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W2021-04-04 11:08:13
우리가 가장 잘하는 게 사랑이니까, 마미 (2014)
영화 <마미> 리뷰
가족과 사랑, 이 두 가지 요소는 자비에 돌란의 영화들에서 늘 존재한다. 그의 페이지 속 인물들은 끊임없이 사랑의 환희와 아픔을 맛보고, 혼란을 겪으며 성장한다. 그리고 이런 인물 곁에는 항상 그들의 가족이 맴돌고 있다. 돌란은 그 중 ‘엄마’라는, 가장 가까운 존재이자 그에게 무한한 영감을 주는 단 하나뿐인 인물을 내세워 이야기를 풀어낸다.
<마미>는 ‘엄마’의 전형적인 틀에서 다소 벗어난다. 다시 말해 자식을 향한 헌신적이고 자애로운 사랑을 다루지는 않는다. ADHD와 애착 장애가 있는, 다소 불안정한 스티브가 보호시설에서 나온 뒤 엄마 디안의 모험 같은 나날이 시작된다. 극의 초반 갑작스럽게 발생하는 교통사고처럼, 그들의 하루하루는 예측할 수가 없다. 둘은 집 안의 물건이 부서지도록 살벌하게 싸우기도 하고, 행동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며 언쟁을 벌이지만, 누구보다 서로를 너무도 사랑한다. 디안은 다정함보다는 특유의 발랄함과 불같은 성격이 돋보이는 엄마로, 스티브와 치고받는 하루가 가장 평범한 날이다. 이들의 일상 속, 이웃집에 사는 카일라가 합류하게 되며 그들의 시간은 더욱더 다채로워진다.
디안, 스티브, 카일라는 모두 자신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는 공통점이 있다. 디안은 남편을 잃고 통제가 어려운 아들을 시설에 보낸 후,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만 했다. 스티브는 아빠를 잃고 그 상처로 인해 급격히 행동에 문제가 생기게 되었고, 카일라는 과거의 트라우마로 말을 더듬게 된다. 그의 방에 놓여있던 남자아이의 사진으로 보아 그의 아들과 관련된 것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렇게 이들은 각각 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서로를 통해 그 결핍을 조금씩 채워간다.
<‘마미’만의 아이덴티티_색감(빛)과 화면 비율, 그리고 사운드트랙>
이들이 함께하는 순간들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의 대범하고, 강렬한 색감들로 둘러싸여 있다. 눈부시게 쨍한 푸른 하늘과 디안의 화려한 옷들, 스티브를 둘러싼 노란빛들은 이들이 겪고 있는 상황들과 확연히 대비된다. 특히 스티브의 등장 장면은 그가 사랑스러운 아이임을 한눈에 보여준다. 아들을 데려오기 위해 보호시설에 도착한 디안에게, 인터폰을 통해 쏟아지는 험한 말들로 스티브의 충동적이고 거친 면을 보여준다. 이로 인해 일종의 긴장감이 생기지만, 문을 열고 나오는 그는 예상 밖의 모습이다. 엄마를 보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환한 미소를 가진 천진난만한 아이이다. 이때 유난히 디안과 스티브를 비추는 빛은 너무도 따스하다. 극 중 등장하는 옆광의 활용 또한 인상적인데, 인물보다는 뒷배경의 색이 돋보이며 불안정한 인물의 모습을 강조한다. 신문의 구인광고면을 보며 일자리를 찾는 디안과 홀로 남겨진 스티브를 이렇게 표현함으로써 그들의 감정을 대신해 준다.
가장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는 화면 비율도 인물이 처한 상황에 따라 확연히 차이를 둔다. 일반적인 화면비와는 다른 1:1의 비율을 유지하는데, 이로 인해 불필요한 것들은 덜어내고 손과 눈빛 등의 클로즈업을 통해 관객이 이야기 자체에 집중하도록 의도했다고 한다. 줄곧 정사각형 비율을 유지하던 화면은 두 번 넓어진다. 한번은 세 인물의 행복한 순간, 다른 한 번은 엄마가 스티브의 미래를 상상하는 순간이다. 넓어진 화면을 통해 일종의 해방감을 선사하지만, 곧바로 인물이 막막한 현실을 인식함에 따라 화면은 다시 닫힌다. 이 두 장면은 어쩌면 이들이 가지지 못할 평범하지만, 먼 꿈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영화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경계를 화면의 크기로 확실히 각인한다.
사운드트랙 또한 그중 일부이다. 돌란의 영화 속 노래들은 인물의 상황이나 감정이 묻어나오는데, 이는 대사의 또 다른 연장선이기도 하다. <마미>에 흘러나오는 대부분의 곡은 의도된 배경음이 아닌 인물의 일상에서 나온다. 스티브가 CD 플레이어를 작동시키거나, 카일라가 차 안에서 듣는 것처럼 인물이 주체적으로 음악과 함께한다. 여러 노래가 있지만, 세 가지만 소개하겠다. 스티브의 첫 등장씬에서 나오는 Dido의 White Flag의 가사를 주목해 볼 수 있다. 항상 너를 사랑할 거고,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가사는 디안의 스티브를 향한 마음을 읽는 것만 같다. Ludovico Einaudi의 Experience라는 곡은 감독이 <마미>를 만들게 되는 첫 시작점이 되었다. 곡을 듣고 난 후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를 떠올렸던 돌란은 이 영감을 영화에 녹여냈다. 극 중 엄마 디안의 상상 장면에 쓰이는 노래에 맞게 화면은 잡을 수 없는 미래처럼 뿌옇다. 마지막, 밖으로 달려 나가는 스티브와 함께 엔딩 크레딧까지 이어지는 Lana Del Rey의 Born To Die는 제목에서부터 의미가 있다. 여기서 Die는 그의 엄마인 디안 다이 데프네의 미들 네임으로, 스티브의 엄마를 향한 진심 어린 마음을 대신하는 제목이기도 하다. 이렇게 다양한 요소들이 <마미>만의 아이덴티티를 만들어 낸다.
<사랑과 구원은 별개에요>
영화에서 제시한 가상의 법안인 S14는 이렇게 말한다. ‘행동 문제가 있는 자녀를 둔 부모가 위험에 처할 경우, 법적 절차 없이 아이를 공공병원에 위탁할 수 있다.’ 이는 디안과 스티브의 삶에 화두를 던지는 부분이자, 엄마의 역할에 의문을 제기한다. 아이를 공공병원에 위탁하는 것, 과연 이 행동이 엄마로서의 잘못된 방식인지, 그렇다면 과연 보호자로서의 옳은 행동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게 한다. ‘사랑과 구원은 별개에요.’ 스티브가 나아지지 않을 거라 여긴 보호시설 직원이 한 말이다. 이에 디안은 비관적인 사람들이 틀렸다는 걸 증명해 보이겠다며 당당히 맞섰지만 현실의 무게는 버티기에 쉽지 않다. 결국 디안은 서로에게 최선의 선택을 하고, 이들은 또다시 이별하게 된다. 여기서 그의 태도가 <마미>에서 말하고 싶은 바이다. 디안은 희망이 있기 때문에 스티브를 병원에 보낸 것이라고 하며, 그렇기에 자신은 늘 승자였다고 한다. 그의 말이 아이러니할 수도 있지만, 이는 절대적인 부모의 역할은 없다고 말한다. 이들의 관계에는 균열이 생겼지만, 이는 곧 회복될 것이란 희망을 품고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감정과 꿈으로 규정되어야 한다’는 돌란의 말처럼, 그들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 승리자이다. 어쩌면 사랑과 구원은 별개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런 행동 또한 사랑의 다른 형태로써, 이들이 가장 잘하는 이 감정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들은 누구보다 뜨겁게 사랑했고, 그렇기에 희망을 품을 이유가 충분하다.
‘마미’는 어린 시절 아이가 엄마를 부를 때 주로 사용하는 말로 여겨진다. 영화의 제목을 보편적으로 엄마를 지칭하는 말인 ‘마더’가 아닌 ‘마미’로 표현한 것에는 분명 남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늘 엄마를 위해 살겠다는 스티브의 애정 어린 표현이자, 언제나 우리를 제일 사랑하는 그들에게 바치는 돌란의 존경 담긴 메세지가 아닐까. <마미>는 그렇게 결국 현실에서 구원해주지는 못했지만, 끝까지 사랑과 희망을 놓지 않는 이들의 삶을 낭만적으로 말한다. 엄마와 아들,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필연적이다. 엄마는 스티브가 항상 돌아가고 싶어 하는 곳이자, 우리에게도 그런 장소이다. 이들은 불안정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항상 서로에게 의지한다. 마지막 병원에서 달려 나가는 스티브 또한 디안과 같은 생각일 것이다. 좀 더 나아질 것만 같은 앞으로의 나날들, 그 한 줄기 빛은 나의 엄마, 그리고 사랑을 비추고 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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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발된 범인, 피해자는 증발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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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느껴지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영화를 리뷰하는 사람으로서
특히 작고 사회적인 내용을 담은 작품들에 조금더 마음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으로서
[공기살인]같은 작품들의 개봉을 응원하고, 또 미디어의 선한 영향력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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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 실화 퇴마 파일! 어둠 속 숨겨진 바티칸의 비밀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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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쓰이지 않은 글, 쉽게 만들어지지 않은 영화는 흥행하지 못하면 좋은 영화가 아닌 걸까. 좋아하는 마음에서 시작한 일이 어려움으로 다가와 내려놓게 되는 현실을 마주한다. 깨진 문 사이의 바람처럼, 끝끝내 틀린 맞춤법과 같은 딜레마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진 지완. 그는 어느 날, 아르바이트 삼아 두 번째 여성 영화감독인 홍은원 감독의 작품 <여판사>의 음향 복원하는 일을 하게 된다. 중간중간 사라진 필름, 들리지 않는 소리, 바래진 장면으로 가득한 영화 속에서 흔적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홍은원 감독의 마지막 행적을 따라가는 길목마다 그 영화와 관련된 사람들을 만나며 어떤 여성의 그림자를 만난다. 어떤 장소에 빛만 바래진 채, 사라지지 않는 마음이 각자 다르지만 비슷한 형태로 펼쳐지고 있는 영화인들을 발견하며 들게 만든 소중한 작품들이 빛을 받지 못했던 과거의 순간과 현재의 순간이 겹치며 어둠이 그림자를 흡수하듯 앞으로 나아가는 지완의 발걸음이 조금씩 가벼워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자넨 끝까지 살아남아”
하나, 둘씩 떠나가는 주변과 영화 그만하라는 말 가운데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에 이런 말을 듣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변화를 겪어야만 벌어지는 상황을 어떻게 이겨나가냐에 따라 달라지는 수많은 상황 속에 놓였다. 한때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하지 못했고 또 검열되었던 수많은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하면서 불협화음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힘들게 필름을 복원하듯 먼지를 털어낸 자신의 꿈을 다시 바라보는 순간을 맞이 한다.
