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4-05-08 17:27:03
[JIFF 데일리] 물망초의 꽃말을 아세요?
<메이저 톤으로>

메이저 톤으로(The Major Tones)
잉그리드 포크로펙
Argentina, Spain | 2023 | 102min | DCP | Color | Fiction | Asian Premiere
겨울 방학의 어느 날, 열네 살의 아나는 어릴 적 사고로 팔에 이식한 금속판이 모스 부호로 된 이상한 메시지를 수신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나를 잊지 마세요.
Don’t forget me.
이름부터 잊지 말아달라는 하늘색 꽃, 물망초(勿忘草)의 꽃말이다.

‘방 천장의 별을 따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이 작품의 주인공은 열네 살의 소녀, 야나. ‘엄마’가 끼어들 공간은 없어 보일 정도로 유달리 화목해 보이는 부녀 사이는 오늘도 “이상 전선 무”인 듯싶다. 어딘가로부터 수신한 소리를 그대로 내뱉는 주인공과 그 소리를 악보로 받아적는 친구 사이에도 불완전함은 느껴지지 않고, 소녀의 인생은 굴곡 없이 잘 흘러갈 듯하다.
이윽고, 주인공 야나의 팔에 난 큰 흉터가 ‘그렇지 않아’라고 “뚠-뚠” 소리치며 이 빈틈없는 공간에 균열을 내버린다.

어릴 적 사고로 팔에 이식한 금속판에서 모스부호일 수도, 노래일 수도 있는 신호를 수신한다는 이 판타지 영화롤 보는 내내 최근 개봉한 한국의 성장 영화 <막걸리가 알려줄거야> 생각을 안 할 수 없었다. 같은 듯 다른 두 작품은 소녀와 모스부호라는 공통 소재를 전자는 한국의 ‘입시’를 통해, 후자는 사회적 이슈를 통해 풀어낸다.
잉그리드 포크로펙 감독은 GV에서 아르헨티나의 현실에 판타지 요소를 가미한 ‘전통 판타지’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하며, 동시에 한 여자아이의 성장 서사를 담고 싶었다고 말했는데, 이는 ‘야나’가 뛰어다니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시 안팎과 특히 열두 시가 넘은 야심한 밤에 ‘야나’에게 ‘시 경계는 건너지 않으니 내려서 걸어가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택시 기사의 말을 통해 매우 직접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씁쓸한 현실 속 담담한 ‘야나’의 모습에서 어딘지 모를 쓸쓸함이 느껴지는 <메이저 톤으로>는 잊지 않아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이를 기억하면서도 그 기억에 침몰되지 않고 간직하며 살아낼 수 있다는 희망을 찾아간다.
그리고, 영화는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국제경쟁 대상을 거머쥐며 ‘잉그리드 포크로펙’ 감독이 있는 아르헨티나 영화계 역시 희망차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5 BULL.T
9 Windmill
등 모스부호를 통해 알아낸 단어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의 끝은 영화가 아닌 ‘엔딩크레딧’에 있으니, 만약 이 작품이 국내 극장에서 개봉한다면, (그렇게 되길 희망한다) 상영관 내에 불이 켜지더라도 자리를 지키고 엔딩크레딧 속 꽃말까지 감상하길 바란다.
국제경쟁 - <메이저 톤으로> -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스케쥴
2024.05.03(금) 17:00 | CGV전주고사 7관 (244) *GV
2024.05.06(월) 13:30 | CGV전주고사 7관 (527) *GV
2024.05.10(금) 13:30 | CGV전주고사 7관 (922)
씨네랩 에디터 Cammie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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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F 데일리] 마침내 도달하는 빛과 꿈
DIRECTOR. 파얄 카파디아(Payal KAPADIA)
CAST. 카니 쿠스루티(Kani KUSRUTI), 디비야 프라바(Divya PRABHA), 차이야 카담(Chaya KADAM) 외
PROGRAM NOTE.
대도시 뭄바이, 간호사인 프라바는 독일로 일하러 간 후 연락이 끊긴 남편과의 혼인관계에 묶여있고, 룸메이트 아누는 무슬림 남성과 사랑에 빠졌다. 관습이 허락하지 않는 사랑을 나누는 이 젊은 연인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자신들만의 공간을 찾아 뭄바이의 밤거리를 헤맨다. 섬세한 연출로 두 여성의 드라마를 펼쳐내는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카메라는 뭄바이에 꿈을 안고 모여든 사람들을 비춘다. 쓰레기를 수거하고, 물품을 실어 나르고, 도시 철도에 몸을 기대선 이들이 카메라를 흘깃 보고, 그들의 보이스오버는 ‘꿈의 도시’ 뭄바이에 대한 자신들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다큐멘터리 스타일과 마술적 리얼리즘이 시적으로 결합된 이 독특한 영화에서 관객들은 주인공 프라바의 특수한 이야기이자 뭄바이를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의 보편적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홍소인)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의 줄거리가 부분적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도시는 아름다운가? 일면 그렇다.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들고, 각자의 소망을 향해 매진할 수 있는 곳, 새로운 가능성을 품은 공간. 틀린 말이라고 아주 부정할 수는 없지만, 이 말을 순도 100%로 믿는 순진한 사람도 이제는 없을 것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도 누군가의 자리는 없고, 소망을 향해 매진할 수 없는 위치로 사람을 쉽게 패대기 치기도 하며, 가능성을 오히려 차단하는 공간이 되는 경우도 많으니까. 그리고 보통 이런 일들은 동일한 입지조건의 사람들에게 일어난다. 그래서 도시는 눈부신 만큼 그림자가 짙다.
