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4-04-04 09:25:10
비키퍼 | '존 윅'을 꿈꿨지만 닿지 못한 양봉업자
<비키퍼> 리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떤 정보기관도 당해낼 수 없고, 법 위에 있는 비밀 기관 '비키퍼'. 비키퍼의 전설이 된 요원 '애덤 클레이'(제이슨 스타뎀)는 기관의 눈을 피해 한적한 시골에서 양봉가로 살아간다. 유일한 이웃이자 친구인 엘로이즈하고만 교류하면서 그는 조용한 은퇴를 즐긴다. 어느 날, 엘로이즈는 컴퓨터를 사용하던 중 의문의 전화를 받는다. 그녀는 보이스피싱 조직의 농간에 당해 전재산을 잃고, 그 충격으로 자살한다.
이에 애덤은 그녀의 복수를 하기 위해 보이스피싱 조직이 속한 IT 기업과 CEO인 '데릭'(조시 허처슨)을 쫓기 시작한다. 애덤의 정체를 눈치챈 데릭의 조언자 '월리스'(제레미 아이언스)는 전력을 다해 애덤을 막으려 한다. 한편, 엘로이즈의 딸이자 FBI 요원인 '자넷'(미니 드라이버)도 수사에 착수하면서 데릭의 악행은 비로소 전모가 드러난다.
이번 무림 고수는 무엇이 다를까
액션 스릴러 영화의 서사에는 이데아, 곧 이상향이 하나 존재하는 듯하다. 조용하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전설적인 킬러. 그는 개인적인 이유로 다시 활동에 나서고, 그의 존재와 위상을 미처 알지 못하는 애송이들을 무자비하게 해치우며, 복수를 향해 막힘없이 나아간다. <존 윅> 시리즈를 비롯한 여러 액션 영화가 차용하는 익숙한 이야기다.
<퓨리>, <수어사이드 스쿼드>로 이름을 알린 데이비드 에이어 감독의 신작 <비키퍼>도 마찬가지다. 세계 질서를 유지하는 비밀 기관 '비키퍼'와 그 조직에서 은퇴한 요원 애덤 클레이를 중심으로 새로운 액션 유니버스를 꿈꾼다. 특히 4편을 끝으로 자리를 비운 <존 윅> 시리즈의 빈자리를 정조준한다.
그러니 <비키퍼>의 당면 과제는 명확하다. 모두가 아는 이야기를 어떻게 차별화할 수 있느냐가 핵심이다. 흥미롭게도 <비키퍼>는 이 지점에서 예상외로 성공했고 의외로 실패했다. 미국 사회의 일면을 드러내는 드라마 파트가 기대 이상의 쾌감을 가져다준다. 반면에 영화의 중심축이어야 할 액션은 정작 실망스럽다. 그 결과 <비키퍼>는 북미에서의 준수한 흥행 성적에도 불구하고 미묘한 영화다.
시의성이 돋보이는 야심
<비키퍼>는 야심은 남다르다. 미국 사회에서 시의성이 두드러지는 범죄 이슈를 겨냥한다. 보이스피싱 조직에 대한 사적 제재가 메인 플롯이기에 미국의 <시민덕희>라고 할 수도 있다. 이는 <비키퍼>가 제작비 4,000만 달러로 북미에서만 6,500만 달러가 넘는 흥행 수익을 기록한 이유이기도 하다. 팬데믹 이후 미국에서는 보이스피싱 범죄가 기승이기 때문. 2022년 이후 미국인 중 15%가 보이스피싱 피해를 입을 정도다.
단순히 범죄 조직만 소탕하는 데서 그치지 않기에 더욱 인상적이다. <비키퍼>는 빌런을 단순 범죄자가 아니라 IT 기업가, 미국 대통령 및 CIA 출신 관료 등으로 설정했다. 이를 바탕으로 시민들의 피해를 해결하지 못하는 미국 사회 시스템적의 모순을 폭로한다. 그렇기에 <비키퍼>에는 겉보기와는 다른 재미와 매력이 있다.
IT 기업은 보이스피싱 조직을 통해 막대한 범죄 수익을 창출한다. 이 수익의 일부는 미국 정치계로 흘러 들어가서 기업의 보호막이 되어준다. 그리고 CIA를 비롯한 정부 관료는 이 카르텔을 은폐하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애덤 클레이는 기업과 정치권력의 카르텔을 화끈한 액션으로 처단하며 보이스피싱 범죄 피해자의 울분을 풀어준다. 범죄 이슈와 기득권을 바라보는 미국 사회의 시각을 일부 맛볼 수 있는 대목인 셈이다.
조준을 잘못했다
그러나 <비키퍼>는 일관성이 부족하다. 마지막까지 대상을 지속적으로 조준하지는 않는다. 미국의 정치, 경제 권력과 사회 시스템의 모순과 폐해를 겨냥하는 듯하지만, 근본적인 문제 해결 대신 눈에 보이는 증상만 도려내고 만다. 장르적으로 본격적인 사회 고발 영화보다는 액션 영화 범주 안에만 남으려 하기 때문.
그러다 보니 소재도 굳이 깊숙이 다루는 대신 손쉬운 방식을 택한다. 선과 악을 확실하게 구분한 뒤, '시스템을 바로잡는 자'라는 설정이 무색하게 단순한 권선징악 구도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데릭은 순수 악으로, 월리스는 줏대 없는 변절자로, 미국 대통령인 데릭의 어머니는 무능하나 최소한 상식적인 인물로 묘사한다. 애덤은 앞의 두 명만 확실하게 제거하고, 자넷과 FBI는 애덤의 속뜻을 파악한 뒤 은연중에 그를 도와준다.
준수하지만 킥은 없는 액션
단순한 스토리텔링은 액션에도 피해를 준다. 물론 제이슨 스타뎀의 액션은 여전히 호쾌하다. 빠르고 간결하며 데이비드 에이어 작품답게 잔혹하다. 적의 신체를 사정없이 절단하며 비키퍼 요원다운 위용을 드러낸다. 침투라는 모티브를 반복하는 액션 연출도 눈길을 끈다. 애덤은 경호원이나 FBI가 방어막을 치고 있어도 엘리베이터나 스케이트보드를 이용해 어떻게든 목표물에 접근해 낸다.
다만 시리즈를 지탱할 정도로 충분하지는 않다. 이는 <존 윅>과의 결정적인 차이다. <존 윅>은 다양한 스타일의 액션을 보여줬을 뿐만 아니라, 건짓수(총+주짓수)라 불리는 특유의 사실적인 액션 스타일을 관객에게 각인시켰다. 언제나 확인 사살을 잊지 않는, 할리우드 영화와는 차별화되는 개성을 강조하면서 색다른 재미를 선사했고, 이는 시리즈 마지막까지 이어졌다.
반면에 <비키퍼>는 그런 대목이 없다. <비키퍼>라는 영화를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있는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했다. 통쾌하고 짜릿하지만, 그 이상의 플러스알파는 찾아볼 수 없다. 그 결과 후반부로 갈수록 액션의 자극은 약해지고, 단점만 부각된다. 자연히 후반부로 갈수록 자극이 약해진다. 일례로 특정 각도가 반복되거나, 일부 스턴트가 맞기 위해서 기다리는 등의 몇몇 디테일한 아쉬움이 점점 눈에 자주 띈다.
<존 윅>의 아류작?
