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4-02-04 20:42:16
등이 꼿꼿한 사람
영화 <플랜75> 리뷰
SYNOPSIS.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가까운 미래의 일본. 청년층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정부는 75세 이상 국민의 죽음을 적극 지원하는 정책 '플랜 75'를 발표한다.
명예퇴직 후 '플랜 75' 신청을 고민하는 78세 여성 '미치'
가족의 신청서를 받은 '플랜 75' 담당 시청 직원 '히로무'
개인별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플랜 75' 콜센터 직원 '요코'
'플랜 75' 이용자의 유품을 처리하는 이주노동자 '마리아'
'플랜 75'의 세상,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POINT.
✔️ 초고령화 사회, 인간성을 잃어가는 듯 느껴지는 뉴스가 쏟아지는 지금, 볼 가치가 있는 영화
✔️ 주인공 ‘미치’ 역의 배우 ‘바이쇼 치에코’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 소피 성우이기도 합니다. 극중에도 언급될 만큼 따뜻하고 다정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세요.
✔️ ‘미치’ 씨는요, 몸이 꼿꼿해요. (…) 난 이게 미치 씨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고 생각합니다.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눈여겨본 단편 감독의, 첫 장편 작품. 봉준호처럼 현실 인식이 서늘하고, 고레에다 히로카즈처럼 풀어가지만, 그보다 단단하고 무게중심이 낮은 느낌입니다. 차기작이 벌써 기대됩니다.
✔️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 특별언급을 비롯해, 세계 각지에서 주목받은 작품
✔️ 2월 7일 개봉

오래 전 누군가에게 들은 적 있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 그러니까 처음 5-10분은 그 영화를 이끌어가는 내용이자, 나중에 돌아보면 그 부분만 봐도 영화를 다 본 거나 마찬가지라고. 그런 관점에서 이 영화를 본다면, 적극 동의하는 동시에 소름이 끼칠 것이다. 이 영화의 시놉시스가 되는 ‘플랜75’ 정책은 결국 오프닝 시퀀스에 나온 사건을 아주 천천히, 공적인 탈을 쓰고, 풀어서 진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권리인가? 이 질문은 결국 존엄사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진다. 나는 이 논쟁이 언제나 편치 않았는데, 누군가에게는 ‘존엄’을 지킬 선택이겠지만, 적어도 이 사회에서는 ‘죽음을 선택할’ 자리까지 떠밀린 사람들에게 마지막 버튼을 눌러 주는 것이거나, 의료라는 흰 베일을 뒤집어쓴 살인이 훨씬 많으리라는 기분 나쁜 예상 때문이었다.
유독 인물들의 뒷모습을 많이 담아낸 이 영화 속에서, 나는 마치 서래를 본 해준처럼 생각했다. 미치 씨는요… 몸이 꼿꼿해요. 난 그게 미치 씨에 대해서 많은 걸 말해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꼿꼿한 등처럼 하루하루를 성실하고 바르게 살아온 사람이다. 꼼꼼하게 일하고, 퇴근해서 장 본 식재료를 정리하고, 베란다에 걸어 두었던 옷을 다시 들여놓는 사람. 퀴즈 쇼에 도전하고 상품을 노리는 사람들이 나오는 예능 프로그램을 틀어놓고도 그는 눈길 한 번 제대로 주지 않은 채 정갈한 식사를 한다. 호기로운 도전이나 일확천금을 노리는 마음 같은 것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단정하고 알뜰한 일상.
그러나 국가는 이러한 미치의 일상을 보지 않는다. 초고령화 사회에서 ‘예산 들어갈 곳’을 줄이기 위해 75세 이상의 노인을 대상으로 존엄사 신청을 받는 국가에게, 미치는 그저 75세를 넘은 노인일 뿐이다. 국가가 국민을 죽이는 방법으로 명맥을 유지하다니. 누군가의 미래를 짓밟아서 도달하는 곳을 우리가 감히 미래라 불러도 될까. 그렇다면 국가란 무엇인가. 미래는 무엇인가. 영화는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좋은 영화가 으레 그렇듯, 무거운 질문에 답안이 될 수 있을 여러 가지를 그저 보여준다.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부유하지는 않아도 자기 일과 머리 누울 집이 있던 미치에게서, 국가는 그의 세상을 하나씩 잘라내고 몰아낸다. 죽음이 아니면 선택할 수 없는 자리까지 사람을 몰아세우는 느낌마저 든다. 영화를 보는 내내, 노인의 가난을 단지 그의 개인적 문제로 치부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는 책 <가난의 문법>이 생각났다. 나아가 노인 빈곤율과 노인 자살률의 상관관계를 떠올리며, 노인 자살률이 OECD 압도적 1위라는 한국의 통계치 또한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과연 그러한 죽음은 ‘자’살인가? 미치를 끊임없이 몰아간 끝에, 라바콘 불빛이 경고등처럼 온통 붉게 번쩍거리는 어느 밤. 온통 빛이 번쩍번쩍하지만 온기는 없는 밤이 마치 이 사회 같았다.
온기 없이 휘황찬란한 세상에서, 미치는 계속해서 꼿꼿하게 걷고, 정갈하게 먹고, 조용히 배려하며, 더없이 예의 바른 언어를 구사한다. 그 중에서도 “신세(お世話)”라는 단어는 세 번 이상 쓴다. 이 단어는 사전에 “도와줌, 보살핌; 폐, 신세, 귀찮은 일”로 등장하데, 도움을 받으면서 폐를 끼치게 되어 송구한 마음을 담을 때 쓴다. 꽃다발을 받으며 명예 퇴직을 하게 되었을 때, “그 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의 의미로, 플랜75 상담원과의 첫 통화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통화에서 “마지막까지 신세 지게 되네요”로 차차 등장한다.
기초 일본어 회화에서 배우는 문장인데, 퇴직하면서 마지막으로 사물함을 깨끗이 닦고 감사 인사를 남기는 미치의 성격상 자연스러운 문장인데, 유독 귀에 툭 걸렸다. 생각해 보면 이 영화 속에서 스스로를 낮추는 단어들은 죄다 귀에 툭툭 걸렸다. 스스로에 대한 낮춤말이 존댓말 못지않게 발달한 일본어에서는 과히 이상할 게 없는 표현들인데, 왜 그 겸양의 표현들이 마음에 걸렸을까. 공적인 탈을 쓰고 무례한 죽음이 판을 치는 세상에 끝내 고개를 조아리는 모습이, 마음에 걸렸던 건 아닌지.

#우리는 얼마나 다를까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장애인에게도 이동권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문장만큼이나, 노인의 생명이 소중하다는 말 또한 당연한 소리다. 너무 당연해서 흰소리처럼 느껴져야 하는, 힘주어 말할 필요 없는 문장이어야 한다. 당연히 노인은 ‘우리’와 ‘그들’로 나뉘는 개념이 아니어야 하며, 사람이니까 당연히 다르지 않다. 그 모습이 무너진 세상을 표현하면서도, 오히려 그렇기에 자연스럽게 인간의 면면을 비춘다.
