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란2024-05-09 17:17:08
모두에게 즐거운 한때가 되었기를, <로봇 드림>
모두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도그와 로봇이 만났다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담겨 있습니다.
로봇 드림(Robot Dreams), 2024
스페인 / 애니메이션 / 102분
감독: 파블로 베르헤르
모두에게 즐거운 한때가 되었기를, <로봇 드림>
어두컴컴한 집 안, 맛없는 냉동 도시락이 전자레인지 안에서 빙빙 돌아간다. 2인용 게임을 혼자 하는 게 익숙한 도그의 저녁밥이다. 도그는 지독한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다. 설렘이나 기쁨, 행복은 곁을 떠난 지 오래다. 일상은 시간을 보내기 위한 수단일 뿐이고, 간혹 찾아오는 새로움은 앞으로 다가올 지겨움으로 여겨질 뿐이다. 무엇 하나 즐겁고 좋다고 말할 수 없는 삶 속에서 도그는 오늘도 옆집 커플의 행복을 애써 외면하며 입에 숟가락을 집어넣는다. 무료한 하루가 또 이렇게 가나 싶었는데, 돌연 TV 광고 하나가 마음을 사로잡는다. “외로우신가요? 지금 바로 주문하세요!” 도그는 곧바로 반려 로봇을 주문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나를 위한 존재가 등장하자 도그의 일상은 180도 바뀐다. 도그의 친구이자 가족, 어쩌면 그 이상의 존재가 된 로봇도 다양한 경험을 통해 세상을 알아간다. 반려 로봇이지만, 나의 짝을 의미하는 ‘반려’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로봇 역시 (도그처럼) 하나의 인격체로 묘사된다. 영화는 도그와 로봇의 존재를 특정한 종으로 규정하지 않음으로써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를 명확하게 표현한다. 우린 냉동 도시락이 데워질 때부터, 끊임없이 변화하는 관계 속에 어떻게든 머무르고 싶어 하는 우리의 이야기가 시작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로봇 드림>은 모두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도그와 로봇을 만나게 했다.

둘의 시너지는 순풍을 타고, 재미없던 삶은 무한한 행복으로 채워진다. 그러나 그들의 시간은 해수욕장에서 강제 종료된 로봇으로 인해 멈추고 만다. 로봇이 고장 난 이유는 언급되지 않는다. 바다를 헤엄치고 잠수까지 한 로봇이 고장 나지 않을 이유가 없지만, 영화는 이를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도그가 외로움에 빠진 이유나 로봇을 움직이는 주요 부품에 관한 설명, 로봇의 자연스러운 감정 및 이성 습득도 마찬가지다. 전부 영화의 몰입도를 깨트릴 수 있는 물음표지만 이야기는 구렁이 담 넘어가듯 전개된다. 눈에 빤히 보이는 빈 곳에 별표를 붙이고 시간을 들여 메우려 하지도 않는다. 움직이지 못해 주인과 더는 함께할 수 없는 로봇에 더 집중한다. 무엇보다, 도그와 로봇의 과거가 아닌 현재에 의미를 두고 앞으로 직진하기 바쁘다. 일찍부터 작고 사소한 정보와 그렇지 않은 정보를 구분했기에 가능한 결과다. 중요한 건 뒤가 아니라 앞에 있고, 어제도 오늘도 아닌 ‘내일이 될 오늘’이 더 가치 있다는 <로봇 드림>만의 심지를 보여주는 지점이다.
폐장을 선언하고 여름 개장을 예고한 해수욕장 공고문 앞에서 도그는 절망한다. 외로움을 떨쳐내기 위해 반려 로봇을 샀는데 한순간에 외로움을 반납받게 된 상황이라니, 도그와 로봇에게 벌어진 첫 번째 위기가 분명했다. 그러나 둘의 첫 이별(위기)은 별다른 사건충돌 없이 영원한 이별로 남는다. 이야기는 도그와 로봇의 각자 입장으로 나눠 두 갈래로 진행된다. 역시 <로봇 드림>이 가진, 아주 능숙하고도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로봇을 데려올 수 없는 현실에 순응한 도그는 새로운 친구를 사귀어 보라는 신문 광고에 또 반응한다. 설산에서 처음 본 동물들과 썰매를 타며 나름 어울리려고 노력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눈사람에 눈코입을 선물하며 제2의 로봇을 만나고, 새해 기념으로 연을 날리다 멋진 선글라스를 낀 오리도 사귀지만, 역시나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나’의 마음만을 기준으로 한, 기울어진 저울을 가진 도그에게 다른 동물과의 관계 형성은 당연히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해수욕장에 멈춰 있던 로봇은 꿈을 연속적으로 꾸며 진짜 세상을 경험한다. 꿈이 전부 악몽이지만, 꿈을 꾸고 꿈에서 깨어날 때마다 로봇은 ‘성장’한다. 도그 없이도 인생의 단맛과 쓴맛을 모두 맛보고, 관계는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없는 영역임을 몸소 체험한다. 슬픔과 별개로 기존 관계가 깨지면 새로운 관계가 만들어지는 인생의 아이러니한 흐름도 깨닫는다.

