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란2024-04-01 23:59:03
예술은 길고,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
듣고 있었기에 들리지 않았다.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 Ryuichi Sakamoto | Opus, 2023
감독: 네오 소라
예술은 길고,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

첫인상은 ‘무성 영화 같다’였다. 피아노 선율이 쉴 틈 없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시선은 류이치 사카모토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특히 카메라가 그의 얼굴과 정교하게 움직이는 손가락을 비출 때면 더욱 들리지 않았다. 듣고 있었기에 들리지 않았다. 그의 연주에 빠져들수록 영화는 숨죽였고 그 결과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는 누구나 빠져들고 마는 이야기로 다가왔다. 인물의 표정과 행동이 유일한 언어가 되어 관객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 무성 영화처럼, 류이치 사카모토의 언어는 본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끌고 마침내 관객의 ‘무엇’이 되었다.
무엇, 시작은 류이치 사카모토란 단 한 사람의 얘기다. 그만이 할 수 있는 말들은 영화 끝에 다다른 관객에게 각자 보관해 왔던 ‘나’만의 사적인 기억을 들추게 한다. 흐르는 강물을 막을 수 없듯, 기꺼이 따르고 마는 이 감정적 동요는 그의 내밀하고 친밀한 연주와 계속 함께 흘러간다. 물론 화면 속엔 피아노와 연주자 그리고 악보가 전부다. 드라마 장르가 가진 기승전결 형식의 이야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상영시간의 99%가 그의 연주로 채워져 있고, 대사 분량은 1분도 채 되지 않는다. 류이치 사카모토의 열렬한 팬이 아닌 이상 20곡 전부를 알기란 쉽지 않은데, 자막(곡명)도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는 관객을 불편하게 하거나 난처하게 하지 않는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영화의 일반적인 요소를 과감히 생략해 조금 낯설 뿐이다.

이 작품의 가치는 작곡가의 이름만큼이나 유명한 곡보다, 피아노를 직접 연주하는 류이치 사카모토의 행위에 있다. 집중해서 볼 수밖에 없는 그의 라스트 댄스와 곡과 곡 사이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짧지만 버릴 수 없는 공백. 그것은 피아노 연주란, 눈에 보이는 외적인 행위가 아닌 비워진 화면 속에서 파생된 내적 파동의 결과물이다. 듣고 있었기에 들리지 않아, 직접 느낄 수밖에 없는 진동은 견고하고 세심할수록 더 깊고, 더 격렬하게 퍼지며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의 내면에 닿는다.
공백과 진동. 내겐 바람의 건축가 유동룡(이타미 준)의 대표 건축물 중 하나인 '풍 미술관'으로 걸어 들어간 순간과 이어졌다. 벽 틈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과 햇빛. 마치 한 줄기 바람이 미세하게 열린 창문 사이로 들어와 커튼을 잔잔하게 펄럭이는 장면을 오랫동안 보는 것 같았다. 계속 바라보며 간직하고 싶다가, 일순간 자기 자신에게 한없이 솔직해지고 싶은, 신비롭고도 한편으론 무척이나 고마운 순간. 그의 연주에서 풍 미술관으로 연결되는 흐름은 내겐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내게 아주 긴 내적 환호를 불러일으켰으며, 피아노 연주와 건축물에 담긴 그들만의 이야기와 세상을 바라보는 각각의 시선에서 예술이란 공통 언어를 발견한 순간이었다.

예술은 한 사람의 지극히 사적인 지점에서 탄생한다. 세상에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순식간에 불특정 다수의 심적 공간에 스며든다. 예술의 진정한 힘은 개인의 예술이 무수히 많은 개인에게 무수히 많은 방식으로 전달되는 것이며, 영향을 받았던 개인들이 각자 ‘자기 자신’이란 공간 안에 숨겨져 있던 작은 문을 발견하게 하는 것에 있다. 나를 온전히 바라보게 하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어루만지게 한다. 나아가 그 힘으로 나만의 예술을 만들어 내도록 격려하기도 한다. 어쩌면,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는 네오 소라 감독이 아버지가 아닌 예술가, 류이치 사카모토의 마지막 연주를 카메라에 담는 순간, 첫 관객이 되어 빚어낸 예술 작품일지도 모른다.
개인의 예술이 또 다른 개인의 예술로 끊기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힘.
더욱더 많은 이가 개인의 예술에 지극히 사적으로 동요했으면 좋겠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그의 예술은 길다, 모두가 동의하지 않더라도.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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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4주 최신 개봉영화
2022년 11월 3주 개봉영화!
올빼미 he Night Owl , 2022
영화 "올빼미"는 밤에만 앞이 보이는 맹인 침술사가 세자의 죽음을 목격한 후
진실을 밝히기 위해 벌이는 하룻밤의 사투를 그린 스릴러입니다.
