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onymoushilarious2024-04-30 22:55:45
원초적인 웃음이 필요할 땐 과거로 회귀할 것
화이트 칙스
가끔 옛날 영화가 보고 싶을 때가 있다. 다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또 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래서 잊을 만하면 90년대 영화들을 다시 찾아본다. 요새 영화들에서는 대단한 서사를 찾을 수 없다고 생각이 드는 이유는 웬만한 서사들이 그 때까지 나온 영화들에서 다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00년대 헐리웃 영화들은 90년대의 황금기스러운 느낌보다는 로맨틱 코미디, 원초적 코미디가 더 많았던 것 같은 느낌도 든다. 물론, '트랜스포머'같은 대규모 프랜차이즈 영화들도 많이 등장했었지만 그런 영화들보다 그런 코미디 영화들을 즐겁게 보았던 기억이 있다. 내 인생의 오글거리는 하이틴 영화들은 그 때 봤던 게 전부이지만 그 때 많이 보아서 지금 환상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하튼 간에 요새 다시 향수에 젖고자 하는 미친 감성에 젖어 보았던 영화가 '화이트 칙스'였다. 굉장히 어설프지만 원초적인 웃음을 주는 영화를 보고 싶었다. 이 영화를 언제 처음 봤었는지도 기억이 없는데, 참 코미디라는 장르에 충실한 영화라고 생각이 든다. 물론 지금 와서 보면 흑인에 대한 비하가 넘쳐나고, 그 비하가 영화의 소재가 될 정도로 당연시되던 사회였구나 다시 실감하게 된다.
1. 아무리 봐도 어색한 티가 나는 분장
영화는 두 재벌 상속녀로 위장하기 위해 흑인인 경찰이 백인으로 위장하는 분장을 감행한다. 참 누가 봐도 안닮았는데, 이걸 겉모습으로 알아채는 인간이 없다는 게 정말 웃긴 지점이다. 오히려 여자 치고 너무 운동 신경이 좋아서 수상함을 느끼지, 외양에서는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는 게 이 영화가 가진 장점 중 하나인 '허무하게 웃기기'이다. 약간 밑도 끝도 없는 개그를 보고 나면 아니 저게 뭐야 하다가 막판 가서 와하하 웃게 되는 그런 시간차 공격 같은 개그들이 넘쳐난다. 지금에 와서 그 영화를 처음 보는 상황이라고 가정한다면 처음엔 웃기 보다는 경악할 것 같긴 하다.
하지만 그 지점이 이 영화의 장점인데, 처음부터 영화의 목적이 코미디이기 때문에 관객을 웃기려는 데에 많은 공력을 들였다는 것이 보인다. 물론 웃음의 소재가 다소 원초적이지만 가끔 이런 영화도 보고 싶을 때가 있지 않은가. 그런데 참 웃긴 건 이 영화도 유치한 건 매한가지인데, 왜 요새 만들어지는 코미디 영화에서 큰 감명을 받지 못할까. 이 영화도 그다지 작품성을 논하기는 조금 애매한 그저 오락 영화이고, 웃음의 코드가 대단히 고급스럽지도 않은데, 이 영화는 계속 보게 되면서 다른 코미디 영화들은 식상하다고 느낄까. 그건 나의 위선인가, 아니면 코미디 영화가 그만큼 발전이 더딘 장르인 것인가.
2. 웃음의 소재가 비하인 것은 조금...
영화의 가장 코믹한 캐릭터 중 하나인 라트렐이라는 농구선수가 나온다. 흑인인데, 백인 여자를 좋아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자신이 좋아하던 여자가 사실은 흑인 남자였다는 사실에 실망하는데, 포커스가 남자였다는 것때문에 실망한 것이 아니라 흑인이라서 실망했다는 지점이 '이건 요새 나오면 안되는 대사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흑인에게 맛들이면 헤어나올 수 없다는 둥 이런 대사들도 참 요새 나오면 논란 거리가 되지 않았을까.
그 시절이니 용인된 대사들이 참 많이 보였다. 주인공들이 모두 흑인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흑인에 대한 편견에서 비롯된 대사들이 참 많이 나오는데, 그걸 현재를 살아가는 흑인이 본다면 불쾌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마치 헐리웃 영화에서 동양인들은 너드 혹은 전문직종으로만 그려지는 게 동양인 입장에서 세상 답답한 것처럼 말이다.
뭐, 코미디 영화를 보면서 뭔 불만이 많냐 싶을 수도 있지만 코미디라는 것이 누군가를 비하하지 않고 웃기는 것은 생각보다 고급 스킬이기 때문에 그런 고급 유머를 구사하는 영화를 보고 싶은 마음이라고 생각해주었으면 좋겠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명장면은 배출한.
