 개연성이 왜 저러나 싶긴 하지만 그래도 이런 새로운 계절감으로 시대적 배경을 표현한 그 첫 시도에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OST가 영화의 반은 살린 작품
한국판 서부극을 표방했기에 서부극이 사실 개연성이 없긴 하다. 갑자기 총들고 찾아와서 총격전을 벌이고 잠시 한 눈 팔면 사람들이 다 죽어있고, 저 남자들의 가오는 무엇이며,, 그래서 서부극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처음 볼 때부터 나는 이 영화에 개연성은 기대하지 않는다! 하며 다짐을 굳건히 하고 봤지만 사람 마음이라는게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보는 내내 이 맥락없음은 무엇인가? 너무 영화가 캐릭터 빨인데? 이러면서 되게 지루하다가 갑자기 흘러나오는 OST! OST가 영화를 살렸다. 영화 자체에서는 딱히 긴장감이나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데 OST가 순간적인 몰입도를 굉장히 높여주는 역할을 제대로 해주고 있었다.
솔직히 내용만 보면 볼게 없었던 영화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 하지만 일제강점기라는 시기가 영화라는 미디어에서 얼마나 다양성을 제공하는지 잘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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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감독을 찾아서_#1] 이미지의 영감은 어디에서 오는가? (with. 김승원 감독)
🎙️ Episode 1. 영화 감독 김승원 편 ‘우리의 감독을 찾아서’는 단편 영화 감독을 만나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팟캐스트입니다. 영화를 통해 어떤 말을 하고 싶었는지, 영화란 무엇인지,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술이란 무엇인지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눠봅니다.
- 김승원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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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옴표 필름
📍 instagram @ddaompyo.film 📍 YouTube @ddaompyofilm 📍 ddaompyofil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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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라는 매게체가 주는 시각적 청각적 황홀경의 최대치
*해당 영상은 씨네 랩 크리에이터로 활동하며 10월 27일 개봉하는 작품 ‘아네트’의 돌비시네마 시사회를 다녀온 뒤 제작한 영상입니다. 예술가들의 도시 LA, 오페라 가수 `안(마리옹 꼬띠아르)`과 스탠드업 코미디언 `헨리(아담 드라이버)`는 첫눈에 서로에게 이끌린다. 함께 인생을 노래하는 두 사람에게 무대는 계속되지만, 그곳엔 빛과 어둠이 함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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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공식 예고편
"우린 모두 낮과 밤을 오가며 산다” 정신건강의학과에 근무하게 된 간호사 다은이 만나게 된 세상과 마음 시린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 지금 잠시 찾아온 어두운 밤을 지나 '다시' 햇살 가득한 아침을 맞이할 수 있을까요? 넷플릭스 시리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11월 3일, 오직 넷플릭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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