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플래쉬> (데미언 셔젤, 2014)
자기 증명을 향한 외력과 내력의 주도권 전쟁
<위플래쉬>는 2014년에 개봉한 데미언 셔젤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영화로 평단과 대중을 사로잡고, 단연 빛나는 두 배우 J.K. 시몬스와 마일스 텔러의 연기력과 잠재력을 확인할 수 있었던 작품이다. 데미언 셔젤의 장기인 영화의 리듬에 재즈의 역동적인 에너지를 부여하는 것에 있어서, 그리고 음악을 중심으로 인물의 성장과 그 과정에서의 서스펜스를 그야말로 박진감 넘치게 담았다는 점에서 필자도 현재까지 나온 데미언 셔젤의 최고작이자 한 해 극장에서 만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영화라는 데에 이견이 없다.
필자는 이 작품의 스릴러적인 요소가 이 작품을 ‘아주 재밌는 영화’로 만드는데 크게 한몫했다고 생각하지만, 누군가 내게 이 영화가 어떤 영화냐고 묻는다면 [‘앤드류’(마일즈 텔러 분)가 파멸로 향해 가는 반성장 영화의 클라이맥스]라고 하고 싶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위플래쉬>의 메인 서사를 따라가되, 마지막 장면을 포함해 짚고 넘어가 볼만한 장면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해볼 것이다. <위플래쉬>는 관객에게 크게 어렵게 다가오는 영화도 아니기에 구태여 주요 장면들에 달아보는 해설같다는 느낌이 들어 재미 없을 것 같다. 따라서 이 영화를 ‘파멸로 향해 가는’이라고 한만큼 엔딩 이후의 ‘앤드류’도 한번 해볼 생각이다. 다만 그 뒷얘기는 꽤나 삐딱한 이야기일 것 같다. 마지막으로 <위플래쉬>의 마지막 장면을 설명하기 위해 영화 속 재즈 음악이나 무대 공연에 대해 나름의 조사를 하면서 작성했으나, 이에 대한 지식이 너무 부족하기에 전문적인 지식을 알고 계신 분들의 수정과 첨언을 부탁드린다.
오프닝 장면부터 짚어봐야겠다. <위플래쉬>의 첫 번째 쇼트는 연습하는 앤드류를 복도에서 열려있는 연습실을 향해 롱 쇼트로 바라보다가 달리 인으로 점차 가까이 가서 컷으로 플레처 교수(J.K. 시몬스 분)가 등장할 때까지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영화는 이보다 더 이전에 이미 시작된다. 암전된 상태에서 점차 템포를 올려가는 드럼 소리를-그리고 엔딩에서 다시 듣게 될- 들려주며 제목 ‘위플래쉬’가 나오는 게 첫 번째 쇼트다. 이 오프닝이 사실상 영화 <위플래쉬>가 어떻게 진행될지 알려주는데, 템포를 한계까지 끌어올리는 드럼 소리는 앤드류가 광기에 사로잡혀가는 과정, 이 이야기의 전체적인 리듬과 일치한다. 이를 인지하고 다시 이야기를 진행하자. 앤드류는 플레처 교수 앞에서 연주를 보여준 뒤 무시당하고, 아버지와 영화를 보러 간다. 앤드류의 아버지는 앤드류가 음악을 공부하는 것을 것을 아마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 같다. 앤드류는 플레처 교수를 처음 만났지만, 그가 어떤 사람인지 이미 들어봤고, 그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선망을 품고 있다.
이후 단체로 연습이 진행 중이던 강의실에 플레처 교수가 난입한다. 플레처 교수는 두 번째 등장에서 그의 카리스마와 동시에 얼마나 청각이 예민한 사람인지를 보여준다. 이때 앤드류는 본인이 연주를 잘했는지, 못 했는지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뜬금없이 플레처에게 교내 최고인 스튜디오 밴드에 들어오라는 제안을 듣는다. 앤드류는 아무튼 ‘그에게 간택을 받았다’라는 자신감으로 평소 마음에 두던 영화관 아르바이트생에게 데이트를 신청하기도 하지만, 불행하게도 앤드류의 파멸은 이제부터 진짜로 시작된다.
