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4-02-04 20:42:16
등이 꼿꼿한 사람
영화 <플랜75> 리뷰
SYNOPSIS.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가까운 미래의 일본. 청년층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정부는 75세 이상 국민의 죽음을 적극 지원하는 정책 '플랜 75'를 발표한다.
명예퇴직 후 '플랜 75' 신청을 고민하는 78세 여성 '미치'
가족의 신청서를 받은 '플랜 75' 담당 시청 직원 '히로무'
개인별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플랜 75' 콜센터 직원 '요코'
'플랜 75' 이용자의 유품을 처리하는 이주노동자 '마리아'
'플랜 75'의 세상,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POINT.
✔️ 초고령화 사회, 인간성을 잃어가는 듯 느껴지는 뉴스가 쏟아지는 지금, 볼 가치가 있는 영화
✔️ 주인공 ‘미치’ 역의 배우 ‘바이쇼 치에코’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 소피 성우이기도 합니다. 극중에도 언급될 만큼 따뜻하고 다정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세요.
✔️ ‘미치’ 씨는요, 몸이 꼿꼿해요. (…) 난 이게 미치 씨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고 생각합니다.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눈여겨본 단편 감독의, 첫 장편 작품. 봉준호처럼 현실 인식이 서늘하고, 고레에다 히로카즈처럼 풀어가지만, 그보다 단단하고 무게중심이 낮은 느낌입니다. 차기작이 벌써 기대됩니다.
✔️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 특별언급을 비롯해, 세계 각지에서 주목받은 작품
✔️ 2월 7일 개봉

오래 전 누군가에게 들은 적 있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 그러니까 처음 5-10분은 그 영화를 이끌어가는 내용이자, 나중에 돌아보면 그 부분만 봐도 영화를 다 본 거나 마찬가지라고. 그런 관점에서 이 영화를 본다면, 적극 동의하는 동시에 소름이 끼칠 것이다. 이 영화의 시놉시스가 되는 ‘플랜75’ 정책은 결국 오프닝 시퀀스에 나온 사건을 아주 천천히, 공적인 탈을 쓰고, 풀어서 진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권리인가? 이 질문은 결국 존엄사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진다. 나는 이 논쟁이 언제나 편치 않았는데, 누군가에게는 ‘존엄’을 지킬 선택이겠지만, 적어도 이 사회에서는 ‘죽음을 선택할’ 자리까지 떠밀린 사람들에게 마지막 버튼을 눌러 주는 것이거나, 의료라는 흰 베일을 뒤집어쓴 살인이 훨씬 많으리라는 기분 나쁜 예상 때문이었다.
유독 인물들의 뒷모습을 많이 담아낸 이 영화 속에서, 나는 마치 서래를 본 해준처럼 생각했다. 미치 씨는요… 몸이 꼿꼿해요. 난 그게 미치 씨에 대해서 많은 걸 말해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꼿꼿한 등처럼 하루하루를 성실하고 바르게 살아온 사람이다. 꼼꼼하게 일하고, 퇴근해서 장 본 식재료를 정리하고, 베란다에 걸어 두었던 옷을 다시 들여놓는 사람. 퀴즈 쇼에 도전하고 상품을 노리는 사람들이 나오는 예능 프로그램을 틀어놓고도 그는 눈길 한 번 제대로 주지 않은 채 정갈한 식사를 한다. 호기로운 도전이나 일확천금을 노리는 마음 같은 것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단정하고 알뜰한 일상.
그러나 국가는 이러한 미치의 일상을 보지 않는다. 초고령화 사회에서 ‘예산 들어갈 곳’을 줄이기 위해 75세 이상의 노인을 대상으로 존엄사 신청을 받는 국가에게, 미치는 그저 75세를 넘은 노인일 뿐이다. 국가가 국민을 죽이는 방법으로 명맥을 유지하다니. 누군가의 미래를 짓밟아서 도달하는 곳을 우리가 감히 미래라 불러도 될까. 그렇다면 국가란 무엇인가. 미래는 무엇인가. 영화는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좋은 영화가 으레 그렇듯, 무거운 질문에 답안이 될 수 있을 여러 가지를 그저 보여준다.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부유하지는 않아도 자기 일과 머리 누울 집이 있던 미치에게서, 국가는 그의 세상을 하나씩 잘라내고 몰아낸다. 죽음이 아니면 선택할 수 없는 자리까지 사람을 몰아세우는 느낌마저 든다. 영화를 보는 내내, 노인의 가난을 단지 그의 개인적 문제로 치부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는 책 <가난의 문법>이 생각났다. 나아가 노인 빈곤율과 노인 자살률의 상관관계를 떠올리며, 노인 자살률이 OECD 압도적 1위라는 한국의 통계치 또한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과연 그러한 죽음은 ‘자’살인가? 미치를 끊임없이 몰아간 끝에, 라바콘 불빛이 경고등처럼 온통 붉게 번쩍거리는 어느 밤. 온통 빛이 번쩍번쩍하지만 온기는 없는 밤이 마치 이 사회 같았다.
온기 없이 휘황찬란한 세상에서, 미치는 계속해서 꼿꼿하게 걷고, 정갈하게 먹고, 조용히 배려하며, 더없이 예의 바른 언어를 구사한다. 그 중에서도 “신세(お世話)”라는 단어는 세 번 이상 쓴다. 이 단어는 사전에 “도와줌, 보살핌; 폐, 신세, 귀찮은 일”로 등장하데, 도움을 받으면서 폐를 끼치게 되어 송구한 마음을 담을 때 쓴다. 꽃다발을 받으며 명예 퇴직을 하게 되었을 때, “그 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의 의미로, 플랜75 상담원과의 첫 통화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통화에서 “마지막까지 신세 지게 되네요”로 차차 등장한다.
기초 일본어 회화에서 배우는 문장인데, 퇴직하면서 마지막으로 사물함을 깨끗이 닦고 감사 인사를 남기는 미치의 성격상 자연스러운 문장인데, 유독 귀에 툭 걸렸다. 생각해 보면 이 영화 속에서 스스로를 낮추는 단어들은 죄다 귀에 툭툭 걸렸다. 스스로에 대한 낮춤말이 존댓말 못지않게 발달한 일본어에서는 과히 이상할 게 없는 표현들인데, 왜 그 겸양의 표현들이 마음에 걸렸을까. 공적인 탈을 쓰고 무례한 죽음이 판을 치는 세상에 끝내 고개를 조아리는 모습이, 마음에 걸렸던 건 아닌지.