조선왕가의 의문사인 소현세자의 죽음에 새로운 캐릭터를 가미하여 완성한 영화입니다.
인조실록에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 같았다" 로 기록된 역사적 미스터리에서 출발하여
'맹인 침술사'라는 신선한 설정을 결합해 색다른 재미를 안길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믿고 보는 배우 유해진과 류준열의 세번째 만남인데요
유해진은 이번 작품을 통해 연기 인생 처음으로 '왕' 역할에 도전하며
새로운 캐릭터를 탄생시켰습니다
영화에서 처음 다뤄지는'주맹증'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소재 '맹인 침술사'
충무로 베테랑부터 블루칩까지 완벽한 캐스팅 라인업으로
폭발적인 시너지 예고하는
이번 주 THIS WEEK MOVIE "올빼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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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이없어서 재미있었던 '지옥의 화원' 리뷰
*본 본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지옥의 화원
(2022.12.15 개봉)
감독: 세키 카즈아키
출연: 나가노 메이, 히로세 아리스 등
안녕하세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 선정된 에깸입니다 ♥
이번에 지옥의 화원 시사회에 초청받아서 개봉 일주일 전 미리 보고 왔는데요
사실 기대 안 했던 작품인데 ㅋㅋㅋㅋ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고 싶어요~
지옥의 화원은 오피스 코믹 무비인데요
힘이 세다면 '최강 여직원' 타이틀을 달 수 있는 대양아치 세계관(??)을 배경으로 했고요
왕년의 양아치, 폭주족들이 사내 파벌을 형성하여 싸우는 와중
신입으로 들어온 란으로 인해 계급도가 바뀌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은 지극히 평범한 여직원인 나오코...
아주 강력한 스포일러죠? ㅋㅋ
하지만 이 말만 듣고 멋대로 추측하며 영화를 보셨다가는 큰코 다칠 수도 있는 게 지옥의 화원인 거 같아요
네??! 쟤가 저런 애였다고요!!?? 의 연속인 영화랄까...
ㅋㅋㅋㅋ 그게 지옥의 화원 매력 아닐까 싶어요
지옥의 화원이 좋았던 이유는 또 있는데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젠더의 이미지를 뒤바꿨다는 거예요
사실 이런 양아치,, 폭주족,, 의 싸움은 흔히 남성들 사이에서 일어나잖아요?
우리나라만 해도 여자끼리 이렇게 피 흘리며 싸우는 영화 많지 않고요. 남성과 여성의 이미지를 완전히 체인지 해 놨더라고요
보통의 영화가 지나가는 여자에게 시비 거는 남자 폭주족, 그런 폭주족을 한 방에 무찌르는 남자 주인공 이었다면!
지옥의 화원의 경우 지나가는 남자에게 시비 거는 여자 폭주족, 그런 폭주족을 한 방에 무찌르는 여자 주인공 이 되었습니다 ㅋㅋ
끝까지 로맨스가 나오지 않는 것도 한몫 한 거 같아요. 사알짝의 로맨스가 첨가되어 있긴 하지만, 그마저도 코믹 요소로 사용되니까 끝까지 지켜봐 주세요. 엔딩이 완전 대반전이거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지옥의 화원은 100 퍼센트 코믹으로 즐길 수 있는 영화예요. 조금의 신파, 조금의 스릴 전! 혀! 없고요
싸우면서 피가 철철 흐를 텐데 무섭지 않냐고요? 피도... 웃기게 나더라고요(??) 중간중간 일본 만화틱한 요소들이 등장하는데 그게 젤 웃겼어요. 주인공끼리 싸우는데 염력 뿜으며 여기저기 날아댕기고, 나레이션으로 '만화에선 이럴 때 혼자 등장하지, 그렇지!' 하기도 하고요 ㅋㅋㅋ 걍 진짜 무협만화 세계관,,,
포스터를 왜 저렇게 만들었을까 싶을 정도로... 보고 나면 생각보다 괜찮은 영화였거든요
사실 포스터 보고 이건 재미없을 거야 했던 편견도 있는 거 같구요. 미리 말하자면 대단한 스토리 라인은... 없습니다
줄거리가 이렇고 연출이 이렇고 말하기에도 어이없달까요. 그래도 기승전결 하나 만큼은 완벽한 거 같기도요 ㅎㅎ
지옥의 화원!
2022 보내야 하는 이 연말에 웃으며 즐길 수 있는 영화니까요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영화 찾고 계시다면
12월 15일 개봉 예정인
지옥의 화원 추천합니다~
*스토리: ★★★
*연출: ★★★★
*영상미: ★
*연기: ★★★★
*OST: ★
*재관람 의사: 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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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릭터 뒷이야기가 궁금해지는, <승리호>
캐릭터 분석, 작품 분석에(리뷰 전체적으로)
영화 <승리호>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1. 귀차니즘 4점: 로봇이 이래도 돼?