앤드류는 잘못 알려준 시간 때문에 지나치게 일찍 도착한 뒤 9시 약 5분 전에 단체로 몰려오는 밴드 팀원들을 보게 된다. 모든 것이 초짜인 앤드류의 시선에서 이들은 교내 최고의 밴드의 일원인 만큼 제각각은 분주하지만 꽤 프로페셔널해 보인다. 이를 빠르고 리드미컬한 편집으로 보여주면서, 9시가 다가오고 있다는 시계의 쇼트는 이 분주한 와중에 긴장감을 부여하고, 9시가 된 순간 플레처 교수는 이 장면의 리듬을 완전히 박살 내면서 등장하여, 모든 것은 플레처 교수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군생활 중 생활관에 등장한 대대장을 방불케 하는 이 장면은, 뒷 이야기를 위해 한 번 이렇게 설명해보겠다. 플레처 교수는 자신이 위치한 공간의 사람을 포함한 모든 것을 자신의 ‘템포’에 맞춘다. 오로지 그의 지시대로만 움직이는 이 밴드는 플레처의 등장 이후 분주함은 사라지고 조화를 이룬다.
플레처가 밴드를 장악하는 방식, 사람을 다루는 방식, 모든 것을 자신의 템포에 맞추도록 자극하는 방식은 대체로 정서적 학대다. 필자는 이 글의 부제를 ‘자기 증명을 향한 외력과 내력의 주도권 전쟁’이라고 했다. 여기서 외력이란 플레처 교수의 자극이고 내력은 앤드류의 욕망과 감정이다. 플레처 교수는 사람을 자극하는 면에서, 사람을 자신의 템포에 맞추도록 다루는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꽤 사람 좋아 보이는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음악을 하는 순간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까지 불사하는 분노의 화신으로 변한다.

이 대목에서 짚고 가야 할 대사는 “찰리 파커가 위대한 뮤지션이 된 건, 조 존스가 그의 머리에 심벌즈를 던졌기 때문이야”라는 대사다. 그리고 꼭 그 말을 지키기 위해서인 듯, 앤드류의 머리를 향해 의자를-심벌즈와 꼭 닮은- 집어던진다. 앤드류는 이 자극에 엉망으로 무너졌다가, 그의 템포에 맞추기 위해 말 그대로 피나는 연습을 시작한다. 이때부터 앤드류의 감정이라는 내력이 끌려 나오기 시작하는데, 피를 흘리면서 연습하는 장면의 무시무시함은 거의 호러 영화를 방불케 한다. 그리고 앤드류는 태너의 악보를 잃어버리는 아주 우연한 사건으로 인해 밴드의 메인 드러머 자리를 꿰차게 된다(이 대목은 이 영화의 몇 안 되는 미스테리로, 영화가 정확한 설명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필자는 앤드류가 악보를 버렸다고 생각한다).
현재까지 그럭저럭 괜찮은 미래가 기대되는 와중에, 영화 초반에 암시되었던 새로운 외력이 등장한다. 앤드류의 가족 중엔 예술을 하는 사람이 없고, 신입생치고 훌륭하다고 할 수 있는 앤드류의 행보를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다. 심지어 앤드류의 친아버지조차도. 이 무렵부터 자기 증명을 향한 앤드류의 내력은 점차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커지게 되는데, 이를 보여주는 것은 세 가지다. 즐겁다기보단 어딘가 살짝 나사가 빠진 듯한 눈으로 연주하는 앤드류를 담은 로우 앵글, 그리고 코넬리가 자기 자리를 뺏었다는 생각에 보이는 격렬한 감정적 반응, 여자친구와의 결별 선언이다. 이쯤부터 앤드류는 자기 증명 말고는 그 어떤 가치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그는 드럼을 부수고 욕설을 내뱉으며 연주를 해나가는데, 이때 주의 깊게 봐야 할 반복되는 쇼트가 있다. 처음으로 피 흘리며 연습하는 장면에서 외력을 상징하는 것처럼 심벌즈에 밀려있던 앤드류의 얼굴이 이제는 완전히 나와 있다. 지금의 앤드류를 움직이는 동력은 분노라는 내력이다.
첫번째 피나는 연습 장면.