#우리는 얼마나 다를까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장애인에게도 이동권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문장만큼이나, 노인의 생명이 소중하다는 말 또한 당연한 소리다. 너무 당연해서 흰소리처럼 느껴져야 하는, 힘주어 말할 필요 없는 문장이어야 한다. 당연히 노인은 ‘우리’와 ‘그들’로 나뉘는 개념이 아니어야 하며, 사람이니까 당연히 다르지 않다. 그 모습이 무너진 세상을 표현하면서도, 오히려 그렇기에 자연스럽게 인간의 면면을 비춘다.
미치와 직장 친구들의 대화, 그들이 함께 보내는 시간을 보면 젊은 직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이 영화 속 젊은이들과 노인들은 여러 차례 같은 자리에 선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길, 기차 차단봉 앞에 잠시 서는 것은 미치도 히로무도 마찬가지다.

그런가 하면 플랜75로 사망한 노인들의 짐을 정리하고 물건을 털어 보는 마리아와 동료의 모습에서는, 누구라도 아우슈비츠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이 영화 속 인물들은 서로서로, 그리고 현실의 어떤 면과 끊임없이 공명하며 우리에게 묻는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다르냐고.
비슷한 스토리라인을 담았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단편 <황혼의 반란>에서 주인공 프레드가 남겼던 말, “너도 언젠가 노인이 될 게다”는 문장이 그렇게 이 영화에서도 우리에게 파고든다. 플랜75는 노인들에게는 죽음을 선사하지만, 히로무와 요코를 비롯한 젊은 세대에게는 더 큰 내상을 입히고 있음이 영화에 절절하게 드러난다.

이 영화 속 ‘플랜75’가 지향하는 것, 그리고 실제로 성과로 들이미는 것은 “경제적 파급 효과”다. 그건 정말 좋은 것일까? 어쩌면 그건 군더더기의 다른 표현일 수 있다. 어느 정도까지는 “부가 가치”라고 할 수 있겠지만, 밭에서 “농작물 가격을 잘 쳐주지 않다” 수확할수록 손해가 나서 농작물을 갈아엎는데, 마트에서는 너무 비싸서 못 사먹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가면, 이 ‘부가’된 것은 가치일까 군더더기일까. 그 군더더기를 만들기 위해 진짜 중요한 가치들을 버린다면, 그걸 어떻게 부가 가치라고 부를 수 있을까.
팔을 베고 식탁에 엎드린 미치가 이내 응시하는 어둠. 낮잠에서 깨어난 마리아가 같은 자세로 팔을 베고 응시하는 어둠. 그 시선 끝에, 절대 자구책이 될 수 없는 군더더기가 구더기처럼 우글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등에 이야기를 매달고
친구에게 몇 번씩 걸어도 도저히 가 닿지 않던 미치의 전화는, 역설적으로 플랜75 상담원과 연결되면서 그제야 전화기의 기능을 하기 시작한다. 비록 마음 주고받는 일을 차단하기 위해 모든 상담에 타이머로 시간 제한을 걸고 있고, 우리가 아는 가치들에 붙었던 이름(예컨대 “용기”)을 뒤죽박죽 섞어 쓰며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연결이지만… 그 연결에서도 꽃은 피어난다. 귀여운 하이파이브가 있고, 멜론 소다 아니 크림 소다의 추억이 있고, 지나간 시간이 한 결씩 곱게 펼쳐지고 겹쳐진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소피 역할로 단단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모든 등장인물을 품었던 바에쇼 치에코의 목소리로, 꼿꼿한 등으로 해주는 이야기들은 어쩐지 자꾸만 더 듣고 싶어지는 이야기들이었다. 히로무 삼촌의, 어쩐지 지친 듯한 등과 방에 놓인 물건들의 이야기도… 어쩐지 더 듣고 싶어서 슬퍼지는 기분이었다.

영화가 마지막에 가까워 갈수록, 어쩐지 나는 “생은 존엄이구나”라고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영화 속 ‘플랜75’ 광고에서는 “태어나는 건 선택할 수 없었지만, 죽는 순간은 선택할 수 있다”고 호기로운 광고를 하지만, 그 말이 오히려 깨달음을 준다. 태어남을 선택할 수 없었듯, 죽음도 선택할 수 없는 자리에 남겨두어야 맞겠구나. 누구나 한 번은 죽는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싶을 만큼 두려운 것이지만, 그것이 생의 본질이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당신이 이 영화에서 무엇을 발견할지도 궁금하다. 하야카와 치에 감독의 말마따나, 계속해서 흑백의 명확한 답을 요구하는 세상이지만, 인간은 아주 복잡하고... 중요한 이야기들은 회색 지대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플랜75' 식이 아닌 답을 찾아내려면, 이 영화가 던진 무거운 질문에 우리 각자의 답을 하나하나 꽃다발처럼 풍성하게 엮어내는 편이 좋을 테니까. 내가 이 영화에서 엿본 것은, 정말 너무 무거워서 좀처럼 쓰고 싶지 않은 단어라고 생각하면서도, 생의 존엄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 삶이 바닥을 쳐도 생은 존엄하다는 것이다.
그래. 어쩌면 삶의 어느 순간, 결기 어린 눈빛 외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 때가 있을 것이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는 식의 부드럽고 달콤한 말로 로맨스 영화처럼 혹은 청춘 영화처럼 갈무리할 수 없는 엔딩이라 느껴지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꼿꼿한 등으로 서서, 나의 노래를 한 소절 부르고 또 발걸음을 옮기면 그저 그뿐이다. 이 생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꼿꼿한 등에 이야기와 노래를 매달고 걷는 것뿐이다. 여전히, 저는 그게 많은 걸 말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초청받아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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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MZ Docs] 하인츠 에미히홀츠 드로잉전: 기울어진 비전
고양시 예술창작공간 해움과 제16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가 공동 주최하는 '기울어진 비전'은 독일의 다큐멘터리 감독 하인츠 에미히홀츠의 다채로운 예술 세계를 조명하고자 기획되었다.