결국 <비키퍼>는 <존 윅>의 아류작이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나름대로의 변주는 한계에 부딪히고, 차별화된 정체성도 보여주지 못하다 보니 <존 윅>의 영향력만 더 부각되기 때문. 비밀 결사 네트워크에 기반을 둔 액션 세계관, 애덤을 모르는 젊은 빌런과 두려움에 떠는 늙은 보호자 등을 보면 <존 윅> 1편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존 윅>만큼의 개연성이나 설득력을 갖추지도 못했다. 존 윅은 개 한 마리 때문에 수십 명을 죽였다. 하지만 그에게 개가 왜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데는 성공했다. 개는 단순한 애완견이 아니라, 살인을 하지 않고 아내와 함께하는 평화로운 삶 그 자체를 상징했다.
반면에 애덤이 엘로이즈의 복수를 하기 위해 이 난리를 치는 이유는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다. 물론 비키퍼에서 은퇴한 그에게 엘로이즈는 친절한 이웃이자 유일한 친구였다. 하지만 그 관계의 깊이나 중요성은 존 윅의 서사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러다 보니 애덤의 집요함은 설득력이 없다. 영화는 이 간극을 위해 ‘시스템을 바로잡는 자’라는 설정을 강조하지만, 이는 설명조 대사만 도드라지는 부작용을 낳는다.
이처럼 <비키퍼>는 <존 윅>의 그림자를 벗어나는 데 끝내 실패한다. 물론 여전히 킬링 타임 영화로는 소구력이 있다. 돌비시네마처럼 음향이 좋은 극장에서 본다면 액션에 푹 빠진 채 105분을 보낼 수도 있다. 단지, <존 윅>의 빈자리를 채우려는 야심에 비해 완성도가 퍽 아쉬울 따름이다.
Poor 형편없음
이데아에 닿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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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CFF 데일리] 호러와 코미디 속에 드러난 입시 전쟁
[SICFF 데일리] 호러와 코미디 속에 드러난 입시 전쟁
영화 <수능을 치려면> 리뷰
감독] 김선빈
시놉시스] 좀비시대에도 어김없이 다가온 수능날, 오합지졸 여고생들이 직접 운전을 해서 수능장으로 간다,
#스포일러 주의#
어느 누가 1년을 기분 좋게 더 수험생활을 할 수 있을까
영화 수능을 치려면은 좀비가 창궐하는 대한민국의 수능 날 아침을 보여주고 있다. 밤에만 활동하는 좀비들이라는 설정 때문인지 수능은 정상적으로 치뤄지고 아이들은 좀비를 걱정하면서 수능장으로 이동한다. 하지만 밤에만 등장한다는 설정은 금방 영화 속에서 깨지고, 낮에도 좀비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승합차로 이동하던 수험생들을 덮치기 시작한다. 이를 저지하려던 기사님이 좀비에게 당하고, 승합차에 남은 사람은 고3 수험생 4명이다. 이들은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 경찰을 부른다던지, 구해줄 때까지 기다린다던지와 같은 상식적인 방법이 아닌 수능을 반드시 치뤄야 한다는 ‘신념’으로 직접 승합차를 몰고 수능장으로 향한다.
수능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과연 이 상황에 놓였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자연스럽게 상상을 하게 되는 지점이었다. 수능장으로 향하는 길에 좀비는 계속해서 등장하고, 주변에 도움을 청할 이는 없고, 경찰은 언제 도착할지 모르고 수능을 보지 않으면 1년이라는 수험생활을 더 해야한다는 그 절망감 속에서 수험생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정말 직접 운전을 해서 수험장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수능을 본지 10년이 지난 시점에서 아이들이 참 상식을 벗어난 행동을 했네 라고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정말 내가 그 상황이고 다른 사람들은 수능을 보는 데 나만 좀비 때문에 덩그러니 도로 한 가운데에 남아 수능을 못본다고 생각하면 무슨 수를 쓰든 수능을 보러 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작품이었다. 그만큼 영화 수능을 치려면은 고3 수험생들의 절박한 마음을 잘 풀어내고 있었다.
과연 고3 수험생만 맹목적이라고 볼 수 있을까?
영화 수능을 치려면에서 결국 5명의 아이들은 직접 운전을 하고 수험장 안으로 들어간다. 수능을 치르기 위해 의도치 않은 무면허 운전이라는 범법행위를 하고 온 것이다. 이를 두고 수능에 ‘미친’ 너무나도 맹목적인 행동이라고 이들을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 수능을 치르면은 영화 말미 좀비들이 수능장으로 습격하는 와중에도 감독관들이 그 모습을 블라인드로 애써 가리며 고개를 돌리면 부정행위이니 시험에 집중하라고 말을 한다. 이 장면을 통해 맹목적인 것은 고3 수험생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었다.
생명이 위급한 상황에서도 부정행위라며 학생들을 다그치고, 주위 환경에 관심을 두지 않도록 블라인드를 내리는 모습에서 우리 사회가 학생들을 ‘수능’이라는 한 가지 목표만을 위해 주변 환경에 관심을 두지 않도록 맹목적으로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결국 차를 운전해서 온 ‘유리’는 이 상황이 잘못됐다는 것을 인지하고 벌떡 일어서지만 그녀를 향해 감독관은 자리에 앉지 않으면 부정행위로 퇴실 조치하겠다는 말만 반복한다. 이 장면을 끝으로 마무리되는 영화는 우리 사회의 맹목적인 학구열에 대해 넌지시 의문점을 제시하고 있었다.
영화 수능을 치려면은 좀비 호러 장르와 고3 수험생의 웃픈 무면허 운전이라는 코미디가 합쳐져서 ‘수능’제도에 대한 맹목적인 우리 사회의 모습을 비판하고 있었다. 호러와 코미디를 통해 문제점을 통쾌하게 찔러주고 있어서 만족스러웠던 작품이었다.
<상영시간표>
2023. 9. 16.(토) 19:30 롯데시네마 은평 3관
2023. 9. 19.(화) 20:00 롯데시네마 은평 7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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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물다섯 스물하나>정답보다 풀이가 중요한 순간이 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수학이라는 난적을 극복하기 위해 애써 온 수많은 이들은 아마 다음 두 문장을 숱하게 들어봤을 것이다. "풀이를 쓰면서 문제를 풀어라." 그리고 "정답은 중요하지 않다." 그 누구보다 빠르게 답을 찾아내는 게 지상 최대 과제인 한국의 학생에게 과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은 사실 머나 먼 안드로메다나 아스가르드 마냥 낯설기만 한 조언이었다. 그저 조금 더 꼬고 길어진 풀이를 요구할 뿐, 같은 개념과 원리를 요구하는 문제들을 줄줄이 틀리기 전까지는. 이는 한 편의 인생 드라마가 되는 듯했던 tvn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가 범한 패착이기도 하다. 답을 위해 과정을 간과하는 실수를 범한 <스물다섯 스물하나> 역시 정답에 도달했는데도 허탈하고 공허하게 마무리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스물다섯 스물하나>가 지향하는 바는 명확했다. 바로 한국의 <라라랜드>였다. 이미 그 정답은 드라마의 시작에서 다 알려져 있었다. 나희도의 첫사랑인 백이진과 딸인 김민채의 성씨가 다르다는 점은 90년 말, 2000년대 초의 청춘을 추억하는 드라마의 로맨스가 결코 해피엔딩은 아닐 것이라는 암시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즉,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커플의 완성 혹은 결혼으로 이어지는 로맨스의 클리셰를 따르지 않는 대신, 사랑과 꿈이라는 갈림길을 함께 걸은 두 청춘의 동행을 보여줄 것임을 일찌감치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러한 두 주인공의 관계는 <라라랜드> 속 세바스찬과 미아와 꼭 닮아 있으며, 그래서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한국의 <라라랜드>라 할 수 있다. <라라랜드>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재즈와 연기를 할 이유와 열정이 되어줬던 세바스찬과 미아. 그러나 이들의 사랑은 서로 다른 꿈을 좇는 현실 앞에서 갈라진다. 재즈 피아니스트인 세바스찬은 배우인 미아의 세상을 이해하지 못해 "리허설 같은 건 아무데서나 할 수 있으니 함께 가자"라고 말한다. 반대로 미아 역시 세바스찬의 세계를 모르기에 밴드 투어가 언제 끝나는지를 묻고,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그렇다고 해서 <라라랜드>가 그저 연애에 실패한 청춘의 새드엔딩만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꿈을 이루는 데 성공했으니 한편으로는 해피엔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물다섯 스물하나> 역시 두 인물의 세계와 두 세계의 충돌에서 비롯된 갈등, 그리고 두 주인공 모두 그들의 세계를 포기하지 못할 것임을 보여줘야 했다.