두번째 피나는 연습 장면
영화 중반부까지를 외력과 내력으로 간단하게 설명해보겠다. 플레처 교수는 앤드류는 자극하면서 자신의 템포에 맞추도록 외력을 가하며, 자극받은 앤드류는 그 템포에 맞출 수 있도록 내력을 끌어올린다. 그리고 템포의 기준은 점점 높아지면서 자극의 강도 또한 강해지고-플레처 외의 요인과 함께- 앤드류의 내력은 성취욕이라기보단 분노에 훨씬 가까운 부정적인 감정으로 변하면서 더 강력해진다. 그러니까 <위플래쉬>는 오프닝에서 점점 빨라졌던 템포처럼, 앤드류의 외력과 내력이 엔딩을 향해 달리는 지옥의 밸런스 게임이다.
다음으로 나오는 플레처와 앤드류(외 2명)의 광기 어린 연습 장면은 이 지옥의 밸런스 게임을 한 장면으로 압축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1분에 330 더블 타임 스윙’ 템포의 기준을 제시한 뒤, 내력과 외력의 밸런스가 맞을 때까지 플레처는 계속 외력을 가한다. “빠르게! 더 빠르게! 멈추지 마!”
플레처의 템포에 맞춘 앤드류에게 벌어진 아주 뜻밖의 사건. 영화 <위플래쉬>의 전체의 리듬은 이 우연한 사건들을 통해 변주된다. 첫 번째는 물론 악보를 잃어버리는 사건이었고, 이 사건은 앤드류가 자신을 증명할 기회가 되었다. 두 번째 사건, 타이어 펑크로 경연에 늦는 불상사는 첫 번째처럼 플레처와는 전혀 관계없는 사건으로 본인이 간신히 얻은 기회에서 추락하는 계기가 된다. 간신히 내력을 끌어올려 맞춘 ‘더블 타임 스윙’을 보일 기회가 사라지려 하자, 앤드류는 피투성이로 무대에 오르는 기괴한 선택을 한다. 이 대목은 한 사람이 얼마나 망가지고 있는지 보여주며, “넌 끝이다”고 선언하는 플레처에게 앤드류는 분노를 표출한다. 왜? 한계치까지 오른 앤드류의 내력, 분노가 마땅히 분출되어야 할 지점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제적당한 앤드류가 마주한 뜻밖의 진실(사건이 아니다). 플레처 교수가 눈물까지 보이며 들려줬던 음악의 주인공 ‘션 케이시’는 사고사가 아니라 자살을 선택한 것이고 그 원인은 플레처 교수의 지도를 받던 시절부터 나타난 불안과 강박 증세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확정되는 사실은 플레처 교수는 앤드류에게만 이런 외력을 행사한 것이 아니라-심벌즈나 의자를 던졌다는 말로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앤드류 이전의 앤드류’가 있었으며, 그는 자살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앤드류의 반응이 묘하다. 앤드류는 자신이 당한 가혹 행위에 관해 ‘그는 잘못이 없다’며 그를 감싼다. 왜? 그를 폭행할 정도로 분노를 표출해 제적을 당했으면서?
플레처 교수는 앤드류에게 외력으로 다가왔으나, 앤드류가 음대에 입학하면서 필요로 한 것은 자애로운 아버지와 같은 정신적 지지였다. 그러나 앤드류의 친아버지는 앤드류의 진로를 지지해주는 것이 아니라 늘 탐탁지 않아 했고, 아들이 다른 사촌들처럼 예술 외의 진로를-그가 진정 ‘재능’으로 생각하는- 택하길 바랐다. 앤드류는 친척뿐 아니라 자기 직계가족인 아버지로부터 그의 행보에 대한 지지를 전혀 받을 수 없었고, 지옥 같은 자극을 줄지언정 그의 재능을 발굴하고 ‘Whiplash’, 채찍질해주는, 가끔은 격려를 통해 따뜻한 사람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플레처 교수를 자신의 아버지로 택한 것이다. 그래서 그런 일을 겪었음에도 그를 감싸주는 행위를 하지만 자신을 아끼는 친아버지를 보고 끝내 앤드류는 그를 고발하는 데 동참한다. 여기서 이 장면을 플레처를 고발하는 앤드류, 어린 시절 영상을 보는 앤드류, 개인 연습실을 정리하는 앤드류로 교차편집했다. 나눠서 보여줘도 이상한 것이 없는 이 장면을 교차편집함으로써 얻어지는 효과는 무엇일까?