해당 전시는 크게 두 가지 갈래를 가진다. 하나는 하인츠 에이미홀츠의 꿈에 기반하여 무의식을 기록한 드로잉 시리즈로, 2차원으로 존재하는 꿈의 이미지를 3차원적 형식으로 부피감 있게 전시한 콘텐츠이다. 다른하나는 감독이 연출한 영화로, 2004년부터 2021년까지 그가 작성한 공책과 스케치북, 길가의 나무 등이 비추어진다. 이는 자연에 의한 건축물을 해체를 기록하고 있으며, 다양한 텍스트와 콜라주를 통해 예술가의 세계를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기울어진 비전>은 영화와 드로잉의 관계성을 가지는 작품들을 위주로 추린 드로잉을 전시한다. 평면적인꿈의 이미지는 전시장 내에서 이리저리 꼬여 입체감을 가지는 3차원적 형태를 가지게 된다. 관람객은 롤러코스터를 연상케 하는 드로잉 배치 형상을 통해 운동감을 느낄 수 있으며, 이미지의 재현은 관람객의 관람 속도와 거리에 따라 다르게 구성된다.
해당 전시의 드로잉은 보는 이의 주관적 경험과 판단에 기반한다. 추상적이고 단편적인 장면들의 해석은 관객의 상상에 기댄다. 감독이 일방적으로 메세지를 전달하는 전통적인 관습에서 벗어나 관람객이 주체가 되어 사유할 수 있도록 능동성을 부여함으로써 해당 전시는 관객의 위치를 보다 동등하게 상승시킨다. 영화 연출 기법에서 불연속편집을 통해 흔히 의도되는 ’낯설게 하기‘ 가 전시에 적용된 셈이다.
하인츠 에이미홀츠 감독은 도전적인 전시 행태를 통해 관람객이 ‘기울어진’ 시선으로 새롭게 대상을 바라볼것을 의도하고 있다.
<전시 정보>
고양시 예술창작공간 해움 2024. 9. 26. (목) ~ 10. 2. (수) 10:00 ~ 18:00
도슨트 : 14시, 16시(약 15-20분 소요 * 9.29~30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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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술과 공명과 기억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서 감상 후 작성하였으며,
줄거리가 일부 서술되어 있습니다. 영화 개봉일은 2월 1일입니다.*누군가의 소중한 기억에 들어가는 기분으로 푹 젖어드는 영화입니다.
극장에서 보시길 적극 추천 드려요. :-)* * *
영화 <애프터썬>은 20여 년 전 11살 소피가 여름방학 끝자락 아버지와 함께 갔던 튀르키예 여행을 소재로 한다. 그래서 현재의 소피, 과거의 소피, 여행에서 찍은 캠코더 영상까지 다양한 결의 영상이 섞여 있다.
리조트로 이동하는 버스에서 부녀가 소곤소곤 귓속말을 하며 여행은 시작된다. 광활한 들판을 달리는 튀르키예의 버스. 영화는 캠코더 줌 소리와 캠코더 속 계단 현상으로 조각조각 깨진 영상으로 시작하면서 이것이 영상임을 선명하게 느끼게 만들더니, 이내 버스를 같이 탄 것처럼 가장 현실적인 시야 안에 관객을 둔다. 덕분에 새삼 깨닫는다. 기억은 단순한 저장과 축적이 아니라 편집과 서술에 가까운 행위라는 것을.
촬영한 사람의 1인칭 시선이 반영된 캠코더 영상처럼, 기억은 사실 1인칭으로 서술된 후 편집된다는 것을. 우리는 우리에게 공명한 것만을 서술할 수 있으며, 서술한 후에 비로소 기억할 수 있는 것이다. 어두운 방에 앉아 캠코더 속 오래된, 변해버린 기억들을 더듬어 보는 아빠의 모습이야말로 ‘기억을 기억’하는 우리 모습에 가까운지 모르겠다. 숨소리만 들리는 이 영화 속 새벽을 가만 집중해 바라보게 되는 것도 어쩌면, 새벽은 모든 추억이 가장 선명하게 요동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이 영화는 관객에게 소피와 아빠의 기억을 설명하고 보여주기보다, 그냥 그들의 기억 속에 관객을 덜렁 내려놓는다. 덕분에 마치 <이터널 선샤인>의 주인공들처럼 기억에 숨어든 기분마저 든다. 남의 부녀 여행에 별안간 동승해 버린 나는 어리둥절한 채로 열심히 두 사람의 세계를 파악한다. 그러다 보면 영화를 본다는 느낌 그 이상으로, 이 영화를 내 기억으로 새로 쓰는 느낌마저 든다. 그렇게 영화는 관객을 적극적으로 이끈다. 기억이란 이렇게도 적극적인, 그럼에도 아주 선명할 수만은 없는 행위인 것이다.
수백 가지 감상문이 가능할 이 영화를 보는 내내, 튀르키예의 높은 하늘과 어마어마한 광량을 함께 느끼는 듯했다. 그래서일까 따끈한 햇볕 아래에서 콧날이 시큰거리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이 영화의 어떤 순간이 나에게 공명했는지 서술해 보기로 한다. 결국 나에게 이 영화는 나의 서술로 기억될 테니까.
기억은 공명하는 것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단지 지금 내 눈앞의 상대뿐 아니라 그의 과거와 미래까지 마주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 순간은 비장하고 묵직한 운명의 얼굴을 하고 오지 않는다. 아주 여상한 순간, 가볍게 찾아온다. 미리 준비할 수도 없게.
튀르키예를 여행하는 중 딸에게 질문을 받은 아빠 캘럼의 순간이 그러했다. 11살 소피는 몰랐지만 그 질문은 삼십대 아빠가 아닌 과거의 11살 캘럼에게 던져진 것이었다. 아빠가 지금 11살이라면 무엇을 할지, 아빠의 11살 생일은 어땠는지. 아직 충분히 위로받지 못한 자신의 11살을 떠올리며 캘럼은 질문을 피하려다가, 캠코더를 끄고서야 대답한다. 조금 슬펐던 생일, 자신이 했던 선택을. 그러자 소피는 잘 선택했네, 하고 은은하게 대답한다. 십 년이 두 바퀴나 지난 지금, 그때엔 존재하지도 않았던 이가 지금 말해주는 것이다. 잘했다고. 과거의 자신에게 공명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30대의 아빠가 11살 소피에게 해준 말이, 언젠가 30대의 소피에게 공명할지 모른다. 지금은 고향에 소속감을 느끼고 행복하다는 소피에게, 훗날 생각이 변한다 해도 네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다는 말을, 아빠는 그래서 남겨두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얘기든 할 수 있는 사이를 꿈꾼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언젠가 스스로가 남들과 다르고 유별난 듯이 느껴질 때, 더 이상 소속감을 느끼지 못할 때가 온다면 그때, 지금 이 대화가 떠오를 수 있도록. 두 사람이 앉아있던 바다의 부표처럼 이 기억 위에 앉아 쉴 수 있도록.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변하고, 어떤 말들은 이전과 전혀 다른 의미로 와닿게 된다.