미치와 직장 친구들의 대화, 그들이 함께 보내는 시간을 보면 젊은 직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이 영화 속 젊은이들과 노인들은 여러 차례 같은 자리에 선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길, 기차 차단봉 앞에 잠시 서는 것은 미치도 히로무도 마찬가지다.

그런가 하면 플랜75로 사망한 노인들의 짐을 정리하고 물건을 털어 보는 마리아와 동료의 모습에서는, 누구라도 아우슈비츠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이 영화 속 인물들은 서로서로, 그리고 현실의 어떤 면과 끊임없이 공명하며 우리에게 묻는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다르냐고.
비슷한 스토리라인을 담았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단편 <황혼의 반란>에서 주인공 프레드가 남겼던 말, “너도 언젠가 노인이 될 게다”는 문장이 그렇게 이 영화에서도 우리에게 파고든다. 플랜75는 노인들에게는 죽음을 선사하지만, 히로무와 요코를 비롯한 젊은 세대에게는 더 큰 내상을 입히고 있음이 영화에 절절하게 드러난다.

이 영화 속 ‘플랜75’가 지향하는 것, 그리고 실제로 성과로 들이미는 것은 “경제적 파급 효과”다. 그건 정말 좋은 것일까? 어쩌면 그건 군더더기의 다른 표현일 수 있다. 어느 정도까지는 “부가 가치”라고 할 수 있겠지만, 밭에서 “농작물 가격을 잘 쳐주지 않다” 수확할수록 손해가 나서 농작물을 갈아엎는데, 마트에서는 너무 비싸서 못 사먹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가면, 이 ‘부가’된 것은 가치일까 군더더기일까. 그 군더더기를 만들기 위해 진짜 중요한 가치들을 버린다면, 그걸 어떻게 부가 가치라고 부를 수 있을까.
팔을 베고 식탁에 엎드린 미치가 이내 응시하는 어둠. 낮잠에서 깨어난 마리아가 같은 자세로 팔을 베고 응시하는 어둠. 그 시선 끝에, 절대 자구책이 될 수 없는 군더더기가 구더기처럼 우글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등에 이야기를 매달고
친구에게 몇 번씩 걸어도 도저히 가 닿지 않던 미치의 전화는, 역설적으로 플랜75 상담원과 연결되면서 그제야 전화기의 기능을 하기 시작한다. 비록 마음 주고받는 일을 차단하기 위해 모든 상담에 타이머로 시간 제한을 걸고 있고, 우리가 아는 가치들에 붙었던 이름(예컨대 “용기”)을 뒤죽박죽 섞어 쓰며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연결이지만… 그 연결에서도 꽃은 피어난다. 귀여운 하이파이브가 있고, 멜론 소다 아니 크림 소다의 추억이 있고, 지나간 시간이 한 결씩 곱게 펼쳐지고 겹쳐진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소피 역할로 단단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모든 등장인물을 품었던 바에쇼 치에코의 목소리로, 꼿꼿한 등으로 해주는 이야기들은 어쩐지 자꾸만 더 듣고 싶어지는 이야기들이었다. 히로무 삼촌의, 어쩐지 지친 듯한 등과 방에 놓인 물건들의 이야기도… 어쩐지 더 듣고 싶어서 슬퍼지는 기분이었다.

영화가 마지막에 가까워 갈수록, 어쩐지 나는 “생은 존엄이구나”라고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영화 속 ‘플랜75’ 광고에서는 “태어나는 건 선택할 수 없었지만, 죽는 순간은 선택할 수 있다”고 호기로운 광고를 하지만, 그 말이 오히려 깨달음을 준다. 태어남을 선택할 수 없었듯, 죽음도 선택할 수 없는 자리에 남겨두어야 맞겠구나. 누구나 한 번은 죽는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싶을 만큼 두려운 것이지만, 그것이 생의 본질이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당신이 이 영화에서 무엇을 발견할지도 궁금하다. 하야카와 치에 감독의 말마따나, 계속해서 흑백의 명확한 답을 요구하는 세상이지만, 인간은 아주 복잡하고... 중요한 이야기들은 회색 지대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플랜75' 식이 아닌 답을 찾아내려면, 이 영화가 던진 무거운 질문에 우리 각자의 답을 하나하나 꽃다발처럼 풍성하게 엮어내는 편이 좋을 테니까. 내가 이 영화에서 엿본 것은, 정말 너무 무거워서 좀처럼 쓰고 싶지 않은 단어라고 생각하면서도, 생의 존엄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 삶이 바닥을 쳐도 생은 존엄하다는 것이다.
그래. 어쩌면 삶의 어느 순간, 결기 어린 눈빛 외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 때가 있을 것이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는 식의 부드럽고 달콤한 말로 로맨스 영화처럼 혹은 청춘 영화처럼 갈무리할 수 없는 엔딩이라 느껴지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꼿꼿한 등으로 서서, 나의 노래를 한 소절 부르고 또 발걸음을 옮기면 그저 그뿐이다. 이 생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꼿꼿한 등에 이야기와 노래를 매달고 걷는 것뿐이다. 여전히, 저는 그게 많은 걸 말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초청받아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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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혼이 트렌드가 된 세상 속 코믹한 결혼 보고서!
“4주 후에 뵙겠습니다.” <부부 클리닉 사랑과 전쟁>의 명대사가 최근엔 드라마 <굿 와이프>로 전이된 느낌이다. 드라마의 높은 시청률은 그만큼 이혼과 불륜이 만연되어 있다는 걸 방증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이혼이 트렌드(?)가 된 세상속에서 대사가 전하는 의미는 이혼숙려기간인 4주, 30일 동안의 시간은 무의미한 것인가? 2023년 추석에 개봉해 관객들의 지지를 받은 <30일>은 뻔하고 예상가능하며, 기시감 넘치는 로코이지만, 사랑과 기억에 대한 생가할거리를 준 코믹한 결혼 보고서다.
결혼식 날 나라(정소민)은 버진 로드 대신 식장 출구로 뛰쳐나간다. 그 이유는 백수지만 진정으로 사랑하는 남친 정열(강하늘)에게 가기 위해서다. 정열 또한 선배(윤경호)의 술집에서 한탄만 하다가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마음에서 나라에게 달려가던 참이었다. 이들의 마음은 통했는지, 술집 문 앞에서 마주쳤고, 집안의 반대에도 결혼에 골인했다. 역경을 딛고 사랑을 이룬 이들은 결말은 해.피.엔.딩. 이라고 하면 오산.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랑 보단 전쟁이 펼쳐지고, 이내 이들은 이혼을 결심한다. 가정법원에서 나와 30일 동안 이혼숙려기간을 보내야 하는 둘은 함께 차를 타고 가다 교통사고를 입는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나라와 정열. 근데, 약속이나 한 것처럼 과거의 기억을 하지 못한다. 심지어 서로 결혼한 사이라는 것까지.