이 영화의 명장면은 그 클럽에서 댄스 배틀하는 장면을 빼놓을 수가 없는데, 개인적으로 그 장면이 뭐라고 그렇게 여러번 보게 되는지 모르겠다. 여자들끼리의 춤배틀인데, 어딘지 모르게 안무를 억지로 외운 것 같은 몸치 바이브들도 웃긴데, 다 같은 몸치이면서 누가 이겼네 졌네 하고 있는 것도 코미디 포인트였다. 그 다음에 주인공들이 백인 여성으로 위장하고서 세상 올드스쿨 느낌나는 춤을 추는 것도 재밌었지만 말이다. 뭐랄까, 그 배틀 장면은 허세에 점령당해 버린 남자들을 보는 느낌이었다. 굉장히 오글거리는데, 그래 어디까지 오글거리나 보자 하면서 끝까지 보게 되는 장면이다.
OTT 영화들은 성행하는데, 볼게 없다고들 한다. 그럴 때는 과감하게 과거로 가보시라고 추천한다. 지금보다는 확실히 영화들이 기술적으로 만듦새가 어색한 지점이 많긴 한데, 오히려 서사적인 측면에서는 그 내용이 더 새롭다. 그때에는 새로이 등장했던 서사여서 그런지, 요새 더 발전된 서사들도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 투박한 서사가 오히려 더 신선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서 90년대 영화들을 돌려보게 된다. 곱씹을수록 좋은 영화들이 참 많다. 음, 그런 의미에서 '화이트 칙스'는 곱씹을수록 좋은 영화라고까지 칭송하고 싶진 않지만 가끔 삶이 무료할 때 대책없이 웃고 싶을 때 꺼내봐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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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수는 정말 달콤할까?
가장 완벽한 복수는 무엇일까. 똑같이 되갚아주는 것? 보란듯이 잘 사는 것? 아무래도 받은만큼 돌려주는 쪽에 마음이 동한다. 내가 아팠던만큼 상대도 아파야 평등한 것이니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에서는 사람의 팔을 부러뜨린 자는 팔을 부러뜨리고, 눈을 멀게한 자는 눈을 멀게 한다는 동태(同態)복수 원칙을 명시했다. 암 역시 그렇고 말고. 그렇지만 이 원칙이 개인적 복수의 당위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복수를 끝마친 피해자는 다시 가해자로 법 앞에 서서 심판을 받게 될 테니까. 가장 정의로운 방식처럼 보이지만, 본인이 다시 복수의 대상으로 전락한다는 부작용이 있다. 안타깝게도, 복수는 위임된 권력이 대신 행할 때에만 정당성을 갖출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복수의 칼날은 제자신에게 돌아온다. 복수는 달콤한만큼 유독하다.
복수의 유독성이 가장 강력하게 분출하는 때는 아이러니하게도 복수가 성공하는(혹은 성공했다고 믿는) 순간이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는 복수의 이중성을 잘 담고있다. 복수라는 덫에 갇혀 허우적대는 두 남자의 이야기. 한 남자는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파멸했고, 다른 한 남자는 (어쩔 수 없이) 멈췄지만 영원히 구속된다.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사는 남자 '오대수'가 평생 수습하지 못할 과오를 저지르며 벌어지는 복수극이다.
이우진은 오대수에게 복수하기 위해 15년 간 그를 감금했다. 오대수가 함부로 혀를 놀렸기 때문이다. 오대수는 이수애(이우진의 누나)와 이우진이 관계를 가지는 것을 목격했고, 친구에게 소문을 퍼뜨렸다. 이수애는 학교에서 깨끗하지 못한 여자로 소문이 났고,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이 때문에 이우진은 오대수를 몹시 증오했다. 그래서 좁은 골방에 가두고는 군만두만 먹였다. 심지어는 오대수의 부인을 살해하고 그가 범인인 것처럼 꾸미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이우진은 멈추지 않았다. 평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우진은 최면을 걸어 오대수와 미도가 서로 사랑에 빠지도록 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순간에 두 사람이 부녀관계였음을 폭로한다. 오대수가 불편한 진실을 마주했을 때 비로소 이우진의 복수는 평등해졌다. 이우진은 자살함으로써 한 발 더 나아간다. 오대수는 홀로 덩그러니 남은 채 혀를 자름으로써 인과응보를 받아들인다.
"누나하고 난 서로 알면서도 사랑했어요... 너희도 그럴 수 있을까?'
