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은 확실히 반전 영화의 연속이다. '이런 문제가 생겼다. 그걸 해결하기 위해 어떤 방안을 갖고 온다. 해결된다. 그 해결됨으로써 어떤 문제가 발생한다.'가 반복되는 게 나의 삶이었다. 이거 좀 반전 아냐? 이쯤이면 됐다 싶었을 삶의 과정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부분은 아무리 봐도 놀랍다. 이런 나지만 한편으로는 아주 잘 알고 있는 지점이 있다. 바로 모든 인생이 다 똑같다는 것이다. 다음에 안 일어날 것 같았던 일이 형태만 다른 채로 돌아오는 것, 참 질리는 일이지만 이걸 피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드라이브 마이카>와 <소울>이 등장한 것 아니겠어?
이런 영화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샀던 것과 별개로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각자의 사연을 듣게 된다. 그럼 내가 가진 사연이 금세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과 세상을 향한 미안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떠오르는 한 문장. 내 인생의 구체적인 성공담과 복수담을, 세상은 그렇게 궁금해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 누군가가 구체적으로 묻기 전까지 먼저 늘어놓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는 게 좋다는 것이 내가 살면서 느낀 점이다. 그래도 내 뒤를 아내 건 자식이건 후배들이건 나의 이야기를 기억해주었으면 하는 부분이 있다. 내가 가진 상처를 그들이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때문에다. 한편으로는 이런 이야기들이 나란 사람을 바탕으로 픽션으로 제작된다면 그게 어떤 의미가 있나 싶다. 이 영화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노마 진, 그러니까 마릴린 먼로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금발머리를 한 영화 <블론드>다.
살아있단 건 너무 아픈 상처 같아
"살아있다는 건 너무 아픈 상처 같아"라는 노래 가사가 더 아프게 들려온다. 물론 기리보이라는, 우리나라 아티스트의 가사지만 이 문장은 주인공 노마 진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 아예 태어나선 안됐나. 노마 진이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는 없었다. 왠진 모르게 어머니와 함께 사는 노마 진. 이 어머니도 온전한 상태는 아니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던 어머니. 어머니는 진작에 딸을 버렸다. 보육시설에서 자란 노마 진. 자기 곁에 없었던 부모님을 뒤로하고 모두에게 사랑받는 배우가 되고자 한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잔 노마 진. 할리우드에 들어가고 난 후에는 자기 적성도 찾은 것 같았다. 이런 그녀를 세상은 마음대로 두지 않았다. 끊임없이 노마 진에게 접근하는 남자들. 노마 진이라는 사람에 메릴린 먼로라는 두 번째 이름이 붙어도 그녀의 처지는 변하지 않았다. 순수하게 접근하지 않는 사람들. 노마 진, 마릴린 먼로는 험난한 세상을 딛고 홀로서기에 도전한다.
<스펜서>
올해 3월 <스펜서>가 개봉했다. 비극적인 삶을 살다가 간 다이애나 스펜서. 파블로 라라인 감독을 직접 인터뷰한 건 아니지만 난 감독이 이를 전면으로 보여준 게 다이애나가 느낀 행복감을 묘사하고 싶어서 그랬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심리 호러에 가깝게 등장인물의 목을 옥죄서 후반부의 카타르시스에 힘을 주는 것이다. 이는 분명히 효과가 있었다. 이후 스펜서가 그려나갈 인생의 청사진이 더 슬프게 느껴지기도 한 것이다. 또한 '달리기'라는 운동의 성격을 차용해서 분출하는 에너지를 그린 건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 충분하다. 반대 측면에서 스펜서의 억압받는 삶을 보여주는 방식도 흥미로웠다. 영화에서 스펜서가 밤중에 슬쩍 일어나서 부엌에 몰래 들어가 뭔가를 먹는 장면이 있다. 이를 집사가 감시하는 장면이 기억난다. 기본적인 욕구가 제어되는 스펜서의 일생을 암시한 좋은 연출이었다. 스펜서가 뭐만 하면 헛구역질을 하는 것도 이와 비슷한 선상에 놓여있다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스펜서의 주변인이었던 매기는 아예 성적 취향까지 숨겼었다. 이렇게 파블로 라라인 감독은 섬세한 구석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해서 답답한 스펜서의 일생을 깔끔하게 묘사했다.