포기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오랫동안 그 꿈을 포기하지 않았는데,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놓아주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어도 포기는 쉽지 않은 법이다. 좋아하는 것을 평생 할 수 없었지만, 그때의 순간들을 찍어둔 앨범, 커피에 달걀을 넣어 마시던 다방, 고이 넣어둔 영사기처럼 영화에 대한 마음을 놓지 않았던 마음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끝끝내 자리를 지켜 소중한 영화들을 펼쳐낸 누군가의 작품이 그림자처럼 흔적을 남기고 커피에 달걀을 넣어 먹던 그때의 다방이 빛바래지지 않은 채,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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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과 이야기의 공명, 이야기로 묻고 삶으로 답하다
소통의 부재는 영혼의 부재
우리 집에는 네 명의 인간과 두 마리의 개가 함께 살고 있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같은 종의 동물이라도 각각 전혀 다른 소통방식을 구사한다. 이를테면, ‘네가 먹고 있는 것을 줘.’라고 표현하고 싶을 때도 “달라”라고 부탁하는 인간이 있고, 손으로 뺏어 먹는 인간이 있다. 개는 엎드려서 침을 흘리거나 양손(앞발)을 사람에게 올리기도 한다. 각각의 종은 서로 같은 언어 체계를 공유하지만, 같은 소통방식을 구사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손이 먼저 나가는 인간은 앞발을 올리는 개와 가까운 소통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개도 인간도 종과 언어를 막론하고 저마다 소통하는 방식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의 진정한 언어는 침묵일 수도 있고, 육체적 관계일 수도 있고, 운전 방식일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한국어와 같은 언어 체계는 진정한 소통방식을 번역한 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언어를 뛰어넘어 소통하기 위해서 우리는 각자의 진정한 소통방식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히로시마 연극제의 상주 예술가에게 배정되는 운전사 와타리 미사키(미우라 토코)는 말수가 적지만 차와 상대를 세심하게 배려한다. 그가 밟는 액셀과 브레이크 역시 하나의 소통 수단이다. 미사키는 이를 통해 차 안의 공기와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미사키의 운전은 중력도, 운전하는 사람도 잊게 할 정도로 부드럽다. 이 무저항의 운전은 미사키의 고향 가미주니타키무라에 내리는 눈송이처럼 고요하다. 자신의 존재를 지우며 상대를 편안하게 해 준다. 미사키가 배워야만 했던 소통방식은 그런 것이었다.
배우이자 연극 연출가인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는 자신의 진짜 마음을 숨기는 방식으로 소통한다. 그의 언어는 침묵 또는 회피라고 할 수 있다. 가후쿠와 드라마 각본가 오토(키리시마 레이카)는 이상적인 부부처럼 보인다. 블라디보스톡 연극제의 항공권 예약이 미뤄져 집으로 돌아간 가후쿠는 아내 오토의 외도를 목격하고 아무 말도 없이 뒤돌아 나간다. 가후쿠가 외면한 진실은 아내의 외도만이 아니다. 그들의 결혼 관계는 사실상 끝났고, 두 사람은 함께할 수 없다는 진실을 그는 끝끝내 마주하지 않는다. 그리고 오토의 죽음으로 가후쿠는 자신의 마음과 진실이 마주할 기회를 영영 잃어버렸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에는 단 한 번의 식사 장면이 등장한다. 히로시마 연극제 담당자 윤수(진대연)가 마련한 저녁 식사 자리에는 유나(박유림), 가후쿠, 미사키 그리고 래브라도 리트리버 한 마리가 함께한다. 이 식사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는 대부분 번역된 말이다. 전혀 다른 언어들이 오가고 누군가의 입을 빌려 다시 변환되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지만, 영화의 어떤 장면보다도 따뜻하고, 안정적이며 소통과 공감이 느껴진다. 이 장면은 언어를 뛰어넘는 따뜻한 소통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우리가 소통의 부재를 겪는 것은 언어가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영혼이라 부르는 그것이 언어 안에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언어와 텍스트의 관계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언어와 텍스트는 닭과 달걀 같은 관계를 맺고 있다. 가후쿠 부부는 4살 딸을 폐렴으로 잃은 후로 관계를 통해 이야기를 잉태하기 시작한다. 오토의 음성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가후쿠의 번역을 거쳐 오토에게 전해진다. 다시 오토에게 돌아온 이야기의 잔상들은 각본, 즉 텍스트로 태어날 준비를 하게 된다. 이렇게 탄생한 이야기는 단순히 캐릭터와 플롯이 아니라 무의식과 욕망의 집합체와 같다. 오토의 음성과 그것을 양분 삼아 만들어진 이야기는 오토의 창조물이지만, 독립된 생명체처럼 타인에게 다른 모습으로 뿌리내리게 된다. 가후쿠에게 오토의 이야기는 진실이 드러나기 직전의 두려움과 불안의 기척을 품은 채 마무리되었지만, 다카츠키(오카다 마사키)에게 그 이야기는 불길한 고요함으로 가득 찬 세상의 모습이다.
각본으로 만들어진 텍스트는 결국 발화함으로써 완성된다. 그렇기에 오토는 자신의 이야기와 무의식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완성해줄 누군가를 찾았고, 그가 바로 다카츠키였다. 가후쿠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며 감동하고, 오토의 열렬한 팬인 다카츠키는 ‘바냐’라는 인물에는 쉽게 이입하지 못한다. 다카츠키는 체호프의 ‘바냐’보다 오토의 이야기 속 칠성장어의 전생을 가진 소녀를 닮은 인물이다. 그는 체호프의 성실하며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세계보다 무의미한 기다림과 충동과 욕망의 세계에 끌린다. 불가해하고 불길한 무언가로 가득한 오토의 텍스트야말로 다카츠키의 삶을 담을 텍스트다. 그는 오토와 같은 언어, 즉 같은 소통 방식을 공유하고 있는 인물이다. 다카츠키는 오토의 텍스트를 완성했으나 바냐가 되어 체호프의 텍스트를 완성하는 데에는 실패한다.
이와 반대로 이성적이며 통제적인 가후쿠는 오토의 텍스트를 똑바로 마주할 수 없다. 가후쿠가 오토에게서 듣는 것은 오직 이야기뿐이다. 자기 안의 진실을 마주하지 못한 가후쿠는 이야기 안의 오토를 외면한다. 가후쿠가 오토의 목소리로 듣는 또 하나의 이야기는 녹음된 ‘바냐 아저씨’의 대본이다. “대사를 입에 올리면 나 자신이 끌려 나와” 오토의 음성으로 울리는 체호프의 텍스트는 가후쿠에게 계속해서 진실보다 깊은 것을 묻는다. 가후쿠는 체호프와 오토가 자신에게 걸어오는 말을 애써 피하고 있다.
오토의 죽음으로부터 2년이 지난 후 히로시마 연극제에 초대된 가후쿠는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의 연출을 맡는다. 가후쿠의 연극은 일본어, 중국어, 한국어 그리고 한국 수어까지 서로 다른 언어가 한데 어우러진다. 이 특별한 공연을 준비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대본 리딩이다. 어떤 감정도 없이 아주 천천히 대본을 읽는 것이다. 배우들은 불완전한 언어를 뛰어넘어 소통하는 동시에 온몸으로 체호프의 텍스트를 체득해야 한다. 언뜻 이해하기 어렵고 지루한 이 과정을 가장 먼저 이해한 것은 수어를 사용하는 유나다. 자신의 언어가 타인에게 닿지 않는 것이 평범한 일인 그에게 보고 느끼며 공감함으로써 기능하는 연기는 몸에 잘 맞는 옷과 같다. “체호프의 글이 내 안에 들어와 움직이지 않던 몸을 움직이게 해 줘요” 체호프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유나와 소통하고 있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하루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졌지만, 영화의 영혼은 체호프의 텍스트에 담겨있는 것처럼 보인다.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는 ‘바냐’가 한때 누이동생의 남편이자 존경하는 학자였던 교수 세레브랴코프를 원망하고, 교수의 두 번째 부인 옐레나를 사모하게 되며 겪는 갈등을 다룬다. 체호프는 우리가 갈등과 절망, 적의와 증오를 넘어서 계속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현재의 고난과 슬픔보다 미래의 희망과 기쁨을 꿈꾼다. 체호프의 텍스트는 하마구치 류스케가 선택한 많은 인생을 담을 수 있는 넓은 그릇과 같다.
대본 리딩이 주를 이루는 연극 연습과 오토의 목소리로 녹음된 ‘바냐 아저씨’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붉은색 사브 900을 오가며 영화는 체호프의 텍스트를 반복한다. 체호프의 텍스트는 대사뿐만 아니라 이야기로도 반복된다. 누이동생을 잃고, 존경하던 교수에게 실망을 거듭하며 바냐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인다. 바냐가 교수를 위해 바쳤던 청춘은 이미 흘러갔고 옐레나에 대한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며 소냐의 사랑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모든 것은 여전히 엉망이지만 바냐와 소냐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일을 계속한다. 딸과 아내를 잃은 상처를 마주하게 되는 가후쿠 뿐만 아니라 아이를 잃은 상실을 견뎌내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게 된 유나와 애정과 증오의 대상이었던 엄마를 잃은 미사키의 삶 역시 체호프 텍스트의 또 다른 변주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언어의 불완전함을 뛰어넘어 공명을 시도하는 이야기의 작동방식을 보여주는 영화다. 이는 일견 언어의 무용함을 말하는 듯 하나 각자의 언어와 이로 만들어진 텍스트는 호응하는 삶과 사람이 있다는 것에 가깝다. 감독은 언어의 가면을 쓴 이야기를 단지 텍스트가 아닌 독립된 생명체처럼 마주 보게 한다. 그렇게 언어와 텍스트는 계속해서 삶과 사람에게 호응을 시도하고 영화는 그 순간을 담아낸다.
삶과 사람을 담는 그릇
가후쿠와 미사키가 지나온 터널처럼 우리가 지나온 궤적을 이해하기 위한 이야기가 모두에게 필요하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이처럼 불완전한 언어와 불가해한 텍스트에 사람과 삶을 담음으로써 이야기에 힘을 불어넣는다. 언어와 텍스트가 사람과 삶을 만나는 순간 발생하는 에너지는 영화 안팎으로 퍼져나가 관객의 삶에도 영향을 미친다.