실제로 초반에서 중반부로 흐르는 전개 역시 그 틀을 벗어나지 않았다. 나희도와 백이진 사이에 흐르는 감정선을 단순한 연애 플래그로 활용하는 대신, 사랑과 우정 혹은 사랑과 동지애 사이를 줄 타는 미묘함으로 남겨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두 주인공의 이야기는 펜싱과 기자라는, 전혀 다른 두 세상이 만나서 서로를 성장시키는 서사에 더 가까웠다.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따고도 누명을 쓴 나희도의 억울함을 백이진이 기자로서 풀어주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패배가 눈앞까지 온 상황에서도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결코 포기하지 않는 희도를 보면서 기자로서 버틸 힘을 얻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니 사랑으로 발전했던 이들의 관계가 각자의 꿈과 커리어라는 목표를 넘어서지 못해 갈라지고, 서로를 응원하는 사이로 남는 것도 놀랍지는 않다.
물론 이처럼 정답이 이미 반쯤 공개된 상황에서 극의 긴장감을 유지하고 시청자들을 유인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정답에 이르는 풀이 과정에서 클리셰를 파괴하는 신선한 매력을 선보이며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 자칫 흔한 트렌디 드라마의 전철을 밟을 뻔한 전개에 9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적절히 혼합해 차별화시킨 점이 대표적이다. 백이진의 경우, 그는 사실 나희도와 고유림이라는 두 여성 주인공 사이에서 백마 탄 왕자님의 위치에 있어야 할 인물이다. 하지만 IMF라는 시대적 맥락은 그룰 <상속자들>의 '차은상' 못지않은 캔디로 만든다. 또 그렇다고 해서 그가 나희도의 성장을 위해 기능적으로만 소비되는 것은 아니다. 그 역시 흩어진 가족을 다시 모으고, 또 기자로서 성장하는 본연의 서사를 충실히 보여준다. 9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시대극이지만, 그 시절을 재현하는 데에만 집중한 안일함은 없는 것이다.
또한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스포츠물이라는 장르적 특성을 부각하면서 뻔한 삼각관계를 비튼다. 나희도와 고유림은 백이진을 두고 연적으로 부딪힐 수도 있는 사이였다. 하지만 드라마는 두 여성 간의 분노와 질투의 감정 대신 동병상련에서 기인하는 연대에 주목한다. 그들은 펜싱 선수이기에 서로가 서로만 알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지점들을 공유하고, 그 결과 서로에게 선의의 라이벌이자 단짝 친구로 우정을 쌓는다. 이는 익명의 온라인 채팅에서 만난 친구의 정체가 공개되는 장면이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었던 이유다. 그 덕분에 나희도와 백이진의 관계에서 동지애가 부각되듯이 고유림과 백이진의 관계에서는 남매의 정이 두드러질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이는 고유림이라는 캐릭터의 주체성과 입체성이 극적으로 살아난 배경이기도 하다. 그녀는 남주의 사랑을 받기 위해 발악하는 대신, 현실적인 고민 앞에서 수많은 좌절과 성장을 경험한다.
이처럼 클리셰를 벗어날 줄 아는 과감함과 로맨스에 함몰되지 않는 각 캐릭터의 성장 서사의 시너지 덕분에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따뜻하고 사랑스러우며 아련한 청춘물로 다가올 수 있었다. 다섯 주인공이 각자 마음에 한 구석에 가진 어둠을 신파나 눈물로 들추어내기보다는, 미소 끝에 머금고 다시 정진하는 전개가 반대로 돌린 수도꼭지 같은 청량함을 선사한 것이다.
그러나 신선함, 청량함, 아련함과 같은 장점은 후반부에 들어 극의 기본적인 짜임새가 무너지자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초여름의 밤을 떠올리게 하는 청춘물이자 성장드라마는 어느 순간 사랑에 울고 웃기를 반복하는 익숙한 멜로드라마로 전환된다. 이 과정에서 클리셰를 주도적으로 파괴하던 매력은 찾아볼 수 없다. 신파와 눈물의 진부함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망설임을 모르던 나희도는 남자 친구를 위해 모든 것을 인내하는 비련의 여주인공이 된다. 백이진이 사랑 대신 커리어의 성공을 택하는 변화 과정은 울음과 소주로 가득하다. 현실에서도 만날 수는 있겠으나 꽤나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고유림의 이민 사연 역시 눈물로 점철되어 있다.
그 결과 명쾌하고 탄탄했던 캐릭터의 서사는 붕괴되고, 나머지 극의 개연성에도 큰 구멍이 뚫리고 만다. 엄연히 성장 서사여야 할 드라마에서 정작 주인공인 백이진의 성장은 찾아보기 힘든 것이 대표적이다. 희도는 학교 펜싱부가 해체하고 우상이었던 이에게 냉대를 받는 와중에서도 끝내 금메달과 친구를 모두 얻는다. 유림은 자신에게 쏟아질 비난에 아랑곳하지 않고 가족을 위해 러시아행을 선택한다. 지웅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는 연애를 지켜내고 아무도 기대하지 않은 분야에서의 성공을 거둔다. 승완은 학교 측의 부조리에 당당히 맞서 쉽게 끝낼 수 있었던 입시의 길을 굳이 돌아간다. 반면에 이진은 줄곧 상황에 무기력하게 주저앉는 모습을 보였고, 이는 결국 희도와의 이별로 귀결된다.
그러니 이들이 예상했던 답을 향해 나아간다 해도, 그들의 발걸음 하나하나에는 자연히 의문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서로의 감정선을 설명하느라 긴 분량과 대사를 할애한 마지막 화가 그 방증이다.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가장 큰 힘은 젊음과 청춘의 판타지를 화면 가득 생생히 살려 놓은 데 있다. 그리고 그 판타지는 분명 영원할 것 같았지만, 어느 순간 뒤돌아보면 빛바래고 흐릿해진 기억에서 느껴지는 아련함을 품고 있었다. 이처럼 달콤함 끝에 느껴지는 약간의 쓴 맛은 드라마가 끝난 지 며칠이 지나도록 여전히 넷플리스 TOP10에서 1위 경쟁을 하는 가장 큰 원동력일 것이다.
그러니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자신의 가장 큰 장점을 믿어야 했다. 클리셰를 비틀어 만들어낸 시원하고 청량하며 아름다웠던 판타지를 지켜야 했다. 한국의 <라라랜드>가 되겠다며, 현실적이고 알싸한 사랑이라는 정해 놓은 답으로 가기 위해서 늘어지고 진부해질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훌륭했고 또 좋았기에, 기꺼이 일주일을 기다릴 수 있었기에, 더더욱 휘황찬란한 용두사미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P(Poor, 형편없음)
나쁜 정답은 아니었다. OMR이 아니라 서술형이었던 답안지를 제대로 채우지 못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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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3주 차, 최신 씨네 뉴스
안녕하세요.