영화 <위플래쉬>, 그리고 앤드류를 중심으로 한 내력과 외력의 주도권 경쟁엔 ‘부자관계’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교차편집 장면을 부자 관계를 통한 설명으로 바꿔보자. 끝없이 채찍질 받으며 자신도 성장했던 애증의 아버지 플레처를 고발하는 앤드류,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고 한때 자신을 지지했던 친아버지와 함께했던 어린 시절의 자신을 보는 앤드류, 애증의 아버지 플레처를 배신하고 원래의 아버지에게 돌아가는 앤드류. 한 장면에서 현재, 과거, 미래의 부자 관계를 충돌시키면서 앤드류가 느끼는 공허감을 전달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에서 음악을 관둔 앤드류가 위치한 환경은 온갖 소리들로 가득 차 있고 화려했던 학교와 무대와 다르게 조용하고 공허하다. 공간과 청각 감각의 대비. 목표나 자기 증명을 향해 자신을 자극하던 외력도 없고 자신을 이끌었던 내력도 사라진 상태의 앤드류. 사실상 앤드류는 자신의 성취를 향한 갈망을 거세당한다. 물론 이쯤에서 영화가 끝날 리가 없다. 여기서 영화가 끝났다면 관객들은 스크린에 팝콘 통을 집어 던졌을 것이다. 영화 <위플래쉬>의 마지막 뜻밖의 사건. 세 번째 사건이 다시 이 영화의 리듬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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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류는 길을 걷다가 아주 우연히 작은 재즈 바의 공연에서 플레처 교수를 다시 만난다. 애증의 대상이었던 플레처가 직접 보여주는 연주. 강압적인 선생이-혹은 아버지가- 아닌 재즈를 사랑하는 뮤지션의 면모. 앤드류는 자신이 배신한 과거의 아버지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플레처는 바를 나서려는 앤드류를 붙잡고 자리를 마련한다. 플레처는 앤드류에게 자신이 강단에서 물러났음을 말하며 자신이 학교에서 했던 역할은 학생들이 ‘한계를 뛰어넘도록 몰아붙이는 일’이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대사가 퍽 인상적이다. “세상에서 가장 해로운 말은 ‘그 정도면 잘했어’(Good Job.)야.” “제2의 찰리 파커라면 좌절하지 않지.” 플레처는 재즈가 죽어가는 이유가 사람들이 쉬운 것만 하려고 해서 그런 것이고, ‘버드’ 찰리 파커와 같은 스타 탄생엔 조 존스의 심벌즈처럼 한계를 뛰어넘도록 몰아붙이는 자극이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마음이 매우 복잡해지는 앤드류에게 재즈 페스티벌의 공연 자리를 제안하며, 코넬리는 앤드류를 자극하려고 데려온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상 ‘네가 제2의 찰리 파커이길 기대하고 있다’와 같은 발언. 플레처는 사람을 가지고 노는 데는 도가 튼 인간이다.
다시금 가슴이 불타오르는 듯한 앤드류. 앤드류는 스튜디오 밴드에 들어가게 된 그날처럼 니콜에게 전화를 건다. 카메라는 방문 프레임 안에 앤드류를 두고 바라보다가 니콜이 새로운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밝히자 클로즈업으로 전환된다. 전화가 끊어지고도 계속 앤드류를 바라보고 있는 롱테이크. 관객들은 앤드류의 얼굴에서 무엇을 읽어야 할까? 앤드류는 한 번 선택한 일은 되돌릴 수 없다고 깨달은 것이다. 자신이 꿈을 선택하면서 그 외의 것들은 모두 버리겠다고 선언한 순간, 그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랑과 꿈을 두고 양자택일하는 주제는 데미언 셔젤의 이후 영화들에서 계속 반복된다)
JVC 무대는 누군가의 커리어 혹은 인생을 아주 긍정적으로나 아주 부정적으로 바꿀 수 있는 큰 무대다. <위플래쉬>에서 첫 번째 사건은 기회였고, 두 번째 사건은 몰락이었다. 그렇다면 세 번째 사건은? 세 번째 사건은 둘 다다. 앤드류에겐 기회지만 플레처에겐 앤드류의 몰락이다. 자신을 고발한 사람이 앤드류인 것을 눈치챈 플레처는 이 업계에서 앤드류를 완전히 끝장내려고 부른 것이다. 플레처가 이제 바라는 것은 앤드류의 성장이 아니라 파멸이다. 이 동기라기보다 악의에 가까운 행동은, 앤드류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그리고 가장 강력한 외력이 될 것이다. 물론 앤드류는 플레처가 지휘하는 ‘Upswingin’’을 전혀 따라가지 못하고 연주를 망친다. 그리고 플레처의 한 마디 “아무리 생각해도 넌 아니야.” 플레처가 기다리던 제2의 찰리 파커가 아니라는 말이자, 너는 더 이상 관심 대상이 아니라는 배신에 가까운 아버지의 선언. 앤드류에게 이보다 더 끔찍한 말이 있을까? 