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작가2024-01-16 11:46:33
눈에는 눈, 믿음에는 믿음
영화 [클럽제로(Club Zero)] 리뷰
한 마디로 역겹다.
영화를 보는 내내 역겨움이 울컥울컥 차올랐다. 오해는 않았으면 좋겠다. 영화 내의 장면이 구역질 난다던가,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싫다는 것이 아니다. 영화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그래서 역겨웠다. 이게 현실에 기반한 이야기라는 것이, 이 넓은 세상 어딘가에서는 영화와 같은 일들이 벌어질 것이라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이 역겨웠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이런 감정을 유지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에서, 영화는 극찬을 받아 마땅하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영화의 의도를 명확히 밝힌다. 어떤 믿음을 강요하는 자의 입장이 되어보려고 했다고. 그런 사람에겐 믿고 있는 세상이 전부일 것이라고. 그래서 영화에서 던지는 메시지가 그리 어렵게 느껴지진 않았다. 오히려 너무 정확해서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모두 상처를 가지고 있다. 몸매에 대한 강박 때문에 거식증을 앓는 엄마를 따라 어려서부터 음식에 거부감을 느꼈던 엘사, 학부모회의 수장인 부모님의 간섭에 지친 라그나, 이혼하고 홀로 자신을 키우는 엄마를 위해 장학금을 받아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는 벤, 모든 가족이 해외에 나가 자신에게 무관심한 프레드까지. 대체로 가족과 얽혀있는 상처들은 어린 나이에 쉽사리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미스 노백은 바로 그 점을 이용한다. 불안정한 심리를 파고들어 아이들의 마음을 쓰다듬는 것이다. 의지할 곳 없던 아이들은 어느 순간부터 선생님이라는 믿음직한 어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게 된다. 미스 노백은 아이들의 미묘한 심리 변화를 포착한 후, 섬세하고 치밀하게 상처를 헤집는다. 그렇게 아이들의 지배자가 되는 것이다.
미스 노백은 아이들의 육체에 대한 주도권을 선점하고, 차차 정신을 지배해나간다. 바로 이 모든 과정이 날 역겹게 만들었다.
사춘기 아이들은 반항은 하지만 저항력은 현저히 떨어진다. 일명 '반골 기질'이라 불리듯, 모든 강요받는 것들에 대해 극렬한 거부를 하긴 하지만, 이것을 '왜'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자신을 옭아매는 시스템에 대해 스스로 의문을 품고, 끊임없이 생각하는 능력을 길러, 자신만의 태도로 행동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그런 아이 곁에 모든 걸 포용해 주는 어른은 거의 없다. 자기 방식대로 밀어붙이거나, 부드러운 말투를 쓰지만 결국 자신의 말만 하거나, 아예 관심이 없거나. 때론 아이에게 부담을 갖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는 어른도 있지만, 너무 일찍 철든 아이들에게는 소용이 없다는 것이 슬픈 현실이다.
이 시점에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지대한 관심과 들어주는 태도이다. 무언가를 말하고 조언하려는 것은 어른의 방식이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표현하고 싶어 하는 아이들 앞에서는 그저 들어주는 것만이 전부이다. 그게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한 시작점이니까.
노백 선생 같은 자에게는 청중으로부터 고립된 아이들이야말로 딱 좋은 먹잇감이다. 먼저 이야기를 들으며 약점을 찾아내면 소극적이지만 분명하게, 자신의 신념인 식사법을 권유한다. 가장 먼저 그 식사법으로 효과를 본 프레드를 바탕으로 더 많은 아이들에게 설파한다. 아이들은 또래 집단의 분위기에 따라 행동이 좌우되기도 한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헬렌'은 그저 아이들과 친해지기 위해, 그룹에 끼고 싶어서 수업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아이들은 식사법을 공유하는 그룹에 속해 있으면 자신의 외로움과 상처가 치유될 것이라고 믿는다. '친구'라는 존재가 우선되는 것이 아닌, '식사법'이라는 요법이 우선되는 것이다. 그것이 노백 선생에 대한 맹신으로 이어지고, 아이들은 점차 걷잡을 수 없이 말라간다.