2. 자본주의 5점: 자본주의 패치 1000%
3. 미적 감각 1점: 아름다움을 추구하지만....
4. 안전욕구 4점: 누구보다빠르게 남들과는다르게
5. 꿈 5점: 모든 불편함을 견디는 원동력
귀차니즘, 로봇이 이래도 돼?
업동이는 첫 등장부터 무기력한 대사, 어슬렁거리는 동작과 함께 등장한다.
전직 전투로봇이라고 하는데, "오늘 정말 일하기 싫다", "귀찮아"라는 말을 상습적으로 한다.
자본주의, 자본주의 패치 1000%
팀원들의 자금, 주로 부채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계산해서 알려준다. 팀 작업을 계획할 때, 아주 확실한 자기주장을 해서 자기 몫을 적극적으로 쟁취한다.
게다가, 도끼와 전기총까지 꺼내놓고 진행되는 동료들과의 카드게임에서도 한몫 단단히 챙기기 위해 타짜 기술을 쓰기까지 한다.
미적 감각, 아름다움을 추구하지만....
도로시 얼굴에 업동이가 해준 화장을 보면 미적 감각이 끔찍스럽게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숙원사업이자 꿈이던 목표를 이룰 때는 '그 디자인'을 자신이 고른 것 같지 않다.
사람들이 옷을 고를 때 '저 마네킹에 입힌 옷 싹 다 주세요'하듯이, "머리에서 발 끝까지 이렇게 해주세요"하고 결정하지 않았을까?
안전욕구, 누구보다빠르게 남들과는다르게
위험해 보이면 동료 중 누구보다도 안전한 방법으로 가장 먼저 몸을 피한다. 도로시가 폭파할 것이라고 생각해 몸을 피할 때, 인간 동료들은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감싸는 데 그쳤지만, 업동이는 제 방까지 달려가 문 뒤로 몸을 숨겼다.
또한, 위험한 일에 자신을 찾으면 "왜 또 나야"하며 나서고 싶지 않다고 어필하기도 한다.
꿈, 모든 불편함을 견디는 원동력
위험한 게 싫고, 귀찮은 것도 참 싫은 로봇.
하지만,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하는데, 그 이유는 외모 개조 및 피부 이식이라는 꿈이 있기 때문이다.
그 꿈을 위해 착실하게 돈을 모은다.
모험 이야기의 매력: 개성 있는 등장인물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승리호 조종사 태호이다.
어리버리한 청년으로만 보이지만, 후회로 가득한 과거를 반성하며 치열한 삶을 살아가는 인물로, 관객의 흥미를 끈다. 하지만, 이 주인공만큼이나 매력적인 동료들이 등장한다.가냘퍼보이지만예리한 관찰력과 판단력, 카리스마를 겸비한 장선장.
험악한 인상을 가졌지만, 귀엽고 불쌍한 존재에게 누구보다 약해지는 박씨.
로봇 탈을쓴 사람같은 업동이.
여기에 반동인물인 설리반도 온화한 첫인상과 달리 잔혹한 성미를 드러내며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하지만, 이토록 매력적인 각 캐릭터들의 특성이 영화 내에서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충분한 배경 설명, 부족한 인물 소개
승리호의 러닝타임은 총 2시간 16분이다.
짧지 않은 시간이지만, 사건에 얽힌 모든 이야기를 다루기에는 부족했다.폐허가 된 지구, 우주로의 진출이라는 배경은 설리반의 기자회견이라는 상황과 수려한 특수효과로 충분히 설명되었다.
하지만, 인물들간 관계와 각 인물들이 주요 결정을 내리는 데 영향을 준 사건 등은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가장 궁금한 것은 "업동이는 어떻게 전투로봇에 어울리지 않는 인격을 지니게 되었을까?", "설리반은 무슨 병을 앓기에 지킬과 하이드의 상태를 오가는 것일까?"
인격을 지닌 로봇과 공존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 애니메이션 중 <또봇>이라는 작품 시리즈가 있다.
초등학생 어린이들과 인공지능 로봇이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갖가지 사건들을 해결해가는 내용이다.
그런데, 한 에피소드에서 섬찟한 주제를 다뤘다. 또봇들이 질투로 인해서 파트너들의 말을 듣지 않고 떠나버리는 장면이 있었다.
어린이용 애니메이션 버프를 받아 다시 돌아와 화해하는 단순한 해프닝으로 마무리되었다.또, 게임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에서는 외형조차 인간과 꼭 닮은 안드로이드들이 '신인류'임을 자처한다.