이우진이 오대수를 15년 간 감금한 것은 더 '잘' 복수하기 위해서다. 오대수를 죽이거나 그의 딸 미도를 해코지할 수 있었음에도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은 것은 평등을 실현하기 위함이었다. 오대수와 미도가 사랑에 빠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두 사람이 부녀 관계임을 밝힘으로써 마주하게 될 죄책감과 수치심을 온전히 느끼기 바랐기 때문이다. 오대수가 이우진을 일찍이 죽이지 않은 것 역시 마찬가지다. 감금한 이유가 너무 궁금했기 때문에, 복수의 명분을 밝히기 위해서 게임에 끝까지 참여했다.
공교롭게도 복수가 완성되는 순간 붕괴는 시작된다. 오대수가 감금의 이유를 알아내고 의기양양하게 이우진을 몰아붙이는 순간, 알고보니 모든 재앙이 스스로 몰고 온 것임을 인식한다. 오대수가 혀를 잘라냄과 동시에 이우진은 일생의 후련함을 느끼지만, 이내 삶의 이유를 상실하고 자살한다. 복수가 달콤함 뒤에 숨겨둔 독이빨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두 사람은 모두 복수의 피해자다.
이우진은 멈출 수 없었다. 누나를 잃은 뒤로 삶은 피폐해졌고 오직 복수만이 구원이라고 믿었다. 복수에 중독되고부터 어쩌면 누나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자결로써 복수를 완성한 것일지도 모른다.
오대수는 멈출 수 밖에 없었다. 15년의 세월을 빼앗아 간 이우진이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오대수는 복수의 대상을 잃었고, 삶의 추동을 상실한 채 방황하게 됐다. 역설적이게도, 그토록 증오했던 이우진이 죽음으로써 살 이유가 사라졌다. 다만 그에게 남은 것은 불편한 진실을 감내하는 일 뿐이다.
복수에서 승자는 없다. 복수에 성공했지만 삶을 멈추게 된 이우진도, 목숨을 부지했지만 복수에 실패한 오대수도 행복해보이지 않는다. 복수의 달콤함은 끝내 두 사람에게 독이 됐다. 복수는 상처의 처방전이 될 수 없다. 상처의 근본적 해결은 환부를 치료하는 것이지, 남에게 똑같이 상처를 내는 것이 아니다.
복수를 멈추고 용서를 한 자만이 자유롭다. 용서만이 구원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과연 그 자유는 정말 행복할까? 다음 편에서는 용서라는 덫에 빠진 한 여인, 이신애의 이야기를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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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선의 권력과 폭력성을 직면하다
작품을 수입하여 부제를 붙이거나 새로운 제목을 붙이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제목은 작품의 얼굴이라고 생각하며, 어떤 선택은 작품을 오염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무척이나 어울리는 '분열의 시대'라는 부제를 달고, 한국의 극장에 도착했다. 그렇다면, 이 작품에는 어떤 ’분열‘이 벌어지고 있는가? 일차적으로는 ’내전‘으로 인한 분열이다. 한 나라의 국민임에도 갈라선 이들. 이들이 어떤 이념으로 인해 갈라서게 됐는지에 이 영화는 집중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한 인물이 기자인 주인공과 동료들을 향해 묻는 질문은 의미심장하다. “Which kind of American are you?”. 이 질문을 던진 뒤, 그의 총구는 아시아 출신 미국인들에게 먼저 향한다. 이차적으로는 ‘종군사진기자’들의 분열이다. 주인공인 이들은 내전 상황에서 내면의 분열을 겪으며, 이 작품은 후자에 초점을 둔다.
이들은 전쟁의 참혹함을 사진으로 다뤄내어 사람들의 의식을 고취시키겠다는 의지를 가진 인물들로 보인다. 그렇게 이들은 ’Great photo’를 찍기 위해 현장을 누빈다. 내전 상황 속에 펼쳐지는 수많은 이들의 죽음들. 그 순간 카메라를 들이밀어 극적인 순간을 담아내는 것이 그들의 일이다. 총탄이 오가고 피가 솟구치는 순간들이 화면에 연속적으로 보여진다. 전쟁 영화에 어울리지 않게 울려퍼지는 파티에서나 나올법한 음악은 우리의 의식을 혼란하게 만든다. 그 현장을 좋은 구도로 포착한 이들은 현장을 떠나며 말한다. ”아드레날린이 솟구친다”. 그러나 목숨을 내놓고 일하는 이들은 집단 내부에서 동료의 죽음을 맞이하자 온전히 다른 반응을 보인다. 쾌감 속에 익명의 인물들의 죽음을 담아내던 이들은 자신의 동료를 ‘그들’ 정도로 칭하자 그들도 이름을 가졌다며 분노를 표출한다. 게다가 집단의 정신적 지주격인 이의 죽음에는 절망하며 고함을 쏟아낸다. 이 순간, 이들의 음성은 음소거되어 이미지로만 비춰진다. 즉, ‘분열의 시대’라는 부제 속에 담긴 의미는 단순히 ‘내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분열의 시대‘는 이들 내부에서도 진행 중이다.