<30일>은 영화처럼 사랑했던 남녀가 결혼 이후 180도 변화가 되는 관계에 놓인다는 다소 현실적인 이야기를 가져온다. ‘결혼하니 배우자가 변하더라’ 하는 이 말을 오롯이 옮겨놓듯 연애할 때 좋았던 그 모습이 결혼 후에는 가장 싫어하는 모습이 되는 일반적인 이야기를 초반에 깔아놓는다. 법원에서 이혼 사유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 숱하게 마주한 이야기들이 등장하는데, 어디서 보고 들은 듯한 이 이야기는 기시감이 느껴질지언정 공감대를 확실히 형성한다. 보통의 부부보다야 좀 더 과장되고 과격하지만, 이들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는 건 연애와 결혼의 차이에 한 번쯤 겪었을 답답함. 웃픈 이들의 현실적인 모습은 교통사고 이후 벌어지는 황당한 이들의 동거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집중하게 만든다.
남대중 감독은 기존 로코와의 차별화 포인트를 위해 ‘기억’이라는 키워드로 상상력을 펼쳤다고 말한 바 있다. 좋지 않은 기억이 없어진다면 죽일듯이 미워한 배우자를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에 대한 궁금증. 뭐 이 또한 다수의 영화나 드라마에서 사용되었던 것이지만, 관객이라면 충분히 호기심을 가지게 한다. 연애 시절 당시 서로에게 반했던 순간과 포인트에 다시 물들고, 이내 점점 사이가 가까워지는 나라와 정열의 모습을 보면, 왜 인간은 오류를 범했음에도 또 다시 오류를 범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갖게 한다. 그리고 영화는 그게 바로 사랑이라고 답하는 듯 하다.
이를 증명하듯 영화에서는 야구라는 스포츠가 등장하는데, 이들의 마음을 전하는 매게체로 사용되는 건 야구공이다. 마치 투포수를 연상시키듯 공을 던지고 받고, 다시 던지는 듯한 이들은 최고의 합을 맞춰가는 관계라고 볼 수 있다. 매번 포수의 사인에 맞춰 투수가 정확한 공을 던지지 못하고 실투도 하고, 그러다 홈런을 맞고 위기를 맞을 때도 있지만, 9회까지 진행하는 야구는 그만큼 다시 던지고 받고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기회와 순간이 많다. 그만큼 영화는 야구처럼 이혼 위기에 놓인 부부에게 그 기회를 주고 싶어하는 마음이 그득하다.
이런 이야기를 갖고 있는 <30일>의 정체성은 코믹이다. <위대한 소원> <기방도령> 등 꾸준히 코믹 영화를 만든 남대중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 자신만의 코믹함을 첨가한다. 앞서 소개한 두 영화만큼 B급 코믹은 줄였지만, 관객들을 웃기는 게 주 목표로 말하는 감독은 자신의 장기를 끝까지 밀고 간다.
그 중심에는 배우들의 몫이 크다. 강하늘, 정소민의 코믹 케미는 최고라 말할 수 있는데, 톰과 제리를 연상시키는 듯 서로 못잡아먹어서 안달난 이들의 코믹 연기는 그 자체로 폭소를 터뜨린다. 깐족거림과 비아냥, 뒷끝 작렬인 강하늘의 찌질함과 말보다 손이 먼저 나가는 행동파로서 망가짐을 주저하지 않는 정소민의 연기는 매력 그 자체다. 코믹과 로맨스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다. 여기에 조민수, 김신영, 윤경호, 황세인 등 조연들의 코믹 앙상블도 그 자체로 재미를 전한다.
로코의 공식을 충실하게 이행하면서 빗는 웃음과 가족애는 영화의 장점이자 단점이기는 하다. 하지만 신나게 웃으면서 결혼이란 대 환장극을 객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전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의의를 둘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1990년대 개봉한 박중훈, 최진실 주연의 <마누라 죽이기> 최민수, 심혜진 주연의 <결혼이야기>와 비교해보면 더 좋을 것 같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결혼은 인간에게 가장 힘든 과정인 동시에 가장 행복한 과정이라는 걸 느껴보길 바란다.
사진 제공: 마인드마크
평점: 3.0 /5.0
한줄평: 이혼이 트렌드가 된 세상 속 코믹한 결혼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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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상의 편리함을 빚진 우리가 공범이 되지 않으려면
7★/10★
지하철을 고치다가, 자동차를 만들다가, 뷔페 음식점에서 수프를 끓이다가, 콜센터에서 전화를 받다가, 생수를 포장‧운반하다가, 햄을 만들다가, 승강기를 수리하다가…. 그러니까 우리가 먹고 마시고 이용하는 모든 일상 영역에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은유,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2017년 1월. LGU+의 전주 소재 하청 콜센터에서 현장 실습을 하던 마이스터고 학생 홍수연 양이 저수지에 투신했다. 홍수연 양이 담당한 일은 서비스 해지를 요구하는 고객의 전화를 ‘방어’하는 일이었다. 서비스를 중단하라는 고객과 연장하라는 상담사 사이에 기분 좋은 대화가 오갔을 리 없다. 고객은 왜 빨리 해지하지 않느냐고 항의하고, 상담사는 그 요구를 어떻게든 되돌리려 안간힘을 썼다. 고객은 친절할 필요가 없지만 상담사는 늘 따뜻하고 밝은 목소리여야만 한다. 회사의 실적 압박도 문제다. 회사는 왜 콜 수가 떨어지느냐, 왜 고객의 해지 요구를 막아내지 못하느냐며 센터 노동자들을 닦달했다. 홍수연 양은 임금뿐 아니라 성과 인센티브도 제때 받지 못했다. 실습생이 격무를 견디다 못해 도망가면 ‘손해’가 난다는 이유에서였다.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하는 금액마저 제때 지급하지 않으며 고등학생 노동자를 볼모로 잡은 것이다.
영화 〈다음 소희〉는 홍수연 양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다. 즉 이 영화는 안전하게 노동할 여건이 마련되지 않은 가장 위험한 곳에 던져진 학생 노동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마땅한 보호와 관심이 필요한 자들이 모두가 피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터로 내몰린다. 취업률이 이유다. 영화에는 소희가 자살한 후 그녀가 왜 죽어야만 했는지 좇는 형사 유진이 회사 담당자와 만나는 장면이 있다. 유진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법적 절차들을 따져 묻자 회사 담당자가 말한다. “그냥 그만두면 되는 거 아니에요?”
억지로 붙잡아둔 것도 아닌데 그렇게 힘들었으면 왜 먼저 그만두지 않았느냐는 이야기다. 회사에는 책임이 없다는 소리다. 하지만 소희는 여러 번 ‘말했다’. 그나마 자신을 보듬어주던 팀장이 먼저 자살했을 때, 팀장의 자살에 침묵하라는 회사의 각서에 서명했을 때, 네가 그만두면 회사와 학교 관계가 틀어져 후배들에게 피해가 간다는 선생님에게, 자녀가 대기업에 다닌다며 마냥 좋아했던 부모님에게 말이다. 다만 그 말이 그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았을 뿐이다. 소희가 다니던 학교에는 ‘빨간 명찰/빨간 조끼’가 있었다. 이는 취직했다가 ‘견디지 못하고’ 되돌아온 학생을 낙인찍기 위한 시각적 표지 역할을 했다. 요컨대 소희 주변에는 ‘사회생활이 다 그런 거야’라며 다그치는 어른, 버티지 못하면 낙인찍는 폭력적인 시스템만 있었다. 많은 사람이 필요로 하는 노동인데도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노동 환경을 문제 삼는 어른 대신 말이다.