다카츠키와 가후쿠가 차의 뒷좌석에서 대화를 나누고 헤어진 후 가후쿠는 처음으로 미사키의 옆에 앉는다. 차 안에서 흡연을 피하던 가후쿠는 미사키에게도 담배를 권한다. 차 위를 향해 뻗은 두 사람의 손에서 담배 연기는 망자를 위한 향처럼 피어오른다. “넌 엄마를 죽였고, 난 아내를 죽였어” 오래된 죽음을 놓지 못하고 있던 두 사람은 도망치고 미뤄왔던 애도를 시작한다. 카메라는 나란히 피어오르는 연기에서 멀어져 익스트림 롱숏으로 이리저리 얽혀 있는 도로와 어찌 됐든 앞으로 나아가는 차들을 바라본다. 그 속에서 점처럼 작아진 사브 900도 앞으로 나아갈 거라고 믿으면서.
“바냐 아저씨, 우리 살아가도록 해요.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는 거예요. 운명이 가져다주는 시련을 참고 견디며 마음의 평화가 없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이 든 후에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리고 언젠가 마지막이 오면 얌전히 죽는 거예요. 그리고 저세상에 가서 이야기해요. 우린 고통받았다고, 울었다고, 괴로웠다고요. 그러면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어여삐 여기시겠지요. 그러면 우린 기쁨에 넘쳐서 미소를 지으며, 지금 우리의 불행을 돌아볼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우린 평온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소냐 역의 유나가 바냐 역의 가후쿠를 감싸 안고 수어로 전하는 연극의 마지막 장면은 연극을 보는 듯한 롱숏으로 길게 이어진다. 그리고 이를 응시하는 미사키의 곧은 정면 얼굴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체호프의 텍스트에 대답한다. 체호프의 텍스트와 유나의 언어 그리고 미사키의 삶이 만난 이 장면 하나로 <드라이브 마이 카>는 그 역할을 다한 것이다. 감독이 전작 <해피 아워>(2015)에서 사람들이 서로에게 무게를 기대며 중심을 맞추는 소통에 집중했다면,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는 사람과 텍스트가, 이야기와 이야기가 마주하는 소통에 집중한다.
가후쿠가 히로시마로 향하는 도로 위에서 시작했던 영화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는 미사키의 뒷모습을 보며 끝난다. 도망치듯 떠나왔던 가미주니타키무라를 뒤로 하고, 멈춰 설 수밖에 없었던 히로시마를 벗어나 새로운 땅에서 미사키는 앞으로 향한다. 사브 900을 타고 한국 부산의 도로를 달리는 미사키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며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드라이브를 즐긴다. 끝없이 이어진 도로처럼 삶은 계속 이어지고, 언제나 또 다른 슬픔이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멈추지 않는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마침내 텍스트와 언어에 담긴 사람과 삶은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음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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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WIFF 데일리] 깨어있든지, 다음이 되든지
데카메론(Decameron, 2021)
감독 : 쉬야수
상영시간 : 108분
시놉시스 : "역사는 단지 날짜의 문제가 아니다." 1997년 영국이 홍콩 행정부를 중국에 반환하기 직전, 크리스 패튼은 홍콩의 영국 총독으로서 마지막 연설에서 이와 같이 말했다. 이 영화는 크리스 패튼의 연설을 포함한 역사적 자료들을 픽션과 결합한다.(출처: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나는 한 번도 홍콩에 가본 적 없지만 홍콩을 좋아한다. 홍콩을 좋아한다고 말하지만 나는 제니쿠키와 몇 편의 홍콩영화만을 좋아할 뿐이다. 어릴 때 엄마가 '별들이 소곤대는 홍콩의 밤거리'로 시작되는 <홍콩 아가씨>라는 노래를 자주 불렀다. 내가 좋아했던 홍콩은 예술가들에 의해 잘 만져진 홍콩이고, 나는 홍콩을 모른다.
홍콩은 1841년 아편전쟁을 겪고, 1842년 난징조약으로 영국의 식민지가 된다. 근현대사에서 뭔가 구린내가 난다 싶으면 영국이 끼어 있다. 아무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도 영국은 홍콩을 계속 식민지로 둔다. 중국 본토에는 사회주의 체제인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졌지만 홍콩만큼은 세계사의 흐름대로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를 취한다. 그리고 중국의 부호들과 돈 좀 벌어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홍콩으로 몰려들기 시작한다. <첨밀밀>의 이요와 소군처럼.
왕가위 감독은 홍콩 반환을 앞두고 그가 사랑하는 홍콩의 모습을 필름에 담았다. 1997년,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에서 중국의 특별행정구로 편입되었다. 덩샤오핑은 일국양제로 홍콩의 민주자본주의를 50년간 유지하기로 했으나, 우리가 중국에 대하여 보고 들은 바와 같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민들은 우산을 들고 최루탄에 맞섰다. '우산혁명'이라 불리는 2014년 홍콩 민주화운동이다. 5년 뒤인 2019년에는 '범죄인 인도 법안'에 맞서 시민들이 다시 거리에 나섰다. 우산혁명 당시에는 평화적 시위를 이어나갔지만, 우리 모두 알다시피 평화시위는 힘이 없었다. 1996년생인 조슈아 웡은 대한민국에도 홍콩과 뜻을 같이할 것을 호소했다.
영화는 영국령 홍콩의 마지막 총리 크리스 패튼이 연설하는 장면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를 교차편집하여 보여준다. 총리는 말한다. "역사는 단지 날짜의 문제가 아니"라고. 대학교 졸업 이후 처음으로 역사의 보편성과 특수성에 관하여 생각해보게 된다.
<데카메론>은 이탈리아 작가 조반니 보카치오가 쓴 소설의 제목이다. 흑사병이 돌고있는 도시를 떠나 교외의 별장에 머무는 귀족들이 떠드는 이야기. 홍콩의 민주화운동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보여주는 이 영화는 굳이 '데카메론'이라는 제목을 차용했다. 21세기의 흑사병 같은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이겠다.
영화에는 홍콩 역사의 이모저모가 담겨있다. 100년 전인 1922년 홍콩 선원 파업 사건과 코로나 이후 홍콩 예술인들의 노조 설립을 병치하고, 1966년 홍콩섬과 구룡반도를 잇는 유일한 운송수단이었던 스타페리호의 가격인상이 도화선이 되어 발생했던 1967년 폭동과 2019년 혁명, 아직까지도 이어지는 '광복홍콩 시대혁명'까지 영화는 홍콩의 큼직큼직한 역사적 사건들을 훑어간다.
그 가운데, 코로나로 봉쇄된 도시에서 주부들이 화상회의로 만난다. 주부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서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겠지만, 코로나로 아이들이 유치원과 학교에 가지 못하게 되자 엄마들이 난감해졌다. 거시적으로도 난리가 났지만 미시적으로도 케파가 딸리는 상황에서, 언제까지 생활을 이어갈 수 있을지도 의문스럽다. 밖에서는 검은 옷만 입어도 전경에게 취조를 받아야 하고, 안에서는 밖에 나가지 못하는 가족을 돌보거나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경찰들 때문에 조마조마해야 하는 삶.
아무튼 <데카메론>은 홍콩의 과거와 현재다. 홍콩영화 특유의 찬란한 네온사인도, 화려한 액션도 없는, 홍콩 그 자체다.
'홍콩을 정말 사랑하는 예술가들'이 제작했다는 엔딩 크레딧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이 작품은 공권력에 의해 살해되거나 실종된 수많은 홍콩사람들을 기억하는 일, 억울한 죽음에 마스킹테이프를 붙이는 일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마음 그 자체다. 정말 사랑하기 때문에 기록해야만 하는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영화에서 교차편집하여 보여주었듯이, 역사는 반복될 것이다.
홍콩 시위대가 남긴 "깨어있든지, 다음이 되든지(Be aware, or Be next)"라는 문구를 목격한 우리는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우리나라에도 민주화운동이 있었고, 기록하는 사람들과 왜곡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곧 행안부 소속 경찰국이 신설될 예정이다. 어쩌면 다음은 우리일지도 모르겠다.
제24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상영 스케줄
2022년 8월 27일 17:30~19:18 /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9관
2022년 8월 31일 16:00~17:48 /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8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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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 오브 더 월드> 뉴스의 의미를 찾기 위한 여정
남북전쟁 종전 5년 후, 참전용사인 '제퍼슨 카일 키드(톰 행크스)' 대위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세계 각지에서 전해지는 뉴스들을 사람들에게 읽어주며 여러 마을을 돌아다닌다. 어느 날, 키드 대위는 키오와 부족 사람들에게 납치되어 그들의 일원으로 자라난 10살 소녀 '조한나(헬레나 젱겔)'를 발견한다. 법에 따라 그녀를 친척들에게 데려다 주기로 결정한 그. 그는 그녀와 함께 뉴스에 등장한 다양한 사건들과 험난한 자연환경을 뚫고 텍사스의 넓은 평원을 가로지르기 시작한다.
폴 그린그래스 감독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뉴스 오브 더 월드>는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상당히 이질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폴 그린그래스 감독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은 무엇보다도 현장의 긴장감과 생동감을 날 것 그대로 스크린에 투영시킬 줄 아는 핸드헬드 연출과 빠른 리듬감의 편집이다. 이는 그에게 <블러디 선데이>부터 '제이슨 본' 시리즈, <캡틴 필립스>나 <7월 22일>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유지되어 왔다. 하지만 <뉴스 오브 더 월드>에서는 일부 추격전과 총격전 외에 그의 그림자가 느껴지는 장면은 많지 않다. 대신 그 자리는 각자의 이야기를 품에 안은 채 서부를 가로지르는 주인공들을 향한 차분한 시선이 대신한다.
그 시선의 중심에는 제목대로 뉴스가 있다. 실제로 영화는 키드 대위가 사람들에게 뉴스를 읽어주는 장면으로 시작하고 끝나는 수미상관의 구조를 보여준다. 흥미로운 것은 키드 대위의 여정이 시작되는 첫 장면과 여정이 끝나는 마지막 장면이 큰 대비를 이룬다는 점이다. 우선 뉴스를 읽는 장면의 조명이 다르다. 비가 쏟아지는 어두운 날에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서 읽어 내려가는 데 비해 끝에서 키드 대위는 밝은 대낮에 글을 읽어나간다. 또한 그가 뉴스를 전달하는 태도도 판이하게 다르다. 허리를 숙인 채 신문 만을 바라보며 건조하게 뉴스를 읽고 전달던 그는 마지막 장면에서 허리를 곧게 펴고 청중들과 소통하며 당당하게 뉴스를 읽어나간다.