영화/ OTT 전문 큐레이션 웹 매거진 씨네랩입니다:)최근 국내외 영화 / OTT계에 어떤 소식이 있었는지 정리하는최신 씨네 뉴스 타임이 찾아왔습니다!~!그럼, 최근에 어떤 이슈가 있었는지 살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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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강동원 X 허준호 X 이솜 X 이동휘 X 김종수<빙의>, 크랭크인
ⓒ CJ ENM
<기생충>, <헤어질 결심>,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에서 조감독을 맡았던 김성식 감독의 연출 데뷔작인 <빙의> (가제)가
지난 9월 14일 본격적인 촬영에 돌입했다. 영화 <빙의>(가제)는 귀신을 듣지도 보지도 못하지만 귀신 같은 통찰력으로
온갖 사건을 해결하는 가짜 퇴마사 ‘천박사’가 지금껏 경험해본 적 없는 강력한 빙의 사건을 의뢰받으며 시작되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로
강동원, 허준호, 이솜, 이동휘, 김종수 배우가 출연을 한다.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일반 상영작 27일 티켓 오픈
ⓒ 부산국제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 개·폐막식 입장권 예매는 오는 23일(금) 오후 2시부터, 일반 상영작 티켓 예매는 27일(화)
오후 2시부터 온라인을 통해 진행될 예정이다. 또한, 아시아 전역의 우수한 TV, OTT, 온라인 콘텐츠를 대상으로 하는
시상식인 아시아콘텐츠 어워즈 티켓 역시 9월 23일(금)에 오픈된다.
<콘스탄틴>, 17년만에 속편 제작 확정
ⓒ 네이버 영화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영화 <콘스탄틴>이 17년만에 속편 제작을 확정했다.
<콘스탄틴> 1편을 제작했던 아키바 골즈먼이 속편의 각본과 제작을 이어 맡았고,
키아누 리브스가 존 콘스탄틴으로 다시 등장할 예정이다.
김지운 감독, 미국 드라마 시리즈 연출
ⓒ 네이버 영화
<악마를 보았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밀정> 등 다수의 히트작을 보유한 김지운 감독이
<스타트렉: 디스커버리> 극본을 쓴 김보연, 에리카 리폴트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 떠나는 한국 가족에 관한
드라마를 제작한다.
김영대, <낮에 뜨는 달> 검토 중
ⓒ 네이버 영화
인기 네이버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 [낮에 뜨는 달]에 배우 김영대가 출연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낮에 뜨는 달]은 시간이 멈춘 남자와 흘러가는 여자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갈등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해외
ⓒ네이버 영화
배우 조니 뎁과 앰버 허드의 재판을 다룬 영화가 제작될 예정이라고 한다.
제목은 <Hot Take: The Depp/ Heard Trial>으로 조니 뎁은 배우 마크 햅카가 연기하고,
앰버 허드는 배우 매건 데이비스가 연기할 예정이다.
씨네랩 에디터 camm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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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쳐 가는 감정들과 스며드는 소리들
왕가위의 영화 가운데 <타락천사>(1995) 다음으로 마음에 드는 영화는 <중경삼림>(1994)이다. <타락천사>는 질척거리는 불편한 감정들과 공존할 수 있는 찰나의 위안과 휴식을 머금으려는 영화였다. 어떤 것도 과하게 긍정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솔직하게 표출하는 날 것의 영화이기도 했다. 제멋대로 감정을 덧칠하는 <타락천사>의 작법은 <중경삼림>에서 출발한다. 시선과 감정을 교환하는 인물들의 사이를 파고드는 긴장감이 위태로운 무드를 만들어내지만, 그 속에서 낭만을 찾아서 음미할 수 있다는 점이 <중경삼림>의 매력 아닐까. 감정의 얽힘을 형상화하는 <중경삼림>의 투박한 시도는 어쩐지 <타락천사>의 거친 스타일보다는 매끄럽게 느껴진다. 다양한 인물의 사연이 얽힌 에피소드를 은근슬쩍 교차하던 <타락천사>와는 달리, <중경삼림>은 비교적 분명하게 첫 번째 에피소드와 두 번째 에피소드를 구분해서 배치한다. 하지만 떨어진 듯 보이는 두 이야기는 몇몇 연결고리를 통해 유기적인 덩어리로 재편된다. <중경삼림>에서 감정은 어지럽게 스치기만 하고, 음악과 목소리는 언제나 깊숙이 스며들고, 기억은 보존된 채로 어딘가에 남아 있다.
스쳐 가는 감정들
<중경삼림>의 도입부는 정신을 산만하게 만든다. 쉴 새 없이 화면을 흔들던 왕가위는 갑작스레 남자와 여자가 스치는 순간을 프레임에 가둬버린다. 내레이션하는 남자(하지무)는 뻔뻔할 정도로 친절하게 설명한다.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고 말이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는 찰나를 가두는 건 쉬워도, 그들의 감정을 보존하는 일은 어렵다. 왕가위의 세계의 단골손님인 스텝 프린팅과 정지 화면은 어쩌면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스쳐 가는 감정을 붙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역으로 표출하고 강조하는 처절한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그런 왕가위 특유의 기법들은 화면을 멈추고 인물들을 머무르게 해서라도 감정을 붙잡고 싶다는 감독의 간절함이 형상화된 산물로 기능한다.
하지무는 메이를 잊기 위해 술집에 처음 들어오는 여자를 사랑하기로 마음먹는다. 손바닥 뒤집듯 실연과 사랑을 오가는 듯하지만, 사실 그렇게 해서라도 실연의 늪에서 벗어나고 싶은 하지무의 간절함이 오히려 와닿는다. 그러니까 스치는 감정의 표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심연에는 낙인처럼 박힌 짙은 감정들이 몸부림치고 있다. 마약 밀매상은 언제나 레인코트를 입고, 선글라스로 눈을 가리고, 풍성한 블론디 가발로 머리를 가린다. 덕분에 밀매상의 감정은 헤아리기 어렵다. 스치는 감정들을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해, 왕가위는 그의 영화에서 내레이션을 활용하기도 한다. 우리는 밀매상의 의뭉스러운 속내를 내레이션을 통해서 직관적으로 전달받을 수 있다. 언제 비가 올지 언제 화창해질지 모르니까 늘 레인코트와 선글라스를 함께 착용한다는 밀매상의 독백은 그녀의 감정이 가장 확실하게 드러나는 구간 가운데 하나다. 놓쳐버린 마약 운반책들을 잡지 못하면 일이 번거로워질 거라는 내레이션 또한 그녀의 불안정한 심리를 잘 표현한다.
