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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남2025-03-05 00:45:34

딱 거기까지

<데드풀과 울버린>

 요즘의 마블은 앞선 비전을 제시할 때보다 그들이 세운 과거의 영광을 반추할 때 빛난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이 그랬고,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이 그랬으며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3>도 그랬다. 데드풀은 현재를 살아갈 때 가장 빛난다. 데드풀이 생사가 오가는 액션 상황에서 그런 농담들을 뱉는 것은 그가 현재에 충실한 인물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가 뱉어내는 농담이 바로 지금, 그 상황에 충분한 재미를 제공한다면 그 농담이 여태까지의, 그리고 앞으로의 설정에 미칠 영향에 상관없이 그냥 뱉어내는 것이다. 사실 그래서 데드풀 시리즈는(물론 이 영화 이전까지 두 편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한 번도 발전을 보여주거나 매너리즘을 타파한 적이 없다. 그것은 데드풀 시리즈의 태생적 한계이다. 그리고 데드풀도 거기에 별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을 것이다.


 <데드풀과 울버린>에는 다양한 맥락들이 관여되어 있다. 디즈니가 20세기폭스를 인수합병하며 폭스의 히어로들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로 편입되었고, 폭스의 히어로 영화들 중에는 엑스맨 시리즈만 있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에게 잊혔거나 망한 영화들도 많았으며 이러한 상황에 유용하기 그지없는 마블의 멀티버스 전략은 이미 실패만을 거듭했고, 뿐만 아니라 디즈니의 폭스 인수합병 과정에서 수많은 직원들이 일자리를 잃은 일도 있었기에 디즈니는 폭스와 그들의 여태까지의 작업에 대한 충분한 존중을 보여주어야 했다... 등등. 이 영화를 둘러싼 이러한 복잡한 영화 외적 맥락들을 고려할 때 <데드풀과 울버린>의 대답은 꽤 슬기로운 대답이다. 이 영화엔 엑스맨 시리즈 최악의 작품이라 평가받는 <엑스맨3> 속 뮤턴트들이 대거 등장하며, 그야말로 '실패한' 히어로들인 갬빗과 엘렉트라, 이제는 잊힌 히어로인 웨슬리 스나입스의 블레이드와 같은 캐릭터들이 마침내 제대로 된 엔딩을 맞이한다. 말하자면 <데드풀과 울버린>은 실패한 영웅담에 대한 헌사인 동시에 여태까지의 폭스의 히어로 영화에 대한 존중인 것이다. 이 영화는 실패한 영웅담에 대한 헌사라는 주제의식의 연장선으로 마블의 실패한 멀티버스 사가에 대한 자조까지 다룬다. 데드풀의 입으로 그것을 직접 언급하기도 하고, 후반부 데드풀과 울버린이 수많은 데드풀들을 피 튀기며 해치우는 장면은 멀티버스 설정에 대한 자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데드풀과 울버린>의 이러한 발걸음은 이 영화에 주어진 일종의 과제들을 성공적으로 해결했다는 점에서 영리하고, 마블 팬들이 가장 가려워했던 곳을 긁어주었다는 점에서 유쾌하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 이상을 바라보지 않는다. 사실 바라볼 생각이 없다. 그것은 이 영화가 지닌 (결국 데드풀 시리즈라는)태생적 한계이다. 이 영화가 디즈니의 폭스 인수를 둘러싼 복잡한 맥락들을 창의적으로 오락에 이용하고, 멀티버스 프로젝트를 툭 까놓고 자조한 것은 철저히 농담의 방식을 통한 것이다.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인다면 곤란하다. <데드풀과 울버린>이라는 선언을 끝으로 마블은 앞으로의 멀티버스 사가를 완전히 엎어버릴 수 있을까? 물론 마블이 이후의 방향성을 바꾸는 과정 속에서 필모그래피상의 위치를 고려할 때 <데드풀과 울버린>이 상징적인 분기점으로 남을 순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데드풀과 울버린>이 어떤 대안을 제시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래서 '<데드풀과 울버린>은 마블의 구세주인가?'라는 질문은 별로 중요한 질문이 아니다. 데드풀은 그 말 자체를 농담으로 소비하기 때문이다. <데드풀과 울버린>의 재미는 여전히 과거의 순간에 골몰하는 마블과 역시 현재의 쾌락에 몰두하는 데드풀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발생한다. 둘 중 미래를 보는 쪽은 없다. 조금 신선해질 뻔했던 <데드풀과 울버린>은 거기서 멈춘다. 물론 데드풀은 별로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작성자 . 윤동남

출처 . https://pedia.watcha.com/ko-KR/comments/PkvE6YlebLQ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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