뜻하는 대로 되지 않는 관계(삶)가 주는 진짜 교훈은, 전제를 잘 알고 있음에도 매번 다시 깨닫게 된다는 점이다. 로봇은 해수욕장 개장 후 원숭이에게 구출되지만, 악어가 운영하는 철물점에 팔려 온몸이 산산이 조각난 후 전원이 꺼진다. 삶이 끝났음을 받아들인 순간, 너구리의 도움으로 다시 태어난다. 외로움에 결국 굴복한 도그는 상점에 반값으로 나온 틴(로봇)을 산다. 한때 도그의 반려였던 로봇은 몸통 대신 달린 카세트를 보며 환한 미소를 짓는다. 완전한 이별과 함께, 낯설지만 곧 익숙해질 ‘반려’가 또 등장한 순간이다.
너구리와 살기 시작한 로봇은 틴과 함께 걸어가는 도그를 우연히 발견한다. 둘을 보며 복잡한 감정을 느낀 로봇은 다시 한번 꿈꾼다. 도그는 몸이 바뀐 로봇을 단번에 알아보고, 둘은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껴안지만, 곧이어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마주한다. 틴은 도그를, 너구리는 로봇만을 바라보는 순간이다. 로봇은 카세트 되감기 버튼을 눌러 꿈에서 빠져나온다. 그리곤 도그와 함께 들었던 노래를 틀고 볼륨을 높인다. 도그는 노래를 들으며 춤을 추고, 로봇도 팔과 다리를 흔든다. 나란히 서서 같이 췄던 춤을 각자 다른 곳에서 추는 도그와 로봇. <로봇 드림>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이다음에 등장한다. 호텔 꼭대기 층에서 춤추던 로봇이 도그의 시선이 느껴지자 재빨리 숨는 장면이다. 로봇과의 추억에 젖어있던 도그는 돌아선다. 그렇게 틴과 손을 잡고 로봇과 영영 멀어진다.

우리는 알고 있다. 왜 로봇이 꿈을 꾸고, 도그가 왜 틴을 사고, 로봇이 마지막 순간에 왜 숨어버렸는지. 우린 모두 각자의 외로움에 벗어나기 위해 애쓴다. 나를 위한, 오직 나만을 이해하는 단 한 사람을 찾느라 시간을 두 배로 더 빨리 쓰기도 한다. <로봇 드림>은 이를 로봇(꿈)과 도그(외로움 탈피)로 보여줬다. 로봇이 겪은 불행과 도그가 겪는 슬픔은 형태만 다른 특별한 데칼코마니였다. 꿈(로봇)은 현실(도그)이고, 현실을 겪은 로봇은 다시 현재를 살기 위해 꿈을 꿨다. 도그도 멈추지 않고 로봇과 같은 모양을 찍어내며 아침을 맞이했다. 이들의 이야기는 원하는 대로 되는 일 하나 없는 세상에서 외로움과 이별을 반복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공감하고 위로한다. 나아가 전반에 깔려있던 구멍에 과거가 돼버린 관계(기억)들을 채우게 하고, 불완전한 관계를 향한 갈망이 메마르지 않도록 열심히 응원한다. 특히 도그와 로봇이 Earth, Wind & Fire의 ‘September’에 맞춰 함께 춤을 추는 장면은 토마스 빈터베르그 감독의 <어나더 라운드> 속 엔딩과 연결되면서 짜릿한 쾌감을 선물한다(주인공도 삶에 허덕이다 마침내 자기만의 알코올 농도를 찾고, 엔딩 삽입곡 Scarlet Pleasure의 'What A Life'에 맞춰 막춤을 춘다).

완벽하지 않고 때론 상식적으로나 심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인간관계 안에서 꿈을 꾸다 다시 꿈을 접고, 또다시 꿈꾸며 사는 모두에게 즐거운 한때가 되었길 바란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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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MZ DOCS] 사라진 노동운동의 A컷을 찾아라!
제14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포스터
멜팅 아이스크림(Melting Icecream)
South Korea/2021/70min/홍진훤 감독 작품
모든 달콤한 것들은 녹는다. 녹아 없어지기에 더 달콤하다. 〈멜팅 아이스크림〉에서 ‘달콤한 것’은 노동운동이다. 영화는 90년대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시대의 노동운동의 푸티지를 몇몇 회고를 동반하여 풀어놓는다. 그리고 이 서사는 수해로 훼손된 투쟁 현장의 A컷 사진을 복구하는 서사와 교차한다.
두 서사의 교차가 의미심장하다. 훼손된 A컷 사진은 노동운동의 은유다. 모든 노동자의 연대 투쟁을 강조했던 사람들은 제도권에 들어간 후 노동을 버리고 ‘민주화’만 강조했다. 노동자와 함께 싸웠으나 성과는 독차지했다. 영화가 세 명의 ‘진보’ 대통령 시대의 노동 투쟁을 보여주는 건 노동을 뺀 민주화가 노동자의 삶과 노동 현장을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고발하기 위해서다. 그 결과 시민과 노동운동의 거리는 좁혀지길 기대하기 어려울 만큼 멀어졌다. 영화의 마지막, 코로나 시대에 ‘필수 노동자’라 일컬어졌지만 금세 버려진 노동자 집회를 무심한 듯 힐끗하고 지나가는 시민들의 모습이 이를 증언한다. 이제는 더 이상 진지하게 고려되지 않는 노동 문제처럼, 훼손된 A컷 복구도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즉 〈멜팅 아이스크림〉은 철저한 실패에 관한 영화다.
