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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작가2024-03-05 12:25:47

삶을 통째로 연기한 여자, 연기를 삶처럼 사는 여자

[메이 디셈버] 시사회 후기

전에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유부녀인 선생이 13살의 제자와 바람을 피웠고, 감옥에서 아이를 낳았다는. 슥 읽고 지나칠 때는 쉽게 평가할 수 있다. 누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에 대해 가볍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 <메이 디셈버>는 그러지 않는다. 그들의 관계를 오래도록 깊게 바라본다. 그리고 이내 관객을 불편하게 만든다.

이 과정의 호흡이 상당히 길기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조금 지루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도 이렇게 디테일하고 섬세한 감정의 변화를 보여주는 영화는 조금 힘들긴 하다. 눈여겨둘 부분이 굉장히 많아져서.

 

 

제목이기도 한 <메이 디셈버>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연인을 칭할 때 쓰는 말이다. 이 제목의 주인공인 그레이시와 조가 자기들의 이야기를 영화화하겠다는 배우, 엘리자베스를 기꺼이 집에 초대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엘리자베스가 처음 그들에게서 본 모습은 가족과 이웃이 모여 뒷마당에서 즐겁게 어울리는 장면이다. 바비큐를 굽고, 핫도그를 만들어 먹고,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아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고... 아마 이것이 부부가 사회에 보여주고 싶었던 모습일 거라 생각한다.

"우린 행복해요! 우린 서로 사랑한다고요!"

분명 그들은 문제가 없어 보인다. 다른 이웃들도 그들에 대해 칭찬 일색이며, 아픔을 건드리지 말라는 충고까지 덧붙인다. 하지만 엘리자베스가 두드린 문은 의외로 쉽게 열린다. 그녀는 문 앞에 놓인 택배를 들고 가서 전해준다. 아마 부부의 관계를 모욕하는 혐오의 메시지가 담겨있을 택배를, 그레이시는 별거 아니라는 듯 버려 버린다. 하지만 그날 밤, 조는 침대에서 홀로 숨죽여 울던 그레이시를 안아준다. 여전히 그들은 괜찮지 않고, 완전히 행복하지만은 않은 것이다.

 

불편한 노크로 그들의 일상을 침범한 엘리자베스가 영역을 확장해나가자, 그레이시는 점차 불편한 기색을 드러낸다. 단단해 보였던 그녀는 자신의 케이크를 매번 주문해 주던 이웃이 이사를 간다고 주문을 취소해버리자, 어린애처럼 엉엉 울부짖는다. 단순히 사랑 앞에서 아이가 되어 버리는 건지, 그녀가 불안정한 상황인 건지 종잡을 수가 없을 정도로.

 

그 사이 엘리자베스는 그들의 이야기에 깊게 심취한다. 점차 그레이시와 비슷한 차림을 하고 비슷한 화장을 하며 말투, 손짓과 행동까지 비슷해진다. 게다가 놀라울 정도로 빼닮은 외모 탓인지 사람들은 엘리자베스를 볼 때마다 '닮긴 닮았네'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시종일관 멍한 상태로 하루를 보내는 조는 엘리자베스와 만날 때면 제법 또렷한 눈을 한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여자의 젊었을 적을 보는 것만 같은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힌 걸까? 속마음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말이 없는 조는 엘리자베스에게 자기 직장을 보여주기도 하고, 산책을 하며 대화를 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드디어 오랫동안 자신이 숨겨놓았던 그레이시의 편지를 건네기까지 한다.

 

이 과정에서 감정에 휩쓸린 두 사람은 관계를 맺지만, 이내 자기 인생을 '이야기'라고 부르는 엘리자베스에게 질려버린 조는 그녀를 떠난다. 그리고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결국 그레이시와 말싸움을 하게 된다.

"왜 얘기를 못하는 건데? 이게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사랑이 맞는다면 말이야!"

"무슨 소리야? 네가 날 유혹했잖아!"

폭발한 조의 외침에 그레이시는 교묘하게 조에게 탓을 돌린다. 그동안 그레이시 앞에서 한 번도 어린애 인적 없었던 조는, 어린애이고 싶은 마지막 발악에 대응해 주지 않는 그레이시에게조차 질리는 듯하다.

 

그 사이, 편지를 읽고 그레이시와 완전히 동화된 엘리자베스는 홀로 독백 연기를 한다. 그레이시의 편지를 마치 조에게 말하는 것처럼 읽으면서.