심지어 뉴스의 내용도 다르다. 주로 전염병 발병과 같은 객관적인 사실들과 정보들을 전달하는 데 그쳤던 첫 번째 뉴스와 달리 마지막에 낭독하는 뉴스들은 사람들이 공감을 사기 쉬운 해프닝이다. 키드 대위의 뉴스 낭독이라는 동일한 상황을 묘사한 오프닝과 마무리는 그 안의 모든 내용이 다른 것이다. 이는 키드의 대사로부터 알 수 있는 뉴스의 의미, 곧 아침부터 저녁까지 땅을 일구며 일해야 했던 이들에게 고단한 일상을 잊기 위한 엔터테인먼트였던 뉴스가 키드의 여정이 끝난 후에는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을 잃은 한 아이를 가족의 품 안에 되돌려주는 키드 대위와 조한나가 함께 하는 여정은 다른 한 편으로 키드 대위 자신이 다른 이들에게 읽어주었던 다양한 뉴스를 체감하고 그 의미를 깨닫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키드 대위가 과거 남부군과 시비가 붙어 총격전을 펼치는 장면은 남북전쟁 이 끝난 직후인 1860년대 후반 남부에서 실시된 북부의 군정기 혼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일부 지역의 경제권을 장악한 지주와 갈등을 빚는 대목도 흑인 노예제의 폐지로 인한 대규모 농장의 해체, 그로 인한 남부인들의 경제적 위기와 정치적 불만이 고조되던 시대상을 반영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는 자신에게는 생계를 위한 수단이었고, 그의 청중들에게는 오락거리이고 정보 전달에 불과했던 뉴스가 갖는 진짜 의미를 깨우쳐 나간다. 그는 남부 사람들에게 얼마 전까지 전쟁을 치렀던 북부의 탄광에서 사고를 당하고도 극적으로 살아남은 노동자의 이야기를 전달해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상황은 달라도 자신들처럼 힘겹게 살아가는 다른 이들에게 공감한다. 그들의 극적인 생환에 환호하고, 그들처럼 힘겨운 상황에서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힘과 희망을 얻는다. 한 청년은 자신을 억압하던 주인을 죽이고 새 출발 하기도 한다.
그 모습을 보면서 키드 대위도 전쟁 중에 접한 아내의 죽음을 비로소 직접 마주하고 삶의 새로운 의미를 찾는다. 그래서 그는 뉴스 낭독을 위해 여러 마을을 떠돌아다니며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한 도피 생활을 이어가는 대신, 본래 집으로 되돌아가 그 어느 때보다 당당하고 자신 있게 뉴스를 읽는다. 그렇게 그는 고단한 일상을 잊게 해 주던 뉴스가 그 이상의 것임을, 그보다 더 중요한 힘을 지닌 존재임을 깨닫는다.
이는 조한나가 있고 없음이 영화의 시작과 끝 장면의 또 다른, 그렇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인 이유다. 작중 조한나는 그 자체로 뉴스가 단순한 엔터테인먼트나 정보 전달의 역할을 넘어서 공감을 통해 진정으로 서로를 연결할 수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가 함축된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미국 서부로 이주한 독일인과 아메리카 원주민 사이 충돌로 인해 본래 부모님을 잃고 아메리카 원주민들 사이에서 자라난 조한나. 그녀는 미국 대륙횡단철도 공사 구역이 인디언 보호구역을 지나감에 따라 원주민들이 강제 이주당하거나 살육당하는 통에 양부모마저 잃고 키드 대위에 의해 백인 친척들에게 전해진다.
그런 그녀는 원주민 문화에 동화되었는데도 약간의 독일어를 기억하는 등 서로 다른 인종과 종족, 언어와 문화 사이에서 제각각의 이야기를 간직한다. 또한 그 이야기를 토대로 아무런 공통점이 없었던 키드 대위와 서로의 아픈 가정사를 공유하며, 과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그렇기에 조한나를 구한 이가 나름대로 언론인이라고 할 수 있는 키드 대위인 것, 그녀가 가장 먼저 배운 영어 단어가 '이야기 Story'인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아무리 철도가 생기고 도로가 새롭게 놓아지더라도 사람들을 연결하고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서로를 이해하도록 만든 것은 결국 세계 각지에서 한 데 모인 이야기인 뉴스라는 사실을 곱씹어 보면 더욱 그렇다.
결국 <뉴스 오브 더 월드>는 각자의 가족을 잃은 이들이 새 가족을 이루는 과정을 통해 뉴스가 단지 문자로 적힌 정보가 아니라 분명 생생히 살아 숨 쉬는 현실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고 이야기한다. 하루에도 수많은 뉴스들이 쏟아지고, 심지어 그 뉴스가 담고 있는 진실, 사실, 허구, 거짓의 구분도 쉽지 않은 현재의 휘발적 뉴스 소비 세태에서 자칫 잊히기 쉬운 의미를 재조명하는 것이다. 특히 이 영화가 미국에서 근대적 형태의 뉴스가 성립되어 가던 1870년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도 뿌리로 되돌아가 진정한 뉴스가 무엇인지 고찰하고 문제의 답을 내놓는 키드 대위의 여정에 무게감을 더한다.
다만 <뉴스 오브 더 월드>가 의도한 메시지나 감정선이 명확히 전해지지 않다 보니 기존과는 다른 폴 그린그래스의 새로운 시도는 다소 불친절하게 느껴질 여지가 있다. 영화는 인물들의 입을 빌려 구체적으로 무언가를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앞뒤 장면들의 연결점, 카메라의 움직임과 포커스를 통해 그림의 일부만 조금씩 보여주며 나머지는 관객의 상상과 이해에 맡긴다. 예를 들어 조한나가 문득 독일어로 말하자 키드 대위는 무언가 기억나는 것이 있냐고 묻지만, 이내 그녀는 입을 다문다. 이때 그녀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이유는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추측과 상상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이러한 불친절함은 폴 그린그래스 감독이 차분하고 잔잔한, 또 감성적인 드라마 장르를 많이 다루지 않았던 데서 기인한 한계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의 완성도가 완벽하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9.11 테러를 소재로 한 <플라이트 93>, 피의 일요일로 대변되는 아일랜드 독립 투쟁을 다룬 <블러디 선데이>, 노르웨이 연쇄 테러 사건을 영상화 한 <7월 22일>과 같은 전작들에서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사회를 바라보는 폴 그린그래스 특유의 날카로운 시선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점은 몇 가지 단점과 어색함에도 불구하고 <뉴스 오브 더 월드>의 매력을 부정하기 어렵게 만든다.
A(Acceptable, 무난함)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폴 그린그래스의 이름값을 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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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캡틴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 “무난한” 캡틴 아메리카를 위한 관객은 없다.
(IMDB, 발췌 편집)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후, 지속된 졸작들로 인해 바닥까지 내려간 마블. 엔드게임 이후 지금까지 개봉했던 주요 캐릭터의 영화와 시리즈를 돌아보자.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 <완다비전>, <팔콘과 윈터솔져>, <로키>, <블랙 위도우>, <샹치>, <이터널스>, <호크아이>,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 <미즈 마블>, <토르 러브 앤 썬더>, <쉬헐크>,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매니아>, <가오갤3>, <더 마블스까지> 총 17편이 개봉했다. 이 중에서 '스파이더맨'과 '가오갤'을 제외하면, 꼭 봐야할 좋은 작품이 없다. 이렇게 참담한 상황에서,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가 개봉했다. 이 작품이 엔드게임 이후의 세계관을 잘 이끌어나갈 진정한 첫 번째 영화가 될 수 있을지 하나씩 따져봤다.
예고편 대참사
(IMDB)
이번 영화를 기다리면서 어처구니없었던 부분은 다름 아닌 예고편이었다. 감칠맛을 살짝 돋우는 정도로 보여주는 게 예고편의 목적이지만, 영화 전부를 보여줬다고 해도 무방했다. 주인공이 쉽게 죽거나 다치지 않는 특성을 지닌 히어로 장르는 베일에 싸인 빌런으로 긴장감을 만들어 내야 한다. 하지만 레드 헐크를 공개해 버리면서 영화의 긴장감은 다 날아가 버렸다. 물론, 메인 빌런인 스턴스는 예고편에 많이 등장하지 않았지만, 캐릭터 자체에 큰 매력이 없었다. 이 부분은 밑에서 다루고자 한다.
이번 예고편에 대해 너무 가혹한 잣대를 들이밀고 있는 건 아닌지 비교해 보기 위해 어벤저스 : 인피니티 워 예고편을 다시 봤다. 인피니티 워를 몇 번이나 봤던 입장이지만, 타노스가 어떤 식으로 싸우는지 그리고 스토리가 어떻게 전개되는지 예상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고편 마저 명작이다.
이번 예고편을 보면서, 이번 영화마저 성적이 좋지 않으면 정말 큰일 난다는 마블의 불안감과 성급함이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주인공이 캡틴아메리카 아닌가. 엔드게임 이후 처음 개봉하는 캡틴 아메리카 영화이기에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하는 그들 입장에서 당연할 터다. 예고편으로 인해 긴장감은 제로 였지만, 캡틴 아메리카니까 뭔가 보여주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품고 극장에 갔다. 그런데 또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다.이런 빌런, 지긋지긋해.
예고편에 많이 등장한 레드 헐크는 메인 빌런이 아니다. 무려 2008년에 개봉했던 인크레더블 헐크에 등장한 스턴스가 메인 빌런이다. 17년 전 등장한 일회성에 가까운 빌런을 등장시킨 느낌이다. 등장시킬 빌런이 얼마나 없었길래 하는 궁금증이 생길 정도다. 스턴스는 히어로 영화에 나오는 대표적인 빌런 중 하나인 매드 사이언티스트라고 보면 된다. 이 캐릭터를 이해하기 위해 굳이 예전 영화를 찾아볼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한다. 실험을 하다가 일이 틀어져서 세상에 앙심을 품은 빌런 정도로 이해해도 문제없다. 빌런이 지루한건 오랜만이다.
(IMDB)
게다가, 극중 스턴스의 실제 모양새를 보면 메인 빌런이 이렇게 허약해 보일 수도 있나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가녀린 모습에 빌런이 안쓰럽게 보일 지경이다. 메드 사이언티스트 답게 두뇌 싸움은 잘하느냐? 꼭 그렇지도 않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 등장했던 헬무트 제모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여러모로 폼이 떨어진다. 빌런이긴 한데, 빌런의 역할을 제대로는 한 건지 의문이 생기는 사이드와인더. 그의 등장도 아쉽다. 캡틴 아메리카가 운전 중인 차량을 폭파하고, 그와 단독 액션 장면이 있을 정도로 비중 있는 캐릭터처럼 그려졌다.