지난 몇 년간 1970~80년대의 민주화운동을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관객의 호응을 끌어낸 영화가 많았다. 이들 영화는 반동분자 취급당하던 시민들의 명예를 복권하여 집단의 역량으로 재의미화한다는 점에서 분명 의의를 가진다. 그러나 〈멜팅 아이스크림〉을 보며 의문이 들었다. 왜 그들 영화에 함께 싸웠던 노동자(혹은 노동자인 시민)는 등장하지 않는가?
최근 개봉한 영화 〈재춘언니〉, 〈미싱타는 여자들〉이 떠올랐다. 〈멜팅 아이스크림〉의 문제의식에서 보면, 이들은 모두 변방으로 밀려난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시 ‘중심’으로 옮기고자 노력하는 영화다. 언젠가 다시 맛볼 날을 기다리며,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의 달콤함(즉 노동 관점의 소중함)을 추억한다.
*이 글은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에 초청 받아 제14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기자단으로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영화제는 9월 29일까지 이어지며 상영작은 온오프라인으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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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픈 가족을 품고 사는 이들의 슬픔과 희망!
서서히 죽어가는 가족을 바라보는 것보다 더 슬프고 힘든 건 없다. 옆에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무력감은 물론, 언제까지 이 지난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그 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디즈니 플러스 영화 <썬코스트>는 이런 양가적인 감정을 안고 사는 한 가족의 이야기로 삶의 한계에 다다른 이들의 민낯을 보여준다. 미안함, 죄책감, 답답함 등으로 얼버무려져 있는 이들의 복잡한 심경 사이로 명확히 보이는 건 슬픔, 현실, 그리고 작은 희망이다.
꿈도 많고 하고 싶은 게 많은 10대 소녀 도리스(니코 파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뇌종양으로 투병 중인 오빠를 돌봐야 하고, 아들을 고통을 마주한지 오래되어 매사 신경이 곤두서있는 엄마(로라 리니)의 눈치도 봐야 한다. 호스피스 병원 ‘썬코스트’로 오빠를 옮긴 이후에도 팍팍한 삶은 나아지지 않는다.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건 파티가 일상인 학교 친구들, 썬코스트에서 만난 아저씨 폴(우디 해럴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오빠와의 이별의 시간은 다가온다.
<썬코스트>는 실제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난 오빠를 향한 로라 친 감독의 뒤늦은 연서이자, 자신의 성장담이다. 감독은 과거 10대 시절 가졌던 마음을 도리스에게 투영시켜, 오빠를 향한 슬픔과 미안함, 평범한 10대의 삶을 살고 싶었던 양가적인 마음을 드러낸다. 영화는 전자보단 후자에 무게 중심을 두는데, 그도 그럴 것이 도리스는 오빠로 인해 삶이 저당잡혔기 때문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TV 프로그램도 시청 못 할 정도로 엄마의 압박에 시달리고, 언제나 아픈 오빠가 먼저고, 자신은 뒷전인 상황은 못마땅하다. 아픈 오빠를 위한 희생은 인지하고 있지만, 이를 당연시하는 엄마와 세상은 감옥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도리스의 딜레마는 썬코스트에 입원한 ‘테리 샤이보’ 사건으로 이어진다. 2005년 실제 있었던 이 일은 15년간 식물인간 상태로 있던 테리 샤이보라는 여성이 영양 공급 튜브를 제거하라는 법원의 판결에 따라 숨지게 된 사건이다. 테리 샤이보의 부모는 물론, 당시 존엄사를 반대한 이들과 달리, 법원은 그녀가 정상이었을 때 이런 식의 생명 유지는 원치 않는다는 말했었다며 영양 공급 튜브 제거를 청원한 남편의 손을 들어줬다. 윤리적 관점이나 남편의 좋지 않은 행실은 제외하고라도 이 사건은 아픈 가족을 품고 사는 이들이 겪는 현실적 고민과 다른 입장을 표방하는 사회의 목소리가 충돌한 계기로 비친다. 아마 도리스는 남편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했을 터.
그 마음을 대변하듯 영화는 윤리적, 도덕적 갈등을 떠나 이 비통한 상황을 아는 이는 가족이나 동일한 아픔을 가졌던 사람만이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극 중 썬코스트 앞에서 테리 샤이보의 생존권을 주장하는 이들이나 학교에서 존엄사의 비윤리적 문제에 대해 논하는 선생님의 이야기보다 비록 테리 샤이보의 생존권 운동에 동참한 강성 생명윤리주의자이나 자신과 같은 아픔을 가진 폴에게 도리스가 마음의 문을 여는 건 이 때문이다.