마찬가지로, “내일도 신날까?”라는 말에 대한 대답도 이미 두 사람의 생애 다른 순간에서 이미 대답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주 어쩌면, 여전히 섬광 속 아빠를 꿈에서 보는 현실의 소피가 잠에서 깨어 기꺼이 아기 침대로 향하는 선택에는 이런 시간이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기억은 서술되는 것
아빠와 소피는 기억을 서술하는 방법을 잘 아는 사람들이다. 물속에서 서로의 사진을 찍고, 캠코더를 들고 다닌다. 그러나 시간을 물성에 잡아 두는 데에만 얽매이지도 않는다. 담아둘 수 없는 시간도 성실하게 마주한다. 버스에서 내렸을 때 하나 같이 사진을 찍는 사람들 틈에서도 자기들의 행위에 집중하고, 온천에서 머드를 발라 줌으로 미안한 마음을 녹이기도 하면서.
그들이 함께 사는 사이가 아니라는 것은 대화에서 금방 드러난다. 같은 하늘 아래 있다는 것으로 같이 있음으로 같이 있음을 느낄 수 있다는 소피의 말에서 실은 참 그리웠다는 마음이 읽힌다. 같이 있는 가족이 놓치기 쉬운, 애틋한 마음의 무게를 늘 그림자처럼 인지하고 있다. 아마 그 마음이 두 사람의 여행에 보조를 맞춰 주었을 것이다.
게다가 두 사람은 눈높이가 그럭저럭 맞는다. 철없는 말도 이따금 툭툭 뱉는 아빠와, 사람들의 어린애 취급마저 여유롭게 소화할 만큼 성숙한 소피는 친구처럼 다양한 대화를 한다. 두 사람의 대화는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다. 화장솜으로 얼굴을 가만가만 어루만져 주는 저녁처럼, 서로 등을 맞댄 느낌으로 나란히 있다. 함께 있지 못한 사이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이런 시간을 공들여 쌓았을 것만 같다. 호신술이라며 잡힌 손 뿌리치는 방법을 가르치는 시간처럼, 포켓볼도 아마 저렇게 가르쳤을 것이다. 그 시간이 두 사람의 세계를 만들었다.
캠코더에 연결한 호텔 텔레비전 옆에 첩첩 쌓인 몇 권의 책이 두 사람의 세계를 보여준다. <명상하는 법>이라는 가상의 책과 실제 태극권 교본, 마가렛 타이트의 <시, 이야기, 글 쓰기(Poems, Stories, and Writings)>도 놓여 있다. 시인인 동시에 영화인이었던 마가렛 타이트의 책이 놓인 것에 대해, 샬롯 웰스 감독은 독립적으로 자기 세계를 구축해 나갔던 스코틀랜드 영화인들을 바라보는 마음이라고 대답했다.
문득 궁금해진다. 자기 손으로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사람의 책을 여행지에서도 읽고 있는 소피가, 훗날 이 순간을 어떻게 서술하고 기억할까. 그러다 불현듯 깨닫는다. 이 영화 자체가 그 대답임을. 극 중 인물의 미래는 영화 이후의 (관객이 알 수 없는) 선형적 시간이 아닌, 영화 안에 이미 들어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기억을 서술하는 한, 시간은 회전목마처럼 무한히 순환한다.
기억은 기억되는 것
두 사람의 여행은 적당히 무료하고 적당히 나른하며 적당히 신난다. ‘인스타그래머블’하고 요란하지 않았던 그 시절의 여행답게. 두 사람은 튀르키예 구석구석을 살뜰하게 즐긴다. 소피의 머리에 실을 감고, 하나하나 이야기를 넣어 짰다는 카펫을 구경하면서. 실을 얽고 짜는 데 재능이 있는 땅, 이야기를 얽고 짜는 데 재능이 있는 땅이다.
그러나 삶은 카펫이 아니어서, 우리는 모든 이야기를 다 읽어낼 수가 없다. 모든 자식들이 다 그렇듯 우리는 생각보다 아빠를 잘 모른다. 이따금 캘럼이 보이는 어두운 면들을 영화는 자세히 서술하지 않는다. 까만 티셔츠를 입고 바다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 카펫 더미에 기대서 짓는 표정 같은 것들에서, 밝아 보이는 아빠 이면의 캘럼이 있음을 어림짐작하게 할 뿐이다.
저렇게 대화가 많은 부녀여도, 아무리 소피가 성숙해도, 그토록 꼭 끌어안았어도. 아빠와의 기억은 천천히 차오르는 폴라로이드 사진 같아서, 아주 선명하지도 않지만 다시 인화할 수도 없다. 자식에게 부모의 기억이란 대개 그럴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더 애틋하다.
두 사람은 헤어지는 순간까지 착실하게 캠코더에 담는다. 지켜보고 있음을 알기에 돌아보고, 장난을 치면서 이별을 조금 유예해 보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이별은 종결될 수밖에 없다. 사랑한다는 말로든, 잘 가라는 말로든. 밝은 미소로든, 서글픈 미소로든. 우리는 다만 피할 수 없는 종결의 순간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을지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소피는 이제 성인이 되어 그 시절의 기억을 재생해 볼 수 있지만, 어떤 대화와 어떤 뒷모습, 어떤 씁쓸한 미소 같은 것들은 미처 캠코더에 다 담기지 못했다. 그러나 괜찮다. 수영복을 입은 소피의 어깨나 머리칼을 따끈따끈 데워 주었을 어느 여름의 태양 빛처럼, 직면하지 않아도 흔적을 남기는 것들이 있다. 기억으로 서술되고 공명하고 그렇게 끝내 추억이라는 이름을 얻은 어떤 순간들이 있다. 과거의 사람이 되어 버린 그 시절의 아빠는 이제 섬광의 기억 속에 있다. 서술되지 않은 것들까지 총합하여 소피는 아빠의 카펫과 다른, 자신의 기억을 써내려갈 것이다.
