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4-05-04 18:06:08
날카로운 조각별처럼
영화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 리뷰
PROGRAM NOTE.
<시티즌포>(2014)의 로라 포이트러스 감독의 최신작이자 2022년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인 이 다큐멘터리는 두 줄기의 이야기를 전개한다. 하나는 세계적인 사진작가 낸 골딘의 지난 삶과 예술 작업에 관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골딘이 오피오이드 진통제 옥시콘틴 중독에서 벗어난 뒤 이 약의 제약사 퍼듀와 그 배후에 있는 새클러 가문을 상대로 벌인 투쟁 과정이다. 영화는 골딘이 비극적인 가정사를 넘어 1960년대와 70년대 혁명적 시대와 결합하면서 예술가로 성공하는 과정을 그의 대표적인 슬라이드 쇼들을 덧붙여 보여준다. 또한 그가 ‘에이즈 시대’에 벌였던 격렬한 투쟁이 골딘 예술의 본질 중 하나임을 드러낸다. 결국 포이트러스 감독은 골딘이 옥시콘틴 피해자 단체인 P.A.I.N과 함께 세계 곳곳의 미술관과 대학을 돌면서 벌였던 시위 투쟁도 그의 또 다른 예술 작업이라는 사실을 알게 한다. (문석, 제24회 전주국제영화제)
POINT.
✔️ 예술가들의 예술가 낸 골딘. 사진작가 낸 골딘을 잘 몰라도, 자비에 돌란이나 왕가위가 언급했음을 들으면 궁금해지실 거예요
✔️ 내부자이자 당사자로서 기록한 예술 세계의 아름다움. 사진과 음악이 동시에 펼쳐지면서 '아 이래서 영화가 종합 예술이지' 하고 만족스러워지는 영화입니다 (그러므로 꼭 영화관에서 보셔야 좋아요!)
✔️ 예술가인 동시에 투쟁하는 사람이라고? 예술가가 예술하는 이야기만은 아닌 영화랍니다. 보고 나면 우리 삶에 대해서도 생각거리들이 많아지는 영화
✔️ 근데 일단, 예술과 투쟁과... 이런 걸 다 떠나서 매우 흥미롭고 재미있는 다큐멘터리
✔️ 전세계 영화제와 시상식에서 52번 노미네이트되고 35관왕이 되었다는데...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이라는데... 이유가 있다!

날카로운 조각별처럼 터져나가는
사진작가 낸 골딘은 1970년대 미국의 "하위 문화"를 사진으로 담아 슬라이드쇼 형태로 클럽이나 공연장에서 선보이며 등장했다. 자신과 친구들의 세계를, 내부자의 시선으로 담아낸 그 세계는 트랜스젠더와 동성애자, 예술가, 마약과 섹스가 혼재되어 있었고, 세상으로부터 배제되었던(marginalized) 동시에 세상을 배제하는 당대의 아웃사이더들의 세상이었다.
카메라를 여자가 들다니, 심지어 이런 "타락과 방종"을 담아내다니, 미술계에서는 낸 골딘을 거부하기도 했지만, 내부자이자 당사자의 시선은 강력하다. 낸 골딘의 예술세계는 깃발을 하나씩 꽂듯 '개저씨'들에 밀리지 않고 '맞다이' 뜨면서 자신의 자리를 공고히 했다. 낸 골딘의 사진 속 친구들은, 70-80년대 사진에서 각자의 잰으과 상처로 날카로운 조각별처럼 반짝반짝 터져 나가던 그 빛은, 이내 90년대에 전혀 다른 빛 안에 담기게 된다.

에이즈. 후천적면역결핍증후군. 항레트로바이러스제요법이 알려지고 널리 퍼질 때까지 마치 "신의 저주"처럼 여겨졌던 그 질병 앞에 친구들은 말라 가고 스러지고 죽어간다. 세상은 그들의 "타락과 방종"의 결과라고 손가락질하지만, 낸 골딘의 눈빛은 그 앞에서 더욱 단호해져 간다. 단호한 눈으로 친구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고, 친구들의 예술을 전시로 구성한다. 여기에 던져지는 눈총에는 "이것은 매카시즘이자 예술가들을 블랙리스트하는 것"이라고 명확히 말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손목수술 후 처방 받은 약이 마약성이었다는 사실을 몸으로 깨닫게 된다. 그래도 중독에서 금방 벗어날 수 있어 "운이 좋았다"는 낸 골딘은 가만히 있지 않는다. 같은 고통을 겪고 회복된 사람들 혹은 같은 고통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 고통과 상처를 아는 사람들은 모여서 투쟁한다. 마약성 진통제를 아무렇게나 처방하여 사람들을 중독되게 하고 막대한 부를 쌓은 제약 회사와 그 오너 일가를 규탄한다. 영화는 낸 골딘의 삶을 선형적으로 담지 않으면서, 다른 축에서 이 투쟁을 담는다. 영화는 그렇게 명확히 보여준다. 삶과 투쟁이, 예술과 정치가, 그들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이 모든 것들은 한 줄기에서 태피스트리처럼 뒤얽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 것임을.

모든 예술은 정치적이다
그러므로 모든 예술은 정치적이다. 매끄럽고 티 없는 느낌으로만 아름다운 그런 것은 아니다. 매끄럽게 어떤 '규칙'에 따라 밟은 창작물에서 우리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고, 그래서 그것을 엔터테인먼트라 부를 수 있고, 그것도 우리에게 필요하고 정말 좋은 것이지만, 예술은 다르다. 예술은 작가의 속을 파먹고 태어난다. 어딘가 거칠고, 피인지 땀인지 눈물인지 그 모든 것인지 모를 무언가가 축축하게 얽혀 있고, 스크래치가 나 있고, 툭툭 걸거치는 무언가가 이따금 박혀 있고, 그래서 내가 그 결과 정확히 일치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매끄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어쩌면 불편할 수도 있다. 그래도 그게 예술이다.
그러므로 모든 예술은 정치적이다. 예술은 결코 당의(sugarcoat)를 입을 수 없다. 존경스럽고 그들의 존재에 감사하게 되면서도, 그의 운명을 내가 지고 살고 싶은가 묻는다면 고개를 절레절레 젓게 되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김애란의 소설에 매번 감탄하지만 그가 눅눅하게 표현한 슬픔의 농도를 내 마음에 지고 살고 싶지는 않다. <토지>를 비롯한 박경리 소설을 읽을 때마다 대문호의 높이를 느끼지만, 이 대문호가 대작을 쓰면서 느꼈을 마음 속의 소용돌이를 내 것으로 지고 살 자신은 없다. 오래 소설가 황정은 인터뷰에서 "문학 작품 주인공이라니, 그런 것이 되고 싶을 리가 있냐"고 응답한 것과 마찬가지다. 낸 골딘의 작품 또한 내게 그렇다. 슈가코트를 걸치고 매끄러워질 수 없는, 툭 불거지고,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예술이다.
그러므로 모든 예술은 정치적이다. 정치적인 것들은 필연적으로 투쟁하며, 그 투쟁에는 절대 피상적인 구호가 끼어들 수 없다. 영화 속 제약회사와 오너 일가는 "기업 홍보 리스크"로만 이들의 싸움에 접근하지만, 낸 골딘과 단체의 목적은 "피해를 줄이는 것"이다. 싸움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예술은 언제나 어떻게든 삶의 본질에 가 닿는다. 심지어 작가 스스로 알든 알지 못하든. 70년대 친구들을 담던 낸 골딘의 사진에 담긴 예술성도, 오너 일가에 맞서 투쟁하는 순간의 예술성도 결국 같은 본질에 맞닿아 있듯이.

오명과 낙인에 맞서는 아름다움
이 영화에는 스티그마(stigma)라는 말이 많이 등장한다. 때로는 '오명'으로도, 때로는 '낙인'으로도 번역되는 이 단어는 우리 사회에서 자주 쓰이는 용어가 아니지만 자주 보이는 현상이다. 에이즈 환자라서, 성소수자라서, 여자라서, 고양이를 예뻐해서, 머리가 짧아서, 참사 피해자의 유가족이라서... 각양각색의 이유들로 우리는 손쉽게 '낙인'을 찍고 그것으로 상대에 대한 평가를 끝내 버린다.