영화의 한 축을 담당하는 건 성장이다. 감독은 외형이 아닌 내적 성장에 초점을 맞추며, 학교 졸업 파티가 아닌 유명을 달리한 오빠에게 진심을 전하는 그 순간에 집중한다. 뒤늦은 고백이자 마음이지만,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낼 때 다음 발걸음을 뗄 수 있다고 덧붙인다. 더불어 아들의 가느다란 실과 같은 생명줄을 부여잡고 놓지 않으려는 엄마 또한 자식을 떠난 보낸 후 비로서 자신과 딸을 바라보며 또 다른 삶의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
이렇듯 <썬코스트>는 죽음을 앞둔 가족을 두고 모녀 간의 복잡한 관계와 성장 과정에 집중하지만, 그 깊이가 얕은 건 아쉬운 지점이다. 그동안 응어리졌던 모녀간 관계 해결 부분이 약하다 보니 관계 개선이 급작스럽게 되는 부분 등 작품이 지닌 단점을 메우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영화가 빛을 발하는 건 신예 니코 파커, 베테랑 로라 리니와 우디 해럴슨의 연기다. 니코 파커는 여느 10대 소녀의 말간 모습을 보여주는데, 연기 원숙도를 떠나 작품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로라 리니, 우디 해럴슨은 베테랑으로서 감정의 진폭을 조율하며 극의 분위기를 살리는데 일조한다. 특히 니코 파커는 이 영화로 제40회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미국 드라마) 신인 연기상을 수상했다.
사진 제공: IMDB
평점: 2.5 / 5.0
한줄평: 걸출한 성장 서사는 아니지만 마음에 가닿는 상실의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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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직 기자의 시점으로 본 '기자 영화'
기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마치 탐정처럼 사건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면서 조금씩 조금씩 본질을 향해 나아간다. 그러다가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하며 반전을 맞이한다. 그래서 그는 펜으로 바로잡고 정의 구현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이렇게만 보면 영화 '댓글부대'는 흔히 사회고발을 하는 기자 영화로 비치고, 원작소설을 집필한 장강명 작가 또한 기자 출신이었기에 더더욱 기자 영화로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정진영 작가의 '침묵주의보'를 드라마화한 JTBC '허쉬'와 같은 결을 따라갈까 영화를 관람하기 전 살짝 예상해 봤다.
전직 기자의 시점으로 바라본 '댓글부대'는 우리가 흔히 아는 기자 영화와는 전혀 다른 결이다. 특정 대기업을 떠올리게 만드는 만전 그룹 비리를 보도했다가 오보로 판명돼 한순간에 '기레기'로 전락한 임상진(손석구)이 절치부심해 비밀리에 운용 중인 만전 내 여론조작팀의 실체를 들춰내 정의 실현으로 이어질 줄 알았지만, 정작 이 영화는 그러한 스토리에 관심 없다.
안국진 감독이 '댓글부대'를 통해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기자 임상진이 쓰는 '기사'다. 인터넷 문화가 태동한 1990년대부터 온라인 커뮤니티, 소셜미디어, 유튜브 등이 주류가 된 현시점까지 보여주면서 여론을 주도하는 건 소수 미디어 매체가 아닌 불특정 대다수에게 넘어갔다는 걸 전한다. 그러면서 임상진의 피땀눈물로 완성된 기사의 영향력은 점점 잃어가고, 진실인지 거짓인지 불분명한 인터넷 글이 막강한 힘을 얻는 오늘날의 현주소를 조명한다.
이를 바탕으로 영화가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정보들은 하나같이 '100% 팩트'라고 말하기 애매함의 연속이다. 임상진에게 만전의 여론 조작을 제보하는 찻탓캇(김동휘)의 주장이나 만전의 비리를 알린 중소기업 대표의 말, 만전이 진짜 여론을 조작했는지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전혀 알 길이 없다. 아니, 영화는 애초에 이 정보들의 사실 여부를 판단하지 않는다. 어차피 중요한 건 정보의 사실 검증이 아니라 믿을 수 있는지 여부다. 믿는다면 진짜로 받아들일 것이고, 의심하면 가짜로 보일 테니까.
그래서 '댓글부대'는 흥미롭다. 그동안 근현대사를 재해석하는 데 할애하는 반면 현시대에 벌어지고 있는 이야기에는 조용했던 다른 한국영화들과 다르게 과감한 선택을 취했기 때문이다. 안국진 감독의 선택은 확실히 참신했고 그는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다만 '댓글부대'의 화법과 연출 방식까지 참신하다고 하기엔 어딘가 부족하다. 장황한 내레이션과 대사들이 주류를 이루며 풍자하는 방식은 할리우드 대표 감독 중 하나인 아담 맥케이를 연상케 하나, 마치 말로 모든 걸 해결하려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리고 플래시백이 잦다 보니 작품의 전개 속도도 빠르지 않아 지루함도 느껴진다. 반전이 등장했음에도 감흥이 떨어지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댓글부대'에 출연한 배우들의 쓰임새도 아쉽다. 주연인 손석구를 비롯해 김성철(찡뻤킹 역), 김동휘, 홍경(팹택) 등 다양한 작품에서 인상적인 연기력과 존재감을 뽐냈던 배우들인데 유독 이 영화 내에선 크게 매력적이지 못하다. 아무래도 '기사'에 너무 힘을 준 나머지 캐릭터들이 희미해진 게 아닐까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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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을 돌아보게 만드는 새로운 방식
현실을 돌아보게 만드는 새로운 방식
넷플릭스 오리지널 <퀸메이커> 리뷰감독] 오진석, 문지영
출연] 김희애, 문소리, 류수영, 서이숙, 이경영, 진경
시놉시스] 이미지 메이킹의 귀재이자 대기업 전략기획실을 쥐락펴락하던 황도희가 정의의 코뿔소라 불리며 잡초처럼 살아온 인권변호사 오경숙을 서울 시장으로 만들기 위해 선거판에 뛰어들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넷플릭스 시리즈
#스포일러 유의#
이토록 여성을 강조하는 정치물이 있었던가
퀸메이커를 보는 내내 상당히 이질감을 느꼈던 부분이 바로 ‘여성’에 대한 강조였다. 과연 현실 정치판에서 여성에 대한 공약이 적극적으로 이뤄지는 선거가 어디에 있었을까 생각해보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그만큼 현실 정치에서는 여성의 인권을 앞세운다기 보다는 보통의 인권을 주력하고, 당장의 표심을 얻을 수 있는 개발 및 유치와 같은 경제 중심의 정책이 앞세우곤 한다. 하지만 퀸메이커에서는 이상하리만큼 ‘여성’에 초점을 맞춘다. 공약 설명이나 토론회에서도 후보들의 1분 발표 시간에는 여성을 위한 서울시라는 문장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부분이 기존 정치물과 상당히 달랐던 요소였다.