결정적인 순간은 찾아오고, 총과 카메라는 번갈아가며 보여진다. 그렇게 시선의 권력이 가진 폭력성은 상징적으로 재현된다. ’shoot’은 ‘총을 쏘다’라는 의미 뿐만 아니라, ‘사진을 촬영하다’라는 의미도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다시금 알려주는 순간이다. 그리고 찾아온 클라이막스의 이미지는 예상 가능함에도 충격적이다. 카르티에 브레송이 말했던 ‘결정적 순간’은 그순간 카메라에 담긴다.
카메라의 곁에 오랜 시간 머물러왔다. 그렇기에 그 ‘결정적 순간’을 포착했을 때의 쾌감을 안다. 불행이 만드는 스펙터클은 끔찍하며 아름답다. 그때 나도 이들과 같은 표정을 지었을까. 일찍이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폭력이나 잔혹함이 보여주는 이미지들로 뒤덮인 현대사회에서는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을 일종의 스펙터클로 소비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스펙터클로 뒤덮인 사회에서 우리는 끝없이 폭력에 무뎌진다. 이는 온갖 매체들이 점점 더 폭력적인 이미지를 양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더이상 예전 같은 자극으로는 대중들은 만족하지 못한다.
이 작품의 특장점은 그러한 스펙터클을 끝없이 재현하는 것을 넘어, 그 스펙터클을 온힘을 다해 포착하는 인물들의 복잡한 심리를 여과없이 표현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거룩한 뜻이 있다는 곳으로 나아가지 않고, 사실 우리는 스펙터클을 담아내는데 쾌감을 느낀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점이 이 작품의 장점이다. 충분히 교조적인 흐름일 될 수 있었을 것임에도, 시선의 권력과 폭력성에 대해 인정하고 직면하는 이 영화가 좋다. 그렇다면 보는 이이자 찍는 이로서 나는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하는가. 영원히 풀리지 않을 이 질문을 남긴 채 이 영화는 우리의 손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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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빈의 원맨쇼가 빛났던 좀비물
현빈과 장동건의 조합이라는 사실만으로 보고 싶었던 영화 <창궐>. 그 당시까지만 해도 넷플릭스에 <킹덤> 이 나오기 전이었고, 사극과 좀비물의 결합이 굉장히 신선했던 시기였다. 그래서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던 조합으로 나온 영화 <창궐>에 대한 기대가 상당했었다. 그런 기대에 영화 <창궐>은 상당히 선방을 하지 않았나 싶다.
영화 <창궐> 시놉시스
야귀떼가 온 세상을 집어삼켰다!
밤에만 활동하는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닌 ‘야귀(夜鬼)‘가 창궐한 세상, 위기의 조선으로 돌아온 왕자 이청은 도처에 창궐한 야귀떼에 맞서 싸우는 최고의 무관 박종사관 일행을 만나게 되고, 야귀떼를 소탕하는 그들과 의도치 않게 함께하게 된다.
한편, 조선을 집어삼키려는 절대악 김자준은 이 세상을 뒤엎기 위한 마지막 계획을 감행한다. 조선필생 VS 조선필망, 세상을 구하려는 자와 멸망시키려는 자!.오늘 밤, 세상에 없던 혈투가 시작된다.
*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창궐>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박씨전이 연상된 영화 <창궐>
영화 <창궐>을 보는 내내 박씨전의 창작의도가 생각났다. 박씨전은 병자호란 때 당한 치욕을 씻기 위해 소설에서 나마 그 치욕을 씻어 용골대를 처형하는 그런 내용의 소설이다. 영화 <창궐> 역시 비슷한 노선이었다. 그냥 역사대로 인조가 노환으로 죽고, 돌아온 세자가 효종이 될 수도 있었을텐데 청나라에 굴복한 인조를 야귀(좀비)에 먹히게 하고 결국엔 죽음에 이르게 하는 모습을 보면서 영화 속에서 벌을 주는 것인가?하는 느낌이 들었다.
생각보다 무서웠던 좀비들
영화 <부산행>을 볼 때도 좀비들의 떼거지 등장에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다. 아마 영화 <부산행>은 홍보 초기부터 한국형 좀비라는 타이틀을 강하게 내걸고 와서 이미 예상을 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 <창궐>은 그 때까지만 해도 넷플릭스 오리지널 <킹덤>을 보지 않은 상태였고, 사극이라는 것에 초첨이 맞춰져 있어서 이렇게 좀비가 사실적이라고 예상하지도 못했고, 한복과 좀비의 조합이 이렇게나 충격적으로 다가올 것이라 가늠조차 안돼서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나 싶다. 그만큼 분장팀의 사실적인 묘사와 배우들의 연기력의 조합이 좋았던 것 같다.