누구의 잘못일까? 소희의 죽음을 파헤치던 유진은 회사, 학교, 교육청 등을 연달아 방문하여 ‘담당자’를 추궁한다. 하지만 적확한 담당자는 없다. 회사는 소희 탓, 학교와 교육청은 취업률과 연계된 지원금 탓을 한다. 유진은 여전히 화가 난 상태지만 더는 어디를 찾아가야 할지 알지 못한다. 교육부에 간다고 문제가 해결될까? 대통령을 만난다면 잘잘못을 가릴 수 있을까?
직업계 고등학교의 현장 실습 제도는 1963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도입되었다다. 처음에는 ‘교육’이 목표였으나 점차 ‘학생 인력’을 활용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실습생이 사망하는 사고가 잇따르자 참여정부에서 업체 파견형 실습을 폐지했으나 MB가 대통령이던 2008년 4월에 부활했다.* 그 이후 우리는 꾸준히 산업 현장에서 고등학생들이 죽는다는 기사를 접했다. 그러나 늘 슬픔과 안타까움은 일시적이었다. 이들의 죽음은 대체로 일회성 기삿거리로 언급되고는 곧잘 잊혔다. ‘인문계 고등학생이 아니라서’, ‘특성화고가 가난하고 공부 못하는 학생이 주로 가는 곳이라서’ 따위의 편견이 기억의 휘발을 부추겼을 것이다.
초췌하고 힘없는 소희의 얼굴과 그런 소희를 제대로 추모하기 위해 분노하는 유진의 얼굴이 있다. 그리고 ‘딱하다’며 혀를 끌끌 차고는 이내 고개를 돌리고 살아가는 평범한 얼굴들이 있다. 그들은 종종 구체성을 상실해 추상화된 ‘노동자’라는 기표에 못마땅한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리기도 한다. 표정을 잃은, 생떼 부리는 집단 정도로 막연히 추정되고 마는, 필수 노동을 하는데도 필요한 존재로 대접받지 못하는 얼굴들의 구체성을 복원해야 하는 이유다. 그래야만 소희와 유진의 얼굴 역시 잊히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 소희’의 비극은 또다시 반복될 확률이 높다.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에 일상의 편리함을 빚진 우리들은 소희의 죽음에 공범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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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의 몰락으로 세워진 바빌론, 고전 할리우드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미국 영화 산업의 중심이자 황금기였던 고전 할리우드 영화 시대는 시기상 메이저 스튜디오*의 성립과 쇠퇴가 이루어진 1910년대 말에서 1950년대 말 중 무성영화가 사라지는 1920년대 후반을 배경으로 한다. 이 시대에는 감독과 배우들이 스튜디오별로 소속되어 이미지 관리까지 받으며 영화 제작에 참여한다. 타 스튜디오의 영화 제작에 참여하려면 스튜디오 간의 협의가 필요하며 배우를 포함한 제작진들은 스튜디오로부터 스카우트를 받기도 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일종의 소속사 개념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또한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발전하며 할리우드 영화 산업에서 가장 큰 변화가 있었던 시기로 많은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들이 저항하기도 하고 적응하지 못해 도태되는 큰 격변기를 맞이한 때이다. 이 변화는 특히 배우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데 기존에 화면에서 표정과 몸짓만으로 연기의 찬사를 받던 배우들이 목소리 또한 연기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서 곤혹을 겪은 것이다. 이러한 할리우드의 영화산업을 유쾌하게 풍자한 영화가 <사랑은 비를 타고>(1952)인데 당시 ‘영화로 보는 영화사’로 유명했던 영화인만큼 <바빌론>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 시절(1920~1940년대 말) 할리우드 영화 산업을 주도했던 영화사로 당시 제작, 배급, 상영 기구를 수직 통합한 5대 메이저 스튜디오 (워너브라더스, 파라마운트, MGM, RKO, 20세기 폭스)와 상영기구를 갖지 못한 3대 마이너 스튜디오(유니버셜, 유나이티드 아티스트, 콜롬비아)로 분류
영화는 시기뿐만 아니라 등장인물 또한 실제 인물을 소재로 이용했다. 스타들의 스타인 잭 콘래드(브래드 피트)는 무성영화의 대스타였으나 유성영화에 적응하지 못했던 대표적인 스타 존 길버트(John Gilbert, 1897-1936)를 떠올리게 된다. 실제로 결혼을 4번 했던 것부터 자신의 발성에 콤플렉스를 느꼈던 것과 전쟁로맨스 <빅 퍼레이드>(1925)로 초기에 대성공해 관객의 비웃음을 샀던 첫 토키영화는 <위대한 밤(His Glorious Night)>(1929)의 상대역 이름은 ‘캐서린’이라는 점까지 실제 배우의 많은 부분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마고 로비가 연기한 넬리 라로이는 완벽히 매치되진 않지만 유독 눈물 연기에 능했던 클라라 보우(Clara Bow, 1905-1965)와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노동자 계급 출신이라는 배경과 자유분방한 이미지로 인기를 끌었지만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어머니와 성적학대를 일삼는 할리우드의 조롱거리 아버지가 기본적인 배경이다. 클라라 보우와 다르게 추가된 설정은 알마 루벤스와 잔는 이글스를 떠올릴 수 있다. 두 배우 모두 1920년대 유명한 배우였지만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넘어가는 시기에 심각한 약물 중독에 빠지게 된다. 지금까지 다른 장편에서 볼 없었던 디에고 칼바의 마누엘 토레스(매니)는 정확히 기존의 인물을 차용했다기보다는 <사랑은 비를 타고>의 등장인물과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영화의 엔딩 시퀀스에서 주 배경시기였던 30년대를 뛰어 1952년에 할리우드로 돌아와 영화관에 앉아 <사랑을 비를 타고>를 보는 장면에서 앞서 매니가 촬영장에서 스태프들에게 ‘유성영화, 유성영화’를 외치던 자신의 모습이 고스란히 영화로 재현되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이러한 설정들을 따라 스토리를 보자면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욕망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인기 스타가 되고 싶지만 끼는 있고 지속적인 스타의 자질은 부족한 넬리, 이미 스타가 되어 지속적인 스타의 삶을 원하지만 변화하는 시장에 적응하지 못하는 잭, 영화사 고위 직원이 될 만큼 사업 수완은 좋지만 사랑하는 넬리를 스타로 유지시키려는 매니가 중심인물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이 세 인물들의 두 가지로 공통점이 있다. 애정하는 대상이 있으며 본인 스스로가 장애물이라는 점이다. 세 인물 모두 기본적으로 영화를 애정한다. 또한 앞서 적은 바와 같이 인물이 목표를 이루는 데에 있어 원인이 본인에게 있으며 그 원인은 본능과 직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욕망과 사랑이라는 본능에 대한 이야기인 셈이다. 이에 대해 감독은 ‘배설’을 주요 메타포로 여기는 것으로 보여진다. 