70-80년대 미국 "하위 문화"에 속한 사람들은 분명 스스로의 몸을 도구화하고 있었다. 섬광처럼 터져 나가는 젊음을, 마약이든 섹스든 예술이든 어떤 형태로든. 그러나 이는 타인의 몸을 도구화하는 것과는 다르다. 낸 골딘이 성매매에 대해서 "ugly"한 시절이었다고 말하는 이유도 아마 거기에 있을 것 같다. 스스로의 몸을 도구화하는 것에 나는 개인적으로 동의할 수 없지만, 자신의 주장을 위해 이들의 삶과 몸을 도구화하는 시각에는 더더욱 동의할 수 없다. "타락과 방종"의 결과로 죽어가는 너희를 다 죽이면 이 병이 사라질 것이라고, 이 병은 신의 저주라고 말하는 마음. 그 마음에 깃든 생각들은 과연 "타락과 방종"이 아닌가? 그 심보를 그냥 두는 것이야말로 신의 저주가 아닌가?

그 모든 오명과 낙인에 맞서 깃발을 꽂은, 어떤 삶은 그 자체로 예술이다. 그래서일까, 낸 골딘이 참여한 시위들이 담긴 이 영화 속 장면들은 무척 아름답다. 이런 중대한 이야기를 목 놓아 외치는데 내가 여기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앉아 있어도 되나, 싶으면서도... 전단이 나부끼고 사람들이 박수를 치는 순간 아름다워서 울컥하게 되고, 라임이 잘 들어맞는 투쟁의 구호에 감탄하고 있고, 체포되는 순간까지 우아한 미소를 잃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또 아름다움을 느낀다.


나는 왜 그들의 투쟁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그 느낌 자체에 착잡해졌는가. 고민하다 보니 결국 그건 시민사회의 아름다움에 닿는다. 돌고 돌아 나에게까지 이어질 공공선에 대한 투쟁이더라도 (예를 들어 장애인 이동권이 보다 보장되는 사회는 장애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며, 참사에 맞서 사회적 안전을 말하는 투쟁은 결국 우리 모두를 보호한다), 차가운 시선을 보내며 "정치적"이라는 (부정적으로 쓰이는) 비난을 던지는 사람들, 그들로 인해 더욱 그악스러워져야만 가까스로 기능하게 되는 한국의 투쟁들을 생각할 때, 그 아름다움 앞에 착잡해졌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예술은 정치적이기에, 정치적인 것들 안에서 우리는 예술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어쩐지 이 영화 끝에서 나는 <아무튼, 데모>를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영화의 한 축을 이루는 이 투쟁기로 인해 중간중간 탐사 보도처럼 느껴지는 이 영화 속 장면들은, 우리에게 더 많은 대화거리와 고민을 안겨준다.

우리의 목소리는 어디까지
이따금 탐사 보도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낸 골딘이라는 인물의 개인사를 선형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드러내는 인물 다큐멘터리이면서, 슬라이드쇼 형태로 많이 '공연'되었던 그의 작업물을 넉넉하게 보여주는 종합 예술이기도 한 이 영화는, 아주 재미있는 작품인 동시에 아주 잘 만들어진 영화라는 인상을 남긴다.
시작부터 천명하고 시작한다. 삶을 이야기로 만들기는 쉽지만 삶은 그렇지 않다고. 그 말은 낸 골딘이라는 인물에게서 사진작가, 예술가의 아우라를 일견 걷어낸다. 그의 예술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큐멘터리에 담길 정도의 고고한 인물의 일대기가 아님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그냥 단순명쾌하지도 깔끔하지도 않은 현실을 사는 사람의 이야기임을, 그리고 이 영화를 통해 구성된 이야기가 낸 골딘의 전부일 수도 없음을.

또한 아예 내레이션을 맡을 만큼 감독이 적극적으로 등장하지도 않으며, 아예 카메라 뒤에만 존재하며 표면에 등장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중간중간 아주 작은 순간에만 등장함으로 그 장면들을 주목하게 한다. 낸 골딘의 목소리도, 감독의 목소리도, 우리의 목소리는 어디까지 이야기로 정리될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한다. 이야기 뒤에 펼쳐진 삶을, 현실을 놓치지 않게 한다.
이 영화를 보고 나와, 수많은 주제로 가닥가닥 이어지는 생각거리들을 자분자분 펼쳐 보면서 생각한다. 영화에서 보여준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고민하고 논의하는 데에서만 감상이 끝날 수 없다고. 이 감상은 결국 삶으로 이어질 것이다. 살아있는 영화들은 이렇게 우리를, 살아있게 한다. 살아가게 한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의 초청으로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영화는 5월 15일에 개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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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박강아름 결혼하다(2021)> 리뷰
《박강아름 결혼하다(2021)》는 정직한 이름표를 단 자전적 다큐멘터리다. 영화를 감상하기 전, 우리는 제목으로부터 몇 가지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주인공이 박강아름이라는 사람이라는 것, 그가 결혼을 했다는 것, 이에 따라 다큐멘터리의 테마는 ‘결혼’이라는 점. 그런데 재미있는 건, 결혼 생활에서 나타나는 일을 기반으로 하하호호 예쁜 프랑스 풍경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3유로 커피를 사치라고 부르는) 적나라한 삶의 단편을 엮어낸다는 점일 것이다. 그렇게 감독이자 출연진인 박강아름은 자신만의 방식과 시각으로 왜 자신이 결혼을 했는지를 추적해보고, 결혼이란 대체 무엇인지를 질문한다.
거대한 시놉시스가 있는 것은 아니나, 다큐멘터리의 특성상 매분 매 초를 관객이 관람하며 함께 겪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고작 몇 마디 문장으로 다큐멘터리의 모든 것을 담아내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한 시도이겠으나, 짤막하게 소개하자면 영화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감독인 박강아름은 남편과 함께 프랑스에서 생활하며, 자신의 학업을 이어간다. 부부 중 불어에 더 능통한 사람인 그가 행정과 경제를 담당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남편인 정성만은 가사를 (그리고 훗날 육아가 추가된다) 맡는다. 성만에게 카메라가 돌아가고, 자기소개를 해달라고 요청하자 그는 나는 식모입니다, 식몬데 무슨 이름이 있어요, 정도로 대답하는 건 코믹하게 보이나 분명 유의미한 장면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앞날을 위해 프랑스 이주에 참여하였으나 언어가 통하지 않는 낯선 땅에서 성만의 세계는 자꾸만 좁아지며, 이것이 안쓰러운 아름은 그에게 일주일에 한 번 문을 여는 ‘외길 식당’ 운영을 제안한다. 이 외길 식당은 이사를 비롯한 기타 여러 사유로 인해 시즌제로 운영된지라 두 사람이 프랑스에 있는 내내 운영된 것은 아님에도, 성만에게 분명한 활력소가 되어주었다. 자, 이런 상황에서 아름은 임신한다. 아이가 생겼다. 보리는 귀여운 두 사람의 아이이지만 여전히 성만이 독박 가사와 독박 육아를 지속한다. 이따금 부침이 있긴 하지만 두 사람의 '평범한' 일상은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
굳이 엄청난 통계를 들이밀지 않더라도, 우리는 지금까지의 세상에서 보지 못했던 일들이 앞으로 펼쳐지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다. 가부장적 제도 하에서 정상 가족이라 불렸던 시스템이 해체되고 있으며 가족 내 구성원의 권력구도가 기존과는 다르다는 걸, 그리고 이런 변화의 속도는 가속하리라는 것을. 예컨대 아름-성만 부부가 프랑스로 오게 된 것 역시 이주의 여성화(Feminization of Migration)에 부합하는 사회적 현상 중 하나이기도 하다. 다만, 감독이 보다 집중하는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래. 결혼 말이다. 남들 다 한다는 결혼, 안 한 사람에겐 왜 안 하냐는 말이 쉽게 따라붙는 이 제도. 결혼은 대체 뭘까?