현빈의 원맨쇼
영화 <창궐>에서 가장 빛이 났던 것은 현빈의 액션신이었다. 청나라에서 자라며 자유로운 사고를 가진 이청의 모습을 현빈은 굉장히 재치있게 표현해냈다. 야귀떼들과 1대 100으로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보는 내가 진이 다 빠질 정도였고, 재치 넘치고 유머러스하던 이청이 백성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왕으로 거듭나는 변화를 굉장히 잘 표현해서 현빈이라는 배우가 이렇게나 연기를 잘하던 배우였나 싶었던 작품이었다.
영화 <창궐>은 현빈의 원맨쇼 만으로도 충분히 볼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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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 지휘자가 되기 위해 험난한 시련을 마주하다!
시놉시스
자히아 지우아니는 어렸을 적에 부모님이 튼 지휘자 영상을 보고 지휘자의 꿈을 꿨다. 자히아 지우아니의 가족은 프랑스의 아랍인 이민자 가족이고 자신의 여동생과 함께 파리의 명문 음악원에 다닌다. 자히아 지우아니가 맡고 있는 분야는 비올라지만 자신의 꿈은 지휘자가 되어 악단을 연주해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음악원에 다니는 친구들의 무시와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지휘자가 될 수 없는 시선이 공존한다. 그래서 그 꿈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자히아 지우아니에게 앞으로 무슨 일들이 펼쳐질까?
전 세계에서 여성 지휘자의 비율이 6%밖에 안된다고 한다. 프랑스에서는 자히아 지우아니를 포함한 4%만이 여성 지휘자라고 하는데 그만큼 지휘자의 비율은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은가 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고 자히아 지우아니가 당시 사회적 시선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여성 지휘자 자리까지 올랐는지도 보여준다.
음악은 제 삶이라는 걸 보여주는 자히아 지우아니의 대사와 지휘자라는 꿈을 포기하지 않는 끈기가 어떤 건지 관객들에게 잘 보여준다.
세계적인 지휘자인 세르주 첼리비다케가 자히아 지우아니의 재능을 알아보고 지휘자 수업을 가르친다. 세르주 첼리비다케는 엄격하게 지휘자를 기르는 수업을 했으나 한편으로는 제자들에게 따뜻한 덕담도 하는 좋은 스승이었다. 자히아 지우아니가 지휘를 하는 모습이 너무 교과서적이다고 해서 때때로 음악에는 어떤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이 필요하다고 충고를 해준다.
사실은 자히아 지우아니의 내면 속에는 외로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단원들과 연습할 때도 자신이 혼자인 기분이 들곤 했는데 세르주 첼리비다케는 언젠가는 그 외로움이 하나가 되는 날이 올 거라고 조언하고 그 말이 현실이 된다.
이 영화의 메세지는?
자히아 지우아니는 언젠가 오케스트라에 서서 지휘자를 하는 목표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피나는 연습을 해왔다. 그렇기에 지금의 여성 지휘자의 자리까지 올라가지 않았을까 싶은데 지금까지도 프랑스에서 외국인 이민자에 대한 차별과 여성의 역할에 대한 차별이 만연하다면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꿈을 펼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품기도 했다.
출발선이 달라도 기회를 줘야 하지 않을까란 생각도 해봤고 자히아 지우아니에게 다가온 역경과 시련을 잘 이겨낸 걸 보고 필자도 그 점을 본받아 꿈을 위해 끈기 있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여성 지휘자가 되기 전에 겪어야 했었던 한계를 극복한 어느 여성 지휘자의 이야기!
※ 씨네랩의 크리에이터로써 영화 시사회에 초대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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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을 괴롭게 하는 영화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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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었어?
이렇게 인사를 건넨다. 한국인에게 밥이 가지는 어마무시한 메타포를, 오스트리아 출신 감독 예시카 하우스너는 알지 못할 것이다. '언제 한번 밥이나 먹자'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를 우리는 다 알지만, 외국인의 눈에 이 먹보들은 불가해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2010년에 발매된 옴므의 <밥만 잘 먹더라>라는 노래는 이별 후에도 밥만 잘 먹더라는 스토리이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서 힘들어 죽겠어도 '밥만 잘 먹으면' 괜찮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그러니까 먹는 걸로 장난치면 뒈지게 혼나는 거다. 가정교육의 또다른 이름은 밥상머리 교육이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클럽 제로>는 한국인들이 유전적으로 가진 어떤 버튼을 딸깍 누른다.