영화 시작부터 카메라에 묻혀가며 시점샷으로 코끼리의 변을 보여주며 강조한다. 이어서 나오는 ‘배설’은 파티장에서 영화사 임원으로 보이는 남성이 맞는 소변, 화장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브래드 피트의 뒤로 칸 안에서 거하게 나오는 방귀 소리, 고위층 파티장에서 넬리의 구토, 멕시코로 도망가는 길에 암살자를 마주한 매니의 소변으로 볼 수 있다. 코끼리의 변과 화장실의 소리가 가장 기본적인 배설욕이라면 파티장의 남성은 성욕으로 볼 수 있으며 넬리의 구토는 자신의 본능과 다르게 가식적인 부유층 앞에서 이미지 메이킹을 해야 하는 역겨움과 매니는 두려움에서 오는 본능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3시간에 달하는 러닝 타임 중에서 파티장을 주로 한 오프닝 시퀀스는 30분가량 지속된다. 하필이면 차에 코끼리를 싣고 오르막길을 올라가는 매니는 ‘할리우드’라는 세계에 신분 상승을 위한 노력과 겹쳐진다. 그리고 광란의 파티장 시퀀스가 끝나고 브래드 피트의 ‘마법과 같은 곳이야’라는 대사와 함께 영화의 타이틀을 중심으로 영화 촬영장이 따라 나오며 영화의 타이틀을 중심으로 대칭을 만든다. 첫 번째로 두 장소 모두 영화와 관련된 사람들이 모여있다. 파티장은 키노스코프라는 극 중 영화사의 사장이 주최하는 행사이기에 사실상 키노스코프 스튜디오의 직원들이 모인 곳이다. 연이어 나오는 촬영장은 잭 콘래드가 영화 촬영 중인 장소이기에 또한 영화 제작진들과 배우들이 등장한다. 또한 각각 죽음이 연이어 나오는데 다음날 첫 촬영을 앞두고 약물중독으로 죽음에 가깝게 기절한 미성년자 여자 배우와 카메라 운반을 담당했으나 전쟁씬 촬영 중 사고로 사망한 남자 배우이다. 또한 이들은 각각 넬리와 매니에게 할리우드에 진입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각 인물들의 사건 발단이 되는 동시에 배경 설명을 하기에 과한 시간의 분배처럼 보이지만 ‘바빌론’에 투사하는 당시 할리우드를 설명하기에는 적당한 시간이라고 볼 수 있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바빌론은 욕망으로 세워졌고 할리우드 또한 욕망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그 욕망이 개인의 삶을 어떻게 이끌었으며 개인과 사회에 무엇을 남겼는가이다. 감독의 최근 전작들을 살펴보자면 <위플래쉬>(2015), <라라랜드>(2016), <퍼스트맨>(2018) 모두 개인의 삶(본능)에 대한 고뇌를 다루었다고 볼 수 있다. <위플래쉬>에서 자신과의 싸움을 견디며 완벽한 드러머가 되기 위한 자신과의 갈등이라면 <라라랜드>에서는 LA에서 피아니스트로 배우로 성공하고 싶어 하는 연인의 꿈과 사랑에서의 갈등이며, <퍼스트맨>은 좀 더 지나 첫 우주비행사로서의 도전과 이미 만들어버린 가정에서의 갈등이라고 볼 수 있다. <바빌론>또한 연장선상에 놓여있지만 개인의 애정과 연관된 본능을 다루며 영화사(史)까지 확장시켜 진행했다는 점에서 관객에게는 더 심층적인 질문을, 영화 팬들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던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세계의 수많은 대도시를 연구한 벤 윌슨은 관능과 혼란스러움이야말로 메트로폴리스의 필수적인 요소라고 말했다. 각 인물들은 영화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각자의 본능을 통해 할리우드의 일원이 된다. 영화에 대한 애정들은 영화사의 형태로 남겨졌고 계속 발전하며 변화하는 형태를 요구하는 산업에 적응하지 못한 욕망(본능)은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었다. 하지만 산업적인 측면에서 볼 때 몰락과 탄생의 반복하며 발전하는 구조다. 즉 더 중요한 일, 큰 일을 하고 싶다고 한 매니와 같은 개인의 욕망들이 이루어져 개인은 몰락했지만 어쨌든 영화사(史)라는 바빌론은 세워졌다. 영화는 매니가 1952년도의 <사랑은 비를 타고(Singin’ in the Rain)>을 보며 지난날을 복기하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사랑은 비를 타고>는 매니의 삶(고전 할리우드)을 담아내기도 한 동시에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의 쇠퇴기(1946~1967년)의 영화기도 하다. 따라서 할리우드 시대의 끝과 함께 영화가 끝나는 셈이다. 따라서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바빌론에 비유한 것은 지리적인 의미의 메트로폴리스인 할리우드뿐만 아니라 시기적으로 고전 할리우드 영화 시대로도 해석할 수 있겠다.
<바빌론>을 굳이 빗대어 표현하자면 <라라랜드>를 배경으로 한 <위플래쉬>라고 생각한다. 극 중 잭이 개봉한 자신의 첫 토키영화의 관객 반응을 살피러 가는 상황에서는 크게 잭의 대사가 웃기게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마지막 매니가 <사랑은 비를 타고>에서 재연하는 잭의 모습은 어색하기 짝이 없다. 그 당시에는 알 수 없었지만 지나고 나서야 보이는 것처럼 연출된 두 장면은 급변하는 사회에서 잭이 도태된 이유를 설명해 주면서 잘못된 점을 알아채지 못했던 잭의 입장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든다. 고전 할리우드의 역사, 데이미언 셔젤의 연출, 뛰어난 배우들의 연기력, 스펙터클,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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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은 흐르지만, 기억은 여전히 우리의 내면을 뒤흔든다
영화 <하얼빈>이 개봉된 후 극장가와 온라인 커뮤니티 곳곳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쏟아지고 있다. 어떤 관객은 이 작품을 ‘엄숙하게 다시 써 내려간 독립운동의 한 페이지’라고 평하고, 또 누군가는 ‘감정적으로 울컥하게 만들면서도 담담하게 흘러가는 독특한 분위기’에 주목한다. 개봉을 기다려온 사람들 중에는 앞서 안중근을 다룬 여러 작품을 기억하는 이도 있고, 이제 막 안중근이라는 인물과 그의 역사적 역할을 자세히 접하는 이도 있다. 흥미로운 점은, 관객들이 공통적으로 ‘언제 이런 순간이 다시 와도 우리는 과연 옳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을 곱씹으며 극장을 나선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하얼빈>은 단순한 역사극을 넘어, 현재를 살아가는 한국인에게 무겁고도 절실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영화 속에서 안중근(현빈 분)과 독립 투사들은 러시아와 만주가 뒤섞인 복잡다단한 국경 지대, 그중에서도 하얼빈을 활동 무대로 삼는다. 시대는 1909년. 대한제국이라는 이름이 무색해질 만큼 이미 조선 땅은 일본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중근과 동지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걸고 필사의 싸움을 이어간다. 그들은 하얼빈의 얼어붙은 기차역, 어둡고 취약한 뒷골목을 거점 삼아, 비밀리에 정보를 교환하고 작전을 짜낸다. 눈 내리는 겨울, 혹독한 추위 속에서 고국으로부터의 지원은 턱없이 부족하고, 거대한 제국의 압박은 점점 더 거칠게 이들을 죄어 온다.