뭄바이는 인도에서도 손꼽히게 화려한 도시다. 인도 금융기관과 굴지의 대기업 본사들이 위치한 인도의 경제수도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고, 발리우드라는 현란한 세상이 펼쳐지는 곳이기도 하다. 도시가 팽창하면서 도시 권역은 넓어져 가고, 이를 연결하는 철도는 언제나 출퇴근에 지친 사람들로 혼잡하다. 주어를 서울로 대치해도 그럭저럭 이해될 문장들이다. 이 영화가 뭄바이 풍경을 스케치하듯 담고 그 위로 뭄바이 사람들의 내레이션을 구메구메 펼쳐 놓는 방식은, 대도시 거주자라면 누구라도 이 도시와 이 영화를 가까이 느끼게 만든다. 23년을 살아도 언제든 떠나야 할 것 같은 감각이 든다는 "만인의 타향", 시간이 덧없이 흐르는 이상한 곳. 이곳의 꿈은 망상(illusion)이 아닐까 의심해야 하는 곳. 그럼에도... 아름다운 곳. 애증의 현장.
영화는 이 도시에서 자기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세 여성을 담았다. 세 여성의 삶과 사랑은 이 도시에 일면 녹아들어 있지만, 또 다른 일면은 부재하거나 불화하고 있다. 간호사라는 탄탄한 직업을 가지고 삶을 꾸려가는 기혼 여성이지만 남편은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로 떠나 부재한 프라바. 병원을 찾은 여성의 가족 계획에 자연스럽고도 적절히 조력해 줄 만큼 일에 인이 박였지만 정작 자신의 사랑은 종교의 장벽에 가로막혀 있어, 부모님의 맞선 종용을 받으며 비밀 연애를 이어가는 아누. 병원 요리사로 일하며 남편 없는 삶을 잘 꾸려 왔지만 이 도시에 22년을 살았지만 서류가 없어 거주 사실을 입증할 수 없게 된 파르바티.
도시에 거주하는 세 사람의 집안은 대부분의 시간 어둑어둑하다. 열려 있는 창밖으로는 도시의 어둠과 불빛이 보인다. 누군가의 노동과 피로와 연결된 불빛은 집안까지 닿지 않는다. 심지어 파르바티의 집에 전기가 끊기고 나면 서류 하나 찾기에도 어려운 어둠이 찾아온다. 아누와 시아즈는 아예 창문 안의 세계를 갖지 못하고 골목을 다니며 서로의 이야기를 쌓아갈 뿐이다.
튼튼하고 깨끗한 전철와 최첨단 시설로 연결된 도시는, 동시에 그 연결점에서 이탈하기 너무 쉬운 공간이기도 하다. 아누는 의도가 빤한 엄마의 전화를 받지 않고, 남편을 향해 건 프라바의 전화는 독일어로 된 자동응답으로만 돌아오며, 급기야 튼튼한 철로조차 폭우로 침수되고 만다.
내내 비가 오고 야경만이 빛나는 뭄바이의 모습은 아름답지만, 안정적이지는 못하다. 그 안에서 우리는 모자란 빛을 빛으로 상상하며 살아간다. 몽상을 꿈으로 착각하거나 치환하며 살아가듯이. 그 안에서 우리는 최선을 다해, 어둠을 조금 몰아낼 수 있는 정도의 빛을 끌어모으며 살아간다.
그러나 파르바티의 고향 마을에 세 사람이 당도한 순간, 비는 그치고 빛이 가득하다. 파르바티의 집은 뭄바이에서나 고향에서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기로는 매한가지인데, 여기서는 집안 구석구석까지 빛이 스민다. 꿈과 몽상의 차이는 어쩌면 태양과 야경 불빛의 차이 딱 그만큼인 것 같다. 세 여자는 여기서 비로소 자유롭다. 술도 마시고 춤도 춘다. 이상한 곳에 갇혔다는 노랫말에 맞추어.
이들이 도시에서 꿈꾸었던 것들은 모두 도시 바깥에서 실현된다. 동굴 안에서 사랑의 말을 더듬거려 보던 연인은 이내 백주의 숲 속으로 나와 사랑을 나누고, 공장 깊은 어둠 속에서 빛을 상상했다던 남자가 현실에 나타나 상상해 왔던 사랑을 말한다. 그렇게 이들의 사랑은 어디엔가 도달한다.
마침내 어떤 지점을 찍은 세 사람은 해변가에 모여 앉는다. 올망졸망한 불빛은 뭄바이의 야경보다 선명하고, 밤하늘의 별자리까지 선명하게 보일 만큼 다른 빛을 해하지도 않는다. 도시에서는 갖지 못했던, 다 함께 있는 자리는 마치 꿈처럼 황홀하다. 정작 그들이 바라던 것이나 미결 상태로 질질 끌어온 것들이 현실로 찾아온 곳은 여기인데.