앞으로 나아갈 때에야 비로소 뒤에 있는 이를 인지할 수 있다. 등 뒤의 존재를 생각하며 깨닫는다. 삶은 본질적으로 긴 이별임을, 즐겁고 평온한 순간조차 우리는 다 알 수 없는 서로를 더듬거리며 멀어져 가고 있음을, 함께 있는 순간은 당연한 게 아니었음을, 그럼에도 서로를 서술하고 서로 공명하고 깊이 기억하는 일이 사랑임을. 그래서 슬프고 그래서 따끈한 어떤 여름 햇살 같은 사랑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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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딱 거기까지
요즘의 마블은 앞선 비전을 제시할 때보다 그들이 세운 과거의 영광을 반추할 때 빛난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이 그랬고,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이 그랬으며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3>도 그랬다. 데드풀은 현재를 살아갈 때 가장 빛난다. 데드풀이 생사가 오가는 액션 상황에서 그런 농담들을 뱉는 것은 그가 현재에 충실한 인물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가 뱉어내는 농담이 바로 지금, 그 상황에 충분한 재미를 제공한다면 그 농담이 여태까지의, 그리고 앞으로의 설정에 미칠 영향에 상관없이 그냥 뱉어내는 것이다. 사실 그래서 데드풀 시리즈는(물론 이 영화 이전까지 두 편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한 번도 발전을 보여주거나 매너리즘을 타파한 적이 없다. 그것은 데드풀 시리즈의 태생적 한계이다. 그리고 데드풀도 거기에 별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을 것이다.
<데드풀과 울버린>에는 다양한 맥락들이 관여되어 있다. 디즈니가 20세기폭스를 인수합병하며 폭스의 히어로들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로 편입되었고, 폭스의 히어로 영화들 중에는 엑스맨 시리즈만 있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에게 잊혔거나 망한 영화들도 많았으며 이러한 상황에 유용하기 그지없는 마블의 멀티버스 전략은 이미 실패만을 거듭했고, 뿐만 아니라 디즈니의 폭스 인수합병 과정에서 수많은 직원들이 일자리를 잃은 일도 있었기에 디즈니는 폭스와 그들의 여태까지의 작업에 대한 충분한 존중을 보여주어야 했다... 등등. 이 영화를 둘러싼 이러한 복잡한 영화 외적 맥락들을 고려할 때 <데드풀과 울버린>의 대답은 꽤 슬기로운 대답이다. 이 영화엔 엑스맨 시리즈 최악의 작품이라 평가받는 <엑스맨3> 속 뮤턴트들이 대거 등장하며, 그야말로 '실패한' 히어로들인 갬빗과 엘렉트라, 이제는 잊힌 히어로인 웨슬리 스나입스의 블레이드와 같은 캐릭터들이 마침내 제대로 된 엔딩을 맞이한다. 말하자면 <데드풀과 울버린>은 실패한 영웅담에 대한 헌사인 동시에 여태까지의 폭스의 히어로 영화에 대한 존중인 것이다. 이 영화는 실패한 영웅담에 대한 헌사라는 주제의식의 연장선으로 마블의 실패한 멀티버스 사가에 대한 자조까지 다룬다. 데드풀의 입으로 그것을 직접 언급하기도 하고, 후반부 데드풀과 울버린이 수많은 데드풀들을 피 튀기며 해치우는 장면은 멀티버스 설정에 대한 자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데드풀과 울버린>의 이러한 발걸음은 이 영화에 주어진 일종의 과제들을 성공적으로 해결했다는 점에서 영리하고, 마블 팬들이 가장 가려워했던 곳을 긁어주었다는 점에서 유쾌하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 이상을 바라보지 않는다. 사실 바라볼 생각이 없다. 그것은 이 영화가 지닌 (결국 데드풀 시리즈라는)태생적 한계이다. 이 영화가 디즈니의 폭스 인수를 둘러싼 복잡한 맥락들을 창의적으로 오락에 이용하고, 멀티버스 프로젝트를 툭 까놓고 자조한 것은 철저히 농담의 방식을 통한 것이다.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인다면 곤란하다. <데드풀과 울버린>이라는 선언을 끝으로 마블은 앞으로의 멀티버스 사가를 완전히 엎어버릴 수 있을까? 물론 마블이 이후의 방향성을 바꾸는 과정 속에서 필모그래피상의 위치를 고려할 때 <데드풀과 울버린>이 상징적인 분기점으로 남을 순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데드풀과 울버린>이 어떤 대안을 제시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래서 '<데드풀과 울버린>은 마블의 구세주인가?'라는 질문은 별로 중요한 질문이 아니다. 데드풀은 그 말 자체를 농담으로 소비하기 때문이다. <데드풀과 울버린>의 재미는 여전히 과거의 순간에 골몰하는 마블과 역시 현재의 쾌락에 몰두하는 데드풀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발생한다. 둘 중 미래를 보는 쪽은 없다. 조금 신선해질 뻔했던 <데드풀과 울버린>은 거기서 멈춘다. 물론 데드풀은 별로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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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브릭레이어>, 백인 남성의 시큼한 액션
나름 액션 영화에는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하는 편이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스파이 영화를 찾고, 여름밤에는 누아르 영화가 끌린다. 와인이나 위스키 한 잔과 함께 마주하는 액션 영화는 서사와 대사로는 전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전한다.
물론 액션에도 다양한 스타일이 있고, 그만큼 관객의 취향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개인적으로 가장 선호는 스타일은 맷 데이먼의 ‘본’ 시리즈, 키아누 리브스의 ‘존 윅’ 시리즈다. 깔끔한 액션에 쓸모없는 대사는 많이 생략한, 그러면서도 영화 전반의 분위기에 스며드는 작품을 사랑한다. 그 외에도 많은 액션 영화를 선호하는 편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스파이 영화는 감사하게도 ‘007’,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를 보고 자란 세대로서 새로운 작품이 개봉했다면 영화관을 찾게 되는 장르다.