공포에 가까운 관객의 시선을 뒤로한 채 앤드류는 무대를 나서고 친아버지는 앤드류를 안아주며 “집으로 가자”고 말한다. 그러나 앤드류는 이 말을 듣고 눈빛이 바뀌어 다시 무대로 돌아간다. 지나치게 자기 계발 격언으로 사용되곤 하는 니체의 말,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가 떠오르는 장면이다. 플레처의 악의 가득한 외력은 앤드류를 끝장내지 못한 것일까? 혹시 앤드류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곧 죽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 아니었을까? 그 소리도 화려함도 없는 공허한 세계로 돌아가는 것은 플레처가 가하는 그 가혹한 외력보다도 견디기 어려운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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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앤드류는 자신을 배신한 애증의 아버지에게 플레처에게 복수해야 한다. 앤드류의 내력은 이제 분노라기보단 집념에 가까워 보인다. 앤드류가 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복수는 자신이 제2의 찰리 파커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증명은 플레처의 인정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백미이자 마지막 장면의 진행은 이러한 것들을 염두에 두고 따라가야 한다.
앤드류는 플레처의 지휘 사인 없이 혼자서 연주를 시작하고 옆에 있는 콘트라베이스부터 자신의 신호에 따르게 한다. 앤드류는 플레처에게 복수하기 위해 모든 것이 그에게 맞춰진, 플레처의 템포, 플레처의 자장 바깥으로 나가버린다. 강의실이라면 뭐라도 던졌겠지만, 공식적인 무대이므로 플레처는 이미 시작된 연주에 따르면서 ‘팔이나 휘두르며 박자를 맞추는’ 지휘자가 된다. 우리는 앤드류가 그리도 지독하게 연습한 더블 타임 스윙, Caravan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다. 과연 프로 밴드답게 환상적인 무대를 선보이고, 연주가 만족스러운 플레처는 이 무대에 합세하기로 한다. 이때 앤드류와 플레처, 다른 말로 앤드류의 내력과 외력이 얼마나 조화로운지는 데미언 셔젤 감독의 시그니처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 두 화면이 주고받는 패닝 쇼트로 알 수 있다. 그리고 앤드류와 플레처 둘 다 굉장히 즐거워 보인다. 플레처는 연주를 마친다는 사인을 보내는데 앤드류는 멈추지 않고 독주를 이어 나간다. 왜? 앤드류에게 아직 할 일이 더 있는 것일까?
앤드류는 이 밴드의 주도권을 플레처로부터 빼앗아 오긴 했지만, 아직 자신이 제2의 찰리 파커라고 증명하지는 못했다. 따라서 이어지는 앤드류의 드럼 솔로 독주는 자신이 제2의 찰리 파커라고 애증의 아버지 플레처에게 일갈하는 순간이다. 여기서 앤드류의 행동이 얼마나 당혹스러운 것인지 뜯어보는 일도 꽤 흥미로울 것이라 생각한다. 앤드류의 독주는 플레처, 밴드 단원들, 공연 스태프들, 모두를 당황시킨다. 첫 번째로 플레처는 앤드류에게 개인 지도를 한 적도 없으며, 독주 버전의 ‘Caravan’을 지도한 적 역시 없다. 앤드류는 자신의 방에 걸려 있던 버디 리치가 실제로 드럼 솔로가 부각되게 편곡한 버전처럼 독주를 시작한다. 두 번째, 플레처는 곡 소개를 하면서 ‘Upswingin’’이 ‘익숙한 명곡이 아닌 새로운 레퍼토리’라고 하였다. 앤드류가 자신의 주도로 Caravan을 시작하는데, 앤드류와 달리 ‘프로’인 연주자들은 악보 없이도 최상의 연주를 들려준다. 다들 손에 익을 정도로 연습이 된 곡이라는 소리이자 뒤집어 말하면 누구나 아는 명곡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명곡 뒤에 누구와의 합의도 없이 '독주'를 시작한다. 세 번째로 무대의 조명은 플레처의 지휘 사인과 함께 꺼졌다가 앤드류의 독주 시작과 함께 다시 켜진다. 지금은 페스티벌의 오프닝이고 그들은 한 팀으로 무대에 올랐다. 이 밴드는 플레처가 지휘하는 밴드지, 앤드류의 밴드가 아니다. 앤드류는 이 밴드의 메인은커녕, 마지막에 들어온 일원일 뿐이다. 지금 앤드류가 하는 행동은 그 누구도 상상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행동이다. 앤드류는 무대의 주도권을 빼앗아 오는 것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이 무대 자체를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무대로, 모든 템포를 자신에게 맞추도록 바꾼다. 이것이 앤드류가 플레처에게 ‘내가 제2의 찰리 파커가 맞다’고 복수하는 방법이자 증명하는 방법이다.