꿈은 언젠가 이루어지거나 폐기되는 방식으로 완결점을 갖는다. 망상은 결코 어떤 완결점도 갖지 못한 채 영영 부유하다 스르르 사라진다. 이 지극한 도시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이 영화의 아름다운 엔딩이 풍성하게 말해준다. 도시가 아무리 빛을 망상하는 덧없는 날들로 꽉 차 있다 해도, 우리는 언젠가 끝내 빛과 꿈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 원하던 형태가 아니더라도 아무튼 완결의 점을 찍을 수 있다는 것. 그 자리에서 테이블에 함께 앉을 이들이 있다면 족하리라는 것.
10/04 20:0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5관 (상영코드 129)
10/06 13:30 CGV센텀시티 7관 (상영코드 237)
10/09 12:30 영화의전당 중극장 (상영코드 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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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힘들고 지친 당신에게도 아침이 와요
어두운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온다. 하지만 '밤의 시간'이 지속되는 어떤 누군가에겐 아침이 과연 올 지 불안감과 걱정이 앞선다. 넷플릭스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는 이렇게 답한다. "언젠가는 아침이 옵니다"라고.
동명 웹툰을 영상화한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는 내과에서 정신건강의학과로 전과한 간호사 정다은(박보영)과 자신이 근무하는 정신병동에서 겪는 에피소드들을 담아낸다. 드라마는 정신병동 근무가 처음인 정다은이 고군분투하며 적응하는 과정에서 정신병에 대한 인식을 자연스럽게 개선하는 데 주력한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첫 회에 첫 장면부터 눈길을 끈다. 정다은이 자기 전, 그리고 출근하면서 현대인의 정신질환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데 최근 현대인들이 정실질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걸 알린다. 그러면서 다른 병과와는 달라 보이는 정신건강의학과 근무자들의 복장, 풍경을 담아내 관심을 사로잡는다.
풀버전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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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둘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안녕하세요! 영화/OTT 전문 큐레이션 웹 매거진 씨네랩입니다.
다들 즐거운 주말 보내셨나요?
오늘은 4월 셋째 주 주말 동안의 박스오피스 분석 결과를 공유해 드리겠습니다.
시작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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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내 주말 박스오피스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인기 시리즈 영화 <존 윅>의 개봉으로 전체 주말 관객 수가 105만 7천 명에 도달하였습니다. 지난 주말(86만 7천)과 비교했을 때 약 22%가량 증가하였습니다. <존 윅 4>의 개봉에 따라 <스즈메의 문단속>과 <리바운드>의 순위가 한 계단 하락하였습니다. 개봉 전 독특한 포스터와 예고편으로 화제를 모았던 <킬링 로맨스>는 개봉 첫 주말 4위에 진입하였습니다. 지난 주말에 아쉽게 6위를 차지했던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한 계단 상승하며 다시 한번 TOP 5에 진입하였습니다.
1. <존 윅 4>(NEW)
<존 윅 4>는 개봉 첫째 주 주말에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며 인기를 입증하였습니다. <존 윅 4>는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이라는 리스크에도 불구하고 5일 연속 박스오피스 1위 자리를 차지하였습니다. 이번 편은 전편인 <존 윅 3>의 개봉 스코어를 넘어섰으며, 이로 인해 <존 윅 4>가 전편의 흥행 기록인 100만 명을 언제 넘어 설지 주목되고 있습니다. 특히 <존 윅 4>는 CGV 골든에그 95%, 롯데시네마 관람객 평점 9.3, 메가박스 실관람객 평점 8.9점을 기록하며 폭발적인 흥행을 이어갈 것으로 보입니다.
2. <스즈메의 문단속> (⬇︎1)
5주 연속 주말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던 <스즈메의 문단속>은 인기 시리즈 <존 윅 4>의 개봉에 따라 2위로 하락하였습니다. 영화는 400만 관객 돌파까지 최단 기록을 세워 놀라움을 자아냈으며, 현재 460만 관객까지 기록하였습니다. 영화는 국내 개봉 역대 일본 영화 TOP 1위까지 단숨에 석권하였다.
3. <리바운드>(⬇︎1)
<리바운드> 역시 한 계단 하락하여 3위를 차지하였습니다. <리바운드>는 지난 15, 16일 이틀간 진행된 경기-서울 지역 무대인사 매진을 기록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영화의 몰입도를 위해 배우들은 실제 선수 못지않는 개인 연습과 합숙 훈련을 진행하였고, 이는 실제 관객들이 느끼는 영화의 매력으로 다가왔습니다. 또한, 관객들의 N차 관람 인증 릴레이로 누적 관객 수를 얼마나 돌파하게 될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4. <킬링 로맨스> (NEW)
4월 3주 차 주말 박스오피스 4위는 2013년 <남자사용설명서>로 주목받았던 이원석 감독의 신작 <킬링 로맨스>가 차지하였습니다. 개봉 전부터 독특한 포스터와 예고편으로 화제를 모았지만, 반응에 비해 다소 아쉬운 성적을 받았습니다.
5. <더 퍼스트 슬램덩크>(⬆1)
이번 주말 박스오피스 5위를 차지한 영화는 바로 <더 퍼스트 슬램덩크>입니다. 4월 둘째 주에 아쉽게 6위를 차지했던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셋째 주에 한 계단 상승하여 TOP5 안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2) 북미 주말 박스오피스
개봉 첫 주말 북미 박스오피스에서는 1위를 차지한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가 2주 연속 1위를 차지하였습니다. 2위를 차지한 <더 포프스 엑소시스트>는 <레미제라블> 자베르 역의 러셀 크로우가 주연을 맡은 작품으로 아직 국내 개봉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4위를 차지한 <렌필드>는 국내에서 19일 개봉 예정인 작품으로 배우 니콜라스 홀트가 출연해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에어>는 나이키에 관한 영화로 국내에서는 8위를 차지하였지만, 북미에서는 5위를 차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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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픽의 4월 셋째 주 박스오피스 분석 콘텐츠는 여기까지입니다.