그러나 영화는 안중근과 동지들의 처절한 현실을 단순히 영웅적 의지로만 채우지 않는다. 필사적으로 맞서야 한다는 당위는 분명하지만, 눈앞의 죽음을 피할 방법이 마땅치 않고, 주변을 살펴보면 배신과 협잡이 난무하며, 내부에서도 서로 다른 노선을 주장하는 갈등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진다. <하얼빈>은 ‘독립 투쟁’의 표면 뒤에 묻혀 있는 수많은 난관과 엇갈린 이해관계, 인간적인 번민을 담담하게 그려낸다.독립 투사들의 인간적 번민
이렇듯 실제 역사적 사건인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향해 치닫는 과정이 너무나도 잘 알려진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이 안에서 새로운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거기서 관객은 ‘나라를 되찾기 위한 투쟁’이라는 거대 담론과, ‘한 사람의 인간 안중근’이 겪는 작고 숨 막히는 고민 사이에서 끊임없이 압박감을 느끼게 된다.이런 부분에서 <하얼빈>이 이전에 안중근을 다뤘던 영화 <영웅>과 <도마 안중근>과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보는 것은 흥미롭다. 영화 <영웅>은 뮤지컬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틱한 감정선에 강점을 두어, 안중근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결연한 의지와 함께 감동을 자아내는 노래들로 극의 정서를 극대화했다. 반면 <도마 안중근>은 안중근의 재판 과정과 그가 가톨릭 신자로서 품고 있던 신념, 그리고 ‘도마’라는 세례명을 부각해, 그가 총을 들 수밖에 없었던 신앙적·윤리적 갈등을 깊게 파고들었다. 완성도를 떠나 이런 시도들은 '안중근' 이라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보려는 시도들이었다.
이에 비해 <하얼빈>의 안중근은 묵묵하고, 동시에 인간적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자세히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는 안중근이 태생부터 ‘결단력으로 가득한 의인’으로 그려지기보다는, 처절한 현실 속에서 “과연 내가 옳은 길을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수도 없이 되뇌며 심리적 갈등을 겪는 존재로 나타난다. 스스로가 택한 길에 한 치의 후회도 없다고 말하고 싶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길에 따라붙는 죽음의 그림자와 가족, 동지들의 희생, 그리고 실패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그를 옥죄인다. <하얼빈>의 안중근은 그래서 더욱 현실적인 감정을 이끌어낸다. 영웅서사로만 보면 희생과 결단이 낭만적으로 비칠 수 있지만, 정작 당사자는 ‘내가 정말 이 모든 걸 감당해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안고 있기 마련이다.그렇다면 안중근의 심리적 고민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었을까. 영화가 비추는 장면들을 보면, 먼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던지는 길’이라는 명분 안에 어떤 감정이 담겨 있는지를 직시하게 된다. 독립운동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인간적인 두려움과 슬픔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지만, 이토록 거대한 상대를 저격하는 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 혹은 일이 성공한 뒤에 남아 있는 것은 과연 자유일까, 아니면 또 다른 폭력의 시대일까 하는 걱정 또한 안중근의 머릿속에 찾아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는 내부의 신념, 그리고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절박함이 겹치며, 그는 스스로를 극한 상황으로 몰아넣는다. 영화는 이러한 심리를 매우 건조하고 진지한 톤으로 그려내며, 관객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라면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인가?’ 라고.
안중근의 인간적 고민들
안중근이 이런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가 현실을 매우 또렷하게 인식했기 때문이다. 독립운동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매 순간 실패와 죽음을 예견하는 일이다. 배후 세력이 든든히 버티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근거지를 안전하게 마련할 방법도 없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조국은 더욱 식민지화되어 간다. 반역자나 스파이의 위협도 끊이지 않는다. 이처럼 너무나도 불리하고 암울한 환경에서도, 개인이 할 수 있는 선택지가 거의 없다는 점이 그를 고뇌하게 만든다.
동시에, 그가 만일 이토 히로부미의 가슴에 총알을 꽂는다면, 적어도 전 세계에 조선을 도살장에서 끌려가는 짐승 취급하지 말라는 강렬한 메시지를 던질 수 있다고 믿는다. 이토는 일본 제국의 상징적인 인물이자 침략 정책의 주체였으므로, 그를 제거한다는 행동이 동아시아의 정세에 어떤 충격을 불러올 수 있는지 안중근은 명확히 알고 있었다. 즉, ‘나라가 망할지언정, 우리 민족의 끈질긴 투쟁을 세계에 알려야 한다’는 절박함이 그에게는 존재했다. 이는 단순한 애국심 이상의, ‘나와 동시대인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왜 다시 안중근을 떠올려야 할까. 사회학적 관점에서 보면, 안중근의 행위는 단순히 ‘역사적 의거’가 아니라, 억압받는 개인과 국가가 저항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과정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현재의 대한민국 정치는 여전히 치열한 대립 구도를 안고 있다. 서로 다른 이념과 이해관계 속에서, 때로는 법과 원칙이 무너지고, 부당한 방법으로 권력을 쥐려는 움직임이 감지되기도 한다.
계엄령이나 내란과 같은 단어가 뉴스 헤드라인에 등장할 정도로 정세가 혼란스러운 상황이라고 가정해보자.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100여 년 전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고자 했던 안중근의 ‘간절함’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의 총성은 단순한 살상 행위가 아닌, 더 넓고 깊은 맥락에서 ‘정의를 외치는 나팔소리’였고, 그 울림은 우리 사회가 지금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스스로를 점검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독립군은 어떻게 되었을까. 당장은 잔혹한 현실 앞에서 무너져내리는 듯 보이지만, 그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선다는 암시를 영화는 마지막 장면까지 내비친다. 역사적으로도 알고 있듯, 안중근 이후로도 독립운동은 수많은 형태로 전개되었다. 만주 벌판을 누비는 무장투쟁 세력부터 해외 각지의 외교 활동까지, 일제강점기 내내 ‘해방’을 꿈꾸는 시도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바로 그 끈질긴 의지를 오늘의 관객에게도 전해주면서, <하얼빈>은 우리에게 묵직한 메시지를 남긴다. ‘힘들다고 해서, 혹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멈춰 서선 안 된다. 어떤 형태로든 계속 나아가는 것이 우리의 길이다.’ 이러한 격려는 지금을 사는 이들에게도 분명히 힘이 된다.
영화에서 보이는 현실의 정치상황
물론 <하얼빈>은 이야기의 전개가 다소 느리고, 말 그대로 ‘건조한 듯 진지하게’ 흘러간다는 점에서 일부 관객에게는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전투 장면이나 의거 장면에서 극적인 음악과 연출을 더해 감정선을 폭발시키는 방법도 있지만, 우민호 감독은 이를 절제하고 차분하게 상황을 쌓아 올리는 방식을 택했다. 이 덕분에 영화 전체가 허황된 영웅주의에 기댄다기보다는, ‘정말 그 시대에 이런 사람들이 이렇게 살고 고민했겠구나’라는 현실감을 심어준다. 관객에게는 인내심을 요구하지만, 그 인내 끝에 오는 묵직한 감동이야말로 <하얼빈>이 가진 특별한 강점이다.