비혼을 외치는 청년층이 많아진다는 점, 정상가족의 해체가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점, 다큐멘터리에 등장한 외길 식당의 손님들처럼 결혼을 위한 이주 역시 발생한다는 점에서 한국의 가족 가치관은 분명 예전과 다르다. 다만, 완전히 달라졌다고 말하긴 어렵고, ‘부분적으로 탈전통적으로 변화(최연주, 문정희, 안정신 (2020))’ 했다고 하는데, 아름과 남편 성만의 관계에서도 그러한 요소를 엿볼 수 있다. 두 사람의 관계는 기존 성별분업의 단순한 젠더 역전에 기인하고 있어, 기존 시스템의 젠더 관계를 완전히 해체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했듯 성만은 자신을 ‘식모’로 규정하며 돌봄/가사 노동을 담당하는데, 이 과정에서 그의 돌봄/가사노동은 육아휴가 등에서 비롯된 ‘일시적’인 요소가 아니다. 그렇기에 그는 스스로를 전통적인 ‘아버지’로 규정하기보단 ‘어머니’ 포지션으로 인식하는 듯 보인다.
반면 아름은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펀딩을 받는 등 경제적 책임을 이끌고, 프랑스인에게도 어려운 관공서 서류 제출 등을 신경 쓰는 역할을 맡는다. 또한 남편을 위해 외길 식당을 먼저 제안했음에도 좋은 식재료를 쓰는지라 늘 발생하는 적자를 떠올리고, 매 순간 가계부를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하며 성만과 싸우기도 한다. 이러한 관계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인 보리가 태어난 후에도 지속된다. 물론 아름 역시 가사노동에 일부 참여하지만, 주 양육자 포지션에 위치한다고 말하긴 어렵다. 이러한 모습에서 나는 김경민(2021)이 인용한 러딕의 구절을 일부 반복하고 싶다. 그러니까, 여성은 '생물학적으로 자녀를 낳는 경험’을 선택적으로 할 수 있으나 ‘자녀 양육자로써 운명 지워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름은 그렇게 전통적인 ‘어머니’의 모습을 답습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난한 일상 속에서 아름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왜 결혼을 하려 했을까? ‘아버지’라는 위치에 더 가까운 – 그러니까 집안의 ‘가장’인 그는 거듭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왜 비혼주의자였던 성만과 결혼했고, 아이 계획을 세울 때 침묵한 성만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을까…….
그가 방황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 일부분은 아름의 과거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최연주, 문정희, 안정신 (2020) 은 개인의 가족가치관은 개인 자신의 성장 경험에서 발생한다 말한 바 있다. 즉, 자라는 동안 매일 봐온 가족/부모의 가치관 등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면화하여 미래의 결혼 여부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아름 역시 이러한 부분을 설명하고자 함인지, 영화 내에서 자신의 성장과정을 짤막하게 언급한다. 남동생에게만 집중한 아버지, 아버지에게 관심을 끌고자 애썼던 어린 소녀에 대해서. 하지만 오로지 과거에서만 대답을 찾아야 할까? 어쩌면 일찍 세상을 뜬 아버지의 빈자리를 보며 저도 모르게 안정적인 가정을 꿈꿔왔을지도 모르지만, 아름은 과거에서만 이유를 찾지 않는다. 그는 외길 식당 시즌 2를 계획하고 부족한 시간을 쪼개서 손님들에게 묻는다. 짧은 시간 동안 신선한 시각과 사유가 점차 흘러들어온다. 프랑스의 팍스(PACs)라는 새로운 개념도 그렇게 영화에 등장했다. 그러나 아름은 여전히 자신의 물음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결혼이란 '남녀가 정식으로 부부 관계를 맺'는 것이라지만 사회/문화적으로 결혼은 이보다 더 많은 것을 포괄한다. 아름이 말했듯 입덧이란 미디어에서처럼 우아한 ‘우욱’ 정도가 아니었고 개인마다 다른 신체적 증상이었다. 마찬가지로 결혼 역시 미디어에서 비춰주는 양 매일매일 완벽하고 풍성한 생활을 담보하는 사회 시스템이 아니며 연애시절처럼 매양 낭만적일 순 없다. 주례에서도 알 수 있지만, 결혼을 통해 일상을 공유하게 된다는 건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함께해야 한다는 뜻이다. 즐거울 때야 상관이 없겠다만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는 건 어쩔 수 없다는 걸 이성적으로 이해한다 해도 어렵고 짜증이 날 수밖에 없다. 이런 시간이 연애 시절보다 늘어난다는 것. 그것이 어쩌면 결혼의 단면일 것이고, 《박강아름 결혼하다》는 그런 과정을 미화하지 않았다.혼전 합의서를 통해서든 아니든, 합리적으로 가사를 분담하고 경제적 책임감을 공유하는 것은 시간이 갈수록 어려워진다는 점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젠더가 단순히 전복된 관계를 살고 있는 아름-성만 부부가 기실, 처음부터 끊임없이 합의하고 민주적인 가정을 이룩하고나 노력했을지라도 아마 이 과정은 어느 순간부터 중단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 시점은 보리가 태어난 이후일 확률이 높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본이 풍부하지 않은 상황에서 아이를 키울 때엔 너/나를 가릴 시간조차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족의 공동체적 특성이 강조되고 가족 구성원 간의 자원 공유가 미덕으로 수용(나성은 (2014))’되는 동안, 가족 내의 권력관계는 쉽게 기울어지기 마련인데, '사랑'과 '협력'이 캐치 프레이즈로 내걸린 이상 구성원의 기울어진 운동장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는 점차 미뤄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상적인 결혼(생활)은 그럼 무엇인가? 에 대한 내 대답은 '글쎄'이다. 몇 천년 전부터 인류는 이 물음에 대해 대답하려 했지만 여전히 질문을 하고 있는데, 내가 감히 이것이 정답입니다, 하고 무언가를 내놓을 자신은 없다. 정 안되면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읽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일 순 있겠다만, 다큐멘터리와 함께 고민하다 보면 관객은 관객 나름의 대답을 찾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다.
너무 비관적인 이야기만 한 걸까? 아마 영화 내에서 아름이 자신이 겪는 결혼의 특수성을 강조하기 위해 어떤 캐릭터성을 강조/축소하고, 일상을 편집한 측면이 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하여튼 결혼에 대해 환상을 심어주는 멋진 드라마와 영화는 이미 많으니까, 그러한 미디어와(마음에 드는 작품 하나를 마음속으로 떠올리고) 《박강아름 결혼하다》를 동시에 펼쳐 놓고 생각해보자. 결론적으로 결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그 모든 것의 총체라고밖엔 대답할 수 없을 것 같다.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아온 두 사람이 만나 아웅다웅 삶을 일체화 시키며 추억을 쌓고, 헤어질 수 없는 사이로 변모하는 과정 말이다. 외길식당의 손님이 말했듯 자신의 선택임에도 불구하고 이게 다 너 때문이라고 원망하는 과정이 수반될 수밖에 없을지라도, 결혼이란, 관계의 한 자락에서 낭만에 취해 이런 선택이 있었기에 내가 네 곁에, 그리고 네가 내 곁에 있나보다 대화할 수 있는 삶의 한 양태가 아닐지.
★★★
*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한 후, 주관적 견해에 따라 작성되었습니다.
* 참고문헌
김경민 (2021). 베트남 결혼이주여성의 ‘좋은 엄마’ 되기: ‘어머니됨(mothering)’ 인식과 실천에 대한 고찰. 비교문화연구, 27(1), 5-56.