한편으로 인물들의 감정은 여전히 아리송하게 스크린을 맴돈다. 경찰 663은 스튜어디스인 애인과 이별한 뒤 자신에게 온 편지를 읽지 않는다. 오히려 페이가 663 앞으로 온 편지를 몰래 읽는다. 이때 왕가위는 단골 식당에 함께 있는 경찰 663과 페이를 프레임에 가두고 응시한다. 전경(前景)에선 행인들이 쉴 새 없이 오가는데, 후경에 위치한 두 사람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하고, 서로의 감정은 묘하게 서로의 마음을 스쳐 간다. 663을 향한 페이의 마음은 점점 커져가고, 애인을 떠나보낸 663의 마음은 점점 복잡해져 간다. <중경삼림>의 인물들이 표출하거나 감추는 감정들을 우리는 이따금 포획할 수 있지만, 어쩐지 떠나보내거나 스치도록 내버려 둬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스며드는 소리들
오래 머무르지 못하는 감정들을 붙잡기 위해 왕가위는 <중경삼림>에서 종종 ‘소리’를 활용한다. 음악은 감정을 실어 나르는 최적의 도구이자, 그 자신이 감정 표출의 주체로 기능할 수도 있다. 이때 왕가위가 <중경삼림>에서 음악뿐 아니라 유독 매달리는 소리가 있다. 첫 번째 에피소드의 경찰 하지무는 전화기를 붙들고 있다. 옛 애인 메이를 잊지 못해 전화를 걸었지만, 어쩐지 전화를 받는 이들에겐 메이를 찾는 전화가 아니라 안부 차 전화드렸다고 둘러대기만 한다. 하지무는 메이의 목소리를 기다린다. 하지무는 자신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이의 목소리를 끝내 들을 수 없었지만, 그 상실의 빈자리를 잠시 스친 마약 밀매상의 생일 축하 메시지가 채운다는 점이 상당히 흥미롭다.
하지무와 마약 밀매상의 본격적인 만남은 옷깃이 스치던 찰나를 거쳐 어둑한 술집에서 꽃을 피운다. 그들이 가까워질 시간은 하룻밤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각자의 사정 때문에, 서로의 속내를 깊게 공유하지 않는다. 머뭇거리는 감정들이 무심하게 스치는 자리엔 무엇이 남았는가. 그건 바로 하지무의 삐삐에서 흘러나오는 메시지이다. 만남이 종료된 이후, 감정이 스쳐간 이후에 남은 건 그 소리가 전부다. 밀매상의 축하 메시지는 비록 그녀의 목소리로 직접 전달되진 않았지만, 안내원을 매개로 하지무에게 스며든다. <중경삼림> 속의 이런 특징적인 소리는 성취될 수 없었던 직접적인 감정의 교환보다 더 넓은 층위의 소통을 만들어낸다. 하지무의 마음에 밀매상의 소박한 진심이 스며든다. 묻어놓았던 감정을 나누고, 지쳐버린 서로를 위로하는 일이 소리를 매개로 자연스레 이루어진다.
재밌게도 하지무는 말을 멈추지 않는다. 밀매상을 바(Bar)에서 처음 만나 말을 걸 때도, 당신은 이야기하지 않아도 된다며 너스레를 떨지 않았나. 그는 저녁마다 단골 식당의 공중전화 부스에서 질리도록 전화를 걸기도 했다. 이때 두 번째 에피소드의 경찰 663 역시 누군가에게 계속해서 말을 건네는 모습이 어쩌면 두 에피소드를 연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663은 스튜어디스였던 전 애인과의 이별을 온전히 수용하지 못한다. 그는 실연의 아픔을 사물과 대화를 나누는 순간들로 대체하려고 한다.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빨래를 향해 그만 울라고 말하는 그의 모습에선 빈자리를 무언가로 채우려는 고독이 짙게 묻어 나온다.
이렇게 어디서든 말을 멈추지 않는 663에게 스며드는 소리가 있다. 바로 단골 가게의 종업원 페이가 틀어 놓은 음악이다. <중경상림>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 그렇다. 663이 등장하는 그 감성 가득한 신을 기억하는가. 그때 페이가 크게 틀어놓은 음악인 ‘California Dreamin’은 내화면 영역에서 외화면으로 확장되어 관객을 자극한다. 또한, 이 음악은 663의 집에 무단으로 침입한 페이가 바꿔 놓은 CD로 인해, 663에게도 은근슬쩍 스며들고야 만다. 페이가 663의 집에서 종아리 마사지를 받는 장면에서, 663은 ‘California Dreamin’을 재생하며 전 애인이 가장 좋아했던 노래라고 말한다. 이에 페이는 코웃음치며 속으로(내레이션) 내가 CD를 바꿔놓은 줄도 모른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게 어느덧 663의 마음속은 음악을 통해 페이로 가득 채워진다.
그 자리에 남은 기억들
감정이 어지럽게 스쳐간 자리, 소리가 아련하게 스며든 자리엔 뭐가 남아 있는가. 소박한 추억이나 잊고 싶지 않은 기억들은 아닐까. <동사서독>(1994)에서 왕가위는 기억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탐닉한다. <중경삼림>의 인물들 역시 기억에 매달린다. 기억은 평생 동안 우리의 머리를 맴돈다. 영원히 잊고 싶지 않은 기억들, 평생을 가져가고 싶은 기억들이 있다면 한편으론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기억들도 있다. 하지무에게 메이와의 추억은 잊고 싶지 않은 기억이지만,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한순간에 털어내야 할 기억이기도 하다. 그에게 스물다섯 번째 생일 아침은 메이 없이 맞이하는 외로운 날이기도 하지만, 밀매상의 축하 메시지가 마음을 채워준 날이기도 하다. <중경삼림>을 대표하는 대사가 있다. 하지무의 내레이션 가운데 가장 유명한 구절이기도 하다.
한 여자가 ‘생일 축하해’라고 말해 주었다.
난 그 말 때문에 이 여자를 잊지 못할 것이다.
만약 기억을 통조림이라고 친다면, 영원히 유통기한이 없었으면 좋겠다.
유통기한을 적어야 한다면 만 년으로 하고 싶다.- 왕가위, <중경삼림>(1994)
하지무는 온종일 돌아다니느라 지저분해진 밀매상의 구두를 타이로 닦아준다. 잠에서 깬 밀매상에겐 하지무의 온기가 묻은 채로 놓인 구두 한 켤레가 남는다. 그 구두를 보면 밀매상이 과연 하지무를 떠올릴까? 밀매상에게 하지무는 좋은 기억으로 남을까? 확신할 순 없지만, 카메라는 가발을 벗어 던진 채 프레임을 빠져나가는 밀매상을 간신히 붙들고 화면을 멈춰버린다. 그리고 유통기한이 1994년 5월 1일인 통조림을 비춘다. 붙들기조차 힘든 스치는 감정들이 지나간 자리엔 유통기한을 지워버리고 싶은 통조림이 남는다.
페이는 떠나면서 663에게 편지를 남겼다. 663은 그 편지를 일 년 간 고이 간직한다. 일 년 후 스튜어디스가 된 페이와 식당을 넘겨받은 663이 재회한다. 663과 페이가 처음 만났던 그 순간처럼, 식당엔 ‘California Dreamin’이 크게 울려 퍼진다. “언제부터 이런 시끄러운 노래를 좋아했죠?”, “이제 습관이 됐어요”. 지난날의 감정들은 미묘하게 스치며 그들 또한 함께 어긋났지만, 페이의 음악은 663에게 스며들었고, 그의 마음속은 페이의 편지와 시끄러운 음악들을 매개로 하는 추억들로 가득 채워졌다. 이젠 시끄러운 캘리포니아 드리밍을 듣는 게 습관이 되었다는 663에게 페이는 젖어버린 항공권을 새 항공권으로 바꿔주겠다고 한다. 젖은 항공권을 간직했던 663의 일 년과, 스튜어디스가 되어 노래를 따라 캘리포니아에 갔다 온 페이의 일 년은 서로의 기억에서 어떤 시간으로 남아있을까. 새로운 항공권이 가져다줄 시간은 그들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까.