처음엔 소수의 안드로이드만이 인간의 명령을 거슬러 자의로 움직이지만, 점점 많은 개체들이 인간과 동등한 권리보장을 요구하며 파업, 시위 또는 테러를 벌인다.인류만 놓고 보더라도 분쟁이 끊이지 않고, 동식물과의 갈등은 환경문제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 인간보다 튼튼하고, 지식도 더 많이 축적된 존재들이 합류한다면?우리는 그런 존재와 함께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을까?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서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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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출 필요가 없는, <로스트 도터>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로스트 도터 The Lost Daughte, 2021
미국, 그리스, 드라마, 122분
감독: 매기 질렌할
감출 필요가 없는, <로스트 도터>
<로스트 도터>는 매기 질렌할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이자 여성이 여성의 삶을, 여성의 이야기를 그린다는 점에서 눈에 띄는 작품이다. 하지만, 여성이 숨기고 싶어 하면서도 분출하고 싶어 하는 감정'을 포착하고 이를 집요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 더 주목해야 한다. 단순히 여성이라서가 아니라, 그들만이 갖고 있는 특수한 상황과 당연하다 여겼던 지침서(가령 모성애라든지, 또 모성애라든지-)를 강제로 품어야 했던, 여성의 심리를 어떠한 생략과 축약 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엘리나 페란테 작가가 '잃어버린 사랑'(<로스트 도터>의 원작)을 영화화하는 조건으로 매기 질렌할 감독의 연출을 요구한 건, 이러한 원작의, 나아가 영화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남성이 여성의 언어를 해체해 보여주는 것보다 여성이 여성의 언어를 해체할 필요 없이 쭉 늘여놓는 것이 감정적 동요와 이해를 더 효과적으로 불러일으키는 법이니까.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이 주는 매력보다, 방법이 갖는 의미를 음미하는 게 <로스트 도터>를 보는 첫 번째 각도다.
출처: 영화 <로스트 도터> 스틸컷(다음)
고요한 해변에 돌연 보트가 침범한다. 이미 해변을 점령한 대가족의 막무가내식 태도도 눈감아줬는데, 자기 집 앞마당에 차를 끌고 들어오듯, 보트를 밀고 들어오다니. 모처럼 그리스로 휴가를 온 레다의 심기가 뒤틀리기 시작한다. 평온한 하루를 모아서 그동안 쌓여있던 피로를 풀고자 했는데, 쉽지 않다. 레다는 그들의 왁자지껄한 소리를 백색소음으로 생각하며 차분히 휴가를 즐기려 노력한다. 하지만, 자꾸만 시선이 불청객들 사이로 향한다. 니나와 엘레나, 젊은 엄마와 어린 딸이 서로에게 꼭 붙어있는 모습을 보면서 레다는 격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깊게 묻어놨던 기억이 불쑥 가슴 밖으로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니나와 엘레나의 모습과 젊었던 레다와 어린 두 딸(비앙카, 마사)의 이야기는 시도 때도 없이 겹쳐진다. 엘레나가 니나의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떼를 쓸 때, 비앙카는 레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엄마의 머리를 때린다. 엘레나가 갑자기 해변에서 사라졌을 땐, 바다에서 마사를 안고 애타게 비앙카를 찾는 (패닉 상태에 빠진) 레다의 모습이 펼쳐진다. 레다는 자꾸만 젊었던 때로 돌아가 두 딸이 자신을 얼마나 힘들고 지치게 했는지 떠올린다. 그럴수록 영화를 보고, 쇼핑을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끝까지 휴가를 휴가답게 보내고자 한다. 과거를 생각하고 싶지도, 또 얽매이고 싶지도 않았던 레다는 고집스럽게 휴가를 즐긴다. 그러나 그녀의 계획은 니나와 엘레나가 눈앞에 나타난 순간, 공중분해됐고 결과적으로 실패한다.
레다는 잠에 빠져있다가 침대를 점령한 매미에 화들짝 놀라고, 해변에서 자리를 바꿔 달라는 캘리(니나의 형님)의 부탁을 거절하고 욕을 먹는다. 그날 저녁엔 누군가가 던진 솔방울에 등을 크게 다치기도 한다. 관리인의 추파를 불편해하면서도 여자로서의 욕망을 참지 못해 벙찐 유혹을 날리고 도망친다. 사라진 엘레나를 잘 찾아주고는 엘레나의 인형을 훔쳐와 아이를 돌보듯 인형을 품고 있기도 한다. 인형을 잃어버린 엘레나가 엄마(니나)와 가족들을 미치게 만드는 걸 보고도 레다는 "찾을 수 있을 거예요"라 말하며 침묵한다. 대체 레다는 왜 이러는 것일까. 휴식을 즐긴다고 해놓고 왜 이리 예민하고 초조해하는 걸까. 나아가 왜 그렇게 자신을 포함한 타인에게 못되게 구는 걸까. 답은 정해져 있다.