이번엔 <블론드>다. 이 <스펜서>와 공통점이 많은 것 같다. 여성 원톱 주인공. 아나 데 아르마스 / 크리스틴 스튜어트라는 스타 여배우를 섭외했다는 것. 한 사람의 일대기를 다뤘다는 것. 남편 캐릭터를 묘사하는 방식. 베를린의 선택. 뭐 굳이 꼽자면 더 있을 여러 공통점이 있다. 이는 의상이라는 키워드에서도 읽을 수 있다. 노마 진은 불필요하다고 느낄 정도로 옷을 꽉 껴 입는다. 몸매가 드러나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스펜서>에서도 볼 수 있다. 또 자기에 대한 사진을 찍는 연출은 나름 꼼꼼했다. 역시 <스펜서>에서도 볼 수 있다. 엔딩까지 러닝타임을 끌고 가면 볼 수 있는 주인공의 처지도 꼽자면 공통점이 있다. 나체/질주라는 것은 다시 어린아이의 형태로 돌아감/원초적인 에너지 발산이라는 지점에서 '다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주인공'을 묘사한 방식으로도 볼 수 있다.
그리고 <패왕별희>
그 대신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스펜서>는 단적인 기간만 보여줬고 이 <블론드>는 긴 일대기를 보여줬다. 이는 후자가 <패왕별희>와도 비슷한 느낌이 든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형식은 <패왕별희>를 빌렸지만 이야기하고자 했던 바는 <스펜서>와 비슷했던 것이다. 다시 <패왕별희>로 돌아가서, 이 영화에서 장국영이 맡았던 주인공은 철저하게 시대에 희생된 인물이다. 물론 후반부 공리 캐릭터에게 폭언을 하는 부분이 제시되긴 하지만 이 사람은 정체성의 혼란을 문화 대혁명이라는 시간적 배경 아래에서 겪고 있다. <패왕별희>는 이 구분을 명확하게 했다. 바로 '경극에는 여자가 출연할 수 없음'이라는 설정과 퀴어 캐릭터라는 모순이 극에 창의성을 부여한 것이다. 이 때문에 인물은 선택지가 없다. 당시에 보수적이었던 중국 사회가 없었어도 답답한데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은 것이다. <박하사탕>도 이 <패왕별희>에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주인공 영호는 자기가 선택했지만 분명하게 제시되는 시간적 배경 아래에서 점점 미쳐갔다.
다시 쓰자면, 이 영화는 <패왕별희>의 형식을 빌려 <스펜서>의 주제를 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닫혀있던 시대상. 그리고 그 안에서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던 여성 주인공. 공통점과 차이점을 기존 영화에서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는 분명한 특이점을 갖는다. 그런데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불필요한 게 너무 많아서.