다행히도 영화를 볼 때 나는 공복이었다. 종일 먹은 거라고는 베이글 하나뿐이었는데, 정말이지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배가 고프지 않았고, 술을 좀 마셨다. 영화 때문인가? 그런 생각을 했다. 엄마, 할머니랑 같이 보면 난리 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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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엘리트 학교에 영양교사로 온 노백이 아이들을 굶기는 이야기.
노백은 학부모 회의에서 추천받아 부임했다. '웹사이트'에서 추천했다는 걸로 보아, '안아키' 한의사와 비슷하다. '의식적으로 먹기'에서 시작하여 인간에게 음식이 필요하지 않다는 극단적 논리로 치닫는 과정을 보여준다.
식사의 정치학
예시카 감독은 <클럽 제로>를 '통제'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그렇다. 밥이 아니라 다른 무엇이어도 무방하다. 이를테면 옷을 통제한다고 생각해 보자. 처음에는 날씨와 옷은 상관 없다고 시작하여 점퍼를 벗는다. 그리고 상의를 벗는다. 다음으로는 하의를 벗는다. 사실 인간은 옷 같은 건 필요 없는 존재다. 스스로 체온을 조절할 줄 안다. 옷이란 자본주의의 폐해이며 우리를 억압하는 모든 것이다.
그러나 통재의 소재가 '밥'인 것은 먹는 행위가 가장 원초적이기 때문이다. 원초적이어서 끔찍하고, 원초적이기에 인간의 모든 행동양태를 통제할 수 있다.
미성년자에게 보호자가 필요한 이유는 수십만 개가 되겠으나 그중 보호자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아이를 '먹이는' 행위이다. 그러니 수많은 아동학대 중 밥 굶겼다는 항목에 공분한다. 먹이는 자와 얻어 먹는 자에게는 역학관계가 반드시 존재하기 때문이다. 밥을 굶길 수 있는 사람은 밥을 먹어야 하는 사람보다 우위를 점한다. 노백의 클래스에 모인 학생들이 점점 노백에게 종속되는 것처럼.
학생들의 식사를 통제할 수 있게 된 노백은 완전히 그들 위에 군림한다. 마치 사이비 종교 같다. 실제 영화에서 노백이 하는 짓거리들을 보면 사이비와 다름 없다. 정체불명의 '어머니'를 찾으며 계시를 내려 달라 애원하고, 명상하고, 마음 어쩌고를 찾는 것까지. 사이비 교주가 사이비 신도들을 꾀는 방법과 유사하다. 사이비 신도들이 절대적 믿음을 갖는 순간, 교주가 가지게 되는 것은 바로 권력이다. 그러므로 정치적이다. 사이비 종교를 다룬 무수한 콘텐츠들에서 발견되는 맥락과 같다.
접근 방식도 비슷하다. 각자의 약점과 결핍을 파고든다. 부모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아이에게는 부모 같은 자애로운 사랑을, 특히 부모가 동생만 데리고 떠난 아이에게는 '너만이 내 특별한 아이'라는 환상을 심어 준다. 가난한 싱글맘을 가진 아이에게는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을 자극하며, 체중 관리를 하는 아이에게는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역설한다.
문제되는 지점은 이들이 청소년이라는 사실이다. 교장 선생에게도 노백은 '의식적으로 먹기'를 설파하지만, 식사량을 줄이던 교장 선생은 '처음에는 좋았지만 힘들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는다. 그러나 청소년들은 다르다. 맹목적인 믿음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논리적으로 격파하지 못한다. 종국에는 다른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오직 노백의 말만 따른다.
미성년자-그중에서도 여학생-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던 '프로아나'라는 용어가 있다. '아노렉시아(Anorexia)'를 찬성(Pro)한다는 이상한 용어인데, 이들에게도 별 희한한 '믿음'이 있다. 뼈만 보일 만큼 빼빼해지면 모두가 자기를 사랑할 거라는. 프로아나를 지향하는 아이들의 대부분은 정상 체중이다. 밥에도 미쳤지만 외모 강박에도 미쳐버린 대한민국에서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쪽에서는 먹방이 난리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프로아나가 난리다.
사실 제3자의 눈에는 이들이 빼빼마른 몸이 아니라 사랑받기를 원한다는 것이 훤히 보인다. 맹목적인 믿음에 빠진 그들만 모를 뿐이다. 사랑에도 정치가 있으니, 권력은 당연히 사랑을 주는 자에게 있다. 사랑받기 위해서 무슨 짓이라도 할 만큼. 부모와 자식간에도, 연인간에도. 노백의 학생들은 노백에게 사랑받고 인정받기 위해서 단식에 이른다. 부모나 친구로부터 생긴 구멍을 노백이 채워주므로.