정확히 말하면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고, <로스트 도터>는 이를 숨기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출처: 영화 <로스트 도터> 스틸컷(다음)
젊은 시절의 레다는 일곱 살 비앙카와 다섯 살 마사를 두고 집을 나갔다. 자신의 진짜 가치를 알아봐 주고, 존재 이유를 본능적으로 일깨워 준 남자에게 주저 없이 뛰어들었다. 불륜을 어쩔 수 없이 하게 됐다고 정당화하지도 않았다. 그저 즐기고 또 누렸다. 아이들과 통화를 하고 나면 매번 참았던 (속마음을 비집고 나오던) 말들을 쏟아냈다. 정제되지 않은 말은 레다에게 자유로, 해방으로, 망가졌던 나를 다시 원상 복귀하는 방법으로 이어졌다. 그녀에게 불륜은 도덕적인 문제가 아닌 생존의 문제였다. 그렇기에 두 딸을 버린 일은 나를 온전히 존중해주는 사랑을 위한 일이라 말해도 무방했다. 그리고 니나는 그때의 레다가 되어가는 중이었다. (영화의 두 번째 각도는 니나와 레다가 서로를 끊임없이 의식하는 지점에서 더 눈에 띄고 그리하여 관객이 모성에 더욱 몰입할 수 있도록 만든다.)
<로스트 도터>는 레다의 과거를 그녀가 스스로 자백하기 전까지 드러내지 않는다. 레다가 끊임없이 과거의 기억에 허우적대는 모습을, 숙소에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등대의 불빛과 바닷바람과 함께 노출한다. 비앙카와 마사를 홀로 키워야 했던 레다가 점차 이성의 끈을 놓을 때마다 현재의 레다에겐 태풍이 불어닥친다. 과거의 정신적 고통이 현재의 신체적 고통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모든 것에 지쳐버린 니나의 눈에서 중년의 레다는 그때의 파편들이 비바람과 함께 몰려오는 걸 느낀다. 그녀는 니나를 이해하고 동정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혐오한다. 현재의 니나와 과거의 자신을 잇는 걸 멈추지 못하는 스스로를 답답해하면서도, 그 짓을 그만두지 않는다. 레다는 두 딸을 버렸던 자신의 선택을 바닷물에 쉽게 흘러보낼 수는 없었다. 이미 쓰인 이야기를 다시 고쳐 쓸 수 없는 것처럼, 레다는 몸에 새긴 선택의 결과들을 지울 수 없었다. 솔방울에 맞은 상처를 굳이 치료하지 않은 점이 대표적이다. 레다는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죄다 자신에게서 출발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출처: 영화 <로스트 도터> 스틸컷(다음)
모성애. <로스트 도터>에서 모성애는 감출 필요가 없는 이야기다. 너무 많이, 또 빈번하게 여러 인물과 사건, 장치, 나아가 상징으로 쓰이는데, 전부 사실적이고 날카로워서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무뎌지기 힘든 화두이기도 하다. 어렵게 임신한 캘리에게 당신도 아이를 낳아보면 알 거라는 마치 저주와 같은 말을 내뱉는 레다부터 레다 자신과 현재 미치기 일보 직전인 니나, 레다가 엄마에게 받았던 인형(미나), 엘레나의 인형, 솔방울, 인형 속에 든 지렁이, 끊기지 않은 과일 껍질까지 영화에서 모성애는 다양한 형태로 속을 내보인다. 엘레나가 인형을 끝까지 잊지 못하는 이유는 자식을 향한 맹목적이고 헌신적인 엄마의 사랑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비앙카가 레다에게 과일 껍질로 뱀을 만들어 달라 조르는 행위와도 일치한다.
작품 세계에서 등장하는 모든 것이 '모성애'로 연결됨에도 불구하고, 우린 모성애를 인간의 본능이라 선뜻 말하기 어렵다. <로스트 도터>가 말하는 모성은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동시에 어떠한 방식으로도 확인받을 수 없는 것이다. 간단하게 영화가 품은 모성애일 뿐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건, 현실 속 모성애도 같은 껍데기와 내용물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선천적이고 즉각적으로 인지되는 인간의 습성 중 모성애는 무엇일까. 차곡차곡 쌓여가는 감정이나 규칙들의 합인가? 처음부터 생존의 문제로 인식해야 하는 중대한 사안인가? 모성은 여성에게 어떤 자기 확신과 자기만족을 주는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레다의 말처럼,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마음이다. 알 수 없지만,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기도 하고 알아도 마음처럼 쉽게 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왜 레다에게 모성은 자기 발목을 잡는 사랑이 되었을까.