윈터 솔저가 닉 퓨리를 급습하는 장면이 떠오르기도 했다. 스턴스보다 묵직한 느낌의 빌런처럼 보였지만, 영화가 끝나는 무렵까지 사이드와인더의 쓸모는 무엇이었는지 답을 내리기 어려웠다. 예전 캡틴 아메리카 영화에 등장했던 레드 스컬이나 헬무트 제모를 생각하면 이번 빌런들은 총체적 난국에 가까웠다. 마블 원작에 따른 빌런의 등장 순서가 이렇게 정해져 있다면 어쩔수 없다. 하지만, 레드 헐크의 마무리와 무전기나 들고 다니는 빌런의 모양새를 보면 이건 좀 아니지 않나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아, 생각해도 이건 너무 아니다.
캡틴 아메리카는 무난해선 안 된다.
(IMDB)주인공 캡틴 아메리카는 어땠나?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쁘지 않지만 그렇게 좋지도 않고 아직 어색하다. 캡틴 아메리카 보다는 강화된 팔콘이라는 느낌이 더 강하다. 여기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팔콘의 첫 등장은 스티브 로저스의 조력자였다. 여러 영화에서 전투에 참여했지만, 팔콘 개인의 서사를 쌓을 시간적 여유가 충분하지 않았다. 팔콘의 서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부분이 어벤저스: 엔드게임에서 스티브 로저스로부터 방패를 받는 순간 아닌가. 이후에야 팔콘 중심의 서사가 펼쳐지는 팔콘 윈터 솔져 6부작 시리즈가 나왔었다.
하지만, 팔콘 개인의 서사를 차곡차곡 쌓는 데 집중하지 않았다. 썬더볼츠 개봉을 위해 새로운 캐릭터를 선보이는 데 신경을 분산했기 때문이다. 팔콘의 서사가 쌓이기보다는 마블의 세계관만 넓어졌다. 물론, 팔콘이 캡틴 아메리카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고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고민은 스티브 로저스가 시빌 워에서 보여줬던 신념에 비교하면 소박하다. 이제야 팔콘의 첫 번째 개인 영화가 나왔는데, 아직도 “내가 캡틴 아메리카 맡기에 적임자 일까?”, “내가 혈청을 맞았더라면?” 같은 고민을 하고 있으니까. 솔직히 좀 짜치더라.
(IMDB, 반가웠고.)
이런 모습을 자기들도 알고 있는 건지, 팔콘의 캡틴 아메리카로의 성장을 위한 조언자 역할로 버키를 잠깐 등장시키기까지 했다.(오랜만에 봐서 반갑긴 하더라.) 이런 모든 과정을 거친 후, 뜬금없는 입담으로 레드 헐크를 잠재우는 캡틴 아메리카의 모습을 보여주며 마무리했다. 참 뜬금없었다. 레드 헐크와의 대치 과정에서 새로운 액션과 기술을 선보였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팔콘이 캡틴 아메리카로서의 정체성 고민을 이번 편에서 끝내던가, 아니면 스스로 해답을 찾는 과정이 제대로 그려졌어야 했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 어설프게 빌런을 처리하고, 고민 살짝 하다가 브레이브 뉴 월드가 끝났다.
팔콘이 캡틴 아메리카로서 보여준 힘과 기술은 어땠는가? 전보다 확실히 발전한 느낌이다. 방패를 사용하며 전투하는 어떤 장면에서는 스티브 로저스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이 부분은 칭찬할 만하다. 레드윙도 전편에 비하면 발전된 느낌이다. 하지만 이런 모습을 짜치게 만드는 요소가 또 있었다. 바로 CG다. 역대 캡틴 아메리카 영화 중에서 가장 CG 퀄리티가 떨어졌다. 과장 더하자면, 마블 영화 중에서도 CG 기준으로 보면 중하위권이라 해도 무리가 아니다.
특히, 항공 전투 장면은 탑건: 매버릭보다 못했다. 이번 편에서는 팔콘을 이을 호아킨이라는 인물도 등장한다. 스티브 로저스의 조력자로 등장했던 샘처럼, 그 역시 같은 포지션의 인물로 등장한다. 그런데, 그는 항공 전투에 한 번 참여해 부상을 당했다는 이유만으로 팔콘을 계승할 것처럼 그려진다. 팔콘이 수년간 함께하며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를 받아 계승한 과정과 비교하면, 초고속 승진한 느낌이다.
수습 가능할까?
종합해보면, 빌런을 빌런답게 그려내는 데 실패했다. 캡틴 아메리카는 여전히 애매하다. 아군으로 등장해 팔콘의 위치를 계승받는 호아킨의 등장도 양산형 느낌을 지울수 없다. 팔콘이 캡틴 아메리카로 진급하니까, 빈 자리를 채우는 느낌이다. 팔콘은 수년간 어벤저스의 조력자로 등장하며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를 받아 그를 계승했다. 초고속 승진이라는 말이 적합하다. 또한, 페이즈 1에서는 쿠키 영상도 아주 잘 활용했다. 쿠키 영상을 다음 편에 대한 짧은 예고편 느낌으로 사용하며 관객들에게 다음 편에 대한 감칠맛을 줬다. 다음 편에 대한 수많은 추측을 만들어내며 수많은 팬들이 생기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번 영화에서의 쿠키 영상은 엔드게임 이후에 나온 영화들의 쿠키 영상들에 비해 영양가 없었다. 더욱이, 이제는 그만 했으면 하는 소재를 또 등장시켰다. 바로, 멀티버스다. 다른 세계에서 적들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페이즈 1에서 최종 빌런 타노스를 향하는 빌드업에 비하면 너무나 뜬구름 잡는 이야기다. 다음 편에 대한 감칠맛은커녕 또티버스라는 짜증만 만들어낸다. 생각하면 할수록 앞으로의 영화들에 대한 빌드업을 하고 있는 걸까 라는 생각만 든다. 이쯤 되면, 엔드게임에서 모든 이야기를 끝냈어야 하는 건 아니었을까. 과연, 수습이 가능할까.
(IMDB)
*이 와중에 등장한 리브 타일러는 왜 반지의 제왕에서 봤던 모습이랑 다르지 않은지 신기할 뿐이다.
*미국의 인도 태평양 전략이라는 현실 국제 외교 포인트를 차용한 건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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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1주 최신개봉영화
2022년 3월 1주 개봉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The Batman , 2022
수학에서 발견하는 인생이야기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신분을 감추고 고등학교 경비원으로 일하는 탈북한 천재 수학자가
수학을 포기한 학생을 만나며 벌어지는 감동 드라마 입니다.
‘수알못’ 관객들도 영화가 주는 감동과 재미를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일상 곳곳의 수학을 친숙하게 표현해냈으며,
경제부 기자 출신 각본가부터 물리학 교수까지 전문가들이 총출동해 완성도를 높였다고 합니다.
또한 대한민국 대표 배우 최민식이 3년 만에 스크린으로 돌아와 기대를 더 하고 있습니다.
250 대 1 경쟁률 뚫고 발탁된 김동휘와 독보적 스크린 장악력 선보인 박병은과
박해준, 빛나는 신예 조윤서까지 환상적인 배우들의 신선한 케미스트리도 빠질수 없는 관점포인트 입니다.
인생에 대한 따뜻한 위로와 수학의 즐거움을 전하는 특별한 이야기
첫번째 추천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입니다.
예고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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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배트맨 The Batman , 2022
새로운 배트맨의 탄생
영화 '더 배트맨'은 2년간 고담시의 어둠 속에서 범법자들을 응징해 온 배트맨이자
고담 최고 부를 가지고 있는 브루스 웨인의 이야기를 그립니다.
알프 DC 확장 유니버스와는 연결되지 않는 독자적인 스토리로 다시 탄생을 합니다.
이번에 나오는 새 배트맨 영화는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청춘스타에서 연기파 배우로 거듭난 로버트 패틴슨이 배트맨을 맡고,
'혹성탈출' 리부트 시리즈를 연출하며 능력을 인정받은 맷 리브스 감독이 연출했다는 점에서
전 세계 관객의 기대를 받고 있습니다.
1980~1990년대 배우 마이클 키턴, 2000년대 크리스천 베일,
2010년대 벤 애플렉에 이어 로버트 패틴슨이 배트맨의 주인공이 된거죠
더 강력하고 무자비한 배트맨으로 새롭게 돌아온
두번째 추천영화 "더 배트맨" 입니다.
예고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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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라이트 Blacklight , 2020
액션장인 리암 니슨의 신작
영화 "블랙 라이트"는 언더커버 요원들을 관리하는 FBI 비공식 스페셜 요원 트래비스가 조직의 추악하고 충격적인 비밀을 폭로하는 끝장 액션 영화입니다.
"블랙 라이트"는 ‘타임 투게더’, ‘어니스트 씨프’ 등의 작품을 연출한 마크 윌리엄스 감독의 신작입니다.
액션 히어로로 회춘한 리암 니슨이 ‘어니스트 씨프’에 이어 마크 윌리엄스 감독과 연이어 호흡을 맞추게 됐죠.
역시나 액션장인 답게 이번 영화에서도 맨몸 액션과 쉴 틈 없는 총격전은 물론,
도로 위 거침없는 추격전까지 다양하고 강도 높은 액션이 러닝 타임 내내 펼쳐질 예정입니다.
'분노의 질주: 홉스&쇼'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등의 베테랑 제작진과 힘을 합쳐
카체이싱부터 맨몸 액션까지 다양한 액션 연기를 보여주는 영화
세번째 추천영화 "블랙 라이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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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의 세계 Sophie′s world , 2021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 & 제47회 서울독립영화제 공식 초청작
신예 이제한 감독의 첫 장편영화
영화 "소피의 세계"는 일상처럼 여행을 보낸 ‘소피’, 여행처럼 일상을 보낸 ‘수영’과 ‘종구’, 2년 전 그들이 함께한 나흘의 기록을 담은 작품입니다.
이 영화는 여행자 ‘소피’의 블로그를 우연히 발견한 호스트 ‘수영’이 2년 전의 기록과 기억을 되돌아보는 과정을 그리는데요.
서로 다른 자리에서 과거를 바라보며 기록과 기억이 뒤엉키고 풀어지는 스토리 입니다.