여기에 배우들의 연기도 큰 몫을 한다. 안중근을 맡은 현빈의 연기는 서사를 과장하지 않고 담담하게 표현한다. 그는 안중근이라는 인물을 ‘말없이 굳센’ 동시에 ‘내면의 흔들림이 분명한’ 상태로 끌고 간다. 대사를 통해 감정을 일거에 폭발시키기보다는, 상황과 상황 사이에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 다짐을 되뇌는 듯한 미묘한 눈빛 변화로 캐릭터의 심리를 전달한다. 동지로 나오는 조우진, 유지태, 전광렬 등 중견 배우들의 연기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거창한 애국심을 노래하기보다, 항시 떠나는 자들의 슬픔을 눈빛으로만 보여주고, 은밀한 접선을 기다리는 초조함을 낮은 목소리로만 드러낸다. 그러니 영화를 보고 나면, 그저 웅장한 역사극 한 편을 본 것이 아니라, 한 세기를 뛰어넘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사람들의 숨소리를 듣고 나온 듯한 느낌이 든다.
우민호 감독의 연출 스타일 역시 이런 연기에 잘 어우러진다. 그는 이미 <내부자들>, <마약왕> 등을 통해 인물의 내면을 깊숙이 파고드는 방식을 선호한다는 걸 보여주었다. 이번 <하얼빈>에서는 더욱 절제되고 묵묵하게, 시대의 풍경을 탁하게 그려내면서도 인물의 감정선을 놓치지 않는다. 때로는 극적인 클로즈업 대신 인물들을 배경에 작게 배치한 채, 눈 쌓인 하얼빈 거리나 기차역 풍경과 함께 묘사함으로써 시대적 고독과 혹독함을 배가시킨다. 덕분에 영화의 미장센이 매우 사실적이며, 동시에 서늘한 느낌을 전달한다.
결국, 지금 계엄과 내란의 기운이 감돈다는 뉴스가 흘러나올 정도로 정치적 혼돈이 이어지고 있는 이 시대에, <하얼빈>은 다시 한 번 우리가 어떻게 역사를 기억하고,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하는지를 되묻는다. 온전한 자유와 권리를 지키기 위해 누군가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투쟁했다. 그 정신을 잊은 채, 그저 분열과 힘겨루기에 빠져 있다면, 과연 우리는 100년 전 독립투사들의 발자취로부터 무엇을 배운 것인가. 영화를 통해 고스란히 전해지는 안중근의 망설임, 결단, 그리고 최후의 총성은 지금 우리의 현실과도 끈질기게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만든다.
마지막 장면에서, 혹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우리는 이 작품이 단지 ‘역사 재현’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지금 여기’에서 여전히 유효한 독립군의 정신, 잃지 말아야 할 자유와 인간의 존엄, 그리고 무엇보다도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용기가 진정한 <하얼빈>의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그 메시지는 한국인들에게 특별한 공감대를 형성하며, 정치적 혼돈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기 쉬운 이 시점에 더없이 소중한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 몇몇 관객에게는 결코 가볍게만 볼 수 없는, 그러나 반드시 마음 한구석에 새겨야 할 작품이다. 어쩌면 그것이 <하얼빈>이 우리에게 주는 ‘차분하지만 강력한 울림’의 진짜 의미가 아닐까. 이 영화를 지루하다고만 치부하기에는, 지금 우리의 현실에 너무나도 절실한 목소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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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콘스탄틴이 되고 싶었던 동은이
이 글은 영화 [검은 수녀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글을 퍼 갈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세요. 경고했다.
예전에 영화 파묘에 대해 리뷰를 썼다가 악플(?)에 시달린 적이 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개소리 중 하나는 살다 살다 오컬트 장르를 분석하는 인간을 다 본다.라는 뉘앙스를 담은 욕이었다.(보통 그런 사람은 브런치 계정만 있지 글이 없는 경우가 99.9%라서 그런 악플은 남겨둘 가치도 없어서 그냥 지움) 물론 그 말이 이해가 가기도 하고, 그러면서 하도 욕이 하찮아서 웃기기도 했다. 그래서 다음 오컬트 영화를 리뷰하는 날엔 그 사람이 반드시 내 리뷰를 보고 아 오컬트에 이런 매력이 있구나. 혹은 아 모든 장르마다 공식이 있다더니 오컬트도 예외는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가지는 날이 오기를 바랐다.
반드시 좋은 영화여야만 했다. 덜컥 상이라도 하나 받게 되는 영화라면 어쨌거나 작품성 면에서는 무시는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알량한 생각도 있었다. 대중적이라면 오히려 더 좋을지도 몰랐다. 천만명이 봤다고 반드시 괜찮은 영화는 아닐지 몰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는다면 그래도 그 악플러에겐 대중적이라는 말로 밀어붙이기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으니까.
그러나 그 ”다음 리뷰“가 하필 이 영화일 거라고는 나조차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순수하게(?) 영화에 대한 투덜거림만 늘어놓을 수 있게 되어 버렸다. 이쯤 되면 누가 악플러인지 나조차도 구분을 못 할 지경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피식하고 웃음이 나온다.
이 영화가 글러먹은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닌데 애초에 잘못된 것은 의도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감독은 10년 전 영화인 [검은 사제들]의 세계관을 따르는 스핀오프 작품이라는 말을 했다고 하는데, 누군가가 구마자가 되고 그런 사람을 퇴마 하는 신도들이라는 이야기의 구조는 [엑소시스트] 때부터 고유하게 내려온 오컬트 장르의 특성일 뿐. 세계관을 따른다는 말은 과하다 못해서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아마도 영화의 말미에 최부제(강동원)가 등장하기 때문에 검은 사제들과 연결되어 있다, 혹은 앞으로 그가 미카엘라(전여빈)와 함께 다음 편에서 고스트 버스터(?)를 할 거라는 예상을 하게 해서 스핀오프라는 말을 붙인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런 모든 시도들은 뻔뻔하기 짝이 없게 느껴진다.
또한 모든 것이 완벽하게 반대인 등장인물들의 성별도 나를 화나게 한다. PC적인 의도는 아니었어야 할 것이다. 또한 여성 서사 어쩌고를 언급하려는 의도도 아니었어야 할 것이다. 반드시 “표절”을 피하려는 의도였어야만 그래도 화가 덜 날 것이기 때문이다.
첫 등장에서 담배를 물고 있는 유니아(송혜교)를 본 순간 깨달았다. 감독은 이 캐릭터의 설정을 앞 구르기를 하면서 봐도 영화 [콘스탄틴]에서 따왔다는 것을. 이 한 장면으로 감독은 매우 많은 면을 설명하려 했을 것이고. 또한 매우 많은 시간을 절약하려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얄팍한 의도를 숨기려면 표절을 피하기 위해 성별을 남자가 아닌 여자 캐릭터로 반드시 바꾸어야 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매우 대차게 실패해 버렸다.
송혜교라는 배우가 전작인 글로리를 통해서 어느 정도 연기력을 인정받았음에는 이견이 없지만. 감독이 원했던 비딱하면서 종교와 교리, 그리고 이단의 줄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역할에는 완벽하게 스며들 만큼의 내공은 아직 없었다. 특히 욕설을 내뱉는 연기는 마치 영화 [아수라]에서 세상 어색하게 욕을 하던 정우성이 생각날 만큼 너무도 경건하고 타격이 하나도 없어서. 저걸 진짜 오케이를 준 컷이란 말인가.라는 생각이 들 만큼 영화에 몰입하기 힘들었다.