모성과 '나'를 구분해서 봐야 한다. 레다가 끝내 어린 두 딸을 두고 집을 나간 건, '나는 늘 나인가'란 질문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로스트 도터>가 지속적으로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는 레다의 얼굴에 집중하는 것 또한 물음에 대한 일종의 해석본(세 번째 각도)이다. 복잡 미묘한 니나의 표정과 모성에 확신하는 캘리의 태도까지 여성에게 모성은 '나'를 만드는 하나의 요소다. 또한 모성은 일방적인 표현이 아니라 엄마와 아이가 서로에게서 주고받는 표현으로 작동된다. 정석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요소란 건 분명하지만, <로스트 도터>는 모성이 여성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는 가를 조명한다. 모든 엄마가 모성을 똑같은 각도와 동일한 태도로 인지하고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부 개인의 선택과 결정에 따라 모성을 뒤틀거나 자신만의 모양을 찾는다. 그리하여 모성은 경험하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고, 경험했다고 해도 오롯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채울 수 없다.
출처: 영화 <로스트 도터> 스틸컷(다음)
따라서 "절 나쁘게 생각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라고 부탁하면서 "지나가긴 해요?"라 묻는 니나의 말은 상당한 파장을 일으킨다. 여러 갈래로 퍼져나가 상반된 시각을 제시한다. 레다가 자신을 이기적인 엄마라고 소개하고, 니나에게 훔친 인형을 돌려주며 "난 비뚤어진 엄마니까요"라며 자조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레다는 니나를 함부로 나쁘게 판단할 수 없다. 자기 자신조차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비뚤어지고 이기적인 엄마라 말하지만, 그녀는 그때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 자식을 끔찍한 부담이라 말하던 레다는, 본인의 판단으로 선을 넘었고, 그 결과 허울뿐인 자유를 얻었다.
여성에게 모성이 들어오는 순간, 엄마란 존재가 불쑥 튀어나와 존재감을 발휘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예기치 못한 사건도, 좋지 않은 징조도 아닌 자식을 낳은 여성이라면 반드시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이미 엄마의 자식이었을 내가 느끼는 불변의 것이다. 레다는 엄마의 존재를 처음부터 부정했다. 그녀에게 엄마는 엄마의 의무를 저버린 여성이었다. 따라서 두 딸에게만큼은 좋은 엄마가 되겠다 다짐했고, 잠시 동안 그녀는 '나'를 제외하고 '엄마'가 됐다. 엄마가 '나'를 이루는 수많은 자아 중 하나임을 인식하지 못했다. 결국 현실에 치이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 검열했고, 그 힘마저 빠져나가자 질식할 것 같다며, 엄마이길 포기했다. 엄마로 일할 능력이 되지 않아 그만두겠다는 듯이 말이다.
마치 엄마가 언제든 선택할 수 있는 직업 중 하나인 듯이.
<로스트 도터>가 말하는 모성애는 다양하다. 레다는 모성을 한때 악으로 설정했다. 다른 것은 자신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었지만, 모성은 그럴 수 없는 범주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본 니나는 레다의 모성을 모성이라 부르지 않는다. 범죄이자 태만이었다. 딸의 인형을 일부러 훔쳤다는 레다를 보며, 순간 니나는 그녀에게 이해받기를 거부한다. 왜? 니나의 모성은 다른 지점에 있다. 그렇다면, 니나의 모성은 켈리가 가진 모성과 같은가. 아니다. 그들의 모성은 교집합을 이루는 부분이 없다. 각자의 모성이 남기는 진득한 진액만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출처: 영화 <로스트 도터> 스틸컷(다음)
각도를 세우고 끝을 달리던 영화는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모성으로 여성을 이해할 수 있는가? 아니다. 하지만, 여성만큼 모성을 이해할 존재는 없다.
(남성들의 역할이 크지 않아도 충분히 영화가 풍성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작품은 여성에게 놓인 현실과 그들의 입장, 그리고 그들이 분출하는 감정에 주목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인간이 괴로운 이유는 자신이 선택한 것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짓을 하고, 어떤 말을 해도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책임을 지고 나서는 또 어떤가. 잊을 수 있는가? 잊을 수 있었다면, 레다는 해변에서 니나와 엘레나를 보고도 인자한 미소를 흘리고 말았을 것이다. 니나가 들고 있던 긴 핀에 찔릴 일도 없었겠지. 그리스를 떠나지 못하고 해변 자갈밭에 쓰러지는 레다의 뒷모습. 관객은 레다가 흘리는 피를 보며 그녀가 선택한 모성애의 결말을 봤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레다는 그런 상흔을 갖고도 여전히 사랑스러운 두 딸의 엄마로 살았고, 앞으로도 살 예정이다.
레다는 스스로 긴 형벌을 준 셈이다.
마치 끊어지지 않게 깎은 과일 껍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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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의 최악은 나의 최선일 수 있다
*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리뷰입니다.
* 스포일러가 있으니 관람하지 않으신 분은 읽으실 때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삶에는 단계가 있다. 가령 내 삶의 단계를 거칠게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다.
질풍노도의 사춘기: 막연하게 자라서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나는 뭐든지 될 거 같았다.
대학 새내기: 수능을 망친 이후 흑화했다. 나는 여전히 오만했고, 내가 남들보다 아주 조금 더 공부를 잘한다는 것을 자랑거리로 삼았다.