이미지 출처: https://screenmusings.org/movie/blu-ray/Chungking-Express/index_2.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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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편난 기억 너머에서 마주한 아름다운 것들
애프터 양 (AFTER YANG, 2021)
"파편난 기억 너머에서 마주한 아름다운 것들"
등급 : 전체 관람가
장르 : 드라마, SF
러닝타임 : 96분
감독 : 코고나다
출연 : 콜린 파렐, 조디 터너 스미스, 저스틴 H. 민
개인적인 평점 : 4.5/5
쿠키 영상 : 없음
애프터 양 줄거리
함께 살던 안드로이드 인간 ‘양’이 어느 날 작동을 멈추자 제이크 가족은 그를 수리할 방법을 찾는다. 그러던 중, ‘양’에게서 특별한 메모리 뱅크를 발견하고 그의 기억을 탐험하기 시작하는데… 무엇을 남기고 싶었어,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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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화제가 됐던 애플 TV <파친코(1,2,3,7편)>의 연출을 맡은 것으로 알려져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끌게 된 코고나다 감독의 신작 <애프터 양>이 전주 국제영화제를 거쳐 국내에 정식 개봉한다. 제23회 전주 국제영화제의 개봉작으로 선정된 <애프터 양>은 매 상영마다 전석 매진을 기록하며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애프터 양>은 알렉산더 와인스틴의 단편 소설 [양과의 안녕]을 각색한 작품으로, 테크노 사피엔스라 불리는 안드로이드가 각 가정에 보급된, 언젠가 다가올 미래를 배경으로 한 SF영화다. 주인공 제이크 가족은 입양한 딸 미카의 고향인 중국에 대해 알려주기 위해 안드로이드 양을 구매한다. 양은 미카에게 선생님이 되어주기도 하고, 하나뿐인 형제가 되어주기도 한다. 미카 또한 양을 오빠라 부르며 그에게 의지하고 함께 마음을 나눈다.
어느 날, 수명이 다된 것인지 양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되자 제이크는 공식 서비스 센터와 사설 센터를 오가며 양을 고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어딜 가든 양은 다시 움직이지 못할 거라는 부정적인 답만 돌아올 뿐이다. 제이크는 양을 차 뒷좌석에 앉힌 채 이곳저곳을 헤매다 마지막 보루로 테크노 사피엔스를 연구하고 보존하는 박물관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양의 중심부에 저장되어 있던 그의 기억 조각들을 마주하게 된다.
<애프터 양>은 안드로이드 양의 짧은 추억들을 함께 되짚으며 우리를 가장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감정인 사랑과 행복했던 기억, 소중한 것의 상실과 회복, 나의 뿌리(정체성)와 인생을 찾아가는 여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단 하나의 아쉬웠던 점? 취향의 차이
개인적으로 <애프터 양>은 상당히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사심이 가득해서 더 좋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솔직히, 미리 말하자면 이번 리뷰에선 영화의 장단점을 비슷한 비율로 다루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나에겐 이 영화가 상당히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전주 국제영화제에서 첫 상영을 마친 후, 남아있는 감정에 푹 젖어있다가 다음 상영을 바로 예매했을 만큼 이 영화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아마 이 글의 90%는 영화의 장점과 내가 느꼈던 영화의 메시지들로 채워질 예정이라 아주 작은 아쉬웠던 점 하나를 먼저 던지고 가려고 한다.
<애프터 양>은 느린 속도를 좋아하지 않는 관객들에겐 추천하지 않는 영화다. 오프닝 신을 제외하면 스피드가 느껴지는 신이 거의 없고, 양의 기억이 짧게 파편 난 채로 재생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다. 영화 전체가 마치 아름다운 비디오 일기처럼 흘러가는 느낌이 있고 모든 등장인물들이 외적으로 감정을 많이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다이나믹한 감정선을 기대한다면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또 SF영화라 하여 상상력으로 가득한 세상을 기대하는 관객에게도 비추! 조용한 영화기 때문에 피곤한 상태로 관람하는 것 또한 비추다.
객관적으로 본 아쉬운 점은 이 정도가 있겠고..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단점도 아니고 그냥 취향 차이 정도가 아닐까? 오히려 난 이 천천히 흘러가는 화면들이 좋았다. 빠르지 않은 속도 덕분에 푸른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 연하게 느껴지는 바람 같은, 그 순간에 담긴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으니까.
오늘부터 나의 최애 주머니에 담긴 저스틴 H. 민 배우
이 영화에 처음 띠용-했던 건 코고나다 감독의 이름 때문이었고, 죽어도 꼭 봐야겠다!! 고 생각하게 된 이유는 '저스틴 H. 민’이라는 배우 때문이었다. 올해 초, 나는 뒤늦게 <엄브렐러 아카데미>를 통해 이 배우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고, <애프터 양>을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려왔다.
해사한 미소와 조곤조곤한 말투, 밝은 성격과 내 취향을 저격하는 매력적인 외모. 거기에 <엄브렐러 아카데미>에서 보여준 발랄함과 따스함이 뚝뚝 떨어지는 연기까지… 저스틴 H. 민은 내 눈에 쏙 들어오는 매력적인 배우였다. 그리고 나는 <애프터 양>을 보자마자 한치의 망설임 없이 저스틴 H. 민을 최애 주머니에 담아버렸다.
저스틴 H. 민 배우는 <엄브렐러 아카데미>에서 보여줬던 모습과 사뭇 다른 모습으로 '양’이 되어 스크린에 나타났다. 그는 언젠가는 로봇처럼 딱딱하고 어색하게, 언젠가는 따스한 오빠처럼, 언젠가는 든든한 부모님처럼, 또 다정한 연인처럼 느껴지는 여러 결의 눈빛을 흘리며 나의 마음을 완벽히 홀리는 데 성공했다. 사실 저스틴 H. 민 배우는 단편 영화들을 제외하면 아직은 필모그래피가 많지 않은 배우인지라, 다양한 연기를 보지 못했었는데 <애프터 양>을 통해 새로운 모습을 만날 수 있어 정말 기뻤다. 나는 섬세하고 정갈한 그의 호흡에 속절없이 빨려 들었고 '이 배우는 지금도 엄청난 스타지만… 앞으로 더 잘될 배우가 확실하다!’고 외치며 그에게 뼈를 묻기로 다짐했다.
세련된 연출
<애프터 양>은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영화다. 정확히 몇 년인진 알 수 없어도 왠지 멀지 않을 것 같은 미래로 보인다. 코고나다 감독은 익숙한 현재의 모습에 미래의 모습을 자연스레 녹여낸다. SF영화라 하면 정말 상상 속에만 존재할 것 같은 배경을 떠올릴 수도 있는데, 이 영화는 정말 곧 다가올 것 같은 미래의 모습을 담았다. 안경과 닮은 판독기, 낯설지 않은 차의 구조, 지금도 찾아볼 수 있는 익숙한 카메라와 집, 가구들. 그래서인지 정말 이런 가족이 어딘가에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들어 더욱 몰입이 됐던 것 같다.
그리고 인물들의 의복이나 음식, 차를 우려먹는 문화를 통해 영화 곳곳에 동양적인 요소들을 가미함과 동시에 깔끔한 갤러리를 연상시키는 건축물과 가구들을 배치함으로써 흠잡을 곳 없는 깔끔하고 안정적인 화면을 보여준다. 더불어 이 영화의 세련됨은 오프닝에서 제대로 느낄 수 있는데, 이 부분은 먼저 얘기하면 장면의 재미를 반감시킬 수 있으니 자세히 언급하진 않겠다.
코고나다 감독과 저스틴 H. 민 배우의 만남.