"사람들은 우리가 선을 넘었다고 해. 하지만 그 선은 대체 누가 그린 걸까?"

이 대사가 영화의 핵심인 듯 아닌듯한 중요한 맹점이다. 그레이시는 영화에서 시종일관 남들을 가스라이팅 하는 모습을 보인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상황을 이끌어가려는 것이다. 어린 학생이었을 조에게 '선'을 운운하며 '잘못된 것은 우리가 아니라, 내가 아니라, 사회다'라는 메시지를 던지며 조가 생각해 봐야 했을 문제에 대해 덮어버린 것이다.

 

이제 그 메시지를 엘리자베스에게 주어버린 조는 철장 밖으로 나온 나비가 되었다. 한 번 진실을 바라본 순간부터는 다시 몰랐던 때로 돌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불안정한 사람들은 정말 위험하죠. 나는 아주 단단해요."

하지만 그레이시는 여전히 자신이 보고 싶은 모습만을 믿는 듯하다. 그 지점에서 우리는 영화 앞으로 되돌아가 엘리자베스의 대사 하나를 더 떠올리게 된다.

"그러다 보면 점점 헷갈려. 내가 좋아하는 연기를 하고 있는 건지, 싫어하는 연기를 하고 있는 건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왜 배역을 맡아요?"

"회색 지대에 있는(도덕적으로 모호한) 게 훨씬 흥미로우니까."

성관계를 맺는 연기를 해봤냐는 짓궂은 질문에도 엘리자베스는 진지하게 대답한다. 나체로 부딪히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리듬이 생기는데, 그 리듬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편이라고. 연기인지 실제인지 헷갈리게 된다고. 그레이시와 조의 삶은 이러한 리듬에 맡겨진 연기는 아니었을까. 어떤 쪽이 진실인지는 생각하는 것보다는, 좋은 쪽으로 자신을 밀어 넣는 것이 훨씬 쉬우니까.

 

더불어 엘리자베스 역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자기 자신을 뚜렷하게 정의 내리거나 온전히 안정적이고 싶지 않아 하는 심리 때문에. 영화 초반에 엘리자베스는 남자친구와 통화를 하지만 이야기를 전혀 듣지 않고, 사랑한다고 말을 끝맺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리는 등 관심이 없는 태도를 보인다. 반지는 끼고 다니지만, 아직 결혼 생각은 없다고 말한다. 이처럼 엘리자베스는 '연기'라는 매개를 통해 '도덕적으로 모호한' 사람 그 자체가 되는 것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영화를 다 보게 되면 모호해진다. 누가 잘못을 했고, 누가 피해자인지. 사회가 말하는 대로 받아들이면 그것이 정답이 되지만, 그들의 화학작용을 그대로 보았을 때 판결은 더욱 어려워진다.

다만 나는,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서도 그레이시에 대한 불편한 마음을 치울 수 없었다. 그녀가 아동 성범죄자라서가 아니다. 조가 피해자라서도 아니다. 그녀가 조를 비롯한 다른 주변 인물들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가 성인이 될 때까지 이 비밀을 지켜야 해."

정말 조를 사랑했다면 성인이 될 때까지 비밀 연애를 할 게 아니라, 조가 성인이 되어서 다른 사람을 만나도 마음이 변치 않는지 스스로 확인할 기회를 주었어야 맞는 것이다. 물론 누구의 강요도 없이 조가 자발적으로 그레이시가 사회와 격리되어 감옥에서 지내는 시간을 전부 기다려주긴 했다. 하지만 자녀가 생겼고, 자녀를 조가 한 지붕 아래서 키웠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대목이다.

 

교묘한 가스라이팅의 대가인 그레이시보다 더 무서웠던 건 엘리자베스였다. 정확하게는 엘리자베스의 욕망이랄까. 그녀는 진심으로 그레이시가 되고 싶어 한다. 그건 연기에 대한 열정이 아니다. 그저, 그 도덕적으로 모호하고 법이라는 잣대로는 판단 내리기 어려운 그 인물 자체가 되고 싶었을 뿐. 실제로는 자신이 저지르지 못할 일들을 하며 즐기는 듯한 모습이 소름 돋기도 했다.

하지만 삶을 통째로 연기한 사람과 연기를 삶처럼 사는 사람, 두 사람 다 무섭긴 마찬가지다.

 

작성자 . 담작가

출처 . https://blog.naver.com/shn0135/223373674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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