이번 주도 건강한 한 주가 되기를 바라며 씨네픽은 다음 주 월요일 이 시간에
또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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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F 데일리] 천천히 찾아오는 것
Director] 아누파마 스리니바산Anupama Srinivasan, 아니르반 두타Anirban Dutta
Program note]
인도-미얀마 국경 근처의 외딴 마을 토라에는 도로가 없고 수도가 없고 학교나 병원도 없다. 인도 독립 70주년이 훌쩍 지났지만 오랜 반란의 역사 탓에 세상에서 밀려나 잊혀진 마을 토라에 어느 날 전기가 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마을 사람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올해 크리스마스에는 환한 불빛을 볼 수 있으리라는 장밋빛 희망에 들뜬다. 구멍가게 아주머니는 냉장고를 들여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팔 생각에 마음이 들썩이고, 마을 남자들은 땅을 파고 전봇대를 세우느라 진땀을 흘린다. <깜빡이는 불빛>은 온 마을에 첫 전구가 켜지는 날까지 토라 사람들의 이상과 현실, 희망과 좌절을 다정하고 사려 깊은 시선으로 지켜본다. 타고난 유머러스한 낙관과 역사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그들의 열망이 깜빡이다가 환히 켜지는 불빛 마냥 눈부시다. (강소원)
관객과의 대화가 시작하기 무섭게, 예상했던 질문이 바로 나왔다. “영화 속 사람들이 우리가 아는 ‘전형적인’ 인도 사람의 얼굴처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한국 사람들과 가까워 보인다. 혹시 어떤 연관 관계가 있는지?”
이해를 위해 ‘인도-미얀마 국경 근처’라고 표현된 지역은 마니푸르(Manipur) 주, 더 넓게 말하면 인도의 북동부 지역이다. 이쪽 사람들은 확실히 우리가 통상적으로 인지하는 인도 사람들의 얼굴, 터번과 멋진 수염과 큰 덩치로 흔히 표현되는 북인도 사람들이나, 상대적으로 더 진한 갈색 피부와 둥근 눈을 한 남부 인도의 얼굴과는 다르다. 외려 흔히 생각하는 동아시아 쪽의 얼굴에 가깝다. 실제로 인도 북동부의 토착 부족민들은 티베트 혹은 미얀마 쪽과 더 가까운 혈통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영화에서 담은 나가(Naga) 족의 경우에도 나갈랜드(Nagaland)와 마니푸르 주에 주로 거주하지만, 미얀마에도 상당수가 거주하고 있다. 옛날에는 외부 교류가 많지 않았다가 영국인 선교사들이 많이 유입되면서, 인도 타 지역에 비해 기독교인 비율이 높다는 것 또한 독특한 특징이다.
1940년대 말 인도라는 국가가 세워진 이후로도 이들은 끊임없이 각자의 독립국을 향한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이는 또 인도 국내에서의 차별로 이어졌고, 이 영화 <반짝이는 불빛>은 그 중에서도 아주 외딴 지역의 ‘토라’라는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전기도 수도도 학교도 일자리도 없는 마을. 사람들이 달밤에 손전등에 의지해서도 춤과 노래를 멈추지 않는 마을. 태양열 전지를 동원해 한밤중에도 농작물 정리하는 바지런한 손길을 멈추지 않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정부 소식에 촉각을 기울이는 사람들의 마을.
열심히 사는 사람들의 풍경이 정직하게 담겨 있어, 영화는 얼핏 TV프로그램 <인간극장>의 한 장면처럼 소박하고 정겹게 느껴진다. 고된 농사 중 기숙학교에 있는 아이들을 만나러 먼 길을 떠나야 하는 아침, 아직 붓기가 빠지지 않은 얼굴로 멀거니 차를 마시다 말고 남편에게 촬영 팀 바나나라도 갖다 드리라고 말하는 구멍가게 아주머니 ‘자스민’의 얼굴은, 그야말로 우리가 아는 똑똑하고 적극적인 아주머니의 모습 그 자체다. 15년 가량 주민들과 관계를 쌓았다는, 실제로 전기 공사를 진행하는 인부들의 옆 방에서 먹고 자고 발전기를 돌리면서 촬영하고 무려 7년을 녹여 영화 작업을 했다는 감독들의 접근이 이 거리감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동시에 영화는 이들이 사는 현실에 언제라도 서늘한 긴장감이 서릴 수 있는 곳임을 살짝살짝 표현하고 있다. 오랜 기간 독립군 생활을 하고 마을에 정착해 살고 있는 노인 ‘캄랑’은 여전히 라디오로 평화 협정 진전 소식을 들으며 “끝이야…”하고 허탈하게 웃기도 하고, 지난 투쟁의 역사를 들려주기도 한다. 그의 마음에는 여전히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에 대한 열망이 있다. 이따금 뉴스에서 전해지는 특정 지역 통행 금지령이나 심상치 않은 연기나 총 소리는 여전히 이들의 삶이 언제든 긴장으로 빠져들 수 있음을 숨기지 않는다.