불필요한 것으로 가득 찬
원작 소설은 마릴린 먼로의 삶을 픽션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라고 한다. 사실 원작 <블론드>를 읽지 못했다. 그래도 이 영화가 각색하고자 했던 지점이 과연 무엇인가? 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는 군더더기로 이루어져 있다. 왜 영화에서 마릴린 먼로(아나 데 아르마스)가 신체부위를 노출해야 하며. 아버지를 사칭해서 청혼하는 남자와 왜 키스를 해야 하며. 구강성교 장면이 굳이 들어가야 할 이유는 무엇이며. 유산하는 모습을 굳이 구체적으로 연출한 의도는 무엇이며..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장면이 영화 구석구석 들어가 있다. 영화는 소설과 달라서 장면마다 제작자가 연출하고 싶었던 의도라는 게 있다. 아름다운 이미지를 보여준다던가, 지적인 소재로 이야기를 꼬아놨다던가, 따뜻한 감동으로 관객에게 에너지를 준다던가 하는 것 등등이 연출가 될 수 있다. 왕가위, 크리스토퍼 놀란,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왜 뛰어난 감독일까를 생각해보면 관객에게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진정성 있게 전할 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냥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아름다운 이미지? 영상미? 내용이 아름답지 않아서 그렇게 와닿지 않는다. 여성 혐오적인 시대상? 그렇다기엔 극 중 마릴린 먼로가 고르는 선택지가 '단지 아버지의 존재가 어렸을 때부터 없었기 때문에'로 퉁쳐진다. <패왕별희>에서 장국영 캐릭터가 마음대로 자기 삶을 개척할 수 없었던 것과는 정반대다. 각본의 허술함이 너무 대놓고 드러나는 것이다. 아버지를 사칭해서 청혼하는 남자랑 같이 사는 여자가 어디 있어? 감독은 이런 노마 진의 삶이 기구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는지 이 시퀀스의 영상미를 아름답게 뽑았다. 근데 영상 아름답게 뽑은 게 대수인 건 아니다. 일단 이 사람은 여기서부터 그냥 쓰레기인데 여기에 또 넘어간다. 이런 식으로 분명히 처음부터 끝까지 노마 진은 선택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패턴으로 계속 속는다. 이럼 영화의 설득력과 진정성이 떨어진다. 자기가 선택한 것 아닌가? 뭐 어쩌라는 말인가? 여성 혐오적인 시대상에 대해 공부하려면 같이 업로드된 넷플릭스의 마릴린 먼로의 다큐를 보는 게 더 이득이지 않을까?
느껴지지 않는 미학적 아름다움
이렇게 줄거리랄 것도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일어난 애정결핍'이 무려 2시간 40분 동안 반복되기 때문에 리뷰랄 것도 없는 영화의 줄거리가 반복되고 있다. 이야기가 후반부에 노마 진이 어떤 처지에 놓여있다는 거 빼고는 같은 패턴의 연속이기 때문에 지루한 연출 방식이 더 고루하게 느껴진다. 또 주인공 왜 옷을 안 입고 사는지 궁금하다. 그냥 가벼운 잠옷 정도 입을 수 있는걸 왜 저렇게 나체로 자주 있어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이렇게 반복적인 이야기를 병렬적으로 제시하다 흐물흐물하게 끝나는 엔딩을 보면서도 물음표 쳐지는 기분을 부정할 수 없다. 과연 어떤 걸 예술가로서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무의미하게 자극적인 내용의 반복이라 무엇에도 몰입할 수 없었던 답답한 이야기의 반복이었다. 영상미를 이쁘게 뽑았다기엔 내용에서 받쳐주지도 못했으며 왜 마릴린 먼로를 소재로 삼았는지도 의문이다. 또 굳이 실존인물의 실제 이야기인 것처럼 이야기를 쓴지도 영화에서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다. 그녀의 삶을 더 이해할 수 있었냐? 아니오. 실제로는 당당한 분이었다고 하는데 이 영화에서는 그냥 애정결핍에 시달리는 인물이다. 영상미가 예뻐서 시각적인 쾌감이 분명했나? 이야기가 구려서 집중이 잘 안됐다. 또 계속 같은 이야기만 반복하니(심지어 사실도 아님) 집중도 안 된다. <스펜서>처럼 힘을 줄 수 있는 곳에서 임팩트를 줘 카타르시스를 줬나? 아니오. 이 영화는 그냥 아무것도 아니다. 단지 못 만든 영화가 되는 셈이다. 이렇게 직업윤리적으로 성실하지 못한 영화를 보면 많이 아쉽다. 단지 자극적이기만 한 것이 모든 예술의 능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 이렇게 두루뭉술한 영화더라도 분명한 강점은 있다. 일단 영상미 자체는 잘 뽑았다. 계속 반복되는 내용이라 예쁜 영상미도 보다 보면 질리지만 뭐 화면비율이나 조명을 사용하는 방식은 인상적이다. 또 아나 데 아르마스의 명연기가 돋보인다. 노마 진은 극에서 엄청 자주 운다. 이 눈물연기의 패턴이 점점 달라지며 임팩트를 주는 건 대단했다. 또 아버지의 부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극본이 좀 과하게 전개되는데, 이를 구현하는 표정연기나 눈빛 연기도 좋았다. 주요 시상식에서 이름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퍼포먼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