"소피의 세계"는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 제47회 서울독립영화제에 공식 초청돼,
섬세한 연출력과 따뜻한 정서로 주목받은 영화입니다.
지나간 과거의 기억들을 다시 바라봤을 때 발견되는 작지만 소중한 감정들을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영화
네번째 추천영화 "소피의 세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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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 레이더스 Night Raiders , 2021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 & 제47회 서울독립영화제 공식 초청작
신예 이제한 감독의 첫 장편영화
전쟁으로 도시가 모두 폐허가 된 2043년,
국가는 얼마 남지 않은 어린이와 청소년을 공적인 자산 취급하며 애국을 세뇌시키는 군대식 공공학교 ‘아카데미’로 차출해가고,
인간병기로 만들어 다시는 부모와 만날 수 없게 하죠
숲에 은신하며 딸 ‘와시즈’를 지키던 엄마 ‘니스카’는 덫에 걸려 다리를 크게 다친 딸에게 약 하나 제대로 구해줄 수 없게 되자
온전한 치료를 받게 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아이의 존재를 외부에 알리고 이별을 택합니다
전쟁 이후, 개인이 낳은 아이를 국가가 독점적으로 관리한다는 전쟁 이후의 독특한 설정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스릴러
"나이트 레이더스" 제71회 베를린국제영화제 , 제46회 토론토국제영화제 공식 초청과
2022 캐나다 스크린 어워즈 11개 부문 노미네이트 대기록을 달성 했습니다.
전 세계가 주목하는 뜨거운 화제작!
다섯번째 추천영화 "나이트 레이더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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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기살인 리뷰 -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다룬 용기에 박수를 (약스포, 결말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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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었죠,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거”
봄이 되면 나타났다 여름이 되면 사라지는 죽음의 병.
공기를 타고 대한민국에 죽음을 몰고 온 살인무기의 실체를 밝히기 위한 그들의 사투.
증발된 범인, 피해자는 증발되지 않았다!
영화라는 매개의 특성상 결국 극적인 연출과 전개를 끝끝내 놓지 못해
개인적으로 느껴지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영화를 리뷰하는 사람으로서
특히 작고 사회적인 내용을 담은 작품들에 조금더 마음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으로서
[공기살인]같은 작품들의 개봉을 응원하고, 또 미디어의 선한 영향력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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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엑소시스트 : 더 바티칸> 메인 예고편
충격 실화 퇴마 파일! 어둠 속 숨겨진 바티칸의 비밀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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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을 꾸는 현재를 놓지 않겠다는 과거와 마주하는 순간
쉽게 쓰이지 않은 글, 쉽게 만들어지지 않은 영화는 흥행하지 못하면 좋은 영화가 아닌 걸까. 좋아하는 마음에서 시작한 일이 어려움으로 다가와 내려놓게 되는 현실을 마주한다. 깨진 문 사이의 바람처럼, 끝끝내 틀린 맞춤법과 같은 딜레마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진 지완. 그는 어느 날, 아르바이트 삼아 두 번째 여성 영화감독인 홍은원 감독의 작품 <여판사>의 음향 복원하는 일을 하게 된다. 중간중간 사라진 필름, 들리지 않는 소리, 바래진 장면으로 가득한 영화 속에서 흔적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홍은원 감독의 마지막 행적을 따라가는 길목마다 그 영화와 관련된 사람들을 만나며 어떤 여성의 그림자를 만난다. 어떤 장소에 빛만 바래진 채, 사라지지 않는 마음이 각자 다르지만 비슷한 형태로 펼쳐지고 있는 영화인들을 발견하며 들게 만든 소중한 작품들이 빛을 받지 못했던 과거의 순간과 현재의 순간이 겹치며 어둠이 그림자를 흡수하듯 앞으로 나아가는 지완의 발걸음이 조금씩 가벼워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자넨 끝까지 살아남아”
하나, 둘씩 떠나가는 주변과 영화 그만하라는 말 가운데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에 이런 말을 듣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변화를 겪어야만 벌어지는 상황을 어떻게 이겨나가냐에 따라 달라지는 수많은 상황 속에 놓였다. 한때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하지 못했고 또 검열되었던 수많은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하면서 불협화음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힘들게 필름을 복원하듯 먼지를 털어낸 자신의 꿈을 다시 바라보는 순간을 맞이 한다.
포기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오랫동안 그 꿈을 포기하지 않았는데,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놓아주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어도 포기는 쉽지 않은 법이다. 좋아하는 것을 평생 할 수 없었지만, 그때의 순간들을 찍어둔 앨범, 커피에 달걀을 넣어 마시던 다방, 고이 넣어둔 영사기처럼 영화에 대한 마음을 놓지 않았던 마음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끝끝내 자리를 지켜 소중한 영화들을 펼쳐낸 누군가의 작품이 그림자처럼 흔적을 남기고 커피에 달걀을 넣어 먹던 그때의 다방이 빛바래지지 않은 채,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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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과 이야기의 공명, 이야기로 묻고 삶으로 답하다
소통의 부재는 영혼의 부재
우리 집에는 네 명의 인간과 두 마리의 개가 함께 살고 있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같은 종의 동물이라도 각각 전혀 다른 소통방식을 구사한다. 이를테면, ‘네가 먹고 있는 것을 줘.’라고 표현하고 싶을 때도 “달라”라고 부탁하는 인간이 있고, 손으로 뺏어 먹는 인간이 있다. 개는 엎드려서 침을 흘리거나 양손(앞발)을 사람에게 올리기도 한다. 각각의 종은 서로 같은 언어 체계를 공유하지만, 같은 소통방식을 구사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손이 먼저 나가는 인간은 앞발을 올리는 개와 가까운 소통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개도 인간도 종과 언어를 막론하고 저마다 소통하는 방식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의 진정한 언어는 침묵일 수도 있고, 육체적 관계일 수도 있고, 운전 방식일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한국어와 같은 언어 체계는 진정한 소통방식을 번역한 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언어를 뛰어넘어 소통하기 위해서 우리는 각자의 진정한 소통방식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히로시마 연극제의 상주 예술가에게 배정되는 운전사 와타리 미사키(미우라 토코)는 말수가 적지만 차와 상대를 세심하게 배려한다. 그가 밟는 액셀과 브레이크 역시 하나의 소통 수단이다. 미사키는 이를 통해 차 안의 공기와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미사키의 운전은 중력도, 운전하는 사람도 잊게 할 정도로 부드럽다. 이 무저항의 운전은 미사키의 고향 가미주니타키무라에 내리는 눈송이처럼 고요하다. 자신의 존재를 지우며 상대를 편안하게 해 준다. 미사키가 배워야만 했던 소통방식은 그런 것이었다.
배우이자 연극 연출가인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는 자신의 진짜 마음을 숨기는 방식으로 소통한다. 그의 언어는 침묵 또는 회피라고 할 수 있다. 가후쿠와 드라마 각본가 오토(키리시마 레이카)는 이상적인 부부처럼 보인다. 블라디보스톡 연극제의 항공권 예약이 미뤄져 집으로 돌아간 가후쿠는 아내 오토의 외도를 목격하고 아무 말도 없이 뒤돌아 나간다. 가후쿠가 외면한 진실은 아내의 외도만이 아니다. 그들의 결혼 관계는 사실상 끝났고, 두 사람은 함께할 수 없다는 진실을 그는 끝끝내 마주하지 않는다. 그리고 오토의 죽음으로 가후쿠는 자신의 마음과 진실이 마주할 기회를 영영 잃어버렸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에는 단 한 번의 식사 장면이 등장한다. 히로시마 연극제 담당자 윤수(진대연)가 마련한 저녁 식사 자리에는 유나(박유림), 가후쿠, 미사키 그리고 래브라도 리트리버 한 마리가 함께한다. 이 식사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는 대부분 번역된 말이다. 전혀 다른 언어들이 오가고 누군가의 입을 빌려 다시 변환되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지만, 영화의 어떤 장면보다도 따뜻하고, 안정적이며 소통과 공감이 느껴진다. 이 장면은 언어를 뛰어넘는 따뜻한 소통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우리가 소통의 부재를 겪는 것은 언어가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영혼이라 부르는 그것이 언어 안에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언어와 텍스트의 관계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언어와 텍스트는 닭과 달걀 같은 관계를 맺고 있다. 가후쿠 부부는 4살 딸을 폐렴으로 잃은 후로 관계를 통해 이야기를 잉태하기 시작한다. 오토의 음성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가후쿠의 번역을 거쳐 오토에게 전해진다. 다시 오토에게 돌아온 이야기의 잔상들은 각본, 즉 텍스트로 태어날 준비를 하게 된다. 이렇게 탄생한 이야기는 단순히 캐릭터와 플롯이 아니라 무의식과 욕망의 집합체와 같다. 오토의 음성과 그것을 양분 삼아 만들어진 이야기는 오토의 창조물이지만, 독립된 생명체처럼 타인에게 다른 모습으로 뿌리내리게 된다. 가후쿠에게 오토의 이야기는 진실이 드러나기 직전의 두려움과 불안의 기척을 품은 채 마무리되었지만, 다카츠키(오카다 마사키)에게 그 이야기는 불길한 고요함으로 가득 찬 세상의 모습이다.
각본으로 만들어진 텍스트는 결국 발화함으로써 완성된다. 그렇기에 오토는 자신의 이야기와 무의식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완성해줄 누군가를 찾았고, 그가 바로 다카츠키였다. 가후쿠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며 감동하고, 오토의 열렬한 팬인 다카츠키는 ‘바냐’라는 인물에는 쉽게 이입하지 못한다. 다카츠키는 체호프의 ‘바냐’보다 오토의 이야기 속 칠성장어의 전생을 가진 소녀를 닮은 인물이다. 그는 체호프의 성실하며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세계보다 무의미한 기다림과 충동과 욕망의 세계에 끌린다. 불가해하고 불길한 무언가로 가득한 오토의 텍스트야말로 다카츠키의 삶을 담을 텍스트다. 그는 오토와 같은 언어, 즉 같은 소통 방식을 공유하고 있는 인물이다. 다카츠키는 오토의 텍스트를 완성했으나 바냐가 되어 체호프의 텍스트를 완성하는 데에는 실패한다.
이와 반대로 이성적이며 통제적인 가후쿠는 오토의 텍스트를 똑바로 마주할 수 없다. 가후쿠가 오토에게서 듣는 것은 오직 이야기뿐이다. 자기 안의 진실을 마주하지 못한 가후쿠는 이야기 안의 오토를 외면한다. 가후쿠가 오토의 목소리로 듣는 또 하나의 이야기는 녹음된 ‘바냐 아저씨’의 대본이다. “대사를 입에 올리면 나 자신이 끌려 나와” 오토의 음성으로 울리는 체호프의 텍스트는 가후쿠에게 계속해서 진실보다 깊은 것을 묻는다. 가후쿠는 체호프와 오토가 자신에게 걸어오는 말을 애써 피하고 있다.