그들이 던지는 "~다운 건 무엇일까?" 하는 질문코고나다 감독과 저스틴 H. 민 배우. 각자 떨어뜨려 놓아도 충분히 이슈를 몰고 다니는 인물이자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공통된 정체성이 있는 두 사람이 만난 작품이라니. 어찌 궁금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영화에서 양과 가까운 사이였던 에이다는 양이 교육용 안드로이드로서 미카를 가르치기 위해 중국의 문화와 아시아인다운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했다고 말한다. 양은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아시아인의 조건은 무엇일까?"
프로그램에 정보가 입력되어 있기 때문에 중국의 역사, 문화를 해박하게 알고 있지만 사실 중국에서 살아본 ㄴ적이 없는, 그에 대한 기억이 하나도 없는 양은 미카를 가르치면서도 아시아인다운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제이크와 차를 마실 때도 그렇다. 차의 기원과 종류는 다 알고 있지만, 양은 차 한잔을 온전히 즐기지 못한다. 그것이 어떤 맛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는 몇 번이고 같은 질문을 던진다. "~다운 것이란 무엇일까?"
하나 더 예를 들자면 제이크의 찻집이 있다. 제이크는 잎이 그대로 살아있는 차를 판매한다. 영화의 첫 장면, 제이크의 찻집에 들어온 손님은 가루로 된 차가 없냐고 묻더니 "차 가루가 없는 찻집도 있냐"고 말하며 찻집을 나간다. 차 가루가 없는 찻집은 찻집답지 못한 걸까? 찻집 다움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 걸까? 제이크는 손님의 말을 마음에 담아뒀는지 차 가루를 내 양과 함께 차 한잔을 마셔보지만 가루로 된 차가 주는 맛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시아인의 조건은 무엇일까?", "차를 즐긴다는 건 무엇일까?", "안드로이드다운 것은, 인간다운 것은 무엇일까?", "가족이란 건 무엇일까?" <애프터 양>은 무언가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한다.
<애프터 양>을 만나기 전, 저스틴 H. 민 배우의 <애프터 양>이란 영화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인터뷰를 읽고 가서인진 몰라도 코고나다 감독과 저스틴 H. 민 배우가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며 끊임없이 던져야 했을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온전히 느껴지는 듯했다.
차에 대한 기억이 없고 지식만 있어도 나는 차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인가?, 중국에 대한 기억이 없고 역사에 대한 지식만 있어도 나는 아시아인이 되는 것인가?
저스틴 H. 민 배우는 자신 또한 이런 비슷한 고민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분명 나는 한글을 배웠고, 한인 교회에 갔고, 한국에 대해 알고 있지만 그것이 나를 한국인답게 만들 수 있는 걸까?"하는 고민 말이다. 코고나다 감독 또한 이 영화를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들어간 영화라고 언급했다.
저스틴 H. 민은 양을 닮았고, 양은 저스틴 H. 민과 닮았다. 나는 과연 누구이고, 어떤 인생을 살아가야 나다운 것인가. 저스틴 H. 민 배우는 끊임없이 질문을 하고 '나’의 뿌리를 찾아가는 양의 여정이 곧 자신의 여정이기도 하다고 언급했다.
양의 이름 + 뿌리와 정체성에 대하여
Yang이라는 이름은 코고나다 감독과 저스틴 H. 민이 항상 고민했던 '이민자(한국계 미국인)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그대로 드러나는 매개체다. 우리는 Yang을 양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영화 속 제이크의 가족은 Yang을 양이 아닌 '얭’에 가까운 발음으로 부른다.
저스틴 H. 민 배우는 한 인터뷰에서 이에 대해 코고나다 감독과 양의 이름에 대해 함께 고민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두 사람은 양의 발음을 실제 버전(양)으로 할지 미국화 된 발음(얭)으로 할지 신중히 고려해 '얭’으로 결정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서양인 부모들이 "Yang을 원래 발음에 가깝게 발음하기 위해 크게 노력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코고나다 감독은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아시아와 서양이라는 두 개의 문화의 중간에서 정체성과 소속감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모습을 양의 잘못 발음되는 이름을 통해 은유적으로 나타냈다고 한다. 아마 서양, 아시아의 문화 사이에서 정확히 자리를 잡지 못한 채 고민하고 있는 이민자들의 모습을, 서양 부모들에 의해 '양’이 아닌 대충 '얭’으로 발음되는 그의 이름으로 비유했다고 생각하면 될듯하다.
다양성에 대하여
위에서 언급한 "~다운 것은 무엇일까?"하는 질문은 다양성에 대한 이야기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주인공인 제이크의 가족만 봐도 알 수 있듯, 이 영화엔 다양한 모습을 한 가족들이 나온다. 제이크의 가족은 백인 남성, 흑인 여성, 아시아인인 딸, 안드로이드로 구성되어있고 그의 옆집엔 복제 인간 아내와 아이를 둔 이웃이 살고 있다. 오프닝 신에 나오는 가족 댄스 대회의 참여 가족들 또한 피부색, 성별, 인간/복제 인간/안드로이드의 구분 없이 다양한 형태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가족이란 같은 인종인 부부가 이루는 것인가?, 또는 사회 통념상 정해진 보통의 연인들이 이루는 것인가? 아니면 같은 핏줄을 가진 사람들끼리만 이룰 수 있는 것인가? 그 무엇도 정답이 될 수 없다. "~ 다운 것"은 타인이 함부로 정할 수 없는 개인의 정체성 문제이고, 그 답을 찾고, 정의하는 것은 온전히 개인의 몫인것이다.
댄스 대회를 하면서 제이크의 가족들은 "우리가 한 팀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말대로 이들은 하나의 온전한 가족이 되어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며 한 팀이 되어 살아간다. 백인 아빠와 흑인 엄마, 입양된 아시아인 딸, 딸의 오빠 역할을 하고 있는 안드로이드. 혹시 이들을 감히 '가족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만약 있다면 내가 아주 조금만 혼내주려고 하니 어디 한번 그렇게 말해보길 바란다…)
새로운 안드로이드
나는 지금껏 안드로이드, 로봇들이 바라보는 세상은 사뭇 건조할 것이라 생각했고 안드로이드는 인간이 될 수 없다는 한계를 깨닫는 순간, 높은 확률로 슬퍼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양은 달랐다. 그는 제이크의 가족에게 심어진 곁가지가 아닌 든든한 뿌리였고, 인간이 아닌 자신의 인생을 슬퍼하지도 않았으며, 건조한 표정을 하고 있는 진짜 인간들보다 더욱 인간다운 삶을 살아온 존재였다.
영화의 초반, 인간들의 눈으로 본 양은 딱딱한 로봇 같은 모습이다. 그는 미카와 대화를 나눌 때도 눈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고, 어딘가 어색한 모습으로 비친다. 하지만 양의 기억 속 양의 모습과 양이 느낀 감정들은 어떤 등장인물보다도 더 '인간다웠다'. 옆에 있는 가족들의 모습을 소중히 간직하는 따뜻한 마음, 사랑한 사람을 잊지 않고 그의 주변을 맴도는 지고지순함, 거울을 보며 빙긋 웃어보는 모습까지. 수많은 기억을 저장하며 순수하게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양의 모습은 아름다운 인간 그 자체였다.