왜 하필 식이요법이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먹었던 것을 게워내는 엘사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몸에 필요한 영양분을 제공하는 것과 같다. 음식을 지식으로 치환한다면 정신을 형성하는데 도움이 되는 영양분을 섭취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이들은 이미 세상에 놓여져 있는 지식을 거부한다. 이것을 삼키면 그들에게 지배당하기 때문이다, 기득권인 어른에게. 아이들의 심리를 잘 알고 있던 노백은 그것을 먹을 필요가 없으며,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에 반해 영화에서는 어른이 식사하는 장면을 자주 보여준다. 학교 교장인 도싯은 노백이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차에 설탕과 우유를 타고 과자를 먹는 등의 행동을 보인다. 게다가 학부모들은 식사하는 장면을 끊임없이 보여주는데, 심지어는 학부모 회의를 할 때마저도 무언가를 먹고 있다. 그들에게는 누군가의 생각을 쳐낼 힘이 있다. 자신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지식은 습득하고,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버릴 의지가 있다. 그게 과하면 치우친 어른이 되지만, 어쨌거나 그런 힘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는 행동의 자유가 주어진다.
지식이라는 단어는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에 비해 깊은 단어다. 사람에게는 지식이 있어야 그것을 응용할 지혜가 생기고, 그런 지혜가 모여 삶의 태도와 가치관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적 삶의 근간이 되는 지식 자체를 거부해버리면 아무것도 쌓이지 않는다. 그 무엇도 만들어낼 수가 없다. 노백의 방식은 아이들이 다른 지식에 접근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온전히 자신에게만 의존하도록 하는 세뇌에 가깝다. 쉬운 예시를 들어볼까? 당장 보이스피싱만 해도, 다른 사람과 접촉하지 못하게 하지 않는가? 타인이 수상한 낌새를 채면 안 되니까.
결국 아이들은 크리스마스 아침에 노백 선생과 사라져버린다. 자신의 방에 걸어두었던 액자 속 풍경에 들어간 미스 노백과 아이들. 명확한 지명을 밝히지 않은 걸로 보아선, 그들에게 있어 유토피아와 걸맞은 장소일 듯하다.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영생할 수 있는 곳.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이 아닐까. 노백 선생의 이름은 'no back'이란 발음과 똑같다. 다신 돌아오지 않는다. 그들은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함께 죽음을 택하지 않았을까.
더불어 그 장면에서 묘하게 노백의 모습 역시 아이들과 같다고 느꼈다. 마땅히 기댈 변변찮은 어른이 없어, 고통 속에서 자랐을 것이라고. 아이들에게서 자신을 발견한 노백은 그들을 구원해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만큼은 진심이었겠지.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미스 노백이 설파하고자 했던 신념도, 그것의 근간이 되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도, 진보적이고 올바른 교육에 대한 논의도 아니다. 정말 눈여겨봐야 할 것은 그 결과다. 미스 노백의 신념에 의해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자본주의는 그것을 해결해 줄 수 있었는지, 치우친 교육이 남긴 흔적은 무엇인지.
아이를 잃은 학부모들은 학교에 모인다. 스키장에 가느라 노백을 만나지 못했던 헬렌은 유일하게 살아남은 학생이다. 헬렌에게 노백을 따른 이유를 묻지만, 이미 세뇌된 헬렌 역시 노백의 말을 그저 앵무새처럼 따라 할 뿐이다. 유일하게 어른들 중에서 식사를 거부했던 엘사의 엄마는 '우리도 먹지 않으면 아이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하지만 헬렌은 '믿음의 문제'라고 말하며 영화가 끝난다.
지식을 습득하는 데에는 믿음이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믿음을 가지면 위험할 때도 있다. 지식의 섭취는 오로지 지식에 의거했을 경우에만 유용하다. 빈 속에는 식이섬유와 채소부터 먹고 단백질, 탄수화물 순서로 먹는 것이 좋다는 식으로 말이다. 합리적으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경험에 의한 것이지 믿음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지식을 습득하지 않으려면 믿음이 필요하다. 무언가를 거부할 때는 그에 반하는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을 거부해야만 마땅한 이유 말이다. 현대 사회에는 아직 그것을 가려낼 힘이 없는 아이들을 꼬드겨 그릇된 믿음을 심어주는 자들로 가득하다. 그런 자들로부터 아이들을 어떻게 지켜내야 할까?
아이러니하게도 믿음이다.
아이를 믿고, 그 아이의 마음과 생각에 관심을 갖고, 귀를 열어야 한다.
아이에 대한 믿음만이, 아이를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믿음으로부터 구할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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