기존 정치물에서는 남성 중심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 정경유착을 주로 보여주면서 현실과 너무나도 비슷한 모습을 보며 관객에게 깨달음을 주었다면, 퀸메이커에서는 현실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여성’이라는 키워드가 정치의 주요한 쟁점이 되면서 오히려 시청자들이 이렇게까지 쟁점화되고 전면에 나올 수 있는 요소들이 왜 현실에서는 부각되지 않는 것일까? 그저 편을 가르고 서로를 비난하는 위치에 머물러 있는 것일까?하는 의문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황도희의 복수는 왜 시작되었을까은성그룹의 전략기획실장 황도희. 그녀는 여론을 주무르는 이미지 메이킹 전략의 귀재다. 기업의 골치 아픈 일을 매끄럽게 처리하면서 오너 일가의 높은 신뢰를 받고 있다. 하지만 자신이 그토록 충성을 바쳐왔던 은성그룹을 배신하고, 그들의 적이었던 오경숙 인권변호사를 서울시장으로 만들기 위해 선거 캠프의 단장을 도맡는다. 황도희는 그간 오너 일가의 수많은 범죄행위들을 무마하면서 리스크 관리를 해왔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죽었던 적이 없진 않았으나 한이슬의 죽음은 그녀에게 충격으로 다가온다. 왜일까?
그 동일한 궁금증을 은성그룹의 사위 백재민 상무도 황도희에게 물어본다. 이제까지 수많은 리스크들을 처리해왔으면서 왜 갑자기 이젠 못하겠다고 하는지. 자신 역시 활도희 당신이 지켜야하는 오너그룹의 일가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작품을 보는 내내 활도희가 왜 은성그룹을 돌아섰는지, 이제껏 이보다 더한 일들도 해온 그녀가 이 일로 돌아설만큼 정말 큰 일이고, 충격적인 일이었는지 의문을 가졌었는데 작품에서 직접적으로 백상무라는 캐릭터를 통해 짚고 넘어가주고 있었다.
백상무는 어찌보면 오너일가로 편입된 사람이다. 본인도 그것을 느꼈기에 항상 황도희와 개인적으로 술을 마실 때면 자신은 황도희와 같은 입장이고 상황이라며 우리는 이 은성그룹 안에서 유일한 동지와도 같다는 표현을 자주한다. 외부에서 보기엔 은성그룹의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위치에서 권력을 누리고 있지만 내부에서는 실질적인 힘을 크게 가지고 있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그가 자신의 은성그룹의 사위라면서 저지른 성폭행을 무마해달라고 황도희에게 노골적으로 요청했고, 그 과정에서 저지른 살해 행위에 대해 거짓으로 황도희에게 말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황도희에게 들키게 되고, 황도희는 이런 백상무에게 윤리적인 경멸과 자신과 같은 사람이라고 믿었던 배신감이 동시에 작용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동안 은성그룹 일가에게서는 느끼지 않았던 배신감이 기폭제가 되었고, 성폭행이라는 같은 여성으로서의 모멸감이 작용하여 백상무에 대한 복수심으로 은성을 떠나 오경숙에게 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진실이 승리하는 사회를 희망하며
전략가 황도희를 잃은 은성그룹은 사위의 과오를 덮고 서울 시장으로 만들기 위해 전설적인 킹메이커로 유명한 칼 윤을 섭외해 온다. 그 과정에서 아주 다양한 음모와 범죄행위가 발생하는데, 황도희는 이 과정에서 아버지를 잃고 만다. 그저 백재민 상무를 시장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시작했던 일이 은성그룹을 망하게 만들고야 말겠다는 복수로 확장된다.
아내 은채령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던 백재민은 회사 주변의 여성들을 성적인 대상으로 이용했고,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더 높은 자리에 앉혀주면서 그에 대한 보답을 했다. 국지연은 이러한 관계에 만족하면서 임신을 하게 되고, 이를 무기로 백재민을 잡고자 하지만 권력에 눈이 먼 백재민은 국지연을 살해하려고 한다. 정치인으로서 불륜과 혼외자는 너무나도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국지연을 자살로 위장하려 하지만 이를 알아챈 황도희와 오경숙은 결국 국지연을 살려내며 백재민의 추악한 모습을 유튜브 생중계를 통해 만천하에 알린다.