여담으로 저스틴 H. 민 배우는 GV를 통해 양의 기억을 언급하며 양은 일상의 순간들을 아름답게 기억하고 있다며, 관객분들도 일상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잃지 않길 바란다고 전했다. 생각해보니 내 일상을 단조로운 것이 아닌 매일 다른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해본 날이, 일상에서 내 인생의 의미를 찾아본 날이 언제였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처음엔 왜 양이 주인공인지, 왜 그가 이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지 알 수 없었으나 양의 기억을 여는 순간 확실히 알게 됐다. 이 영화의 제목이 왜 <애프터 양>인지. 그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옅은 흔들림과 여전히 반짝이고 있는 기억들은 나에게 복합적인 감정을 선물했다. 이런 사랑스럽고 복잡한 안드로이드 같으니…
양의 소중한 기억 속을 함께 유영하며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던 96분. 이 시간의 일부는 나의 '아름다웠던 순간' 중 하나로 고이 저장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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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호 돌봄'이라는 새로운 부녀 관계
8/10
11살 딸 소피와 30대 초반의 아빠 패터슨이 소피의 방학을 맞아 함께 여행을 떠난다. 부부의 이혼 후 소피가 엄마와 함께 살기에 두 사람 모두에게 아주 소중한 여행이다. 행선지는 튀르키예. 매끄럽지만은 않다. 두 개의 침대를 확인하고 예약한 호텔 방에는 침대가 하나뿐이고, 호텔 바로 옆에서 진행 중인 공사는 부녀의 신경을 긁는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여행의 기쁨이 더 크다. 패터슨은 다정한 얼굴과 몸짓으로 딸에게 선크림을 발라주고, 소피는 그런 아빠에게 의지하며 둘이 함께 만들 추억에 들뜬 상태다.
11살은 애매한 나이다. 어린이와 청소년 그 사이 어딘가. 소피는 아빠와 함께 노는 것도 좋지만 수영장에서 만난 언니 오빠들과 어울리며 그들처럼 놀고 싶기도 하다. ‘소피의 오빠가 아니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젊은 아빠인 패터슨 역시 그런 소피의 마음을 알고 보호자와 친구 역할을 오가며 소피를 배려한다.
어른이 되어가는 소피와 젊은 아빠라는 패터슨의 부녀 관계는 미묘하다. 소피가 절대적 보호가 필요한 나이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고, 젊은 청년인 패터슨 역시 소피 말고도 신경 쓸 일이 많기 때문이다. 부녀 관계를 따뜻하게 담아내는 〈애프터썬〉이 흥미로워지는 건 이 지점이다. 성장 중인 딸과 여전히 방황하며 인생의 갈피를 잡지 못한 아빠가 만들어내는 관계에서는 기존의 부녀 관계와는 다른 역동이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소피 앞에서는 늘 밝고 당당하게 행동하지만, 패터슨은 고통의 시간을 겪는 중이다. 최근 사업에 실패한 패터슨은 미래가 두렵다. 딸에게 많은 것을 해주고 싶지만 돈은 넉넉하지 않고, 당장 자신의 미래조차 확신할 수 없다. 딸은 자신과 다른 인생을 살기를 바란다. 소피도 아빠가 어려운 시기를 통과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아빠의 간섭과 참견을 귀찮아하면서도 ‘어린아이’ 같은 천진함을 활용해 아빠에게 위로를 건넨다. 그녀가 더는 어린아이가 아님에도 말이다.
일상적 배려와 스치듯 지나가는 다정한 말 한마디로 서로를 응원하는 부녀. 그런 그들에게도 위기가 찾아온다. 위기는 두 사람의 정체성이 엇갈릴 때마다 찾아온다. 어린이이자 청소년이고, 아빠이자 (위태로운) 청년인 부녀. ‘어린이’와 ‘아빠’, ‘청소년’과 ‘청년’이 만날 때는 좋은 시너지가 난다. 하지만 ‘어린이’와 ‘청년’, ‘청소년’과 ‘아빠’가 만나면 불협화음이 난다. 지금 이 순간의 정체성이 무엇이냐에 따라 돌봄의 화살표가 바뀌기 때문이다. 두 정체성 사이를 오고 가는 둘은 매 순간 서로를 면밀히 탐색하며 미세하게 관계를 협상해야만 한다. 정체성을 오인하면 감정이 상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주고받는 상황이 생긴다. 함께 무대에 올라 춤추고 노래하자는 소피의 제안을 패터슨이 거부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어린이’ 소피는 어린 시절부터 해왔던 가족의 전통을 거부하는 아빠에게 서운하고, ‘청년’ 패터슨은 남들 앞에서 가무를 하는 게 부끄럽기 때문이다.
서로를 아끼면서도 때로는 상처주는 말을 주고받는 장면이 이어지는 동안 부녀 관계의 깊이와 갈등 모두 고조된다. 더불어 패터슨의 아픔과 상처가 서서히 부각되며 소피와 패터슨의 부녀 관계는 점차 ‘청소년’과 ‘청년’의 관계, 즉 돌봄의 화살표가 딸에게서 아빠를 향하는 것으로 전환된다. 〈애프터썬〉의 성취는 바로 여기에 있다. 아빠에서 딸로 향하는 일방적‧일반적 부녀 관계를 거스르며 상호 돌봄의 부녀 관계를 형상화하는 것이다.
아빠/아버지는 늘 강인한 존재일 것을 요구받는다. 이 요구가 내면화되어 남성이 스스로를 그렇게 재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부장적 젠더 이원론의 각본에서 태생적‧본질적으로 강한 존재는 없다.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지는 각본에 자신을 맞추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개별자들이 있을 뿐이다. 〈애프터썬〉은 방황하는 청년이라는 보편적 인간에게 ‘아빠’ 정체성을 더함으로써 ‘아빠/아버지’ 역시 취약한 존재임을, 즉 누군가의 돌봄을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보인다.
영화에는 패터슨과의 상호 돌봄 관계가 소피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 짧게 나온다. 성인이 된 소피가 동성 애인과 함께 아이를 양육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그녀가 패터슨과 서로 기대며 버티고 지나온 시간을 바탕으로 성숙한 돌봄의 관계를 꾸렸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돌봄이 필요하다. 자신의 취약함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고꾸라질 수밖에 없다. 친밀한 사람에게 기대는 사람만이 무너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을 돌본다. 이것이 상호 돌봄의 부녀 관계를 감동적으로 영상화한 영화 〈애프터썬〉의 메시지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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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트릭스, 다시 돌아올 필요가 있었을까?
매트릭스 시리즈의 4편인 매트릭스 리저렉션이 개봉했습니다.
마지막 3편이 나오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다시 만들어지게 된건데요.
거의 완벽히 이야기의 결말이 지어진 시리즈에 더 할말이 있었을까요?
센세이셔널한 액션 장면이 인상적이었던 과거 시리즈의 영광을 이어갈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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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rix Resurrection, the fourth part of the Matrix series, has been released.
After a long time, the last three films were released, and it was made again.
Was there anything else to say about the series that almost perfectly ended the story?
Can we continue the glory of the past series, where sensational action scenes were impress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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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트로트는 인생이다> 메인 예고편
줄거리
트로트 가수 ‘신하’(김경진, 김동찬)는 최근 고민이 많다
아무리 신곡을 내고 홍보를 해도 그들을 찾는 무대는 없다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던 이들은 신입 멤버를 영입해
시대에 맞는 트로트 혼성 그룹 ‘뉴-신하’를 결성하기로 한다
때마침, 연습생 기간만 6년… 이제는 희망을 잃은
아이돌 지망생 ‘지원’(장소영)이 운명처럼 나타나는데!
희망찬 내일을 꿈꾸는 이들의 좌충우돌 도전기!
우리들은 무대는 지금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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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미션 파서블>
"돈 되니까" VS "국가를 위해"
우린, 한다면 한다!
티격태격 하는 말마다 태클,
우당탕탕 하는 짓마다 사건!
우수한X유다희,
아찔한 이 공조를 멈출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