나성은 (2014). 남성의 양육 참여와 평등한 부모 역할의 의미 구성. 페미니즘 연구,14(2), 71-112
최연주, 문정희, 안정신 (2020). 미혼 남녀의 가족건강성과 결혼의향의 관계 : 가족가치관의 매개효과. 한국지역사회생활과학회지, 31(4), 663-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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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 소녀가 자란다
이번 주말 태풍 링링이 왔다.(이 글의 초안은 2019년 9월에 작성 됐다.) 집 안에 틀어박혀 잠옷도 안 갈아입은 채로 커피를 내리고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연주하는 프로코피예프와 창 밖의 바람 소리를 동시에 들었다. 몇년에 한번 꼴로 유난히 많은 피해를 남기는 이 9월 태풍이 지나가고 나면 얼마나 청명하고 맑은 가을 하늘이 되어있을지 상상한다.
가을은 아무리 생각해도 여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관문 같다. 매년 느끼지만 겨울은 깔끔히 사라지지 않고 3월이고 4월이 될 때까지 차가운 바람으로 길게 꼬리를 드리우며 물러가는데, 여름은 하룻밤을 기점으로 언제 그런 계절이 있었냐는 듯 자취를 감춰 버린다. 그래서 어느 날 현관문을 열었을 때 갑자기 차가운 바람이 살갗을 때리면 허망한 기분마저 든다. 더위를 피하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쓰며 한 분기를 살다가 찬바람이 불기 시작해야 갑자기 그 계절을 그리워하며, 여름이 어떤 의미였는지 차분히 돌아보게 된다.
사람들은 저마다 계절에 대해 총체적 감각을 버무린 하나의 이미지로 기억한다. 나에게 몇년 전부터 여름은 영화 <콜럼버스> 속 계절이었는데, 오늘은 거기에 <벌새>까지 더해졌다.
<콜럼버스> 속 케이시는 고향인 콜럼버스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떠나고 싶어한다. 콜럼버스의 모더니즘 건축물들을 사랑하고 아직은 자신이 엄마를 돌봐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 도시에서의 삶이 얽매여 있는 것인지 자신이 선택한 것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는다. 답답하기도 하고 괜찮기도 한 일상 속에서 그녀는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 진을 우연히 만나며 새로운 기회를 마주치게 된다. 가족, 현재의 일상, 지나온 삶들과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해 고민하는 두 사람은 푸른 잔디밭과 울창하게 잎사귀를 드리운 나무 아래에서 사리넨의 건축물을 바라본다. <콜럼버스>는 두 주인공 케이시와 진이 각각 선택을 하고 앞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성장 서사인 동시에, 두 사람이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선택을 격려한다는 점에서 버디 무비이기도 하다. 두 동료는 뜨거운 여름의 열기와 쏟아지는 장대비를 머금고 있는 콜럼버스의 녹음 속에서 앞을 향해 나아간다.
<벌새> 속 중2 은희의 여름은 1994년 대치동이 무대다. 은희는 보편적이고 평범한 소녀다. 미도상가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부모님과 언니와 오빠와 대치동의 아파트에 살고 있다. 보편적인 은희의 이야기는 가능한한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묘한 향수와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나는 은희처럼 흰 반팔 블라우스와 체크 치마로 구성된 여름 교복을 입고, 머리는 학칙에 맞춰 단발로 자르고 발목을 덮는 흰 양말과 장식이 없는 검은 구두를 신고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영화에 나온 진선여중과 대청중을 졸업한 친구들과 함께 고등학교를 다녔고,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에는 미취학 아동이어서 기억이 희미하지만 동시에 삼풍 백화점과 세월호라는 사회적 비극의 간접 목격자다.
은희의 구체적인 일상은 그래서 비슷한 시대를 지나온 이들의, 그리고 그 나잇대를 지나온 모두의 성장 이야기다. 영화의 끝에서는 여름이 지나 가을이 오고, 춘추복을 입은 여러 소녀들의 얼굴이 비춰진다. 10대 소녀들에게 세상은 어떤 존재일까. 이해할 수 없고, 폭력적이고, 갑갑하지만 때로는 숨통이 트이는 순간이 있고, 즐겁고 행복하고, 그러다 또 갑자기 비극적이기도 한 세상. 비단 10대 소녀들에게만 그런걸까? 대학생인 영지에게도, 아이를 셋 낳은 숙자에게도, 여전히 세상은 그런 곳이다. 살아남은 우리는 그렇게 복잡한 세상을 응시하며 자라간다.
누군가는 여름을 축제의 계절로 기억할지도 모른다. 여름밤의 낭만이나 해변의 불꽃놀이로 기억할지 모른다. 케이시와 은희처럼, 나에게 여름은 도시의 녹음 속에서 차분하게 주시하는 계절이다. 자신을 주시하고 세상을 주시하는. 뜨거운 햇빛과 숨막히는 수분을 양분삼아 소녀들은 나무처럼 가만히 자라난다. 계절이 바뀌면서 햇빛은 한층 기울고 습도는 사라진다. 갑작스러운 찬바람에 당혹스럽고 허전한 기분이 들면 그제야 알 수 있는 것이다. 여름 사이 우리의 키가 한뼘 자라있음을.
* 본 콘텐츠는 브런치 Good night and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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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AN 데일리] 호수, 유리창, 거울로 그려낸 데칼코마니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감독] 카롤린 링 Karoline Lyngbye
출연] 미켈 폴스라르 Mikkel Boe FØLSGAARD, 마리 바크 한센 Marie BACH HANSEN
시놉시스
스틴과 타이트는 어린 아들 네모와 함께 코펜하겐의 도시 생활을 떠나 스웨덴의 한 고립된 숲으로 향하고, 그곳에서의 삶을 팟캐스트 녹음을 통해 기록하며 자신들의 진정한 모습을 찾고자 한다. 그러던 중 자신들과 똑같은 모습의 커플을 호수 건너편에서 발견하고, 곧 원한과 이기심, 욕망으로 뒤덮인 자신들의 자아와 마주하게 된다.
도플갱어를 마주한다면?
독일에서 기원한 미신 '도플갱어(Doppelgänger)'. '나'와 똑같은 사람이 존재하며, 그 사람을 만나면 자신은 죽는다는 내용으로 유명하다. 괴테도 자기랑 똑 닮은 사람을 본 적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을 정도다. 그 외에도 다양한 전승이 있지만, 핵심은 도플갱어를 만나는 게 악운의 전조라는 점이다.
사실 현실적으로 도플갱어는 존재할 수 없다. 생김새부터 DNA까지 전부 같은 사람이 존재할 가능성은 과학적으로 0.1%가 채 되지 않는다. 만에 하나 자기랑 똑같이 생긴 사람을 본다 하더라도 이는 정신 질환 증상이라고 보는 게 더 합리적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도플갱어는 두려움의 대상이다. 존재할 수 없는 존재를 봤다는 공포와 내가 미쳐버린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나를 감쌀 테니.
카롤린 링비의 장편영화 데뷔작 <수퍼포지션>은 그 공포와 두려움을 물고 늘어진다. 이 감정을 철저히 해부한다. '나와 똑같은 사람, 내 남편과 똑같은 남자, 내 아들과 똑같은 아이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면...?'이라는 오싹한 상상을 원동력 삼아 굳건히 나아간다. 이 접근법은 생각보다 신선하다. 원초적인 감정에 충실히 몰두할 뿐, 좀처럼 딴 길로 새지 않기 때문이다.
호수가 두려운 이유
<수퍼포지션>의 지향점은 첫 장면부터 드러난다. 영화는 아름다운 풍경으로 시작한다. 북유럽 특유의 길고 가는 삼림이 둘러싼 호수가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호수를 보는 듯한데 모양이 평소와 다르다. 파란 하늘이 왼쪽, 호수가 오른쪽에 있다. 위아래가 아니라. 화면은 마치 데칼코마니 같다. 잔잔한 호수에 하늘이 비치면서 좌우가 똑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호수의 역할이 흥미롭다. 첫 장면 이후 호수는 한동안 아무 일도 안 한다. 스틴과 타이트가 지내는 집의 예쁜 배경을 할 뿐이다. 그러나 스틴이 호수 건너편에서 자기 가족 외의 다른 사람을 발견하자 호수에게는 새로운 역할이 생긴다. 도플갱어가 있다는 의심. 곧 두려움이다.