어쩌면 드라마기에 짜릿한 권선징악으로 끝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현실이었다면 권력과 자본을 가진 백재민과 같은 캐릭터가 국지연이라는 인물을 자살로 위장하는 것은 너무나도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퀸메이커는 계속해서 백재민이 자신의 과오를 덮기 위해 더 큰 잘못을 선택할 때마다 그 모든 행위를 하나씩 하나씩 벗겨나가면서 결국에는 진실이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결론을 통해서 우리 사회 속에서도 시간이 걸릴지라도 결국에는 진실이 승리한다는 희망을 넌지시 심어주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퀸메이커는 남성이 강조되었던 기존 정치물과 달리 캐릭터와 소재 모두 여성을 내세우면서 새로운 방식으로 현실 정치와 비교할 수 있게 만들어준 웰메이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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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왓챠로 볼만한 봄 영화 추천 11편
넷플릭스, 왓챠로 볼만한 봄 영화 추천11편
지난 주말에 벚꽃이 피고 개나리와 진달래를 구경할 겸 산책에 나섰어요. 오랜만에 꽃구경이라 그런지 그간 추워서 움츠려들었던 몸도 기지개를 펴보았지요. 그렇게 한 시간 정도 걷다보니 벚꽃영화는 뭐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네이버에 봄 영화 검색하면 우선순위로 나열되는 전형적인 영화들 말고 봄이 되면 떠오르는 봄 영화 11선을 꼽아봤어요.
#나의 소녀시대 (我的少女時代·2015)
“비록 넌 작고, 바보같고 게다가 다른사람을 좋아하기까지 하지만 그렇다 해도 나는 여전히 너를 정말 좋아해” 소위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너가 좋다는 류의 고백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플립 (Flipped·2010)
“어떤 사람은 평범한 사람을 만나고, 어떤 사람은 광택이 나는 사람을 만나고, 어떤 사람은 빛나는 사람을 만나지. 하지만 모든 사람은 일생에 단 한번 무지개 같이 변하는 사람을 만난단다. 네가 그런 사람을 만났을 때 더 이상 비교할 수 있는 게 없단다.” 예쁜 동화 같은 이 영화로 힐링하세요!
#4월 이야기 (四月物語·1998)
“성적이 안 좋은 내가 대학에 합격했을 때 담임선생님께서는 '기적'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어차피 '기적'이라고 부를거라면, 난 그걸 '사랑의 기적'이라고 부르고 싶다“ 벚꽃이 휘날릴 때 풋풋한 첫사랑의 설렘이 제격이겠죠!
#봄날은 간다 (One Fine Spring Day·2001)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라면... 먹고 갈래요?“ 누구에게나 봄날이 있지만, 그 계절이 언젠가 지나가기 마련이다.
#족구왕 (The King of Jokgu·2013)
“남들이 싫어한다고 자기가 좋아하는 걸 숨기고 사는 것도 바보 같다고 생각해요” 시대가 꿈을 사치라고 일갈하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도전하는 것이야 말로 청춘의 특권이죠.
#22 점프 스트리트 (22 Jump Street·2014)
"SCHMIDT XXXXED THE CAPTAIN'S DAUGHTER!!!!!!" 대학교 신입생으로 위장취학한 두 형사가 마약 단속을 벌인다.
#미드나잇 인 파리 (Midnight In Paris·2011)
“여기 머물면 여기가 현재가 돼요. 그럼 또 다른 시대를 동경하겠죠. 상상속의 황금시대. 현재란 그런거예요. 늘 불만스럽죠. 삶이 원래 그러니까.” 우디 앨런이 동경하는 1920년대의 낭만으로 우리 모두를 초대한다.
#캐빈 인 더 우즈 (The Cabin In The Woods·2012)
“잘했어, 좀비팔“ 봄방학을 맞은 다섯 친구들이 놀러간 숲 속의 오두막에서 뜻밖에 호러 종합 선물세트를 받고 환호(?)한다.
#머니볼 (Moneyball·2011)
“야구는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어” 스토브리그가 끝나는 봄이면 새로운 시즌이 개막한다.
#빅피쉬(Big Fishl·2003)
“때론 초라한 진실보다 환상적인 거짓이 더 낫을수도 있다 더군다나 그것이 사랑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이라면” 팀 버튼은 자신의 아이가 태어나고서야 그동안 사이가 좋지 않았던 아버지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를 위한 이 영화에는 행복과 희망이 가득 차 있다.
#만춘(晩春 Late Spring·1949)
오즈 야스지로는 ‘늙어가는 아버지를 애처로워하는 딸, 자식의 결혼을 걱정하는 부모’라는 소박한 가족이야기로 가장 극적인 변화를 포착한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하고,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성숙과 상대방에 대한 배려다.