그런데 이번 <브릭레이어>는 백인 남성의 시큼한 땀 냄새가 그득한 영화였다.
* 씨네랩(cinelab) 크리에이터로서 참석한 시사회 후기입니다.
영화 <브릭레이어>의 한국 포스터와 주연 에런 엑하트 / (C) 한국 배급 ㈜플레이그램
<브릭레이어>는 은퇴한 CIA 첩보 요원이 다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소환되어 비밀리에 임무를 수행하는 스파이 액션 영화다. CIA 최고 요원들이 연이어 살해당하고, CIA의 존재 자체가 위협받는다. 그 주범으로 추정되는 빅터 라덱을 처리하기 위해 전직 요원 스티브 베일(에런 엑하트)은 다시 작전에 소환되고, 현장 요원이 아닌 케이트 배넌(니나 도브레브)이 함께 투입된다. 과연 그들은 무사히 사건을 해결하고 평화를 지킬 수 있을까.
주연인 스티브 베일 역으로는 <다크 나이트>의 ‘하비 덴트’ 역으로 한국 관객에게도 잘 알려진 에런 엑하트가 출연한다. 그는 이번 영화를 통해 57세의 나이에도 뛰어난 액션을 보여준다. 케이트 배넌 역에는 드라마 ‘뱀파이어 다이어리’ 시리즈의 주연으로 잘 알려진 니나 도브레브가 출연했다.
(C) 한국 배급 ㈜플레이그램
서론이 길었지만 이번 영화에 대한 개인 감상을 공유하자면 <브릭레이어>는 말 그대로 백인 남성의 오래된 시큼한 땀 냄새가 그득한 영화다. 액션 장면은 일부 카메라의 구도에서 종종 흥미롭게 본 장면들이 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다소 부산스러운 화면 전환이 액션의 매력보다는 긴박한 흐름에 좀 더 초점을 두고 있다. 또한 은밀히 침입하는 장면에서 주인공의 과한 호흡 소리는 장면에의 몰입을 깬다.
무엇보다 시대적으로 아쉬운 스토리가 영화 전반을 장악한다. ‘은퇴한 요원을 다시 불러들여 사건을 해결하는 스파이 영화’는 이제 너무 많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런 스토리는 다른 전개를 보여주거나 혹은 액션 그 자체로 승부해야 한다. 하지만 <브릭레이어>는 그러지 못했다. 여전히 러시아 마피아와 라틴계 악당이 등장하고, 벨트로 목을 조르는 진부한 액션이 연출된다. 영웅이 되고픈 감상적인 백인 남성 주인공의 모습도 진부하다. 감상적인 주인공의 모습을 뒷받침할 서사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 눈물을 빼려는 다소 당황스러운 연출이 보인다. 사이드킥으로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가 무능력하고 극히 보조적인 존재로 등장한 후 성장한다는 전개 또한 시대착오적이다.
정말 주인공을 의심하는 사이드킥 서사와 폭발을 뒤로 하고 걸어나오는 주인공 장면이 필요했나 (C) 한국 배급 ㈜플레이그램
영화에 대해 안 좋은 얘기는 참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세상에는 안 좋은 얘기가 너무 많기에, 거기에 내가 하나를 더해서 무엇하나’하는 생각 말이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세상에는 너무 좋은 영화가 많은데, 안 좋은 영화를 한 편 더 볼 필요가 있나’하는 생각 또한 든다. 그리고 영화를 애정하는 한 사람으로서, 최소한 시대를 거슬러 가는 작품은 더는 만나고 싶지 않다.
영화 <브릭레이어> (2025)
감독 레니 할린
주연 에런 엑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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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WFF 데일리] 세 여자의 거울치료
제목 : 그렇고 그런 사이
감독 : 김인혜
시놉시스 : 선지는 새언니가 된 친구 진희와 제사상에 올릴 전을 부친다. 분명 결혼 전까진 쿨한 친구였는데, 오늘따라 진희가 엄마 영순을 대하는 태도가 불편하다.
결혼과 파혼, 그 사이
널부러져있는 짐, 그리고 쌓여있는 '선지'의 이름이 적힌 청접장. 이 장면만 봐도 '선지'는 파혼을 하고 본가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말 "급" 짠해보이는 선지의 뒷모습. 그게 영화 <그렇고 그런 사이>의 시작이다.
'선지'는 왜인지 눈치를 보며 거실로 가고, 거실에는 한창 명절 음식 준비를 하고 있는 엄마 '영순'. '영순'은 결혼한 지 6개월이 지났는데도 방문을 안한 며느리 '진희'의 뒷담화를 '선지'에게 늘어놓는다. 그 때 알 수 있는 사실은, '진희'는 '선지'의 오랜 친구이고 '선지'의 소개로 인하여 '선지'의 오빠인 '선호'와 결혼했다는 사실. 정말 결혼과 파혼 사이의 오프닝 시퀀스.
한복을 안입고 왔구나
호랑이도 제말 하면 온다더니, '진희'는 때마침 방문한다. 그때 엄마 '영순'은 "한복을 입..을 줄 알았는데" 라며 말 끝을 흐린다. 요즘도 한복을 입는구나. '진희'는 핫핑크색 트레이닝복을 입고와서는, 일할 때 편한 복장이 최고라며 능글맞게 상황을 넘어간다. 여기서 '영순'의 두번 째 충격. 바로 이어지는 '진희'의 명절선물은 바로 샤인머스캣. 이 장면을 보면 '진희'와 '영순'은 신세대 며느리와 아직 옛날을 살아가고 있는 시어머니의 충돌. 그리고 그걸 얄밉게 지켜보는 남편이자 아들 '선호'.
그리고 2N년째 전 부쳐본 솜씨로 '선지'는 능숙하게 전을 부치지만, '진희'는 이 광경이 낯설다. " 어머니 요즘 사먹는게 최고예요~"를 시전해보지만, '영순'은 칼같이 거절한다. 요즘 쉽게 볼 수 있는 명절의 분위기 아닐까. 그러던 중 '진희'와 '선지' 그리고 '영순'은 각자의 이유로 전을 방치하고, 전은 새까맣게 타버린다. 마치 '영순'의 마음처럼.