피를 봐야만 가능한 수준의 연주, 앤드류는 정말 광인처럼 드럼을 두들긴다. 여기서 앤드류의 친아버지의 시점 쇼트와 클로즈업이 등장하는데, 아버지의 표정이 무척 복잡하다. 필자는 이 클로즈업이 ‘아들을 지지해주지 못한 죄책감’이라기보단 ‘아들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표정 같다. 끝내 앤드류를 집에 데려오지 못한, 플레처라는 악마에게 아들을 빼앗기고 만 아버지의 괴로움. 앤드류와 친아버지는 그 시점 쇼트의 거리감만큼이나 멀어진 것 같다. 시점 쇼트 직전에 잠시 사운드가 사라지고 프레임 속에 앤드류의 상체만 잡았다가 다시 사운드를 키우는 장면은 충분히 과잉 해석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한 번 이렇게 말해보고 싶다. 필자는 이 부분이 자신을 욕망을 거세하려 하는 애증의 아버지와 친아버지 둘 앞에서 자신의 성적 능력을 과시하는 동시에, 절정에 이르는 장면같다고 느낀다. 아까 2번째 사건에서 앤드류의 내력이 ‘분출’할 곳을 잃었다고 했듯이, 지금 이 장면은 앤드류 내력의 거대한 분출 장면이다.
영화 <위플래쉬>의 오프닝에서 끝까지 듣지 못했던 부분은 이 하이라이트에서 마저 듣게 된다. 한계치까지 끌어올린 속주 다음, 이 격렬한 영화의 마지막 분출 이후 프레임이 입까지 잡고 있지 않기에 정확하지 않지만, 플레처는 앤드류에게 뭔가를 말한다. 이 영화의 맥락상 그 발언은 높은 확률로 "Good job"이다-“네가 제2의 찰리 파커다”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맥락상 Good job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앤드류는 이 처절한 자기 증명에 성공한 듯하다. 영화 <위플래쉬>는 딱 이 부분에서 끝난다. 하지만 이런 영화라면 영화가 끝난 다음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위플래쉬>를 파멸로 향해가는 반성장 영화의 클라이맥스라 생각한다고 했다. 앤드류가 행복했을까 불행했을까를 논하는 것은 개인적 가치관의 문제다. 그런 얘기는 영화 이야기가 모두 끝난 다음에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할 이야기는 앤드류가 스스로 생각하는 자신보다는 <위플래쉬> 이후의 앤드류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필자가 생각하는 앤드류의 미래는 매우 비관적이다. 영화는 이미 끝났고 카메라로 찍히진 않았으니 사실상 추측에 불과하지만, 영화의 내용을 기반으로 해서 필자가 작성한 속편이라고 생각하면 감사하겠다.