* 본 콘텐츠는 블로거 영혼아이 TERU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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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죄도시4 | 구슬은 준비됐는데 정작 꿸 사람이 없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배달앱을 이용한 마약 판매 사건을 수사하던 ‘마석도’(마동석)와 서울 광수대. 마석도는 수배 중인 앱 개발자가 필리핀에서 사망하자 이 사건과 대규모 온라인 불법 도박 조직과의 연관성을 의심한다. 그는 오프라인과 온라인 양방향으로 수사를 진행하기로 결정하고, 불법 온라인 도박 회사를 운영하다가 망한 전적이 있는 ‘장이수’(박지환)에게 뜻밖의 협력을 제안한다.
수사팀 레이더에 걸린 IT업계 천재 CEO로 이름을 날린 ‘장동철’(이동휘)의 뒤를 쫓던 마석도는 이내 특수부대 용병 출신 ‘백창기’(김무열)의 존재를 확인한다. 더 나아가 그가 필리핀에 거점을 두고 대한민국 온라인 불법 도박 시장을 장악한 뒤 거리낌 없이 납치, 감금, 폭행, 살인을 저질러 왔음도 깨닫는다. 이에 마석도는 한국과 필리핀을 넘나들며 백창기를 체포하기 위한 작전에 착수한다.
3연속 천만, 가능할까?
코로나 이후 <범죄도시>는 단순한 영화 시리즈가 아니다. 한국 극장가의 봄을 지탱하는 막중한 책임을 떠안은 존재, 메시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범죄도시4>는 그 기대에 부응하는 듯 보인다. 개봉 첫날에만 8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고, 둘째 날에 1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직전 주말 관객수가 60만 명이었던 걸 고려하면 놀라운 성적이다. 첫 3연속 천만 영화를 기대하는 반응도 이상하지 않다.
사실 <범죄도시4>를 보기 전까지는 우려가 적지 않았다. 2022년부터 매년 한 편씩 개봉했으니 시리즈의 장기화로 인한 피로감 문제가 대두됐다. <한산>과 1년 텀을 두고 개봉한 <노량: 죽음의 바다>가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뒀듯이. 당장 <범죄도시3>만 해도 완성도가 1편과 2편에 미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았고, 전작들에 비해 호불호가 심하게 갈린 바 있었다.
<범죄도시4>는 우려를 일부 불식했다. <범죄도시> 시리즈다운 매력 포인트는 확실하게 살렸다. 액션, 드라마, 캐릭터 등 여러 부분에서 전편으로부터 차별화하고, 개선하려는 노력도 엿보였다. 이는 <범죄도시4>의 천만 관객 돌파를 낙관할 수 있는 이유다. 다만 완성도는 여전히 명성에 미치지 못한다. 장편 영화 연출, 편집에 익숙지 않은 초보 감독의 한계가 고스란히 노출된 까닭이다.
액션 맛집의 신메뉴
<범죄도시4>는 먼저 액션으로 눈을 사로잡는다. <범죄도시> 시리즈는 언제나 액션 맛집이었지만, 이번에는 더 다채롭고 규모가 커진 액션으로 무장했다. 수십 명의 갱단과 갱단이 서로 칼부림을 벌이거나, 무장한 경찰 특공대가 조폭을 때려잡는 식이다. 피가 나와야 할 순간마다 카메라를 돌리되 비명 등을 활용해 잔혹함을 우회적으로 살린 연출도 영화의 균형감을 잡아준다.
눈에 익은 마석도의 액션 분량은 줄인 대신 다른 캐릭터를 적극 활용한 점도 인상적이다. 특히 백창기의 나이프 파이팅이 눈에 띈다. 신속하고 절제된 액션 연출은 마치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 속 윈터 솔져를 보는 듯하다. 이는 캐릭터 설정을 강렬하게 각인시키는 수단으로도 적절했다. 무표정으로 거침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필리핀 오프닝 시퀀스만 봐도 그가 특수부대 출신의 프로페셔널 킬러라는 설정을 납득할 수 있다.
한 시퀀스 내에서의 완급조절도 탁월하다. 비행기에서 벌어지는 클라이맥스가 대표적이다. 맨주먹으로는 마석도가 백창기를 압도하지만, 나이프가 주어진 순간부터는 백창기가 마석도를 곤경에 몰아넣는다. 그 이후에야 둘은 비로소 전력을 다해 승부를 본다. 극 중 둘이 직접적으로 부딪히는 장면이 전무하다 보니 마지막 액션은 상당한 몰입감을 자랑한다. 비록 다소 짧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분명 강렬한 마무리다.
<모범택시> 한 스푼 더하기
드라마도 액션 못지않게 달라졌다. 범죄 사건에 다각적으로 접근하려는 변화가 눈에 띈다. 이는 드라마 <모범택시> 시리즈의 오상호 작가가 합류한 효과라 할 수 있다. <모범택시>의 사이다 전개에는 피해자의 고통을 강조하는 스토리가 늘 쌍둥이처럼 붙어 있었으니까. 3편에 비해 유머가 줄어들고, 분위기가 다소 어두워진 이유이기도 하다.