거기서 살아가는 주민들의 삶에는 자유와 주체성이 또렷하다. 없는 불빛에 의지해서 합창 연습을 하는 찬송가 가사 또한, “나가 지역 젊은이는 특출하고 공부도 잘한다”거나 “넓고 비옥한 땅을 모두가 부러워한다”면서 지역의 색깔과 자부심을 톡톡히 드러내고 있었다. 이 자의식을 바탕으로, 이들은 이전에도 몇 번 불발되었던 전기 연결이 과연 이번에는 될까 의구심을 품은 시선으로 느리작느리작 진행되는 공사 과정을 지켜본다. 특히나 독립 운동을 오랜 기간 해온 캄랑 노인은 전기 공급도, 평화 협정 임박 소식도 온전히 믿지 않는다. 그에게 이런 소식은 실제로 이루어진다면 너무나 좋겠지만, 진짜 올 때까지는 ‘모르는 일’이다. 오랜 기간 피부로 체득한 감각일 것이다.
마침내 전기는 아주 천천히 주민들을 찾아온다. 수풀을 헤치고 나무를 베고 전봇대를 하나씩 설치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그 전봇대가 마을 한복판으로 다가오고, 지연 끝에 자재가 도착해서, 집집마다 두꺼비집 판과 전구 자리를 설치하고… 그러다 마침내 마을 첫 전구에 불이 들어오고, 우리 나라 옛날 모습처럼 텔레비전이 있는 집에 모여서 다 같이 영화를 보고, 냉장고를 들인 기념으로 구멍가게에서는 주스를 얼린 아이스크림을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
그들이 바란 바로 그 크리스마스에 찾아오지는 않았지만, 몇 해 지연되어서나마 그들은 비로소 불 밝힐 수 있는 크리스마스를 맞이한다. 그러나 평화 협정은 여전히 저 멀리 있다. 전기뿐 아니라 평화로운 공존의 미래 또한 자연스럽게, 이내 도래하기를 바라게 되는 영화였다. 이들의 단단한 자의식이 무너지지 않고도 평화로이 살아갈 수 있기를. 깜빡깜빡 서서히 들어오는 백열등처럼 찾아와 주기를. 이들은 어둠 속에서도 작은 불빛에 의지해 발걸음을 옮길 수 있는 사람들이지만, 캄랑 노인의 말대로 “어둠과 빛은 같지 않”으니까.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2023.10.04-13) 상영시간표]
10월 05일 19:3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2관(상영코드 055)
10월 07일 16:30 CGV 센텀시티 2관 (상영코드 160)
10월 10일 14:00 CGV 센텀시티 1관 (상영코드 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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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네피커 인터뷰] 프로덕션 대표 / 영화, 그리고 나
저는 지금 인천에서 영상 프로덕션 풀림 필름을 운영하고 있는 안소회라고 합니다.
Q. 자기소개 해주세요.
A. 저는 영화과를 졸업을 했고 연출을 전공을 했습니다. 연출을 전공을 하고 나서 졸업하자마자 했었던 거는 사실은 좀 강사 일을 좀 했었어요. 이제 입시학원에서 영화 제작반 같은 아이들과 같이 뭔가 호흡하면서 영화를 만드는 수업을 좀 했었고, 그다음에 예전에 아시던 감독님이 장편영화 독립 장편 영화 조 감독을 좀 부탁을 하셨어서 조 감독을 하고 그다음에 또 이제 계속 우연의 반복인데 사실은 그게 또 우연히 알게 된 제작사 대표님이 한번 이거 각색 한번 해보면 어떻겠냐 해서 각색을 또 하다가 군 문제를 해결을 해야 되는 상황이냐 이것들을 좀 불안정하지만 기다려야 되는 상황이냐 나는 갈래길에서 군대를 선택을 했었고 그 시기와 비슷하게 프로덕션을 창업을 했었던 것 같아요. 뭔가 영화라는 직업 혹은 영화라는 일을 한다는 것이 사실은 상당히 좀 불안정한 일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어서 그런 것들을 좀 내가 마음 놓고 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수단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고 그런 생각의 끝에 도달한 결론이 이제 프로덕션 창업이었던 것 같습니다.
Q. 감독님의 작품 소개 해주세요.
A. 사실 화려하다고 할 것까지는 없는 것 같은데 그냥 뭐 열심히 했던 작품들이 운 좋게 성과가 좋았었던 것 같습니다. 처음 작품에 썼던 것들은 사실 이렇게 밖에 잘 내놓지는 않는데 개인적으로 되게 애증의 작품이 하나 있습니다. 야쿠르트 형이라는 작품이 있었고 처음으로 영화제에서 대중들한테 선보였던 작품은 무단조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그 이후로는 계속해서 학교도 영화를 전공을 했다 보니까 단편 작업들을 꾸준히 해왔었는데 일단 크게 기억에 남는 작품 세 가지가 <무단조퇴>랑 <코리아타운>이라는 단편 영화랑 ,<이종>이라는 단편 영화 이렇게 세 편이 가장 기억에 남는 것 같습니다.Q.영화 <이종>을 찍게 된 계기가 있나요?