오토의 죽음으로부터 2년이 지난 후 히로시마 연극제에 초대된 가후쿠는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의 연출을 맡는다. 가후쿠의 연극은 일본어, 중국어, 한국어 그리고 한국 수어까지 서로 다른 언어가 한데 어우러진다. 이 특별한 공연을 준비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대본 리딩이다. 어떤 감정도 없이 아주 천천히 대본을 읽는 것이다. 배우들은 불완전한 언어를 뛰어넘어 소통하는 동시에 온몸으로 체호프의 텍스트를 체득해야 한다. 언뜻 이해하기 어렵고 지루한 이 과정을 가장 먼저 이해한 것은 수어를 사용하는 유나다. 자신의 언어가 타인에게 닿지 않는 것이 평범한 일인 그에게 보고 느끼며 공감함으로써 기능하는 연기는 몸에 잘 맞는 옷과 같다. “체호프의 글이 내 안에 들어와 움직이지 않던 몸을 움직이게 해 줘요” 체호프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유나와 소통하고 있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하루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졌지만, 영화의 영혼은 체호프의 텍스트에 담겨있는 것처럼 보인다.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는 ‘바냐’가 한때 누이동생의 남편이자 존경하는 학자였던 교수 세레브랴코프를 원망하고, 교수의 두 번째 부인 옐레나를 사모하게 되며 겪는 갈등을 다룬다. 체호프는 우리가 갈등과 절망, 적의와 증오를 넘어서 계속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현재의 고난과 슬픔보다 미래의 희망과 기쁨을 꿈꾼다. 체호프의 텍스트는 하마구치 류스케가 선택한 많은 인생을 담을 수 있는 넓은 그릇과 같다.
대본 리딩이 주를 이루는 연극 연습과 오토의 목소리로 녹음된 ‘바냐 아저씨’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붉은색 사브 900을 오가며 영화는 체호프의 텍스트를 반복한다. 체호프의 텍스트는 대사뿐만 아니라 이야기로도 반복된다. 누이동생을 잃고, 존경하던 교수에게 실망을 거듭하며 바냐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인다. 바냐가 교수를 위해 바쳤던 청춘은 이미 흘러갔고 옐레나에 대한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며 소냐의 사랑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모든 것은 여전히 엉망이지만 바냐와 소냐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일을 계속한다. 딸과 아내를 잃은 상처를 마주하게 되는 가후쿠 뿐만 아니라 아이를 잃은 상실을 견뎌내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게 된 유나와 애정과 증오의 대상이었던 엄마를 잃은 미사키의 삶 역시 체호프 텍스트의 또 다른 변주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언어의 불완전함을 뛰어넘어 공명을 시도하는 이야기의 작동방식을 보여주는 영화다. 이는 일견 언어의 무용함을 말하는 듯 하나 각자의 언어와 이로 만들어진 텍스트는 호응하는 삶과 사람이 있다는 것에 가깝다. 감독은 언어의 가면을 쓴 이야기를 단지 텍스트가 아닌 독립된 생명체처럼 마주 보게 한다. 그렇게 언어와 텍스트는 계속해서 삶과 사람에게 호응을 시도하고 영화는 그 순간을 담아낸다.
삶과 사람을 담는 그릇
가후쿠와 미사키가 지나온 터널처럼 우리가 지나온 궤적을 이해하기 위한 이야기가 모두에게 필요하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이처럼 불완전한 언어와 불가해한 텍스트에 사람과 삶을 담음으로써 이야기에 힘을 불어넣는다. 언어와 텍스트가 사람과 삶을 만나는 순간 발생하는 에너지는 영화 안팎으로 퍼져나가 관객의 삶에도 영향을 미친다.
다카츠키와 가후쿠가 차의 뒷좌석에서 대화를 나누고 헤어진 후 가후쿠는 처음으로 미사키의 옆에 앉는다. 차 안에서 흡연을 피하던 가후쿠는 미사키에게도 담배를 권한다. 차 위를 향해 뻗은 두 사람의 손에서 담배 연기는 망자를 위한 향처럼 피어오른다. “넌 엄마를 죽였고, 난 아내를 죽였어” 오래된 죽음을 놓지 못하고 있던 두 사람은 도망치고 미뤄왔던 애도를 시작한다. 카메라는 나란히 피어오르는 연기에서 멀어져 익스트림 롱숏으로 이리저리 얽혀 있는 도로와 어찌 됐든 앞으로 나아가는 차들을 바라본다. 그 속에서 점처럼 작아진 사브 900도 앞으로 나아갈 거라고 믿으면서.
“바냐 아저씨, 우리 살아가도록 해요.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는 거예요. 운명이 가져다주는 시련을 참고 견디며 마음의 평화가 없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이 든 후에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리고 언젠가 마지막이 오면 얌전히 죽는 거예요. 그리고 저세상에 가서 이야기해요. 우린 고통받았다고, 울었다고, 괴로웠다고요. 그러면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어여삐 여기시겠지요. 그러면 우린 기쁨에 넘쳐서 미소를 지으며, 지금 우리의 불행을 돌아볼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우린 평온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소냐 역의 유나가 바냐 역의 가후쿠를 감싸 안고 수어로 전하는 연극의 마지막 장면은 연극을 보는 듯한 롱숏으로 길게 이어진다. 그리고 이를 응시하는 미사키의 곧은 정면 얼굴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체호프의 텍스트에 대답한다. 체호프의 텍스트와 유나의 언어 그리고 미사키의 삶이 만난 이 장면 하나로 <드라이브 마이 카>는 그 역할을 다한 것이다. 감독이 전작 <해피 아워>(2015)에서 사람들이 서로에게 무게를 기대며 중심을 맞추는 소통에 집중했다면,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는 사람과 텍스트가, 이야기와 이야기가 마주하는 소통에 집중한다.
가후쿠가 히로시마로 향하는 도로 위에서 시작했던 영화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는 미사키의 뒷모습을 보며 끝난다. 도망치듯 떠나왔던 가미주니타키무라를 뒤로 하고, 멈춰 설 수밖에 없었던 히로시마를 벗어나 새로운 땅에서 미사키는 앞으로 향한다. 사브 900을 타고 한국 부산의 도로를 달리는 미사키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며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드라이브를 즐긴다. 끝없이 이어진 도로처럼 삶은 계속 이어지고, 언제나 또 다른 슬픔이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멈추지 않는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마침내 텍스트와 언어에 담긴 사람과 삶은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음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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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WIFF 데일리] 깨어있든지, 다음이 되든지
데카메론(Decameron, 2021)
감독 : 쉬야수
상영시간 : 108분
시놉시스 : "역사는 단지 날짜의 문제가 아니다." 1997년 영국이 홍콩 행정부를 중국에 반환하기 직전, 크리스 패튼은 홍콩의 영국 총독으로서 마지막 연설에서 이와 같이 말했다. 이 영화는 크리스 패튼의 연설을 포함한 역사적 자료들을 픽션과 결합한다.(출처: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나는 한 번도 홍콩에 가본 적 없지만 홍콩을 좋아한다. 홍콩을 좋아한다고 말하지만 나는 제니쿠키와 몇 편의 홍콩영화만을 좋아할 뿐이다. 어릴 때 엄마가 '별들이 소곤대는 홍콩의 밤거리'로 시작되는 <홍콩 아가씨>라는 노래를 자주 불렀다. 내가 좋아했던 홍콩은 예술가들에 의해 잘 만져진 홍콩이고, 나는 홍콩을 모른다.
홍콩은 1841년 아편전쟁을 겪고, 1842년 난징조약으로 영국의 식민지가 된다. 근현대사에서 뭔가 구린내가 난다 싶으면 영국이 끼어 있다. 아무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도 영국은 홍콩을 계속 식민지로 둔다. 중국 본토에는 사회주의 체제인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졌지만 홍콩만큼은 세계사의 흐름대로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를 취한다. 그리고 중국의 부호들과 돈 좀 벌어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홍콩으로 몰려들기 시작한다. <첨밀밀>의 이요와 소군처럼.
왕가위 감독은 홍콩 반환을 앞두고 그가 사랑하는 홍콩의 모습을 필름에 담았다. 1997년,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에서 중국의 특별행정구로 편입되었다. 덩샤오핑은 일국양제로 홍콩의 민주자본주의를 50년간 유지하기로 했으나, 우리가 중국에 대하여 보고 들은 바와 같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민들은 우산을 들고 최루탄에 맞섰다. '우산혁명'이라 불리는 2014년 홍콩 민주화운동이다. 5년 뒤인 2019년에는 '범죄인 인도 법안'에 맞서 시민들이 다시 거리에 나섰다. 우산혁명 당시에는 평화적 시위를 이어나갔지만, 우리 모두 알다시피 평화시위는 힘이 없었다. 1996년생인 조슈아 웡은 대한민국에도 홍콩과 뜻을 같이할 것을 호소했다.
영화는 영국령 홍콩의 마지막 총리 크리스 패튼이 연설하는 장면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를 교차편집하여 보여준다. 총리는 말한다. "역사는 단지 날짜의 문제가 아니"라고. 대학교 졸업 이후 처음으로 역사의 보편성과 특수성에 관하여 생각해보게 된다.
<데카메론>은 이탈리아 작가 조반니 보카치오가 쓴 소설의 제목이다. 흑사병이 돌고있는 도시를 떠나 교외의 별장에 머무는 귀족들이 떠드는 이야기. 홍콩의 민주화운동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보여주는 이 영화는 굳이 '데카메론'이라는 제목을 차용했다. 21세기의 흑사병 같은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이겠다.
영화에는 홍콩 역사의 이모저모가 담겨있다. 100년 전인 1922년 홍콩 선원 파업 사건과 코로나 이후 홍콩 예술인들의 노조 설립을 병치하고, 1966년 홍콩섬과 구룡반도를 잇는 유일한 운송수단이었던 스타페리호의 가격인상이 도화선이 되어 발생했던 1967년 폭동과 2019년 혁명, 아직까지도 이어지는 '광복홍콩 시대혁명'까지 영화는 홍콩의 큼직큼직한 역사적 사건들을 훑어간다.