그 결과 전편들에 비해 유달리 범죄 피해자의 처지에 공감하고, 그들과의 약속을 소중히 여기는 마석도의 면모가 강조된다. 범죄 피해자의 어머니가 범인을 잡아달라고 사정할 때나, 뒤늦게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백창기의 악랄한 수법을 막지 못해 수사가 난관에 빠지자 정신적으로 흔들리는 모습도 인상적이다. 전작들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마석도의 약점과 절박함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는 마석도라는 캐릭터의 생명력을 연장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그간 마석도는 거대한 체구, 강력한 주먹, 거구에 어울리지 않는 유머감각이 돋보이는 캐릭터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의 얼굴에 깊이 들어선 주름들이 유독 강조된다. 자칫 평면적인 캐릭터로 고착화될 기로에서 향후 그의 이야기를 보다 입체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최소한의 활로는 뚫은 셈이다.
원맨쇼에서 벗어나다
이에 더해 여러 캐릭터의 역할을 확실히 정립하면서 마석도 원맨쇼라는 비판도 일정 부분 피해 간다. 일단 장이수의 재등장이 영리했다. 그와 마석도의 티키타카는 3편보다 심각해진 분위기를 환기하는 숨통 역할로 제격이었다. 또 앞으로 어떤 범죄 사건이 등장할지는 모르겠으나, 장이수를 연결고리로 삼거나 그를 매개로 다른 캐릭터를 등장시켜 변주를 줄 가능성도 확인했다.
성격도 역할도 전혀 다른 빌런 둘을 내세운 선택도 합격점을 줄만하다. 3편에서는 '주성철'과 '리키'의 이미지가 다소 겹친 나머지 주성철의 존재감이 기대 이하였다. 이번에는 다르다. 장동철은 말 많고 촐랑거리는 빌런 클리셰에 충실한 반면, 백창기는 타노스처럼 목적지향적이고 실수를 하지 않는 냉철한 빌런이다. 두 빌런의 존재감이 겹치지 않다 보니 조직 내 알력 싸움이라는 뻔한 전개에서도 기시감은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캐릭터쇼는 양날의 검이다. 시리즈 내에서는 긍정적인 변화여도, 외적으로는 <범죄도시>만의 개성이 약해질 여지를 남긴다. 예를 들어 새롭게 합류한 '한지수'(이주빈) 캐릭터는 도구적일 뿐만 아니라, <모범택시> 속 '안고은'(표예진)과 역할이 비슷하다. 현장에 나가고 싶어 하는 IT 전문가라는 설정이 같다. 이렇게 보면 마석도와 '김도기'(이제훈), '장태수'(이범수)와 '장성철'(김의성)의 관계에서도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구슬도 꿰야 보배인데
여기까지만 보면 <범죄도시4>는 모범적인 속편이다. 전작의 매력은 유지하되, 단점도 보완했으니 흠잡을 데가 없는 듯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범죄도시4>는 치명적인 문제를 노출했다. 액션, 드라마, 캐릭터 등 이 모든 구슬이 하나의 목걸이로 꿰어지지가 않는다. 허명행 감독의 솜씨가 목걸이를 완성시키에는 부족했기 때문이다.
허명행 감독의 연출 데뷔작은 넷플릭스 <황야>다. 다만 <황야>는 넷플릭스에서의 흥행과는 별개로 혹평을 피하지 못했다. 기본적인 컷과 컷의 연결이 부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아파트 내부에서 격투가 한창인데 돌연 개그 장면이 난입했다가 다시 액션씬으로 넘어가면서 템포를 끊는 식의 편집이 잦았다.
<범죄도시4>도 마찬가지다. 편집점이 이상한 나머지 하나의 작품이라는 느낌이 없다. 영화는 각각 마석도, 백창기, 장동철 중심의 세 플롯으로 나뉘어 전개된다. 그런데 각자의 내용이 한창 전개되는 와중에 돌연 다른 인물의 이야기가 난입한다. 한쪽 상황이 종결되지도 않았는데 다른 플롯으로 넘어가는 상황이 반복된다. 자연히 마석도의 감정선은 뚝뚝 끊기고, 음모를 꾸미는 빌런의 음험함도 부각될 수가 없다.
대사도 문제를 심화한다. 이른바 '판을 까는' 대사가 너무 많다. 배경이 바뀔 때마다 상황을 정리하고, 설명하고, 브리핑하는 대사가 반복된다. 그러다 보니 여러 사건이 뒤섞여서 진행되는 중반부터는 템포가 늘어지기 시작한다. 전혀 극에 녹아들지 못하는 카메오의 등장도 악수다. 러닝타임이 109분으로 결코 길지 않은데, 영화가 생각보다 지루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장기 시리즈의 초석이 되기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죄도시4>의 성과는 유의미하다. 디지털 시대에 적응 못하는 기술치 마석도를 새롭게 부각하는 묘사가 대표적이다. 제작자이기도 한 마동석이 5편부터 8편까지는 시리즈의 2부에 해당한다면서, 현대 사회의 고도화된 범죄를 다루는 만큼 모양새 자체도 달라질 것이라 천명한 바 있기 때문.
즉, 드라마틱하지는 않아도 <범죄도시>의 틀 안에서의 다양한 변화 시도가 차후 시리즈의 동력이 될 가능성만은 확인한 셈이다. 익숙한 맛에서 낯선 향이 느껴지는 <범죄도시4>를 보며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이유다.
Poor 형편없음
흔들리던 주먹 속에서 익숙한 맛과 낯선 향기가 반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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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취한다 비지니스메일: allwey02@gmail.com
영화:악인전
결말포함된 영상이니 시청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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