이에 더해 영화는 호수를 다른 이미지로 끊임없이 바꿔낸다. 유리창이 대표적이다. 일가족이 숲 속 집에 들어설 때, 그들이 집 안에서 요리하거나 글을 쓸 때, 싸우는 순간까지. 카메라는 주인공과 주인공이 반사되어 비치는 모습을 같이 중심에 둔다. 그 덕분에 알 수 없는 호수의 두려움은 손쉽게 영화 전반으로 전염된다. 이는 도플갱어의 존재를 인지하기까지 초중반부의 흐름이 상당히 강한 흡인력을 자랑하는 이유다.
도플갱어의 진짜 의미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나와 똑같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 그 때문에 두려울 수 있다.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그런데 정확히 무엇이 두려운 걸까? 영화는 호수가 잠시 역할을 하지 않는 사이에 그 답을 미리 일러준다. 영화 전반을 사로잡은 두려움은 단순히 도플갱어 때문이 아니다. 도플갱어를 만나 알 수도 있는 답 때문이다. 바로 자기 자신에 관한 진실이다.
첫 팟캐스트 녹음 때부터 스틴과 타이트는 계속해서 갈등을 빚는다. 이번 기회에 서로에게 솔직해지자는 부부. 그러나 그 솔직함의 의미가 다르다. 스틴은 알몸을 보여주듯이 솔직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반대로 타이트는 필요한 일에 한해서만 솔직하면 된다고 말한다. 이 갈등은 점점 커지고, 서로를 비난한다. 서로 무책임한 남편과 아내라고.
이때 도플갱어의 등장은 거울을 보는 것과 같다. 지금 자기 모습이 어떤지, 부부 관계는 어떠한지, 아이에게는 어떤 부모인지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기회다. 처음에 서로를 경계하던 도플갱어 부부가 싸우는 대신 서로 대화를 나누며 인생을 공유하는 이유다.
더 나아가 자기 모습을 보고 생각을 바꾼 사람과 자기 모습을 고집하는 사람의 운명이 갈리는 이유다. 거울을 보고 진짜 솔직해질 수 있는지, 아니면 그 거울에 비친 모습까지도 왜곡하며 외면할지. 자기 과오와 결점까지도 끌어안고 살아갈 용기가 있는지 없는지. <수퍼포지션>이 진정으로 말하고 싶은 메시지다.
다소 빛이 바랜 도전
아쉽게도 <수퍼포지션>은 초중반부의 흡입력을 마지막까지 유지하지 못한다. 이유는 두 개다. 외적 요인과 내적 요인이 있다. 우선 소재와 접근법의 참신함이 빛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물론 도플갱어와 거울의 이미지를 활용해 주인공의 심리를 파헤친다는 접근 자체는 충분히 시도할 수 있는, 좋은 소재다.
문제는 최근 들어 멀티버스 소재를 꺼내든 영화가 너무 많다는 것. 멀티버스 영화도 대부분 '또 다른 나'와의 만남을 통해 주인공의 인생을 들여다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수퍼포지션>의 도플갱어 이야기가 자기만의 한 방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다.
이에 더해 굳이 설명을 덧대는 약간의 욕심도 아쉽다. 영화는 도플갱어끼리 만난 이후에 상황을 해석하려 한다. 타이트는 자기가 미친 거라는 의견을 내기도 한다. 그러다가 하나의 답이 도출된다. '중첩'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제목 '수퍼포지션'이다. 평행세계가 겹쳐진 결과 도플갱어끼리 만나는 상황이 생겼다는 설정이다.
그러나 이 설정 때문에 영화의 개성은 희석된다. <수퍼포지션>의 최대 장점 중 하나는 일반적인 멀티버스 영화와는 달리 스릴러 내지 호러 영화의 분위기를 끌고 간다는 점이다. 명확한 설명 없이 도플갱어를 일종의 미스터리로 남겨두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또 북유럽, 그것도 숲 속을 배경으로 삼다 보니 유달리 스산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일종의 설명, 특히나 SF적인 설정이 붙어 버리니 본래 분위기나 색깔은 약해지고 만다.
Acceptable 무난함
고요한 호수를 넘나들며 펼쳐지는 나와 나의 싸움
상영 일정
7/2 17:00 - 18:45 CGV소풍 9관
7/6 19:30 - 21:15 부천시청 어울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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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뇨 아빠가 인간이었을 때 직업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자타공인 '지브리 스튜디오' 혹은 '미야자키 하야오' 덕후다. 일본 방송에 지브리 매니아로 두 번이나 방송에 나간 적도 있다.
영상을 보면서 환경을 생각하게 된 것은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의 영향이 클지도 모른다.
<벼랑 위의 포뇨>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하울의 움직이는 성> 이후에 4년 만에 들고 온 신작이었다. 은퇴한다고 했었는데 새로운 작품이 나온 것도 기대되었지만 이번에는 어떤 내용으로, 어떤 캐릭터로 우리에게 이야기를 전달해 줄까 매우 기대가 되었다.
포뇨를 본 뒤, 어른을 위한 동화를 기대하고 있었던 팬과 평론가들에게는 실망감이 있었던 모양이지만 나는 그가 여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마음이 든 것은 귀여운 포뇨와 소스케 때문이 아니라 포뇨의 아빠 때문이었다.
<벼랑 위의 포뇨>는 호기심이 어마어마한 물고기 소녀 포뇨가 육지의 소년 소스케를 만나면서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아마 인어공주를 재해석하여, 혹은 모티브로 하여 만든 이야기일 것이다. 이 애니메이션 역시 다른 애니메이션과 마찬가지로 '과거로의 회귀', '자연의 회복'에 대한 이야기가 기본으로 깔려 있었다. 그 깔려있는 스토리는 포뇨의 아빠가 끌어가고 있다. 포뇨의 아빠라고 부르고 있지만 엄연히 '후지모토'라는 이름이 있으니 이제부터는 그 이름을 불러줘야겠다.
이제부터 하는 이야기는 리뷰라고 하지만 상상에 기반한 소설이라고 봐도 무관할 것 같다. 후지모토는 인간이었다. 아니, 아직까지 바닷속에서 편하게 숨을 쉬지 못하는 인간이다. 하지만 지금은 인류애를 잃고 바다와 지구를 캄브리아기로 돌리기 위해 생명의 물을 모으고 있다. 인간인 소스케를
좋아하는 딸 포뇨가 육지로 가는 것을 극구 반대하는 그는 딸바보, 극성 아빠라며 수많은 욕을 먹었지만 그가 그렇게 극단적으로 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해주는 이는 없었다. 애니메이션에서 포뇨의 등장은 쓰레기가 가득한 바다로부터 시작한다. 인간들은 바다에 쓰레기를 마구 버렸고 그 쓰레기를 치우기 위해 배는 그물을 이용해 바다의 바닥을 긁어낸다. 쓰레기만 치우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하다 보니 바다의 생물들은 쓰레기 때문에 피해를 받고, 쓰레기를 치우는 과정에서도 또 피해를 받는다. 인간으로 인해 자연이 얼마나 더러워졌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후지모토가 육지로 올라갔을 때 깨끗한 물을 주위에 뿌리는 행동이나(물론 제초제로 오해받았지만) 소스케와 차를 타고 가는 포뇨를 따라가면서 바닷속의 쓰레기에 계속 맞는 모습으로도 확인할 수도 있다. 후지모토가 더러워진 모래와 뻘에 질색팔색 하는 것은 덤이다.
후지모토가 말하길 그는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했다고 했다. 그는 언제부터 인간이길 포기했고, 언제 바다의 여신을 만나 사랑에 빠졌을까? 정말 사랑에 빠진 것일까? 이는 그는 말한 것으로 조금은 추론해 볼 수 있다.