대학 헌내기: 공부가 전부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친구가 많이 생겼다. 인맥도 넓어졌고, 나는 사람들 사이에 좀 별나지만 똑똑한 애 정도로 인식되었다. 내가 부족하단 건 알지만 그래도 노력하면 뭐든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대학원: 나는 공부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세상엔 나보다 잘난 사람이 너무나 많고, 나는 너무 보잘 것 없게 느껴졌다. 나는 꽤 오랫동안 절망했다.
사회인(현재): 그렇게 힘들었는데 어떻게든 취업을 했고, 그렇게 어수룩했는데 어떻게든 적응했다. 나는 지금 내 일이 좋고, 내 삶에 만족한다. 또 어떤 불행과 우울이 나를 지배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다시 일어날 준비가 되었다.
나는 꽤 오랜 시간 방황했다. 특히 10대와 20대 시절에 더욱 그랬다. 학업, 진로, 연애, 교우 관계 등 모든 것이 내게는 해결해야만 하는 거대한 과업처럼 느껴졌고, 실제로 그것에 힘겨워했다. 돌이켜 보면 사실 그렇게 힘들어하지 않았어도 되었을텐데 그때는 그 모든 일이 처음이고 익숙하지 않아서 두렵게만 느껴졌던 것 같다. 이건 말하자면 칠흑 같은 어둠 너머로 발을 내딛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번 어둠에 익숙해진 다음부터는, 길찾기는 한결 쉬워진다. 나는 삶도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의 주인공, 율리에 역시 이러한 지독한 방황기를 겪는다. 그는 성적에 맞춰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가, 나중에는 심리학자가 되고자 했고, 그리고 또 얼마쯤 지나서는 사진 작가를 꿈꾸는 서점 직원이 되었다. 그러나 율리에는 그 숱한 번복과 탐색의 과정에서 무엇 하나 뾰족하게 되고 싶은 것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런 그녀 앞에 나타난 것은 40대의 만화 작가인 악셀이다. 그녀의 거의 곱절을 살아온 그는 '능숙하다'. 그러면서도 20대의, 아직 무엇 하나 이루어내지 못한 율리에를 원하고, 필요로 한다. 말하자면, 악셀은 그녀가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되고 싶은 것이 된 사람'으로서의 롤모델이자, 그토록 '완성된' 사람이면서도 미숙한 자신을 포용할 수 있는 이상적인 연인처럼 보인다. 실제로 그들은 한동안 그렇게 살았다. 소울메이트를 찾았다는 일종의 환상에 휩싸인 채.
그들이 간과한 것이 있다면(더 정확히는 외면한 것이다.), 그것은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인생의 단계를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악셀은 더 늦기 전에 아이를 가지고 싶어했고, 율리에는 그럴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악셀과 그의 친구들의 삶은 율리에의 삶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악셀은 때때로 일에 매몰되어 율리에를 바라보지 않고, 율리에는 그것이 야속하다. 환상의 베일이 걷힌 어느 시점부터, 율리에는 두 사람 사이에는 좁혀지지 않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율리에가 에이빈드를 만난 것은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에이빈드는 율리에와 닮았다. 율리에가 악셀의 부속처럼 살아갔듯이, 에이빈드 역시 연상의 여인과 함께 살면서 그녀의 삶의 한 부분으로써 살아갔다. 그리고 둘 모두, 무엇도 명확하지 않은 어느 삶의 단계에 서 있다. 그것이 두 사람이 서로에게 끌리게 된 근본적인 이유이리라. 서로를 잊지 못한다는 것은 꽤나 강렬한 사건이지만, 이는 그와 동시에, 비이성적인 충동의 결과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각자의 연인과 헤어져 서로의 연인이 되었다. 그러나 순간의 열정은 금세 사라지고, 두 사람은 다시금, 환상 너머의 상대를 발견한다.
그러나 으레 그러하듯, 변화는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율리에는 우연한 기회에 텔레비전 쇼에서 여성 혐오적인 내용을 비판 받는 악셀을 보았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악셀의 암소식을 듣고서 그를 만나러 갔다. 그 텔레비전 너머에서, 그리고 그 병동에서, 율리에는 언제나 어른처럼 느껴졌던 악셀의 민낯을 바로 본다. 20대의 율리에와 30대의 율리에가 보는 악셀은 서로 다른 존재인 것만 같다. 그것은 그녀 또한 인생의 다음 단계로 접어들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 즈음 율리에는 에이빈드와의 사이에서 원치 않는 임신을 한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악셀은 '당신이 좋은 어머니가 될 것'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율리에가 진정 원하는 바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는 사회가 규정한 삶의 흐름을 거부하고 자아를 찾기 위해 끝없이 방황하던 사람이 아닌가?