노백이 처음에 주장한 '의식적으로 먹기'도 적당히 하면 중요하다. 식사를 통제하고, 의식적으로 액상과당과 탄수화물을 줄이고, 생활을 통제하고, 핸드폰 적게 하고. 우리는 얼마나 무의식적으로 입에 음식을 집어 넣는가. 입이 심심하니까.
노백의 학생들도 초반에는 몸이 가벼워지고, 능률이 오르고 일시적으로 당뇨가 호전되는 경험을 한다. 정상적으로 사고하는 성인이라면 '적당히'를 안다. 이 정도 통제하면 되겠다는 판단이 가능하다. 그러나 통제가 극단으로 치닫는 까닭은 아마도 구멍 때문일 것이다. '결핍' 말이다.
내가 이상한 짓을 하고 있다면 내 구멍을 찾아야 한다. 외로움인지 슬픔인지 두려움인지 사랑인지. 프로아나 여학생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이 '사랑'이기에 사랑을 받기 전까지는 몸이 걸레짝이 되어도 포기할 수 없는 것처럼.
노백의 수업은 통제와 가스라이팅을 하려면 반드시 구멍이 있는 자를 찾아야 한다는, 그리고 그 구멍을 집요하게 파야 한다는 이상한 교훈을 안겨 준다.
밥 잘 챙겨 먹자. 맛있는 거 '의식적으로' 먹고, 건강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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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제로(Club Zero)
감독: 예시카 하우스너
출연: 미아 와시코브스카
상영시간: 110분
주의: 역겨운 장면 있음. 저는 비위 약해서 눈 감고 봄.
씨네랩으로부터 시사회에 초대받아 참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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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계의 사랑법
해당 리뷰는 씨네랩 초청 시사회 관람 후 작성되었습니다.
<나를 모르는 그녀의 세계에서>는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등 이미 다수의 로맨스 영화를 감독한 미키 타카히로 감독님의 신작이다.
주인공인 리쿠는 베스트셀러 작가이다. 대학시절 운명적으로 만난 아내 미나미와는 결혼한지 8년차. 리쿠는 글을 쓰고 미나미는 음악을 하며 다정히 사랑했던 연애 초반과는 다르게, 이제 그에게 미나미의 내조는 부담스럽기만 하다. 미나미에게 보여주기 위해 소설을 쓰기 시작했던 그였지만, 사회적인 성공을 얻기 시작하며 그때의 마음은 퇴색 되었다. 소설의 마지막 탈고를 앞두고 있던 시점, 엔딩을 보여 달라던 미나미의 말을 무시하고 잠든 다음 날, 눈을 떠보니 자신이 알던 현실과는 전혀 다른 평행세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리쿠. 아내 미나미가 자신을 전혀 알지 못하는 낯선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오히려 성공한 싱어송라이터로서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세계이다. 리쿠는 다시 한 번 그녀와의 사랑을 시작하기로 결심하고, 그녀의 마음을 열기 위해 처음부터 다가간다.
평행세계라는 소재를 끌어왔어도 판타지 영화보다는 로맨스 영화에 훨씬 큰 축을 둔 듯 하였다. 특히 로맨스 영화에서 자주 쓰이는 클리셰적인 연출은 자칫 과하다 느껴질 정도로 부각된 편이다. 클리셰적인 연출이 가장 기능적으로 유려하게 쓰인 부분은 단언컨대 오프닝 타이틀이다. 리쿠와 미나미의 연애 과정은 첫 만남의 파트를 제외하고, 타이틀이 뜨는 동안 전부 관객들에게 보여진다. 뻔하다 느껴질 수도 있으나, 대신 대사 한줄 없어도 '리쿠와 미나미의 행복할 줄 알았던 결혼 생활이 리쿠의 사회적 성공과 함께 빛바랬다'는 긴 시간의 압축을 관객들은 놓침 없이 따라갈 수 있다.
그리고 이미 수없이 다른 영화에서 반복 되었던 클리셰들로 예측 가능한 전개를 만들어내는 이 영화는, 로맨스 장르로써 자신이 지니고 있는 가치를 서브 인물들의 레이어를 통해 만들어낸다. 주인공들 만큼 조연들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지는 영화. 주인공들이 메인 스토리를 끌어가는 사이에 조연들이 다채로운 레이어를 만들어낸다.
조연들의 이야기는 이 영화가 단순히 ‘사랑을 다시 시작하는 이야기’에 머물지 않도록 깊이를 더한다. 리쿠가 도달한 평행세계는 그냥 우연히 생긴 곳이 아니다. 누군가는 슬픔을 껴안고, 누군가는 자신의 상실을 견디며 끝내 이 삶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지되고 있는 세계다.