앤드류는 JVC에서 무지막지한 연주를 보여줬고, 그는 친아버지가 조롱하던 링컨 센터에 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필자가 앤드류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는 까닭은 더 이상 앤드류에게 외력이 없기 때문이다. 앤드류는 이제 늘 자기 자신과 사투해야만 한다. 애증의 아버지 플레처에게 인정받았으니 앞으로도 관계가 지속되지 않을까? 라고 질문할 수 있겠으나, 플레처는 공교롭게도 ‘세상에서 가장 해로운 말’을 해버렸다. 그는 이제 긍정적인 의미에서 앤드류에게, 제2의 찰리 파커에게 더 기대하는 바가 없다. 플레처는 앤드류가 선택한 아버지일 뿐만 아니라, 오로지 제2의 찰리 파커를 위해 자극시키는 법만 아는 인간이다. 플레처는 아버지나 선생의 위치에서 자식이나 제자를 사랑하는 법을 모른다. 그러므로 아주 부정적인 의미에서 앤드류는 아버지로부터 곧바로 독립한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더, 과연 ‘스타’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라는 의심이 있다. 플레처는 바에서 만난 앤드류를 다시 자극시키면서 퍽 인상적인 대사를 몇 마디 내뱉는다. ‘요즘 세상은 뭐든 쉬운 걸 원해. 그러니 재즈가 죽어가지. (…) 그런 제자를 키워보려고 누구보다 노력했어. 그래서 내 노력에 대해 사과할 생각은 전혀 없어.’ 플레처는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노력을 계속해나간다면 언젠가 제2의 찰리 파커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적어도 이 영화 속에서-아마 현실 또한 마찬가지로- 재즈는 죽어간다. 그러니까 재즈라는 장르가 아예 종말을 맞이한 것은 아니지만 재즈의 시대는 이미 끝났다. 필자의 생각엔 재즈의 시대를 풍미할 스타는 그때 이미 탄생했고 지금은 탄생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만들 수도 없다. 그런데 플레처는 이 불가능한 일을 한계 이상의 외력을 통해, 정서적 학대를 통해 해내겠다고 하는 사람이다. 세상에 이런 끔찍한 인간이 있을까? 영화의 내용이 꼭 도덕이나 윤리에 부합할 필요는 없고, 가치판단에 그다지 중요한 요소도 아니다. 하지만 <위플래쉬>는 확실하게 끔찍한 이야기다. 필자는 이 영화가 훌륭한 영화라고는 생각하지만, 개봉 당시에 <위플래쉬>를 보고 자극받았다는 몇몇 네티즌들의 평가에는 다소 위험한 발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우리는 앤드류의 내력이 점점 더 높아져 가면서 소위 말하는 ‘인간미’를 잃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므로 앤드류는 성공 가도를 걷든, 걷지 못하든 그는 스스로 파멸하게 될 것이다. 이 점에서 매우 안타까운 것은 앤드류가 음악에 대한 열정과 성공에 대한 갈망이 있긴 했지만, 과연 플레처를 만나기 전에도 ‘이름만 남길 수 있다면 약물중독으로 단명하는 삶’을 바라고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플레처를 만나기 전의 앤드류는 성공했을지 못했을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영화 <위플래쉬>는 앤드류가 플레처를 만나면서 시작하고, (아마도) 함께하는 마지막 무대에서 끝난다. <위플래쉬> 이후의 앤드류는 확실히 파멸할 것으로 보인다. Whiplash… 채찍질이란 뜻의 영어단어다. 플레처는 채찍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이쯤에서 영화가 시작될 무렵의 장면을 다시 이야기하고 싶다. 암전이 끝난 이후 앤드류가 연습을 시작하자 천천히 달리 인으로 앤드류에게 다가가는 카메라. 앤드류가 누군가 왔다는 것을 인지하자 플레처 교수로 컷이 되지만, 앤드류로 향해 가는 카메라는 플레처의 시점 쇼트가 아니다. 명백하게 앤드류가 바라보는 시선의 위치가 일치하지도 않고 플레처의 눈높이와 카메라의 아이 레벨이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카메라 이동은 뭘까? 내 생각엔 앤드류에게 ‘플레처라는 채찍’으로 ‘불행’이 서서히 다가가는 장면처럼 보인다. 앤드류와 플레처의 더블 타임 스윙 연습 부분에서 주목해 볼만한 것은, 플레처가 외력을 가하는 대상이 앤드류 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태너와 코넬리, 그 외의 밴드의 구성원들 또한 플레처의 자장 안에 있는 동안은 이 외력의 객체가 아니라고 보기는 어렵다. 영화 <위플래쉬> 속 세상에서 꽤 시간이 지난 다음, 플레처 교수는 뭘 하고 있을까? 그는 아마도 제3의 찰리 파커를 위해, 아니 어쩌면 너무 빨리 떠난 제2의 파커를 다시 찾기 위해서 의자를 집어던지고 있을 것이다.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