율리에는 악셀이 임종할 때까지 그의 곁을 지키면서, 그를 모델 삼아 사진을 찍는다. 병들어서 마르고 창백한 전 남자친구를 카메라 렌즈에 담는 그의 자세는 사뭇 진지하다. 악셀은 결국 유명을 달리했고, 율리에는 그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샤워를 한다. 큰 충격을 받아서일까? 너무 슬퍼서일까? 그녀의 다리 사이로는 빨간 피가 흘러내리고, 율리에는 그로 말미암아 자신이 유산했음을 깨닫는다. 그녀에게 그것은 비극임과 동시에, 또다른 의미에서의 해방이다.
그리고, 영화의 말미에서 율리에는 그토록 꿈에 그리던 사진 작가가 되어 숱한 사람들을 피사체 삼아 플래시를 터트린다. 영화는 그렇게 막을 내린다.
언뜻 보기에, 율리에의 삶 전반은 제대로 된 것 하나 없는 인생처럼 보인다. 서른이 되도록 진로도 제대로 찾지 못하고, 남자와의 연애도 언제나 실패로 끝난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도 그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누구나 멍청한 짓을 한다. 설령 우리가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할지라도 그것은 때로는, 다른 누군가의 최악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스스로를 무력하게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끝내 율리에가 제가 '되고자 한 것이 된 사람'이 된 것처럼, 우리는 우리 나름의 방식으로 우리의 자아를 찾아나갈 것이다. 삶의 단계를 넘어서서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으레 그러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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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흩어지는 사랑 혹은 사람
-한줄평 아닌 한줄평
수용과 순응 사이에서 같은 감정인지 모를 감정의 형태가 모양 잡히지 않은 채,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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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그 시대, 그 도시, 그리고 그곳의 그 사람의 이야기가 떠올랐다가 가라앉는 순간을 조명한다. 지나 보면 동화 같은 이야기는 일상을 벗어나지 못한 현실의 현재의 한 부분으로 남는다. 비극과 희극 사이의 사랑과 상실을 아우르는 사랑의 이야기가 마치 동화처럼 한 남자의 목소리로 시작된다. 이들이 그려갈 사랑의 형태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욕망은 다양한 형태로 펼쳐지고 어떤 성별, 계급에 따라 구분되지 않는다. 그의 욕망은 물속에서 표출되며 교감 또한 물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들에게 있어서 교감은 사랑보다는 본성에 가까운 감정으로 이루어지는 듯하다. 부유하는 감정이 어떤 정해진 사랑의 형태가 아닌자신만의 방식으로 빚어내어 만들어지는 모습이 된다. 수용과 순응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감정이 모양 잡히지 않은 채, 흩어진다.
중요한 순간에 침묵하는 사람들을 지나쳐 서로를 늘 지켜왔던 이들이 사랑의 형태를 빚어내어 서로를 지킨다. 잃었을지 또는 살아남았을지 모를 그들의 모습이 물결에 흩어질 뿐. 와 닿지 않았던 사랑과 너무 와 닿았던 오만이 교차하며 어떤 사랑의 형태든 마치 흐르는 강물처럼 그저 흐른다.
(시대)
그림의 시대에서 사진의 시대로 도래하며 갈고리를 걸듯 시대는 사람을 끌고 간다. 사람이 만들어 낸 시대이니만큼 개인의 힘으로는 밀어내기 힘든 거대함이므로 인해 가로막고 있던 오만함은 무력함을 압도한다. 이런 끔찍함이 모여 ‘인류의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화합을바라본다.
화합보다는 강압에 가까운 인류의 발전으로 희생되는 것은 특권 계층이 아닌 주변의 멸시를 온몸으로 맞는 소수자들에 한해서였다. 인간의 이기심은 반복되고 잔혹성은 더해진다. 오만함을 가진 인간은 자신을 신과 동급으로 성급하게 잔혹성을 드러내어 주변을 까맣게 물들인다. 인류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어떤 생명의 희생을 당연시하며 이 또한 이용한다.
하지만 시대 앞에서 선택하는 건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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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없는 사랑의 표현 / 파도가 지나간 자리
-bgm Sad Emotional Piano - AShamaluevMu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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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침묵의 숲> 30초 예고편
청각 장애가 있는 소년 ‘창청’은
특수 학교로 전학을 간다.
새로운 친구들을 만날 기대에 부푼 ‘창청’은
‘베이베이’라는 소녀와 가까워지게 된다.
하지만 설렘도 잠시,
통학 버스 뒷자리에서 ‘베이베이’에게 벌어지는
끔찍한 사건을 목격하게 되고,
‘창청’은 ‘베이베이’를 구하기 위해 용기를 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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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마추어> 공식 예고편
테러에 의해 살해된 아내, 밝혀지는 진실 내가 직접 움직여야 한다! 제91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 [보헤미안 랩소디] 라미 말렉 주연 🎬[아마추어] 예고편 전격 공개 2025년 4월 대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