그중에서도 특히 인상적인 인물은 리쿠의 선배이다. 이 세계의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지만 그 고통을 세상과 단절하는 방식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조용히 자신의 일상을 이어가며 살아간다. 그의 존재는 말하지 않아도 리쿠에게 이렇게 전하는 듯하다. “다시는 사랑할 수 없더라도, 그 사람을 기억하며 살아갈 수는 있어.”
그는 자신의 삶을 멈추지 않음으로써, 이 세계에서 리쿠가 다시 사랑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준다. 리쿠는 그런 이들의 이야기를 곁에서 지켜보며 자신이 살아왔던 세계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감정과 선택 위에 놓여 있었는지를 뒤늦게 알아간다.
더불어 미나미의 할머니는 이 세계의 또 다른 축을 담당한다. 그녀는 젊은 시절 자신이 간절히 원했던 꿈을 내려놓고, 가족의 탄생을 선택한 인물이다. 결국 선대에 존재했던 그녀의 희생 덕분에 미나미가 살게 되고, 리쿠와 만나고, 리쿠가 그녀를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지워진 선택들, 화려하지 않아도 단단한 선택들이 쌓여, 이 세계의 미나미가 지금의 자리에서 노래할 수 있게 되고 저 세계의 리쿠가 미나미를 사랑할 수 있었다. 주인공의 촘촘한 주변 세팅을 통해 이 영화는, 우리가 ‘평범하게 살아간다’고 여겼던 순간들조차 사실은 누군가의 포기와 헌신, 배려 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감성적으로 되짚는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가족일 수도, 친구일 수도, 이름조차 알지 못했던 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결국 리쿠가 도달한 진실은, 자신이 돌아가고 싶어 했던 원래의 세계는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지금 이 세계는 누군가의 눈물과 결단, 그리고 사랑이 모여 만들어진 결과였고, 그는 그 안에서 단지 소비자처럼 사랑을 받아왔을 뿐이라는 자각에 다다른다. 이 영화는 그렇게 말한다. 모든 세계는 결국 누군가가 사랑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고.
그러니 이 영화를 본 우리도 기꺼이 사랑하고, 기꺼이 나를 던져, 누군가의 세계가 되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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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작의 명성에는 미치지 못한 글래디에이터 2 / 넘기 힘든 막시무스의 카리스마 / 덴젤 워싱턴의 팔색조 연기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글래디에이터 2"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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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vielog #2] 주체적 삶을 택한 소녀의 성장 영화 걸후드를 관람하고 왔어요!
셀린 시아마 감독의 영화 걸후드를 시사회로 관람하고 왔습니다.
워터릴리스, 톰보이 이후 세 번째 장편 영화로 2014년에 제작된 영화인데요.
한국에서 이제 개봉을 합니다.
시사회 참석 후 간단히 이야기해 보았습니다.구독과 좋아요 부탁드리고,
자세한 리뷰가 궁금하신 분들은 브런치에 오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https://brunch.co.kr/@movie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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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극장판 도라에몽: 진구의 신공룡> 스페셜 영상
도라에몽 50주년 기념대작!
오리지널 스토리로 돌아온 진구와 쌍둥이 공룡의 어드벤처!진구는 공룡 엑스포 화석 발굴 체험에서 발견한 화석을 공룡알이라고 굳게 믿는다.
도라에몽의 비밀도구 타임 보자기로 화석을 되돌리자 새로운 종의 쌍둥이 공룡이 태어났다!
진구를 닮아 미덥지 못한 큐와 말괄량이 뮤.
사랑을 듬뿍 주며 키우지만, 함께 살아가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진구는
큐와 뮤를 원래 시대로 데려다 주기로 결심하고,
친구들과 함께 6,600만 년 전 백악기로 모험을 떠난다!
도라에몽의 비밀도구와 공룡들의 도움으로 공룡의 발자국을 따라
진구와 친구들이 도착한 곳은 바로 수수께끼의 섬.
공룡이 멸종했다고 알려진 백악기에서 큐와 뮤, 그리고 진구를 기다리고 있는 운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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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TUDUM: 글로벌 팬 이벤트> 공식 예고편
9월 25일, 전 세계 넷플릭스 최고 스타들과 크리에이터들이 가상의 공간에서 모입니다. ? 사상 최초로 열리는 글로벌 TUDUM 이벤트! 세계 곳곳의 넷플릭스 팬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고 감사의 뜻을 전하는 시간입니다. 3시간에 걸쳐 진행되는 이번 이벤트에서는 《지옥》 《마이 네임》과 같은 신작부터, 《기묘한 이야기》 《브리저튼》 등 인기 시리즈의 후속 시즌, 《레드 노티스》 《돈 룩 업》 같은 영화까지 70여 편에 이르는 콘텐츠의 최신 정보를 만나볼 수 있어요. 넷플릭스 최초 공개 및 독점 영상 대거 등장 예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