"인간의 물과 공기는 더럽고 인간은 어리석은 생물이다. 인간은 바다에서 생명을 빼앗아 갈 뿐이다."
"나도 한때는 인간이었고, 인간을 그만두기 위해 얼마나 노력..."
아마도 그는 어느 사건으로 인해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그 사건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사건으로 바다의 여신과도 만나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인간으로 인해 죽을 위기였으나 바다의 여신이 구해줬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포뇨의 현재 상황을 논의하기 위해 바다의 여신을 만나야겠다고 다짐했을 때는 그는 떨린다며 혼잣말을 했다. 그 떨림은 과연 설렘이었을까? 아니면 두려움이었을까? 이 의문 역시 그가 바다의 여신을 만났을 때 그녀의 손길이 그에게 닿았을 때 확신 쪽으로 가까워졌다. 그 모습은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기보다는 두려움 혹은 경이로움에 옴짝달싹 못하는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바닥에 떨어진 생명의 물을 먹으러 바다 생물들이 집 안으로 들어오자 그는 바다의 결계로 인해 생태계의 균형이 무너지는 것을 걱정한다. 후지모토는 인간이 망하거나 죽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 균형을 이루고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인간이 너무 우점해 있고, 그로 인해서 다른 자연 생태계의 균형이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이 바다에서 생명을 빼앗아 간 것이 원인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가 지구를 캄브리아기로 되돌리기 위해 생명의 물을 모아놓는 우물의 방의 번호는 1907이다. 1907년은 환경운동의 역사에 한 축인 '레이첼 카슨'이 태어난 해이다. 방 안에 있는 병에 쓰인 숫자인 1957년에는 영국에서 처음 시작한 민간 환경운동 단체인 '시빅 트러스트'가 만들어졌고, 세계기상기구가 주관하여 체계적으로 오존량을 관측하기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또 하나의 병의 숫자인 1871년은 찰스 다윈은 식물학자이자 자연주의자 친구인 조셉 달톤 후커에게 진화론의 가설을 편지에 써서 보낸 해이면서 '인간의 유래'라는 책을 출판한 해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가 있는 것인지 후지모토가 언제부터 인간이 아니게 된 것인지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 시간이 오래되었다면 후지모토는 환경과 관련된 역사적인 사건이 있던 해의 생명의 물을 소중히 모아 놓았을 것이다.
결국 후지모토도 아버지이기는 한 것인지 자녀인 포뇨의 성장 과정을 논의하기 위해 바다의 여신을 만난다. 포뇨가 소스케의 피와 오랜 시간 모아놓은 생명의 물을 먹어서 파워업되었다고도 알린다. 5살의 사리 분별 못 하는 않는 어린아이에게 무서운 무기를 맡긴 것 같은 말 그대로 긴급상황이다.
하지만 바다의 여신은 딸과 인간들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 마법의 힘이 가득 차 있고, 데본기의 바다로 돌아간 것 같다며 그 상황을 즐기고 좋아한다. 만약에 후지모토가 바다의 여신을 사랑해서 오로지 그 이유로 생명의 물을 모으고 있었다면 여신의 이 한 마디는 뿌듯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포뇨를 걱정한다. 인간이 싫다면서도 '브륀힐트'라는 딸의 이름을 놔두고 소스케가 지어준 이름인 '포뇨'를 이름으로 불러주는 것을 보면 그의 성격을 알 만도 하다. 후지모토는 세계의 멸망을 걱정한다. 실제로 인류애를 잃은 것이라면 그는 세계의 멸망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딸 덕분에 그 멸망을 앞당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걸 바라지 않았다. 다만 사람으로 인해 훼손된 자연이 그 옛날 과거로 돌아갔으면 하고 있었다.
딸이 사랑을 얻는 것에 실패해서 죽을까 봐 걱정하는 것도 후지모토다. 엄마인 바다의 여신은 '원래 물거품이었는데 뭐'라면서 아주 쿨하게 실패해도 상관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아무리 남은 자식이 많더라도 오래된 마법에 자식의 생사를 결정하도록 하는 건 너무 매정한 엄마다.
소스케와 포뇨를 약속의 장소로 데리고 가려고 할 때도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토키 할머니는 다른 할머니들은 속아서 갔다고 했지만 후지모토는 그냥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회유책을 썼을 뿐이었다. 그리고 할머니들의 다리가 나아서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이동하는데 더 편했기 때문에 그 방법을 선택했을 것이다.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면 안 되는데 머리 좀 길고, 스모키 화장을 했고, 화려한 옷을 입고 귀걸이를 했다고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한 후지모토는 가엽기까지 하다. 그리고 요놈 딸내미 아무리 남자 친구가 좋아도 그렇지 아빠한테 물이나 뱉고 있으니 약간의 무력은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시간이 없었다. 지구에 가까이 온 달 때문에 지구의 중력은 달라졌고, 쓰나미가 계속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사실 포뇨 자체가 쓰나미라는 해석이 많다.
결국 소스케의 사랑이 포뇨를 지켰다. 그리고 지구와 세계를 지키게 되었다. 후지모토는 인간의 소스케의 배를 찾아주고, 인간이 소스케에게 악수를 청한다. 지상의 공기와 땅을 더러워하던 그인데 정말 큰 변화이다. 인간이길 포기하기까지 꽤 많은 노력을 들였다는 그이기 때문에 사실 안타깝기도 하다. 그는 쓰나미 즉 자연재해로 인해 자연의 위대함과 두려움을 다시 한번 알게 되었을 것이고 과거로의 회귀가 균형을 맞추는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인간들의 삶의 회복을 위해 '급진주의자'라고 볼 수 있는 후지모토는 한발 물러섰다. 딸의 행복을 위한 아빠의 마음이었을 수도 있으나 남편을 부르는 리사의 오른쪽에 보이는 산에 꽂힌 송전탑을 보면서 생태주의자이자 환경운동가의 입장에서 볼 때는 마냥 해피엔딩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캄브리아기로 바꾸려고 했었는데, 그보다 이후 시대인 데본기로 바뀌어도 인간이 살기 어려워진다는 것을 안 후지모토는 다른 계획을 세웠을지도 모른다. 이런 일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아 했기 때문이다. 미루어 짐작건대 후지모토는 환경운동가였던지, 생물학자였던지, 역사학자였을 것이다. '별의 중력장 붕괴 제2단계' 같은 걸 얘기하는 걸 보면 과학자였을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 그가 인류애를 잃고 지구와 바다를 과거로 회귀시키고 싶게 된 사건은 결국 알지 못한다. 사실 지금의 행보와는 전혀 상관없는 과거를 가지고 있고, 바다의 여신이 심심할까 봐 혹은 자신의 마력을 높이기 위해 후지모토에게 일거리를 준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보니 그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었는지 바다의 여신을 만나기 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생각보다 크게 중요하지 않다. 다만 인간들 중에도 그와 같은 마음으로 자연과 인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후지모토도 겪어봐서 알겠지만 환경을 지키고 보호하는 것은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으면 가족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만큼 의외로 외로운 싸움이기 때문이다.
후지모토를 포함한 이 온 세상 환경운동가들, 힘내시고 평화가 깃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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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을 살아가는 누구나에게 위로를 전하는 영화 <소울>
영화 내용을 아예 모른 상태에서 오로지 포스터만 보고 저 영화를 봐야한다고 생각한 작품 <소울>. 디즈니와 픽사가 다시 만났다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만 아무것도 알아보지 않고 무조건 보러간 선택은 옳았다. 귀여운 건 역시나 옳았고, 디즈니와 픽사도 역시나 옳았고, 애니메이션도 완벽히 옳았다.
영화 <소울> 시놉시스
나는 어떻게 나로 태어나게 되었을까? 지구에 오기 전 영혼들이 머무는 태어나기 전 세상이 있다면? 뉴욕에서 음악 선생님으로 일하던 조는 꿈에 그리던 최고의 밴드와 재즈 클럽에서 연주하게 된 그 날, 예기치 못한 사고로 영혼이 되어 ‘태어나기 전 세상’에 떨어진다.