A. 사실 항상 GV 때 이 질문을 받았을 때 했던 똑같은 대답들이 있는데 촬영 감독이랑 같이 이제 학교 앞 술집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다가 진짜 졸업 작품으로는 좀 재밌는 걸 해보고 싶다. 흔히 말하는 단편 영화 독립영화라고 했을 때 사람들이 생각하는 좀 재미없다 너무 지루하다 너무 심오하다 그런 것들이 아니라 진짜 재미있는 것들을 한번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찰나에 그때 그 맥줏집에서 tv에 UFC가 나오고 있는 거예요.그래서 이종 격투기의 영화를 찍으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고 그리고 또 촬영 감독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그런 격투기를 되게 좋아해서 이런 것들을 한번 여기에 이제 서사를 담아보자라고 좀 시작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Q. 영화 <이종> 속 이정현 배우 섭외 비하인드?
A. 센 이미지를 원했었고 저는 몸을 쓸 줄 아는 배우였으면 좋겠다고 고민을 하면서 찾아보던 중에 그때 또 당시에 <미스터 선샤인>이라는 드라마에서 되게 이미지가 강하게 나오셨었고 저 배우랑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래서 PD님 한테 저 배우랑 나는 하고 싶다 해야겠다 그랬더니 뭐 알겠다 하고 하시더니 캐스팅을 해오시더라고요. 그래서 그렇게 작업을 했었죠.Q. 영화 <이종> 촬영 중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A. 아무래도 <이종>이라는 영화가 되게 몸을 쓰는 영화고 실제로 액션 합이 되게 중요했던 영화였다 보니까 배우들이 되게 고생을 많이 했어요.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이제 이정현 배우죠. 극 중에 겸수 역을 맡은 이정현 배우가 촬영을 하다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면서 딱 쓰러지는데 팔이 빠졌었나 발목이 돌아갔었나 그래서 되게 오래된 일이라 잘 기억은 안 나는데 그래가지고 잠깐 촬영을 멈췄던 기억도 있고 그런데 결국은 다시 또 반대쪽으로 돌려서 촬영을 하더라고요. 한 번은 연습을 하다가 이제 막 액션 합을 맞추다가 갈비뼈가 아프다. 그래서 제가 그때 막 녹용을 보내주기도 하고 그랬었던 기억이 나는 것 같습니다.
Q. 연출을 전공한 계기는?
A. 막연했던 것 같아요. 막연하게 꿈꿨었던 게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이었고 그렇게 하려면 뭘 해야 할까 뭐 다양한 파트가 있잖아요. 촬영도 있고 제작자도 있고 미술 음향 다양하게 있는데 그중에서 내가 생각하는 것들을 그대로 이미지로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담아낼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라고 했을 때에는 연출이 답이었던 것 같습니다.
Q. 입시반 강사시절 이야기해주세요!
A. 제가 가장 많이 맡았었던 바는 이제 입시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인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 고2 기초반이라고 하는 반이랑 아이들이 영화를 제작하면서 공부를 할 수 있는 영화 제작반을 가장 많이 맡아서 했었는데요. 입시반에서 가르치는 것들 어떻게 보면 영화과 입시에 필요한 정형화된 것들을 가르치는 것보다는 그냥 영화를 가지고 아이들이랑 좀 재미있게 접근하는 것들이 좀 더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그게 좀 더 잘 맞았던 것 같기도 하고 아이들이랑 이제 같이 시나리오 아이템 기획 개발부터 콘티를 짜는 것들, 편집을 하는 것들 이런 것들을 좀 많이 했었고, 어쨌든 제가 배웠던 곳에서 누군가를 가르치고 있다는 건 되게 남들은 쉽게 할 수 있는 경험은 아니라고 생각을 했었고, 과거의 나일 수도 있고 이들이 보는 게 그 학생들이 보는 게 미래 그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다 보니까 다른 곳에서 강의를 할 때보다는 조금 더 유의미했던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Q. 영화과 선택하게 된 계기는?
A. 솔직히 말씀을 드리면 큰 이유는 없었고요. 뭔가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만 있었던 있었었는데 현실적으로 어떤 방법을 선택해야 유명한 사람이 될 수 있어 그런 고민들을 한참 했을 때가 있었고요. 그러면서 제가 이제 진로를 고민할 때 초등학교 때부터 생활기록부에 직업을 어떤 걸 써놨을까 하고 쭉 봤더니 뭐 개그맨도 있었고 방송 작가도 있었고 그런 식으로 쭉 뭔가 그쪽이랑 연관된 직업들이 나오더라고요.
그러다가 영화과라는 학교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저기에 들어가면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되게 많은 사람들한테 하면서 좋은 영향력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러다 보니까 영화과를 자연스럽게 가게 되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안소회님의 인터뷰 영상은 [여기]서 확인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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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 어쩌면, 아주 흔한 이야기
그런 때가 있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을 자연히 하게 되는 때. 뭐, 무언가에 쫓기듯 하게 되었다고 해야 할까. 나의 경우엔 그게 말이었고, 그 말을 듣는 엄마에겐 꽤나 청천벽력처럼 느껴졌을 거다. 단 한 번도 생각지도 못했겠지. 엄마 딸이 여자랑 사귀었다는 것, 그것도 친구인 줄 알았던 애랑.
엄마는 별말 없이 손에 쥔 화장품을 얼굴에 차분히 발랐지만, 제법 눈썰미 있는 딸에게 숨길만큼 천역덕스럽진 못했다. 침묵은 무거웠다. 엄마의 움직임이 서서히 느려졌다.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긴장되는 분위기였지만 무섭거나 두려움은 없었다. 일단 나는 헤어짐에 잔뜩 취해있었으니까.