세 여자의 거울 치료
'거울 치료'란 즉 역지사지다. '영순'은 '진희'의 시어머니기도 하지만 딸 가진 엄마이기도 하고. '진희'는 며느리이자 '선지'의 새언니이지만 누군가의 소중한 딸이다. 마찬가지로 '선지'도 훗날 누군가의 며느리지이자 '진희'의 아가씨이고, '영순'의 소중한 딸이다. 그들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다가 어떤 사건으로 인하여 사실을 깨닫는다.
깨닫는 과정이 굉장히 웃기다. 영화관에서 소리내며 웃는 일이 거의 없는데, 오랜만에 웃게된 영화다. 뭔가 정말 있을 법 한 일을 다루고 있고 그 이야기를 있을 법 하게 풀어내서인지 캐릭터의 감정 이입이 잘되었다. 30분의 러닝타임을 세 여자에게 골고루 썼달까. 알차다.
씨네랩 에디터 ria
제24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08.25 - 09.01
'아시아단편 단편선 2' 상영 시간표
2022-08-27 17:00 - 18: 36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1관
2022-08-29 19:30 - 21:06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5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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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딘가 밋밋한 단테의 지옥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가족이 모두 모여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돔'(빈 디젤)과 '레티'(미셸 로드리게즈). '로만'(타이러스 깁슨), '테즈'(루다크리스), '램지'(나탈리 엠마뉴엘), '한'(성 강)이 로마로 작전을 나간 사이 그들은 불청객을 만난다. 바로 숙적 '사이퍼(샤를리즈 테론)'. 그녀는 새로운 빌런 '단테'(제이슨 모모아)의 존재를 알려준다. 오래전 돔 때문에 가족을 잃은 단테. 그는 로마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돔을 범죄자로 만든다. 이에 뿔뿔이 흩어진 패밀리. 그들은 각기 '제이콥'(존 시나)과 '쇼'(제이슨 스타뎀) 등 가능한 모든 친구를 모아 단테에게 반격할 준비를 한다.
<인피니티 워>에는 미치지 못하다
<분노의 질주: 라이드 오어 다이>(이하 <분노의 질주 10>)를 보면 영화 하나가 떠오른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다. 둘은 여러 공통점이 있다. 시리즈 속 모든 인물이 집결한다. 가장 치밀하고 강력한 빌런도 등장한다. 몇몇은 대의를 위해 목숨을 희생한다. 종결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판을 까는 영화라는 점도 같다.
그런데 두 영화의 인상은 사뭇 다르다. <인피니티 워>는 그 자체로 충격이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전개로 모두를 놀라게 했다. 동시에 기대감을 키웠다. 파멸적인 피해를 입은 영웅들이 타노스에게 어떻게 반격할지. <엔드게임>을 손꼽아 기다리게 만들었다.
<분노의 질주 10>은 반대다. 주인공이 유례없는 위기에 빠지는 전개는 동일하다. 그런데 그 위기는 진짜 같지 않다. 새 빌런 단테도 타노스만큼의 위압감은 없다. 과거 주역들의 복귀는 반갑지만, 인상적이지 않다. 오히려 억지스럽다. 결말도 아쉽다. 놀랍지만, 기대감보다는 실망감이 더 크다. 이유는 명확하다. <인피니티 워>와 달리 <분노의 질주 10>은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이미 끝난 준비 작업
잠깐 시선을 전편으로 돌려보자.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 나름 인상적이었다. 자동차를 타고 우주로 향하는 무리수는 충격적이었지만, 시리즈의 난맥상을 정리한 서사는 돋보였다. 사실 <분노의 질주> 시리즈는 통일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브라이언과 한의 빈자리는 컸다. 첫 편과 비교하면 장르도 크게 변했다.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는 가족의 귀환을 택했다. 그 중심에는 돔의 동생, 제이콥이 있었다. 제이콥은 성경 속 야곱 같았다. 야곱은 아버지의 축복을 둘러싸고 형과 갈등을 빚었다. 제이콥은 아버지와 진실을 숨긴 채 돔과 충돌했다. 진실을 알지 못한 돔은 제이콥을 패륜아로 비난했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오해를 풀고 화해했다. 긴 시간 헤어져 있던 가족은 마침내 하나 됐다.
제이콥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도, 미아도, 심지어 브라이언도 직간접적으로 토레토 패밀리에 복귀했다. 돌아온 탕자, 제이콥의 서사가 중심을 잡아준 덕분에 다른 이들의 복귀는 비교적 매끄러웠다. 익숙한 얼굴이 재합류하면서 시리즈에 통일성도 생겼다. <분노의 질주: 더 맥시멈>를 기준으로 이야기가 나름 깔끔하게 연결됐다. 이처럼 <분노의 질주 9>라는 가족 드라마는 프랜차이즈를 떠나보낼 준비 작업을 깔끔히 끝마쳤다.
레퍼런스를 잘못 써먹다
그런데 정작 <분노의 질주 10>는 달리지 않는다. 자기 역할이 <인피니티 워>와 다르다는 걸 망각한 듯 보인다. <인피니티 워>의 과제는 두 가지였다. 우주와 지구에서 활동하는 영웅들을 한 데 모아야 했다. 동시에 타노스와의 대결을 그려내야 했다. <분노의 질주 10>은 첫 번째 과제를 이미 끝냈다. 전편에서 돔은 분명 모든 가족을 규합했다. 그들에게는 달릴 일만 남았다. 화끈하게 단테와 싸우면 그만이었다.
<분노의 질주 10>의 선택은 달랐다. 제작자 빈 디젤은 마지막으로 남은 가족까지도 전부 끌어모았다. 최종 빌런인 단테에 맞서기 위해 과거 빌런이었던 쇼와 사이퍼를 소환한다. 시리즈에서 하차한 줄 알았던 '홉스'(드웨인 존슨)도 불러온다. 심지어 오래전에 사망한 줄 알았던 '지젤'(갤 가돗)을 되살려낸다. 빈자리를 채울 새로운 멤버도 투입한다. '미스터 노바디'(커트 러셀)'의 부재는 그의 딸 '테스'(브리 라슨)가 대신한다. 8편에서 죽은 '엘레나'(엘사 파타키)의 여동생 '이사벨'(다니엘라 멜키오르)처럼 잊고 지나갈 뻔했던 가족도 챙긴다.