캐릭터 기용에 있어서도 어설프기 짝이 없다.
영화 자체를 통틀어서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를 담당하고 있는 인물은 허준호 배우이다. 성직자의 몸에 깃든 악령이라니!! 그러나 영화는 구마자가 된 이후의 허준호를 그 어떤 설명이나 쓰임 없이 아주 간단하게 서사에서 아웃시켜버린다. 더 어이없는 것은 이진욱의 출연이다. 그다지 역할이 크지도 않고. 이성적인 역할, 혹은 여주인공들에게 반대하는 역할로서의 설득도 크게 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마지막의 장면까지도 야무지게 출연을 하는 것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구마(퇴마)라는 것을 진행하고 실행하기 위해 일어나는 수많은 반대들과 위험성에 대해 말하려 하는 의도는 알겠지만. 문제는 이 모든 캐릭터들을 데리고 그 어떤 설명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와리가리만 하다 시간만 채우는 불상사가 일어나기 때문에. 초반부뿐만 아니라 후반부로 치닫는 이 모든 시간들에서 위험성은커녕 지금 이 어수선한 상황에서 구마를 한다고?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렇다면 과연 오컬트 영화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도 있는 구마 의식 자체에 대한 문제가 없는가.라고 묻는다면 영화가 나를 가장 화나게 한 부분도 그 부분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두 주인공이 가진 특별함을 강조하기 위해 이런 선택을 했을 것이라는 합리적(이어야만 한다 진짜)인 의심을 할 수 밖엔 없지만. 타로카드 세 장 믿고 진행하는 템빨 크로스오버 굿판이라니. 그것도 수녀가.
진정한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는 있지만. 하지만 이런 방법은 피했어야만 한다. 차라리 구마 의식 자체에 대해 반감이 있었던 미카엘라에 대해 좀 더 많이 설명했더라면 이런 이질감은 많이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시도와 의도들이 어긋나서 보는 내내 불쾌함을 감출 수 없는 영화였다.
[마치면서]
보통 좋은 영화든 안 좋은 영화든.
영화라는 것을 보고 나면 나는 할 말이 너무 많아서 줄이고 또 줄여서 리뷰를 쓰는 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번 영화는 쓸 말조차 없어서 한참이고 빈 페이지를 띄운 채 다리를 달달 떨며 문장을 잡아내야 했다. 한동안은 오컬트 영화에 첫 출연하는 주연배우들의 덕을 보긴 하겠지만.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는 그다지 유쾌한 결과로 기억되지는 않을 영화라는 예상을 해본다.
[이 글의 TMI]
1. 부산에서 서울로 오는 표를 못 구해 강제로 연휴를 서울에서 보내게 된 1인
2. 그릭요거트 이제 지겹다. 아침으로 뭐 먹지.
3. 백오십 년 만에 우동 먹었는데 정제 탄수 최고!!!
4. 장갑 잃어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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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많은 엄마들의 헌사와 희생에 바치는 아름다운 이야기
엄마의 고생의 끝은 과연 어디까지인 걸까? 우리가 알고 있는 엄마라는 존재는 자식을 위해 대가 없이 헌신하는 존재이다. 여기 <딸에 대하여>라는 영화가 있다. 여기서 나오는 엄마라는 역할은 몹시 고달프고 슬프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아픔을 홀로 껴안고 누구에게 말하면 치부가 될까 봐 꼭꼭 숨기고 다닌다.
요양원에서 간병인으로 일하고 있는 엄마의 모습은 일을 완벽하게 해내는 것보다도 일단 자신의 외로움을 달랠 재희라는 간병 대상을 꼼꼼히 챙기며 아끼고 간병인으로서 사랑을 베푼다. 일단 여기 요양원에서도 재희는 후원 재단까지 세울 정도로 젊은 날을 힘차게 살았지만 지금은 아무도 찾지 않을 그저 노인네라고 여기고 있다.
간병인으로서 또는 외로운 존재로서의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는 엄마라는 존재는 자신도 재희처럼 독거노인이 될 수 있다는 불안감과 가족의 울타리라는 안정감이 필요하다고 느끼며 고집을 피우고 말썽까지 피우는 재희를 섬세히 돌본다. 요양원의 과장에게도 핀잔을 들으며 일을 하는 엄마라는 존재가 얼마나 고달프고 힘들었을까?
그리고 엄마라는 존재는 자식이 잘 되길 바라는 간절함을 가진 존재이다. 자신의 딸이 대학교의 강사지만 해임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동성애자였다는 것도 안다. 그린과 레인 둘은 동성 커플이다. 서로 잘 살아보려 했으나 그게 어려운 현실이기에 그린은 레인과 함께 자신의 엄마 집에서 얹혀 살아간다. 그리고 그린은 대학 강사 해임을 대학교에 따지며 복직시켜달라는 시위에 동참한다.
그 모습을 본 엄마는 마음이 찢어지고 산산이 조각난다. 자신의 딸이 적당한 남자와 만나 결혼하고 가족을 만들어야지 재희나 자신처럼 혼자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메세지는 우리들의 일상에 늘 존재하고 필요로 하는 엄마의 존재를 크게 부각시키며 세상의 수많은 엄마들의 버팀목이 필요하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가장으로서 늘 혼자만 문제를 안으며 살아가려는 이 시대의 엄마들에게 바치는 헌사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 엄마가 있기에
우리는 편하게 살 수 있지 않았을까?
※ 씨네랩의 크리에이터로서 영화 시사회에 초대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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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2주 최신 개봉영화(건파우더 밀크셰이크, 쇼미더고스트, 리스펙트, 좋은 사람, 내가 날 부를때)
[WEEKEND CHOICE MOVIE] 2021년 9월 2주차 #개봉영화
#최신영화#영화추천 #영화예고편
#건파우더밀크셰이크 #쇼미더고스트 #리스펙트 #좋은사람 #내가날부를때
영화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https://blog.naver.com/rainbbox
@Weekend Choice 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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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461개의 도시락>
15살 코우키는 부모님의 이혼으로 자유로운 영혼의 뮤지션인 아빠 카즈키와 단 둘이 함께 살게 된다. 아빠는 고등학교 3년 동안 매일 도시락을 사줄 것을 약속하고, 대신 코우키는 학교에 빠지지 않고 등교하기로 약속한다. 학교에서 아빠의 도시락이 때로는 시한폭탄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절친을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1년을 유급하여 한 살 어린 친구들과 같은 반에서 생활하는 것도 부모님의 이혼도 적응이 안 되는 코우키는 방황을 하기 시작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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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치와와> 예고편
치와와가 죽었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녀의 진짜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또래 친구들의 마스코트 같은 존재였던 '치와와'가 크리스마스를 얼마 앞두고 토막살인 된 상태로 도쿄만에서 발견된다.
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진 치와와의 친구들은 함께 자주 가던 술집에 모여 그녀를 추억한다.
하지만 이들의 이야기가 거듭될수록 명확해지는 것은 아무도 치와와의 본명, 출신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