드디어 엄마는 손을 멈췄고 툭, 물음을 던졌다.
그래서, 네가 동성애를 했다는 거니?
응, 맞아. 짤막한 대답으로 이야기는 끝났다.
우리 엄마의 반응은 전형적이었다고 해야 할까. 몇 년이 흐른 지금, 엄마는 여전하다. 가끔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남자친구랑 있느냐고 묻고, 정말 결혼할 생각이 없냐고 묻는다.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웃는다. 말해봐야 피차 입만 아프다. 그냥 한 번 데려와서 진득하게 사는 거 보여주는 게 낫겠다.
<딸에 대하여> 속 '엄마' 딸, '그린'도 비슷한 생각이었을까. 물론 별 수 없는 상황이 겹쳐졌을 테지만, 내심 그런 생각이 아예 없을 것 같진 않다. 앞으로 이어 쓸 이야기는 영화 스포일러가 넘칠 테니, 주의하길 바란다.
SYNOPSIS
요양보호사인 엄마는 딸로부터 목돈을 빌려 달라는 부탁을 받지만, 가진 거라곤 낡은 집 한 채가 전부인 엄마는 그럴 능력이 없다. 엄마 편의 대출도 어렵게 되자 동성 연인과 함께 엄마의 집으로 들어온 딸. 두 사람과 불편한 동거를 하게 된 엄마는 요양원의 어르신을 돌보는 데 몰두해 보지만, 홀로 곤궁하게 늙어가는 어르신에게서 자신과 딸의 모습을 겹쳐 본다.
한 창작자가 만드는 작품을 순차적으로 살펴보면 공통된 주제의식이 또렷하게 보이는 경우가 있다. 김혜진 작가도 그렇다. 그는 언제나 삶 속의 노동을 말했고, 노동이란 투쟁의 과정이기도 하다. 영화 <딸에 대하여>는 그가 지은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기에 사랑, 퀴어, 가족 이전에 노동자, 그러니까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소재로 둔다.
엄마는 요양보호사다. 늙은 육신을 돌보고, 달래고, 먹이고, 재우고, 살피는 일. 나와 전혀 연고 없는 타인을 정성으로 돌본다는 게 쉽지 않을 텐데 그는 자신이 돌보는 어르신에게 지극정성을 다한다. 일터에서 생기 넘치던 모습은 집에 돌아오는 발걸음에선 온데간데없다. 한 손에는 묵직한 수박을, 다른 한 손에는 생활품을 잔뜩 든 채 걷는 그.
티비 소리를 배경음 삼아 반 가른 수박을 퍼먹는 것. 풍족하면서 고독하다. 밤. 잠을 청하려 누워있는데 현관문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그리고 누군가와 다정하게 통화하는 딸 애의 목소리까지. 사실, 그 누군가가 어떤 존재인지 엄마는, 그러니까 '나'는 안다. 닫힌 문 너머로 작게 들려오는 소리를 애써 질끈 감으며, 그렇게 모르는 척.
엄마가 딸의 한 면을 외면하면 외면할수록 사실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온다. 마치 놀리는 것 같다. 코앞에 보이는 존재를, 정말로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고. 무시할 수 있느냐고. 잠결에 이불을 다 걷어차는 딸아이가, 누군가의 옆에서 살결을 맞대며 곤히 잠든 모습을. 누가 봐도 커플 신발로 보이는 운동화 두 켤레를.
집에서는 불편한 동거가, 일터에서는 불편한 상황이 이어진다. 엄마가 돌보던 어르신이 센터에서 짐짝 취급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때 많은 아이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며 사회의 본보기가 된 그가 먹고 자고 싸는 일에 도움이 필요한 노인이 되었다. 사람들은 과거의 그를 기억하고 현재의 그를 외면하기에, 찬란한 시절을 어떻게든 현재와 연결 지으려고 수작질을 부린다.
하지만 지난 것은 이미 지나간 것. 돌아오지 않는다. 아무리 갖춰진 옷을 입히고 곱게 화장을 해도 지금 코앞에 있는 사람은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제 몸 가누기가 어려운 노인이다. 달달한 알사탕에 위로를 받고, 과거의 영광을 가방 보따리로 기억하는, 그런 사람.
'나'는 모르지 않는다. 아무 연고 없는 생판 남에게 품는 애정이 어떤 것인지를, 왜 그렇게까지 마음이 가는지 그 어떤 논리로도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을. 하지만 사람의 아집을 꺾기는 얼마나 어렵던가. 딸아이의 연인, '레인'이 제 나름껏 예의를 지키며 다가섰다가 눈치껏 빠지기를 반복하는 모습에도 엄마의 태도는 늘 비슷하다. 눈도 제대로 맞추지 않고,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딸아이와 딸아이의 연인은 서로를 낯선 이름으로 부른다. '그린'과 '레인'. 닉네임 같은 이 호칭에는 어떤 선입견도 개입하기 어렵다. 생각해 보자. '그린'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무엇을 좋아할까? 어떻게 살아가고 싶을까? 막연한 질문 대신 좀 더 노골적인 물음을 던져보자. 몇 살일까? 여자일까 남자일까? 직업은 뭘까?