하지만 올스타전은 그다지 반갑지 않다. 이미 전편에서 끝난 가족 드라마를 중언부언하는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또 가족이라는 이유로 시리즈에서 퇴장했거나 죽은 인물을 되살리니 긴장감이 없다. 단테가 돔을 위기에 몰아넣어도, 패밀리가 중 한 명이 죽어도 담담하다. 다시 살아날 테니까. 아무리 <분노의 질주> 시리즈가 가족애로 똘똘 뭉친 시리즈 해도 과한 전개다. 시리즈를 향한 빈 디젤의 애정이 집착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이유다.
다른 문제도 있다. 영화는 돔과 단테의 대결을 보여주기도 벅차다. 그런데 다른 이야기가 자꾸 끼어든다. 흩어진 일행 중 일부는 쇼를 데려와야 하고, 다른 쪽은 사이퍼와 친해져야 한다. 돔은 테스와 함께 브라질로 가서 이사벨을 구해야 한다. 물론 어떻게든 각 에피소드를 하나로 이어 붙이려는 노력은 엿보인다. 가족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돔의 대사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대사 내용도 타이밍도 작위적인 나머지 설득력은 부족하다. 이처럼 구심점 없는 2시간 20분은 어지럽다.
단테의 지옥이 펼쳐지다
잘못된 레퍼런스 활용은 단테의 서사에도 악영향을 끼친다. 사실 단테라는 빌런의 모티브는 인상적이다. 그는 자신이 겪은 고통을 돔에게 그대로 되돌려주는 악당이다. 그의 이름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듯한 계획이다. 이탈리아 작가 단테가 창조한 '신곡' 지옥편 속 지옥은 인과응보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지옥에서 자기가 저질렀던 죄를 형벌로 되돌려 받는다.
실제로 <분노의 질주 10>는 단테가 열어젖힌 지옥도를 보여준다. 단테는 <분노의 질주: 언리미티드>에서 돔 때문에 아버지와 재산을 모두 잃고 비참하게 살아야 했다. 그래서 그는 돔의 아들을 집요하게 노린다. 돔에게 가족을 잃은 슬픔을 안겨주기 위해서. 단순히 아들을 죽여 복수하려는 게 아니다. 살아 숨 쉬는 동안 가족을 차례로 잃고, 무력하게 바라봐야 하는 아픔을 돔에게 안기려 한다.
단테는 가족애로 무장한 시리즈에 걸맞은 최종 빌런이라 할 수 있다. 돔에게 물리적 위협만 가하는 게 아니라, 그의 신조까지 위기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자기 가족을 챙기기 위해 다른 가족은 파괴해도 되는지. 그의 신조는 정녕 정의로운 것인지. 돔을 정신적으로 괴롭힌다. 여기까지만 보면 단테는 길고 길었던 가족 이야기를 끝내기 위한 비장의 무기로서 손색없다.
밋밋하기만 한 지옥
문제는 단테라는 캐릭터의 완성도다. 영화는 토레토 패밀리를 다시 규합하는데 너무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 그 결과 단테라는 캐릭터에게 필요한 공간을 내주지 못했다. 잘못된 레퍼런스 활용의 또 다른 예시다. <인피니티 워>는 타노스가 주인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악역의 신념과 철학, 위력을 섬세하게 묘사했다. 우주의 절반을 죽이는 살인자이자, 대의와 영웅을 존경하는 현자라는 입체적인 모습을 설득력 있게 보여줬다.
단테에게는 그런 사치가 허용되지 않았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분노에 불타는 복수귀를 보여주는 게 전부다. 그 결과 남은 건 스테레오 타입이다. 단테는 소시오패스 살인범이라는 캐릭터의 전형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다. 개연성도 떨어진다. 그가 돔보다 언제나 한 발 앞서 계획을 완벽하게 실현하는 과정은 부자연스럽다. 평면적인 악역이 너무 완벽하고, 무턱대고 잔인하니 좋은 소재나 모티브도 힘을 쓰지 못한다.
<분노의 질주 10>이 비빌 언덕은 결국 액션이다. 현실감을 되찾은 액션이 눈길을 끈다. 물론 헬리콥터를 차로 격추하거나 대형 폭탄을 쫓아 로마 시내를 종횡무진 누비는 대목이 있기는 하다. 그래도 우주로 가거나, 잠수함과 싸우는 전편에 비하면 현실적인 느낌을 주도록 액션이 잘 짜여 있다. 5편인 <분노의 질주: 언리미티드>와 6편 <분노의 질주: 더 맥시멈>을 오마주한 일부 시퀀스가 대표적이다.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분노의 질주> 시리즈에는 언제나 인상적인 팀 액션이 있었다. 토레토 패밀리가 한 팀으로 움직이며 악역을 막아내는 시퀀스는 늘 짜릿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르다. 로마 시퀀스를 제외하면 뛰어난 팀 액션을 찾아볼 수 없다. 팀원들이 다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레이싱 장면이 스쳐 지나간 점도 감질난다. 물론 시리즈 정체성이 바뀐 지는 오래됐다. 하지만 시리즈의 기원을 생각하면 레이싱 과정이 너무 간단하다는 인상을 지우기는 어렵다.
결론적으로 <분노의 질주 10>은 한계가 명확한 10번째 시리즈다. 가족애 말고는 더 할 이야기도 없고, 카 액션도 한계가 찾아왔으며, 빌런도 매력적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다운 스펙터클은 여전하지만, 특별함과 신선함은 없다. 과연 이 장수 시리즈가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을까? 지금까지의 결과물만 놓고 보면 미래가 밝지는 않아 보인다.
Acceptable 무난함
기본만 하는 국밥집처럼 밋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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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말포함】액션은 90점 스토리는 30점
#영화 #다만악에서구하소서 #리뷰
범죄, 액션│한국│108분 감독 홍원찬│출연 황정민, 이정재, 박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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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웨이브 <맥밀리언스> 공식 예고편
누구든 우승할 수 있었을까? FBI 잭슨빌 지부의 요원들이 90년대 맥도날드 모노폴리 게임을 둘러싼 거대한 사기를 추적해나가는 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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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D.P. 2> 티저 예고편
바뀌는 건 없었다. 탈영병은 계속 생기고, 디피는 그들을 데려와야 한다. 그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일이 일어나든. 결코 바꿀 수 없을 것이다. 뭐라도, 하지 않는다면 넷플릭스 시리즈 《D.P. 2》 7월 28일 공개, 오직 넷플릭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