탄생 전 영혼들이 멘토와 함께 자신의 관심사를 발견하면 지구 통행증을 발급하는 태어나기 전 세상. 조는 그 곳에서 유일하게 지구에 가고 싶어하지 않는 시니컬한 영혼 22의 멘토가 된다.
링컨, 간디, 테레사 수녀도 멘토되길 포기한 영혼 ‘22’. 꿈의 무대에 서려면 ‘22’의 지구 통행증이 필요한 ‘조’. 그는 다시 지구로 돌아가 꿈의 무대에 설 수 있을까?* 해당 내용은 네이버 영화를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캐릭터가 마냥 착하지 않아서 좋았다
영화 소울에서 가장 좋게 생각했던 부분은 주인공 ‘조’가 마냥 착한 캐릭터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착한사람이 주인공이고 나쁜사람은 악당으로 묘사되는 이분법 구도를 벗어나서 조가 자신의 인생을 본인이 생각하기에는 굉장히 열심히 꿈을 쫓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서 어찌보면 너무나도 이기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것을 영혼 22가 조의 몸에 들어가면서 보여준다.
단골 미용실 가게의 주인장과 대화를 하며 그제서야 미용실 가게의 주인의 꿈이 미용업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되고, 엄마의 진심을 알게되며, 자신의 제자의 엇나간 마음 역시 되돌려 놓는다.
이처럼 기존의 ‘조’의 인생이 조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기준대로 열심히 살았던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사람 눈에는 너무 자신의 삶만 쫓고 다른 사람의 인생에는 관심이 없었던 인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을 통해 조는 앞으로 같이, 공유하는 삶의 모습으로 나아가지 않을까 하는 미래가 그려졌다.
맹목적인 목표와 목표 달성 후에 찾아오는 허탈감
한끗차이란 이런 것일까? 사람들이 무엇엔가 열중해서 마치 다른세계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와 그 느낌을 받기 위해 집착하는 모습을 보일 때는 정말 한끗차이라는 점을 영화에서는 잘 보여주고 있었다. 황홀경과 집착은 같은 공간에 있지만 하나는 아름답게 하늘에서 다른 하나는 땅만 보며 같은 단어만 외치는 괴물로 표현되고 있었다.
살다보면 어느샌가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꿈 자체에 맹목적으로 집착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얻는 즐거움과 교훈은 잊어버린 채 오로지 맹목적인 목표의 추구는 사람을 파멸로 이끌기 마련이다. 그러한 모습을 영화 속에서는 무언가에 집중하며 황홀경에 있는 사람과 대조시키면서 맹목적인 목표의 추구는 옳지 않다는 것, 그리고 자칫 잘못하면 순식간에 그 목표가 맹목적으로 뒤바뀔 수 있는 것을 표현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토록 원하던 목표를 이뤄냈을 때 찾아오는 허탈감 역시 엿볼 수 있었다. 목표를 이뤄낸 순간에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할 수 있겠지만 달성하고나면 솔직히 허탈감이 밀려온다. 만족감도 있지만 순간적인 이 기분을 위해서 내가 이토록 고생을 했어야 했나? 하는 감정처럼 말이다. 그리고 목표를 이룬다고 해서 현실은 바로 바뀌지 않는다. 그대로인 경우가 많다. 이거 하나만 하면 뭐든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 그것은 이루기 전의 환상 속 자신의 모습일 뿐 현실은 과거와 별반 다른 것은 없다. 이런 기분을 토로하는 조에게 최고의 트럼펫 연주자는 ‘내일도 여기로 출근하는거지’라는 대사를 날린다. 자신이 무언가를 성취했다고 해서 바로 무언가가 달라지지 않은 현실을, 그리고 현실은 묵묵히 살아가는 것임을 알려주는 대사였다.
현재의 흐름에 맞는 주제
21세기를 나나태는 대표적인 단어를 선택하라 한다면 ‘소확행’을 꼽을 것이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의 줄임말이다. 이 단어 탄생의 이면에는 과거처럼 큰 성과를 내기 힘든 이 사회 속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사람들은 포기를 강요당하는 사회의 어두운 면을 내포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일반 중산층이 아무리 노력해도 혼자의 힘으로 서울에 있는 아파트를 구할 수 없듯이 사람들은 현대 사회에서 포기를 강요당하면서 행복의 초점을 무언가 이뤄내는 큰 성가, 성취 중심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존재에 기쁨을 느끼고, 사람들과 교감하는 감정으로 옮겨갔다.
이러한 현대 사회의 흐름은 영화 소울의 주제가 너무나도 일맥상통했다. 치열한 경쟁 사회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인정하고 성공을 해야 인생을 잘 산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떨어지는 눈에, 여유롭게 마시는 차 한 잔에 기쁨을 느끼며 살아가는 삶을 지향하고 있었다.
특히, 이러한 주제를 조가 마지막으로 피아노를 치며 어떠한 대사 없이 오브제들과 감미로운 선율만으로 전해준다. 이 때 필자는 굉장히 신기한 경험을 했다. 이 장면에서 눈물을 엄청 많이 쏟았는데 이성적으로 완벽하게 주제가 정리된 상태가 아니었음에도 감정이 먼저 반응해서 이렇게 이유도 모른채 눈물이 왈칵 쏟아진 것 처음이었다. 이후에 조가 내레이션을 통해 한 번 정리를 해주고 나서야 이성적으로 이해가 됐다. 이성적으로 이해가 된 다음에야 감정이 발동하고 눈물이 나던 필자였는데 그 장면 속 오브제와 피아노 선율의 조합을 아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영화 소울은 인생의 초점이 what이 아니라 how에 맞춰져 어떠한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 내 삶의 방향성은 무엇인지, 고민을 하게 만들고 현재의 선택에 위로를 전해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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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키 17이 아닌 '18을 통한' 희생과 애도의 메시지
봉준호 감독의 <미키 17>이 개봉한 지 일주일 정도가 지났다. 당연하게도 영화에 대한 평이 이리저리 갈리고, 관객 수를 얼마나 유치했는지에 대한 분석과 전망이 줄짓고 있다. 홍수정 평론가가 “탁월한 이야기꾼이 몰려드는 관중 앞에서 점점 더 몸에 힘을 주는 모습을 볼 때 안타까움을 느낀다”라고 했는데,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는 대목이다.
<미키 17>은 행성을 테라포밍하는 과정에서 일종의 ‘”실험 쥐”처럼, 먼저 우주 밖으로, 행성 밖으로 나가 죽는 것이 임무인 ‘미키(로버트 패틴슨)’를 두고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미키는 ‘익스펜더블’이라는 직책을 맡고 각종 생체 실험, 일종의 “고기 방패”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봉준호의 <미키 17>은 그런 미키의 직업으로부터 다양한 철학적 질문을 끌어낸다. 아무리 미키가 지구에서 큰 빚을 지고서 도망을 다니는 신세라도, 익스펜더블 임무를 미키가 자원한 것이라도 그 반복되는 죽음과 복제의 과정이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시장 경제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을까?
미키의 죽음은 매우 자연스럽고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미키가 죽으면 죽을수록 테라포밍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더욱 커진다. 인류의 새로운 정착을 위해서 미키의 죽음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인류의 정착과 미키의 죽음은 자연스레 불가분의 관계에 놓인다. 미키가 죽어야, 인류가 산다. 그렇다고 미키가 죽는 것이 크게 문제가 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어차피 살아나기 때문이겠다.
그렇지만 의문이다. 미키의 기억을 드라이브에 저장하고, 육체만 다시 재생성한 뒤에 새로운 몸에 기억을 덧입힌다면 그것은 ‘미키 1’이라고 불리는 원형과 같다고 할 수 있을지 말이다. 한번 생각해 보자. 기억을 주입 당하고 새롭게 몸이 기계로부터 제면기 면 뽑히듯 뽑힌 내가 있다면, 그것은 정말 나와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는가?