그 가운데, 코로나로 봉쇄된 도시에서 주부들이 화상회의로 만난다. 주부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서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겠지만, 코로나로 아이들이 유치원과 학교에 가지 못하게 되자 엄마들이 난감해졌다. 거시적으로도 난리가 났지만 미시적으로도 케파가 딸리는 상황에서, 언제까지 생활을 이어갈 수 있을지도 의문스럽다. 밖에서는 검은 옷만 입어도 전경에게 취조를 받아야 하고, 안에서는 밖에 나가지 못하는 가족을 돌보거나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경찰들 때문에 조마조마해야 하는 삶.
아무튼 <데카메론>은 홍콩의 과거와 현재다. 홍콩영화 특유의 찬란한 네온사인도, 화려한 액션도 없는, 홍콩 그 자체다.
'홍콩을 정말 사랑하는 예술가들'이 제작했다는 엔딩 크레딧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이 작품은 공권력에 의해 살해되거나 실종된 수많은 홍콩사람들을 기억하는 일, 억울한 죽음에 마스킹테이프를 붙이는 일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마음 그 자체다. 정말 사랑하기 때문에 기록해야만 하는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영화에서 교차편집하여 보여주었듯이, 역사는 반복될 것이다.
홍콩 시위대가 남긴 "깨어있든지, 다음이 되든지(Be aware, or Be next)"라는 문구를 목격한 우리는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우리나라에도 민주화운동이 있었고, 기록하는 사람들과 왜곡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곧 행안부 소속 경찰국이 신설될 예정이다. 어쩌면 다음은 우리일지도 모르겠다.
제24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상영 스케줄
2022년 8월 27일 17:30~19:18 /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9관
2022년 8월 31일 16:00~17:48 /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8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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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 오브 더 월드> 뉴스의 의미를 찾기 위한 여정
남북전쟁 종전 5년 후, 참전용사인 '제퍼슨 카일 키드(톰 행크스)' 대위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세계 각지에서 전해지는 뉴스들을 사람들에게 읽어주며 여러 마을을 돌아다닌다. 어느 날, 키드 대위는 키오와 부족 사람들에게 납치되어 그들의 일원으로 자라난 10살 소녀 '조한나(헬레나 젱겔)'를 발견한다. 법에 따라 그녀를 친척들에게 데려다 주기로 결정한 그. 그는 그녀와 함께 뉴스에 등장한 다양한 사건들과 험난한 자연환경을 뚫고 텍사스의 넓은 평원을 가로지르기 시작한다.
폴 그린그래스 감독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뉴스 오브 더 월드>는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상당히 이질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폴 그린그래스 감독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은 무엇보다도 현장의 긴장감과 생동감을 날 것 그대로 스크린에 투영시킬 줄 아는 핸드헬드 연출과 빠른 리듬감의 편집이다. 이는 그에게 <블러디 선데이>부터 '제이슨 본' 시리즈, <캡틴 필립스>나 <7월 22일>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유지되어 왔다. 하지만 <뉴스 오브 더 월드>에서는 일부 추격전과 총격전 외에 그의 그림자가 느껴지는 장면은 많지 않다. 대신 그 자리는 각자의 이야기를 품에 안은 채 서부를 가로지르는 주인공들을 향한 차분한 시선이 대신한다.
그 시선의 중심에는 제목대로 뉴스가 있다. 실제로 영화는 키드 대위가 사람들에게 뉴스를 읽어주는 장면으로 시작하고 끝나는 수미상관의 구조를 보여준다. 흥미로운 것은 키드 대위의 여정이 시작되는 첫 장면과 여정이 끝나는 마지막 장면이 큰 대비를 이룬다는 점이다. 우선 뉴스를 읽는 장면의 조명이 다르다. 비가 쏟아지는 어두운 날에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서 읽어 내려가는 데 비해 끝에서 키드 대위는 밝은 대낮에 글을 읽어나간다. 또한 그가 뉴스를 전달하는 태도도 판이하게 다르다. 허리를 숙인 채 신문 만을 바라보며 건조하게 뉴스를 읽고 전달던 그는 마지막 장면에서 허리를 곧게 펴고 청중들과 소통하며 당당하게 뉴스를 읽어나간다.
심지어 뉴스의 내용도 다르다. 주로 전염병 발병과 같은 객관적인 사실들과 정보들을 전달하는 데 그쳤던 첫 번째 뉴스와 달리 마지막에 낭독하는 뉴스들은 사람들이 공감을 사기 쉬운 해프닝이다. 키드 대위의 뉴스 낭독이라는 동일한 상황을 묘사한 오프닝과 마무리는 그 안의 모든 내용이 다른 것이다. 이는 키드의 대사로부터 알 수 있는 뉴스의 의미, 곧 아침부터 저녁까지 땅을 일구며 일해야 했던 이들에게 고단한 일상을 잊기 위한 엔터테인먼트였던 뉴스가 키드의 여정이 끝난 후에는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을 잃은 한 아이를 가족의 품 안에 되돌려주는 키드 대위와 조한나가 함께 하는 여정은 다른 한 편으로 키드 대위 자신이 다른 이들에게 읽어주었던 다양한 뉴스를 체감하고 그 의미를 깨닫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키드 대위가 과거 남부군과 시비가 붙어 총격전을 펼치는 장면은 남북전쟁 이 끝난 직후인 1860년대 후반 남부에서 실시된 북부의 군정기 혼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일부 지역의 경제권을 장악한 지주와 갈등을 빚는 대목도 흑인 노예제의 폐지로 인한 대규모 농장의 해체, 그로 인한 남부인들의 경제적 위기와 정치적 불만이 고조되던 시대상을 반영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는 자신에게는 생계를 위한 수단이었고, 그의 청중들에게는 오락거리이고 정보 전달에 불과했던 뉴스가 갖는 진짜 의미를 깨우쳐 나간다. 그는 남부 사람들에게 얼마 전까지 전쟁을 치렀던 북부의 탄광에서 사고를 당하고도 극적으로 살아남은 노동자의 이야기를 전달해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상황은 달라도 자신들처럼 힘겹게 살아가는 다른 이들에게 공감한다. 그들의 극적인 생환에 환호하고, 그들처럼 힘겨운 상황에서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힘과 희망을 얻는다. 한 청년은 자신을 억압하던 주인을 죽이고 새 출발 하기도 한다.
그 모습을 보면서 키드 대위도 전쟁 중에 접한 아내의 죽음을 비로소 직접 마주하고 삶의 새로운 의미를 찾는다. 그래서 그는 뉴스 낭독을 위해 여러 마을을 떠돌아다니며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한 도피 생활을 이어가는 대신, 본래 집으로 되돌아가 그 어느 때보다 당당하고 자신 있게 뉴스를 읽는다. 그렇게 그는 고단한 일상을 잊게 해 주던 뉴스가 그 이상의 것임을, 그보다 더 중요한 힘을 지닌 존재임을 깨닫는다.
이는 조한나가 있고 없음이 영화의 시작과 끝 장면의 또 다른, 그렇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인 이유다. 작중 조한나는 그 자체로 뉴스가 단순한 엔터테인먼트나 정보 전달의 역할을 넘어서 공감을 통해 진정으로 서로를 연결할 수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가 함축된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미국 서부로 이주한 독일인과 아메리카 원주민 사이 충돌로 인해 본래 부모님을 잃고 아메리카 원주민들 사이에서 자라난 조한나. 그녀는 미국 대륙횡단철도 공사 구역이 인디언 보호구역을 지나감에 따라 원주민들이 강제 이주당하거나 살육당하는 통에 양부모마저 잃고 키드 대위에 의해 백인 친척들에게 전해진다.
그런 그녀는 원주민 문화에 동화되었는데도 약간의 독일어를 기억하는 등 서로 다른 인종과 종족, 언어와 문화 사이에서 제각각의 이야기를 간직한다. 또한 그 이야기를 토대로 아무런 공통점이 없었던 키드 대위와 서로의 아픈 가정사를 공유하며, 과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그렇기에 조한나를 구한 이가 나름대로 언론인이라고 할 수 있는 키드 대위인 것, 그녀가 가장 먼저 배운 영어 단어가 '이야기 Story'인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아무리 철도가 생기고 도로가 새롭게 놓아지더라도 사람들을 연결하고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서로를 이해하도록 만든 것은 결국 세계 각지에서 한 데 모인 이야기인 뉴스라는 사실을 곱씹어 보면 더욱 그렇다.
결국 <뉴스 오브 더 월드>는 각자의 가족을 잃은 이들이 새 가족을 이루는 과정을 통해 뉴스가 단지 문자로 적힌 정보가 아니라 분명 생생히 살아 숨 쉬는 현실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고 이야기한다. 하루에도 수많은 뉴스들이 쏟아지고, 심지어 그 뉴스가 담고 있는 진실, 사실, 허구, 거짓의 구분도 쉽지 않은 현재의 휘발적 뉴스 소비 세태에서 자칫 잊히기 쉬운 의미를 재조명하는 것이다. 특히 이 영화가 미국에서 근대적 형태의 뉴스가 성립되어 가던 1870년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도 뿌리로 되돌아가 진정한 뉴스가 무엇인지 고찰하고 문제의 답을 내놓는 키드 대위의 여정에 무게감을 더한다.
다만 <뉴스 오브 더 월드>가 의도한 메시지나 감정선이 명확히 전해지지 않다 보니 기존과는 다른 폴 그린그래스의 새로운 시도는 다소 불친절하게 느껴질 여지가 있다. 영화는 인물들의 입을 빌려 구체적으로 무언가를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앞뒤 장면들의 연결점, 카메라의 움직임과 포커스를 통해 그림의 일부만 조금씩 보여주며 나머지는 관객의 상상과 이해에 맡긴다. 예를 들어 조한나가 문득 독일어로 말하자 키드 대위는 무언가 기억나는 것이 있냐고 묻지만, 이내 그녀는 입을 다문다. 이때 그녀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이유는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추측과 상상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이러한 불친절함은 폴 그린그래스 감독이 차분하고 잔잔한, 또 감성적인 드라마 장르를 많이 다루지 않았던 데서 기인한 한계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의 완성도가 완벽하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9.11 테러를 소재로 한 <플라이트 93>, 피의 일요일로 대변되는 아일랜드 독립 투쟁을 다룬 <블러디 선데이>, 노르웨이 연쇄 테러 사건을 영상화 한 <7월 22일>과 같은 전작들에서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사회를 바라보는 폴 그린그래스 특유의 날카로운 시선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점은 몇 가지 단점과 어색함에도 불구하고 <뉴스 오브 더 월드>의 매력을 부정하기 어렵게 만든다.
A(Acceptable, 무난함)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폴 그린그래스의 이름값을 해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