추측이 난무할 뿐 어느 하나 치우친 가능성이 없다. '레인'이라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럼 '윤지'라는 사람은 어떨까? 단박에 여자를 상상할 것이다. 주변에 아는 사람을 떠올릴 수도 있고 말이다. 버젓이 존재하되 함부로 입을 놀릴 수 없게 만드는 명칭. 일상에서 벗어난 이름이 주는 안정감. 둘은 그것에 기대어 7년을 지냈다.
대학교 시간 강사와 주방 직원, 여자 둘,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 따위의 환경을 그린과 레인으로 바꾸어.
둘이 짊어진 무게 자체는 무겁지만, 막상 들어보니 무겁지만은 않다. 수박은 함께 들 수 있고, 일방적으로 시끄럽게 떠드는 티비 소리가 아닌 둘의 이야기가, 대충 가른 수박을 퍼먹는 작은 소리 대신 웃음소리를 나눈다. 중간에 너무 무겁다면 짐을 바꿔 들 수도 있겠지. 쉬어가도 좋고.
물론 연인 간의 사랑이 언제나 능사라는 건 아니다. 7년을 만나고도 언제든 헤어질 수 있다. 다만, 헤어짐의 이유는 둘 사이에서 발생하는 게 맞다. 외부의 개입으로 피하듯 깨어지는 건,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충분하다.
이것 말고도 딸아이, 그러니까 그린의 삶은 충분히 녹록지 않다.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교수를 강단에서 쫓아낸 학교에 문제를 제기하며 시위에 동참하는 중이다. 열과 성을 다하는 그 모습은 레인을 처음 엄마 집에 데려왔을 때의 당돌함과 닮았다.
공부 열심히 하던 딸 애가 제 밥벌이 생각은 않고 생판 모르는 남 일에 시위까지 나선다니. 이 광경을 본 엄마는 딸아이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하나 더 생긴다. 여기저기 상처 난 모습을 보아하니 마음이 쓰라리고, 그만큼 화가 난다. 너는 뭐가 부족하다고 그런 짓을 하느냐고.
사람은 때로 자신을 타인에게 투영해서 바라본다. 특히 엄마-딸처럼 양육자와 자식의 관계에서 흔하다. 당신이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주겠노라고, 혹은 당신이 경험해 보니 별로인 것을 내 아이에겐 절대 주지 않겠노라며. 그런데 우리네 삶은 아무리 달라봐야 크게 다르지 못하다. 오히려 닮은 만큼 이해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지는 것 아닌가.
어쩌면, 너무 닮아서 이해하고 싶지 않은 지경에 이르렀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비슷했다가는 내 삶에 이르게 될까 봐. 젊어서 다 가졌던 어르신이 노년엔 가족 하나 없이 외로운 삶을 마무리했다는 것 또한. 사실 엄마는 어르신에게서 자신을 보았는지도 모른다. 노동할 수 있었을 때 아무리 많이 가져도 훗날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그러니까, 내심 일종의 담보처럼 정상 가족을 꾸렸으면 하는 마음.
사람은 익숙한 것에 대해서는 안정감을 느낀다. 그리고 추측도 썩 논리적이지 못하다. 비유하자면, 동전 던지기를 해서 이번에 앞면이 나왔으면 다음엔 뒷면이 나올 거라는 '예감'을 논리로 둔갑하는 광경을 쉽게 볼 수 있으니까. 그 예감은 평소 본인이 하던 사고의 흐름과 같은 결이고 말이다.
삶은 지나기 전엔 모른다. 고로, 그린의 훗날은 알 수 없다. 레인과 여전히 함께일 수도,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도, 만나는 사람이 없을 수도 있다. 어떤 결과가 좋은 것일까? 지금은 알 수 없다. 당장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현재에 충실하는 것. 그린의 현재엔 레인이 있고, 레인의 현재엔 그린이 있다. 둘은 각자 노동하며 삶을 영위하고, 서로를 돌보며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그러하듯.
그럼 뭐가 그렇게 다르고, 뭐를 더 이해해야 하는가.
이해를 구할 것도 이해를 할 것도 없다.
너희의 존재를 티비 소리로 애써 지우다가 잠 못 이루던 밤.
그들의 목소리를 가만히 듣다가 까무룩 잠들던 밤.
이제는 또 다른 그린과 레인을 알아보고, 존재를 존재로서 인정한 어느 낮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이야기가 너의 이야기였고, 너의 이야기가 곧 나의 이야기였다.
* 씨네랩에서 크리에이터로 초청받아 시사회 참석 후 남긴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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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보리] 리뷰:청각장애를 넘어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메세지를 전달하는 따뜻한 영화
#나는보리#영화리뷰#청각장애인
청각장애인에 대한 인식과 장애로 인한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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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왓챠 <잇츠 어 신>
[2021년 3월 24일 왓챠 공개]
“게이만 걸리는 병?, 영국에서 남자들이 죽어가고 있다!”
정체불명의 병이 런던을 덮치고, 리치와 친구들의 삶은 위협받는다.
하지만 온 세상이 등을 돌릴 때, 그들은 서로를 붙들며 노래한다, 라! 라! 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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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2067> 메인 예고편
“반드시 구해낼 것이다”
지구 종말이 도래하고, 산소가 중요한 화폐가 된 서기 2067년.
‘타임머신’이라고 불리는 일명 ‘크로니컬’이 발명되고,
407년 뒤, 2474년 미래에서 보낸 메시지가 도착한다.
인류의 마지막 희망, 미래를 구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