지구에 살던 시절 미키의 동업자였던 ‘티모(스티븐 연)’라는 존재에 대해서도 살펴보아야 한다. 티모는 지구에서 “마카롱이 햄버거를 넘어설 만큼 대박 날 사업 아이템”이라는 헛된 희망으로 미키와 사업을 펼쳤다가 단단히 망한다. 사업을 위해 졌던 빚은 수습이 불가능한 상태에 놓였다. 잔인하기로 악명 높은 빚쟁이 ‘다리우스’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미키와 함께 우주로 도망치지만 결국 다리우스의 부하에게 덜미를 잡힌다. 그러자 티모는 미키에게 간청하기에 이른다. “너는 죽어도 다시 살아날 목숨이니, 다리우스가 건넨 ‘잔인한 제안’을 도와달라”는 것이다. 지키지 못하면 티모는 죽은 목숨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또 한 번 의문을 가지게 된다. 어차피 살아날 목숨이라면 남을 위해 죽어야 하는가? 그럴 수 있대도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인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미키의 죽음은 매우 가벼운 것이 된다. <미키 17>이 보여주는 아이러니다. 죽어야 하는 일을 맡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덕에 계속해서 다시 복제될 힘을 가졌기 때문에 남을 돕는 데에 자기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지에 대한 딜레마까지 얻어야 한다.
현실에서는 어떠한가.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역사에서 여러 희생과 참사를 목격했다. 최근 몇 년 간의 일을 보자면 세월호 참사에서부터 이태원 참사, 화성 아리셀 공장의 대형 화재 참사, 그리고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까지 생각해 볼 수 있다. 대부분 안전불감증과 행정의 빈틈으로 인해 벌어진 일들이었다. 우리는 참사들을 계기로 미흡했던 구석을 고쳐볼 기회를 얻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라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앞으로의 일을 방지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리고 외양간을 고치는 계기가 됐던 그 희생자들의 죽음에 관한 가치를 논해야 한다.
미키는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는 특징이 있지만 현실에서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직은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작 중 미키의 생명과 존엄성은 그렇다 해도 훼손될 수 없듯, 우리와 함께 살아가던 이들의 희생은 아주 참담하고 슬픈 일이다. 그런 이들이 우리에게 남기고 간 희생의 뒷일은 얼마나 허투루 넘겨서는 안 될 일인가. 바로 그 부분에서 애도와 반성을 통한 진보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드러나게 된다.
<미키 17>에서 눈여겨볼 지점은 ‘애도하는 자’의 유무에도 있다. 그래서 영화에서 계속해서 ‘죽는’ 인물은 누구인가. 미키가 있다. 그리고 영화 초반부에 사고로 목숨을 잃는 ‘제니퍼’가 있다. 재미있는 점은 미키와 제니퍼 모두에게 연인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연인이 있다는 점이 재미있는 게 아니라, 죽어버렸거나 죽어야만 하는 이들에게 연인이 있다는 것은 그들의 죽음에 깊이 아파하고 슬퍼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으로 연결된다. 즉, 애도하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미키 17>에는 죽음에 슬퍼하는 이들이 많이 없다는 점이 독특하다.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사실 그 정도는 아니다) 미키에게 “죽는 것은 어떤 기분이냐?”고 묻는 이들이 있다. 그들의 죽음을 단순히 무용담 건너 듣듯 대하는 태도들이 인상적이다. 진정으로 미키의 죽음에 아파하고 공감하고, 제니퍼의 사고에 슬퍼하는 이들은 그들의 연인인 ‘나샤(나오미 애키)’와 ‘카이(아나마리아 바르톨로메이)’가 있다. 영화 중반부에서 카이 또한 미키에게 ‘죽는 기분’을 묻거나 미키를 성적으로 대하는 부분에서 그 사실이 살짝 뒤틀리긴 하지만, 카이의 제니퍼를 향한 애도는 어쨌든 가 닿는 지점이 있다.
그리고 외계생명체 ‘크리퍼’가 있다. 크리퍼 종족은 한 개체만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모두가 서식지 밖으로 나와 자신들 모두를 희생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서로를 지키고 기억하고 잃지 않으려는 간절함이 묻어나오는 몇 안 되는 상징물이다.
이렇게 <미키 17>에는 죽는 이들과 그것으로 인해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도약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의 희생에 전적으로 공감하고 슬퍼하는, 애도할 줄 아는 인물들이 존재한다. 흥미로운 지점은 바로 애도할 줄 아는 존재들이 영화 종반부에서 인류와 크리퍼 간의 갈등 상황에서 중재 역할의 중심에 위치하게 된다는 것이다. 정치인으로서 우주선 내의 위계질서를 지배하고 있는 인물이 등장하는 것은 사실이나, 그를 중심으로 한 인물들이 종반부에서는 무력함도 모자라 사실상 전무한 존재감을 띠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미키 17>의 핵심으로 생각하는 ‘미키 18’이 있다. 미키 18은 주인공인 미키의 그다음 복제체면서도 17번뿐 아니라 그 전의 모든 미키들이 겪은 죽음에 대한 부당함에 대해 분노한다. 미키 17은 어수룩하고 둔한 성격에 이전 개체에 대한 애도나 깊은 공감이 부족할 수 있었겠지만 미키 18은 그들에게 공감하고 분노한다는 점이 상징적이다. 그렇기에 미키 18이 영화 종반부에서 미키 17을 살려둔 채로 자신이 자폭하기를 결심했을 것이다. 미키 18이 살아남아 미키 17이 제거되고 계속해서 미키가 복제 실험체로서 남게 된다면, 인류에게는 미래를 향한 진보가 계속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말하고자 한 것은 미키 19, 즉 미래를 향한 진보가 아니다. 미키 17, 과거의 죽음과 희생에 다시 한번 주목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미키 17>은 죽음과 애도에 대한 질문을 관객에게 던진다. 외계생명체인 크리퍼에게도 다른 개체를 동정하고 박애하는 마음이 깃들었듯, 인류에게도 그것이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많은 관객이 미키의 실험 쥐 같은 모습에 측은지심을 느꼈겠다고 생각한다. 인간 또한 타인을 동정하는 그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가 단순히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 아니라, 봉 감독이 인류 전체에게 동정과 연민 그리고 애도에 대한 감정을 제고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했을 것이라 짐작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이 영화가 흔치 않은 해피엔딩이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속의 인물들처럼 애도하고, 반성하면서 희생된 이들에 대한 기림을 소중하게 여기는 이들이 가득한 세상이라면 우리 인류에게도 희망이 있을 것이라는 감독의 작은 바람이지 않을까.
그렇기에 <미키 17>은 단순 미키 17에만 관심이 쏟아지는 원맨쇼 작품이 아니라, 미키 18에도 마찬가지로 주목해야만 하는 작품일 것이다. 미키 18이 영화 종반부에서 해낸 결단, 그리고 그 결단 속에 숨은 의미와 상징을 고민해 봐야 할 것이다. 상업과 예술 그 사이 언저리에 서서 자신만의 철학과 해학을 담아낸 봉 감독의 그 행보를 응원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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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즈니+ <최악의 악> 티저 예고편
1990년대 강남 한-중-일 마약 트라이앵글을 막기 위한 멈출 수도, 끝낼 수도 없는 위험한 잠입이 시작된다! [최악의 악] 티저 예고편 공개 9월 27일, 오직 디즈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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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무브 투 헤븐: 나는 유품정리사입니다>
[2021년 5월 14일, 넷플릭스 공개]
"나는 유품정리사입니다"
모든 죽음에는 이야기가 있다
미처 끝내지 못한 누군가의 마지막 이야기지금부터 마지막 이사를 시작하겠습니다
사람이 세상을 떠나도, 그들의 물건은 남는다.
거기엔 생전의 삶이 깃들어 있다.
아스퍼거 증후군이 있는 청년과 출소한 그의 삼촌.
두 유품정리사가 고인의 못다 말한 이야기를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